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11
니느웨의 회개(2) (욘3:7-10)
4장에 아주 귀한 은혜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3장을 속히 지나가고 오늘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4장 1절과 2절을 더듬어 가겠습니다. 우선 지난 주일날 오후에 드렸던 말씀은 이 요나가 니느웨이에 가서 회개를 전파할 때 어떻게 이 사람들이 그렇게 속히 그 말씀을 듣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연현상을 동반한 큰 일식이 있었고 이것을 통해서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선지자의 음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뉘우치는 장면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회개가 어떤 특성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첫째는 방향에 있어서 특이성이다. 대게 밑으로부터 회개가 일어나서 위로 올라오거나 아니면 위로부터 회개가 내려오는데 이것은 밑에서 부터 회개를 하고 올라갔다가 밑으로 다시 내려와서 완전한 회개에 이르는 그런 특이한 방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아주 니느웨의 백성들의 회개가 성경역사 속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그런 점이었다고 얘기를 했고, 두 번째는 이 회개가 정말 우주적이고 전국적이었는데 심지어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짐승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회개에 짐승들까지 동참시키기를 원했던 그런 점에서 이들 마음속에 있는 회개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전국적이고 우주적인가를 알 수 있다는 그 말씀을 드렸고, 세 번째로는 이들의 이 회개가 질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겸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금식의 상징은 음식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음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 마음과 생각과 모든 뜻을 다 모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베옷을 입은 것은 더더군다나 슬픔의 의미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리 떠나고 재앙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 4번째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 회개는 기도가 있는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지나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서 깊이 슬퍼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호소하는 그런 기도가 있는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깊은 슬픔, 자기가 지은 죄과, 혹은 자기가 지은 죄악에 대한 깊은 후회,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비감한 심정, 이런 것이 회개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한 예가 어떤 것인가 하면 가룟 유다의 회개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고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 삼십을 받고 쓰기도 전에 그는 깊이 깨달았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도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판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심문을 받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그런 모든 과정들을 보면서 자기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았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과오에 대한 깊은 후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회가 그의 인격을 아주 전체적으로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은 삼십을 버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려고 의도한 것은 출발이 간단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돈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은 삼십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은 삼십을 사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팔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돈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을 때 그는 예수 보다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내가 흘렸도다. 그러면서 돈을 버린 것은 그가 여전히 돈을 사랑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가룟 유다는 연구할 가치가 아주 많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그 일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여러 가지 신앙적인 태도, 불신앙적인 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굉장히 값진 교훈을 받게 됩니다. 분명히 은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팔았을 때는 그 예수가 아니라 은을 사랑한 동기가 돈을 사랑한 동기가 그 예수를 팔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는 깊은 자책을 느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후회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있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도다. 그 이야기는 자기가 범죄했다는 그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돈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돈도 더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갸롯 유다의 행동 속에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세 개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죄의식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죄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죄인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굳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회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더라도 그 의식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이 자식들이 속을 많이 썩이면 부모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죄가 많지. 한숨과 푸념을 합니다. 그 이야기는 툭! 하면 그 이야기입니다. 무슨 아들이 사고를 치고 들어와도 내가 죄가 많지. 딸이 시집을 못가도 내가 죄가 많지. 그게 어떻게 자기의 죄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런 어떤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비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들은 신앙이 전혀 없어도 옳은 일을 행할 때는 기분이 좋고 감정이 고무되고 보람을 느끼고 뿌듯하고 또 악한 일을 할 때는 마음이 괴롭고 번민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의 질서가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들이 하도 타락하니까 이게 뒤집어져서 선한 일을 하면 속이 편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해야지만 편하고 정당하게 노력을 해서 얻어먹어야 떡이 맛있고 물이 달 텐데 훔쳐 먹어야 떡이 달고 물이 맛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질서조차도 인간들이 지탱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식이 아비를 존경하고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그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았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너를 보냈느니라.