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여인같이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1월 20일 - 2월 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우물가의 여인같이(요4:13-15) 1995.1.20 새해말씀 사경회 1
2.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16-20) 1995.1.22 주일오전 15
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1-24) 1995.1.29 주일오전 24
4. 메시아가 오실줄을 내가 아노니(요4:25-26) 1995.2.5 주일오전 30
1. 우물가의 여인 같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3-15)
이 요한복음 4장은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알던 한 사건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게 있습니다. 성경이 쓸데없는 것을 많은 부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무엇인가 긴 부분을 할애하면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을 때에는 때로 우리가 기울여야 할 메시지가 들어있고 가치가 있는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물가의 여인 같이 (1995.1.20 새해말씀사경회 1)
이 사건은 우리들이 알다시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에 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는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의 삼등분 되어있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별 볼일 없는 동네로 소문이 났고 사마리아는 부패하고 패역한 동네로 소문이 났고 유대만 알짜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팽배하던 때였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는 촌동네였고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사마리아는 북 왕국의 이스라엘 땅인데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앗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앗수르의 기본적인 정책이 국제화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치명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면 사민 정책을 쓴 것입니다. 본토에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사를 보내고 또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그곳으로 심어서 혼혈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들과 결혼을 해서 태어난 혼혈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사마리아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결국은 그 후 140년 후에 남 왕국 유다도 멸망을 하게 됩니다. 남 왕국 유다가 멸망을 한 다음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의 지배를 받다가 정권이 로마에 이동하면서 그러면서 신약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 시기에 바사왕(페르시아) 고레스가 제국을 지배한 다음 쓴 정책이 유화 정책인데 그 수단으로 종교를 존중해주고 결국은 이스라엘에게도 이 정책이 적용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설하기를 위한 사람은 고향으로 보내주고 물자도 대어주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로 인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감격이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주께서 바벨론 포로들을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고 우리는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녕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히는 것은 고통입니다. 탄식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제가 군대를 들어갔을 때에는 주일은 제대로 가는데 수요일 같은 날은 못 갈 때가 많았습니다. 한 주를 거른 다음 주일날 밤에 줄을 서서 막사 같은 군의 교회에 가서 한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로부터 단절된 가운데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그 일들이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런 감격을 누릴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성전의 짓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 하였을 것입니다. 돈이고 물질이고 어떠하든지 동참하고 싶어 하였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율법상 품어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성전을 짓고 모세 5경만 붙들고 이것만 성경이라고 하고 그것을 경전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들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에서 갈릴리 갈려면 빙빙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그 땅을 밟기만 하여도 부정을 탄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땅을 예수님께서는 직통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체가 굉장히 복음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는 더러운 땅이 없고 불결한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땅이 있고 불결한 땅이 있다면 그 곳이야말로 정말로 주님을 필요로 하는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더욱 이 세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소망이 없는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소망이 없고 비참하고 죄에 눌려있고 가득 찬 사람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 대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온전한 생각일 수 없습니다. 예수 앞에 나아가기에 너무나 무거운 죄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시면서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시다가 이제 너무 피곤하고 지치셔서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12시쯤 된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빵이라도 사러 내려갔는데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유대 관습으로는 이렇게 한낮에 물을 긷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침과 밤에 보통 물을 길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낮에 물을 길러 나오는 볼 때 이 여자는 사람들하고 마주치기 싫은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을 5명이나 거느렸던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하고 마주치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오면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다가도 조용해지고 서로 수군수군 거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고 아예 점심때 아무도 없을 때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 오려고 왔는데 우물곁에 유대인 선생이 한 명 앉아 있는데 풍채가 종교지도자입니다. 선지자나 아주 훌륭한 랍비같이 생긴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상관하지 않고 물을 긷고 있는데 이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요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행로의 왜 우물가에 앉아 있습니까? 전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곤해서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고 있는데 보니까 인생 막차 탄 여자가 물동이 이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보는 순간 예수님은 고단한 생각이 지나가고 물 좀 달라고 하는 것은 물을 드시고 싶으셔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과 교제하기 위해서 물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접근하시는 방법이 예수님은 굉장히 인격적입니다. 때로는 선지자처럼 당신 이렇게 살면 죽는다고 소리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예수님의 방법도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발견하면서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사건입니다. 바닷가에서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겠느냐하면서 고기를 잡으러 제자들은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났습니다. 고기를 잡다가 주님을 발견하고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께 어떻게 못할 짓을 하였는지는 잊어버리고 예수님 앞에 뛰어오다가 예수님 앞에 서니까 자신이 한 행동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를 하면서 부인을 하였는데 생각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이렇게 서있으니까 다른 제자들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쭈삣주삣 서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너희 물고기 잡은 것 좀 있냐고 물으시니까 용기가 나서 제자들은 더 다가오고 이제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나 믿어라 이이야기가 하고 싶으셨는데 상당히 인격적인 접촉으로 나아갔습니다.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적인 방법으로 접근을 하여서 결론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다가오니까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보니 당신은 유대인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여인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시면서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을 전하는 관건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과 함께 인격적인 접근입니다. 예수 전하다가 싸움하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여자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면서 마지막에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사람을 다루실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이 한 단계 높이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달라고 한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그에게 물을 달라고 구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목적이 목을 축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로 시작해서 생수로 가고 그러다가 본질적인 인생의 문제로 가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서 그 여자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이 목표를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떡 사러간 제자들이 물을 가져오지 않았겠습니까? 우물이 학자들에 의하면 30미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줄을 내려서 물을 길어 올려서 그것도 여인의 힘으로 하는데 그것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달라고 한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생수를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하는 말이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떻게 물을 길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생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여야겠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물론 되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수가 의미한 이차적인 뜻입니다. 일차적인 뜻은 유대인의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생수는 시편에 나오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르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수는 살아있는 물이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이라는 의미입니다. 42편에 나오는 그 시냇물과 완전히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42편의 시냇물을 성령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억지로 신약에 있는 이야기를 구약에 집어넣는 것이 됩니다. 유대인의 맥락에서 구약의 배경의 조명을 받은 이 생수라는 단어를 해석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 하나님의 임재, 기쁨,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생생하게 교제와 은혜 느끼게 하고 임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이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공부하고 배우면서 그것이 깊이 신령하게 체험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매개체로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때에는 요나하면 은혜를 받았다, 사명을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도망갔다, 그러나 회개 했다, 돌아왔다, 다시 니느웨로 갔다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면 설교자가 2700년 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풍랑에서 허덕이는 모습에서 고통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를 받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령한 은혜의 모든 사건들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생수라고 하는 말을 그런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목이 너무 말라서 그 때 생각나는 것은 단지 물, 탁하지 않고 맑게 흐르는 그런 생각만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것을 생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갈증과 곤고함 속에서 그 고통을 그치게 하고 해갈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1차적으로 성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재, 생생한 생명, 그런데 그것을 누가 주시냐면 성령님을 통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서 물을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물이 이렇게 깊은데 어떻게 길어서 줄 수가 있겠느냐 당신이 도사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러니까 적어도 천 몇 백 년을 지내온 우물이고 짐승들이 먹었는데 당신은 아무런 물을 길을 도구도 없이 내게 물을 준다고 하였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이냐고 이 여자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물 이야기를 집요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시각이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물 좀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생각해 낸 것이 매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겹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대화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여인은 계속해서 물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데 그 물에 대한 필요가 육신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물을 주님이 주신다고 했을 때 달라고 한 그 이유는 육신적으로 물을 길러 오는 일이 너무나 수고스럽고 그리고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것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먹고 목 안 마르는 물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먹고 싶으니 그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생수는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하여튼 목이 안 마르다고 하니 그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선물 또 그것을 너희에게 주는 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주님은 이 여인이 물동이를 지고 오는 것을 보았을 때 인생 막차 탄 그 여인을 구제하고 싶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생수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모름지기 이 영혼의 생수를 마셔야지 살 수 있고 목마르지 않음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말씀하고 싶은 것은 여인아 네가 얼마나 목마른 자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시각이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의 여인의 모습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니다.
