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시리즈
(1995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8월 13일 - 9월 17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요셉 (창 39:1-3) 1995.8.13 주일오전 1
2. 복의 근원이 된 사람 (창 39:5) 1995.8.20 주일오전 10
3.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산 사람 (창 39:6-9) 1995.8.27 주일오전 20
4. 신령했던 사람 요셉 (창 41:37-38) 1995.9.3 주일오전 28
5.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사람 요셉 (창 45:5-8上) 1995.9.10 주일오전 36
6. 본향을 사모한 사람 요셉 (창 50:22-26) 1995.9.17 주일오전 43
1.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요셉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1-3)
요셉시리즈 (1995.8.13 주일오전 1)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 사람,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오히려 야곱의 그런 성격을 닮지 않고 우직하게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묵묵히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셨던 큰일에 쓰임을 받아서 수많은 나라를 기근과 궁핍 가운데서 건지고 또 앞으로 교회가 될 이스라엘 백성들 즉 자기의 가족 식구들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생명을 보존하게 하여 애굽 땅으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이 잉태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 도구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37장에서 시작이 되고 38장에서 잠깐 없어진 다음에 39장에서 다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37장에 보면 처음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물론 출생도 있습니다만 그 긴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엇이냐 하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고 곡식 단이 자기를 향하여 경배하고 채색 옷을 입고 다니면서 형들의 언사가 불평하게 한 이러한 사람으로서 이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그에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이 절하는 꿈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 이였고 형들의 곡식 단들이 자기의 곡식 단들을 향하여 절하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요셉이 남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꿈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꿈을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37장에서 보면 요셉이 그렇게 놀라운 꿈들을 꾼 것들을 가지고 형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라든지 아니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해 바쳐서 형들의 언사가 불평하게 한 것이라든지 이런 등등의 사실들로 미루어 봐서 17살 되는 이 요셉의 신앙이라든지 신앙의 인격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39장은 그 무대가 이미 그 요셉을 시기하는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 팔아서 그 사람 손에 이끌려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인 애굽 사람 보디발 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으로 노예로 팔려간 이후의 일을 39장서부터 기록을 하고 있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맨 뒤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요셉이 승승장구하며 결국은 애굽의 국무총리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이런 일들을 창세기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바로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들을 제일 먼저 보여주는 첫 번째 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사실은 37장에 그랬던 사람이 39장서부터 넘어오게 되면 거기서부터 이미 신앙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놀랍도록 신앙이 강하여 지고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며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이런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가서 더군다나 자기네 사람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가증하게 생각하는 그런 이방의 가나안의 사람이 노예로 끌려와서 처음에는 언어도 잘 소통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끌려온 그 소년이 그 속에서 종살이를 하며 살아갔을 때 요셉 한사람을 보디발이라고 하는 지위 높은 주인이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또 주목해야할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이 요셉이 이곳에서 하나님이 놀랍게 함께 한 생활을 했다고 오늘 성경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보디발을 비롯해서 애굽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셉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이방의 사람이었고 그는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삶을 보자 그는 남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애굽의 고관 대장도 아니고 보디발의 집에서 허드레 일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인 이 어린 소년을 주목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집안에서 허드레 일을 하며 그렇게 집안 식구들의 여러 가지 가사를 돌아보는 그러한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고단하게 하루의 일과를 허드렛일 속에 마치고 헛간 같은 곳에서 사랑채 같은 곳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또 일어나서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고상한 일이 아니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천하고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록 그렇게 후줄근한 삶을 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 아니 모든 사람들이 오히려 우습게 생각하는 노예의 지위에 있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 보디발을 비롯한 모든 식구들은 그를 보았습니다. 그의 삶을 주목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두 가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는데 하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살아가는 그 삶과 섬김을 보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누군가가 그의 인생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안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특별히 함께 하고 계신 그런 삶을 이 사람은 보여 주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삶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요셉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형통케 해주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비록 종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자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주목 해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위가 높고 훌륭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손에 넣어서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지위에 올라가야 전도가 되고 사람들이 갖지 못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커다란 부귀를 누려 야지만 마치 우리가 비로소 예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우리를 통해 알릴 것 같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주목해야 할만한 이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예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해주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장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인생으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오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야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큰 지위에 올라가고 높은 권력을 소유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높은 지위에 올리시기 이전에 이미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나 낮은 지위에 있을 때나 국무총리가 되어 있을 때나 혹은 노예로 살아갈 때나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나 혹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을 때나 언제나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그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 거룩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이심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또 이 세상에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들려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삶을 통해서 보여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과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틀린가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사람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은혜와 인격을 깨닫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은 높은 지위와 커다란 물질의 축복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요셉과 같이 노예로 비천한 신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이웃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성경은 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이야기가 이 요셉의 기사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이었더라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더라 이런 묘사들이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늘을 쳐다봐도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 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 유혹을 뿌리치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일들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모두들 슬퍼하며 애통해야 할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풍랑이 일어나서 갈 바를 몰라 헤멜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바를 알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과 혼미 속에서 방향을 잃고 인생이 마치 대포에 맞은 배처럼 좌초의 위기에 직면에 있을 때 오히려 인생이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그런 혼란과 무지와 혼돈 가운데서 어떻게 인생의 길을 걷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 것을 확신 있게 보여 줄 수 있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이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머리로써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또 육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결심으로도 살아가지 않고 그리고 내 마음의 생각과 내 마음의 소원으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그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셔서 내게 은혜를 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가 나로 하여금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능하게 만드는 우리 신앙생활의 자원이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그리고 더러운 죄악들을 뿌리치고 의를 위해 당당히 고난을 받으며 올바른 일을 위하여 외톨이가 되는 일들을 기꺼이 감당하며 이 길을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걸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믿는 것이 있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합니다.
지난주에 한국 의사회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네 명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러면 의사도 네 명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그렇죠? 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산부인과 의사도 네 명중 한 명은 예수 믿는 사람일 텐데 어느 병원이든지 전부다 낙태 수술하고 죄 짓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 병원 앞에 [우리 산부인과는 낙태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낙태는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을 해치는 죄악입니다.] 그렇게 써 붙여 놓은 병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난 잘 모르지만 산부인과에서 낙태 수술을 안 하면 무얼 가지고 병원을 경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들이 돈 많이 버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갖다가 붙여 놓았습니다.
무엇이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죠? 여러분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러한 어떤 우리의 삶을 그런 이익을 마다하고 또 고난을 받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우리의 힘의 원동력이 우리 안에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린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익을 포기하거나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역동적인 삶을 살며 그렇게 신앙생활에 대해서 수많은 체험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걸어온 신앙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감화와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살아온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간증도 들을 것이 없습니다. 요셉은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해주시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 에녹은 어두운 시대에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기르며 사는 그런 촌부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왕도 아니었고 또 선지자도 아니었고 또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자 가장 어둡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득한 시대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리는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수많은 적군들을 대적하게 하고 외톨이가 된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커다란 믿음의 위기와 시련 앞에서도 사자와 같이 담대하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빛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던 이모든 힘들은 바로 그 사람들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는 위대한 힘과 믿음의 능력이었다고 하는 사실들인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힘으로 감동된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그의 삶의 실제로 함께 하셔서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이 변화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꿈과 욕망을 여러분들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밀면 미는 대로 물결이 치면 치는 대로 욕심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이렇게 고삐에 매인 망아지처럼 혹은 송아지처럼 그렇게 세월과 풍파와 세상의 풍조에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깊이 돌이키며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래서 세상의 물결을 움직이고 그리고 나를 움직이고 이웃을 움직이고 가족들을 움직이고 교회를 움직이는 이런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히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을 모든 사람들이 주목했던 이유는 형통케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적인 시야에서 보면 이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요? 형통케 되었으면 무엇 때문에 이 억 말리 먼 곳에 그것도 노예로 끌려 왔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형통케 하셨다 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수많은 물질이나 위대한 지위를 주신 것이 아니라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받는 고난은 하나님이 그를 정말 미래에 이 넓은 애굽과 그리고 주위의 수많은 나라들을 죽음에서 건지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건지는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깊이깊이 인격이 깨뜨려 지고 영력이 자라고 영성이 깊어지며 그리고 놀라운 지혜로 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드디어 때가되매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시련과 또 환란은 기도를 해도 물러가지 않는 시련과 환란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복 주시고 특별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러한 말하자면 환경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적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놀랍게 변화 시켜서 그래서 그런 모든 훈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우리의 인생을 향한 놀랍고 아름다운 계획을 이루는 훌륭한 도구로 우리가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서 애굽 생활은 이 갈리는 생활이었습니다. 요셉은 그런데 불평한마디 안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을 때는 뭐라고 지었습니까? 므낫세 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제는 애굽에서 경험한 이모든 쓰라린 고생을 기억에서 잊어버리리라”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애굽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면서 결국은 국무총리까지 됐지만 다시 모두 지나간 애굽 생활을 돌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죽 했으면 세상 적인 시야에서 보면 애굽이야말로 이 요셉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곳 아닙니까? 왜 요새 말로 애굽은 바로 내가 하늘로 붕뜬 곳이다. 스타가 된 곳이다.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고난을 당한 곳이었습니다. 한없는 시련 가운데서 살아서 잊고 싶다는 고백을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름을 그걸로 붙여줬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이가 갈리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요셉이 기도 안 했기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까? 요셉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고 놀았기 때문에 이 애굽에서 그렇게 종살이를 오랜 동안 하게 되었습니까? 경건하지 않아서였습니까? 경건하기 위해서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자는 요구를 거절을 하니까? 그 다음에는 종살이에서 더 떨어져 가지고 이번에는 옥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옥 속에다가 집어놓고 성경은 뭐라고 그러냐면 요셉 그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 아니 뭐가 형통합니까?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동침하자는 요구를 거절했더니 옥 속으로 들어 가지고 착고에 채워 가지고 옥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것도 특수 감옥입니다. 정치범들을 가지고 대역 죄인들을 가두는 그 말하자면 감방에다가 이 사람이 쳐 박혔는데 뭐가 형통합니까? 형통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하고 또 따른 형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은 요셉이 기도 안 했기에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그 애굽을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요셉을 이 애굽 속에 집어 넣으셔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감옥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고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를 위해서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을 향해서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쓰지 않는다면 우린 너무 비참할 것입니다.
