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10(95. 1. 29)
니느웨의 회개①(욘3:7-10)
요나서 3장 7절부터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아멘.
지난 시간에는 6절까지 했습니다만 오늘은 7절부터 10절까지는 요나서의 클라이 막스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런 것이었는데 이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모습을 7절부터 오늘 10절까지 오늘 봉독한 성경 속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부터 10절까지 나타난 이 제목을 붙인다면 니느웨의 회개가 되겠죠? 니느웨의 회개인데 니느웨의 회개는 여러 면에서 많은 특성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우선 무슨 생각을 하게 되냐면 불완전을 인간을 사용하셔서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호와. 우리는 이런 주제를 하나 보게 되거든요. 무슨 뜻이냐면 요나가 불순종의 길로 가다가 깊이 뉘우치면서 회개를 하고 다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니느웨로 갔습니다만 그러나 그 요나의 마음속에 두 번째 깊이 회개하면서 니느웨로 갈 때는 무슨 니느웨 백성을 향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나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겠다는 무슨 사무치는 갈망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얘기해야 돼요? 사실 거기까지 갔어야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회개를 했지만 그러나 회개를 하고 3장에서 다시 순종하는 길로 갔지만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순종의 길이라고 우리들이 보기는 어려운 거죠. 그러면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냐면 요나가 깊이 뉘우치고 니느웨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이 니느웨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는 줄을 알고 요나고 같은 마음을 가졌어야 옳다는 거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어요? 나중에 박 넝쿨 사건을 통해서 요나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뭐냐 하면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것이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마음을 전심으로 느끼면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니느웨를 향해서 다가오는 심판을 외치는 이러한 사역을 감당했더라면 이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주님이 돌이키셨을 때에 하나님처럼 기뻐할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완전한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지 몸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처럼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순종입니다. 그걸 기억해야 돼요.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저를 예를 들죠. 저를 이 열린 교회에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그러면 제가 이 자리에서 힘들고 너무 버거워서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가면 당연히 불순종이죠.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냥 여기에 서있기만 하면 순종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불순종은 가득 찬 인간들에게는 그것도 대단한 순종일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질은 나를 여기에 세우실 때에 하나님이 애타는 마음으로 원하시는 그것, 그 마음을 내가 함께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함께 기뻐하고 주님이 고통스러워하시는 일에 함께 고통하고 주님이 괴로워하시는 일에 함께 괴로워하고 이렇게 동참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에서 기쁨과 하나님의 정렬로 가득차지 않은 순종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이 그거에요. 분명히 3장에서의 순종은 불완전한 순종이었어요. 그런데 그 불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완전한 뜻을 이루신 거예요. 그러나 보세요.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불완전한 순종을 통해서도 하튼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할렐루야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불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니까 요나가 4장 1절에 뭐라고 했어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잇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걸 보니까 요나가 아마 배를 타기 전에 하나님하고 무슨 모종의 소위 얘기하는 언쟁이라고 하면 너무 불경하죠. 히브리말로 리브패턴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그건 이렇지 않사옵나이까 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이렇게 말하자면 의견이 교차하는 이런 대화나오죠. 그런 것이 아마 분명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요나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요나의 불순종은 죄질이 아주 나쁜 불순종이었어요. 하나님이 이럴 시에는 가능성이 있고 더 말하자면 이럴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고 하는 이렇게 니느웨백성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내리시기로 한 심판을 거두실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러한 기대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불순종했으니까 죄질이 더 나쁜거죠.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요나로 하여금 그렇게 물고기 뱃속에서 생명을 내건것 아닙니까? 