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시는 하나님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창50:20) 2004.1.21 수요예배 1
2. 악을 선으로 바꾸신 목적(창50:20下) 2004.1.28 수요예배 6
3. 징계를 회복의 기회로 바꾸심(시71:2) 2004.2.4 수요예배 14
4. 고난을 깨달음의 기회로 바꾸심(시119:71) 2004.2.18 수요예배 24
5.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심(시30:11) 2004.3.3 수요예배 34
6. 상처를 위로로 바꾸심1(시31:19) 2004.3.10 수요예배 42
7. 상처를 위로로 바꾸심2(시31:20) 2004.3.17 수요예배 51
8. 배신을 영광으로 바꾸심(시3:2-4) 2004.3.31 수요예배 61
1.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
당신들을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세기50:20 )
녹 취자: 손 미자
인간은 누구든지 편안하고 좋은 환경을 원하지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선대 받고 싶어 하고 돌봄을 받고 싶어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그가 모든 것이 편안한 환경에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는 정말 훌륭한 신앙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강력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이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한 사람은 다윗 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보면 다윗과 유사한 점이 참 많았습니다. 고난을 참 많이 당한 것도 그랬고, 신앙으로 산 것도 그랬고, 그리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도 또 그랬습니다. 아무튼 이 요셉은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고, 다윗은 그래도 생애를 보면서 한두 번 혹은 두세 번 결정적인 그 끔찍한 죄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그러나 이 요셉에게서는 거의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온전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요셉은 아주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어서 당시에 애굽의 국무총리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은 사람 할 때에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요셉을 떠올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에게 신앙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하나님에게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높은 지위도 얻게 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막을 보면 이 요셉의 살아온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길과 같은 그런 생애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집에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형들의 시기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형들의 시기를 받으면서 자라다가 결국은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시기심이 극도에 달한 형들이 이 요셉을 애굽의 장사꾼에게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팔려 와서 그래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요즘으로 말하면 경호실장이나 당시의 수비대장 정도 되는 그런 사람의 집에서 이제 종으로 애굽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정말 피나는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채색 옷을 입고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을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서의 안일했던 삶은 끝나고 그리고 치열하게 고달픈 애굽에서의 종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이후로 그렇게 종 생활을 하다가 잘했습니다. 집안의 모든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그만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뛰쳐나온 잘못으로 그는 옥 속에 갇히게 되고 거기에서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시 긴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바로 앞에 서서 그래서 공직에 취임하게 되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애굽의 국무총리로서의 그 화려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넘어왔지만 그 요셉의 생애는 정말 가시밭길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얼마나 가시밭길과 같은 생애를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시밭길과 같은 고단한 생애를 걸어왔는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도 그 고통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에 그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잊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그 고난의 길에 혼자 걸어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받은 고난만 큰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받은 위로도 참 컸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잊고 싶은 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얼마 안 되는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고생을 많이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고생하며 산 날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고생하며 사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스러웠던 날들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위로도 있었고, 또 그 고난의 검은 그림자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거미줄만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 빛났고, 그 검은 시련의 고통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씨줄과 날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도 참 회상하기가 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그 장소에 가면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에 전도사로 있던 그 때에 생활하던 동네의 어귀에만 들어서도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그 쪼들리는 경제적인 환경 속에서 그렇게 고생하며 다니던 신학교에 들어가도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오늘날 나를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여튼 그 벌써 20년 25년 지난 일 인데도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그 가시밭길과 같은 고통들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요셉이 아들을 낳았을 때에 그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 라고 지었던 것에 대해서 정말 성경을 읽으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 정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요셉의 생애를 보더라도 이 가시밭길과 같은 헤치면서 왔기 때문에 백합과 같이 그 향기로운 신앙의 그 향기를 풍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그냥 우리에게 원망과 상처만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고난을 잘 견디면 그 고난은 마치 그 향기로운 백합화에 있어서 가시밭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시밭에 찔리면서 백합화가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가시밭에 백합화가 무슨 상관이 있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꽃의 향기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시에 찔리는 것과 같은 그런 공격이 있게 되면 더 많은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여러분 허브 알죠. 냄새를 맡을 때는 항상 때려야합니다. 탁탁 치면 항기가 쫙 올라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정말 향기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를 고난의 계곡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정말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은 그 고난 속에서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시련 속에서 닦여진 사람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는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인격에도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뭐냐면 그러면 도대체 이 요셉은 어떻게 자신에게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감당했기에 그렇게 그 고난이 그를 향기롭게 만들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첫 째는 이 사람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확신이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고는 믿음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환경이 이 사람은 이렇게 만든 측면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는 야곱의 편협한 성격이 요셉을 편애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살았더라면 그 형제들로부터 원망과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시기 속에서 살다가 불화한 가정에서 필부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엄마 아빠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이 애굽에는 아무 살붙이도 없었고, 그리고 누가 자기를 도와줄 사도도 없었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이 요셉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도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맨 처음 끌려가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 때나 옥 속에 갇혔을 때에나 혹은 바로의 집에 지극히 높은 자가 되어서 왕 이외에 누구도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도 이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지위가 높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해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일생을 살아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간에 그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이 바로 고난 속에서 향기로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주님이 높여주시는 사람으로 그 고난의 파도도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 믿음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라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믿음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섭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고 그리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시험해볼 필요가 없이 객관적인 사실이고 하나님의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숨김없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 살아보지 않아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잘 깨달으면 세상을 사는 이치, 인생을 사는 이치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은 섭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요셉이 왜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까지 끌려와 종노릇을 하게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을까? 거기까지만 관찰하면 아무런 설명이 안 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도 없고, 그리고 끌려왔으면 끌려와서 이 애굽이라고 하는 먼 나라에까지 끌려와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또 잘 봉사를 해서 그 집안의 총무가 되었는데 왜 그 여자가 자기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는데 감옥에 가야 되는지 이것은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정한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살아봐야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 아니면 “내가 너를 참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을 보여주었잖아요. 형들이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에 절하는 것을 보여주셨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형들도 알 수 없었고, 요셉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희미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희미하게만 보여주실까? 아미 툭 터놓고 “야, 네가 이렇게 끌려가면 이렇게 되거든, 종살이 하고 마당이나 쓸 터인데 그러다가 네가 계속 승진할거야. 총무가 될 거거든, 그 때에 이상한 여가 하나가 와서 너를 유혹할 터인데 너는 믿음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감옥에 가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모년 모월 모시에 네가 국무총리가 된다.” 왜 이렇게 안 가르쳐 주실까요?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지 아니면 마지막 좋은 결과를 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모든 것을 이렇게 버선목을 뒤집듯이 모두 눈에 보이고 아는 것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가끔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도 전적으로 믿는 그런 종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끌려왔을 때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고, 감옥에 들어가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 라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점점 더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떠한 결과가 왔습니까? 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당신들의 그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만나게 하셨는데 그 만나는 모든 일들이 믿음으로 사는 요셉에게 항상 달콤하고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것을 감사함으로 이길 뿐이지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고난을 받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요셉에게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형들이 준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고통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결국은 섭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이 요셉으로 하여금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인 이 섭리가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는데 기여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저는 뭐 그런 것 잘 하지 못합니다만, 당구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면 공을 이렇게 놓고 막대기로 치지 않습니까. 여기에 있는 공을 맞추고 싶은데 공을 이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쪽으로 보냅니다. 탁 보내니까 저쪽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온 공이 여기를 맞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형들이 요셉을 팔았을 때 그것은 요셉에게 있어서 피눈물 나는 고통이었고, 정말 죽을 것 같은 위협이었지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지만 형들이 그렇게 자기를 판 뒤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이 요셉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점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의 마음속에는 그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섭리가 한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생겨나니까 형들을 용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개인적으로 자기를 팔았을 때 같으면 그 형들을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데 이 요셉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신앙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데 그 섭리 속에서 이 요셉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고, 그리고 그것은 형들이 잘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잘못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나에게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선한 것으로 갚으셨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살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도 살리고 그 긴 흉년 속에서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애굽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부지하게 만들어주셨던 사실을 요셉을 여기에서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시냇물처럼 좁던 마음이 넓은 마음이 되어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지난 한 해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날마다 보호해 주졌지만 금년에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한 해에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고 행복한 일만 일어나게 해 달라고 우리서로에게 축복하고 빌지만 그러나 금년에도 우리는 어려운 일도 좀 있을 것이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것을 사용하셔서 섭리 가운데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이것들을 사용하신다면 우리는 마다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2. 악을 선으로 바꾸신 목적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창세기50:20하)
해가 될 것 같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섭리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섭리 속에서 해로운 것이 선한 것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사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해가 될 만한 고통스럽고 아픈 일들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일까? 요셉이 살아온 지난 모든 생애는 정말 생각하기 싫은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에서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던 따뜻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 시기하는 형들에 의해서 팔려진 그 이후로부터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떼어놓아지고, 아무데도 의지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애굽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요셉은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아마 보디발의 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애굽의 총리가 될 때까지 어디에서도 신앙의 동지를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육체적인 외로움과 그리고 사회적인 외로움과 그리고 영적인 외로움까지 아마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길도 편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모함과 오해, 그 속에서 한없이 고난을 받으면서 보디발의 집에서 다시 옥으로 옥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그러면서 가장 젊은 세월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묘하냐면 요셉이 옥에서 나왔을 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후에 애굽의 고고학 자료를 연구한 결과 당시 바로 시대에 30세가 공무를 담임할 수 있는 법정 연령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30세가 되어야지만 공직에 취임할 수 있게끔 그렇게 법이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어린 나이에 미리 세상에 내 보내봐야 그가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옥 속에 묻어 놓으시고 거기에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면서 자라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어느 정도 익었다고 생각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꺼내 놓으셔서 그 때가 섭리 속에서 애굽에서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연령이 되게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절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굽에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어서 바로의 꿈을 기가 막히게 해석했기 때문에 총리가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요셉이 가진 다였다고 한다면 그것만을 가지고는 그 오랜 세월동안 국무총리로서 그 위기에 처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보디발의 집이기는 했지만 노예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그는 밑바닥에서 빗자루를 들고 쓰레질을 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보디발의 그 큰 집을 관리해 나가는 총체적인 기획과, 그리고 관리업무에 이르기까지 총무의 일을 감당하기까지 그는 모든 면에서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들을 갖추면서 성숙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애굽의 정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닥에서부터 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이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유혹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에게 배신도 경험하고, 고난을 받는 것도 경험하고, 그러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 성숙해갔던 것입니다. 이 형들이 동생을 돈 받고 팔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는 사자에게 찢겨서 죽었나봅니다. 그리고 그 옷에다 피를 묻혀서 가지고 가서 아버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짓이죠. 그것 한 토막만을 딱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죠. 갈아 마셔도 시원하지가 않죠. 그러니까 갈아 마신다는 표현이 너무하면 쥬스를 만들어도 시원치가 않죠. 그래서 사람이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들은 항상 생각이 이렇게 어느 하나만을 크게 확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요셉이 “아니 나보고 뭐라고 하는데 목사님이 내 입장이 한번 되어보십시오. 목사님이 형이 없어서 그렀지만 목사님이 형들을 믿고 따랐는데 그런데 동생인 목사님을 데려다가 인신매매 범에게 팔고 내 옷을 벗겨서 선지피를 발라서 아버지에게 가서 짐승에게 뜯어 먹혔나봅니다. 그리고 그 인신매매 범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가면서 양복도 맞춰 입고 밥도 사 먹고 갔다고 칩시다.” 그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죠. 마치 인간도 아니고 극형에 처해도 할말이 없죠. 요즘 같으면 법관들이 흔히 잘하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버려도 시원찮죠. 그것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맞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인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계속 원수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한에 사무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좁은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적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번 눈 밖에 나면 그러면 다시 상대를 안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적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가 무슨 한 나라의 황제쯤 되어서 내 눈에 나면 재미없어. 그러면 아마 죽을 때까지 기겠지 그런데 요즘 황제가 어디 있어요. 대통령만 되어서 한판 해보려고 덤벼드는 세상인데 아니 이제는 학교 선생님들도 애들 마음대로 못 때리잖아요. 야단치면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데 그것 무서워서 어떻게 해요. 학교 선생님들을 체육을 시켜서 태권도 9단씩 만들어야합니다. 꼼짝도 못하게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가는 길에 수없이 누구를 만나느냐면 적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요. 물론 자기를 좋다고 그러는 사람도 있죠. 그러나 그 원수들이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잠깐 얘기했잖아요. 요셉이 그런 피눈물 나는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었는데 그것이 모두 인간들 때문입니다. 형 때문에 또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그랬고, 또 보디발도 책임이 있지 자기 아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데 말이죠. 그러면 요셉을 믿어야지. 멍해가지고 말이지 그랬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옥에 가니까 그 떡 맡은 관 원장 술 맡은 관원장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또 자기를 배신해요. 다 배신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면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얘기가 뭐냐면 “나는 히브리 사람인데 보디발의 집에 있으면서 나는 거기에서도 이렇게 옥에 갇힐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내가 진실을 얘기하지, 내가 진짜 혈서라도 쓰라면 쓴다. 그 나쁜 년이 그리고 시작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원래 그 사람은 행실이 그랬다. 말이지. 그리고 완전히 한 여자를 매도해버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요히 보디발의 집에서도 옥에 끌려올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진실을 규명하면서 자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가 어려운 상황에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보디발의 아내가 옳았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요렇게 그 한 토막만 보았으면 그럴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뭘 잘못했냐? 볼일이 있어서 계량기 검침하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니 이 여자가 어디에서 딱 튀어나와서 그리고는 분위기를 잡을 새도 없이 같이 자자. 낮인데 왜 자냐?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서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주인이 나를 사랑했고, 나에게 모든 것을 신임하고 나이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내게 맡기지 않은 것이 있는데 자기의 먹는 것과 자기 아내인 당신은 내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시는데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 있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여자가 그런 정도는 우리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도 포기했을 터인데 이 정욕이 불붙듯 하니까 이 남자를 권력으로 겁탈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막 도망을 나오니까 옷이 벗겨졌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보세요. 이 옷을 가지고 나와서 이 옷 임자가 누구냐? 이 옷 임자 이놈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 그야말로 주스를 만들어도 시원치 않지. 아니 그런 일이 없는데 이것이 말이죠.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해보았습니까?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것이 가슴에 맺힙니다. 한이 됩니다. 그 한이 맺힌 것은 그래도 조금 풀리는 때가 언제인지 하십니까? 그것을 말을 할 때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슴에 묻어놓은 것입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못살 것 같습니다. 정말 못살았을 것입니다. 아니 예를 들자면 그 일이 남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덕스럽게 내가 그것을 얘기하면 뭐하냐? 그리고 나만 알고 묻어 줄 수 있지만 그런데 지금 그 진실이 안 밝혀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억울하게 감옥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잖아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에 죄가 어느 정도 되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호실장이나 무슨 그런 사람의 장관급이 되는 각료의 옛날로 말하자면 판서에, 정승의 집안에 가서 그 집 부인을 겁탈하려고 그랬는데 신분이 외국에서 끌려온 노예입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말이죠. 