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서머나 교회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님의 자기 소개가 주는 교훈(계2:8-9上) 1997.11.23 주일오전 1
2. 가난 속에서의 부요(계2:9下) 1997.11.30 주일오전 12
3.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1997.12.7 주일오전 20
4. 이긴 자를 위한 축복(계2:10下) 1997.12.14 주일오전 34
1. 예수님의 자기 소개가 주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8~9)
(기도 :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모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경배를 통해 주님이 기뻐함을 받으시옵소서. 지푸라기와 같고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지난 일년동안도 말할 수 없는 자비와 긍휼로 보호하시고 오늘도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거룩한 주일에 주님의 집에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주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이제 주의 백성들이 주의 약속을 따라 모여 주님을 경배 하오니, 주님이 오늘 저희들에게 이 예배를 통해 찾아와 주시옵소서. 환난과 시련 속에서 곤고하고 고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허락하시고, 아픈 마음의 못들을 제거하시며 죄와 불신앙으로 무감각해지고 굳어진 영혼들은 오늘 뜨겁게 흐르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잠겨 그 마음을 부드러운 속살과 같이 녹아지게 하옵소서.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미끄러졌던 사람들이 돌아왔다면, 오늘 눈물로 기다리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다시는 목자의 품을 떠나지 아니하고 내가 미끄러질 때 붙잡으셨던 여호와의 팔을 의지하면서 사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이 어떻게 살고 믿어야 할 바를 알려 주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임을 통해 주님 자신의 이름이 영화로워 지옵소서. 오늘도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의 예배를 두르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각 사람 속에 충만하게 임하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주일까지 여덟 번에 걸쳐서 에베소 교회의 설교를 바쳤습니다. 계속해서 서머나 교회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이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 교회처럼만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고, 또 주님이 피로 값주고 이 교회를 세우신 것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느끼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이 서머나 교회는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서부터 몇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에베소 교회로부터 약 55㎞정도 떨어진 동일한 항구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버가모, 에베소, 서버나 이렇게 세 도시가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중요한 도로가 이 곳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도 많고 인구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공교로운 것은 에베소는 지금 현재 모두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서머나는 지금도 굉장히 번성한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터키의 2대 도시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촛대가 옮겨진 그 에베소 교회가 있었던 도시는 이제 거의 한적한 마을이 되어버리고, 곧 옛날의 영광을 잃어버렸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과 함께 칭찬을 받았던 서머나 교회가 있었던 이 도시는 지금도 아주 번창한 도시가 되어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이 서머나 지방은 매우 특수한 도시였습니다. 여기에는 똑똑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A.D. 195년이면 로마가 아직 패권을 차지하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 지도자들은 부상하고 있는 로마와 손을 잡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친선을 목적으로 로마의 여신의 신상을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세워서 로마의 환심을 산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B.C. 27년에는 로마시대의 유명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거대한 신전을 바쳐서 로마에 헌정하기도 한, 그런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도시였고 또 그렇게 로마에「 대해서 충성하고, 또 로마의 종교에 대해서 아주 헌신적인 그런 도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방 종교를 향하여, 이방신들을 향하여 충성심이 있는 도시여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방종교에 충성하고 있는 이 서머나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남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국 맞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해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뭔가를 박해하기 위해서 공격해 오고, 핍박하고, 밀려오고,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불이 붙었을 때에,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보다도 더 뛰어난 충성심으로 그 세상의 충성심을 분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살아 남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중심적인 메시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이전에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 교회에 대해서 자기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역시 이 교회도 서머나 지방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면서 이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형편과 그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봉된 계시는 요한에 의해서 쓰여져서, 바로 이 서머나 교회의 사자, 즉 감독,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머나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 때 주고받은 편지는 두루마리 처럼 인봉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사자가 뜯을 수 잇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이 풀렸습니다. 이 교회 역시 서머나라고 하는 지방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가 문제가 많은 도시였던 것처럼 서머나도 에베소 못지 않게 문제가 많은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사는 사회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교회가 어렵고 힘들고, 또 교회도 세상과 함께 타락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 타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곳에는 사명도 없고, 사명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도 세우지 아니하시고 교회도 세우지 아니하십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섬길 수 잇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캄캄한 어둠이 이 세상에 찾아오고 도덕적인 깊은 흑암이 찾아올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불법과 불의가 팽배할수록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대로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서 그 시대에 향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길을 가다가 도저히 길이 어디인지를 모를 때, 손바닥만하게 나타나는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말하자면 혼돈과 어지러움의 시대에 그러한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지방은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많은 지방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교회를 세워 놓으셨던 것입니다.
로마에 아부하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데 충성심을 발휘하였던 그랬기 때문에 박해도 어떤 다른 도시에 비해서 극심했던 이 도시에 하나님께선 충성스런 서머나 교회를 세워 놓으셔서 그 시대를 변혁하는 중요한 무릎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부패하고, 이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뭔가 이 세상이 잘못된 곳으로 흘러가고 있으면, 반대로 더 강렬한 소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 정말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정말 교회가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겠구나!”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 캄캄한 시대에 세상에 대해서 소망을 안 가지시고, 교회와 그 어두운 가운데 빼어난 몇 안돼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소망을 갖고 계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번민했던 것처럼 어그러진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빛들로 나타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흠없고 티없는 자녀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부패하는 것을 보며 너무 오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금과 은으로 치료할 수 없는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 자신으로서 고칠 수 있는 섬김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즉 서머나 교회의 감독에게 인봉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가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리고 한 교회의 목회자의 수준이 어떠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교회에 목회자를 통해서 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원리를 당신의 교회들에게 적용해 주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 싶은 그 말씀을 요한에게 들려준 것처럼 서머나 온 교회의 교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은 이해가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속에는 책망이 있었기 때문에 온 교인에게 들려주는 것보다도 목회자에게 먼저 찔림을 주고, 그 목회자로 하여금 전달해 주는 것이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를 향해 전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편지를 보십시오. 여기에는 그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말할 수 없는 연민. 그리고 연약한 교회를 눈물을 씻어 불끈 일으켜 세우시는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손잡아 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서머나 교인들이 모두 모인 대예배 낮예배 시간에 주님이 강림하셔서 그들에게 들려 주셨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불꽃과 같은 용사로 살고싶은 결심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봉된 한 편지를 서머나 교회의 사자, 감독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그 편지를 받아 보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그 말씀을 그 교회를 향해서 증거하도록 만들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이 하나님께서 지지하고 계시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성도들이 따라 기억하면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세상 끝날에 가면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목자를 위해서 진지하고 열심있게 기도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목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마음을 다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목자가 없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모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그래서 언제든지 인봉된 하나님의 그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와 교훈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해줄 수 없다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절망 속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 속에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절망과 어두움 속에서 헤메게 만들어 줄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새로운 믿음의 길을 찾아야 할 사람들로 하여금 오만과 방종에 들뜨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교회의 축복은 커다란 건물이나 모이는 사람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거기 와서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거기 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고, 거기 와서 어떻게 살아야지만 영원을 향하여 사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그것이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영국의 유영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테버너클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 생각과 비슷한데, 당시에 유행하던 고딕식으로 지은 교회 건물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고딕식 건물을 보시면 알겠지만, 앞에서 보면 멋은 있는데, 삐죽 올라간 그 탑이 건축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앞에 멋있고, 뒤로 갈수록 홀쭉한 지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 그러나 이런 식의 건물이 표리부동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체육관같이 돔형태로 되어 있는 그런 교회를 사모했습니다. 저도 그런 교회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 건축양식이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 그 지방에 오는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둥그렇고 커다란 지붕의 그 건물이 교회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첨탑이 있어야지 되는데, 그런 것들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저씨 저 호떡같이 생긴 저 둥그런 건물은 뭡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믿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선생님. 여기 처음 오셨군요. 저기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지요.”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거기에 가면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 거기에 가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요청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여러분들에게 명령하시는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당신의 종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내려 부어 주시도록 그럴 수 있는 통로가 늘 열려 있고, 수시로 위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인봉된 편지로 목회자에게 전달되는 그런 말씀과 주님의 음성의 세계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모든 교회를 향해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자기를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 소개가 독특합니다. “가라사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가 가라사대” 즉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소개를 할 때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자기 소개는 그 교회가 처하고 있는 형편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어느 교회가, 어느 그리스도인이 처해져 있는 상황 속에서 정말 진실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면 거기로부터 벗어나거나, 거기로부터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야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지 않으면 안돼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별이 내 손에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감독들이 자신의 손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붙잡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며, 일곱 금촛대 사이를 돌아다니시면서 그 교회를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며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 교회를 세우고자 하여도 그 교회가 서지 않을 때,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경고로서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일하게 우리를 이방종교와 이방신들을 향하여 충성심이 각별한 이 서머나 도시에서 복음을 위해서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던 이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이 성품 중의 한 부분은 우리 중에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먼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하는 것입니다. ‘알파’는 당시 신약성경이 쓰여진 희랍어 문자의 첫알파벳입니다. ‘오메가’는 맨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시작과 끝은 창조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창조주인 동시에 예수님이 마지막에 심판자로 오셔서 이 세상을 끝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위해서 힘없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을 다스리고 우주를 다스리고 교회를 다스리는 영적인 왕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참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 그리고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도우시고, 성도들의 쓸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고 우리들의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 보좌 위에 계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분이 바로 창조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이 세상을 만들어 내신 분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그 분이 없이는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이 명령에 복종해서 온 세상은 창조되었고, 인간도 그 분에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도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그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먼저 영적인 왕권으로 당신의 교회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한 교회의 문을 열게고 하시지만, 한 교회의 문을 닫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지의 빗장을 풀기도 하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교지를 닫아버리시기도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회개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자들에게 용서와 위로와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거스르는 자에게 당신의 엄위를 보이시기 위해 고통가운데 가시밭길을 걷게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생명도 손안에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그 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 분이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감격하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교회에 부흥을 주시기도 합니다. 