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원리들조차도 작동하지 않게끔 마비되어버렸습니다. 그게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했다는 말이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도 세상을 보면서 야, 말세다, 말세, 타락했다고 자기는 종말 같은 것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말세다, 그런 말을 하는데 자기가 무슨 높은 신앙적인 견해도 없으면서 타락했다고 하는데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타락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도덕적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도덕적인 기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느끼는 이런 양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신데 내가 죄를 지었음으로 내가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 된 본질을 깨닫는 말하자면 거룩함 앞에서의 각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에 이르는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렇게 깊이 슬퍼하고 그랬는데 이들이 그렇게 한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깊이 타락했다. 미국보다도 성범죄가 더 높다. 이스라엘보다도 더 타락했다. 이스라엘보다 더 많은 범죄자가 나왔다. 형무소가 수감인원이 더 많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이 백성들이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총체적인 죄악, 그리고 그것을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 우리 앞에서 자연현상을 통해서 만천하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이런 범죄한 땅들을 슬퍼하고 계시다고 하는 총체적인 죄입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면서 우리가 회개할 때 사실은 어떤 우리의 특정한 한 가지 죄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가 죄악 덩어리라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상적인 죄에 회개에 이르는 각성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가 내게 잘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진다. 그것이 아니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던지니까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가만히 예수를 바라보니까 이분이 보통분이 아닙니다. 이분이 뭔가 신적이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물을 끌어올린 다음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에 하는 말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럴 때 예수님이 너 네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네가 죄인이라고 그랬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데 죄인이지? 이렇게 물으면 베드로가 뭘 얘기하겠습니까? 그것은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뭘 물어보시겠습니까? 뭐 옆집과 같이 그물로 동업을 했는데 고기를 분배할 때 내가 서너 마리 더 가져갔습니다. 못생긴 저쪽에 주었고 값나가는 고기는 내가 챙겼습니다. 의자 밑에 고기를 감추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밤새도록이 아니라 몇 달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고치고 나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엄위하심 인격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인간이 됩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태도를 고치게 하기 위해서 특정한 죄가 아주 우선적으로 떠오르게 만드셔서 그 앞에서 자기의 인생을 결단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개할 때 그 사람이 ‘나는 이것만 고치면 문제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야’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 앞에서 자책감을 느끼는 것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영의 차이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회개할 때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죄인임을 증거하시고 그리고 새롭게 하실 때 그때 우리가 완전히 죄인임을 느끼게 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할 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존재 자체가 죄와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깊이 발견한 사람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네가 죄인인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우스운 것입니다. 어느 한두 가지 죄를 깊이 떠오르게 하셔서 우선적으로 그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해결 받게 하시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그 두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나는 이제 분같이 하얀 인간이고 하나님 앞에 완전무결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에 이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회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부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바로 이런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에 몇 번 나오신 어느 할머니와 말씀을 나누신 내용- 팔순이 넘으 신 할머니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면서 봉사도 몸을 사리지 않고 하시며 교회를 섬기셨는데 어느 날 자신이 성령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껏 깨닫지 못한 자기 자신의 죄된 인생에 대해서 눈뜨고 보니까 먼 지처럼 많은 자신의 죄된 모습이 완전히 죄악 덩어리였다고 고백한 이야 기)
사람이 왜 교만해지는지 아십니까? 이런 순전의식,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깨달은 사람들은 교만해지라고 부추겨도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교만해지려고 하면 성령의 빛이 비출 때 내가 전체적으로 죄악 덩어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니까 나하고 나보다 더 악한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기준은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에 있어서 죄를 따지고 죄질을 따질 때 소용되는 기준이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내 존재 자체가 죄악 덩어리고 내 존재 자체가 죄로 가득 찼는데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올라갔던 그 세리가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가 죄가 더 많기 때문에 지금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리는 신전의식 속에서 바리새인이 볼 수 없는 자신 속에 있는 깊은 죄의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에서도 누가 말립니까, 주일을 지키고 새벽기도를 나오고 금요기도 나오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지, 물질이 있으면 교회에 제일먼저 바치니 교회에서 그 이상 원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각성시키시니까 자기의 존재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세계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가 있는 세계였습니다.