생명 내걸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그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그 깊은 기도를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부르짖었는데 그렇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로 하여금 결국은 완전히 순종할 수 없게 만들었던 요소가 무엇이에요? 그것은 결국은 선입견이에요. 무슨 선입견?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악한 이방인들을 파멸하셔야 한다는 선입견이었어요. 그렇죠? 그 선입견 중에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었죠. 그러나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기초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결국은 선입견 때문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요소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보다도 더 커다란 요인 중에 하나는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이 선입견, 자기만의 편견이에요. 이게 너무 집요해서 부서지지가 않아요. 막 가슴을 부여안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해도 이게 안 부서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이 3장을 보면서도 우리들이 느끼는 바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과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살펴보려고 하셨지만 찾기가 힘드셨던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눈에는 정말 보이지 않아요. 우리 속에는 이 요나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돼요. 3장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고함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던 사람들은 1장에 있는 요나를 우습게 알지 몰라요. 그리고 3장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니느웨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2장의 물고기 뱃속에서 징계를 받는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우습게 알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이러한 요나 안에 있는 불순종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이라는 거예요. 강력하고 말릴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불순종의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늘 말씀드립니다. 우리 자신은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니느웨에서 일어났던 회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회개의 방향이 아주 특이해요. 예를 들자면 아사나 히스기야 같은 경우는 위로부터의 회개와 각성이었어요. 왕이 먼저 각성을 하고 그 왕의 각성과 회개가 말하자면 아래로 확 확산되어서 백성들에게 미치는 거죠.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밑으로부터의 회개였어요. 헤롯왕은 결국은 회개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세리와 사두개인과 이런 사람들은 이 밑에서 철저히 회개하는 역사가 밑바닥부터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네요. 우선 뭐냐 하면 높은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일단 니느웨를 지나면서 백성들이 먼저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바닥에서 그리고 나서 곧바로 그것이 바로 상층부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왕과 대신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왕이 포고령을 내려서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한 금식과 통회를 지시하는 그러한 조서가 떨어지고 그 조서가 떨어져서 아래로 확산되어가지고 마치 원자폭탄이 펑하고 터지면 무슨 탄두 미사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거든요. 펑하고 터지면 다시 공중으로 폭탄이 올라와요. 올라가면 그 다음에 펑하고 다시 한번 터지면 그다음에 그 속에서 작은 새끼 폭탄들이 우산처럼 퍼지는 거예요. 그게 땅에 떨어지면서 다시 폭발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3중 폭발을 하는 거지요. 쾅, 쾅, 그다음에 쏟아진 작은 폭탄들이 또 폭탄이 터지는 거죠. 이런 식의 회개가 일어난 거죠. 더 특이한 것은 뭐냐 하면 과연 회개가 이런 조서, 담화문을 발표해가지고 ‘너희들은 회개해야 된다.’ 이런 것 가지고 회개한 예가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서는 이런 것들이 가능했다는 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이 속에서 에스라의 회개운동과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돼요. 무슨 얘기냐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서 깊이 깨닫고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추한 모습을 비추어 볼 때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조서를 사용하시니까 이 조서가 반포 될 때에 온 백성들의 마음이 그 조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 그 조서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죠? 그 조서가 자기들의 마음에 굉장히 크게 다가왔고 지난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이 회개가 일어나던 때에는 세기적인 일식 현상이 이 니느웨 지방에 있었던 바로 그때였어요. 그러니까 자연현상에 대한 징크들을 동반해가지고 그것들과 동반하면서 이 왕이 내린 조서를 통해서 말하자면 백성들이 회개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방편은 아주 다양합니다. 하튼 하나님의 메시지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선지자의 선포, 혹은 왕의 조서까지라도 사용하고 자연현상까지라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깊이 회개시키는 거예요. 이러한 말하자면 특성을 이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시킨 이 역사 속에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회개의 방향의 특이성이었어요. 마치 하나님께서 회개하시는 이 역사는 배 한가운데 나타난 돌풍과 같아서 어느 방향으로 치고 들어갈지 몰라요.