잠들어 있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기도 하시고, 죽어있는 그리스도인, 마른 뼈와 같은 그러한 인생이 있는 그곳에 부흥의 불을 보내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군대가 되는 함성으로 가득찬 교회로 만드시기도 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것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자들을 제거하시기도 하지만,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자들을 놀랍게 회복시키셔서 거룩한 성도로 세우시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생명도 주관하실 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주관하셔서 이 시간에서 지도상에서 어떤 나라는 일으켜 세우시고, 어떤 나라는 지워버리시는 것입니다.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정하시고 번영하던 도시를 쇄하게 하시기도 하고, 쇠퇴하던 도시에 생기가 돌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의 조화로운 운행, 그리고 때를 따라 다가오는 우리나라의 뚜렷한 4시의 구분,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 모두 그 분이 이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 결과입니다. 그렇게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오십니다. 하늘로 올라간 것을 본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어찌 놀라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본 것처럼 또한 다시 너희에게 오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당신의 왕권을 보여주십니다. 오셔서 하나님이 교회를 손대실 것입니다. 가라지와 쭉정이들을 골라내고, 거룩한 성도와 알곡과 같은 성도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은 성도와 함께 세상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 바로 이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고, 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고 있느냐? 염려 말아라. 너희는 내가 누군지 기억하라. 너희들이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너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너희들이 소외를 당하고 마음 아픈 일을 달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느냐. 너희는 기억하라. 나는 창조의 근본이요. 심판의 마지막 주로 올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하늘에서 이 서머나 교회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은 창조의 근본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심판의 마지막 주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며, 지금도 홀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다스리시는 통치가 이토록 교회 구석구석, 우리의 삶 구석구석, 우리의 인생 구석구석에 미친다고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귀한 은혜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이 되어서 온 세상을 영적인 왕권으로 우주적인 왕권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분은 이 세상에서 죽으셨던 분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이 서머나 교회에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믿음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신앙을 따라 살기 위해서 박해를 받아야 됐던 사람들. 인간은 원래 고난보다는 영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고통보다는 행복을 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공통된 본성입니다. 비록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은 괴로운 것입니다. 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아무리 믿음이 좋았어도, 지속되고 있는 도시의 이 끔찍한 박해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겠습니까? 그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그때에 예수님은 당신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내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느냐?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나를 기억하라. 나도 이 세상에서 죽었었느니라.” 그러면서 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즉각적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할 때, 고난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고난이 없다면 우리 주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특별히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이렇게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은 횡행하여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심한 고통과 박해 속에서 아픈 세월을 보낼 것을 주님은 이미 미리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은 고난이 없고, 박해가 없는 시대라고 생각을 하시지요. 아닙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1세기, 3세기에 순교한 사람보다도 30세기에 순교한 사람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이 평화로운 20세기에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3000만 명이라고 제가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믿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예배 드리는 순간에도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 지구상에서 핍박과 고난의 칼을 맞으며 혹은 총살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믿음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면에서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이거나 형장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도시, 이 나라를 보십시오. 비록 공개적인 박해는 없지만, 어디를 가든지 은밀한 박해는 볼 수 있습니다. 은밀한 박해. 그리고 술과 담배를 금하고, 경건하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직장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소망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이룰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서 적은 봉급과 혹은 모자라는 대우를 감수하면서도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잘 믿고 믿음을 따라 산다는 이유 때문에만 다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서 승진이나, 발령에 지장을 받고, 그리고 정직하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모인 불의한 사람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이유 없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를 바르게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박해가 없다면 여러분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부패한대, 옳게 사는 사람이 오면 왜 박해가 없겠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어두운데,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면 어찌 세상의 주목을 안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신앙과 경박한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지도 않은 그런 잘못되고 허황된 신앙이 판치고 유행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지 않는다면 그가 가진 신앙이 정말 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세속적인 신앙생활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사는 세상에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어떻게 고난받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수시로 타협하고, 수시로 위기를 모면하고. 편법과 탈법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세상의 얄팍한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임수를 쓰면서 자기를 위장하며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없고, 고난이 없을지 모릅니다. 세상사람들이 볼 때, 초록 동색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알고, 그리고 이 어두운 도시에서 갈 길을 잃고 표류하는 이 양심이 마비된 불법한 도시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과 자비를 알고 하나님 앞에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박해받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랬을 때,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셔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를 지낼 때에 인간의 오기로 버티면 마음에는 남는 것이 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기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 풀무불과 같은 치열했던 일제의 치하에서 신앙을 지킨 선조들이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십자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고백으로 살았습니다. “주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며, 주와 함께 죽은 자는 주와 함께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합니다. 주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리고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다시 살리라 단순한 소망, 하나의 희망을 걸고 사람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받고 그리고 부족들에게 쫓겨남을 당하면서 신앙을 지킨 것입니다. 치열한 공산 치하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킨 위대한 선조들을 가진 나라가 바로 우리 조국 교회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훌륭한 선조들을 가진 우리 나라가 오늘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러한 정신으로 다시 죽고, 살았던 그 분들이 오늘 그 순교의 피로 세워진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가지시게 될까요? 여러분 진리를 따라서 올곧게 살기보다는 피할 길이 없는가에 몰두하는 사람들. 편법과 탈법으로 고난을 모면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세상과 타협해서 적당히 한쪽 팔에는 세상의 팔짱을 끼고, 또 한쪽 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팔짱을 끼고 양다리 걸친 신앙 생활을 할 수는 없는가? 이런 정조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으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순수한 교회냐가 문제입니다. 그 교회는 비록 수가 많지 않아도 반드시 그런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죽으셨습니까? 주님이 세상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죽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워하고, 그를 찌르고 채찍질해서 얼마든지 더 사실 수 있는 그 분을 죽인 것입니다. 미워하는 미움과 죄와 어두움을 사랑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자기를 이 세상이 이해해 주기를 구걸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분의 삶은 의연했습니다.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당신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자존심,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영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고, 왜 이 어두운 서머나와 같은 땅에 우리를 세워 두셨는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올곧게 의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능력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고난받을 때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올렸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 하나를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와 같은 자들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금은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도 죽었던 분이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분을 살리셔서 만왕의 왕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서 죽을 것과 같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진짜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도 살리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자들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때에 대해서 절망을 갖기보다는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망을 갖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히랍어 성경에는 “아노니”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고난받을 때에 성도들은 외로워지기 쉽습니다. 시련이 많이 겹치면 세상에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은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스럽게 살고 그 충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 인생의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고난과 아픔 속에서 보내는 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교회와 영혼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기도하고, 이름 없이 고난을 당하며 섬기는 사람을 기억해 주지 않는 그 모든 섬김들을 오늘 주님은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며,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애통하면서 아무도 없는 교회당 한 구석에서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아버지 앞에 호소하는 그 기도도 주님은 오늘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꽃처럼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지만, 끊임없이 남들이 알 수 없는 시련과 박해, 혹은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아파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저버리지 못해서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그런 성도들의 애달픈 사연도 오늘 주님은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 싶지만, 믿음이 없고 진리를 따라 살고 싶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고 싶지만, 그 길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그 연약한 형편에 대해서도 주님은 오늘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다보면 박해를 받을 때도 있고, 오해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질 때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다가 보면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과 결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사연을 안고 오늘 여기까지 와서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나를 기억하십니다. 주께서 함께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산 이 교회, 이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이 메시지가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제가 만약 이 서머나 교회에서 이 영광스러운 성도들과 함께 서머나교회에서 피뿌리는 박해를 받으면서 믿음을 지켰다면 내가 너희의 환난을 안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 왔을 때, 저는 영광스러운 성도들과 손잡고 마구 울었을 것입니다. ‘그래, 세상은 모르지만, 주님은 아시지. 세상은 이해해 주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가 어떠한 서원 하나를 품고 이제껏까지 고난의 쓴 물을 먹으며 시련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무슨 소망으로 죽지 않고 오늘 여기에 서 있는지 아시지.’ 이런 고백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감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서머나 교회와 같이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에베소 교인에게도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소망은 우리의 모든 형편이 그래도 주님에게 알려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모든 마음과 우리의 모든 형편, 우리의 모든 신앙,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죄까지도 주님이 그것을 알아주실 때에 우리에게는 회복과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생사간에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용기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여러분들이 바로 이렇게 주님이 모든 것을 안다고 말씀하실 때, 황급히 옷소매를 여며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모든 것을 안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눈물 펑펑 흘릴 수 있는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주님이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성도들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환난과 박해를 많이 받은 교회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부요한 교회였다고 말합니다. 환난은 물론 이 핍박과 시련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환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이 없고,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이 교회를 통해서 환난과 시련이 많은 교회로 특별히 이 교회를 궁핍한 교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궁핍했을까요? 돈이 없으니까 궁핍했을까요? 왜 돈이 없었을까요? 추측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근거 있는 추측을 합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 예수 믿는 사람을 밀고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밀고한 사람에게 주어졌답니다. 그러므로 눈이 시뻘개져서 그 도시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만만한 사람 있으면 저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재산을 빼앗아서 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사람들에게 지목되는 그 순간, 그는 그야말로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소유도, 전답도, 그리고 백성으로서의 자격도, 요즘으로 말하자면 주민등록증도 빼앗기고, 심지어는 가족들과의 관계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궁핍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그 궁핍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전에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버려야 했습니다. 그 분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에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커서 모두 버리고 궁핍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요한 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지심과 가난을 본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가난해 지셨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포기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갖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얼마나 포기하고 있습니까? 이 교회는 주님께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서머나 교회의 자녀들아 너희는 나를 위해서 가난하게, 궁핍하게 된 사람들이라.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러한 교회를 인정하고, 이러한 교회에 면류관을 씌워 주시지 아니하시면, 어느 교회에 상급을 내리시겠습니까? 여러분 신자의 모든 부패는 세상 사랑도 손에 넣고, 그리스도의 사랑도 손에 넣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꽃으로 면류관을 쓰고 싶고, 그리고 저 나라에서도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대우받고, 대접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이 세상과 타협한 대가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고, 그 나라에서도 영광스럽게 높은 지위를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탐심입니다.