여러분 이 우물가에 앉으셔서 별로 부유해 보이지도 않고 지체 높지도 않고 그렇게 살아온 이 여인이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눈물 없이는 쳐다볼 수 없는 상당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시집을 다섯 번이나 갔는데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재혼한다고 청첩장 내밀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죽었는지도 도망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을 창출하였겠습니까? 그렇게 고난의 인생길을 걸어왔는데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사람도 남의 남자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렸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그 여인이 잘했건 잘못했건 그것은 두고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안고 여기까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불쌍한 여인아 너를 두고 도망간 첫 번째 남편, 너를 버린 나머지 남자들도 내가 천국에 가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라 하면서 그런 식으로 그런 상처를 주님을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자로 하여금 상처를 주목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목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자기가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상처가 없고 죄와 슬픔이 없다면 누가 천국을 그리워하겠습니까?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상처가 덧나지만 않으면 금방 아무는 것입니다. 덧나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덧나니까 그것을 고쳐주려고 하면 그 상처를 무슨 보물이나 되듯이 부둥켜안고 나는 불쌍해 나는 불쌍해하면서 신세타령이나 합니다. 자기의 상처를 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자기가 자기를 불쌍하다고 백 번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는 눈물 없이 너의 인생을 볼 수 없노라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 그래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 상처 많은 여인을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다루셨습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눈을 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생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선물과 연결을 시키고 그러면서 내가 바로 하나님께로 그것을 주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못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창출해 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다가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이 여인의 시각은 여전히 육적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니까 도무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이렇게 설교를 하면 곤고함을 느끼던 사람들은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도무지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점심도 먹었고 아까 간식도 먹었는데 왜 곤고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있어서 영혼의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 목마름을 못 느끼는 사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는 죄인들이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듭났다고 한다면 차이는 있겠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곤고한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집회를 많이 다닐 때 지나가다가 툭 치면서 형제 곤고하지? 하면 그 형제는 막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매 곤고하지? 하면 막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영적인 삶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해지면 주님이 치료하시는 것, 오시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있어도 곤고함이 해결이 안 되고 자기도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 만나서 대판 싸울 때는 그런 것을 잊어버리지만 고요히 하나님 앞에 앉아 있을 때는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노래를 해봐도 반주가 끝나고 불이 꺼지면 괴롭고, 친구를 만나도 어디를 신나게 돌아다녀도 바쁘게 일할 때는 몰라도 고요한 밤이 되면 괴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적어도 거듭났기 때문에 주님을 못 만나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신경질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궁극적으로는 목마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가 아니면 치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목마른 사람들은 물을 마셔야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모금의 물을 진짜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증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가물어서 삐쩍 말라서 예배하는 시간은 조는 시간이고 기도하는 시간은 눈 감고 참는 시간이고 찬송 부르는 시간도 참으면서 견디는 것입니다. 남들이 통성 기도 하는 시간이 가장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결심하기를 다음 주에 이 교회 나오나 봐라. 왜 그럽니까? 생수가 다 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인격적으로 서서히 들어와서 자신의 곤고함을 사정을 갈피갈피 보여주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왠지 마음이 열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면서 성령이 자신의 주위를 감싸는 것입니다. 그때는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기쁨과 생명이 충만하게 솟아나면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고 오늘 하루를 밥 벌어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잇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냐 하면 오늘의 인생이 영혼을 향해 의미 있는 삶이 될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편이 승진을 하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지 염려하면서 이런 하나님과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그렇게 믿는 사람가운데 임한 생수,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생생한 생명적인 교제 그리고 생명을 부어주시는 은혜로운 임재를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릴 때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불꽃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슬픔과 죄악을 이기고 고통을 견뎌서 문제가 많고 모순이 많은 내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불화한 인생들에게 샬롬을 창조할 수 있는 이런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우리가 불꽃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것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도 18번과 같은 설교가 있습니다. 모든 성경을 설교하지만 어떤 것은 그 본분을 펴기만 하면 말씀이 쏟아져 나와서 승부를 걸 수 있는 그런 자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말씀을 20번 씩 돌아다니면서 하여도 어떤 때는 그 설교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데 어떤 때는 아무 반응도 일으키지 못하고 설교를 마치고 빨리 숨어버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내 안에 그런 생수가 있고 생명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임재하고 은혜가 충만할 때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을 때는 내가 다 알아도 내 마음에서 불이 붙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불이 없는데 어떻게 불을 나눠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여인이 여전히 이러한 생수가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과 그랬을 때 예수님이 주는 생수가 야곱이 주는 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계속 지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인데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때 우리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우리들이 복을 받아야겠다 하고 나오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비비꼬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과 복을 받는 것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서 복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삶의 결과이지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하는 신앙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경은 여러분이 500만원 코트를 걸치든지 1억 짜리 자동차를 몰든지 8억 짜리 집에서 살든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집요한 관심은 여러분이 무엇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싸여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심령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하는 그 자리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집요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을 받나니, 상한 심령으로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너희의 심령을 살피라, 왜 이렇게 집요하게 심령의 문제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라에도 중앙 정부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과 삶을 지배하는 중앙 지배국 같은 것이 바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정중앙에 왕좌가 있는데 거기의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고 계시면 그리스도가 주인으로서 그 인생을 다스리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세상의 허영과 헛된 욕망이 자리 잡으면 그것에 지배를 받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서 그 왕좌에 세상의 것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이런 것들이 자리 잡고 앉아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면 안면 몰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게 가능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생수에 대해 말하시면서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과 교제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지독한 목마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목이 마르니까 육신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목이 너무 말라서 헛것이 보이고 뇌의 활동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목마른 심령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적인 척도에서 볼 때 아이큐가 내려갑니다. 성령이 충만 할 때는 그렇게 지혜에 빛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던 사람들이 목마름에 빠져서 깊이깊이 들어가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생각하는 것이 멈추고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의 대풍을 던져서 바다를 뒤흔들어서 요나의 배를 금방 침몰하게 만들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러셨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가 말하자면 목마른 채로 오랫동안 살아가는 인생들 속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여인입니다. 얼마나 오래도록 영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무엇인가 심령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불안한 갈망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 주에도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예가 올라가니까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입이 올라가니까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환경이 행복해지니까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벌어서 오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신병이 없습니다. 그것은 꽤 살만한 사람들이 그런 허무에 빠지니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통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의 참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말씀하면서 심령의 문제를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은 무지무각 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명이 달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도 도무지 뭐가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온통 머리속에 가득한 것은 어떻게든 물을 좀 많이 가져가서 다시는 이 창피한 우물가에 안 나올까 하는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어떻게 내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여내 인생을 이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내 내면의 형편들과 인연을 끊고 내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이런 것들로 생각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우물물이나 길어다가 갈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오늘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도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목마르게 하지 않는 솟아나는 생수를 먹고 소생하여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자 하는 원천적인 인생의 문제의 해결을 갈망하는 대신 임시적이고 마약 같은 방법으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인 속에서도 얼마든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 생수를 네게 주려고 하는데 네가 이 생수를 주시옵소서 라고 몸부림을 치려고 하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 것과 이렇게 물을 주려고 네 앞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마다 이제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보다 이 하나님의 생수를 더 뜨겁게 갈망하였습니다.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도 좋사오니 주님, 나를 향하여 이 생수의 문을 여시옵소서. 닫힌 교제의 관계를 여시고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옵소서. 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 주님만이 나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그 샘물을 나에게 주시기만 한다면 어떤 역경도 이기도 치욕의 길이라도 내가 원수들을 사랑하며, 문제를 안고 있는 주위의 수많을 사람들을 끌어안고 내가 먼저 은혜 받은 요나로서 사명의 길을 걸어가겠나이다. 이렇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름 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망하나이다.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나 주셔서 그 생수와 같은 교제를 주셔야 목마름을 면하고 살아갈 수 있는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복 되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물이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생 막차 타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을 이 생수는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타오르며 지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 여인과 같이 완전히 실패한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전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낙인찍힌 인생을 바꾸어 존귀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몇 푼 벌어먹다가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허망한 인생들을 이 생수를 주셔서 새롭게 살 때 그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주님을 기리는 빛나는 샛별과 같은 인생들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의 육체는 풀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영광을 가지고 있던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났던 사건을 중에서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기쁨이 아직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과 더불어 싸울 때 자신의 동족들이 삼손을 잡아다가 그들에게 당할 고난을 면해 보고자 가져다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올 때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당나귀뼈로 죽은 자의 수가 1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싸움 끝에 도저히 목말라 죽게 된 것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방금 전까지 함께 한 사람도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면 뭐하고 목사면 뭐하고 전도사면 무엇 합니까? 