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을 통해 보는 죄와 성화 1
녹취자 : 이경순
사실 존 오웬이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들이 신학교 다닐 때 특별히 영국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슬쩍 스치고 지나간 인물이었고 여러분들은 부흥과개혁사의 책이나 제 책을 읽으면서 존 오웬에 대해 좋은 분이라는 인상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고 또 잊혀진 존재인 것입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1993년도에 열린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개척할 때에는 교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설교자로 저를 불러주시고 말씀에 깊이도 상당부분 열어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일 년 열심히 개척교회 하면 한 300명 이야 안모일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아시고 철저히 저를 낮추셨습니다. 1년 동안 했는데 목회적인 성과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펑펑 울고 갔는데 놀랍게 두 가지는 절대 안하더라고 등록하는 것 하고 헌금하는 것 은 안합니다. 그래서 일 년 집회도 다니고 나 자신을 많이 소진해서 일 년쯤 지났을 때 깊은 침체가 와서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하고 되는 게 없나 그리고 기도도 잘 안되고 낙심이 되어 있을 때 그때에 존 오웬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단 한권도 번역이 안 되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전부다 원서로 되어 있었습니다. 원서는 1994년도 이전에 구입을 해 놓았는데 보다시피 책이 그렇게 친근감이 가게끔 그렇게 편집도 안 돼 있고 영어도 그렇게 썩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그런 스타일의 문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는데 도대체 나의 침체 이런 것들을 내가 그래도 명색이 교수고 설교자인데 많은 사람들을 침체에서 일깨우고 그랬는데 나는 이렇게 침체되었을 때 어떻게 하나 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며칠 동안 끙끙 앓고 있었는데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존 오웬을 한번 읽어보지 않겠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존 오웬의 책을 들었는데 어렴풋이 들었던 그 사람의 논문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몰티케이션이라고 하는 죄 죽임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6권을 빼서 몰티비케이션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친숙하지 않은 영어이고 영어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교회에 영국인이 한사람 있었는데 읽으라고 주니까 못 읽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읽으니까 영어가 원래 그런 줄 알고 하지 현대에 가면 너무 틀렸습니다. 단어도 사전에 안 나오는 단어도 많고 어쨌든지 인내심으로 아파서 침대에 기대어서 6권중에 그 몰티비케이션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까지 가보지 않았던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침대에 꼬박 앉아서 그것을 줄을 치면서 읽기 시작하는데 막 빛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하루 종일 꼼꼼하게 읽으니까 한 20페이지정도 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삼일인가를 해서 몰티비케이션을 다 끝냈을 때 제가 우리 집사람 보고 그랬습니다. ‘여보 난 이제까지 짐승처럼 산거 같아 신앙생활이 이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신앙생활을 내가 보았어! 그때 받았던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존 오웬에 천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이후에 저의 생활이 너무 불안정하고 교수생활하면서 바쁘고 목회였기 때문에 계속 읽긴 했지만 온전히 헌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읽어나가면서 몇 년 후부터 마음에 작심을 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해서 한 8년 정도 됩니다. 그러면서 읽어나가면서 그동안에 경험했던 것은 말로다 설명할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이제 것 가보지 못했던 신앙의 세계 그리고 내가 이제 것 까지 가본 적이 없었던 아주 놀라운 지식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결론은 청교도들 중의 한사람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존 오웬이 청교도가 모두 같은 청교도가 아니라 청교도만 하더라도 약 10만권정도의 작품을 남겨놨습니다. 그 중에서 5만권정도 남아 있다고 하던데 그중에 2만권정도가 상당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인데 일단 존 오웬에 심취해서 오웬을 이해하고 나니까 다른 청교도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분들에의 입장에서 좀 뭐라 하겠지만 대학생들이 쓴 논서를 읽다가 초등학생이 쓴 기행문을 읽는 듯 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그 지식과 신학의 구도의 차이들이 아주 현저 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저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오웬에 천착하면서 그 작품들을 죽 읽어갔습니다. 오웬이 비블리지지 칼라지까지 스물네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사실은 모두 읽지 못했습니다. 뒤의 몇 권은 아직 못 읽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기위한 목적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영적생활과 목회를 위해서 읽으면서 지나갔기 때문에 훨씬 더 부담감 없이 마음에 깊이 빨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웬의 책을 읽다가 기도원에 가서 밤새도록 읽고 새벽에 세수하고 내려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오웬목사님의 책에 심취하니까 설교준비도 너무 쉬워졌습니다. 일 끝나서 항상 그분이 된 것 같은 그런 착각 속에서 성경을 보는 눈들이 열리게 되고 목회를 어떻게 해야 되고 목사가 무엇 하는 사람이고 하는 것들에 대한 차근차근한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면 그 모든 과정들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되고 이렇게 강력하게 오웬의 책이 좋다는 것을 도전을 해도 여러분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오웬을 읽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읽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 더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어 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밀림 속에 들어간 것처럼 한없이 우리를 끌고 들어가서 입구가 어디였는지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로 논리의 밀림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보통 인내심을 가지지 않고는 이 책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하자면 오웬의 신앙이나 신학의 결과물들은 약으로 말하자면 아플 때 한 알 먹는 아스피린이나 진통제 같은 그런 약이 아니라 보약입니다. 그래서 오웬을 읽으면서 이것을 오늘 배워서 다음 주에 뭘 좀 써먹어야겠다고 하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자신의 신학에 이끌려서 깊이 공부해 들어갈 때 그때에 탁월한 것들을 얻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쏟아내기 전에는 먼저 남에 훌륭한 것에 깊이 천착 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오웬을 공부하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은 여러분들이 누구를 공부하던지 제대로 된 신학사상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한사람을 깊이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소극적 지식과 적극적인 지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소극적인 지식은 예 ,아니요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은 신학에 있어서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훌륭한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지식을 가져서 남이 얘기 하는 것에 대해서 예 ,아니오. 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것을 대해서 논리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신학의 체계를 가져야 되는데 그런 것 들을 위해서는 한 사람을 깊이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 모본을 보인 사람주의 한 사람은 존 파이프 목사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존 파이프 목사님이 에드워즈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한 30년 동안을 멘토링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곧 바로 예전에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도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군데군데 읽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웬을 공부하면서 아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되겠구나 하고 맛을 들이면서 에드워즈로 넘어가서 에드워즈를 계속 천착하면서 에드워즈 전집을 공부해 나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게 되니까 어떤 유익이 있냐면 오웬 한사람을 공부를 해서 오웬의 사상을 전부다 받아들이게 되고 그리고 후에 오웬 이라고 해서 모든 사상에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좀 결함이 있는 것 같다는 사상들은 이제 다른 것을 공부해가면서 비교하면서 내가 따르고 싶지 않은 것들은 빼내게 되면 온전한 사상의 체계를 전수받으면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공부하다보면 다른 저자를 공부할 때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에서 하나의 틀을 세우고 나면 그담에는 공부할 때 는 굉장히 빠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공부할 때는 에드워즈의 저작이 결코 존 오웬의 저작보다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신학의 세계는 아주 메크로코즈믹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대우주적인 그런 것들을 펼쳐내고 그리고 에드워즈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사실은 신학자이기보다는 철학자 쪽에 훨씬 많이 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훨씬 인물됨 자체가 존 오웬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런대도 굉장히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고 존 오웬에 대한 이해 없이 에드워즈를 공부할 때보다 에드워즈에 대한 훨씬 