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강해
(1996년 주일오전)
설교기간|1996년 01월 28일-05월 0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29일
목 차
1. 서론1: 벳브올 맞은편에서 선포된 율법(신 4:44-47) 1996.01.28 주일오전 1
2. 서론2: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라(신 5:1-3) 1996.02.04 주일오전 13
3. 하나님만을 섬기라(신 5:4-7; 시115:4-7) 1996.02.11 주일오전 25
4. 우상을 버리라(신 5:8-10; 출 32:1-6) 1996.02.25 주일오전 40
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살라(신 5:11) 1996.03.03 주일오전 48
6.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5:12-15) 1996.03.10 주일오전 58
7.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 5:16) 1996.03.17 주일오전 68
8. 살인하지 말라(신 5:17) 1996.03.24 주일오전 78
9. 간음하지 말라(신 5:18) 1996.04.14 주일오전 88
10. 도적질하지 말라(신 5:19) 1996.04.21 주일오전 95
11. 거짓증거하지 말라(신 5:20) 1996.04.28 주일오전 105
12. 탐하지말라(신 5:21) 1996.05.05 주일오전 112
십계명 강해 (1996.01.28 주일오전1)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서론 1:벳브올 맞은편에서 선포된 율법
“그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이 땅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속하였더니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그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고 또 바산 왕 옥의 땅을 얻었으니 그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으로서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 살았으며” (신 4:44-47)
녹취자 : 오희열
오래전부터 마음을 먹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오늘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 주가 걸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세 주간에 걸쳐서 서론을 하고 1계명을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인데 이 십계명이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왜 이렇게 두 개씩 나왔을까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가 껍데기에도 나온다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것 말고 성경에 나오는 것만 두 번이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명기에 나오는 것과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니고 같은 것인데 모세가 두 번을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한 번은 시내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시내산에서 모세는 생명을 건 기도를 하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주셔서 돌비에 새겨진 말씀을 주시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였고 또 한 번은 오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광야생활을 시작하기 직전이었고 마지막은 광야생활이 끝나가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운명하기 직전에 이것을 다시 한 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44절과 45절에 보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모세가 증언과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였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신”은 “거듭 신(申)”입니다. “다시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십계명은 이미 ‘돌판’에 새겨져서 이스라엘의 법궤 가운데 보존되어 있었고 늘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깨닫고 늘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운명하기에 앞서서 다시 한 번 이 십계명을 세세하게 알려주는 이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어도 쉽게 잊어버리거나 마음에서 떠나가 버리거나 하나님은 말씀을 들었어도 그 말씀이 그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고 마치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듯이 늘 머리로는 돌아도 한 번의 부딪힘도 없이 그렇게 지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야기, 전혀 알지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 평생에 한 번도 생각도 해 본적이 없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던 일들을 새롭게 발견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그의 거룩한 계획을 보이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반복의 연속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훌륭한 신앙도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만 바뀌면서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름다운 신앙의 행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좋은 평가도 반복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지 않는 불신앙의 행위도 반복됩니다. 거기에 대한 평가도 반복됩니다. 그렇게 구약이 끝나고 신약은 구약을 회고하면서 또 반복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방법으로 이런 일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증거 하신 것과 규례와 법도를 모세가 선포하였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그 율법 하나 안에 이미 증거와 규례와 법도와 같은 많은 내용들, 히브리 원문에는 이것이 모두 복수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십계명을 중심으로 그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러주시고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온 후에 일어났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도록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이 노예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과 함께 어떤 의무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돌아보사 너희를 불쌍히 여겨서 너희를 억압받는 이 비참한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너희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모든 메시지였습니다.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때 엄청난 감격이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하는 것은 땅이 없기 때문이고 왕이 없기 때문인데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왕이 되어 주시고 그 땅을 가나안에 정해 놓으셔서 그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시고 거기서 심지 않은 과일과 포도나무와 감람나무 열매를 따게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거나 누구에 의해서 종살이를 하지 않고 완전하게 정착된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귀가 번쩍 뜨인 것입니다. “이런 공짜가 어디에 있나? 이거 완전히 거저먹는 것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수로 애굽에서 떠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열 번의 위대한 재앙, 기적을 애굽땅에 베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여호와만이 진정한 참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모든 애굽 백성의 환송을 받으면서 유유히 애굽 땅을 출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하는 소식은 그 어둠 속에서 커다랗고 찬란한 희망이었고 빛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세상 속에서 죄와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완전히 행복에 들뜨고 더 이상 세상에서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나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도 자기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기 직전에는 자신의 육신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심각한 영적인 삶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게 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노예와 포로 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의 영적인 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있고, 진정한 삶의 기쁨과 의미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생의 무목적,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그 참된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깊이 마음속으로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뭔가 자신의 인생 속에 진정한 변화가 필요하고 진정한 구원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구원에 대한 경험 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듭나서 주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며 신앙을 부인하고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활을 해 왔는데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고통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빛이 비칠 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불현듯 눈을 떠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며 오랫동안 살았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이 있고, 그 가나안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애굽의 고기 가마 옆에서 가마를 끓여서 애굽 사람들에게 그 고기를 다 퍼주고 자신은 국물이나 먹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나서 자신들이 이렇게 포로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듯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기 전에 그런 일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각성시켜주시자 자기의 이런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고 죄 가운데 있는 삶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오늘도 주님이 그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능력으로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큰 기쁨과 감동이 됩니다.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계속해서 누리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손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 때 그 감격을 생각해보십시오.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430년 동안이나 억압하던 애굽의 위풍당당한 군대를 다 쳐부수고 바다에 다 쓸어 넣고 너무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광야 길로 나설 때 그 감격은 여러분이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이 된 후에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어나와서 울며불며 땅을 치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겨우 36년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430년 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받은 피해와 만행이 엄청나게 큰 것이었지만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학대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면 죽이라는 것을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아이를 낳고 배가 불러올 때마다 산모들은 근심을 합니다. ‘이 아이가 여자 아이여야 할 텐데…’ 낳았는데 아들이면 얼굴을 보기도 전에 죽여 버립니다. 이런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가 잠깐 휴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속박하고 구속했던 지긋지긋한 애굽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냥 결별하고 정처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입주할 아파트를 가나안에 다 지어놓고 그것을 분양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거기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동네에서 이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신이 나서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은 큰 평수로 가는 사람들이고 한숨을 내쉬면서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은 쫄딱 망해서 집을 다 팔고 사글세로 쫓겨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간 곳이 어딥니까? 홍해를 건넌 후에 시나이 반도, 그것이 시내 반도입니다. 시내산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9개월 동안을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행군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에서 종 생활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더러운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털어버리게 하시고 모세가 계명을 받아서 가지고 내려오는데 겁이 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어서 와라. 오기만 하면 너희에게 아직 미분양 상태에 있는 저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유업으로 주리라!”, “할렐루야!” 하면서 뛰어나왔는데, 놀라운 역사와 기적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율법을 받아서 내려오더니 하는 말이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칼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피를 뿌리면서 “너희는 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합니다. 이제는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를 믿고 그렇게 놀라운 감격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 구원의 기쁨을 속히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것을 숙명처럼 생각합니다. 한 번 좋았다가 그 다음에는 다 털어먹고 “손들고 옵니다.”를 되풀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공식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감격을 누린 후에 그들이 즉시 만나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놀라운 기쁨과 은혜 속에서 감격하게 되었을 때, 그때 여러분이 즉시 알아야 할 사실은, “이제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가야 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규칙대로 살아가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에 대한 행복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분복에 대해서 언제나 감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너무나 크게 생각하고 구원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하찮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그 백성으로 부르셨고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그 피로 여러분을 빼 내셔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참여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전에 믿어질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지게 되었고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이제는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의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내가 구원은 받았지만 내가 어떻게 신앙도 없는데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어?” 이것은 신앙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 생겼을 때, 그때 내 삶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는 그 덕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면서 그 아버지의 말에 전혀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면서,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마디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만 애비 없이 살아가는 그런 자식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얘들아, 너희가 이렇게 살아주면 나에게 좀 보탬이 될 거 같다.” 하나님이 이런 것으로 우리에게 구걸하신 의사도 없거니와 필요도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체면이 깎이거나 손해를 입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규례를 주시고 증거 하신 것들을 주시고 수없는 하나님의 반복되고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그래서 그 백성들의 최고의 보람인, 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게 하시려고 그러한 규례와 규칙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교훈과 가르침들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고 내 마음대로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마음먹을 때는 이런 것들이 한없이 무겁고 억압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방종한 학생들에게는 학교의 규칙이 한없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모범적인 학생들에게는 학교의 규칙처럼 자신들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성실한 학생들이 상을 받고 진로가 보장되고 꾀를 피우고 불성실한 학생들이 언제나 손해를 받는 학칙처럼, 모범적인 학생들에게 안전하고 기분 좋고 학교생활을 힘써서 생활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은 이 종살이에서, 죄라는 이 세계로부터 구원을 통해서 광야로 나오자마자 하나님의 계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명을 받고 그 계명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계명을 지킬 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지금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다 살고 난 후에 내가 정말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왔지만 이것은 내 힘이 아니라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을 받을 텐데 이 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면 살아라.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너희 책임이 아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너희에게 원하시는 뜻이 이것이라고 하시면서 십계명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지키면서 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의 반복된 선포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46절입니다.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그리하였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벳브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오늘 모세가 이전에 이미 했던 설교를 다시 한 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흘러가서 첫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을 통해서 그 설교를 들었던 후세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반복된 이 설교를 들으면서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고 시계를 보고 도시락 먹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엄위하심 속에서, 가나안을 정복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십계명의 선포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주의 교훈을 향해서 가져야할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따로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십계명을 다시 반복한 장소가 어딥니까? “벳브올 맞은편”입니다. 여러분은 이 벳브올이라는 곳이 잘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이곳은 바로 ‘바알브올의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가끔 설교 시간에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발람 선지자와 관련되어 나타난 모압의 왕이 발락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이미 소문이 많이 났는데, 요단강이 흘러가고 이쪽에 암몬이 있고 모압이 있고 그 밑에 에돔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야하는데 암몬과 모압의 사이로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기로 지나가면서 그 사람들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잘 타협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암몬과 모압의 사이에 있는 헤스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을 지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헤스본 땅에 시온 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이 왕에게 헤스본을 지나가겠다고 했더니 시온 왕이 싫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온 왕을 치고 올라가서 바산의 왕인 옥까지 피비린내 나도록 완전히 진멸을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준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모세는 죽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마지막 큰 시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간다고 하니까 모압 왕이 발람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하니까 싫다고 합니다. 다시 더 많은 재물과 사람을 보냈더니 이 발람 선지가 하는 말이, 자기 힘으로는 저주를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갈라놓으면 된다고 하면서 낸 묘안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와 간음인데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해서 그 죄에 빠지게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이니 모압이 승리를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바알브올이라는 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축제를 여는데 미디안 사람들을 시켜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지도자급인 백성의 두령들을 초청해서 그 우상 숭배하는 곳에서 커다란 음행을 하게 합니다. 당시 우상 숭배하는 순서 속에 음행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예상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진노하십니다. 결국 2만 4천 명의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피 흘려 쓰러지는 심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일어났던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에 이스라엘 백성이 서서 벳브올을 바라보면서 그 십계명의 선포를 듣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수많은 장소가 있음에도 불고하고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이 벳브올 맞은편에서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그런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계명과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보며 그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의 수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경험하며 이렇게 가나안 땅 앞에 왔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역사적인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벳브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셨고 우리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재앙을 당하고 징계를 받았다.” 이런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상기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의 계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율법을 능가하는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율법을 능가하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 시대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의 의와 공로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없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 흘린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와 어떤 허물과 어떤 죄악 가운데 있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사죄의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 죄인 중의 괴수라도 받으신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같은 죄인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거나 간음을 하거나 이웃의 물건을 도적질한다고 해도 구약시대처럼 누군가가 칼을 들고 나와서 사람의 목을 베고 지나가거나 땅이 갈라져서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거나 불뱀이 나와서 우리를 물어 광야에서 죽어가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징벌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약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놀라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이 십계명을 해설하면서 여러분이 알게 되겠지만,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 속에 담겨있는 보다 심각하고 깊은 복음적인 의미들을 끌어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영적인 형벌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어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곤고함이 있습니다. 사죄 받지 못한 영혼들의 그 고통, 죄로 말미암는 그 곤궁함,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인 세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즐거움과 기쁨은 죄로 말미암아 박탈됩니다. 계명을 어긴 사람들은 오히려 옛 시대의 사람들이 받았던 것 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견디기 힘든 영적인 고통과 아픔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받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방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전에 구원받기 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영적인 아픔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자유 하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지만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율법을 사랑하면 살아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대의 행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벳브올을 마주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명의 말씀을 들으면서 알게 되는 두 가지 길은, 순종하며 이 율법을 전심으로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 율법을 하찮게 여기고 벳브올에서 죽어갔던 바알브올의 참여자들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삶을 것인가?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신앙의 태도를 분명하게 해 보십시오. 신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롭게 하나님의 모든 교훈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 강 건너 저 편에 서서 너희들이 섬기던 그 아모리 족속과 이방의 많은 원주민들의 신들을 섬기며 살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길 것인지 택하라.”, “둘 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오늘 똑같이 이 모세로부터 선포된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런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에게 분명히 말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냐? 세상의 자녀이냐? 너희가 만일 세상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이제 너희는 택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하게 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하든지 주님은 내게 말씀하셨지만 살아가는 것은 이제 내 맘이라고 하며 불순종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꼭 그렇게 흑백논리로 말씀하셔야 합니까?” 주님은 그것을 흑백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의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준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구원은 당신 마음대로 하셨지만 살아가는 것까지는 참견하지 말라고 하며 그렇게 살아간다면 “벳브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알브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셨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내 맘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너희는 바알브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을 은혜의 시대에서 율법의 시대로 돌아가게 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나 방종하고 너무나 태만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입니다. 규칙도 없습니다. 그리고 규칙이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만화책에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수결로 하자고 손을 듭니다. 주님이 저쪽에서 “얘들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란다.” 말씀하시니까, “주님, 좀 가만히 계세요. 주님도 한 표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너무 방종합니다. 그리고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세상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뭔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의식이 없는 사람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규칙대로 살아간다,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체성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고 거스르고 규칙을 깨고 어기고 변칙, 변이, 불규칙, 이런 것들을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개성 있는 인생이고 주체성이 있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세상의 풍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물려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찮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교통법규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나는 너희가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 하시는 말씀을 교통순경이 떼어주는 3만 원짜리 딱지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속에 되풀이되는 변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현실은…”,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누가 다 그렇게 살아갑니까?”, “세상을 봐라, 누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방종하고 막 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은 만난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후에 즉시 시내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를 깨달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값싼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속에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이 구원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마다 이렇게 옛날의 습관대로 방종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며 살아가기 좋아하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다시 한 번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기뻐하는 바를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를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편한 길을 포기하고 불편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영광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길을 버리고 주님,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는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주 앞에 고백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주어졌지만 그 은혜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계획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방종하고 세상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그들의 친교단체에서 하는 정도, 그 회칙을 지키는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에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근동의 세계에서 충격적인 계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형상을 만드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만들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형상을 놓고 경배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형상을 만들어 놓고 경배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렇게 형상화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남의 아내를 빼앗고 노비를 탐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시대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한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십계명이 우리에게는 너무 무겁다!” 하시면,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애굽 땅을 떠나왔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안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설교되는 이 율법을 들으면서 선명하게 두 가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며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축복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아니며 하나님의 그 율법에 대해서 방종하게 살다가 바알브올의 사건을 통해서 징계를 받은 조상들처럼 그렇게 비참한 길을 갈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로에 놓여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하찮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살아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방종한 생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법을 지키는 것만큼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하철을 오르내릴 때 역무원 하나만 있어도 질서정연하게 좌측통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거리에서 신호등 하나의 깜빡거림에 따라서 수 천대의 자동차들이 섰다 가다를 반복하며 일정한 방향으로 물줄기처럼 흘러가는 질서정연한 세상을 보십시오. 여러분, 질서는 놀랍게 흘러가게 있고 오히려 무질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을 하나님의 높은 보좌 위에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율법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빨간불을 켰는데도 우리는 “돌격 앞으로!” 하지 않습니까? 사고가 나서 차가 전복되고 뒤집힌 다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율법을 통해서 좌회전 신호를 켰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질서정연하게 오직 그 신호등 하나 때문에 좌측으로 이동을 하고 있습니까? 파란 불이 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직진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인생살이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 보실 때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멋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이전에 세상에서 배웠던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법과 말씀과 질서와 규칙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고 방종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고 나서 더 겁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빙자하여 이전보다 더 자기 맘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은혜를 주실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더 심각하게 갈라놓고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지고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굳어진 심령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시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그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여건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환경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방종한 옛 성품 때문에 주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신앙의 삶을 돌려드리지 않는 불신앙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요단 동편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 거기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낭랑하게 들려오는 이 모세의 권능 있는 십계명의 선포를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십계명을 하찮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칼에 맞아 2만4천 명을 이 벳브올에 묻었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는 저들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이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며 살자.” 그들은 우리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 능력이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데 누가 우리에게 그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공급해 줄 것인가? 어느 때 그런 능력이 하늘로 부터 임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계명을 지키게 만들어 줄 것인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받은, 구원받고 주님 앞에 구별된 백성이니 우리는 옛 백성들의 모습을 따라가다가 칼에 맞아 죽은 2만 4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지 말자. 우리의 명예는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우리의 기쁨은 그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 우리의 기쁨은 그 말씀대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심각하게 결심하게 하신 다음에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에 서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모든 음행과 악행들을 소개하면서 이 역사를 회상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엄청나게 많이 죽었으니 우리는 다시 이와 같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옳도다.” 하며 역사를 상기시켰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의 마음을 다짐하고 입으로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신앙생활에는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두 편 가운데 한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버리고 어떻게 바알브올의 사건에서 징계 받은 것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나는 그 편에 서서 모세에 의해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심각하고 엄숙하게 듣고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지키며 살기로 맹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리를 지키며 살아서 주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지만 구원해 주셨을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셨던 그 계획을 온전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감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결심을 하며 바알브올의 맞은편에 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이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헤스본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온을 쳐서 멸하고 이어서 바산의 왕 옥을 쳐서 멸한 그 땅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벳브올의 그 땅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로 심판하신 피비린내 나는 죄악의 심판의 장소인 것과 동시에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당대의 강력한 나라인 헤스본의 시온과 바산의 유명한 왕인 옥을 쳐서 멸망시킨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간에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참 은혜로웠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여러분이 율법을 지키도록, 십계명을 지키며 살도록 초청하고 있지만 칼만 들이대시면서 안 지키면 죽음만이 기다린다고 협박하시면서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겁나서라도 십계명을 지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그렇게 심판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이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헤스본의 시온와 바산의 왕 옥, 자신들의 힘으로는 넘어뜨릴 수 없는 이 거대하고 강력한 나라의 왕들을 모두 꺾고 강건하고 견고한 도성들을 초토화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로 그런 놀라운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역사를 경험한 바로 그 땅에서 이 십계명이 울려 퍼지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해서 보겠지만, 이 십계명을 두 가지 각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지키려고 노력을 하다가 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는 주님이 우리는 구원하신 그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놀랍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무원칙하게 내 인생을 살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인생을 살아드려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이 하나님의 십계명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한없는 즐거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로 시온과 바산의 왕 옥을 깨뜨린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상되는 의미 깊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말할 때마다 역사가들은 이 헤스본 땅에서 있었던 시온과의 전투를 떠 올렸고 바산 왕 옥을 쳐서 깨뜨린 위대한 역사는 가나안 땅에 숨어있던 여리고성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흘려 기도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찢어 우리를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땅에서 여러분을 죄의 사슬에서 건져주시고 사망의 올무에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대한 찬송이 마음속에 남아있을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십계명 강해 (1996.02.04. 주일오전2)
2. 서론 2: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라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신5:1-3)
녹취자: 김경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십계명을 들어가기 전에 두 번째 서론 시간입니다. 5장은 오늘 읽어드린 1절부터 십계명 바로 앞부분까지는 이미 44절에서 모세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선포하였다고 한 말씀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 5:1)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명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면서 살아야할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교훈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이 장면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온 이스라엘을 불렀다고 성경이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모이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겠다고 목숨을 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일론 신자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누군가의 권유와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주일이면 자동적으로 교회에 오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러한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세상살이에 바쁘고 피곤하고 시련과 환난이 겹쳐서 말씀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키며 살만한 사람들에게만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에게만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심에 수준이 어떠하든 그들의 놓인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팔로 구원을 얻고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이 광야 속에 가나안땅이 보이는 요단강 맞은편에 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오랫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연로한 사람들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까지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이스라엘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신앙에 있어서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셨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부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믿지 않는 이유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주인노릇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믿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라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한다.’라는 사상입니다. 그것도 철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 와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안 믿으시는 분 빼놓고 믿으시는 분들은 제가 다시 한 번 말 할 테니까 아멘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별로 안살아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데 아멘을 큰소리로 해도 괜찮을까? 그렇게 떨지 마시고 다시 한 번 말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아멘.’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성경은 우리에게 패역이요, 불순종이요, 하나님을 향한 배반이요 악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한 달이나 한 달 반이면 지나올 수 있는 그 광야 길을 지나며 그 숱한 사연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모세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쯤 되어서는 모세가 맨 처음에 애굽에서 출발해서 시내산으로 갔습니다. 여기서는 호렙산이라고 하는데 호렙과 시내산은 어떤 관계냐 하면 학자들이 생각하기를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시내산은 넓은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렙은 그중에서 바로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한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율법이 선포되고 있지만 첫 번째 원판에 적혔던 율법을 들었던 사람들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 등 몇 사람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마지막에 모세까지도 죽으면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출생한 신세대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던, 애굽을 감격적으로 출발하고 그리고 홍해에서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하던 그 병거들이 모두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놀라운 역사의 광경을 목격했던 그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어있었습니다. 못 들어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고도 복된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했던 유일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시고 지금 이 시간도 인생의 생과 사와 그리고 화와 복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아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의무는 여러분들이 신앙이 돈독하거나 돈독하지 않거나 혹은 여러분들이 교회의 훌륭한 직분을 가지고 있거나 갖지 않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그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도 주님의 놀라운 손으로 구원을 받고도 구원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법도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규칙대로 인생을 살지 않을 때 그 인생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쁨도 없습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고달픈 인생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갑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값지고 고귀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빈손 들고 앞으로 나갈 때 하나님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삶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마음의 진정한 평강을 잃어버리고, 기쁨과 진지한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놀라운 은혜의 증거들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보다 더 우울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언제나 평강이 없고 곤고한 고통이 깃듭니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시작됩니다. 고난을 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감히 자신이 욥과 같이 무죄하나 하나님에게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아픔을 겪습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평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이 깨뜨려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평안이 깨뜨려진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불안과 고통과 번민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규칙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잘 믿었던 사람을 단지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랑의 깊이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깊이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준행하며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그 말씀대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를 교훈하시고 나를 바꾸시고 내 인생을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이 모세가 다시 한 번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새로운 세대들을 유서 깊은 벧브올의 맞은편 골짜기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일만 이천 명이나 죽었던 생생한 역사의 추억이 서려있는 그 현장 맞은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도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셨었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우리 아버님의 취미 가운데 하나가 저를 데리고 고향에 가서 선산을 다니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우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묘 앞에 서서 물론 절이야 하지 않지만 선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니 살아있는 사람들도 못 돌보는 처지에 무슨 8대조, 9대조 심지어는 이십 몇 대조 할아버지 묘까지 돌아본다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이 좀 들어서 효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모가 해달라는 대로 해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닌가? 그래서 정말 싫은데 그것도 종중의 회의가 있는 날 거기에 가서 서기 노릇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회장이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산소를 돌아다니셨습니다. 그러면 본인은 뵙지도 못하신 분인데 어찌도 그렇게 잘 아시는지 “이분이 우리 8대조 할아버지인데 어디 병마도원수를 지냈는데 그분이 이르기를….” 하면서 주절주절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딴 생각합니다. ‘경치도 좋다. 어쩜 바람도 이렇게 좋고 이런데다가 조그만 집을 짓고 설교준비나 하러 왔다 갔다 하면 좋겠다.’ “알아들었냐?” “예예.”