목마르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르면 다 괴로운 것입니다. 죽겠나이다.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앞에 샘을 터뜨리셨습니다. 생수를 한 모금 들이키니까 이제 힘이 나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수, 이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에서 오는 이 그리움에 목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는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런 목마름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너의 영혼이 병들었으며 왜 목마른지 알려지면서 예전에는 몰랐는데 예배에 참석하면 참석할수록 목마름을 느끼면서 불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목마름을 느끼고 생수를 주시는 주님 자신을 바라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이 몸을 존귀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목마른 자의 영혼을 주님 자신으로 만족케 하옵소서. 라고 바라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생수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갈급함이 해결되면 이제 돈이 없어도, 있어도 건강해도 연약해도 늘 찬송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치면 고난의 파도를 타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순풍일 때는 발동기를 발리 돌려서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에서 생수가 솟아나니까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주님은 거저 주십니다.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셔야지 그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둔다고 돼지가 웃습니까? 행복해 합니까? 아닙니다. 돼지 는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가서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면 웃지 말라고 하여도 저절로 웃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은혜 받는 일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접으십시오.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은혜 받기 전에 사모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생수를 심령 속에 주시고 그래야지만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줄을 아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처지로 보면 이 사마리아 여인만큼 불쌍한 처지는 없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이 여인은 그 생수 없이는 살수 없는 맛이 간 인생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막차 탄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생수를 보시자마자 그냥 던져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마음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 생명의 생수를, 생생한 교제를 가지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느끼고 사모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사모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모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사모함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없다면 그러면 아직도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아직 입장권도 안 산 것입니다. 언제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말씀으로 교제를 하다가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비로소 이제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 어떻게 제가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목마른 자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슬픔과 고통과 부대낌과 자신의 걸어온 한 맺힌 자신의 슬픈 인생길이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생수가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 년을 예수를 믿어도 습관적으로 나와서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하여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고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심령을 가지고 어둔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는데 그런 기쁨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 보십시오. 매일 밤을 설레면서 춤추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다스립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쁨이고 사랑이며 우리의 삶의 유일한 이유이신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여 주신 그 은혜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는데 기쁨이 없다고요? 펄펄 뛰면서 좋아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속에서 참된 기쁨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기쁨이 사라진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오셔서 다스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스림을 기뻐하지 않으니까 우리의 탐욕과 자존심과 욕망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예수를 밑에 내려놓고 우리를 다스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즐거워할 인생들이 그런 것들의 통치를 받으니까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선물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지를 눈뜨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통 없이 생생한 교제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주신 선물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하면서 전심으로 사모하면서 주님 그것을 주시옵소서. 사모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것이 절대적인 나의 요구 사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교회 나와서 하는 말이 ‘주님 그것만 주시옵소서. 다른 것 다 가져가셔도 좋사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재, 주님과의 생명적인 교통 그것이 있으면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거기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광야를 지날 때에도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의 위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위기가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런 사람에게 죽는 것밖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함께하시는데 그러면서도 기쁨으로 주님 곁에 가는 것입니다.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 생수를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선물을 사모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선물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와서 말씀을 듣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자연적으로 그것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그 생명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일인지를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때 그런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그런 생수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선물을 주시는 이가 누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비슷한 것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인생들이 그렇게 생수를 사모하지만 그것을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면서 결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관계를 통해서 그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내 기뻐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누구를 향해 마음을 주시고 당신과 교제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문벌이나 가문,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생수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그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셔서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생수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네가 주는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말하시면서 이것은 목마를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필연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수는 언제든지 이 마약적인 효과밖에는 없습니다.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의 기쁨과 삶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삶은 어떻습니까? 물질과 향락적으로 사는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들은 돈도 많으면서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되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도덕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유익이 될지도 모르나 그러나 자신의 영혼에는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되면 그 인생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니까 도덕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열매가 계속 맺는 데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살고 싶어서가 주님처럼 살고 싶어서 살다보니까 자연히 도덕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것들은 가끔 우리의 목을 축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상태를 잊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마시나 항상 목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살다가 열심히 봉사하고 살 때는 뭔가 되는 것 같은 유혹을 받는 것 같지만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보면 이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마음속에 허무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는 형제, 자매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가장 괴로운 시간이 주일 아침 교회 가는 시간이고 가장 슬프게 눈물 나오는 시간이 교회에서 집으로 오는 시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핍박 속에서 교회 가니까 교회 가는 시간이 괴롭고 돌아올 때는 은혜 받아서 눈물이 나나보다 생각을 했더니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교회를 가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하루 종일 봉사하고 친구를 만나 떠들고 밥 먹을 때는 잊어버리는 데 집에 돌아올 때는 왠지 허무하고 무너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나머지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오늘 말씀드린 이런 성도들의 메마르고 갈급함을 교회가 채워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 교회가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잠시 후 다 굶주려 죽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제하고 먹고 마시고 우정 충만하고 그러면 무엇 합니까? 모여 있을 때는 무엇인가 되는 것 같은 데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는 휑한 느낌이 가슴에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런 생수를 공급받고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만약 그런 생수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받는데 자신만 못 받고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수는 배에서 솟아나는데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배에서 솟아나는 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런 생수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결코 불꽃과 같은 삶이 될 수 없고 목숨만을 부지하고 사는 것이 정말 대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솟아나는 이런 생수의 은혜 없이 교회를 꾸역꾸역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을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누리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이기게 하고 슬픔을 잊게 하고 그리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고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는 상황에서 찬양하게 하고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게 하고 안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고 이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고 낙망할 때 오히려 꿈과 용기를 가지고 그들을 일으키며 고난 받고 슬픔이 가득할 때 오히려 위로와 사랑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힘들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아니, 온전하지 못한 인생, 나아가서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방불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오래면 오래될수록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죄악을 창출해내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빛처럼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타올라서 빛처럼 살지 않으면 내일은 그 일이 더 힘들어 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샘물,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생명적인 교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그것 없이도 살수 없고 그것 없는 인생을 바라기보다는 죽음을 원하는 마음이 바로 생수를 그리워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한 모금의 물을 찾기 위해 벌판을 가로지르는 뜨거운 햇빛 아래 한 마리 사슴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외로운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악초를 찾아다니며 그늘 좋은 곳에서 쉬기를 원할 때 그는 그가 들판을 가로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산 저 산을 넘어서 들판을 가로지르며 질주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모금의 생수,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시는 생생한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대가로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비로소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평화를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샬롬을 창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배에서 이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넘치고 교회가 넘치는 생수를 통해서 미개한 땅들을 덮을 때 선교사들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드디어 갈망이 생겨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것을 주십시오. 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면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남편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가 자신의 인생의 약점을 찌르는 것을 교묘하게 피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가슴에 찌르지 않을 것이 정말 남편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여러 남자들은 다 도망가거나 죽었고 지금의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가끔 꾸어서 쓰는 사람이니까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인생이 사실을 가지고 주님을 농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여인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이 여인이 주저리주저리 꾀지 않고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살짝 피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문제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치부이고 최대의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말한다고 꾸짖지 않으시며 인격적으로 너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명이 있었으나 지금의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너의 말이 맞구나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수하고 남편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여인이 막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수가 아니면 내가 정상적인 인생을 살수 없다는 뜨거운 갈망으로 그 생수를 달라고 요구를 하였는데 사모하는 마음으로 생수를 달라고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생수를 주실 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농축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남편 문제였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진짜 불러오라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불러오라 그럼으로써 그 하나님 없이 살아간 죄악의 나날들, 그 앞에 직면하면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사모하나 자격이 없이 이 비참한 죄인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죄가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비정상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성령 충만을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는 다 시간 낭비입니다. 