정확하고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아우구스트누수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도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만 공부했다면 바르게 판단하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이 두 사람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을 꼽으라면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아우구스티누스고 네 사람을 꼽으라면 거기에 칼빈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칼빈 이후로 이어지는 개혁파 정통 신학 안에서 지금 이 세 사람들을 모두 녹여내면서 이 참된 신학의 전통과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개혁파 신학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그런 것들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훌륭한 매트릭스들을 개혁파 정통신학 베자이후로 이어지는 그리고 멜랑 스톤 이후로 이어지는 16세기 중엽부터 시작해서 18세기 초반까지의 네덜란드와 스위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신학에 내가 궁극적으로 고민하던 신학에 답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쪽 분야에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더 천착을 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나의 생애를 신학적으로 마무리 짓고 싶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목회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가시밭길입니다 .늘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젊고 기회도 많이 주어서 있으니까 부지런히 공부를 해서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신학이 있는 목회를 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그것을 온전히 보전하고 확장하는 일입니다. 확장은 그야말로 계시 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계시의 해석에 대한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3중적인 임무를 갖는데 한편으로는 자기 앞서 이미 이루어진 계시에 대한 해석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그것들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잘 하지를 못합니다. 특별히 이런 심각한 약점이 개신교 신학에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여러분들이 새로운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신학을 전개하는 노력들이 개신교 안에 현저히 부족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신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정통적인 신학에서 많이 이탈하한 가운데 자의적으로 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되곤 합니다. 이렇게 자기 시대에 신학을 독특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미 주어진 세대에 신학의 결과들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복음서에 나온 것처럼 서기관이 곳간을 드나들면서 두루마리 책을 가지고 오는 것처럼 그렇게 신학적 유산의 창고를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 개신교에서는 심각하게 잘 못합니다. 훈련이 안되어 있고 그리고 이제 종교개혁이전에 있었던 모든 자료들을 가톨릭의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그 문제를 못 다루겠습니다만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도 나중에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은 카톨릭 안에 있었던 중세의 신학사 속에서 그 근거를 가지고 그리고 형성되어 내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중세신학의 후기에 가게 되면 기존에 계속 되어오던 중세 스콜라 신학의 중대한 반전을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윌리엄 오캄을 비롯해서 많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나오면서 여태까지 계속되어 나오던 아리스토텔레스 적이고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일률적인 그런 어떤 세계관과 그리고 진리에 대한 인식 존재에 대한 사유에 중대한 변혁이 오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저는 철학자적으로 볼 때에 18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독일의 관념론 이라든지 그담에 그 이전에 데카르트 칸트의 출현 이 모든 사상적인 기저들이 사실은 중세의 스콜라주의 안에 그 모판이 다 나타나고 그것들의 영향을 먹으면서 이런 것들이 생겨났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역사적으로 있었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이런 것들도 전부 다 거기에서 자양분을 먹고 자랐고 그리고 자양분에 힘입어서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겨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내려온 학문의 전통과 계시의 해석의 전통 중에는 오류도 있고 참인 것도 있는데 참 인 것들을 잘 물려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명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시대의 고민을 해결하고 신앙적인 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내는 가운데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았던 세대들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상황이 진리를 저절로 보게 해 주는 것은 아니고 신학의 도움을 받아서 성경자체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있을 때 특정한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상황이 없었더라면 볼 수 없었던 진리의 다른 국면들을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결과물로 남을 때 그 시대가 바로 자기의 교회 안에서 그런 계시의 해석을 풍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세 번째 사명이 무엇이냐면 오고 오는 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입니다. 말하고 떠들고 흔들렸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 버립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서 학문의 형태로 지성에 담아서 그것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는 이것을 잘해서 볼륨이 커지고 어느 시대에는 이것을 잘 못해서 볼륨이 아주 미약해 지는 것입니다. 불 충성한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오면서 그러면서 말하자면 이 교회의 역사가 진리를 담지 한 신적인 기관으로서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존 오웬 그러면 청교도 중에서 공부를 뛰어나게 많이 한 탁월한 사람 영적인 탁월한 지도자 그리고 좀 더 많이 안다면 영국의 성공회주의에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영국을 크롬웰과 함께 참된 종교개혁 신앙으로 바꾸어 놓으려다 실패 했던 사람, 그런 정도로 우리들이 이해합니다. 사실은 영국 안에 있었던 청교도로소의 존 오웬은 사실은 영국 안에서의 인물이 아니라 더 크게 보면 대륙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났던 개혁파 정통주의에 한 산맥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혁파 정통주의 이야기를 좀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에 물론 그 이전에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존 후스라든지 좐 위클리프라든지 이런 종교개혁의 이전의 개혁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존 칼빈에 의해서 그 종교개혁이 아주 세련된 형태로 무엇을 믿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정연되게 됩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기독교 각료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 책이 천년도 부터 이천년까지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던 열권의 책가 운데 한권이 들어갑니다. 그 내용을 보면 여러분들이 요즘 보면 도대체 어떻게 이 책이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열권의 책 가운데 한 권 이 될까 라고 의심이 가지만 그 16세기의 문맥으로 가면 그 책은 엄청난 핵폭탄적인 위력을 가진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초기에는 저건 아닌데 저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스위스의 개혁자들조차도 부분적으로밖에 전체적으로 정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 젊은 신학자 존 칼빈이 이것들을 정리해 내게 되는데 그것이 기독교 각료입니다.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서 50세가 넘어서 최종형태가 마무리되게 되는데 사실 우리들에게 전해진 이 개혁파의 유산 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가운데 루터파도 있는지도 모르지만 루터파의 경우에는 루터가 방대한 저작전집을 남겨놓지만 루터파 자체 안에서도 사실 안 읽혔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방대하고 산만하고 필사 자들이 20년을 베껴 써야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니까 사실은 잘 안 읽히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이제 기독교 각료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그것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치면서 ‘맞아 우리가 가톨릭하고 이런 점이 다르고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바로 이거야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특히 개혁파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렇게 칼빈의 기독교 각료라고 하는 유산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각료라고 하는 것은 알다시피 그렇게 마르틴 루터 그리고 칼빈이 신학을 세우는데 있어서 커다란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이 마틴 부처 라든지 그리고 칼빈이 루터도 무척 존경 했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이 나를 마귀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 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라고 할 정도로 까지 그렇게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멜란히톤이나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자원들을 받으면서 세련된 형태의 기독교 각료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역사를 보면 일단 처음 어떤 일들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반동이 생겨 날 때는 항상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반응해서 오른쪽에 있는 것 들을 비판하면서 왼쪽으로 많이 튀게 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많이 튀었고 칼빈은 그것들을 조정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런 요소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 이후에 멜란히톤 그리고 베자 이런 사람들에게 이어지면서 화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이런 곳을 중심으로 해서 각기 개혁신학이 형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문맥이 카톨릭에 대해서 반항을 해서 무조건 뛰쳐나오는 때가 아니라 그 다음세대에 내려오면서 치열한 가톨릭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되는 것입니다. 