이처럼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놓고 이 계명을 다시 한 번 들려주는 이야기는 “옛날에 하나님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단다.”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계명을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왜 저를 여기에 세우셔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매주일 여러분들을 교회로 부르셔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것이 있구나! 하나님이라는 할아버지는 그런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한번 여러분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주고계신 것이 아닙니다.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계명을 주시는 것은 그런 계명도 있고 삶은 또 따로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계명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법이 따로 있고 단지 우리에게 알려지고 그것은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뜻이지 우리 모두를 향해서 살아라.’ 그런 뜻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벧브올 골짜기 그 맞은편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언약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에게 이런 생각이 있고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시니까 너희들이 이랬으면 참 좋을 텐데 못살아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을 하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말씀을 듣고 너희는 이 말씀을 배우고 너희는 이 말씀을 지켜서 너희는 이대로 살아라. 이대로 살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가만두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말씀을 해도 좋으십니다. 왜? 우리에게 그 정도로 요구하실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풍성한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그럴 수 없었는데 이제는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말씀을 순종하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려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한번 생각해봐야합니다. 이것을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하나 받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쉼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가르쳐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유익을 받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너무 둔하고 딱딱해져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들려도,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공지사항보다도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돌아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자주 들리기 때문에 이제는 이미 그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들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법이 따로 있고 살아가는 삶이 따로 있듯이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런 세상의 삶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에 대한 모든 욕망에 이끌려 삶을 살고 자신의 모든 인생의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골똘한 나머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할 강한 도전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삶속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가장 불효한 자식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여러분들은 자주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자기가 너무 불효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효를 했는지, 무엇이냐? 살아생전에 아버님은 이런 것을 원하시고 어머님은 저런 것을 바라셨는데 내가 인생살이에 바빠서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산 것이 후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는 그것이 바로 유언입니다. 그래서 유언을 지킴으로써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하고, 마지막에 그 부모를 전심으로 사랑해야하는 것을 그 유언을 지킴으로써 자기가 그 부모를 사랑하고 여전히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 부모 앞에 보여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법도를 알려주시는 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말씀이 있다 ‘아 하나님은 어쩜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까? 하나님은 참 말씀도 잘하셔 어쩜 이렇게 우리에게 이렇게 귀하고 놀라운 말씀을 한없이 들려주실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에 능하시다는 사실을 칭찬받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이 계명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동의를 표하고 박수를 치고 ‘계명이 훌륭하도다. 기독교 말고 어느 종교에 이런 훌륭하고 고상한 계명이 있단 말인가?’ 이런 것들에 환호성과 찬사를 받기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백성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 애굽에서 살던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었고 너희의 땅은 이제 죄 많은 억압받는 애굽의 땅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며 새롭게 세워가야 할 새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독특한 나라를 세워갈 때 하나님은 그 나라를 통해서 온 중동의 땅에 하나님이 누구인 것을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마음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율법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들어야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듣고,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 출발은 율법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구원을 받고 광야를 출발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가 운데 살아가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을 바라본 예표였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주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는 우리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교리 하나에 하나님을 제한하며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내실 때에는 그 은혜는 거저 주신 것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낸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고 진정 행복한 인생을 살기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가지셨던 삶의 계획과 우리의 인생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면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날 나이 좀 드신 분이 무엇을 해다 드리면 먹고 ‘이 맛이 아냐! 옛날의 이 맛이 아니야!’ 왜 그럽니까? 의사들의 이야기는 음식이 옛날만 못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미각의 모든 세포들이 나이가 먹으면서 변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살아나셔서 옛날 된장가지고 다시 찌개를 끊여주어도 지금 먹으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렇게 세상이 신나고 즐겁고 쾌락이 신나고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참 유쾌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변화된 다음에 그래서 어쩌다 욕심에 이끌려서 세상에 나아가서 옛날에 살던 대로 세상연락을 즐기면서 살아보았더니 그 맛이 옛날 맛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고 싶지만 옛날 맛이 아닙니다. 옛날의 그 고깃국 맛이 아닙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으로 돌아가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독특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독특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내 인생 네 마음대로 하세요.” 세상에 누가 그럽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주님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사용하시옵소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방법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쫒아 다녔으나 이제는 죄와 타협을 거부하고 거절하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죄의 길로 가고 넓은 길로 가도, 외로워도 좁은 길로 걸어가고, 즐거움이 없어도 죄의 길보다는 의의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세상에서 번영하는 길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고난의 길을 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게 될 때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겠냐하시며 밖에 버리는데 밖에 가면 환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밖에서 사람들의 발에 의해서 철저히 짓밟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바라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우리는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이미 세상은 옛날의 세상이 아닙니다. 돌아가도 옛날의 고향이 아니듯이 이제는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맛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옛날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독특성을 잃어버리면 세상에서도 밟혀버리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우리 인생의 진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배우고 행하면 행할수록 우리는 우리를 그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키며 살면 살수록 주님이 얼마나 고귀하신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감격합니다. 그 큰 죄악의 구렁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건져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말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뜻을 세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결심하십시오. 이제 내가 이 세상의 음성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이제 마귀에게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는 어리석어져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방법을 배우고 그 말씀을 지켜 살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받아도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를 결심하기로 뜻을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셨던 이 거룩한 율법이 선포되던 하나님의 동산에 다시 한 번 서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면서 이 말씀대로 깊이 살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는 내가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놀라운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드리겠습니까? 이 놀라운 증거를 무엇으로 입증해 보여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의 품에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간절히 원하고 가르치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여러분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또한 자녀로 서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아픔과 그리고 그런 사모함으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고쳐진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정확히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만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도 세우신 것이라.”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님의 손으로 친히 쓰셔서 십계명을 주신 그 돌 판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처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고 와서 모세의 얼굴은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것처럼 광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열 가지의 계명을 장엄하게 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처음 그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영광 자체였습니다. 그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왜?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신 그 임재를 백성들 가운데 드러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것을 보았습니까? 못 봤습니까? 못 보았습니다.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율법은 거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받고 내려온 그 모세의 율법을 받는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 율법이 구속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그 율법대로 살아야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가서 ‘네가 어찌하여 내 뜻대로 살지 않았느냐?’ ‘몰랐어요!’ 교통순경은 가끔 봐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열린 교회에 보내서 거기에서 내가 내 말을 너희에게 가르쳐주는 주의 일꾼들을 세워 내가 너에게 열심히 전하였거늘 네가 그 말씀을 배웠느냐?’ ‘하나님 주일 오후에는 놀러가느라고 못나왔고 수요일에는 밥 벌어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갈 수 없었습니다. 몰랐어요! 내가 알면 지켰죠! 몰랐는데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전심으로 내 말이 무엇이고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애를 썼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이어서 여러분들이 말 할 것입니다. ‘꼭 그랬다고는 할 수 없죠. 그저 거기 갔고, 설교를 하니까 들렸고, 성경을 펴서 눈에 들어오니까 읽었을 뿐입니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 시내산에 있지 않았던 모든 백성들을 그 말씀으로 이끄시고 다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늘 들려졌습니다. 오늘도 이 현장에서 다시 들려지고 있습니다. 태어나면 그 계명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공부했습니다.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이 들어간 사람들은 너무 알고 싶어 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하나님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습니까? 주님 제가 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계속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담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 이렇게 살아야한다.”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그 자체가 너무나 부담이 됩니다. 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지만 그러나 그 부모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그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얘야, 너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네 앞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러면서 다 가르쳤습니다. 그때에 신앙이 있는 자녀들은 “아멘, 아멘. 어머니 그러면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부모를 사랑하되 어떻게까지 하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죠?” 알고 싶어 했습니다. 너무 알고 싶어 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 이외에 법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규례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더니 “부모님보다 하나님을 공경해야지요.” 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미명하에 부모 섬기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때만 되풀이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대언자로서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로부터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쓰신 놀라운 돌비를 가지고와서 양손에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십계명을 웅장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모세로부터 그 원판의 계명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핑계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과 언약을 맺을 때 자기들과만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후에 태어날 모든 후손의 대표로서 그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할 의무를 모두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관계가 없는 사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님이 택하시니까 이스라엘이 독특한 백성이 되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으시고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그리고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이 되게 너를 도와주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모세가 눈만 껌벅껌벅했을 것입니다. 왜? 그 당시에는 이방의 신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이 모두 변덕이 팥죽 끊듯 하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람들은 불안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왜? 신들이 언제 심통을 부릴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안 믿는 집에 가보면 봄만 되면 가서 부적을 만들어 붙여놓고 집의 기초공사를 하면서 돼지고기를 사다놓고 구부렁 절을 하는 이유는 재앙을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앙은 왜 일어납니까? 신들이 변덕을 부리고 터줏대감이 곤조를 부리면 재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많은 신들이 그런 식으로 변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로 불로 지나가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 아브라함이 굳게 마음으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중동에 있는 사람들이 흔히 쓰던 약속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둘이 약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너는 내 부하가 되고 나는 네 주인이 되어서 내가 너의 모든 생계와 행복을 책임진다. 그 대신 너는 나에게 충성하고 나만 섬겨야한다.” 이런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안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큰 소를 잡아서 반을 쪼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소를 반으로 쪼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500kg짜리를 반으로 쪼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현장은 끔찍합니다. 피가 몇 트럭이 흐를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둡니다. 그렇게 해놓고 약속을 한 다음에 둘이 거기를 함께 손을 잡고 지나가야합니다. 피를 질퍽질퍽한 데를 걸어서 지나갑니다. 소는 반으로 쪼개어져서 눈을 부릅뜨고 누워있습니다. 거기를 지나갑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둘이 맺은 이 약속을 우리 중 누군가가 깨뜨리면 이런 큰 재앙과 저주가 우리에게 내리기를 신께 비나이다.” 의미하며, 그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엄숙한 언약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주겠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삼겠다. 너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게 만들어주겠다.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백성들이 많게 되리라.” 그것을 약속하신 다음에 믿지 못해서 주저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불길의 임재로 쪼갠 고기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씀이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줄게. 내가 너를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아줄게. 그리고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 해주마.”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그것을 어떻게 믿어요?” “그럼 내가 보여주마.” 그리고 쪼갠 고기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보았지? 아브라함아 내가 만약에 너하고 맺은 약속을 어기면” 우리는 흔히 말할 때 너무 세게 약속할 때 뭐라고 합니까? “이 말이 거짓말이면 내가 성을 간다.” 그 성은 못 갑니다. 우리나라처럼 성을 갈기 까다로운 나라는 없습니다. 성은 못갑니다. 이복형제라도 다른 성을 가지고 한 집에서 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합니까? 약속을 하면서 못 믿겠다고 하니까 “이 말이 거짓말이면 네 자식이다.” 자기 친구보고 네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신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너에게 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저 소가 저주를 받고 쪼개져서 죽음을 당한 것과 같이 내가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설령 하나님이 그 약속을 하고 어기신다고 해도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책망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보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으실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찾아오셔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와 관계를 맺자. 그리고 너는 복을 주마.” “정말이요?” “정말이다.” “어느 정도로 정말이요?” “내가 이 약속을 너와 안 지키면 내가 하나님인 내가 저주를 받는다.” “누가 저주를 하는데요?” “저주할 사람을 아무도 없지만 그렇지만 내 자신을 저주해서라도 너와의 약속은 지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언약관계로 직접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거기에 있는 백성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도 맺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올라가는 그곳을 동행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했던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따라갔습니까? 비겁한 제자들은 도망갔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 못 박혀 살과 피를 찢으시며 그리고 그 십자가 뜨거운 태양 볕 아래 죽어가고 계실 때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했던 여인들은 십자가 아래 서있었습니다. 왜 거기에 서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십자가상에서 여러분들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로 오늘 우리들을 언약으로 묶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던 그 사람들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팔복산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산상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교훈의 말씀을 듣고 함께 감격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직접 만나셔서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동일하게 거기에 서있던 사람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셨습니다. 율법에 있어서 이러하다면 복음에 있어서는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를 위해 운 사람들도 아니고 안타까워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들려주실 때 우리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할 백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보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열조와만 세우신 것이 아닌 것이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말씀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언약관계 속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걸었던 두 길을 우리는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과 부요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결핍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살았고 그리고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시련과 위기를 능히 극복하며 이기며 살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한없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베푸시고 평강을 잃어버리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율법시대에 베풀어졌던 이런 끔찍한 심판이 우리에게 되풀이 되지 않는 것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은혜의 초청에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내실 때 우리를 위한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계획과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러지 않고는 인생의 번뇌와 고뇌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말합니다. 방종과 우리의 육체적인 모든 욕망들과 욕망을 따라 살고자하는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우리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계명을 거추장스러운 것들로 만들어버립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기를 원하지 않고 그 말씀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사람들을 부르셔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우리를 권고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네게 나타냄은 나 여호와는 하나님이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고 땅에서는 큰 불을 보이시고 너는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벧브올 골짜기 맞은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이 교회에서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핑계할 수 없도록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이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 무엇이고, 어떤 삶을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고 어떤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가장 대견해하시는가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그러시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내게 문제가 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관심이 없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도 나는 해야 되겠다는 것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육체의 방종이요 죄의 영의 지배를 받는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성경은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의를 계속 좇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써 나타나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내신 이후에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고 구원해내실 때에 가지셨던 그 고민이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장엄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광야의 길을 행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다른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없었고 이방나라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변덕스러운 하나님, 능력 없는 하나님, 성질이 고약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율법과 교훈을 따라 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고민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들을 용서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서 내 백성답게 만들까? 아니면 쓸어버리고 다른 나라를 다시 세울까?’ 이것이 광야길 내내 하나님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구원해내셨습니까? 이제껏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기까지 여러분들을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그 인도하심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인생의 사연이 고달픈 것이든 행복한 것이든 그 사연 갈피갈피마다 깃들여져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여러분들이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악 된 세상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설복이 있었습니다. 녹아지지 아니하는 돌 같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하나님은 다가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건드리시고 때로는 어루만지시고 때로는 눈물 섞인 음성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양심에 호소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썰렁한 삶인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멩이 같이 굳었던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 사랑이 믿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인도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그 비참한 고난을 대신 당하시고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열매 맺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래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한 성품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오늘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해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들을 겨우 애굽의 땅에서 구원해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 나라를 여러분들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열망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고집과 하나님의 인내가 어느 것이 더 강한지를 시험하고, 주님의 사랑이 그 농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불순종을 계속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심으로 오늘 이 시간에도 눈물겨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구원했으니 이제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내 교훈을 배우며 내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하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벧브올 골짜기 맞은편에서 이 말씀을 들려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 말씀을 건성으로 듣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벧브올 골짜기 맞은편에서 서서율법을 듣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시지 않는 피 냄새를 벧브올 골짜기 그 평지에서 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삶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던 백성들의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들을 여전히 그들이 느끼면서 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이 말씀 하나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자면 칼로 새기는 것과 같이 다가왔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동일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죽어야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는 생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불러내고 계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삶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그 품에 안겨서 그분의 젖을 먹으며 그리고 광야의 곤고한 골짜기에서도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려 우리에게 먹이시고 그리고 우리를 길러주시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고 너희는 그 품에서 내 말을 들으며 내 말을 배우며 내 말을 지키며 살라. 이것이 내가 너희를 구원해낸 뜻이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교훈을 지키며 살기위해 특별히 결심하지 않으면 안 돼는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계명 강해 (1996.02.11. 주일오전3)
3. 하나님만을 섬기라
“여호와께서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신5:4-7)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시 115:4-7)
녹취자: 백지영
어떤 사람이 캄캄한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서 항구를 찾아가는데 캄캄한 바다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었고 한 사람은 종이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주인이 종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난 이제 잘 테니까 너는 계속 노를 저어 가거라.” 종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 캄캄한 밤바다에 어디로 노를 저어서 가야지만 항구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얘야, 저 북쪽 하늘을 봐라.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니?” “예, 보입니다.” “그쪽을 향해서 계속 노를 저으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항구가 나온단다.” “예, 알았습니다. 주인님.” 주인은 뱃고물에서 잠이 들고 그리고 종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한숨 푹 자고 난 다음에 주인이 종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거의 다 왔느냐?”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북부칠성은 어디 있느냐?” 종이 대답했습니다. “주인님, 북두칠성은 벌써 지났나봅니다. 안 보이는데요.”
캄캄한 밤바다에 노를 저어가는 작은 가랑잎 같은 배가 북두칠성을 지나서 항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이라고 다양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너희는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3천 5백 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이 십계명 안에 오늘날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영원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인 여러분들 가운데 열 가지 계명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외우실 수 있는 분이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생들도 그렇습니다. 3계명과 4계명의 순서를 헛갈리고, 7계명은 이해를 하는데 8계명과 9계명이 무슨 계명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십계명이 우리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는 계명이지만 그 계명의 능력은 오늘도 우리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속박하는 사악함과 우리를 멸망시키는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모세가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이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을 때, 우선 그 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도 나오고 오늘 신명기 5장에도 나옵니다. 이 신명기 5장에서 나오는 계명은 역사가 많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선포된 계명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과 똑같은 계명이지만 뒤에 있는 신명기 5장에서는 20장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계명에 대해서 약간의 해석이 첨가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유의해야 될 대목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십계명을 받던 때, 백성들이 이 십계명을 듣던 그 놀라운 광경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시내산에는 -아마 시내산 생긴 이후로- 최초로 온 땅이 구름으로 가득히 덮이고 우뢰가 내리고 번개가 치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나팔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장엄한 하나님의 임재 한 가운데서 이 열개의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십계명은 열 가지 계명인데, 처음의 네 계명과 다음의 여섯 계명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십계명이 두 돌비에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 돌비에 네 가지 계명이, 다음 한 돌비에 여섯 가지의 계명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네 가지 계명,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 또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이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그리고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은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먼저 오늘 십계명 가운데 일 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 십계명이 이제 우리 신약시대에 와서 보다 풍부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은 첫 번째 계명으로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 주신 그 명령을 오늘 여기에서는 다시 약간의 변경이 가해져서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약간 말이 바뀝니다. 이 일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40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얼마나 우상을 쉽게 위하고 그 우상에게 헌신하고 우상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위하여”라는 말을 주님이 덧붙이셨습니다.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이 선포될 때에 이스라엘이 어느 땅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중동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결같이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우리도 다신교 아닙니까? 부뚜막에는 부뚜막 신이 있고 처마 끝에도 신이 있고 화장실에도 신이 있어서, 가끔 사람들이 고혈압으로 죽어가는 것도 화장실의 귀신이 역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이런 다신교적인 이 원시사회에 있어서 하나님만 섬겨야 된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나머지는 너희에게 신일 수 없다고 한 이 선포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모든 세계의 인민들에게 충격적인 선포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자신이 있으면 당당하게 승부를 하시지 무슨 하나님이 얼마나 불안하기에 나 말고 딴 데는 절하지 마라, 나 말고는 다른 것들은 신이 아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공정한 경쟁사회에서, 신들의 세계도 경쟁시대가 되어서 하나님이 당신이 가장 우월한 신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 사람들이 믿고 따를 텐데 뭘 하나님께서 나만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뭔가 인간을 향해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요구를 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독점적인 영광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지키면 행복하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고 만드셨습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편단심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이 시내산에서 만나는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장엄하게 들려오는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첫 번째 계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선 이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직 경배를 받으실만한 가치가 그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 살아가는 가운데는 가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인간을 대단히 존중하게 여깁니다. 엊그제도 시장에서 엄청난 불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물건들을 몇 십억 원어치를 태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퇴근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왜 사람들이 그렇게 경악했습니까? “그 물건 값이 얼마나 많이 나갈까?” 그것 때문에 경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더 큰 소는 수없이 죽고 피 흘려도 여러분의 식탁에 올라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소 보다 작고 나귀보다도 힘이 없는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것은 신문지상이 떠들썩한 뉴스거리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가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서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방법을 배웁니다. 오랫동안 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데, 그것은 결국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우게 됩니다. 사랑을 뛰어난 미덕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렇게 우리는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법을 만들고, 사람을 존중하게 여기지 않고 그 가치를 짓밟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벌을 주고 가두고 심지어는 사형을 시켜서 생명까지 빼앗아가는 권력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이 모든 존엄과 가치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 위에 인간이 뛰어난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치 있게 하셨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주님만이 가치를 정하실 수 있고, 그 주님만이 가치 있게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가치의 원천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완전하고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이 훌륭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도 모든 인생을 가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살아가는 삶을 가치 있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드시고 우리의 모든 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시는 가치의 원천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또한 이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생명이 그에게 속해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운명이 그분에게 속해져 있습니다. 삼라만상과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속해져 있고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하늘의 별을 생겨나게도 하시고 또한 소멸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고요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두려울 정도로 억겁을 흐르고 있는 이 세월과 그리고 우주의 영원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만이 이 모든 만물을 보존하고 통치하고 섭리하고 운행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들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거두어지고 있습니다. 숨 쉬고 기동하던 사람들이 죽어서 실려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이 세상의 어떤 과학의 기술로도 모방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어떤 것도 모방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만이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신 유일하고 참된 창조주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서고 나라가 무너지고 한 역사가 굽이치며 그리고 인간의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죽음과 고통이 여호와의 장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생명을 주시는 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역사와 나라가 서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인생은 더더욱 하나님의 손안에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므로 오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힘차게 설교하는 저를 오늘 저녁에 하나님께서 거두시기 위해서 온 세상을 무장시키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면 그리고 한 순간의 손길이면 내 생명을 거두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과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붙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이 땅에 보내셔서 여러분들을 먹게 하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온 땅에 식물을 주시고 그 곡식으로 무르익게 하지 아니하시면 여러분 통장에 들어있는 돈과 여러분 손에 움켜쥐고 있는 은과 금이 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누가 여러분들의 생명을 주장하고, 누가 여러분들에게 자녀를 주시고, 누가 여러분들을 불행과 좌절의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누가 여러분들을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광대하시고 완전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아니하시면 여러분들의 노력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고 축복하시려고 하면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으며 누가 우리를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축복된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 인생의 남은 날이 축복되고 행복할 것 같습니까 불행할 것 같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여쭈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그 고통에서 여러분 언제쯤 헤어나게 될 것 같습니까? 오늘 헤어날까요? 내일 헤어날까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혜나 생각으로 여러분들이 거기서 벗어나게 될 날들을 예측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뭐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보십시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언제 하나님을 믿고 돌아올 것 같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을 버리고 침륜에 빠져 마지막에 믿음을 부인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으로 인생을 마치는 대신에 육체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까? 아니면 마지막 죽는 순간에 살아서는 에녹과 같이, 죽어서는 아벨과 같이 그런 신앙의 삶을 살게끔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이 이어질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다 그분께 여쭈어보십시오. 직접 여쭈어 보십시오. 그분께 대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며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참 그런 것 못하는 게 직장생활하면서도 흠이었는데, 아부하는 사람들 보면 닭살 돋습니다. 완전히 간도 없고 쓸개도 없습니다. 돌아서서 침을 튀기게 욕하다가 나타나기만 하면 김밥 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김밥 싸는 게 뭔지 아십니까? 손을 막 비비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세계나 그런 줄 알았더니 기독교 세계도 그렇습니다. 김밥 싸지 마십시오. 사람한테 그러지 마십시오. 왜 인간이 평범한 사람에게 그렇게 김밥 싸면서 그렇게 비굴하게 그러고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그러며 사는 사람 없습니다.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에게 김밥 싸는 것은 겸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첨하고 아부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아첨과 아부를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정말 실세에게 가야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쥐고 계십니다. 그들을 움직이고 계신 유일하신 여호와 한분이 여러분들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분한테 곱게 안 보이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도둑심보입니다. 도둑놈 심보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실세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의 모든 인생을 붙잡고 계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십계명은 또한 구속받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서두를 붙이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먼저 밝히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밝혔습니까? 같이 읽어봅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아멘.
먼저 열 개의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열 가지 계명을 애굽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을 시온과 바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 가지 계명을 바벨론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이 열 가지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언제까지는?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 주시기 전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첫 번째 계명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먼저 상기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말씀하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었다는 것입니다.
종이 되어 본 적이 우리는 없으므로 우리는 종에서 그를 구원해 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던 감격을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제가 요새 바쁜 삶을 삽니다. 지난 주간에도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헉헉거릴 정도로 바쁘게 사는데 앞으로 몇 달 계속 될 것 같습니다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서 가서 말씀을 전하고 봉사를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너무 힘든데 요새 한없이 해방을 느낍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알다시피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교에서 목회를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꼭 무슨 도둑질하는 것처럼 목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목회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선순위가 학교에 있습니다. 분명히 심방 갈 약속이 있는데 학교에서 회의가 있다고 하면 할 수 없이 들어가야 합니다. 심방을 취소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하고 약속이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집회를 열어놓고도 수업이 있기 때문에 그 수업시간이 끝나야지만 여기 오게끔 됐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30분씩 기다리게 했습니다. 물론 미리 광고 냈습니다만. 그런데 이제 사직을 하고나니까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워졌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에 비할 데 없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지금 학교 다녔으면 입학 때문에 상당히 바쁠 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유롭게 말씀 준비도 못하고 또 집회도 못 다닐 텐데 자유를 느낍니다.
그러나 한 신학교에 교수가 되어서도 그런 해방감을 느낀다면, 이 사람들은 종으로 살았습니다. 종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한번 참말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학대받으면서 근로하고 있는 말하자면 열악한 근무조건에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루에 지금도 12시간 가까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래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남아돌아서 그것도 잘리지나 않을까 근근덕신으로 눈치를 보며 직장을 다니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어땠을까요? 그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24시간 중에 식사하는 20분 동안에 고기국물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 먹었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랬다면 애굽에 소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절이면 한 번씩 얻어먹는 그 애굽의 고기국물이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기국물을 먹기 위해서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루 종일 수고하며 벽돌을 짓이기고 그리고 짚을 잘라 넣어서 그 벽돌을 굽고 그것을 찍어야 했습니다. 햇볕에 말리고 그것을 등 허물이 벗겨지도록 쌓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일하고 나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거기에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있게끔 허락해 주는 것이 그 뼈 빠지는 노역의 대가였습니다. 그들을 틀림없이 변소를 청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당을 쓸고 개같이 기어 다니며 애굽의 사람들의 허드렛일을 다 해야 됐을 것입니다. 까다롭고 힘들고 더러운 모든 일들을 도맡아 했을 것입니다.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을 때는 아마도 채찍으로 휘갈겨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야 했고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에 노동력을 상실할 때는 밥만 축낸다고 잡아다가 창으로 찔러 죽여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의 운명이었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그 소유는 주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가족이 찢겨서 팔려가는 이런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종 된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구원이 있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이야기입니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너희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았어도 너희에게 나만 섬기라고 말할 수 있거니와 그러나 너희는 회상하라. 너희는 종 되었었고, 너희의 친구는 죽음이었고 너희의 일생은 비참하였으되 내가 너희에게 나타나서 너희를 건져내어 구원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살라고 명령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전에 그들의 상황은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버려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로왕 애굽이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저절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줄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의 천지인 애굽의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차례로 열 가지의 지축을 뒤흔드는 위대한 재앙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애굽의 온 땅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애굽의 모든 사람의 입에서 고백으로 받아내셨습니다.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갈라 인도하셨습니다. 뜨거운 태양 볕을 가려주기 위해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셨고 밤이면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도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목마를 때 반석에서 터뜨려 오르는 샘물을 먹고 해갈을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광야의 4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싸움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조상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의복은 낡지 않았고 신발은 해어지지 않았고 한 끼도 주린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땅에서 종 되었지만 우리는 애굽의 땅이 아니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죄의 종이 되고 그리고 사슬의 멍에를 메고 우리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실 때 흥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여러분 가운데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내게 너를 구원해 줄 테니 이제는 무엇 무엇을 해주겠느냐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내가 너에게 베푸는 은혜의 대가로 너는 나에게 돈을 달라 요구하시는 금전의 하나님을 만나신 분이 있습니까?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도 하지 않을 그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전하고 그리고 헛된 삶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퍅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감동 받을 줄 모르는 목석과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감동시키시고 감화시키시고 결국은 우리의 이 강철과 같은 마음을 녹이셔서 손을 들고 “여호와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고 주님만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옵나이다.”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속도로가 우리 앞에 펼쳐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때는 홍수로 다리가 끊긴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산사태로 말미암아 끊겨진 길 한 가운데 서서 겨울을 돌아보며 의지할 이 없을 때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외로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한 순간이라도 버려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던 그 인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하시고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희망도 보이지 않는 미련하고 우둔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수시로 감화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마치 목자가 지팡이로 양을 인도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재앙을 만나 고통하고 홍해와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에도 하나님의 팔로 우리 앞에 길을 내셔서 우리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영적인 싸움을 거치며 세상과 싸웠고 마귀와 싸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인생에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들이 죄를 범 했을 때라도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내 자식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의 집안은 너 같은 놈 둔 적이 없다.” 문전에서 여러분들을 쫓아내셨습니까? 지치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시련의 계곡을 지나고 풀 한포기 없고 물 한 모금 없는 광야와 같은 길을 지날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잠깐 잊어버리고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오셔서 우리가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을 내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위로하셨고, 우리를 향해 도전하는 맹수의 세력 앞에서 우리는 그저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여호와의 이름만을 불렀을 뿐인데 우리 싸움을 그가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가 굶지 않고 오늘날까지 먹고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교육시켰고 우리가 입었고 우리의 신발이 해어지지 아니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살아계셔서 수시로 죽음과 같은 위기를 지나는 그래서 사망의 위협을 당하며 곤고해 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을, 정말 인생을 끝내고 싶을 것 같은 위기와 그리고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 갈하여 우리의 심령이 목말라 죽을 것 같을 때 말씀의 샘을 우리 앞에 터트리셔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을 훔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쥐고 “오, 주여! 내가 살기를 원하옵나이다.” 결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 하나님만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의 끝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은 세상의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처와 사랑을 동시에 주고 병과 약을 겸하여 주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어떤 때는 우리를 모욕하는 세상의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호의가 아니라 시종일관 계속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의, 거룩한 하나님의 놀라우시고 지속적인 은혜, 이것을 힘입어서 오늘 우리가 살아있지 않습니까? 이 모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은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번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애굽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우습게 생각하셨습니다. 온 애굽의 처음 난 장자를 모두 죽여서 애굽의 온 땅을 곡소리가 메아리치게 만드시면 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하다고 별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구원해내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를 구속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둘도 없는 독생자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인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제일 고통스러운 일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건물을 하나 지을 때 고사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자고 신우회에서 그렇게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슨 사고가 나면 책임을 지겠다고 해도 고사는 지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한 간부가 빙긋이 웃기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예수를 안 믿으면 마지막에 지옥에 간다고 그리고 지금도 영적인 세력들이 있어서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그리고 인간을 유혹하기도 한다고 하니까 아니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계가 있으며, 아니 누가 영들의 세계를 만져보고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축복이라는 것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고 자기가 성실하게 살면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 지 분복을 지가 찾는 것이라는 이런 논리를 가지고 뺀질뺀질하던 간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청사 관리하는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사를 지내는 때가 언제인가 했더니 땅을 팠을 때입니다. 땅을 깊이 파놓고 그 다음에 토목공사를 하기 전에 그때 맨 밑바닥에서 -이제 그것도 정부 예산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웃기는 것입니까?- 정부 예산에서 그것을 가지고 돼지머리, 남대문 가면 웃다가 죽은 돼지들 많지 않습니까? 갖다가 하나씩 사다놓고 도저히 영적인 세계라든지 그런 차원의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는 그 사람이 대표가 되가지고 구부렁구부렁 절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쫓아가서, 거기 또 함께 가서 절하는 게 무슨 큰 서열에 드는 줄 알고 쫓아가가지도 자기도 절하겠다고 거기다 또 돈까지 올려놓습니다. 돈 놓으면 그건 분명히 누가 하는 사람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부렁구부렁 절합니다. 믿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절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와 고통, 여러분들의 인생이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비극을 만날 수도 있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자신의 지혜를 자랑해도 혼돈 가운데 여러분들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비극과 좌절과 고통과 혼돈 가운데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의 도움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거기서 여러분을 건져내실 수 있고 거기서 인도해 내실 수 있습니다.