월요일 날 집회 갔다가 어제 토요일 날 4시에 늦어서 허겁지겁 막 달려 갖고 왔는데 여기 5시 반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간신히 옷 갈아입고 시간이 없어서 전도사님 오토바이 빌려달라고 해 갖고 빌려 타고서 여기를 오니까 또 날 데려갈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라이드를 타고 가는데 아우!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뒤에 기대 갖고 있는데 힘들다 그러고 있는데 저를 데리고 가는 전도사님이 그러는 것입니다. “교수님! 행복하시겠습니다.” 뭐가 행복하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매일 사용하시니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 맞습니다.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아직 일할 마음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주님이 사용해 주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소외감을 느끼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오늘 예배 끝난 다음에 앞에 서서 인사하면서 “아! 정말 우리교회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한 분이 악수 딱 하면서 "당신은 우리교회에 유일하게 별로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마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인생의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이구 내 나이 팔십인데! 팔십 되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시겠습니까? 요셉이 그 고생을 십 삼 년 동안하고 그리고 진짜 그렇게 감옥 속에서 혹독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새로 입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그때 성경은 뭐라고 그런지 압니까?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에 그 나이가 30세 였더라 최근의 애굽의 고고학을 연구해 보니까 애굽에서는 30세가 공직에 취임 할 수 있는 최저 연령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이 자로 재시고 그 기간 동안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큰일을 위해서 준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이구 내 나이에 무슨 큰 일이 있으려나 아니고 내가 가정주부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무슨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신 가운데 이 요셉을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목적을 위해서 두신 그 틀 안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모든 호위를 다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애굽에서 건져내어 속히 우리 집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것은 하나님이 응답 안 해주십니다. 왜? 그 틀은 요셉을 하나님의 계획에 만들기 위한 합당한 틀 입니다. 그 틀이 놓여 있는데 그 틀 속에서 형통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종으로 팔려 가면 신분은 종인데 종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처럼 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종으로 팔려갔으면 맨 날 주인에게 몽둥이로 맞고 그리고 상급자들에게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녔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야 할 텐데 종에 신분으로 그 집안에 종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그냥 뭐 한달 두 달 석 달 다섯 달 여섯 달 있다가 보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그 사람이 놀라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 저 사람 인정해줍니다. 그래서 새로 들어온 사람은 존경을 하고 함께 있었던 동료들은 그를 정말 사랑하고 그리고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아끼고 그러다 보면 결국은 주인이 야! 나는 국사에 바쁘니까 네가 내대신 종들을 다 부려라 종으로 거기 들어갔지만 그 사람은 종이 아니라 종을 부리고 그 종들을 관리하는 주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감옥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요셉이 감옥 속에 들어가서 이제는 꼼짝없이 고난을 받으며 비참한 옥살이를 하겠구나 했더니 감옥 속에 들어갔지 만 그러나 그는 간수처럼 삽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옥중에 일어나는 모든 죄수를 그 죄수에 손에 붙들고 그 사람들을 관리하고 자기는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다고 하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이런 것들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주께서 여러분들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람이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이렇게 동행하는 삶을 살고 또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삶들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애굽에 끌려 와서 마지막 국무총리가 되어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하에 왕권을 손에 쥐고 있는 바로의 인정을 받는 것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 애굽의 땅에서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람과 특별히 함께 하고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종으로 끌려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그 천한 일들을 감당하며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그때에도 요셉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비교적 지위가 높아져서 이제는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고 그 집안의 모든 노예들을 부리는 사람이 되었을 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서 감옥 속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에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언제나 이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환경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두셔도 그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하고 그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형통하고 잘 나갈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관계를 저 버리지 아니하였으며 또 고난을 받고 난관에 쳐 하였을 때도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매일 매일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요셉이 비록 17살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면서 그 꿈은 곧 내가 이곳에서 총리가 되라는 꿈일 것이다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종살이로 살아가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았지만 감옥 속에 투옥되는 위기를 만나면서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꿈꾸는 꿈과 근접해 가는 삶으로 진도가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계획과는 전혀 반대로 나아가서 마지막에는 감옥에 들어가서 죄 없는데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무죄함을 말하고 석방을 받게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애원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잃어버렸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요셉의 부탁을 진지하게 들었지만 옥 속에 나가고 나서는 그 사람이 요셉에게로 받은 부탁을 잊어버리게 만드셨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는 이 신앙을 놓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인생을 살며 무슨 일을 만날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그것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사람하고 상당히 유사했던 인생을 살았던 사람 중에 하나가 다니엘과 셋 친구 아닙니까? 모두 심판을 받고 함께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들은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드디어 다니엘은 그 바벨론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왕에게 인정을 받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왕들이 다니엘에게 얼마나 호위 적으로 대했습니까? 오죽했으면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갇혔을 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왕이 그 아침에 밤새도록 기다리다가 그 사자굴속에 와서 다니엘아! 다니엘아!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아! 네가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하더냐? 하나님이 너를 과연 지켜 주시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호위 적으로 대해주던 왕에 대해서 왕이 그렇게 호위 적으로 대해주었고 또 다니엘도 왕을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셋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 앞에 절할 수가 없나이다. 이것이 환경을 능가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림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그들이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노예와 같은자리에서도 당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그 사람을 통해 보여 주시고 하나님이 동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셔서 하나님 앞에 주목받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이것이 가장 큰 가치라고 믿었고 그 관계의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보여주는 위대한 신앙의 힘이 애굽에서 꽃피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위가 높아지고 우리가 많은 재물을 소유해야지 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금이나 은으로 광채를 내고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신앙의 위대한 힘으로 빛을 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 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게 되고 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하며 살았습니다. 노예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하며 살았고 그리고 유혹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상으로 여겨서 그의 임재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그를 한없이 높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는 자신의 애굽의 총리의 지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스토리를 우리들이 말씀을 들어가면서 우리 지나간 사람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정말 나도 한번 비록 요셉 과 못지않게 고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기회가 되기 위하여 요셉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힘께 하시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는 놀라운 계획들을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결심을 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일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믿음의 위대한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특별히 붙들고 그리고 그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며 이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고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양보할 수 있는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내가 하나님 앞에 힘써야 하리라 결심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복의 근원이 된 사람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요셉시리즈 (1995.8.20 주일오전 2)
언젠가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택시 운전사가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저 차가 얼마쯤 가는지 아십니까?” 저 차가 세금까지 다 포함해서 이 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몰고 다니는 것은 스텔라 다 낡아서 털털거리는 것 그것도 자 기차가 아니고 회사 택시였습니다. “선생님 저런 큰 부자는 하늘이 내겠죠?” 무슨 뜻입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저렇게 부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큰 부자만 하늘이 냅니까? 여러분 우리 인생이 성공하는 비결을 오늘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큰 부자만 하나님이 내는 것이 아니고 작은 부자도 하나님이 내시고 건강한 사람만 하나님이 내신 것이 아니라 또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생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요셉에 대해서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요셉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복의 근원이 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알다시피 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종이 되어 가지고 노예로써 그 집안에 모든 궂은일들을 다 했습니다. 노예로서 살아가는 삶이니까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신기한 것은 무엇이냐면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간 것도 아니고 수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수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보디발과 및 그 보디발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요셉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형통케 하여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드러내는 생활은 우리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권세를 소유하거나 수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많은 사람들을 내가 종처럼 거느리고 있을 때에만 보여 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요셉에게 특별히 동행하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이 없어도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될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형통해도 아무리 잘 나가도 요셉은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소유도 없고 그리고 가족도 없고 심지어 생명도 주인의 수중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노예의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남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대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존귀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서입니다. 이 보디발의 집에 끌려간 이종 요셉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들 흔한 생각으로는 우리가 돈이 많아지면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삶을 살면 우리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삶을 살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사람들 앞에 주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함께 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관계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 그때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우리가 고난을 겪으며 역경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디발이 보니 요셉이 지혜롭고 성실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되던 일이 요셉이 맡기만 하면 놀랍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의 의해서 앞길이 열리면서 그 일이 말하자면 풀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재산과 큰 집안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이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당연히 형통한 사람 이 요셉의 손에 맡겼을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껏 까지는 요셉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으니까 그냥 안 되던 일이나 되고 어려웠던 일이나 요셉이 손을 대면 풀려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보디발이 아예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 요셉을 불러서 다 맡겼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가정의 총무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의 관한 권리를 그에게 다 맡겼던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나는 가서 국사를 돌보고 봉급을 받아오는 일만 하고 나머지 집문서 땅문서 통장 적금통장 인감도장 비밀번호까지 요셉의 손에 다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보디발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에게 이런 일을 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뛰어난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과 동시에 또한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아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인간과의 관계에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당한 대가로써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신실하고 근면한 사람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잘못해서 받는 박해를 예수 때문에 받는 박해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성실하지 못해서 인간관계에서 받는 손해와 상처를 마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자기가 먹는 음식과 자기의 아내 딱 둘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라고 맡겼습니다. 요셉은 아무런 법적인 권리가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노예였습니다.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속하고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는 자기의 아이가 될 수 없는 그런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일들을 그대로 두시면서도 실제로 이 요셉은 주인보다도 더 능한 권세를 가지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디발이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손에 집에 모든 소유를 다 맡기고 나니까 그때서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열리고 복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굽의 사람의 집에 복을 한없이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거지 당신을 믿지도 않는 이 이방의 사람들 이 보디발과 보디발의 집에 있는 사람들 틀림없이 그들은 태양신을 섬기고 나일강의 우상을 섬기는 그러한 그 시대에 수많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거짓된 것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보디발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복을 내리니까 여호와의 복이 그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가득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하면 밥상 있지 않습니까? 밥상 이 있는데 보자기가 조금하면 이쪽으로 덮으면 저쪽반찬이 튀어나고 저쪽으로 덮으면 이쪽 반찬이 튀어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자기가 커서 푹 덮으면 밥상이 온통 다 덮여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이 이 집에 한구석에 임한 것이 아니라 이 보디발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애굽사람의 모든 소유 이 애굽사람 보디발이 가지고 있는 재산 소유 땅 노예 짐승 모든 것 위에 포대기처럼 푹 복이 씌워 져서 그래서 그 복된 보자기 속에서 재산이 늘어나고 그리고 풍년이 드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그때 말로 하면 우리가 실감이 잘 안 나지 않습니까? 요즘표현으로 해보자면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가 마구 나오고 집을 사놓기만 하면 집값이 오르고 땅을 사놓기만 하면 도시 개발이 되고 장난으로 지나가면서 복권을 샀는데 당첨이 되고 말하자면 이런 복된 일들이 넘치도록 일어나서 노예가 자녀를 낳으면 그 집안에 소유가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짐승이 새끼를 낳으면 소유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짐승이 새끼를 낳으매 낙태하는 법이 없고 그리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서 목축과 목양과 전토가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보디발은 국사에 전념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일들을 이제는 누구에게 맡겨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데 이제 이 이스마엘 손에 끌려와서 노예로 사라고 그랬을 때는 별로 힘도 쓸 것 같이 않았던 요셉을 헐값에 샀는데 이 아이가 그야말로 큰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디발의 집에 놀라운 은혜와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점에 대해서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말입니다. 우리만 잘살고 우리만 축복해 주시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축복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잘살고 내가 아무리 부족한 것 없이 살아도 내 형제 내 부모 그리고 나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이웃의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면 그러면 나 편한 것은 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그리고 형통함을 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주위가 형통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 형제가 자기들이 각 각 편안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축복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어도 내 형제들이 굶는다. 먹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내 형제 하나가 죽을병에 걸려서 지금 사형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사경을 헤맨다. 이것이 행복이 아니란 말 입니다. 그런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하나님을 떠나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때에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서 요나를 붙들어서 요나를 엘리야처럼 하늘로 끌어올리신 것이 아니라 요나가 타고 있는 배 주위를 폭풍을 보내서 그 태풍으로 바다를 흔드시고 그리고 사람들을 말하자면 두려워하고 재물을 잃어버리게 만들면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오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떠난 자들을 찾으시는 방법과 정반대의 것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할 때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형들이 잘못하는 것을 고자질하고 속이 좁고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의 세월을 거치면서 요셉은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으로 다듬어졌고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때에 요셉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여전히 소망이 없고 언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가운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복 주시기전에 먼저 요셉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복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축복해 주시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난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변화시키셔서 당신 앞으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마음을 낮추시고 심령을 가난하게 하셔서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케 하심으로 고난 가운데 부르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고난에 처할 때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고난과 역경에 처할수록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찾을 여유를 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 인가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간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을 헤치고 시련과 역경의 파도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푸른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간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을 바라보고 또 여러 분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바라볼 때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며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도다 말할 수 있는 이런 생애와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요셉은 비록 노예의 신분 이였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이였지만 그는 어디 가든지 노예의 신분 속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재물과 자기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 주셔서 무슨 일을 하든지 범사에 형통케 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그의 생애 가운데 드러내 보여 주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비록 언제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디발과 같은 높은 지위로 올리실지 요셉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것을 꿈꾸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내가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던 그 어린 시절에 놀라운 하나님의 비전들을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자신을 위하여 성취하고야 말리시라는 이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관심은 이 애굽의 땅에서 어떻게 하면 고난과 위기를 면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얼마나 이 애굽의 사람들의 마음에 환심을 사서 이곳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다가 죽을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씻겨지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나에게 경배하고 절하고 하나님이 나를 그러게 높이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일찍이 기대할 수 없었던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이 이 요셉을 주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생각하며 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였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렇게 고난을 받으며 종살이를 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망 없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그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일했습니다. 