벨라노니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신학자였는데 조직적으로 가톨릭이 소유하고 있는 신학에 대한 자원이라든지 축적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개신교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양을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학과 그런 신학을 다 동원해서 조목조목 개신교 지도자들의 신학 집을 비판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도전을 해 온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세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개하면서 물고 나온 그런 신학의 방법들이 스콜라주의 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원래 스콜라는 라는 말은 희랍어 스콜레 에서 나온 말인데 한가롭다는 뜻입니다. 원래 공부는 한가로운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먹고살기 고달픈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스콜라주의의 특징은 인과관계에 의해서 이것들이 이성적으로 추론의 형식으로 반론과 답변의 양상을 가지고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문의 방법을 사용해서 비판을 하니까 그것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방어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내용은 그들의 것과 달랐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그런 방법들을 사용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의 방법에 대해서 이미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해 이후에 태동되는 개혁파 정통주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아주 충분한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존 오웬이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신학들이 형성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신학이 종교개혁자들이 한쪽으로 치우쳤던 예를 들면 이성과 신앙의 문제라든지 학문과 철학의 문제라든지 이런 등등의 것들에 대해서 정돈되게 되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전수받고 있는 아주 개혁파의 정통 교리라고 하는 상당 많은 부분들이 바로 그 시대에서 칼빈의 신학을 발전한 가운데 형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여러분들은 기독론에서 제 3직 이론에 대해서 공부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3직론 말입니다. 그게 정통 신학 안에서 엄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실 칼빈에 의해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논리를 발전시키는 가운데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예정론에 대한 논쟁에 관한 이런 것들로 이렇게 해서 신학이 죽 형성되면서 후에 와서는 이것들이 이성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 정통파 신학이 이성주의에 의해서 오염이 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미로 라고 하는 이단인데 프랑스 쪽에 소모로 학파 아카데미를 만들어서 거기에서 어떻게 하든지 개혁파신학과 당대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이성주의적인 사조들을 융합하여 이것들이 이성적으로 설명 할 수 있는 신학으로 조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에는 이성주의적인 사조들이 제네바 아카데미에 침투하면서 신학자체를 서서히 침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학 자체가 18세기 초반 1730년대 이후로 넘어가게 되면 제네바 아카데미가 가지고 있었던 독특했던 신적이고 장엄하고 그담에 계시 중심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정통적인 세계관과 성경관 이런 것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이성주의에 의해서 오염이 되는 결과가 됩니다. 이렇게 흘러내려가면서 결국은 계몽주의와 야합하면서 자유주의 신학들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역사 속에서 그 아름답던 그 탁월한 시대였던 개혁파정통주의 스콜라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그러한 신학적인 유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대를 건너뛰어서 그것들이 연구가 되면서 그러면서 아주 좁은 통로를 통해서 개혁파 안에 그것들이 형태를 전해져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졈메이처 나 이런 사람들이 벤자민 브레클리 워필드라든지 또 그런 사람들 헤르만 바빙크 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전수되어서 내려오지만 결국은 그렇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존 오웬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1616년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륙에서는 바로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가 화려하게 꽃피던 전성기입니다. 비유하자면 대륙 쪽에 흐르고 있는 이 신학적인 기류가 태백산맥이라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그 산맥에 잇대어 가지를 친 소백산맥 되는 것입니다. 작은 산맥에 몇 개의 걸출한 봉우리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 봉우리가 바로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슨 윌리암 루 아메스우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입니다. 좐 낙스도 있지만 그분은 신학자라기보다는 교회 정치가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 명망을 떨쳤던 사람들입니다. 이 후에 자자란 신학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봉우리가 대륙에서 일어난 그 개혁파 정통주의 스콜라주의와 어깨를 견주면서 그 신학을 전수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커다란 세 봉우리입니다. 그중에 한 봉우리가 우리가 오늘 공부하려고 하는 존 오웬이라는 사람입니다.
존 오웬이 그러면 그렇게 새까맣게 잊혀졌던 사람이 왜 오늘날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을까요?
제가 지난달에 병목사님하고 영국을 갔는데 영국에 갔던 그 전 주간에 세계 존 오웬 학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존 오웬이 전 세계적인 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존 오웬에 관한 책들이 최근에 꽤 나오기 시작하고 되고 전문적인 연구소 들이 등장하고 박사논문들도 한 동한 뜸했는데 다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우선 첫째는 영국 자체 안에서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나와서 청교도 신앙에 대해서 새롭게 부르짖으면서 사실 음으로 양으로 청교도들 가운데 걸출했던 사람 리챠드 백스터 라든지 리챠드 식스라든지 존 오웬 윌리암 퍼킨슨 존 번연 이런 사람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제이 아이 페커같은 분이 존 오웬에 대한 중요한 서문들을 꽤 여러 책에서 쓰고 그리고 실지로 제임스 페커는 사실은 존 오웬이 그 사람이 영적인 방황 기에 그를 건져주었던 중요한 신학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제임스 페커가 옥스퍼드 학생으로 재직 했을 때 그 때에 우리로 말하자면 아 브이 같은 학생 선교단체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에 그 들 속에 유행하였던 성화 론은 쾌직 성화 론이었습니다. 관조주의적인 성화론 이라고도 하고 내 표현에 의하면 자동성화론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성화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네가 가만히 있으면 계속 성화된다. 문제는 반동이 문제다 그러니까 네가 해야 할 최대의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무조건 자기를 복종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을 믿어야 된다. 이런 성화관 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화관이 사실은 그 당시에 영국에 대체적인 기류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미스짐도 거기서 나오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고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성화 관을 여러 선교단체에서 교회에서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아주 고약한 교리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혐오감을 표했습니다. 이런 것을 믿는데 계속 믿고 하나님을 믿는 놀라운 기쁨이 있었는데 이후로부터 계속 침체에 빠져드는데 선배들 계속 찾아가서 질문을 하면 너 자신을 복종 시키지 않아서 그런다 네가 스스로 성화되려고 해서 그런다. 이런 답변을 주는데 허우적거리면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에 두 권의 책을 만나게 되는데 국교도 청교도였던 존 라일의 홀리니스라고 하는 책과 그담에 존 오웬의 6권 7권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분이 자기의 성화 론이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열렬하게 여러 책 에서 존 오웬에 대한 신학적인 호평을 썼습니다. 이것들이 말하자면 존오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유로는 1970년대 이후로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이어지게 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주어지게 됩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칼빈과 루터 특별히 칼빈에 의해서 우리 개혁파 신앙이 따라야 할 정통주의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이 루터에게서 생겨났는데 다음세대의 제자들인 멜랑히논에 와서 루터의 신학은 칭의 론을 중심으로 중심교리를 발전시켰고 베자는 칼빈의 충실한 개혁사상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예정론 중심으로 발전 시켰다고 라고 하는 테제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이후에 루터파안에서도 정통주의로 이어지는 후예 신학자들 그리고 베자이후로 이어지는 개신교 정통 스콜라주의에 많은 신학의 유산들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참된 개혁사상인 루터와 칼빈의 사상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칼빈의 신학, 루터의 신학은 순수하게 계시 중심적이고 신앙 중심적이고 성경적인 신학 이였는데 이후에 제자들에게 내려오면서 이성의 물을 타면서 그러면서 참된 정통신학의 내용들을 흐려놨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기존에 있었던 테제입니다. 