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스올에서 건지심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2-13)
녹취자: 정유선
이 구절은 시인이 깊은 인생의 위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구출을 받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주 나의 하나님이여’ 그렇게 노래를 합니다. 여기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저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성함입니다. 존함에 대해서. 1절에는 ‘여호와여’ 라고 나오는데 뒤에서는 ‘주 나의 하나님’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과 능력에 대한 고백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4절에서도 주님을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 나의 하나님’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쓰여진 하나님에 관한 존함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이 여호와, 주 그리고 하나님 이 세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이 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리고 모든 인간과 만물에 대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당하고 그 환난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에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이 호칭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면서 시인이 이후에 자신의 인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심으로 주를 찬양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이고 고백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해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아마 제사와도 관련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인이 인생의 깊은 시련과 고통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거나 만져지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에 당신의 존재의 효과를 드러내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에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딱 두 구절이 나오는데 하나는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하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성경 66권 전체가 그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효과를 어떻게 드러내시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어떤 존재이신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 하나님이 그것을 설명해 주셔도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하는 그 말씀도 인간의 영과 같은 그런 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셔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세계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지 정확히 말하면 어떤 속성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드러내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되고 이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늘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기까지는 안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때 아주 생생하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향해 벅찬 가슴으로 찬송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계시가 자신의 인생과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찬송이 넘치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앎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런 시련과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인이 만약에 이렇게 시련을 만나고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지 아니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과 시련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그것과 맞서서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오히려 선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굴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이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런 속에서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기개를 가지고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셔서 그 이름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이름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의 이름에 대한 사랑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고 주를 위해 산다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주의 이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완전한 동의어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윗이 그 어린 나이에 골리앗과 싸울 수 있었던 용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을 때에 부들부들 떠는 그 거룩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만약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그렇게 모욕을 받을 때에 분노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게 답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여기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면서 살 때 주님의 이름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시인이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게 됩니다. 시련 속에서 벗어난 사람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 차게 되고 외적인 삶에 있어서는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고백을 하게 되는데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 주님의 인자하심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큽니다. 인자하심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믿음이 좋아서 시련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또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거짓된 의도를 꺾었다고 하나님 앞에 뽐내지도 않습니다. 그런 모든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사해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당신의 인자하심 때문에 후하게 대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시련과 환난에서 벗어났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시련과 환난에서 벗어나고 나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게 되고 때로는 마치 그 환난에서 벗어난 것이 자신의 위대한 승리의 전리품인 것처럼 그렇게 뽐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신약의 언어로 말하자면 ‘주여 나의 나 된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냐 하면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습니다.’ 영혼이 ‘네페쉬’ 라는 단어인데 아주 다양한 뜻으로 사용이 됩니다. 여기서는 영혼이라기보다는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 목숨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히브리어로 ‘청구하다’라고 하는 ‘샤리’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이 아주 분명하지 않던 구약시대 때에 이 스올은 죽은 후에 인간이 가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 스올은 삶의 희망이 끊어진 곳, 이 지상에서의 생기와 육체의 기력이 모두 사라지고 아주 음습하고 침침한 곳에서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슬픈 상태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스올은 낙심과 절망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깊은 슬픔과 낙심을 말할 때 ‘내가 스올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혹은 내가 스올에서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노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목숨이 스올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다. 혹은 악한 자들이 주는 고통으로 환난을 당해서 나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었고 그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라고 노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나를 건져주셨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시인이 이런 환난을 만나지 아니했더라면 이렇게 영혼 깊이 쇄신되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스올에서 건져주시는 은혜를 경험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발견하고 가슴 벅찬 가운데 주님을 찬송하고 남은 자신의 인생이 우리 하나님께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 앞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