보십시오. 가룟 유다는 결국은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도다. 하면서 자기가 사랑하던 돈까지도 던져버렸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얻어야 할 절박함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가 안 됩니다. 그러나 동기가 세상적인 도덕의 기준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느끼는 것은 이런 결과를 낳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죄인이라는 각성을 받은 결과는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있는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해달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의 회개는 세상의 도덕적인 기준에 의한 자책감에 후회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각성과 함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런 깊은 회개였습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로는 이들이 8절에 보니까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찌라.” 그랬고 그런 왕의 조서에 대해서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면 10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셨다.” 고 그랬으니까 이들의 회개는 근본적으로 삶의 변화를 동반한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퍼하고 깊이 뉘우치는 감정적인 회개가 있은 후에 다시 개가 그 토한 것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누웠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런 종류의 회개가 아니라 삶에서 완전히 돌이켜서 이전에 행하던 길에서 방향을 바꾼 이런 회개였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돌이키는 변화가 동반된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15절을 한 3주에 걸쳐서 설교한 것을 이 점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회개, 그 회개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그 죄 가운데서 돌이키고 악한데서 삶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응답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죄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깊이 느끼면서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자기의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목숨도 버릴 수 있는데 뭘 버릴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 회개하는 자로서 합당한 삶이 동반되지 않는 부르짖음은 능력이 없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같은 기도의 제목을 놓고 계속 기도하면서 삶이 거기에 쫓아가지 못하면 그 기도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계속 하면서 성경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성경 속에서 깨달으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날 그 기도가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힘을 얻으면 여러분들의 성경읽기는 가속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면서 계속 늦게 와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가 점점 힘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주십시오. 기도한 후에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예배를 준비하는 삶을 살고 여러분들이 일찍 나오십시오. 여러분들은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열린 교회를 세울 때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고통해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다른 교회 집회 가서 교회가 죽어있는 증거가운데 하나가 교인들이 예배 시간을 당겨서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 교회가 죽어진 증거라고 얘기하는데 열린 교회에서도 그런 것이 보입니다. 저, 말발을 세워주십시오. 어디에 가서 예기할 때 내 말발을 세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하나님 앞에 옳은 것입니다. 우리 개선해야 합니다. 여러분, 열린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인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설교를 해서 여러분들에게 막 호소해도 안 고쳐지면 여러분은 다른 교회에 가서도 안 고쳐집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주보를 나누어주는데 빨간색과 하얀색을 만듭니다. 그래서 11시까지 온 사람은 하얀 것을 주고 11시 이후에 온 사람에게는 빨간 것을 주어서 자, 우리 다 같이 주보를 들어봅시다. 그런다고 합니다. 들어보면 빨간 것이 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시뻘겋습니다. 그러면서 이 빨간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게 부끄러워서 하얀 주보를 받으려고 좀 일찍 나온다면 그렇게 해서 고친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호소해서 깨닫고 그 예배를 하나님 앞에 정성껏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나와야지 야 빨리 가자, 하얀 주보를 들어야지 체면이 엉망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쳐보십시오. 영적인 삶의 변화는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40일 금식기도를 한번 해볼까. 누가 금식기도를 했다는데 그 정도 갖고 되나. 40일은 해야지. 그렇게 큰 것 하지 마시고 그것은 나중에 하시고 우선은 작은 것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칠 수 없는 사람은 고칠 수 없이 큰 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습니까. 나는 내가 그리는 열린 교회의 모습은 그것입니다. 20분전에 성도들이 나와서 있는 것, 예배를 준비 하는 사람들은 그 이전에 예배 준비를 끝내고 또 꼭 필요한 준비가 있다면 한 두 사람만 움직이면 됩니다. 들어와서 안녕하셨어요. 얼싸안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입 다물고 말을 안 합니다. 왜 첫 번째 입술의 열매를 새벽기도에 가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교회에 오면 그저 피할 수 없는 사이면 얼굴을 마주치면서 가볍게 인사하고 그다음에 앉아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일주일동안 얼마나 부산하게 살았습니까. 이것을 녹이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돋아나도록 오늘 아침의 설교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사모 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도록 그래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된 가운데 올 때도 와서 아무데나 털썩털썩 앉지 말고 구석으로 먼저 들어가면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석에 들어가서 앉으면 어차피 중간에 나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자리부터 차곡차곡 앉아서 기도하다가 시간이 나면 성경 본문을 읽어가면서 그러면서 고요히 기다리다가 예배 시간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헥헥 거리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니야, 그게 아니지, 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헥헥 이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치십시다. 고칠 의사가 전혀 없는 모양입니다. 고칩시다.