근거는 없지만 이것은 추측은 아니고 역사입니다. 요셉이 갇혔던 곳이 말하자면 단순한 잡범들이 투옥되는 옥이 아니라.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이것이 보디발의 집 근처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해석하기를 이 보디발도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이 요셉을 훨씬 더 믿었다. 만약에 아내를 믿었더라면 단칼에 잘라버렸을 터인데 워낙 좀 문제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셉이 억울한 것을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요셉을 미래를 기약하면서 여기에 가둔 것이 아니냐. 자기는 그렇게 한번 추측을 해본다. 뭐 추측을 한데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참고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이 누구냐면 정치범들 아닙니까. 떡 맡은 관 원장, 술 맡은 관 원장들이 잡범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그 억울한 사정을 푸는 진실을 규명하는 대신 그것이 결국은 자기의 이 불행한 사태를 모면할 수 있는 길이잖아요. 그런데 안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아이고 요셉은 굉장히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그것이 뭐냐면 인생을 그렇게 한 토막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한 토막 한 토막 그렇게 보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교회가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가 어느 여 전도사님과 호텔에서 나온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확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 사실은 다른 것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어도 그것은 용서 못하잖아요.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을 쪽을 믿기보다는 안 좋은 쪽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거기에서 혹독하게 연단을 받고 이분의 신앙이 참 훌륭하지 뭐냐면 하나님이 나의 결백을 밝히실 때까지 나는 침묵한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유감 있던 사람들이 그 사건을 이용해서 교회를 발칵 뒤집혀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약에 맞대응을 하고 고소하고 싸움하고 만약에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교회가 나누어지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토막을 보면 이것이 진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형 놈의 새끼들 갈아 마셔” 이렇게 만약에 말을 했다고 쳐요. 그러면 그 때에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그 마음에 “야, 진짜 무슨 쓰레기차를 피하고 나니까 똥차가 나타난다고 이 형들을 피하고 나니까 보디발의 아내 이 여자 똥차가 내 인생을 망쳤어, 이것을 갈아 마셔. 이렇게 생각하면 이 속에 하나님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인배 같은 기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딱 그 한 토막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원수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도록 좋아하는 친구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인자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도 만족을 못 시켜주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변하고 요사스럽고 부패성을 가지고 있고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마음에 정함이 없는 그런 인간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분들을 낳아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해서 완전하게 여러분들의 인생에 만족을 주는 인간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세요. 그런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 기다리세요. 곧 실망을 줄 것입니다. 착각이 깨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도 만족시켜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만족시켜줄 인간이 있겠습니까. 한 토막을 딱 보면서 “이. 인간을 갈아 마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토막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면서 ”저 놈을 갈아 마셔“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이 치열한 칼부림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동료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인생길에 칼과 그리고 피 맺는 미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산산조각 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뭐가 남겠습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아무개. 아무 아무개. 성도가 죽었더라. 그가 죽었으나 아끼는 자가 없더라.”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불러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언약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죠. 그렇죠. “너로 인하여 히브리 성경에는 ”백하“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며” 우리를 한 사람 주님 믿는 자녀로 불러주신 것은 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사람하고 만나면 어쨌든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손을 잡으면 하여튼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고 관계를 맺고 한 동료가 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의 원천이 되라고 부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나 만났는데 덕을 좀 볼까 했더니 등껍질까지 벗기려고 한다. 거기에서 아주 학을 띠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느냐면 하나님에 대해서 넌덜머리를 내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직접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야, 진짜 하나님 잔인하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선교 적으로 조사해보면 불신자들이 예수를 안 믿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복음을 못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커다란 이유는 뭐냐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잘못된 예수님의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질리는 것입니다. 인간을 상종도 하고 싶다. 않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위선자로 보는 것이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임이며” 요셉의 생애는 그런 생애였습니다. 요셉이 다 살려준 것 아닙니까. 형들이 와서 벌벌 떨면서 지금 비는 것 아닙니까. “얘들아 나를 팔아서 생고생을 시킨 놈들이다. 머리를 정리해라.” 그러면 미용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칼 들고 망나니가 와서 다 정리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이 사람이 입만 뻥긋했으면 죽었습니다. 살려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라.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조금 구제하면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벌써 보디발의 집에 끌려와서 빗자루 들고 마당을 쓸던 시절에 이미 보디발의 집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9장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생각하사 보디발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느니라.”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돈 몇 푼주고 사 왔겠습니까. 그 쪼그마한 애를 말이죠. 그러니까 딱 들어왔을 때 초라한 몰골에 옷까지 벗기고 그리고 긴 여행길에 짐승처럼 끌려와서 내동댕이처 졌을 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끌려온 이방의 불결한 아주 더러운 새끼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뭐 집사를 하네, 구역장을 하네. 뭐 집을 사네, 파네. 그리고 뭐하고 직분을 맡고, 그러면 뭐합니까. 사람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한 토막 가지고 “나쁜 자식들 말이지.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이러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 소인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도 깊이 인생을 나눌 아름다운 동지 없습니다. 정치가를 하면 철새가 되는 것이고, 사업을 하면 눈 살살, 살살 돌리면서 말이지 야바위같이 사업을 하는 야비한 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끼는 사람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랑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 가로질러 흐르는 한줄기 강물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강물신앙’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 내가 흘러가느냐? 쭉 흘러가야합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이 안에서 놀게 되고 짐승들은 핥아먹게 하고 그리고 내가 메마른 땅에 스며들어서 그래서 그 모래바람 밖에 일지 않던 땅에 흥이 돋고 꽃피고 새 노래하게 만드는 그게 바로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일생입니다. 이것을 강물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누가 어느 후배가 그래요. “목사님 목회가 뭡니까?” “목회는 메마른 대지를 가르고 흐르는 한줄기 강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를 다 좋다고 합니까. 아니 그렇게 인생을 거의 그렇게 인생을 맨몸으로 사시면서 가시고기처럼 자기를 다 내어주시는 예수님도 사람들이 다 좋다고 안했는데 그러니 내가 예수를 닮으면 닮을수록 예수 싫다고 한 사람들이 나도 싫어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적절하게 그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내가 참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가 맬랑히턴이라고 하는 자기의 제자에게 편지를 쓸 때 그랬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당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아니면 듣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 되게끔 설교를 하십시오.” 해석 안 해줘도 이해하겠죠. 그렇게 얘기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누가 다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저의 인생의 스승입니다. 다윗과 이 요셉은 구약에서 제 인생의 맨토 입니다. 참 많이 배웠습니다. 이 두 분이 성경에 안 나왔더라면 아마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같은 성경에 있어서도, 그런데 이 요셉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인생을 이렇게 한 토막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체, 이 굽이치는 물줄기와 같은 인생 전체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소인배적인 기질을 가지고 그렇게 한 토막을 보고, 원수 맺고,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독한 마음을 품고 사는 그런 야비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을 그렇게 총체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안 산 것은 아직 살지 못했으니까 못 보는 것이죠.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온 인생도 그렇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쭉 굽이치면서 살아온 인생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토막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물과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큰 토막이 보이는 것입니다. 맞아요. 형이 나를 팔았어요. 그것 하나만큼은 얼마나 어린 아이의 그 애굽에 끌려온 노예로서의 그 첫날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나는 언젠가 그것을 묵상하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요셉이 불쌍해서,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불쌍하겠지만. 그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 온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사랑 받으면서 자라온 그 아이가 아무 혈열 단신으로 끌려와서 내팽개쳐져서 첫 날밤을 지낼 때 얼마나 무서움 속에 몸부림 쳤겠습니까. 정말 죽여도 시원치 않죠. 그런데 그가 애굽에 와서 배운 것은 뭐냐면 인생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강물처럼 하나님의 섭리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간다. 라고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이 팔았는데 그것은 그렇게 가슴 아프고 찢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하나님이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한 것도 몸이 부서지듯이 일한 것이죠.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에게 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그 때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신명을 다해서 보디발을 섬겼는데 주께 하듯이 섬겼는데 마지막 돌아온 것이 차가운 옥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어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또 징검다리가 되어서 정치범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게 되니까 그다음에 또 배신을 당하게 되고, 배신을 당하는 동안에 2년이 지나면서 30세가 되고, 그러는 가운데 흉년이 들고, 그러니까 30에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가장 남으로부터 해를 받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하나, 하나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하나만 빠졌어도 거기 바로 앞에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게 하죠. 그 신앙을 가지고 인생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한번 딱 하고 고정되어 있는 어떤 점이 아닙니다. 연결이 없는 한순간에 터지는 섬광과 같은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이것이 강물처럼 쭉 흘러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쭉 흘러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뼈아픈 배신, 그리고 그 치열한 고난, 그 음모와 모함,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인 그 고통을 통해서 드디어 세계를 가슴에 품고 경영할 수 있는 지도자적 심성이 신앙과 함께 영글어 간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이제 자신을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이렇게 돌아 볼때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돌아보니까 가장 해 받으면서 혼자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웠던 거기에서 원수 맺을 수 있는 사이로 만났던 그 인간들이 사실은 자기로 하여금 섭리의 시내를 건너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이를 수 있는 징검다리 돌 맹이를 하나씩 갖다놓았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요. 스토리를 다시 써 볼까요? 애굽으로 끌려갔는데 오밤중에 손톱깍기로 수갑을 풀고 그리고 끌려가던 노예 창고의 자물통을 끌러서 뛰어 나왔어요.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저 형 놈들이 나를 돈 받고 팔았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칩시다. 그 요셉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죠. 아버지는 형들과 의절했을 것이고, 가슴에 한을 품은 아버지와 그리고 형들을 잃어버린 채 외로운 아버지의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양의 똥이나 치면서 인생이 끝났겠죠. 두 번째. 그래요. 옥에 안 끌려가고 죽어라고 버럭, 버럭 소리 지르면서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지만 몰래 카메라라도 들이 대면서 “봐라. 네 마누라가 나를 유혹했지, 나는 안 된다고 계속 그러다가 외투를 빼앗긴 죄 밖에 없다.” 그것을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 인터뷰를 해서 모든 것이 풀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그 집에서 마당을 쓸었겠죠. 마당 쓸다가 끝났겠지 아니 그러다가 늙은 노예로서 죽었겠죠. 그렇잖아요. 물론 요셉이 적극적으로 저기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이렇게 이용을 당해야지 그랬던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인생이 한순간 번쩍이고 끝나는 섬광이 아니라. 마른 땅을 가로지르고 흐르는 한줄기 강물이라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요셉은 이 고난을 통해서 이 근거 없는 비난을 통해서 내게 다가올 또 다른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요셉이 말이죠. 다윗이 요셉과 아주 유사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보다도 더 나쁜 놈입니다. 진짜 갈아도 시원치 않죠. 그런데 “임금님 큰 일 났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쳐들어옵니다.” 왜? 아들이 그렇게 면민주도하게 아버지인 자기의 등에 칼을 꼽기 위해서 준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죠. 도망을 갑니다. 그 때에 “임금님, 저 법궤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 법궤는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나둬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다시 와서 보리라.” 그리고 도망을 가는데 한 때는 자기 백성이었던 그 인간들이 말이죠. 막 흙을 던지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을 네가 말아먹더니 똑같은 꼴을 당하는구나. 그러면서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하가 “저 놈을 내가 단칼에 날려버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칼을 빼들려고 하는데 “나둬라.”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나둬라. 내가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용해서 나를 욕하시는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서 보복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강물 신앙입니다. 그래요. 저 사람이 나를 욕해요. 그런데 그럴 수가 있어 저놈은 내 백성이었고, 나는 왕이었는데 며칠 전까지 내 앞에서 숨도 못 쉬던 놈이 내 앞에서 욕을 해.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욕한다는 생각을 했으면 단번에 뛰어 올라가서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시켜서 나를 욕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물신앙입니다. 성도의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함이니라.
왜? 일곱 해의 흉년입니다.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모든 곡식을 거둬들여서 큰 창고에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풀어서 그 창고에서 나오는 곡식, 칠년 동안 풍년이 들어서 모아놓은 곡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부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뒤집어서 이야기 하면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인생 한 토막, 한 토막 마다 뒤집어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깔깔대고 히히덕거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도 안중에 없이 뒤집어져서 거의 미친 사람처럼 살다가 마지막에는 그렇게 웃고 울고 분노하고 수많은 원수 맺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끼는 자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가 되겠느냐고요. 여러분,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에서 제가 그랬죠. 피 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를 해요. 형제를 찌르고 아직 따뜻한 피가 그 마음에 칼에 묻어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칼부터 버려라.” 요셉이 만약에 그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으면 이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섭리 속에 자기를 맞기고 살수가 없었죠.
여러분,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이루어질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요즘 미국에서 화성으로 쏘아 올려 보낸 탐사선이 계속 사진을 보내오잖아요. 요즘 그것 보는 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한번 보니까. 뭐냐면 새로운 이론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주고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적게는 뭐 백억 광년. 어떤 사람은 구백억 광년. 그렇게 얘기 하는데 그것이 나는 우주인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과학자가 상세하게 기고했는데 그런 우주는 10의 500제곱개의 우주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는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마 어마한 우주입니다. 그 한별에 몇 개월 동안 날아가서 ( ?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그 중요한 부품들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서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특허만 1500몇 개를 받았데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것은 특허도 안 받는답니다. 왜? 특허내면 그 원리를 설명하게 되니까 감추기 위해서 그것도 안 보여주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부속 하나를 이렇게 깎았습니다. 그래서 참 잘 깎았다. 이것도 굉장히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 하나가 수십만 개가 조립이 되어서 그래서 우주를 날아가서 그래서 인간이 전혀 가보지 않는 별에 도착해서 사진을 전송해오고 하는 장면들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하나 인생의 우여곡절이 모두 모여서 연결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훌륭하게 하나님께서 그 섭리를 통해 흘러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강물과 같은 섭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먹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좋은 역할 하나는 있습니다. 그 사람과 만나는 경건한 사람들을 성화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행하죠.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을 때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했을 때 옥에서 배신을 당했을 때. 이렇게 기구한 인생의 날들을 보낼 때 그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의 수많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었고, 요셉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징검다리. 하나, 하나를 건너왔더니 그 섭리가 이루어졌고, 그 섭리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은 매순간, 순간마다 몸부림치면서 살았던 그래서 쏟아야했던 그 희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강물과 같이 흘러가는 섭리의 신앙.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강물과 같은 섭리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신앙이 그 사람의 인격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다음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징계를 회복의 기회로 바꾸심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 시리이다. (시편71:20 )
우리가 지난 두 주 동안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역시 고난을 영혼의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깨끗하고 그리고 시종일관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산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야할 이유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실 때에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평안하기 때문에 또 수고의 염려가 없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만 그러나 그런 좋은 환경들이 오래 계속 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뒤로 물러가서 부패해지게 되면 여지없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고, 하나님의 사랑하기에 적합하던 환경이 이제는 주님을 거시리고 뒤로 물러가기에 아주 좋은 환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죄로 물들고 하나님 앞에 순결을 잃어버리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가장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 그리고 어떤 것이 가장 귀한 것인가 라는 그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높은 지위, 그리고 지식과 학식, 편안한 삶의 환경, 이 땅에서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이런 것들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여러분들이 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무지한 상태에서 깨어나서 영적인 총명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더 많이 분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과, 그 생각과 마음을 잘 분별하고 깨달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부패해지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이러한 생각과 가치관들에 변질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에 변질이 오면서 가장 주요하지 않은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가 적은 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밖에 있는 많은 유혹과 시험들이 또한 마음에 있는 죄와 만나서 그래서 그 밖에 있는 불결한 것들로 성도인 자신의 마음을 금방 더럽힙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사람이 자꾸 변해가는 것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에 성도의 마음은 항상 세상에 있는 물결과 타락, 부패와 하나 되려고 하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영향을 계속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영혼이 그런 죄로 인해서 어두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영혼과 관련되어 있던 생각, 그리고 마음의 기능, 그리고 영적인 총명, 이런 모든 것들이 동시에 어두움에 잠기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안방에 전기불이 들어오고 건넌방에, 거실에 이렇게 들어오는데 두꺼비 집에 휴스가 나가면 한꺼번에 불이 가나는 것처럼 그렇게 각 방에 어두움이 가득 차듯이 우리의 이 영혼과 관련된 이 모든 영적이고 정신적인 작용에 어두움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눈으로 보고 판단은 합니다. 이것은 빨간 것이고, 이것은 먹으면 맛있고, 이 짓을 하면 재미있고, 요렇게 하면 돈을 벌고, 저렇게 하면 저 사람을 괴롭힐 수 있고, 이런 것들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영적인 광명이 없이도 판단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짐승도 할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영적인 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총명, 영적인 생각, 그리고 영적인 마음, 이런 것들이 영혼이 죄로 가득 차게 되면 모두 기능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놓은 사람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놓으신 뜻과는 전현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 아까우신 것입니다. 왜? 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해 주시고 또 성령님이 그 마음 가운데 작용하셔서 죄와 그 죄의 비참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나서 목양을 받으면서 시시때때로 베풀어주신 은혜의 투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많이 돌보고, 투자하신 신자가 그렇게 거의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자꾸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 아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거기로부터 돌이킬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아주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혼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놀라운 특권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좀 썰렁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징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 정식으로 법적으로 유업을 물려받은 아들에게는 그 자녀 됨의 많은 특권들이 따르는데 그 자녀 됨의 특권 가운데 집안의 유산을 마음대로 쓰는 것, 그 집의 아들의 명분을 갖는 것, 상속자가 되는 것,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과 동격으로 크게 중요한 특권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 하세요. 내가 이해는 갑니다.