우리가 신학교 다닐 때 그런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테제를 처음 세운사람은 숄라흐 마흐입니다. 숄라흐마흐는 알다시피 당시에 일어나는 계몽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사상을 변증하겠다고 나섰는데 사실은 절충을 시도하므로 서 기독교신학을 심각하게 왜곡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적인 가치는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으로 나름대로 그 시대에 정신에 반응했다는 점에서는 역사적인 가치는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에게 다 내어주게 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테제가 계속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설처럼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테제에 대해서 중대한 도전을 했던 사람이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가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역사를 흔들어 놓았던 로마서 주석을 쓰게 됩니다. 그 로마서 주석은 20세기 신학자들의 놀이판에 떨어진 폭탄 이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칼 바르트가 주장 했던 것은 이성주의가 극치를 이르던 자유주의 시대였는데 이미 그가 1차 대전을 통해서 처참한 유럽의 현실을 보면서 칸트의 윤리신학이나 데카르트나 이런 철학 사상들이 결국 이문제 대해서 해결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구 자유주의도 이런 것들에 대한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을 우리들이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자연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는 것들을 전적인 부정을 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그 초월적인 존재를 부각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숄라흐 마흐의 테제를 부인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계기가 있었는데 사실은 로마서 주석을 쓰고 나서 그가 대학교수로 초빙이 되는데 사실 첫 번째 대학에 갔을 때 충분히 신학을 가르칠만한 내용이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 이후로 이 사람이 고민을 하면서 천착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한 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에 대한 저작의 연구였고 또 한편으로는 개신교 정통 주의자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개신교 정통주의자들을 연구를 촉발시킨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하인리 헤페라고 하는 독일신학자가 쓴 개혁파 정통신학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하인리 헤페라는 사람은 신학적인 주제를 정해놓고 주제를 자기의 이야기로 써내려가지 않고 이 개혁파 스콜라주의자 들 속에서 기가 막히게 된 작품들을 각각 편집을 해서 거기에다 집어넣어서 50여명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로 하여금 그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가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개혁파 정통주의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 깨졌지만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자유주의나 이런 것들에 대한 담론이 멈추었지만 사실은 칼바르트가 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칼바르트의 영향력이 쇠퇴하게 되면서 다시 예수의 연구 그담에 자유주의 해석에 대한 연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이성주의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1960년대 이후로 서서히 150년 동안 이상이나 내려왔던 슐라이허 마흐 테제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라는 것이 남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알아보지도 않고 누가 그렇다 하더라. 그렇다 하더라 하면서 카더라 하면서막 그게 대세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독일이나 화란 ,화란쪽 에서도 특별히 두 개의 학파가 유명한데 우트레이트 학파와 암스테르담 학파인데 암스테르담 학파는 대게 성경 신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학파였고 우트레이트 학파는 조직신학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학파였습니다. 우트레이트 학파를 중심으로 이 개혁파정통주의에 대한 연구가 사실은 계속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연구 결과들이 대중화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후에 들어서 학자들이 연구를 하면서 슐라이어 마흐 테제는 이게 사실이 아니다 라는 것들을 밝혀내게 됩니다. 결국은 저쪽에 내려오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그담에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 스콜라주의 신학이 불연속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규명하게 시작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버마니나 매치 같은 쟁쟁한 사람에 의해서 연구가 되고 괄목할만한 학자한사람이 등장하게 되어서 1970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 신적 작전 이라는 박사논문 한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논문이 이러한 150년 이상 계속되어오던 슐라이 마흐 테제에 대해서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갈아엎는 그런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 미국에 있는 리챠드 먼로 교수입니다. 그분이 쓴 3권의 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전개가 되는데 요지는 칼빈까지 왔던 그런 것들이 제자들의 세대에 내려오면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로마 가톨릭에 맛서 기만 하면 되는데 이후에는 로마 카토릭뿐만아니라 오웬의 시대만 해도 로마 가톨릭뿐 소키노스주의 알미누스주의 이런 것들에 맛서야 하는데 학문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맞서면서 개혁자들이 전개해 놓았던 듬성듬성한 교리들을 아주 아름다운 개혁파 정통신학 으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 만들어가는 방법이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질료가 되고 그리고 중세에 있었던 스콜라주의적인 학문의 방법론들은 그 질료를 빚는 형상이 되어서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라고 하는 유산이 우리들에게 내려오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로 존 오웬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1970년대 이후에 이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대사회에 이 방황하는 신학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줄거리를 타고 가니까 이 존 오웬은 윌이암 아멘스 윌리엄 퍼킨스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봉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것 까지 청교도 경건 이런 쪽에서 목회의 실천 쪽에서 올라갔던 존 오웬에 대한 접근이 이제는 개혁파 스콜라주의 정통주의 종교개혁의 유산 이런 쪽의 학문적인 산기슭부터 올라가게 되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존 오웬의 신학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존 오웬은 17세기 아주 격동기에 태어났고 그때에는 영국이 성공회 주의 이었습니다. 성공회주의는 알다시피 헨리8세가 궁녀 엠벌렌을 사랑해서 결국은 본마누라 내버리고 재혼을 하겠다고 하니까 교황청에서 안 돼 그러는 바람에 네가 나자르면 나도 너 자를래. 그리고 교황청에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교회의 수장은 왕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교회가 간다. 그리고 만든 것이 성공회입니다. 성공회는 어중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상에 있어서는 개혁파의 내용을 많이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국가가 교회위에 있는 다든지 국가교회를 인정한다던지 여태까지 영국에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와 있던 가톨릭의 문화를 그대를 예전 속에서 수용 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당한 가톨릭의 분위기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애매모호하게 형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처음에 이 사람의 아버지도 그런 목사였는데 그렇지만 아버지도 역시 이런 국교주의 반대를 해서 찍히게 됩니다. 그런데 존 오웬은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나중에 이것은 절대 아니다 라는 생각을 굳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바로 윌리엄 크롬웰의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윌리엄 크롬웰 혁명은 영국을 명실상부 하게 개혁주의로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에서는 이런 것들이 언제들이 왕을 바꾸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 이었는데 아래에서는 왕들이 정통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한다는 국민적인 컨센시스가 있었기 때문에단 한 번의 기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무의로 끝나게 됩니다. 결국은 아주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불우하고 힘겨운 인생길을 걸어가다가 결국은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그분이 마지막 남긴 유언이 감명적인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사랑하는 친구 찰스 피립 우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이 사랑 해 왔던 분, 내가 사랑 했다기 보다는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분, 내가 받는 모든 위로의 근원이 신 그분께로 떠나가려 합니다. 이제 나는 폭풍가운데 있는 배와 같은 지상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 배안에 계시는데 배 밑창에서 노를 젓던 노예가운데 하나가 떠나간들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대는 깨어서 기도하고 소망을 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며 낙심하시기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약속이 견고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워했던 하늘나라고 가게 됩니다.
