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꺾어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오대산 바로 아래였습니다. 방학 때면 꼭 집에 갔습니다. 교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려서 부모를 떼어 놓는 가정도 있는데 이는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서울로 오고 부모님과 떨어져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관계 단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 년에 여름에 두주, 겨울에 두주를 놀고 그 이상은 놀지 못하고 중학교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지금은 길이 워낙 잘 닦여서 두 시간이면 충분히 오대산까지 갑니다. 옛날에는 아홉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벽에 5시쯤 신림동에서 출발하면, 양평에 8시 30분쯤 도착해서 아침을 먹고 다리가 끊어져서 버스를 나무 배 위에 싣고 건넜는데, 어떤 사람은 배가 뒤집혀서 죽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버스에 탄 채로 나무배에 타고 건넜습니다. 배가 조금만 기우뚱해도 배가 뒤집힙니다. 그래서 버스 속에 탔던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무지했습니다. 게다가 강원도 길은 참 험합니다. 옛날의 길은 산을 뚫고 토목공사는 생각을 못하니까 생긴 대로 놀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배수로를 파서 길을 이리로 쓰러지게 해야지만 차가 원심력에 의해 떨어지지 않는데, 공사비가 없어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서 토사가 쏟아지면 차랑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강원도 운전사는 워낙 유명합니다. 차사고 나는 이유는 브레이크나 핸들 고장입니다. 몇 년 전에 나오는 지프차도 핸들을 한번 꺾으면 스스로 안돌아가서 돌려야했습니다. 무쏘하고 코란도도 그렇습니다. 요즘 차는 막 빨리 달리면 핸들이 무거워지는데, 그 때는 빨리 달이면 핸들이 구름위에서 공 구르는 것처럼 굴러서 핸들을 꺾을라치면 정신없이 구르는 것이죠.
여러분 살면서 이런 의문 들지 않나요? 어떤 사람은 크게 죄도 안 짓고 하나님 마음 아프게도 하지 않았고, 교회 나온대드라 안나온대드라 이런 이야기도 안하고 있는 듯 없는 듯 꾸준히 예수님 믿고 얼핏 보기에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은 안정성도 떨어지고, 죄도 짓고, 침체도 하고, 어떤 때는 이를 악물로 하나님 앞에 대들기도 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후자의 사람이 더 많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은 간증을 남기는 것 같은 그런 것 의문이 들지 않나요? 그 비밀은 한 가지 오늘 가르쳐 드릴게요. 꺽어짐이에요. 그렇게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강퍅해져서 하나님께 맺힌 것 많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교역자 찾아와서 신앙 때려 칠 거라고 공갈하기도합니다. 그렇게 완고하게 고집대로 혈기로 살고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말씀 앞에 이 사람은 꺾어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꺾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꺾어진다는 것을 결국은 불순종하고 가던 길을 꺾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차가 잘 달려가고 속도가 뛰어난데 조향장치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속도 빠른 것이 큰 재앙입니다. 차도 안가는 것 같아. 핸들이 잘 움직여요. 그러면 지혜로운 운전수가 어느 차에 타겠는가? 차가 좀 느려도 운전수 맘대로 운전되는 그 차를 탑니다.
나는 이제까지 영혼들을 돌보면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사례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동행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냐 하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성실한 사람이냐?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큰 특징은 잘 꺾어지는 것입니다. 혈기를 막 부리다가도 하나님이 한 대 치시면 즉시 무릎을 꿇고 엉엉 우는 사람입니다. 옳지 않은 길을 잘못 선택해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거나 치실 때에 꺾어지는 사람입니다. 노회에서도 그래도 교회에 생명적인 은혜의 파동이 일고 있는 교회들을 보면, 목회자에게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 꺾어질 줄 아는 목회자입니다. 대화를 해보면 압니다. 간증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내가 그리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한번 가르쳐주셨는데, 내가 정말 바보였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정말 대단한 교부였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창조 목적을 거스르는 것은 운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지상에서 그런 경향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차선은 가능한데 바로 꺾어지는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다른 제사”가 뭡니까? 속건제, 속죄제 등 희생 제사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제사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그것보다도 순종입니다.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샤먀베콜”이라고 나옵니다. 영어의 call과 비슷합니다. 앞에 전치사가 나옵니다. 듣는 것 앞에 항상 따라 오는 베(into)가 옵니다. 들리는 것이 아니라 hear into his voice 그의 목소리 속으로 들어가서 듣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목소리 속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목소리 듣는 것! 이 말씀을 하는 사람이 “사무엘(하나님이 들으시는 사람)”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깊이 듣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깊이 소리를 듣습니다. 애정이 없는 사람의 귀에는 애들이 다 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엄마의 귀에는 들립니다. 배고픈 소리, 오줌 싸서 우는 소리! 다 들립니다.