(예화) 저는 이번에 학교를 입학 면접을 하는데 선장을 하던 사람이 한 사람왔어요. 해양대학교를 나와 가지고 오대양육대주를 누비던 선장 출신이었어요.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참 반가워요. 왜냐하면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면접은 안 하고 한참 앉아서 20분 동안 내가 평소에 궁금하던 것, 월급은 얼마 받느냐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배가 얼마나 큰 배를 몰았느냐, 그 배가 태풍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 그런 얘기를 다 물어보았어요. 또 한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공군 전투기 조종사를 한번 만나면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물어 볼 텐데, 한 20분 얘기를 나누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어요. 너무 재미있더라구. 그래서 나는 가만있고 면접실에 들어와서 자기 혼자 얘기를 다 하고 갔어요. 3만 8천 톤짜리 배를 몰았다고 합니다. 배에 실을 수 있는 양이 3만 8천 톤이니까 그 크기는 어마어마 한거죠. 근데 보통 여객선이 1만 톤 그러면 와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3만 8천 톤이니까 4배죠. 근데 그 큰 배를 원목을 실고 운항을 하는데 그 배를 20명의 승무원이 운전을 한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마도로스하면 월급이 최고였어요. 뭐 보통 육지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3배 가까이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많이 받지 않더라구요. 3만 8천 톤 몰고간다고 하면 1톤에 천원씩만 받고 만원씩 받는다고 해도 그렇게 계산하면 뭐 엄청난 돈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는 안테요. 뭐 그것까지는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만, 하여튼 그 배가 첨단 장치가 되어 있어가지고 기상일보도 받지만 그렇지만 자체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기능까지도 갖추고 있대요. 그런데 왜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야 그랬더니 이 사람 하는 얘기가 우선 그 얘기 하기 전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우선 제일 궁금한 것은 파도였어요. 어느 정도 파도에 견딜 수 있냐고 했더니 놀라지 마십시오. 3만 8천 톤 되는 배는 10미터 파도는 거뜬합니다. 10미터면 여러분 몇 층인줄 아세요? 5층 높이의 파도입니다.
견디는 거예요. 나는 거기에서 뭐 그저 하는 일이 설교하는 일이니까 그냥 그 얘기 들을 때에도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 아, 신앙도 그렇겠구나. 신앙도 조그만 신앙의 깊이나 이런 것들이 2인승 보트 같으면 이거는 뭐 옆에 모터보트 하나만 지나가도 온통 뒤집힌다고 악악대고 난리에요. 근데 3만 8천 톤 정도 되니까 10미터. 상상이 갑니까? 4미터 파도만 일면 일체의 어선이 출항을 못합니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도 배는 유유히 대양을 누비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다 태평양이나 이런 한 가운데에 나가면 파도가 벌써 규모가 틀리다는 거죠. 그렇잖아요? 저는 가보지 않았습니다만 그냥 폭풍도 안 불고 해변에서 사람들이 윈드서핑 타고 노는데도 보통 3미터 이상 불어서 파도타기를 하면 여기 이렇게 동굴 같은 것이 생기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안 생긴단 말이에요. 규모가 벌써 틀리죠. 10미터하면 정확히 5층 건물 높이에요. 이게 바로 와서 치는데 끄떡없다는 말이에요. 지난번에 제가 배 타고 인천에서 덕적도 가다가 죽을 뻔 했다는 얘기도 했는데 그 때 파도가 겨우 제가 보기에는 3미터내지 4미터정도 밖에 안 되는 파도였어요. 4미터도 채 안 돼 보여요. 10 미터 파도. 끄떡없어요. 신앙도 그렇게 큰 배와 같이 무게가 있어지고 좀 장중해지면 웬만한 파도가 일어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영향을 줘요. 여러분, 배가 그래도 사람이 200명, 300명 타는 배니까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배인데 옆에 큰 군함이 하나만 지나가면 그 파도 때문에 배가 춤을 춘다고. 그런데 4만 톤짜리 배가 대양 한 가운데를 누비고 지나갈 때에 주위에 있는 그 배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겠어요?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신앙도 그렇게 큰 배처럼 크고 깊으면 지나갈 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거예요. 영향을 받는 대신 영향을 준다고. 그런데 그렇게 컴퓨터 장치가 잘 되어 있고 최첨단 장비가 되어 있어서 태풍이나 이런 것들을 레이더로 잡고 이럴 수 있는 배인데 왜 가끔 폭풍을 만나서 배가 그렇게 뒤집히는 뭐냐 그러니까 그건 기상청의 이야기지 바다 한 가운데에 나가 보면 폭풍 같은 것을 만나면 이게 어디를 치고 지나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갑자기 평온하던 바다에서 소용돌이가 확 일면서 그 다음에 그게 무슨 진로가 어디 있냐는 거예요.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막 가는데 누구도 짐작을 못한다는 거죠. 정기적으로 오는 태풍은 감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건 피해가죠. 그러나 불시에 생기는 이 태풍과 폭풍은 예보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가 말하자면 위험을 만나게 되는 거죠. 심지어는 아주 심하면 파도가 얼마나 치냐면 30미터까지 칩니다. 상상이 가요? 30미터면 15층 빌딩 정도 되는 높이의 파도가 쳐오릅니다. 빌딩이 그냥 솟아났다 사라졌다 하며 파도가 치는 거죠. 그럴 때는 어떻하냐 그럴 때는 하는 수 없이 최대한 영향권이 적은 쪽으로 우회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뚫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붙잡고 역사하시는 이 회개의 폭풍은 회개의 역사는 폭풍과 같아요. 어느 쪽을 치고 들어와서 꺾으면서 뒤집는 역사가 일어날 지 아무도 몰라요. 어떤 갑자기 회개의 폭풍이 들어와가지고 젊은 사람들을 치고 지나가는 거예요. 18세기 그런 일들이 참 많았어요. 한 번 압구정동 쓸고 지나가면 오렌지족 전부 다 손들고 옵니다 할텐데. 그러면 참 볼만 할텐데. 그러면 망할 사람들 참 많을 거예요. 로데오 거리에다가 장사판 벌려놓은 사람들 다 망할 거 아니에요. 그런 역사가 일어나요. 젊은이들 속에. 아니면 또 완전히 임종이 가까운 노인들을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많은 어린아이들. 하나님께서 회개의 폭풍을 불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게 이리로 왔다가 저리로 갔다가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가난한 자에게서 부한 자로 막 휘집으면서 지나가요. 