존 오웬이 그런 신학을 이루기까지의 그 배경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사람은 옥스퍼드에서 공부했습니다. 옥스퍼드는 당시에 최고의 교육을 제공해주던 학교 이었습니다. 그래서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근대의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교육과정이나 모든 틀들은 중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 준하는 교육을 충분히 거기에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7년 정도를 정도를 공부하게 되는데 13살의 이른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문학 석사를 공부하고 신학사 엠디브 과정을 공부하다가 결국 윌리암 로드라는 국교도가 책임자로 오면서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 성경적인 관행들을 보면서 결국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신앙양심을 따라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때에 두 사람이 큰 영향을 이 사람에게 끼칩니다. 토마스 발로라는 사람과 프리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이 사람의 영향을 몇까지 꼽을 수 잇는데 성경과 개혁신학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첫 번째 학문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사람은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청교도들의 뚜렷한 특징은 성경 제일주의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제일먼저 들고 나오는 것이 어느 것이 참된 성경인가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위경과 외경을 잘라내고 오직 66권의 성경의 유일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무척 강조하게 되는데 그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이 존 오웬이 목회자의 집안에 태어나서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저작을 보면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익숙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한 두해동안 성경을 탐독 한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성경과 아주 친숙하게 살아왔던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그의 경험과 애착이 그의 신학 전반에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자면 그는 성령론 에서 이 사람은 성령을 경험한 사람의 특징은 성경의 통일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와 성경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역사를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시키는 그 개혁주의 전통을 그대로 들어 올립니다. 그래서 오웬 같은 사람이 오늘날 볼 때에 깨닫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하는 이런 성령의 역사는 오웬의 입장에서 추호도 성령의 역사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작용과 분리된 채로 일하시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제 사도행전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와 이후에 있는 성령의 역사사이에 불연속성의 문제를 거론하게 되는데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었던 성령이 이러한 신비한 일들을 일으키는 것들이 오늘도 그대로 재현된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씀과 분리된 역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을 잘못되었다고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보면 성경에 대한 아주 뛰어난 애착과 사랑이 이러한 신학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사랑은 성경과 가장 가까웠던 당대의 신학인 개혁신학에 대한 탁월한 사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람은 당대에 모든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인문주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인문주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 당대에 고전 문헌들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전문헌들이 희랍을 중심으로 생산이 된 고전 문헌들이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개성을 한 것 발휘하게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시대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폴리테이아 폴리스 시절에 그때에 그리스 사람들의 삶이나 이런 것들이 종교적인 억압이나 국가의 억압이 없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자기의 삶의 구현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개성에 대한 존중들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정신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런 연구들이 비단 이 그리스 문헌뿐만 아니라 이집트, 샘족의 여러 가지 문헌들에 대한 많은 고문서에 대한 고전학에 대한 연구로 이 사람들을 데려갑니다. 그런 대학의 분위기에서 우리가 마치 옛날에 태어났으면 공자 왈 맹자 왈 그걸 공부해야만 사람이 되어서 그것을 배우고 칼싸움도 하고 농사도 짓고 서당에 가서 더 많은 공부도 하고 공직에도 나갈 수 있듯이 그 당시에 그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방대한 양의 언어적인 지식들을 습득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존 오웬을 본받아서 목사가 되려면 최소한 5년 정도는 양보할 수 없게 하루에 네다섯 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해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까지 한번쯤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이후에 계속 공부를 한다는 조건하에 그래서 내가 요새 맨 날 부르짖는 것은 여섯 시간 이상 자는 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넝마장사도 그렇게 해서는 장사가 안 됩니다. 잘 거 다 자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볼 거 다보고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일밖에 없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누가 자기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위업을 이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도 안하고 밤 기도도 안하고 전도도 안하고 그저 노라이로 그렇게 하니까 교회 가서 딴소리나 하고 그러는 겁니다. 하여튼 대단합니다. 우선 이 사람의 라틴어는 영어보다 훨씬 낫습니다. 존 오웬이 칼빈 주석 로마서를 처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존 오웬을 비롯한 개혁과 정통주의 저자들을 찾아보면서 의심스러운 장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칼빈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옵니다. 루터에 대한 이야기도 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너무 가까운 시대의 라이트들은 인용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아직은 더 두고 봐야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에 대한 존경심은 상당했지만 그러나 칼빈 한테 배웠다는 이야기는 잘 안 나옵니다. 어쨌든 그랬기 때문에 800페이지 정도 되는 작품인데 그 작품에 보면 원래 라틴어어로 썼습니다. 그 당시에는 라틴어가 학문의 언어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면 신학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라틴어를 탁월하게 하니까 라틴교구들의 문언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랍어를 탁월하게 잘했습니다. 그래서 호모의 일리어드나 오딧세이 같은 작품들은 사실은 클래식 그리 까지 안 되고 호메리 그리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 런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 희랍어에 훈련이 되어있었습니다. 특히 데오로그메너라고 하는 그 작품은 신학 서론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거기에 들어가 보면 어마어마한 양의 방대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대부분이 희랍어의 문헌입니다. 대부분의 희랍어로 적혀있고 그중에 일부는 라틴어로 번역된 문헌들입니다. 그 방대한 문헌들을 자유자재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얼마나 잘했는지 성경에 히브리어를 읽고 번역할 뿐 아니라 랍비들의 히브리어 자료들을 원전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의 작품들은 왜 중요했느냐하면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인의 해석을 보여줄 뿐 아니라 람밤이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 같은 사람들 중세의 유대인 철학자들이 있었는데 유대인 철학자들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철학들을 헬레니즘의 세계속 에 그리고 중세의 세계 속에 펼쳐냈습니다. 뒤로 올라가면 알렉산드리아 필로라든가는 이런사람들 그리스의 철학들을 가지고 유대교의 신앙들을 믹스하면서 유대교의 우위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내는 독특한 세계관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자료들을 아주 잘 섭렵하고 있었고 특별히 마이모니데스는 존 오웬이 즐겨 속독하던 유대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람어 본문까지도 자유자재로 주석해 내면서 번역해 놓고 이번에 제가 영국에 갔다 올 때에 존 오웬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분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경매에 부쳤는데 그때 카다로크를 입수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희랍어 사전, 라틴어사전등의 방대한 양의 사전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거기에는 폴리그로시라고 하는 다국어 대조 사전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어 곱티거 그리그 라틴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아랍어사전까지 나옵니다. 결국 히브리어 같은 경우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언어들과 연구를 해서 어원 자체를 밝혀내는 필를로즈라고 해서 비교언어학까지도 필요했습니다. 그런 것 까지도 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방대한 언어의 지식을 가지고 넘나들면서 그 문헌들을 자유자재로 소화를 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 같은 많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습니다. 마틴 부처, 칼빈, 버미글리, 베자, 무스클리스 블링거 윌리암 에임즈, 윌리암 퍼킨스 그 담에 칼빈의 직제자였던 유니우수 요하네스 피스카토르, 기르베티우스 보에티우스 잔티우스 프링시스 티에틴 제네바 아카데미의 최고봉이었던 이투에틴 슈페하인 사루티스,하이데카르스, 이런 쟁쟁한 신학자들이 대륙에 있었는데 이 사람들의 저서들이 지금 상당부분 남아 있는데 제가 이번에 530권 정도를 구했는데 그 방대한 양의 책들인데 이런 것들을 자유자재로 읽으면서 거기로부터 개혁주의의 풍부한 유산들을 흠뻑 섭취 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정통 개혁파 주의 산맥의 옆에 잇댄 영국의 청교도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청교도주의 그중에서도 지성적 청교도주의는 반드시 영국에서 자생한 것이라고 보다는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의 산맥에 잇댄 한 가지로서의 산맥이고 이 산맥과 이 산맥의 접합지점 쯤에 존 오웬이라는 산봉우리가 하나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봉우리는 워낙 높아서 원줄기 산맥에 어느 산과도 뒤지지 않는 장엄한 높이로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 오웬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두 번째는 인문주의 교육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문주의라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이미 중세 스콜라주의 중세신학의 후반부에 들어가서 중대한 전언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이미 이때 등장합니다. 