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밤을 지날 때
(2004-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날에(창17:1) 2004.10.17 주일오전 1
2. 죽음이 그리워질 때(왕상19:4~5) 2004.10.24 주일오전 14
3. 브니엘의 눈부신 아침을 맞다(창32:31) 2004.10.31 주일오전 24
4. 순전한 신자에게도 밤이 오는가(욥19:25~26) 2004.11.7 주일오전 35
5.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왕하6:16~17) 2004.11.14 주일오전 48
6. 절망 속에 들린 음성(행27:22) 2004.11.28 주일오전 57
7. 주님을 붙들 때(막5:25~29) 2004.12.5 주일오전 69
8. 믿음의 사람이 그 밤을 지나는 방식(에4:16) 2004.12.12 주일오전 80
9. 강가에서 흐느낄 때(스8:21) 2004.12.19 주일오전 91
10. 성실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렘33:6) 2005.1.2 주일오전 100
11. 불후(後)의 세미한 음성(왕상 19:11~12) 2005.1.9 주일오전 111
1.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날에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닙니다. 삶이라는 그 실존과 함께 실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동시에 또 실존이 그 밖과 더불어 작용하는 가운데서 자라나고 또 성장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구원받은 즉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건져내셔서 별다른 나라로 옮기게 아니하시고 여전히 죄와 슬픔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곤고한 날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불순종의 열매로서 곤고한 날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를 그런 곤고한 날을 지나게도 하십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는 이 모든 인생에 있어서 곤고한 날들을 사용하여 우리들이 믿음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세우는 훌륭한 도구로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환난과 시련의 때를 인생의 밤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인생의 밤을 지난 사람이 한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인생의 밤을 지났다고 하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밤이 아니라 그의 죄와 불순종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새삼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그려내고 있지만 단 한번도 사람을 위대하게 그려낸 적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편견과 사심의 껍질을 벗고 성경을 정직하게 보면 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거기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 때문에 강해진 것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몇 주에 걸쳐서 이런 인생의 밤을 만난 인물들을 살피면서 그들이 인생의 밤을 어떻게 맞이하게 되었고, 어떻게 인생의 이 어두운 밤중을 슬기롭게 지났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이 종식되게 되었는지를 우리들이 성경의 드라마를 따라서 탐구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시는 것으로 17장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17장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이 놀라운 사건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적 사건이었는데 16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16장의 사건이 또한 15장을 배경으로 할 때 그 메시지가 분명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16장 전체에서는 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집안에 어떻게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16장에서 그려내고 있는 이 그림은 이스마엘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밝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을 낳은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우 커다란 불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또한 15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이 불행이었는가 하면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십니다. 12장에도 만나주셨고 15, 17장에서도 만나주셨고 그리고 19장과 22장에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토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가고 그 지식 안에서 아브라함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믿음의 조상으로 영적으로 성장해가게 됩니다. 특별히 이 15장의 만남은 이 12장에 버금가는 감격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는 말씀은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메시지보다는 훨씬 친근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다가오셨으니 이는 14장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4장에서 아브라함은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세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연합군과 함께 상대를 해서 싸워 이겨 롯을 구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조카 롯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왕들이 피어린 복수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을 때 그 정말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것 같은 그런 시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두려워마라 나는 너의 방패요, 그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나는 너를 보호한다. 그리고 너의 지극히 커다란 상급이니라.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생애 잊혀질 수 없는 인상 깊은 약속을 거듭 하십니다. “네 몸에 날 그 씨가 사라에게서 날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되고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은 마치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를 끌어안으시고 폭포수처럼 키스를 퍼부어주시는 듯한 그런 애정의 표현과 함께 이루어진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주셨습니다. 네 몸에서 나게 될 그 씨가 내가 너에게 약속한 그 약속의 아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고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다. 그런 깊은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6장에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깊은 밤이 찾아오게 됩니다. 16장과 17장 사이에는 1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건너뜁니다. 김희보 박사님 같은 분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 시기는 아브라함이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내는 시기였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끊어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13년의 세월을 침체기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잔인할 정도의 침묵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명백하게 그의 인생을 찾아온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하게 된 인생의 어두운 밤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는 가정의 큰 불화였습니다.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습니다.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하갈과 그리고 사래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사래의 눈에는 하갈이 언제나 자신에게 잘 복종하고 순종하는 착한 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남편의 피붙이를 그 아이를 통해 끼쳐서 자기의 무릎에 놓고 그 아이를 사랑하고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 사래가 이렇게 하갈을 통해 아이를 가지라고 재촉하였을 때 아브라함이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아브라함을 참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기보다는 사래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자신이 이 자녀가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잔머리를 굴리게 되고 그리고 결국은 아브라함을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드는 대신 현실 속에 잔머리를 굴리고 그 인간의 꾀를 따라서 행동하도록 끌어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가정에 큰 불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 조상이 타락했을 때부터 죄는 들어오기만 하면 화목하고 좋은 관계를 다 깨트려버리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실제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역시 이런 일에 증인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자 제일먼저 일어나게 된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도 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트려지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일어난 일이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있었던 가정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래가 대단히 생각이 부족한 여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무슨 하갈이 애 낳는 자판기도 아니고 자기 남편을 빌려주면 아이를 낳고 그러면 자기와 하갈과의 관계는 어떤 손상도 없이 자기는 하갈이 낳아준 아기를 안고 자녀를 본 즐거움에 노년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 것입니다.
아마 하갈이 사래의 몸종으로 있을 때는 주인인 아브라함을 넘보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남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했을 때 하갈의 마음속에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이나 별다른 연모의 감정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 자판기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의 배속에서 자라가고 있었을 때 아브라함을 향한 의존과 사랑의 마음도 함께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의 처지와 사래의 처지가 비교되었습니다.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아브라함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사래가 아브라함과 멀어지게 되었으며 자신은 배속에 들어있는 아이로 인해서 아브라함과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그 남성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교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관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주인은 비록 무자하다고 할지라도 종을 향해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갈과 사래와의 관계가 산산이 깨트려졌고 이제 몸종과 여주인의 관계로서 친근했던 그들의 관계는 미움을 가슴에 품은 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래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산산이 깨트렸습니다. 하갈이 아이를 가진 것을 인하여 자신을 멸시하는 기색을 보자 사래는 이 일이 바로 당신 때문에 생겨난 일이라고 남편을 몰아붙이면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추궁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당돌하게 남편에게 대들면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투기에 가득 찬 이 사래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깨트려진 부부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아브라함과 하갈의 관계를 깨트려버렸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몸에 피붙이를 끼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요구에 쉬 몰려서 네 마음대로 내쫒든지 말든지 하라고 자신의 씨를 가지고 있는 사실적인 아내인 자기를 광야로 결국은 유리하고 방황하게 만들었을 때 이미 더 이상 하갈의 마음에는 인정 깊은 주인도 아니고 자신에게 피붙이를 끼친 사랑하는 남성으로서의 면모도 하갈의 마음속에 새겨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갈과 아브라함의 관계도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통들이 16장 전체를 가득 매웠고 불행은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이처럼 환경의 큰 풍랑이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관계의 깨트려짐으로 다가왔습니다만 당신께 불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고통에 직면하게 하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고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복주시기 위한 수많은 보화들도 가득하지만 정신 못 차리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때리시기 위한 회초리도 다양하도록 많은 회초리가 각자 체형에 맞게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뼈까지 부러질 정도의 굵은 몽둥이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고 웬만큼 표 나지 않는 가느다란 실 채찍에 이르기까지 각자 기질과 성품에 맞도록 하나님께서 모두 준비해놓으시고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회초리가 가득 들어있는 창고를 열어 그 회초리를 꺼내지 않도록 살아가는 성도들은 복이 있는 성도들입니다. 침묵하시는 것을 보니까 자주 꺼내시도록 많이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다루십니다.
그렇게 하시는데 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혹은 큰 흉년을 만나서 밥을 굻어서 아사 직전에 이른 것도 아니고 자식이 커다란 사고를 당해서 정말 부모의 가슴을 찢어지게 만든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깨트려졌습니다. 화목하고 사랑이 넘쳤어야 할 가정은 이 사래의 충동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자 산산이 깨트려지게 되고 갈등과 상처로 가득 찬 가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스스로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번에 요절을 내셔서 그래서 제물을 산산이 흩어버리시거나 아니면 생명을 거두시거나 아니면 큰 질병을 허락하시거나 이런 일들을 하실 수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환경의 커다란 고통이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의 바로 그 일의 증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런 아브라함이 인생의 밤을 지날 때 일어난 또 하나의 일은 이런 환경의 커다란 깊음 뿐만 아니라 내면의 깊음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가운데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13년이란 세월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끊어진 관계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13년 이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는 나이가 86세였고 하나님이 말씀해주실 때가 99세였으니 13년이지만 거기에다가 범죄 하여 이스마엘을 잉태케 한 그때에 약 1년을 가산한다면 결국 그런 불순종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이 굳어지고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까지 계산한다면 최소한 14년 혹은 15년 이상의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었는데 특별히 이 13년 내지 14년 동안은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을 피붙이로 잉태하였다는 그 소식과 함께 그 아이가 피붙이로 태어나고 그 핏덩이가 태어날 시절은 활을 어깨에 메고 들을 뛰어다닐 소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아브라함은 전혀 아브라함답지 않은 인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들리는 주님의 음성이 끊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된 가치와 덕목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거는가 하면, 매우 중요한 것들은 사소하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가치는 소유한 물질의 다과나 지위의 고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통이고 그 교통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의 들림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이 귀에 말씀하셨으나 이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시간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들리고 하나님이 예배 시간마다 자기를 거룩하신 그분 앞에 세우시는 말씀이 있는 그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인생의 행복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축복이 있는 사람들인지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성경을 펴도 일주일이나 열흘, 혹은 한 달 동안 아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을 지나는 것이 영혼의 얼마나 어두운 위험한 밤을 지나고 있는 시기인지 여러분들은 알고나 계십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빌미로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에 더 많은 꿈을 누리게 되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하나님 앞에 수다처럼 늘어놓은 일에 익숙해지게 되기는 사람을 대할 때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습관이 하나님께 나타나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인 미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신자는 열심히 기도해서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영적으로 깊이가 있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바꿔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그 날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곤고했을까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떠났는데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라고 하는 생명과 같은 기업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이 땅의 기업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의미였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아브라함의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적인 깊이가 모자라면 눈치라도 있어야 됩니다.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설교를 들어도 바람을 잡는 것처럼 들린다면 영적인 깊이가 없어도 눈치라도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열었는데도 아무 음성도 들리지 않고 기도를 하는데도 어떤 응답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납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몇 주 전에도 제가 알려드렸지만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안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모릅니까?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웃는 것도 또 눈치가 없는 것입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그것은 영적인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아주 극단적인 상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기도하실 때 특별히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소리를 질러도 잘 다가오지 않는 것 같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그게 무슨 깊은 영적인 통찰이 필요한 일입니까.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절대적인 이 침묵 속에서 아브라함이 살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13년 동안 살수 있었습니까? 살았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면 죽을 것 같아도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하는 고백입니다. 얼마든지 삽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 찬란한 믿음으로 어두운 역사의 밤중을 밝혔던 히스기아나 아사와 같은 임금들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배교할 신자는 자신이 절대로 배교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견고하게 은혜에 붙들려 살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꼭 배교할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소리가 비수와 같이 여러분을 찌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내 영혼의 어두운 밤이 10년이 넘은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영혼의 긴 밤이 지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 시대에 그것도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서 율법도 묵인한 그 종을 첩으로 맞아서 아이 하나 낳은 것이 13년 동안 하나님 앞에 외면당하여야 할 정도로 무서운 죄였는가. 이런 의문을 한번 제기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개량적으로만 그 죄를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보면 성경에도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신자가 도둑질 하면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그를 판단하고 그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객관적으로 기록된 것 이외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주 자주 반복해서 동일한 것에 대해서 계속 지적을 하시면서 너 그거 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경고하시고 또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우연히 설교를 들으러갔는데 도둑질하지 말라. 성경을 폈는데 그날 아침에 훔치지 말라. 큐티를 하는데 본문이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한 것에 대해서 경고가 주어질 때 그때는 만약에 그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이 매우 가혹할 정도로 그 죄를 다루십니다.
또 하나 아브라함의 경우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바로 16장에 범죄가 있기 전에 15장에서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리니 그 씨가 하늘에 별,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대충하신 말씀이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 대면해서 말씀하시다가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꽉 끌어안고 네가 이렇게 나를 믿으니 나는 너를 의롭다고 말하고 싶다. 너 정말 훌륭하구나. 꽉 끌어안고 입맞춤을 퍼부으면서 볼을 비비면서 내 친구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마. 너는 내 말을 믿으라. 내가 너에게 꼭 아들을 주어서 그 씨로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고 너는 그 모든 후손들의 영적인 조상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똑같습니까?
하나님이 강한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의 가슴에 새겨 넣으셨는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력한 징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 13년 내지 14년 동안의 긴 세월동안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 속을 지나게 됩니다. 아마 그 13-4년 동안의 그 어두움의 세월동안 그가 겪어야했던 마음의 깊은 고통과 괴로움은 아마 이스마엘을 갖게 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기쁨과 즐거움, 성적인 만족,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의 쓰라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됩니다. 그 밤은 얼마나 곤고한 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행복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데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의 전진들이 고난과 시련이 가득 찬 길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하게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용기가 어디에서 생겨났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어디에서 생겨났습니까? 고난과 시련의 폭풍이 몰아쳐도 주님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폭풍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함께 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난 속에도 하님이 그들과 동행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왜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3-4년 만에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 속에서 첫마디, 한마디의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나 여호와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13-4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첫 번째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생각나게 해주시고 싶으셨던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나 여호와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환경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그 환경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이미 늙었고 그리고 사래 역시 나이가 많아서 생산하기가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흘러가고 자신의 온 몸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몸 어디에서 내 씨가 나와서 그리고 그가 자라서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들을 이룬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가 없었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후일 바로 그 믿음이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산채로 하나님 앞에 재무로 바치게 만들었던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믿음이 아브라함 속에서 모두 부패하여 사라졌습니다.
신자가 믿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게 되면 상식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비루한 방법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갈 장엄한 길을 선택하는 대신 비루한 인생들이 걸어가는 잔머리를 굴리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몰두하고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아브라함과 그 온 가족을 사로잡고 파괴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대신 상황을 붙들고 일련의 잔재주로 자신의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것으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고 오히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고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그들과 함께 동행 하기를 기뻐하셨고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그들의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그들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환난의 날 한복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많은 약속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수많은 약속들을 우리들이 굳게 붙들고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날에 처해야 할 우리의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형통한 날에 취하여야 할 우리의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며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오늘도 찾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남이모르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밤바다에 내동댕이쳐진 돛대도 없고 삿대도 부러진 한 조각배처럼 별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망망대해를 표류해야 하는 때와 같은 시기가 인생에 있어서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그런 망망하고 어두운 인생의 밤 한복판을 지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시거나 우리의 지혜의 용량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 인생의 어두운 밤 한복판에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 속에서 우리를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불순종과 약속보다 우리의 감각을 의존하면서 살았던 동물적인 삶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업이며 우리의 인생의 참된 행복이 그분을 가까이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끔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혹할 정도로 어두운 밤바다에 우리를 버려두시기도 합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우리는 긴 밤을 지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커다란 범죄를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더 많이 슬퍼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때, 그래서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을 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인생의 보호자로 스스로 자처할 때,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주님을 제쳐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슬퍼하십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선언했겠습니까? 헌신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충성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사람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가 없다면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으니 온 세상 이기네
별빛이 보이는 상황에서 별빛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가 사라진 것과 같은 어두운 인생의 밤중에서 상황보다도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폭풍우 한가운데를 지날지라도 흑암 한가운데를 통과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주 여호와가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님은 구원의 빛이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주께 속하여있습니다. 이 세상의 방백들을 의지하는 것 보다는 여호와를 의지함이 내게는 더 났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필요할 때 어느 한순간 믿음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올곧게 똑바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증거가 이어서 나타납니다. 13-4년 만에 침묵을 깨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꼭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여기서 “내 앞에서 행한다.”고 하는 뜻은 “내 면전에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 의미가 먼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리적으로 보면 어디서 뭘 하든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니까,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말할 때 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을 때도 행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안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표리가 일치되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꼬랑대우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다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행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다 행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행할 수 없다. 행하지 않는다. 그 사상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행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그것을 행함으로 내가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내가 이 일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은 표리가 부동한 그런 거짓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표리가 일치하는 악인들을 더 소망 있게 보십니다. 우리들이 위선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위선은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커다란 적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실해지지 않고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진실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한 성도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이 당신의 면전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의 불쾌함을 보이셨습니다. 13-4년이라고 하는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을 한번 범한 이 불순종의 죄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가운데 인생의 가장 어두운 한 밤중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밤중이 더 두려웠던 것은 영혼의 어두움이 인생의 밤보다 더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니엘이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 자를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고 하는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을 알고서도 하루에 세 번씩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난 동쪽 창문을 열고 예전과 다름없이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자 굴보다도 더 무서운 또 하나의 두려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록 사자 굴에 내던져지고 죽음의 문 앞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그가 정말 두려웠던 것은 육신을 죽이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소외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상의 지위를 걸고, 이 모든 영화를 걸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루살렘을 향해 난 동쪽의 창문을 열고 오직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음성이 들리지 않는 어두운 날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 보다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지옥의 깊은 시면으로 내려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이 다니엘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사자 굴에 처넣기를 원했던 악한 자들의 궤계를 어떻게 종말이 났습니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지지 않습니다. 혹은 이 세상이 그의 생명을 빼앗아갈 수도 있고 혹은 세상이 그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 세상이 그를 죽여 순교의 피로 물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워가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싶으실 까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동일한 마음으로 마지막 때에 이 믿음의 사람을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그러나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가 하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남다른 재능은 주님이 눈길을 끄는 대신 사람의 눈길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여러분의 재능이나 소유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고 그리고 그 약속을 굳게 믿는 사람, 하나님은 그들의 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인생의 어두운 밤을 보지 않게 하시며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난다고 할지라도 어두움보다도 더 찬란한 빛으로 그들을 그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빛의 나라로 데려가십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즘과 같이 환경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대학을 졸업하는 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실업자로 내몰리는 때는 더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정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주님의 들리는 음성이 이것이었으니 너는 완전하라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perfect라고 번역이 되었고 또 NIV 성경에서는 blameless 라고 번역을 했으니 perfect 라고 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이겠지만 blameless는 꾸짖어질 것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말로는 ‘타민’ 이라는 단어인데 순전함, 온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완벽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번 사경회 때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주제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나무라시는 것은 왜 완벽하지 못했는가. 문자 그대로 perfect 하지 못했는가. 왜 완벽하지 못했는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perfect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perfect 하다면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완전하다는 표현이 몇 군데 나오는데 그것 모두가 다 완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적인 순전함이나 온전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여기서 문제를 삼으시는 것은 타민이라는 말 자체가 up rightness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올곧음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up right, 혹은 up rightness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올곧다고 하는 것은 올곧음의 좌소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사경회 때 깊이 살펴보겠지만 혼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너무 숙명론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 가운데 있었지만 그래서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었는데 내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설복시키셔서 나를 회개시키셨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말도 교리적으로 거듭난 사람의 경우에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일단 그런 정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자 하는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을 보고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문제가 됩니다. 내가 돌아올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셨다. 거기서 비롯된 말하자면 그 말도 안 되는 상식적인 교리가 이면에 무엇인가 하면 따라서 나는 믿음에서 미끄러질지라도 애는 써보겠지만 내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고 그리고 미끄러지는 것은 나의 연약함이 가져다주는 숙명적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인 은혜에 달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은혜에서 미끄러진 자리에서 돌아올 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분의 은혜만 높였던 겸손이 미끄러지면서 그 미끄러지는 것을 하나님께로 책임을 전가하는 교만으로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인간의 사악함이 만들어낸 자기방식의 교리입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의지작용 내에서의 올곧음을 가지고 문제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아브라함을 다그쳐 세우시는 이유는 내가 너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큰 계시로, 큰 비전으로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내 뜻이 무엇이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 말해주었다. 그러면 너는 완벽하게는 살수 없어도 주님이 주신 그 약속을 붙들고 살려는 의지의 단호함, 그리고 올곧게 이 의지적으로 그 약속을 계속 붙들면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의지의 일관된 헌신이 있어야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보고 완벽하라고 요구를 하시게, 완벽하신 분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보고 완벽하라고 그러셨겠습니까? 동일한 맥락에서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그 완전의 뜻도 바로 그런 의지의 올곧음이 유지되도록 자기 자신의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대한 아주 심히 부적절한 이해로 말미암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도 이게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초처럼 물결에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에 당연한 것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하나님 앞에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그 고백을 진실한 참회가 없이도 마구 망발합니다. 그런 것이 과연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난한 마음의 간구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의지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강력하게 그 의지가 올곧음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강력하게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은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충분히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해될 수 없는 명백한 계시를 주셨고 그리고 사랑에 넘치는 뜨거운 헌신으로 그에게 약속의 성취를 보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이 약속 붙들고 살려는 의지의 행사가 일관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상황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 아무 것도 아닌 껍데기 밖의 결과가 16장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간음에 준하는 죄를 짓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그것을 안고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떠났던 그 담대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이삭까지도 기꺼이 하나님 앞에 바치고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그 아브라함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롯을 구출하고 위기 속에서 떨고 있으면서도 감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퍼붓는 사랑을 경험하는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읽어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끄러진 것입니다. 올곧음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과거의 믿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과거의 믿음은 과거에 살았고 미래의 비전은 미래에 우리를 살게 할 것이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늘 믿음입니다. 현재적인 믿음입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우리들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면서 나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그리고 나는 지금 비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생의 밤을 지내고 눈에는 아무 길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한 가지를 보이는 것처럼 믿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나는 믿노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그길 안에서 내가 주님의 손을 잡고 행하노라면 지금 걷는 이 어두움의 한 발짝 한 발짝이 빛 가운데서 드러날 때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한 발짝 한 발짝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길이 가장 선한 길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저버리고 환경에 의해서 떠밀리고 좌절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 아첨에 빠지고 부패한 영혼, 타락한 정서를 합리화하면서 살면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음부와 같은 영혼의 깊은 밤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이 빛을 주시지 않으셨나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게하시지 않으셨나요? 누구든지 그 복음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고, 더러운 정욕과 싸우며 힘이 모자라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정결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미래를 몰라 불안하고 두려워 떨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품으로 안아주셔서 당신과 영원히 동행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시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는, 하늘의 지혜를 힘입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2. 죽음이 그리워질 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고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19:4-5)
인생의 밤을 지날 때 두 번째 시리즈입니다. 오늘은 죽음이 그리워질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의 이야기 한 토막을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뛰어난 선지자였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 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이 다르시던 시대였습니다. 북 왕국의 선지자였고 아합의 시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번영하던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가장 배교적인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오늘 인생의 어두운 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합의 시대는 종교적으로 그야말로 영적인 어두운 밤의 시대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가장 능력 있는 걸출한 종,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을 보내어 아합의 시대와 마주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어둡고 배교적일수록 강력한 말씀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 시대를 포기하지 않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엘리야는 바로 그런 시대에 사명을 받아서 아합의 시대의 그 불신앙의 풍조, 더불어서 싸워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아합의 시대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이세벨이라고 하는 이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이 여자는 해양민족 출신으로서 베니게아에서 이스라엘로 시집을 온 여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바알종교로 선교하기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침투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 사람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떤 신앙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철저히 여호와를 믿는 종교를 탄압하고 바알종교를 선포하기 위해서 선교적인 일생으로 헌신으로 일생을 살았던 여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는 고난을 많이 받아야했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바로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가 낙심하고 있는 장면이 오늘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들이 이 선지자의 낙심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선지자의 능력을 이야기해보아야겠습니다. 그가 낙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엘리야 선지자는 구약에서 가장 능력이 많은 선지자로 불려졌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르냐고 물었을 때 엘리야라는 사람도 있다는 보고를 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큰 능력을 예수님께서 행하시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엘리야 하면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바로 앞장인 18장에서는 구약에서 잊혀지기 어려운 중요한 사건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갈멜산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그래서 선지자들이 모두 피하여 숨었고 그리고 그 죄로 인해서 그 이스라엘 온 땅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이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을 대면하게 되고 그리고 아합에게 제안을 합니다. 바알신과 그리고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데리고 갈멜산으로 올라가자.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부르고 불을 내리는 그 신이 참 하나님이라고 결정하자. 아합도 그것을 좋게 여겨서 이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하나님을 섬기는 한 사람 엘리야가 갈멜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장작을 쌓아놓고 먼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이 부르짖으며 자신의 신들의 임재를 구했습니다. 아침부터 정오에 이르기까지 부르짖어 열심히 간구했고 심지어는 칼로 자신의 몸을 상해 피를 줄줄 흐르게 하면서까지 인간적인 열정을 가해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담대한 엘리야는 850대 1의 싸움에서 그들을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너희 신이 죽었는가. 아니면 출장을 갔는가. 아니면 지금 자는가보다. 한번 깨워봐라. 그들은 더욱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며 신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 응답도 하늘로부터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이제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고 거기에 12지파의 돌을 놓고 장작을 놓고 물을 붓고 도랑을 팠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주님은 단번에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불로 임하여 그 모든 재물들을 다 태워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850대 1의 싸움에서 이 선지자는 크게 이기고 그리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 소식이 이세벨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이세벨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바로 엘리야의 낙심의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선지자 엘리야를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병사들이 엘리야를 추격했을 때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을 하여야 했습니다. 하루 길쯤 도망을 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통로를 보면 갈멜에서 브엘세바 그 다음에 브엘세바에서 다시 광야로 이르게 되는데 갈멜에서 브엘세바까지만 지도를 보면 장정이 한번에 가기에는 어려운 정도의 먼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어째든 이 선지자는 그 먼 길을 달음질하며 도망을 쳤고 그렇게 도망을 하고 아무도 없는 광야에 로뎀나무 그늘에 주저앉았고 거기에서 깊이 낙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넉넉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만큼 산 것만 해도 나에게는 충분합니다. 더 이상 나에게 인생을 계속 이어갈 그런 삶의 욕구가 없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리고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죽음을 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참 인간의 강함과 약함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850대 1의 싸움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이 선지자,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그 많은 종교지도자들과의 전투에서 너끈히 살아남은 이 선지자, 그 수많은 대적들이 자신을 에워싸도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줄 모르던 이 담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지금 로뎀나무 그늘 아래 낙심과 실망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엎드려있는 이 모습과 그 두 모습을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아마 처음 언급한 그 선지자의 능력 있는 모습에서 그 선지자가 이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전설적인 행적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삼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그는 천대 일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죽은 자만 천명이었으니 아마 실제의 싸움은 천대 일보다 훨씬 많은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장한 군사들이었지만 삼손의 손에는 들려진 나귀의 턱뼈 이외에는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일천 명의 군사들을 때려죽였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귀골이 장대한 그 거인이 그 당나귀 턱뼈를 가지고 일천 명의 군사를 때릴 때 그 놀라운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춤추듯이 그는 전투를 하였고 당나귀 턱뼈에 맞아서 수많은 군사들이 엎드려져 시체가 무덤을 이루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사사의 나약함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순간에 이 사사는 주저앉아서 깊이 낙심하고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아무 힘이 없고 여기에서 목말라 죽을 것이라고 하는 낙심된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만약에 그 순간에 죽은 줄로 알고 엎드려졌던 블레셋 병사 하나가 일어나서 삼손의 목에 칼을 겨누었어도 아마 삼손이 그를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모두 낙담했을 때 사사는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앞에 샘을 터트리셔서 그래서 그 터친 샘에서 물을 마시고 정신이 쇠락하게 되어 그곳 이름을 엔학고레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한 사람들이 내일도 강한 것이 아니고 오늘 약한 사람이 또 내일도 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은 이처럼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러나 사실 엘리야 선지자가 이 광야에 엎드려서 낙심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하고 있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코 이 모습이 신앙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앙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인생에 대한 깊은 낙심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인생의 길에서 밤중과 같은 인생의 미로에서 낙심하고 엎드려질 때는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실망이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며 사는 사람들은 이런 실망에 빠지는 예가 적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낙심에 빠지는 예가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치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이 선지자가 아닙니까? 그들이 모두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언약백성에 대한 위대한 일, 그 언약의 주관자가 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어서 낙심한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바라게 만들고 실망한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갖게 하는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고 직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지금 엎드려졌습니다. 낙심했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인생의 깊은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금 처음 지납니까? 어떻게 보면 아합의 시대 전체가 인생의 어두운 밤이었고 역사의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배교의 역사 속에서 태어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의 모든 삶은 필연적으로 핍박의 어두움을 지날 수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때는 훌륭하게 이겼습니다. 850명의 이교도들의 지도자들이 에워쌓을 때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밤보다 무서운 것은 마음의 밤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인생의 어두운 밤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어두운 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깊은 낙심 속에서 그는 엎드려졌고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믿음이 없는 선지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입니다. 아마 선지자가 지금 로뎀나무 그늘아래 엎드려 잠들어있는 하나님 앞에 죽음을 구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선지자가 잘못했다는 것을 우리들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너는 내가 부른 선지자요, 이렇게 실망하고 낙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워 나를 향하여 살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주의 종이 아닌가.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발길로 선지자의 옆구리를 걷어차시는 광경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도 우리를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강할 때도 있지만 약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구속을 이루실 때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사람을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난 어린아이의 몸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몸이었으니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시기에 충분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이 되시도록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모두 맛보십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들이 겪는 그 모든 수고와 고통과 연약함을 다 경험하게 하셨으니 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도 영원히 우리를 통치하고 중보자로 다스리시는 대 제사장으로서 위하여 대신 죄 사함을 받는 헌제자인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제사를 받을 때 그분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누구인지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두 이해하셨고 불의는 없으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도 몸소 경험하셨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실 때 그렇게 애달프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의 생애를 사신 이유도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면서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 무엇인지를 배우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완전하신 분이셨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가르칩니다. 불순종하셨다가 고난을 통해 순종을 경험하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 앞에 순종하시는 분이었지만 고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의 몸을 통해 더 많이 충만히 배우게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어려운 삶이고 그리고 그런 올곧은 순종의 삶이 얼마나 그들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잘 반영하는지를 기억하실 수가 있는 중보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있는 이 대제사장은 연약함을 체휼하는 대제사장이라고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오늘 이 선지자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 엘리야 선지자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도망하고 그리고 광야에 엎드려져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낙심 가운데 주님께 실망하고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850명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이 엘리야 선지자가 체포되면 한번 담대하게 이세벨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주님의 기적을 보든지 순교당하면 되지 도망은 왜 갑니까! 그리고 도망을 갔으면 다시 재무장해서 나타나야지 광야에 엎드려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낙심 속에서 잠들어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한정 강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었지만 오늘 모든 도움이 끊어진 가운데 로뎀나무 아래 엎드렸을 때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는 여호와의 편에 선 자는 나밖에 없다고 하는 깊은 고독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낙심은 항상 우리에게 이런 고독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엎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낙심한 가운데 엎드려져있는 선지자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로 다루셨으니 하나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자, 한번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그 능력의 선지자가 깊은 외로움 속에 광야에 잠든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게 하나님께 실망하고 광야에 엎드려진 믿음이 식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찾아가게 하시는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조용히 묵상해보십시오. 선지자는 팔로 베게를 하고 깊은 피로감 속에서 잠들어있고 굶주림과 배고픔 속에서 탈진한 가운데 입술은 하얗게 부르트고 그리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어쩌면 하나님께 실망하고 자신은 혼자라는 외로운 때문에 흘린 눈물자국을 남긴 채 그는 그 로뎀나무 그늘아래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잠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애정 어린 손길로 그를 두루 어루만져주었습니다. 마치 고이 잠들어있는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애정이 깊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그의 전심을 어루만졌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위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 저는 살면서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노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째든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주의 도움을 구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깊이 낙심해서 선지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낙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실망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간밤에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정말 살기도 싫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야말로 정말 이렇게 잠들었을 때 깨지 말았으면 했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제 밤까지 짓누르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희망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던 어떤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내가 그렇게 엎드려있더라는 것입니다. 넓은 벌판에 울면서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게 안타까워서 저에게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꿈에 그렇게 하늘로부터 큰 파이프 같은 것을 내려 보내시더니 파이프가 내려와서 머리 위에 딱 멈추더니 조금 있더니 깨끗한 기름이 막 쏟아 부어서 거기 전신을 목욕을 시켰다고 합니다. 나는 그 이후에 그 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내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는데 그분의 편지를 받고나서 비로소 풀려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왜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었는지 진짜 낙심하고 실망했는지 그분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저는 마음속에 그것을 깊은 심지로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이 선지자가 이렇게 깊이 연약함을 인해서 낙심해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엘리야에게 보내시고 그에게 선지자를 어루만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가 아닐까요?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여기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인생의 깊은 밤중을 지날 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불러서 이긴 신앙의 경험도 있는데 지금은 왠지 그 모든 밤중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낙심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남이 보기에는 반듯하게 교회를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만이 깊은 죄 가운데 몸부림치며 그 죄의 사슬에 뒤엉켜서 어떻게 하려야 할 수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적당한 원망을 가슴에 품은 채 이제 나는 끝났다. 이제 하나님께 정죄되었고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아무 희망이 없어서 차라리 죽기를 구하고 싶은 그런 죄악 속에 있는 분들도 여러분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만 지나가고 어려운 상황이 개선이 되면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모습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이 죄에서 좀 빠져나온 다음에 하나님을 찾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날이 정말 올까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다듬으시기 위해서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바꾸시기 위해서 그 고난의 시련을 주셨는데 여러분들의 잔재주로 그 시련을 극복하고 평화를 누리는 때를 여러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하나님 대신에 죄를 택한 자의 마지막 결말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화살을 쏘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아프게 하시고 그 심령을 상하게 하셨는데 여러분이 스스로 그 화살을 빼고 개선이 되어서 죄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해방되던 때가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성령께서 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오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을 보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부끄럽고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의 죄를 모두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십시오. 논리는 상대방의 이성을 굴복시키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굴복시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정직한데 그중에 회심이 뚜렷하지 않은 애들 중에서 시험이 너무 어려우면 유혹을 느낍니다. 특히 히브리 시험 같은 것은 거의 다 맞든지 빵점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보고 써야하는 유혹을 느낍니다. 저는 항상 감독이 없는 시험을 하기를 늘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번은 시험지를 모두 나누어주고 나는 퇴장할 것이니 너희들끼리 시험을 보라. 잘할 수 있겠는가 그랬더니 모두 각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험을 모두 나누어주고 교수실에 있었습니다. 끝나고 나니까 학생들이 다 거두어가지고 왔습니다. 15분 만에 정확하게 누가 커닝했는지 다 찾아냈습니다. 그 애들은 아직까지도 김남준 교수가 어떻게 그렇게 감독으로 안 들어오고도 누가 보고 썼는지를 다 알아냈는지, 왜 그랬는지 머리를 잘 써서 시험문제를 출제해서 이렇게 앉았는데 시험문제가 틀립니다. 이렇게 옆에 사람과 틀립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옆에 것을 보고 쓴 것입니다. 다 다른 것을 보고 쓴 것입니다.