폭풍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요. 할렐루야!! 여기서 돌풍과 같이 역사하시는 어떤 하나님의 회개의 역사를 보게 되는 거예요. 쓸고 지나가요.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정말 회개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잘 들어낸 그러한 말하자면 역사였다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어느 방향으로 몰고 가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여튼 역사가 일어나면 그 역사는 한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 영향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변화의 역사가 말하자면 강력하게 미치게 되요. 이런 일들이 바로 이 니느웨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폭풍과 같이 하나님께서 쓸고 지나가시는 그러한 부흥, 그로 말미암는 깊은 각성과 회개, 이런 역사가 쓸고 지나갈 때에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것 같이 그렇게 회개하는 역사가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새롭게 하시는 영적인 폭풍을 몰고 지나가실 그때에 비로소 인간들이 아까 말씀드린 배처럼 깊이지고 넓어지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와는 거리가 먼, 나와 거리가 가까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배울 것이 많지만 전혀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정말 재미있어요. 한번은 물리학을 배운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이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몰고 오신 이 회개의 폭풍은 어쨌든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면 왜 회개의 폭풍이 백성들을 치고 지나가고 다시 그것이 조정을 치고 조정으로부터 그 아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되는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어요. 또 누구도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튼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주관하셨을 때에 누구도 거기에 거슬리지 못하고 그러한 회개에 깊이 동참하는 놀라운 역사들을 이루어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앞둔 하나님의 백성들을 용서하시는 방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성경은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높은 그 인간의 죄를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이러한 약속들을 주고 계세요. 그러나 이렇게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이 방법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죄사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방법도 인자의 온 것은 이와 같이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느니라. 회개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방법이에요. 왜? 그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가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것도 결국은 그런 회개를 통해서 돌아가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니느웨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에 이 백성들이 이렇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니느웨 백성들이 이렇게 깊이 회개를 하고 그리고 큰 각성이 말하자면 온 민족, 온 국가에 특히 범 국가적으로 가득 차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그 운동을 친히 주관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누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요나가 심히 싫어했다고 하는데 뭘 싫어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싫어했어요. 가깝게 말하면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사실을 싫어했지만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을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싫어한거죠.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회개키를 간절히 원하시는데도 백성들이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회개가 일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불발로 끝나게 되는 그래서 결국은 심판으로 이르게 되는 이런 일들을 성경을 얼마든지 많이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죄사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들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판단,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주어졌을 때에 이들은 즉시 하나님 앞에 잘못되어진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다가 그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마지막 때에 니느웨 백성들이 일어나서 너희를 정죄하리니 이는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라” 니느웨는 분명히 이방 백성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경고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요나에게 주신 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서 유대인들에게 전파하도록 하신 메시지와 상당히 유사했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오히려 그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니느웨 백성들의 믿음이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에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의 믿음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이렇게 깊이 회개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 이 회개는 아까는 방향에 대해서 알아봤고 또 하나는 이 백성들의 그 회개의 특징은 뭐냐 하면 범국가적인 회개였다는 것이죠. 