주님이 성령을 주시기 전에 이 문제를 거론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죄라는 것이 하나하나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닥이 하나있으면 다 얽혀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그 가닥이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 문제 이외에는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남편 문제로 끌어당기니까 모든 것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막고 있는 총체적인 죄의 문제에 직면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해결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죄 사함에 대한 갈망을 통해서 그 여인이 진정으로 생수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성령 충만이 된다는 생각을 먼저 하면 안 되고 이미 부어주시는 성령을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에게는 남편의 문제일 수 있으나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문제를 끌어 당겼는데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속에서 역사하는 엄청난 덩어리의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끈질긴,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것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갈피갈피 깃들여 있는 교묘함과 그리고 갈피갈피 깃들여 있는 죄악과 갈피갈피의 깃들여 있는 그 야비함이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죄악으로 역사해서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을 가로막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모든 노력도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 이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래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원동력을 삼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만두고 머리를 가지고 수단을 가지고 하는 하나님께서 여시지 않는데 인간이 열려고 몸부림을 쳐도 결국 결과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봐라 네가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 되는 것이 있나 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내 말을 네가 이런 식으로 계속 피할 작정이냐, 결국은 네가 사마리아 여인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인격적인 승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맞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 5명이 있었으나 지금 너와 같이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의 말이 맞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이 여인은 감추려고 하다가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제껏 남편 5명을 거느리고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고 아프고 슬펐다 라고는 생각을 하였지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막고 있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당했다. 나는 일방적인 피해자다. 나는 기구한 여자다. 나 같은 자가 위로를 받지 않으면 누가 위로를 받을 것인가? 하고 자기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소위 상처 속에 깃들여 있는 교묘함입니다. 나는 옳은데 나는 당했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옳은데 라는 생각이 깔려있고 그럼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막히고 혼탁한 구름이 더 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홀로 대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남편이 5명이고 지금의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님을 도덕적인 관계에서만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지금 자신의 이 죄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우리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도록 만드는 샘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어두운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만드는 참된 힘을 메마르게 만드는 그것을 받지 못하게 해서 결국은 내 인생을 이처럼 기형적으로 만드는 그 결과로 몰고 가는구나 라는 생각에 미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여인이 깨지고 예수 그리스도 에게 이 놀라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집어던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관계로 우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원망하고 미워하는 모든 일을 그치고 우선 우리 속에 생수가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생수가 메마를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완전히 실패하고 사는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오셔서 주님이 만나주시자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여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만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도록 간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6-20)
우물가의 여인같이 (1995.1.22 주일오전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드디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님이 선물을 주시는 것을 받으면 그리고 그 생수가 마음 안에 있으면 그것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말하고 있는 마르지 않는 생수, 솟아나는 샘물 그렇게 솟아나는 생수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성령이 아니라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단순히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통, 그리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님이 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비결이고 비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그리고 이 세상이 주는 마음의 시원함은 마치 그릇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시원하고 생수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고여 있기 때문에 잠시 후에는 말라서 갈하여져 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부패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즐거운 기쁨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기쁨은 자꾸자꾸 감소합니다. 마치 우리가 과일이 아주 먹고 싶을 때는 한 개를 깎아서 첫 입에 넣을 때는 한계 효용, 즉 만족도가 최고치가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계속 먹는다면 처음의 기쁨보다는 감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 즐거움과 씹는 고통이 같은 순간을 지나고 나면 나중에는 먹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 기쁨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큰 기쁨이 내 마음속에 있을 때는 감격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쁨이 감소하고 메말라갑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것들을 물을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였습니다.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영원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그 생생한 교통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 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한번 받으면 자기가 죄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이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된 기쁨과 영적인 은혜가 가슴에 충만해서 그 은혜를 가지고 힘에 넘치도록 봉사하였으면 이제 소진 될 때가 된 것 같은데 힘에 넘치도록 봉사를 하였어도 고요히 앉아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 그 샘이 다시 솟아납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고 섬기기 위해 복음을 들고 더 수고해도, 다시 무릎 꿇으면 다시 그 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이기게 만드는 세상의 힘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고통을 받으며 지나가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이런 사람들은 노래할 수 있고 마라와 같이 쓰디쓴 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그 때에도 이 사람들은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속에서 솟아나는 이 생수 때문에, 이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오는 생생한 샘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혼이 그물의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생명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뭔가를 사랑하고 집착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끝날 때 인간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사랑하고 집착하고 있는 한 인간은 끝까지 생존하는 것입니다. 생수에 대한 사랑과 그것에 대한 강한 갈망,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대신하기 위해 이 세상을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그런 것들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생수로만 살 수 있고 그것은 솟아나는 것입니다. 퍼내면 퍼낼수록 계속해서 맑은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펌프로 물을 퍼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맨 처음 물을 퍼낼 때는 시커먼 물, 석유 냄새가 나는 물, 더러운 물들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물의 질이 안 좋은 것 같을 때는 파이프를 연결하여 더 깊이 박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을 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처음부터 맑은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한 이틀 동안 퍼내는 일이 계속됩니다. 왜입니까?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퍼내면 퍼낼수록 고갈되어 버리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은 계속 퍼내면 퍼낼수록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두운 새 세상을 비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여기에서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절제, 온유한 마음, 모든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이 여인이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속에서 솟아나는 이런 이야기하는데 아직도 이 여인은 그 말을 진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뭔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신다고 하니까 구하는데 주시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목마르지도 않고 둘째는 물 길러오지도 않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이유에서 이렇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읽게 됩니다. 교회를 찾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 죄를 물리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주셔서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힘,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영적인 힘으로써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살도록 그런 원천적인 힘을 공급해 주기를 원하시는데 세상의 세속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지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고통스러운 문제를 당하고 인생의 쓰라린 문제를 당할 때, 그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서 풀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박복하다고 믿을 때 주님께 축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정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복의 근원이 하나님뿐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깨닫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은혜와 평안을 구하면서 복을 구하면서 나오는 이런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먼저 해결해야 될 것들을 해결하지 않고 신앙을 추구함에 있어서 이런 경향과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할 수 없이 우리는 왜곡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왜곡된 복음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서 취하게 되어서 신앙이 우리의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런 이상한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뒤틀린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뒤틀린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교정되지 않으면 오히려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보다 더 불행하고 잘못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하기 위해 그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방향이 맞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을 찾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뭔가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으면 그것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을 일단을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냐고 동기를 물어보면 어느 날 고요히 묵상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고 그래서 내가 영원을 향해 결단하고 천국과 지옥 그 사이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만이 참신인 것을 고백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희소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우물가의 여인과 같이 길거리에서 만난 한 그리스도인이 인연이 되어서 교회를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도 왜 교회를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나오다가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필요를 깨닫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적인 안목에서 접근하는 이 여인을 결코 정죄하거나 거절치 아니하시고 보다 깊은 진리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으시자 나는 남편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실은 결혼을 했던 여자였고 지금은 다른 여자의 남편과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물을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본질적으로 남편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가로막히는 가장 중요한 죄의 장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인생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죄가 이것이었고 모든 죄악들은 여기에 연결된 죄악들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한 마디로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우리에게 이런 영원히 솟아나는 참된 생수,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통,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만들게 하시는 생명적인 교통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우리를 죄의 문제에 직면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이 여인과 같이 회피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죄는 나머지 모든 죄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를 통해서 많은 죄를 짓게 되고 이 죄를 다 끌어오고는 마지막으로는 내 힘으로는 이 죄를 해결해 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이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 앞에 남편이 없다고 이 여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짓말하지 마라’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고 말씀하시고, 네 말이 참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다루실 때에도 인격적입니다.