(예화) 절에 오르다 보면 우상이나 망부석들이 쭉 서 있는데 기가 막힌 것 하나는 절 앞에 있는 석상은 에누리 없이 코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들이 없는 사람이 그 코를 잘라다가 물에 푹 삶아서 먹으면 아들을 밴다는 수천 년을 내려오는 비방 때문에 그 코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서부터는 지나다니면서 유심히 보면 석상에 백퍼센트 코가 없습니다. 나중에 한번 가 보십시오. 코가 팍 깨져있습니다. 어떤 코는 깬 코를 또 깨가지고 아예 코 자체가 완전히 뭉개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 석상은 왜 내 코를 베어 가느냐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거기 그렇게 수백 년을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혼돈과 어지러움 가운데서 인생의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몰라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주여 어느 길이 내 길이옵나이까?” 부르짖고 간구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믿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위기와 역경과 고난에 빠져서 어떻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그때에, 여러분들의 모든 처지가 사람들에게는 숨긴바 되었지만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고 여러분들의 처지를 감찰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이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들으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행하는 모든 일과 모든 말들을 들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냄새도 맡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에 없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악의와 선의 그리고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충성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의 냄새를 맡으실 수 있는 코가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의 손을 펼쳐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사실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어루만지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낙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그리고 홍해와 같은 어려움들을 앞둔 사람들을 그 앞에 손을 펼치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앞에 길을 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언젠가 변화받기 전 일입니다. 뭐 세상에 살아가는 모습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직장 가서 돈 벌고 그러면서 살다가 큰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근심과 좌절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누군가 저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분명히 지금 내 상황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교회 가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어디선가 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감싸 안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따뜻했습니다.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야,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는 말이 이런 의미이구나.”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원하고 또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안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넘어지는 여러분들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실 수도 있습니다. 믿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발로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부산에 집회에 내려갔는데 그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강대상이 좋다고 설교가 잘 되는 것은 아닌데, 이런 강대상이 아니라 플레스틱 비슷한 걸로 만들었는데 강대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특별한 재질로 만들었는데 220만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자가 쏙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탁 들어가니까 조그만 방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아주 아늑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여기 이렇게 레버를 돌리면 이 보면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끔 각도가 조절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한테는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강대상이 참 좋네요. 어디 수입품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나라제인데 이런 강대상을 가지고 있다가 그날 아침에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 속으로 강대 하나 바꾸면 참 좋겠다고 그랬답니다. 기도도 안하고 강대하나 바꾸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좀 읽다가 일어나서 나오려고 하는데 누가 똑똑 두드리며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아침인데. 그래서 누구시냐고 그러니까 “목사님, 접니다.” 그러면서 들어오는데, 그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제일교포였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에 거기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 강대를 새것으로 하나 바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돈을 내 놓는데 정확하게 한화로 계산해서 220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낱장 한 장 안 틀리게. 그래서 내가 “그거 참 신기하네요. 그러면 기도할 필요도 없네요.” 그러니까 목사님 하는 말씀이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미리 앞서 가셔서 내게 필요하고 교회에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 어떤 때는 교회일로 말미암아서 고통을 받고 돈 때문에 고통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막 기도를 내일서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이런 놀라운 신앙의 경험들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앞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발을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앞서서 여러분들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제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 인생이 사망의 계곡을 지나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언제이냐 하면 정말 예배할 때입니다.
(예화) 지난 주일날 집회를 다니고 나서는 최고로 적은 집회에 갔습니다. 열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크다고 가고 적다고 안 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안 가면 다 못가는 거지. 그런데 처음에는 꼭 뭐라고 비유할까? 보충수업 받으러 나온 학생들같이 입이 부어가지고 가만히 앉아있더니 넷째 날이 흘러가니까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강해를 하는데 1절을 가지고 두 시간을 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하는 폼을 보고 가만히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3절하다가 집회가 끝날 것 같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밤새워서라도 들을 테니까 6절까지 끝내고 가시라고 그래서 저녁 7시서부터 1시까지 설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는 추호도 배려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한번 보고 안 볼 사람이라서 그런지.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는 이 십계명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만 섬기며 살고 계십니까?” 십계명이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는 최대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으로 끝내기를 원해서 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은 여러분들에게 펼 때마다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느냐고 십계명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우리의 마음의 초점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약적인 의미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난주일 절에 가서 돈 놓고 절하고 온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굿판에 가서 돼지머리한테 절하고 오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전에도 그런 일이 별로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의미의 우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삶의 절대적인 권위를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에 눈 떠지던 처음 시간이 생각나십니까? 침상에서 잠깐 잠이 깼을 때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밤에 잠자리에 들 때 의식의 마지막 끝에서 여러분들은 누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계십니까?
(예화) 어느 교회 집회를 갔는데 가끔 와서 차가 와서 데리고 갈 때가 있습니다. 편하게 가라고. 그리고 앞자리가 편하니까 앞자리에 앉으라고 해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 달고 다니는 것 별로 운전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나침반을 거기다 달았습니다. 동그란 나침반인데 거기 빨간 바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남쪽, 동쪽, 북쪽 이렇게 죽 있습니다. 그런데 차가 달리니까 그게 달랑 달랑 달랑 움직이니까 바늘이 막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게 장식품인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호대기 시간에 차가 섰는데 그 바늘이 정확하게 흔들리더니 탁 섰습니다. 그러더니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일어나서 아침 밥 먹고 그리고 아이를 학교 보내고 하다보면 아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 갈 때는 직장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직장을 갔는데 맨 교회생각만 하면 그 사람 그 직장에서 참 곤란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제 밤에도 책을 읽는데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이면서 직장을 경영하는 사람인데, 뭐냐 하면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까 교회에서 오라고 하면 직장 하던 일 다 팽개치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믿음이냐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직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애인하고 데이트할 때는 애인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놀러가서는 놀러가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차가 달릴 때는 나침반 바늘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정지해 있는 동안에 고요히 그 움직임을 멎을 때에는 정확하게 북쪽과 남쪽을 가리킵니다. 가리키지 않으면 그 나침반을 가치가 없어서 폐기처분해야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은 어디입니까? 한낮에 직장 다닐 때 분주해서 직장의 일과 직장의 목표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앉아서 조용한 시간에 여러분들은 누구를 생각하십니까? 그때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아무 일도 없이 움직임도 없고 고요히 침잠한 가운데 무릎 꿇고 앉았을 때 여러분의 마음의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집입니까? 그리고 사람입니까? 애인입니까? 성공입니까? 목표입니까? 돈입니까? 오락입니까? 아니면 보다 화려한 휴가입니까? 결국 진정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관심이 초점이 나침반과 같아서 잠시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지만 그러나 그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즉시 하나님께로 집중되고 말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의 가슴 속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따라서 이 십계명을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고 그 십계명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삶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정말 싫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게으름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은 변화를 받아서 부지런한 사람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게으른 것은 최대의 악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부패합니다. 백퍼센트입니다. 부지런하다고 다 경건한 것은 아니지만 게으른 사람들은 백퍼센트 부패합니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그리고 여러분은 일합니다. 그리고 저축하고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일어나기 싫은데 새벽이면 눈을 비비고 일어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감동시키고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그런 삶을 삽니까?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즐거움과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대견해 하고 그 목표를 성취한 그 모든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인생의 신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로 자신들의 인생의 신이고 자신들의 목표가 자신들의 인생을 채찍질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좀 더 나은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가족의 행복을 짓밟고 그리고 자신만 행복하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이런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들입니다.
(예화) 엊그제도 신문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킬러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미제 킬러를 한국 사람이 고용해서 이혼을 하면 부인에게 위자료를 주어야 되겠으니까 2300만원을 주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은 눈을 쓸기 위해서 마당에서 이혼할 날을 앞두고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그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을 돈 삼만 불에 눈이 멀어서 칼로 난자해서 길바닥에 쓰러뜨려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자신을 신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좀 더 나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에게 자기의 인생의 모든 것을 건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 한 사람을 위해서 청춘을 바친 사람들도 많습니다. 혹은 친구의 유익을 위해서 불행한 길을 기꺼이 걸어가며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유익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의 생각이 자신의 신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의 행복이 자신의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첫 번째 계명, “나 외에 위하는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이 첫 번째 계명에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려고 배웁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는 것입니다. 자녀와 남편과 아내와 친구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깁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배받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할지언정 섬겨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그들은 이 일을 행함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 기뻐하신다면 내가 어떠해도 좋고 하나님만 좋아하신다면 내가 어째도 상관이 없는 그런 길을 걸어갑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인가 되게 무서운 선생님의 집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이 아주 늦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 앉아서 선생님에게 무슨 선물이 좋을까 결정을 했는데 정력제를 선물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을 했습니다. 참 짓궂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약 때문인지 몰라도 장가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팔불출같이 자기 아이에게 빠졌습니다. 그 집에 갔는데 그 근엄하고 무서운 선생님이 아이를 어르는데 이것은 완전히 동물원에도 그런 원숭이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자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벙어리 삼룡이 흉내도 내는 것입니다. 자기 제자들 앞에서.
그 생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우리가 그런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주님, 나는 이 세상에 사람들이 나보고 벙어리 삼룡이라고 해도 좋고 개그맨이라고 놀려도 좋습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주님 제가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하더라도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고난 받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원하고 내 인생이 아무리 평탄한 길을 걸어가도 주님이 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 한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질문은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다. 여태껏 우리가 살아온 삶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삽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기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자기마음대로 살고 자기 마음대로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 일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이런 경솔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삶의 목표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그런 것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힘이 있고 여건이 닿고 그러므로 나는 걸어간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유일한 여호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이라는 말 한마디에 껌뻑 죽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자신의 뜻을 꺾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수많은 백성들 그 사람들 뒤에 줄 서서 따라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왜 그리하셨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다 이루었도다”가 예수님의 인생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생애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1계명을 범하지 않고 이 1계명에 있어서 정결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오늘 이제는 여러분 단지 먹으로 칠하고 사람의 수공물로 깎아서 세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하나님만을 위한 삶이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이고 그리고 삶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인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삶으로 '아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화) 한 2년 전인가 순복음 신학대학에서 와서 개강집회를 하루 해 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아주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하러 미리 들어가서 강대에 엎드려서 설교할 원고를 한 번씩 습관이 있습니다. 읽고 나서 그 다음에 한 20분 남았기 때문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데, 정말 가끔은 잊어버리는데, 특별히 그건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 기도원에 갔는데 학생들이 한 5백 명 나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이번 3월 달에도 갑니다. 대학원에. 그런데 그때 설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에서 누가 생각이 나느냐 하면 세례 요한의 모습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30여 년 동안을 광야에 살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옷 입고 넥타이 맨 게 아니라 피부가 다 드러나고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에 수염도 분명히 깍지 않아서 덥수룩했고 아마 광야에서 물이 없으니까 깨끗했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으니까 가끔은 먹다가 그 꿀이 아마 약대 털옷에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깔끔하고 뭔가 요즘의 설교자들처럼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그리고 파랗게 수염을 깍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뭔가 지저분하면서도 그러나 그 눈은 뭔가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천상의 것들을 응시하는 거룩한 정열로 불타오르고 있는 그 사람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 동역자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는 가운데 그는 고요히 서서 불신앙 그 시대를 향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리고 외쳐오를 때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30여 년 동안을 광야에서 기도와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께 연단 받은 심령으로 토해내는 정말 한 사발의 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런데 그 광야에 처절한 모습이 생각이 나는 데 그렇게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그 사람처럼 살다가 그렇게 불꽃같이 죽으면 좋겠습니다. 정직하게 한번 말해 보십시오. 하나님만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생각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의식세계를 하나님이 지배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도, 내가 어떠한 자리에 처해도 여러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있다면 “할렐루야”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성경이 이렇게 많이 있지만 오늘 이 첫 번째 계명이 성경 속의 가장 두드러진 계명일 것입니다. 작고 자잘한 계명을 순종하는 것 가지고 의를 세우지 마시고 두드러지고 뛰어난 이 압도적인 계명 앞에 먼저 승복하셔서 이 첫 번째 계명을 들을 때 “오, 주님!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계명 강해 (1996.02.25. 주일오전4)
4. 우상을 버리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 5:8-10)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1-6)
녹취자 : 오희열
지난 시간에 지방으로 고향으로 출타하신 분들을 위해서 2계명을 쉬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2계명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1계명의 강해를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둔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우상, 다른 신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든지 1계명을 어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1계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우리가 불교신자가 아니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제 3의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1계명을 준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의 중심의 경배를 받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그 모든 삶은 1계명을 범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전에 없던 놀라운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독특하게 주어지는 참다운 평강과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맛보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계명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계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두 번째 계명이기 때문에 제 2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2계명을 들을 때, 1계명을 들었을 때와 똑같이 “아니, 우리가 무슨 우상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나는 결코 제사를 지낼 때에도 절하는 법이 없었고 법당에 들어가서도 머리를 숙인 적이 없었으니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다.”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에 나타난 시내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반도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상당한 날이 지났습니다. 모세는 내려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지루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여기서 ‘신’은 히브리말로 ‘엘로힘’인데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부분은 “우리를 인도할 하나님을 만들라.” 로 번역이 되어야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론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주도한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모세 곁에서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세의 신령한 영적인 지도력을 보고 배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이 아론이 왜 백성들에게 우상을 만들어주었을까 하는 것이 32장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직면하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론이 송아지를 만들도록 허락한 것도, 사실을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송아지를 만들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증거가, 송아지 우상을 다 만든 후에 아론이 선포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다.” 특별한 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날 여호와께 이 송아지를 가지고 경배하자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송아지가 만들어졌는데 아론은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송아지는 건강한 송아지, 힘 있는 송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과 강함을, 지금 지도자 모세가 없어져서 불안함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서 만든 우상이었습니다. 이 송아지에 대한 힌트는 애굽의 ‘호루스’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이 ‘소’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왜 소인가 하면, 소처럼 강한 힘, 왕성한 생명력, 이런 것들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힌트를 애굽의 ‘호루스’ 신상에서 얻은 것입니다. 지도자도 없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인도함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그들은 이처럼 강하고 힘 있는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형상을 통해서 이전에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여러 가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면서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거룩한 하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처한 것과 같은 지도자 없이 갈 길이 막막한 상황, 모세가 언제 내려온다고 약속도 없는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은 그런 하나님이 필요하고 그런 능력의 하나님이야말로 자신들에게 지금 간절히 요구되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튿날 일어났습니다. 그 백성들은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렸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나와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방식으로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그 현장이 먹고 마시고 뛰노는 현장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애굽의 종교의식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 버리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워한 나머지 그것을 형상화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형상화 되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은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도덕적 성품이 무시되고 하나님 한 성품만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상, 예배에 쓰이는 이 형상, 예배를 위한 형상, 기도를 돕는 형상,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대한 많은 성품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주위의 모든 이방 백성들은 한결같이 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우상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종교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 우상이 전혀 없이 종교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우상들이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이 자신들의 사고와 생각과 형상화를 통해서 가두어 둘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예배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종강 때가 되어서 어느 한 학생이 포장을 예쁘게 해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이게 뭐니?”, “한 학기 동안 너무 애를 쓰셔서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을 드립니다.”하면서 외국 이태리제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외제라고 하니까 고맙다고 하고 집에 와서 뜯어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신학을 하고 졸업반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자기로 만든 것인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서 피 흘리고 있는 장면을 아주 정교하게 총 천연색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가톨릭 신학교도 아니고 개신교 신학교인데 이 학생이 정신이 나갔나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당 앞에서 보면 성모 마리아 상이 있고 그 앞에 촛불이 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건을 쓰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가녀린 여자의 모습은 파란 풀밭과 하얀 마리아 상, 그리고 발갛게 타오르는 촛불, 하얀 수건, 예쁘게 모은 두 손, 그런 것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너무나 서정적이고 멋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걸 그렇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유혹받지 마십시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있는 예수님의 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거룩하고 신령한 강한 능력은 드러내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던 인간적인 약함만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 그 예수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가톨릭에서 형상을 숭배하는 동기는 선합니다. 가톨릭은 결코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당에는 베드로상, 바울상과 같은 수많은 성인들의 상이 있습니다. 동기는 선합니다. 그들의 동기는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거룩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까지 주님을 사랑했던 그 베드로의 거룩한 믿음을 본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버리며 이방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하였던 바울의 선교적이고 거룩한 열정을 본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매여서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던 사도 요한의 성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섬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형상을 만들다가 부족해서 그 다음에는 흠이 있는 인간 말고 인간보다는 보다 완전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천사와 천사장의 형상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동기는 순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결국 우리의 삶의 중심 자리에 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거룩하고 참된 하나님을 신앙의 세계에서 직접 만나고 그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그 하나님과 직접 사귀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런 형상과 성상(聖像)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위로를 하고 그런 성상과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연결된다는 위안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곧 우상숭배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 커다란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랑을 표출해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의 마음이 그 사랑에서 떠날 때에도 형상을 자기 옆에 두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사귀는 것 같은 교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제나 발견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성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그런 형상으로 만들고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을 성상으로 만들고 형상으로 만들어서 이런 것들로 진리를 대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기보다는 보이는 그 형상들을 붙들고 살아가고 급기야는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거룩한 경배를 그러한 우상들에게 올려 보내는 어리석은 일로 연결되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외심이나 경배하고자하는 마음이 성상으로 연결되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예배의 중심자리에 오는 것을 우리는 미워하고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상이나 형상이나 우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옛날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 속에 보여주어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깨닫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교회는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진리가 있고 깨달음이 있는 예배와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는 감화가 있는 교회는 이러한 형상과 성상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함께 자신의 삶이 항상 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는 은혜로운 영적인 체험과 마음으로,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신령한 은혜가 없는 교회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을 보이는 육신의 형상으로 바꾸어보려고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들의 영혼으로 직접 만나게 하여서 신령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만이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진리와 함께 자신의 삶이 변하여 자기 안에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가 영적으로 체험하고 확신하게 되면 형상과 우상 같은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해 주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하시는 것을 형상을 통해서 일부분 보여주지 않아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를 때는 얼핏 생각하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보다 뭔가를 보고 그것을 섬기면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진리를 깨닫고 우리의 죄의 무거운 껍질을 회개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화) 어제도 강서구에 있는 어떤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전주에서 올라왔으니 피곤했습니다. 차를 놔두고 전철을 타고 가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터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터질 것 같았습니다. 심령이 기쁨에 터질 것 같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인정사정 보질 않고 밀었습니다. 그렇게 터지니까 여유라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렇게 짐짝처럼 취급받는 우리 인생 하나하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니까 예배드릴 때에도 쉽게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졌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진리를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어디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철 안에서나 만원버스 안에서나, 직장에 늦어서 바쁘게 뛰어갈 때나 계단을 오를 때나, 혹은 설거지할 때나 세탁기를 돌릴 때나, 어디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느꼈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느낍니다. 그리고 어디서든지 그 하나님을 부르면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이러한 삶이 없으면 어디서라도 그리스도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느낄 수 없습니다. 수십억짜리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장 거룩한 곳에 그 사람을 데려다가, 겟세마네 동산에 세워놓는다고 할지라도 느낄 수 없습니다. 빈 무덤, 예수께서 묻히셨던 빈 무덤 앞에 세워놓아도 느낄 수 없습니다. 어디서나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신령한 방식으로 나를 찾으라. 마음을 다해 은혜로운 방식으로 신령한 방식으로 거듭난 방식으로 나를 찾으라. 너희가 이전에 우상을 섬기고 찾던 방법으로 나를 찾지 말라. 나는 너희와 만날 수 없다. 신령한 방법으로 나를 찾으라.”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우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이 사라진 뒤에는 그곳에 우상에 대한 관심이 싹트고 우상이 있는 곳에 신령한 예배는 사라졌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러한 우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와 성령이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기를 사모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더 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보이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하나님께 더 잘 예배하기 위해서 만든 이 형상이 하나님에게 미움의 대상이 된다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우상에게 절하고 그것을 만들거나 경배하는 일, 하나님 앞에 절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이교도의 풍습을 따라서 이방의 신상에 절하는 일들은 얼마나 커다란 문제가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우상에게 절하고 불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교묘한 모든 형상과 우상숭배의 위험들이 우리 도처에 널려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가끔 점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았으면 오늘 확실히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슬프게 하는 죄입니다.
“목사님, 별자리 점도 점입니까?” 어떤 사람은 별자리 점은 점이 아니라 통계라고 말합니다. 통계이고 나발이고 다 죄입니다. 심지어 요즘에 손금 보는 것, 그것도 죄입니다. 요새는 컴퓨터로 만들 놓고 손을 집어넣으면 종이가 주르륵 나오고 그것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고 혹은 낙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봅니다. 그 안에 열두 장밖에 안 들어있습니다. 120명이 가면 열 명은 똑같은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일과 뭘 입력하라고 나오는데 12간지니까 열두 장 집어넣어두고 이 사람에게는 이것이 나오게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것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해에 토종비결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건 재미로 보는 것이니까 괜찮지요?” 안 됩니다. 토종비결은 60만 명이 똑같은 것이 나온답니다. 중학교 때 제가 토종비결을 봤더니 그해에 득남한다고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낄낄거리고 낙심을 하는 것, 모두 우상숭배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오늘의 운세”를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에 말씀합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내일 일을 알 수 없다고 말입니다. 누가 압니까? 그것을 보고 무엇을 참고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것을 점쟁이가 알려준다고 그걸 참고로 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해보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찾아보겠다는 것입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마지막 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을 섬기고 그릇되고 가증한 풍습에 자기 몸을 던지면서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미워한다.” 그리고 이것을, “너희 대에 뿐만 아니라 삼, 사대에 이르기까지 진노하시고 책망하시는 저주가 자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운명을 믿지 않는 곳에서는 우상도 없습니다. 우상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정해진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교도의 풍습에 젖어들어 갑니다.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아이를 낳고서 이름 지을 때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럴 바에는 저에게 오십시오. 제가 지어주겠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것은 이중생활을 하면서 남편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에게도 심각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더 커다란 죄악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다 심각한 우상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편견입니다.