잠시 후에 칸트가 나오고 헤겔이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사실은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그런데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해서 그 전까지를 중세철학이고 데카르트 이후부터가 근대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철학의 결정적인 특징은 중세까지는 철학의 중심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이 철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림 설명)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여기에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 이런 인간도 있고 이런 인간도 있고 별사람들이 다 있고 여기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고 사람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식을 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을 각자 각자가 이렇게 움직이고 돌아가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된다고 하더라고 이 존재 는 항상 가운데 중심에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이것을 보더라도 이 존재라고 하는 것은 꼭 하나님이 아니라도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있을 때 이것이 에이다라고 하면 항상 누가 보더라도 전부다 에이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느낌이나 기분이나 선의에 따라서 에이1,에이2,에이3,에이4 정도는 구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중세까지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데카르트로 넘어오면서 데카르트가 중대한 전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서있고 여기에 에이라고 하는 존재, 비라고 하는 존재, 씨, 디 등 별난 게 다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것이 A라고 하는 것은 A이기 때문에 A인게 아니라 내가 이것을 A라고 인식하니까 A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철저하게 인식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엔 객관적으로 이게 존재하느냐 저게 존재하느냐가 그것이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인식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하게 전통적으로 흘러내려오던 철학의 중심적인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이라고 하는 것을 대입한다고 할 것 같으면 에이가 보던지 신이 있는 것이고 비가 보던지 결국은 신이 있는 것인데 그런데 사람이 바뀌게 되니까 에이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다라서 여기에 나오는 신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이면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면 데카르트가 세운 전통적으로는 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게 선이요, 이것이 진리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부정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이 있으면 이 세계에 진리라고 하는것은 이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이 있으면 이 세계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렇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하셔야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은 이 진리를 초월할 수 있는가? 신은 구속받는 분이 아니다. 진리를 초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는데 여기와 여기 사이에는 연속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진리 따위에 매이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스킴을 만들어 냈냐면 신이 이렇게 진리를 창조했는데 이 진리자체는 신이 창조를 했지만 이것을 인식 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것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위탁 하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록 완전한 존재는 아니지만 이렇게 명백하고 판명한 법칙에서 인식에서 의심할 수 없을 때에는 자기가 인식 한 것과 여기에 있는 것 사이에 동떨어졌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리고 이것은 일치 한다고 믿어도 좋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담엔 이 인간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부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을 맡겨놓고 하나님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당신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오늘날의 폭발적인 과학의 문명을 이룩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예전에 중세시기 같은 경우에는 어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도 불안한 것이었는데 인간은 유한하고 오류투성인데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그럴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하고 법칙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 법칙을 보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판명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을 놓고 또 다른 토대를 쌓아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문리에서는 쉽게 적용이 되지만 도덕과 사상에는 적용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사람들은 고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이 인간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보다는 인간에 대한 연구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토대들을 여기에서 갑자기 데카르트가 나온 게 아니라 이미 중세사상사에서 이런 씨앗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배운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입니다. 윌리암 오캄 이런 사람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인간이 있고 여기에 보편개념 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 만나는 것은 개별개념이고 이 개별개념이 있는데 이 순서에 있어서 보편개념을 훌쩍 뛰어넘어서 무엇인가 신비한 작용 아래서 이렇게 이것을 알고 이 밑에서 이렇게 연역되어 내려오면서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냐 이것이 실재론입니다. 이것이냐 아니면 그게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뛰어넘어서 이성을 초월한 찾아가서 이것을 먼저 안다고 하는 것은 허언이다 그게 아니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개별자를 통해서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이것을 통해서 결국은 보편자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담에 알 수 없다. 이렇게 의견으로 다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안에 이 보편자는 이 개별자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머리 안에 관념 속에 보편자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개별자를 볼 때 보편자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실재가 있긴 있는데 자기 밖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론 입니다. 여기에서 사실 이후에 독일의 관념론의 씨앗도 여기서 발견이 되고 그리고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후에 발달할 데카르트적인 이런 발상의 중대한 전환 칸트적인 전환 이런 것들이 이미 중세 스콜라 후기에 신학사상에 배태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중세의 신학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충분히 배가 부르면 애가 튀어나오듯이 결국은 중세사상이 개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충분히 배태한가운데 탁 하고 튀어나오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상의 기반이 없이 종교개혁이 태어났다면 마치 길거리에 어린애가 태어난 것처럼 금방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의 젖줄을 먹으면서 이런 사상을 가지고 무장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이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사고와 지적인 자양분들을 이 인문주의 교육이 제공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두 가지 면에서 탁월했는데 성경과 성경 안에 있는 역사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 밖의 역사 특별히 희랍의 역사와 그담에 문헌에 대한 논리학 수사학 심지어 천문학 생물학에 관한 책까지 나옵니다. 그러면서 방대한 영역에 대한 이 비옥한 지식들을 섭렵하게 됩니다. 개혁신학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대한 인문학적인 지식들을 함께 역어내서 책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책 가운데 아주 논쟁적인 작품 7년 동안 쓴 책인데 그것이 바로 더 데스어브 데스인데 데스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그런 데스데스데스로 이어지는 책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스도 죽음 안에 있는 신자의 종식이라는 책인데 데스 오브 데스라고 불리는 책인데 이 책은 7년 동안 그가 기술을 하는데 4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그 책은 오직 하나의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 써졌습니다. 그게 개혁 형성된 도르트 신조에서 형성된 개혁 칼빈주의 5대 교리 큘립 중에서 특별히 엘 리미티드 어턴먼트 제한 속죄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인간을 위한 보편적인 죽음이었고 다만 그 죽음의 효과가 적용되는 것은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웬에 있어서는 매우 신성모독적인 논리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제한속죄의 교리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선택하고 구원하실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선택의 교리를 변증하므로 서 이제 칼빈주의 안에 있었던 제한 속죄론을 옹호하게 됩니다. 결국은 이 책 때문에 걸출한 청교도였던 리차드 백스터와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분도 굉장히 훌륭한 청교도 이었는데 그분은 국교도 이었습니다. 그분은 알미니스 주의자입니다. 어째든 갈라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보면 신학저작인데 방대한 이교도의 문헌이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 오도스 호메로스 호라시우스 아일리아우스 아리스토텔레스,스웨니우스 베리길리우스등의 희랍의 저자들이 방대하게 동원되면서 자신의 논리들을 입증하는데 폭넓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보편성을 논증할 때 이런 방대한 이방의 저자들을 인용하면서 덧붙이는 것은 그렇지만 이 이방의 저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성경의 계시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도달 할 수는 없다고 하는 또한 한계까지도 명확하게 걷게 됩니다.
이 사람의 세 번째의 학문의 배경은 고대와 중세의 교부학입니다. 교부전집은 교부시대에 그러면 속사도 사도 이후의 속사도 교부의 폴리캅이나 클레멘트나 이런 사람들로 시작을 해서 이후에 변증과 시대를 거쳐서 중세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 그 전에 페르톨리아누이레누스 그 이후로 이제 많은 교부들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교부 시대를 지나서 토마스 아퀴나스 까지 오게 되는 그런 방대한 교부들의 책인데 이교부들의 책이 1950년대부터 완전히 다르게 편집이 되어서 비평장치를 달아서 독일에서 출간이 되고 있는데 작년에 알아본 것에 의하면 이 교부들의 전집이 전부다 450권정도 됩니다. 한 질의 가격이 8천만 원에서 9천만원정도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 아무대도 소장한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권씩 두 권씩 다섯 권씩 사는데 보통 한권에 15만원에서 30만 원 정도 가는 책입니다. 그 책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것도 원전으로 아주 자유롭게 사실은 그게 435권이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읽으면 435권이 한글로 되어있다면 맘먹고 읽으면 한2년 읽으면 못 읽겠습니까? 7백몇일이니까 이틀에 한권씩 밤잠 안자고 읽으면 이 사람에게 자기 언어와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읽어냈던 것입니다. 그런 방대한 교부들을 읽었는데 그 교부들 중에 누구 한사람을 전적으로 추종한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 교부와 라틴교부의 방대한 양들을 읽어서 자기의 신학논리들을 개진할 때 어느 누구의 논리가 뒷받침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원문을 거의 제한 없이 몇 페이지씩 원문으로 인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논거를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깊은 경의를 표했던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우구스티누스였고요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크로브스 그레보니 아벨라도스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피너롬바르도스 그리고 다메색의 요한 클레멘트 바질 그리고 스토폴론 카노 글레고리 안셀모스 특별히 아벨라스 클레르보르 베르나라 알렉산더 보나벤추라 이런 중세의 신학자들을 방대하게 섭렵하면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개전해 나가는 하나의 원천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교부들에 관해서 탁월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 이었지만 항상 교부들을 읽을 때 성경과 연관 지어서 읽었습니다.