제가 참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보고 썼는데 여기의 1번이 여기는 3번입니다. 여기의 4번이 여기는 6번입니다. 그러니까 보고 쓴 것인지 아무렇게나 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3번의 이쪽 줄에 1번답이 올라와 있으면 자기가 생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보고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될 리가 없습니다. 또 한번은 이제 옆에 애와 똑같다더라. 그러니까 앞에 애를 보고 썼는데 이제는 앞뒤 옆이 다 틀립니다. 시험지를 네 종류를 내서 여기 틀리고 여기 틀리고 네 명이 하나씩만 같게끔 이렇게 시험지 문제를 낸 것입니다. 네 종류의 시험지를 만든 것입니다. 순서를 다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독은 가만히 교수실에 기대고 있다가 시험지를 갖다 주면 쭉 펼쳐보면 앉은 줄이 있으니까 이놈이 이놈을 보고 썼고 이놈이 이놈을 보고 썼구나. 다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광고를 붙입니다. 7명이 커닝을 했다. 그 애들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어떻게 저것을 알까? 아마 여기다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고 봤나.
그래서 이제 그 중에 어떤 애 하나는 사람이 참 진실한데 그 순간의 유혹을 못 이기고 낙제할까봐 커닝을 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불러서 야단을 쳤을 텐데 들어오면 앉혀놓고 커피까지 한잔 타서 주면서 그래. 낮에는 직장에 가서 일하고 밤에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공부하는데 얼마나 힘들겠니. 아내는 아직까지도 직장에 다니니? 물어보면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이게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것보다 더 강력한 교육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다루실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가 엎드려져있을 때 발길로 엉덩이를 차시면서 이 녀석아 그것도 믿음인가 정신 차려라.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보십시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낙심한 이 선지자를 찾아오셔서 어머니같이 어루만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충만할 때 하나님만이 아니라 낙심할 때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곤경에 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밖에는 나에게 참된 위로가 없다. 내가 그분을 떠나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없다. 그런 믿음이 없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십시오. 세상의 쾌락이 주는 위로, 그게 위로가 됩니까? 더 깊은 미궁으로 들어갑니다. 위로가 됩니까? 우리의 영혼이 망가져서 느끼는 고통인데 세상의 물질의 약을 거기에 처바른다고 그게 심령이 위로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마음의 깊은 아픔이 있는데 그것을 고치겠다고 가슴팍을 파헤치고 빨간약을 바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병은 하나님의 마음이 고쳐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직한 회개와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실망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 실망하고 잠든 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실망스러우십니까?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긍휼로 이 선지자를 찾아오셨던 것처럼 찾아오셔서 어루만져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실 때 거기에 평화와 그리고 평강이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행복한 품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린다 에더라고 하는 가수가 부른 80년대의 유행가를 여러 번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 무슨 가사가 나오는가 하면 물론 그 사람이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그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디에 있는 타이틀이 성경과 너무 비슷합니다. 타락, 그 다음에 창조, 돌아오다. 이런 노래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영어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사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대로 옮길 수 없지만 번역해서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옛날에 당신의 품에 안겼는데 그 품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완전한 안식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맞다. 우리가 금으로 된 궁전, 은으로 된 왕궁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정말 그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 그것이 가장 퍼펙트 플레이스 가장 완전한 장소다. 거기에 위로가 있고 하나님의 품 그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는 그 행복과 즐거움 대신에 더 큰 즐거움과 위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온 몸을 휘감는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그 상처 나는 죄악들이 거기서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예수님은 그렇게 실망하고 만신창이가 된 그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품 이외에 참된 안식이 없음을 기억하고 그분께로 돌아와 어루만지심을 있는 위로를 받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숯불에 잘 구운 떡과 그리고 물을 하나님이 그 머리맡에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참 신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방법으로만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실 때 아주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다루심으로서 효과를 배가시키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전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선지자가 깊이 낙심해서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어루만집니다. 어머니와 같은 손길로 자기를 그렇게 두루 만질 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이제 부지중에 눈을 떴는데 마음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눈을 떴는데 잘 구운 따끈따끈한 떡과 맑은 물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선지자의 영적인 감격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 어루만지심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꼈다면 그 잘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시면서 공급해주시는 섬세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영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군들이 모인 장소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헌신적으로 일하던 어느 사역자의 사모님이 설교가 끝난 후에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둘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그곳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 가운데 그래도 한때는 소명을 받아서 영혼을 위해서 섬기도록 사역의 부름을 받았는데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까 너무 염려스러울 정도로 그렇게 저는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제 죄가 크지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기에 그래서 제가 아닙니다. 목사님, 그럼 뭡니까?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사모님은 지금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깊은 죄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모님 또래 한번 지나가는 갱년기 우울증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회개를 해야지 되겠지요?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그런데 그것도 해야지 되겠지만 그것 말고 사모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한번 해보십시오.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목사님 저는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TV 드라마를 가끔 보는데 어김없이 남편이 들어오면 사모가 되어서 드라마나 보고 있고 말이야. 그런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을 때도 TV앞에 앉아있는 것은 매우 불경건한 것이라고 훈련을 받아서 남편을 야단을 안 해도 재미있게 보고 나서 끄고 나서는 잠들 때까지 마음에 가책이 느낀다고 합니다. 불꽃처럼 복음을 전하며 살아도 신통치 않은데 여기서 드라마나 보고 히히낙낙 거리다니,
사모님, 진짜 하시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저는 드라마보다 영화가 더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십시오. 시간이 없고, 그러면 DVD라도 빌려다보십시오. 플레이오가 없습니다. 사실은 DVD오도 플레이오도 저희 집도 지난달에 제가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게 비싼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까 돈 십만 원밖에 안 하는데 내가 사줄까요? 하나 걸어놓고 그리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빌려다가 보고 싶을 때 보십시오. 그게 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사모님이 일주일 내내 168시간 그것만 보고 계시겠습니까? 보고 싶으면 보십시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사모님 그러지 말고 책 하나 쓰시면 어떻습니까? 예, 웬 책이요? 그리스도인들인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영화, 20개, 그리고 책을 내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다들 이거 보지 말라. 저것을 보지 말라. 그런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을 글 쓰는 것을 목표로 해서 20개 골라내려면 한 100편은 봐야지 될 것이 아닙니까? 하십시오. 목사님,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그러니까 가서 몸을 좀 돌보십시오. 의사에게 가서 좀 치료하고 약도 좀 복용하시고 필요하면 보약도 드시고 운동도 하시고 친구들을 만나서 좀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그리고 영화구경도 담대하게 하시고 그리고 드라마 다 보시고 가책 느끼지 마시고 TV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는 너무 무지합니다. 나는 그 사모님을 보는데 사실 좀 경우에 없는 이야기도 많이 하셨는데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누가 나에게 그랬다면 젊은 사람이 누가 그랬다면 혼났을 것입니다. 빠져도 한참 빠졌구나. 기도를 안 하더니 이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에게는 사모님, 이런 때 지나지 않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사모님은 정상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세심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신령한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외로우십니까? 하나님보고 좀 만져달라고 그러십시오. 누가보고 싶으십니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숨기는 것이 없이 그분께 고하십시오. 죄를 지었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그러지 말지. 그러나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정직하게 나는 이러 이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날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십시오. 모든 필요를 주님 앞에 구하며 어루만져주시도록 그리고 필요한 것을 주시도록 기도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점점 의지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추어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주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이 가장 멀리 계시다고 느낄 때는 바로 그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3. 브니엘의 눈부신 아침을 맞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31)
인생의 밤을 지날 때 시리즈 3번째 시간, 브니엘의 눈부신 아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구약의 족장 가운데 야곱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구약의 족장들 가운데 야곱이라는 사람이 경험한 한 사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족장이라 함은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선택된 백성들이 아직 한 가정이었을 때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야곱 역시 그 족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야곱은 네 명의 족장들 가운데서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삭이었고 그는 말년에 판단력이 좀 흐려지기는 했지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고 온유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아들 요셉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순결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 야곱은 그렇게 온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이삭과 순결한 신앙을 가졌던 요셉 그 사이에 있어서 어떻게 그 아버지 배속에서 이런 아들이 나왔고 또 그 아버지의 배속에서 저런 아들이 나왔을까? 양쪽 사이에 빛나는 믿음의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네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세워놓으셨을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요셉까지는 가정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이제 족장이라는 말이 적용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요셉 이후부터는 자손이 퍼져서 그래서 애굽에서 큰 무리들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야곱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엄마 배속에서부터 형보다 먼저 나오겠다고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었고 이름 자체도 야곱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말하자면 “붙잡다”는 그런 뜻인데 약간은 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잔꾀나 어느 정도의 간사함을 내포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야곱은 결국 나중에 이름을 개명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도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화된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이 사람 야곱의 경우에는 그 이름의 변화가 암시하는 바가 훨씬 더 특별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것과 함께 그의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고 그 이름이 결국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그런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의미가 매우 심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그렇게 간교하고 인간의 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이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고 그런 열심이 잘 나타난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이오, 또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우리 신약교회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나머지 세 족장에서도 많이 배우지만 그러나 이 사람에게 특별히 많이 배우며 동료의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야곱이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일생동안 다루시면서 결국은 신앙이 거의 없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하는 법이 없던 그런 간사하고 얄팍한 꾀를 가진 이 야곱이 많이 변화되면서 결국 나중에는 믿음의 사람들, 자신의 아버지나 혹은 그 후에 태어날 요셉과 같은 순결한 족장과 함께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고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요셉은 애매하게 고난을 많이 당한 표상이라고 한다면 야곱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신앙과 결함 때문에 고난을 많이 당했다는 점에서 만약에 요셉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의 예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야곱은 불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려고 하다가 징계를 받으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예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이 들으면 기분이 좀 나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지금 야곱은 다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잔꾀와 그리고 간사함으로 살던 인생의 갈 길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그리고 인생의 캄캄한 밤을 여기에서 맞이하게 됩니다. 야곱이 만나게 된 인생의 밤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가 환경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맞으러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배속에 있을 때부터 사실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했지만 아버지 이삭의 신앙적인 안목이 흐려지면서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기가 편애하는 자식 에서에게 축복해주기를 원했고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약속을 받아가지고 있었음에도 야곱이나 리브가는 오래 참는 인내로 그 믿음의 성취를 기다리는 대신에 인간의 잔재주로 하나님의 축복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결국은 이제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 에서를 불러 죽기 전에 내가 너에게 축복해야지 되겠다. 가서 요리를 만들어오너라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이 족장이라고 하는 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권세를 그 가족 안에서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될 일을 얘기하기도 하고, 그를 축복하기도 하고, 가족들에 대해서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그런 권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가 특별히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을 지정하여 그에게 축복하면 그 축복이 임하면 특별한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리브가와 야곱은 꾀를 내어서 형의 옷을 입고 그리고 팔뚝에 짐승의 가죽을 붙여서 털이 있는 사람처럼 위장을 하고 가서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로부터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장자의 계보적 축복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잠시 후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당황했고 이제 네 동생에게 모두 축복해주었기 때문에 너에게는 그 축복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울며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에서를 향해서 이삭이 축복해주는 것은 고작해야 너는 칼과 활을 믿고 살 것이며 라는 것이었습니다. 짐승이나 사냥하며 먹고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가 축복의 고작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업되심이 그 축복 속에 없었습니다. 칼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전투적인 사람으로서 일생을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로 축복이 대신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야곱을 보면 그 수많은 어두운 밤들이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렸다면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과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고 인간의 잔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불상사를 낳았습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 그래서 인생의 밤을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서는 머리 굴리는데 자신이 최고의 고수였기 때문에 엄마도 누르고 아빠도 누르고 형도 눌렀지만 그러나 이제 결국은 형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메소포타미아 밧단 아람 지방으로 도망을 갔을 때 거기에서 외삼촌을 만나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사람이 되도록 만들 최고의 속임수의 고수일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눈치도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엄마 아빠 곁을 떠났고 형하고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타관 땅에 와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너무 착하고 아리따운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자기 외사촌이었습니다. 라헬, 오늘날 영어권의 사람들이 레이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라헬을 거기서 만나게 됩니다. 깊이 그 라헬을 연모하게 되었을 때 외삼촌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라헬이 네 마음에 든다면 내가 너에게 아내로 줄 수 있지. 그 대신 7년 동안 머슴으로 살아라. 그래서 너무나 그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 동안 쇠경하나 받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지만 얼마나 장가갈 날을 기다렸는지 7년을 수일같이 일했다고 성경이 적고 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고 그리고 밤중에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꿈같은 신혼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전기불이 없어서 그랬는지 자고 일어나서 보니까 그 꿈같이 첫날밤을 지냈는데 이게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자기가 별로 싫어하던 그 언니 레아였습니다. 이 분노한 야곱은 삼촌에게 뛰어가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따졌지만 그것은 그 후에 계속될 수많은 속임수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외삼촌이 말하기를 너희 지방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예가 없다. 그러면 진작 말해야지. 그리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하고 있을 그때에 라헬도 너에게 주마 그랬습니다. 그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이제 앞으로 남은 7년을 수일같이 여길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라헬을 가불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일주일 있다가 다시 장가를 들어서 꿈에서도 그리던 그 여인을 만났지만 그러나 다시 7년을 아무 보수도 받지 못한 채 뼈가 부스러지도록 일해야지 되었고 14년 동안 노동하고 난 다음에 남은 것이라고는 늙어가는 두 여자 이외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진짜 강적을 넘어서 천적을 만난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이 야곱은 그 인생의 밤을 지나면서도 깨트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14년 모두 끝내고 두 여자, 하나는 사은품으로 왔고 하나는 본 품으로 따라왔는데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원하지도 않던 사은품, 그리고 7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이제 겨우 부인 하나 얻었는데 7년이 지나면서 그 꽃 같은 아름다움이야 벌써 다 물 건너가지 않았겠습니까? 중년 부인 둘을 데리고 그들에게 딸려온 첩, 둘을 데리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때에 간사한 라반이 다시 한번 제안을 합니다. 빈 몸으로 애들을 데리고 마누라를 데리고 어디 가서 뭘 먹고 살겠나. 이제 너도 네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은 집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고 야곱이 워낙 유능하고 성실하게 목축을 잘하니까 그만한 일군을 만나기가 힘들었을 것인데 이제 14년 동안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다시 7년 더 한번 착취해보려고 그에게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7년 동안에 지켜주지 않으셨더라면 정말 이 야곱은 빈털터리가 되어서 식구들만 잔뜩 데리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사람들이 도망 다니듯이 그런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라반의 꾀로부터 보호해주셔서 오히려 제물을 모으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도 야곱답게 하나님이 축복해주십니다. 뭐 신풍나무 껍질을 벗기고 집어넣다, 뺐다가 연못에다가 집어넣다가 빼고 난리를 치면서 어째든 해서 사기를 쳐서 그래서 재물을 많이 모으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한번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라반이 도망간 사실을 알고 자식들과 함께 말을 휘몰아서 그를 복수하기 위해서 추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야곱에게 손대지 말라. 엄중하게 명하셨기 때문에 죽여 버리려고 달려오던 라반이 막상 야곱을 만났을 때는 완전히 태도가 바뀌어서 왜 가면 간다고 이야기를 하지 그렇게 도망을 가나. 내 딸과 내 어린 자식이 있는데 내가 환송회라도 해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루 전만해도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늘어놓고 결국은 둘이 서로 화해를 하자하고 함께 식탁을 나누고 거기에다가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여하 간에 너희 자손도 이리로 넘어와서 나를 해치지 않고 나도 이 무덤을 지나쳐서 너희를 공격하지 않으리니 우리가 이쯤에서 헤어지고 평화롭게 살자. 그리고 그 무덤을 증거의 무덤이라고 불렀으니 여갈사하두다 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많이 겪었고 라반의 집에 가기까지도 그는 정말 외롭고 힘든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이 그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셔서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부인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 깨어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환경의 어두운 밤중을 보내신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하나님께서 인생의 밤에 야곱을 몰아넣으시고 이전까지는 어떻게 머리를 굴리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대책이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저의 해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때에 400인을 거느리고 왔다고 할 때 이 400인은 당시의 풍습으로 볼 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돈 있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양성하던 사병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롯을 건질 때 집에서 기르던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구출한 것처럼 이 사람에게도 400인이나 되는 병사가 있었고 지금 야곱이 온다고 하니까 일생을 마음에 불타던 그 복수심을 억누를 수 없어서 그 병사들을 데리고 야곱을 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꼼꼼하게 준비를 했고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마 무력을 쓸 줄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놈들을 모두 박살내고 그리고 야곱을 죽여 버리리라 결심을 하고 400인을 이끌고 자기의 집을 출발해서 야곱을 맞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병력도 없거니와 명백하게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형을 해칠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 인생의 캄캄한 밤중에서 이제는 달그락거리며 머리를 굴려 봐도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자기의 재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캄캄한 환경의 밤 속으로 이 야곱은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무엇 때문에 이제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로 얽혀진 인생의 환경의 어두운 밤중 속으로 데리고 가십니까? 자신이 잘못해서 자신의 악한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런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밤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어두운 밤 속에 야곱을 몰아넣는 그 이유 때문에 오늘도 많은 자기의 백성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이제껏 까지 불신앙적인 방법으로 인간적인 지혜로 자신의 인생에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상황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그런 환경의 밤이 아니었습니다. 더 고통스러운 밤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 번째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야곱에게 찾아왔고 그 영혼의 어두운 밤은 환경의 밤보다도 더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 캄캄한 영혼의 밤중에 그는 아무도 없이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았습니다. 얍복 강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홀로 남았더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인생의 밤이었는데 영혼에는 깊은 어두움이 드리웠고 그래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흔히 이런 상황을 이야기할 때 나는 보약신앙과 수술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수술신앙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도저히 혼자 어찌할 수 없을 때까지 혼자서 불순종하고 게기다가 그러다가 막판에 도저히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까 한번만 살려달라고 대굴대굴 구르다가 응답을 받아서 고침을 받더니 다시 이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수술신앙이라면 보약신앙은 인생의 어두운 날들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항상 겸손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해서 어떤 환경이 오든지 화목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 그것을 저는 보약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야곱은 이런 수술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거의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 자신의 지혜와 잔꾀로 도저히 풀 수 없는 인생의 어두운 밤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그 어두움을 밝힐 수 없게 되자 하나님 앞에 대굴대굴 구르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응답도 없었으니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가졌던 평소의 태도가 위기의 때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입증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나 환경의 깊은 흑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칠흑과 같은 내 인생의 앞길에 가리고 한시도 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면 염려 없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인생의 해결의 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없었고 제멋대로 탐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 이외에는 도울 분이 없는데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 있어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이 환경의 밤과 영혼의 어두운 밤은 함께 만납니다. 그 사람을 곤고하게 하고 절대 절명의 인생의 위기 속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야곱처럼 이렇게 인생의 밤을 맞이할 때가 있는데 야곱이 그러면 이 얍복 강가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어떤 것을 깨닫고 변화되었을까? 그것을 우리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 놀라운 적용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인생의 밤중을 맞이하였을 때 야곱이 절대로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처음부터 결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육체의 열심을 의지했습니다. 육체의 열심과 잔꾀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세 가지로 그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는데 우선 첫째는 형에게 닥친 뇌물이었습니다. 사실 이 형에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나 형에게 끼친 그 상처와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형은 일평생 가슴앓이를 하면서 장자의 잃어버린 허탈감 속에서 복수의 칼을 갈았고 그것은 형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형 앞에 나가서 용서를 빌고 은혜를 구하기 전에 뇌물로 형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지혜지만 어떻게 보면 야곱 특유의 잔꾀를 발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 짐승과 그리고 많은 가축들을 모아서 종들에게 딸려 보내며 형의 마음을 누그러트려보려고 했던 것과 야곱은 인생의 캄캄한 밤중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간교함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는, 도망갈 길을 예비한 간교함이었습니다. 이제 많은 짐승의 때를 거느리게 되었고 종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제일먼저 앞서서 얍복 강을 건너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는 형에게 보낸 때는 선물이었습니다. 뇌물로 보면 그 선물도 한번에 보내지 않고 네 떼로 나누어서 간격을 뜨게 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짐승의 떼와 종들을 다시 두 대로 크게 나누어서 다섯 번째로 보내고 거리를 상당히 뗀 다음에 여섯 번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들과 자녀들을 일곱 번째로 강을 건너보냈고 마지막에는 자기 혼자 얍복 강가에 남았습니다.