언젠가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변화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설교가 끝나 후에 한다는 얘기가, “당신이 설교하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릅니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었더니, 감히 강사에게 틀렸다고는 말을 못하지만 아무튼 제가 아는 하나님과 자기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상이 하나 마음에 있구나.’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롭게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죄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의로우시기 때문에 언제나 명령만 내리시고 형벌만 선고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계시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해도 이익은 가깝고 하나님의 심판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늘에 계시다고 말하기에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느 한쪽 단편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우상숭배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나 언제나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자비로우시다는 이유 때문에, 그 하나를 겨우 깨달은 것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거리로 들먹이고 하나님을 훼방해도 하나님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계시다고 믿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했을 때 나타나셔서 재판을 하시고 검찰관처럼 우리를 추궁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갈망하며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두 자신 속에 왜곡된 편견이 만들어 놓은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말미암아 자신의 왜곡된 편견과 그릇된 신앙의 견해가 부서져야만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의 우상이 깨뜨려지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그릇된 편견과 잘못된 생각들이 깨뜨려지는 역사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러한 우상이 가득합니다. 왜 그 사람이 저에게 제가 설교하는 하나님과 그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상을 허물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것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우상숭배가 만연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을 붙들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섬기기를 원하는 한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와 신령한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부흥이 없습니다.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교파 가운데 ‘유니테리안’이라는 교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단위신론”이라고 하는데 그런 곳에는 부흥이 없습니다. 가톨릭에서도 부흥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교에서는 더더욱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진리, 하나님을 참으로 바르게 아는 그곳, 거기에 진정한 부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마음의 편견을 굳게 붙들고 이것을 허물기 싫어하는 그 사람들의 집착은 엄청나게 강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기독교가 왜 그렇게 박해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 신주를 허물고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는 것은 조상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성자로 떠받들고 있는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쓸데없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자가당착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절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6.25때 그 신주단지를 머리에 이고 피난을 갑니다. 폭탄이 쏟아지는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웃으시지만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 집안에도 커다란 사과궤짝으로 두세 개가 되는 것을 지고 다니면서 피난살이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집착이 강합니다. 세상 사람들만 우상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까? 이번에 서울에 있는 어느 절에서 절 전체를 금으로 도금하는, 금만 30억 원어치가 들어가는 공사를 한다고 합니다.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중생을 구제해야할 절이 이렇게 금으로 법당을 치장하는 것이 부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넓은 의미에는 이 절도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가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은 그 우상을 위합니다. 일단 그 우상이 있으면 그 우상을 떠받듭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이런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에 딱 맞는 설교를 하면 박수를 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박수가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깨닫게 되고 나서는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신나는 마음이 아닙니다. “맞다! 저 말씀이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구나!” 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난 다음에는 기도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갈망이 속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시중에서 설교집을 보더라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읽다가 박수치고 싶은 책을 읽지 말고 다 읽고 나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우상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런 것들로 말미암아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마음의 편견이 만들어 놓은 형상이야말로 하나님에게는 금송아지나 불상처럼 가증한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전주로 집회를 갔는데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차에 타고 가는데 그 교회 목사님과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목사님, 마음에 갈등이 생깁니다.”했더니, 저보다 4년이나 후배이고 나이도 어린 목사님이, “갈등은 무슨 놈의 갈등! 짤라요, 짤라!” 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 분이 건축업자인데 변화받기 전에 절을 몇 개 지어주었답니다. 교회는 지어주면 돈을 받기가 소 힘줄처럼 질기게 힘들답니다. 교회는 돈도 없으면서 큰 공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골탕먹는 것은 결국 그 집사 자신이라고 합니다. 돈은 1천만 원밖에 없으면서 1억 원짜리 공사를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제 때 나오질 않는다고 합니다. 피를 말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은 절대 그런 일이 없이 깨끗하다고 합니다. 1억 원 공사를 시작하게 되면 1억 원보다 조금 더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더 여유있게 돈을 준비하고 공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절 공사에는 매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30억짜리 공사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절을 잘 짓는 사람들에게만 돌아가면서 연락해서 일을 준다고 합니다. 불교회관이라고 하니까 절은 아니니까 어떻게 공사를 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이 집사가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 모여서 뭐 하겠느냐고, 신령한 은혜를 받은 교회 집사가 그것을 지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절 공사 할 때는 타고 다니는 차 안에 있는 십자가 같은 것을 다 떼고 다녀야 한답니다. 공사를 다 끝내고 나니까 주지스님이 와서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수고를 참 많이 했는데 줄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하면서 불교 잘 믿으라고 큰 액자를 써서 주더랍니다. 그 집사의 심령이 너무나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끊어요, 끊어. 갈등은 무슨 놈의 갈등!” 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십시오.” 했더니 용기를 얻어서 휴대폰을 꺼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난데, 너 30억짜리 공사 할래? 불교회관인데 돈도 잘 나오고 완전히 이득 보는 거야.” 전화 받은 친구가 왜 네가 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지 않는 불교 사람들이 모여서 맨날 먹고 마시고 우상숭배 하는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양심에 걸려서 너한테 넘겨주는 것이니까 네가 해라.”하는 것입니다. 아깝긴 아까웠나 봅니다. 제가 듣고, “참 잘하셨습니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까짓 30억이 문제입니까? 신앙의 정조를 팔아먹고 30억을 받아도 그 30억 다 남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서 몇 억 남겨서 뭐하겠습니까? 아낌없이 버리십시오. 여러분에게 일당 50만원씩 드릴 테니까 절 짓는 곳에 가서 벽돌 나르라고 하면 가서 나를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우상들이 만들어주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릇된 형상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 사람의 구습, 이방인의 구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더욱 신령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도록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계명 강해 (1996.03.03. 주일오전5)
5.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녹취자 : 허혜숙
오늘 우리는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에서 선포된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열 가지의 계명을 주신 것은 이것이 신양생활의 최고봉이 아니라 기초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 다른 백성들로서 구별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이 십계명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우리는 이 세 번째 계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성한 의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즉각적으로 벌하시거나 책망을 하시거나 손해를 입히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는데 사용해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을 교통법규 하나를 어기는 것만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방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많이 받은 그 은혜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늘 내가 이 계명을 지키며 살아서 즉각적으로 하나님이 내게 물질적인 보수로 갚아주시거나 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하나님께서 나를 벌 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우리들에게는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 계명 하나를 지키는 것이 오늘 나에게 당장에 물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의무를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녀를 기르면서 자녀가 여러분들을 인격적인 부모님이 아니라 자기가 장성할 때까지 뒷돈이나 대주는 물주로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런 자식들을 전혀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난관에 부딪칠 때에 여러분들에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버틸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위로부터 더 힘이 되어주고 더 능력을 부어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환란과 시련을 이기고 믿음으로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물질적으로 곤핍하고 곤고하여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들이 기죽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뒷돈을 대어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이상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뒷돈을 대어주는 물주라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물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요 내 삶의 이유요 내 찬송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우리가 누리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의무를 주셔도 우리는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계명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첫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차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기를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앞의 네 계명은 약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다섯 번째 계명은 이 땅에서 네가 부모에게 순종하면 장수하고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있지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라는 계명은 약속이 없습니다. ‘형상을 만들고 거기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약속이 없습니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약속이 없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약속이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계산에 넣어가지고 하나님만 섬길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식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호와 이외에는 내가 다른 신을 두지 않을 테니 주님 내게 뭘 주시겠습니까?” 하면 주님은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전심으로 내 부모를 공경 하겠사옵나이다”라고 말하면 주님은 네가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철저한 복종 그리고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거절하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던지 나는 우상에게 절을 할 것이며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지시하시던지 나는 당신의 이름을 마음대로 망령되이 일컬으며 살 수밖에 없고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명령하시던지 나는 주일날 일해서 돈을 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파괴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막보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 사람의 인생에서 축복과 재앙과 실패와 성공을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내 계명을 마구 어기고 그러면서도 네가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네 마음대로 살겠느냐? 그러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 대한 관계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훌륭한 무기다 되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가서 “아버지, 어머니 내가 학교에 가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바로 당신들이라는 사실을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 할 텐데 대가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여러분,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는 그런 일들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계명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교묘하고 잘못 된 편견들을 가지고 그럴듯한 이유들을 대면서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합리화를 꾀하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변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설득을 받을 줄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생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여호와 이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중심이 있는데 어찌할 수 없는 환경으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며 사는지 혹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복종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둘러대며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있는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마음껏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께는 무릎을 꿇지 않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자기가 잘못된 상에 대해서 절하고 그런 편견들을 우상시하며 살아가는 이런 모든 방종한 세태에 대해서 우리는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을 계산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있어서 거룩하고 신성한 의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래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이렇게 들먹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혹은 쓸데없이 혹은 잘못 된 방법으로” 그 이름을 들먹이는 일들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금지된 계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이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주술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일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마음에도 없으면서 그 신들의 이름을 자꾸 부르면 뭔가 자기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주술적인 의미에서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복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자기가 하고 있는 말에 대한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서 신들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에 대해서 신실하게 그 말을 지키는 대신에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신뢰를 기초로 사람들을 속이고 사기 치는 수단으로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풍습이 그 시대에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 사람들이 그 신들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되뇌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되뇌면 하나님의 축복이 저절로 임할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신들 위에 뛰어난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께 나아가는 방법도 다분히 영적인 방법이어야 됩니다. 그리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식에 메이지 않고 오히려 영혼 깊은 곳에 우러나오는 거룩하고 신령한 사모함과 갈망과 진실 된 인격적인 접근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엘리야가 도전하던 바알의 우상들의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모두 모여서 자기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신의 긍휼을 자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오히려 몸에 상처를 내고 울부짖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격적이고 신앙적이고 영적인 접근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덜합니다만 미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다가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Jesus Christ”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정확히 번역하면 ‘제기랄’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생겼을 때 “Oh My God!” 이렇게 말합니다. ‘아뿔싸’, ‘세상에’ 그런 뜻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는데 지금 뭐가 꼬이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로 ‘Jesus Christ'를 만나고 싶은 것입니까?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도움을 원하는 마음으로 'Oh my God'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망령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웃고 떠드는 농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소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농담하고 웃고 떠드는 일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경박한 곳에서 들먹이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한마디로 여러분들의 많은 이유와 핑계 말고 한 마디로 잘라서 말합니다. ‘잘못 됐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들먹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고 들먹이기 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숙제로 남아있는 중요한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함이 본명이 네 글자로 되어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모음을 안 찍고 자음만 썼습니다. 그래서 자음만 네 글자를 적어 놓았는데 하도 안 불러서 그 하나님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가 사람들에게는 숙제입니다. 그 이름이 ‘여호와’라는 이름인데 정확한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아니고 ‘야훼’라는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유대인들 중 누구도 그렇게 추측할 뿐입니다. 왜? 너무나 오랜 세월을 네 글자를 써놓고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분’ ‘그분’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주님, 주님’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 진실한 이름이 무엇인지가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베껴 쓰다가 ‘여호와’란 이 네 글자가 나오면 붓을 빨고 다시 씁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후손들에게 이 네 글자를 써놓고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오늘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주겠다.” “그 분의 이름” “오 하나님 내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용서 하옵소서.” “그 분의 이름은 여호와니라” 하고는 밤새도록 회개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러한 가벼운 언급,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살아가는 삶 속에서,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 마구 끌어들이면서 그 이름으로 농담하고 웃고 떠드는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결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물론 이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한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잘못 부른 것은 문제가 되니까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노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의미에서 세 번째 계명을 여러분들에게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 번째 계명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싶으신 첫째는 우리가 모두 언어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들먹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농담의 소재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입에 붙어서 무슨 일을 만날 때 ‘주여’ 그렇게 말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도움의 요청과 간청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주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그 일을 지키지 않는 이런 일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 도전은 하나님께서 이 세 번째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욕을 하던지, 어떤 사람은 소설을 썼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라’이렇게 소설을 썼습니다만 인간이 뭐라고 욕을 하던지, 인간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비난을 퍼붓던지,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쓰던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고 비가 와야 먹고 사는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 우비를 파는 장수들이 주먹을 쥐고 하늘에 떠있는 해를 보면서 “저놈의 해가 왜 떠올라가지고 오늘 우리 장사를 망쳐 놓냐”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주먹질을 해 봐야 여전히 해는 거기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모욕을 하고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땅 아래 있는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이름 신학입니다.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은 높아지고 낮아지실 수 없지만 그 이름은 더럽혀지기도 하고 혹은 높이 여김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의 찬송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름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예화)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들에게 어떤 영사가 주는 충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례를 부탁할 때 역사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그 사람의 이름에 대한 평가가 환경에 의해서 쉽게 바뀔 것 같은 사람에게는 주례를 부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예로 옛날 어느 시대 때에 항상 끗발이 날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주례를 받는 것이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 할 만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세월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그 집에 결혼식 사진이 치워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때는 높아지던 이름이었는데 세월이 지나가고 평가가 달라지니까 그 이름이 부끄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시인 가운데 이육사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이육사입니다. 이육사는 자기 죄수 번호가 264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그 이름이 참 치욕스러운 죄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새로운 세상이 되자 모두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이름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워 질 수가 있고 더러워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그러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관심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홀로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만족해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백성들이 그 백성들의 신앙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높이 여겨지는 이러한 세상이 되어 지기를 사모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고 또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높이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불렀고 그 이름을 마구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도 세 번째 계명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대치할 수 없는 가장 큰 열망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대접을 이 세상에서 받기를 원하는 갈망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가장 사모하는 덕망이요 열망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이러한 사실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때마다 지루하지 않는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예화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가서 형들이 어떻게 있나 한 번 보고 오너라” 그래서 다윗은 형들이 싸우고 있는 전선에 갔습니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창과 창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전쟁이 아니라 무슨 동네 편싸움도 아니고 양쪽에 죽 나래비를 서서 두 나라의 군사들이 마주 서 있고 중간에 한 꺽다리가 나와 가지고 소리를 지르는데 키가 9척이라 거의 3m나 되는 거인이 손에 칼을 붙잡고 있는데 베틀채만 한 칼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소리소리 지르면서 뭔가 떠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는 모욕적인 발언을 폭포처럼 그 더러운 입으로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내가 저놈의 목을 벨테니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모든 투구와 창칼도 집어치우고 날렵한 차림으로 물맷돌을 들고 그 싸움의 현장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서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름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를 죽이기 위해서 전쟁터로 뛰어나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예와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못한 족속으로서 여호와와 그 백성들을 능욕하는 너를 처단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한다는 이런 갈망을 가지고 뛰어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그 싸움의 자리에 뛰어 들어간 것은 이 때 한 건 올려서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아서 다가오는 대선에 득표를 하겠다고 하는 정치적인 계산이나 암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싸움에서 이기건 지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너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처단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그 뜨거운 열망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성경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그 때는 골리앗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았습니다만 지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죄악 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은 업신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세상 나라도 하나님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도 하나님이 세웠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삼라만상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노래해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세상 바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이 때때로 먹칠을 당하고 있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빛답게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업신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소금답게 살지 못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진리의 빛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그 교회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시대가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비웃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사도는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유익’, ‘하나님께 커다란 기쁨을 드리는 것’ 이것이 삶의 중심의 초점에 놓여 있느냐고 오늘 세 번째 계명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면 우리는 한없이 즐겁고 기뻐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만족해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이 세 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가 다른 것은 무엇이냐? 가장 다른 뚜렷한 차이점은 세상의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예전에 직장생활 할 때 직원 한 분이 계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볼 때 인생 중에 가장 안 풀린 인생길로 접어든 사람이었습니다. 글씨도 잘 쓰고 업무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혜 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중에서도 일반직 공무원도 안 되고 기능직이 되어서 일평생을 보낸 우편수를 하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 딸 같은 사람이 승진을 해서 자기 상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참 살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 박봉을 받으면서 견디면서 직장을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인생을 한탄하지 않고 인생이 안 풀리면 한숨 쉬는 사람도 많은데 견디면서 꾸준히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힘이 뭔가 몇 년 뒤에 그 비밀이 밝혀졌는데 아들이 서울법대를 나와서 사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높아지는 아들의 이름, 드러나는 아들의 명예를 보면서 자신은 이 세상에서 이제 다 살았는데 어떤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변함없는 인생을 살게 하는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나거나 뜻하지 않은 오해를 당하거나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쓰면서 원하지 않는 비난을 당하거나 혹은 고통을 받거나 혹은 쓸데없는 오해를 받거나 혹은 구설의 다툼에서 고통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시기를 받을 때에 나를 통해 높아지는 이름이 여러분들의 위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든지 위로를 얻고 기뻐할 수 있다는 이런 희망.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아들로 하나님이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아들의 행복 보다 여러분들의 구원을 더 그리워하셨기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의미에서 볼 때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한없이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열등감과 무능력과 무기력함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 때에 참된 극복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보다도 여러분들을 더욱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지만 이 세상에서 구원해야 할 수많은 백성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보다 사랑하고 우리보다 사랑하고 우리보다 하나님에게는 더 귀한 최고의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 교회를 통해 도저히 높아질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기도 합니다. 한 나라를 사랑과 인내로 돌보시면서 그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지만 이 나라가 역사 속에 존재하므로 도저히 나의 이름의 영광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은 그 나라를 폐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42장은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각오를 말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그 이름의 존귀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핵심적인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런 소극적인 계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느냐? 이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의 모든 관심을 우리의 이름의 높아짐과 우리의 행복에서 다시 한 번 돌려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을 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있는가? 거기를 향해서 우리의 생각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말라’는 말을 크게 읽으면 안 되고 ‘망령되이’ 라는 말을 크게 읽어야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주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시로 말하고 그 이름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이야기 가운데 들먹이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깊이 존경한다면 친구를 만나서 자신의 부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 가서든지 그 부모를 자랑하고 그 부모의 이름을 말하기를 즐거워 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망령된 동기나 그릇된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 속에 있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한없는 기쁨과 그 은혜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이런 신앙의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삶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이름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견딜 수 없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충만히 받을 때는 입만 열면 하나님 자랑입니다. 믿습니까? 왜? 사람은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이름이 그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나의 삶이 지금 보람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모욕되지 않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고 거기에서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그 이름이 이 세상에서 높아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뜻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묻혀서 주님의 이름이 우리로 말미암아 높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휘장 뒤에 숨어서 높아지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런 마음, 이것이 바로 3계명이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벳브올 골짜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벳브올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그 충격적인 우상숭배와 간음의 사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백성들과 하나가 되어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거절하고 타락한 그 현장에서 주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았고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게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그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새롭게 신앙의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세상의 백성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예화) 한 때 한참 날리던 코미디언이 간증하는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이름을 대면 지금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간증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저럴까?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는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코미디 하면 자기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팬들이 많았답니다. 팬레터 같은 것들은 뜯어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10통, 15통씩 쌓이니까 아예 뜯어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의 팬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났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코미디계의 1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물으니까 죽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었는데도 자살하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예계의 역사를 보면 인기가 급락했을 때 자살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제가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10대들에게 하늘로 치솟는 급격한 인기를 누리다가 어떤 스캔들에 휘말려가지고 하루아침에 인기가 떨어지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은 약간은 희로적인 기질을 타고 난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이름이 높아질 때 그렇게 높아지는 이름 때문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높아진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서 실추되고 더럽혀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말하자면 이름 때문에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절망을 갖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한 존재도 아니고 더욱이 영원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에 대한 그런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찬송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에 합당한 피조물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영과 경배와 찬송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은 얼마나 찬송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고 그런 경배와 찬송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암시가 바로 복음서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찬송할 때 바리새인들은 욕을 했습니다. “예수여 말리시옵소서, 어찌하여 당신이 인간이면서 저런 찬송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놔둬라, 저들이 찬송하지 않으면 이제는 돌들이 소리를 치리라”이것이 하나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얼마나 큰일을 당신 자신의 이름이 존귀하고 경배를 받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높여드리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나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은 쇠잔하고 주님이 예정하시는 삶의 구간이 끝날 때 우리는 퇴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인생의 무대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져가도 영원히 빛나는 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 자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면 어떻게 우리의 부주의하고 불경건하고 잘못 된 언어생활 속에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이 함부로 들먹여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부주의하고 경박한 언어생활을 청산하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언제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경이로운 울림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게 하옵소서, 자주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하오나 주님,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고 있는 이 세상이 변화되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런 소원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로까지 나아가도록 3계명은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 강해 (1996.03.10. 주일오전6)
20170102동서울노회 교역자회 신년하례회
6.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 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의 안식일 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급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 (신 5:12-15)
녹취자: 이경순
(예화) 언제 나왔는지 도대체 기억도 나지 않는 낡은 자동차를 한번 탄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차가 유행하던 시절이 70년대 초에 차 같습니다. 오래된 차인데 차가 아주 잘 나갑니다. 그래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망가지면 부속품이나 있으려나.” 생각을 하고 차 주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이 차가 이렇게 수십만 킬로를 달렸고 서울에 아무리 돌아봐도 이런 차가 지금은 없는데 어떻게 이 차가 잘 굴러 갑니까?” 그랬더니 이 주인 하는 말이 간단합니다. “이상하면 안갑니다. 그리고 즉시즉시 정비를 합니다. 아직까지도 새 차입니다. 남은 벌써 두, 세대 폐차를 해서 갈아탈 지경이 되었는데 이 차는 잘 가고 있습니다.” 그 차 주인은 틈틈이 정비를 하면서 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이 이렇게 정비를 하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정비계획표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1일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6일까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이 전부다 다 쉬운 것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날 창조도 기가 막힌 것이고 둘째 날 창조도 참 입이 벌어지는 얘기이고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신 대목에서는 기절할 지경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점점 세미한 부분까지 간섭하셔서 고등한 동물들을 창조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빛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뭍을 드러나게 하시고 바닷물과 육지를 나누시고 그담에 짐승들을 만드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이라고 하는 가장 고등한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 위에 후 영혼까지 부여하시는 일들을 고난도의 작업들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신 일곱째 날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 같으면 아마 일곱째 날쯤이면 온 세상 창조 기념식을 해서 밴드를 동원하고 가수들을 동원해서 뻑적지근한 아마 축하파티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를 마치신 이후에 창조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신 그 일이 무엇이냐면 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도 사실 우리는 이해가 안갑니다. 하나님이 뭐 피곤하시기를 합니까 아니면 창조를 많이 하셔서 팔이 당기시고 그러십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굳이 “하나님이 쉬셨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유한함을 드러내는 광경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마지막 6일까지 창조하신 다음에 7일에는 아무 일도 안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요히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그 위대한 창조를 다이내믹하게 성취하신 다음에 마지막 순간에 고요히 쉬는 것을 통해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이 몸소 행해 보임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7일 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쉬실 필요가 없었는데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쉬시므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물건을 볼 적마다 마지막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 손을 붙잡고 아빠 손을 붙잡고 가다가 이렇게 물으면 “저 빛을 하나님께서 언제 만드셨어?” “아, 첫날 만드셨지.” 아이가 다리로 땅을 쿵쿵거리면서 “엄마 이것은?” “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그럼 저 해와 달은 언제 만드셨어?” “그것은 4일째 만드셨지.” “저기 뛰어다니는 저 사슴 저놈노루들은 언제 만드셨어?”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으셨지 마지막에 우리들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란다.” “그럼 마지막 날은 뭐하셨어?” “마지막 날 하나님이 하신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쉬시는 것이었단다. 쉬는 것 자체가 일이라는 것이란다.” 라고 대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쉬실 필요 없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쉬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이 단순히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이 기다려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아! 그 날은 쉬는 날이다.’ 이 개념이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쉬는 날이라고 해서 주일에는 우리가 몸과 마음을 푹 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누군가가 저에게 “주일날 새벽기도를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의를 할 때 제가 6개월 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각 끝에 ‘쉬는 것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쉬어보니까 정말 안식일의 정신을 잘 반영을 합니다. 주일에 새벽기도를 하면, 기도하러 나와서 그 다음에는 빨리 집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쉬고 챙겨가지고 중고등부도 나와야 되고 주일학교도 나와야 되고 다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한번 쉬어봤어요 좀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쉬었습니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여태까지 신앙생활을 그렇게 안했기 때문입니다. 쉬었더니 이제는 뭐가 기다려지면 토요일 되면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주일 이 기다려집니다. 왜? 주일 하루는 제게 있어서 늦잠 자는 날 한 7시 반이나 심하면 8시까지 푹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담에 건강하고 맑은 마음으로 오늘도 중고등부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8시 반쯤 가서 설교를 하고 교회 일을 보고 그리고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이 쉬도록 하나님께서 경영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제일 먼저 여러분들은 쉬는 일들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요일 날 밤늦게까지 명화극장 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럼 벌써 보신 분들은 표가 납니다. 그런 것 보면 일은 토요일에 있었지만 영향은 주일날까지 미쳤기 때문에 엄격하게 이야기해서 주일을 구별되게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구약 때 사람들은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토요일을 예비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조상들은 반공일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예비일이라고 불렀습니다. 토요일은 불편 없이 모든 성도들이 와서 신앙생활하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교회일꾼들이 교회를 준비하고 그리고 성도들은 다른 날 보다 좀 더 일찍 잠드는 것입니다. 토요일에 명화 보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보고 싶으면 다른 날 보세요. 그리고 토요일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별되는 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고 푹 쉬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은 편안하게 쉼으로써 우리가 한주를 살면서 바쁘고 고단할 때마다 주일이 생각나야 됩니다. ‘아 주일이 왔으면 좀 쉴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육신이 주일을 그리워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그렇지 못하고 토요일 날 밤늦게까지 데이트를 한다든지 아니면 명화극장을 본다든지 심지어 심야상영관에 가서 한시 두 시까지 영화를 보고 파김치가 되어서 11시 10분전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교회를 간신히 걸어 나왔지만 벌써 예배는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주일을 바르게 지킬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토요일도 잘 쉬지 못해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시간에 좁니다. 피곤한데 별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육신을 푹 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령하셨는데, 어느 정도로 강하게 명령하시냐면 “너만 쉬는 것이 아니라 너 그리고 너는 네 아들도 쉬게 해야 될 의무가 있다 네 딸도 일을 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네 종 네 남종 여종 심지어는 소나 나귀 네 모든 육축 심지어는 문안에 들어와서 사랑방에서 묵고 있는 식객까지도 우리 집에서는 안식일날 일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 하라는 것입니다.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각자 믿음에 따라서 쉬어라 하지 않고 왜 이렇게 가장에게 권위를 부여해서 모든 가족을 쉬게 만들었습니까? 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일하고 있으면 혼자 불안해서 못 쉬게 됩니다.
(예화) 목사님, 교역자들이 참 불쌍해 보입니다. 교역자들이 월급쟁이도 아니고 아홉시에 출근 전에 새벽기도 나왔다가 빨리 들어가야지 한숨자고 또 나옵니다. 모든 게 피상적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부임해서 “교역자들은 1시에 출근하라. 아침동안에 성경도 읽고 기도도 충분히 하고 식탁도 하고 개인적으로 공부도 하고 그리고 1시부터 나와라.” 그런데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그 자리에서는 부교역자들이 ‘와, 우리목사님 최고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나와 보니까 그 사람들이 똑같이 9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럴까 했더니 가만히 보니까 불안 하더랍니다. 내가 한시에 나가면 나만 한시에 나갈 것 같더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격상 그렇게 못할 것 같더랍니다. 그게 우리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위의 자녀나 주위의 객이나 나귀나 자기가 데리고 있는 많은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하면 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이렇게 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푹 쉬세요. 제일 좋은 것은 오후 예배 마친 다음에 집에 바로 들어가서 바로 푹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도 제일 많이 자고 가족들과도 제일 많이 교제하고 그래서 아이들도 그 날이 그리워지는 쉼이 있는 그런 주일을 여러분들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쉴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저 같은 사람 아닙니까? 또 지하철을 운전하던지 아니면 병원에 당직을 선다든지 경찰서에 경찰관으로 주일 당직을 선다든지 회사에서 당직이 걸렸다든지 그 사람들 모두 쉬면 아마 이 사회가 잘 안 돌아갈 것입니다. 전력회사에서 주일날 다 쉬면 전기가 들어오겠습니까. 이런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이 주일날 근무를 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주일날 근무하고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으면 직업을 바꿔서라도 쉬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는 괜찮지만 오래도록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 우리의 몸이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 진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젊은 시절에 바쁘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젊을 때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다가 중풍에 걸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는 이야기가 나는 너무 교만했습니다. 나는 내 건강을 너무나 과신했습니다. 이제야 내 불찰을 깨달았는데 때는 너무 늦고 젊어서 내가 벌어놓은 수많은 돈이 이제는 내게 의미가 없습니다. 쉬어야 됩니다. 주일날 꼭 쉬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날 쉬어야 되는데 피치 못하게 일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할 수 없이 일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예화) 주일날 교인이 집사님이 되었는데도 교회를 잘 안 나오니까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허셀 포드라는 목사님의 설교 속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목사님이 집사님 어째서 주일날 잘 못 나오십니까. 이 집사님이 목장을 하는 집사님입니다. 아 목사님 말 마십시오. 목사님이 주일을 지켜야지 그러면 되냐고 하니까 이 집사님이 얼굴이 시뻘게서 목사님 그러면 주일이라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럼 쉬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일인데 아니 성경에도 양이 우리에 빠지면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너희가 안식일이라고 건져내지 않겠나? 그랬는데 우리 소가 어저께 시궁창에 빠져서 어깨가 부러졌는데 교회오라고 종소리는 치는데 목사님 그것을 꺼내놓고 가야겠습니까? 불쌍한 짐승을 내버려 두고 교회를 가야 되겠습니까? 목사님이 꺼내셔야죠! 꺼내세요! 그럼요 꺼내십시오! 그런데 집사님 자꾸 빠지거든 팔아버리세요. 주일날 자꾸 빠지거든 팔아버리세요 꺼내야 되죠. 주일날 피치 못하게 이렇게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일들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될 때는 무조건 아, 나 못한다. 죽이려면 죽여야 그래도 되죠. 신앙으로 순교까지 했는데 그거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직장 다니는 사람한테 그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두 번이야 어쩔 수 없이 당직 걸려서 일하지만 주일날 마다 나오라 그러면 그 직장 그만둬야 합니다. 사업을 바꿔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못삽니다. 못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육신을 혹사하면 반드시 일반섭리의 차원에서나 특별한 신앙의 차원에서나 우리는 손해를 입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주일에 이렇게 쉬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말입니다. 두 개의 십계명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와 있는 것이고 하나는 이 신명기 5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십계명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이 안식일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신명기서 에서는 전혀 다르게 이 하나님의 안식일에 쉬는 이유를 창조와 덧붙여서 하나 더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5절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내가 애급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이야기 입니까? 처음에 십계명을 줄때는 하나님이 쉬셨으니까 너희도 쉬라고 말씀하시다가 두 번째에는 너희가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이유가 있는데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쉬셨기 때문에 너희도 쉬어야 되고 거기에 덧붙여서 둘째는 하나님이 너희를 종 되었던 애급의 땅에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너희를 건져 내셨기 때문에 너희는 주일을 지켜야 된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우리가 지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 단지 창조의 6일과 관계된 마지막 하루라고 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 내시는 구속하시는 행동과 관계되어 있는 날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지금 와서 안식교 사람들이 안식일이 주님이 창조하신 안식일이 그 쉬신 날이 토요일이니까 주일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하신 날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해가 여기 있을 때는 이쪽에는 토요일이고 저쪽에는 주일이고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됩니까? 태평양 한가운데 가면 날짜선이 있어서 이쪽으로 깡충 뛰면 한날이 뒷날 가는데 그 중간에 서있는 사람은 어떻게 날을 정합니까? 그것은 초대교회시대에도 그런 쓸데없이 날을 가지고 매달리면서 씨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부다 이단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미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식일이 출애굽기 20장에 안식일에 대한 계명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안식일의 계명이 똑같은 십계명인데 벌써 의미가 다르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이 신명기 5장에서는 너희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큰 능력의 팔로 너희를 애급 땅 한가운데서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해내었으니 이것을 기억하며 한 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시고 나니까 이전에는 주님이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쉬라고 명령하시며 자신도 쉬신 그날이 최고의 의미였지만 하나님의 그 창조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게 되었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더 의미 있는 것은 재창조입니다. 재창조는 구속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이제 더 큰 의미는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죄 가운데 있는 그 사람들을 새롭게 구속으로 말미암아 재창조를 하실 때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져다주시는 참된 생명이기 때문에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원창조가 아니라 재창조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 해보면 이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 9:4) 당연합니다. 죽은 정승보다는 살아있는 상놈하나가 훨씬 더 행복합니다. 돈을 한없이 많이 갖고 여러분 한번 기가 막히게 그 은과 금으로 짠 관에 누워 있는 것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사람 있으면 이야기 해보십시오. 아무도 그럴 사람 없습니다. 이전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최대의 사건입니다.