주님은 어떤 생애를 사셨습니까? 주님이 만왕의 왕이시면서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야말로 환난과 시련을 당한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일평생 사는 동안에 자기의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생애를 살다가 마지막에 죽으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분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고, 또 그 분의 것은 동시에 우리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께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궁핍해 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가난해 지셨으니, 우리도 또한 주를 위해서 그렇게 가난해 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때에 서머나 교회와 같이 주 앞에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리고 이리 저리 유리하는 양떼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로마 제국 이 세대 아래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고, 예배를 드렸는지를 카타콤을 보신 분들은 잘 알 수 있습니다. 동굴이 파져 있는데, 천연적으로 나와 있는 동굴입니다. 미로와 같은 곳, 시체를 내다버리는 그런 곳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빈민들과 같이 거러지와 같이 모여 다니며, 그 어두움 속에서 횃불을 밝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셨습니다. 거기서 세례를 받고, 거기서 횃불을 밝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거기서 세례를 받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모일 마다, 흩어질 때마다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이것이 그들의 인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정 둘 곳이 없이 궁핍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소원은 하루바삐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이 고난과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순결한 성도들 이외에는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부요합니까?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처럼 되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좇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리고 깃들 곳 없는 그런 생애를 살게 되었습니다. 유리하는 거지와 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아무 것도 없어도 부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축복과 부요는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눈물을 흘려야 할 시간의 때에 주님을 찬송하고 아파하며 사람들을 원망해야 될 때에, 오히려 고난을 통해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찬란한 인내의 꽃이 피고, 인내의 꽃이 피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을 마음껏 소유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런 사람들, 이런 부요함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 이런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오늘 이 서머나 교회에게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처럼 비록 이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적고, 그리고 현저하게 남의 눈에 띄는 지위를 가지지 못했어도, 그러나 믿음 때문에 부요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살아 때문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부요함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난 속에서의 부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2:9下)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서머나교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이 서머나교회에 한 자기 소개를 살펴보았고 이 교회가 궁핍과 혼란을 많이 당한 교회인데 주님이 이것을 안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후에 예수님께서는 궁핍과 환난을 내가 알지만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과 실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겉모습과 진정한 실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면이고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 열린 교회를 향해서 지금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매우 궁금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신자 개인의 신앙 생활과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가지는 영적인 신앙 생활은 나누어질래야 나누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불쾌하고 겉으로는 번지르 하지만 속은 썩은 교회라고 생각하실 때 여러분의 신앙 생활도 간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보시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너희 교회는 돈도 많고 유식한 사람도 많고 건물도 좋지만 실상은 너희가 벌거벗은 자니라’ 이러한 평가를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평가를 받기를 바랍니다. 너희들은 가난하고 상처를 많이 받은 자들이고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해서 고난도 많이 받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맡기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난한 자가 되었지만 실상은 너희가 부유한 자라는 칭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이 실상은 사람 앞에 드러난 실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난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나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같은 생각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고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겉모습이 아니라 이면을 볼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을 소유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물 묻은 사상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허락하신 속죄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두운 죄악에서 건지고 구원받게 하신 것은 사람 앞에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요 거룩한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건져내었습니다. 우리 밖에 없는 것처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곧장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얻고 이렇게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은 사람들끼리 한 교회에 모여서 신앙 생활을 하게 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 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없고 우리의 모든 인생이 사람들 앞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든지 주님이 보실 때에 부요하고 주님이 보실 때에 훌륭한 그런 인생이 되도록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교회가 이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고발하고 박해한 사람들에게 부요한 모든 재산을 빼앗겨 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 믿기 전에는 결코 풍파가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재물과 좋은 평판이 안전하게 지켜준 그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전의 평화와 안락함은 사라지고 환난과 시련의 비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요하던 사람들이,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환난과 시련을 벗삼아서 그런 고난의 언덕에 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좋은 평판과 값진 명예를 모두 잃어버리고 욕을 먹는 사람들이 되었던 이유, 친척과 이웃 그리고 가족 가지 모두 잃어버리고 이렇게 홀로 서 있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이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너희의 궁핍과 환난을 안다 그러나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라고 평가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그 교회의 주인이고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궁핍해지고 환난을 받는 삶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부유한 것도 아니고 시련이 없고 평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안락한 삶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 부유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이 믿음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궁핍함과 환난과 시련이 겹치는 가운데 이 서머나교회 교인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디에서 부유한 것을 우리가 찾을 수 잇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늘 부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환난과 시련을 당하고 명예와 값진 재물을 모두 잃어버렸는데도 이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었는데도 이들을 부유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재물이나 세상의 평판이 이들을 부유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인생의 목표를 이런 식으로 두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두 번 실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의 실수는 그것을 모두 버리도록, 사랑하지 않도록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분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 어두운 인생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을 어떻게 변함없이 사랑하며 살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히브리서 11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부유해진 믿음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찌끼와 같이 여겨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을 믿음을 위해서 그 유명하고 존귀한 생활을 버리고 낮고 천한 생활을 택했습니다.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모든 애굽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그 백성을 위해 고통받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의를 위해 싸우고 그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신실한 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지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스스로 궁핍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좋은 평판과 많은 사람들에게 약속 받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시련의 가시밭길을 걸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진정한 부유의 길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많은 부와 사랑하는 것들을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부유하게 만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사는 그 때에만 부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리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는 사람들에게 왜 목자가 오셨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목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더 풍성히 살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풍성한 삶 그리스도 앞에 있는 이 부유한 삶, 단지 이전에는 내 방법 내 수단으로 잘 먹고 잘살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세상에서 편하게 잘 살고 잘 먹는 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풍성한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서 생명과 함께 주시고 싶어했던 풍성한 삶은 이제는 썩을 세상에서 육신을 위해 사망을 대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 머물 세상에서 눈에 스쳐 가는 것들을 붙들고 사는 대신 우리가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해 살고 이 땅에 살더라도 천상을 이대이면서 사는 그런 삶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서머나 교회의 삶이 풍성한 삶이었습니까? 주님을 이들을 궁핍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핍박도 직면해야 하는 시련도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속에서 무슨 풍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던 것들은 잃어버리고 사랑하던 사람들과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진정한 부유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이 세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던 것들이 부유하게 만든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권세와 재물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 외로운 새벽에 그렇게 말구유에 싸여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겪고 있는 수많은 갈등 중에 하나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좀더 부유하게 살까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부유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왜 그렇게 가난하셨는지 그리고 그 분이 왜 그렇게 가난해지셔서 그렇게 멸시받는 삶을 사시면서도 왜 그렇게 당신이 사시는 그런 풍성한 삶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많은 것을 손에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없고 주님을 잘 믿더라도 시련과 궁핍과 환난에 시달리고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여러분들이 그 속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결심한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바지 자락을 붙들고 우는 가련한 신세 이제는 옛날만으로 족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서 서머나교회와 같이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믿음으로는 부유하다는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유대인의 회, 그리고 그들이 곧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사실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외부적으로 로마의 박해와 내부적으로는 먼저 신앙 생활하는 잘못된 믿음의 사람들로 인해서 시련과 고통을 많이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회라는 사람들은 정통적인 유대인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 후 복음이 사도들에게 강력한 역사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제일 먼저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잘 듣고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하여 나갔지만 그러나 그들 중에 상당한 사람들은 처음의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이단적인 사상에 빠져서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거짓 선생, 거짓 선지자 노릇하며 백성들을 꼬드기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며 참된 진리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믿음 적은 사상을 배격하고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려는 거짓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서머나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고소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면 교회의 진리를 위해 죽어갔던 대부분의 선교자들이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처형된 사실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송사를 받고 교회 안에서 재판을 받고 교회 안에서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선지자들을 내보내고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세움을 받아서 예루살렘이 많은 선지자들을 거절한 것처럼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이렇게 자기의 형제 지체들을 탄핵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일성을 깨뜨리고 거짓된 사상으로 변론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형제들을 경솔하게 평하거나 그들을 깎아 내리거나 하는 거짓된 일들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사단을 훌륭하게 이 유대인들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회개를 하고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남이 알지 못하는 신앙의 연륜을 가졌나 하는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크게 만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자 권능 있는 그의 말은 유대인과 서기관과 바리세인과 같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아와서 그 설교를 듣고 참회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소리를 지르며 찬성하였습니다. 주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에게 떡과 고기를 받아먹고 팔복산에서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고 그런 사람들이 그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라고 처들었고 그리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도록 소리 질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먼저 믿고 얼맞나 많은 은혜를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알아서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믿음으로 부유함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신앙의 경력으로 대접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려고 하실 때 주님은 순전한 벽돌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과거에 매달리고 붙들린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주님의 시선 아래 그렇게 믿음이 부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낼 무렵 포리갑이라는 요한의 제자가 이 서머나교회에 다닐 가능성이 많다고 역사가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20년 후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이 서머나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그때 그 편지의 수신자가 서머나교회에 감독이었는데 그 감독이 바로 폴리갑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기서 요한의 가르침과 영적인 영향을 따라서 훌륭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폴리갑이 스승으로부터 온 이 편지를 교회에 읽어 들리는 그 서머나교회의 감독에 이야기를 들을 때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니라, 너희를 괴롭히고 연약한 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그 유대인 들이 사실은 사단의 앞잡이요 그들의 졸개들이라’고 예수님이 분명하게 선을 그어주었을 때 그는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타협을 거부하고 진리를 따라서 궁핍하여지고 신앙을 따라서 환난의 길을 걸어 온 것에 대해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겠습니까?