왜 이해가 가느냐면 저는 사실은 자라면서 거의 안 맞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매우 온유하셔서 제가 안 맞은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인데 엄마 아빠 만날 시간이 너무 없었고, 부모님은 시골에 계시는 저는 서울에서 유학을 했으니까. 두 번째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모범생처럼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별로 맞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번 이렇게 혼이 나거나, 아버지께 한차례 맞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혼이 나면 어렸을 때 나를 보고 식구들이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그랬는데 진짜 우리 엄마 아빠 어디 있을까? 어느 다리 밑에 계실까? 그런 생각도 어린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특권으로 받아드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징계해주시다니.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혼내시고 징계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입니다. 이런 정도로 철이 들었으면 맞을 짓을 안 하지. 대부분 부모가 때리면 ‘에이 씨. 왜 때려’ 속으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않으면 ‘때려라.’ 네 자식이 죽지, 내 자식이 죽느냐 그런데 성격적으로 보면 저는 그 교리를 발견하면서 아주 깊이 감격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특권이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안 되었고, 내가 이 세상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심판하실지언정 징계하실 리가 없습니다. 징계는 자기 아들에게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여러분들이 알아두어야 합니다. 절대 남의 아이들을 징계하는 것 아닙니다. 둘이 싸워도 자기 아들을 나무라야지 괜히 관계도 없는 사람이 가서 ‘애들은 똑바로 가르쳐야 된다.’ 그리고 말이죠. 언제도 보니까. 누가 애들을 손들고 있으라고 세워놓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지 마라.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가르치고 그리고 자기 아이들을 나무라야지 누가 남의 아이들 징계 하라고했습니까. 자기 아들을 징계해야지. 그런데 어쨌든지 그렇게 징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큰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지나간 다음의 얘기지 남이 얻어맞을 때의 이야기지 자기가 당했을 때에는 그것이 달콤해 보이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당할 때에는 누구든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볼 때에 아마 이 시인이 이것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기보다는 문맥상으로 볼 때에 징계 같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뒤에 보면 ‘다시 살리신다.’ ‘땅에서 나를 일으키신다.’ 라고 하는 구절이 그런 것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히브리 성경하고 좀 다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죠.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거의 비슷하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그가, 혹은 그분께서 많은 혹은 넘치는 괴로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재앙들도 보여주셨다. 그랬는데 당신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다음에 그리고 그 땅의 깊음 들로부터 혹은 그 땅의 깊은 거기에서 당신이 돌이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올라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보면 “많고 심한 고난”이라. 그랬는데 사실 여기에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면 많은 양적으로 많지만 종류별로도 많지만 양적으로 많은 괴로움을 보여주셨고, 혹은 그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고, 그런 뜻이겠죠. 그리고 또한 재앙들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점부다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그리고 얼마나 재앙을 개체적인 수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정도에 있어서 넘치도록 받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괴로움과 그리고 많은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재앙을 당할 때에 신자들은 대게 제일 먼저 자기가 잘못 살아서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때리시는 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구나. 하나님 아버지가 그래도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도록 믿음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게 이 속에서 양심이 먼저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양심이 발동하는데 긍정적 의미에서 양심이 발동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에서 양심이 발동해서 율법과 함께 짝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징계하시니까 이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끊어졌나보다. 그리고 예전에 나를 향한 사랑은 다 사라지고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 징계밖에 받을 수 없는 말하자면 징계 덩어리가 되어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밀려오게 되면 신자는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중에 엎드러지게 되는데 이런 절망은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고 이런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는 마음은 이렇게 양심이 괴롭힘을 당하면서 율법의 정죄를 받으며 엎드려질 때에 그 마음에 굳어짐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하나님의 징계가 무섭다. 두렵다.’ 라고 하는 것은 잠깐이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더 굳어지면서 갈 때 까지 가보다는 식의 반응을 자신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런 깊은 고통 속에서 많은 괴로움과 그리고 커다란 재앙들을 겹겹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괴로움을 만하게 되었을 때에 이 자체로만 보면 그는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남편과 아들 둘을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나오미가 한탄했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고, 이제는 어떤 인생에 좋은 일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사람의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상황 자체가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신자인 우리들을 잘못했다고 때리실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때리실 때에 그것은 첫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반쯤 두들겨 패신 다음에 한참 얻어맞다가 ‘내가 왜 맞아야합니까?’ 그렇게 물어볼 정도로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징계하시기전에 하나님이 인격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일깨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히게도 하시고, 또 선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도 하시고, 이렇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많이 일깨우십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두 다 강퍅한 마음과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흘려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그것은 졸지에 당하는 사건인 것처럼 신자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충분한 경고를 주시고 돌이킬 수 있는 수 없는 기회를 주신 후에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만약에 부모라면 자식이 있는데 무엇을 몰라서 잘 못한다. 그러면 단번에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겠습니까? 아니면 단번에 발길로 차겠어요? 그렇지 않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하지마. 그러면 안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가르쳐주고 가르쳐준 후에 그다음에 그 아이의 마음속에 부모인 자신의 뜻을 거시려서 살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와 경향이 있다고 생각 될 때에 그 때에 징계를 하는 것이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렇다면 얼마나 더 그러시겠는지 생각해보세요.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이 당하고 있는 그 어려움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손을 드셔서 “너 왜 이러고 사니?” 그리고 때리시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다 끊어졌거나. 끊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징계의 목적자체가 하나님 아버지 나 좀 살려주세요. 그리고 매달릴 참이거든요. 매달리게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징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믿음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 그 믿음이 뭐냐면 “아빠, 나 잘못 했어 좀 살려줘” 그리고 매달리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절대 의존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징계 받을 만큼 잘못할 일을 하지를 않죠.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기 때문에 징계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죠.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정말 저 좀 살려주세요.” 그리고 매달릴 정도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좀 결단이 났지만 그래도 내게는 돈이 있으니까 좀 살아볼만 하다. 이거지. 그러면 하나님이 돈을 치십니다. 돈도 별로 없고, 그렇지만 그러나 지위가 돈을 벌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좀 썰렁하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나를 존경하고 그리고 내 앞에 굴복하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그 지위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혹은 지위는 낮출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이 행한 아주 잘못된 일을 폭로하셔서 그래서 그 사람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런 자존감과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좋은 칭찬을 앗아가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의지할 대가 없게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 역설적으로 “아, 나는 돈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별로 없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지만 내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잖아.” 그러면 그것을 자원으로 삼으면서 그 덕택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것을 치십니다. 그래서 관계를 깨뜨려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홀로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마음이 부요할 때쯤 되면 항상 교통사고가 난데요. 그래서 비 오는 날 망가진 차 앞에서 엔진에서 연기 풀풀 나고 비를 쫄딱 맞고 서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답니다. 그래요. 여러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만 더하죠. “나는 뭐 애인도 없고, 돈도 별로 없고, 그리고 또 지위도 별로 없지만 그러나 내게는 이 건강이 있잖아 이 몸매가 바쳐주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건강을 치셔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영혼, 우리의 인생보다도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를 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가 의뢰하던 우리가 사랑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아주 깊어지면 하나님이 그것들을 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도 참 재미있습니다. 뭐냐면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나도 거기에 담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빨리 읽어냅니다. “아, 이것은 지금 우연히 생긴 일이다.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다.” 아니면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깨닫게 하신다.” 이것을 분명히 분별해 나가거든요. 그런데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다 해석을 해줘도 안 믿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면 이판, 사판, 공사판, 갈 때까지 가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된장인지 뭔지 직접 먹어보고 내가 판단하겠다.’ 그러라고 하세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아니 절벽에 “위험” 표시가 되어있으면 그러면 거기 가지 말라는 것은 너무 뻔하잖아요. 도로가 끊어지고 거기에 해골 표시가 되어있으면 그것 무슨 표시입니까? 거기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이죠. 패드 병에 하얀 농약이 들어있고, 거기에 해골 표시가 그려져 있으면 뭐하라는 것입니까? 먹지 말라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한글로 읽어서 “단것”그래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시는군요.
그러니까 벌써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고하시니까. 그것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너무 질기면 하나님이 한번의 괴로움이 아니라. 많은 괴로움, 한번의 재앙이 아니라. 여러 번의 재앙을 보내셔서 결국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나님이 명백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순전하고 정결하게 만드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이 소원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식 데려다 놓고, 주위에 욕 안 먹고 학교에서 한 10등만 하면 만족하실지 몰라도 하나님은 안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 닮을 때까지 우리를 그렇게 주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겉으로 보면 그냥 괴로움과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손을 들어서 치시고 이제 우리가 고집과 인내 사이에서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때, 거기까지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뢰하던 모든 것들을 이미 다 부서뜨리십니다. 그래서 항상 순종하고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런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 좀 번다고 마음이 부요해지고,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가 좀 올라간다고 해서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징계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어서 제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도 잘해요.” 그러면서 까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애들을 보면서 귀엽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추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았는데 혼자서도 잘하기는 뭘 혼자서도 잘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괴로움을 당할 때에 많은 재앙을 만날 때에 그것을 보면 진짜 그 괴로움과 재앙 그것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아니 뭐 믿는 사람이 당하는 괴로움과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괴로움이 틀립니까. 다 세상에서 당하는 괴로움인데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괴로움이 가득 찬 징계의 도상에서 하나님은 그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징계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징계는 항상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신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우리를 그 원래의 선한 자리로 돌려놓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언제나 반영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곧 구속의 목적과 같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회복할 수 없는 창조의 목적을 구속이 회복하고,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은 그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을 반영하고, 그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반영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창조의 목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받을 때에 그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상태로 돌려놓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정행동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장 중요한 독특성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지체중 하나가 천애 고아로 자란 사람이 있는데 언젠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는 아이들이 그 부모에게 그렇게 혼나는 광경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그렇죠. 똑같은 얘기를 어떤 사람이 또 얘기하는데 자기는 정해진 교회도 없이 이 교회, 저 교회를 5년 인가 6년 동안 떠돌아 다녔답니다. 그러면서 어쩔 때는 너무 곤고하니까 자기를 이렇게 혼내고 야단칠 목사님이 자기에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 그런 것 잘 한다. 와라. 내가 사랑은 잘 못해줘도 그런 것은 내가 잘 한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에 그 외형적인 모습은 괴로움에 지나지 않은데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바꾸어 놓으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괴로움을 당하고 많은 괴로움과 그리고 재앙을 당하면서 그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계획이 뭐냐면 “나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주 절묘합니다. 여기에서 “나를 다시 살리신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대부분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편67편에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죽은 것과 같은 백성들을 하나님이 다시 그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어서 회복시켜서 살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그 땅의 깊음에서” 혹은 “그 땅 깊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올라가게 하십니다.” 라고 할 때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비천함을 의미합니다. “땅에 엎드려졌으며”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묵사발이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졌다.” 성경에 그런 표현 많이 나오죠. 그것이 뭐냐면 존귀와 영광, 가치 이런 것들이 상실 되어서 땅에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가 무엇입니까? “하늘 높이 올리시고” 이것은 뭐죠? 존귀해지고, 영광스러워져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높임을 여기는 받는 그런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비슷한 표현이 뭐냐면 시편 119편 같은데 “이 땅. ‘에렛쯔’ 혹은 ‘아드마’ 여기에서 이것과 같이 이것의 부속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파르’ 입니다. ‘티끌’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면 그래서 ‘진토’라고도 번역이 되었는데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땅과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내 영혼이 예전에 존귀와 가치, 아름다운 그 영광과 그 힘, 그 신선함, 그 선한 특징 이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주 하찮은 것처럼 땅에 붙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티끌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뭐냐면 그와 가치가 합일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땅 밑에서” 원래 이 ‘태훔’ 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것인데 “깊음”입니다. 그래서 “심연” 혹은 “깊음”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심연, 혹은 깊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 땅의 깊음 들로부터” 그러니까 땅에 그냥 붙어버린 정도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시인이 그런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 모든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땅에 붙은 정도가 아니라.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매장해버린 것처럼. 그리고 보니까 우리들 표현도 그런 것이 있네요. “내 너를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릴 거야” 굉장히 좋네, 굉장히 성경하고 유사합니다. 매장하려면 어떻게 하죠. 파야 되죠. 그때 파는 그 웅덩이 같은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태훔”입니다. 그것이 또 복수입니다.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무슨 명예도 또 존귀함도, 지위도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땅을 파고 다 묻혀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그야말로 단순히 영광을 상실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매장되어버린 것 같은 상황에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의 시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시도 역시 다윗이 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 다윗의 생애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왕이 누구입니까? 왕이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왕은 그 당시에 이방 나라에서 이 왕은 나라 전체가 왕의 것입니다. 그것을 가산재 국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라 전체가 왕 개인의 소유입니다. 자기 집 재산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계셨으니까. 그럴 수 없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만 하면 이 세상의 있는 왕 보다도 이스라엘의 왕이 존귀나 영광이 덜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제가 건축할 때도 그런 얘기를 한번 했습니다. 만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건축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금만 90조 원어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금값이 올랐다고 해요. 요즘에 그것을 계산하면 아마 90조도 넘어서 아마 한 100몇 조 될 것입니다. 뭐 저도 직접 계산한 것이 아닌데 제가 아는 어느 교수님이 칠판에 열심히 계산을 해보더라고요. 그리고 결론을 우리 보는 앞에서 90조원이라고 내더라고요. 그것도 금만 은은 말고, 그러니 은하고 동, 철 백향목, 등등을 갖다 다 친다고 하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만큼 돈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떵떵거리고 있을 때에 그의 영광과 존귀라고 하는 것은 감히 다른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죠.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온갖 환난이 다 일어나지 않습니까. 딸이 자기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고 황급히 도망을 가니까 진짜 옛날 같으면 진짜 강아지만도 못한 인간들이 나와서 다윗에게 욕을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존귀와 영광이 모두 다 땅의 깊음 속에 묻혀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나를 살리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이것이 영적인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것 같으면 뒤에 나오는 “우리를 그 땅의 깊음 들로부터 끌어 올라가게 하시고” 라고 하는 이것은 외면적인 이 존귀와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 징계를 하실 때에 영혼만 곤고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아름다움과, 지위, 소유, 이 모든 것들을 다 함께 잃어버리고 그리고 땅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혼은 다시 살리시고, 사회적인 지위와 외적인 영광들은 하나님이 다시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징계 가운데서 그 모든 징계가 끝나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살리실 때에 우리의 영혼은 거기에서 깊은 어두움으로부터 다시 일어나고, 그리고 다시 살아요. 예전에 물질적인 탐욕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염려, 그리고 허탄한 것들의 자랑, 이런 것들로 인해서 거의 억눌려 죽었던 영적인 생명이 다시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그 적대감을 청산하고 화목 하면서 그러면서 그 안에서 놀랍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산다.” 라고 하는 의미는 결국 뭐냐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진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뭐와 같으냐면 곡식을 잔뜩 심어놓은 논밭에 놓인 수로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수로에 물이 계속 흘러들어오면 그러면 아무리 가물건 말건, 상관없이 그 논밭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로에 물이 딱 끊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아름다운 곡식이 열매 맺을 수 있는 밭이 황량한 가시 덩굴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 징계 받지 않으면 안 될 악,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관계를 끊으시고, 그리고 하늘의 신령한 자원을 주시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죽은 자와 같은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혼이 죽었다고 아무 일도 못하나요? 영혼이 죽었을 때 못하는 일은 영적으로 선한 일만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어도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영적으로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자의 의무입니다. 천국에 절대 출석 상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났는가? 뭐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계속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주는 상. 집사를 맡기고, 장로는 맡기고, 목사를 맡겼는데 무슨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한 자리에 계속 눌러 붙어서 그냥 견뎠다. 그런 것으로 주는 그런 참가 상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영적으로 선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데, 그 일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영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 외식하는 신앙생활 아니면 배교에 가까운 사람, 그것만 죽은 영혼으로 할 수 있지 진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들은 죽은 영혼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습니까? 생생합니까? 언제나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주님의 마음을 함께 나누어 갖고, 주님의 생각에 동참하고,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 여러분들이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언제나 중요합니까? 반성해보세요. 그것이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표징입니다. 징계를 받을 정도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는 전혀 그렇게 살아있는 영혼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왜? 그 영혼이 너무 소중하니까. 그 살아있는 영혼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맛보기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주셨는데 그런 들 포도와 같은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호된 괴로움과 그리고 반복되는 재앙을 통해서라도 여러분의 육신이 그것으로 인해서 상하고 망가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이 세상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징계를 통해서 그 모든 좋은 지위와 아름다운 채면을 상실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다시 얻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기에서 치열한 징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서 영혼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신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괴로워 보이나 후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 징계를 통해서 그 징계가 모두 끝날 때에 하나님이 이 땅바닥에 떨어져서 땅 깊음 곳에 들어가 버린 것 같은 매장되어버린 것 같은 그런 수치스러움과 불명예, 거기로부터 여러분들을 거기로부터 존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 아무개 성도, 아니면 이 아무개 집사, 항상 떠오르는 것이 뭐냐면 짜증나는 실패의 연속, ‘아무개하고는 사업도 같이 하지마.’ 