교회에서 누가 경찰서에 잡혀갔다고 해서 심방을 간 기억이 납니다. 그 유치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가서 보면서 그 사람들이 대부분 협의가 있어서 왔어도 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있기 전에는 그 피의자는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이 법인데 아직 죄인이라고 낙인찍히지도 않는 사람들을 경찰서에서 다루는 모습을 볼 때 완전히 인간 이하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룻바닥이 깔린 곳에 5평 남짓한 곳에 30명가량 모아놓게 거기서 볼 일 보고 거기 앉아서 무엇을 먹고 완전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적으로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옳다 참되다는 것은 육신의 안목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5명은 죽거나 도망가 버리고 지금 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니까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당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대답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그렇게 갈피갈피의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마음, 이 여인같이 목마르지도 않게 물을 길으러 오지도 않게 그 생수를 구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단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죄인들의 마음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 없이도 내가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변화를 받고 새로워지고 어두운 삶에 빛이 들고 그리고 생기를 잃어버린 삶에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깃들여서 그 은혜로 내가 세상을 살기 원한다는 그 사모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와 선물을 받기는 원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여태까지 살아왔지만 이 남편의 문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상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여인에게 네가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얼마나 방탕하고 타락하고 지금도 계속되어 오고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네가 하나님을 찾고 조상을 따라 이 산에서 예배하고 지냈으나 그러나 네가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으며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메마른 인생이라고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에 네가 얼마나 부적절한 인간인지 알고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도록 부르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 한마디가 이 여인의 속의 모든 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속에서 생수와 같이 솟아나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이 그런 소망을 피력하면서 우물가의 여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 우물가에서 대면하게 되었다면 여인에게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지만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무엇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어떤 향유를, 옥합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많은 남편가운데 단 하나만 불러와도 얼마나 이 여인의 생애의 죄악됨에 대해서 잘 말해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여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주고 수납을 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적을 통해서 결국은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문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지금도 내연의 관계를 계속하면서 남자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상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처를 고치시기 전에 관계를 고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관계를 고치신 마음, 그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생수가 흘러 들어가면 그 상처는 단숨에 낫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기를 원하시는데 이 여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부끄러움 이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스스로는 죄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하나님 앞에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이것은 깨뜨려진 심령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진심으로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많은 경우에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이전에는 몰랐는데 새롭게 깨닫게 되니까 하나님에 비추이어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5번 면사포를 쓰고 지금은 내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대의 고민과 고통은 자기 속에 죄를 안고 그러면서도 고통스럽고 팔자 센 그 인생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그 슬픔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의 슬픔을 주목하고 그런 삶을 계속할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서 물 길러 오는 일을 계속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냐고 전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 어떤 상처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상처는 치유된다기보다도 그 상처로부터 우리가 해방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상처가 지배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의 치유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평생 동안 가슴에 두고 살았던 이 상처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기피하였는데 이제는 그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어떠한 상처도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할 때 이 여인은 끝까지 피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옳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하시자 여자는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 것은 눈으로 그냥 본 것이 아닙니다. 이 눈으로 볼 때는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알 수 있듯이 그냥 유대인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이 여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를 통해서 말씀을 들으니까 이 분은 유대인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속을 감찰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깨닫게 되고 그 나중에는 ‘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아니냐’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수준이 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므로 인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인상과 생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에 물을 달라고 말하신 후, 하나님의 선물과 그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오히려 내게 생수를 구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이 간절하게 그 생명 샘물을 내게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았어야 했는데 하나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 없이는 인생은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그 사실과 그 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때에 전심으로 그 생명 샘물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래서 영생하는 물, 솟아나는 샘물, 먹으면 목마르지 아니한다 하나님이 선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 여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마지막에는 메시아라는 고백을 받아내고 죄의 벽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그 임재에서 오는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변화된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고 믿음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새롭게 하여야 하고 그리고 그 고백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유대인을 알고 선지자로 알았을 때는 생수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 예수가 그리스도인지를 알고 그가 우리의 구원자인지를 알고 그만이 우리에게 메마른 우리의 인생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어서 그만이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빛나게 하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교제와 생명의 능력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신앙적인 원동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여인이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고백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샬롬을 통해서 주시는 생수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사실 것입니다.
이러면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주님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메시아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고 진정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인 것 같은 그러한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동시에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고 그 샘물로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 생명 샘물의 가치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깊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죄악의 낙을 즐기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걸으면서 고난을 즐겨 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속에서 솟아나는 이러한 영적인 생활이 없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해지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이 여인에게 생수의 가치에 대해 일러 주셨을 때 이 여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아 갔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인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을 주목해서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주목할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가 얼마나 깊은 죄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야 우리는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해방함을 받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 앞에 살아가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 때에 우리는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이 여인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20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20절에서 예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였던 것처럼 깊이 있는 신앙의 본질의 문제로 이 여인이 다가간 것을 보여 줍니다. 물동이, 물바가지, 목마르지 않는 물, 생수통이란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고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이 말 한마디에 이 여인은 충격을 받고 그러면서 겉으로는 남편이 없다고 말하면서 회피하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통해서 그는 여태까지 자신을 감추며 살아온 위선과 껍질이 그 말한 마디에 산산이 부서지면서 조각나는 것 같은 충격이 이 여인의 인생 가운데 찾아온 것입니다. 누구도 여인을 피하고 수군수군 대고 욕하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그 여인에게 네가 그렇게 사는 것이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돌이키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지만 속에서 솟아나는 참된 생명을 누리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의 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하고 욕하고 흉보았지만 이 여인의 처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 여인과 함께 손을 마주 잡고 한숨을 쉬면서 그래 네 인생이 어쩌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느냐고 위로해 주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도 이 여인의 인생의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특수 안경이 있어서 인간의 심령 속에 모든 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안경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다 주었다면 우리는 아마 모여서 예배를 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저런 사람의 설교를 듣고 있다니. 혹은 내가 저런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설교를 하고 있다니.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절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당히 눈이 멀게 만드셨습니다. 상담할 때도 자신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나 하듯이 너 이거 했지? 너 이거 했지?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받을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특수 안경을 끼면 우리의 관계가 모두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지적해 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마음에 묻어둔 죄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목회자에게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백을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싶어서 벗으면서 나오는 것은 문제가 덜 되는데 누군가가 확 벗길 때 그것 앞에서는 생명을 걸 것입니다. 정확한 비유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 옷을 벗기려고 그럴 때 그러면 옷을 벗길 때 특히 여성의 경우는 수치심이 남성보다 더 강하니까 아마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러면 죽음을 각오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드러날 때 인간은 그런 식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복이 있는 사람은 성경을 조용히 읽으면서 주님, 내가 실상은 벌거벗은 자입니다. 믿음의 옷을 주셔서 저에게 입히십시오. 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그런 정도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가 오셔서 죄를 벗기시는 그런 정도의 도전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안약을 많이 팔아서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니 너희는 부유하나 사실은 가난한 자이고 너희는 벌거벗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시각입니다. 주님이 벌거벗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그냥 살 수 있는데 주님이 내 앞에서 나에게 벗었더라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때에 따라서는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지적하시면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그럼 결국 이 신앙의 문제는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막혀있던 하수가 터지면서 맑은 물이 흘러가듯이, 논에 보가 막혀 있다가 터지니까 흰 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가 새롭게 열리면서 이전에 잃어버렸던 은혜와 생명과 기쁨이 밀려들어오는 재충전을 경험하는 일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하게 전에 성도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인식입니다. 머리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심히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고백할 때에 인간이 가장 정직해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강할 때에 자신의 죄를 깊이 고백 할 때에,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19절에 와서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다음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지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예배를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의 눈에는 물바가지, 물통 목마른 나날들 물 길러 오는 때들의 고통은 생각은 다 사라지고 마음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하면서 생각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전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수평적인 의식밖에는 없었습니다. 상처를 주고 떠나간 5명의 남자들, 언제 오는지도 모르고 늘 기다려야 하는 그 한 명의 남의 남자, 또 목마르지 않는다는 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어느 유대인 이런 수평적인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할 때에는 자신이 고통하고 있는 문제를 피상적으로 생각할 대에는 수평적인 의식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행해지는 것이 누구 때문인가? 