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떡, 그리스도의 몸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 11:24)
녹취자: 문미경
지난주에 저는 한국기독교 초기 신앙의 양대 산맥에 대해 말씀했고 우리가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체험하면서 살아가야 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드디어 성만찬 예식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원형이 되는 마지막 만찬사건을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하신일은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너희는 이것을 먹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데 있어서 소재로 사용한 것이 왜 떡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은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살을 상징하는 떡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이 두 가지가 대표적인 그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당신의 살을 떡에 다가 비유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떡을 실제로 떼어서 먹게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피로써 상징하게하시고 그것을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떡이나 포도주라고 하는 그 물건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떡과 포도주가 우리 몸에 대해서 갖는 관계, 나아가서는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성만찬에 의미를 드러내서 그 성만찬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아주 풍부하게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떡과 포도주.. 물건만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떡과 포도주가 있고 떡과 포도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몸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도 고려해야 하고 또 하나는 이 성만찬의 사건은 단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만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나아가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여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하나씩 차례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바로 전 날 밤,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생애에 많은 날이 있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충 미루어 짐작할 때에 빠르면 6시쯤 되었을 것이고 늦었으면 그 이후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12시 넘기기 전에 체포 됐을지도 모릅니다. 식사를 하시고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는 길에 체포 된 겁니다. 그렇게 체포되기 순간 그 같은 날밤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성만찬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염두 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 그리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으로 나아가기 위한 체포와 심문, 처형, 이 모든 사건들은 결코 예수님이 예상치 못하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 사건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리고 악한자의 손에 의해서 당신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최후를 마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물론 인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교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지만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이처럼 풍성하고 확실하고 깊이 예수그리스도께서 형상화되어 이렇게 예식으로써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이 일을 왜 이전엔 하지 않으시고 잡히시던 그 날 밤에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일은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제자들이 함께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살다가 이제는 이 예수그리스도를 제자들이 그날 밤에 잃어버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제자들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어렸고 여러모로 연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잡혀가셔야 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이 성찬예식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가 생명적인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인지시켜주시고 제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예식을 베푸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성만찬의 예식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복음에 대한 감격을 간직한 사람들이 이 성만찬에 참여하면 이 성만찬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그리고 그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그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할 수 있으면 습관화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 년에 두 번 이라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의미가 있는 날을 정하여 이 성찬을 거행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이고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그리스도가 그렇게 성찬을 통해서 제자들을 신앙을 강화해주고 싶어 하셨던 그 예수그리스도를 몸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마지막 날 밤에 제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이 성찬을 행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제자들과 예수그리스도 사이가 물리적으로는 잠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가 그런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조각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심어주어서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신앙을 넣어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은 구약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가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의 규례를 따라서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서 문지방과 인방, 문설주에 모두 피를 바르고 그리하여 애굽의 모든 초태생, 처음 난 자식을 치는 그 죽음의 사자가 그 피 묻은 집의 대문을 보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넘어갔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예식이 행해지던 유월절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이 바라보던 모든 구속의 예언들을 완전히 성취하시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대 제사장장과 장로들과 이런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잡되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유월절에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하면 백성들이 크게 반발을 하고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에 하지말자고 했고 그렇게 결심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구하려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를 못 박혀 죽이도록 하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죽이지 