그런 듣는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섬기는 것은 성능 좋은 핸들 망가진 차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기여 못합니다. 끊임없이 꺾어져야 창조 목적에 기여합니다. 목회하면서 어떤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순 날라리고 심지어는 술 먹느라고 예배 못 오고, 교회 오다고 운동화 끈이 끊어져서 못 왔다는 둥 황당한 소리도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누가 나무랄 수 없는 모범생인데, 그것뿐이고 그 이상이 없습니다. 겉모양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 같은데, 마음속은 제 잘난 맛에 제 좋을 대로 살고 절대 안 꺾어집니다. 그런데 전자의 사람은 막 살다가 인생의 기로에 놓이면, 결혼이나 등등 그런 기로에서 자기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꺾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붙듯 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의 핵심을 “회심하게하고, 회심한 것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지만 후자 형 사람입니다. 착실한 사람은 아니었고, 날라리처럼 기도 안하고 놀다가도 어떤 시점이 되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거역하는 것은 사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고 듣지 않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 같다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죄는 사신 우상을 섬기는 죄였는데, 바로 그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에 확 쏟아져오는 은혜의 빛은 자기 꺾음에서 나옵니다. 우리 사역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New method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는 자기꺾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자기 꺾어짐이 매일은 못하더라도 몇 달에 한번만이라도 꺾어짐이 있으면 거기에서 피를 토하는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제일 하위가 침 바른 설교입니다.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땀 바른 설교입니다. 주석 찾고 남의 설교집 찾아서 열심히 준비합니다. 세 번째 설교가 눈물을 바른 설교입니다. 그게 뭐지 눈물의 냄새가 납니다. 그 설교 속에 눈물의 설교는 설교자가 설교할 때 최소한 설교는 설교대로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분리 되었다는 생각이 안들고, 자기가 촛농처럼 녹아서 설교자 안에 용해되어 버립니다. 최상의 설교는 피를 바른 설교입니다. 꺾어지고 감동만 받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꺾어짐 그대로 사는 몸부림이 있는 피 바른 설교입니다. 피바른 설교는 철학자들의 이론과 모든 논리를 파하는 아주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무릎을 꿇게 하고, 억눌려 희망이 없던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죄 지은 자들을 하나님의 사죄 앞에 데려가고 완고한 자의 마음을 녹여서 강물처럼 흐르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영혼을 먹일 뿐 아니라 영혼을 섬기는 이 길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영혼을 돌볼 때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상담을 할 때, 침 바른 권면은 허공을 울릴 뿐이고 책을 읽고 열심히 권면하는 땀 바른 권면도 허공을 울립니다. 여러분들이 먼저 말씀을 먹고 눈물을 흘리고 자기를 꺾이는 비통함을 경험하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호주에 갔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초대를 해서 어머니라는 사람이 샤브샤브를 준비하고 깍듯이 대접하는데,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자기 아들이 생자배기인데 한국에 가서 열린교회 갔는데 변화되었답니다. 그날 설교가 은혜로웠느냐하는 것인가 했는데, 그보다도 새가족 위원 중 한 사람이 자기를 데려가서 복음을 들어보았냐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울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이 교회는 복음을 말하면서, 설교자도 울고, 평신도도 자기를 데려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들어 보았냐고 하면서 울더랍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혼들을 앉혀놓고 하나님에 관해서 눈물에 젖은 가르침으로 지체들을 가르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수없는 피 흘리는 꺾어짐을 경험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어야 합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어떤 설교자가 단에서 내가 알지 못하던 하나님에 대해서 희미한 빛이나마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알려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설교자가 그 설교를 하기 전에 수없는 자기꺾임 중에서 피 흘리며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바가 있는데, 안 꺾인 대로 그냥 살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그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회초리를 많이 맞고 많이 아픕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한 대서 자기를 강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비밀입니다. 아무 생명 없고, 아무 생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불순종하고 주님 거슬러도 주님이 꺾으실 때, 꺾어지는 사람들은 간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다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꺾어짐은 결국은 옛 자아의 목을 부러뜨립니다. 그 속에서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길이 있습니다. 그냥 밋밋하게 주님이 내 버려두신 채 우리 생긴 대로, 우리 열심에 취해서 그렇게 일생을 사는 방법이 있구요. 때마다 나타나시는 하나님 앞에 꺾어져서 우리가 보지 못하던 세계를 보고 그래서 눈물을 바른 가르침, 피에 절은 설교 남기면서 끊임없는 자기 꺾어짐에 길을 가는 그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우리들이 걸어가야 하겠습니까? 누군지 기억은 안 나는데, 청교도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참회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아오던 그 강퍅하고 완고한 그 마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옥합을 깨어 내 놓은 여인처럼 그것을 산산이 부스며 오 하나님 “I'm nothing, You're everything” 그러며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 내릴 때, 하나님의 모든 뜻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사랑을 깃발을 내려 꺾고 하나님의 사랑에 승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싶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항상 올바른 사람은 아니지만 주님의 원하실 때 꺾어질 수 있는 목회자, 온전한 사람도 아니었고, 덕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도 아니었지만 일평생 자기 꺾어짐의 길을 갔던 사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마실 수 있었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여러분도 그런 기도 제목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길 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