나를 이곳에 몰아넣은 환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정말 우리 안에 그렇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있을 때 자기 속에 그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 그것이 없음을 발견할 때 이 수평적인 의식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내게 오는 좋은 것을 다 막아 버렸구나, 하나님과의 새로워진 관계만의 회복만이 내 속에서 다시금 솟아나는 생수가 내 삶을 지배하고 그 힘을 얻어야 내 삶을 살 수 있는 참된 원동력이 되는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로 관심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교통하여야 된다는 절박한 영적인 사모함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왜 그들이 예배하는 시간을 가장 감격으로 받아들였고 그 예배 속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11월에 강남에 있는 교회로 집회 들어가기 전에 그 목사님에게 주일날 설교를 몇 분이나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25분 30분 정도해서 1시간동안 20가지 순서의 예배가 다 끝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제 설교의 긴 시간 동안 견뎌낼 수 있을 지 걱정을 하였습니다. 3시간 정도의 설교 시간이 흘렸습니다. 나오면서 몇 사람에게 들은 말이 ‘강사님, 30분이 흐른 줄 알았는데 3시간이 지났네요.’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사모함을 갖는 사람들은 즉시 그 해결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밖에는 없는 줄을 깨닫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직감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심각한 위기는 못 느끼더라도 이렇게 살면 안 될 텐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알아도 이 여인처럼 남편이 없나이다 라는 회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위로를 삼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이미 사라진 생수에 대한 갈망을 생기게 하고 그리고 회개케 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물동이에 물을 한 통 쥐어주면서 자선을 베풀면서 이 여인 속에 그런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자선행위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영혼의 문제를 돌아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영혼과 영생의 문제를 날카롭게 직시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참된 진리, 참된 실상을 가르쳐 주실 때에 없었던 갈망이 생겨나고 잠자던 사모함이 생겨나고 그리고 자기가 전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불행한 여인을 일깨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서 r결국은 문제의 해결을 직면하고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이 여인에게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참된 변화와 회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은 잠시 충격을 받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계속 자기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아가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모든 일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잃어버린 사람들, 신앙에서 자꾸 덜어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힘을 다해서 찾아야 합니다. 때로는 억지로 끌려온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억지로’라는 말이 얼마나 교회에서 필요한지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새로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나는 다음 주부터는 안 나올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왜 그러냐니까 오늘 사실은 내 친구가 좋은데 데려 간다고 해서 자기는 낚시하려 가는 줄 알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교회라고 말하고 자신의 집은 불교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아직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연악한 자를 열심히 다시 물어 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교회가 할 수 있지만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은 교회가 도와 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 앞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없나이다. 네 말이 맞다 맞으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군요 하고 흩어졌다면 문제를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도망가면 예수님이 좇아가서 멱살을 잡으셨겠습니까? 발을 거셨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즉시 예배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예배를 하여야 합니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찾고 싶나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전에는 주님이 받으신다, 안 받으신다는 말이 문제가 안 되고 다 받으신다고 생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 그리고 내게 생수를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예배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드리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러므로 말미암아 이 여인은 해결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우리의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붙들고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우물가의 여인같이 (1995.1.29 주일오전 3)
예수님이 그 여인의 숨어 있는 죄를 들추어내시자 이 여인은 드디어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 획기적인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여태까지는 물을 이야기 하면서 그 물이 필요한 이유도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 쉽게 목마르지 않고 그렇다면 여기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물을 길으러 오는 목적도 세상적이며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발 더 진전하셔서 내 물을 먹는 사람은 속에서 솟아나는 영생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시는데 그 물은 오래도록 먹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특수 음료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한번 먹이면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 퍼내도 퍼내도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여인의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였습니다. 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드러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이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면서 갑자기 예배로 화제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하던 왜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내게 주십시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던 여인의 대화와는 이 마지막 대화는 완전히 종류가 틀린 대화였습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갑자기 물하고 예배드리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었겠습니까? 왜 이 여인이 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예배까지 오게 되었냐 하면 이것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을 깊이 이해하였다는 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 여인은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하여야지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산에서 예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느냐 안 드려지느냐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서 이 여인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생각에 귀착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예배의 문제를 이야기해서 자기가 모든 사람들 앞에 감출 것 같은 이 남편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말씀 앞에 이 여인의 인생의 숨겨졌던 깊은 죄의 문제가 드러나자 이 여인의 관심은 즉시 하나님께로 옮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죄 문제를 풀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이 여인이 여기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여인이 이제 생수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것과는 상관없이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 죄 문제에 직면하니까 예배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땅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조상의 규례를 따라서 물론 왜곡된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과연 이 여인의 인생을 신앙이 주관하고 있었을까요? 5번이나 남편을 바꾸고 지금도 어느 남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신앙에 할애하고 그 믿음 생활을 주장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여인은 이 예배가 정말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려져야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이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드려지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나의 인생의 비극의 근원이 되는 죄의 문제는 어디서 해결할 수 있겠는가 라는 근심과 절망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배의 문제 그리고 예배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로 돌아가도록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슬픔의 원인을 구조 속에서 찾고 환경 속에서 찾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5번이나 남자를 바꾸면서 면사포를 썼습니다. 한줄 한줄 그 이력이 기록될 때마다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생의 비극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이 여인의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오늘 이 예배의 장소를 찾는 사실에서 자기의 모든 지난날의 비극이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여인이 문제의 정곡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배할 곳에 대한 질문,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통하는 소망함이 이 여인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주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결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있는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의 물질과 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에게 참 진정으로 자유함을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세상의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화려한 침실은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잠은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이 여인이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진작부터 여기서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는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문제에서 이 여인은 한 번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깨닫기 전까지는 이 여인에게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그 모든 생각에 없다고 말하고 또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관없이 자기의 인생을 다스려가고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여인을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물가에도 동네 사람들이 낯을 피하여 나와야 했던 이 슬픈 여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정말 깨달은 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목적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로 하여금 예수 죽은 것을 우리들이 슬퍼하기 위해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한 성도들의 교제도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의 참된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 예배할 곳이 있다고 합니다 라는 이런 말을 할 때 문제는 그것이 어디든지 간에 하여튼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드리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는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철저하게 자기의 모든 인생의 문제가 이 남편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자기의 죄악 된 생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모든 불행한 일들은 거기에 잇대어서 줄줄이 따라오는 그런 일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그 가닥을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정확하게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그 본론적인 문제를 집고 다루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 기대하셨던 바대로 이제는 물에 대해 관심이 사라지고, 목마르지 않는 것, 자주 물 길러 오지 않는 것 이런 욕망이 이 여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여인의 마음속에 간절하고 절박한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심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예배할 것을 간절히 찾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입니다. 아직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이러한 구약의 약속들이 지배하고 있지만 정말 예배할 때가 곧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치고 그리고 성령이 오실 때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시고 나면 곧 성령이 오셔서 이제 이런 장소가 상관없이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여인과 함께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는 말은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였습니다. 이산에서도 말고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라는 말은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너희가 이산에서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곧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어디서든지 예배하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배를 하나님 앞에 산제사가 되게 하는 그런 일들이 곧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게 해주시는 구속의 은총이 이르게 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 속에서 빈 잔이 채워지고 메마르지 않게 되고 그 목마름 영혼들이 목마르지 않는 영적인 해갈함을 얻게 되는 은혜와 죄의 문제와 예배의 문제와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다 하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경밖에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것도 자기네 신앙생활에 맞추어서 성경을 변경하여서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에게는 그 율법뿐만 아니라 시서와 선지서와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의 글들이 있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을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경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 지의 참된 지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경배하면서 율법 속에 나타난 대로 바르게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였냐 하면 그렇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하게 이해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이 여인 앞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온 땅에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파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지만 그런 로마서에 나오는 특권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 제일 먼저 그들 이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르게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글들의 말씀 속에서 그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도구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 이들의 특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런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할 곳이 어디냐고 묻는 이 여인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자기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이 여인에게 있는 것을 예수님이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깊이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영이라는 뜻입니다. 