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자들의 포악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86:14)
녹취자: 김명진
여기서는 시인이 왜 자신의 영혼이 깊은 스올에 들어간 것처럼 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재딤’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교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자기의 모든 생각 속에서 없다고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교만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단순한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성경에 보면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요” 시인이 생각하기에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을 스스로 삼고 그렇게 해서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서 나를 치고”라고 했습니다.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뜻이 있는데 어떤 절망과 좌절 속에서 믿음으로 용기를 내는 것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뭔가 복종하고 엎드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반역의 마음으로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것을 의미 합니다. 원래 성경에 보면 친다는 이야기보다는 “나를 맞서서 일어나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서 반역의 마음을 가지고 공격을 하려고 일어나는 자세를 말합니다. 복수로 나온 것으로 보니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에워싸듯이 일어나서 이 시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꼭 이 시인이 왕이 된 후에 겪었던 반란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는 자신의 삶의 목적과 어긋나도록 대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 대적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는데 병행구로서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교만한 자도 있고 포악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앞에 나오는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시인을 쳤다는 것을 다시 상세히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포악한 자의 무리, 교만한 것이 자기의 마음을 높이는 성향을 가리킨다면 포악한 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삶의 방식이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무리들이 이 시인을 스올에 들어간 것 같은 깊은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 영혼을 찾았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13절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목숨을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서 시인을 치고자 하는데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아주 포악합니다. 그래서 이성적이지 않고 마음속에 느끼는 감정을 따라서 아주 포악하게 행동하면서 이 시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결국 이 교만한 자들이 이 시인을 대적하며 얼마나 악을 행했는지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 시인은 쫒기는 자처럼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고통을 받고, 삶은 절망적인 고통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깊은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싸개 안에 이 시인의 목숨을 보전하여 돌보지 않으셨다면 아마 오래 전에 이 교만한 자들의 포악한 행실로 인하여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의 생명을 당신의 생명싸개 안에 감추셨습니다. 시인이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으로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포악한 자들의 악한 시도가 있었지만, 그래서 시인의 생명이 때로는 바람 앞의 등불 같았지만 그러나 결코 꺼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을 깊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도우신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이 많으시면 왜 하나님은 그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지 말게 하시지, 왜 그 시련과 고통을 다 당하게 하시면서 그러면서 그 속에서 그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그런 소극적인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확실한 것 하나는 그 질문에 대한 우리는 적절하고 완전한 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시인은 선한 사람이요 완전한 신앙의 사람이요, 시인을 괴롭히는 교만한 무리들은 포악하고 나쁜 사람처럼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도 비록 이 교만한 사람들처럼, 이 포악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일생을 악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 생애 속에서 그런 삶을 살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편을 보면서 한 번 이 시편의 기록자를 다윗이 아니라 우리아를 놓고 기록을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다윗에게 충성했지만 간교한 꾀로 아내를 빼앗기고, 충성스럽게 왕을 위해, 나라를 위해 살았기 때문에게 아주 교활하게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이 악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록 이 시인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가난하고 궁핍하고 괴롭게 내버려 두심으로써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합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하루 종일 주께 부르짖사옵나이다.” 그래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다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의지하고 매일 주께 부르짖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아마 이런 시련을 당하게 하신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포악한 무리의 목표는 시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자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사람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정반대의 감정입니다. 이미 사랑하는 자녀가 멀리 떠나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죽었는데도 사랑하는 그 아들이, 딸이 살아있는 것처럼 도시락을 싸서 도시락을 퍼서 밥알을 바다에 떠 넣습니다. 매일 아이들이 한참 발육기에 우유 1L 짜리 하나씩을 먹습니다. 그렇게 우유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엄마가 우유를 바닷가에 뿌리면서 “네가 좋아하는 우유 사왔잖아. 한 번 나와 봐.” 이것이 사랑입니다. 미움은 그 사람이 거기에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랑은 사라져 버렸는데도 불러내서 서로 관계를 갖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사람이 사라지고 사랑만 남으면 떠나간 사람보다는 남아있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포악한 자들의 무리는 극도의 미움을 가지고 시인을 대했기 때문에 시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은 이 포악하고 교만한 무리 앞에 아주 미운 물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시인이 이 교만하고 포악한 자의 무리에게 어떤 잘못을 했을까요? 오늘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교만하고 그래서 시인을 치고 그리고 포악한 자가 되어서 시인의 목숨을 노린 이유가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궁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잘 됩니다. 평민이 혹은 죄인이 어전에 불려나갑니다. 그리고 “죄인은 고개를 들라.” 혹은 “그대는 고개를 들라.”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왕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면 그 앞에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모든 사람 위에 가장 높고 뛰어난 왕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 앞에 있다는 것은 왕이 자신을 통치하고 자신은 왕 앞에 복종하며 경외하며 살아야 할 하찮은 백성이라는 의식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 하였나이다.” 앞에 나오는 교만의 의미와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님은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도 않고 복종하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이 시인이 그에게는 아주 하찮은 물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렵거나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시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을 그런 신앙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편 속에 흐르는 악인과 선인의 날카로운 대조는 도덕적 행동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때로는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 할지라도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있는가, 이것에 의해서 선인과 악인이 나누어지는데 이 시인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선한 언약백성이었고, 이 시인을 쳐서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앞에 하나님을 주로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언제나 교만하고 악한 무리들을 짓밟도록 만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포악을 당하고 교만한 자들이 칠 때 맞으며 시련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다하며, 주님을 우러러 보며 그의 원한 맺힌 기도소리로 하나님 앞에 아뢰며 그렇게 주님 앞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기도가 승리해서 악한 자들의 기도대로 이 시인이 멸망당하거나 생명을 잃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싸개 안에 이 시인의 영혼을 감싸시고,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을 하실지언정 그의 생명은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신앙을 주셨으면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고 신실하셔서 우리가 여러 가지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십시오. 저희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시인처럼 하나님을 우러르게 하옵소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악한 자들이 생명을 노리나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우리를 감추시고 그 은혜로 우리를 붙드실 줄 굳게 믿사오니 저희와 함께 해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