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은(1)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에 아들을 구원하소서”(시 86:15)
녹취자: 김수경
15절부터 17절까지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으로 이 시편 86편을 끝내고 있습니다. 먼저 “그러나” 하고 시작을 합니다. 무엇과 대조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앞에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절망적인 상황을 만드는 악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며 또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들의 목표는 시인의 목숨을 노리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시인은 깊은 스올에 들어간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함으로써 과거에 악인들로 부터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지금도 유효해서 자기를 이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실 것 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지 모르지만 시인들에게는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과거를 회상 하는 것 이것은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훌륭한 그런 영적인 회복의 방법 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과거를 돌아보면 항상 밝고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 삶은 나쁘고 그리고 어두웠던 것은 우리들이 스스로 악을 행하고 잘못 선택한 결과였지만 그 속에서 구원해 내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닐지 모르지만 부분적으로는 나의 악한 의지로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악한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악을 품었기 때문에 그 기도가 일시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내가 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그 모든 시련 속에서 나를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시인들은 그렇게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를 과거에 건져주신 그 모든 구원의 과정을 회상 했습니다. 그런 구원의 과정을 회상함으로써 거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들에게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는지를 회상했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는 어떻게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해주셨는지를 회상했습니다. 이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구원에 대한 회상이 시인들로 하여금 오늘 시련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13절까지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고 14절부터는 지금 자기가 당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를 중심으로 한쪽에서는 악인들이 지금 자기를 에워싸고 목숨을 노리며 커다란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를 중심으로 이 반대쪽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시인은 하나님이여 이렇게 노래하는 대신 주여 라고 노래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살아가는 자신의 모든 인생에 대한 주제권을 가지고 계시고 심지어 자기를 괴롭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묵상은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그리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처분에 기꺼이 맡길 수 있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결코 나의 인생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처분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생사간의 운명을 주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하지만 자신이 선하신 하나님 편에 서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고요한 성품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질서들을 올바르게 하실 때에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시인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올바른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사람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종종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올바름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시인도 범죄 할 때가 있었고 또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마음의 깊은 밑바닥을 들여다 볼 때에는 자신이 죄 중에 잉태하였노라고 그래서 그 죄를 결코 떠나서 살수 없는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아주 치열한 논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은 논리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어떤 비참에 처했을 때 논리와는 상관없이 비참한 처지에 있는 그 사람을 본 슬픔을 동반한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이속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성품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이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완벽함을 주장하며 악인을 멸해 달라고 빌기보다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구하고 찾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가장 순수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죄와 부족을 알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하는 때입니다. 이때에 자기를 의존하는 마음이 가득 있어서는 그렇게 마음을 녹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 할 때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져가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어떤 소망들을 끊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랑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 할 때 그때에 자신의 마음에 깊은 정화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 입니다. 