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로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몬 1:11-12)
녹취자: 원수연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왜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 오네시모가 자기가 옥 속에 갇힌 중에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1절에서는 두 번째로 그의 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레몬의 집에서 재물을 훔쳐 달아났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그 집에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그랬더라면 오네시모도 빌레몬의 집에 유용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분에서 이탈함으로 무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땅히 주신 본분에서 이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부르시지 않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계를 다스리고 돌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부르셨지만 우리는 그 본분을 이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죄짓고 악을 행하고 오히려 죄의 종이 되기를 기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무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속량해주시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자신이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아는 신앙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면 진정으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무엇이고 또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신학교를 가고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자신이 살았던 삶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아내가 되라고 명령하시는가, 어떤 남편이 되라고 명령하시는가, 또 자녀들을 향해 어떤 부모가 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늘 누를 끼치던 지체에서 자신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함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무엇을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선택해주셨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고, 주님이 자신의 삶에 복 주셔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분투하면서 싸우며 이겨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뭔가 목적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오늘 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진실한 신앙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하는 것,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랬을 리가 없는데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로부터 관용을 받는 것, 그래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울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을 돕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이제는 빌레몬을 위해서나 사도 바울을 위해서나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는 빌레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사도 바울도 그러했고 그들의 섬김과 봉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그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이었는데 그 길을 위해서 이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나의 심복이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심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해설에는 ‘심장’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프랑크나’라는 단어인데 ‘창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창자다’ 원래의 뜻은 그렇습니다. ‘창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문화마다 영혼이 어디에 깃들여있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 인격의 중심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영혼의 중심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 사람들은 등 정중앙에 영혼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단단한 실처럼 사지백체와 연결되어서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온몸이 기동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이 죽을 때에는 그 줄이 딱 끊어지면서 사지가 다 풀어지면서 죽는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아프리카 콩고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간이라고 보았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간다에 이디아민이라고 하는 아주 포악했던 독재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정적들을 죽인 다음에는 배를 갈라서 그 사람의 간을 꺼내 먹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미친 짓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그 간에 영혼이 있어서 자신에게 언젠가는 복수를 할 것이라고 보고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사람의 영혼이 자신 안에 갇히게 된다는 이교의 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떨까,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영혼의 좌소가 어디에 있다고 하는지. 사실은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럴 때 ‘애달프다’ 혹은 ‘애를 끓인다’ ‘애가 끊어진다’ 고생했을 때도 ‘애쓰셨습니다’ 할 때 그 ‘애’가 복부에 있는 장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자, 쓸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자라고 했을 때 그러한 사상과 우리나라가 상당히 유사하지 않는가 생각이 듭니다.
왜 창자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료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 단어가 동사가 되면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창자까지 떨리는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그는 내 창자다’라고 부르니까 ‘그는 내 영혼이나 마찬가지라, 그가 생각하는 것은 곧 내가 생각하는 것이요, 그가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요, 그의 마음은 내 마음이요’ 이런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는 나의 분신과 같은 사람이다.’ 얼마나 사도 바울의 마음에 일치를 이루었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나의 심복이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자신의 심복과 같은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그는 나의 심복이라’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가득 품은 사람, 그런 예수의 정신에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바로 이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랑하는 것에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람, 그래서 그 마음이 전해지기까지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그러니 이 쓸모없었던 노예가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커다란 유익을 주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심복을 ‘네게 돌려보내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를 향해서는 혐의가 남아 있으나 이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된 것,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는 것, 얼마나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그를 자신의 창자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 되었으니 너는 예전에 오네시모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나쁜 기억 때문에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하게 된 이 사람을 하찮은 사람으로 보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빌레몬을 향하여 오네시모를 변론하고 있는 이 사도 바울의 모습은 마치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호하고 도우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나의 심복이라” “그는 내 마음을 아는 자요, 나와 동일한 심정을 가진 자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이러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신자가 되어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한 축복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길 때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깁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리스도의 심복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빕니다.
마지막으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로, 또 빌레몬에게 커다란 유익을 끼쳤던 영적인 지도자로서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격적으로 빌레몬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묶여있던 이 노예를 모두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형제로 마음속에서 놓아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도 아마 사도 바울이 오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새로운 성품이라고 여겨집니다. 불같았던 젊은 시절, 교만하고 자신만만했던 젊은 시절의 혈기는 사라지고 이제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라고 합니다. 그런 세월이 흐르기까지 인격적인 신앙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고난을 가지고 있는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는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주기를 원하고 남을 향해서는 비인격적으로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또한 남에게도 그렇게 대해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입니다.
아무튼 이 오네시모는 예전에 무익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창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유용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