앞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눈에 보이는 앞일보다도 확실하게 요셉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나를 이 고난에 땀과 눈물로 얼룩진 노예 살이 하는 이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은 나를 인정해 주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보디발과 같은 사람으로 아직 만들어 주지 아니하였고 내 손에서 보디발의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도 그 중에 단 한 푼도 내 돈은 아니지만 요셉은 그것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돈보다도 훌륭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권세보다도 더 훌륭한 여호와의 동행하심이 이 요셉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요셉을 위하여 애굽의 온 집에 복을 넘치도록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에 내려주셨습니까? 보디발의 집에 요셉이 들어온 다음에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 요셉이 믿는 하나님의 대해서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요셉 그는 뭔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이방을 위해 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를 요셉이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 이였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요셉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곤고하게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해 손을 높이 들고 축복하십시오. 죄 사함을 받지 못해 곤고한 심령들에게는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죄 가운데 있어서 곤고하게 살아가는 저희 동생을 주께서 죄 사하시고 용서하시며 축복하옵소서. 물질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복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 불쌍한 영혼들이 물질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여 손을 드시고 아버지 하나님! 저들에게 물질의 복을 내리시옵소서.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건강을 위해 축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이 무슨 약속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이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단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요셉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 때 그가 빈 축복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하는 이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데 이 축복이 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 한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니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으면서 이 복 받는 것을 통해서 이 요셉이 보통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런 한 식으로 세상을 축복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우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저는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너무나 가난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동안에 한 번도 제때에 등록금을 내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은 가만히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우리 집이 언제쯤부터 살게 되었냐면 내가 회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여러분 직장과 여러분들께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나에게 달렸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의식입니다. 선민의 의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의해서 택함 받은 하나님의 선민의 의식입니다. 선택된 백성들은 이런 자부심과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너희를 위하여 중보 하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권고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너희를 축복하시리라 믿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민에 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집안에서 많은 식구들 가운데 그저 젊은 시절에 수없이 좌절을 경험한 그런 연약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창세기 39장을 보면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다! 우리 가정에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히 여기고 그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것들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에 남편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변화되고 가족들이 변화되고 부모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애굽 사람의 집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 하나님은 이 요셉을 위하여 이 애굽의 집에 큰복과 물질의 축복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것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이 요셉 한 사람을 기억하며 요셉을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애굽의 사람 집에 축복과 은혜를 내리시기까지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 세상에 있는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써 자기를 중심으로 역사 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이 애굽의 땅에서 살아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축복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요셉을 위해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위해서는 보디발의 집에 내리시는 그런 정도의 축복이 아니라 더 놀라운 비전과 그리고 더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께서 이 요셉을 향하여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요셉은 이 보디발의 집에서 우선 첫 번째 정착에 성공하여야 했습니다. 만약에 이 요셉이 이곳에서 살면서 하는 일마다 망하고 요셉이 끼어드는 일마다 불통하는 그러한 불행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면 요셉은 만약 이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서 어떠한 인정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이 애굽 사람의 집에서 그야말로 비참한 종살이만을 계속 되풀이하며 살다 한을 품은 노예 생활 끝에 그렇게 인생을 비관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은혜를 주셔야지 만 이 요셉을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요셉을 주목하여야 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요셉을 통해서 말하자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위해 요셉의 인생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요셉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애굽의 집에 보내셨습니다. 그 환경은 요셉의 마음에 드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 그런 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는 더더욱 생각될 수 없는 그런 불만족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목표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며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증거를 보여주는 삶이 요셉이 원하고 바라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축복이 아니었지만 요셉을 그 모든 애굽 사람 가운데 존귀하게 만드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와 관계있는 많은 주위의 사람들을 흔드는 것입니다. 가정의 수많은 풍랑과 예기치 않았던 수많은 폭풍과 파도들 속에서 그들은 비록 말로 고백하지 않지만 그들은 풍랑 이는 파도 속에서 꿀꺽꿀꺽 물을 마시며 바다위로 떠올랐다가는 빠져 들어가는 그 난파된 배를 부여잡고 살려고 기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도와 달라고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어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어야 가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축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들을 붙잡아주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가지고 그들에게 증거하고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실망 한 곳에 소망을 주고 낙담한 곳에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가 바르지 못할 때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흔드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관계에 약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내가 아무리 기분이 좋고 하나님 없이 행복해도 집안에 들어와서 조끔한 말다툼 한 마디만 하면 그 평안과 행복이 다 깨져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관계에 약한 것을 하나님은 알기 때문에 그 관계를 하나님이 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는 다는 의미는 우리 한 사람이 예수를 잘 믿으면 나 때문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적자에 헤매던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 사장은 예수를 안 믿어도 하나님이 나를 평안 가운데 인도하기 위해서 나에게 샬롬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 때문에 그 회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한번 우리들이 모두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됩니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위에서 풍랑과 파도와 역경과 시련의 물결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가족들 속에 풍랑과 파도가 일어나고 물질이 곤핍하여 고통을 받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들을 축복해 주시도록 나를 하나님이 부르시는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축복해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요셉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시련을 만나는 사람들은 시련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왜 잠잠하던 인생의 풍랑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고,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그 파도가 일어나는 원인을 모든 일을 알아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속으로 너 나 돌아와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 적인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만 내가 너를 위해 축복할 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기만 하면 내 축복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이런 깊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네 인생? 좀 안 된 말이지만 내 손안에 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네 인생을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셔서 놀랍게 축복하실 수 있다!” 오늘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눈을 들어서 여러분 말고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에게 놓여 있는 삶이 혹시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과 같이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생활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의 희망은 보디발의 집에 부유한 창고에 문을 열고 그득히 쌓인 훌륭한 제물과 그리고 고기나 아니면 식료품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하신 삶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이들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이라고 하는 선민의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집에서 사표 내고 나가기만 하면 그것은 빈 껍질이다.’라는 이런 선민의식을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이 나를 중심으로 우리의 집안을 위하여 움직이고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인정 해주는 삶을 살고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삶을 살 때에 여러분들로 말미암아서 세상이, 교회가 움직이고 가정, 남편, 아내가 자녀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녀와 내 이웃이 고통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삶을 살기 원하면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물질은 추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물질 중 신앙을 따르자니 우리가 물질이 손해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면 평생 여러분들은 물질을 찾아다니기 위해서 곤고하게 쫓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그 물질이 약만 올리고 숨어버리는 그런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지 않는데 누가 그에게 복을 주시겠으며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그 모든 소유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자신의 건강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데 누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축복을 줄 것이며 그 축복을 견고케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 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신앙을 따르는 것이 물질의 손해가 나는 것이고 엄격하게 하나님이 가르쳐 준 법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그러면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그런 어리석은 착각 속에서 믿음을 향하여 자신의 인생의 닻을 던지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사이에서 늘 방황하다가 우리의 인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초라한 인생입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셉을 기뻐하시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아낌없이 내려 주셨습니다. 뭐든지 내려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좋은데 그 사람이 맘에 드는 데 그가 생각하는 것도 맘에 들고 행하는 것도 기특하고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생각도 갸륵하고 그가 마음먹고 있는 미래를 향한 인생의 계획도 정말 가상한데 하나님이 왜 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귀한 것을 다 드리고 싶어집니다. 뭐가 아깝습니까? 하나님 앞에 귀한 물질을 드릴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뺏긴다는 생각 안 가지고 드리면서도 그게 즐겁습니다. 퍼내는데 퍼낼수록 기쁨과 은혜가 더 충만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하나님을 향해 아무리 막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교회는 돈이 없어서 일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어서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해 지면 헌금이고 뭐고 넘치도록 나옵니다. 부족한 것이 없이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그런데 사랑이 메마르면 이것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 같이 계산적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주판튀기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이 얄팍한 인간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한번 부어지니까 그냥 머리가 획 돌아 가지고 그냥 구두쇠들이 예수 믿다가 변화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다 변화를 받으니까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 살아있는 간증이 세리 삭개오입니다. 그는 돈에 대해 얼마나 밝히는 사람 이였겠습니까?. 매일 돈은 만지고 사니까 돈 하나 하나에 대해서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가 부어지니까 그 다음에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 것 훔친 게 하도 많아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러나 누구든지 청구서만 들고 오면 율법에서 정한 그 최고 이상의 배상을 해 주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랑이 부어지고 나니까 구두쇠가 변해서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드리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거꾸로 뒤집어서 하나님 적용해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그렇게 째째하게 주판을 튀기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자체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 관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열린 교회 아무개가 정말 맘에 들어요. 하는 짓이 정말 맘에 들고 그리고 맘에 먹은 생각 하여튼 하나님이 그 사람이 종로로 나가면 눈이 종로로 가시고 광화문에 가면 광화문을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여의도 광장에 모여 있어도 그 한 사람만 따라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겠습니까? 사랑하면서 아무 것도 안 준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 요셉이 하나님과 이렇게 동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보디발의 집을 섬기는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이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놀라운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로 말미암아 곤고해지신 분들은 꼭 기억하십시오, 물질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서 물질 얻기 위해 세상을 기쁘게 하려 하지 말고 하늘을 여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어디에 가든지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축복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갖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 할 수 없습니다. 그와 누가 동업하면 그 사람은 괜히 망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흔들어야 되니까 할 수 없이 그 사람도 말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화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면 동업한 사람들도 다 같이 복을 받습니다. 같이 회사 다니는 사람이 복을 받고, 가족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가서 고통 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고통 속에서 울지만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게끔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주일 동안 일평생 살아가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였더니 세상을 기쁘게 할 때에는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더니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더라 간증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산 사람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6-9)
요셉시리즈 (1995.8.27 주일오전 3)
요셉은 비록 종이였고 노예였지만 오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주인은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부장이 되고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것이 목표지만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 실세가 자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실세, 명복상의 사장이나 회장이 아니라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중심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시고 나를 중심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시고 나를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나를 중심으로 내가 속해 있는 사회를 이끌어 가시는 그런 중요한 실세의 인물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세상을 이끌고 움직이는 길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의 위치는 어떨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 할 때에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런데 이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 많이 있었지만 보디발의 집에서 환영을 받았던 것도 생각해 보면 얼굴이 괜찮게 생겨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고관 대장의 집에 수시로 외국 손님들도 오고 또 정객들도 드나드는데 아! 기왕이면 거기서 설거지를 하더라도 얼굴을 좀 예쁜 사람을 뽑겠지요. 아무튼 오늘 성경에 보니까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히브리 사람들 관점에서 볼 때 남자답게 생기고 동시에 또 아담하게 생겨서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정말 친근함이 가는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그런 잘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모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하나님이 주신 외모가 이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처의 유혹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남편이 늘 국사에 바쁘니까 늘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노예 그러면 사람들이 전부다 행동거지가 다 천박하고 노예근성이 있어서 시킨 것 이외에는 하지 않고, 지저분하고 그런데 이 청년은 보통 신실하고 충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이 요셉의 기사를 다 통 틀어보면 애굽 땅에 와서 깊이 배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남을 향하여 따뜻하게 배려하는 매너였습니다. 신앙도 물론 배웠지만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이 요셉은 자신의 삶을 비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 전에 주신 그 꿈을 기억하면서 보디발의 집에 훌륭하게 적응을 했습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타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부터도 최고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하자면 이 집에 집사장이 된 것입니다. 노예로써 그러니까 남편은 출타하고 나면 낮에는 이 보디발의 아내와 늘 상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이 여인의 마음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한번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눈짓을 하고 또 눈짓을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눈짓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적적한 때가 되자 동침하자고 유혹을 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는 굳은 신앙의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혈기 왕성한 이십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와 모든 사람을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애인이 있을 리 없고 연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리 없습니다. 물론 장가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이 젊은 여인, 보디발의 집에서 자랐으니까 좋은 화장품과 아름다운 식료를 먹으면서 편안한 환경에서 자랐을 테니까 나이는 자기보다 많아도 귀티가 흐르는 그런 부인 이였을 것입니다. 젊은 청년이 하루 밤을 함께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유혹하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눈짓하며 그에게 다가 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고 축복의 근원이 된 사람들에게도 유혹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한번 따놓고 평생 먹고사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기도 힘들지만 한번 회개하고 그 평화를 회복한 다음에 그 평화를 지키며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이 세상의 유혹 이 사람은 어디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고 하나님이 그를 중심으로 역사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복을 주셔서 어디에 가든지 그로 하여금 축복의 근원 되게 해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그러나 유혹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직면했을 때 잠시 멈칫거리며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어도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어제의 신앙이나 그저께의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의 신앙입니다. 주님이 이전에 나를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셔서 나로 말미암아 가정의 복을 주시고 이웃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에 큰 은혜를 주시는 놀라운 일들을 위해서 나를 사용해 주셔서 나를 그 은혜의 중심부에 두셨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과 시련과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범죄의 유혹을 이기게 만드는 것은 이전에 함께 한 그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나와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시련과 유혹을 이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전에 나를 축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셔서 많은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밀려오는 죄악과 더불어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그 신앙 그것이 우리 안에 역사해야 우리는 오늘이라고 일컫는 나를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에는 타락으로 마쳤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혼자 걸어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오늘 이 요셉은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한 사람 이었지만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도 유혹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며 승리 할 수 있는 믿음이 있고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패배하고 낙심 할 것입니다.