왜? 그 사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망했어. 이것이 복의 근원이 아니라. 재앙의 근원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그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변화되면 그 영광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당신의 목사가 되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의사였었거든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슬쩍했는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내가 옛날에 지질이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데 진짜 고생 많이 했더라고요.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밥술이라도 먹게 되었습니다.” 이 얘기를 하시면서 아주 투박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결국 뭐냐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시는데 영혼만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적인 영광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노래하죠. “주는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재 대신 화관을 내게 씌우시고, 기쁨의 띠를 띠게 하셨나이다.” 그런 경험이 시인들에게는 많이 나옵니다. 저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누구는 없겠습니까. 그런데 징계가 잘 끝나고 나면 항상 징계 받는 동안에 겪었던 이 구겨진 채면을 다시 펴 주시는 은총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회복과 그다음에 우리의 이 외적인 아름다움과 영광을 복구시키시는 이 축복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 처절한 괴로움과 수많은 재앙의 상황이 바뀌어서 영혼은 다시 살고, 외적인 아름다움의 영광은 복구되는가? 그것이 여기 히브리 성경에 보면 “타슈브”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신이 돌아오셔서” 누가 돌아오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여기 나오는 “슈브” 라고 하는 단어는 뭐냐면 타를 빼버리고 “슈브”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돌아오너라.” “여호와를 떠난 너희여 돌아오너라. 나를 떠난 너희여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쓰여 있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급격한 돌이킴입니까. 죄의 길을 가다가 의의 길로, 세상을 향해 가다가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가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돌이키는 것이 슈브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으로 가시는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기가 죄 가운데 있었는지, 하나님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났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러한 징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태도를 바꾸심으로 자기의 죽었던 영혼은 살아나게 하시고, 사라졌던 그 모든 육체의 영광과 외적인 아름다움, 땅에 떨어져서 매장이 된 것 같은 자신의 모든 자존감과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먼 길을 떠나셨다가,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셨다가, 다시 자기를 향해 오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특히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이 “타슈브”를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나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옵소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많이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넷” 이 절묘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향해 돌이켜 주시옵소서.”라고 외치던 사람들은 모두 다 스스로 죄의 길에서 돌이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만 자신 있게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멀리 떠나서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그래서 주님께 징계를 받고 있다. 그래서 내 영혼은 죽은 것과 같고, 내 육체의 아름다움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매장되어 버린 것 같이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렇죠. 자신이 하나님께 참회하고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회개하고, 진실로 돌이킬 때, 징계로 인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커다란 괴로움과 많은 재앙의 상황들이 변해서 오히려 그 재앙과 괴로움을 바꾸셔서 하나님이 오히려 영혼은 살리시고, 부끄럽게 된 자신의 외적인 영광은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당신의 자녀들이 죄 가운데서 계속 고통당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밟히는 소금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있는 영혼으로 정말 이 외적인 아름다움의 영광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그런 의지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기 모인 많은 여러분들 가운데 뚜렷이 나는 징계 중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확신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런 위험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지막 끝이 어떻게 될까요? 그 마지막 결국이 어떻게 될까요? 불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깨닫지 못하고 사생자처럼 자행자지하며 그리고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 마지막 결국이 어떻게 될까요? 영혼은 죽고 티끌만큼 남아있는 외적인 아름다움도 모두 상실한 채 땅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매장되는 것. 그것을 여러분 중에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깊이 돌이키고,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영혼의 괴로움, 그리고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통, 하나님이 이것을 바꾸셔서 오히려 이 괴로움을 사용하셔서 죽은 자와 같던 여러분들의 영혼을 살리시고, 땅에 떨어진 여러분들의 영광, 외적인 아름다움의 영광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셔서 존귀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고난을 깨달음의 기회로 바꾸심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지난주에는 제가 설교를 못했고, 그 지난주에는 바꾸시는 하나님 가운데 “징계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회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커다란 특권중의 하나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는 것과 그리고 징계는 그 때에는 아파보이지만 그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파멸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징계를 통해서 우리를 회복으로 바꾸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을 배움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시편 119편은 정말 사랑스러운 시편입니다. 성경 중 어느 책 한권이 아름답지 않은 책이 없지만 그러나 시편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다른 성경은 역사를 기록하거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되 서술로 교훈하는 책이지만 그러나 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래서 우리가 깊이 공감하게 되고, 그 시편을 통해서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시편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기뻐하고 감격했는가가, 한 사람의 신앙의 성숙을 재는 척도라고 말할 것 같으면 좀 지나친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 시편은 그런 체험적인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온전한 신자가 되어 가면 되어갈 수록 시편을 많이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편 119편은 제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시편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몇 해 전에 이 119편을 40일에 걸쳐서 전체를 한번 설교한 적이 있는데 죽기 전에 이 119편 1절부터 마지막 절 까지를 모두 설교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여러 해 동안 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이 71절 그 앞뒤에는 시인의 고난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 119편의 제목은 그래서 고난의 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 웁니다.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 119편인데 이 119편에는 그러면 왜 그렇게 시인의 고난 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 하나님이 가장 경건한 성도들에게조차 고난을,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는 기회로 바꾸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뭐라고 나오느냐면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랬습니다. 그 바로 앞 67절에서는 왜 고난당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인지를 앞서서 설명하기를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그릇행하면서 살았다는 것이죠. “그릇 행한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때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때로는 잘 몰라서 불순종하고, 그런데 불순종하며 살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몰라서 불순종 하는 경우가 많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일수록 몰라서 불순종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순종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이 불순종이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힘쓰는 부지런함, 힘쓰는 영적인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게으른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불순종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아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왜냐면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 알고도 죄를 짓는 것 보다 양심의 송사를 덜 받기 때문이죠. 도둑질한 사람들에게는 어두워지는 시간이 출근시간입니다. 대낮에 열심히 일해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해 떨어지면 퇴근시간이죠. 어두운 시간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정직하게 돈을 번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불의한 일을 남몰래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움이 좋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옛날에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그릇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알아도 불순종하고 몰라서 또 편안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시리고 그러면서 죄 악과 허물이 쌓이는 가운데 일생을 산 것이죠. 그렇게 생애를 사는 동안에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행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찍혔고, 그렇게 그릇행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릇 살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이 그를 깨닫게 하십니다. 한번에 회초리를 들고 때리시지 않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지식이 모자라고 부족해서 그릇행하고 범죄 하면 한 칼에 목을 날려버리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죄인들을 그렇게 다루었더라면 이 세상에는 떨어진 성도의 목과 피 묻은 칼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죠. 때로는 우리의 양심에 가책을 주시고 율법의 송사를 통해서 우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괴로움을 주시고 그래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죠. 때로는 죄를 지은 우리들에게 용서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십자가를 의지해서 죄 용서 받게 하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일상적으로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너무나 우리들이 말이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어두움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깨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며 그릇행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예처럼 우리를 몰아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어느 한 순간에 우리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서 노예와 같은 억압의 상태에서 자기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인격적인 관계가 되려면 말이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는 인격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남남이든지, 혹은 노예와 상전의 지배의 관계든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가장 하나님 앞에 감격했던 부분 중 하나가 물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지만 나를 그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가신 그 방법에 있어서 말이죠. 가장 하나님 앞에 눈물겹도록 감격했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라는 것, 우리를 발로 차거나 비인격적으로 우리를 억압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고,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얼마간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이다음에 목회를 하면 참 인격적인 목회를 했으면 참 좋겠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애는 씁니다. 인격적인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겠다는 교인, 오라고 하고, 가겠다는 교인 가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방목이지. 그래서 예수 믿겠다는 교인은 오라고 하고, 그리고 가겠다는 교인은 그 협박하고 그런 것 말고, 잘 인격적으로 설복하고 알아듣기 쉽게 그래서 사실은 나는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제일 부러운 사람들이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만나보면 어떤 사람들은 말이죠. 전혀 그렇게 하기 싫은데 몇 분만 가만히 앉아서 듣고 보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만듭니다. 약 장수들이 잘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약 장수가 되었습니다. 신약과 구약, 그런데 결국은 인격적으로 그렇게 하려면 말을 잘 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그럴 때 무엇으로 그렇게 인격적으로 인도하셔요?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쭉 인도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교회에 왔는데 항상 기도하게 하는 설교만 듣습니다. 부모와 대판거리 싸우고 사는 사람은 몇 년 만에 친구에게 이끌려서 왔는데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러다가 뛰쳐나가서 다시 전도 집회 때 다른 교회에 갔는데 “부모님께로 돌아가라.” 그래서 이제 에이, 씨 하면서 뛰쳐나갔는데 친구가 차를 타고 가면서 찰칵하고 라디오를 켰는데 “돌아온 탕자” 설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집요하게 우리들을 설복하실 때 항상 인격적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그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셔요. 그래서 솔직히 그렇게 인격적인 목회를 너무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것도 한두 가지 있습니다. 집사 하기 싫다는 사람 안 시키기. 인격적이잖아요. 너, 너, 너, 여러분들을 나는 우리 교회의 집사를 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는 목사님은 의논도 안 하고 주보에 내버리더라고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할 때에 누구하고 의논하고 택했냐는 것입니다. 말은 되는데 왠지 좀 썰렁합니다. 그리고 주보에 나온 이름보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내 놓고 그 다음에는 하고 싶은 사람은 와서 교육받고, 또 시험보고, 그리고 집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또 이것이 기회다. 그러면서 6년이 지나도록 집사 안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격적인 목회를 아주 악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죠.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인격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무수하게 많이 보여주죠. 우리들이 잘 모르지만 우리가 일단 죄 가운데 빠져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되면 그러면 안 된다. 안 된다. 하나님이 많이 말씀하셔도 누치를 못 챕니다. 그러죠. 그러다가 나중에 쾅 하고 일이 나서야 가만히 보면 한두 번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 때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어려움을 당할 때는 졸지에 라고 말하지만 은혜를 많이 받고 보면 수없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나. 이렇게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렇게 그릇 행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평안함을 주셨겠죠. 그래서 “고난 당하기전에는” 어땠을까요? 평안했죠.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 명령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선지자 요나가 순풍에 돛단 배 같이 바다를 미끄러져 갈 때에 득의양양했던 것처럼 또한 이 시인도 아마 고난이 없는 평안한 때에 마음 놓고 그릇 행했고, 하나님이 수시로 인격적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지만 마음에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있고, 자기가 이 온 우주와 인생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교만이 자리 잡으니까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시인만의 일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그림자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고 복주시면 하나님께 정말 순종하고 예수님만 사랑하며 살 것 같죠. 언제? 고생할 때 징계를 받아서 고생할 때 그 때는 그런 생각이듭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훌륭하게 입증해주는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성이 됩니다.
제가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드는 시간이 되면 다니엘은 동쪽 예루살렘에 난 창을 열고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서쪽 교육관 쪽에 난 창문을 열고 온 식구들을 재워놓고 기도를 합니다. 찬 바람이 싹 들어오는데 거기에서 보면 서쪽 창문을 열면 어쩌면 그렇게 창문의 정 가운데 교육관이 딱 보입니다. 거기에서 다니엘처럼 기도를 합니다. 제목이야 좀 다르죠. 저는 무슨 기도겠습니까? 잔금 잘 치루고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죠. 그때 예루살렘이야 원수들에게 짓밟혔지만 저기야 누가 원수들이 밟고 있습니까. 세입자들이 들어있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죠. 꿈도 꿀 수 없는데 주님이 행해주셨는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말이죠. 기도는 그렇게 간절히 하는데 첫날 그 건물을 보면서 흥분했을 때의 흥분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냉정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지금은 꿈을 꾸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저것을 깨끗이 수리해놓고 색칠하고 그리고 들어가면 아마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당연히 우리 교회인 것처럼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이 교회를 지어놓고 깜짝 놀란 것이 뭐냐면 어떻게 사람들이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당연히 내 교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니는지 놀랐습니다. 이런 것 하나 신기하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밟고 지나가고 툭툭 치면서 지나가고, 앉으면서 벤치도 한번 만져보고 “야, 이게 이렇게 신기하게 생겼을까?” 이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다른 모든 축복들은 일반섭리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그런 감동을 우리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간직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잇 사이에 고기가 끼었는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메추라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주시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요즘 닭 값만 이렇게 떨어져도 기쁜데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쫙 있는데 요즘 닭 좀 사라고 제가 얘기하는데 왜냐면 농민들이 너무 불쌍해요. 그런데 메추라기가 확 날아와서 발목이 빠질 정도가 되었을 때에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맛있게 먹었어요. 이게 씹히는 동안에 벌써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고기가 여기 잇 사이에 끼어서 아직 남아있는데 또 열 받을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나서 역대에 누가 그런 기적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죠? 나는 엊그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300만 명이 홍해를 건너는데 하나님이 만약에 물만 가르셨다면 어떻게 했을까? 300만 명이 땅을 밟고 지나갔다면 그 하중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거기가 만약에 갯벌이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갈라진 물 사이로 갯벌에 빠져 죽었더라. 그러니까 히브리 성경에 보면 그 물을 가르고 육지가 나왔는데 그것이 “얏빠샤” 입니다. 히브리말로 “얏빠샤”는 ‘마른땅’입니다. 마른땅이 나온 것입니다. 그 300만 명의 사람이 쿵쿵거리면서 밟고 지나가는데도 지반이 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큰 기적을 봤는데 3일밖에 안 되어서 마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일반섭리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시인이 고난 당하기전에 시인이 어떻게 그렇게 형통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이 풍지고 고단한 세상을 살면서 고난당하지 않고 살수 있었습니까? 누구의 은혜였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죠.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그릇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좋은 삶의 환경, 지금 여러분들에게 주신 좋은 삶의 이 아름다운 여건들, 평안함,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물질, 여러분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지위,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들, 복된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릇 행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주신 그 모든 좋은 환경 속에서 그릇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잘못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불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자녀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를 않습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기만 하다가 자기의 자녀가 파멸에 떨어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계기로 삼으실까? 먼저 여기에 나오는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고난당한 것,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수동태로 되어있어서 자기가 있는데 괴로움이 찾아온 것이죠. 그런데 이 히브리어 성경을 히랍어로 번역해놓은 옛날 히랍어 번역에 보면 뭐라고 번역되어있느냐면 “당신 저를” 그러니까 주님이죠.“ 괴롭게 하신 것이 내게는 유익입니다. 왜냐면 그것 때문에 제가 주님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번역에 의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를 괴롭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고난의 원 저자는 아니시지만 허용하시기 전에는 자기의 백성들의 머리털 끝 하나 상하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신의 교훈을 가르치실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직접적으로 관련해서 우리가 지적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 완악한 인간들의 마음은 고난을 받을 때에 가장 약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나쁜 의미에서 강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얼마 안 되서 읽은 어느 간증에 관한 이야기에 나옵니다. 몇 만 명, 몇 십만 명의 교인을 목회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러니 그분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는 어느 여 집사님이 남편이 있었는데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이 부인이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애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담임 목사님을 모셔다가 한번만 말씀을 듣게 하고, 기도 받게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니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전하니까 그 바쁜 목사님이 별일 제쳐놓고 거기까지 심방을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이 한번도 교회에 나온 적이 없고 예수 믿는다고 아내만 박해하던 그 남편에게 “선생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죽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신 병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 정도 했으면 빈 말로라도 여기까지 목사님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믿어보도록 애쓰겠습니다. 간 다음에 안 하더라도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숨을 헐떡거리면서 “내가 군인으로서 일생을 살았는데 치사하게 죽음 앞에서 예수 의지할줄 압니까. 나는 군인답게 죽고 싶습니다.” 결국은 죽었습니다. 군인 정신은 그런데 쓰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까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모두 다 연약한 마음이 되느냐? 아닙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고난을 당할 때 마음이 약해지는 때는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고난당하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아주 완악한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하다가 안 되면 죽어버리지”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모질고 모진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너무나 모질고 완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완전히 굳어진 마음인지, 돌아오려고 하는 마음인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그들을 시험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이제 그 고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물론 한번에 생각이 돌아서고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재고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시’ 그러면 후닥닥 그만두는 아이가 있고, 어려서부터 그래요. ‘시’ 해도 너는 짖어라 나는 한다. 계속 하는 아이, 그래서 툭 쳐도 계속해요. 잡아 당겨도 붙들고 안 놓으면서 자기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그릇 행해도 마음 밭이 그래도 남아있는 신자는 하나님이 ‘시, 하시면 ‘아이고 큰일 나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가는 신자는 하나님이 ‘시’ 그러면 ‘뭔 소리야, 누가 입맛을 다시나’ 그러면서 가는 거죠.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부딪힐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이 마음에 밑바닥 속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는지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분별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야단을 치시면, 하나님이 괴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시인의 마음속에 깊은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게 되니까 그러면 인생의 길이 다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 올 때 “아, 씨, 더럽다 사는 것도 힘들고, 아, 괴롭다” 이러면서 오다가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은혜를 받고나니까 “그래 맞아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라.