야곱의 편을 많이 드는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한 것은 모든 복잡한 것을 일상사에서 떠나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려움이 생기면 금식하러 기도원에 올라가는 심정으로 얍복 강에 섰다고 해석들을 합니다만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훨씬 인색한 해석을 훨씬 좋아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지 아니하고 하나 보내고 한참 있다가 또 보내고 또 보내고 더 한참 있다가 자기의 떼 중에서 절반을 다섯 번째로 보내고 한참 있다가 여섯 번째로 자기의 재산을 또 건너가게 하고 또 있다가 상당히 거리를 떼어서 이번에는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을 보냈는데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에 하나 형 에서가 분노하여 자기의 떼를 칠 때 그 선물은 죽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대 치면 그 다음에 이에서 뒤로 돌아. 도망을 치다가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 다음에 자기의 재산도 반치면 나머지는 뒤로 돌아서 도망을 할 텐데 그것도 다 치면 마지막에는 아내들이나 데리고 자식하고 도망가려고 했고 그것도 힘들면 다 팽개치고 혼자 도망가려고 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이 야곱다운 해석입니다. 그까짓 것 부인이야 다시 얻으면 되고 자식이야 낳으면 되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부인도 넷이나 있었으니까 아마 그들을 다 같이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과 사은품은 먼저 앞으로 가서 죽어도 좋다고 보내고 자기가 진짜 사랑했던 본 품 그 라헬과 사랑하는 두 아들은 맨 뒤에 보내서 최악의 경우에 그들을 보존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 야곱에게 있어서 억울한 해석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교한 꾀를 부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천사와 씨름한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천사와 씨름한 사건을 가르쳐서 야곱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호세아 12장 3절에 잘 나타납니다. “저가 천사와 겨루어 싸울 때 천사가 그의 환도를 치자 그는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처음에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며 매달린 그것이 절대로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붙들고 늘어지려면 천사를 붙들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 좀 도와달라고 자기는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 앞에 매달려야 했는데 천사를 붙들고 씨름한 것은 이제껏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에 붙들고 씨름하던 야곱 특유의 기질이 발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사를 붙들고 씨름한 이 사건은 인간의 혈기가 담긴 열심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가장 야곱적인 행동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공을 했으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천사가 그것을 이기지를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나옵니다만 천사입니다. 씨름해서 이기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본 기록입니다. 천사의 사명이 인간을 돕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고 혹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 천사의 임무인데 야곱이 얼마나 힘이 센 사람인지 모르지만 그와 함께 씨름을 해서 그것도 이기지 못하는 천사라면 그까짓 것 살아서 뭐하는 천사입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사실은 이기지 못하는 천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야곱이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렸는가를 사실은 회화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천사가 붙들고 매달려서 뭘 구했습니까? 나를 축복해주십시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닙니까? 에서가 축복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버지 앞에서 울며 매달릴 때 듣던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 천사를 붙들고 축복해주십시오. 그러면서 매달립니다.
사실 이것을 보면서 인생의 서글픔을 느끼지 않습니까? 형 것을 다 뺏어먹고 이제는 마치 에서가 아버지 앞에 매달리며 빌었던 것처럼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며 나를 축복해주고 축복해주기 전에 내가 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천사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축복 좋아하네. 너나 바뀌어라. 이놈아. 이게 우리 안에 있는 야곱적인 기질입니다. 뭔가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주시면 그 안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야말로 오늘날 정보처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오토마톤입니다. 단추 하나를 누르고 이 단추를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오토마톤의 지식이라고 할 것 같으면 똑같이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된다. 그렇게 아주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무조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싸우고 그 다음에 신앙으로 하나님을 협박하면 주님도 굴복시킬 수 있다.
이 천사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 나를 향한 당신의 태도 좀 바꾸십시오.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바뀌어야 합니까? 진짜 신실하신 하나님이 야곱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지만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니면 정 반대로 야곱이 하나님 앞에 그의 굽은 성격과 간사한 삶의 태도, 올곧음이 없고 상황을 따라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잔꾀로 넘어오던 그 인생의 긴 날들에 일력의 종지부를 찍고 자기가 바뀌어야지만 그의 인생이 새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인생의 위기를 해결해보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몸부림쳤습니다. 집요하게 천사를 붙들고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의 혈기와 간사한 고집과 완고함으로 천사를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태도를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종의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진실한 승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 깨어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패배하는 것이 자기가 진짜로 그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십니다. 천사를 시켜서 그의 환도 뼈를 내리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환도 뼈라고 하는 것은 발목에 있는 복숭아 뼈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이 아이를 가지면 환도가 시리다고 합니다. 이 환도가 무엇인가 하면 골반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골반 양쪽에 인체의 뼈 중에 제일 큰 뼈가 자리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대퇴로 위로 올라가는 다리하고 연결된 뼈입니다. 이렇게 골반 속에 들어가서 좀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이게 수시로 빠지면 사람이 돌지요. 딱 들어가 있습니다. 이게 빠지는 뼈가 아닙니다. 그런데 천사가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쾅 하고 이게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십시오. 엉덩이에 주먹만한 혹이 튀어나오도록 대퇴부 다리뼈가 밖으로 튕겨져 나왔으니까 환도 뼈를 깨고 튀어나왔는지 아니면 그냥 빠져나왔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어느 상황이든지 간에 보통상황이 아닙니다. 결국은 이것은 허리의 힘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환도 뼈를 치니까 그 다음에는 두 다리로 버텨야 천사와 씨름을 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게 튕겨져 나와서 이게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두발로 자기의 몸을 지탱할 수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붙들겠습니까? 그냥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주저앉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난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간사하게 올곧음이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징계였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그 인생의 밤중에서 수술까지 감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밤중에서 하나님이 이 야곱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후려치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육신의 힘을 믿고 그렇게 천사를 붙들고 놓지 않아서 내 태도를 바꾸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네 힘을 요절내주마. 쾅 하고 치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자기가 마지막에 믿었던 육신의 힘도 사라지고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풀썩 주저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로 성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호세아 12장에 나옵니다. 울며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천사에게 간구하였습니다. 뭘 간구하였을까요? 이제 당신이 나를 향한 태도를 바꾸기 전에는 못 갑니다. 그러고 매달렸지만 그러나 환도 뼈가 튕겨져 나오면서 이제 풀썩 주저앉아서 장애인이 되어서 그래서 땅바닥 설설 기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육체의 완력으로 천사를 잡아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와르르 무너졌고 그는 거기에서 생애 최초로 완전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자신의 지혜와 잔꾀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이제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이 주저앉았고 그리고 거기에 엎어졌습니다. 그는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멋있고 절묘하신 분인지 한번 보십시오. 이게 천사가 환도를 내리쳐서 이게 튕겨져 나와서 이제 다리를 질질 끌고 기껏해야 간신히 지팡이를 잡고 일어선 장애인이 되어버린 것인데 일시적으로.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습니다. 그날 밤 이렇게 천사와 씨름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깊이 깨트려져서 하나님 앞에 무너졌을 그때에 하나님은 에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놀랍게 어루만져주신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 가서 이 에서의 마음이 풀렸는지는 성경이 침묵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아마 야곱을 맞으 러 나온 순간에도 이제 다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는 형제로 다시 살아야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얍복 강을 왔습니다. 왜 저기에서 동생이 오는데 자기보다 더 늙었습니다. 왜 강호에 고수를 만나서 사은품 7년, 본 품 7년, 그 다음에 쇠경을 받기 위해서 7년, 21년을 뼈 빠지게 일했으니 이게 자지도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면 졸음을 내어쫒으면서 그 짐승들을 지키고 잊어버렸을 때는 물어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단하게 보냈습니다. 자기 형보다 더 나이가 든 사람처럼 해서 오고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자기의 축복을 모두 빼앗은 간사하고 야비한 놈이라고 복수심이 불탔는데 만약에 그가 금가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부채나 부치면서 왔다면 에서가 그냥 찔러서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이게 때마침 다리를 질질 끄는 장애인 하나가 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순간적으로 이속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엘로스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자기의 축복을 빼앗아서 갔는데 얼굴은 다 늙어 자기 아버지쯤 늙고 그리고 뭔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장애인처럼 다리를 질질 끌고 오는 그 서글픈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에서는 인생의 무상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력하게 녹이셔서 그래서 그 얍복 강에서 어긋맞게 끌어안고 통곡을 하면서 형제가 해후를 합니다. 나는 언제나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남북이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이념의 대립들을 끝내고 말이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둘이 만나 뜨겁게 해후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져주시지 않았더라면 둘은 아마 거기에서 싸우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얍복 강은 시뻘건 피물로 얼룩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흘러가는 강물에 그 수많은 시체와 그 핏물대신에 형제가 뜨겁게 끌어안고 통곡하며 우는 해후와 그리고 화해의 눈물로 그 강물을 흘려보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은 지내며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뼈아픈 시련을 겪어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은 아무리 좋아도 나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무리 나빠도 좋은 것입니다. 어째든 거기서 이 야곱이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무엇을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까요?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에 가리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리며 이제는 육신의 힘도 없으니 주님의 자비만을 구하며 울며 그 밤을 새웠습니다. 이게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첫 번째였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통곡을 했는지 천사도 떠나가고 먼동이 환하게 밝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침이 밝아올 때는 이미 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인생의 이 어두운 밤을 승리로 지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날 아침 맞이한 그 브니엘의 아침은 야곱에게 있어서 얼마나 눈부신 아침이었을까요?
인생의 긴 어두운 밤을 최소한 21년 이상 긴 생애를 보냈고 그리고 그는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깊이 징계하시고 환도 뼈가 탈골되는 그 큰 징계를 받고 나서야 야곱은 자기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를 깨달았고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구했고 울면서 간구하며 가난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전심으로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해서 주님 앞에 자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치열한 열심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에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악한 열심을 모두 발휘할 때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었지만 겸비하게 깨어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가 맞이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의 손에서 자비와 그 긍휼이외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님 앞에 매달렸을 때 장애인처럼 엎드려져 다리를 질질 끌며 펑펑 울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기 깨어짐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것이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든 고난과 죄와 형벌을 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정말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허물도 많고 잔꾀와 저주받을 죄악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은혜를 구할 때 진정으로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상처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그래서 우리는 죄악 되고 사악되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은혜를 보시고, 자비를 보시고, 우리를 위한 대속의 그 희생을 보시고, 다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기를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곱은 그런 예수님의 중보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깨트려졌고 그래서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징계 가운데 있을 때 울면서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자기의 인간의 혈기로 인생의 문제를 극복해보려고 했던 자신의 경험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그를 주님의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종식시킬 수 없었던 인생의 어두운 밤을 끝내게 하시고 주님을 붙들고 그 흑암 속에서 헤어 나오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맞이하는 브니엘의 그 눈부신 아침은 야곱의 일생에 잊혀질 수 없는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어두움은 모두 물러가고 찬란한 햇빛이 오므로 정오에 한낮을 시작하게 되듯이 인간의 술수와 방법으로 살았던 간사한 날들을 진정한 자기 깨어짐과 참회 속에서 보내고 나니까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리고 그의 어두웠던 영혼의 여명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고난당할 때 그 의미를 인지하는 것에 차이입니다. 정말 우리가 왜 인생의 밤을 지날까요? 왜 별빛조차 캄캄한 칠흑과 같은 어두운 날에 외롭게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셨을까요? 우리가 잘못 살아온 삶의 복수일까요? 주님이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마음아파하신 것만큼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양심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그 인생의 어두운 밤에 홀로 뒹굴도록 팽개치셨을까요?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느껴질 그때가 사실은 새벽이 가장 가까운 때이고 그리고 인생의 위기가 깊은 때일수록 하나님을 그 위기 속에서 극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 사는 삶을 포기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잔꾀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그 사악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자기가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때 자기를 지탱해주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그리고 간사한 야곱과 같은 인생에 방식들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눈부신 아침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날지라도 자기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4. 순전한 신자에게도 밤이 오는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인생의 밤을 지날 때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순전한 신자에도 밤이 오는가 하는 제목으로 오늘 읽은 욥기의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욥기에 나오는 이 사건은 두고 두고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에 대명사로 일컬어져왔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욥의 시대의 배경이 아브라함 때 시대와 같은 때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 추측에는 몇 가지 근거가 본문에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 욥기를 대할 때 우리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어쩜 그 욥이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인데도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탁월한 진보를 욥기를 통해서 보여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오늘 이 욥의 고난을 새롭게 보게 되는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욥은 하나님도 인정해주실 정도로 그 좋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욥의 신앙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는 순전한 자였으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때 배웠던 그런 종류의 올곧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던 사람이었고 네 번째는 도덕적으로 모든 악에서 떠난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정해주실 정도로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욥이었고 그 욥이 당한 사건에 대해서 오늘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순전한 신자에게도 인생의 밤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사건을 보면 그렇다고밖에 대답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단에게 자랑하실 정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이 없는 그런 아주 순결한 신앙의 사람이었는데도 그가 지금은 가장 저주받은 자의 모습을 하고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욥이 경험한 인생의 밤은 그야말로 폭풍과 같이 찾아온 재앙을 동반한 밤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 욥은 부족한 것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욥은 많은 재산을 소유했고 사랑스러운 자녀들, 그리고 부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신도 건강했습니다. 그는 순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쉽게 악에 물들지 않고 혹시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죄라도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의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순식간에 재산은 모두 날아갔고 집은 불탔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는 자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아내조차도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욕하며 자기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하나님만을 찬송하자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다시 한번 폭풍의 밤을 보냈는데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무서운 악창이 난 것입니다. 온 몸에 틀림없이 진물과 고름이 흘렀을 것이고 칠일 칠야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잿더미에 앉았었지만 사람들이 위로의 말조차 걸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육신까지도 병들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담겨있는 19장에서의 고백에 의하면 살 껍질은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겨우 입술만 움직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 혹은 자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큰 저주받은 몹쓸 사람인 것처럼 대하고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고통위에 마음의 고통이 더하여졌고 그의 시련은 더 깊은 상처를 그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일이 있었으니 이는 부르짖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이 들리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호소해도 주님이 응답해주시지 않는 영적단절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얘기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 순전한 욥에게 그런 고난을 주실까? 또 혹시 그런 고난을 뜻이 계셔서 주신다고 하더라도 왜 하나님은 말씀까지도 안하실까? 분명히 이제껏 까지 우리가 배운 신앙의 이치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큰 위로의 통로가 있으니 언제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어주신다고 배웠는데 왜 그 신앙의 좋은 공식이 의로운 사람 이 욥이 고난을 당할 때는 적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 의문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간에 이 문제를 하나씩 풀어보면서 신앙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편의를 위해서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은 이런 욥의 깊은 인생의 밤, 까딱없이 당하는 깊은 시련의 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고 싶으셨던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은 충분히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이 사람, 하나님의 사람 욥을 쇄신시키시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그를 쇄신시킨 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집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에 대한 견해입니다. 저는 지난 앞 시간 3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우리들이 순전함에도 하나님께 당하는 욥과 같은 고난이기보다는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일 가능성이 많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사실 욥과 같은 고난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인생의 어두운 밤은 우리 자신이 뿌려놓은 죄의 씨가 거두어진 열매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 자신이 마치 욥인 것처럼 행세하지 말고 다윗인 것처럼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나의 어떤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이 오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고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실 때 이제 첫째는 징계를 통한 연단이 있습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즐거운 징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징계를 당할 때는 항상 고난이 찾아옵니다. 왜 징계의 목적 자체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혹은 행한 일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 속을 썩이고 공부를 안 하는 애를 징계한다고 하면서 너 벌이다. 3시간 동안 게임해. 그러면 그것이 징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너는 3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손들고 있어라. 그러면 그것은 큰 벌이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징계는 항상 고통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결코 당신이 그가 죄를 지은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 보상을 받으시기 위해서 복수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는 이유는 외적으로 드러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채찍을 가하심으로서 매를 맞음으로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징계를 통해 자기 안에 이런 죄를 산출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내면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문제로 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정확하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그런 일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의지하게 하십니다. 분명히 이런 불순종, 저런 죄악을 지을 때 하나님의 강력하고 아픈 징계의 채찍이 있는데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자기 안에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죄를 죽이고 정결하게 되어야 할 필요를 깊이 느끼게 만드셔서 거룩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징계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징계를 통한 연단이 소극적인 의미, 즉 죄가 밖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징계하시는 소극적인 연단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적극적인 연단입니다. 이 적극적인 연단은 정화를 위한 연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즉 밖으로 그가 어떤 심각한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고난을 주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죄와 부패한 것들을 그 고난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나게 하셔서 그것을 버리게 하시는 고도의 정화방법입니다. 방금 생각난 예화이기 때문에 제가 꼼꼼히 조사는 못했습니다만 어렸을 때 읽은 어떤 책에 의하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 사람들이 추우니까 바위주위에 모여서 불을 땠는데 그런데 바위에서 물 같은 것 이 흘러 불을 끄고 보니까 딱딱해졌기에 들고 보니까 밖이 보이는 물건이었는데 그게 유리를 발견한 동기였다. 유리가 미친 문명사회의 발전은 획기적인 것이었 다.)
이런 유리의 발견처럼 자신 안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하나님이 시련의 열을 가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 녹아내리고 흘러내리도록 하나님이 만드셔서 결국은 그 사람을 정결케 하신 방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미에서 정화를 위한 연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렇게 되면 욥의 고난에 대해서 중요한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이 욥을 해석할 때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고난이었다고 해석을 하는데 욥이 들으면 짜증날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욥이 이렇게 주님을 고난 속에서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한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한계를 가지고 욥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무슨 결론이 나오는가 하면 결국은 욥을 하나님께서 고난을 가하신 것은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욥은 더 큰 축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뭘 더 원합니까. 재산이 있을 만큼 있고 자식들도 있고 아내가 사랑하고 몸도 건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더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물론 더 주셨습니다. 짐승들도 더 주시고 자녀들도 또 주시고 몸도 건강하게 해주셨지만 욥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상급일 수가 있겠습니까? 왜 아니 지금 충분한데 짐승을 늘려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더 예쁜 자녀들을 주시기 위해서 아니면 자기를 더 건강하기 위해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치열한 고난의 밤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래서 얻은 것이 있는데 더 늘어난 재산, 더 예뻐진 자녀들, 그리고 건강한 자신의 몸이다. 욥이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욥이 들으면 짜증나는 해석입니다. 욥기를 읽을 때 욥을 너무 짜증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럼 뭔가?
이 욥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1장에서 욥이 고난을 잘 이깁니다. 그래서 이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폐허가 되었는데도 거기서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때까지 그의 신앙이 정말 훌륭합니다. 그러다가 사단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십니다. 봐라. 사단아 이렇게 모든 것을 가져갔는데도 내 사랑하는 욥이 그 순전함을 잃지 않지 않니. 그랬더니 사단이 건강하게 내버려두셔서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몸을 칩니다. 그래서 온몸에 악창이 돋아납니다. 그러면서 다 잃어버리게 되고 칠일 칠야동안 그는 말거는 사람도 없이 폐허가 된 그 터 위에서 외롭게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1장에서는 고난 속에서 찬송을 했는데 2장에서는 침묵하고 3장에서는 입을 엽니다. 입을 열었을 때 그의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욥이 그의 난 날을 저주하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발전이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단지 복을 더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욥 자신도 알지 못했던 헛된 죄의 찌끼들을 결코 욥의 수준에서는 이해할 없고 파악할 수 없으며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지식의 수준에서는 간파할 수 없었던 욥의 내면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죄들, 그가 순전하게 살고 그리고 정직하게 올곧음 속에서 행하며 하나님을 예전보다 경외하고 모든 악에서 떠난 삶에서 살고 번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며 일평생을 산다고 한다 해도 결코 쉽게 깨달을 수 없었던 인생 밑바닥에 있는 깊은 그 죄를 하나님이 흘러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정화를 위한 연단에 불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 그렇구나. 결국은 그 마음 깊은 밑바닥에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신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 안에 마음에 알려지고 양심에 거스르는 죄, 인식되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이런 죄들, 이런 죄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불러오는 것이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해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인간 깊은 내면 속에 깃들어있는 파악하기 힘든 죄, 소위 이야기하는 “번써 체플신” 쉽게 탐지할 수 없는 그런 죄,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폭풍과 같은 인생의 밤을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욥이 느낀 혼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욥은 진짜로 순전했고,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지속적으로 모든 악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 19장에서도 고백합니다. 나는 죄가 없다. 그런데 혹시 죄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런 죄는 나만 있는가. 만약에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런 죄가 나에게 있다고 치자. 그게 내가 택한 것인가. 나에게만 있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도 있는 죄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폭풍과 같은 시련을 당할 정도로 가족을 모두 죽음 가운데로 몰아넣고 소유를 모두 잃어버리고 종과 계집종에게 이제 조롱을 당하는 이런 처지에서 육신이 이런 저주를 받아서 헌데로 가득 차 기왓장으로 그 헌데를 긁으며 재위에 엎드려있는 이런 정도의 벌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큰 죄인가. 이게 욥이 자신의 신앙의 수준에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혹시 그 속에 깊은 어떤 깊은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평범한 노력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17세기의 청교도 안토니 벌지스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책 속에서 표현하기를 자기의 마음을 검푸른 바다와 같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그 바다 밑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암초들이 있듯이 평온한 마음의 바다, 평온한 양심의 바다 그 밑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감추어진 죄들이 있으며 노력을 해도 찾아내기 힘든 무서운 죄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는 심지어 이렇게 보태었습니다. 혹시 분투하고 노력을 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내가 나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깨닫게 되었으니 이미 하나님과 나에게 알려진 죄이지만 그것이 알려졌어도 여전히 그 밑바닥에는 안 알려진 죄가 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빌었습니다.
존 오웬은 이런 죄를 시편에 시인이 말한 “주께서 인간의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누가 그 앞에 서리이까” 하고 그 시인이 고백했을 때 바로 인간의 힘으로는 찾아내기 힘든 깊은 내면에 있는 부패한 죄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존 오웬은 이런 죄를 결코 우리를 죄의 지배 속으로 이끌어갈 수 없고 이 죄가 분명하게 우리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곧은 삶을 살수 없게끔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묻혀있는 깊은 죄의 본질이 오늘 우리들이 양심을 거슬려서 행하는 대담한 범죄, 미움과 살인, 방탕과 술취함, 간음, 이런 모든 죄들과 본질적으로 틀린 죄라고 말하면 신학적으로 모순입니다. 동일한 본질입니다.
욥에게 이런 본질의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욥이 당한 고난은 바로 이런 죄에 대한 징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평의 죄에 맞지 않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내버려두시고 욥은 자신이 노력해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의 저 밑바닥에 있는 심오한 죄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폭풍과 같은 어두운 밤을 지나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자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자의 자리에까지 가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하나님의 공평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그러면 이런 욥이 당한 고난은 이렇게 죄에 대한 징벌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또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정화를 위한 연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화를 위한 연단은 연단의 동기 자체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그 속에 죄가 있기는 있지만 그것들을 끄집어내어서 막 유출시켜서 그를 보다 더 순결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욥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더욱더 가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어떤 원리 하나를 찾아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순전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더 순전하게 만드시려고 열심을 내십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제가 증거를 풍부하게는 댈 수가 없지만 아쉬운 대로 두 가지만 증거를 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시편 73편에 나오는 시인의 경험입니다. 그는 평소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의를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까 악을 행하는 사람이 너무나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시인을 꾸짖고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아침마다 주께서 나를 징책하십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순전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 돼지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의 불신자를 정결케 하려고 애를 쓰시는 대신 하나님 앞에 올곧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 사람을 더 순전한 신자로 만드시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말씀을 폈는데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야단치셨습니다. 너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너는 이것이 온전하지 않구나. 그리고 야단을 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삐졌습니다. 삐진 것까지는 귀여운데 그 다음에 먹은 생각은 무서운 생각입니다. 나도 막 살아버릴걸,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내가 그 어두움의 사람들, 불순종하는 어두움의 사람들, 이 세상의 자녀들처럼 나도 궤휼을 행할 걸, 악한 꾀를 가지고 인생을 살걸, 그렇게 막 살아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결국은 자기의 수준에서는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징계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계산이 안 됩니다.
또 하나의 증거를 댄다면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징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특별히 당신과 교통하는 사람들을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내십니다. 그래서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하나님께 혼도 많이 납니다. 잘잘한 매를 많이 맞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온전하게 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점점 더 온전하고 거룩한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떤가 하면 신령한 소심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막 살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를 더 온전케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그 속에서 보게 되니까.
그래서 결국은 이 욥이 당한 이 고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욥의 죄 때문에 당한 고난이 아니라 죄는 죄인데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의미에서 당한 그 고난 때문에 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욥의 수준에서는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파악할 수 없는 이 밑바닥에 깃들어있는 깊은 죄를 하나님이 드러내셔서 그를 더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욥에게 말할 수 없는 섭리 가운데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깊은 밑바닥의 죄는 있지만 양심을 거스르는 죄를 행하지를 않은 욥처럼 순전한 사람을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 정결케 하려고 고난을 주시고 우리처럼 양심에 거스르는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번민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주실 때, 징계를 주실 때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고난의 시작된 시발은 각각 다릅니다. 왜 양심을 거스른 큰 죄를 꼭 그것 때문에 징계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해서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없는 깊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시는 것은 그렇게 때리시는 고난이 아닙니다. 시발은 다릅니다. 그러나 목적은 같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차단할 수 없는 죄든, 양심을 거슬려서 행한 큰 악이든지 간에 각각 죄가 있을 때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징계, 혹은 연단을 통해서 그것들을 뽑아내서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그럼 이제 이 욥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이 명료하게 깨닫게 됩니다. 욥의 고난은 더 큰 시련을 주시기 위한 시련이 아니라 욥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자신 안에 깊은 밑바닥에 있는 죄까지 끄집어내셔서 그를 더 순전하고 정결한 신자로 만드시기 위한 연단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죄가 동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 자체가 그를 더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에 욥이 당한 고난을 우리는 죄로 말미암은 징계의 고난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꼭 한 가지를 더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그럼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정결하고 순결한 사람이었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는 소리도 듣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셨습니까? 언젠가 목사님은 깊음이나 높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고 오직 죄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낼 수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답함으로서 이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징계를 통해서 그 재산을 빼앗아 가시고 혹은 그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지위를 낮추시고 심지어는 그의 생명까지 걷어 가실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바를 지각하지 못하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욥이 재산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보다 자기자식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아내와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기 몸의 건강을 신앙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재산이 날아갔을 때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자기의 죄를 돌이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각 사랑했던 것을 가져가는 것에 있어서 욥에게 커다란 각성을 불러일으켜서 자기의 죄를 보게 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부자였지만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녀들을 사랑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사랑했습니다. 건강을 돌보았겠지만 신앙보다 자신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는데도 그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 안에 밑바닥에 있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만약에 하나님이 부르짖을 때 즉시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래. 너는 아무 죄가 없다. 너는 내 앞에 참 올바른 사람이고 이 고난을 통해서 네가 후일에 많은 의로움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의 본이 될 것이며 그리고 애매히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 될 것이라고 주님이 칭찬해주셨더라면 그 고난을 통해서 욥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욥은 그 지점에서 가장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도 아내도 자녀도 건강도 다 가져가셔도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하늘에서 불이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징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한 또 다른 하나님의 판단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에 이 사람의 눈이 열리지 않고 서서히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이게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 고백을 할 때쯤에는 자신이 왜 고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 7-80%가 다 풀렸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미래의 지금은 잡티가 많이 섞인 저질의 금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 너는 순전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너는 이런 무서운 징벌을 받을 정도로 양심을 거슬려서 나에게 불순종하고 악을 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네 안에 있는 어떤 것들 때문에 나는 너에 대해서 침묵하노라. 그게 뭔지 한번 생각해보아라. 그때 그는 침묵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금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나 이 세상에 있는 쇠붙이와 같은 사람들과는 달랐으나 찌끼가 섞인 금이었구나. 주님이 순결해지기를 원하셨구나.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이 치열한 연단의 밤을 통해서 이 욥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심으로 쇄신시키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첫째는 구속자를 갈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그는 썩어가는 육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죄를 발견할 수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 징계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구속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그가 내 앞에 서시리라. 이 구속 주라고 하는 의미는 구속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죄와 죄의 결과인 비참아래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신 것, 그것이 구속입니다. 그러니까 죄로부터의 용서와 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의 해방이 함께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이 깊이 고난을 당하면서 두 가지 절망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마음 밑바닥에 있는 감추어진 죄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무서운 징계 아래서 자신의 힘으로 그 상황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고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없이는 자신의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구속 주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을 연구한 많은 사건들을 거의 전율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그 시대에 만약에 이 연대 매김이 정확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주전 2200년 그 시대에 이런 신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을까요?