(예화) 새벽에 꿈을 꿨는데 깨고 나가지고 한참 동안을 생각했다. 이것이 도대체 누구에 대한 꿈인가! 큰 배가 있는데 그 배에 마스터가 높이 솟은 돛대가 있었다. 거기에 층층층 사람이 앉게 되어있어서 이제 제가 교인들을 다 태우고 그리고 제 가 제일 밑에 탔는데 미처 못 올라온 한 사람이 있었다. 자매인데 누구인지 기억 은 안난다. 그런데 헤엄을 쳐서 올라와야지 사는데 주위에는 시퍼런 바닷물이 있는데 자꾸 헤엄치면서 떠내려갔다. 그래서 그냥 꿈속에서 뭐라고 이름을 부르다가 꿈을 깼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죄악된 세상을 헤쳐 나갈 신앙의 힘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시련과 유혹의 파도는 옛날의 여러분들이 뭘 하면서 살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그 시험과 시련의 파도를 헤치고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파도와 더불어 싸워서 유혹의 파도와 시련의 파도와 더불어서 싸우려고 노력을 하고 싸울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여러분들이 공급받지 못하면 이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 이였고 이전에 축복의 근원이 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우리는 무너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세워진 건물이 무너질 때 그 무너지는 소리가 더 심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요셉으로 하여금 보디발의 처에게 유혹을 받고 이렇게 유혹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 요셉이 이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옛날의 함께 하신 하나님 옛날의 나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셨던 하나님을 믿는 옛날 신앙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요셉에게 있었던 믿음이 무엇 이었는지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요셉은 오늘 성경에 말하기를 동침하기를 청하니 거절하여, 그 거절은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유혹이 밀려 올 때 한참 생각하고 뜸들인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아마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끌려가서 상전에 명령에 불복종한 것은 이것이 처음 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서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드려서 주인을 섬기고 그리고 그 주인이 축복 받는 것을 보며 충분히 즐거워하고 수고와 고생의 보상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의 처 역시 이렇게 충직하고 주인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요셉이니 내가 이렇게 눈짓하고 동침하기를 청하면 감히 거절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요셉은 그 자리에서 즉시 거절했습니다.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타일렀습니다. 나의 주인이 집안에 있는 모든 제물을 내게 맡기고 간섭지 아니하였고 이 집에는 나보다도 큰이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실세였습니다. 신분은 노예지만 실질적으로 이 사람 보다 더 높고 더 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집안에 모든 세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내게 아무것도 금하지 아니하였는데 한 가지를 딱 금한 것이 있는데 그 선악과 같은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당신이다. 그랬습니다. 이 요셉은 먼저 시험을 당할 때에 우선 그 주인과의 신의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나를 믿어주고 그리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 그 주인의 신의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땅에서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이 전적으로 요셉을 도우시고 요셉을 축복해 주셨지만 그러나 요셉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렇게 축복해 주실만한 훌륭한 도구들을 간직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디 가든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 집에 끌려 갈 때는 보디발의 집에 신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는 옥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간수들과의 관계에서도 의를 지켰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에는 왕과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렸던 그 형들을 불러올 때에도 또한 그는 가족들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기도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인격이 아직 깨트려지지 않아서 주위의 사람들과 늘 충돌을 일으키고 주위의 사람들 속에 분란을 일으키는 모난 형제자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형통하기가 어렵습니다. 불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딪치니까 인생의 목표를 하나를 위해서 투자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일에 너무 소모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 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의를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따라서 이스라엘 안에 있는 한 형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 요셉은 신의를 지켰습니다. 집안에 모든 재물을 다 맡겨 주고 집안에 있는 모든 권세를 요셉이 대신하여 행사하게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넘어야할 선과 넘을 수 없는 선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과 자신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보여 줄 때까지 요셉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을 향한 신의 하나가 피 끓는 청년 요셉, 외로운 이 청년 요셉으로 하여금 타락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거절 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말했습니다. 그는 먼저 요셉에게 눈짓하며 동침하자고 청하는 이 주인의 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간음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는 내가 주인이 없는 사이에 이 젊고 준수하고 아담한 이 이스라엘에 노예와 하루 밤 잔들 주인이 알 턱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때는 밤도 아니고 낮이었을 것입니다. 잠깐 이 노예와 잔들 무슨 표가 나겠는가! 그것은 그렇게 크고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큰 악이었습니다. 커다란 악이었습니다. 요셉이 이 시험에 넘어지는 동시에 그 이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끌려오게 하시고 이 보디발의 집에서 그 까다로운 상전들 밑에서 수많은 종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모든 집안에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보내주시는 그런 축복의 도구와 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 주심으로 오늘도 보디발과 그 모든 집안 모든 사람들과 처의 신뢰를 독차지하고 실질적으로 보디발 움직이시는 실세로 등장하게끔 만들어 주셨던 이 놀라운 신앙의 축복과 하나님의 임마누엘 하시는 놀라운 간증들을 단번에 물거품을 만들 수 있는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음을 이 요셉은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바라보는 신자의 눈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괜찮다. 다른 사람들을 봐라.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 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죄를 향하여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악이라 어린 아이와 같이 무서워 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죄를 하찮게 여깁니다.
(예화) 캐나다로 가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옆에 어떤 처녀가 탔는데 얼굴을 보니까 직감적으로 스치는 게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무려 17시간을 가니까 어떻게 말을 안 하겠습니까? 난 가만히 있는데 옆에 외국 사람에게 자기가 뭘 물어보고 싶은데 이야기 좀 대신 해 줄 수 있느냐고 그래서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냐고 물었더니 수련회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고 또 은혜 받은 자매가 또 있구나 했더니 아무리 봐도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고 예수를 믿어도 상당 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팜플렛을 보여 주는데 섹스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문제가 됐던 종파데 수련회가 섹스교 수련회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장소에서 벌거벗고 몇 칠 동안 같이 살면서 원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팜플렛을 보여주는데 그 팜플렛을 가지고 혈연단신으로 돈을 몇 백 만원 들여가면서 수련회를 참석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아! 여름 수련회 때 우리 교인들이 이렇게 열심을 내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놀라운 것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데 무조건 가는 거라고 합니다. 영어도 별로 못하는데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더 해보니까 인생이 어쩌구저쩌구 하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결핍 등등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핍도 아니고 또 이웃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태어난 자신의 모습이나 성격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까? 인생의 모든 불행의 근원은 죄입니다. 그러자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미간에서부터 인상이 쫙 찌글어 지는데 그것으로서 대화는 단절됐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하고 그리고 죄가 우리의 인생의 영향을 끼친다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그 죄를 민감하게 느끼고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얼마나 커다란 파괴적인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늘 통용되는 죄였습니다. 언제나 있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늘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늘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런 큰 악을 행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비결이었음은 말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시련 가운데 있었으나 그는 정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우상들을 섬기던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로 보냄을 받았고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집안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그 속에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갈지라도 요셉은 전혀 다른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하는 독특한 견해였습니다. 만약에 내가 당신과 더불어 동침하면 하루는 즐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가 나는 그 죄의 노예가 되고 종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이것을 적은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배우 커다란 일입니다. 내 생명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어두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찬란한 신앙의 빛을 바랄 수 있었던 요셉의 신앙에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서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으로 세상을 산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인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하나님은 아무데나 앉지 아니하고 당신의 앉을만한 정결하게 치어진 자리에 앉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당신과 함께 해 주는 사람들 때로는 이 세상에서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셔서 수많은 지혜 없는 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 때로는 미련한 자와 함께 하셔서 미련한 자를 지혜로운 자보다 훨씬 훌륭하게 쓰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부자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부자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부러워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빛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추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좀 더 신령해지고 그리고 좀 더 하나님과 놀랍게 교통하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정결한 삶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일에 있어서 양보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요셉은 이 커다란 유혹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아가서 이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을 때 나는 오늘 본문을 기초해서 분명히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를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한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 살아간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겠느냐 말했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동침하자 이 방에는 우리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요셉은 말했습니다. 아니다. 이방에 누가 또 계신다 누가 있는데?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문은 닫혀져 있고 사방은 고요합니다. 자빈 들의 접근은 금지되었고 그곳은 주인의 은밀한 내실이었습니다. 어떤 노예가 감히 저벅 저벅 걸어서 주인의 내실로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보는 사람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단 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속에서 요셉 자기를 유혹하고 있는 이 보디발의 아내에 아름다움보다 더 능가하는 임재 함으로 자기 곁에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신앙의 감각은 영적인 깨어진 감각은 어디로 가든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끌려와서 형통 할 때든 혹은 위기를 만날 때든 때로는 감옥 속에 쳐 박혀 콩밥을 먹을 때에도 항상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 임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생각입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만이 영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 한 후에 하나님이 거기다 놔두고 다시 만날 때까지 세상으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계심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 일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고 오늘 내가 불의를 행할 때에도 그 현장에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형통할 때에나 축복의 근원이 될 때나 위기를 만날 때나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셔서 요셉을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요셉을 지켜보신 하나님은 오늘 또한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임재 하심 가운데 우리를 들여 다 보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도 하고 고난을 주시기도 하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와 섭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 이런 영적인 감각 이런 깨어 있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교회 속에 와서만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집안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길을 건널 때든지 위기를 만날 때든지 누군가를 위로해야 될 때든지 누군가를 찾아가서 도와줘야 할 때든지 혹은 넘어질 때라든지 일어설 때라든지 형통할 때라든지 불퉁할 때라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하나님이 그곳에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이 내게 임하셔서 나와 함께 그 임재 가운데 나를 두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느끼며 유혹을 이기고 실현 가운데 공급받으며 어려움 가운데 능력을 공급받고 어두움을 헤치고 하나님의 찬란한 진리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이런 신앙의 사람 진리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욕먹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에 나아가서 잠시 내가 누구라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의를 향하여 드리고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병기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신분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아가서 빛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소금의 정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든지 더 형통한 삶으로 여겨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적인 방법으로 형통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고 고난이 오면 피하고 위기가 오면 잔꾀로 넘기고 어려움이 다가오면 인간의 머리를 가지고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신적인 형통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은 전설 속에서만 듣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시련의 파도를 헤치고 그 누구도 자신을 향해서 호위 적인 미소를 보내는 사람 하나 없는 그런 완전한 남의 땅에서 종교도 틀린 모든 이방인의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던 비전을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 요셉 하나를 삼키기 위해서 때로는 환경이 시련의 파도를 몰고 오고 사람들이 미움의 파도를 몰고 오고 유혹의 물결이 도전합니다. 그때 요셉이 어떻게 이런 시련의 파도와 유혹의 물결을 이겼는지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놀라운 지식도 없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애굽의 모든 파도를 능가하는 힘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낮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낮은 지위에 있을 때 찬란한 빛을 바랐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는 높은 지위에서 아름다운 광채를 바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할 때나 부요 할 때나 형통할 때나 위기를 만날 때나 미천한 노예일 때나 높은 총리 일 때나 그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명예나 지위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면 나는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족하게 하나님의 진리의 횃불을 쳐 들 수 있는 것, 내가 비록 집에서 기저귀나 빨고 얘들 붙들고 솥뚜껑 냄비 뚜껑 들고 운전을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세상에 어떤 지위에 오른 사람들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발하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지위는 높아졌다가도 낮아지고 낮아졌다가도 높아집니다. 세상의 물질은 있다가도 없고 없는가 하면 또 있습니다. 그렇게 들락날락 하다가 결국은 얻은 것은 없고 손을 펴고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표는 애굽과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요셉처럼 빛으로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임재를 이 세상의 금은과 보화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겠습니다. 어디 가든지 하나님은 요셉밖에 모르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지하 감옥 속에 쳐 박혀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오직 요셉밖에 몰라요. 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나와 감옥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보디발과 함께 하던 하나님도 함께 떠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축복하며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끊김)
은밀한 내실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거기에 계셨습니다. 요셉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고 요셉이 어떻게 결단하나 보고 있었습니다.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지켜보고 계셨고 요셉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임재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기도도 가능해지고 말씀생활도 가능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서 그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우리가 있는 삶을 살아 야지만 우리는 승리하고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땅에서 누구에게도 주목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 요셉 이었지만 그러나 요셉과 함께 하는 하나님은 그를 주목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힘입고 축복의 근원이 되기까지 요셉은 매일매일 어제의 신앙으로 오늘을 산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으며 이 이북의 땅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하심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결정적인 위기와 유혹의 위험이 다가왔을 때 그 는 평소 자기와 함께 하시던 그 하나님을 인정 할 수 있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우연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 우리가 깨어서 하나님 앞에 오늘도 예전의 은혜가지고 오늘을 살수 없음을 굳게 시인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시련의 파도를 넘고 유혹의 물결을 물리치며 어두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하늘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 주시도록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구할 때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함께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습니다.