이제까지 하나님이 내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시고, 이제까지 인도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니까 잠시 교회에 올 때까지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세상의 염려와 근심, 괴로움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 이것이 부드러움이 남아있는 신자의 마음 아닙니까. 이 시인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야단을 치셨죠. 그랬더니 죄 가운데 있으면서 평안하게 살던 그 평안이 뒤흔들리고 고난이 닥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밀려닥칠 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신자가 신령한 방향으로 즉시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깨닫기 위해서 고난을 주셔도 ‘인생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아주 굉장히 통 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 이 모든 일이 나의 죄 때문이구나.” 이렇게 안절 부절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아, 살다보면 뭐 마누라도 죽고 자식도 다치고 사업도 망하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면 정말 감사하겠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괴롭게 하시는데도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그 끝없는 낙관이 그를 펑퍼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마음은 온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를 더하시죠. 어려움을 더하십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한히 고난을 견딜 수 있게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안하죠.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가면 소위 빙점이라는 것이 옵니다. 마음이 얼어붙고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점이 옵니다. 그 때에 탁 터지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겨냥하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할 때에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온 그 모든 날들이 너무 하찮게 여겨지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거시리면서 살려고 했던 그 몸부림과 불순종의 수많은 날들이 그렇게 허무하고 비참해 보일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 나의 유익입니다. 왜? 그것을 통해서 내가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가장 커다란 밑천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부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우리의 재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며 내 우편에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여기시고, 그리고 내가 그분의 편에 있다는 것, 내가 그분의 마음에 있고,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교제의 비밀이 하나님과 나 아시에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재산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적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운 것은 감히 하나님을 등지고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원수들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의 대적들이 얼마나 많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에이브람 링컨이 말하기를 “우리의 원수들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의 적수들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느냐? 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며 나의 구원이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시인이 그 고난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엄청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들을 하나 둘씩 잃어버리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변하는 것이요.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온 천지는 변해도
주 날 버리질 않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더 싫어하시는 것은 딴 것 의지하면서 힘내면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붙잡아 주셔야만 설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모두 다 날 버려도 주님만이 내 편이 되어주시면 나는 충분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시인이 형통한 가운데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큰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당할 때에 그 당시에 이 시인의 괴로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가져다주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하시지만 그것은 결과이고,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편한 것은 편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내가 참을 수 있다. 그것은 신앙으로 그것을 승화시켜서 참는 것이지 살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왔다. 갔다. 하는데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은 다 아픈 것이죠. 이 시인도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를 치셨을 때에 정말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당한 것,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 자기가 당한 그 일이 고난이었고, 큰 고통이었다는 것, 그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반복해서 말합니다. 얼마나 그 고난 중에 새겨진 고통의 인상이 명료했으면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파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아파했는데 사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반응하고 견디고 나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큰 고난의 아픔을 통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 은혜를 내리신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의 율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동시에 깨달았는데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는 형통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또한 하나님 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난을 통해서 얻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이 세상의 불순종 가운데 획득하는 형통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은 아예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아주 어렸을 때 제일 접종하기 힘든 주사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천연두 주사와 또 하나는 B.C.G 결핵 예방 접종이었습니다. 이 천연두는 맞으면 우두 맞은 자국이 있잖아요. 천연두 균을 이 짐승, 소 같은데서 배양해서 인간 몸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균이 들어간 자국이 우두자국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곰보입니다. 곰보자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병에 걸리면 천연두 맞은 것 같은 구멍이 많이 나는데 우리는 조금 집어넣었으니까 구멍이 한 개나 두개만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맞고 오면 앓죠. 저녁 내내 앓고, 심하면 3일씩도 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천연두 균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면역력과 저항력들이 생겨납니다. B.C.G 접종을 투브로클린 반응 검사를 해서 음성이 나오는 사람들만 골라서 B.C.G 접종을 합니다. 저는 양성 반응이 나와서 안 맞았는데 그것을 맞은 애들을 보면 불쌍해요. 옛날에 꼭 여름에 놨습니다. 누렇게 훈장처럼 곪아서 며칠 동안 다니는 것입니다. 어떤 애들은 저녁내내 집에서 앓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결핵균을 거기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균이 들어가서 그냥 난리를 치면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다른 것들은 거기에 달라붙어서 그것들을 막으려고 몸부림을 칠 때 전쟁이 일어나면서 열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며칠 지나면 노랗게 옆에다 훈장을 하나씩 달고 다닙니다. 또 가만이나 있습니까. 또 어떤 녀석들은 그것을 이수시게로 터뜨려서 그것이 독이 올라서 약을 바르러 가느니. 약도 별로 없던 시대였지만 뭐 장난감도 없으니까 그런 것이나 가지고 노는 것이죠. 그런 접종을 통해서 순간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그러는데 그것을 통해서 평생가도 걸리지 않을 수 있도록 저항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저는요, 사람이 참 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셨지만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셨지만 나는 정말 연단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연단은 아름다워라.” 그것은 괜히 남들이 하는 소리죠. 지금도 그렇게 연단을 많이 받았던 그 기억을 생각하면 지금도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단을 많이 받으면서 살던 동네에는 지금도 별로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과거와 화해를 못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죠. 물론 거기에서 고난만 받았느냐? 아니죠. 고난만 받았으면 벌써 죽었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살아서 이제까지 살았고, 그 때에는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주님의 마음에 썩 드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변화되어 가고 있는 중의 사람이 되었잖아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을 많이 깎으시고 그 고통은 정말 크고 쓰라리고 맵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될 때에 그 고난은 우리에게 오히려 놓아주시는 천연두 예방 주사나, 혹은 B.C.G 접종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맞고 건강을 확보하는 것처럼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 고난이 그 당시에는 너무 쓰디 쓴 것 갔고 기 힘든 것 갔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람이 고통 는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대로 그를 데려가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괴로움을 많이 당한 사람들이 모두 신령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었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즉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가르쳐주시는 놀라운 영혼의 축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거기에 반드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은 30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밭으려면 좀 많이 받지, 우리 예수님이 그래 노예의 몸값밖에 안 나간단 말입니까.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것을 썼습니까? 돈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았지만 결국은 쓰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돈 주고 판 것을 알았을 때에 다른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룟 유다를 인간이라고나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말이 제자들의 마음에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비록 예수님을 팔았지만 그러나 그는 완전히 철면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했습니다. 안에는 양심의 가책이 솟아나고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둘 사이에 끼어서 그는 얼마나 괴로운지 목표로 삼고 예수님을 팔았던 그 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푼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갖다 그들에게 던져주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처절하도록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 괴로움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나요? 예수님을 만났나요? 나가서 목메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우리를 모두 유익하게 하고 고난이 우리를 모두 선하게 우리를 바꾸어 놓아서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렇죠.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단지 이를 악물고 참거나 분노하거나, 아니면 그 고난을 통해서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품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는 고난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기고, 고난에 담겨진 하나님의 더 커다란 인격적인 뜻을 분별하고 무릎을 꿇는 신앙이 있을 때에 그 쓰라린 고난이 변하여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는 지혜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고난의 절정에 오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혹은 이미 영혼의 곤고함이 밀려오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형통하게 해주신 날들을 하나님 반역하면서 사는 시간들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뒤로, 뒤로 미끄러져 가고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뉘우치셔야 됩니다. 깊이 회개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새롭게 하나님 앞에 이 고난을 계기로 삼아서 오히려 순종을 배우고, 고난을 계기로 삼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배우고, 고난과 위기의 때를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고 그 성품을 배우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심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30:11 )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서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이유는 풍부한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이 풍부한 신앙의 체험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경험한 것 중에는 그 사람이 경험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할 정도로 경험이 참 풍부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되죠. 또 하나는 이 사람의 시가 이처럼 은혜가 된 것은 신앙적인 경험이 풍부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착한 신앙의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그 많은 체험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구약에서 이 사람보다도 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을 이 사람만큼 더 사랑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방만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는 우리와 같이 풍부한 구속의 계시를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녀가 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녀가 되어서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 받고 싶다고 하는 그 절절한 마음은 그로 하여금 환경과는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의 시는 참을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한 신자로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그 풍부한 가르침을 주고, 또 은혜가 된다. 이런 말씀입니다.
오늘도 그의 체험 가운데 하나를 30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0편 전체의 내용을 보면 그렇게 기분 좋은 내용만 가득 실린 그런 장이 아닙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그 하나님 앞에 노여움과 진노아래 있어본 경험도 이야기 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그래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경험도 또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 이 30편에 나오는 이 시인의 마음의 상태의 등락은 마음에 이렇게 기쁨으로 차고, 슬픔으로 떨어지고 하는 이 마음의 등락은 단순히 핍박을 받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매하게 고난을 받음으로 경험했던 그 등락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도 있었겠지만 또한 여기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노여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영혼의 어두움과 깊음 속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경험했던 그 거절감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이런 것들과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회복의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되었든 저렇게 되었든지 간에 시인은 여기에서 바꿔지는 것을 또한 경험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이 자기에게 헤하려고 하여 악을 행했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나이다. 고백하게 하셨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이 시인의 그 하나님 앞에서 진노와 하나님 앞에 불쾌감으로 인해서 어두움 속에 있고, 그리고 영혼이 슬픔과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는 그 때에 그런 장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런 축제적인 변화를 경험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일에 한 복판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렇게 이 다윗의 처지를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게 되면 항상 맑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부지런히 성화의 삶을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줍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서 화목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그런 고통, 결핍, 이런 것들에 의해서 깨트려질 수 없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신적인 평화입니다. 이런 신적인 평화의 평강을 많이 누리게 될 수록 우리의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휘둘리는 일들이 극히 적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가 되면 될 수록 우리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그 연합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이런 것은 모두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주님과 연합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고, 그런 고백이 필요할 때 영혼 깊은 곳에서 그런 고백을 터져 나오듯이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어느 한 순간에 그런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참으로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을 온전해지기 위해서 애쓰고,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깊이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살아오는 긴 시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이 땅의 수고를 마치고 주님이 오라고 부르실 때에 모두 두려워 떠는 그 어두운 죽음의 길을 휘장을 걷고 나면 찬란하게 내리비칠 영광스러운 임재의 빛을 믿으며 뚜벅 뚜벅 걸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주님과의 연합이 주는 유익이고, 그 연합은 성화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 없이는 이 땅에서 진정한 천국을 누릴 수 없고, 진정한 천국을 누림이 없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가 아무리 힘들고 가혹하게 여겨져도 그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혹하고 힘겹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가혹하다고 할지라도 죄 때문에 고생하고 고통 받는 날보다는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가 설교시간에 그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 너무 힘들어요.” “왜” 그러니까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평신도 생활을 하려니까 입술이 부르트더래요. 그러면서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그렇지만 목사님 죄 가운데서 고생하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 가운데 그렇게 고생하며 사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고생과 내세에 심판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참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 이 입이 부르트도록 살아요. 여기에 붙은 딱지가 하늘나라에서는 별로 변하는 것입니다. 허허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연합된 삶을 살면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시인 다윗이 이점에 있어서는 참 탁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아까 했던 그런 고백, “하나님이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런 유의 신앙의 고백을 참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연합 속에 탁월하게 살았지만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수 없거든요.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람을 보면서 배울 때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완전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같은 사람에게 배우라고 허락해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신학교 다닐 때 그 대학원 때 한참 공부해야 할 나이에 매일 매점에 가서 앉아서 빵이나 먹고, 그리고 만화집에도 가고, 만화집에 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면 만화집 가게 주인 할머니가 내 친구 엄마였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만화방에 자주 온다고, 제가 형벌 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형님, 나는 진짜 우리 교회 목사님 때문에 괴로워죽겠데” 담임 목사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아, 세상에 그렇게 설교하도고 밥 먹는 것을 보면 진짜 놀랍데요. 어떻게 그렇게 설교를 하고 밥을 먹고 사냐?” 나도 기가 막혀서 가만히 있었죠. 그랬더니 “세상에 말이죠. 그것도 목회라고 하냐?” 그래서 제가 “야, 너는 만화방에나 가지 마라” 그 얘기를 하려다가 또 거기에 친구들이 있으니 체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가만히 있었죠. 그 다음에 뭐냐면 “형님, 나 교회 좀 소개시켜줘” “왜” “내가 진짜 존경하며 배울 수 있는 목사님이 있으면 내가 교회에서 30만원 받는 것 말고 내가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벌어다가 그 목사님 주면서 배우고 싶어” 그 지점에 가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야” 그랬더니 “왜”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면 널 왜 전도사로 쓰겠냐?”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 사람에게 배워야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정말 옥에 티 같은 몇 개의 범죄도 없이 온전한 삶을 살았더라면 하나님이 안 보이고 아마 다윗밖에 안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연약함을 배웁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30편에서 이 시인의 상태는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노여움을 산 경험이 있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왜냐면 “노염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어두움이 오고, 원수들은 대적하기 위해서 일어섰고, 자기는 힘을 잃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말 가련한 자로서 그렇게 구박을 받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훌륭한 신앙의 인물이 이렇게 실족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노여움을 사고, 그 임재의 기쁨 앞에서 멀어진 때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얼마나 그런 때가 많겠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살아간 것이 자랑할 이력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그럴 때가 얼마나 많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그래서 두터워진 마음의 각질을 쓰다듬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떠한 은혜를 근심 중에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못 살았죠.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죠.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십자가 붙들고, 그리고 내가 주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설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붙들고, 마음을 쏟으며 그분의 은혜를 의지했다면 그렇게 두터운 먹구름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고 그리고 영혼이 슬픈 기색을 띠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처지에 있었죠. 여러분도 그런 처지에 있을 것입니다. 혹은 다윗보다 훨씬 좀 나아서 적극적인 범죄가 없이도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경제적인 고통과 세상에 대한 염려 속에서 마음 아파하며 거미줄 같은 신앙이 끊어지는 것 같은 그런 위기를 경험하고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우러러볼 기력도 잃어버린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려고 해도 죄가 잘 생각나지 않고, 그리고 자기를 연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련이라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그 연단하시는 그 마음이 참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런 식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지 간에 오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바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그 바꾸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만들고, 부인할 수 없이 내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내 인생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강력한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이야 다 그런 취미생활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은 옛날에는 제가 좋아하던 스포츠 가운데 하나가 야구였습니다. 역시 이 구기종목의 재미는 역전이었습니다.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몇 년도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만은 일본하고 감정이 참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 일 야구 전을 하는데 아마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 대 몇인지 하여튼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9회말 투아웃인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만 들어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자 한 사람이 들어가서 말루 홈런을 쳐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운동장을 훌렁 넘겨버렸습니다. 대한민국이 들썩들썩했습니다. 텔레비전이 몇 개가 깨졌답니다. 사람들이 너무 통쾌해 하는 것입니다. 몇 십 년 전이죠. 지금 나이든 감독들이 한참 뛰던 선수들이었으니까 20년이 넘었을 것입니다. 경제학자가 그 때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530억원의 경제적인 효과가 왔다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면서 아침에 나오면서 너도 나도 신문을 사는데 뭐 무슨 신문이든지 상관없이 “일본 눌렀다.” 시원하게 말루 홈런을 치고 들어와서 역전을 하고, 그리고 게임 끝난 광경을 거기에 적은 것입니다. 진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모두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더군다나 다른 나라도 아니고 그 나라를 이겼으니까 신나는 것이죠. 그것이 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에는 언제든지 역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번에 뒤집혀서 그래서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자리로 하나님이 우리를 옮기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주 놀라운 이 증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그다음에 뒤에 가면 뭐죠.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띠를 띠셨습니다.” 이것이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 시에서 대구법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대구법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 이 대구법의 문장을 써 내려가면 뭐가 재미있느냐면 한 줄만 읽으려고 했는데 한 단락을 읽게 되고, 한 단락을 읽으려고 했는데 한 페이지를 읽게 됩니다. 한 페이지를 읽으려고 하면 한 챕터를 읽게 되고, 한 챕터를 읽으려면 한권을 다 읽고 말아버립니다. 그래서 술 술 술 빠져들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끔 만들어버리는 그런 문학적 서술법입니다. 책 읽을 때 그렇죠. 여기에서 슬픔과 베옷이 짝입니다. 그래서 A.B A'B'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슬픔과 베옷이 같은 짝입니다. 그다음에 기쁨과 띠가 같은 짝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슬픔이 한편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슬픔이 그냥 슬픔이잖아요. 그런데 베옷으로 진전합니다. 베옷이 사망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사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경고가 나타날 때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 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금식 기도하잖아요. 그것입니다. 이것은 슬픔, 심화된 슬픔 내지는 죽음의 광경입니다. 기쁨은 다시 띠를 띠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이 띠를 띠는 것은 무엇입니까. 