(예화) 내가 우체국에 있을 때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그만 두었지만 제일 그 동기가 그놈의 보험 들으라고 위에서 우체국장한테 매일 전화 하는 것입니다. “김 국장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막대그래프가 제일 밑이라고 말입니다. 주님 생명을 구원하기 위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 보험 팔러 다니고. 직원들 불러놓고 맨날 야단치는 것입니다. 사돈의 팔촌이라도 좋으니까 보험 들으라고 하다하다가 지쳤습니다. 옛날에 그 옆에 자전거포가 있었는데 자전거포에 가끔 가니까 그 옆집이 육개장 집이었는데 가서 점심 먹을 때 늘 들립니다. “아유, 국장님 오셨습니까?” 그럽니다. “저 보험하나 들으세요.” 아 그러니까 이 젊은이가 연장을 놓더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실은 보험하나 들으려고 했다고 무슨 보험 있냐고 해서 쭉 펼쳐놓고 이러이러한 보험이 있는데 제일 좋은 것은 생명보험이 있다고 이렇게 이런 조건인데 죽으면 일억 나온다고 하니까 아니 국장님 내가 죽는데 1억이 나오면 뭐합니까. 자기는 세상에 싫은 게 그것이랍니다. “내가 죽는데 1억이 나오면 뭐하냐는 겁니까?” “당신 부인하고 애들..” “아니 내가 죽는데 부인하고 애들이야 목숨 빌어먹지 않고 살겠지. 내가 살았을 때 내가 도움이 되어야지 붓는 것은 내가 붓고 타는 것은 딴 사람이 타는 보험 나는 싫습니다.” 그런 보험은 사람이 죽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살아있을 때 제일 커다란 사건은 태어났다는 사건이고 그담에 미래에 근심스러운 사건은 죽는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이 이전에는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태어났으나 죄 가운데 태어났으나 태어나자마자 사산입니다. 죽은 채로 태어난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죽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리고 그다음에 깨닫게 된 것은 예수 안에서 내가 태어난 것 이 구원의 탄생을 더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일은 대충 넘어가는데 아예 자기 생일을 세례 받은 날로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믿음이 좋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온 식구들 불러서 “아빠 오늘 태어났어. 야, 아빠가 이 세상에 응애 하고 태어난 것은 의미가 없단다. 죽은 채로 태어났으니까 오늘이 바로 이 아빠가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신앙의 길을 걷게 된 날이란다.”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구속이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해 내신 날들을 깊이 기억할적마다 무엇을 생각하게 되냐면 ‘아! 우리는 소망 없이 애급에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데 여호와의 크신 능력의 편 팔!’ 이 편 팔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행동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의미입니다. ‘그 편 팔로 우리들을 건져내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구나.’ 그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니까 그 하나님이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할 때 우리를 구원해내신 그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바를 아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예화) 그러니까 한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수업시간에 어느 조직신학선생님이 안식일은 쉬어야 된다. 그 안식일의 개념이 신약에도 들어오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날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뭘 많이 하고 그러는 것은 못쓴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우리 목사님은 5부 예배까지 설교하고 밤에 집회까지 나가는데 그 안식일 위반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그러면 제사장들은 안식일 날 어떻게 했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어했냐하면 하나만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쉬는 것이 옳다 그러면 우리 예배도 드리지 말고 그냥 퍼 자야 됩니다. 커튼 쳐 놓고 이 날은 날 잡은 날이라 하고 허리가 쑤실 때까지 불 뜨끈뜨끈하게 떼고 애들이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그러면 “오늘은 안식일이니라. 엄마가 쉬어야 되겠다.” 그리고 마구 자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이 뒤에 더 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날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쉬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고 그날이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 직장 다닐 때 봉급도 조금밖에 못 받았지만 그때 할머니하고 살았는데 봉급봉투를 가져다 드리면 할머니가 먼저 그 봉급봉투를 쭉 꺼내서 세어 보신 후 갈라놓기 시작하십니다. 우선 십일조를 떼어놓고 그때마다 항상 믿음이 적으실 때는 “얘야, 이거 꼭 해야 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하여튼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떼어서 갈라놓습니다. 갈라놓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이것은 이미 이렇게 된 것이라고 확정해 놓고 그리고 이 돈 가지고 살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지 않으실 때는 돈 생기면 이렇게 떼어서 이거는 누구네에게 꾼도 갚고 딱 떼어놓고 못살아도 할 수 없다 이런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히브리말로 ‘카도시’인데 잘라놓는다는 것입니다. 떼어놓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는 주일을 떼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6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안 되면 안 되더라도 6일 가지고 그냥 살라는 것입니다. 그럼 6일 벌어서 도저히 못 먹고 사는데,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일은 마지막 하나님 앞에 한 날은 딱 떼어 놓고 그 날을 계산에 넣고 살아서는 안 된다. 어차피 손댈 수 없는 것이고 나머지 6일가지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부족해도 모자라도 바빠도 사업이 잘 되도 그것 가지고 해결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다른 6일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이냐면 첫째는 푹 쉰다는 의미에서 쉬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멀쩡한 사람이 평일에 몸이 아프면 할 수 없지만 몸도 안 아프면서 주일도 아닌데 뒹굴뒹굴 글면서 노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살아야 됩니다. 돈벌이 할게 없으면 하다못해 봉당이라도 쓸어야지 누워서 빙글빙글 돌면 영육 간에 해악이 옵니다. 주일날 육신을 푹 쉬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원기와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주일날도 아닌 평일에 뒹굴뒹굴 굴면서 쉬는 것은 부패와 안일과 타락과 죄악을 가져다줍니다. 열심히 일주일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이 말은 그 속에서 다른 날과는 다른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날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달력에 빨간 글씨로 나왔다고 해서 그 날이 구별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 주일이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 주일날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은혜가 있어야지만 그 주일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주일날 청년들이 자꾸 뭐를 사먹으니까 그게 젊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덜 되는데 옛날에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눈에 보면 너무 거슬리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해도 안 들으니까 청년들은 청년대로 불평을 합니다. 아니 교회에 천여 명이 모이는데 우리 청년들이 수백 명인데 주일날 교회 앉을 곳도 없고 식당에 가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줄을 서니까, 결국 교회 앞에 나가서 칼국수 먹고 바로 앞에 찻집에 앉아서 서로 교제하고 그리고 또 성경공부도 하고 들어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면서 심포지엄을 벌였습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 교인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주일날은 될 수 있으면 사먹지 말라 꼭 사먹으려면 교회 먼데서 사먹으라. 이게 참 율법주의가 아니고 뭡니까.
그러면 대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일날이 다른 날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넘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한 시간 가까이 이렇게 조용히 앉아서 제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45분 가까이 그런데 한 주 내내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내 영혼의 은혜를 위해서 한 시간씩 기다려 본 그런 시간들이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일에 이렇게 불러놓으신 것은 단순히 이 주일이 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를 우리가 받아서 우리의 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지난주에 아시다시피 세 군데나 신학교 집회를 인도하고 나서 너무 지쳤습니다. 그래서 약국에 가서 뭔지 모르지만 피로회복제를 먹으면 나을 것 같아서 “피로회복제를 하나주십시오.” 했더니 피로회복제를 하나를 ‘원비디’를 하나 꺼내더니 그담에는 유리병에 들은 거 같은걸 두 개나 집어넣습니다. 아니 그것은 뭐냐고 했더니 이것을 섞어서 드시면 빨리 피로 회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도 되나 하고 먹어도 좋다니까 하고 먹어보겠다고 하니까 그 약사 하는 말이 선생님 이제는 너무나 피로할 때는 영양분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을 몸에서 빼내는 약을 넣어야 됩니다. 그래야 피로 회복이 빨리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겠다고 하고 한번 먹었습니다.
여러분, 육신에 무언가를 보충해서 힘을 보충하는 것만이 이 우리의 육체가 새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일주일을 살면서 잘못 들어온 영혼의 독소가 되는 죄악, 세상적인 생각, 세속적인 욕망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통해서 그 영혼의 독소들을 빼내야 합니다. 쭉 빼내는 것입니다. 한번 이유 없이 몸이 너무 아파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픈데 이게 몇 달이 계속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500미터만 걸어 다니면 금방 이불을 쓰고 드러누워야 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장이 안 좋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식구들은 영양분이 모자라서 그런 줄 알고 그땐 돈도 없을 때니까 친척들이 가져다주었는데 소꼬리를 삶아온다 녹용을 해오겠다. 그랬습니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점점 상태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약사한테 진맥을 받으면서 약사한테 그런 이야기를 쭉 했더니 하는 이야기가 “선생님. 구정물 통에 생수를 아무리 부어보십시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빼내야지. 그래야지 몸이 새로워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육신이 그렇게 새 힘을 얻는 것과 함께 영혼의 잘못된 독소들을 빼내는 신령한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날 적당히 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세속적인 친구들과 함께 교제를 하고 돈 몇 푼에 으르렁 거리는 치열하고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일날 점심 먹은 후에 형제자매들과 온 교우들이 서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합니다. 그 신령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세속적인 교제에서 묻었던 때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오후에 다시 모여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던 잘못된 정서적인 찌꺼기 들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음란하고 더러웠던 찌꺼기들을 속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또 이거가지고 안되니까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서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잘못된 요소들을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되겠구나. 역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아 역시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볼 가치가 있구나.’ 이런 꿈과 용기와 신념과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아서 돌아가야지만 이 주일이 살아있는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이 아니라 교회 개척하면서도 늘 이야기 했지만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이 교회에 나와서 하지만 다른 교회하면서도 마찬가지지만 주일이 풍성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한두 번이 아니라 처음 개척할 때부터 여태까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주일이 풍성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주일날 저녁예배에 안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일 저녁예배 안 나오다가 주일예배 나오지만 무슨 이유만 있으면 주일예배에 빠집니다. 하나님 앞에 충만하고 풍성한 주일이 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 오래도록 우리가 한 교회를 다니면서 풍성한 주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풍성한 주일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로 옮겨야 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도 나는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저께 저녁에도 어느 설교 집을 보다보니까 빌 하이벨스라고 하는 윌로크릭의 목사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교회에서 풍성한 주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를 깊이 기도하고 옮기십시오! 어느 교회에 가시든지 풍성한 주일이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6일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습니까? 6일이 문제라기보다 이 하루가 풍성하지 못하니까 6일의 삶이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일 동안의 삶이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니까 7일을 지키고 싶은 사모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환적으로 이것이 악순환의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의 신앙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주일이 주일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런 주일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휴, 지겨운 주일예배가 이제 끝났구나.’ 이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갈 때는 가슴속에 무엇인가 선명하게 새겨져서 ‘아, 맞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하나님,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고 싶사오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다르게 살아봐야 되겠다.’ 라고 하는 강한 결심 같은 것들이 이 내면에서 치밀어 올라와야 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6일을 담대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런 사모함 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위해서는 우리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하나 유념해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준비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까? 우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주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6일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설교를 마치고 내려올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물었더니 언제나 주일이 다시 오나 그 생각을 하면서 내려왔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분과 정 반대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를 떠나가면서 여러분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물을 때 언제 수요일이 다시 오나 생각하며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삼일씩이나 기다려야 되나 그러며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의 교제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예배 속에서 내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친자녀라는 사실을 풍성하게 드러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이것들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들을 사모하며 하나님 앞에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을 이 설교를 하면서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중에는 저녁예배 참석안하시고 수요일 날도 거의 안 나오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꽤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수요일 날도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배나 빨리 자랄 것입니다. 수요일 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딴 데 가고 이방인들이 온다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작게 나오고 다른 교인들이 많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두 시간씩 두 시간 반씩 수요일 날 차타고 자기네 교회 안가고 여기에 와서 은혜를 받는데 열린 교회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요일 날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주님, 내 믿음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만남에 내 자신을 내어드리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주일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담에 성도들과의 참된 교제가 있는 그러한 은혜로운 주일이 될 때 그때에 우리는 정말 6일 동안을 승리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승리하고 6일을 살았으니까 7일 날 교회 오는 게 신나는 것입니다.
(예화) 초등학교 때 서울에서 저는 공부를 하고 아버님이 시골에 계셨습니다. 그러면 한 두 달이나 석 달에 한 번씩 서울 올라오십니다. 올라오시면 뭐 어디 아픈데 없나 물어보는 게 아니라 참 멋도 없습니다. 시험본거 가져와 그러십니다. 그러면 집게로 꼭 집어 놓았던 시험 본 것을 갖다 놓는데 시험을 잘 보면서 공부를 잘한 학기에는 그저 손꼽아서 아버지 오실 날만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칭찬이 있으니까 그렇지 못한 때는 언제 오실까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6일 동안을 형편없이 살아가면 주일날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쉬고는 싶고 하나님 만나봐야 뭐합니까? 좋은 이야기도 못들을 텐데 그런데 일주일동안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기도하며 간증을 남기면서 살 때에는 7일 날만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빨리 가서 하나님 앞에 승전 보고를 해야 되는데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렇게 은혜롭게 승리했다고 보고를 드려야 할 텐데 아유 이제 화요일 밖에 안 되었으니 언제 주일을 기다리나 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주일을 승리하면서 사니까 나머지 7일이 기다려지는 이러한 일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는 이 주일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 앞에 매우 기쁜 날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가족들과 함께 만들어 먹는다. 그러면 토요일 날 준비해 놓았다가 주일날 거하게 먹는 것입니다. 갈비에다가 실컷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 주일이 기다려지도록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항상 좋은 옷을 사도 장롱 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일날 개봉을 탁 해야 합니다. “야, 이거 너 주려고 사온 새 옷인데 오늘 이 주일 기쁜 날에 이 옷을 너에게 선물한다.” 뭐 선물할거 있으면 주일날 갖다 주어야 합니다. 부인들에게 혹시 가외로 생긴 돈을 주고 싶을 때 다른 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사용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용돈이 부족한 것 같아서 좀 넣어 주고 싶을 때 주일날 넣어주는 것입니다. 주일날 한 10만원이나 20만원 탁 주면서 “여보. 요새 얼마나 궁하오! 한번 체면 유지하면서 사세요.” 하면서 탁 넣어주는 것도 주일날 기쁜 소식도 간직하고 있다가 주일날 터뜨려서 모든 사람이 그 주일날이 기뻐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주일날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일날은 기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면서 주일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으면 교회에서도 잘 먹여주면 좋습니다. 주일날 교회 가니까 참 풍부하더라. 국수가 아니라 ‘야 오늘 참 맛있더라. 다음 주일 구역이 참 부담이 가겠습니다.’ (웃음) 역시 주일날 가면 모든 것이 풍성하더라. 주일날은 자녀들이 잘못을 해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특별히 많이 잘못했지만 너는 이러이러한 것 잘못했다 그렇지만 오늘이 주일날이 아니라면 넌 반쯤 죽었는데 주일이기 때문에 오늘 너를 용서해준다 와! 주일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 안식일에 이 주일에 내가 너를 용서해 주노라 모든 기쁘고 좋은 일을 주일날 터지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주일을 생각하면 뭔가 설레는 것입니다. ‘아 교회 가도 뭔가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 직장이 아니라 가정에 돌아가도 뭔가 주일이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 하는 이런 기쁜 날들이 넘쳐나는 그러니까 주일날 부부 싸움하는 것은 최악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회의하다 다투는 것도 최악이고 주일날 친구와 다투는 것도 최악입니다. 주일날 마음상하는 것도 최악입니다. 주일이니까 보라 오늘은 은혜 받을 만한 날이요 하면서 지체가 잘못해도 주일이니까 허허 용서해주고 이해 해줄 수 있는 이런 날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한 중심에 이 주일이 와서 이 주일날을 지낼 때마다 아 영원한 주일이 계속되는 천국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것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 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계명 강해 (1996.03.17. 주일오전7)
7.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6)
녹취자: 조경훈
하나님에 관한 의무를 기록하고 있는 네 계명을 끝내고 다섯 번째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인 부모 공경의 십계명을 생각하기 전에 다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 까지 여섯 개가 모두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먼저 주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관한 의무 네 가지를 차례대로 말씀하신 다음에 인간에 관한 의무 여섯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헌금 드리고 찬송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생활이 아니라, 나아가서 부모와 이웃과 형제들과 함께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이 신앙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다섯 번째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약속 없이 일방적인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생활을 잘 한 결과이지 약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 공경하면 이러이러한 축복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약속까지 주시면서 인간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관계에 앞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규정하고 계신 사실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십계명 속에 끌어들여서 규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은 오늘날 신앙의 세계 밖에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부모공경의 이유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는 그 부모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서 우리를 이 땅에 생산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드셨지만 직접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결합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향해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이의 법칙을 저버리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거나,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잘못된 삶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사 속에서 일어나는 예외인 죄로 말미암아 굽어진 인간의 타락한 성품을 드러낼 뿐이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성품은 끊임없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모의 정입니다.
(예화) 양식이 귀하던 시대의 대부분의 나라에는 자녀들을 위한 양식을 아끼기 위해서 부모가 미리 목숨을 끊는 풍습이 많이 있었습니다. 북쪽 에스키모 인들의 경우에 부모들이 연로하여서 짐승을 잡거나 물고기를 잡는 일같이 가족들을 위해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밤에 저 벌판 얼음위로 보내집니다. 그들은 거기서 고요히 앉아서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냥 죽는 것 보다는 맹수에게 자기 몸을 잡아먹히면 그 맹수가 자기 몸을 먹고 그 맹수는 그들의 자손들이 사냥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후손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께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난하던 옛날 시대 아마 고려시대일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그 부모가 나이가 들면 깊은 산속에 버리는 것을 고려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산속으로 연로한 어머니를 엎고 고려장을 지내러 가는데 어머니가 가만히 업혀서 가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꺾는 것입니다. 나중에 도착한 후에 아들이 물었습니다. “어머니. 그거 뭘 이제 고려장 지내러 가는 판에 나뭇가지를 꺾습니까?” 부모가 하는 말이 “얘야. 우리가 너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왔구나. 네가 어떻게 집으로 갈 길을 찾을 수 있겠느냐? 가면서 나뭇가지가 꺾여 지고 밑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서 숲을 빠져 나가면 우리 집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사랑해 봐야지만 겨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사랑 때문에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의 세계 바깥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추스를 수 없는 어린 아이 때부터 시작해서 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인간성을 형성하고 교육을 받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홀로 독립해서 한 세상을 해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하기 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는 대부분 부모를 통해서 공급되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신성한 의무를 우리가 저버린다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도 축복받는 삶을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부모가 생물학적으로 나아주었고 길러주었다는 이유 때문에만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눈을 떠야 됩니다.
(예화) 이민을 간 어느 부부가 그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려고 남편과 아내 모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 직장 가지고 안 되니까 두 세 직장을 번갈아 가지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막 자라게 되었고 한국에서 배웠던 윤리, 도덕, 부모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들은 그 사회에 잘못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점점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이것을 하도 볼 수 없는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아이들을 주워 팼더니 아이가 하는 말하였습니다. “부모에게는 만 18세까지 자녀를 양육할 의무만 있지 때릴 의무는 없습니다.” 지금도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데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오면 선생님들이 철저하게 교육을 시킵니다. 엄마나 아빠가 너희를 때리고 그것이 너무 아프면 즉시 911에 전화를 해라. 그러면 5분 안에 경찰이 출동하는데 자기 자식을 때린 것 때문에 부모는 철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한번 신고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풀어달라고 애원을 해도 경찰이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질서가 얼마나 무너졌으면 인간과 인간,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사이에 법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는지에 대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무너져가는 가정의 질서와 도덕적인 오류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계명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야 됩니다.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평범한 자연의 질서가 인간 속에 깃들여있는 죄성과 사악함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규정하는 첫 번째 계명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사회 속에 난무하고 있는 죄악과 마음대로 살려고 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파괴하며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우리의 성품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배받고 고침을 받고 속박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우리의 생각들을 회개하고 새로워지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는 결코 이 계명을 지키면서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가운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생물학적이고 일반적인 우리의 삶에 행복을 위하고 가정의 질서를 위한 그 이상의 신앙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방법을 가정 속에서 배우게 하려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학교는 가정입니다. 그 가정 속에서 우리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가정은 단지 한 피를 받아 태어난 사람들이 한 솥에 밥을 먹고 한 장소에 어울려서 잠을 자는 것이 곧 가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가지 기관이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두 기관의 공통점은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참된 가르침이 없는 가정은 진정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왜 비참하게 파괴되고, 자녀들이 가출하고, 부모들이 가정을 버리는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나며 우리의 인성을 의탁하고 살아 갈 수 있는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나가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안에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입니다. 가정은 자녀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주고 육신을 자라게 하고 학교를 보내고 쓸 용돈을 주고 미래에 누리고 살 수 있는 기업을 물려주는 그것이 가정이 아닙니다. 가르침이 없는 가정은 가정답게 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하거나 부유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가정에서 많이 배운 가장의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가정이 규율이 서는 것도 아니고, 완력이 센 아버지가 그 가정을 지킨다고 해서 그 가정에 질서가 서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세계 바깥에서도 아버지가 분명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분명한 처신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물려 줄 인생에 대한 모종의 교훈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가 있는 그 가정은 질서가 서있고 계통이 서있고 철학이 서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관을 의미하며 보편타당한 가치를 의미합니다. 신앙의 세계 바깥에서도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가정을 어거하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고 육체의 방종한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부모가 있는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가정이 아닙니다. 식구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서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도 그 가족이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을 누구 한사람 챙기고 단속할 수 있는 아무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가정은 이미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그 가정으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도록 명령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모들을 통해서 당신을 믿는 경건한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도록 위함입니다. 오늘 이 십계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향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구속받은 이스라엘에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어진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애굽에서 이미 경험하고 40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데 너희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을 가진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그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앙의 도리가 자녀에게 전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가장이 확실하게 예수를 믿고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가정을 어거해 나가야 됩니다. 부인이 가정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자식들이 툭하면 아버지에게 대들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집안에서는 결코 선한 날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인 가장들이 되지 않으면 가정에 진정한 행복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오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도록 자녀에게 말씀하실 때 그 부모는 하나님을 깊이 존경하고 경외하는 신앙일 때 자녀들이 깊이 공경하고 순종할 때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도리가 자녀들에게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에 아버지가 너무나 훌륭하지만 자녀들이 개판이 된 집안이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야말로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는 한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자녀들이 자신을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인 동시에, 부모에게 부여하신 가장 중요한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 경건하고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녀들을 어거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신앙이 자녀에게 물려질 리가 없습니다. 이점을 실패한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유대 임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사라고 하는 뛰어난 임금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는지 제사장들로 하여금 율법 책을 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율법 공개강좌를 열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었던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전심으로 여호와를 일평생 추구한 왕이었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정의 교육에 실패하였고 그 다음에 왕이 된 자신의 아들에 의해 다스려진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당신의 경건한 왕들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한 우상을 다시 세우는 패륜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경건한 신앙이 자녀에게 물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인 우리들을 공경하고 경외하면서 살도록 만들지 못한 교육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되고 그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부모인 우리들에 공경하고 존경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고 부모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꺾으며 살아가는 것들을 훈련받을 수 있는 삶을 우리들이 그들 가운데 만들어 낸다면 좋은 신앙이 그 공경하는 관계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물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만약에 정반대가 되면 어떻겠습니까? 부모는 전혀 신앙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끊임없는 폭력과 구타로 자녀들을 꼼짝 못하게 굴복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삐뚤어진 자아상을 가진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시라고 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치가 떨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또 있다는 말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시다.” 라고 하실 때 그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뜨거운 사랑, 애틋한 사랑, 그러면서 어찌하든지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시종일관된 약속에 신실한 아버지의 사랑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셔도 우리에게 그렇게 뜨겁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하찮게 생각하고 친구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이 없고 방만하고 방종합니다. 이 모든 잘못되고 왜곡된 생각들을 자녀들에게 창조해내게 됩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경건한 신앙 없이 자녀들을 폭력과 위엄으로 권세와 권위로 압도하고자 할 때 자녀들 속에는 그 권위에 대한 커다란 반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을 공경케 하는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끊임없이 우리를 감화 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다섯 번째 계명을 말씀드리면서 부모인 여러분들, 가장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제가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똑바로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자녀들은 진정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본 자녀들만이 그 하나님의 자녀인 그 부모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따라 부모로서 공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부모공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그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도를 배우기 힘써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 앞에 착하게 순종하고 자신을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그런 은혜로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자녀들을 섬기고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를 경외하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도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의 부모들은 깊이 무릎을 꿇고 존경할 만큼 인격이 훌륭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신앙을 이어가는 도에 있어서 깊이 존경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감화력이 있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지 우리들 가운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뭔가를 요구하면서 우리는 가끔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그 부모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면서 살아 왔는가? 그러나 애들을 야단치고 혼내고 할 때는 자기가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가 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립니다.
(예화) 어느 선생님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공부 안하고 맨날 딴 짓 하고 있는 놈을 야단쳤습니다. “야 임마. 아브라함 링컨은 네 나이 때에 통나무집에서 빌려온 책으로 공부를 하느라고 밤을 샜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말했습니다. “맞아요. 선생님만 할 때 그는 대통령이 되었지요.”
우리는 부모의 요구에 온전히 부흥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을 부모의 결함, 존경할 수 없는 인격, 도저히 일관성 없는 인생관, 여전히 신앙 밖에서 살아가는 그 고집. 이런 것들을 보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우리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부모의 마음에 합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마음에 합하지 않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를 통해서 넘치도록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주님을 공경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바로 믿으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부모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깊이 감사하셔야 됩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그렇지 못하고 자식 앞에 자신의 인생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부모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 자녀들조차도 부모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녀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보면서 개탄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집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신앙을 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주일이면 교회 가라고 손목을 이끌고, 야단을 치고, 구슬리고 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소원과 주님을 믿지 않고 신앙생활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여러분들의 부모들이 그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하지 못하도록 핍박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경험을 못해보셨으면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너무나 비참합니다.