4. 신령했던 사람 요셉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 41:37-38)
요셉시리즈 (1995.9.3 주일오전 4)
오늘 이 무대는 어제 말씀드린 때로부터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일입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지만 37장에 나타나서 형들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형들이 그 사실 때문에 요셉을 미워했다는 기사와 그것 때문에 그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서 애굽으로 가게 했다는 그 사건이 같은 해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면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은 37장 이후로 정확하게 13년 내지 14후에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39장에 나타나는 보디발의 집에서의 노예 생활이 바로 17살 팔려오던 그 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이 바로 동일하게 13년 내지 14년 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디발의 집에서 처의 휴혹을 뿌리치고 그리고 그가 그 대가로서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몇 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39장의 내용으로 볼 때 39장 전체가 일련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안 습니다. 그런 등등에 사건으로 미루어 볼 때에 아마 39장에서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 그리고 또 옥 속에 갇혀서도 몇 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옥 속에 갇힌 기사가 나오고 거기에 옥 속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둘이 같이 옥 속에 들어와서 함께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이 요셉은 그 옥에 들어간 뒤에도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입어서 죄수가 되었지만 그 속에서 간수를 대신해서 옥에 모든 사무를 처리하는 이러한 임무를 맡고 자유롭게 그 옥 속에서도 활보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 술 맡은 관원과 바로의 떡 맡은 관원장 두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둘이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을 꾸게 될 때에 그 꿈을 해석해 주는데 한사람은 복직할 꿈이요 또 한사람은 사형을 당할 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람이 이 요셉으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았느냐 면 바로에게 가면 내가 여기 억울하게 갇혀 있는 것을 기억해 달라 그래서 나를 좀 빼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년이 흘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꿈 해석을 받고 떠나간 것이 스무 여덟 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37장에서 팔려온 것이 17살이었다고 한다면 정확하게 11년이 지난 후에 바로 거기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30이 되던 후에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하지 못해서 고민할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그 보디발의 집 감옥에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소개를 해서 다시 면도를 하고 깨끗이 옷을 입고 바로 앞에 서게 된 때의 나이가 30세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은 그때의 이야기를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기다랗게 연대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지 잠시 후에 여러분들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요셉은 약 14년 가까운 세월을 애굽 땅에서 보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토리는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날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 애굽을 관통하고 흐르고 있는 나일강이 있습니다. 그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그 평야를 만들고 또 그 홍수가 지면 나일강이 쓸어온 상류의 흙들이 평야를 만들어서 곡식을 자라게 만듭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강변에 큰 일곱 좋은 암소가 나오는데 아주 실하고 토실토실하게 보기 좋은 그런 암소가 나오는데 조금 있더니 다시 일곱 암소가 나오는데 그 소는 아주 흉악하고 삐쩍 마른 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올라와서 그 살찐 소를 다 먹어버렸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또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또 아주 실한 이삭 일곱이 올라오는데 조금 있더니 동풍에 말라서 속이 빈 일곱 이삭이 다시 이렇게 나오고 그 파리한 이삭 그 허약한 이삭이 충실한 이삭 일곱 개를 다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박사들과 술객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그 꿈을 고하면서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러나 바로에게 해석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고하며 오늘날 내가 정말 잘못한 사건 하나가 생각납니다. 바로가 물었습니다. 그게 뭐냐? 사실은 제가 임금님께서 저를 향해 노하셔서 저를 감옥 속에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었을 때에 그때에 내가 꿈은 꾸었는데 이러 이러 이러한 꿈을 꾸었는데 또 내 친구가 이러 이러 이러한 꿈을 꾸었는데 그래서 고민을 하고 근심에 잠겨 있던 차에 그 곳에 갇혀있던 요셉이라고 하는 히브리 청년하나가 당신들이 어찌 하여 오늘 근심 빛이 얼굴에 가득합니까? 그리고 묻길래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능히 꿈을 해석 할 자가 없도다. 말했더니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분에 이름을 빙자해서 해석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니 혹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지도 모르니까 한번 나에게 말해 보시옵소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내 친구는 저렇게 저렇게 꿈을 꾸었다고 말했는데 그는 기가 막히게 그 자리에서 즉시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해석하기를 삼일후면 너희 두 사람을 왕이 각각 부르는데 너는 복직을 할 것이고 너는 사형을 당할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삼일 뒤에 정확하게 페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저는 복직시키시고 제 친구는 사형에 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급히 사람을 보내서 옥 속에서 끌어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게 했습니다. 바로에게 들어가게 했더니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구나 제 생각에는 이 애굽에 있는 박사들과 술객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마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추면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엉뚱하게 지어냈을 텐데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른다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이 바로가 요셉을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셉에게 한 꿈을 꾸었는데 그것을 해석 해 보라 들은즉 들으면 능히 푼다고 하더구나!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을 반드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무명하고자 하여도 무명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려고 해도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무명한 사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옥 속에 갇혀 있었고 그것도 시위대장에 뜰에 있는 깊은 감옥 속에 갇혀서 외부와 차단된 속에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요셉이 필요하시니까 하나님이 이 요셉을 때가 되매 드러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갖추어진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감히 자신을 높이려고 하고 그리고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고 자기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모든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일에 언제나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잠시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것도 때문에 노여워하거나 불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표준이 하나님이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잠시 무명한자 같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묻혀서 사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전혀 불쾌하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실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정확히 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은 투로 말하였습니다. 바로에게 이르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옵나이다. 말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을 때나 혹은 감옥에 갇혀서 고통가운데서 죄수들에게 꿈을 해석해 줄 때에나 혹은 왕 앞에 훌륭한 의복을 입고 면도를 하고 그렇게 영광 가운데 왕 앞에 서게 될 때나 그는 언제나 똑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내게 만약에 신령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은혜로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동일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동일한 고백 속에서 사십니까? 고통 받을 때나 평안할 때나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나 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나 동일한 고백 속에서 살아야할 것을 오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에 꾼 꿈을 기도할 테니까 몇 칠 여유를 주십시오. 라고도 말하지 않고 즉석에서 꿈을 듣더니 그 다음에 쭉 꿈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실로 단숨에 그 꿈을 풀고 그리고 바로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곱 암소 살찐 소가 올라온 것이나 실한 이삭 일곱 개가 올라온 것은 모두 앞으로 칠 년 동안에 풍년이 있을 것을 의미하고 파리한 소 일곱이 올라온 것과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이 올라온 것도 칠 년 흉년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켜버린 것은 칠 년 동안 있을 그 풍년을 칠 년 후에 나타날 극한 흉년이 다 삼켜버림으로 말미암아 온 땅에 흉년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고 해 주었던 것입니다. 두 번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으니 돌이킬 수 없고 잠시 후에 일이 속히 이루질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해석 한 후에 그 바로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정책적인 처방까지 내렸습니다. 온 땅을 관리를 두어 관할하고 그리고 일곱 해 풍년동안에 애굽 땅에 있는 오분의 일씩을 매년 거두어서 관리로 하여금 다가올 풍년에 모든 곡식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에 손에 붙이고 그리고 그것을 일곱 해 동안 저장해서 일곱 해 흉년에 예비하면 땅이 흄년을 인하여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에 바로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는 그 모든 신하가 이 모든 일들을 좋게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이 애굽이라고 하는 전통이 있고 큰 나라가 아무리 꿈을 잘 해석했다고 그래도 상장이나 주면 되지 이 사람을 그 애굽인의 전통인의 정서를 무시하고 총리를 삼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이 바로라고 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직책의 이름입니다.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바로라는 명칭은 하나이지만 바로가 누구였는가는 여기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바로가 이 요셉이 갔을 때에 바로에 시대가 애굽의 역사 이집트의 역사에 있어서 소위 중 왕국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나라사람들이 잠시 북방에서 내려온 힉쑤식의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깁니다. 그래서 그 힉쑤식의 민족이 아주 강한 무력과 뛰어난 통치 기술로 말하자면 고위 계층을 장악하면서 그러면서 그 나라를 자기네 지배아래 두게 되는 식민지 시대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힉쑤식계가 바로 이 애굽 사람인 함족계열의 사람이 아니라 말하자면 이 히브리 사람과 같은 족속인 셈족 계열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로 라고 하는 사람은 애굽의 사람이 아니라 애굽에 내려와서 애굽을 통치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과 같은 계열인 셈족 계열의 힉쑤식 민족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비록 애굽에서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러나 함족보다는 이 셈족에게 대해서 말하자면 정서적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피부 색깔도 훨씬 가까웠고 그리고 이 사람이 이런 뛰어난 놀라운 지혜로서 나라를 건져낼 수 있는 그런 계락을 보여주자 이 사람이 즉석에서 총리로 임명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 사람은 바로에게 커다란 기쁨이고 그리고 바로의 신민들에게 있어서 구세주와 같은 그런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이 바로가 잠깐 동안 이 요셉을 만났습니다.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을 해석하는 시간이 몇 분이나 걸렸겠습니까? 잠시 동안만 그 요셉이라고 하는 이제는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고생가운데서 늙어졌을 30세에 결혼하지 아니한 노총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 바로가 요셉에게서 받은 첫 번째 인상이 무엇이었습니까? 요셉은 정말 과연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할 정도로 그렇게 준수하고 예쁘게 생긴 미남 청년이구나 한 마디로 참 잘 빠졌구나! 그것이 이 사람의 첫 번째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인상이었습니까? 야! 너 고생을 참 많이 했구나!