그는 거기서 믿음을 따라서 훌륭하게 목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고발로 로마의 박해가 있을 때 이제 핍박자들은 이 폴리갑을 앞에 세우고 말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너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 분을 모욕한다면 우리가 너를 살려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가 한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86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었고 그리고 86년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내가 입고 살아 왔습니다. 내가 어떻게 일평생 나를 부인하지 않은 그분을 단지 살기 위해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나를 죽이시오.’ 그에게 심문하던 이가 다시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너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는‘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내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은 기억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 인입니다.’ 그러자 심문자는 ‘내가 너를 불태워 죽일 수도 있는데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폴리갑은 ‘당신은 1시간의 장작불로 나를 태울 수 있지만 당신이 만약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을 지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유언의 말을 남기고 타오르는 장작불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고 죽어가던 것입니다. 주후 155년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단의 무리들은 끊임없이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서머나교회는 어떻게 사는 것이 부유한 것인지 그 방식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껏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해주고 건져주신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만약에 여러분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세상만을 본받지 않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또래의 그리스도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오늘날 교회 속에 흐르는 풍조를 본받는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너무 세상화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려면 결심하면 여러분들은 즉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깨어나서 이제는 진리만을 따라서 주님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세상에서 뿐만아니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박해가 계속될 때 어떻게 믿음으로 부요하게 사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누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칼날 같은 핍박은 없지만 은근히 우리를 짓누르고 모욕하고 그리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박해의 분위기는 오늘 직장에 나가도 볼 수 있고 사업을 해도 볼 수 있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복음에 대해서 냉소적이고 신앙에 대해서도 자조적인 사람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진정으로 부요해 주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시련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오늘 유대인의 회, 사단의 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종일관 처음 여러분을 감동시키고 붇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물러가 침륜에 빠지고 처음 진리를 잃어버리고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람들 속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보십시오. 교회가 싸우는 것은 죄 많은 세상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싸우고 재직과 재직들이 싸웁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비난하고 목회자가 돌아다니면서 교인을 편론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회에 속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 속에서 자라고 있는 한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피로 값 주고 산 교회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서머나교회에 수많은 고통을 준 이 유대인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부서뜨리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궁핍하고 환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킨 이 성도들과 손잡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었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승리로 인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버리고 거짓 교훈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두기를 마음에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이 우리 스스로로 인해서는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강한 손으로 사로잡을 그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고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산 서머나교회에서도 이러한 쓴 뿌리와 같은 무리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교회는 온전히 신령한 교회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그 교회에 패역한 무리들이 당을 지어 모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그 교회에 , 복음의 감격이 있는 그 교회에서 오히려 복음을 싫어하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두길 싫어하는 무리들이 당을 지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가득 찬 교회라고 할지라도 매일 매 순간 교회에 진정한 안전이 사람의 손이 아니라 목회자의 손이 아니라 교회를 붙들고 계신 교회에 진정한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의 무리들은 복음의 수많은 축복들을 누릴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진리의 빛이 있었고 참된 신앙을 하는 동료들과 선배들 속에서 선택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축복으로 활용하는 대신 오히려 그 축복을 깨뜨리기 위해 모인 사단의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에서 그들은 그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런 생각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서머나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손에 있을 때에는 주님의 교회이지 주님이 내려놓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안팎으로 핍박과 시련에 싸이고 궁핍을 벗삼아 살아가야 하는 이 고통스런 환경 속에 놓여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영원한 축복과 안식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대신 시련과 환난이 더 크게 불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런 시련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 때에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 그 유명한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피를 우리의 마음에 바른 그 순간 이제는 우리의 즐거움의 이 세상에 사는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창조한 그 창조의 목적, 그리고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피로 고치고 거룩한 고난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고, 우리를 위해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해 살고 사는 날 동안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리는 횃불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오히려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고 수많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께 인정받는 성도들로 세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머나교회의 성도들, 그런 교회가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서머나교회는 가난하고 그리고 환난을 당한 많이 당한 그런 교회이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산 교회를 향해서 마땅히 예수님께서는 축복을 말씀하셨지만 정석입니다.
내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궁핍해 지고 믿음을 따라 살기 위하여서 환난을 많이 당하였으니 이제는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복 줄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셔야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오늘 주님께서는 이전에 당했던 환난이나 궁핍보다 더 큰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희에게 더 큰 시련이 올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너희 중에 몇 사람을 시험에 떨어지게 만들어서 그래서 너희들에게 고난을 받게 할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사람이라고 그런 것은 희랍어 본문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단지 그냥 너희 중에서 이런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은 나오지 않는 이야기인데 옥에 던져서 시험을 받게 하리라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얼마나 대대적인 박해가 와서 많은 성도들을 옥에 던져서 시험 가운데 떨어지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뭔가 커다란 시련이 온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마귀였고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서 서머나교회의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재판을 받게 되고 그래서 이제는 어떤 더 큰 믿음으로 말미암은 박해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여러분들은 이런 것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까? 믿음 없이 살 때에는 뭐가 좀 되는 것 같았는데 신앙대로 살려고 해 보니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까 어떤 사람은 복 받았다는 수많은 간증들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뭔가 더 없습니다. 사업은 망하고 가세는 기울고 가족들은 사고를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곁을 떠나고 좋은 사람들로 상처를 받고 여러분 이런 적은 없습니까? 서머나교회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산 교회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가난해지고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의 ( ? )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에 또 다른 더 큰 환난과 시련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축복 받은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신앙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 얻는 것보다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이 서머나교회가 그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고 이제는 ( ? )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할 때 뭐가 되는 것도 없고 모든 일이 꼬이고 고난이 더 오고 시련의 바람이 더 불어서 점점 더 곤고한 인생이 되어질 때에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신앙대로 살고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 고난이 더 겹치고 시련이 더 많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서머나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서머나교회를 평가하시면서 얼마나 깊은 인생을 이 서머나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셨었겠습니까? 이 교회는 라오디아교회처럼 게으르지도 않았고 이 교회는 에베소교회처럼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음란하지도 않았고 거짓된 교훈을 좇아 다니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순결하고 믿음을 따라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가난해 지기를 소원한 그리스도를 택하기 위해서 세상을 기꺼이 버린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늘 이 교회가 또 다시 시련이 직면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도 비록 환난과 궁핍은 당하였지만은 믿음에 있어서는 부흥된 교회라는 사실을 주님 자신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인정해 주신 그 분이 바로 그 입술로 동일하게 이 교회를 향해서 너희들이 더 큰 환난을 당할텐데 너희 중에 사람들을 얼마나 될지는 모르는 너희 중에 많은 사람들을 옥에 던져서 시험에 떨어지게 하고 재판을 받고 조직적이고 악랄한 박해가 가해질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신 분이시길래 믿음의 부요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난해 질대로 가난해 지고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을 정도가 된 사람들을 향해서 또 다시 환난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을 정결하고 순결하게 하시려고 애쓰신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교회, 그 교회는 주님이 택하셔서 더 순결하게 하시고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정결한 신앙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되는 일이 없고 믿음대로 살려고 해도 더 막히고 고난이 더 많이 와도 우리는 ‘주님이 이러실 수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실 수 가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땅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의 형통하고 축복 받은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지만은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고 방식 자체가 천상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한 섭리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더 순결한 것, 더 정결한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을 때는 고난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고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 교회는 끊임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따라 살려고 노력을 하면서 고난을 받을 때 개인 또한 신앙을 좇아서 살려고 할 때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끊임없이 고난에 고난이 더 겹쳐올 때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대도 뭔가 풀리는 일이 없고 고난이 계속 닥칠 때 그 때 ‘주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자식들이 부모에게 이렇게 대드는 경우를 저는 봤습니다. ‘엄마, 엄마가 이 때까지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아빠,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그것은 패역한 질문입니다. 부모는 무엇을 해 준 것이 있기 때문에 부모가 아니라 존재가 자체가 부모입니다. 이미 ‘엄마, 아빠 나한테 쥐뿔이나 해 준 게 뭐가 있어’ 이렇게 물으면 그 부모는 뭐라고 말합니까? ‘그래 없다, 넌 나한테 해 준 게 쥐뿔이나 뭐가 있냐?, 월급 타고 니가 적금 붓고 너 나한테 한 달에 십 만원씩 이십 만원씩 갖다 주는데 여기가 하숙집이냐? 너는 짓불 해 준 게 뭐 있냐? ’ 엄마 나는 엄마한테 상처도 많이 받고...‘ ’야, 너 낳아서 여태까지 보람 얻은 게 뭐냐? 학교 다닐 때도 지지리 공부 못해서 속 썩이고 군대가서도 사고 치고 방위 가서도 탈영하지 않았냐? 나도 너 없었으면 이렇게는 안 산다‘ 이미 부모와 자식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이 이러실 수가‘ 이런 식으로 마음에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사람은 그런 질문에 마음에 떠오르는 것으로 떠오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고난을 당하든 뭘 당하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패역해 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사랑하는 이 서머나교회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겠습니까? 아마 ( ? ) 돌아보아도 교회다운 교회가 없었을 때에 빌라델비아교회와 이 서머나교회를 보시면서 주님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프실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교회 교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재산을 다 빼앗기고 궁핍한 자가 되었을 때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피 뿌리며 죽어 가는 성도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얼마나 아파하셨겠습니까? 그 교회에 또 다른 시련과 고난을 다시 한번 예고하시는 이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 의도를 알아야 됩니다.