그런데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토요일 날 와서 기도할 때 꼭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가 신령과 진정 가운데 드리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목소리 제일 크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지각하면 점점 그 기도제목은 약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삶이 동반될 때 기도가 힘을 얻고 기도가 힘을 얻을 때 삶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더 기도에 맞는 능력과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또 많습니다.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이럴 때 기도를 하면서 그냥 무방비한 상태로 살아가면 기도제목이 점점 약해집니다.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오늘도 한번 유혹을 탁! 물리치며 이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기도 속에 힘이 확!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변화 되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주님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매일 기도도 안 하고 노니까 주님이 붙잡으시옵소서. 전권적으로 사로잡으시면 내가 기도하겠나이다. 하나님이 네가 나를 잡기 전에 나도 너를 안 잡는다. 하십니다. 아니, 여러분, 그것은 당연하지 하나님이 전적으로 사로잡으시는데 기도를 안 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가지시면 누구도 사로잡아서 살인적인 기도를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르고 그냥 하나님이 붙잡으시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짱으로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도 배짱이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가 있는데 어제 밤에도 금요기도회에 나가서 내가 정말 기도하는 영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하고 난 다음에 기도하게 하지 못하는 수많은 요인들이 더 몰려옵니다. 그것들을 뿌리치고 안 돼. 안 돼. 하면서 뿌리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아버지, 그리고 다만 한 시간이라도 기도할 때 그 다음날 주님, 제 기도가 더 깊어지도록 영적인 삶에 더 충실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할 때 자기도 모르게 그 기도 속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 있게 기도하면 더 쉽게 그런 유혹을 뿌리치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또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딱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진짜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하고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하고 딱 두 종류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렇게 합니다.
바울이 소명을 받고 나서 매일 고스톱이나 치고 놀다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랬습니다. 말발이 서겠습니까? 일평생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서도 그러나 선한 것이 있다면 정말 주님의 은혜다.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을 완간해놓고 주석 완간 예배를 어디서 드리면서 인사말을 하라고 그러니까 대학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 책을 읽으시다가 은혜가 되거나 선한 것이 있다면 다 하나님 때문이고 읽다가 틀린 것이나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 나 때문입니다." 그분이 그 주석을 쓸 때 어떻게 쓴 줄 아십니까? 아들이 오죽했으면 수 십 년 동안 주석을 쓴 것을 본 아들이 흉내를 냈습니다. 주석을 쓰다가 성경의 무슨 뜻인지 모르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아버지, 이 미련한 인생이 아무것도 몰라서 또 왔사옵나이다. 아들이 쫓아다니면서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아버지,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하더랍니다. 그것을 수 십 년 동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해놓은 사람이 비로소 잘된 것은 다 주님 때문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뭐 된 것이 있어요. 아무 것도 안 되고 그냥 놀다가 노리탱탱하게 된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뭘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힘 안주시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라니까. 바울처럼 열심히 산 사람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종류 있고, 또 하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노는 사람이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무 것도 안 하옵나이다. 그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악한 길에서 떠나겠사옵나이다.