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바라보았을 때에 이 바로가 받은 첫 번째 인상은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바로의 눈앞에 서 있는 요셉은 한 사람의 노예의 불과했고 노예의 그 위에 다시 커다란 대역죄를 지은 그 죄인의 멍에가 씌여진 잠시 전까지 죄인이 모여 있던 감옥 속에서 살다가 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수염을 깍지 않고 왕궁에서 제공해주는 새로운 의복만 입지 아니하였더라면 이 사람은 그야말로 몰골이 거지에 방불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람을 만났을 때 바로가 만난 인상은 바로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가 이 요셉을 마주하였을 때 즉각적으로 받은 인상이었다고 하는 말씀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었겠느냐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특별한 일들을 위하여 사용하기로 이미 작정하시고 그 인생의 길을 예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 위하여서 요셉은 팔렸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그 땅 애굽에까지도 천신만고 끝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신령해지기까지 요셉을 통하여 아무 당신의 계획을 행하지 않고 여전히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혹은 감옥의 죄수로 놔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나 그러나 노예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셨으나 그러나 죄수로서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 사람을 애굽의 왕에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총리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있는 모든 왕과 그리고 모든 신하와 모든 신민들이 이 요셉의 말에 굴복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을 통하여 모두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수많은 백성들과 특별히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와 그리고 언약의 백성들을 이 애굽으로 인도하여 보존하는 이 계획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택하시고 그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미 요셉이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 무릎에서 사랑을 받고 형제들에게 질투와 멸시를 받고 그리고 미워함을 받은 그때에 이미 그에게 비전으로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이루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이 요셉을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요셉이 믿음을 지키며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애굽의 총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노예로 그냥 두시는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살았지만 그러나 그를 감옥 속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수 가운데 거하게 만드셨고 하나님께서는 죄수로 살아가는 그 요셉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신의 감동하여 신령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 요셉을 여전히 버려두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감옥 속에서 아무리 간수들을 대신하여 그 옥 속에 있는 제반 사무를 처리하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냥 죽었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까? 착하게 살다간 선한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 생애는 끝나고 창세기에 올라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지난 시간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여쭈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까지 약 9주간에 걸쳐서 우리의 사명에 대해서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셔도 우리가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발락 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발락을 축복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그는 선지자로서 가서는 안 될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긴 칼을 빼들고 다가오기만 하면 발락에 목을 치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서 있었습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와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 장면을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열 때마다 우리도 그 장면을 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불행히도 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도 보는데 이 선지자는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귀를 채찍으로 때리며 왜 안 가냐고 소리를 지르니까 나귀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야 임마! 내가 일평생에 너 가자는 대로 안 간 적이 있느냐 ? 내가 안 갈 때는 안 갈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바보야 눈 좀 똑바로 뜨고 앞 좀 쳐다보아라! 여러분 요셉이 아무리 하나님과 동행하고 유혹을 뿌리치고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고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과 형통하고 자기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을 복을 얻게 하는 그런 복에 근원이 되기까지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가 신령한 사람이 될 때까지 당신의 계획을 고이고이 접어두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고 그리고 아무리 오랜 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살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예수의 미치고 예수쟁이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본문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뛰어나고 성실하고 사람들이 예수의 미친 사람들이고 교회에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여러분들이 신령해지지 않으면 여러분에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실하게 보디발의 한 집 안에서 그 집에 종이 된 것을 숙명처럼 알고 성실하게 섬기다 모든 동료 하인과 주인의 애도를 받으며 무덤으로 들어가는 그렇게 모든 사람의 착한 청지기로 남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령해지고 하늘의 은혜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실로 거룩하고 신령해 지기 전까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살아져 가도 일일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났다가 사라지는 세상에 왜 왔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내가 30년 40년 50년의 세월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남은 생애를 왜 내가 살아야 하는가, 이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생활이 익숙한 사람들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령해서 형통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인생 도대체 무슨 계획이 있길래 나를 만들어 놓으시고 늘 실패하고 이렇게 끌려가듯이 살아가는 나를 오늘도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을 때 하나님은 얘야 세상 사람들은 너를 초라하다고 생각해도 네 인생은 정말 초라해도 네 인생을 향한 내 계획은 화려하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지 우리가 꿈을 가지고 살 것 아닙니다. 아니 그게 무슨 승진이 되어서 월급이 얼마 오르고 그 마지막 꿈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꾸다가 마지막에는 좋은 무덤에서 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느 장의사에 가보니까 참 정신 나간 사람들 많습니다. 수의 한 벌에 230만원짜리입니다. 그 돈 가지고 살았을 때 좀 실컷 입고 다니지 죽어서 땅속에 묻히니까 그게 무슨 돈 많던 사람들이 평소에 못하던 효도를 한 풀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관을 뭐 몇 백만원짜리를 쓰고 그래가지고 뭐합니까? 그래가지고 썩기는 마찬가지인데. 여러분 요셉을 보십시오. 그 요셉이 신령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끊김)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에게 부탁을 합니다. 여러분 신령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통한 사람이 되어서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통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오묘한 인생의 관한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보이는 인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교회 안에 섬기시는 분들 중에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 등등 이런 중직들이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교회는 핸들 망가진 자동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회자라도 신령해서 목회자가 끌고 가면 되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또 목회자 하는데로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그 핸들 내가 돌려야 된다고 또 우격다짐을 한다는 이야기죠. 그러게 나사 빠진 핸들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수결을 해서 교회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 나는 어느 교회 가든지 하튼 설교하러 가면 이 이야기 꼭 합니다. 장로님들 교회에서 장로님들을 세우는 원리를 신령한 사람, 영통한 사람들 속에 육에 속해서 전혀 신앙의 비밀이 없는 사람들 돈 있고 오래 나왔다고 그래가지고 직분 맡겨줘서 교회가 이리 처박히고 저리 처박히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셉은 신령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럼 요셉이 어떻게 되었느냐? 쉽게 이야기하면 말입니다. 요셉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37장의 요셉을 어린 그 요셉을 보면서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이 어떻게 형이 잘못하면 아버지에게 조르르 가서 고자질하고 그러냐는 말입니다.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14년 가까이 흐른 어느 날 그는 신령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바로 1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깎이고 다듬어 지면서 신령한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뭔가를 갖다가 확 부어 주셔서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놀고 있던 어느 한 사람을 불러서 확 부어주셔서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안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어느 날 바로와 모든 사람의 눈앞에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비쳤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 그의 인격에 그에 영성에 특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4년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려 깎여진 이 신앙생활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 손에 의해서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그 보디발의 집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노예 살이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 살이를 하는 가운데서 그는 많은 세월을 보내며 말할 수 없는 상한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밤마다 두고 온 고향과 자기를 팔아 버린 야속한 형들을 원망하거나 혹은 그리운 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깎여 나가는 모진 고통 속에서도 이튿날 해가 뜨고 나면 변함이 없는 어제와 같은 환경에 놓여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인생의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였으니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고 앙망하고 사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 요셉은 이 애굽의 땅에서 철저히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오랜 세월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리고 모든 악을 미워하며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유혹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자신을 유혹하는 모든 세상의 유혹의 세력들을 꺾고 물리 쳤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기 위해서 모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부요 할 때나 고난을 받을 때나 형통 할 때나 불통 할 때나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을 때 나 수많은 상전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나 언제나 요셉은 신앙을 이 세상에 걸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순간 순간 믿음을 택하고 세상을 버리는 길은 뼈를 깎아 내는 아픔이었고 피를 짜는 고통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희생이 없이 어떻게 될 수 있게 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고난과의 싸움이고 자기 절망과의 싸움이고 그리고 시련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인생의 계획 속에서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오랜 세월 고난이 가져다준 연단이었습니다. 고난을 핑계하고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고난의 길을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했던 그런 각오 속에 하나님은 이방의 땅에서 외롭게 섬기며 외롭게 살았습니다. 누구도 말벗이 없었습니다. 오늘 기도하고 은혜를 받아도 내일 아침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형제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있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동일한 고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든지 나와서 심령을 털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동일하게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 세상을 이기고 요셉처럼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성전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요셉보다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입니까? 여러분 이 축복에 대해서 감사해 본적 있습니까? 여러분 이 축복에 대해서 가슴 깊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과분한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와 특권들을 내가 감당하기에 쉽지 안 다는 그런 도전을 받아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이런 특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의 땅에서 시련을 이기고 유혹과 싸웠습니다. 절망과 정욕을 누르고 하나님의 자녀의 (?) 이것 하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신령한 (녹음상태 좋지 않음)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깎이고 다듬어져 고난을 받은 이유 때문에 내가 신령해 진 것이 아니라 고난가운데 하나님과 (여기에서 끊김- 홍보실에 문의했으나 음성파일 복원 불가)
5.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사람 요셉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5-8上)
요셉시리즈 (1995.9.10 주일오전 5)
오늘 이 45장은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즉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을 때에 이제 애굽뿐만 아니라 온 가나안 지경에까지 흉년이 깊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 야곱의 집안도 곡식이 없어서 이년 흉년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애굽에 곡식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요셉이 예언 한 대로 칠 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에 그 곡식을 다른 나라에서는 다 먹고 치우고 썼지만 이 나라에서는 철저히 이 곡식들을 쌓아서 준비했습니다. 오분의 일씩 걷어 들였다고 하니까 그 칠 년 동안에 쌓아둔 곡식이 약 일년 치가 넘고 일년 반 동안 수확할 수 있는 양의 곡식을 쌓아두었던 것입니다. 쌓아두고 나니까 온 인근 나라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애굽에 와서 이 곡식을 달라고 손을 벌리게 되었는데 그 중에 야곱의 집안의 식구들이 들어 있게 되었습니다.
