주의 길을 닦게 하심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시 85:13)
녹취자: 김지혜
이 구절은 시편 85편을 마무리하는 구절로 13절에서 마지막 대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거기에서 언약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들은 다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지금의 처지가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잠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지만 영원히 그러실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보여 달라고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고통과 커다란 시련을 주실 수 있는지 생각하며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춘다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시련을 당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불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심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어떻게 하던지 마음을 낮추고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신정론적인 접근, 다시 말해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라는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답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분명하다면 그 선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한 데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이 일단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실제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고통이나 시련의 문제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에너지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때에는 정신의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매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사태들 속에서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좋으신 하나님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던지 사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선한 방향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사랑하면 나쁜 죄를 짓겠다는 생각을 안 한다는 의미도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랑을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악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쪽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게 일어나는 어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찼는데 사랑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교 속에 있다는 것은 그 분이 선하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악인이라도 다 똑같습니다. 악인이라도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그 사람도 선한 사람입니다. 그 선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선이냐 아니면 악한 사람이 생각하는 좋음이냐하는 문제는 별개로 치고서라도 어쨌든 자신에게 좋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내가 충분히 느낍니다. 그러므로 뭔가 내 앞에 나쁜 사태가 일어나고 내게 고통을 주는 사태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선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은혜로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방향성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선한 방향성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은 인자한 사람은 항상 속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선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로는 속기도 하고 때로는 손해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의 성향입니다. 말하자면 사랑과 너그러움이 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생각해보니 자신들에게 일어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들은 하나님이 당신과의 평화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땅에서도 그대로 실현이 되어서 하나님이 물질적인 넉넉함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의가 주의 앞에 앞서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의가 주의 앞에 앞서가며’라는 구절은 의로움,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 이것을 우리가 의라고 부른다고 말했고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상태를 의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두 번째 의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입혀서 의롭지 않은 백성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모자란 사람들을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덧입혀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백성이라고 인정해주시는 이런 은총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총을 입혀주시니까 당연히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사실은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마음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양심에 커다란 가책을 느끼다가 가룟 유다처럼 죽어버릴 순 있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돕지 않으셔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양심의 작용이 극대화되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양심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양심과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유죄의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양심이 저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믿음을 필요로 하며 이 믿음 역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제 믿어야하는 주체의 자유의지의 소산으로서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믿고자 하는 자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마틴 루터는 설교 속에서 천국에 가보면 앞에 문에는 ‘믿는 자만 들어올 수 있다’라고 되어있지만 들어가 보면 그 문 뒤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만 믿었다’라는 문구가 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문 앞에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믿으라하는 것 같지만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믿은 것도 내가 자랑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을 덧입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으로서의 의를 덧입혀주시면 인간의 마음이 양심의 작용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주의 앞에 앞서갑니다. 주의 앞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을 느끼는 상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먼저 은총을 덧입혀주시고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회개가 있고 하나님이 커다란 부흥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순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길을 닦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 지방에 있었던 'king’s highway'라는 왕의 대로와 관련된 문화적인 관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왕이 행차를 할 때 지금처럼 몰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오시기 전에 왕이 00년 00월 00시에 이곳을 지나가신다는 나팔을 붑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왕이 곧 이리로 지나가실 것이니 너희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하라하며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뒤에 도로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그것이 이사야 40장에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고 나온 부분입니다. 그러면 왕이 당시에 지나가면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데 무슨 일이 생길까요? 길이 울퉁불퉁하면 왕의 마차가 편안하게 지나갈 수 없으므로 도로를 보수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높은 곳은 깎아서 낮은 곳으로 흙을 붓고 낮은 곳은 높은 곳의 흙을 받아서 돋웁니다. 그렇게 깎고 돋우어서 평평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보면 포장하지 않은 도로는 비가 한번 오면 길이 울퉁불퉁해져서 항상 비가 오고 맑아지고 나면 트랙터가 지나갑니다. 깎아서 고르고 나면 길이 훨씬 판판해지고 그 위로 차가 며칠 지나다니게 되면 다시 판판한 도로가 됩니다. 그래서 아스팔트하지 않은 도로는 유지비가 굉장히 많이 듭니다.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차가 다니기 힘들 정도의 길이 됩니다. 어쨌든 그렇게 깎습니다. 그것을 다 닦아놓은 다음에는 왕이 지나갑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성경은 그 역할을 마치 이렇게 왕 앞서 가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왔다 너희는 회개해야한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외침이었습니다. 이 외침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 회개가 마음에 높은 것, 교만한 것은 낮추고 낮아져 주저앉은 마음은 돋워주워 이후에 잠시 후 나타나셔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역할을 정확하게 세례 요한이 수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먼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있고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우리 주님의 임재 앞에 서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도록 그 마음이 바뀌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길에 왕의 대로가 나고 거기에 우리 하나님이 찬란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때가 온다는 것을 이 1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13절은 부흥에 대한 열망으로 기도가 막을 내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이 만나주실 사람들에게 먼저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하셔서 그 마음에 주님을 만날 만한 상태가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 깊이 이렇게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그리고 이 조국 교회 위에 민족 위에 하나님 당신 자신이 권고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도록 빌어야할 의무가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