이 백성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힘써 강포한 길에서 떠나라. 그리고 온 백성에게 조서를 내린 것입니다. 힘써서 악한 강포한 길에서 너희들은 돌이키라. 그러니까 기도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내가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제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은 이렇게 바라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온 감회, 아, 젊은이 어쩜 기도가 그렇게 신령하고 하루에 600명씩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어, 비결을 알려주시오. 그럼 그때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능력을 주시니까 제가 했습니다. 자랑을 받으실만한 분이 있다면 주님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주님,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하겠나이다. 안 주시면 게기겠나이다. 안 되는 것입니다. 찾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에게 주님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래, 오늘부터 기도해야지되. 주일날 지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찍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늦게 자기 때문에 못 일어난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토요일 날 여기에 와서 주무십시오. 그럼 지각하지 않습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여러분, 그렇게 해놓은 다음에 누가 묻거든 매일 그렇게 지각하더니 요즘은 그렇게 20분 전에 나와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까? 말하면 다 주님의 은혜지요. 이렇게 말해야지. 자매님, 오늘 어떻게 늦으셨습니까? 제 기도가 약했나봅니다. 주님이 응답을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각했습니다. 그럼 안 된다는 것입니다. 떠나라.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아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찰떡같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이었고, 여섯 번째는 부르짖을 때 그들이 무슨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혹시 우리를 내리기로 한 그 징벌을 내리시지 않으실 줄 누가 알겠는가.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념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도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짜 순수한 믿음이 있고, 또 하나는 이기적인 자기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니까 그것을 바라고 절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도 겸비함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그 내리신 뜻을 돌이키시지 아니하실 줄을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구하고 긍휼히 여기심을 탄원하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길이 없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찾아오셔서 용서해주셔서 다시금 그 관계로 자기들을 회복시키는 것 말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가 너무나 커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돌려놓으실 가능성이 아주 적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작아서
뒤편 시작 (?)암이나 뭐 이런 것이 걸려서 마지막 죽을 때 의사가 물어봅니다. 꼭 수술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면 속으로는 받기를 원하면서 받아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난감합니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냥 두면 3달 후에 죽고 수술을 해도 확률은 10%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아주 돈이 없으면 모르거니와 능력이 되면 10%의 기대라도 걸고 수술을 받아보려고 신청서를 내밉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밖에 길이 없으니까. 제 삼의 길이 있다면 가겠지요. 그러니까 그냥 두어서 3개월 후에 죽으니까 차라리 10%의 가능성을 보고 수술을 하면 그래도 10%의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리고 주사위를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가 너무나 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시금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징벌만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눈에도 벌써 자연현상들이 막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큰일 났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이 혹시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겠는가. 긍휼히 여기시지 않겠는가. 요만큼이라도 전혀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에 매달려보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말은 내가 당신의 긍휼 얻기를 간구합니다. 하는 그 말은 이미 그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 의무가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혹 당신에게는 긍휼을 내게 베풀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나 은혜를 베풀어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호의 때문입니다. 하는 이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가치와 자격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을 깊이 고백하면서 긍휼히 여기시는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죄 사함과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은총을 하나님 앞에 구할 마음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 백성들의 기도는 아주 특이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런 긍휼함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너무 뻔뻔스러워서 주님, 제가 이렇게 문제가 많게 살아왔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택하신 것이 주님이시니 주님 책임이 아니시겠습니까? 저도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꼭 잘못했다고 말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이러면서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무가치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그 티끌만한 죄 사함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니느웨의 백성들의 회개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으면 인간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캄캄한 동굴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곳에 들어가면 조금 들어가면 모르는데 들어가 보면 빛이 하나도 없어 캄캄합니다. 