범위에 있어서 일부분의 회개가 아니라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 하여튼 식물을 빼놓고 움직이는 모든 동물들에게까지도 그 회개의 개념이 확산되었다고 하는 데에 말하자면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 같은 것들이 하나님과 관계로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니느웨 왕이 이렇게 깊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면서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들의 회개가 완전한 회개가 되기를 원하는 그 충정에서 회개에 동참하는 그 범위를 확대시킨 거죠.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짐승에게 금식을 명하진 않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왕은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에게 말하자면 함께 금식하게 하고 금식보다도 하튼 먹이를 주지 않고 그 다음에는 물도 마시지 말고 그 다음에는 짐승들에게도 굵은 베를 입히는 이러한 행동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좀 정도에 지나치는 면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준 유익은 굉장히 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백성들이 깊이 회개하고 금식을 하면서 짐승들도 동참을 하니까 사료를 줄 필요가 없잖아요.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손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던 거예요. 이 조치가. 예를 들자면 직장에는 안 나가고 일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짐승들이 옆에 살아있으면 먹이라도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굶어죽더라도 안 주는 금식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서 백성들은 모든 일상적인 일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방된 자유로움을 오직 하나님을 찾는데다가 말하자면 기울일 수 있었다고 하는 면에서 이 회개는 우주적인 회개였어요. 그리고 자연계까지 동참시키는 이런 회개였던 것입니다. 한 나라가 예수 믿는 사람들만 제대로 믿어도 나라는 변하지 않아요. 그러나 한 나라가 거의 완전에 가까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구석구석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바램이요, 사모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니느웨 백성들이 짐승과 더불어 완전히 금식하면서 그러면서 지낼 때에 하나님이 위에서 보실 때에 그 느낌이 어땠겠어요? 그들은 그야말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죠. 어떻게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훈련도 안 된 사람들이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한 번에 그렇게 모든 것을 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게 되었느냐? 그것이 우리에게서 상당히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죠.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늘 찾는다고 말하던 사람들보다 불신앙에서 충격적인 각성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밖에는 인생의 참 소망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더 간절한 사모함으로 주를 찾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전심으로 찾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세리와 창기들은 갈망했어요. 죄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이 그 길이 참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즉시 그 길을 버리고 예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간다는 이 사람들이 문제에요. 언제든지 이 사람들이 문제에요. 늘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 이게 문제라는 것이죠. 하튼 이 회개는 철저한 우주적인 말하자면 전국적인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 회개의 질입니다. 질적으로 이 회개는 완전히 겸비해지는 그러한 심령의 상태로 드려진 금식이었습니다. 금식이 무슨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느냐? 그건 금식에 여러 가지 종류가 없어요.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금식과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금식 딱 두 가지에요. 받으시는 금식은 뭐고 안 받으시는 금식은 뭐냐? 받으시는 금식은 응답되어지는 금식이고, 하나님을 향한 것이 동기가 되는 금식이고,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금식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금식이죠.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얽매이는 것을 풀고 자유를 준다고 하는 그 금식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금식이죠. 그러나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세리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슴을 치며 기도할 때에 손을 높이 들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나이다 했던 그 금식은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금식이죠.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금식은 그건 뭐 해서 유익보다는 오히려 해로움이 더 많죠. 그런 사람들이 대개 자기가 금식한 것을 자랑합니다. 포스터에다 쭉 붙여놓고 자기 얼굴 저처럼 잘 생긴 사람들은 원래 사진일 잘 안 나오는 법이에요. 못 생긴 사람이 꼭 나오가지고 그것도 칼라로 나와요. 그렇게 해놓고 밑에다 쭉 써놓는 거예요. 이력서를 쭉 어느 학교 졸업, 어느 학교 졸업,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요. 이해가 안 가죠. 