(예제) 우리교회 한번 왔었는데 목사가 된 어느 형제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은 참겠는데 형제들까지도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한데 착한거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집을 돈을 달라고 합니까? 떡을 달라고 합니까? 자기가 가서 예수 믿겠다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그 집이 불교집안도 아닙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믿고 나 혼자 믿겠다는데 성경책 찢어서 아궁이에 집어넣고, 교회 간다는데 개 패듯이 패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가족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좋던 가족의 관계가 발기발기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신앙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이 없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이 복음을 붙들고 하나님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 할 부모와 가족들이 자기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호적을 파가지고 가버리라고 하거나, 인연을 끊겠다고 극단적인 이야기를 퍼부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차에 올라서 성경을 폈는데 이사야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 가족이야기를 하면서 우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서있게 되었을 때, 어느 날 여러분의 부모가 부족하지만 회심해서 예수를 믿고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함께 손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방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녀가 신앙이 없기 때문에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그런 축복을 자녀는 쉽게 잊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부모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에 못자리가 되었고 그분들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경외하며 살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부모공경의 최대의 부모공경은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가져다주는 좋은 음식, 아름다운 의복 같은 것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길어봐야 몇 십 년 입으면 다 두고 갈 것입니다. 돌아갈 날이 멀지 않은 분에게 무슨 비단옷을 해 입히는 게 필요하지만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런 효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에 대해 의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퇴원해서 먹고 싶은 것이나 실컷 잡수시게 하십시오.” 기왕 죽는 것 잘 해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의 효도만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효도방법인 부모님들이 예수 믿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녀들은 최대한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력해서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부모가 아직까지 그런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아오고 여러분의 자녀였다면 많이 야단칠 수밖에 없는 삶을 부모가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경건한 부모를 공경하라” 혹은 “너의 부모가 경건하다면 공경하라” 라고 말하지 않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기대처럼 완전하고 경건한 부모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들은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잠언은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지혜자는 부모로서 자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질이나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는 것도 훌륭하지만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모든 섬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화) 젊을 때 한 가닥씩 했던 노인들이 노인대학 서로 모여서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유산은 절대 빨리 물려 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유산을 가지고 분배를 안 해주고 딱 쥐고 있으면 언제 어떻게 분배될지 절대권한이 부모에게 있으므로 그런 긴장이 있는 동안에는 며느리도 잘하고 자식들도 경쟁적으로 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상대로 사업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세상에 모든 부귀를 누렸던 사람이었지만 자식에게로부터 최대의 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우리는 부모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도 부모와 우리와의 관계는 그 부모가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관계를 끊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공경하며 살아야 될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환경마다 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부모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경하면서 살아가면 되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기도하면서 마음을 부모에게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것이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요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에게 마음을 주지 아니하면 우리의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이것을 배우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건축헌금을 막 가져 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아까운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음을 드렸으니까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마음을 줄 때 부모의 허물과 잘못된 것들이 오히려 가리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지 오늘 그분이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하고 부를 때 가슴 깊이 밀려오는 그리움은 완전한 어머니와 아버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불완전하고 허물 많은 부모님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그들을 통해서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스쳐갔지만 아무리 부족해도 그 부모님들에게 우리의 이름 세 글자는 기쁨이었고 동시에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할머니와 고모들이 계셨는데 그중에 할머니의 딸 한 명이 지방에 내려가서 직장생활을 하며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려서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딸이 죽은 것 같다는 잘못된 소식이 집안에 전해진 것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였지만 부모 속에 깃들여있는 사랑은 너무 기이한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 드린 딸인데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확인을 해보면 되는데 그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에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할머니가 덜덜덜 떠시는 것입니다. 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분만 떠셨습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살아오신 인생이 아무리 부족했더라도 그분들의 마음에 세계 속에서는 우리의 이름 석 자를 외울 때 그것은 기쁨이었고 설움이었고 눈물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이름 석 자만 부르면 가슴 깊이 목 메어오는 사랑을 느꼈던 유일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부모들입니다.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오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모든 허물들이 자녀들에 의해서 용납되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정도에 비례해서 공경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부모로부터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한없이 사랑만 받아왔다는 사실을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들이 자녀인 우리들을 대할 때 공부를 잘 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했거나 건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거나 귀여워해주고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저는 학교를 다닐 때 꼭 같은 지점에서 버스를 타는 아주머니를 무려 3-4년 가까이 뵈었습니다. 그 아이를 휠체어를 태워서 학교까지 태워다 주는 모양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아이가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중학생이었는데 나중에는 커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정말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자식이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홀대하거난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정도에 비례해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져 가기 쉬운 이 가정에 모든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한 첫 번째 계명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모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주신 이 거룩하고 신령한 의무를 기쁘게 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것입니다. 아무 수식어도 없이 그가 바로 너희를 낳았고 너희의 부모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너희는 그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고 이것은 내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향한 첫 번째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들이 때로는 여러분들이 보기에 형편없는 삶을 살 수 있고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부모에게로부터 가슴 아픈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자매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커다란 은혜가 있습니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면서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와의 관계가 상처 있는 관계라면 믿음과 사랑으로 그 상처의 관계가 치유되는 일들을 우리들이 친히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듭난 하나님 자녀의 삶은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위대한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 깊이 부모를 먼저 용납하는 일들을 부모를 공경하는 일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모를 마음에 용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축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에 영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부모를 용납하지 못하고 마음을 부모에게 줄 수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을 기대 한다는 것은 심히 곤란한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공경이 문제가 아니라 용납이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부모님을 마음깊이 용납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용납을 넘어서 공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님들이라면 그분들이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박해하고 여러분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의 인생일지라고 그것을 쓸어안고 사랑하고, 치유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거룩한 사명이 하나님을 이미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이 계명 앞에 새롭게 우리 자신을 세워서 부모들이 자식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새롭게 새우고 가정 전체가 치유를 받고 새로워지는 은혜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세월이 흘러가도 불변하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기도)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먼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저희에게는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부모에게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 가정에 진정한 부모로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돌보게 하시고,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이 가정과 관계들을 새롭게 치유하는 도구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주께서 은혜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에도 역사해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셔서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같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들을 불러서 주님 자녀 삼아 주셨으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부모들을 용납하고 공경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이 시간에도 우리의 모든 관계들을 새롭게 치유하시는 변화의 역사가 저희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 되겠사오니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시고 하나님이여 우리를 고치시고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용납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에도 부족하고 연약한 아들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도록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의 인생에 참된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면서 이 땅에 모든 부모들이 당신과 같은 사랑으로 자녀들을 돌보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자녀들에 경건한 삶과 같이 그렇게 부모들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지만 말세에 고통 하는 때를 당하여 깨어진 수많은 관계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로서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고 이 교회를 통해서 어머니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놀라운 사랑들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시간도 저희들이 부모로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기를 소원 합니다.
우리들이 방탕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내어 놓인바 된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훈과 도로 양육하기 위해 온전한 부모님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 부모로서 더욱 닮아가도록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부모들을 공경하며 살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삶.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하는 우리의 그 모든 표리부동한 신앙들을 오늘 이 시간 마음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주님을 경건하게 섬기며 믿는 부모를 가진 우리의 처지를 인해 감사하지 아니하였던 우리의 잘못된 삶들을 오늘 이 시간에도 용서하여 주시고, 부모와 깨트려진 관계 속에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식들도 이 가운데는 있을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을 치료하신 것처럼 그 깨트려진 관계를 치유할 수 있는 거룩한 은혜들을 주의 자녀들에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십계명 강해 (1996.03.24. 주일오전8)
8.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신 5:17)
녹취자: 임희정
신명기 5장입니다. 17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살인하지 말지니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손을 우리의 일주일 세상살이의 혼돈하고 더러워진 마음을 주님이 다스려주옵시고 우리 중심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 깨닫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로부터 깨달음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 사모하던 거룩한 부르심으로 우리가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6번째 계명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모에 대한 계명을 여러분들에게 강론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부모에 대한 계명을 모든 십계명 중에 인간들 사이의 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으로 주실 수밖에 없었던 그 중요성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계속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주신 것이 바로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이미 1, 2, 3, 4계명은 우리가 강론을 들었으니까 들리는 것이 많았겠지만 그러나 십계명 중에서 아마 여섯 번째 계명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계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는 한 여러분 가운데는 아무도 살인전과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첫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 십계명은 신약의 빛을 받아서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밖에 없었던 깊은 의미들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이것을 하라, 이것도 하라, 이것도 행하거라, 이것을 너희들이 행할 때 나는 기뻐한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다 하시지 못할 텐데 여기에서 써진 히브리어는 강한 금지명령입니다. ‘하지 않았으면’ 이 아니라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인을 하지 말라” 이 계명은 결국 엄격한 의미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깊이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는 생겨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이 있고 그 선으로 계속 우리가 갑니다. 여기까지는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인이라는 라인에는 닿지 않았지만 그길로 행해가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에게는 대단한 진노와 분노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 선을 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어긴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살인을 금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은 생명외경이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찬미합니다. 살아있는 짐승을 혹은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을 죄악으로 보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 훌륭한 의사나 혹은 불교인들이나 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자비심이 뛰어나다면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부득불 죽여야 했던 수많은 병균체들 그리고 지금도 끝없이 인간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모르모트들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여기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모양과 형상을 가지고 창조하신 인간을 살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십계명에서는 인간을 살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루하루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고는 신문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살인이 일어난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만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보지 않았습니다마는 옛날에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팔도에서 살인이 한번 일어났다 하면 보름동안은 온 나라에 뉴스거리가 됐다고 합니다. “세상에, 함경도에서 누가 사람을 죽였대.” 그러면서 제주도에 있는 사람까지 덜덜 떠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만약에 신문 한 면에 “지난주에는 이 땅에서 한건의 살인도 없었습니다.”라고 신문에 난다면 뉴스거리가 될 만큼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인이 일반화되어진 이러한 끔찍한 일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인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영혼의 피해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인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습니까? 그것도 즉시 살인한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습니까? 살인은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살아갈 때에 우리가 뭔가 죄를 범 하면 즉시 하나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슬퍼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가 그만 두어도 하나남께서 슬퍼하시는 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데 살인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셨습니다.
어느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인과 아벨이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한 아들은 양을 치고 한 아들은 곡식을 가꾸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죽음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육식도 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물가에 아름답게 열매 맺은 과일을 따먹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가인과 아벨 사이에 커다란 미움이 있고 나서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잠시 후에 아빠와 엄마가 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금 전까지도 따뜻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었던 한 아들이 차갑고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인을 하고 난 다음에 가인은 하나님께로 완전히 끊어지는 극심한 큰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급기야 그를 비롯한 그의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타락과 불순종과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살인들은 지금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운데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자주 쉽게 그리고 별로 살인할 이유가 없는 그런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수많은 살인행위들을 우리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에게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돌아가는 세태를 바라보면서 우리자신도 암시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이 땅에서 제거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에서 살인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시카고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살인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신문에 “시카고스타일의 살인 또 자행되다.” 이렇게 기사가 납니다. 약 천불에서 삼천불만 주면 언제든지 살인을 청부맡아주는 업체가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카고슬리퍼 라는 유명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후에 콘크리트로 만든 커다란 슬리퍼를 신기는 것입니다. 다리자체를 콘크리트로 해서 그 죽은 시체를 강바닥에 깊이 수장시키는 방법을 시카고슬리퍼 살인수법이라고 말합니다. 어디 시카고만이 그렇게 살인으로 이름난 도시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을 인간마음대로 처리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일들이 놀이삼아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땅의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심판하고야 마실 것입니다.
왜 살인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극도의 미움이 되는가? 극도로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손에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들을 인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산에서 꽃을 따오는 것도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인간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나무를 베어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악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아침에 육류를 드시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어느 소, 어느 돼지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죽어가기도 하고 사육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인 너희에 대한 생명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태어나고 한 사람이 죽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각자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하시겠지만 인간은 타락하고 죄 가운데 있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지만 그러나 참으실 수 있는데 문제는 사람을 죽이는 것, 생명을 앗아가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참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 권리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 홀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수 있고 하나님 홀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취하실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마치 인간을 처단하고 인간의 생명을 끝장내는 그런 주권들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학대하고 인간을 살인하는 이런 일들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는 커다란 죄를 범입니다. 더군다나 이 계명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거룩한 의미와 영광을 시내산에서 보여주셨고 이 계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듣고 있는 사람들은 40년 동안 애굽의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의 온갖 자비와 은혜를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의 땅 가나안이 눈앞에 보이는 현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살인이 공공연하게 자행될 수 있는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살인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지워지지 않게 우리의 마음속에 깊게 아로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반드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입니다. 만약에 자기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앞에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끼는 대가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의 극단적인 발동이 곧 살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두 사람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했고 또 한사람은 곡식으로 제사했습니다. 제사 드리기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앞에서 자기 동생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자기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는 것을 보는 그 순간에 미움이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사소한 이익을 향한 집착이 엄청난 살인으로 빚어지기도 합니다.
신문에도 났습니다마는 공중전화박스에서 여러 사람이 맞아죽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와서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이 수다를 떨며 통화를 끝내지 않자 뒤에 온 사람이 기다리다가 앞사람에게 전화 빨리 끝내라는 말에 서로 시비가 붙어 몸싸움이 나고 공중전화 부스는 피범벅이 됐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간단하게 죽을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대로상에서 앞지르기를 하려는 차를 계속 못 가게 가로막는 자동차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개인차를 몰고 있는 경찰관이었습니다. 뒤차가 와서 앞차를 가로막고 불러 세웠습니다. 운전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그 자리에서 몇 대 쥐어 팼는데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으로 죽음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회복될 수 없는 파멸로 우리의 영혼을 몰고 간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살인은 이미 낙태를 통해서도 처절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1년이면 수십만에 해당하는 어린아이들이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처참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아이를 기계를 집어넣어서 머리부터 차례대로 박살을 내서 찌꺼기들을 끌어냅니다. 이러한 살인 행위들은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문명의 거리 한구석에서 버젓이, 그것도 돈을 받고 간판을 내걸고 행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인 당할 기회를 피해서 출산한 아이들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인간을 죽이고 파괴하는 영화들을 재미로 생각하며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재미있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이 어린아이에게 일찍부터 대포와 총 같은 장난감들을 만들어주지 말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총과 대포와 칼을 가지고 노는데 프랑스 어린이들은 그러면 15살이 될 때까지 인형의 옷이나 입히면서 자라면 이 나라의 미래를 누가 지킬 것이냐고 말했습니다. 이미 어린아이 때부터 인간을 살해하고 살인하고 죽이는 일들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전 근 6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요즘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끔찍한 살인 행위를 묘사한 영화들이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끌고 가서 두들겨 팬 다음에 온갖 끄는 소리가 나면서 이 벽이 핏빛으로 물드는데 나무를 자르는 기계톱으로 인간의 다리를 자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버젓이 영화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이것이 뭔지도 모르고 보고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아이를 화장실에 데려가서 혓바닥을 자른 이런 사건들을 아이들이 상상해낼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끔찍하게 린치를 행하는 수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암시를 받은 것입니다. 생각은 언젠가는 행동을 낳고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 누적되면 그것이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고야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속에서 먼저 우리자신을 지키고 우리의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다시 한 번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만드시고 땅위에 사람들을 만드시고 그 위에 특별히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몇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움과 살인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예화) 옛날에 교회에 뭐 훔쳐갈게 있다고 칼을 들고 가끔 들어오는 어리석은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주일에 헌금을 걷어서 교회에 넣어두기 때문에 월요일에 오면 뭐가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 대단한 사모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사모님이 실질적인 당회장처럼 그렇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는데. 교회를 짓는 땅 자체를 사모님이 내놓을 정도로 정말 대장부입니다. 저녁때가 됐는데 교회 문을 누군가 두들기더랍니다. 내버려두고 잠시 후에 문이 열린 것을 보니 아마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새였습니다. 사택에 목사님과 자녀들이 있었고 사택과 교회당은 문 하나로 연결되어있었는데 문을 열고 보니 거기에 시퍼런 칼을 들고 복면을 쓴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답니다. 자녀들도 놀라고 목사님도 놀라서 어떻게 하나 고민만하고 있었는데 사모님이 방문을 열고 한손에 하얀 고무신을 쥐어들고는 강도에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여기가 어딘데 허우대 멀쩡한 놈이 칼이나 들고 와서 먹고 살려고 하냐. 너 이리 와봐.” 이러니까 도둑이 혼쭐이 나서 도망을 갔습니다. 또한, 한 교회에서는 권사님들이 모여서 월요일 저녁에 철야를 하고 있었는데 도둑이 칼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내놓으라고 하니 몇 사람들은 교회 온 사람이 뭐가지고 온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다 거둬 줄 테니 목숨만 해치지 말라고 했는데 신앙이 깊은 권사님이 “이보게 젊은이. 그래 얼마가 필요한가? 설마 저녁 값을 얻자고 여기 칼을 들고 들어온 건 아니지 않겠나? 이까짓 몇 푼이 무슨 유익이 있겠나. 그래 내가 날 새면 아침에 은행에서 찾아줄 테니 말해보게 얼마나 필요한가?” 그러니까 이 젊은이가 복면을 풀고 칼을 내려놓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이게 결국 복음의 힘 아닙니까? 도둑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사실은 옛날에 주일학교로 교회를 다닌 기억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그 교회에 칼 들고 들어왔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살인이 이렇게 행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인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며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드는 창과 칼을 쳐서 보습과 쟁기를 만드는 일들을 위해서까지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사람을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살인의 칼을 버릴 뿐만 아니라 살인하기 위해서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살인을 그만두게 만드는 데까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사람을 죽이는 그런 흉악한 영화들과 프로그램들을 어린아이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충만한 사랑과 화해와 용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을 어린아이부터 실어주고 자신도 그런 것들을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백주에 수많은 사람들이 창과 칼을 들고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우리는 개탄해 마지않습니다. 미국에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42%가 총을 휴대하고 학교에 다녀야 할 판이라고 하니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십 만원만 주면 어디든지 가서 권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는 기사들이 많이 실렸습니다. 기관총을 비롯해서 대량의 테러용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구입하려다가 적발된 그러한 폭력조직도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경고하고 경계 받고 그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는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안고 교회에 나와야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살인의 원인이 어디에서 나는가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계명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분명한 어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살인의 원인이 미움에 있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피 묻은 칼을 보기 전에 피 묻은 마음속의 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이것들이 결국 살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우리 속에 있는 미움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삶에 대단한 어려움들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살인의 계명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옵나이다. 나는 아무도 죽인 적이 없고 낙태를 한 적도 없사옵나이다. 나는 누구의 생명을 앗아간 적도 없사옵나이다.”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나는 네 가슴에서 칼을 맞고 죽어가는 수많은 나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살인이 있고 난 후에 비로소 한 살인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에덴의 낙원과 같은 마음에서 살인의 칼을 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수없이 미워하고 수없이 질투하고 수없이 시기하는 가운데 이미 우리 속에 수만 번 그 사람의 시체를 묻고 나서야 비로소 살인이 행해집니다. 오늘 주님 말씀하시기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인격적으로 정말 고매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래도 나는 뒤끝은 없는 사람이야.” 자기나 뒤끝이 없지 당하는 사람은 계속 뒤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수많은 마음의 살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그리고 그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들을 입을 통해서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교회에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황폐해지고 있을까?’ 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분노의 마음들을 우리는 다스려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한 번, 한 번의 살인은 독사와 같이 우리의 영혼의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누군가를 사랑할 때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의 이름만 생각하면 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액체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온몸에 퍼집니다. 생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꿈을 안겨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아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고통가운데 그걸 견딜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을 줍니다. 그러나 속에서 미움이 솟아날 때 그것도 똑같은 영향을 정 반대의 의미로 우리의 영적인 삶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나려고 할 때 우리 속에서 뭔가 원망과 미움의 쓴물이 솟아날 때 그 쓴물이 우리의 속살 안에 골고루 퍼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던 입술이 굳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을 기뻐하던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미래를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경하며 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속에서는 극한 분노가 쏟아져 이루고 우리의 모든 판단과 생각들은 실타래처럼 뒤엉켜버리는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하나님께서 그토록 자주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지킬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너희의 마음을 지킬지니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낢이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예화) 인천에서 살 때 근처에 톨게이트가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쭉 가다가 내리면 영락없이 하루에 한건은 보게 됩니다.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무스를 바르고 잘 차려입고 차도 아주 좋은 차가 옵니다. 그렇게 점잖게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창문 두 개가 열리고 누가 먼저 튀어나오나 내기하는 것처럼 튀어나오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여태껏 어떤 스타일로 운전하고 왔는지 다 잊어버리고 고성으로 욕을 하며 싸우는데 정말 어린아이 같습니다. 4미터 높이밖에 안 되는 육교위에서 내려다봐도 어린아이 같은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 보실 때 얼마나 유치해보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미움은 살인으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공명하게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미움을 우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피 묻은 칼과 욕하는 입술에 묻은 침은 같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사람을 죽인 칼을 다시 깨끗이 닦아서 또다시 사람을 찌르고 그 칼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었습니다. 그런 칼을 우리들이 품고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미움들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면서 우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로 하여금 관계를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즉, 살아가면서 때로는 옳은 일 때문에 분을 내거나 노를 낼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 분노가 그 마음을 주장하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분노가 너희를 살인죄로 데려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마음속에 끊임없이 시체를 쌓아가면서 풍요로운 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연구대상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기를 원하는 극단적인 분노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매일매일 그의 시체를 쌓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이는 칼을 깨끗이 씻고 주일날 교회에 옵니다만 신령한 은혜가 그의 마음속에 깃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짧은 세상을 지나가면서 다양한 삶의 일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것이 상처로 남아서 그 상처 때문에 또다시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자행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선택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려고 할 때 끝까지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멀어져서 동물적인 삶으로 나아가든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속에서 죽이든지 그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든 내 자신을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증오하는 마음의 작용이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기까지에는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공연히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이고 싶다든지 저처럼 못생긴 얼굴을 보면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갖는다든지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잘못된 것입니다. 끊임없는 살인이 내안에서 자행하기까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움을 숙명처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조차도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주님은 살인을 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도 주님이 용납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을 끊임없이 찌르며 그 피 묻은 칼을 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이 있기 이전에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그 가슴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있는 끊임없이 살인하고자하는 내 자아를 죽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합니다. 시내에 살인자가 나타났다하면 온 시민들이 두려워하고 거리거리마다 경찰차들이 몰려들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복잡하게 신문을 하고 검색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이 작은 마음가운데 뭔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죽게 하고 살인하게 하려는 이러한 피 묻은 칼을 들고 사람의 생명을 찾아다니는 살인하고자 하는 자아가 우리 속에서 살아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있겠느냐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그러한 살인대상자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몇 사람의 시체를 우리 가슴속에 묻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총알과 같은 말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속에서 사람들을 미움으로 살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를 묻고 우리는 피 묻은 손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인에게 물으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 다시 묻고 계십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십니다. 우리가 미워함으로 죽여서 우리의 가슴속에 미움으로 묻었던 그 수많은 이웃과 그리고 가족들과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야 될 사람들의 시체의 이름을 부르며 너희가 그들을 어디에 묻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만 이렇게 물으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화목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벗어나서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사람을 죽이고 자기가 그것으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오늘도 물으시고 계십니다. “가인아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부모님이라면 “너희의 부모는 어디 있느냐?”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내이요 남편이면 너희의 짝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것이며 여러분들이 미워하고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여러분의 이웃이라면 여러분의 이웃이 지금 어디에 누워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눈물을 쏟으며 가인을 향하여 물으시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인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때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분명히 피 묻은 돌멩이를 한손에 들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마음속에 수많은 이웃과 사랑해야할 사람들을 죽여서 피 묻은 시체로 묻으면서도 하나님이 “네가 미워하여 죽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물을 때에 여러분들이 “난 사람을 살인한 적이 없사옵나이다.” 얼마나 더 잘 말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인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신을 감추며 항변하는 가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우리 가슴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그 핏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고통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을 때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높은 윤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의 율법아래 칼과 축복을 두었을 때는 너희들이 단지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 너희를 향한 내 사랑이 무엇이고 내 형상과 모양으로 지은바 된 너희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이제는 너희는 너희의 시체를 가슴에 묻는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속에 살인하려고 하는 자아를 죽이는 것보다는 한번 죄를 범으로 살인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미묘한 살인행위를 그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람이 내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미움을 먼저 이미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내 삶의 소중한 것을 수없이 빼앗기고 나로 하여금 이렇게 그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준 장본인이 그 사람, 그 관계, 그 이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변색이 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수많은 피 묻은 돌멩이가 교회 안에 가득하고 피 묻은 칼이 교회에 잔뜩 쌓여있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서라도 군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 들어올 때는 총과 칼을 풀어놓고 들어오는 법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미움의 살인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관계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에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미움의 쓴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 계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내 손은 피 묻은 적이 없었지만 수없이 우리의 가슴속에 살인으로 묻어두었던 수많은 미움과 그로 말미암는 죄를 범들을 오늘 우리는 “살인자요 폭행자였사옵나이다.” 고백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미움과 살인들이 하나님 앞에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는 살인과 미움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미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기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으로 살인하고 육신으로 살인하고 속사람으로 사람들의 시체를 묻으며 피 묻은 손 피 묻은 영혼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 한 방법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이렇게 숙명적인 살인과 미움 속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이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하늘높이 못 박히실 때 죄를 범 한 우리들을 죽여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서 우리의 죗값을 담당하게 하게 하심으로 화해와 용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받아야 했던 하나님 자신의 처절한 고난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했던 고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 속에서 미움이 그치지 않고 있다면 누군가 한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 미워하는 가족들 속에 미움이 화해로 바뀌기 위해서 누군가 한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분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그 위에서 울고 피를 쏟고 마땅히 죽어가야 할 살인한 자들을 위해서 대신 살인을 당하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늘날 복음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구속의 물결, 화해의 역사의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들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우리가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미워하는 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우리자신을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자신이 깊이 죽어질 때 우리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의 불로 피 묻은 칼을 들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며 마지막에는 그 칼로 자기를 찌르며 죽어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살인자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 칼을 그 불로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호미와 괭이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장엄한 영광의 임재 가운데 시내산에서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복락의 땅, 진정한 우리의 영혼의 가나안에 우리가 들어가 하나님의 놀라운 부유한 축복들을 누리며 살기 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십계명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살인과 미움의 문제들을 정리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내 마음속에 있는 이 수많은 살인들 그리고 내 마음속에 가슴에 묻은 이 수많은 피의 시체들 하나님께서 오늘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 우리가 살인자요 폭행자였던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오니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6계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주여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셔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 속에 솟아나는 모든 미움과 살인의 죄악들을 이 시간에도 십자가에 묻을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시옵소서.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미움이 사랑이라는 묘약에 의해서만 치료될 수 있사오니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시고 아버지 하나님 붙들어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아버지 도와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붙잡아주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주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새 힘과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소원하오니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오사 주의 영으로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사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것들을 못 박고 살게 하옵소서.