그런데 혹시 티끌만한 빛이 확 비취면 아주 바늘구멍만 하게 비춰온다고 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왜, 그 티끌만한 빛이 지금은 티끌만 하게 밖에 안 보이지만 그것을 깨치고 파헤치면 더 큰 빛이 거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한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고 우리는 용서받을 특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파렴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늘 제일 먼저 하는 기도가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가치 없는 죄인임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이 백성들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이런 부르짖는 회개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신 기도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회개를 거창하게 하고 건국 이래로 최대의 현수막을 걸고 그다음에 탑을 세우고 사람들이 최대 인파가 모이고 눈물로 부르짖고 기도했다고 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셔서 쓸어버리셨다면 이 니느웨의 회개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응답을 받은 회개였습니다.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사하심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든지 성전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그들의 죄룰 사하고 내가 그 땅을 고칠 것이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의 성전에 주어진 축복의 은총이 이 성전과 관계없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는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사유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자기의 죄를 사유하시고 그 뜻을 돌이키는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아, 주님이 과연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구나. 큰 감격과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에서의 후손입니다. 큰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회개가 하나님 앞에 응답될 때는 이전보다 더 큰 믿음으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더 큰 감격을 하나님께서 안겨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자, 거기는 지나가고 4장 1절을 보겠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을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가 크시다.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자, 4장 1절에 보니까 1절만 오늘 좀 더듬어보고 끝나겠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나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그랬습니다. 그 정도가 쉽게 이야기하면 혐오감이 확! 든 것입니다. 에이씨, 하는 혐오감과 반감이 요나 속에서, 뭐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느 한순간에 못 볼꼴을 확! 보면 분노가 확! 혈관에까지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심하면 벌벌 떨립니다. 그러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윽!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심장마비입니다. 그럴 정도로 요나가 딱 상황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온 몸에 독이 퍼지듯이 강한 분노와 시기심과 혐오감과 이런 것들이 인격 전체를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봅시다. 우선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나중에 보고 봐야 할 것이 이 4장 1절을 보면서 여러분,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요나가 자기의 죄 때문에 풍랑이 일어난 것은 겸비하게 인정하고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진짜 장엄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삼일동안 완전히 나 죽었습니다. 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해서 순종해서 니느웨이로 갈 때까지 그 속에 사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회개의 터널을 지난 것입니다. 이 회개는 그야말로 진짜 죽음과 삶을 앞에 둔 결단의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잠기게 되었나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상어인지 고래인지 그 후실에서 가시를 하나 딱 붙들고 바닷물이 밀려오니까 여기에 김, 미역 줄거리가 너덜너덜 걸리면 아버지, 그리고 기도하면 물고기가 올라와서 숨을 한번 쉬면 바람이 들어와서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주여, 그러면서 삼일을 지냈습니다. 그때 생사를 걸고 하나님 앞에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요나가 그때 한국 찬송가 있었으면 아마 그때 불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생각하기를 헌신, 헌신 하는데 그 헌신이 말로만 헌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하는 일은 쉽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 생명도 주 예수께 바칩니다.’ 그것은 쉽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생애적인 회개를 하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음부에 처넣으시든지 천국으로 올리시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난 다 드립니다. 그런데 진짜 요나는 몸도 드렸습니다. 니느웨에서 돌 맞아 죽을 각오도 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멸하신다. 한 것입니다. 죽어도 할 수 없지. 그리고 간 것입니다. 헌신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헌신되었습니다. 자기 고집을 꺾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생명도 아낌없이 드려도 못 드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입견입니다. 자기 생각, 주님을 섬기는데 생명도 드리고 제물도 드리고 지혜도 드리고 다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아는 방식대로 내 생명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주님, 내 생명도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그 대신 너는 내가 원하는 법도대로 네 마음과 몸을 내게 드려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 목숨을 드렸으면 다 드린 것이지. 끝까지 간 것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으면 얘기해보십시오. 뭐가 있는지, 이번에 일병 되었다면서요. 이병에서 일병 올라갈 때 그 기분 좋은 게 별 하나에서 별 둘 올라간 것보다 더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병장 달아줄 게 죽을래요? 싫다고 합니다. 병장이면 두 단계나 올라갔는데 싫다고 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뭐가 있어요. 생명도 드렸습니다. 막 이렇게 오랜만에 휴가 나와서 예화 거리를 제공하는 이 충성스러운 병사를 보십시오. 그렇게 생명을 드렸습니다. 병장한테 지금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겠는지 뻔합니다. 상관들이 (?)못할텐데.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생명까지 드렸는데 뭘 또 드릴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드렸는데 생명보다 더 귀해서 못 드리는 게 요나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입견입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2절에 보면 나옵니다. 