인간의 마음밑바닥에 있는 깊은 원죄의 뿌리를 보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의 전적인 무능을 발견하게 되고 자기를 그 모든 죄와 비참으로부터 건져낼 하나님의 구속행동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신학적인 진전이고 이 연대 매김이 만약에 정확하다면 아브라함은 이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배우는 학생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들은 만약에 하나님이 이 의로운 사람 욥을 칭찬만 하시고 고난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도달할 수 없는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수준이 높은 성도의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의 수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의 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만약에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의 수준이 저급하다고 할 것 같다면 그는 결코 수준 높은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수준이 높고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의 삶은 원대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기를 구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오늘 구원받은 이 의미는 무엇이고 이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긴 100년의 역사를 회고하자면 그중에 커다란 안타까움을 가져다주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받은바 은혜와 거룩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고 주체하지 못해서 부패해버린 때가 너무나 많았다고 하는 회고입니다. 결국 신앙의 수준의 발전이 없이 상태만 좋아서는 정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욥이 그런 수준에 묶여있는 것이 싫으셨습니다. 그래서 욥을 높은 신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박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훌륭한 인물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주전 천년 경이니까 이 욥으로부터 약 12세기 후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 메시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욥을 훨씬 밑도는 정도의 생각밖에는 못 가지고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왕궁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 왕국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주께서 또 다른 주께 말씀하시는 그 중보자의 위대한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산 생애였습니다. 그는 비록 욥과 같이 의로운 고난이 아니라 양심을 거스르는 현저한 죄에 대해서 징벌을 받으며 폭풍과 같은 고난의 밤을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를 향하여 발꿈치를 들었고 고난과 시련이 폭풍처럼 몰아닥쳐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백성들 전체가 자기를 배반했습니다. 그는 실로 외로운 고난의 밤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고난의 밤을 통과하면서 그는 자기를 모든 죄와 그 죄의 비참한 결과에서 건져내실 구속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그 범죄를 통해서 그는 그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뿌리가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뿌리박혀있고 그리고 그것은 이미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 프린스턴의 교수였던 벤자민 플리크 니츠 워필드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 다윗의 참회 시 51편을 해설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죄가 무엇인지를 자기가 온 몸으로 경험하고 거기에서 그 죄를 통절하게 회개한 사람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는 지식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랬습니다. 이게 바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입니다.
욥은 양심을 거스르는 큰 죄가 없이 고난을 당했고 그래서 의로운 자가 당하는 표상이 되었고 다윗은 양심을 거스르는 현저한 악속에서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징벌을 당했습니다. 둘 다 똑같이 인생의 무섭고 혹독한 어두운 밤을 지났습니다. 그들이 그 폭풍의 밤을 지날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그 인생 어느 때든지 드나든 적이 없었던 그 무서운 단절의 밤을 지나고 질풍과 노도와 같은 그 환난의 밤을 통과하면서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사랑하는 친구도 없고 홀로 섰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 케고아는 말하기를 신앙이란 순결하고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외로움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였습니다. 한 사람은 양심에 거스르는 악을 행했고 한 사람은 애매히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그 치열한 고난을 통해서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역사 속에는 시절을 따라서 변절한 야비한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혹한 설한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켰던 순결한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질그릇처럼 약한 사람이었지만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깊이 용서받은 경험이었고 또 하나는 그 결과로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구속주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붙들고 의지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 신앙의 가벼움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작은 시냇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큰 강은 도도히 침묵 속에서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인생에 마지막 한순간까지 비록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을지라도 그 창조의 구속의 목적을 따라서 견고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고난의 치열한 밤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뜨게 하신 영혼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욥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욥과 같이 순전한 믿음을 지켰는데 고난을 당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다윗같이 죄를 범해서 고난의 밤을 지날지라도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고난 이후에 이들이 어떻게 그 고난의 밤을 지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욥이 이 치열한 고난의 밤을 통과해서 구속자를 만나게 될 때까지 자신의 처지나 불평하면서 살았습니까? 다윗이 그 칠흑과 같은 고난의 밤, 그 무서운 밤에 홀로 있는 외로움을 넘어서서 하늘위에 높이 들리신 주님과 궁창위에 빛나는 주의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그가 죄악에 엎드려진 가운데 죄의 낙이나 먹으면서 그렇게 어두운 밤을 지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몸부림쳤습니다. 죄악의 모든 인생의 어두운 밤과 고난의 시련이 나를 죄 때문에 왔지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속에서 이 고난을 통해서 나를 연단하사 나를 정금과 같이 만드시려고 하는 주님의 그 손길을 느꼈습니다. 뜻을 정하고 그는 빛 가운데 나오기를 사모했습니다. 넘어졌으나 일어섰고 쓰러졌으나 다시 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올곧은 그 신앙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 외로운 밤에 부르던 수많은 노래들이 오늘도 남아서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이미 있었던 우리의 죄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를 저급한 신앙으로부터 수준이 높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비범한 지혜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그가 세상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육신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입 꺼풀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이 피골은 상접하게 되었고 남아있는 피부에도 악창이 돋아서 부스러진 기와쪼가리로 그 악창을 긁으면서 피고름을 닦아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순결하게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정화를 위한 연단을 깨닫게 되자 그는 자신이 그렇게 애착했던 이 육신과 이 세상이 껍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 고난 속에서 건져내셔서 이 썩어질 육신의 껍질을 깨고 다시 태어날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이 썩을 육신의 몸을 벗은 뒤에 내가 내 육체를 밖에서 주를 보리라” 하고 말입니다.
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분명히 이 욥은 죽음 이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도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내세에 간섭하고 계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명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연단을 통해서 모든 것이 명료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육체의 껍질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리고 이 육체의 껍질을 벗고 나면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인생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영광의 경험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그 순간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고 그리고 이 세상이 지나가고 나면 결핍과 헤어짐이나 목마름이 없는 완전한 그 하늘세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한다면 모든 범죄의 의지는 존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소망은 이 세상에 묶여있고 모든 인생의 비전도 세상의 부두에 갇혀있습니다. 그 줄을 끊고 망망한 대해로 헤엄치며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를 기록해가기보다는 세상 사랑의 줄에 묶여 안전하게 살려고 하는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게 되고 바로 거기에서 세상 사랑이 싹트고 거기에서 수많은 변형된 세상 사랑과 정욕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이름을 내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에서 이름을 내고 싶어 하고 예전에는 세상의 돈을 모으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남보다 더 많은 교회의 지위들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생의 삶은 내세의 빛으로 비추어볼 때 비로소 진실한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사는 세상에 갇혀서 부활의 영광이 있는 그 나라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결국은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기라성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았으나 소망이 땅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받으며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택했을 때 모세 그는 세상사랑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욥이 내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하고 그분께 정직하게 행하며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때 하나님은 날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신다는 공식을 깨트리시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고 사는 이 육신의 삶조차도 유한한 것이며 그 모든 것들 너머에는 흔들리지 않는 왕국과 떨어지지 않는 가치와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수준이 낮은 욥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치열한 연단의 밤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아파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눈물이 흐르고, 그들이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 고난의 어두운 밤을 지나게 하시고 시련의 폭풍 아래 홀로 있게 하시는 이유는 이처럼 원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힘들어하는 문제들,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셔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 문제들일까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작별하는 것이 기대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 것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 안에서 발견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누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두고 가도 그것이 상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기업을 얻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인생 그 마지막 날은 얼마나 기다려지는 날일까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자기를 위해 예비 된 의의 면류관을 확신하며 자랑스럽게 정들었던 이 땅을 떠나는 그 나그네와 같은 신앙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고 싶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어두운 인생의 밤을 사람의 잔꾀로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가르쳐주시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가르쳐주시고 싶으신 것은 인생의 고난의 밤을 통과하면서 내가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는 결국 이렇게 밖에 살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더 많은 빛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을 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욥이 그것을 갈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당하는 인생의 외로운 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그 밤을 지나는가에 따라서 말할 수 없이 괴롭기만 했던 동물적인 학대를 받은 나날처럼 기록될 수도 있고 혹은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욥과 같이 영적세계의 비상의 날개를 단 비범한 밤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선택의 몫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선택의 몫입니다. 어떻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할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영광스러운 아침을 기대했습니다. 바로 욥이 그 기대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이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닥친 많은 문제를 한번 영혼의 빛으로 비추어보십시오. 그리고 정말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인해서 고통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야 할지를 결정하십시오. 오히려 밤과 싸우는 동안보다 훨씬 더 빨리 인생의 밤이 물러가고 욥처럼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5.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여기서는 구약에 나오는 엘리사 선지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남쪽에 유다가 있고 북쪽에 이스라엘 왕국이 있었으며 그 북쪽에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아람이라고 나오는 민족과 같은 민족이고 성경에는 암시적으로 북방 민족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북방에 살고 있는 이 다메섹은 강력한 나라였고 그 나라는 남쪽으로 진출을 하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통과해야 했는데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다메섹의 정책과 북쪽으로 올라가려는 이스라엘의 정책이 수시로 부딪혀서 전쟁이 일어나고는 했습니다. 오늘도 바로 그런 때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볼 때에 다메섹은 강력한 나라였지만 왜 그랬는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는 번번이 패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 매복을 할라치면 어떻게 알았는지 이스라엘 군대들이 그 길로 지나가지 않고 피해갔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 아람 왕 곧 다메섹의 임금은 자기 안에 누군가 스파이가 있어서 그 첩자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군대동향을 보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불러서 심히 꾸짖었을 때 부하들은 자신들이 내통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어서 아람나라가 무엇을 준비하고 군인을 매복시키든지 간에 그것을 영감으로 미리 알고 왕에게 전달해주어서 군사들로 그 길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제 이 왕의 목표는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격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먼저 번번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패배하게 만드는 엘리사가 선지자를 체포하거나 사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가 되었습니다. 실로 그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국력을 기울여서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고 하는 성으로 진격을 했습니다. 도단이라고 하는 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고 매우 작은 성이었습니다. 아마 아람 왕은 작은 성 도단에 엘리사 비롯한 일행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이 작으니까 포위하기도 쉽고 그리고 저항하는 세력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니 분명히 그들을 격퇴하고 엘리사를 사로잡거나 사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엘리사와 그 일행은 도단성에 묶게 되었고 그리고 거기서 이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놀라운 경험 하나를 하게 됩니다. 어느 날 밤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에 일어난 일을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성경에 보니까 많은 군대가 도단성에 와서 성을 에워싸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을 에워싼 이 군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도 남는 엄청난 군사들이 거기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백주대낮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낮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면 분명하게 엘리사와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들이 대비를 하고 격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낮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깊은 밤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잠들어있는 사시에 아람왕은 수많은 군사를 도단 성으로 보냈고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게 도단 성을 에워 쌓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밤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엘리사를 체포하고자 하는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점점 이렇게 악의 세력에 의해서 둘러싸이고 죄의 세력에 의해서 포위가 된 것 같은 어려운 인생의 때를 맞이할 수 있는데 이 모든 일이 영혼의 어두운 밤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절대적으로 주의해야지 된다는 결론을 여기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항상 충만한 것도 아니고 항상 은혜 안에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해질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뒤로 물러설 때도 있습니다. 칼날같이 예리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보면서 하나님의뜻을 헤아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두워져서 이것이 길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환경에 아무리 어두운 밤이 와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으면 환경의 그 어두운 밤중이 우리를 헤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어두운 밤이 오면 우리는 커다란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아람의 군대들이 야음을 틈타서 이스라엘에게 눈에 띄지 않도록 도단성에 접근했고 그리고 겹겹이 에워 쌓습니다. 아무도 그 밤중에 군대들의 그 야습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절망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많이 주신 번영과 평안함이 우리로 하여금 영혼의 밤을 맞이하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올바로 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셨지만 그러나 그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 까지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기회입니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기회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한없는 기회를 주셨지만 솔로몬이 신앙으로 살 때는 그 지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고 신앙이 떨어지자 그 지혜 때문에 솔로몬은 어리석은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왕국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다윗이 그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그 왕국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다스리고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갔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니까 그 왕의 권세를 이용해서 오히려 범죄에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영혼의 밤이 오는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때는 그 주신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순종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축복을 주시는 것인데 그 축복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대로 사용하지를 않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육체의 욕심대로 사용하고 그래서 죄를 짓고 그래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번영할 때만 영혼의 밤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이 올 때도 영혼에 어두운 밤이 올 때가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만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고난 속에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할 때 마음이 산란하여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던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도 됩니다. 결국 영혼의 밤이 온다고 하는 것은 번영하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은 환경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뜻밖에 번영을 맞이할 때도 늘어난 재물과 이 세상에서의 번영에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잃어버려야 하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올곧음을 유지해서 고통을 받을 때도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인생의 어두운 밤은 우리를 원수에 에워싸이게 만들고 감시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위험한 상황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한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모두 회심하기직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셔서 자신의 죄를 확신하게 하시고 자기가 놓여있는 영혼의 어두운 상황을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의 어두운 상태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은 조금 신앙에서 멀어졌고 하나님의 은혜가 좀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그 인생의 밤중에서 하나님이 눈을 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실 때는 깜짝 놀랍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미끄러져 나왔고 그리고 자기기 생각했던 것보다 참된 신앙의 기반에서 이탈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신앙의 길에서 탈선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제 이 신앙이 깊이 미끄러지고 그리고 거기에서 깊이 어두운 영혼의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즉 영혼이 어두운 밤을 맞아 시험에 들게 되면 대게는 악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시험에서 가깝고 시험에 가까운 영혼에게 악이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시험에 든 영혼이 악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정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방심하다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순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주신 시련인데 인간의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해보기 위해서 신앙까지 팔아먹고 몸부림치다가 영혼의 어두운 밤에 자신에게 커다란 손해를 입히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한번 보십시오.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선지자의 사환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아침은 절망 속에서 눈뜬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는 성밖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스라치듯이 놀랐으니 그 아침에 그가 본 것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구름같이 많은 아람의 군대들이었습니다. 성은 작고 군사들은 몇 명 되지 않는데 그 성을 대군들이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죽이거나 사로잡기 위해서 온 국력을 기울였고 그리고 자신들은 아람이 그 밤에 그렇게 공격하리라고는 미리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 속에 그 아침에 눈을 뜨면서 선지자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깊이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을 양보하면서 한발, 한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미끄러져 들어갈 때는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차마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갔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진 것에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영혼의 어두운 밤을 방심하고 지나니까 아침이 왔는데도 오히려 그 아침은 절망을 알리는 아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깊이 탄식했고 어떤 신앙도 보이지 않고 죽음밖에는 생각나지 않는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모두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 상황을 비웃듯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엘리사 선지자였습니다.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선지자의 믿음과 상황은 크게 세 가지로 본문에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담대함입니다. 그는 두려워 떨며 탄식하는 종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미 자신은 사환이 알지 못한 다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애를 씁니다.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만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탄할 때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는 더욱 주님을 붙들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지 않아도 우리는 도처에서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분께 의지할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보다 더 마음을 기울이고 주님 앞에 정결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환난 날에 주님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환난 날에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이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건져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선지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시련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주님을 불러서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 놓고 부를 수가 없는 마음의 어두운 그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환난 가운데서 담대하게 주님을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누구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나를 지키실 것이다. 환난 가운데서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이렇게 담대하게 외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환난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특별히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하나님은 아첨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를 찾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기 위해서라면 그러면 우리들이 죄를 짓지 말고 순결하게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환난의 밤에 인생의 어두운 밤에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게 맞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차선책이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들이 올곧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뒤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면서 순전한 삶을 살려고 의지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 아무렇게 막 살았던 사람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날 때 그 대가를 혹독히 치릅니다.
어린아이의 동화 속에 베짱이와 개미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가한 여름날에 일은 하지 않고 계속 악기나 치면서 놀던 베짱이가 뙤약볕에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했습니다. 좋을 시절이 지나고 가을이 깊고 눈보라치는 겨울이 왔을 때 그는 자기가 그렇게 비웃던 개미에게 밥 한술을 얻어먹기 위해서 구걸하러 다녀야 되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평안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평범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려고 하고 그분의 뜻을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다가 환난의 날을 맞으며 그는 평안할 때 의지하던 대로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올곧지 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참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를 정직하게 참회하고 그것도 며칠씩 몇 년씩 몰아서 하는 참회가 아니라 매순간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칠 때 비록 올곧게 살지 못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는 그 참회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그리고 양심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가책보다 하나님의 사죄의 확신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올곧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죄를 지었을 때는 즉각적으로 그 죄를 회개해서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소망하고 어린아이처럼 그분을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에게 담대한 믿음의 사람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환난과 위험과 칼이나 어떤 시련의 폭풍도 그를 삼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 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난과 시련이 닥치고 고난이 닥쳐도 그는 담대함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미끄러지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께만 붙어있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연합된 상태 속에서 살아가기를 힘쓰기 때문에 환난과 고난과 위기의 폭풍이 불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환난의 날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그러면 안 됩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순전한 사람으로 날마다 성장해가야 합니다. 구름 같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언제 우리들이 환난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가을이 깊어집니다. 바람까지 불고 비까지 쏟아집니다. 잎은 누렇게 변하고 가지는 흔들리며 모두 떨어집니다. 겨울이 깊어져서 흰눈이 하얗게 내리면 그때 늘 푸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귀합니다.
두 번째로는 믿음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자신의 사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들보다 많다. 저들이 구름처럼 이 도단 성을 에워싸고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지만 저들과 함께 한 군사가 너무 많아서 네가 지금 절망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은 저들보다 훨씬 많다.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자. 그의 눈이 열렸고 눈이 열리자 도단 성을 에워싼 그 수많은 아람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구름같이 허다한 하늘의 불 병거와 불 말을 탄 천군천사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에게는 이미 이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공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끔 심방을 하거나 상담을 와서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보면 내가 심방하는 내내 웃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 이 사람을 어디부터 고쳐야할까? 이 생각의 기반 자체가 너무 정리가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려운 환난을 만났으니까 이것을 좀 고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다른 것을 가르쳐주어야 되는데 기본적으로 골격 자체가 이게 아닌데서 세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초가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도시에 오니까 오 층짜리 빌딩 하나를 봤는데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그 위에다가 오층을 올릴 수 있습니까? 죽으려면 무슨 일은 못합니까? 그것은 초가집을 짓는 것과 오층 집을 짓는 것은 그 위에 서 있는 집만 틀린 게 아니라 지붕만 지푸라기 걷어내고 그리고 콘크리트만 얹으면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 기초공사를 할 때부터 틀립니다. 그것은 집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똑같지만 종자가 틀린 집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을 살다가 환난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님께 아첨이라도 해서 임시방편으로 모면해보고 어떻게 그 위기 속에서 축복이나 받아볼까 생각하는데 그런 얄팍한 수 같고 해결이 되겠습니까? 그런 어려움을 만난 것은 그것을 헐어버리고 그것을 바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를 하면 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껏 신앙이 아닌 것들로 쌓여진 것들은 다 허물어버리고 새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이 지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재개발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다닥다닥 개딱지처럼 붙어있는 수많은 집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다 쓸어내 버립니다. 그것을 남겨두고 옆에 있는 집을 번쩍 들어다가 옆에 있는 집 위에 샌드위치처럼 올려놓고 재개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다 부셔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빈터를 만들어서 그 다음에 완전히 새롭게 땅을 파고 짓고자 하는 그 건물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으면 판을 바꾸어야 합니다. 옛날 판에다가 뭘 좀 집어넣어서 그러니까 계속해서 짝이 안 맞아서 꼭 군복입고 위에다가 고깔모자를 쓴 것처럼 그렇습니다. 다 벗어버리고 그리고 기초를 처음부터 다시 놓아야 합니다. 답답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그런 담대한 믿음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환난 속에서도 담대하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의 파도 속에서 흔들리기 보다도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하게 되는 그 믿음이 어디에서 흘러나옵니까? 하나님과 가진 올바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올바른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새가족반을 안하는 사람은 왜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대부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절대로 안하기로 뜻을 세운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에 짐승 같은 삶 이외에는 고쳐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여러분들이 성도의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설교가 어렵고 공과공부는 이해가 안 가고 상담을 하며 이야기를 해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를 알지 못하고 그렇게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망가진 사람들이고 교회는 식당이 아닙니다. 설교는 요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오게 되어서 망가져서 들어왔으면 들어온 사람이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이 수술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것 좀 당분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치게 해야 합니다. 병원에 들어와서 환자복도 안 입고 뛰어다니면서 자기 먹고 싶은 것이나 찾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병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겸손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잘 나가고 인생이 대낮일 때는 자기 의지 안에서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도 인생의 진정한 밤을 맞이할 때는 하나님이 자기 옆에 계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고 절망할 그 지점에서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갖는 것, 그게 믿음이 효능입니다.
내가 정말 여러분 앞에 정말 간절히 말하고 싶습니다. 배우지 않으면 여러분 절대로 고칠 수 있지 않습니다. 고쳐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좋은 병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잘 치료를 받았을 때 좋은 병원입니다. 치료받지 않고 병원문턱만 밟으면서 부지런히 드나들고 약국에도 안 가고 치료실에도 안 가고 병원 매점에 가서 빵만 사먹었는데 그게 아무리 좋은 병원에 가면 뭐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망가진 사람은 망가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 속에서 어두운 인생의 밤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흑암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고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열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지위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고뇌하지 않고 진지하게 탄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나고 그 안에서 상처를 당합니다. 그 안에서 울고 있는 외로움을 당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동행의 은혜를 누리지를 못합니다. 누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켜줍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금보다 더 소중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위보다 우리들이 사모하고 무엇을 팔아서라도 사야 할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십니다. 나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나의 편이라고 하는 이 믿음, 그것을 갖기 위해서 여러분의 안일한 삶을 팔아야 합니다. 그 게으른 삶을 팔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입니다. 절망 속에 아침을 맞이한 이 사환이 눈을 떠서 큰 위로와 감동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놀라운 역사를 본 것입니다. 자신들을 에워싼 그 수많은 아람군대를 보고 낙심해서 다리가 떨렸는데 엘리사가 기도를 해주니까 눈이 뜨여지게 되었고 뜬 눈으로 다시 바라보니까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불 말과 불 병거를 탄 구름같이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군천사들의 위용 앞에서 아람군대는 그야말로 오합지졸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화: 고속도로 휴게소 앞에서 파는 적외선 망원경을 보니까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사 물이 뚜렷이 보이기에 든 생각이 싸우는 군인들이 한쪽은 망원경을 착용하고 다 른 한쪽은 착용하지 않으면 착용하지 않은 군인들은 완전히 밥이겠다고 생각했다 는 내용)
우리들이 환난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우리가 기도할 때까지는 눈을 열어서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많이 만난 사람이 다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환난을 많이 당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고생만 실컷 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환난을 당할 때 우리의 마음을 낮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난을 만나고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할 때는 기도가 청산유수같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가 정직하게 가식을 벗어버린 진실한 거기에 깃들어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형통할 때는 정직해지지 못했는데 환난을 만나게 되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직하게 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 무엇 때문입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는데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좀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보여주십니다. 왜? 기도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오는 시련과 풍랑은 일상적은 방법으로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거치시기 위해서 보낸 인생의 폭풍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수하기 전까지는 멎지를 않습니다.
요나를 태운 배가 다시스를 향하여 갈 때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럴 때는 배를 가볍게 하여야 한다고 확신을 했고 그래서 많은 기구들과 그리고 비싼 화물들을 다 버려서 배의 무게를 낮추었습니다. 그랬더니 배가 안전해졌습니까? 폭풍은 더 거세어졌고 모든 물건을 다 바다에 던져도 배는 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잔잔한 바다가 되었고 배는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버린 모든 기물들과 화물들은 괜히 버린 낭비가 되었습니다. 요나를 제일먼저 찾아서 바다에 던졌더라면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어려운 풍랑을 만나고 영혼이 깊은 밤을 지날 때 이제까지 인생을 산 방법으로 이것저것 버려보고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결국은 낭비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영혼의 풍랑이 일 때 이 풍랑이 일반적인 풍랑인지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신 풍랑인지를 알아차립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어쩜 그렇게 의지력이 없고 어쩜 그런지 내가 오죽했으면 죽으면서도 마지막의 유언에 기도 좀 하라고 권면을 할지, 그렇게 기도를 안 하고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의지력이 약해서는 여러분들이 나가서 뭘 해도 안 됩니다. 뭘 해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올곧음이 있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엘리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눈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위기, 적군에게 에워싸인 인생의 처절한 위기 속에서 오히려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또 다른 별명은 희망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환난 속에서 스스로 희망을 발견하고 환난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때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남겨주신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기도로 이 어두운 밤을 밝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간절히 기도하며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6. 절망 속에 들린 음성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27:2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잠시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체포가 되었고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 벌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속속히 드러났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청구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엄청나게 큰 나라였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민주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재판에 있어서도 로마의 황제에게 직접 알현하여 그분 앞에 자기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 엄청난 특권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황제에게까지 가서 재판을 받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지금 받고 있는 재판의 결과가 불리하다거나 생명을 건지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서 황제의 재판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한 것은 그렇게 재판받는 기회로 활용해서 황제 바로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재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신앙적인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이 어떠한 그릇으로 쓰여 질 것인지를 예고하셨습니다. 많은 임금들과 이방인들 아에서 복음을 전파할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택해주신 것이고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것들을 다 이루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레떼의 성에 도착하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크레타 성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로마를 향하여 가고 싶어 했는데 이제 사도 바울은 가지 말고 여기서 겨울을 나라고 권고했습니다. 왜 그렇게 권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권고했을 것이라고 우리들이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항구가 좁고 겨울을 나기에는 불편하니까 이제 빨리 그 항구를 떠서 로마를 향해 가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고 그런 권고를 그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만한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배를 모는 사람들과 선주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항해 중에 만난 폭풍 속에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라굴로’라고 하는 이 폭풍은 그 시대에 그 지방에서 매우 유명한 계절 폭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라굴로 라고 하는 폭풍이 광풍이 되어서 휘몰아치기 전까지 바울이 탄 일행의 배는 순풍에 돛단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순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불순종하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그리고 항해에 들어섰지만 잠시는 순풍에 돛단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 못 가서 무서운 폭풍을 만나게 되었고 이 폭풍 속에서 그들은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바로 이런 큰 폭풍 속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곤고하고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나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고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고 자기 자신을 알 수만 있다면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음성이 폭풍 속에서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음성을 들려줄 사람이 없고 또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 폭풍 속에서 요동치는 배 안에서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제일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화물을 비롯한 모든 짐들을 바다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폭풍이 일어날 때 배의 짐을 버리는 이유는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하나는 수명부터 배의 높이를 가리키는 홀수를 높여서 큰 파도에도 배가 삼켜지지 않기 위함이고 배의 물건을 버리고 홀수가 높아지면 배의 복원력이 뛰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파도가 치면 배가 흔들리기는 하는데 흔들려도 짐이 거의 없으면 기가 막히게 원형으로 제 자리로 복원이 됩니다. 그러나 짐을 많이 싫게 되면 홀수가 낮아지게 되고 홀수가 낮아지게 되면 배가 원형복원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파도가 쳐서 배를 흔들어놓게 되면 무게 중심이 이리저리 이동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배가 침몰하기가 매우 입장이 됩니다. 그래서 폭풍을 만나면 배의 짐을 버려서 홀수를 놓이고 배를 가볍게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었고 그런 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이 사람들이 제일먼저 한 일이 짐을 버리는 것이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이 풍랑이 멎지 않았고 멎지 않는 풍랑은 이 배를 물에 빠트릴 것처럼 강력하게 뒤웅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가서 폭풍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GPS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위성으로 지상을 관측하는 방식이 매우 발달했기 때문에 항해를 하기 전에 이미 모든 폭풍이 지나가는 통로나 이런 것들을 다 감지하고 항해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만나는 적이 매우 적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도의 발달한 기술이 없었던 때는 결국 규칙적으로 오는 풍랑이나 바람,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인간방식에 의해서 판단을 하고 항해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위험을 만나는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뭐 여러분들과 똑같이 육지에서만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풍랑을 만난 적이 없지만 한번 이정도 풍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배를 타고 섬에 가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이상하게 파도가 많이 치는데 주의보가 내리지 않아서 그냥 배가 출발을 했습니다. 배가 중간쯤 왔을 때 무전기로 주의보가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냥 인천으로 오면 쉬울 것 같았는데 규칙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배를 돌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가 어떻게 높은지 재는지 방식을 잘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최소한 5-6미터의 높이는 되어 보이는 엄청난 파도였습니다. 파도가 확 쳐서 우면을 때리면 포물선을 그으면서 자연으로 넘어가는 그 그림을 보면서 이게 인간이 태어나서 장가도 못가고 여기서 죽는구나. 그런 죽음의 두려움을 그 어린마음에 느끼고 구명 복을 입고 배에서 있었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정말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폭풍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풍이 철선도 아니고 범선에 밀어닥쳤으니 뭐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경험을 못 했지만 얼마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절찬리에 읽혔던 ‘쌔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을 잃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배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항해의 모습을 그리면서 작은 배를 타고 자기 대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1200킬로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항해하는 쌔클턴의 자기를 버린 희생적인 항해를 보면서도 바다의 무서움과 파도의 어마어마한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폭풍이 이제 여기에 몰아치게 되었고 그리고 이 사람들은 그 매뉴얼에 따라서 제일먼저 화물을 버렸습니다. 거기에는 아마 자신들이 쓸 일상적인 짐과 식료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또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운반해주는 화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값진 것이었고 소중한 것이었지만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래도 배가 진정하지 않자 그 다음에는 배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구들은 대부분 배를 운행하고 항해를 계속하는데 필요한 기자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렸다는 이야기는 결국은 항해하는 길도 포기하고 오직 바다에 떠서 살아남은 것만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풍랑을 만난 배의 선원들이 해야 하는 규범에 따라서 그들은 정확하게 조치를 취했고 그 조치가 자신들에게 닥친 이 무서운 상황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의 기구까지 모두 버렸지만 풍랑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고 배는 이미 항로를 이탈해서 이리저리 바다에 몸을 맡기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항해를 위한 과학적인 기구가 없었던 그 당시에는 아무리 나침판이나 분도기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후에 생겨난 것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방향을 재는 여러 도구들도 별이 있을 때 사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날 동안 두터운 구름이 하늘 가득히 끼고 있었고 그래서 칠흑과 같은 어두움이 낮에도 드리워졌고 밤에는 더더욱 무서운 어두움이 온 바다에 가득했고 그리고 누구도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게끔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무서운 폭풍과의 씨름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몸부림쳤지만 그러나 마지막 찾아온 결과는 구원의 여망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여망이 모두 사라진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헛된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들은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날뛰자 화물과 모든 짐들을 바다에 아낌없이 던져버렸고 드디어는 항해하는 모든 기구까지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깊이 드리워지고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가 가는 방향도 잃어버렸습니다. 가야할 항로도 포기하고 이제 배에 떠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똑같이 인생을 가리켜서 쓰디쓴 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그 인생의 바다에 뛰어든 한척의 배와 같고 그것이 옳은 것이든지 옳지 않은 것이든지 간에 모두 자기가 가야할 마지막 행선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따라 가려고 자신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힘쓰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승복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목표와 다른 또 다른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속해놓으신 그 은혜와 사랑의 비밀을 깨닫고 그렇게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그 인생의 목표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루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각양 많은 탐심들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던 마음의 틀들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의 틀들이 무너지고 흐트러지게 되면 그들은 처음 이 어두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해놓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상실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됨으로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구원계획의 항로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러 가지 많은 방법으로 부단히 설득하십니다.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설득은 도덕적 서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를 거스르고 우리의 의절을 거슬려서 초자연적으로 우리를 굴복시키심으로서 당신께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양심과 지성 속에 말씀하시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도록 도덕적 방법으로 그들을 설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자기욕망에 충실하고 워낙 자기가 가는 인생의 길에 대한 가치를 확신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불순종하면서까지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도 그런 부패함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도적적인 설득의 방법으로 그의 양심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고 양심이 찔림을 받아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실 때도 있지만 보다 보편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청교도 리차드 십스는 이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 전 과정을 세 가지로 묘사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실체를 보는 것과, 두 번째는 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심입니다. 그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자신은 모든 면에서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확신하게 함으로서 그로 하여금 가던 길을 돌이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여리고 상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절히 바라게 하심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그 크신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온다고 술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도덕적 설득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이탈하여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죄를 확신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겸비한 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던 길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죄인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인생을 항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실리지 않은 신앙생활의 껍데기 속에서 그 속으로는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 아집에 붙잡혀서 제 나름대로의 인생의 길을 걸으며 제 멋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꾸어놓고 그를 쇄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올곧은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당한 고난은 대부분 이런 경우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하신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명백합니다.