그게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해놓고 밑에다가 40일 금식기도 3회실시.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3회를 했다는 것을 이력서에 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금식하고 금식한 날짜를 기억할 필요가 있겠느냐 반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열흘 이렇게 정해놓고 금식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 그렇게 묻는 사람도 있어요. 열흘을 금식하고 칠일을 금식하는 것보다 뭔가 더 신령해 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그런 것들이 다 자기 의로 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튼 금식은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금식은 질적인 깊은 회개를 동반한 회개의 모양을 동반한 말하자면 금식하는 그 모습이 당시에 얼마나 슬퍼 보이고 그랬으면 예수님이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 좀 하지 말라고 그랬겠어요. 그리고 그냥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염도 안 깎고 누가 보더라도 금식하는 그 얼굴인 것처럼 드러내 보여주는 그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외식이라고 그러셨던 거죠. 물론 그 사람들은 참 내가 이렇게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서 나 보는 사람마다 내가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지 그러면서 나 있지 요새 금식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슬픈 기색을 하면서 나 있지 금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이러면서 돌아다니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외식으로 보신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감추는게 외식아니에요? 뭐 금식하면 사실인데 뭐 거짓말이 아니고 금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잘못이냐. 그런데 예수님은 외식을 해서라도 그렇게 솔직한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하셨고 오히려 외식을 해서 금식을 안 한 사람처럼 살짝 오늘로 말하자면 밥풀을 여기에다 딱 붙이고 밥 먹은 것처럼 그렇게 기색을 내지 않는 그러한 어떻게 보면 외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진실한 것으로 보셨던 거죠. 얼마나 놀라워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그가 비록 그렇게 금식을 하고 슬픈 기색을 하는 것이 이치상으로는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전심으로 금식 가운데 나타나시는 그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 얘기입니다. 누가 금식하면 ‘얼마나 힘들어?’ 그런 얘기 할 것 없어요. 그 사람 생각해서 금식하는 것 아니니까 불쌍하면 속으로 기도해줄 것이요 가서 ‘얼마나 힘들어?’ 심지어는 ‘그냥 먹지 그래. 꼭 그렇게 해야 돼? 뭐 꼭 그래야 돼?’ 그러면서 말하자면 유혹까지 하는 그런 것들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여기에서는 그러한 깊은 금식이 있는 기도였어요. 몇 칠이나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상황으로 볼 때에 그 날이 길지 않고 짧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금식기도에 있어서 날 수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또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예요? 중요한 것은 이미 진심으로라면 금식을 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 그 사람의 금식이 내면과 외면이 완전히 일치가 되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만약에 그 금식이 이루어졌다면 그 금식을 실행하기 전에 이미 벌써 이 속에서 그 금식에 들어가는 이 사람의 마음이 이미 받아들여진 거죠. 그런 면에서 이 니느웨의 회개는 정말 질적으로 근본적인 회개를 동반한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동반한 금식이었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의 덕행 가운데 이 금식만큼이나 하나님 앞에서 외식보다도 의가 되기 쉬운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남들이 다 하는 것은 별로 의가 안 돼요. 내가 그래도 주일 오전은 빠진 적이 거의 없는데. 그런 것은 의가 될 수 없죠. 왜? 다른 사람들도 다 잘하니까. 내가 그래도 교회 갈 때에 천 원짜리라도 안 가져간 적 한 번도 없다. 그거는 초등학교 애들에게 얘기가 되도 어른들 사이에서는 의가 되지 않아요. 왜? 남들도 다 그만큼 하니까. 그러나 가장 못하는 게 금식이에요. 한 끼는 어떻게 모르는데, 하루는 어떻게 모르는데, 이틀은 어떻게 모르는데, 삼일 그건 정말 인간의 힘으로 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여러분 아실 거예요. 그거 살빼기 위해 가지고 돈 주고 일부러 금식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살인도 할 사람들이에요.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인간 이하에요. 어떻게 배가 고픈데 굶을 수가 있어요. 어떤 신앙적인 의도가 배경이 없이 어떻게 배가 고픈데 그거를 돈 내고 들어가가지고 뭐 살을 빼기 위해서 일주일씩 몇 칠씩 그렇게 신앙도 없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대중가요 들으면서 그렇게 굶을 수 있냐는 말이에요. 그거는 인간도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사귀지 말아요.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베옷은 공통적으로 수의로 쓰이죠. 그리고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베가 주는 의미는 슬픔이에요. 슬픔. 요새 하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패션이 일어나니까 저도 유혹을 받았습니다만, 그 가느다란 베, 뭐죠? 모시 그거는 상상도 못하고. 그거는 옷 한 벌 해 입으려면 150만원, 200만원 가까이 줘야 될 거예요. 그런 것 말고 가느다란 베로 뭡니까? 한복을 지어서 여름에 입으면 아주 시원해 보이고 좋아보이더라구요. 그런데 굵은 베옷은, 여기도 굵은 베라고 그랬어요. 그렇죠? 얼마나 놀라워요. 굵은 베예요. 굵은 베는 무슨 뜻이냐면 특별히 일상적으로 입고 생활하기 위해서 짠 베가 아니라 그냥 막 짠 베예요. 왜? 한 번 입고 그냥 땅 속에 들어갈 수의 같은 거니까 굳이 그렇게 곱게 짤 필요가 없는 거죠. 이 베. 그래서 장사 집에 보면 베가 많이 필요해요. 