몇 번 오고 가는 일이 있고 나서 결국 이 마지막 장면 이년 후에 그 야곱의 집안에서 이 요셉이 그렇게 사랑하던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난 베냐민 까지 만나게 되어서 가나안에 있던 모든 12형제들이 실로 오랜 세월 만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 적어도 약 15년 정도 후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모두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물리치고 모든 사람들이 물러간 다음에 그 형제들에게 자기가 바로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방성대곡 하였다는 이야기 끝에 오늘 읽은 성경본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곡식을 얻기 위해서 모인 형들 앞에서 방성대곡 하면서 큰 소리로 눈물을 흘릴 때 여러분 그 요셉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꿈이 이루어져서 해와 달과 열한 별과 형들의 곡식 단들이 절하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기쁘지만 그러나 그렇게 엎드려서 자기에게 절하는 그 형들을 바라보면서 반면의 자신이 이 애굽에서 약 15년 이상 살아온 그 끔직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의 모든 때가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역경과 시련의 모든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이 요셉은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정을 그리고 설움과 슬픔과 기쁨과 이런 것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어떻게 누 룰 수가 없어서 엎드려서 방성대곡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요셉이 하나님 앞에 방성대곡하고 형들 앞에 울고불고 하게 되었을 때에 반면에 얼굴이 거의 초죽음이 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사람들은 바로 베냐민을 제외하고 그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파는 일에 동참했던 그 모든 형들은 말하자면 사색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들이 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 팔아서 형들은 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금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직감적으로 깨달은 사실은 자기네가 판 그 요셉이 얼마나 커다란 고생과 시련과 아픔 속에서 이 국무총리가 되었을까 하는 것은 뻔 한 것 아닙니까? 팔려 갈 때는 분명히 노예로 팔려갔는데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어서 이 사람이 바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지금은 자신들의 생명을 손안에 쥐고 있는 그런 전능한 바로의 아비로서 자신 들 앞에 서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범죄한 자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눌림이 있고 고통과 부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형들을 일으켜 세우며 하는 말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요셉도 이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얼마나 커다란 보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요셉은 형들을 진정 시켰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마옵소서. 여러분 어떻게 해서 이 요셉이 이렇게 기가 막히게 형들이 자기를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았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근심하고 보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요셉에게 있어서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들이 팔았어도 자기가 팔림을 당한 이 요셉이 형들이 자기를 판 사건이 마음에 둘만한 사건이 아니었다면 형들이 자기를 팔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마음에 자유가 없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리가 없습니다. 이 사건 곧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판 이 사건은 이 요셉에 형들에게 있어서만 큰 사건이 아니라 팔림을 당한 이 요셉에게 있어서도 엄청나게 커다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아마 이 요셉은 형들로부터 팔림을 받았을 때에 끌려가면서 그는 복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이 자기를 판 이 사실이 그 에게는 한없는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 사람이 애굽에서 신앙이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기 전까지 그는 이 형들로부터 팔림을 당해서 고난을 당할 적마다 자기를 이 처지에 몰아넣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의 제공자가였던 형들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요셉은 이제 그 모든 형들이 자기를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가운데 형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격려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군가로부터 커다란 고통을 당한 사람도 자유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받고 그것을 잊지 못하고 복수해야 되겠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자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요셉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을 만났을 때에 방성대곡 하며 울며 지난날을 생각했습니다. 만 이미 이 요셉의 마음속에서 형들을 책망하고자 하는 그 모든 미움의 마음은 사라 졌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형들이 와서 이 요셉을 위로하거나 요셉에게 자신들이 잘못 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요셉이 형들을 징벌하거나 보복을 할 마음을 모두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로 말미암아 그 끔직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거치며 언어도 통하지 않는 애굽의 땅에서 노예로 그리고 종으로 심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형들이 자기 앞에 나아와서 자기가 이제 그 형들을 능히 벌할 수 있는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형들을 위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 놀라운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요셉의 지난날의 뼈아픈 상처와 형들로부터 받은 그 끔직한 고난을 치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요셉이 이렇게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허물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요셉의 시야가 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생의 시야를 바라보는 요셉의 신앙의 변화가 왔던 것입니다. 이제는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꿈꾸고 형들이 자기에게 경배하는 위대한 꿈을 꾸었습니다만 그러나 형들로부터 웅덩이에 집어넣어지고 올라 올래야 올라올 수 없고 그 웅덩이에 깊이 갇혀 있어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울부짖을 때에도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꿈꾸는 그 꿈 때문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형들이 자기를 끌어내어서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고 자기를 판돈을 서로 나누어 갖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밧줄에 묶여 노예로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상품이 되어 끌려가고 있을 그 때에 요셉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만약에 요셉에게 네가 왜 이렇게 불행한 처지로 비참하게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품이 되어서 노예로 부모로부터 멀어지며 끌려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요셉이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형들이 나를 팔았으므로 오늘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오늘 여기에 나온 말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이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형들이 팔았기 때문에 나는 이스마엘 상인의 상품이 되었고 그리고 보디발의 집 애굽 사람의 집에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자기 고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다 준 사람,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 준 사람 이 요셉 그에 형들을 향해서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흐느껴 울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그 두려움에 가득 찬 마음을 위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요셉은 그때에 아버지에 사랑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에게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사랑이 있고 그리고 또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형들이 자기를 구덩이에 집어던지는 그 순간 그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과 그리고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뼈저린 상처와 고통 투성이에 일찍이 경험해 본적이 없는 인생의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5년이 넘는 동안 살아오는 동안 거기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습니다. 자기에 형제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형들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이 그는 낯선 땅에서 시련과 고통을 벗 삼으며 한 많은 세월을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요셉은 적어도 자기의 인생을 13년 가까이 완전한 수렁 속에 집어넣었던 그 형들 앞에서 오히려 범죄 했던 그 형들을 위로하며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던 이 요셉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까?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뀌되 그는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인도를 따라 왔다고 하는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요셉은 말합니다. 형들은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섭리를 보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애굽에서 깨닫기 전에는 형들이 자기를 팔았다고 생각을 했고 히브리인이 어찌하여 이 애굽의 땅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물으면 그는 형들이 팔았기 때문이 이곳에 왔습니다. 누가 너를 보냈느냐? 형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이곳에 보냈습니다. 이것이 섭리를 모르던 때에 그에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그는 시련과 역경을 만나면서 그 속에서 거룩해지고 그리고 지난주간에 말씀을 들었던 바와 같이 거룩함을 넘어서서 그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신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섭리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들은 나를 팔았으나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렇게 초라하게 시작해서 위대하게 드러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 하게 드러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안개가 가득히 쌓인 어두움의 길을 들어서는 것 같이 앞을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그리고 그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어두움은 물러가고 안개는 걷히고 선명한 하나님의 태양 빛이 떠올라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모든 사물들과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형들에게 팔렸을 때에 그는 인생의 캄캄한 어두움이었습니다. 자기가 왜 이 형들에게 팔려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자기를 그렇게 팔려가도록 내버려두시는지 그리고 자기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그 모든 안개가 걷히게 되자 하나님이 형들을 통해 나를 이곳으로 보냈으니 형들을 나를 팔았고 형들은 나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사실은 그 형 들을 하나님이 붙잡으심으로 그들은 결국 나의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게 하는 도구 밖에는 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 인생을 섭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섭리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처음 시작은 미약하고 처음 시작은 희미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고 대낮 과 같이 밝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셉이 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오늘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입니다.
무엇입니까? 요셉은 비록 불행한 상황에 떨어져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가 없고 형들이 자기를 판 것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어 지만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이 요셉은 형들이 왜 자기를 팔아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를 버려두셔야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를 온전히 깨닫고 안개와 같이 희미하던 인생의 길이 정오의 대낮과 같이 밝히 드러나는 섭리에 대한 인식으로 이르기까지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이 무엇이었습니까? 시련 속에서 자기가 왜 이렇게 남이 없는 불행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오직 믿음 하나로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받는 유혹을 거절하며 믿음을 지킨 대가로 그 뜰의 옥에 갇혔을 그 때에도 그는 오직 신앙하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으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동안을 수많은 세월 전에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원망 받을 만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 고통을 속으로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기필코 말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의 눈으로 여러분들의 시야를 바꾸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후에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이곳에 팔았고 당신들은 나를 해 하려 하였으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의 시야인 것입니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방법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목적도 믿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 이었습니까? 오늘 이 요셉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를 애굽의 국무총리 만드는데 있다고 믿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에 지위를 높이는데 있다고 믿지를 안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이렇게 지위가 높아지고 애굽에서 바로의 아비가 된 이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커다란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를 커다란 사람으로 만드셔야 했습니다. 이 요셉이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바가 그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으나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보내셔서 이처럼 바로의 아비 애굽의 총리로 삼으신 그 이유는 나로 하여금 부귀와 권세와 영화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그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요셉이 이전에 형들로부터 팔리 움을 받았을 때에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지내며 남모르는 눈물을 머금고 어두운 수많은 세월을 쓴 뿌리를 삼키듯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아픔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오히려 자기 형들을 위로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옛날에 받았던 그 가슴 아픈 상처와 시련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까? 애굽의 부였습니까? 높아진 애굽에서의 지위였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애굽에서 누리는 요셉의 명예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요셉의 마음이 모두 잊어버려지고 그리고 옛 상처를 씻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도 말하기를 결혼한 후에 아기를 낳아놓은 다음에 므낫세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게 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국무총리가 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에 죽음과 절망의 위기가운데 한 피 받은 형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리고 맹수들이 달려올지도 모르는 광야의 구덩이 속에 쳐 넣고 결국은 목 놓아 울며 살려달라고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밧줄에 묶어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고 그 돈을 나누는 형들의 모습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상처는 깊이 박혔고 그 상처는 생각할수록 요셉의 마음에 남모르는 슬픔에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놀라운 부도 그런 놀라운 영광도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미워하던 원수들이 무릎을 꿇고 자기를 주인이라고 부르고 노예로 삼아달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그 옛날의 상처를 씻게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당하거나 안고 태어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항거 할 수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자기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불행한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자기의 힘으로 저항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불행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 고통의 원인이 제거된 뒤에도 상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애굽에서의 부와 값진 명예가 옛날의 그 어린 시절에 당하여야 했던 그 고통을 씻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오늘 이 형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용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이 놀라운 그 힘은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형통한 부와 명예와 애굽의 총리에 올랐다는 권세가 이 사람을 자유케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섭리를 이루시고 그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고난과 역경이 필수 불가결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자 사람들을 향한 미움도 사라지고 상처도 사라져서 오히려 그 형제들뿐만 아니라 자기의 원수와 같은 형제들의 후손까지도 돌보겠노라고 끌어안은 포용과 사랑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큰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의 바다에서 우리 인생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믿음만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도전하는 악한 세력들의 그 참소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그림처럼 떠올라서 본 것으로 착각하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만 비단은 짜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비단은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그 비단이야말로 전부 손으로 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단이 손으로 짜든 기계에서 짜든 그 기가 막히는 것은 수많은 빨간 실 파란 실 혹은 금실 은실 집어넣어서 이제 비단을 짜는데 비단을 짤 때 그 틀 위에 올라와 있는 그 비단은 뒤집어서 짜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뒤집어서 짜지는 그 모습이 우리가 덮고 자는 비단 이불을 뒤집어 보면 참 볼상 사납지 않습니까? 그러한 이불처럼 쭉 짜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늬도 없고 계획도 없고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실밥이며 그 다음에 줄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올이 나간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무늬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무질서가 그 직조되고 있는 비단 위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누워서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거기에는 학이 그려지고 학이 다 새겨지는가 하면 흘러가는 물이 있고 사슴이 있고 그리고 글자가 새겨져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섭리 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섭리의 눈은 바로 그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바라 볼 때에 그 섭리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섭리가 보이면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을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섭리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못 바라보니까 찬송하며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의 불만족과 고통과 실현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상처를 남기고 고통을 주며 고통을 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원천이 되는 그런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도 몇 년 전서부터 배가 나와서 늘 걱정입니다. 만 운동을 할 시간이 참 없습니다. 요번에도 의사가 한 5kg정도라도 급한 대로 우선 좀 빼보십시오. 그런데 그게 아마 쉽지 안다는 것이 배 나오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의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한 120kg 정도 나갔다고 하니까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이 120kg 정도 나갔으니까 고민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 고민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체질이 뭐냐면 아무리 안 먹고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살찔 운명처럼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모든지 스트레스입니다. 먹을 것을 봐도 스트레스 길거리를 가다가 자기처럼 뚱뚱한 여자를 봐도 스트레스입니다. 그것이 내 모습 같으니까 날씬한 여자를 봐도 또 스트레스 그렇게 고통을 받는데 이 사람이 크리스찬인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에 몰두 하다가 하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다음에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살찌는 것이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자기 주위에 눈을 뜨고 보니까 자기처럼 불가학력 적으로 살찐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뚱뚱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뚱뚱해서 이생의 그 고통을 받으면서 그 삶의 회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인생들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내 중심을 보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 주고 이 사람은 졸지에 백만장자가 되는 인기 잡지의 발행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의 불행을 어떤 시야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리 때문에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다른 사람들도 한꺼번에 더 불행해 질 수도 있고 어떻게 인생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한없이 내가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나 때문에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 나보다 행복한 사람들에게 줄 수 없었던 그 행복을 그 들보다 더 불행한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복을 주시는 도구로 삼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인생에 섭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섭리의 시각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이렇게 섭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애굽에서의 실현과 역경을 통해서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과 선하심을 믿으며 이해 할 수 없는 현실을 믿음으로 이해하기를 원하면서 매 순간 살아가는 하나님의 앞에서의 이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요셉은 신령한 사람이 되었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변화되었습니다.