만약에 한 사람의 신자가 있는데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그리고 자기의 부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을 인해서 참회하고 주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자신을 슬퍼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때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무엇 때문에 환난과 고난 가운데 버려두시고 시련과 핍박 속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종종 굳은 마음을 가지고 어두워진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인생의 강력한 폭풍을 보내시고 그 폭풍 속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일단 하늘자원을 의지해서 풍랑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제일먼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이 폭풍 속에서 벗어나려고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래서 그 폭풍을 만난 그 속에서 자신의 많은 이 세상의 자원들을 낭비하고 마음의 자원들을 낭비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지고 있던 많은 자원과 이 세상의 자원들을 허비하고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구원해보려고 하는 몸부림들이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폭풍 속에서 건져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마음의 자원들을 많이 낭비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수많은 관계를 파괴하면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 인생의 폭풍 속에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가소로울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싶어 하는 것은 그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폭풍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얼마나 훌륭하게 그 폭풍에서 벗어나는지 인간의 그 기교를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보고 싶으신 것은 그런 폭풍을 만날 때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제멋대로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양심에 가책을 불러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자신의 그릇되고 오만한 행실들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쇄신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고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깊은 풍랑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왜 풍랑을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바울을 통해서 떠나지 않고 여기에서 과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뱃사람들의 말을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말보다 더 신뢰했고 그리고 항해를 시작했으며 잠시 그들은 득의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풍랑이 왜 옵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어린아이처럼 찬송하며 매순간 주님의 손에 붙들기를 이 세상의 모든 보화를 붙들기보다 더 사모하며 그분의 손을 붙들고 매일매일 삶을 살고 걸어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과연 이렇게 무서운 폭풍을 그의 인생 한가운데 보낼까요? 그런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 부모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아이에게 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 때문에 매질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입니다. 경향입니다. 하나님께 따라가고 그분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올곧은 양심의 경향성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신자를 하나님이 폭풍 속에 몰아넣으셔서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에 팽개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난 인생의 많은 폭풍이 나라 때문이라고 말하고, 주위에 어떤 사람과 환경 때문이라고 말하고, 가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인생이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위에 다른 여건에 의해서 내 인생이 흔들린다면, 물론 흔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흔들린다면 그러면 나는 내 에너지를 가지고 내 인생을 보호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나의 자원을 가지고 침몰하는 내 인생을 바르게 하려고 몸부림쳐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위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이 흔들릴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하나도 없이 순전히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 개인의 인생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폭풍 속에 내동댕이쳐진 상황이 바로 자신의 상황이라고 말하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젊은 날을 지나고 있고 인생의 바다를 좀더 항해할 시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이런 폭풍은 젊다고 안 오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많이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가 비록 아직 젊어도 절망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을 살고 난 후에 자신의 시대에 당하는 고통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온 인생길을 회고하면서 자기 고생을 많이 말하기 시작할 때는 그가 늙는다는 증거입니다. 젊은이는 회고할 것이 없어서 회고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지금 부딪히고 있는 이 고난이, 당하고 있는 이 시련이 나름대로 중요하고 거기에 몰두합니다. 물론 그들은 보다 많은 인생의 항로를 지나면서 어른들처럼 많은 파도를 겪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 바울의 일행은 불순종으로 인해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도덕적인 설득의 방법으로 수없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항로를 점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인생의 항로가 있어도 그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황했습니다. 열정은 있고 행복을 향한 강력한 욕구는 있지만 어떻게 살아야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원래의 목적대로 사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많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때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게를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모든 풍랑이 이는 어두운 인생에 바다에서 주님이 건져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죽음에 비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왜 그런 풍랑을 만났으며 이제 이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의 항로가 어느 길로 가야지 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마지막 지향지가 어디인지도 우리는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너무나 명료해졌고 그리고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이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떤 인생을 살아야할 것인지 아주 명료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항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풍랑이 경험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바다가 여전히 쓰디쓴 바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풍랑과 큰 폭풍들을 경험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풍랑을 경험하게된 것은 결국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가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죄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 교회와 우리의 사회, 그리고 국가에까지 풍랑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폭풍의 궁극적인 원인이 자신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풍랑 속에서 그는 올바르게 그 풍랑을 벗어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 풍랑과 시련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도무지 의지하려고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허비하며 모든 것을 위해서 몸부림쳤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구원의 여망이 모두 사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뱃사람으로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마치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한 신자들이 그렇게 몸부림을 쳐도 결국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점점 더 불행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처럼 그들도 구원의 여망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절망 가운데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안심하라. 곧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장엄한 음성은 하늘을 찢고 폭풍 속에 들려오는 우뢰와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밧줄에 묶여 배 한쪽에 사로잡혀있던 가련한 죄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선언이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도 이런 음성을 발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음성이 우리의 상황에서 필요합니다. 폭풍과 같이 몰아치는 삶의 시련 속에서 그 고통의 의미도 알지 못할 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안심하라고 들려오는 이 음성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음성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 때 고난을 많이 당해도 마지막에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고난을 당한 끝에 깨닫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시시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큰 환난을 만나서 그 엄청나게 많은 재물들을 다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고 육신도 질병에 걸려서 사선을 넘나드는 고난을 당한 후에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다 치르고 나서 깨달았다고 해서 결국은 하나님께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쉬운 이야기를 그렇게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겨우 깨닫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은 무한히 돈을 벌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못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덕적인 설득의 방법으로 수없이 그의 양심과 지성 속에 말씀하시지만 안 들립니다. 왜? 마음의 사랑이 다른 곳에 가있으니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폭풍 가운데 집어넣으셔서 한참 굴리셔서 정신을 차리게 하신 후에 모든 자신의 방법을 동원해서 그 풍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짐과 화물을 버리고 인생을 항해하는 기구까지 다 버려서 알거지가 되고 난 후에 비로소 이 인생에서 일어난 이 폭풍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주님을 의지해야지 되는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구나. 너무나 평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이런 시련과 고난의 폭풍을 많이 당한 후에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보십시오. 모두 초등학교의 공과 책에나 나올 정도의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니 교회에 오면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안심하고 배신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교회에서 밥만 먹으면 듣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로 할 때는 못 알아듣고 결국 폭풍 속에서 다 털어먹고 나서야 알거지가 되어서야 결국 깨닫게 되는 그 심사는 결국은 얼마나 하나님을 등지면서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안심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정말 만나셨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깊은 풍랑 속에서 어떤 도움의 여망도 없이 구원의 여망조차 모두 사라져버린 별빛조차 없는 폭풍이 이는 밤바다에 버려진 배와 같이 그렇게 떠도는 인생을 살 때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 누군가가 우리의 손을 잡아주면서 걱정 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있잖아. 내가 너를 붙들고 우리 주님과 함께 도와줄 것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믿어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피곤하고 지친 삶을 사는지 눈물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서 척박한 이 세상의 광야를 흐르는 강물처럼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폭풍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리라. 내가 너의 옆에 있어줄게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하늘의 자원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마 이들은 바울을 호송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군인이었으니 군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이 배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줄에 묶여 끌려오는 늙은 바울은 아마 정말 하찮은 죄수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폭풍 한가운데를 여러 날 지나자 위풍당당하던 군인들의 모습은 모두 사라졌고 두려움 속에서 하얗게 질린 파란 입술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때 죄수인 바울의 입에서 안심하라. 두려워할지 말라. 그들을 격려하고 따뜻이 위로하였습니다.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 사랑이 연합을 이루어가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죽기를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욱 좋으나” 라고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폭풍을 만나서 이들이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비록 죄수였지만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생에서만 주님이 아니라 죽음의 강 건너에서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날 때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는지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 속에서 살고 있는지, 그분과 나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화목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화해되고 그로 인해서 주님과 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감이 좁혀지는 그 친밀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화목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종교지도자로서의 평탄한 삶을 청산하고 복음에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가 무엇 때문에 지금 풀려날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고달픈 항로를 항해하고 마지막에 가이사에게 가서 자신이 재판을 받기 위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가 그렇게 원했던 것은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내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하나님 앞에 깊이 붙어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모든 꿈은 예수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극한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어렵고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련이 얼마나 무서운 폭풍을 동반한 시련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풍랑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거나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고난과 시련, 위기와 큰 풍랑이 닥칠지라도 거기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은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폭풍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없는 한 죄수로서 권위 있게 그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었고 이제 이 폭풍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처럼 담대하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자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고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풍랑 속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저항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동안 계속되는 별빛하나 조차 눈에 띄지 않는 그 칠흑과 같은 어두움과 폭풍, 드리워진 죽음의 무서운 그늘 아래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안심하라.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게 된 것은 보다 직접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그 폭풍 가운데서 전날 밤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를 통해서 사도 바울 곁에 그 사자가 섰고 그리고 앞으로 될 모든 일들을 바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풍랑을 만나겠지만 그래서 배는 모두 파산하고 잃어버릴 것이지만 그러나 결코 이 배에 타고 있는 어떤 사람의 목숨도 상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가이사 앞에 서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는 그 사실을 사자가 전해주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사도로 하여금 폭풍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무엇인가 받은 것이 없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인간적인 동정이 되었거나 아니면 비인격적인 허풍이 되었을 텐데 주님께로부터 미래에 대해서 분명하게 들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사도는 담대하게 그들에게 말해서 방황하고 두려워하는 그들을 붙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 근거를 오늘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자가 내게 전해준 그 말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안심하라.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쓰디쓴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자신의 죄와 결함으로 인해서 이 커다란 폭풍과 같은 시련을 만나고 인생이 뿌리 채 흔들리면서도 어떻게 그 속에서 헤어 나올 줄 몰라 하는 많은 영혼들, 심지어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자신의 정욕과 죄로 말미암아서 인생에 이런 모든 폭풍을 만나게 된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인생의 폭풍과 풍랑을 만난 이 사실보다 더욱 명료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이 풍랑과 위기 속에서 나를 건지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되찾게 되는 것, 이것이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신자의 놀라운 복된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주일동안 이 세상에 정신을 빼앗겨서 자기의 육체의 욕심대로 살던 많은 사람들, 그래서 인생의 풍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 땅의 자원, 하나님을 섬기는데 까지도 쓰기에 아까워 아껴두었던 자원을 자기의 힘으로 이 풍랑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다에 모두 내어버리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만난 그 풍랑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자기가 왜 이 풍랑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 풍랑 속에서 자신이 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었으며 그리고 여기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이 교회가 그 신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인생의 깊은 풍랑과 시련의 한 바다를 지납니다. 두렵습니다. 떨립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원을 모두 낭비하며 하나님 없이 인생의 그 어두운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그러나 마지막 결과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모든 구원의 여망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보내신 인생의 어두운 밤바다에서 만나는 폭풍은 그렇게 헤치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눈을 감고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길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만난 인생의 어두운 밤바다의 폭풍이 제일 무서운 것 같지만 이 폭풍이 처음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쓰디쓴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아서 크고 작은 수많은 밤바다, 그리고 풍랑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폭풍 속을 지나왔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혼자 있는 것 같았지만 정직하게 인생을 회고하고 보면 주님이 손 내밀어 그 폭풍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지금 보면 유치해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회심할 즈음에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다니던 성화가 있었습니다. 저도 오래도록 젊은 시절에 성경 갈피에 끼어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풍랑이 이는 바다를 젊은이가 항해하고 있고 그리고 그 뒤에 주님이 홀로 서셔서 그의 손을 그 젊은이에 어깨에 올려놓고 붙들고 계시는 한 손으로 항로를 가리키시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때도 우리의 힘으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나 인생의 폭풍이 이는 밤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우리의 몸부림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셨기 때문에 그 무서운 폭풍과 같은 인생의 밤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고단한 이 몸을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그 손이 우리를 이끌어내었고, 우리를 건졌고 붙들어주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무서운 어두운 밤바다에 폭풍과 같은 속에서 마귀에게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가야할 항로가 남아있고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있고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어두운 풍랑이 이는 폭풍의 바다에서 침몰되지 않고 죽음의 파도로 우리를 삼키는데 내버려두시지 않고 살려두셨습니다. 깊은 폭풍을 만나서 우리의 인생이 뿌리 채 흔들릴 때 우리는 마치 짐과 화물과 운행하는 모든 기구를 다 버리고 배의 무게를 줄여보려고 몸부림을 쳤던 이 사람들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 그 인생의 어두운 폭풍이 이는 밤바다에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잠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외치지 말고 그 풍랑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폭풍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바람소리보다 더 명료한 음성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 없이 너 혼자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결과를 한번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생의 풍랑에 바다에서 때로는 그 폭풍과 어두움과 무서움 때문에 주님을 다시 찾게 되는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귀를 기울이십시오. 깊이 기울이고 내 인생이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것과 그리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이 상황을 향한 나의 처지, 이것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여러분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인생에 이 풍랑이 이는 폭풍의 밤바다에서 다시금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 그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주님 앞에 폭풍을 만나기까지 걸어왔던 불순종의 모든 날들을 참회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이기적인 자기적 욕심들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을 굳게 붙들고 폭풍의 어두운 밤바다를 헤어 나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고 그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의 깊은 풍랑이 이는 밤바다에서 이렇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 앞에 정말 새로워진 인생을 살게 되어서 오히려 폭풍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 있는 주님의 사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7. 주님을 붙들 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5:25-29)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일곱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의 기록을 보면서 ‘주님을 붙들 때’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혈루병에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혈루병 걸린 여인은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의 깊은 어두움을 벗어나게 된 상세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이 단지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이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이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분의 능력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과 같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기록을 읽는 것은 커다란 힘을 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어떻게 예수님을 찾아야할지 어떻게 그분을 붙들고 문제의 해결을 얻을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문제만 주시고 해답을 주시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의 문제는 바로 그 문제 옆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보면 그 문제의 해답을 깨닫지 못한 지난날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째든 오늘 여기에는 혈루증이 걸린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여인은 절망적이 질병에 시달리고 의원들에게 괴로움을 당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혈루증이라고 하는 것은 부인병의 일종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기는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혈을 계속 하는 병입니다. 여성들에게 이 하혈은 흔히 있을 수 있는 병이지만 여기서 지목하고 있는 혈루병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혈이 그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구체적으로 어느 집안인지, 나이가 몇 살인지, 등등 상세한 신상명세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이 여인이 이 질병에 걸렸을 때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아마 가족들도 많이 지쳤을 것입니다. 결혼한 여인이었다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이처럼 혈루가 흐르는 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라고 여겨졌고 그래서 공중모임에도 나갈 수 없었으며 성전에는 더더욱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황은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까지 번져가는 외로움을 동반했을 것입니다.
이 속에서 많은 의원들을 선택한 것은 당연히 그래야했던 선택이었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의원을 찾아서 그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의사를 찾았는데도 이 여인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고치는 정식의사도 가리키겠지만 또한 민간요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다고 하는 돌팔이들도 이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이 여인이 인생의 절망적인 질병에 처해서 많은 의원들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정식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민간요법, 약간은 미신적인 기운이 깃든 그런 치료방법까지 동원했고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이 여인의 절망적인 상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치료를 하는 혈루병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에 관한 기록들을 읽어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치료법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여인도 아마 이런 치료방법들까지 아마 동원하면서 많은 고생을 한 끝에 아무 효험을 얻지 못한 채 예수님께 나아왔을 것입니다.
하도 재미있어서 열댓 가지되는 가운데 한 다섯 가지만 골라서 한번 찾아봤습니다. 우선 첫째는 은전 하나 정도의 무게가 되는 명반, 즉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봉숭아물들일 때 사용하는 백반을 갈아서 포도주에 타서 마시면 혈루가 멎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먹고 혈루가 마를 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폐루시아 산 마늘을 한 대박 갖다가 포도주에 넣어서 푹 삶아서 그 물을 환자에게 떠먹인 다음에 ‘혈루야 떨어져라’ 그리고 소리를 치면 병에서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것도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이제 양쪽으로 갈라지는 갈래 길에 서서 오른손에 컵을 들게 하고 그리고 앞을 쳐다보게 한 다음에 몰래 뒤로 가서 깜짝 놀라게 하면서 ‘혈루야 뚝’ 하고 소리를 치면 그 혈루의 근원이 딱 마른다고 하는 민간요법도 있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은 딸꾹질과 혈루를 혼돈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는 한웅 큼의 민이라는 풀과 그리고 크로커스라고 하는 풀, 이것은 요리에서 사용하는 샤프란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그리고 호로피라는 땅콩류의 견과를 함께 갈아서 그래서 포도주로를 넣고 끓인 후에 이 혈루에 걸린 사람에게 먹이면서 역시 ‘이제 너는 혈루에서 놓였다.’ 라고소리를 치면 혈루병에서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더 황당한 다섯 번째 마지막 속설은 그래도 낫지 않으면 일곱 개의 밭고랑을 파고 그 밭고랑 일곱 개마다 사년이 안 된 어린 포도나무를 잘라서 불에 태워서 그 재를 일곱 도랑에 모두 채운 다음에 그 혈루에 걸린 사람을 그 재위에 앉게 한 다음에 하나 앉은 다음에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개로 모두 이동한 다음에 이동할 때마다 ‘혈루야 떨어져라’ 를 외치면 일곱 개 고랑을 지나는 동안에 이 여인의 혈루가 마른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하니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이 여인도 아마 이런 민간요법까지 모두 행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한 분투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리고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보려고 했지만 이 여인이 절망적인 상황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구체적인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여인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라고 하는 사실은 특별히 오늘 성경에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이 여인이 의사들로 인해서 많은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물론 환자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가 환자를 잠시 괴롭혀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어떤 병세의 호전도 없이 만나는 의원들에게 깊은 고통을 받았고 그래서 여인은 이 깊은 고통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도록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수많은 치료방법에 호소해봤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이 처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고 그 병은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두 번째는 의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었던 모든 재물을 허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나름대로의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가 가난한 여인이었다면 많은 의원들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의원들을 만났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때마다 의사들은 자신의 돈을 빼앗아갔을 뿐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있던 재물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는 병은 그대로 간직한 채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렇게 많은 의원을 만나고 재물까지 허비했는데도 이 여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간적인 치료방법과 의원에게 호소하는 것과 재물이라는 자원을 모두 허비해서라도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쳐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가 없이 이 여자의 병은 점점 더 중하여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이제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살아나야지 되겠다고 하는 의욕, 그리고 병을 고침 받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 그의 믿음 같은 것들도 점점 더 식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이 여인의 처지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는 항상 절망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좀 고달프고 정신적으로 힘겹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넘치고 즐거우면 인생이 어두운 밤이 아닙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은 항상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 그리고 이제 무엇으로도 내 처지를 개선할 수가 없다고 하는 깊은 외로움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아직 그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생의 명백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기쁨과 소망 속에서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깊은 고통 속에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보면 이런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다고 하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잡지에서 우리나라의 의료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기고한 어느 기사를 쭉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가족들이 불치의 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그 눈물어린 간증기를 읽어보고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습니다. 병에 걸려서 즉시 죽으면 사실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은 불행하지 않은데 죽지 않고 그 긴 질병에 고생을 합니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은 물론 없고 의학이 아직 그만큼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데 어마어마한 치료비가 들어갑니다. 저는 의료보험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더니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있어도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를 지불하면서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엄청나게 많은 재물을 허비하고 결국은 그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의 삶이 모두 뒤흔들려버리고 가족해체까지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저는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인들 중에도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지 될 것인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인생에 대한 해법이라든지 고난을 이기는 어려움이라든지 이런 치료방법이라든지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도 참 많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저 살면서 당하다가 섭리 속에서 고난을 당하면 이를 악물고 믿음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견디면 찬란한 햇살이 비쳐오는 그런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는 성도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가족들의 질병을 인해서 오랫동안 고통하거나 혹은 자녀들이 이런 질병에 걸려서 기약도 없이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부모들은 정말 찾아가보면 무엇이라고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시간을 빌어서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인생의 큰 고난은 대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면 물러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 있고 때로는 그렇게 온 것이 아니고 일평생 우리들이 지고 살 수밖에 없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종류의 고난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는 원하지 않지만 몸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든지 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해도 그 장애에서 극복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우에 많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한 이유는 육체의 장애가 있기 전에 먼저 그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마음의 장애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결국은 극복하지 못하고 그 많은 어려움들을 짊어지고 결국은 구겨지고 망가진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생각을 좀 바꾸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물론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고침을 받고 새로워지리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있고 또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려움도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셔서 거기서 벗어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사실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잠시 동안 인내하고 믿음을 기도하면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게 계속되는 어려움이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렇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그 어려움이 반드시 우리의 인생에 어려운 밤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한번 스케보를 탄 어린아이라고 하는 제목이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여러 가지로 잘못된 가운데 상체가 거의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상체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스스로 인생을 사는 방법을 터득해서 다른 아이들이 타는 스케이트 보드까지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인생을 감사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그렇게 온 몸에 심각한 장애가 올 정도로 그렇게 고생한 것은 아니지만 몇 해 전에 허리를 다쳐서 아주 심하게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은 제가 방배 4동에서 절뚝거리면서 돌계단을 오르내리던 그림을 아마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은데 허리가 망가졌습니다. 의자에 앉아있어도 허리가 끊어진 것 같고 누워도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고, 허리가 망가지고 나니까 목뼈까지 틀어지게 되어서 누워도 아프고 엎드려도 아프고 어떻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침대가 밀가루반죽처럼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거기에 푹 누워서 슬슬 꺼져서 들어가고 숨만 쉴 수만 있으면 이 뼈가 안 아플 텐데, 하여튼 긴 날 동안 한번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기운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금방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약도 먹고 또 병원에도 가봤지만 정말 시원한 대답이 없습니다. 수술하자고 하든지 잘라버리든지 그러면 될 텐데 두고 보자고 합니다. 더 나빠지면 수술하자고 합니다. 그럼 지금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그냥 참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돈을 많이 들이고 진찰을 했더니 마지막에 돌맹이같이 생긴 무거운 추를 하나 주면서 거기다 물주머니를 매달아서 문에다 매달아서 목을 하루에 30분씩 잡아당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때 건축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일주일이라도 쉴 수 있는 처지가 안 되었는데 이게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감사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못하고 이것 때문에 고민을 하는데 일평생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그러면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이 허리 하나 때문에 모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인생의 어두운 날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까짓 것 허리 조금 틀어진 것 그것을 가지고 주님이 내게 주신 모든 구원과 사명과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래 내가 이것과 함께 살자. 내가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일본 사람이 쓴 책이 하나 있었는데 암과 싸우지 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암하고 절대 싸우지 말고 공존하면서 살아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훨씬 더 오래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 죽는 것도 아니고 암에 걸렸다고 해서 그 암이 당장 며칠 안에 자기를 삼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데 사람들이 모르면서 자꾸 건드린다고 합니다. 나는 의학적으로 나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사실 하나는 거기서 배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일평생 이렇게 살 수 있겠다. 그러면 지금부터 준비를 하자. 그리고 마음을 갖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누워서 허리가 아픈데 나 자신에게 타일렀습니다. 야, 같이 살자. 나도 네가 여기에 사는 것 허락하겠으니 너도 나를 너무 괴롭히지 말고 우리 둘이 같이 동거하자.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놀랍게 기쁨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많은 은혜와 축복에 비하면 이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더욱이 더 감사했던 것이 사도 바울도 아팠습니다. 이게 혹시 나를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실 훌륭한 조짐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특별히 가족들이 그런 어려움을 당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사람, 자녀들을 낳아서 그 자녀들을 그렇게 일생동안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병 치례를 하면서 돌봐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도록 우리 기도해줍시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들은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일평생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가야지 될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그 상황을 깊이 부정하지 말고 내 상황이 아닌데 할 수 없이 당한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으로 그 상황을 깊이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깊이 그 상황을 끌어안고 그리고 그 모든 괴로움과 어려운 상황들을 오히려 십자가로 삼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구원받은 우리를 성숙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환난과 모든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점점 더 훌륭한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런 어려움과 고난을 이제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왔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것은 이것보다 더 큰 은혜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희 고등학교 때 축구를 아주 잘했는데 가끔 선수들이 운동하는 운동장에 가보면 선수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빨리 뛰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왜 저렇게 느려서 어떻게 대회에 나가는가.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선수들이 모두 발에다가 모래주머니를 작은 것 두개씩 차고 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있는 동안에 이 다리에 힘을 튼튼하게 기르고 그렇게 해서 며칠 뛴 다음에 시합 나가기 전에 며칠 전에 떼면 펄펄 나릅니다. 그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근력이 있고 강단이 있는 튼튼한 체육선수들이니까 거기에 모래주머니를 달아주고 몇 주씩 그렇게 활동을 하고 운동을 하게끔 그렇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죄와는 상관이 없이 그렇게 어려운 환경들을 허락하셨을 때 그 눈물나는 고난의 상황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런 분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라고 하는 설교를 들을 때도 한편으로는 나의 이 고난이 지날 때가 있을까 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노련한 항해사는 파도가 높을 때 빨리 항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사랑을 붙들면서 사는 사람들은 고난과 깊은 어려움의 파도 속에서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앙의 비밀들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이 많으면 그 속에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도 많고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이 많으면 그 속에서 우리가 미끄러질 수 없고 타락할 수 없도록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며 살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고통을 생각하지 말고 그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받은 여러분들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제가 존경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 벤쟈민 브리크니즈 워필드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화란계 사람인데 20세기에 삼대 칼빈주의자 가운데 한분으로 프린스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조직신학을 가리키던 교수였습니다. 그야말로 그분은 거의 천재이고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표현에 의하면 영미권에서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을 20세기에 섭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정말 탁월한 사람이었고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부인이 오랫동안 질병 상태에 있었습니다. 일평생 4시간 이상을 부인 곁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가 얼마나 부인을 지극히 사랑하고 간호하면서 일생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학자로서 성장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이 많은 방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에 그분이 쓴 책을 한권 읽으면서 정말 그렇게 탁월한 학자가 어쩜 이렇게 시편에 나와 있는 이 기록을 뼈 속 깊이 이해했을까 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감탄하며 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 그 노련한 학자가 그런 고난의 어두운 밤을 지났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 시인들 속에 깃들어있는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분투한 노력과 고난에서 오는 아픔들을 다른 학자보다 더 뛰어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은혜를 구하십시오. 질병에 걸리고 어려움 속에 있는 부모나 자기의 자녀, 동기간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한탄하면서 마음의 죄를 범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런 어려움 속에 두신 것은 나에게 주실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이시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고난의 계곡, 사망의 골짜기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 때 그 골짜기를 넘나들 수있을만한 큰 위로와 용기, 그런 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믿음의 비밀은 대게 고난의 어두운 밤에 일어난 믿음의 비밀입니다.