9.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 강해 (1996.04.14. 주일오전9)
“간음하지 말지니라” (신 5:18)
녹취자: 이배훈
우리는 이제 일곱 번째 계명으로 왔습니다. 지지난 시간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들었고 지난 시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계명은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에서는 열 개의 계명 가운데서 가장 크게 와 닿는 계명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문제에서 많은 교훈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옛날에 성경이 기록되었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15세기 당시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독특한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여행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종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 생활 중심부에 간음의 문제가 들어와서 자신의 신들에게 경배하면서 성적인 환락을 즐기는 일이 권장되었습니다.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너그럽고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자유롭습니다. 새삼스럽게 간음하지 말라 혹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고 간음했다고 하는 얘기는 성경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삶 속에서는 여기에 대한 경계심이 이미 무너져버렸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수많은 광고는 성적으로 묘사되고 성행위를 흉내 내어 사람들의 성감대를 자극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습니다. 실로 탄복할 정도로 인간 깊은 곳의 잠재적인 성의 심리를 자극해서 물건을 구매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기법이 광고에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문화가 개방되고 성적인 삶이 자유로워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들으면서,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웠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 계명이 어렵고 낯선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시 모든 나라와 모든 종교에서 통용되고 있던 성적인 관대함에 대해서 쇄기를 박으면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등의 계명은 하나님에 어울리는 계명 같아 보입니다. 간음을 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재산적인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닙니다. 간음처럼 인간적인 은밀한 관계에까지 하나님께서 내놓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초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셔서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누구든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오늘날 서울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서울의 거리에는 피 묻은 돌멩이와 돌에 맞아 죽은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토록 엄격하고 단호하게 이 죄악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깃들이는 것이 안 된다고 못 박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든 종교와 사회가 관대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이런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 사이의 신앙은 풍요신앙이었습니다. 원주민의 사회는 농경 문화였고 그 시대의 최고의 가치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수확되는 수많은 곡식과 열매가 농경사회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고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남아있는 잘못된 사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쇄기를 박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풍요신앙 뒤에는 여성이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출토되는 바알종교, 아세라종교 등의 이방종교의 신상들은 대개 젖가슴이 크고 몸집이 풍만한 여성상입니다. 그것은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아이를 많이 낳고 낳은 아이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을 가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풍요를 상징합니다. 풍요로운 번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해서 이방의 생각을 쫒아가지 못하게 쇄기를 박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임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그런 풍요의 신을 섬겨야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은 그런 종교의 사악한 성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못박아주시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성적인 삶이 보편화되고 인정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이 일곱 번째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간음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있지 않다면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극받지 않으면 훨씬 죄를 덜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주위에는 끊임없는 자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를 정복하고 들어가면 그 중심 자리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요즘의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락의 성품이 문제가 있지만 또한 이 세상의 그런 물결도 문제가 됩니다.
(예화) 덴마크를 여행하고 온 한 사람이 얘기한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16살인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늦은 밤까지 집에서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딸은 엄마에게 둘이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서 자겠다고 하였고 엄마는 잘 자라고 했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놀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고 그 남자친구의 건강검진서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승낙 하에 마음이 맞는 건강한 남자친구와 자는 것이 건전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연실색했다고 합니다.
이런 성적으로 관대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의식을 붙잡고 이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간음한 죄가 우리에게 주는 해악은 엄청납니다.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셨어도 다윗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죄악은 끊임없이 그의 영적인 삶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악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던 아름다운 육체는 죄를 범하면서 고기 덩어리로 변해버렸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빈정거리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육체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간음의 죄만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겠습니까? 모든 죄가 다 우리를 이렇게 만듭니다.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신령한 삶을 방해하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의 영적인 삶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간절하고 엄격하게 말씀하시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 계명의 심각성과 함께 주님이 이 계명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고 깨닫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날 성은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나오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러한 성 개방의 물결에 대항해서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국회에서는 간통죄를 폐기한다고 하고 교회에서조차도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한다는 논의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제는 성이 왜곡되어서 성경에 예언된 것처럼 남성끼리 혹은 여성끼리 함께 부끄러운 일을 행하기도 하고 짐승과 더불어 부끄러운 행위를 하는 성적인 타락이 우리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물결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계명을 자신들의 환경 속에서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이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를 억압하고 세상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 계명을 지키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가정 때문입니다. 주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왕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대해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을 세우실 때는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두 남녀가 단순히 함께 사는 것이 가정은 아닙니다. 사랑 이외의 다른 동기로 결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나의 주인이요 내가 그의 소유라” 하는 남녀의 분명한 고백이 정신적인 결합을 지탱해주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입니다.
그럼 이 문제가 성적인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적인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정신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때의 성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받을 때에는 이미 온 세상이 다 타락해버려서 성을 신을 경배하는 데에 사용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삶을 자신의 소원을 비는 곳에 사용하거나 자신의 성적인 억압을 해방시키는 용도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성의 문제가 가정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이라도 그 시대의 유행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원래의 성을 누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가정에서의 정신적인 결합을 위해서 성행위가 사용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정신적인 결합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성적인 만족만을 위한 부부생활도 엄격하게 보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주시고 그 가정에 이런 성적인 삶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정생활에서의 이러한 성생활은 어떻게 보면 작은 예배와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한 인격에 매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다른 한 사람의 인격과 결합합니다. 나누어진 사람이 성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삶에 문제가 온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와 다르게 성이 사용되는 것을 가정의 파괴로 보고 하나님께서는 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죄를 범 하여 소중한 가정이 파괴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성이 없는 짐승 같은 타락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타락한 가정은 육체적인 타락 이전에 정신적인 결합의 파괴가 먼저 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한 다음에 사실은 이 얘기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고 영적인 간음 행위가 있기 전에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이웃집 여인과 부정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면서 창녀를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영적인 간음행위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사람은 먼저 교회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는 교회에서 눈물 없이는 기도할 수 없었고 기쁨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길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격적으로 드리던 예배가 시시해져버립니다. 이름 없이 주님을 위해 섬기면서 느끼던 기쁨이 이제는 없어집니다. 그렇게 교회에 묻혀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궁상맞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 인생이 좀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세상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을 주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예배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그 속에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 예배 속에서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주님과 혼인한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혼인관계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간음 문제에 대해서 가혹하게 대하지만 우리가 주님 외의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 것을 주님 앞에 회개할 때 주님은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단지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만 만족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랑 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는 여성이 타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은 본인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내나 남편입니다. 한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이혼을 하게 되면 그 상대방도 평생 그 죄를 짊어지고 살게 됩니다. 깨어진 가정으로 이혼을 한 사람이 전도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는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만남도 없이 사역의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두 사람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치유하시지만 그 문제를 치유하는 사람은 그 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범 한 자신과 그 배우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성적인 타락이 있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부부의 결합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부부 중의 한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해서 문제를 일으키면 고통을 받는 사람은 본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부 두 사람이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과 똑같은 마음으로 가정을 떠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기거나 어려움을 느낄 때 성적으로 결합하고 서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두 사람이 인격적으로 맺은 결합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확인시켜 주십니다. 다른 일들과 달리 성적으로는 단 한 사람하고만 맺어지게 하여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막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일입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은 결코 한 여인과 정신적인 결합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적으로 깨끗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은 건강한 가정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깨어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 계명이 인간이 온전히 지키면서 살기에 어려운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죄의 형벌이 주어집니다. 모든 죄 가운데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기까지는 자유 함이 없습니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여러 죄 중에서 특별히 우리가 예민한 죄이므로 죄가 가져다주는 무서움과 비참함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계명의 복음적 의미에 대해서 제시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은 궁극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삶을 살면 좋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 가운데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간음만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지키지 어렵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일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바치며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것으로 삼기로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의 계명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일로 인하여 죄를 범 하였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행을 잘라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악한 유혹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만 우리 마음이 드려져야 합니다. 주일에 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고 헌금 몇 푼하고 돌아가고 나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갱신, 영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마음과 뜻과 성품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드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영적인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시대처럼 우리의 머리를 돌멩이로 쳐서 죽게 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이 죄를 범 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 청년이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유서에는 나는 두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죄를 범에 빠진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율법시대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서 죄를 범 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오래도록 계속 주십니다.
(예화) 통나무가 잔뜩 쌓여있는 도시 변두리의 공사판에서 팔순 노인 한 사람이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담배 한 개비를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목사였는데 그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노인은 바로 당시 감리교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도자는 타락한 후 팔순이 되어도 회복이 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구걸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계명을 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형벌은 무섭고 진지합니다. 다윗은 징계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시 102:6)” 그러나 그 눈물과 고통도 다윗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결혼 전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인해서 결혼 후에도 여전히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년에 죄를 범 한 문제가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않아서 노년에도 그 실패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번에 퇴장시켜 버리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모르지만 악한 세력들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화) 희랍의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지 않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신화 속의 붉은 용과 싸워 이겼고 붉은 용의 붉은 피를 온 몸에 다 맞아서 그 피의 힘으로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등에 붙어 있던 버들잎 때문에 그 부분만 피에 젖지 않아서 그 부위가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 비밀은 그 장수의 부인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장수의 정적이 그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그 정적은 그 장수가 죽지 않으므로 부인은 걱정이 없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인은 망설이다 남편의 약점을 정적에게 말해주었고 남편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정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남편의 약점 부위의 옷에다가 실로 표시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장수의 약점을 알게 된 그 정적은 전쟁 중에 그 부위에 창을 날려 그 장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탄의 세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장 약한 부분을 향해 결정적인 공격을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할 때 대책 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마구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사탄의 세력은 무지하게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세가 밀리면 도망가고 세가 유리하면 다가옵니다. 그리고 화살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겨누어 쏘고 우리가 맞으면 우리는 들것에 실려서 바로 퇴장당합니다. 이 일곱 번째 계명을 범하고 좌절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깊은 고통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열 가지 계명을 모두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깊이 깨달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이런 잘못을 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에게는 가차 없는 형벌만 남아있습니까? 고린도교인에게 사도는 말합니다. “이전에는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한 자였더니” 성적으로 이와 같이 타락한 자였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를 범을 능가하는 위대한 회개로 어두운 영혼 속에 다시 밝은 햇빛을 받으며 찬란한 계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흘러가면 해결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죄는 무덤까지 쫒아갈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죄를 범 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복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가 커지면 이러한 죄를 범 문제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심각한 죄를 범으로 말미암아 혼자의 힘으로는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수양 시설을 갖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풍성한 용서와 자비를 약속하십니다. 위대한 회개가 위대한 신앙인을 만듭니다. 이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길 때 큰 고통과 좌절이 있습니다.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바라보실 때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분명히 해결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주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이미 일어났다면 이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회개하지 않는 자기 갱신의 결핍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계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심각성을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미 죄를 범 한 사람들은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깊은 영적인 삶을 살며 우리의 인생동안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화목하게 하는 자들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십계명강해 (1996.04.21. 주일오전10)
10.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 (신5:19)
녹취자: 김경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제8계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인데, 이 계명을 보면서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은 절도나 혹은 강도나 혹은 다른 사람 몰래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자기의 집으로 가져가는 그런 악질적인 도둑들을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에는 그렇게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 보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도둑질을 하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예화) 저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아버님이 시골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밤에 서울에 올라오시면 올라오시자마자 옷을 벗으셨는데, 속에서 방탄조끼 같은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벗어보면 방탄조끼같이 생긴 것에서 지퍼가 달렸는데 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생각해보니까 가방에 돈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이 위험했고 두 겹으로 방탄조끼처럼 만들어서 앞뒤에 돈다발을 전부 넣어서 마치 구명조끼처럼 만들어서 입고 다니신 것을 여러 해 동안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저 때문인데 그때는 가방에 돈을 넣어오셨습니다. 늘 숭인동에서 택시를 타고 집까지 왔는데 그때는 제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차를 타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전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까 큰 가방의 한 구석이 예리한 면도날로 찢겨지고 거기서 상당수의 돈을 꺼내갔습니다. 그때 저는 낙심하시고 근심하시던 어른들의 표정을 역력히 읽었습니다.
이처럼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전문적으로 도적질하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은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도둑질입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는 거액의 돈을 도적질해가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작게는 아주 작은 돈을 도적질해가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짓을 즐기고 있습니다. 저희 집 바로 위 동네가 산하고 마주 붙어 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잘사는 집이 많습니다. 후딱 하면 사이렌을 불면서 경찰차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도둑이 자주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번창하고 있는 사업 가운데 하나는 이 도둑을 막아주는 사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각종 무인장비를 이용해서 도둑으로부터 도적질 당하는 것으로부터 가정을 지켜주고 재산을 지켜주는 이 일이 성업하는 것만을 보더라도 얼마나 우리 사회에 도적질이 만연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이런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적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살아서 좋은 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이 십계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율법의 최소한의 요약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의해서 정죄 받고 있는 이 죄를 범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칼 들고 누구의 돈을 빼앗아본 적도 없고 남의 재물을 탐하기 위해서 월담을 해본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도적질하지 말라” 이렇게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왜 성경이 “남의 재물을 털어오지 말라” “남의 재물을 너의 집으로 옮겨가지 말라” 아니면 “사람을 위협하여 돈을 빼앗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도적질하지 말라”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정말 도적질 그렇게 이 세상의 법률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이런 도적질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합법을 가장한 도적질과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한 도적질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 터무니없는 이윤을 남겨먹는 것은 모두 다 도적질입니다. 자기가 노력한 대가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받고자하는 이러한 탐심,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도적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가능해지지 않자 이번에는 법의 힘을 빌고 심지어는 이전의 시대에 있었던 그런 재판하는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성경에도 자주 나옵니다. 재판하는 사람들을 매수하고 뇌물로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서 법적인 보호를 합법적으로 받으면서 이런 나쁜 짓을 하고 있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도적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형벌이 이미 도적이라고 못 박은 그것은 이미 최악의 도적질이고 그것보다도 훨씬 더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훨씬 더 잔학한 도적질들이 합법적으로 이 백주 대낮에도 얼마든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부당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이러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부당하게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도적질이라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정당하게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내어서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모든 기대들은 도적질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피해를 받는 사람이 없는 도적질은 비교적 합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 소유권을 행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도적질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적질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때로는 합법을 가장하고 때로는 힘으로 찬탈합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자기에게 옮기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편법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재산을 긁어모으고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빼앗아 옵니다. 합법을 가장한 이런 도적질이 이 나라에서도 횡행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지내면서 모은 돈이 무슨 성질을 가진 돈이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만 다 도적질입니다. 자신의 돈이 아닙니다. 자기의 소유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소유하기를 소원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 실제로 행동에 옮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혹은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서 이익을 누리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을 성경은 오늘 도적질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치나 혹은 그릇된 권력을 가지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재물들을 손에 넣고 이것들을 누리려고 애를 쓰는 모든 것들은 모두 다 도적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것만이 도적질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활하면서 종종 우리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회사의 물건이나 돈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회사가 우리에게 준 차를 우리의 개인의 용도에 사용하는 적은 없습니까? 직장에서 의식 없이 슬쩍 가지고온 수많은 백지 혹은 스테이플러 혹은 여러 가지 문구류 이런 것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도적질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회사가 회사의 일을 하려고 회사에 비치해놓은 것입니다. 왜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빌려오고 돌려주지 않는 것들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도적질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돌려주어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로챌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정당하게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거나 올바른 일을 행하고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그 사람들이 칭찬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으로 우리가 대신 영광을 가로채는 것도 역시 도적질인 것입니다. ‘이 까짓것쯤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의 삶을 도저히 쫒아가지 못하지만 우리 국문학계에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분 밑에서 공부한 제자들이 스승을 늘 기리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은 공과 사가 얼마나 엄격하셨는지 학교 교수연구실에 오른쪽 책상서랍에 그리고 왼쪽 책상서랍에 똑같은 문구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쪽 책상서랍의 문구는 공적인 학교일을 할 때 사용하고, 왼쪽서랍에 있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일을 할 때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쪽 것은 학교에서 공급을 받은 것이고 왼쪽 것은 자기 돈으로 사다가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의미에서 온전해지지 않으면 커다란 의미에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온전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일에서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가 더 큰 것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웃에서 빌려온 물건을 며칠이 지나가도록 혹은 몇 달이 지나가도록 돌려주지 않아서 결국은 이웃도 이사 가버리고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든 작은 것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돈을 꾸고도 갚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런 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도적질인 것입니다. 당연히 돌려줄 의무가 있고 돌려주어야할 기한이 되었고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 빌려올 때는 아주 고맙고 감지덕지 빌려왔지만 빌려오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어서 왠지 이렇게 돈을 갚은 것이 손해보고 억울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마음 이런 것들이 모두 도둑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속에서 이렇게 많은 작은 의미의 도적질들이 우리들 가운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때로는 분명히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할 그 시간에 사람들이 근무지를 이탈해서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고 목욕탕에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도 바로 도적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그 시간에 신실하게 직장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이름의 명예를 걸고 자기를 고용한 회사와 자기를 고용한 직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가 거기를 버려두고 월급을 받는 그 시간에 가서 목욕탕이나 돌아다니고 당구나 치고 차나 마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부단히 도적질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신실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도 매우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자신의 도적질을 합리화시키고 그리고 자신의 도적질을 미화시키거나 혹은 이런 것들을 덮어두기 위해서 더 많은 거짓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계명 뒤에 나오는 그 계명이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영적인 삶의 심각한 피해들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참된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생활해 볼 때 자신의 재물을 매우 아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워낙 알뜰하고 아껴서 교회의 살림을 맡겨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적인 재물을 맡기면 개인이 자신의 재물을 관리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재물을 관리할 때는 그렇게 신실하고 알뜰하던 사람이 공적인 재물을 맡고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재물을 관리하고 사람들과 돈 거래를 하는데 있어서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공적인 재물을 맡기면 안 됩니다. 반드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그렇게 매일 교회의 장부를 검사하고 전표를 세고 하는 것은 사실 목사가 그런 것을 깊이 관여하면 안 돼는 것입니다. 영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몇 억씩 심지어는 십억씩 누군가가 교회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 해먹고 죽이려면 죽이라고 하는데 교회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큰 시험에 든 교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공적인 물질을 다루는 일에 그가 선임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의 작은 도적질도 많이 있습니다.
(예화) 엊그제 한번은 신문을 보니까 공중전화 카드가 있는데 그것만 사기를 해먹은 사람이 걸렸는데 어떻게 해먹었느냐고 하니까 공중전화기 속에 성냥개비를 넣어서 카드를 집어넣으면 나오지 않게끔 만들어서 사람이 간 다음에 핀셋을 가지고 그것을 빼내는데 청량리 일대에서 전문적으로 해서 200장을 뺐답니다. 전화카드가 안 나온다고 청량리 일대에서만 신고가 빗발치듯이 오니까 직원 몇 명이 돌아가면서 잠복근무를 하다가 결국은 붙잡았는데 200장을 빼내서 여태까지 번 돈이 200,000원이랍니다. 그런 사람이 들어가면서 하는 말은 진짜 도둑은 밖에 돌아다닌다고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진짜 도둑놈들은 옥 밖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것도 결국은 도적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도적질, 이렇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도적질,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탐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텔레비전 보는 것을 절제해야할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유익을 절대 주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보았으면 TV를 치워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제일 큰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번에 빛과 소금에서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만 광고입니다. 광고를 잘 들여다보면 광고의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어떤 상황에 처하면 자기네 제품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골이 아프면 저절로 진통제이름이 떠오릅니다. 그 정도가 되려면 광고비를 물 붓듯이 부어서 6개월 정도를 때려야지만 그것이 박힌답니다. 그렇게 박히게 만들어놓으면 어떤 효과가 나오느냐하면 광고를 자꾸 들여다보면 그 광고가 우리에게 뭐라고 하느냐하면 ‘너 이것 있어?’ ‘없어?’ ‘없으면 인간도 아니야!’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는데 광고를 계속 들으니까 그것을 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 하면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살아가는 그 삶이 한없이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가지가 아니라 수천, 수만 종류의 상품들을 선전하고 그 다음에 서비스들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빗발치듯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는 간단합니다. 목표는 특히 화장품 선전하는 목표는 너무 간단합니다. “너 이것 발라?” “아니!” “너는 인간도 아니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어느 립스틱은 단숨에 똑같은 색깔이 2,200,000개가 팔렸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들을 구워삶아서 그것을 바르지 않으면 인간 이하인 것처럼 세뇌를 해서 사게끔 만들겠습니까? 작은 거니까 그렇습니다. 큰 것은 더 큰 것을 선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하고 갖고 싶게끔 자꾸 자극하며 만듭니다. 미친 듯이 새로운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승용차도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옛날차가 그렇게 보기 싫을 수 없고 한참 세월이 흐르면 그 안에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후져 보일 수가 없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참 세련돼 보이던 사람이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광고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상품에 대한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상품에 대한 구매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욕망을 부추기고 거기에 타락한 인간의 욕망은 놀아나면서 우리의 욕망이 더 불꽃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그리하여서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더 많은 서비스를 받기위해서 그들은 더욱 더 욕심을 내게 됩니다.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쓸 것을 조달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쓸 것을 공급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잘못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야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도적질의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실로 오늘날 이것은 너무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이 물질적인 가치가 최고인 것처럼 그렇게 선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재화를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칩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범위 안에서 비교적 그런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야 무엇이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부를 탐하게 되고 그런 욕망의 충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을 훨씬 능가하는 부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도 편지가 수없이 옵니다. 저는 혹시 저에게 온 편지가 다른 우체통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이틀에 한 번씩 전에 살던 집에도 가보고 우리 집에도 골고루 우체통을 다 뒤져봅니다. 그런데 몇 집 모여 살지도 않는 그 집에 우체통에 가져가지도 않는 신용카드 대금 청구서가 한주먹씩 쌓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은 전보가 날아온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니까 당신이 사기혐의로 고발되었으니까 빨리 연락하라고 하는데 뜯어진 봉투를 보니까 200만원, 300만원 대책 없이 카드를 마구 써서 결국은 적색고객으로 등록되고 형사고발까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무절제한 모든 삶은 결국은 탐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극을 받지 않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TV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극받지 않으면 그래도 좀 낫습니다. 여러분, 기도원에 일주일 동안 가만히 가서 더욱 금식까지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욕망이 없어집니다. 욕망이라야 가끔 밥이나 한상 먹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금식기도 가운데 솟아나지 그 밖의 욕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자극받지 않으면 그래도 좀 낫습니다. 구정물을 휘저으면 더 더러워지듯이 가만히 내버려두면 좀 낫습니다. 궁극적인 선한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극을 받지 않으면 좀 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극을 받습니다. 자극을 어떻게 받느냐하면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이렇게 추레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구나!’ ‘누구는 80,000원짜리 파마를 했다는데 나는 동네에서 25,000원 그것도 5,000원 깎아달라고 통 사정을 해서 했는데!’ 이러면서 자꾸 비교의식을 갖게 됩니다. 젊은 청년들이 만나서 나누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스카프를 얼마주고 샀느냐? 반지는 얼마짜리냐? 머리는 어디서 했느냐? 옷은 멋있어 보이는데 어디 것이니? 이런 것이 대화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속에서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고 자꾸 우리의 욕망이 자꾸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화) 한번은 우리가 인천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안양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있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정말 멀기는 멀었습니다. 하루에 6시간정도 차를 타고 다녔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하시더니 “전도사님 아무래도 차를 하나 사야겠군요!” “아이고 교인이 500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도 없는 자가용을 제가 어떻게 타고 다닙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바쁘게 다니시려면 차가 중고라도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고 나신 다음부터 길거리에 나가니까 무엇만 눈에 들어오느냐 하면 차만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트럭은 눈에 안 들어오고 “저차는 내 능력에는 부치고 저차는 괜찮겠는데 얼마나 갈까? 유지비는 얼마나 들까?” 그러면서 그 순간부터 차가 계속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중고차를 샀습니다. 그 다음부터 여태까지 차를 놓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망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나다니다가 혹은 무엇을 보다가 사고 싶다는 마음의 도장이 찍히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것이 광고의 목표입니다. 때로는 능력이 모자라서 도전을 못할 때는 있지만 그러나 가능성만 있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런 소유를 향한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이 부분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들이 살아가다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니까 하나님 앞에 달라고 그래라” 그러지 않고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자족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모자라고 불편한데도 족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번영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축복을 한없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그런 사람의 삶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바라볼 때 그것이 정말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많은 은혜와 능력을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무엇이라고 말하느냐하면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궁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 데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 내가 이 정도면 정말 족합니다.” 하는 이런 지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욕망에 불타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개 직장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챙기거나 해서 커다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경건에 커다란 유익이 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결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이 물질을 과다하게 소유하고 소비하며 살려고 하는 이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합니다.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순결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경건에 심각한 방해가 되는지를 한번 우리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몸부림이 있어서 그래서 그것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잘못된 욕망이 속에서 불타오르고 그래서 급기야는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까지도 손에 넣어보려고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은혜를 충만히 받고나면 그 다음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 이대로 충분합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한 삶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만족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인간사회에서 불법을 제하고 그리고 도적질당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사람들의 눈물을 씻겨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더 지나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것을 자기의 부를 쌓으려 하면,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고나면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도 그 욕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결국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보더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고 싶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속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면 “하나님 자리를 나랑 바꿉시다.” 이렇게까지 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고도 인간은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화) UN본부 건물을 기증한 사람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 재벌인 록펠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올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작년보다 조금 더” 그 다음에 또 물어봅니다. “내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올해보다 조금 더” 죽을 때까지 그 소리입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부를 모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하루가 행복하려거든 이발을 하십시오. 그리고 일주일이 행복하려거든 (그것도 스토리가 이상한데) 결혼을 하십시오.” 장가를 들면 일주일 동안은 행복한 모양입니다. “한 달을 행복하시려거든 집을 사십시오. 일 년이 행복하려거든 말을 사십시오.” 그러니까 집에 단칸방에서 그냥 보따리 싸들고 이사를 다니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집을 마련해서 17평형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한없이 멀어 보이는 것입니다. 몇 걸음을 다가가도 끝이 나지 않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잠시 6개월 정도 살고나면 좁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큰 집으로, 더 큰 집으로, 더 큰 집으로. 누가 그럽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채워지겠는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기의 육신을 위한 이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위한 신령한 욕망은 반비례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신의 육신을 위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망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그 충만해져가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신령한 욕망을 점점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이면서 헌금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가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는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보다 재산은 두 배가 많은데 우리보다 욕망은 세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보다 더 가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맞습니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길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 부유하게 사는 길은 돈을 벌어서 부유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욕망의 수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유해집니다. 정말 부유하게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잘사는데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물질로 인해서 더 많이 고통 받고 마음의 자유로움이 없습니다. 왜? 물질은 우리보다 두 배로 많은데 욕망은 세배, 네 배 많으니까 우리보다 절반도 못사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책에서 보니까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이든지 물건을 살 때는 그 자리에서 1분 이상 기도를 해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즉각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꼭 사야하는지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남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 것부터 하고 보라는데 빚을 내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물질이 남아야합니다. 그러면 언제 물질이 남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왕창 벌면 남겠다고 생각하는데 안 남습니다. 왕창 벌면 욕망이 왕창 늘어납니다. 신앙에 의해서 고삐가 잡히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욕망은 가히 무한대입니다. 솟아나는 것입니다. 한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넉넉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분지족하는 삶의 지혜를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순결한 삶을 얻을 수 있고 갑자기 우리의 재물에 여분이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와줄 수 있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고 이런 삶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순결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결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이 문제를 반드시 넘어서야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에 물질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도 여러분의 물질을 너무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의 불신앙 속과 염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질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인해서 마음 상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인해서는 왜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질에 대해서 그런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상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마음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새로운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돈을 이렇게 만질 때 그 느낌이 언제나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어야합니다. 지갑에 들어와도 그렇게 대견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나가도 그렇게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변화된 삶을 우리가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이 많고 물질이 많은 사람들만 그렇게 탐욕에 가득한 삶을 사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대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물질에 대해서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범하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합니다. 우리는 순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 문제에 있어서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아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집회에 나가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불고 회개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랬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의 회개는 믿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서 다시 태어나면 우리가 물질에 대한 이런 사랑, 물질에 대한 이런 탐심 때문에 죄를 범 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수많은 부분들을 이 세상의 마귀가 가져다주는 염려와 근심으로 할퀴고 찢긴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염려의 가시나무와 근심의 엉겅퀴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한없이 돋아나서 하나님을 찬양할 노래를 깃들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이 황폐하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적은 사람은 적은 사람대로 많은 사람은 많은 사람대로 한없이 고통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정말 깨끗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들 마음대로 누리며 1/10만 교회에 내고나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자기의 영혼도 팔아먹고 자기의 인생도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얼마가 주어지든지 이것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관리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품속에 들어갈 때도 감격할 필요가 없고 나갈 때도 아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올바른 방법으로 들어오고 올바른 방법으로 나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입에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누리고 그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이 세상에 말하자면 자디잔 부자들은 자기의 그런 힘으로 되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물질이 많으면서도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낭비가 몸에 밴 사람들은 결코 영력 있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가난을 아주 깊은 친구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갔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가난 속에서 영적인 능력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족한 것이 없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정말 영적인 삶을 능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결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이런 8번째 계명에 대해서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물질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그 안에서 누리는 보다 크고 넘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물질의 문제로 인해서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고 그러는 삶을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너에게 주고 그 피로 너희를 값 주고 샀건만 너희가 어찌하여 물질의 문제를 인하여서 나를 멀리하고 나에 대해서 상한 마음을 잃어버릴까?’ 이런 마음을 우리는 돌아보아야합니다.