모자부터 시작을 해서 전부 다 베로 만듭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뭐냐 하면 값이 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옷감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슬픔이에요. 슬픔. 사망. 이거죠. 그런데 그렇게 ‘굵은 베를 입는다.’ 그 의미는 무엇을 얘기 하냐면 결국은 존재의 무가치함. 자신의 존재가 가치 없다는 것. 그래서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그런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겸비함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베의 상징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늘 이 베옷을 말하자면 베옷을 입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겸비해진 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온 백성,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그런 마음으로 내려가 주기를 원하는 그러한 회개였다는 볼 때에 이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을 주목하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만 깊이 말하자면 회개하고 뉘우치는 역사가 일어 났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해놓고 물조차도 입에 대지 않는 금식이었거든요. 이 금식은 결국은 이것도 역시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의미하는 의미가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금식을 하면서 온 마음이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온전한 금식일 수 없는 거예요. 그 음식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는다는 개념보다는 그 금식 속에서 사실 금식을 깊이 하면 많은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느냐 사실 그렇지 못하거든요. 이틀, 삼일, 사일 정도만 들어가면 온 몸이 까부러지게 되죠. 오일, 육일, 칠일 뭐 저는 칠일 이상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만 팔일, 구일, 십일, 십오일 넘어가고 사십일 가까이 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워 있는 경우, 정신을 모으고 수많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의 유익은 무엇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헛된 모든 욕망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혼이 하나님만을 주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데 오랫동안의 금식은 굉장히 커다란 유익을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만을 쭉 주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 기간 동안에 계속 밥상만 주목하다가 나오니까 금식 기도를 했어도 변화된 것이 없죠. 그리고 끝나자마자 아멘 하면서 찾는 게 밥상이니까 그러니까 무슨 선한 것이 일어나겠어요? 하나님만 쭉 바라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만을 주목하게 되는 일들이 말하자면 가장 효과적인 것 중에 하나가 금식이라는 거죠. 여기에서 결국은 금식이 의미하는 바는 뭐냐 하면 이 회개가 얼마나 질적으로 근본적인 회개였나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금식함으로 말미암아서 자신들에게 임박한 재앙에 대해서 무슨 방공호를 판다든지 주님이 무슨 심판을 하실지는 모르지만 방공호를 판다든지 터널을 뚫어 거기에 숨는다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속히 이주를 한다든지 그런 방법을 택하기 위해서 몰두를 한 것이 아니라 고요히 금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지고 복스러운 하나님의 각성이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인간들이 거의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것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좋아하시는 건지에 대한 뛰어난 분별력을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회개는 아주 깊은 질적인 회개를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회개를 단시일 내에 그렇게 기쁘게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이죠. 흠과 티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의 완전한 회개, 모든 사람들이 같은 두려움과 용서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신들을 버리고 그리고 천지를 지으신 이가 오직 요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기를 원하는 이런 마음으로 나왔던 이 사실에서 우리는 커다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니느웨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은 불순종한 요나에 의해서 한 번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선포하는 그 이야기를 단 하루 듣고 이렇게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개선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겸비함으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니느웨 백성들은 단 한 차례, 단 하루 길을 행하면서 말하자면 완전히 순종하지 않은 선지자에 의해서 선포되는 불완전한 메시지를 들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은 완전한 선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한 번이 아니라 모일 때마다 성경을 펼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는 메시지를 선포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선지자로부터 선포를 듣고 회개했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뉘우치고 돌이키기를 원하는 하나님과 똑같은 열망으로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들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니느웨 성에 임했던 재앙보다도 더 큰 재앙이 임해도 그들은 핑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