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이 개혁의 교리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해석을 내린 많은 교부들을 섭렵하며 그 교부들의 논리를 자기의 논리를 강화하는데 끌어 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문 이란 것이 쌓아올려진 토대가 있으면 그것을 밟고 올라가야 층이 올라가야지 이미 벌써 3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나는 치사해서 안 써 내가 쌓아 올릴래 하면 평생해도 일층도 못 쌓고 자기는 죽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학문을 잘 이해하고 신학의 업적을 쌓아갔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존 오웬 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주의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 사람인데 왜 개신교의 최고봉 이라할 수 있는 존 오웬이 그렇게 좋아했을까 그러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의 내용보다는 신학의 방법론을 좋아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싫든지 좋던지 반드시 거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원천적인 인물이 교회사에 두 명이 있는데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대교회가 되고 그담에 코스탄스 대제에 의해서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나중에 국교가 되는데 그래놓고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로마에도 굉장히 많이 들어왔는데 희랍어로 된 것들이 결국은 희랍이 망하고 로마 제국에 편입이 되면서 희랍의 저작들이 상당이 많은 것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어서 식자층에 읽히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보니까 이거는 정말 아니었습니다. 사실 철학자로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있고 플라톤이 있고 플라톤의 제자가 소크라테스인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더 위로 올라가면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에 있어서 고대의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 주전 7세기 사람인데 굉장히 중요한 전환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일자사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단편적인 글밖에 안 남았는데 ‘너희들 눈에 보이는 각각 다른 모든 것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다 그리고 이 세계는 하나로 꽉 차있고 온 우주는 있음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다는 논리를 내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 까지는 사람들의 사유가 자연 철학적인 것이었습니다. 우주의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물일까 불일까 흙일까 공기일까 이러면서 사람들이 우주의 진료적인 요소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나중에 우주의 형상에 대한 관점으로 옮겨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금도 미스터리이지만 이 사람의 놀라운 전환이 어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미스터리입니다. 동양과의 교류 속에서 왔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두 개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두 개가 보이는 이것 이것도 존재하고 이것도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두 개를 갈라놓는 것은 비존재이다. 비존재는 존재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 두 개로 보이는 것은 너희의 착시고 사실은 모두 한 덩어리다 굉장히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고 보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설명하기에 기가 막힌 틀을 최초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을 계승한 사람이 플라톤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일생은 행이라고 하는 일자를 찾아가는 사유의 삶이었습니다. 관련된 이야기만 요약해서 한다면 그렇게 일자를 향해 찾아가는 사상이었는데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는 그런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플라톤은 같은 철학자라도 뭔가 신적인 빛을 본 사람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거듭나지 못한 철학자의 대표적인 사유의 흔적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저 건너편에 무슨 선 무슨 일자 그런 것이 눈에 보이냐 눈에 보이는 것은 이런 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을 알려면 이것을 열심히 탐구해서 우선 너의 눈에 보이는 것이나 잘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하면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해서 저리로 먼저 건너가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면서 이렇게 철학에 있어서의 그런 신적인 세계와의 조우 같은 것들을 부인하게 됩니다. 물론 거기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그러면서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학을 채우는데 매우 도움이 안 되고 시비를 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로마제국 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들을 다 정리해서 소각해 버립니다. 즉 없애버립니다. 그러다가 후에 그런 기독교 국가들을 이슬람들이 정복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슬람 학자들이 뒤져보니까 자기네들의 신앙을 설명하기에 기가 막히는 틀들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꾸로 이슬람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서 철학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아베로에지나 아비체네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작품들이 기독교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역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신학이 발전하는 가운데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보니까 기가 막힌 틀들을 만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지고 신학을 개진하는데 사용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가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하나만을 가지고 신학을 세웠다고 말해서 안 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틀들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제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의 발전되어 오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스콜라주의입니다. 이것들을 존오웬이 깊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까 이야기하는 그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시)
어떠한 사실들이 있으면 이 사실들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속에서 삼단논법 ,원인과 결과, 인과관계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독특한 논리 속에서 이것들을 입증하는 논리학의 기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특징은 정교합니다. 그래서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세분해서 혼돈을 피 하게 하는 개념의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사용해서 신학을 만들어 내는데 이 신학의 질료자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었는데 방법론으로 이것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런 방법론들이 호평을 받게 되는 이유는 당시의 시대배경과 관련 됩니다. 왜냐하면 대 적자 들이 논쟁을 할 때 논쟁에서 논리가 필수입니다. 논리적으로 공격을 할 때 이것들을 논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통일된 어떤 논리의 툴들이 필요했는데 이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훌륭하게 제공을 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신학에 적용해서 아퀴나스 신학의 대전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방대한 양입니다. 켐브리즈 나온 책 이영어로 된 책이 60권이 넘습니다. 이처럼 방대한데 거의 백화점입니다. 우리가 뭘까 하는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나눌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나뉘어서 논쟁의 여지가 없게끔 완벽하게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서술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오웬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방법론이 신학논쟁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받아들이기 편한 방법이 되는 것인데 이 당시에 오웬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중세 스콜라주의에 신학적 철학의 고유한 방법론들이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서도 일반화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청교도의 작품들 가운데 약간 수준이 떨어지는 청교도의 작품은 그냥 설교집이고 조금 수준이 높은 청교도 윌리암 엠즈나 그리고 존 오웬 윌리암 퍼킨스 이러한 사람들의 저작으로 들어가서 보면 굳이 이런 사람 말고라도 그래도 상당히 학식이 잇는 사람에게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들이 아주 철저하게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정교한 논리들이 결국은 스콜라주의에서 얻어온 것들입니다. 존 오웬도 그 시대의 정신을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개혁신학을 변증해 나갔습니다.
다섯 번째는 플라톤과 플라톤 철학입니다. 존 오웬이 사실 아퀴나스를 천착했으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이 많았을 텐데 사실은 부분적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러나 철학자로서는 플라톤과 신플라톤 주의를 훨씬 애호했습니다. 이번에 깨달은 사실인데 플라톤의 저작이 두질이나 작품에 들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주석이 기록되어 있는 비평본이 서구의 장서 속에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플라톤주의가 2세기에 와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는데 그게 역사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입니다. 이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토니우스라고 하는 사람으로 되고 이후에 이 플로토니우스에서 유명한 제자 중 한사람이 유명한 기독교교부인데 그 사람이 바로 오리게네스입니다. 그리고