왕의 대관식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기쁜 날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사망과 말할 수 없는 생애 최고의 경사가 두 개가 함께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둘을 모두 경험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서 기도해야할 그런 처절한 정죄된 상태에까지 간적도 있었습니다. 혹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원수들의 압제와 고난으로 인해서 거의 죽을 것 같은 그 슬픈 자리로까지 갔습니다. 왜? 비록 그것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다윗이 언제나 믿음 충만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시에서 “여호와여 어디 계시나이까? 왜 숨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반문하고 있잖아요. 단순한 문학적 서술법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어떻게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주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 믿음의 부족에서 비롯된 미성숙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다윗의 심정은 그야말로 깊은 죽음과 방불할 그 비천한 고통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비천한 죽음의 방불한 고통의 처지에 그를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항상 그에게 다시 회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춤을 추도록 기쁘게 하시고, 그리고 왕의 대관식에 띠를 띠고 왕관을 쓰는 것 같은 그런 놀라운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에서 띠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 띠를 동임으로서 힘을 받게 됩니다. 진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힘이 어디에서 났는지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기쁨입니다. 신령한 기쁨이 있을 때에 힘이 무한이 솟습니다. 주님께 능력을 많이 받은 이라도 아무리 영적 능력이 많아도 마음이 슬픔과 어두움에 잠기면 그 사람보다는 차라리 영적 능력이 좀 모자라도 심령에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 사람들이 훨씬 더 활기차게 삶을 삽니다. 능력 받고 침체에 걸린 사람보다 능력이 좀 부족해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활기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시인이 그런 회복을 자주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의 그 막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신다.” 라고 노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구원이며 나의 노래시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상황이 어렵다.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환경도 이기지 못한 복음이 무슨 복음입니까? 어려운 환경에서 똑같이 낙심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똑같이 슬퍼하고, 가슴 아픈 상황에서 똑같이 좌절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기쁜 사람들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 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좀 이상해 보이게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아니 귀신이 들려도 표가 나는데 아니 성령 들린 사람들이 말이죠. 은혜가 넘치는 사람들이 말이죠. 노래할 이유가 있을 때에 노래하고, 춤출 이유가 있을 때 춤추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춤추고, 하나님이 변하게 하셔서 자기를 기쁨으로 띠 띠우게 만드셨습니다. 그 기쁨 속에서 무한한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안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러면서 그렇게 감사 속에서 삽니다. 언젠가 한번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 앞에 반은 원망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주님이 내 마음 속에 그렇게 말씀하셔요. 아주 또렷하게 주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너에게 안 준 것이 무엇이 있냐?” 그 때 정말 교회당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그 새벽에 울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나에게 안 준 것이 무엇인가?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까워서 안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말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가 비록 슬픔과 그리고 어두움 속에 있고, 심지어는 그 어두움과 슬픔의 원인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복음적인 용서의 과정을 걸쳐서 그런 슬픔의 베옷을 입고, 고통 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죽음과 방불한 베옷을 입은 상태에서 건져내셔서 기뻐하고 왕의 대관식, 혹은 잔치 자리의 신랑처럼 그렇게 하나님 기뻐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맥이 바로 그런 왕의 대관식, 혹은 뭔가 커다란 잔치가 있는 그 흥겨운 광경과 그 상복을 입고 죽음의 방불한 고통을 느끼는 그 두 가지 상황의 대비입니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닮은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건져내서 이쪽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바뀌는 것에 묘미가 있지 않습니까. 한번 뒤집어지는 그래서 정말 놀라운 그 때 그 야구하던 광경들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요. 그 운동장에는 내가 안 갔지만 야구장에서 딱 끝나고 나면 사람들이 출구로 확 밀립니다. 여러분 한번 가보시면 알지만 뭐 엄청나게 사람들이 밀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밟힐 정도입니다. 그리고 빨리 나가야지만 차를 타잖아요. 그러니까 우르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늦게 나가면 이제 막힐까봐 9회말 투 아웃입니다. 끝나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어나서 먼저 나가는 것입니다. 나가는데 갑자기 “와” 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다 뛰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역전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우리의 인생을 바꾸실 수 있다. 고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여태까지 계속 죄 가운데 살았다고 해서 금년에도 죄 가운데서 한 해를 보내리라고 그렇게 우리들이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통 받고, 계속해서 가난과 씨름하면서 부채에 시달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올해도 작년과 무슨 차이가 있으랴? 그러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죠?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 한복판에 오셔서 막판에 뒤집으셔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찬송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다윗에게 있어서 무엇이 이렇게 역전의 대 드라마를 가져왔는가? 무엇을 통해서 이런 역전의 대 드라마가 찾아왔는가? 8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 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그 다윗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는 깊은 어두움과 사망에 방불한 그 슬픔 속에서 다윗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느냐면 “나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서 사망 중에 피 흘리며 내려갔는데 그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내가 진토에 떨어진다면, 비참해 진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진토가 어떻게 주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비록 나의 죄와 나의 허물과 나의 부족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노여움을 받고, 그래서 그 노여움은 마치 평생인 것처럼 그렇게 가혹하게 그렇게 나에게 다가오고 평강을 잊어버리고 그리고 나는 지금 상가 집을 방불한 그런 슬픔 속에 그런 베옷을 입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노를 당하고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심판을 당하는 가운데 피를 흘리며 하나님께 심판을 당한들 그 피가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더러운 자로 여기시며 짓밟으셔서 진토 중에 하나로 나를 내 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당하겠지만 그렇게 진토가 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의 손으로 지은바 된 사람입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저를 권고하십니까. 권고하신다는 것은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고, 그리고 그 인간을 찾아오십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드높은 것을 시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 시인이 기도했지만 그 기도의 내용은 먼저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범죄하고 지금은 베옷을 입고 죽음과 방불한 고통 속에 있지만 이런 처지를 지속시키심으로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범죄하고 그리고 이렇게 슬픔 가운데 다닐지라도 여기에서 나를 건져주십시오. 라고 하는 그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생의 역전 대 드라마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천천히 갈 때에는 브레이크를 조금만 밟아도 차가 충분히 섭니다. 언덕길입니다. 내리받이인데 그냥 달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과속 카메라가 보입니다. 그 때 브레이크를 꽉 밟아도 삑 소리를 내면서 차는 계속 굴러갑니다. 우리가 환난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 안 합니까? 물론 전혀 안 하는 사람이 있죠. 그러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혼 좀 더 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갈 때까지 가 보자.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슨 갈 때까지 가보면 뭐해요. 정답이 다 나와 있는데 아니 자동차를 몰고 갈 때까지 가보자. 그리고 절벽을 향해서 달리면 부딪히는 것 밖에 다른 정답이 있습니까. 길이 없는데 무슨 갈 때까지 가보냐는 것입니까.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요. 누구든지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십니까? 좀 강력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역전의 대 드라마를 연출할만한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리막 비탈길을 들어섰어요. 내리막으로 그냥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지에서 방금 출발한 차처럼 살짝 브레이크를 밟아요. 그러면 그 브레이크가 듣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달리는 것이죠. 그런 정도가지고 안 됩니다. 오늘 이 시인이 진짜 베옷을 입고 상가 집과 같은 상황에서 슬픔에 잠겼다가 임금의 대관식과 같은 잔치 집에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런 처지로 대드라마를 연출할 때까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평생일 것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무엇으로 껐습니까? 일평생 계속될 것 같은 그 가혹한 하나님과의 단절을 무엇으로 극복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굳게 믿으면서 강력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인생길을 잘못 들어서서 비탈길로 내려 달려가고 있는데 그 가끔씩 한번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는 정도로 만족을 하면서 이 고통을 향해 내리달리는 내 인생의 열차가 서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인처럼 뜻을 세워야합니다. 다윗은 죄로도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죄로 소문난 사람이 아니라. 회개로 소문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왕관을 벗고, 그리고 왕관을 내려놓고 왕의 의복을 내려놓고, 그리고 생사를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처절한 몸부림치는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충분히 그를 내적으로 쇄신시키셔서 오히려 그 죄가 아니었더라면 도달할 수 없었을 것 같은 보다 더 완전한 성결함에 도달하도록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기 앞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인생의 이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 오는 모든 슬픔을 내버려두면 자신의 인생에 다가올 그 모든 파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이 기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처절한 집중을 위한 자기희생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값싼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의 태도를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세요. 그리고 그 뜻을 세우고는 하나님 앞에 다윗에게도 주셨던 이 역전의 대 드라마, 우리 지금 몇 주 동안 계속 보고 있죠. 그 고통 속에서 악한 무리들의 간교한 꾀에 의해서 수억만 해를 당하였으나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시니까 요셉이 그 풍랑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119편에서 시인이 견딜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니까 오히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혜와 명철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는 우리를 망가트릴 수가 없습니다. 망가뜨리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결코 원수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를 망가뜨리거나 우리를 파멸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원수,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어야합니다. 뜻을 세우세요.
제가 알고 있는 지체 하나도 영혼의 커다란 어두움과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아마 웬만하면 그 어두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권면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몸을 이끌고 밤마다 교회에 나와서 두 달 동안 매달리면서 철야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셨대요.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세우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우선 끝까지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뜻을 세우기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느껴질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뜻을 세우기만 해도이상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확신을 주시고,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생의 대역전 드라마가 전개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 그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런 용기가 없이 그냥 현실에 엎드려져서 모든 기쁨을 잊어버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삶은 하나님이 보이시기에 결국은 죄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노예가 되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까 부른 찬송 생각나죠. 죽음의 요단강 물결이 거칠게 흘러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면 그 죽음의 강물이 나를 삼킬 수 없습니다. 신화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역전의 대드라마가 펼쳐질 때 그 때 얼마나 우리가 기쁨입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야,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그것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나와 같은 어두움과 좌절 속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얼마나 다른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기대하는 인생이 바로 그런 인생입니다. 뜻을 세우고 그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나는 살고 싶습니다. 정말 환경에 져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나는 살고 싶습니다.”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세요. 그래서 바로 인간들이 모두 포기한 그 지점에서 여러분의 인생역전의 대드라마를 연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상처를 위로로 바꾸심Ⅰ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편31:19)
지난 시간에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상처를 위로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 다윗이 시를 썼는지 단언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 시가 씌어진 가능성이 있는 시기를 둘로 봅니다. 첫 째는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핍박을 받아서 도망 다니던 때에 쓰여 졌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에 그 결과로 인해서 압살롬의 반역을 받고 대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망명의 길을 오르던 그 어느 때쯤에 이 시가 쓰여 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료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같이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를 문학적으로 볼 때에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왜냐면 31편 시 전편을 읽으면서 여러분도 감지했겠지만 이것은 젊은이의 시라기 보다는 인생을 깊이 달관하고 단지 표피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서 영혼에 깊이 살 박히는 그런 뼈저린 고통까지 뭔가 이렇게 터득한 사람의 시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쓰여 졌든지 간에 어쨌든지 중요한 것은 이 시 속에서 주어지는 불변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하여튼 이 시인은 지금 사면 초과의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영적으로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지 않는 것 같은 커다란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것인지 혹은 너무나 커다란 고통 속에서 마음이 찢어진 나머지 하나님을 바라볼 여유가 없는 황망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우리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지 이 시인의 영혼의 상태는 아주 맑고 경건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고 생각과 정서 속에 약간의 혼란이 깃들여있는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는 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장면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그가 평소에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자기를 피하고, 그리고 자기를 상대해주지 않는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는 본문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시의 기록의 시대적인 상황을 후자에 놓고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왕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친구로 자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복종했겠죠. 그러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거기에 붙었고, 그리고 그들은 다윗을 이기기를 원했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다윗을 무찔러 이김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그들이 누리게 될 어떤 보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온전히 이 다윗을 사랑하고 깊이 친교 하였던 사람들이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거나, 떠나지 못했어도 본국에 남아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인 이 다윗의 환궁을 기도하였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기회주의자로 변했을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다윗 앞에 껌뻑 죽었을 많은 사람들이 기가 살았고, 그리고 반역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어느 편이든지 우세하게 승리를 거둔 편에 붙어볼 요량으로 기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서 다윗은 평소에 자기가 아끼던 많은 친구들과 자기가 아끼던 많은 부하들, 자기가 그렇게 마음 바쳐 사랑하던 백성들이 그렇게 대적의 편에 서거나 기회주의자의 편에 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윗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정황을 보면서 깊이 마음이 상하고 상처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환난을 많이 당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뜨겁고 친밀한 관계가 있으면 덜 힘듭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환난 가운데 처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해도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면 환난이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환난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끊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그런 것들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이 다윗이 한없는 고통을 격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다윗은 자기의 그런 침몰 속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변절하고 배신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반역자로 돌아선 광경을 보면서 맨발로 도망치는 그 슬픔보다는 훨씬 더 큰 관계에서 오는 그 고통스러운 상처들이 이 다윗에게 격렬한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정승 집에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붐벼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요? 정승이 개보다 높지만 죽음으로서 그 사람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승 집에 개가 죽어서 가서 슬피 울고 조의금이라도 좀 바치면 그러면 정승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어쩌면 고을 원님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것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비애였는데 다윗 역시 그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시대에 왕국이 강건하고 형통할 수 있었던 그 놀라운 비결을 더듬어볼 때에 물론 다윗은 말할 수 없이 경건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으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고, 범사에 하나님을 많이 의지한 사람이기는 했습니다. 만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위가 견고한 것이 결코 자신의 군사적인 영향이나 정치적인 힘, 인간적인 재능 이런데 있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아마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합니까. “나의 시대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것을 뼈저리게 고백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신문 보면 참 나라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원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 백성을 염려하면서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는 것이 정치인데 그런 것은 그만두고 좀 도와주는 것은 그만두고 불안하게 하지만 말고 각자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걱정스럽습니다. 마치 국회의사당이 유치원 같고 그 국회의원들이 유치원에 보낸 아이들 같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마음들을 좀 정치인들이 깊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한 나라의 견고함과 그리고 그 나라의 그 국권의 안정됨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진짜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서 많이 우리가 기도해야합니다. 다윗이 아무튼 이런 비애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오는 상처는 예전의 배를 곯고 도망을 다니던 때의 그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삶의 벼랑 끝에 서서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을 피해 다닐 때에 겪었던 그 원통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뼈저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처를 이 시인이 정말 깊이 경험하게 된 것이죠.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상처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우리의 죄, 우리의 모난 성품, 이런 것들 때문에 받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에 쉽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저들은 악인이며 내가 당하는 고난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고, 나의 마음에 이런 상처를 주는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을 것이다. 라고 획일적으로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경우가 우리의 허물, 우리가 뿌려놓은 죄, 그리고 우리의 모난 성품,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이죠.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는 물론 우리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도 악인의 하는 일은 항상 의롭게 사는 사람을 넘어뜨리고 그들을 멸시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없어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의하게 사는 사람은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는 것 없이 밉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이 주는 것이 밉거나 혹은 불쌍합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 악인은 원래 아무런 자기의 이해관계도 없이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종종 그런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나를 상대하는 그 이웃이 워낙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애매히 핍박하고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고, 혹은 믿음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내 모습이 그 사람의 눈에 심히 악하게 보이거나 못 마땅하게 보여서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도 우리는 상처를 받죠.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게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의 뿌려놓은 씨앗들이 우리에게 이런 인간관계의 파괴라고 하는 고통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미 다윗이 범 죄 하였을 때에 그 집안에서 칼이 그치지 아니할 것과 많은 환난이 있을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즉시 예고되었습니다. 그 예언을 따라서 다윗의 집안에는 살인이 그칠 날이 없었고, 말년에 다윗은 그야말로 마음 둘 곳 없는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모두 자신이 뿌린 죄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겸비해져서 그래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전에 하나님 앞에 뿌려놓은 죄의 씨앗들이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야합니다.
죄는 이처럼 관계를 파괴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죄가 들어왔을 때 그 죄가 한 일을 생각해보시며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죄가 들어오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죠. 그리고 그다음에 아담과 하와인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선악과를 따먹고 그렇게 하기까지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어떤 갈등이 생길만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각자 범죄 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깨졌습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산산이 부서져서 이제는 그 자연의 재앙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까지도 파괴된 것입니다. 죄가 하는 일 자체가 바로 이렇게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죄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다듬어지지 못한 성품들이 이러한 커다란 관계의 파괴를 의외로 불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중 고등학교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다른 공부는 전혀 안 하고 한문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3밖에 안 되었는데 한문을 고등학교 것 까지 공부해서 줄줄 꾀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였느냐면 한문 선생님이 한번 칭찬해준 것입니다. “야, 너는 어쩌면 그렇게 한문을 잘하냐?” 그 소리를 한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딱 하나 있습니다. 중학교2학년 때 글라스에 들어가서 들어가기 전에 몇 달 연습을 하고 들어갔죠. 그래서 이제 필체를 배운다고 그 때에는 그렇게 쓰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는데 펜하고 잉크하고 가지고 가서 네 줄 그려진 영어 노트에다 펜으로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썼습니다. 일년 내내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영어 선생님이 저를 보더니 굉장히 무서운 선생님이었습니다. 나를 보더니 둘 째 시간쯤 되었는데 “야, 너 정말 영어 글씨 예쁘게 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영어를 열심히 했고, 그 후에 잠깐 사춘기 때에 공부를 게을리 하기는 했지만 그 후에 고등학교 때 다시 그 선생님을 만나서 제 마음이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생의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고 싶어도 영어 공부가 재미있어서 죽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공부하고 3학년 때는 그 밤늦게 퇴근하는 선생님을 붙들고 가로등 불빛 추운 겨울에 거기에 세워놓고 뉴스위크지를 들이대고 거기에다 해석을 해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선생님을 괴롭혔습니다.