요즘에 세월호사건 때문에 국민들이 거의 패닉 상태에 있고 분노를 지나서 절망을 느낄 정도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것을 너무 내면화 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면화 한다는 것이 무슨 뜻 이냐하면 하나님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게 나의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고 끝내는 겁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태의 해결에 큰 도움을 안 줍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별한 은총, 신앙이라는 영역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법, 정의, 도덕이라고 하는 일반 은총이 함께 엮어져서 운행 되어가는 것이 사회고 국가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러한 중차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tm도인으로서 그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묻고 탐구하면서 이러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나와 교회와 개인적인 죄악들이 이러한 일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탐색하고 그 속에서 아주 철저한 자기반성과 회계를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에 그치게 되면 끊임없는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건데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어떻게 이러한 신앙적인 에너지로 사회를 바꾸고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거기에 이바지하게 하느냐에 대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며 회계하고 그리고 뉘우치고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내면화해서 그래서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면 기적이 일어나서 이 사회가 놀랍게 정화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그 다음엔 아주 구체적으로 이러한 악과 비극을 양산하는 사회의 체제에 대해서 저항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힘을 그런 통절한 회개와 자기반성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지금 몇 사람을 통해서 돌을 던지지만 그 사람들이 모든 죄를 양산한 장본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벨라스트라고 평형수를 4분의 1정도 남겨놓고 다 빼버렸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 잘못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은 동의 안할지도 모르지만 너무 싼 값에 배를 타고 다니려고 했던 사람들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싼값에 밥을 먹으려고 했던 것. 그리고 싸기만 하면 사업하는 사람들이 망하든 말든 상관이 없어서 횡재한 것처럼 좋아하던 소비자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보기에는 그 돈 가지고 배를 타려고 하는 한은 그런 사고가 계속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를 띄우고 그 다음에는 나라에서 그 이상은 배 삯을 못 올린다고 꽉 틀어쥐는 것입니다. 그럼 거기에서 온갖 부패와 부조리가 생겨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예화) 예를 들어서 일본에선 15년 밖에 배를 안 쓴다는데 그럼 15년만 타고는 배는 버려야 된다 팔던지 그러면 지금 7만원 내고 제주도 가던 것을 한 12만원 받아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개혁들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끊임없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반성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반성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반성을 아무리 통절하게 하면 뭐합니까?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하려고 국가에서 그렇게 해도 밑에 있는 구조자체가 그렇게 안 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옛날에 어렸을 때 사업하는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물건을 사다가 중계를 해서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거 좋은 물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살게요 아 이거 다른 데 팔 데가 있는데 이미 예약이 되어있는데 그러니까? 이거를 10만원에 사왔는데 제가 20만원 드릴게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뭐라고 하냐면 아니에요 손님 그렇게 많이 주실 필요가 없어요 제가 이걸 사온 가격이 있는데 그렇게 많이 받질 않습니다. 그리고 15만원만 주시면 되요 그런데 이건 이미 예약이 되어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드릴수가 없어요. 얘기를 하더라구요. 뭘 그렇게 하냐? 많이 남기는 게 이익인데 그랬더니 이 사업하는 사람이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맞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사업을 했기 때문에 자기는 평생 위기를 겪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게 무엇입니까? 오늘도 보니 잠수부가 목숨을 걸고 거기 들어가서 하다가 죽었습니다. 한 시간에 칠천팔백 원입니다. 하루 일당이 구만 칠천 원 그게 말이 됩니까? 오늘 보니까? 건축일하면서 시다하는 사람도 팔만 원씩 십만 원씩 페인트칠 좀 할 줄 알면 십팔만 원 이십만 원씩 받는데 그 장비를 메고 목숨을 걸고 들어갔는데 일당 구만 칠천 원을 주고 초과근무 한 시간하면 칠천팔백 원 준다는 게 구조자체가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사람들이 항거하고 거기에다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두 가지가 같이 이루어지면서 바르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 어디에 서 있든지 간에 그런데서 오는 경제적인 손해나 자기 포기를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항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절대로 세상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 가르침을 그런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럴 때는 세상의 밥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용기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모든 악한 악을 행하는 이웃에게 조차도 선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정의가 아닌 것에 대해서 항거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에너지를 그런 데에 사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뇌물 공화국이 되어서 고리에 고리가 엮여져서 죽어 가는데 그 속에 그리스도인도 똑같은 비율로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는 한쪽에서 교회가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고래고래 찬송을 부르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도록 이바지 하게 하시려고 주신 소중한 하늘의 자원들이 낭비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한풀이 하듯이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찬송 부르고 눈물을 쏟고 나도 그게 다 내 죄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이번에도 내 죄 때문입니다. 그담에 또 벌어져도 이게 다 내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삶은 조금도 정의를 향해서 나가질 않는 겁니다. 그런 식의 소위 얘기하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성이 아닙니다. 약간 옆으로 나갔습니다마는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호소하고 이웃을 향해서 이러한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에너지들을 실제적으로 자신을 면밀히 살피는데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자주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주의 말씀으로 비추어 자신을 성찰하면서 주님의 도를 따르기에 헌신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게 심령의 부흥과 삶의 개혁을 함께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