막 대드는 게 하나님, 내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까 처음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을 때 거기에 무슨 하나님과의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히, 그러니까 배를 타고 올 때 이미 이 사람이 배에서 갈까 말까 이러고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와서 니느웨 창구는 거들떠도 안 보고 그냥 다시스 창구로 가서 표주세요. 그런 것입니다. 결심하고 항구로 내려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잘 안 나오지만, 그렇지만 이 요나의 이야기로 볼 때 이 각본을 짜볼 수 있습니다. 야, 니느웨이로 가서 40일 후에 성을 멸망한다고 그렇게 말해라. 그러니까 선지자가 대뜸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진짜 멸망시킬 것입니까? 아니면 봐줄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내가 용서해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태도를 보고 내가 결정할 것이다. 그러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가서 외쳐도 결국은 나를 바보로 만드시고 결국은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혼자 영광을 받으시려고 그러는 것이지요.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안 가겠습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여기에 와서 내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이러신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심으로서만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그 말 자체로만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신앙적인 선입견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다니면서 보면 확신에 넘치는 사람들에게는 시비 걸지 마십시오. 안 고쳐집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헌신된 삶을 살면서 잘못된 확신에 꽉 차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안 고쳐집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헌신되게 일하지만 겸비하게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구도에 맞는 말이 들려질 때는 아멘, 할렐루야! 하며 깜박 넘어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드린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드리고 그렇게 헌신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많습니다.
나는 감히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초보입니다. 그래서 ‘디트리 보니퍼’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신약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내게로 와서 죽어라.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주님을 위해서 죽겠나이다. 그렇게 하는 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초보적입니다. 그럼 문제는 그렇게 생명까지 아낌없이 드린 사람들 속에 생명보다 더 질기고 강한 선입견과 심령에 사로잡혀서 나는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내 방식대로 역사해야지 된다고 하는 이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한 것을 다 바쳐도 매일 깨지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다 드렸는데 드린 것 나도 안다. 그러나 나는 네 방식대로 드리면 받을 생각이 없다. 결국은 주님, 내 생명을 취하십시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주님, 오늘 내 생명을 취하십시오. 이 기도가 얼마나 진지한 기도입니까. 여러분, 집에 있는 벽장 속의 통장을 열어서 주님, 이것을 다 드립니다. 이것도 결단을 요구하는데 이제는 통장이 문제인지, 생명을 드리려는 사람이 통장이 문제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통장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되고, 집 파는 것 그런 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생명을 드리겠다는데 뭐 팔아봤자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반항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목매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반항입니다. 자살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향한 극단적인 반항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생애 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이 사람은 선입견을 포기하느니 날 죽이십시오. 내 목을 따십시오.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덤벼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이 한마디의 말로서 요나의 모든 사역과 하나님을 향한 모든 헌신이 벽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무의미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잘 보십시오.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정이 제일 안 됩니다. 또 책만 읽는 사람은 교정이 안 됩니다. 확신에 넘치니까. 은혜체험 한 사람들이 성령을 향한 갈망이 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런 오류가 이 속에 꽉 차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 속에서 결국은 니느웨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막 뉘우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이 선지자는 어때야 했는가 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종이 죽어서 주님께로 가도 생명을 취하셔도 나는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주권이 이스라엘을 뛰어넘고 유다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방 가운데 나타났사옵니다. 주님의 인자하신 헷세드와 아가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이방까지도 보임으로 말미암아 보십시오. 저 수많은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무릎을 꿇고 통회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님, 이 세상에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사옵니까.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졌사오니 이제는 내가 이제 니느웨의 거리를 누비며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이래야 되는데 그리고 재빨리 본토로 뛰어가서 너희들에게 전할 기이한 소식을 가져왔다. 하나님이 니느웨이에 위대한 일을 베푸셨다. 그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서 감격을 해야 할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실 때 이 사람은 가장 태평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실 때 이 사람은 잤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감격할 때 이 사람은 지금 슬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생명까지 다 드린 사람이 하나님이 가장 감격하는 그 순간에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강퍅한 대적입니다. 어떻게 생명까지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강퍅한 마음이 있을까? 