말자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게 된 일이 그 유월절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몇 가지 여건이 조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던 그 첫날 유월절의 주간이 시작되는 바로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늘여놓고 예수님 오시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아마 그 광경을 보면서 저런 상황에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모함해서 체포하던지 처형하면 호산나 다윗이며 외치던 무리들의 함성이 곧 반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서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닷새 사이에 백성들의 마음이 놀랍게 변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갈 때 구경하게 되었고 심문을 받을 때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폭도들로 변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가 그 유월절 주간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그 주간에 죽으시도록 하나님은 예정해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언제 예수그리스도가 돌아가시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의 눈을 가지고 구약시대에 살면서 신약시대에 오도록 끊임없이 그 구약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사람들에게 이분이 바로 세상 짐을 지고 가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그 백성의 죄를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가장 혁격하고 확실하게 알려 주실 수 있도록 돌아가실 수 있는 그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우연이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계획은 우연히 일어난다던지 혹은 멋대로 실타래가 뒤엉키듯이 그렇게 질서 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만세전에 준비된 계획을 따라서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거스르는 인간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고요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상관없이 바로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시는 그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범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반역과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서 구원의 역사의 물결을 주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죽음이 바로 유월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단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격정이나 어떤 뜨거운 용솟음치는 정열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가게 만들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바라보고 한순간에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연민의 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사랑의 정열이 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 인간의 모든 불순종과 사람의 계획을 넘어서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구원의 역사에 물결로서 흘러오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타락하여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 등지고 사람들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주님이 주신 완전한 세상조차도 저주를 받고 이제 땅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불만족과 투쟁과 고통과 시련과 질병과 가난과 슬픔이 뒤따르는 이 모든 오늘날의 뒤틀려진 이 모든 세계의 부질서와 이 모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세상 그 자체 내에 내재해있는 그 커다란 슬픔과 허무함과 그 많은 고통 이것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오히려 그 모든 역사를 움직여 오시면서 그 모든 허무를 다시 의미로 돌리고 잃어버린 구원을 회복하고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고쳐주시고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피조물과의 망가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킴으로 말미암아 구속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계를 인간과 이 우주 속에 창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놀라운 구원의 섭리가 인간들의 상태가 세상의 절망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도도히 흘러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불순종과 죄악을 넘어서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으로 당신이 구원해내야 할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어떤 인간의 불순종과 어떤 인간의 죄악에 의해서도 좌절되지 않으시고 계속 그 구원의 역사가 흘러왔습니다. 결국은 그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랍게 구원하기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죽음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원하지 않았고 더욱이 제자들은 더욱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도 세 번 즈음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소원을 주셨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마지막으로 꽃피우는 십자가에 사건을 바로 누구도 원하지 않던 유월절에 주셨는데 그것이 오늘 성경에는 잡히시던 날 밤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먼저 주께서 그 성찬을 이 뜻 깊은 예식을 주님께서 몸소 행하신 그 날이 바로 인류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바로 그 날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가는 짐승들의 그 피와 비명소리 속에서 그들을 죽여서 그 피를 문지방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서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렸던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였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가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어린양이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어김없이 당신의 뜻을 성취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그 신실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당신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만세전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신 그 신실함이 그때에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의 삶에도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사람을 의뢰하면서 살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런 마음을 이런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잡히시던 그날 밤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찬을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떡을 가지고 먼저 축사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기도하셨는데 사실 예수님 손에 들려진 떡은 예수님 몸이었습니다. 번역을 하면 떡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밥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밥을 퍼 가라사대 이것은 내 몸이니 너희는 서로 떠 먹으라고 번역해야지만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는 겁니다. 이 사람들에게 떡은 빵인데..빵은 그 사람들에게 주식이었습니다.