(예화) 저 같은 사람이야 바라만 볼뿐이지 그런 사람 흉내를 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준 은사 가운데 한분이신데 참 탁월한 삶을 사셨습니다. 한 교회를 42년간 목회를 하시고 난 다음에 물러갈 때 교회에서 커다란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 분쟁이 무엇이냐 하면 교인이 5,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다가 목사님이 거기에 오셔서 42년을 목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젊은 시절에 와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신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준 사람을 자기 손으로 다시 장로 장립을 시켰다고 하니까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목사님이 떠나시는데 장로님들이 서로 의논을 하다가 목사님이 40여 년 동안을 근무하셨는데 세상에서 42년을 근무하면 몇 억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에게 퇴직금을 드리고, 원로목사님으로 추대하고, 그리고 45평 아파트를 사드리자고 했답니다. 그때가 7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아마 그때 당시로는 꽤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나서 펄쩍 뛰면서 “왜 내 인생에 마지막 가는 목양의 길을 이렇게 부끄럽게 하느냐고 하면서 내 자식들이 다 잘사니까 또 나를 모시려고 하니까 나는 아들네 집에 가서 늙은이 둘이서 못살겠느냐? 곁방 하나 쓰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지 이 늙은이가 45평 아파트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받을 수 없다.” 목사님이 딱 잘라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교회에서는 커다란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이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나중에 장로님들이 그랬습니다. “목사님은 우리교회에서 42여년을 사역하시다가 사택 하나도 없이 무일푼으로 퇴직하셨다하면 목사님의 이름은 아마 한국교회에 길이길이 귀감이 되겠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박사가 수십 명이고 교회예산이 몇 십억이나 되는 그 큰 5000여명이 모이는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교회가 42년 동안을 목자를 부려먹고 마지막에는 노후의 대책도 제대로 안 세워주고 내보내서 아들네 집 곁방을 쓰게 살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교회가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 착한 목사님이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도 듣고 보니 그럴 법합니다. 목사님이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마지막 어느 날 장로들을 소집해서 내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15평이면 받겠다. 교회의 명예를 생각해서 15평 미만이면 받겠다고 했더니 장로님들이 “그러지 말고 목사님 좀 더 쓰십시오. 32평만 해주십시오.” 그렇게 사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32평은 가지 못한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사정하고 애원을 해서 결국은 협의를 보았는데 20평형 아파트인가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던 날 교인들이 목사님 댁에 들러서 사택의 짐을 옮기는데 교인들이 다 울었답니다. 왜 울었느냐하면 40여년을 5,000명이 넘는 교회가 되도록 목회를 하셨는데 이사 가는 날 보니까 그 집안에서 가장 커다란 가구가 40년 전에 그 교회에 이사 오실 때 가지고 왔던 일제 철제 캐비닛 그것이 그 집안에서 가장 값나가는 가구였다는 것입니다. 다 일제 강점기 때에 그런 청빈한 삶을 살도록 강조했던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고 또 그런 목사님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신앙생활을 한 덕택에 그런 삶을 살아서 우리 후학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뒤를 발뒤꿈치도 못 쫒아가지만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본성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마치 영원히 살 사람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주께서 부르실 때 곧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마음을 하나님께만 향하고 사는 이런 삶, 이런 삶이 바로 8번째 계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임을 오늘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계명강해 (1996.04.28. 주일오전11)
11.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신5:20)
녹취자: 백지영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증거하지 말라” 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회가 정치와 그리고 신앙이 일치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종교적인 법이 따로 있고 또 세상을 살아가고 나라를 다스려가는 나라의 법이 따로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종교의 법이 곧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그 법이 곧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 하는 이 성경이었고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죄를 범이 일어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성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잘못된 악이나 혹은 부패한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어떻게 재판하고 다스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율법에 지루할 정도로 상세히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때에 이제 누군가가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죄인을 불러다가 형벌을 주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만큼은 정말 공정한 재판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백 명의 죄인을 놓아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벌주지 말아야 한다는 이런 사법의 원리는 성경에서부터 그 정신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자가 잘못 형벌을 받고 또 재산상의 피해를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굳게 하는 일로 생각하셔서 이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 것을 여러 번 못 박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아홉 번째 계명은 일차적으로는 법정에 관계된 계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증거라고 하는 것은 법정에서의 증거를 우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때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산 사람을 사형시키기 위해서 삼심제도를 거치는가 하면 수사기관들이 동원돼서 그 사람이 죄를 범한 모든 증거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지루할 정도로 긴 검사의 논고와 그리고 변호인의 변론과 반대심문과 인정심문과 그리고 과학적인 수사의 기록들을 증거로 제출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끝에 한 사람이 사형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는 그 죄를 범 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준비하고 그 증거를 재판장에게 내어 미는 일들이 재판에 대한 한 효력을 가져왔고 또 판결을 좌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물증이 없이 목격자만 있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바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증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두세 증인이 저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면 그 사람의 생명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비인도적이고 전횡적인 여호와의 법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이 율법을 어긴 자를 처벌함에 있어서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서 한 사람의 생명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실 수 있도록 법을 만드셨다고 하는 이 의미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얼마나 믿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고 진실만을 말하면서 사는 신실한 백성인가 하는 것을 먼저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법정에 관계된 증인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충격적인 사실,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도 한 사람의 생명을 재판장이 그 생명을 멸하는 판결도 내리실 수 있도록 그렇게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 교회 안에서는 이 세상과는 다른 그런 신실한 믿음들이 그 하나님의 백성 상호간에 유지되어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거짓말과 사기와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이말 저말을 뒤집고 이렇게 저렇게 변명을 하며 사람들이 거짓을 밥 먹듯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는 그런 윤리가 통용 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그것을 말할 때 그 백성들끼리는 신실하게 믿어주고 그리고 그 믿어주는 믿음에 부응하는 삶을 공동체가 살아가는 이런 세상의 윤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윤리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통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을 다해서 신실하게 살고 그리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과 율법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계시록에 넘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 가운데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함께 정죄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시록이 보는 거짓말 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종교적인 삶만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시고 우리의 생각하는 모든 삶들을 다 감찰하시기 때문에, 바로 거짓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입술로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피고로 끌려온 한 사람의 죄를 범을 입증하는 두세 사람의 증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들을 믿어주고, 그 증언을 기초로 이 사람을 정죄하고 재판해도 결코 그 재판에 하자가 있거나 후에 그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만한 일이 없는 이러한 삶, 목격한 것은 분명히 목격하였다고 말하고, 그리고 보지 못한 것들은 분명히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증인들이 비록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라도 그렇게 진실만을 말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서로를 믿지 못하면, 불신들이 생겨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오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말의 권위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말을 서로 믿어줄 수 없는 사회에서 선지자의 말을 어떻게 믿어줄 수가 있겠으며,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 증언하므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죄 없이 죽어가거나 형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피값을 증인에게 찾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법치주의라고 하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매수와 협박과 공갈과 이런 것들을 통해서 위증을 하고, 그리고 사악한 위증을 통해서 불법한 자들이 재판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이러한 잘못된 현실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바로 십계명을 범하고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사악한 이 세상의 풍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말씀과 그 법도를 따라서 우리는 올바로 정직하게 이 세상에서 의(義)와 신(信)과 그리고 화평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정에서 위증을 하는 것처럼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법정에서 이 아홉 번째 계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계명이고, 이 아홉 번째 계명을 특별히 법정에서 준수하여야 된다고 말할 때, 이 아홉 번째 계명만큼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계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개인적으로 재판을 받아본 적도 없고 해본적도 없고 또 재판을 위해서 증인이 되어본 적도 없고 위증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상당수는 아마 한 번도 재판정에 서본 적이 없이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아홉 번째 계명의 의미는 단지 법복을 입은 재판관이 있고 그리고 죄지은 채 수갑을 차고 재판장 앞에 있는 죄수가 있고 그리고 추상같은 논고로 피고를 겁주는 검사의 논고가 있고 그리고 그들을 변호하려고 돈 받고 애쓰는 변호사가 있는 이런 세상적인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느 청년이 사용하고 있는 어디선가 찬송가를 이렇게 열어보았습니다. 찬송가 첫 페이지에 자신의 친필로 그 찬송가 하단에다가 뭔가를 써놓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충격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하는 세상의 법정에 서 있는 증인이다. 내가 일평생 목숨을 다해 주님의 누명을 벗겨 드리리라.”
여러분, 이 세상은 바로 법정과 같습니다. 보다 큰 법정은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이 세상의 이 법정에 증인으로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각자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지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법정에서 피고처럼 서 계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법정에 서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그럴 권한이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의 법정에 세우고 재판장처럼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결이 얼토당토 않는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재판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각 사람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판결하는 그 판결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귀의 자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은 즉시 자기가 그 이 세상의 법정에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식으로 판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줍지 않은 법복을 벗고 피고인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법정에 앉혀드리고 자신들이 그 재판장이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일들이 이 세상의 법정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판장에 서시는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증인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이미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그 사람에 의하여 이 세상의 법정에 죄수처럼 서시고, 이 사람이 생각을 합니다. “이천 년 전에 나무에 달려 죽은 이 예수 그리스도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이 사람을 믿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재판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 앞에 유일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그가 얼마나 지금 재판장의 자리에 서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재판하고 있는 이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친히 목격했고 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야말로 죄 없으신 분이며, 그분이야말로 당신이 믿어야 할 분이며, 그분이 오히려 당신의 재판장이 되실 것이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의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로, 이 세상의 어리석은 육신의 지혜로 그리스도 예수를 판단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판단할 때에 그 사람들은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기로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잘못된 증인이 선 율법의 재판장에서는 한 번의 잘못된 증언을 통해서 한 사람의 육신적인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이제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복음의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증거 하지 아니한다면, 혹은 증거 해야 할 이 의무를 기피한다면, 이제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의 생명도 앗아가는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증언한 사람들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면, 만약에 증거 하지 않거나 잘못된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리지 않음으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을 받아서 죽어간다면, 그의 잘못된 증인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큰 법정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큰 법정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릴 때, 그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감히 판단하고 재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네 이웃을 위하여 거짓증거를 하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도 우리는 종종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잘못해서 이 사람을 벌주어야 할 텐데 물증도 충분하지 않고, 결정적인 증인이 필요한데 증인들은 끝까지 법정에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살인사건에 대해서 법정에 와서 증언을 하던 사람이 법원 정문 앞에서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는 이제 폭력 사건에 대해서 증인을 서려고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서 증언을 하면 끝까지 보호해 준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끝까지 그를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벌을 받고 죽어간 사람은 그 증인의 증언만 아니었으면 요행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증인을 죽도록 증오하고 조직원 중에 누구를 시켜서 그 사람을 살해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께서 피고로 묶여 있는 세상의 법정에서도 이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하게 증거 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우리는 수시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무죄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으며 살아가야 하고, 이 세상의 백성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자유와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하고자 할 때에 세상은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예수를 올바로 증거 하는 삶을 살기를 포기할 때 세상에서는 박해도 없고 시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말로 증거 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튀는 존재들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주목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동족에게, 이방인에게, 유대인에게, 헬라인에게 간교를 당하고 시련과 박해를 당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 동족을 위해서 무슨 나쁜 일을 행했습니까? 그는 쉼 없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백성들과 이방인을 구원할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이 세상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열망에 불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바울을 처음으로 만나서 바울에게 주셨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증인과 사환으로, 사환과 증인으로 너를 삼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나주신 바울을 위해 주신 첫 번째 사명은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투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적인 이념의 투쟁자가 아니라, 셀롯 당원들과 같이 열심당원들과 같이 그렇게 무장하고 봉기하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을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바울에게 맡겨주신 사명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그의 관심은 이 세상 나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나, 이방인들이 또 유대를 다스리는 것이나, 이런 것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뇌물을 먹여서 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이 되는 이런 세속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자유인에게나 종에나 공당에서나 회당에서나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시장 어귀에서나, 그는 거리낌이 없이 기회 있을 때마다 법정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거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고 증거 하는 세상의 법정의 증인석에 선 그 바울의 말을 통해서 세상이 바울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가 사도 바울이 증언하는 것처럼 진실로 그가 바로 우리의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그의 증언을 받고 감동받은 사람들은 바울을 존경하고 아버지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증인을 향하여 돌을 들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증거를 마음속에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법정에서 때로는 박해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옳은 일을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세상의 법정에 서있는 증인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이 증인의 석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건을 본 사람들은 반드시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피고석에 세우고 그를 판단하고 재판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용감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보았거니와, 그래서 우리가 증인이 되었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으신 분이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지금 이 시간에 그리스도 예수께 무릎을 꿇고 당신의 죄를 고백하여야 옳다고 우리는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증거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는 삶을 통해서도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이 세상에 증거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 삶 자체가 증인석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표적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법원에서 있었던 비화를 방송하는 가운데 택시 강도를 하고도 무죄를 선고받았던 한 사람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비록 택시강도를 해서 사람의 금품을 빼앗았지만 평소에 그가 어떻게 자기의 부모를 정성껏 모신 그런 착하고 효성스런 삶을 살았는가 하는 이웃의 증언이 재판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피고의 고백과 그리고 증인의 간절하고 목 메이는 증언을 들은 재판장이 하염없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습니다. 재판장이 그 정도 감동받으면 재판장도 인간이니까 그 마음이 엄청나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여러 번 드나들었던 사람은 누구한테 재판이 걸렸느냐 이것을 보면 전략을 대개 안다고 합니다. 그 판사는 눈물만 보이면 하여튼 감형이다 하여튼 구형보다 훨씬 더 감해준다, 그래서 그 판사는 눈물에 약한 사람이니까 눈물을 보여라, 또 어떤 판사는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을 잘해야지만 기분이 좋아서 감형을 준다, 하여튼 등등의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판사가 이 증인의 그 증언을 들으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서 피고가 자기의 최후진술을 말할 때 이 재판장이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사상 유래가 없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그리스도 예수를 눈물로 증거 해주는 삶이 될 때 그때에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감히 죄 있다고 정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세상의 법정에서 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저희의 말”, 제자들의 말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믿어줄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대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처럼 세상의 법정에 서서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증거를 써가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법정에 등장했는데 이 피고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니까 이 말 했다가 저 말 했다가 앞뒤가 안 맞고 횡설수설하게 증언을 한다면, 그 사람의 증언을 듣고 그 피고를 무죄 석방할 재판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이런 삶이 돼서는 안 됩니다. 어떤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같고, 어떤 때 또 삶을 보면 전혀 하나님을 안 믿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참된 구원이심을 믿는 것 같다가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구주이시고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관되지 못한 증인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깊이 회개하고 우리가 이 세상의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증거 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명을 쓰고 이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누명을 벗겨드려서 밝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누명이 벗겨졌습니까?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일주일 동안의 삶과 그리고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과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나서 재판을 하던 사람이 오히려 재판정에 내려와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왔는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증인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해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두세 증인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잘못 판결하게 하여서 앗아가게 만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았다면, 오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늘 우리를 이 세상의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주시고 기꺼이 당신께서 피고가 되어주셔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법정에서 당신을 향한 태도를 결정하게 만들어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더더욱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올바로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증거가 거짓된 증거가 된다면 우리는 증거 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욱 더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바로 잘못된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잘못된 인간의 지혜와 생각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 거짓 증거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이 잘못된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과 그리고 이교의 증거를 추종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거짓증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거짓증거한 자와 그 거짓증거를 따른 모든 자들을 죄 없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보면 우리로부터는 거리가 한참 먼 것 같은 이 아홉 번째의 계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들이 이 아홉 번째 계명을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의 법정에 서 있는 증인들인 것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이 세상의 법정에 증인으로 선 우리들이 변함없이 일관되게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증거 해서 그리스도 예수로 이 세상에 구주되심이 드러나게끔 해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12. 탐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 5:21)
녹취자: 이배훈
우리는 이제 일곱 번째 계명으로 왔습니다. 지지난 시간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들었고 지난 시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계명은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에서는 열 개의 계명 가운데서 가장 크게 와 닿는 계명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문제에서 많은 교훈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옛날에 성경이 기록되었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기록된 15세기 당시에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독특한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여행하면서 경험했던 모든 종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 생활 중심부에 간음의 문제가 들어와서 자신의 신들에게 경배하면서 성적인 환락을 즐기는 일이 권장되었습니다.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너그럽고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많이 노출되어 있고 자유롭습니다. 새삼스럽게 간음하지 말라 혹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고 간음했다고 하는 얘기는 성경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삶 속에서는 여기에 대한 경계심이 이미 무너져버렸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수많은 광고는 성적으로 묘사되고 성행위를 흉내내어 사람들의 성감대를 자극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습니다. 실로 탄복할 정도로 인간 깊은 곳의 잠재적인 성의 심리를 자극해서 물건을 구매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기법이 광고에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문화가 개방되고 성적인 삶이 자유로워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들으면서,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려웠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 계명이 어렵고 낯선 것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시 모든 나라와 모든 종교에서 통용되고 있던 성적인 관대함에 대해서 쇄기를 박으면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등의 계명은 하나님께 어울리는 계명 같아 보입니다. 간음을 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재산적인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닙니다. 간음처럼 인간적인 은밀한 관계에까지 하나님께서 내놓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말초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셔서 너희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누구든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오늘날 서울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서울의 거리에는 피 묻은 돌멩이와 돌에 맞아 죽은 수많은 시체들이 즐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토록 엄격하고 단호하게 이 죄악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깃들이는 것이 안 된다고 못 박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든 종교와 사회가 관대했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이런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 사이의 신앙은 풍요신앙이었습니다. 원주민의 사회는 농경 문화였고 그 시대의 최고의 가치는 풍요로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땅에서 수확되는 수많은 곡식과 열매가 농경사회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고 거룩하게 보존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남아있는 잘못된 사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쇄기를 박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풍요신앙 뒤에는 여성이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출토되는 바알종교, 아세라종교 등의 이방종교의 신상들은 대개 젖가슴이 크고 몸집이 풍만한 여성상입니다. 그것은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아이를 많이 낳고, 낳은 아이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을 가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풍요를 상징합니다. 풍요로운 번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해서 이방의 생각을 쫒아가지 못하게 쇄기를 박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그런 풍요의 신을 섬겨야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들은 그런 종교의 사악한 성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못박아주시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성적인 삶이 보편화되고 인정되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이 일곱 번째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간음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있지 않다면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극받지 않으면 훨씬 죄를 덜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주위에는 끊임없는 자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를 정복하고 들어가면 그 중심 자리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요즘의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락의 성품이 문제가 있지만 또한 이 세상의 그런 물결도 문제가 됩니다.
(예화) 덴마크를 여행하고 온 한 사람이 얘기한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16살인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늦은 밤까지 집에서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딸은 엄마에게 둘이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서 자겠다고 하였고 엄마는 잘 자라고 했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놀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고 그 남자친구의 건강검진서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승낙 하에 마음이 맞는 건강한 남자 친구와 자는 것이 건전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연실색했다고 합니다.
이런 성적으로 관대한 세상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의식을 붙잡고 이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간음한 죄가 우리에게 주는 해악은 엄청납니다.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용서하셨어도 다윗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죄악은 끊임없이 그의 영적인 삶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악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던 아름다운 육체는 죄를 범하면서 고기 덩어리로 변해버렸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휘청거리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육체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간음의 죄만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겠습니까? 모든 죄가 다 우리를 이렇게 만듭니다. 간음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의 신령한 삶을 방해하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의 영적인 삶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간절하고 엄격하게 말씀하시는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 계명의 심각성과 함께 주님이 이 계명을 주신 이유를 살펴보고 깨닫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힘의 원천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날 성은 상품화되어 있습니다.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나오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미 상품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이러한 성 개방의 물결에 대항해서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국회에서는 간통죄를 폐기한다고 하고 교회에서조차도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자유로워져야한다는 논의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제는 성이 왜곡되어서 성경에 예언된 것처럼 남성끼리 혹은 여성끼리 함께 부끄러운 일을 행하기도 하고 짐승과 더불어 부끄러운 행위를 하는 성적인 타락이 우리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물결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계명을 자신들의 환경 속에서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듯이, 오늘 우리도 이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를 억압하고 세상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 계명을 지키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가정 때문입니다. 주님이 직접 세우신 제도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왕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대해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을 세우실 때는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두 남녀가 단순히 함께 사는 것이 가정은 아닙니다. 사랑 이외의 다른 동기로 결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는 나의 주인이요 내가 그의 소유라” 하는 남녀의 분명한 고백이 정신적인 결합을 지탱해주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입니다.
그럼 이 문제가 성적인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성적인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정신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 때의 성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받을 때에는 이미 온 세상이 다 타락해버려서 성을 신을 경배하는 데에 사용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인 삶을 자신의 소원을 비는 곳에 사용하거나 자신의 성적인 억압을 해방시키는 용도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성의 문제가 가정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만이라도 그 시대의 유행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원래의 성을 누리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정신적인 결합을 위해서 성행위가 사용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정신적인 결합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성적인 만족만을 위한 부부생활도 엄격하게 보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주시고 그 가정에 이런 성적인 삶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성적인 결합을 통해서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어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하게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정생활에서의 이러한 성생활은 어떻게 보면 작은 예배와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 사람이 한 인격에 매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다른 한 사람의 인격과 결합합니다. 나누어진 사람이 성적인 행위를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삶에 문제가 온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와 다르게 성이 사용되는 것을 가정의 파괴로 보고 하나님께서는 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죄를 범하여 소중한 가정이 파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성이 없는 짐승 같은 타락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타락한 가정은 육체적인 타락 이전에 정신적인 결합의 파괴가 먼저 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한 다음에 사실은 이 얘기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고 영적인 간음 행위가 있기 전에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이웃집 여인과 부정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면서 창녀를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영적인 간음행위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사람은 먼저 교회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때는 교회에서 눈물 없이는 기도할 수 없었고 기쁨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길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격적으로 드리던 예배가 시시해져버립니다. 이름 없이 주님을 위해 섬기면서 느끼던 기쁨이 이제는 없어집니다. 그렇게 교회에 묻혀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궁상맞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 인생이 좀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세상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을 주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예배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그 속에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 예배 속에서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주님과 혼인한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혼인관계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간음 문제에 대해서 가혹하게 대하지만 우리가 주님 외의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 것을 주님 앞에 회개할 때 주님은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단지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만 만족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랑 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충만하게 될 때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는 여성이 타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은 본인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내나 남편입니다. 한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이혼을 하게 되면 그 상대방도 평생 그 죄를 짊어지고 살게 됩니다. 깨어진 가정으로 이혼을 한 사람이 전도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는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분명한 만남도 없이 사역의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두 사람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치유하시지만 그 문제를 치유하는 사람은 그 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죄를 범한 자신과 그 배우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성적인 타락이 있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부부의 결합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부부 중의 한 사람이 성적으로 타락해서 문제를 일으키면 고통을 받는 사람은 본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부 두 사람이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과 똑같은 마음으로 가정을 떠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기거나 어려움을 느낄 때 성적으로 결합하고 서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두 사람이 인격적으로 맺은 결합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확인시켜 주십니다. 다른 일들과 달리 성적으로는 단 한 사람하고만 맺어지게 하여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막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일입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은 결코 한 여인과 정신적인 결합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적으로 깨끗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은 건강한 가정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깨어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 계명이 인간이 온전히 지키면서 살기에 어려운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죄의 형벌이 주어집니다. 모든 죄 가운데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기까지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여러 죄 중에서 특별히 우리가 예민한 죄이므로 죄가 가져다주는 무서움과 비참함을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계명의 복음적 의미에 대해서 제시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은 궁극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삶을 살면 좋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 가운데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간음만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지키지 어렵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일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바치며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것으로 삼기로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의 계명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일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행을 잘라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악한 유혹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만 우리 마음이 드려져야 합니다. 주일에 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고 헌금 몇 푼하고 돌아가고 나의 종교는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갱신, 영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마음과 뜻과 성품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드렸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영적인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시대처럼 우리의 머리를 돌멩이로 쳐서 죽게 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이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 청년이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유서에는 나는 두 사람을 다 사랑한다고 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죄를 범에 빠진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율법시대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오래도록 계속 주십니다.
(예화) 통나무가 잔뜩 쌓여있는 도시 변두리의 공사판에서 팔순 노인 한 사람이 두 손을 덜덜 떨면서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담배 한 개비를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목사였는데 그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노인은 바로 당시 감리교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도자는 타락한 후 팔순이 되어도 회복이 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구걸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계명을 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형벌은 무섭고 진지합니다. 다윗은 징계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시 102:6) 그러나 그 눈물과 고통도 다윗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결혼 전의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인해서 결혼 후에도 여전히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년에 죄를 범한 문제가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않아서 노년에도 그 실패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인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번에 퇴장시켜 버리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모르지만 악한 세력들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화) 희랍의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지 않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신화 속의 붉은 용과 싸워 이겼고 붉은 용의 붉은 피를 온 몸에 다 맞아서 그 피의 힘으로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등에 붙어 있던 버들잎 때문에 그 부분만 피에 젖지 않아서 그 부위가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 비밀은 그 장수의 부인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장수의 정적이 그 부인을 찾아왔습니다. 그 정적은 그 장수가 죽지 않으므로 부인은 걱정이 없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인은 망설이다 남편의 약점을 정적에게 말해주었고 남편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정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남편의 약점 부위의 옷에다가 실로 표시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장수의 약점을 알게 된 그 정적은 전쟁 중에 그 부위에 창을 날려 그 장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탄의 세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장 약한 부분을 향해 결정적인 공격을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할 때 대책 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마구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사탄의 세력은 무지하게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세가 밀리면 도망가고 세가 유리하면 다가옵니다. 그리고 화살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겨누어 쏘고 우리가 맞으면 우리는 들것에 실려서 바로 퇴장당합니다. 이 일곱 번째 계명을 범하고 좌절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깊은 고통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열 가지 계명을 모두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깊이 깨달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이런 잘못을 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가차 없는 형벌만 남아있습니까? 고린도교인에게 사도는 말합니다. “이전에는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한 자였더니” 성적으로 이와 같이 타락한 자였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를 범을 능가하는 위대한 회개로 어두운 영혼 속에 다시 밝은 햇빛을 받으며 찬란한 계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흘러가면 해결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죄는 무덤까지 쫒아갈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죄를 범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회복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가 커지면 이러한 죄를 범 문제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심각한 죄를 범으로 말미암아 혼자의 힘으로는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수양 시설을 갖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교회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풍성한 용서와 자비를 약속하십니다. 위대한 회개가 위대한 신앙인을 만듭니다. 이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길 때 큰 고통과 좌절이 있습니다. 완전하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바라보실 때는 죄인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분명히 해결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주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이미 일어났다면 이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회개하지 않는 자기 갱신의 결핍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계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주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심각성을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다 깊은 영적인 삶을 살며 우리의 인생동안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화목하게 하는 자들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