기억하십시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헌신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성은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자기의 힘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입니다. 난관을 이기고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의 속에 자기 교만과 자기만의 아성,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셔야 한다는 이런 것들로 꽉 차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이상하게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은 구제불능입니다.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니 생명을 버렸고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는데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선지자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건너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할 사람이 지금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자기 방어의 기재들이 저와 여러분들 속에 무수하게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갈피, 갈피에 끼어있는 그런 죄악과 깊은 문제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3장까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불순종하고 갔습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애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삼일 밤 삼일 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뭘 먹었겠어요. 바닷물 마시면서 헥헥 거리며서 가시 하나 붙들고 매달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하고 토해놓으니 쫓아갔습니다. 정말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런 체험한 사람, 솔직히 영화 하면 필름이 불티처럼 팔려나가고 간증집을 쓰면 죽으면 죽으리라. 못지 않게 팔려나갈 것입니다.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일어날 때 분노하면서 이 속에서 쓴물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강한 배신감이 쓴물처럼 돋아난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 속에서 인간의 그 무한한 가증함과 하나님 앞에 교정되기 싫어하는 진리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크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헌신되고 생명을 다 버리기로 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러면 교회가 은혜가 충만할 것 같지요? 그 교회가 문제가 더 많습니다. 차라리 소망 없는 죄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있는 교회가 오히려 더 좋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제일 학급회의 하기 어려운 곳이 신학교 학급회의입니다. 전부다 누가 손을 들고 저 할 말 있는데요. 그러니까 너 조용해. 그럼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목에 힘줄을 세우면서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확신됨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신념이 있고 걸어온 간증이 있으니까 이게 붙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없는데 뭐 지푸라기라도 있어야 뭘 붙들지, 아무 것도 없는데 폼을 잡을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신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 속에는 갈피갈피 깊은 오해와 부조리들과 자기도 모르는 죄악과 인간적인 자만과 편견과 선입견과 이런 것이 꽉 끼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법은 없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늘 우리는 우리 편에 섭니다. 우리 편에 서서 그저 내 속에서 일어나는 번민은 갈등이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고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에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고난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려움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게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합니다. 늘 이 속에서 내 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속에 갈피갈피 끼어있는 요소들과 선입견의 요소들과 오해와 무지를 다 긁어내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하며 나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헌신된 사람일수록 이게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헌신을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의해서 교정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냥 확신과 신념으로 살아오면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할 때 겸비하게 자신 속에 그 수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말씀의 칼, 그 다음에 진리의 포도주를 기대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치료하고 고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갈망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 너무 너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헌신된 사람일수록 일생을 하나님만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가슴을 비집고 들어가 보면 더 깊은 상처와 깊은 고름 같은 것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되기 쉬운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오히려 이것을 언제 싫어해야 했습니까? 선창가에 나가서 표를 사려고 할 때 아, 요나시군요. 하나님이 당신을 니느웨이로 가라고 하셨다면서요? 우리 이 선창에서는 다시스로 가는 배표도 팔고 있습니다. 혹시 니느웨이를 가기를 포기하고 다시스로 간다면 삼등 표를 산다면 이등표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텐데 그런 불순종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심히 노하고 심히 싫어하고 심히 불쾌해하고 심히 분노하고 진노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바다 속에 던져지는 그 순간까지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리를 싫어하거나 은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노하기보다는 자신은 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에 마음은 깨어져서 살려주시옵소서,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 삼일 낮을 죽음과 싸우면서 기도한 생애적인 기도를 통해서 무너지지 않는 장벽이 그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십일 기도 서너 번 하고 나면 야, 이제 모든 것 허물고 신령해졌겠다. 생각되지만 죽음 앞에 가서도 안 무너지고 그것을 하나님이 허무시려고 하니까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 버리십시오. 이를 악물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 그리고 내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다음 시간에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