쥐꼬리만큼 믿음 생활하고 ‘하나님 내가 믿음을 쥐꼬리만큼 사랑하는데 ’ 축복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섬길 손길이 그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서 우리에게 고난이 더 겹칠 때 믿음대로 살려고 더 결심하는데 더 고난이 겹치고 ( ? )대로 살려고 하는데 더 혼란이 오고 정말 열심히 붙들고 은혜 받고 기도 받고 하는데도 응답되는 것이 없고 뭐가 안되고 고난이 오고 뭔가 어려운 일들이 자꾸 생길 때 그 때 여러분들은 오히려 환경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이 내가 믿음으로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난과 어려움들을 쉬지 않고 우리에게 오게 하시는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더 정결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믿음으로 살면서도 내 안에 더 정결해져야 할 부분들을 보고 그리고 내가 주님 앞에 더 정결해지고 나면 주님이 나를 지금보다도 훨씬 대견하게 여기시고 귀하게 쓰실 것이다 그런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그랬을 때에는 오로지 사람을 보지 말고 주님을 봐야 됩니다. 사람을 쳐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이구, 믿음으로 산다더니 쥐뿔도 되는 것 없네’ 그렇게 말할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외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 오리라”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믿음으로 사는 당신의 백성들을 무조건 복 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믿음으로 살도록 그래서 가슴속에 남아있는 더러운 찌꺼기들과 그리고 그의 삶 속에 남아 있는 거슬리는 패역한 요소들을 모두 씻어 내시고 빨아 내셔서 믿음으로 사는 그 사람을 더 찬란한 믿음으로 살게 하셔서 주님을 위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고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도 고난 가운데 두실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이 서머나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본 받아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이제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찾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를 좇아서 살기를 이 길에 들어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 지려고 노력을 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많이 ( ?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땅을 넓히고 기업을 늘려 가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거둘 수 있는 주님의 도구로 써 줄 수 있다는 주님의 사실에 감격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그런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런 원대한 계획과 목표를 교회와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는 더 큰 고난 더 많은 시련을 주실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은 처음 복음이 들어 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사실 그땐 제가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세상물정 돌아가는 것을 모르지만 그 후로 우리 집안에 복음이 들어오고 또 식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를 믿기 시작했지만 집안에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정적으로 곤고하고 어렵고 그리고 참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고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제가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 다음에서부터는 뭔가 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정도 원만해 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범사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제가 잘 믿었기 때문에 먼저 믿은 식구들 보다 잘 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믿자마자 주님께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그리고 형통케 해 주시고 물질의 복도 주시고 사람도 붙여 주셔서 그야말로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복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베푸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획일적인 공식은 아닙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이제 주님 앞에 뜻을 세우니까 그랬더니 집안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은 망하고 부도나고 부모님들은 이혼하고 고난에 고난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시련의 시련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련을 통해서 그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 왔는데 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몰랐지만 어떤 사람들은 한집안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니까 신들이 다퉈서 거기서 마치 예수님이 패배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련 가운데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은 거기서 그 형제 한 사람을 단련하고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의 훌륭한 계획을 본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는 고난을 이유 없는 시련을 우리에게 주시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지키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시련과 환난이 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는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잘 믿으면 잘 믿으실수록 하나님은 더욱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일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십일은 문자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짧은 기간 동안에 이일들이 일어날 것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의지하고 사람들의 시련은 시련이 와도 그 시련이 곧 물러갑니다.
문제가 무슨 문제이냐 하면 시련의 강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시련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저앉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련 속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 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커다란 환난과 핍박을 말씀하십니다. 다른 교회에 이렇게 믿음으로 산 교회에 이렇게 고난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교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벌써 이미 예수님께서 이 교회가 이들을 정결케 하는 큰 시련을 줄 때에 이 시련을 믿으므로 감당해 나가서 깨끗케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대로 이 교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이런 시련을 마음놓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교회를 얼마나 정결케 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그 시련이 잠시 지나갑니다. 신앙대로 살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살려고 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그 시련은 어떤 때는 불 같이 다가오고 파도와 같이 다가와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삼켜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에게 더 이상 믿음생활을 계속하실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과 좌절을 우리에게 안겨다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기억하십시오. 시험의 그 실체는 잠깐 후면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이 교회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시련입니다.
반듯이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 시련 속에서 당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믿음을 따라 사는 서머나교회가 박해와 핍박이 눈앞에 다가오고 더 많은 시련이 다가와서 지체들이 옥 속에 던져지고 시험을 받게 되는 다급한 위기가 다가 와 왔을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거나 시험을 대비하라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어떻게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신에 도대체 이 주님이 예고하신 미래의 경고와는 어울리는 않는 어떤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이 다가오고 시련의 큰불이 다가와서 이제 이 교회를 삼킬 듯이 덤벼드는 이 위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충고는 너희가 이런 큰 시험을 당할 때 너희들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서머나교회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이 교회가 큰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두 가지에서 먼저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 두 가지 끊어 놓기 위해서 사단은 몸부림치면서 애를 씁니다. 두 가지의 선만 끊어 놓으면 우리는 끈 떨어진 갓 신세입니다. 아무리 얹어 놓으려고 해도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끈 떨어진 갓,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그런 조각배 신세가 됩니다. 두 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견고한 믿음 즉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일들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을 굳게 붙들면 잠시 주저앉을 수는 있지만 쓰러지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시련 속에서는 더 증가합니다. 시련 속에서는 더 많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시련 속에서는 더 많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더 바라보는 대신에 믿음이 식어지게됩니다. 처음에도 그리스도가 커 보였는데 자꾸 시련들을 쳐다 보다 보니까 시련은 크고 예수님은 점점 더 작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작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성경의 수많은 약속 대신 현실이 눈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현실을 믿는 것이 약속을 믿는 것보다도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다음에서부터는 이제 불순종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니까 이제는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더 슬프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단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도 기쁨이 없고 더욱이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겨 주셨던 하나님의 귀한 직분들을 예전에는 그렇게 작은 것도 그렇게 크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다가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알량한 양심이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길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게 사실은 양심이 성령이 움직이시는 양심이 아니라 불 신앙이 움직이는 양심입니다. 말은 번지르르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섬길 바에야 차라리 안 섬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 말 자체는 자기와 같은 상태에서 그래도 섬기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미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귀한 사명을 맡겨 주실 때 상태가 좋으면 열심히 하고 하다가 상태가 힘들어 지고 나쁘면 '때려 치워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충성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맡은 일을 감당하다가 능력에 부치는 한계에 경험하게 되면 맡겨 주신 일들이 ( ?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구하고 열심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고 사명감을 구해서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 ? )할 만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어디서 하나님을 향한 불같은 충성을 볼 수 있습니까? 어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불같은 충성으로 죽음을 내 걸고 생명을 걸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충성심을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마귀는 ( ? )인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일들로부터 벗어나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 주신 중요한 직분과 사명으로부터 벗어날 때 축복이 있습니까? 정말 주의 평안이 밀려옵니까? 밀려오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패배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마귀에게 밟히고 한가하지 않는 대에서 오지 않는 평화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거짓된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시련의 모진 바람이 불고 신앙을 따라서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돌보고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마귀가 왜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흔드는 것은 당연하고 믿음을 따라 살려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님의 생애가 그걸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늘의 영광도 버리고 오셨습니다. 마귀가 도와주었습니까? 세상이 도와주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다가와서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받게 만들었습니다. 고난 당하실 때 주님의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큰 능력을 사용해서 고난을 치워 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었다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당하시는 것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려고 생각하는 대신에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를 더 붙들었고 시련의 바람 핍박의 폭풍이 불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대해서 더 큰 집착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긴 이 사명,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속죄 사역의 이 위대한 소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더 많이 일에 대한 집착을 가지시고 자기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사명에 대해서 충성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믿음으로 산 생애였지만 고난이 그치지 않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셨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인 믿음으로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충성하는 것입니다. 시련의 바람의 불고 고난의 폭풍이 몰아 닥칠 때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붙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물에 빠졌을 때에 큰 홍수가 나고 그 흙탕물들이 흘러가면서 사람을 물 속에 집어 쳐 넣으려고 삼킬 듯이 그 경류가 흘러갈 때 그 때의 여러분들 손에 방파제로부터 내려오는 밧줄이 하나 붙잡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사력을 다해서 그것을 붙들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고난받은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일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어떻게 믿음을 지켰느냐? 그것이 상 받을 일이요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주님이 맡겨주신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 이것이 우리가 이 다음에 상 받을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시험의 파도가 다가오고 고난이 닥칠 때에 우리는 늘 이런 것들을 잊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공허한 사명,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직분, 귀한 부르심을 굳건히 하고 그것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섬김이 없다면 섬김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은혜를 받고 뭐하시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면 안될 이유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있습니까? 당장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지장 받을 주님의 일이 여러분들의 손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를 하고 중 고등부를 하고 구역장을 하는 것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유 없이 거저 태어나신 분 없고 하나님이 쓸 때없이 괜히 은혜 주신 분은 여러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셨다면 나름대로 구원의 계획이 있을 것이고, 남 다른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셨다면 여러분들에게 거신 하나님의 특별한 기대와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 말고 내가 이러한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 주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얼마나 ( ? )동안 견고하게 붙들고 신앙생활 해 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여러분들의 ( ? )한 사명을 정말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고 귀하게 생각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충성한 삶을 살아 오셨는지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입증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만 충성스런 삶이 없는 사랑의 고백은 유치한 연예감정이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연예감정을 갖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이것은 나이 어린 소녀들이 가끔 이성에 그리는 미남의 남자 배우들을 보면서 눈물짓는 그런 유치하고 그렇게 어리석은 연예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격을 해도 만일에 충성스런 삶으로서 그 삶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연예감정입니다. 