장미는 12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가장 진한 향기를 발하고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꽃잎을 딸 때는 그 어두운 밤중에 딴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인생의 깊은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 이미 베푸신 그 큰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고난 속에서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들을 더 거룩하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을 누리도록 주셔도 그것들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사랑하며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어려움과 고난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동행 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받을 더 큰 은혜와 더 신비한 사랑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거기에 소망을 걸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을 보십시오. 12년 동안의 긴 고난의 세월을 지났습니다. 12년 동안 그 고통 속에서 혈루에 걸린 채 고난을 받은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아온 이 순간도 아마 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혈루를 닦으며 이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을지 모릅니다. 그때까지 12년의 세월은 이 여인에게 있어서 지워버리고 싶은 고통의 순간들이고 자신의 인생의 아무것도 가져다준 것이 없는 어두운 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이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12년 동안의 이 치열하고 어두운 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만약 이런 혈루와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로 넉넉히 살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원하는 바를 다 얻을 수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풍요 가운데 죄와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큰 고난의 어려운 밤을 통해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이 여인이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만난 이 여인은 예수님을 꼭 붙들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행동을 오늘 성경에서 세 가지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 혈루가 흐르는 여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중에 나아갈 수가 없었고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었던 이 여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듣게 되자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자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모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 좋은 이야기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복음을 전해본 사람들은 너무나 아파하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 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고 예수의 소식을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 어두운 방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도 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새 인생을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해진 한마디의 이 복음의 소식은 그야말로 구원의 밧줄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소문을 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깊이 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하고 그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예수의 소문을 전해서 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 여인이 뒤로 왔습니다. 이 여인의 겸손을 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혈루가 흐르는 이 여인은 공중에 모일 수 없고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정해질 것이라고 하는 율법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한 끝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율법을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어 새 인생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로 왔고 마지막으로 그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손을 살짝 대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곧 예수님을 자신의 온 인격으로 붙든 것입니다.
세 번째 행동인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 행동은 이 여자의 모든 소망을 담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이 절망 가운데서 예수님을 붙든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었습니까? 질병에 걸렸습니다. 상식은 의사에게 찾아가라고 가르쳐습니다. 그러나 12년의 세월동안 많은 의사를 만났고 수많은 치료요법을 시도하였지만 병세는 점점 깊어졌고 그리고 재산은 모두 잃어버렸고 그리고 이 여인은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병을 치료하는 가운데 견딜 수 없는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어느 것에도 해결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상식이 가르쳐준 그 치료의 방법으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에게 일어난 질병이 일반적인 것 같으면 아마 이런 치료방법이 통용되었을 것입니다. 혈루에 걸린 어떤 여인도 어떤 치료방법에 의해서도 결코 치료받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런 평범한 방법을 택했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재물을 허비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자원까지 합해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서 모두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고통과 허비와 그리고 견디기 힘든 좌절밖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 불쌍한 여인이 그토록 자신의 모든 자원을 다 써서 여인이 이것을 다 사용해서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주님께서 이처럼 가련한 여인을 가혹하게 대하셨습니까?
그 여인이 12년 동안 혈루병에 걸려서 고난과 시련에 계곡을 넘나들 때는 답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여러 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과 그리고 가난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종교적인 배척감, 가족들에게 조차 버림을 받아야 하는 그 비참한 외로움, 오늘 성경에 보면 누구도 이 여인을 부축해서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여인인지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다리 사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갔을 이 여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그랬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병을 고침을 받는 그 순간 우리는 오히려 이 여인의 절망의 12년의 어두운 밤을 지낸 것이 바로 이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굴과 터널의 차이는 끝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둘 다 끝이 있지만 동굴의 끝은 더 큰 절망의 끝이고 터널의 끝은 찬란한 햇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주신 것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었습니다. 12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그는 자신의 모든 자원에 자신의 불행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큰 불행에서 건지시기 전에 절대 의존의 믿음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 예수님을 찾았더라면 이렇게 절실하게 예수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고 온 세상에는 자기를 치료할 어떤 방법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고 공중에 갔고 그리고 부정한 손으로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이 모두 이 여인 안에 있는 절대의존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인생의 어두운 밤길에 들어서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생활에는 항상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도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가 이 세상에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를 했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과 어려움이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지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이 우리를 그 고난의 상황에 두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주님을 어린아이처럼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모든 길이 고난의 길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무지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 주님이 이 땅에 많은 자원을 주셔도 그 자원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지 않는 사람, 성공과 그리고 번영을 주셔도 그 성공과 번영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래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디에서나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생의 어두움 밤중을 우리에게 가끔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그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자기만을 의지하는 오만을 버리게 하시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런 인생의 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아파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 주님이 주신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만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생의 어려운 섭리적인 고통을 당하면서 거기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은 우리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교회의 담을 넘어서 역사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이고 병든 세상을 고치고 메마른 땅에 다시 풀 돋게 하고 꽃피게 하는 사람으로 이 인생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 중심적이고 우리가 얼마나 죄를 사랑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데 익숙해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의지하고 그래서 밤에도 기도하고, 새벽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는 사람,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도 끊임없이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게 되고 거기서 구름 같은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함께 이 땅에 남아 있는 후배 그리스도인과 남겨두고 온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된 그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범죄한 자, 낙담한자, 미끄러졌던 사람, 주님을 향해 한때 강퍅했던 죄인들,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십니다. 그래서 그 약한 자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서 위대한 사랑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약한 자를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그런 일들을 하십니다. 오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아마 많은 사람들은 12년 동안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 비참한 여인에게 아마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12년의 절망의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이처럼 눈부신 아침이 찾아올지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살아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기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히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날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더러운 질병에 걸린 여인이었습니다. 마침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분 앞에 나아가 우리의 영혼의 손을 얹고 그리고 기도해달라고 자신 있게 기도할 수 없으리만치 그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혈루의 근원이 열려있어서 끊임없이 불결한 피가 흘러내리는 이 여인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악하고 더러운 사람들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이 12년 동안 아무 희망이 없던 이 여인에게 찾아왔고 그리고 12년 동안에 긴 어두움의 터널이 끝나고 터널 끝에서 이 여인은 눈부시게 영광의 햇살을 받았습니다.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홀로 고난을 이기고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요행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그 후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어서 그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고난이 오면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자원을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땅의 자원이 모자라 기도하면 이 땅의 자원을 주시고 이 땅의 자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하늘의 자원으로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뜻이 계셔서 끝나지 않는 고난이 우리에게 계속될 때는 고난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기쁨과 신비한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사단의 가시라고 고백했던 그 몸에 질병, 그것을 사단이 이겼습니까? 오히려 사단은 그 가시를 통해서 자기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했고 더욱 더 빨리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사도 바울을 직접 봐야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하는 자들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훈련시키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보십시오. 어느 경우든 인생의 영원한 터널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12년의 절망적인 상황이 끝나고 영광의 새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제 이 여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그 앞에 펼쳐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원이 모자라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어둔 밤중을 지나며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가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결코 버릴 수 없었던 죄악들을 버리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실들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절대 의존의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속에서 예전에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던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리고 하늘의 한없는 자원을 공급받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구되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 받는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우리 앞에 어두운 터널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터널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기서 주님의 손을 꼭 잡기만 하면 거기서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의존하기만 하면 결국은 우리가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따를 때 그분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그 고난의 어려움에서 이끌어내어서 빛 가운데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표시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인생의 어두운 밤길에서 주님을 붙들고 벗어나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8. 믿음의 사람이 그 밤을 지나는 방식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인생의 어두운 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나 신자들이나 모두 지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두 종류의 사람들은 현저하게 다른 방법으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납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은 더더욱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특별한 방식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아사 시대에 일어난 유대백성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이미 바벨론 시대가 끝나고 메데, 바사 시대에 접어들게 될 때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 바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분들이 배운 페르시아 제국을 가리킵니다. 이 바사 시대에 유대민족이 당하게 된 역사의 어두운 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왔고 끌려온 사람들 중에 얼마간이 70년이 마치는 날에 포로귀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 번에 걸쳐서 포로들이 귀환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고 이스라엘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 상태에 남아 있었고 그런 가운데 이제 이 바사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등장하고 있는 아하수에로 라고 하는 이 왕은 역사 속에서 크세르크세스 라고 하는 왕입니다. 그것을 이제 희랍말로 옮기다가보니까 아하수에로가 된 것입니다. 어째든 이 아하수에로 왕 치하에 바사 시대는 1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굉장히 강력한 나라였을 뿐만 아니라 왕궁에 그 호화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그런 제국이었습니다. 그때에 일어난 한 사건이 있었는데 유대인 말살을 위한 음모였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바사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가지고 있던 바사 사람들의 극도의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만은 왠지 모르지만 유대민족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은 이제 이런 하만의 조정을 받아서 유대민족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계획을 승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아하수에로 라고 알고 있는 이 크세르크세스 왕은 당시의 역사를 알려주는 많은 비문들에 보면 그 왕 당시에 얼마나 커다란 나라를 건설했는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비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크세르크세스 왕은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의 왕이며 모든 인종의 왕이며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의 왕이다. 그럴 정도로 페루샤 제국은 엄청난 판도를 가지고 제국의 백성들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객관적인 기록에 의하면 이 아하수에로 왕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좋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기록들이 이 아하수에로 왕이 변덕이 심하고 그리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임금으로 여러 곳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에스더서도 아하수에로 왕의 이런 변덕이 심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째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서 이제 역사의 어두운 밤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어두운 밤은 바벨론 포로로 접어들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맞이하게 된 이 역사의 밤은 절대 절명의 어두운 밤이었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밤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대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더더욱 어두운 역사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 어두운 밤, 이것이 왜 오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을 할 것 같으면 이런 설명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매데 바사의 시대가 끝나고 드디어 희랍의 시대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랍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 마케도니아 그리스입니다. 그 치하에서 헬레니즘이 찬란하게 꽃피게 되고 문학적으로 유럽이 모두 통일이 되게 됩니다. 거기서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나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이 로마시대로 넘어가고 그리고 그 로마시대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이 땅에 기독교가 찬란하게 꽃피게 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신약시대의 모태가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뭔가 쇄신시키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성경기록에 보면 바벨론 포로 70년이 끝나고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70년대의 세월이면 약 3대의 세월입니다. 포로로 끌려왔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이미 삶의 기반이 만들어지고 생업이 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이 민족들에게 에워싸고 있는 아직도 전쟁상태가 계속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그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더군다나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수축하면서 그러면서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성경기록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속에 영적인 강한 감화가 개인적인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자 그들이 바벨론에서의 평안한 삶을 뿌리치고 고난이 기다리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어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거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헌신으로 이 민족의 박해와 더불어 싸우면서 한손에 칼을 들고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성을 재건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조차도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들이 경험한 강력한 부흥으로 말미암아 쇄신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 전체를 하나님께서 이 어두운 밤을 지나게 하심으로 다시 한번 그들이 비록 바사 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들이 바사에 속한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서 그들을 쇄신시켜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역사의 위기를 만나게 해주셨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중요한 인물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왕명을 거역한 와스디 왕후가 페비 된 후에 다시 왕후로 간택된 유대인이었고 그리고 모르드개는 이 왕후가 된 에스더를 어린나이 적부터 부모처럼 따뜻하게 돌보아주었던 친척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왕궁에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는 어렵사리 왕후 에스더를 대면하게 되었고 왕후 에스더에게 자기 민족이 당하게 될 위기를 설명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요청하는 도움은 왕에게 나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기로 한 그 왕의 칙명을 취소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상한 규례가 하나 있었습니다. 왕후면 왕의 아내인데 왕이 명하지 않고 남편을 만나러 가면 없애버리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정신병자 같은 그런 규칙입니다. 어째든 그런 규칙이 아하수에로가 개인적으로 만들었는지 그 나라에 전통적으로 있는 규칙인지 알 수 없지만 어째든 그런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에스더가 아직 정치적인 입지가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왕이 이미 마음으로 결심한 그 일을 뒤집는 데는 왕의 특별한 감동이 없으면 왕권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으니까 정치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살길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에스더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짐을 하나 하기를 만약에 네가 이 민족을 돕지 않는다면 이 민족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너는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 그러면서 너를 이렇게 왕 가까이 세운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이런 이스라엘 역사의 어두운 밤중을 건져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면서 에스더를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어두운 밤을 지나는 신앙의 방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든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든, 심지어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어차피 인생을 지나면서 밤중과 같은 시련의 때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두운 밤을 지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자입니다.
저는 6.25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고 일제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혼란한 시기들을 80년대의 민주화운동, 90년대의 IMF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오합지졸처럼 풍지박살이 된 정치의 판도를 보면서 눈물나게 이 백성들이 불쌍합니다. 불쌍한 이유는 2만 불이 안 되었기 때문에 불쌍한 것도 아니고 못 먹고 살아서 불쌍한 것도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이유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우리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뉴스위크지의 특집기사가 말하자면 지도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루즈벨트나 드골, 처칠 같은 사람들을 평하면서 오늘날 이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과연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이 세계를 올바로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관한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나라의 고민만이 아니라 우리 같은 작은 나라의 고민이고 또 작은 나라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고민이고 또 우리 가정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다른 것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님이 세우신 훌륭한 지도자를 주시도록 그것을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선물로 우리에게 지도자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조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지도자들을 하나님이 이 조국교회에 주셔서 크고 작은 일들을 맡아서 감당할 때 그들이 큰 나무가 되어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고 교회가 거목과 같이 자라게 되면 그 나무와 숲 사이에 수많은 생태계들이 깃드는 것처럼 거기에서 수많은 작은 나무들이 자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조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기도입니다. 그런 정말 현명한 지도자, 개인적으로 경건할 뿐만 아니라 역사를 알고 이 민족을, 그리고 이 시대의 조국교회를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도구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식견이 있고 역사를 아는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도록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하고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세대를 향해서도 많이 투자를 해야지만 다음 세대들이 그런 지도자들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들이 자라나는 세대에 많이 투자를 해야지 되고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그런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을 보고 자랄 수 있도록 우리들이 솔선수범해야지만 그 토양에서 좋은 지도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역사가는 말하기를 역사에는 무슨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지도자의 우연한 인격적 특성에 따라서 역사는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면 역사 전체가 미친 듯이 날뛰어서 수천만의 사람들을 전쟁 속에 몰아넣고 죽여 버리는가 하면, 우유부단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또 수많은 백성들이 이유도 모르게 까닭도 모르게 고생을 해야 하는 그런 때도 지납니다. 현명하고 결단과 용기 지혜가 있는 지도자가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우리가 이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이 유대민족이 이런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되어서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게 된 이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아무런 정치적인 힘이나 권력이 없었습니다. 국권을 잃어버린 백성들이 얼마나 힘이 없고 비참한지는 일제 36년의 침략의 역사에서 우리들이 잘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보다 더 심한 어려움 속에 놓여 있었고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칼 앞에 잠잠히 머리를 숙이고 있는 어린양과 같은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스라엘 편의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는 모르드개와 이제 막 왕비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남편 앞에 나타날 수조차 없는 힘없는 어린왕비 에스더 이외에 아무도 유대민족의 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을 말살하고자 하는 바사 백성들의 편에는 다수의 바사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만과 같이 실권을 쥔 정치가와 그리고 그렇게 술수에 능한 사람의 조종을 받는 잔악한 포악적인 아하수에로 임금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보든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무서운 역사에 밤중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에스더와 모르드개 하급관리에 불과하고 왕 앞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 없는 정치적인 힘이 없는 어린 왕비였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사용하셔서 유대민족들을 지도하시고 그래서 이 역사의 어두운 밤중을 벗어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에스더가 이런 보고를 받고 이 역사의 어두운 밤중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뒤에 이어집니다. 이 모든 감동적인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세 가지 요소가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결단이었습니다. 에스더는 그 민족이 절대적인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돌아가거나 피할 수 있는 세 삼의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고 유대민족을 말살하고자 하는 하만을 비롯한 바사 정치가들의 이 집요한 계략은 철회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이 처해있는 이 밤중과 같은 위기 속에 개입하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결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많은 인생의 밤중들도 바로 이런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인생의 밤은 곧 지나가고 밤이 온다고 한다는 시를 읊조리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의 신앙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 현실의 어두운 밤이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길게 계속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영적인 침체가 세월에 의해서 저절로 치료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범죄하고 그것 때문에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죄에서 맛본 즐거움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은 쓴물을 머금으며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영적인 침체의 터널에서 죄의 지배아래 지냅니다. 그런 사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고 시련 가운데 두시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고 그래서 그들로 순종하게 하셔서 돌이키게도 하시지만 어떤 완악한 사람들은 그 속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 어두움 속에서 고난의 긴 밤을 잔인하리만치 길게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함을 보여주시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죄인들의 완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부드러움도 끝이 없고 우리의 마음의 강퍅함도 한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면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부드럽고 주님의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한 것조차도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 아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은 마음, 하나님의 작은 의지에도 움직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스쳐가도록 하나님이 주신 작은 생각도 붙들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강퍅해지고 나면 그 강퍅함은 또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곤고하게 하셔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쓴물을 머금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고생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 너무 고달프고 곤고하면 하나님이 생각이 나고 하나님께 돌아올 법한데 이를 악물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완악하게 된 상황은 신자들에게도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중이 길게 계속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올곧은 의지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애굽의 모든 보화를 누리는 것보다도 즐거워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느 한순간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않는 그의 삶은 강물에 떠내려가듯이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그 모든 호화스러운 것들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를 일깨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스라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언약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신앙이 그에게 일깨워주었고 오랫동안 익숙했던 애굽에서의 모든 영화를 포기하고 오히려 고난의 가시밭길을 백성들과 함께 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이 애굽의 죄악 된 부요 속에서 계속되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인생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이켰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모두 미친 것 같은 결단이었습니다. 애굽의 그 모든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졸지에 지명수배를 받고 목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앗아버려야 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목숨이 추격당하는 그런 지명수배자의 죄수의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즐겁게 선택했습니다. 믿음이 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단이 없기 때문에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리멸렬하게 계속하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틀림없이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서 빛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한가운데를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때때로 강력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작은 인생의 어려움들은 일반적인 신앙의 태도로 극복해나갑니다만 특별한 인생의 밤중이 있을 때는 생애를 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는 인생의 길에 힘을 줄 뿐만 아니라 가던 인생의 방향을 돌이키게 만들어주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대로 떠밀려가듯이 사는 일을 위해서는 이런 강력한 의지의 결단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죄에 끌려 다니고 그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신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 위해서는 중대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올곧은 길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실증과 죄에 대한 적절한 사랑이 가슴에 모두 끌어안은 채 고통스러운 인생의 밤을 지내며 하나님 앞에 형식적으로 도와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는 활력 있고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새 삶을 사는데 쓰여 지지 못하고 자기 안에 융성하게 일어나는 죄에 의해서 거의 소진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하나님께 가끔 은혜도 받고 눈물도 흘리는데 도무지 그의 영혼의 상태의 변화가 없고 따라서 섭리 속에서 당하게 되는 그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의 현실적인 밤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겉으로는 은혜를 사모하고, 겉으로는 기도하고, 겉으로는 교회생활을 해도 마음속에 내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하나님 이외에는 내가 의지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결단이 결핍된 것입니다.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기도생활은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기도하는 삼손의 기도처럼 힘이 없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나 그 은혜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을 동반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되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밤중이 계속되고 그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피를 말리는 고생을 하게 되고 우리와 함께 인생의 배를 탄 수많은 사람들이 애매하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나 때문에 수없이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피어오던 담배 하나를 끊기 위해서도 결단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인박힌 술 하나를 끊기 위해서도 피눈물 나는 결단이 필요한데 어찌 내가 살아오던 인생의 방식, 내 인생의 어두운 밤중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불신앙의 삶의 여정을 돌이키는데 결단이 필요 없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흔히 도박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을 ‘올인’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도저히 이대로 인생이 계속되는 것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올인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입니다. Resolution입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리멸렬하게 계속되는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밤,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서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팔이 짧아졌습니까? 그 귀가 어두워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움을 통해서 바사에 남아 있는 유대민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모여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모든 생명이 이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심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하는 장중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그들이 바사에 살고 있지만 바사의 백성들과 같을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라고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도 자기 인생을 고치고 사람들을 고치며 역사를 고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릴 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강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미적거리면서 삶의 상황과 타협하고 고통 받는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진통제처럼 죄가 주는 낙이나 먹고 마시면서 그런 식으로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려고 하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시시하게 살다가 시시하게 죽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영광이 무엇입니까? 고난과 시련 속에서 거기에 짓눌린 채 신음하며 하나님과 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다가 눈을 부릅뜨고 광야에 엎드려져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죽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과 약속처럼 우리가 소명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을 걸어가면서 역사를 고치고 상황을 고치고 위기를 고쳐서 기회로 만드는 그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의 어두움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구원의 놀라운 은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단을 하십시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생각한 것보다 더 훨씬 심각한 제안을 했습니다. 삼일동안 유대인들을 모두 모으고 삼일동안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당연히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 후에 왕 앞에 나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런 정도의 기도를 해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을 마시면서 삼일을 금식하는 것보다 물조차 마시지 않고 24시간을 금식하는 것이 훨씬 힘들고 물을 마시면서 일주일을 금식하는 것은 위험성이 적지만 물조차 안 마시고 3일 금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의사들이 보면 미친 짓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장이 붙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면 에스더가 5-60일 금식기도를 안 하고 이렇게 3일을 물도 안 마시고 금식하라고 얘기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상황이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급박한 것입니다. 농축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금식기도가 주는 강력한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게 바로 집중입니다. 금식하면 하나님이 배고픈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응답을 해 주신다기보다는 금식 자체는 하나님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인 효과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먹고 마시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신경을 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뭘 먹을까? 점심때는, 저녁에는 뭘 끓여서 가족들을 먹일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치우고 준비하고 장만하는 시간을 계산해보십시오. 금식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해방시켜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음식을 통해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기본적인 즐거움과 욕구들을 억제하게 만들어서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목표, 우리의 영혼이 응시해야 할 기도의 목표가 있음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집중, 이것이 바로 금식기도의 효능입니다. 에스더의 요구는 이것입니다. 이제 이런 위기에 이르렀으니 당신은 모든 유대인들을 모으고 3일 동안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에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분만 바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기도하지 않는 못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분량은 다르지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을 찾지 않으면 누구를 찾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도가 힘이 없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그 어두움을 물리치고 그 어두움이 끝나고 터널 끝에서 찬란한 빛이 비추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개벽을 가지고 오지 못한 능력이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에 집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응시하고 그분만이 내 인생의 어두운 밤에 밝은 빛을 비쳐줄 수 있으며 그분께로부터 오는 그 하나님의 빛 이외에 무엇으로도 인생의 어두운 밤을 떠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절대의존의 믿음, 그것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는 집중된 신앙의 응시, 이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토우즈는 말하기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된 한 시간의 기도는 산만한 마음으로 드리는 수백시간을 드리는 기도보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적합하고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에 유용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너무나 많은 인생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정되어있고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인생을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사는 방법은 많이 있지만 같은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침체 속에 산 날이 적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거미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 고단한 인생의 길, 죄와 슬픔이 가득 찬 세상을 지나는 동안 우리들이 침체에 빠질 수 없고 어느 정도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밖에 있는 수많은 근심과 시련, 박해와 고난이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부패한 성품들이 죄와 결별하지 못한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내적인 어두움 속에 몰아넣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지 않은 지적인 어두움들이 우리 위에 드리워져 있어서 영혼의 어두움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 인생의 방황의 심도를 더합니다. 하늘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에워싸고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적군에 둘러싸인 가운데 남의 나라에 와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든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의지하는 백성들이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붙드셨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생애적인 저작 리덴 티비 히스토리라고 하는 히스토리오블리덴 즉 ‘구속의 역사’라고 하는 논문 속에서 상세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태동되었고 그래서 자기가 산 시대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단의 궤계는 역사 속에 집요하였으나 한번도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교회를 지킬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표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흔들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다 망가진 교회들도 붙들고 그래서 사단에 의해서 삼켜지지 않도록 지켜오셨고 붙들어 오신 것이 성경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역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있고 지금도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는 것, 집중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지 않는 것이 그들을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오랫동안 지체하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중 속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립니까? 뼈아픈 고생을 하며 얼마나 많이 비통함으로 가슴을 찢고 그리고 아파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관계의 파괴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 섞인 불신앙과 사람에 대한 미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깊은 동정심 이외에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자원들을 하나님을 향해 매달리는 기도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처하고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날 때 쓴물을 머금으며 흐느껴 우는 그 비통한 눈물은 발등에 떨어진 칼이 되어서 그를 찌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도저히 자기 혼자 그 고난의 밤을 지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비록 자기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인생의 어두운 밤이 도래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죄와 강퍅함을 깨닫고 아버지밖에 의지할 분이 없어서 주님 앞에 나오며 용서의 은혜를 구하는 진실한 참회의 기도, 그리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집중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질 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위로로 바뀌고 그들이 당하는 그 가슴 아픈 모든 고통들은 후일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재 되신 화관을 쓰게 하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의 큰 회복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누가 이 죄로 가득 찬 세상에 불안전한 모습으로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한번도 넘나들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신 일중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사람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긴 세월동안 질병에 시달리면서 아무 희망도 인생의 어두운 밤을 가혹하게 지내고 있는 자기를 스스로 고칠 힘이 없는 형제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저는 자를 일어서게 하시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그 부패함을 인해서 이미 동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인생의 밤을 지냈다기보다는 인생 자체가 밤중으로 시작되어서 밤중으로 계속되어온 사람, 인생의 햇빛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제일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의 발자취에는 항상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은 모두 자신들의 죄 때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질병과 같은 그들의 죄를 씻기시고 영혼의 고통을 멎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 나와 그분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님이 유명해지셨어도 그 작은 흐느낌과 신음들을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긍휼하심이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추어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래서 특별한 인생의 밤중을 지날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쏟으시기까지 기도하셨던 광경을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가 기도를 안 하시고 노신 생애였습니까? 밤마다, 새벽미명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십자가를 져야 할 인류에 죄를 짊어지고 드리워진 그 어두운 영혼의 밤이 오시자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여러분도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중, 깊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용기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구원받을 수 없고 애매하게 자기만 죽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좋다. 그래서 죽으면 죽을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기억해보십시오. 왕은 자기를 본떠서 만든 그 신상에 절하도록 요구했고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절하거나 기도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고백했습니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붓는 풀무불속에 처넣겠다고 위협하자 왕이 우리를 그렇게 처넣으셔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 풀무불속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뜻이 계셔서 우리를 그 풀무불 속에서 건져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하거나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죽었습니까? 그래서 에스더가 죽임을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행사했지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으나 영혼은 살아서 오히려 믿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삶은 순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리멸렬하게 보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어두운 밤에 결단을 내리고 돌이키면 끊어질지도 모르는 죄의 즐거움, 흔들릴지도 모르는 육신의 안락한 삶, 안락하기는 쥐뿔이나 무엇이 안락합니까?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맞이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갈등의 밤중을 지나고 있는데 거기에서 무엇이 안락한 것이 있고 기쁜 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모두 잃어버릴지라도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미적거리면서 결단을 내릴 수많은 순간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불순종의 어두운 밤중을 지속합니다. 이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모두 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두 그렇게 약한 자들은 용기 있는 자들뿐입니다. 우리는 용감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 우리에게 잃어버려서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이 세상이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는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용기, 그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바라고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명예나 부귀나 우리의 생명을 신앙 때문에 잃어버린다고 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느 순간에 결단한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이렇게 미적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지 못한 가운데 수많은 날들을 흘려보내고 그것이 내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지리멸렬한 죄의 지배아래서 살아가는 끊어진 관계, 이것 이외에 재 거품처럼 남아진 망가진 영혼과 구겨진 삶 이외에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이 어두운 세상을 불러주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께로 돌아가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려니와 설령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만 나를 기뻐하시면 나는 내 인생에 어느 길로 걸어가도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하나님 의존적인 신앙, 이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용기,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를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9. 강가에서 흐느낄 때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8:21)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난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평탄한 길을 가기를 원하고 주님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우리의 삶은 평탄한 날들보다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날이 많고 즐겁고 행복한 날보다는 가슴 졸이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위기의 때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히 세운 뜻이 있기에 그런 길을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지 우리는 이것을 인생의 밤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이때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일입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율법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셔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하나님은 70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귀환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포로로 끌려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번에 걸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주님과의 만남이 있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세 번의 포로 귀환 중 두 번째 포로 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라라고하는 지도자의 의해서 1700명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아주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였으며 학자들이 흔히 그러기 쉬운 것처럼 말라깽이 학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가 먼저 준수하고 그 신앙의 비결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언행일치가 된 학자요, 지도자였고 바벨론 왕도 인정한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17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이제 왕의 허락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시대에 고레스 왕의 칙명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세 번에 걸쳐 이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귀환의 시발은 바벨론 제국의 종교적 관행정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커다란 바벨론 안에 있던 작은 많은 소수 민족들을 통합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각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자유가 주어졌고 그 관용정책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여 일부의 백성들이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을 다시 쌓고 성전을 수축할 수 있도록 그렇게 나라가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왕의 허락을 받아서 고토에 이스라엘을 향해서 출발하게 됩니다. 그들이 제일먼저 중간에 다다른 것은 아하와 강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강가에서 그들은 잠시 진을 치며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생의 깊은 밤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즉 이들은 이 강가에서 인생의 깊은 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들이 고토로 돌아가는 기쁜 날에 이 아하와 강가에 머문 것이 인생의 밤이 되었을까? 여러분들은 아마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러나 제국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고 예루살렘과 그리고 이스라엘 영토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일당인 이스라엘의 무리들이 자기의 본 고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미 들어와 살고 있는 이 민족들이 좋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제국 안에서 이름난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어디다 내놓든지 신앙적으로 튀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수룹바벨이나 느혜미아는 4만 명이 넘어 5만 명 가까운 큰 무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기 때문에 아마 웬만한 사람들이 쉽게 건드릴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느혜미아는 왕이 보내준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에스라가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는 1700명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이 민족을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없는 백성들이었으니 그들이 바벨론을 향해 걸어가는 그 행진은 마치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을 양들 몇 마리가 지나가는 행진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아하와 강가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을 보호해주는 어떤 군대들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왕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자시오, 보호하는 자시며, 하나님은 모든 대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하고 고백을 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왕이 보내주는 군대의 호위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약속의 땅으로 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왕의 군대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불신앙일 수는 없지만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고 주님의 우리의 길에 인도되시니 우리가 주님의 손만 붙들고 포로귀환의 이 길을 가는 것이 왕이 보내준 군대의 호위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신앙이 시킨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예루살렘까지 가라고 명령했지만 그 넓은 제국에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에스라가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들이 창칼을 들고 예루살렘에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비무장의 수만은 민간인들로서 구성된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노인네도 있고 어린아이와 아녀자들이 있었습니다. 짐승들의 때는 물론 있었을 것이고 가제도구와 많은 소유들을 가지고 마치 피난민들처럼 무리를 지어서 1700명이라고 하는 작은 무리가 이제 그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까지 당도하여야 했으니 그들이 당하게 될 수많은 앞에 있는 위험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모험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하와 강이 어디인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합의를 이루는 대목은 이것이 아마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데스 강 쯤 될 것이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아하와 강은 엄밀하게 말하면 유프라데스 강과 이어지는 오늘날 하트라고 하는 개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입니다. 그래서 그 커다란 유프라데스 강에서 흘러나온 한 지류인 개울 앞에 1700명의 작은 무리들이 진을 치고 그리고 이제 강을 건너기만 하면 바로 이 민족이 우글거리고 있는 그 땅을 지나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하는 때 그들이 거기에서 특별히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개울가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태도를 봅니다. 그들은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주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함께 진을 친 가운데 마음을 합해서 하나님을 거기서 간절히 찾으며 광야에 남은 길을 주님의 손에 맡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가 모두 지나가고 아쉬운 것도 많고 감사한 것도 많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영혼의 기억 속으로 묻혀버렸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있는 이 일년은 우리에게 밝고 기쁜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일년은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모두 우울하게 하고 신문을 펼 때 마다 울고 싶은 마음이 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두 우울하게 내년 한해를 전망하는 가운데 2005년이라고 하는 땅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보지 않은 예루살렘에 이르는 바벨론의 영토 한복판을 지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수많은 이 민족들과 같은 재난과 고난의 어려움이 2005년 속에 깃들어져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면 우리는 승리하는 한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하와 강가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새해를 앞두고 그렇게 주님을 찾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맞을 때 그 밤을 밝힌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절망과 불 확신, 두려움과 어두움이 가득한 인생의 어두운 밤을 밝힌 그들의 믿음의 행동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거기에서 금식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그들이 거기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제일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아하와 강가에서 1700명의 바벨론으로 올라가는 성도들 모두가 모여서 금식을 하였습니다. 지도자인 에스라의 인도 하에 금식이 선포되어지고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금식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서 마음을 모두 모으고 금식을 선포하며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곡기를 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금식의 참된 의미는 고행을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금식을 통해서 흐트러졌던 자신들의 마음을 모아 하나님 한분을 향하게 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소원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분산되었던 인생의 관심을 신앙 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이 경건의 기술들이 많이 잊혀져가고 있지만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 잠자던 신앙의 새 힘을 불어넣어주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진행을 재계시켰던 놀라운 추진력과 힘이 이 금식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내는 24시간 그 중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대부분 우리의 마음을 오가는 생각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생각들이 아닙니까? 이런 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관심을 뒤로 물러갈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서 골몰하거나 혹은 더 많은 시간을 그 일을 위해서 소비하게 될 때 영혼에는 그 모든 일들이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금식은 그런 의미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고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도록 권유한 것은 그들이 금식함으로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하나님께만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도전한 시간이었습니다.