직역을 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여인이 자기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 죄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원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주신 대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러니 너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너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과 그로 말미암는 목마름, 그로 말미암는 인생의 고통에 시달리는 너에 대한 최대한의 대답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찾는 방법은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데 그 하나님의 찾는 사람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죄인이 죄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생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배만 아닐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이 결코 11시에 모여서 드리는 이 예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 앞에 드려지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모든 삶, 그것을 오늘 예배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배의 핵심 속에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런 종류의 예배가 존재하지만 그러나 이런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모든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11시에 모여서 드리는 이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삶을 축소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쉼에로 초청하는 그 초청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짐이 하나님 앞에서만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합니다. 주님을 이름을 놓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그 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높이고 우리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겁하게 편의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고 감추는, 말하자면 회색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당당하게 이 세상을 지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고백하면서 사는 것이 예배에 들어와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설교를 들을 때, 그 누구도 감히 ‘이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한 주간 동안을, 우리의 일생 동안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이런 사모함으로 늘 살아가고 그런 것들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 앞에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인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11시 예배든 넓은 의미의 예배든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의미의 예배와 큰 의미의 예배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또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순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의미의 예배가 아주 신령하고 감화 있게 되면 우리는 큰 의미의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큰 예배가 올바르게 드려지면 작은 예배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사모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의미의 예배든지 작은 의미의 예배든지 이것이 예배의 두 요소입니다.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쉽게 이야기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속사람이 그 두 영을 묶어주는 성령 안에서 예배할 때 그 때에 참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우리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깊은 사모함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징조들이 간절하고 사모하고 절박함 그런 마음들입니다. 사모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영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고 몸만 나와 있는 예배는 한 번도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을 찾는 마음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으로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 그 욕망이 채워지기까지는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경우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때에도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찾을 때 그 여인에게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르게 아는 것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면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신 산에서 드리는 이 여인의 조상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참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은 지금 이 여인이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지는 진리가 있으니까 이 여인이 모든 오류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고 무엇이 이 여인으로부터 무지와 혼돈 속에 싸여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는 마음도 없고 또 찾고자하여도 알 수 없는 그런 어두움에서 그녀를 빛 가운데로 데리고 오는 도구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녀의 무지와 그리고 모든 어두움들을 밝혀주고 벗겨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여인은 알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서 긷는 이 물만으로는 살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육신의 목마름을 통해서 영혼의 목마름을 가르침을 진리 안에서 펼쳐 보이실 때 이 여인이 물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이 여인이 이렇게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 온다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서 깨달았습니까? 그녀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실 때에 그녀는 무지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이 여인이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남편을 여러 번 바꾼 이 죄의 문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을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진리를 보여주심으로 이 여인이 그 문제의 초점에로 자기의 시각을 옮기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가르치시자 하나님을 예배로써 찾아야 한다는 이런 마음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가르치시자 이 여인을 결국은 자기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하지 못하는 요소가 둘인데 하나는 영적인 교통이 없는 예배와 그리고 참으로 우리를 무지로부터 건져내고 벗겨내는 참된 지식이 없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늘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또 큰 의미의 예배에서도 우리들이 영으로 하나님을 찾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무지를 벗겨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참된 지식이 우리 안에 넘쳐나도록 지식을 사모하고 그 지식을 전심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메시야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5-26)
인간은 먹을 떡과 마실 물만으로는 결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먹을 떡과 마실 물 하나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면 많은 소득을 누리는 사람일수록 행복하고 인생의 근심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여인이 전날에도 이곳에서 한 동이의 물을 가지고 가서 마시며 떡을 지어 양식을 삼아서 먹었습니다만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에 목마른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떡과 물도 그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이 세상의 떡과 물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이 세상의 떡과 물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양식임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이 생수였습니다. 시원한 물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목마른 자가 해갈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며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물을 통해서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여인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으러 올 수밖에 없었던 그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 영혼 속에 있었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일깨우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깨우실 때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달라고 요구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을 불러 오라시면서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죄 문제에 직면하도록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이 죄악에 가득 찬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여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이 물이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로 바꾸고 그것이 다시 죄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이 여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마치 벽장 속에 먼지가 가득 쌓인 채로 묻어 두었던 이 여인의 영원에 대한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씩 하나씩 들추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5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살아온 과거, 거기에는 수많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자기가 이렇게 살아온 부도덕한 인생은 단지 고통스런 인생의 역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그 삶이 죄악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무거워지고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진전입니까? 이 여인이 드디어 물로 시작한 관심이 하나님께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자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 예전에 가끔 드리는 예배가 혹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인가 하는 것이 이 여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배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싶다면 여러분들이 오늘 날 예배하는 삶을 점검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뜨겁고 사랑으로 넘치고 있다면 여러분의 예배는 감격과 기쁨으로 드려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사모함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의 시간과 목소리와 여러분들의 물질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싶어 하는 그러한 예배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배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부분입니다. 그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제일 먼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마치 조는 자와 같은 태만한 인생을 산다면 예배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궁금해 질 때에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생명의 샘과 같은 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데 무엇으로도 우리의 영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참된 기쁨과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해 지도록 하는 길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이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예배 속에 주어주실 때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잠들었던 자들이 깨어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두워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눈을 뜨고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낙망하고 실망하던 사람들이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생명의 샘과 같은 이런 물들을 메마른 사람들의 가슴에 부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사람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곤고함 가운데서 생명의 은혜로 나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신앙의 모든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형통할 때 즐거워하고 그렇지 못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 믿음의 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그 믿음의 힘은 모든 환경을 뛰어넘고 그리고 여건을 초월하고 고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상황을 뛰어넘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슬퍼할 때 오히려 기뻐하고 모든 사람이 불안해 할 때 오히려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삶의 원동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믿음 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영혼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생명의 놀라운 기운을 불어 넣으실 때 때 우리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우리 속에서 기쁨과 생명과 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처럼 만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예배가 될 때 우리는 감격에 넘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도 예배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예배는 11시 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관해서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 몸을 거룩한 하나님의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인 예배니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 그 예배에 성공한 사람들만이 일주일 동안 나가서 어두운 세상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믿음을 붙들고 신앙으로 승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 찾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같은 것으로 하나님은 발견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헤롯에게 심문을 당하실 때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는 숨김이 없이 밝혔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헤롯이 많은 소문을 들은 후 그러면서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헤롯은 그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아주 훌륭한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왜입니까? 호기심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감춰진바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생명의 샘에 대해서 알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더 잘 믿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예배하고자 살고자 하는 동기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욕망,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사모함 이것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이 목마른 자들에게 주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그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를 호기심으로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주님을 전심으로 섬기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소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을 들어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화) 아주 똑똑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중년이 되어서 생각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수많은 철학이 나 사상이나 수많은 종교를 자기가 알고 섭렵하였지만 거기에 참된 자기의 인생 을 의탁할 만한 진리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자기 친구 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것이었습니다. ‘여보게, 누구라도 내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종이 되 고 싶은데 그러나 종이 되고자하는 나는 있으나 내 주인이 되고자 하는, 될 수 있는 그 어떤 절대자, 그 누구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배를 통해서 찾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 물과 같은 은혜를 가슴속에 담으며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배하는 자세로 주님을 찾고 그리스도를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면 여러분들에게 이 여인에 게 허락하셨던 솟아나는 영생 수를 여러분들 속에 주실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만이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진리가 있어서 그 진리가 우리를 깨닫게 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여인과 같이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의 껍질로 억눌린 가운데 일평생을 살아왔든지 어떤 연유에 있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영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신령과 진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고 생명샘 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하나님과 죄인이 화해하고 새롭게 만나고 그리하여 그 속에서 죄인의 메마른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잇대어지는 역사가 바로 영과 진리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쪽의 가뭄이 극심한 나머지 관악산에서 기우제를 드린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사람들이 기우제를 드린다고 비가 오겠습니까? 