포피리를 비롯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프로토니오에 와서도 두 파로 갈라지는 스승처럼 아주 초월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그런 파와 회의주의를 강조하는 아카데미코스 포피리 같은 사람들로 나눠지게 됩니다. 기다란 논쟁들이 있는데 어쨌든 플로티노가 쓴 탁월한 작품 중의 하나가 엔네아 디스라는 작품이 있는데 엔네아 데스라는 것이 원래 아홉이라는 것인데 아홉 개로 되어가지고 여섯 짝을 이루어가지고 짝을 이루면서 어떤 조직신학 교과서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신은 누구이고 인간은 어떻게 그 신을 찾아가고 신을 찾아갈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영혼과 시간의 이런 관계들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이 책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로 가치가 없는 영지주의 수준의 작품이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아직 기독교 신학이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볼 때에는 놀라운 작품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도 이 작품을 읽었는데 굉장히 색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일반계시의 빛을 가지고 상당히 성경과 흡사한 그런 신학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자연 신학에 한계를 보여준 작품이긴 합니다. 그런데 존 오웬이 엔네아 데스를 다른 어떤 철학자들의 글보다도 애호하였다라고 나옵니다. 온건한 철학의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 숙독했고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필로 이런 사람들에 대한 많은 작품들을 탐독했고 그리고 천문학에 대한 작품들도 에피쿠로스의 심리학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이해를 가졌던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였는데 아우구스트티누스 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고 플라톤도 마찬가지고 위대한 사상가들은 결코 죽지 않고 때가되면 죽었다가 어느 시대가 되면 화려하게 부활하고 또 부활하는데 바로 이 17세기가 아우구스티누스가 부활하던 시기였습니다. 부활을 했는데 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알미누스 주의자들과 소키누스 주의자들 이런 이성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학을 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영국에서 일어났던 18세기의 경험철학, 17세기에 일어났던 영국의 경험주의 18세기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도덕 심리주의 운동 같은 것들도 결국은 이 아우구스트누수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당시에 새롭게 부활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가리켜서 스콜라 아우구스트나 모데르나라고 합니다. 모데르나는 근대고 아우구스트는 아우구스티누스 학을 가리키고 스콜라는 스콜라주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탁월하게 등장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있는 리미니에 글로리라던지 이런 많은 저자들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이런 것들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물려받은 스콜라 아우구스트나 모데르나가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 인간에 대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학문의 기준으로서 채택이 되기도 하고 또 하나 각광을 받은 것은 아우구스트누수적은 주관주의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트느수의 신학 안에 있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오웬에 미친 영향에 있어서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존 오웬의 존경심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칼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칼빈은 의지론 같은 것들을 설명하면서 나는 그 뛰어난 분의 이러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더 이상 덧붙일 이야기가 없으리만치 나는 깊이 동의 한다 그리고 그대로 원문을 이용하거나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미친 영항은 엄청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사람들이 개혁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를 평가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실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인문학은 계시의 점승점처럼 한 시대에 태어나서 자기시대에 충실하고 학문을 하고 그것들이 다음세대에 다리가 되고 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뜬금없이 칼빈이 뭐 훌륭한 사람이냐 노예제도도 반대 안했는데 하고 논문을 써서 기겁을 했는데 그것은 정말 인문학에 있어서 에비 씨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나 그담에 아우구스티누스 이런 사람들을 존 오웬은 가톨릭의 교부가 아니라 보편 교회의 교부라고 보았습니다. 원천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류도 많이 있지만 그렇지만 거기에서 사상적인 원천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원천을 알고 올바른 사상을 따라가는 것과 원천을 모르고 이게 이거라고 하더라. 하고 남이 가르쳐준 것을 따라가면 하는 대로 잘 공부하면 가르쳐 주는 것만 따라가지만 원천을 이해하고 공부를 잘 하게 다른 사람의 해석한 것보다는 다른 해석을 해서 자기 나름대로 신학을 진술해 나갈 수 있는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중의 하나가 주관주의입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그중에서 몇 권의 저서 고백론을 비롯해서 참된 종교 그리고 또 하나 기독교 교육론 등등의 특별히 시편에 대한 주석 이런 것들을 객관적으로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아우구스티누스가 굉장히 신비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비주의는 아주 뛰어납니다. 중세에 생겨났던 수많은 신비주의 이단들이 자기들의 이런 신비사상의 근원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가 원조라고 호소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굉장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그렇게 호소할 수 있을 정도로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의 합일이 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래서 여전히 아우구스트누수의 신학은 과연 진짜 기독교에서 이해하기 위하는 진정한 신비신학이냐 아니면 플라톤에 의해서 오염된 신비신학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많습니다. 클레로보의 베르나르 이 사람에게 부터 유니오콤 트리스트와 같은 그런 교리는 칼빈이 개진할 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나옵니다. 여러분 클레보에 베르나르는 우리들에게 알려진 신비주의가 아니라 굉장한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사상가 이었습니다. 교부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어떤 신비주의에 원천을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는 후기에 생겨났던 중세후기의 신비주의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주의는 좀 틀리다. 후기의 중세신비주의는 대단히 감정적 신비주의 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비주의는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지성적 신비주의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지성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격렬한 기독교의 체험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성을 향하여 당신을 인간에게 보여주시고 의사를 소통하신다고 하는 중세의 신비주의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아주 훨 다른 그런 견해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들을 존 오웬이 계승하게 되는데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주관주의에 지성주의적인 신비를 보여주는 작품이 제2권에 아주 폭넓게 나옵니다. 제2권의 주제가 커미뉴언 위 갓입니다. 여기에서 존 오웬은 아주 독특한 교리를 주창하게 되는데 그것은 삼위하나님과의 개별적 위와의 교통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개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냥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하면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고 마는데 존 오웬의 생각은 틀립니다. 그래서 각 위는 각각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각각 하나님과 더불어서 인간이 교통할 때 성부와 교통할 수도 있고 성령과 교통할 수도 있고 성자와 교통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위의 교통의 특이성을 드러내는데 성부하나님은 사랑, 성자하나님은 은혜 ,성령하나님은 위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한 성도가 하나님과 교통할 때 놀라운 사랑을 경험을 하게 되면 성부 하나님과 교통중이라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성도가 있는데 그 성도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이것은 성자와의 교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위로를 경험하게 되면 이것은 성령과의 교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성부 성자 성령은 일체이시기 때문에 각기 떨어져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메인리 하게 역사하시고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림설명)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각위마다 여기선 성부가 성자가 성령이 교통하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설명해 나가게 되면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냐면 성부가 주로 하여서 이루신 사역은 창조사역이 되겠습니다. 성자가 주가 되어서 이룬 사역은 구속사역이 되겠습니다. 성령의 주 된 사역은 구원에 적용이라고 하는 믿음 사역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한위가 있는 곳에 나머지 두 위가 배척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리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본문이 아가서 입니다. 아가 서에 사랑에 대한 풍부한 계시들을 이제 아주 신비한 언어로 조직해 내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가 인간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사병에 결려서 육체가 병들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신자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그래서 이 사람은 평생에 소리 내서 기도를 안하던 사람입니다. 두 가지 경우 이외에는 소리 내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너무 억제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경우와 그담에 대표기도 할 때, 이 둘 이외에는 소리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통의 교리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요소가 경험주의적인 요소입니다. 이 경험주의적인 요소는 17세기의 영국의 신플라톤주의가 다시 화려하게부활 하게 되는데 이때에 무엇으로 부활하게 되냐면 선한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은 선한 것입니까? 아름다운 것입니까? 오늘 게임하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까? 선한 것입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마음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이담에 훌륭한 목사가 되지, 여기에 끌려요? 아니면 오늘 놀러가는 것이 마음이 끌립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게 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뭐가 그것을 끄냐? 끌리는 것을 사람의 마음이 악한 것에 끌리지 않게 선한 것에 끌리도록 조정을 한다면 도덕적인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플라톤의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도덕 심리주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펼쳐집니다. 저도 한 120권정도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하여튼 허무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써내려 갑니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존 로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주의의 산물입니다. 그런 방대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실은 존 오웬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대게 존 오웬이 마주 서 싸워야 하는 세 마리의용이 있었는데 로마 가톨릭주의 알미누스주의 그담에 소키누스 주의 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게 이런 계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셉 버틀러 같은 유명한 당시의 케임브리즈 플라토니스는 결국은 제스위트 교단의 신부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경험들을 가지고 풀어내는 것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습득했음이 틀림이 없고 그 증거중의 하나가 목록을 찾다 보니까 프란시스베이컨의 책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니까 당대에 있었던 이러한 경험주의적인 논쟁들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경험의 요소들을 아주 아름답게 풀어내서 그런 심리 철학적인 것을 풀어내서 개혁신학을 아주 비옥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하고 죄와 은혜 이런 것들이 작용하고 움직이는 것들이 어떤 원리에 대해서 움직이는지를 기가 막히게 설명해 낸 것입니다. 제가 2003년도 내놨던 죄와 은혜의 지배는 사실은 존 오웬의 쓴 60페이지의 논문을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도 보면 아주 탁월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세밀하게 분석해 내는 일들은 우리들이 당장 뛰어가서 심리학을 배워도 그렇게 분석해 낼 수 없습니다. 복음의 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인간을 분석해 내는 기술들이 오웬의 신학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존 오웬은 자기의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싸우면서 이런 학문적인 배경을 가지고 개혁신학의 금자탑의 하나를 완성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