에프비 마이어라고 하는 성경 해석자이자 신학자이며 설교자였던 목회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반드시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하는 것은 곧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심사가 하나님께만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이기를 참된 우정의 교제는 서로를 기뻐하고 서로의 관계에 몰두한 가운데 형성된 것이지 어쩌다 한번씩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우정의 관계를 기대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독수리가 날개를 쳐서 오름과 같이 비상하는 신앙을 가지고 인생에 부딪히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장엄한 교제의 숲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따금 하나님을 부르는 그런 일상적인 신앙생활로서는 그런 깊은 영적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세상과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구별되어 우리 전 영혼과 모든 생각이 거룩한 하나님께 집중되고 그분을 응시하는 영혼의 응징력 있는 집착이 필요하고 그런 시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깊이 있는 신앙을 갖게 되고 하나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을 그렇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면서 깊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결심했습니다. 왕이 보내주는 구원금이나 말발굽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는 군사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 그 피로 맺은 언약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기로 깊이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며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시켰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날 때 그 어두운 밤중에는 환경적인 어두운 밤중만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어두움이 우리를 더 많이 괴롭힙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밝은 빛이 있을 때 우리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어두움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주관적인 어두움과 또 하나는 객관적이 어두움입니다. 객관적인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가르쳐주기만 하면 알 수 있어서 물러갈 수 있는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읽고 또 책을 읽고 상담도 받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옵소서” 이것은 바로 이런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두운 밤중으로 몰아넣는 어두움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이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우리의 영혼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어두움이고 우리가 선택한 죄 때문에 우리의 영혼 속에 깃들게 되는 어두움인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금방 영혼 속에는 어두움의 장막이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분별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벌거벗고 다니면서도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라고 생각할 줄 모르고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자신은 벌거벗었는데도 그 좋고 고운 옷을 입은 것을 흉을 보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혼의 어두움은 영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어두움을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안 되지만 성도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그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으면 결단코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어두움들은 결국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이 인생의 밤중을 맞이할 때 이런 죄와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어두움에 어두움을 더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인생의 어두움을 헤어 나오기 위해서 애는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니 이는 마치 더듬이가 잘려버린 귀뚜라미처럼 움직이기는 하는데 위로 뛰어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게 되면 살이 썩고 뼈가 상하도록 고민을 많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 인생의 밤중을 지나야할지 깨닫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영혼의 어두움은 죄에 대한 욕망을 불러오고 그래서 인생의 어두움에 빠진 길에 육체가 원하는 대로 죄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어둔 밤을 지나는 사람들이 오늘 본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헤어 나오려고 합니다만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자신들이 그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으로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흐트러진 마음으로 일만 마디 울리는 기도보다는 집중된 마음으로 울리는 단 한마디의 기도가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주님의 마음에 감화를 끼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들어선 것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제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들어섰으면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지혜를 배우셔야 합니다. 제일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집중된 마음입니다. 근심과 수많은 걱정으로 뼈를 상하게 하고 살을 썩히는 시간들을 보내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을 향한 미움으로 가득 채워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서 죄를 짓고 망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그 인생의 어둔 밤에 하나님만을 응시하고 그분께 집중함으로서 그 속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어둔 빛을 밝히시고 무지한 영혼의 계시의 빛을 비추시는 주님의 새로운 은총을 힘입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짐승들이 다 네발로 기어 다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고추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고추 세우셨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면 거기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중 속에서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방향이 없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유일한 빛이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면 이 인생의 밤중, 동굴처럼 느껴지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갖는 하나님을 향한 집중, 이것으로 인생의 어두운 밤중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그들이 한 것은 겸비해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겸비함이란 하나님 앞에 자신의무능력과 무가치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아하와 강가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개처럼 짐승처럼 포로로 끌려가서 학대를 받던 그 긴 세월 속에 하나님을 향해 경외하지도 않는 이 민족의 지도자를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는 명령을 내린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아무 힘이 없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부터 그들은 이 민족의 밥 걸이에 지나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은 보호하셨기 때문에 그 고난이 많은 포로생활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1700명의 사람들만이 고토를 향해 올라가겠다고 정든 고향을 등지고 어린 것들을 앞세우고 가축들을 이끌고 가제도구들을 꾸려서 고난과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엄습할지도 모르는 긴 여행의 길에 들어섰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에 귀환을 알리는 초기기록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감동한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큰 감동, 마음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살고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사명을 받아 섬기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다시 성전을 짓고 그리고 또 성을 재건하도록 하나님께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되어서 바벨론에서부터 귀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그 상황을 보면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너무나 두려운 상황이 앞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왔지만 앞으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끌지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었고 그리고 그 앞에 펼쳐져있는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그 먼 길 때문에 자신들이 안전할지에 대해서도 두려움 속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움을 눈앞에 두었을 때 인간의 반응은 둘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절망하고 낙심해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지도자 에스라와 함께 1700명의 목자 잃은 양 같은 어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의 보호도 없이 아하와 강가에 진을 치고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는 금식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깊이 낮추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학자였지 큰 칼 옆에 차고 수많은 군대를 거느린 장군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인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모여서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졌습니다. 이 겸비함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도 자신들의 위기 속에 있는 절망의 어두운 밤을 이기게 해줄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하와 강가에 모두 앉아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마음을 비우고 이제 우리들이 의지할 분은 우리를 고토로 돌아가게 한 이 세상의 임금도 아니오, 군대도 아니오, 우리들이 의지할 분은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신앙의 고백 속에서 그들은 깊이 낮아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 짓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처음 부름을 받을 때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먼저 영광을 받으시고 성도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외적인 삶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큼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큼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셔서 우리 인생의 길을 여기까지 인도해오셨습니다. 일년 동안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 없이 회상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지난 한해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 속에서 걸어온 한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살면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이 자주 떠올랐던 한해이기도 합니다.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저와 함께 모진 세상에서 연약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 모든 성도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수많은 죽음의 그림자들이 교회를 에워싸고 사단과 마귀가 호시 틈틈 기회를 노리며 교회를 위협하였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폭풍을 지나고 바람이 부는 시련의 빈들도 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매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재물도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는 이 시간을 빌어서 축복합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삶 구석구석에서 눈물로 교회를 위해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가난해지면서 헌신했던 수많은 지체들을 축복합니다.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었지만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그 어두운 밤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배운 것 하나는 이것입니다. 인생은 철저히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 그래서 폭풍우 흑암을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의 여정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버리지 않는다는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주셨습니다.
교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정말 어려운 한해를 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떠나 거리로 내몰렸고 대학을 졸업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졸업과 함께 실업자들이 되었습니다. 잘나가던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계까지 위협했습니다. 이런 모든 어려움 속에서 정치적인들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매우 추운 일년을 지내왔습니다. 여러분들도 그 많은 백성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고달픈 2004년 한해를 지났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가장 어려움이 많고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때도 주님을 의지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최고의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이 밀려오는 시련과 어려움 때문에 주님을 붙들게 되어서 영적으로는 오히려 부요해지고 뜻하지 않는 사업의 어려움이나 실직, 경제적인 고통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붙들게 된 수많은 지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지키셔서 그래서 겸비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연약한 신자들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운데는 아직까지도 인생의 어두운 밤중이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겼습니다. 살아왔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만약에 굳이 자랑해야한다면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했던 이유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함이 아니오, 그의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능력을 통해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지만 연약한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연약함을 통해 드러나게 된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한 사람을 통해 받으실 수 없는 영광을 약한 사람을 통해 받으십니다. 잘난 사람을 통해 받으실 수 없는 사람을 통해서 오히려 못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을 통해서 오히려 당신의 용서하시는 은총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내년 한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시련이 아파도 우리는 그분을 버릴 때가 있지만 그분은 우리를 버리실 때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아하와 강가에서 한 일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시는 분입니다. 이제껏 우리의 살아온 인생이 그분이 공급해주시는 것의 빚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먹이셨고 그분이 우리를 입히셨습니다. 생명의 양식만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단한 인생의 길에서 우리에게 자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멸되지 않고 수많은 원수에 에워 쌓였어도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주님은 우리가모든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도 돌아올 때는 아버지의 집에 부요한 품꾼을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지금 버려진 양 무리들과 같이 한 지도자 에스라의 지도를 받으며 피난민처럼 이 민족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바벨로 제국 한복판을 지나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구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그러나 이를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가 기도로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서 주님을 찾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시고 거기에서 우리를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인생의 어둔 밤이 우리 인생에 여러 번 찾아와도 그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주시는 방법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죄악 가운데 잠들지만 그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주님께 간구하는 사람들은 그 어두움을 밝힐 빛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인생의 어두운 밤중에 오히려 하나님께로 오는 찬란한 은혜의 빛, 어두움 속에서 들려오는 그 하늘의 아름다운 가락에 취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히려 그 어두운 인생의 밤중에 주님을 붙들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은혜를 품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많이 기도해야 하고 교회가 흐르는 강물처럼 살기 위해서는 온 교회가 기도의 힘을 모아서 그 힘으로 이 교회를 역사의 바다 위에 띄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척박한 강토 한복판을 흐르며 오늘 기도자의 고백과 같이 소외당하고 고통 받고 아파하고 누군가의 손 뻗치는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는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떠나 일그러진 이 세상을 곧고 바르게 펴기 위해서는 개혁의 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은혜가 강물이 되어서 척박한 세상 한복판을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합시다. 간구합시다. 이제껏 우리를 기도 속에서 이보다 더한 불같은 시련 속에서도 건져주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이 당면하는 인생의 밤중에서도 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0. 성실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
“그러나 보라 내가 이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부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렘33:6)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의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남쪽이 망하기 전 약 180년 전 역사상 앗시리아로 불려지는 앗수르 라는 나라에 의해서 파멸되었고 유다 홀로 남은 단독 시대가 이어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유다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면서 당신의 뜻으로 돌아오기를 간청하셨지만 백성들은 끊임없이 범죄하며 주님의 손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앗수르가 점점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 왕국 유다가 잠시 그 속박 상태에서 벗어나는 독립의 자유를 누리기는 했지만 쇠약해진 앗수르의 정세를 틈타 신흥세력이 융성하고 있었으니 역사상 바벨로니아 라고 하는 나라였고 바벨론으로 성경에 나오는 나라입니다. 이 바벨론은 점점 강성해져서 결국은 애굽 쪽으로 남하하려는 정치적 야욕과 그리고 북진하려는 애굽의 세력이 마주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서 유다나라는 생존해남기 위해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후일 두 세력이 크게 부딪히고 결국 그 전쟁에서 애굽이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유다 민족의 장래는 결국 바벨로니아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비극적인 역사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들을 홀로 하나님 말씀 없이 내버려둔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합과 이세벨의 배교의 시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북 왕국의 아합과 그리고 이세벨 왕비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그 여호와의 신앙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이방신 종교의 도입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철저한 배교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배교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역사에 가장 출중한 선지자 둘을 보내셨으니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워진 역사 속에 밝은 빛과 같은 말씀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셔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당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어서 행하여할 바, 살아야 할 길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때도 때로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캄캄한 어두운 시대에 지낼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배 중에 설교를 통해서 가장 잘 말씀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실제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상대해주시지 않는 것 같은 단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그 뜻과 그 의미를 알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처음 이 땅에 창조되었을 때도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마지막 이 세상 심판하실 때도 하나님은 한마디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의 백성들에게 가장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은 때도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들이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분의 마음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뜻, 그분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이 끊어진 채로서는 도저히 참된 신자의 삶을 살수 없고 구원의 길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사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생활이고 모든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는 들음에서 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깨닫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갈 바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어떤 난관을 만나든, 혹은 깊은 죄에 빠져서 영혼의 어두운 밤중을 지나든 두 가지 사실만을 우리들이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결코 악을 행하실 수 없고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 속에는 반드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선의 기준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에게 고통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마음을 보이시고 우리는 그 마음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갈 길을 인도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악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나는 나대로 가고 싶은 길이 있고 살고 싶은 삶이 있으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불신앙의 결단, 경향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실한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봅니다. 노예가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인의 손을 바라고 그 긍휼을 기대하는 것처럼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고 기대하며 또 하나님의 그 풍성한 자비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서 이제껏 살아왔고 주님의 보호와 사랑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들을 새롭게 하시지 않고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 목적을 성취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나타나는 이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어두운 시대에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이스라엘의 밤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같이 뛰어난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의 종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어찌하든지 애굽을 의지해서 바벨론을 꺾고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지 않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였지만 애굽이 그들을 도와주고 난 다음에 그들을 독립국가로 잘 살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바보같이 이들은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을 깊이 책망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너희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싫어했고 그래서 그를 시위대 뜰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예레미야는 그 시위대 뜰에서 결심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외쳐도 너희들이 그렇게 듣지 아니하니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렇게 결심했는데도 그의 가슴은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중심이 불타니 그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고된 고난을 우리는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받게 되는 그 예언이 여기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겪게 될 그 비참한 고난, 그 이전에 있을 예루살렘에 파괴와 그 수많은 백성들의 살육과 고통은 이루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 대목에서 논리적인 혼란을 느낍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이 범죄 했다고 해서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고 죽임을 당하고 전쟁 속에서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실 수 있을까? 하는 소위 신정론에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잘 순종하면 그들을 복주시고 그들을 모든 민족에 뛰어난 민족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께 끊임없이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심판과 죄에 대한 그 하나님의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드러내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그 상황을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경험하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백히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다는 그 자체가 심판을 통해 그 백성들과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셔서 그들로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는 효과를 이루신다고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버드나무가지에 걸었나니 이는 바벨론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부르라고 하니 우리가 이방의 포로로 끌려온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뇨 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고단하게 노예의 하루의 삶을 노역으로 끝낸 후에 저녁 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시며 악을 미워하시며 선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심판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것이 정당한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보복적인 분풀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그 자체에 더러운 껍질을 벗겨내고 정결하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크신 능력으로 건져내어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그 가나안 원주민들을 토벌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의 유업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들이 거기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포도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평안히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심지 않은 곡식들의 열매를 추수하게 하셔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강한 군대와 훌륭한 왕을 주어서 그 땅을 통치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악한 백성들의 나라의 군대에 씹히지 아니하도록 주님이 보호하고 지켜주셨습니다. 온갖 기적과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적인 보호가 그들의 역사에 점철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그의 특별한 기적적인 은총을 힘입은 민족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비상하리만치 특별하게 보호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바로 하나님을 알리는 이 세상에 깃발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 없이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고 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보는 일 없이는 그들이 참으로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늘에 자원을 은혜를 통해 공급해주셨고 그 은혜와 함께 수많은 육적 구원의 행동들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볼 수 있는 지구의 배꼽 한가운데 이스라엘 나라를 택하시고 거기에 여호와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진정한 행복과 그 영원한 기업이 무엇인지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으셨으니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통치가 만약에 그분의 손에 붙들려진 연필이었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그 손에 붙들려진 연필이 쓰고 지나간 한 편지지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를 품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현란한 필체로 적어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모든 백성들은 그 편지지를 읽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는 것이 자신들의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똑같이 이 세상 나라의 번영을 추구하고 이 세상 왕국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었고 불 꺼진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가 아니라 썩어있는 껍질들을 모두 심판의 칼을 통해 벗겨내시고 그 그루터기에 다시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선한 백성들의 줄기가 뻗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쇄신의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많은 번영 속에서 타락했지만 그러나 사실 그 번영을 누가 가져다주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던 부자유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자유롭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에게 있는 넘치는 물질들을 누가 주셨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수많은 영광의 기회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공교롭게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수많은 자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는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으니 최근에 윈 형제가 쓴 간증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처럼 개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때 아직까지도 중국 땅에 그렇게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박해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74일 동안 밥알 한 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자기가 믿는 방식대로 성경적인 신앙을 고수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두들겨 맞아서 뼈가 부러지고 그리고 수갑에 채워서 뼈가 드러나고 수많은 전기 봉으로 고문을 당하고 두개골이 깨질 정도로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대 지진이 일어난 지역은 최근 들어서 가장 기독교를 혹독하게 핍박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투옥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암살을 당해도 정부에서 수사하지 않고 심지어 스리랑카 같은 지역에서는 하루에 세 개씩 교회가 불타고 부서졌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창에 찔려서 죽고 총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만 민족에게 버림을 받고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서 숨어살고 도망 다니는 신세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부요하게 살고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40년 전에 조국교회가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전역에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예배당은 없었습니다. 모두 그 추운 겨울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그리고 톱밥난로 장작난로를 놓고 그렇게 연기 속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 꼭 비디오 필름을 보니까 중국에 있는 남쪽의 지하교회의 예배당과 너무 똑같습니다. 손끝마다 발끝마다 동상에 걸려있었고 지극히도 가난한 시절에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목도리를 차마 벗지 못할 정도로 추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신앙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고 고문을 당하는 그런 시절은 우리에게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주신 선물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는 주님이 당신을 잘 섬긴 대가로, 혹은 주님이 당신을 잘 섬기고 이 온 땅에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 주신 그 수많은 자원들 때문에 우리 스스로 부패하고 뒤로 물러가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지 한번 깊이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안일하게 살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이제는 웰빙 이라고 하는 바람이 불면서 저마다 자기 몸 하나 위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웰빙보다 중요한 것은 웰 다인입니다. 잘 죽는 것이 없이는 잘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은 웰빙의 사람이 아니라 웰 다인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풍요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풍요함 속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 사이를 혼돈 하며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부패한 욕망과 이 세상의 안일과 안전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불타는 용기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군사와 같은 함성대신에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나태한 그런 희망들이 우리 사이에 넓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현실에 안주한 사람이 아니라 불멸의 꿈을 따라 산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기록되어져 나갔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바로 그런 꿈을 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 했고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번영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이르렀습니다.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그 많은 포도주와 곡식들은 오히려 우상에게 받쳐졌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주님이 풀어주신 그 수많은 안락한 여건들은 오히려 그것을 자원으로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나라는 썩었고 백성들은 희망이 없는 백성들이 되었고 어떻게 해도 주님의 향취를 드러낼 수 없는 맛 잃은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고 누룩 없는 가루와 같은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을 깎아내시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혁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이처럼 고난을 주시고 시련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연단하시며 불결의 껍질을 벗겨내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대부분의 많은 고난과 괴로움들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많은 죄와 불순종 때문에 겪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고난과 이런 위기를 맞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죄를 미워하시고 그 죄의 껍질들을 깎아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지금은 사는 환경이 좋아서 그런지 별로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옛날에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학교에 가면 성한 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버짐이 나서 이렇게 먹은 애들, 그 다음에 못 먹어서 이렇게 하얗게 피는 애들, 그리고 여기 기계충이 걸려서 머리털이 하얗게 벌레가 먹은 애들, 별의별 이상한 애들이 다 모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병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괴롭혔던 병중에 하나는 종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기는 염증이 근육 깊은 곳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겉에는 조금밖에 곪지 않았는데 그 곪은 염증의 뿌리가 이 살에 깊이 박혀서 겉에 웬만큼 약을 발라도 낫지 않고 속에서 자꾸 곪는 것, 이것이 바로 종기입니다. 이런 염증이 생기면 이것이 임파선에 영향을 주어서 이런 겨드랑이 같은 곳이 다 붓고 몸이 쑤시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종기를 다루기 힘든 이유는 그 깊은 곳을 치료해야 하는데 깊은 곳을 치료하려면 아픕니다. 그래서 결국은 겉의 약만 계속 바르는데 낫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게 되면 아주 확실하게 치료를 해줍니다. 우선 가자마자 이제 겉에 있는 딱지를 확 벗겨내 버립니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환자를 다룰 때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네 말로는 애정이 있으니까 그렇게 다룬다고 하는데 그 딱지를 확 벗깁니다. 그러면 살점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피가 납니다. 그럼 거기에 고름이 맺혀있습니다. 아파서 살살 만지던 고름을 사정을 안 보고 그것을 확 누릅니다. 그럼 거기에 터지면서 속에서 피고름이 솟아오릅니다. 그래도 계속 눌러서 고름이 다 빠져나오고 나중에 맑은 피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계속 누릅니다. 그러면 결국은 다 빠져나옵니다. 그 정도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피고름이 한 숟가락 이상 빠져나왔으니까 공간이 생겨서 그냥 내버려두면 또 곪으니까 그래서 핀셋트에 독한 과산화수소를 묻혀서 구멍 속으로 집어넣고 후벼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을 소독약을 부어넣고 후벼냅니다. 그러면 눈이 노랗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거기에다가 그렇게 하면 될 텐데 진짜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신 같은 것들을 이제 발라서 그 속에다 집어넣고 약을 채워놓습니다. 그리고 반창고로 뚜껑처럼 거기를 닫아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오래 아프던 곳이 새살이 돋기 시작하면서 한 일주일 지나고 나면 깨끗하게 딱지가 떨어지면서 아물어버립니다. 사실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점점 곪아서 걸음도 걸을 수 없어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깨끗하게 낫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무지막지하게 고치기 위해서 딱지를 떼고 피고름을 짜내고 그것들을 그 독한 소독약으로 집어넣고 쑤셔서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를 때 그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다시 도지지 않는 깨끗한 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단지 고난만 당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해서 깨닫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병든 부분들을 도려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치료하시는 방법은 때로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가 죄와 얼마나 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고쳐지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고치시는 방법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 속에서 모든 존재의 본질은 힘과 경향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과 경향성이 본질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인간도 역시 그의 본질이 무엇인가 할 때는 그가 그 안에서 가지고 있는 힘과 경향성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일 경우에는 은혜의 힘이 그에게 있고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착한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삶의 궤적이 마음에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하는 죄악의 힘을 갖고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진 사람과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진짜 행복하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본질적으로 고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파해도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있는 그 죄의 환부를 도려내고 다루시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가혹하게 말씀의 칼로 그것을 찢고 그리고 포도주를 부어서 그래서 우리를 씻어내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 없이 다루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선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너무나 지독한 방법으로 자기를 취급하신다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고 그렇게 우리를 고쳐서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여기까지도 신앙의 길을 걸어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매우 소중한 존재로 여기시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못박아죽이시기까지 여러분들을 그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차마 버리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잠시 망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고쳐서 쓰고 싶어 하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망가진 자신을 고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아니면 누구도 치료될 수 없고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팔이 아니면 누구도 고쳐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도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는 분이고 죄에 의해 망가진 우리의 영혼의 섬유질을 가장 잘 파악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주 숙련된 의사와 같이 말씀의 칼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 속에 다가와서 우리의 힘줄 사이에, 그리고 뼈 사이에, 우리의 조직 사이에 배어있는 죄의 염증들을 치료하시고 말씀의 은혜로 새롭게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고쳐서 쓰시려고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여기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분의 고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간섭을 통해서 결국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심판하시는 고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그 치료의 손길로 인해서 받는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두 가지로 드러내심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하나님이 당신이 평강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으로 기록됩니다. 당신이 평강의 풍성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평강은 평화를 뜻하는 것인데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느끼게 되는 전쟁이 없는 상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상태, 모든 것이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는 안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평강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에는 이런 평강이 있을 수가 없으며 주님을 거슬러 사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이 평강이 없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짓밟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전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을 누릴 수 없는 전진일 뿐입니다, 야망에 의해서 충동됨에 자기의 길을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죄인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며 자기의 음성을 듣고 계시며 어느 곳에 있든지 내가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진정한 확신이 그들의 인생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은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과 화평이 없습니다. 그들에는 언제나 불안하고 하나님 앞에서 늘 불안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자원을 가지고 마음껏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 모든 자유가 그들을 평강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거룩한 구속 없는 곳에는 신령한 평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자유는 이 평강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는 것은 바로 이 평강의 분량입니다. 하나님과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평화하고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왔고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내게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단순히 삶의 양태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그 삶의 질에 두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 그래서 공부를 해도 주님 때문에 공부하고, 직장에 다녀도 주님 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시집 장가를 가도 예수님 때문에 시집장가를 가는 그런 사람, 그런 삶의 질을 추구하고 그 질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늘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평강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큰 고난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길을 걸어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평안함보다도 훨씬 더 값집니다. 주님이 정해주신 길을 걸어가면서 당하는 시련과 아픔은 주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서 얻게 되는 수많은 번영과 유명한 것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번영해도 그들은 행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그들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님만이 내 삶의 기쁨이시며 주님 얼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기쁨이시며 모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삶, 그분만이 나의 방패이시며 산성이시고 요새이시며 내가 여기에 서있는 것이 내가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워주신 그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여기 서있고 그리고 내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내 생애 최고의 가치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삶의 질이라고 고백을 하며 살 때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라는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송구영신 예배 시간에도 제가 잠깐 설교했습니다. 오늘날은 우리들이 삶의 양태와 질을 너무 혼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진정한 가치는 이 세상에 높아지고 부요해지고 일을 적게 하고 많은 돈을 받는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태일 뿐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마당이나 쓸었을 때 삶의 양태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삶의 양태는 비교할 수 없는 양태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그 삶의 양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한 마당을 깨끗이 질서 있게 할 수 있었지만 애굽의 총리가 된 다음에는 죽어가는 수많은 세계의 만민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양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양태만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노예로서 마당을 쓸던 요셉의 삶의 양태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만민을 살리던 요셉의 삶의 양태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삶의 질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노예였을 때나 그나마 모함을 받아서 옥에 갇혔을 때나 옥에 있는 간수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그곳 일을 처리하는 집사가 되었을 때나 혹은 그 옥에서 풀려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나 그는 항상 동일한 삶의 질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손이 주님의 손을 붙들고 있었고 비단의 옷만 온몸에 휘감긴 부귀영화 속에 살 때나 헛간에서 쏟아지는 볕 빛을 맞으며 노예로 밤잠을 지새워야 하는 때나 언제나 동일한 삶을 질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로 인해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질을 통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죽었으나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온 삶은 하나님과의 평강이 가득했습니다.