어느 한 쪽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2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느 족에는 물가 없어서 메말라서 논에 심어놓은 모가 죽기 직전입니다. 물길을 파고 물을 대어서 그 물이 빗줄기와 함께 거북이 등같이 갈라진 논에 들어가게 될 때 그 농부가 기뻐하는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러나 그러한 곳에 물이 흘러 들어와서 메마른 땅 갈라진 그 땅을 가득히 물에 적시고 그 위에 개구리 밥 같은 풀들이 가득 떠 있고 그리고 그 물을 먹으면서 이삭들이 성장하게 될 때에 거기에 우리가 한없이 기뻐하는 결실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이러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참된 생명의 물이 우리의 메마른 영혼 속에 충만하도록 대어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 없는 벌판에서도 사막에서도 나름대로 식물은 자라고 열매는 맺고 꽃도 핍니다. 사막에서 우리의 인간을 유익하게 하고 우리의 인간의 목마름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육신의 양식들을 사막에서 거둘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도 같은 것입니다. 메마르고 갈라진 물기가 없는 우리의 이러한 심령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은혜가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샘물이 풍부하게 우리의 영혼 속에 있을 때 그때에 아름다운 결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삶의 환경을 보면 저런 기쁨의 열매가 맺힐 수가 없는 삶입니다. 도저히 그 사람의 그 환난과 시련이 많고 불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인데도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 대어져서 그 강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의 생수가 영혼 속에 부어지게 되니까 그렇게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말하자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사막을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신기합니다. 물 한 모금이 없어서 타고 가는 낙타를 죽여서 체액 같은 것을 빨아먹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막인데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쉴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교제가 있는 그러한 영적인 삶을 살아서 환경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생명과 기쁨의 은혜가 우리 영혼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역사가 있을 때 우리의 신앙 속에서 많은 사람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인격과 삶이 잎이 무성한 나무와 같아서 거기에서 깃드는 것입니다. 벌판이나 논과 풀숲을 누비며 돌아다니면서 벌레를 잡고 고기를 잡과 메뚜기를 잡으려도 놀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땀이 얼굴에 흐르는 새카만 아이들이 시원한 그늘이 있는 나무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곳에 앉아 있으면 저 들 가운데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땀을 닦는 농부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기가 있는 곳은 너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생명과 교제가 우리 안에 깃들어야지만 예수를 믿어도 온유하고 너그럽고 그리고 시련에 처하고 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의 인격에 깃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신앙생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봉사하는 것들, 물론 신앙생활을 이런 것들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 생활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적인 생활은 교회 생활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고 일하면서도 영적인 이런 삶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아무런 기쁨이 없고 그리고 그 일의 무게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일들이 성령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지 아니하고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론 성령은 바람과 같이 다가오기도 하고 불과 같이 다가오기도 하고 폭풍과 같이 다가오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미풍과 같이 다가오기도 하고 이슬비와 같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그 인격적인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게 되고 그 성령을 통해서 예배하고 그 관계가 올바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명 샘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진정이라고 하는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찾아감에 있어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 마음이 참되고 진실된 마음이라면 우리는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가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가 갈지를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아는 것은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인격의 깊이와 은혜의 넓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더 알고 싶어 하고 더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하므로 깊이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찾아가는 하나님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고하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너로 하여금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그 샘물, 영혼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리고 죄인인 너와의 관계를 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된 자신 사이에 뭔가 우리에게 진리 가운데로 데리고 가고 거룩한 곳으로 데리고 갈 메시야가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혹은 이 여인이 제일 처음 예수님을 나왔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 만약에 ‘네가 주님이 누구인지 알고 또 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고하였을 것이요 그가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라는 말씀 이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마다 모두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이전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회개의 경험을 보면 이 사실이 잘 입증됩니다. 자기의 이러한 곤고한 영혼을 안고 살아가다가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기쁨을 잃어버린 것,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내 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이전에 내가 누렸던 영적인 삶, 하나님과의 감격 가운데 섬겼던 이러한 신앙생활과 오늘 날 나의 생활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격차가 나의 많은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출발입니다. 자신의 얼마나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지적 받고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후회하게 됩니다. 그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찾게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찾게 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고 그 십자가는 우리가 한번 구원받을 때 죄 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을 돌이키실 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과 얼마나 자신이 큰 죄인임임도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같이 비천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이 여인과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났던 삶을 사는 죄인들도 부르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고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또 저에게 나를 나타내시리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여 저에게 나를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이십니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잃어버렸던 사람들도 십자가를 통해서 뉘우치고 그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자를 부르셔서 교제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싶어 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사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을 사귀지를 아니하고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변화를 주십니다.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안다 고는 하였지만 이 여인이 오랫동안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구약의 가르침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살아온 삶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삶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안았던 시몬을 기억하고 게십니까? 그는 ‘주재이신 하나님이시여 이제야 종을 편하게 놓아 주시는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일평생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에 묶여서 살아왔고 그 분이 오실 것만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품에 안겨 들어오시는 그 순간에 즉시 그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저귀 차고 포대기에 싸여 있는 난 지 8일 된 그 아이 안에서 인류를 구속할 메시야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여인은 전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고 그리스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여인의 인생은 점점 복잡해 가고 고통 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부여안고 살면서 고통 하는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물조차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이 이 여인에게 메시아를 일깨우고 그리스도를 일깨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메마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속에 생명 의 물과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가 누구 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루신 일이 어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에게 은혜를 입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약속하시고 주님께서 어떻게 그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고 받으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는지 우리는 깨닫고 또 깨닫고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고 그 속에서 생명을 얻게 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른 뼈와 같은 영혼들이 새롭게 살아나고 지치고 낙담한 영혼들이 새 힘을 얻고 빛 가운데 생명 가운데 나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을 불러서 끊임없는 대화 가운데 예수님이 이끌어 내고 싶으셨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인격이었다는 여러분은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이 속에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기를 사모하고 그 지식 안에서 자라나기를 깨닫기를 고대하고 기대하며 갈망해야 합니다. 마치 원초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고 그 욕망의 지배를 받고 그것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사모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안다’는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내가 아노니 라는 말보다는 이전에 내가 그것을 알던 적도 있었거니와 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그는 죄악 가운데 접어들고 인생의 비참한 지경으로 말려들면서 세상만사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한번 결혼하고 한 남자가 떠나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되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 번도 결혼하면서 적당히 살다가 집어치워야겠다. 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자를 5번이나 바꾸고 지금도 남의 남자와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녀가 결코 그리스도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찾고 기억하며 살았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생수의 대화를 통해서 그 여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찾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넣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불러내는 그리스도 예수의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변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셔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영혼 속에서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내시는 방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격 앞에 직면하시게 하며 그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고하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인은 무지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루살렘이냐 그리신 산이냐 장소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구약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끊임없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라고 이 여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오셔서 자기를 모든 무지 가운데서 구하시기 위해 이미 오셨고 이제는 여러분들이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떠나있는 사람들이지만 거룩한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하고 어떻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서 그래서 그 샘물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많은 열매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에게 더 이상 은밀하고 비밀하게 숨겨진 방법으로 알려주지 아니하시고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도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고 하나님과 화해의 길이 무엇인가를 위해 궁금하게 여기는 우리들의 위해 회복이 길이 무엇인지,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성경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며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권고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며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면서 우리를 이렇게 교육하고 계신 거십니다.
이 여인을 보면서 우리는 무지에 가득 찬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 다가가실 때 한없이 무지한 이 여인의 모습을 읽는다면 만약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보실 때에 어떻겠습니까? 이제는 이 여인의 때와 같이 은밀하게 찾아오셔서 개인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하나님께로 찾아가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우리 안에 갖는 비결을 말씀을 통해서 모두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이 여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샘물이 우리 속에 솟아나는 샘물이 우리 속에 없는 것을 숙명처럼 만족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 앞에 무지 속으로 드러날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로 하여금 이런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와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찾아갈 수 있도록 알려주신 말씀을 사모하며 탐구하고 깨닫기를 사모하고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신령한 말씀을 사모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간직하고 그 샘물을 먹고 마셔서 열매를 맺고 그래서 그 열매가 또 씨앗이 되고 울창한 숲이 되어서 지친 사람들이 우리의 인격과 교회에 깃들여서 쉼을 얻게 되는 이러한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물가의 여인같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