조그마한 칭찬, 조그마한 인정이 메아리가 되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입니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총망 되던 글재주가 있는 학생이었는데 선생이 글을 쓴 것을 보더니 “이것도 글이라고 썼느냐? 나 같으면 연필을 잘라버리겠다.” 그리고 좋은 재능을 섞였다가 나중에 다시 그 재능을 발굴 받게 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한 마디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스승의 날이 되면 저는 그 선생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올해는 한번 살아계시면 아마 꾀 연세가 많으시겠죠. 살아계실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계시면 한 아무리 젊으셔도 85세는 되셨을 것 같습니다. 90세쯤 되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음먹고 이번 스승의 날에는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오래도록 남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적극적으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모난 성품,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그런 상처를 줄 때, 그런 것들이 관계의 파괴가 되어서 우리에게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것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롱펠로우라는 시인도 그런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그대로 외울 수는 없지만 대충 내용이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 화살 하나 쏘아 보냈다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화살이 고목에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네. 오래전에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노래 한마디 불러 보냈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그 노래가 내 친구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네.”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 우리가 모난 성품, 이런 것들이 관계의 파괴가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어떤 연유로 왔든지 간에 그것들은 하나의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 상처가 자신이 정말 믿었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너무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그 고통은 정말 죽음의 고통보다도 더 치열하게 잔인하도록 우리 인간의 가슴에 상처를 남깁니다. 이 시인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상처를 높은 수준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돌아보아도 이제는 왕위도 없고, 법궤도 없고, 황망히 망명길을 떠나고 자기 밑에서 녹을 받아먹고 지위를 누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일어났고, 자나 깨나 자기가 사랑하던 양떼와 같은 백성들이 기회주의자가 되어서 다윗을 섬길까, 압살롬을 섬길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을 때에 이 진실한 사람, 다윗의 마음이 커다란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뼈저리게 가슴에 다가와서 후벼 파는 그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아마 이 시인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 이렇게 깊이 상처를 받게 되면 그는 반드시 영적인 영혼의 상태에 영향을 미칠까요? 안 미칠까요? 그러니까 영혼과 가장 밀접하게 인접되어 있는 기능이 뭐라고 했죠? 아, 여러분들은 참 대단합니다. 그래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하나님이 마음을 지키라고 하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영혼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영혼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이 수 천 명이 가득 모여 있는데 진짜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정말 지옥에 가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그런 악 날 한 죄인들이 있는데 거기에 내가 들어가는 즉시 내 영혼이 죄에 감염됩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전에 나에게 한번 물어보는데 성경에 보니까 사단이 가롯 유다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다. 그렇게 나왔는데 그러면 가롯 유다도 피해자가 아닙니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뭐냐면 성령님의 은혜도 준비된 마음을 통하여 들어가고, 사단의 악한 역사도 준비된 마음을 통하여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될 것 같으면 그러면 인간이 악에 대해서 책임질 이유가 없죠. 악의 원조인 사단이 모두 책임을 져야지. 우리 모두 피해자지 그렇잖아요. 그랬더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라. 돌이키라. 마음을 지키라. 악에서 따나라. 그러셨겠습니까? 사단만 패면 되시지. 우리 모두 피해자인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마음이 이렇게 산산이 찢어질 정도로 급격하게 상처를 받았으니까 영혼에 영향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당연히 오죠. 그래서 영혼이 시편에서 다윗의 고백 중에서 즐겨 나오는 것이 뭐냐면 “내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이미 벌써 마음에 들어온 이런 고통의 영향이 영혼에까지 미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물론 때로는 아주 강력한 고통이 그의 육신을 에워쌓는데도 그의 영혼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것은 뭐냐면 강한 위험이 외부적으로 도사리고 있는데 그 위험에서 오는 고통이 이 마음에 공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으니까. 우리도 신앙생활 하다 보면 그럴 때 있죠. 어떤 때 그렇잖아요. “야, 지금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을 때가 아닌데.” 뭐 환난이 겹치고 사니 죽니 하는 진짜 이판사판 공사판인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 스스로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결국 뭐냐면 외부적인 환난이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시인은 마음에 강력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의 편이라고 하는 그의 확신도 다소간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는 그럴 정도로 강력한 상처를 마음속에 입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마 그중에는 비록 자신의 죄를 인해서 섭리 적으로 자신이 환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고 깊이 인정할 수 있었겠지만 그 속에서 뒤따라오는 백성들의 수많은 비난, 그것에 대해서는 다윗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도망갔을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쫓아오면서 흙을 던지면서 욕하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사울의 집을 다 멸망시키고 피를 흘린 너 이놈, 하나님이 너희들을 꼭 그렇게 갚아주시면 좋겠다.” 사실은 그것은 정말 다윗은 추호도 아니었거든요. 다윗이 언제 왕이 되겠다고 했으면 다윗이 언제 사울을 멸망시키고 자기가 피를 흘리고 그 보좌를 차지하겠다고 혁명을 일으키려고 했겠습니까. 자기는 그냥 짐승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었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왕이 되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러면 한 번 해봐라.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울을 내가 버렸고, 그리고 내가 너를 세웠다. 이미 벌써 이 다윗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그 성령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임해서 악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악을 행함으로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그 악인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진실인데 그런 비난을 받을 때에 이 다윗의 마음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깊이 생각해보세요.
저는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노할 정도로 그렇게 억울한 비난을 받고 그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사람이 하도 약하고 좀 질그릇 같으니까 하나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여러분 같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가당치도 않다고 웃으시는데.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 보면 험한 사람을 많이 만나더라고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 한 15년 안에 두 번 정도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은 정말 너무 억울해요. 너무 근거가 없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난을 받고 그날 저녁에 들어왔거든요. 그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은 비난이 아니라. 정면으로 나를 찾아와서 비난하는데 이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이미 단정을 했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평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내 이익을 위해서 무엇을 하다가 그런 비난을 받았으면 내가 좀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다. 그러겠는데 아무 이익이 개입된 것도 없고, 나는 그냥 봉사했을 뿐인데 어떻게 나를 정면에 놓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을까? 너무 억울하고 한편으로 너무 분하고 그래요. 잊어보려고 애를 써도 잠이 안 와요. 기도를 해도 이게 사라지지를 않았습니다. 그 때에 새벽쯤 되어서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사람이 나를 때린 것도 아니고,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듣기 싫은 소리 한번 퍼붓고 그냥 간 것이거든요. 그런데 손상된 것은 내 명예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상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앞에 자존심이 상한 그런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의 명예가 근거 없이 비난을 받았다는 이 이유 때문에 이 자존감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그 사람이 미워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잤는데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되는 광경도 많이 목격했는데 언제 한번이라도 이 인간들에 의해서 혹은 직접적으로 나에 의해서 실추되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이렇게 잠 못 이루면서 이렇게 괴로워 해본 적이 있었는가? 하고 생각해보니까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너 자신의 사람이다. 너 자신의 노예다. 그리고 회개를 한일이 있습니다. 회개를 하고나니까 또 그런 마음도 다 사라져버리더라고요. 그런데 그런데서 오는 근거 없는 비난도 섞여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이 다윗의 말할 수 없는 고통, 다윗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는 사건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뭐냐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은 그 정치적인 품성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중의 하나였습니다. 다윗이 나라를 일으킬 때에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고 돈으로 매수해서 자기 당으로 끌어들여서 그 나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빚진 자, 억울한 자, 병신, 원한 맺힌 자, 슬픈 자. 이런 사람들이 모두 버림받은 사람들이 다윗의 이 사랑의 품에 하나씩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이 그런 삶을 살았잖아요. 동병상년의 아픔으로 그 학대받고 버림받은 백성들을 끌어안은 것이 다윗의 정권의 모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모인 그 나라를 통해서 아주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제가 열린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깊이 도전되었던 것이 둘이었는데 바로 그 사건하고, 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응답이라도 되듯이 교회를 해서 교인들이 모이는데 뭐 여기도 그런 분들이 상당히 몇 명 남았습니다. 만은 어쩌면 그렇게 인생 막장, 벼랑 끝에 간사람, 부자도 와요. 그런데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지금은 완전히 망한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와요. 그런데 전직. 그런 사람들이 다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한편으로 은혜도 사모하지만 또 한편으로 거칠기도 하겠습니까. 상처도 많고, 그럴 때마다 항상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 이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이 잘 모일 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아마 강한 교회를 만드실 것이다.” 다윗이 얼마나 뼈저린 상처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결국은 다윗이 뭐라고 고백을 하느냐면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이 극한 고통의 상처를 그냥 끌어안고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뭔가 바뀌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바뀌었어요. 위로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저를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로다.” 다윗이 그 앞에서 경험했던 그 피비린내 나는 상처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큰 위로를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되고 싶으시죠. 그렇죠. 그래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상처를 계속 부여잡고 있으면 아무리 자기가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그 상처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망가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상처를 바꾸어서 하나님이 크신 위로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컸는지 말하자면 문학적으로 그 하나님께 대해서 반문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탄하는 것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그러니까 다윗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한 위로의 은혜가 아니라. 일생에 있어서 정말 경험해보지 못했던 예외적이고 각별한 은혜를 영혼 깊이 경험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은혜의 위로 때문에 그 상처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러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습니까? 그 하나님의 무한하고 선하시고, 자비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이 시인이 여기에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뼈저린 상처 속에서 그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을까? 이것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못했더라면 아마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겠는가? 오늘 성경이 두 가지 사실을 점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우선 첫 째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 이것은 자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자기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가 그 보편적인 진리에 해당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그렇게 가졌더니 하나님이 자기를 언약을 따라서 자기를 그렇게 대우해주신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첫 째가 주를 두려워하는 자, 했습니다. 정말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상처를 받았는데 대부분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이글거리고 타오르기 시작합니까? 그렇죠.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죽고, 나도 죽고, 그래서 자신의 상처가 조금일 경우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방어하지만 상처가 워낙 클 때에는 자신의 행복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미움은 곧 살인이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살인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대적입니다. 왜?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남겨둔 사람인데 없었으면 하고 바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고통속에서 인간은 당연히 상처를 받게 되면 그 상처가 극단적으로 아프게 되면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데 다윗은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큰 섭리 속에서 보면 자기가 이런 상황을 당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그 장엄한 믿음의 뿌리였습니다. 요셉에게서도 이런 고백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을 형들이 모두 와서 무릎을 꿇고 울고불고, 용서해달라고 구걸할 그 때에 비로소 “아하, 당신들은 나를 해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이 이제야 깨닫고 나서 보니까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구나.” 그런 결론이 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살면서 이미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형들은 나를 해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행행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악을 반드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떤 선으로 바꾸실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믿음이 희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자라는 동안에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가서 썩으면서도 그 보디발의 아내를 고자질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섭리는 도도하게 흘러가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한 우리들이 그것을 뒤바꿔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시리지 않게 하고 그 섭리 속에서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가게 만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원수들이 고대를 들고 발뒤꿈치를 들고 자기를 박해하고, 사랑하던 자들이 칼을 자기 목에 겨누고 아꼈던 백성들이 기회주의자가 되었을 때에도 다윗이 그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오느냐면 압살롬이 쳐들어올 때 도망을 가잖아요. 그 때에 법궤를 가지고 가자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법궤는 왕권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싫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주께서 혹시 권고하시면 내가 다시 와서 뵈오리라.” 그러니까 자신에게 당한 이 고통스러운 일이 못된 놈, 압살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당하게 된 고통이라고 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다윗이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되는 이런 연합을 경험하는 기회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그것을 좀더 점층법 적으로 해석하면서 뭐라고 묘사하느냐면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상처를 받을 때에 그렇게 피신했던 것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인간들은 어떻게 합니까? 칼을 빼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은 것만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대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다음에 인간이 경험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악순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라맥이라는 사람이 다윗의 후손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아다와 신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맥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 (긁힌 것입니다.)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 벌이 칠 배 이지만 라맥을 위하여 벌이 칠십칠 배 이도다.” 그러니까 뭐냐면 요즘말로 표현하면 “건들면 죽어. 나 폭발해.” 그것입니다. “손끝만 건드려도 나는 죽일거야.” 그래서 누가 실수해서 살짝 긁혔는데 자기는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무엇을 잘못해서 자기를 조금 상하게 했는데 자기는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벌을 받고 도망을 갈 때에 사람을 만나면 자기는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을 죽이면 벌이 칠 배다. 그랬더니 자기는 칠십칠 배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인을 해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갚는다고 하시지만 라맥을 위해서는 내가 집적 갚는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증오심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이는 절대로 자기가 상처를 받을 때에 그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지 않습니다. 인생 앞에서 맞대결하고 끝장을 보지 “건드리면 죽어. 나는 남은 것이라고는 악 밖에 없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인생 앞에서 주께 피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끔찍한 상처를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위로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한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방패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애들이 어렸을 때 왜 그렇게 많이 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는 놀 것이 별로 없으니까 그냥 싸우는 것이죠. 단체로 놀 때는 패싸움 하고 동네끼리 놀 때에는 동네끼리 싸우고 말이죠. 그런데 막 싸우다가 얻어맞았습니다. 그리도 그 코피를 닦으면서 이를 악물고 싸우다가 누가 나타나면 약해지느냐면 엄마가 나타나면 열심히 싸우다가 확 돌아서서 “엄마,” 그러면서 울고 엄마의 치마폭에 쌓이죠. 그리고 이제 이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엄마의 치마폭이 안전하니까 바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피하는 마음이 그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비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입니다. 인생 앞에서 맞서서 싸우고 그들만큼 악해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인생들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환난과 상처를 통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내 관계를 돌아보리라. 그리고 때로는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안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다윗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신이 아꼈던 백성들로부터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상처를 받았을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인간을 원망하고 주께 피하는 대신 사람을 대적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더라면 아마 삼류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다가 그 원한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사람으로부터 받는 그 말할 수 없는 그 고통, 사람으로부터 받는 그 말할 수 없는 상처가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인생의 위로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시간 깊이 생각하고 상처받은 가운데 있다면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고통 받고 있다면 버려야합니다. 용서하고 제가 잘 하는 말로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이 있으면 복수를 하세요. 사랑으로 복수하세요. 그래서 갚아버리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그 사람도 살고, 나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요. 왜? 그렇게 자신에게 준 상처를 사랑으로 복수한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으면 딱 칼을 겨누듯이 꽃다발을 겨누어서 갖다 주세요. 사랑으로 복수하세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께 피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다 버려야합니다. 가슴에 남은 피 묻은 칼과 하나님과의 평화는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위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살 것입니까? 아니면 상처에 발목이 잡힌 채 하나님 앞에 범 죄 한 자로 남을 것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7. 상처를 위로로 바꾸심Ⅱ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편31:20)
이제 여기에서 시인은 앞에서 언급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배반하고, 혹은 자기를 미워하고, 상처를 주려는 사람들에게로부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그래서 상처를 위로의 기회로 바꾸셨는지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상세하게 그림처럼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몇 개의 동사를 나열하면서 하나님이 상처에서 위로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역사를 진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선 첫 째로 오늘 시인이 고백하는 바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감추셔서 면하게 하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 째로 하나님께서 하신 시인에게 베푸신 역사는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신 역사였습니다. 은밀한 곳에 시인을 하나님이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저희”라고 하는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주를 두려워하고 그리고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품이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경험은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편적으로 신앙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왜냐면 자신이 그 사람 인생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어도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훌륭하게 인생에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숨시사.”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처를 받거나 대적들에게 곤란을 당할 때에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다 때려 부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놀라운 증거를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시기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행하시기도 합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적군들이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도 하시고, 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가지고 여리고 성을 돌았더니 여리고 성이 그냥 무너져 버렸습니다. 폭약하나 설치하지 않고 성벽하나 흔들지 않았는데도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결국 발각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찾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는 그들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죽이지 않으시고, 라합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의 집에 숨겨지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역사해주셔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때는 이런 방법으로 저런 때는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다양하게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진정으로 의뢰할 바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양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믿음이 모세만큼 못했나요? 또 다윗이 모세보다 하나님을 덜 의지했습니까? 신령한 은혜의 세계보기를 다윗이 모세만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지은 시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운 인식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분명히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고 사울의 일당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했잖아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원수들을 멸해달라고 수없이 시편에서 기도했잖아요. 그러면 모세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애굽땅에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가 올라오고, 악질과 독종이 번지고, 급기야는 불 우박이 떨어지면서 그러면서 재앙이 일어나고 불비가 내리고, 그다음에 애굽의 모든 초 태생들이 죽고 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버리신 사울인데 하나님이 그가 있는 궁에 불비를 내려서 모조리 태워버리면 어때요. 마치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외과 수술적인 폭탄 공격으로 적군들의 진지를 도려내듯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렇게 안 하시죠. 그 집요하게 따라오게 만드시죠. 수시로 곤경에 처하게 하시고, 그리고 수시로 위기를 만나게 하셔서 가까스로 도망치게 하시고, 그런데 결국은 다윗을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까? 왜? 하나님이 숨기셨으니까.