거룩한 정서가 아니라 센티멘털리즘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은 거룩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정말 그 고백 속에는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겠다 라고 하는 그런 선약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 ? )하고 풍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정말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넓이와 깊이 앞에서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잃게 되며 ‘깊도다 그 사랑과 자식이 부요함이요’ 감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물러서 침륜에 빠지는 사람도 숱하게 보았고 또 ( ? )받는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상처로 치유되는 사람도 보았고, 치유된 그 상처 도로 가슴에 담고 작별을 고하는 사람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많지만 은혜를 받는 사람은 이상하게 소수이고 은혜를 받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적은 수입니다. ( ? )에 깊이 감겨하면서도 그 견딜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격이 충성스런 삶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더 놀라운 섭리는 아직도 이전에 받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신 속에 역사해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만 그 사랑의 불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는 요즘은 안 옵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는 가끔 동창 목사들한테 전화가 옵니다. ‘거기 전도사들 모여있는 공장이 아니냐, 그러니까 제품 중 똘똘한 것 하나만 포장해서 보내달라’ 그래서 그런 부탁이 숱하게 들어오는데 대부분 제가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인생 복덕방도 아니고 그 하나 보내 놓고 그 뒤에 들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공장에는 쓸만한 물건이 없으니 딴 공장에 알아보시오‘ 그럽니다. 그러나 이제 거절하지 못한 경우에는 소개를 해 줍니다. 그 중에 한 형제를 제가 소개를 해 주었는데 가끔 전화가 오면은 그 전화 속에서는 자기나 나나 동창인데 진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 아무개 신학생 하나를 보내 줬는데, 하 정말 언제 그만둔다고 그럴지 그게 걱정이라는 겁니다. 완전히 얼마나 충성하고 교인들도 그렇게 좋아하고 기도회를 맡겨 놓으면 불이 붙고, 말씀을 전하게 하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사랑이 넘치고 경건하고 기도 많이 하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정말 너무 훌륭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얼마 후에 전화오더니 아주 한 숨 섞인 음성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 형제가 교회를 그만두고 교회를 개척한다니 정말 섭섭하다 더는 바라지 않을테니까 똑 같은 사람 하나만 구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조선엔 없네’ 그랬습니다.
또 한번 소개를 해 주었더니 몇 달 있다가 전화가 왔는데 목사가 그러면 안 되는데 ‘김 교수님’ ‘왜’ ‘뭐, 그 딴 자식이 있어?’ ‘왜요?’ 그랬더니 ‘맨 날 교회에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피곤해요 힘들어요’ 그래서 ‘뭘 하는 게 있냐? 니가 뭘 하는 게 있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학교 가고 토요일 날 와서 애들 좀 돌보고 주일날 와서 봉사하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부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시고 나 같이 더러운 인생을 용서하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그 감격 하나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마음 같은 사상으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소수인지 모릅니다. 환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정말 꿋꿋하게 인내해서 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고 환난을 오히려 정결케 되는 기회로 바꾸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가 우리는 뜻하지 않게 큰 풍파를 만나게 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 무엇하시렵니까? 믿음을 지키면서 살다가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커다란 시련이 다가와서 늘 울어도 어떻게 눈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한 숨 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위기가 닥칠 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제껏 쌓아 왔던 신앙생활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하고 그런 아픔들을 겪게 될 때 여러분들은 무엇하시렵니까? 성경은 그런 때에 충성을 다하라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은 느낌은 감정의 차원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이지만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감정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야 되는 일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일에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이 일에는 정말 비용이 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러야지만 되는 것이 이 충성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시련을 많이 당한 교회를 향해서 또 시련을 예고 받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충성한 삶을 살도록 그렇게 힘 주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의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여기까지 데려 오시고 인도하여 오신 것은 초점이 있게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데려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목적이 계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모두 예수를 안 믿는데 유독 나만 찍어서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건져내셔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셨으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주신 사람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영혼들을 섬기게 하셨으면 주님이 주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없을 때는 거기에는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그것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공식은 사람사이에 유행하는 공식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그래 그런 어려움도 있고 그런 환경도 이런 환경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니가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겠느냐’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련이 다가오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 오히려 정말 충성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충성하는 삶을 살아 가야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정말 신앙의 초점을 환난 속에서도 잃지 않고 굳게 주님이 허락하신 신앙의 길을 달려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안 되는 신앙의 역사이지마는 제 자신을 이렇게 돌아보면은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 고난이나 어려움들을 이기고 걸어오게 만들었던 가장 커다란 힘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붙들어 온 역사가 일치한다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부르심이 무엇이고 또 그것에 내가 충성해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삶이 있을 때에는 고난이 와도 고난이 나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충성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면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의 삶을 고백하는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은 입에 발린 소리인 것입니다.
12월이 되면은 우리 교회는 비교적 덜 그렇습니다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교사들이 모자라서 난리입니다. 나는 이게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더니 언제 한번 칠 만 명의 성도가 모인다는 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 그 교회 교역자에게 가장 큰 고민이 뭐냐고 물었더니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칠 만 명이면 우리 교회의 몇 백 배인데 사람이 없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그 칠 만 명은 인간이 아니요?’ 그랬더니 ‘목사님 그런 사람 말고 진짜 하나님을 섬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교회의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사상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12월만 되면은 자기는 교인들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월이 무슨 배신의 달이요? 아니 그게 아니라 1월 달부터 12월 달까지 목회자인 자기는 눈물로 씨를 뿌리면서 내 평생 소원은 이것 뿐 어떻게 하면 성도를 은혜를 받을까 그걸 고민을 하면서 열 한달 동안 죽어 라고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나 보다 훨씬 훌륭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씨를 뿌렸는데 12월 달에 가서는 하는 이야기들이 전부 다 못하겠다는 사람은 100명이고 시켜달라고 하는 사람은 20명이니 목사님 내가 이 80명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이게 이젠 지긋 지긋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년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사들이 좇아 다니면서 집사님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사정을 하고 ‘집사님 가시면 우리 유년주일학교 쓰러집니다’ 쓰러지기 왜 쓰러집니까?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애원을 해도 또 세워 놓으면 뭐하냐 이것입니다. 1월 달에는 충성하고 2월 달에는 열심 내라 3월 달에는 식기 시작하고 가장 뜨거운 여름이 올 때 완전히 식어서 9월 달부터는 12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서 얼굴을 뵈올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고난도 받게 하려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 아닙니까? 사랑의 고백은 삶으로 역사 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를 판단해 보십시오.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어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충성스럽고 주님을 위해서 분투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목회자 하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기도하고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구역장 맡겨 놓으면 처음에는 10명 맡겨 줬더니 시들시들 12월 달에 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목사님 아무래도 우리 구역은 딴 구역하고 합쳐야겠어요’ 뭐 있어야지 합치지 다 털어먹고 말이야 하나님의 교회 주님이 말하는 말 잘하고 행정에 능하고 공상하기에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충성을 다하는 병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1년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1년 동안 곤고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가 알기에도 수기를 써도 다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는 많이 있습니다. 곤고하고 유독 시련이 많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길 잃게 만들어 버린 것은 시련이나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면서 살아야 할 충성을 다해야 할 삶의 그 어떤 초점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사명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도 잃어버린 삶을 사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은혜 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주님 믿고 하나님 의지하며 이 자리에 서게 하신 것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기 이 자리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두 가지만 잘 하면 뿌리 채 뒤흔들리고 세상의 욕먹는 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회심하지 않는 사람 세례 안 주는 것, 그래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을 완전히 구별해 낼 수는 없지만은 할 수 있으면 세례를 못 받게 해야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도 세례는 엄격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충성스럽지 않는 사람을 교회의 중직으로 세우는 일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인격이 있고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전사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와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잘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뿌리 채 뒤흔들릴 것 같은 위기는 모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잊고 살아가는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잊혀져 지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올 해 그 어느 해 보다도 더 많이 충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더 많이 울려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만 이 세상에 살면서 일년동안도 얼마나 많은 단어를 떠올렸습니까? 곤고할 때는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했고 시련이 오면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했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시련의 얼룩진 길을 걸을 때에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찬송하고 노래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길 잃은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십니까? 왜 죄악 가운데 주저앉은 여러분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의로 옷 입히고 기쁨으로 관 씌우셔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고치시고 온전한 사람 만드셔서 다시 믿음생활 하도록 세워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충성스럽게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가 보신 분은 다 알지만 훈련소에 들어가면 훈련소에서 모두 벗고 이제 사제라고 하는 것은 몸 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다 관제품을 공급받습니다. 사제품은 쓸 수 없게 통제 당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여러분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신겨줍니다. 모든 것은 나라에서 다 해 줍니다. 단지 여러분들은 나라만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받은 것을 자랑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가지고 어떻게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그것이 주님 앞에서 정말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겠냐고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러면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충성하라고 하는 이 말에 죽도록 이라는 말을 덧붙이심으로서 충성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죽도록 이라는 말씀만 안 하셨더라면 우리는 이 성경구절도 다른 성경구절처럼 큰 소리로 당당하게 읽을 수 있을텐데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말입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만 해도 충성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데 안 가고 비록 지각은 했어도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충성스럽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성하는 자는 죽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려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기까지라고 하는 단서를 가지고 살아야지만 충성된 생애를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든 충성은 매 순간 순간마다 죽음이 목표는 아니지만 만약에 생명에 충성을 다하는 데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 되면 생명도 내려놓을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단서에 의해서 충성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앞에서 분주하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 왔다 라고 하는 것과 충성하면서 살아 왔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충성하는 마음 없이도 분주하게 섬기면서 일년을 보내고 일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충성은 죽도록 입니다. 언제나 기꺼이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내 자신을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마음으로 다 바쳐 온 섬김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고 은혜를 입은 우리는 예외 없이 주님이 두신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습니까? 그 자리에서 소명을 다했습니까? 소명을 다하며 살려고 할 때에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에 생명을 걸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 서머나교회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고 고난의 많은 발자취를 걸어 온 이 서머나교회를 향해서 충성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이 교회를 향해서 다시 한번 이 교회를 깨끗하고 순수하게 하신 마음을 가지고 불같은 시험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험을 이기고 이 시련을 견디는 이 길이 죽도록 충성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곤고함이 여러분들을 둘러쌀 때 여러분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여, 사는 것이 너무 곤곤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더 힘들지요, 그때 여러분 의연하게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그래 세상은 다 그런 거야”