(예화) 여러분, 빵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저 같은 사람은 서울에 빵집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제게 있어 중요한건 밥입니다. 가끔 부득이하게 양식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날은 집에 와서 꼭 된장찌개에 밥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집회를 한번 간적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오늘은 좋은 데로 모시겠다고 하면서 저를 양식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삶은 마카로니 같은 것에 마요네즈 묻혀놓은 것과 어린애 주먹만한 고기가 하나 나왔는데 핏물이 뚝뚝 흘러서 더 구워달라고 해서 먹게 되었지만 양은 차지 않았습니다. 또 달라고 하면 이 강사가 걸신 들렸나 할까봐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나와 음식점에 들어가서 된장찌개와 삼겹살 시켜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그런 거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밥을 안 먹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그 떡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바로 그거였습니다. 빵을 구워서 보여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눈과 한국 사람의 눈은 같지 않은 겁니다. 밥을 들어 보여줄 때 이스라엘 눈과 한국 사람의 눈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먹고 사는 게 빵만이 아니라 고기 나물도 있지만 예수님이 그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너희를 위해 준 내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것은 주식이라는 겁니다. 하루도 그거 없이 살수 없는 주식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떡을, 빵을 들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주식입니다. 저거 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을 위해 싸우는 겁니다. 히브리어에서 빵이라는 말이 레헴이라는 말인데 베들레헴이 빵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레헴이라는 말에서 전쟁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떡이라는 말과 전쟁이라는 말이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분사형태로 취한 것이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전쟁이 무얼 위한 것이었는지 명백해집니다. 바로 먹고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빵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어떤 역사학자가 그런 말을 합니다. 인간이 먹지 않고도 살 수만 있었다면 이 비참한 전쟁의 역사는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빵의 문제가 전쟁의 깊은 커다란 문제인겁니다. 북한이 그런 겁니다. 그 사람들이 삼만 불 정도가 된다면 미국처럼 잘살게 된다면 한판 붙어보자고 큰소리 못 칠 겁니다. 문제는 빵의 문제고 떡의 문제입니다. 그 자체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빵의 자체가 생명인 것입니다. 그걸 잃는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빵을 드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매일 이 빵을 먹지? 너희들이 이것 없이 살 수 있느냐? 매일 아침 이것들을 너희들은 구워야하지? 너희 조상들은 이 빵을 얻기 위해, 만나를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마다 나아갔지?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이 빵 없이 단 하루도 살수 없는 것처럼 너희들이 나 없이 살수 없단다..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너희를 위하여 찢기고서..그래서 십자가에 산산이 찢어져서 너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를 위해서 내가 형벌을 받고 내 몸이 너희 죄악의 구속을 위해서 찢어지지 아니하였다면 너희는 살수가 없다..라고 보여주신 겁니다.
예수님 손에 떡이 들려졌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 예수그리스도께서 손에 떡을 드셨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제자들은 느낄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예수님은 느끼고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잠시 후의 일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잠시 후에 일어날 고난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서 자기 몸을 죄인들의 그 죄의 저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갈갈이 찢기셔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아셨던 것입니다. 손 위에 떡을 올려놓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이미 찢기고 고난을 받은 당신의 몸을 가리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위에 축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몸이 무슨 음식물입니까? 축사하셨다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즉시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지치고 주린 그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그 어린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놓고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를 앞에 놓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해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축사를 받던 그것은 보리떡과 물고기였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히 먹고 주식으로 삼던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예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놓여있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놓인 이 빵은 곧 당신의 몸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축복하실 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 자신이 잘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갈갈이 잘 찢어져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구속을 위해서 사용되게 해달라는 당신 자신의 몸을 음식물 삼으시는 축사하신 사실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소원이었습니다. 일평생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 사셨고 그 죄인들을 먹이고 입히고 그 죄인들을 고치고 치료해주시기 위해서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하고 더럽고 어두운 이 세상에서 죄인처럼 종처럼 노예처럼 사셨지만 마지막 예수그리스도께서 할 일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의 몸을 다 찢어서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킬 때까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살을 갈갈이 찢으시도록 자기를 드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의 살을 다 찢어서 구원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의 입에 넣어주시는 그래서 급기야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어 살고자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자기의 몸을 음식자리에 놓고 축사하셨다는 겁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의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과 창으로 자기의 몸을 다 찢으셔서 그 구원받아야할 백성들의 양식으로 