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에 함께 하는 은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몬 1:125)
녹취자: 오희열
편지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사도바울이 축도, 축복기도를 합니다. 정상적인 완전한 형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함께 있어지어다” 이렇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 우리의 축도의 연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짤막하게 축도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빠지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마지막 절에서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리고 빌레몬서 바로 앞인 디도서에서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끝을 맺게 됩니다. 오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간략한 형태이지만 은혜의 소재, 원천인 주 예수 그리스도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이런 데에 쓰여진 은혜는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셨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하신다고 할 때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주어지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지금도 은혜라는 말이 그라티아(gratia) 라틴어, 스페인어로는 그라시아(gracia)인데, 백화점 같은 데서는 사은품, 1+1, 하나사면 하나 거저 주는 것은 의미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뭔가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을 주는 사람의 호의, 주는 사람의 너그러움을 인해서 우리에게 수여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은혜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힘으로 작용을 해서 이 은혜가 없을 때에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선한 일들을 이 은혜 때문에 이행할 수 있게 되는, 이행할 수 있게 하는 힘,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에 있어서 의욕이나 의지, 혹은 버텨낼 수 있는 힘들이 완전히 방전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나이나 젊음, 늙음, 그의 건강상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이를 연년생으로 낳아서 셋을 한꺼번에 키우는데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지, 돕는 사람 없이 혼자서 어린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다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삶을 버텨낼 힘들이 완전히 방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혼자서 버텨 내기도 하고 좌우로 우리와 관련을 맺은 사람들, 가족이나 시부모나 남편, 아내, 처가 식구들, 직장동료 등이 있을 텐데, 만약에 집안 식구 중 한 사람이 큰 병에 걸려서 생사를 오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병으로 금방 죽으면 고통스럽더라도 그 상황이 끝나겠지만, 긴 병으로 계속 진을 뺀다면, 또는 치매로 온 가족을 힘들게 한다면 가족들의 삶이 다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어서, 집 안에는 이사람 저 사람이 아프고, 누구는 치매에 걸리고, 교회에 오니 분쟁을 하고 싸우고, 직장에서는 무능하다고 나가라고 하는 상황이라면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삶의 상황을 만나서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삶의 상황을 바꿔주실 때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이라도 바다에 옮겨주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상황을 바꿔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지 상황을 바꿔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연단되고 우리의 심령이 강하여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할 때, 우리의 상황을 바꿔주시는 것도 은혜라고 하지만 주님이 아니면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을 버텨내게 해 주시고, 주님이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그런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였는데도 놀랍게 극복을 했고, 지금은 못 버티고 있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컸던 것입니다. 은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붙잡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고정하고, 나는 무지하고 아무 능력이 없는 어린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없었다면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원수 맺고 미워했을 사람들이 오히려 이 은혜로 말미암아서 서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길들을 하나님이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일들을 버텨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때로는 은혜가 떨어져서 버텨내지 못하는데 우리 주위에는 불신자이면서도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버텨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은 아주 미묘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버텨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나님의 은혜만이 버텨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들도 이런 것을 버텨내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버텨낼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질서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신자들은 자식들이 힘들게 하면 자식들을 다 버리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족이든 누구든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성 속에서도 삶의 상황들을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함을 주십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삶을 버텨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오는 힘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의 어려운 상황들을 버텨내더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버텨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으로 버텨내며 산 사람들은, 그런 버텨내는 과정들을 통해서 자기 안에 또 다른 자신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고생을 많이 하면 살아온 사람들은 생활력은 강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지하는 사람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어떤 덕스럽지 않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돈에 대해서 인색해진다든지, 동료들에게 밥 한 번도 사지 않는다든지,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나 결혼을 했지만 아내에게 추호의 경제권을 주지 않는 남편같이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 버텨낸 사람들의 성격 속에 담겨져 있는 덕스럽지 못한 것들입니다. 이런 본성적인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힘들을 두부 자르듯이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의지하고 그 은혜의 힘으로써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삶들을 헤치며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에서 온다고 보았습니다. 믿음을, 구원받은 순간 뿐만이 아니라 구원받고 나서도 계속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굳게 붙잡으면서 살 때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버텨낼 수 없는 삶의 상황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사랑보다도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그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가장 우월하게 은혜를 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그 은혜의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동기이고,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변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사랑이 은혜로, 다시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우리에게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이렇게 사랑이 회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들이 우리 마음속에도 기쁨이 되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그 뜻을 행하고자하는 사모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25절의 해설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다음시간에 한 시간 더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