불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정말 하나님께서 시련 가운데도 주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그 소명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께로 돌아 올 때 주님 앞에 약속했던 바를 굳건히 붙들고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소명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으며 하나님 앞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살려고 할 때에 주님이 그 사람의 믿음과 인생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겠습니까? 나는 말이죠 다른 사람이 이 말씀을 했으면 나는 쉽게 용납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신 이 분은 바로 요한도 아니고 예수님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살지 못한 삶을 우리에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도록 충성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오늘 그 분이 ( ? )섬에서 홀로 귀향을 받고 외로움을 벗삼아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는 요한에게 나타나서 마지막날에 될 위대한 계시들을 다 가르쳐 주실 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복음과 충성된 삶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도 잃어버리고 정들었던 교회도 떠나 와서 ( ? ) 외로운 섬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홀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던 고난받은 한 사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도록 충성한 사도에게 죽도록 충성하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교회의 될 일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말씀하신 분이 죽도록 충성하신 분이었고 주님이 그 말씀을 적어 내려가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사도가 그렇게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해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사도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주님은 지금 충성스러운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오늘 충성하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교회를 섬길지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정말 성경을 붙들고 성경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산 생애가 있어야지만 자녀들에게 그 성경을 가르칠 것 아닙니까?
예수 십자가에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의 달려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부모로서 그런 삶을 살 때 그런 삶을 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아, 저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가 아닌데.. 주님의 은혜를 받고 값없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삶을 안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태만하고 나태한 삶을 살아도 하찮게 생각하고 그렇게 함께 먹고 마시고 주님이 주신 그 귀한 은혜를 하나님의 일들을 위해서 충성하지 못하는데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이렇게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못 박히시고 그리고 정말 충성하다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셨습니다. 일생 사시면서 삶의 초점이 너무나 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일생 사시면서 분명했던 초점은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두루 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기도하실 때에 죽음이 지나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정리하시고는 즉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아름다운 한 편의 시와 같은 묘사로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주님의 생애는 죽기까지의 생애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그런 곤고를 받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이 많으냐? 그렇다면 그 때가 바로 너희가 더 내 앞에 충성해야 될 그 때니라”하고 말입니다.
4. 이긴 자를 위한 축복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下)
고난이 없는 신앙은 어떤 의미에선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에게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고 정직하게 믿음을 좇아서 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정결케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에 고난을 주시므로 그들이 스스로도 속고 있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파하고 결국은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참다운 복음의 기초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결한 자들로 하여금 이제껏 속아왔던 신앙생활 속에서 자기의 진정함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악된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은 교회를 정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정신차리고 살지 못했던 어리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과 그리고 각성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이 나라에 돌아가고 있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이러한 고난 없이 고속적인 성장을 누리면서 편안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쓰고 그러면서 근간 한 십 년 동안에 급속한 사회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혼돈과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 모두 이 한민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한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또한 자신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것인가를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라가 부도날 위기를 만나게 되자 비싼 술집들이 문을 닫기 시작합니다. 값비싼 요리집들이 폐업 신고를 하는 일이 속출합니다. 외제품을 쓰고 흥청망청 돌아다니던 비행기가 텅 비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사치하고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직장이 떨어질 위기가 놓여서 이제는 근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일반 사회도 고난을 통해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축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불꽃과 같은 무리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디서 살던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인정하는 신앙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정결해지지 않고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정결한 그 곳에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취고 순결하고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의 정결한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탐욕과 죄악에 물들어 있는 땅에서 똑같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탐심과 더러운 욕심으로 불법과 불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신앙과 삶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당신의 백성들이 들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시는 백성일수록 더욱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셔서 특별히 은혜를 많이 준 백성일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순결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서머나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세상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내 놓을 것이 없는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이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믿음을 지켜온 이 서머나교회에게 다시 한번 십일 동안 커다란 환난이 있겠고 그리고 옥에 내어주는 일까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고해 주신 것은 서머나교회에게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충성을 다하며 살아온 이 교회를 더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잠시 시련을 더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신실하게 의뢰하며 살려고 할 때 여러분 더 큰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너 예수 믿어서 잘된 일이 무엇이냐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 것이 네 인생에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고 한번 그 축복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변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증거들을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보여주고 계시는 한 환난은 환난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그 강한 열심을 보면서 우리는 고난 속에 깃들여 있는 그 아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과 우리 같은 죄인을 향한 뛰어난 관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정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고난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지체들을 볼 때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단지 목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나면 마음속에 그런 확신이 옵니다. “하나님이 저 지체를 얼마나 훌륭한 곳에 쓰시려고 저렇게 더 순결해지도록 어떻게 보면 가혹할 정도로 믿음으로 사는 분량만큼 더 가혹할 정도로 그렇게 시련 속에서 연단하시고 정결케 하시는가” 저는 그런 지체들의 인생이 앞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릴지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그 고난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인격이 고매한 몇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든 공통점은 무엇인고 하니 많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모두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평안해도 이전에 남이 알지 못하는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고난만 많이 겪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들어내는 고매한 인품과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온 이 서머나교회에게 열흘 동안 더 큰 환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머나교회를 고생시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머나교회를 더 정결케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 분이 당신의 교회들에게 예고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도 세탁되지 못했던 우리의 불결한 죄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우리 자신의 부패한 자아를 보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케 해 주시도록 그런 기회로 우리들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이길 힘을 미래의 소망만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믿음으로 살면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 생활을 인정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은혜주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하나님께서 수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고난이 넘치지만 위로는 더 넘치고 시련은 크지만 시련 속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이 더 큽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시련의 벽,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신앙으로 이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는 사람들은 남들이 고난이라고 말하지 그들은 고난을 고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고난 속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얼마 안되지만 이렇게 돌아보면 주님을 믿고 난 이후로 가장 넘치는 기쁨이 있을 때에는 고난이 함께 있을 때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한 인격 안에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기 쉽지 않습니다. 슬픔이 인격이란 그릇에 담겨 있는 곳에는 기쁨이 와도 기쁨이 기쁨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 속에는 참다운 기쁨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넘치고 시련 속에서 아파하는 것이 큰 것인데도 불구하고 순간 순간 고난의 어두운 먹구름을 가르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늘로부터 고난의 먹구름을 가르고 내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난만 있고 이를 악 무는 결심밖에 없다면 우리는 강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강해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결심이나 아집이나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강해지게 하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기쁨의 꽃, 시련의 먹구름을 가르고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고난을 능가하고 시련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오히려 인내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평탄한 길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고난의 역경의 파도를 헤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흔들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의 신령한 위로를 받고 한 맺혀서 고난을 받으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을 권면하고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 하나님께서는 모두 고난의 학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서머나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한번 마지막 시대에 더 정결한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어내는 그러한 교회로 하나님께서 쓰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어두울수록 더 순결한 교회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미움으로 가득 찬 세상일수록 교회는 불길같이 타오르는 사랑을 가진 그런 교회가 되기를 세상은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하시고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고난 당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때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고난을 받을 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여러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여러분들은 더 세상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면서 내가 신앙도 양보하고, 인생도 양보하고 다 양보할테니 나도 어떻게 좀 잘 살수 있게끔 도와 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버리는데도 자기는 세상을 붙들고 매달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곁을 점점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고난을 받을 때에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는 이런 고백을 하면서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무슨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까? 고난을 받으며 믿음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점점 정결해질 것입니다. 이제 점점 정결해져서 우리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마음껏 주님을 경배하고 방해받지 않고 믿음을 따라서 살아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내 평생 사는 날 동안에 나 같이 천한 인생이 주님의 보혈로 용서받았으니 이제는 주님의 이름 높이며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오늘 이 서머나교회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의 소원은 나라를 무너트리고 나라를 전복해서 국권을 손에 쥐는 것이 서머나교회의 목표가 아닙니다. 