삼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살을 찢으시므로 우리는 세상에서는 주린 자 같아도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굶주린 자가 같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배부른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무엇으로도 만족을 누림이 없이 주린 인생으로 해갈을 하던 인생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영혼의 배부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해갈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나서 영혼의 허기짐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싸우며 걸어갈 용기가 생겼고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과 댓가를 치르면서 살아갈 그런 각오를 갖추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찢어서 우리의 몸을 축사하셨기 때문에 아니고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바로 잡히시던 그 날 밤, 예수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어서 축사하심으로써 이것이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이 마치 음식인 것처럼 그 위에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동화 속이나 전해 내려오는 전설 속에서 자식을 위해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인 부모의 이야기나 혹은 엉덩이의 살을 떼어서 자식을 위해서 약으로 삶아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자식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역하고 자기를 배척하고 미워하며 결국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그 죄인 된 백성들을 하나님께 반역하고 거스르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패역무도한 우리들을 위해서 당신의 살을 놓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축사하신 겁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백성들의 영혼의 허기짐을 기억하옵시고 이제 내가, 내 살을 이 허기진 영혼들의 양식으로 내놓사오니 아버지여 이제는 내 살을 찢으사 영혼을 배부르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끊임없는 대적과 고난과 육체의 연약함에 시달리면서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일생은 쉼도 없고 안식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이 땅에 있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쏟아 부어주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귀한 것들이 그분을 위해서 아껴진바 있는 것이 있었으며 그 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지 않는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시간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당신의 건강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그리고 그 모든 안락한 삶과 휴식도 우리를 위해 포기했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하늘의 보좌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포기하셨습니다. 33년 동안 인생을 사셨지만 그러나 그중 어느 한부분도 자기를 위한 인생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3년의 공생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같은 우리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생애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식사하실 수 없을 정도로 주무실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고열을 짜내는 모든 헌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바쳤습니다. 언제나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가장 커다란 감정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자 되어버린 우리를 향한 불타오르는 연민과 억제할 수 없는 긍휼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리하는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은 아버지의 눈물이었고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도무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죄의 사슬에 매여 죄와 사단의 세력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보면서 아파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그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라는 그 말에 가장 적합한 말은 예수를 무리를 보시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아버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하시고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에겐 무엇이 남아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전대도 가지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돈 통은 유다가 수시로 도둑질 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에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 있는 것은 그저 몸 하나밖에 남은 것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우리를 위한 양식으로 내어주시고 싶어서 자신의 몸을 놓으시고 하나님 앞에 축사하시는 것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도무지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였지만..주님이 축사하시니까 어른만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그렇게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축사는 응답되어서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어둠과 죄악가운데 살아가다가 예수그리스도의 축사로 말미암아서 그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셔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몸에서 찢으신 살을 먹고 생명을 얻었고 그 피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도 예수그리스도의 몸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오늘 그 앞에 나와서 자기의 허기진 영혼을 고백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그 살로 배부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거절하시지 않으시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축사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몸이 다 떼어지고 찢어지면서도 자기의 살이 찢어져서 그것을 먹고 우리들이 배부르고 영혼의 허기를 면하여 영혼이 새로운 은혜와 힘과 구원을 힘입어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살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걸 원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으로 인해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떡과 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찢으신 몸이 우리를 살게 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얼마나 잊고 삽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떡과 물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먹었기에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느끼고 순간순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 