어떤 삶의 양태 속에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 아니었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왕의 신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을 때나 그리고 또 그 바벨론에서 뛰어난 총리가 되었을 때나 삶의 양태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의 삶의 질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고액의 연봉을 받던 총리 시절이나 포로로 끌려온 그 처량한 시절이나 동일한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 땅에서 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간신배의 모략으로 사자 굴에 갇혔을 때 그를 사랑하던 다리오 왕이 와서 그 다니엘을 향해서 말한 그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사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주셨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신하였지만 다리오왕은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왕을 섬긴 신하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강 속에서 그 고난의 때를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것은 사소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죽고 사는 일도 주님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것입니다. 신자에게서는 죽음도 또 다른 삶의 양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놀라운 평강. 그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 그 삶이 최고의 삶의 질입니다. 그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앞길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보니까 괜찮았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정말 주님의 손을 붙들고 그분이 평강 안에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당신이 섬기시라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성실에 풍부하신 주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에서 볼 때 이 성실하심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성품이고 특별히 당신이 맺은 언약관계에 대해서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가지신 견고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관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괴하고 죄악 된 길로 달음질쳤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끊임없이 언약관계를 파괴하고 도망가는 음란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똑같은 행동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과의 약속한 곳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들은 죄악으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거기에 그대로 계신 그 성실하심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아파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신실하신 사랑, 변함없는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해보십시오. 우리의 행한 대로 주님이 갚으시고 우리가 주님을 향해 배신한대로 우리에게 응답하셨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음란한 여인 고멜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던 호세아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끊임없이 정절을 버리고 주님의 품에서 도망치는 두 마음을 품은 우리들을 찾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에는 회개하는 마음과 죄에 대한 용서를 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다시 살게 해주셨고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시 섬기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그 위대한 일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많은 죄와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완고함과 고집, 두 마음을 품은 불결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제공받았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진멸되지 아니하고 시시로 마음을 녹이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과 자백 속에서 여기까지 와서 우리는 은혜 위에 떠밀려 여기에 서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신 분이시고 당신의 세우신 아름다운 그 계획을 따라 우리를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성실하심을 기만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성실하심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가고 변화되지 않은 욕심대로 살아가서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죄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제껏 까지 우리를 섬기시고 때리시면서 고치시면서 어루만지시면서 그 눈물로 씻겨주시면서 참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실하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주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성실하심을 본받아 주님과의 언약의 신실한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1. 불후의 세미한 음성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몇 주 전에도 이 앞에 있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그 장면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였고 바알종교를 퍼트리기 위해서 시집온 이세벨과 함께 아합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가장 어두운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를 보내고 그 제자 엘리사 선지자를 뒤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리 어둡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배교의 시대에도 주님의 음성을 가진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사실을 들을 수 있게 깨닫게 하십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여서 이기고 그들을 죽인 이 엘리야 선지자는 이제 이세벨에게 있어서 처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무서운 적이 되었고 그래서 이세벨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 엘리야를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제 이 체포소식을 듣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길을 쉼 없이 달려와 브엘세바에 도착했고 그리고 그는 로뎀 나무 아래서 엎드려서 그 피곤한 육체를 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낙심과 깊은 침체에 빠진 때의 선지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한때 850대 1의 싸움에서 이긴 능력 있는 선지자였고 위대한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이제 깊은 낙심과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선 육신적으로는 그는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시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신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체포에 관한 소식을 듣고 쉼 없이 달려온 동안에 그는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으니 로뎀나무 아래서 엎드려져 깊이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아도 육신적으로 그가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그는 매우 외롭고 그리고 낙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기를 이제 이만큼 한 것으로도 넉넉하니 이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이 사람이 도저히 잠시 전에 갈멜산에서 그 850대 1의 대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물리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던 능력 있는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그는 아무도 우군이 없었습니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왕궁에 후원을 받는 선지자였고 다수였습니다. 대결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정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편이었지 엘리야의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너희는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누구든지 불로 응답하는 그 신이 참 신임을 가려내자고 제안했습니다. 담대하게 그런 제안을 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어떤 외로움이나 침체, 낙심이 없었습니다. 850명의 기세등등한 악한 선지자들에 의해서 에워싸이고 왕궁의 후원을 받는 그들의 위협 아래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에워싸고 있었지만 선지자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었고 결국은 하나님은 부르짖는 이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 악한 선지자들이 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된 대 선지자가 오늘은 로뎀나무 그늘 아래서 엎드려져서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외로움과 깊은 침체에 빠져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선지자의 이 같은 깊은 침체와 낙담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가 맞닦드리고 있는 이 갈멜산에서의 상황보다 좀 못한 상황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갈멜산에서는 850명이 악한 선지자들에 의해서 에워싸여 있었고 왕궁에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자기의 위치도 모두 노출되었으니 그들이 마음만 먹으며 단칼에 이 선지자의 목을 벨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고 악한 선지자와 그 다음에 왕궁의 그 발악과 백성들의 은근한 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후원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하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과 자기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갈멜산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했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지금은 쫓기고 있는 신세라지만 아직 잡힌 것도 아니고 또 포위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또 백번 양보해서 이세벨이 보낸 군인들에게 붙잡힌다고 할지라도 최악의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는 기껏해야 죽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평소에도 죽음을 무서워하던 사람이었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멜산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였더라면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도전장을 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지금 이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이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죽음을 두려워했더라면 이제 내가 넉넉하오니 이제는 내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겠습니까? 이 상황에서든지 저 상황에서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로뎀나무 그늘아래 엎드려져서 흐느끼는 심정으로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이 선지자는 지금 깊이 낙심하고 침체에 빠진 상태였고 갈멜산에서는 은혜의 불이 붙은 상태였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에 강한 것 같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약한 것입니다. 또 약한 것 같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아주 놀랍도록 강한 사람이 됩니다. 이 강함과 약함의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잡혀있는가 놓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모두 사도 바울이 표현한 바와 같이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사자와 같이 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똑같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전에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850명의 악한 선지자들에게 에워싸였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주님이 자기를 선지자로 불러주신 것, 그것 하나를 의지하고 그 은혜의 붙들려서 그 엄청난 믿음의 도전 앞에서도 싸워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의 은혜의 손에서 놓이게 되자 연약함이 엄습했고 하나님이 없는 선지자의 그 가련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850대 1의 싸움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담대한 사자와 같은 그 모습이 엘리야의 본 모습일까요? 아니면 이렇게 로뎀나무 그늘아래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목숨을 거두어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낙심하고 있는 모습이 엘리야의 원 모습이었을까요? 둘 다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닌 바로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이니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이고 후자는 죽음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낙심에 빠져 있는 때의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는 강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실 때 우리가 주님의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주님의 은혜의 손에서 놓이고 나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강한 믿음을 가지고 타의 추종을 불호할 정도로 열렬한 헌신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서 깊은 침체에 빠지거나 죄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합니다. 실망할 필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장중에 붙들고 계시고 끊임없이 그 은혜의 손에 붙들려서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살면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정말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 드높였던 사람들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낙심하기 잘하는 선지자를 들어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능력의 선지자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고기나 잡고 그리고 물질이나 하던 제자들을 부르고 그리고 악한 세리의 역할이나 하던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이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성도들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전 세계를 복음으로 뒤덮어놓을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손에 붙잡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왕들도 할 수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미천한 신자들을 사용하셔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한 자를 택하시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택하셔서 이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을 무릎 꿇게 하셨고, 하나님이 약한 자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미련한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지혜를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깊이 인식할 적마다 주님의 은혜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주님의 특별한 은혜의 손에 붙들려서 살기만 하면 우리들이 도저히 꿈꿀 수 없었던 삶을 살수 있게 되고 그리고 주님의 손에 의해서 붙들리게 되면 주님께 큰 쓰임을 받게 됩니다. 오늘 이것을 보여줍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큰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850명이나 되는 그 악한 선지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믿음의 위대한 과거를 가진 선지자도 주님의 은혜의 손에서 멀어졌을 때 로뎀나무 아래 엎드려 흐느끼듯이 침체에 빠질 수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깊은 침체 속에서 낙심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연약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의 모든 신비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겸손과 주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 그분만을 바라보는 소망.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 그리고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의 약함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 주님이 자기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과거에 어떻게 헌신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았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면서 일생의 길을 걸어왔든지 간에 결국은 마지막에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흐느끼듯이 탄식하고 있는 이 선지자처럼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길로 들어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낙심하고 주저앉은 길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죄와 불순종의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니고 그 끝은 고통과 비참함 이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선지자가 그런 낙심과 침체 속에 있을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명령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하나님 당신 자신 앞에 서라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는 그 서야 하는 장소가 바로 그 산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선 첫째로 하나님은 넌 여호와 앞에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서 여러 군데 등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내 앞에 서라”는 이 성경구절 혹은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실려 있는 본문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청치자의 삶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을 낳고 잔인할 정도로 긴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살다가 주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도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내 앞에서 온전 하라. 하나님을 대면하기까지 서면서 바로 그 하나님 보시는 그 면전 앞에서 순전한자가 되라. 올곧은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권면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에 세겜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살다가 가슴 아픈 사건을 만나게 되고 벧엘을 향해 올라가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실로 오래간만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벧엘로 올라가서 내게 단을 쌓으라. 말씀하시면서 역시 하나님 앞에 재단을 쌓고 주님을 대면하도록 이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때도 야곱은 깊은 침체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내 앞에 서라는 이 말씀은 대부분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있지 못하는 상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지자가 이처럼 깊은 침체 가운데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눈물을 흘리듯이 낙심하고 있는 이 장면을 인간적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선지자 편도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세벨의 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군대와 무기가 있었고 그리고 선지자 하나쯤은 찾아서 죽이는 일이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처 없는 도망 길을 떠나야했고 원수는 강했으며 자신은 약했습니다. 지금 이 선지자는 커다란 죄, 소문난 악을 행함으로 시험에 떨어져서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어둡고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태평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들도 있었는데 엘리야 선지자는 가장 철저한 배교의 시대에 자신의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왕궁과 맞서면서 복음을 전하여야 했으니 어쩌면 아마 이 엘리야 선지자는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왕궁에 대접을 받으면서 말씀을 예언하던 선지자들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오히려 더 깊은 낙심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무슨 큰 죄를 범한 것이라기보다는 낙심하고 침체에 빠진 것이 동정할 가치도 충분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엎드려 자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의 옆구리를 걷어차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보내어 떡과 물을 먹이시면서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셨습니다. 애정이 있는 돌봄으로 그에게 떡과 물을 먹이시고 그리고 그를 두루 어루만지셨습니다. 비록 천사라고는 하지만 그 천사가 와서 낙심 속에 잠들어있는 선지자의 온 몸을 어루만질 때 이 선지자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떡과 물을 두 번이나 받아먹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에 빠져있는 이 사람의 처지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한 2년 전에 건강검진을 했더니 안과 의사가 시력이 너무 안 나오니까 이럴 리가 없는데 정밀진단을 해봅시다. 그리고 안과 정밀진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사 한방을 나주면서 하는 이야기가 견디기가 힘들 텐데 그래도 잘 참으십시오. 그리고 혈관에 주사 한방을 났습니다. 세상에 그런 주사는 처음이었습니다. 주사를 맞고 약이 조금 들어가고 나니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구토가 나왔습니다. 쓰레기통에 몇 번을 엎드려서 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10분이 지나고 나니까 이상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온 세상이 새빨갛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니까 토끼 눈처럼 빨갰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엇인가 물었더니 지금 이 약이 눈동자를 염색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엑스레이로 찍어야지만 그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얀 것도 빨갛고 빨간 것도 빨갛고 파란 것은 보라색입니다. 두개가 합쳐져서, 사람들이 전부다 빨갱이입니다. 그때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렇구나. 인간이 뭔가 감정에 깊이 휩싸이면 이렇게 되겠구나. 낙심이라는 감정에 깊이 정복되고 나면 상황을 공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뭘 봐도 낙심입니다.
‘인간과 초인’이라는 책을 쓴 조지 버나드 쇼라고 하는 미국의 극작가가 있습니다.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술병이 반이 남았을 낙관주의자는 친구에게 한잔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먹어, 아직도 반이나 남았네. 그렇게 먹었는데도 아직까지도 반이나 남았네, 먹자. 비관주의 자는 그 술병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벌써 반밖에 안 남았네. 어느 각도에서 그것을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오늘 이 선지자의 마음에 있었던 즉 이 선지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데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데도 이 선지자가 하나님과 올곧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은혜에 붙잡혀서 살아갈 동안에는 이렇게 낙심되지 않았는데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상황을 공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 모든 눈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뭘 봐도 비관적으로 보이고 낙심할 이유밖에는 되지 않는 것처럼 자기에게 계속 느껴오는 것입니다.
나만 남았다고 그러는데 언제는 뭐 여럿 남았습니까? 항상 혼자였습니다. 언제는 여럿 남았으며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혼자 가는 것이지 물론 우리들이 가면서 성도의 교제와 위로, 얼마나 크고 감사합니까. 그렇지만 결국은 저 사람이 애를 쓴다고 해서 내가 성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자기 몫에 져야 할 십자가는 각자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그냥 따라만 와라. 내가 다 지고 간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있는 짐입니다.
오늘 선지자의 깊은 낙심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별해서 그 뜻대로 순종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주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나와 더불어 싸우고 이러면서 순결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 힘듭니다. 물론 힘듭니다. 항상 기쁘기만 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다가오고 있는 그 영광을 보면서 즐거워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많이 우셨고 그리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살아가는 그것, 그 관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이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인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엎드려져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괴로워하는 이 모든 무거운 짐보다는 훨씬 가볍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려고 힘쓰고 또 말씀의 은혜를 받았을 때 그것을 잘 간직하고 그 신령한 불길을 우리 안에서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로 헌신하고 그리고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그리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자기 맡은 사명을 감당해나가기 위해서 분투하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짊어지는 인생의 무게만큼 무겁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주어진 멍에는 쉽고 가볍다” 멍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그의 권한입니다. 힘입니다. 그것을 짊어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선지자가 낙담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850대 1의 싸움에서도 이기게 하시고 혼자였는데도 그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들을 때려죽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그까짓 것 이세벨의 추격쯤이야 내가 이세벨 군대와 정면으로 마주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들의 눈을 가려 나를 보지 못하게 하시리라. 그리고 보면 잡힐 것이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그 담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육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이렇게 일년에 몇 번씩 그 바쁘고 고단한 가운데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새벽 특별기도회 이후에 또 말씀 사경회를 하고 말씀사경회가 끝난 다음에는 남들은 다 제멋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때로는 따돌림도 당하고 박해도 당하고 혹은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보면서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 분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왜 그렇게 살기를 힘씁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 붙잡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기를 거절하고 죄에 빠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러나 은혜의 자리에서 부패해져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낙심한 상황으로 떨어져버리는 상황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잠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싸움을 마치 전쟁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 제멋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따로 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늘 자신을 세우면서 살기 위해서는 수시로 분투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성도가 참으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성도는 일평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젖이나 부드러운 죽만 먹는 신자가 아니라 날이 갈수록 단단한 음식까지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미끄러져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게 없지만 주님께 끊임없이 붙어있는 신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이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하고 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허리를 동이는 신앙적인 긴장에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신을 신고 그리고 허리에 띠를 단단히 동이고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그리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그리고 말씀의 칼, 곧 성령의 검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선지자처럼 환경적인 깊은 속에서 광야에 홀로 있는 것처럼 되었고 또 영혼에 깊은 어두움도 함께 찾아와서 낙심에 처하여 이제 도저히 앞날에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어두운 밤중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 어두운 밤중에서 아무리 여러분들의 재주를 의지해서 몸부림치고 그 어두운 밤중에 헤어 나오려고 해도 한 가지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손안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고 곤고한 인생의 시기를 지날 때 더더욱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여러분들의 인생의 어두운 밤은 여명이 깃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두 번째,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산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 산은 엘리야 선지자가 도착한 호렙산이었습니다. 모세는 이후 모든 선지자의 비조였으니 호렙산에 섰을 때 엘리야는 한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려는 애국적인 시도가 불발로 끝나고 그리고 광야로 도망을 갔던 그 모세 말입니다. 40년 동안 짐승이나 치면서 아무 소망도 없이 시골에 목부로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타지 않는 불붙는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신 그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소명을 주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선지자의 비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호렙에 다다르고 거기에서 바로 그 산에서 너는 내 앞에 서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이 모세의 소명, 모세에게 나타났던 호렙산의 이 불붙는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거의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한때는 소명만 받았고 그리고 민족을 위해 강력한 꿈을 꾸었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깊은 낙심에 빠져 있는 그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엘리야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헌신적인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그 헌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능력과는 비교될 수 없는 깊은 낙심에 빠져서 이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 평범한 신자 엘리야가 되어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바로 그 산에서 하나님이 이 엘리야를 만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뭘 가르쳐주고 싶으셨을까요? 봐라. 네가 내 앞에 서는 호렙산은 바로 그 준비되지 않은 모세, 아직 혈기 충만하고 나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할 줄 모르는 그 오만방자한 그 갖추어지지 않은 모세를 내가 불러서 거룩의 사람으로 만들어 결국은 그 한 사람 앞에 애굽 온 나라와 바로가 무릎을 꿇게 하고 내 백성을 건져내어낸 내게 만들어준 나 여호와가 아니냐, 그럴 때 네가 아무리 약하고 그리고 이세벨과 아합을 인하여 두려워할지라도 내가 너도 구원해내서 모세처럼 이를 이루리라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깊은 밤. 어두운 낙심 속에서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시 하나님 앞에 서면 나는 비록 약하나 주님의 은혜가 강하므로 주님의 은혜의 손에서 나를 붙드실 때 내가 능력을 받고 능히 이 상황을 감당해 나가리라 그런 믿음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들을 이루실까요?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섰더니 큰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면서 엄청난 힘으로 그 바람이 지나갔고, 잠시 후에는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불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장엄하고 무서운 광경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누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술 수 있겠으며, 땅을 쪼개고, 그 사이에서 불을 토해내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선지자는 하나님이 저기 계시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산이 쪼개지고 바위가 부서지는데도 그 크고 어마어마한 광경이 그 눈에 비치는데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계셨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갈라지고 거기에서 뜨거운 불길을 토해내는 광경은 얼마나 엄청난 광경이었겠습니까?
어마어마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바로 거기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거기도 하나님이 안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후에 조용히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엘리야를 다시 살리는 것은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위대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가르고 불을 토해내는 지진과 불이 아니었습니다. 침체에 깊이 빠진 그래서 삶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약한 자가 되어버린 이 엘리야의 영혼을 살려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의 영혼을 다시 살려준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살다가 보면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큰일을 행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일입니까? 도저히 내 실력으로 할 수 없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던지, 자기 실력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직장에 그야말로 엄청난 은총으로 취직이 된다던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큰일을 행한다던지,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야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감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금년에도 여러분들의 모든 삶 속에 이런 일들이 좀 많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을 가지고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말합니다. 우연히 사업을 시작했는데, 정말 놀랍게 번성하더라, 등등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크게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하면, 바람, 지진, 불, 모두 지나간 뒤에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중요한 것들이 아니라 그 뒤에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내는 힘입니다. 사업이 잘된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장관이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은 삶의 양태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마치 얼었을 때 얼음이 이렇게 높이 얼고 이러다가도 녹으면 물이 되듯이 그렇게 됩니다.
그럼 왜 그렇게 세미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그 음성이 그런 모든 산을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땅을 가르는 그 지진과 이런 모든 엄청난 능력,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소중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런 예견적인 하나님의 큰 능력은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목소리는 항상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영혼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받는 감화는 영혼 자체를 직접적으로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더 오래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치시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이 엘리야 선지자를 깊은 낙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그 큰 바람과 함께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스고 땅이 쪼개지고 불이 솟아나는 광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 여호와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호와다. 네가 왜 낙심하는가 하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광야에 엎드려져서 로뎀나무 그늘아래 낙심 속에 잠들어있을 때 사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랬습니까?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면 갈멜산에서는 무슨 증거가 나타났기에 이 선지자가 그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까?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진 것은 나중에 기도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살기등등한 바알선지자들과 배교적인 백성들에게 에워싸여서 850대 1의 전쟁을 벌일 때 그때 갈멜산에서 뭐가 나타났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은혜의 장중에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 큰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나 여호와가 이런 능력이 있는 여호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진짜로 로뎀나무 그늘아래 낙심 속에 엎드려져있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이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신 것은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기둥이 아니라 거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통해서 천사는 엘리야의 육신을 어루만졌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이제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선지자의 영광을 어루만지셨던 것입니다. 그런 회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서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음성이 왜 하늘을 가르는 것처럼 청청벽력과 같이 들려오지 않고 그렇게 세미하게 들려왔다고 묘사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쉴락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불같지 아니하냐? 방망이같이 아니하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이렇게 우리에게 세미하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벼락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의 어두움을 찢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깊이 꽂힙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강력하게 변화시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이 세미한 음성이라고 말할 수 없고 벼락처럼 우리의 영혼에 때리시는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는 왜 세미한 음성이었을까요?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른 것들에 의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깊이 낙심하고 있습니다. 침체에 빠졌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밀려오고 그리고 그 마음의 틀은 흐트러졌습니다. 적극적으로 죄를 범하고 불순종한 것은 아니었지만 갈멜산에서 보여주었던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그 마음의 틀들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튜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은혜의 장중으로부터 멀어져서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드어서 잘 집중하면 세미하게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에 죄의 그림자가 물러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응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기 시작하면 그러면 그 음성이 점점 더 크게 들립니다. 도저히 회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는 음성으로 들리게 되고 결국은 그 말씀에 강력하게 붙잡히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동굴 속에서 처음에는 바늘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같은 작은 쉴락 같은 빛을 보지만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 그 빛이 점점 커지고 굵어지면서 나중에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이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그렇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 안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늘 말씀해주십니다. 이렇게 말씀이 계속 가슴속에서 밀려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말씀이 자기를 막 깨트립니다. 그래서 보면 완전히 죄 가운데 있다가 어느 날 말씀을 들을 때 막 부서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있지만 대부분 말씀을 들을 때 막 깨트려져 나가는 사람은 무엇인가 하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깨트려져 나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깨질 사람은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인데,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진짜 깨질 사람은 은혜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계속 깨트려집니다. 어떻게? 더 잘게 더 잘게 부수어집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상을 빚어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미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고 우렁차게 들립니다. 회피할 수 없게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우렁차게 들리는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교만하지 마십시오. 엘리야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세미하게나마 주님의 음성이 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더더욱 그렇게 명료하게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축복 속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순종하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엘리야처럼 이런 깊은 침체에 빠져서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다면 이제 여러분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여러분들이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양자택일을 하도록 나는 요구하고 싶습니다. 택하십시오. 오늘날 이 정처의 마당에서 택하십시오. 주님 없이 2005년을 광야에 엎드려지듯이 낙심과 침체 속에서 한 해를 더럽히면서 인생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서서 그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한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의 밤을 지날 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