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몬 1:25)
녹취자: 원수연
이렇게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쓰는 편지를 끝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그들의 심령과 함께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축도의 형태인데, 축도의 형태는 완전하고 공식적인 형태와 간략한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는 간략한 형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이고 완전한 형태는 삼위 하나님을 모두 거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 이 세 가지를 모두 거론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을 수신자들에게 비는 형태가 완전한 축도의 형태이고 신약의 축도가 바로 사도 바울의 이 서신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축도의 형태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은혜를 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은혜는 주관적으로 적용된 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모든 구원의 행동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소산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가치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받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호의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착한 베풂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하나님의 객관적인 호의로서의 은혜, 그것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 은혜를 통해서 표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아주 짤막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짤막한 편지는 바로 빌레몬에게 이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인이 되게 해서 이제 자기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만들어달라고 하는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교회의 유력한 평신도 지도자였을 이 빌레몬에게는 감당하여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면서 살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지금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간절한 탄원이고 기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축도에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이 표현은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높은 사람이 아주 낮은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의미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본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의 심령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노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있어지이다’라고 축도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있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서는 데 있어서, 한 사람의 신자가 신자답게 세워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결정적이고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간절히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힘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을 때에는 생각과 삶이 이 방향으로 가다가 그 은혜가 주어지면 그 생각과 삶이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힘입니다. 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삽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힘이 없어서 그렇게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힘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도 은혜가 있으면 그런 모든 다른 것들을 통합시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간절히 비는 것이 우리 신자의 삶이고 어떻게 보면 살아 있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핵심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의 오네시모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도망쳐 나온 그 노예를 빌레몬에게 용서받게 해서 자유인이 되어서 자기를 섬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라면, 그런 은혜를 빌레몬에게 주시면 자신과 꼭 같은 마음을 품고 이 빌레몬에게 용서를 받은 오네시모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교회에서 아주 크게 역사할 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자기 유익을 포기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게 만들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주는 이타적인 힘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랑의 능력입니다.
두 번째로 그 은혜가 어디에 있게 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까? 심령입니다. 심령은 희랍어로 보면 ‘마음’입니다. 그 마음, 그 심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중심적인 좌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첫 장을 여시면서도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에 끊임없는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충돌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혹시 그 사람의 어떤 겉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발견되는 속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거나 혹은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예수님의 그런 시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레몬아, 그리고 빌레몬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는 많은 지체들이여, 그대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면 너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란다. 너희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 은혜를 비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미묘한 문제냐 하면, 은혜가 고갈되면 사람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의 삶의 환경에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가득하기를 하나님 앞에 빌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항상 자기가 원하는 삶의 사태만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보다는 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한동안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에 대해서 교육계에서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서구에서 그런 방식으로 교육을 시켜본 결과 아주 사회성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고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이 안 풀릴 때 아주 쉽게 좌절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늘 하던 얘기입니다. 아이들에게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시로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 현실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힘찬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보면 마음대로 풀려서 교만해지는 것도 인생의 실패의 길이고, 또 하나는 모든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좌절하는 마음도 사실은 인생을 실패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것이 더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사실 그대로 어떤 것이냐를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어떤 삶의 사태가 오든지 간에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 수 있게 하는 어떤 은혜의 힘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어서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아갈 때 바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 은혜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주이시기 이전에 빌레몬과, 그리고 빌레몬과 함께하는 교인들과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사도 바울과, 그리고 사도가 간절히 중재하고 있는 오네시모까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상황은 달라도 생각은 각기 꼭 같지 않아도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의 몸의 일부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차례대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주’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입니다. 아도나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그 주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이렇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실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라고 하는 이 단어는 “빌레몬아, 네가 어떠한 상황에 처했든지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간에 우리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의 소유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그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신성’에 강조를 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님의 성함을 풀(full)로 제시함으로서, 특히 이 두 번째 ‘예수’를 통해서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참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과 치욕과 멸시를 당하는 것을 기억하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종하고 죽으시더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여 주라 시인하게 하셨으니 그 분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을 함께 염두에 두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바로 이 만주의 주이신 주와 그렇게 되기까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