살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번에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축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으시는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자기의 몸을 양식으로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제 우리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 한주먹밖에 안 되는 이 인생의 육체가 후패하여지고 우리의 피가 혈관이 굳어버리고 우리의 혀가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하나님 제가 이제 인생의 고깃덩어리를 들고 축사하오니 하나님, 우리의 인생 갈갈이 찢어서라도 당신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화) 저는 한때 매우 좋아하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괴르나라고 하는 사람이 투박하게 새긴 목판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그 예수님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고 있는 한 남자를 그린 투박한 목판화입니다. 그 밑에 독일어로 쭉 기도문을 썼는데 그 중에서 처음문장이 언제나 판화를 볼 때마다 제 마음을 후비고 들어옵니다. ‘주님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저의 것이옵나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찢어서 우리의 구원을 내주시기 전에 자신의 몸 위에 축사하셔서 그리고는 이제 그 떡을 제자들이 떼어먹게 되었습니다. 한 덩어리의 빵을 제자들이 뜯어서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뜯어먹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찢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같은 하나님의 진노에 시련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처참한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아들이 자기를 찢으시는 권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제자들이 그날 먹은 그 빵은 어디에 갔을까요? 빵은 몸에서 모두 녹고 소화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의 일부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살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떡을 먹고 생긴 그 살과 예수그리스도의 떡을 먹지 않은 살이 기술적으로 분리해내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하겠습니까? 먹은 것은 떡이었지만 먹은 그 떡이 속에 들어가서 이제는 자신의 몸에 일부가 되어버려서 그래서 혈관은 구석구석, 힘줄구석구석 모든 속에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죄를 위하여 나의 몸에 축사하고 내가 나를 떼어 너희에게 나눠주노니 너희는 나를 먹고 마치 너희들이 먹은 그 떡이 너희의 살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혈관구석구석에 스며들어서 이제는 그 떡을 너희 몸속에서 따로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처럼 너희도 나를 먹고 그러면 내가 너희 속에 들어가서 나도 너희 살과 피 속에 흐르리라.
여러분 우리가 주님과 헤어질 수 있습니까? 주님과 떨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예수그리스도를 골라내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밖으로 나오시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원하지만 하나님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빵으로 형상화 하셔서 축사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제자들이 그 떡을 매끼니 먹을 때마다 예수의 사랑, 그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희생을 잊지 않는 사람들은 매끼니 식사를 할 때마다 그리스도예수의 고난을 기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지키는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던 똑같이 생긴 그 빵이 그들의 식탁에 있었을 때 그들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매끼니 마다 그들은 부흥회를 하셨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 축사하는 기도를 동일하게 드리면서 하나님, 우리가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찢으신 은혜 때문에 주님, 저희들이 살아 있사옵나이다 라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다 찢으셔서 우리에게 나눠주기 위하여 축사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축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간에 집회를 다녀오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참 초조한 마음이 듭니다. 이제 인생은 이렇게 속히 지나가는데 무얼 가지고 이 하나님 앞에 받은 놀라운 사랑에 어떻게라도 조금이라도 보답하면서 살 수 있을까? 정말 이제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무한하고 넓은 사랑을 깨달아 이제는 한번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놓고 하나님 앞에 축사해야할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 우리의 인생을 축사하오니 하나님, 우리의 인생을 다 떼어놓으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사용해주시고 그 나라를 위해 사용해주셔서 우리의 몸 우리의 인생이 당신의 나라에 녹아들어서 우리는 죽어도 우리의 분신이 남아서 당신의 나라에 숨 쉬게 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 속에서 숨 쉬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정신으로 우리들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받는 중요한 도전 하나는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축사하신 그 떡이 제자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예수그리스도께서 느끼시는 그 슬픔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느껴집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쁨과 그 즐거움이 여전히 우리의 것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그분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고 있고 그분의 보람이 내 보람이 되고 있습니까? 그분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있고 그분의 고난이 내 고난이 되고 있습니까?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제일먼저 떡을 떼고 그 떡을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두 가지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것이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 때문에 예수 죽은 것을 기억하고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괴수라는 사실을 잊지 아니하며 날마다 예수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주께서 찢으신 그 살을 향한 슬픔을 가지고 그리고 그 사랑의 깊이를 알았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의 인생에 축사하며 당신의 나라를 위해 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제 담장을 쌓게 되었고 단절되었지만 용서받고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들이 날마다 화목해하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분을 나의 삶 속에서 날마다 현재적으로 느끼며 그 고난을 기억하고 그 고난의 정신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야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날마다 이렇게 사는데 까지 나아가도록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