서머나교회는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궁핍하게 되었는데도 그것 때문에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도 마음 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해주고 삶 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달라는 소박한 소원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소박한 거룩한 청교도들이 왜 수 천년 동안 살아왔던 정들었던 잉글랜드를 버리고 언제 어디에 도착해야할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돛대 하나, 그리고 삿대 하나에 모든 운명을 맡기고 그 범선에 올라서 그 시퍼런 물결이 일렁대는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부동산을 위해서였습니까? 거기서 나는 금광을 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장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경대로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자신들의 사랑인 하나님께 경배하고 주님만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달라고 하는 소원 하나가 정든 땅을 버리고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만들었습니다. 풍토병과 토인들과 더불어 싸우고 고난을 받으면서 이제 건너간지 1년만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동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감사 예배를 드리게 만들었던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그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돕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 청교도들의 신앙은 내세에 대한 신앙을 관찰하지 아니하고는 그들의 진정한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평균 수명이 평균 건장한 남자의 수명이 삼십 사세 밖에 되지 않고 태어난 아이 셋 중에 하나는 삼 년도 되기 전에 죽어 넘어가는 그러한 가족 상실이 비참한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고 기근에 시달리던 그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망하였겠습니까? 그들의 소원은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지불해야 되는 고난의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죽음이 없고 굶주림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도 없는 그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거기를 사모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포함해서 한국 교회에 있는 교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부르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없던 시대에는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계시록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존하신 그분이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실 때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고난으로 넘친 생애를 살았고 밧모섬에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있는 것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아서 그 외로운 섬에 유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한 소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믿음을 따라 살고 신앙으로 살려고 애를 쓸 때, 그 때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세상에는 영원한 안식이 없다느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오늘 자연스럽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고난을 이기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생명의 면류관은 순교를 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으로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초조하게 수학 능력 시험 발표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취직 시험을 본 많은 사람들은 요즘 같은 불황의 때에 육 대일, 사대일, 된다는데 여덟 명 취업하려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보도가 나오는 때에 내가 과연 붙을 것인지 사람들은 고민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가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면접이 끝나고 고용 계약 마지막 도장을 찍고 첫 번 월급 봉투를 받아 보아야 취직 시험에 합격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이 생명의 면류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 놓은 당상입니다. 단, 그가 믿음으로 주를 위해 고난을 견디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믿음으로 자기에게 태워진 십자가를 지고 고난 속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그 고난의 때를 인내하며 주를 바라보며 경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가 언제 신앙을 시작했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정말 하나님 앞에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킨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생명의 면류관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쓸 때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지 써 본적이 없어서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써 본 사람들은 압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생명의 면류관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아마도 이 생명의 면류관은 그 면류관을 쓰고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또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놀라운 생명적인 교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든지 하여튼 이 생명의 면류관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좋은 상급이 되는 면류관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따라서 고난을 이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하신 말씀에 위로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흘동안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짧은 기간동안이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이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면 잠깐 동안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견디고 인내하지 않는 고난은 우리에게 일각이 여삼추와 같이 길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잘못된 하나님과 관계 때문에 또한 고통을 지속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고난을 인내하는 자에게 이 고난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신 이 말씀을 굳게 붙들면서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또 성경은 오늘 이렇게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는 성도들에게 두 번째 약속을 주는데 그것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두 번 죽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겉 사람이 있고 속 사람이 있듯이 겉 사람의 죽음이 있고 속 사람의 죽음이 있습니다. 한번 태어난 자는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자는 한번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육체의 사망뿐 아니라 마지막에 영혼이 불 못에 던져지는 지옥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또 한번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 태어난 사람은 오직 한번의 죽음만을 경험할 뿐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죽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슬픔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의 종식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육체의 죽음은 비로소 영혼이 자유를 얻는 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과 이제는 영원히 완전하게 함께 사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지만 그러나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육체의 죽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한 방법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던 목사님이 심장병이 걸리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떠나온 교회이지만 몇 년만에 그 병원에 가서 문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이 노인네 목사님은 좀 건강해지고 싶어서 내가 왜 병원에 누워 있느냐, 어떻게 빨리 좀 고쳐봐라, 그랬더니 이 의사가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병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병이 들려야 죽습니다. 병 들리지 않고 기관이 자동으로 멈춰서 죽으려면 최소한 백 이십 년 이상은 지나야 되고 그리고 죽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제 육신의 죽음을 종식시키고 영원한 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은사가 바로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 의사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그 목사님은 어느 날 자는 듯이 돌아가셨습니다. 심장이 멎어서 그러니까 가족들이 원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해합니다. 사실만큼 사셨고 그렇게 추한 꼴 보이지 않고 어느 날 자는 듯이 운명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가족들도 그렇고 본인도 그렇고 그런 의연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기약도 없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즐겨하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는 사랑하다 미워하고 만나서 감격하다 가는 어느 날 또 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고 싶은 대로 얼굴을 보면서 사는 것이 소원인데 그 소망조차 이루어지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는 날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고 나면 먼저 가서 기다리고 그리고 후에 다시 만나면 거기는 다시 이별도 없고 헤어짐의 눈물도 없고 보고 싶어 마음 아파서 가슴앓이를 하는 그런 슬픈 일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없습니다. 이런 모든 축복을 가져다주는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죽음인 것입니다.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평화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육신을 벗어버리는 거룩해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고 할 때 미안하지만 그 지옥에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불 못에 던져지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신앙을 따라서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를 위해서 살고 신앙으로 이기는 성도들에게는 이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을 이런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해서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라, 언제든지 주가 정하신 때에 네가 오라. 내가 너를 밟고 거룩하고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몸소 뵈오리라. 이런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고 오히려 죽음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담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산 이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서머나교회뿐 아니라 오늘도 서머나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고 고난 속에서도 어찌하든지 고난의 파도에 떠밀리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살려고 몸부림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이심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위하여 약속하신 이 놀라운 기업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고난의 때를 어떻게 지나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주께서 당신의 교회들에게 약속하신 이 놀라운 생명의 면류관의 약속과 죽음 너머에서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안식과 축복의 약속들을 우리가 시련 시킬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때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지나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고난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방법은 죽도록 충성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요,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역사해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묘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듣고 생각할 때보다도 그 깨달은 바를 행할 때에 그 진리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감격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만약에 거기서 그친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그런 사랑을 깊이 깨달은 다음에 그런 깨달음을 토대로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실천한 삶이 있다면 후자의 사람이 맛보는 사랑에 대한 지식의 축복은 전자의 사람이 맛보는 축복에 비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결에 대해서 수없이 듣는 것만으로는 여러분들이 성결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여러분들 속에 있는 불결들을 내어버리고 자신들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거룩하고 정결한 신부로써 자기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실제적인 순결한 삶을 살 때 순결한 삶에서 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와 자극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생애를 보십시오. 고난의 때가 가까워올수록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자기를 바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신명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고난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대속적인 속죄의 사역에 자기를 모두 바치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는 생애를 살게 하셨고 그렇게 충성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상심하고 고난이 닥쳐오고 있습니까? 그때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까짓 세상에 아부하기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께 잘 보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들이 지극히 큰일에도 충성을 다하는 법입니다. 작은 일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커다란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매 순간 순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교사로 구역장으로 혹은 교역자로 혹은 여러분들에게 재직으로 다양한 직분들을 맡겨 주셨습니다. 아무런 직분이 없는 사람들은 천사도 감당하기 힘든 성도의 직분을 맡기셔서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을 가정과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지난 일년 동안도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사명의 감각을 일깨우셨고 또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릇된 길로 갈 때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셨고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 우리에게 더욱더 강한 신앙의 불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지난 일년동안 우리들이 살아왔던 삶이 어떻습니까? 일월에는 충성하고 삼월에는 헤이 해지다가 유월에는 잃어버리고 구월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부담스러워지지는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십이월에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하나님 앞에 버린바 된 사람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어떠한 어두움 속에서 어떠한 인생의 고난 속에서 건져내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충성하라고 말씀하신 이분이 충성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이 이처럼 죄 많은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빌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힘입고자 나온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위로와 사랑을 더해 주시는 성실한 사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한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이합니다. 우리 이 세상에 돈 많고 라오디게아교회처럼 타락하는 교회 되기를 여러분 원하십니까? 가난하고 굶주리고 환난이 많아도 믿음을 지키며 산 교회요, 그리고 정말 처음과 나중이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들어 주시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개인의 삶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더 찬란한 충성스런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시록의 서머나교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