가슴속에 맺힌 그 수많은 한 이 변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수많은 원망과 고통이 변하여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찬송에 제목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요셉이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없는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고 하나님의 섭리를 붙들면서 살수 없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으며 자기의 인생을 보이는 세상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소망을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승리케 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에게 두며 살았을 그는 이와 같이 섭리의 눈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고 그야말로 소망이 없는 애굽의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인생을 사시기를 요셉과 같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 애굽과 같이 죄 많은 땅에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6. 본향을 사모한 사람 요셉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 50:22-26)
오늘 읽은 성경과 지난주에 읽은 성경사이 에서는 이미 벌써 7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일이 오늘 일입니다. 야곱도 아마 나이 많은 형들도 죽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110년을 살았으니까 조상들 보다 많이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10년 동안을 살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자손 삼 대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요셉이 마지막 죽을 때에 유언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장면이고 또 죽은 다음에 입관하는 장면으로서 창세기 전체는 끝을 맺고 출애굽기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류 창조의 역사를 기록하신 이 창세기에 마지막을 요셉의 죽음의 기사로 맺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으로 애굽에서 출애굽 하여 가나안땅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배경을 그리고 있는 출애굽기 바로 일장 바로 앞에 이 요셉의 죽음을 놓았는가 우리는 잠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2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에서는 아브라함 이전까지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시작을 해서 아브라함서부터 이제 요셉의 이런 역사를 기록하는 데 이것이 전체 창세기의 80%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철저하게 한 가정의 역사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그 가정의 역사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중심으로 한 이 집안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만 천하에 드러낼 영광스런 당신의 백성들을 그 민족을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창세기에 대부분을 이 사람의 역사를 기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애굽의 국무총리로서 7년의 흉년에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지혜로 말미암아 그 모든 애굽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온 땅을 구했습니다. 틀림없이 칠 년 동안에 비축한 그 양식을 가지고 7년 동안 온 땅에 조금씩 나누어 줄 때에 성경은 말하기를 많은 땅에 사람들이 자신의 땅과 짐승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노예로 바로에게 드리면서 양식을 얻어 갔습니다. 7년의 흉년이 다 끝났을 때에는 이마 상대적으로 바로의 땅은 어마어마한 넓이가 되었을 것이고 양식하나를 가지고 7년 동안 온 세상을 손에 넣었던 그 바로의 권세는 드디어 7년 흉년이 끝난 후에 온 천하를 다스리고 평정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룬 주역이 바로 하나님이 쓰시던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전설과 같은 풍년과 또 전설과 같은 이 흉년을 거치면서 이 애굽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이 요셉은 잊을 수 없는 나라의 구원자요 민족의 구세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노년에 이런 순간까지 요셉은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야곱이 죽으면서 예언했던 바와 같이 그는 샘 곁에서 솟아난 무성한 가지와 같아서 그 곳에 있는 동안에 70여명이 넘는 그런 가족들 아버지가 데리고 온 가족들을 맞이했고 또 그들은 그렇게 놀라운 은혜로서 애굽에서 계속 번성해 나가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요셉이 마지막에 남긴 이 유언과 죽는 장면을 통해서 이 애굽의 땅에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누려보지 못한 부귀와 권세와 영화를 한 손안에 넣고 하나님께로부터 또한 높임을 받아서 온 천하에 뛰어난 바로의 아비가 되었던 이 사람의 맘속에 있었던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또한 이 요셉과 같이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받은 집어 줄 수 없는 귀한 비전과 그리고 성도의 마지막 소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서 110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조상의 세월의 미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130세에 바로 앞에 서고도 이 야곱이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던 것과 같이 요셉도 또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요셉의 생애는 달랐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야곱과 같이 험악한 생애를 보냈지만 은 그러나 그 험악한 생애는 자신을 깎고 다듬는 생애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기간을 자기의 아집과 고집을 꺽는 그러한 성화의 기간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기간을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썼다는 점에서 야곱의 인생과 요셉의 인생은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형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그 편애의 그늘에서 형들에게 불평하는 언사를 하고 또 그 형들을 아버지와 관계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보다는 흐트려 놓는 그러한 인격적인 결함을 갖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며 끌려오던 그 피눈물 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오직 신앙 하나로 살고 말씀 하나로 거룩해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바로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서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인생들은 철저하게 자기의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요셉의 인생은 참 빛나는 믿음의 사람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도 죽고 또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도 죽습니다. 신앙으로 살던 사람도 죽고 그렇지 못하던 사람도 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요셉이 죽을 때에 형제에게 남긴 말이 우리에게 신앙의 마지막 이정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마지막 죽으면서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 속에서 이 요셉의 자손들을 향한 간절한 소원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요셉이 마지막 죽으면서 사랑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남겼던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공고하시기를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는 휼륭한 재산과 많은 유산을 에브라임과 므나세에게 남겨 주고 그리고 애굽에서 누렸던 많은 영화와 권세를 남기고 그것들을 이 자손들이 향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총애를 받던 그 시절로부터 애굽의 집안에서 바로의 노예가 되어서 고생하고 마지막에는 대역죄로 몰려서 감옥살이를 하던 때로부터 시작을 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인생의 높고 낮은 굴곡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마지막에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깨닫는 바는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과 존귀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는 것이야말로 너희의 최대의 유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권고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권면 한다는 뜻이 아니라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너희를 찾아오시기를 원한다. 이 말을 했을 때 요셉은 자기의 그 비참한 노예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비천한 노예로 자기의 형들은 자신을 팔았지만 은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 오셨기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서 평생 형들을 원망하며 한을 품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을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고 그리고 애굽의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사람으로 삼으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이 계획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을 이 요셉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한 생애를 마감하고 이제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면서 그는 말 할 수 없는 감화에 젖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팔려서 애굽 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참한 노예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마지막에 모든 형들로부터 받았던 그 악을 선으로 바꾸시사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으시는 이 다이나믹한 인생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는 생애 전체가 모험과 도전에 연속이었습니다. 앞길을 바라볼 수 없는 그런 망망할 때도 너무도 많았지만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절망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노래하지 안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해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밋밋한 인생은 시시한 인생입니다. 누가 어느 비문에다가 그렇게 썼다고 합니다. 아무개가 언제 태어났다. 아무 변화 없이 먹고 마시다가 때가 되며 죽었도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잘 먹고 좋은 걸 입고 죽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인생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상가집에 가서 일금 4백 만원자리 수의를 입고 누워 있는 시신을 고인을 부러워 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역사 해 주시고 하나님이 권고하실 때에 요셉의 인생은 실로 다이나믹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이생은 실로 다이나믹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가 하면 푸른 풀밭을 거닐고 노예로 착고에 채워서 감옥에서 비참하게 기어다닐 때가 있는가 하면 훌륭한 고관 대작의 옷을 입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는데 기가 막히게 쓰여졌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놀랍게 축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만약에 그 축복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다 죽었다는 것이 다 라면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요셉이 이러한 생애를 지나면서 고난을 받을 때도 고난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루었고 다이나믹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존귀하게 되었을 때도 그 존귀한 것은 요셉 한 사람이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써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빈 한데 처할 때나 부한데 처할 때나 언제나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고 그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죄수로 있을 때에도 그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부요할 때도 그의 인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도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아버지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부귀와 영광을 부러워했지만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부귀와 영광을 통해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권고 해 주시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의 대치할 수 없는 유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사랑하는 손자들아 너희가 이 애굽에서 나와 같은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누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권고 하셨던 그 하나님이 너희도 권고하시면 너희도 또한 나와 같은 인생을 살리라! 여러분 가장 훌륭한 유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을 유업으로 물려주시려고 합니까? 여러분 한 주먹 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의 권세와 그리고 죽어지면 진흙과 같이 섞어질 인간의 육체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와 함께 하는 여호와만을 자랑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권고하시는 이 기업이야말로 우리가 후손들을 위해 간구 하지 않을 수 없는 기업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요셉은 마지막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결국은 이곳에서 하나님이 인도해 내어 우리조상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 사실하나 이 유언하나를 통해서 이 영화로운 부족할 것이 없는 애굽에서의 이 놀라운 권세를 누리면서 살았던 그 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엇을 꿈꾸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부요한 애굽의 땅을 누리며 그 곳에서 온갖 권세를 누리며 살았지 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있는 가나안 땅을 더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는 재물을 누리면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 만 그러나 그는 이곳은 영원히 머물 땅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죄 많은 이 애굽 이 세상에서 수많은 권세가 애굽에 있다고 하더라도 기름진 땅이 내 앞에 있고 내게 준 공력이 수 없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은 다 두고 가야 되는 것이고 내게 주신 기업이 바로 있으니 그것은 내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나안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한 10여 년 전에 한국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삼 세대 전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동남아에 흩어져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그 장면들을 영화한 그런 기록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에 노인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 이 말이었습니다. 내 고향에 내 뼈를 묻어다오. 그것이 유언이었습니다. 요셉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 될 수 없는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놀라운 축복을 애굽에서 모두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권세는 과히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지막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도 하나님이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니와 하나님이 너희를 가나안땅으로 가게 하실 때에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로부터 내어 그 가나안땅으로 옮겨다 묻어 주겠다고 말하라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손들에게 약속을 시켰던 것입니다. 서약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족장의 소망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에 때로는 어두움 속에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밝은 햇빛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잠시 하나님의 손을 놓고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갈급해 지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의 능력으로 사는 때도 있고 때로는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 얻어맞고 책망을 받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어떤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나든지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기업이 아닌 것입니다.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보다 안전하고 영원한 기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완전하고 영원한 기업, 이 세상에서의 영광과 권세는 사라지고 썩어 지지만 그러나 그곳에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언제나 있어서 마르지 아니하는 샘물 속에서 우리가 목을 축이고 어둡고 험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드러내 보여주며 살아가게 만드는 참된 힘과 그리고 생명과 은혜의 원천이 우리 앞에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족장은 이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마무리 많은 것을 누려도 그것은 자기의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기업이 따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 인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아무도 그 부르심에 거역할 수 없이 대꾸 할 수 없이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의 인생의 계획이 무엇이고 우리의 마지막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한 우리의 계획이 무엇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애쓰고 수고하던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주께서 부르실 그때에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백년 가까운 요셉의 모든 생활은 철저하게 이 미래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영원한 기업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그 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살아간 생애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자기의 진정한 소망 애굽 사람들 속에 살았기 때문에 함부로 우리는 언젠가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될 사람들이다. 담대히 그는 말 할 수 없었지만 가슴속으로 속으로 간직하며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그 약속들 조상에게 나타나셔서 땅을 주셔서 거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으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리라고 라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붙들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런 신앙이 요셉으로 하여금 이 험한 애굽의 땅에서 승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받을 때도 위기를 만날 때나 그는 현실을 바라보고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형통하거나 금 마차를 타고 다닐 때나 은 수레를 타고 다닐 때나 그는 이 세상에 부귀와 영광 때문에 이곳에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빈 한데 처 할 때나 어려움 가운데 처 할 때나 그의 관심은 사명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애굽의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주시는 기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거기에서 그 땅을 얻기 위해 어떤 고난을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위해 준비 하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그 기업임으로 자신들의 후손은 반드시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런 삶을 누리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가나안의 날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며 이전에 조상들로부터 받은 그 유전을 기억하면서 그 고향에서 살았던 모든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요셉에게 있어서 육신의 고향 그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왜냐 하면 거기는 하나님의 약속이 길들어있는 땅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이고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아니한 그런 본향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특권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하여 믿음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을 굳게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소망하며 그 성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낙심된 일을 만날 때에도 영원한 세상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완전한 기업 속에 있는 안식과 축복을 바라보며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요 할 때도 너무나 많이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요셉은 금수레와 은마차를 타고 다녔지 만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신이 영원히 돌아가야 할 그 본향을 더욱더 사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아무나 그 집안사람들이 물어보았을 때 나는 이곳에 우거한 나그네로라 말하였습니다. 많은 재산과 주께서 축복하신 수많은 소유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땅에서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나그네로라 자칭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유리하고 나그네 와 같이 대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이 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그들은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들이 한 본향을 찾는 사람들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종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신앙은 영혼과 영혼의 틈바구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순간까지 우리가 소유하고 후에 만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미리 느끼며 그 하나님 때문에 이 어둡고 험악하고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넘어지지 안고 승리하며 걸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하나님 앞에 기도 합시다. 진실로 죄 많은 세상에 우리의 소망을 두지 말고 요셉이 애굽에서도 끊임없이 가나안땅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보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성도의 영원한 기업인 천국을 그리워하며 주님과 함께 맘껏 동행해서 이 세상에서 주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거나 가난하게 하실 때나 형통케 하실 때나 위기를 만나게 하실 때나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 시리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