그러면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숨기시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만나게 된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불비를 내리셔서 사울의 궁을 다 불살라버리고 그 집안을 불태워버렸더라면 만났을 하나님의 은혜보다 적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것은 뭐든지 좋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보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핍박도요? 그렇죠. 환난도요? 그럼. 고난도요? 그럼. 축복도요? 그야 물론이지.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은 다 나쁩니다. 환난도요? 그럼. 축복도요? 그럼.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것은 축복 같아보여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축복이 아닙니다. 악인의 형통함이 좋은 것입니까.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은밀한 곳이라고 하는 것은 발각되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숨기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군대 용어로 “은폐” 라는 말과 “엄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폐”는 뭐냐면 총알이 막 날아와도 자기가 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은신처에 숨는 것을 엄폐라고 합니다. 모래주머니 뒤에 숨었다든지, 바위 아래 숨었다든지. 깊게 푹 페인 참호 속에 들어가 버렸다든지. 이것은 엄폐입니다. 은폐는 뭐냐면 총알이 날아와서 맞으면 죽어요. 그러나 발견할 수가 없어요. 가시덤불 같은데 숨어있어요. 그러면 총을 쏘면 맞지 그러나 찾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이 시인을 그렇게 보호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도망을 다닐 때에 다윗이 사울과 굴에서 마주쳤습니다. 진짜 간발의 차이 아닙니까. 그것 죽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살려내시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 악인의 손에서 자기를 놀랍게 은밀한 곳에 하나님이 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악인의 궤계로 말미암는 환난과 이 시련을 피할 수 있도록 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상처 받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밀한 곳에 자기를 숨기시는 과정을 통해서 악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오히려 위로를 받는 기회로 하나님이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어찌 그리 큰지요.”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에 많이 시달려요. 특별히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 그리고 사랑 받아야할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받는 상처, 나는 많이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사랑에 대한 메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칼과 창이 되어서 돌아올 때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찔리거나 상처받는 육신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있는 깊은 고통을 경험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피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밀한 곳에 우리를 감추시고, 숨기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원수들이 찾아내지 못하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오히려 그 속에서 우리가 받은 많은 상처들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위로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시인이 경험한 것은 그 악인들이 의로운 사람을 해하려고 할 때에 단순하고 순진한 방법으로 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치밀한 꾀와 그리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교묘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의로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살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기는 했지만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주님이 다윗을 보매 그가 내 마음에 합하다. 고 말씀하셨을 때 그 때에 만약에 다윗 속에 간사한 꾀나 거짓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다윗 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받은 인상은 그것입니다. 큰 능력, 이런 것보다도 다윗에게서 받은 인상은 뭐냐면 그 진실함, 왕이 되어도 변하지 않은 그 진실함, 그리고 그 겸비함, 그런 것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뭐냐면 사랑은 인격에 깊이 배인 사랑은 성화와 정말 비례합니다. 혹은 소망이나 믿음은 성화와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격적으로 미성숙해도 어느 한 순간에 강력한 소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수 있고요. 물론 사랑에도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커다란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인격 안에 깊이 배인 이 사랑은 이 성화되어 가면서 점점 그 사람의 성품이 뼈 속까지 그 사랑이라는 성품이 스며들어서 그래서 자신이 온전해져 가는 만큼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어떤 충동 같은 것에 의해서 일어나는 어떤 격렬한 사랑의 감정 말고, 인격 안에 성화의 흔적으로 깊이 자리 잡은 이 인격화된 사랑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간사함이 없고, 진실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실한 사람들의 것이지 이렇게 사랑이 잔재주와 간교, 그리고 간사한 꾀 이런 것들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는 그런 덕목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격화된 사람은 항상 순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인격으로 가득 찬 사람이 어리석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을 때 모세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비난 받을 때에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리석었습니까. 어리석은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우유부단했습니까? 우유부단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했습니다. 사랑의 인격이 있었습니다. 악인은 그런 사랑이 마음에 없고, 그리고 잔꾀와 술수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도 가만히 보면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지혜롭고 똑똑해도 근본적으로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사악하거나 잔꾀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올곧습니다. 사랑은 그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유명한 시편 1편에서 다윗이라고 믿어지는 그 시의 저자가 무엇이라고 노래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거기에 나오는 그 꾀가 “예차” 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의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악인이 가지고 있는 의견과 서로 나누면서 거기로부터 지혜를 공급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의논하면 악인의 그 꾀를 빌어서 지혜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잔꾀가 아니라. 무엇과 의논하며 사는 사람입니까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살면서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원대한 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의 꾀에 있어서 이 사람만큼 악인들만큼 훌륭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결국 긴 인생을 산 것을 보면 다윗은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사울을 비롯해서 그 수하의 배신자들 보다 훨씬 지혜롭게 살았고, 결국은 그들을 이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지혜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나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놀라운 지혜는 정말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지혜는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면 악인들이 악을 도모하기 위해서 꾀를 짜낸 그런 방법으로 꾀를 짜낸 것이 아니라. 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양분을 삼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사는 가운데 얻게 된 전적인 지혜였습니다. 하늘의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로 살아갔기 때문에 이 악한 사람들의 꾀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벗어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형통할 때에든지 혹은 환난을 만날 때에든지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포기하고 인간의 잔머리고 자신의 인생의 상황을 극복해 가려고 하기만 하면 하늘의 지혜는 막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살아가면서 잔머리 많이 굴리는 사람들 중에 깊은 기도의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없죠. 왜냐면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데 이미 마음이 자신의 잔재주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차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화가 안 됩니다. 그리고 잠시는 자기가 번성하는 것 같습니다. 잔재주로 사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안 하십니다. 언젠가는 넘어져요. 지금 잘 나가면 나중에 크게 넘어집니다. 왜냐면 자꾸 올라가잖아요. 1층만 올라가고 떨어지면 다리만 부러지면 되는데 10층 올라간 다음에 떨어지면 묵사발이 됩니다.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문제는 반드시 떨어지는데 언제 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늦게 떨어지면 늦게 떨어질수록 불리합니다. 높이 올라간 다음에 떨어지니까.
그것 때문에 일생을 고달프게 산 여러분들의 선배가 있죠. 야곱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로 앞에 갔을 때 “내 나이가 130세이고 조상의 수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왜. 하나님이 에서 말고 야곱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복 주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처럼 그렇게 “아멘”할 믿음이 그 사람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고생을 하면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를 단단히, 단단히 깎으셨는데 그 깎는 과정이 뭐냐면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네. 그 과정이었습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인이 바로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악한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공격할 때, 그 악인의 수많은 간사한 꽤 그것을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순정한 삶을 살아온 이 다윗에게 있어서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꾀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반란 아닙니까. 압살롬은 아주 머리가 좋은 자식이었습니다. 벌써 그 아버지를 반역하고 모반하고 아버지를 내 쫓고 자기가 그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3년 내지 4년 전부터 면밀 주도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뭐냐면 아버지의 측근에 있는 유력한 장군들과 신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아무리 그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도 백성들의 민심이 자기를 따라주지 않으면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을 만나요. 그리고 거기에 왕자가 거기에 나와 있으니까 얼마나 감지덕지겠습니까. 그 왕자가 아주 자비롭게 “뭐 내가 좀 도와줄 것 없나?” 사정을 다 이야기 하면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이 어디 있나?” 그러면서 편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한번만 그렇게 하면 이렇게 확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빼앗으면서 그러면서 한편으로 무기를 착실하게 모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일을 자기 아들이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왕위의 욕심도 없는 사람이었고, 그러니까 차곡차곡 준비되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확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면밀 주도하게 구태타가 계획되어 있으니까 다윗은 졸지에 당한 일이 되었고, 그리고 그는 버선발로 도망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악인의 꾀가 철저하게 다윗을 이겼죠. 그래서 그 승리가 영원했습니까? 아니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이 시를 다윗이 썼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고라의 자손이 지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지 같은 시기에 같은 상황에서 지어진 시입니다. 악인의 그 꾀를 인하여서 다윗은 침몰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의 과정을 통해서 이 시험이 그 악인의 꾀에 삼킨바 되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망하지 않고 벗어나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그 망명 생활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할 그 놀라운 필요를 이 다윗이 뼈저리게 느끼면서 오히려 이 하나님을 향한 의뢰의 마음들이 놀랍도록 고향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악인의 꾀가 잠시는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인의 꾀를 영영 이기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꾀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악인의 그 사악한 꾀를 사악하게 대응하지 아니하고 순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신앙 안에 살 때에는 악하고 사악한 사람을 만나도 그래서 우리가 상처를 많이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런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어떤 마음이 되느냐면 내가 이 세상의 아들들처럼 궤휼을 행하였을 것이다. 시편 73편의 기자처럼 “에이 씨. 너희들이 그렇게 나가면 나도 한번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접고 악인의 꾀를 따라서 자신도 대응하죠. 그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절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야곱과 요셉을 생각해보면 그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인데 어쩌면 그렇게 다릅니까. 아버지하고는 정 반대잖아요. 아버지는 살 살살 이렇게 산 사람입니다. 아들은 ”주여“ 그리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을 많은 악한 사람들이 해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은 그 해하려고 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요셉을 축복하시고 높이시는 훌륭한 방편으로 사용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올라가다 뚝 떨어져서 다시 시작하고, 또 올라가다 뚝 떨어져서 다시 시작하고,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는데 야곱은 동장도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교하는 자체가 우습지만 어쨌든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에 후에 많이 성화되면서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말년에 자녀들을 축복할 때쯤 되어서는 이제 세상의 모든 환난과 시련을 다 겪은 후에 이 야곱의 마음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신앙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믿음의 자식들을 축복해주는 거목과 같은 신앙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잔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가난했으니까 학교 등록금이 45만원인데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이 7만원입니다. 육 개월을 모으면 등록금에서 한 3만원이 모자랍니다.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지금도 아직 안 죽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매 학기마다 시험 보는 것이 생사를 건 투쟁입니다. 왜냐면 이제 현실적으로 장학금을 못 타면 어디 가서 빚은 얻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전도사에게 누가 돈을 꿔주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시험만 끝나고 나면 항상 1주일씩 앓았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봤거든요. 그래서 이제 등록금을 얼마를 내야 하나 하고 고심을 했는데 교무처에 있는 과장님이 계셨는데 저에게 개인적으로 우호적으로 대해주셨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은 목사님이셨죠. 그래서 이제 성적표가 나오기 한 주 전에 항상 내려가서 한번 물어보죠. “제 성적이 얼마나 나왔습니까?” 그러면 어떤 때는 안 가르쳐주고 어떤 때는 가르쳐줍니다. 가르쳐주는데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뭐냐면 점수는 학년에서 최고 점수가 나왔는데 장학금은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어느 과목이 있는데 교수 한 분이 79점을 주었데요. 그런데 80점 이하가 한 과목이라도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말이지 75점이면 75점이고 80점이면 80점이지 79점이 뭐냐? 그것도 객관식 시험도 아니고 주관식 시험에서 말이죠. 그렇게 그 교수님에게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이야기가 가서 1점이니까 좀 고쳐달라고 해라고 성적 정정기간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래야지. 뭐 그렇게 하고라도 돈을 받아야지. 그리고 이제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찾아갈 날인데 새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1점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뭐 어렸을 일이죠. 이틀 인가를 기도를 했는데 내가 가서 10점을 올려달라면 도둑놈이다. 그러나 79점인데 80점으로 올려 달라 그러면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드느냐면 그러면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는데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에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번개처럼 머리에 스쳐가는 것이 뭐냐면 이 1점을 깍은 것은 교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올려달라고 하면 물론 올려주죠. 그렇지만 그게 하나님이 그렇게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것을 그렇게 하셔서 나를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니까 이것은 등록금 내고 안 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회개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내가 얼마나 야곱처럼 잔머리로 살아오는데 익숙해졌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가지고 가서 오히려 내 마음이 자기가 공부 못했으니까 그 점수를 받은 것이지 아니 80점쯤 맞을 것을 왜 교수가 79점을 주었을까? 그랬지만 그 교수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95점쯤 맞을 만큼 공부를 잘 했으면 왜 79점을 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얼마나 인간의 잔꾀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장학금을 포기하고 어떻게 돈을 해 놓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해 놓았으니까. 꼭 한번 등록금을 모두 10원도 보조를 못 받고 전액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등록금을 내고 오는 길에 제가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그러나 그 뼈저리게 낸 등록금보다도 더 큰 교훈을 하나님 앞에 받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잔꾀로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제가 얼마나 요긴하게 써먹었는지 아십니까. 왜냐면 교수가 되었는데 그 교수하고 결국은 같이 교수생활 했습니다. 그 얘기는 내가 안 했죠. 창피해서. 학생들이 나 같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줄지어 학기 끝나면 오는 것입니다. “교수님 5점만 올려주십시오. 우리 아내가 방직 공장에 다닙니다. 교수님이 5점 올려주시면 장학금을 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사람에게만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마다 다니면서 다 그래요. 제가 올려 줬겠습니까? 안 올려줬겠습니까? 그 때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내가 옛날에 그 1점을 놓고 그리고 쭉 얘기를 하면 학생들이 올 때에는 돈 생각하고 왔다가 갈 때에는 은혜를 받고 돌아가요. 그래서 나중에 생각한 것입니다. ‘아, 물론 그 때에 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그랬지만 그 과목을 실수했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써먹으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구나. 그 때에 만야 내가 가서 1점 올려주십시오. 그래서 받았더라면 그 학생들에게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힘이 납니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악인의 꾀에 밀리는 것 같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재는 역경에 처하는 것 같고 믿음대로 살면 내가 뒤떨어지는 것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가장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면 그것으로서 승부는 끝입니다. 그것이 오늘 당장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결판이 안 나지만 인생은 끝까지 달려봐야 아는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이 웃는 사람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자기를 해하기 위해서 수많은 꾀를 동원했지만 그러나 믿음대로 사니까 하나님이 그 꾀 때문에 그 세상적인 꾀가 이 시인에게 모자란다는 이유 때문에 이 시인을 하나님이 상처받고 곤경에 처하게끔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잠기 지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이 거기에서 받은 상처와 위기를 바꾸셔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것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다윗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시인이 노래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설의 다툼” 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비난과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한 음모와 모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이 세상에 대해서 너무 잘 모릅니다. 옛날에 신학교에서 제가 잘 알던 교수님이 있었는데 학교에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당신이 데리고 있던 직원이 무엇 때문인지 올바르지 않는 부정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이제 은혜로운 방법으로 학교를 내 보냈습니다. 퇴직금을 줘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퇴직금을 경리 처에서 꺼내서 퇴직금을 주면서 ‘그렇게 살지 마라.’ 그리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영수증을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영수증을 안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꽤 큰 돈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는데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죽어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수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인데 눈을 동그랗게 뜨시면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정말 신앙이 사라지고 나니까 인간이 그렇게 악할 수가 없고,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명이 보았으면 증인이 있으니까 성립이 되거든요. 그런데 단 둘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딱 잡아떼고. 두 번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학교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비록 제가 제자의 입장이지만 그래서 제가 목사님에게 그랬습니다. 뭐냐면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 기독교 관련 계통기관에서 근무하면서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뭐냐면 이 신학교나 기독교 관련 기관에서 당하는 어려움은 뭐냐면 이 사람을 평범한 사람에 맞춰서 조직이나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 제도를 합리화 하지 않고, 은혜 많이 받은 진실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이 제도와 이 시스템 이런 것들을 허술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 사실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안 되죠. 왜? 학교 돈을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내 놓으려고 하고, 이러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 가고 나면 다른 사람이 오고 또 다른 사람 가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오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때에는 항상 그냥 이 세상에서 똑 같은 죄인들이 이 자리에 앉고 사라져 가고 한다고 생각하고 제도적으로 만들어 놔야지만 누가 오든지 간에 그 사람이 그 제도 안에서 움직여서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학교에 있어보면서 제가 그런 것들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보면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비리가 많은 것처럼 가끔 신문이나 잡지에서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뭐냐면 비리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경우보다는 제도나 이런 것들이 일반 사회보다도 허술한 기관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앙이 있고, 경건한 사람들이 들어가면 문제가 없지만 신앙이 없고 사악한 사람들이 들어가면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악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악을 도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음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신자들은 어느 한 순간 그런 위험에 처하게 되면 자신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나쁜 의미에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지혜로워져야 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악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악에 대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악을 사랑하고 그 악을 행하기 위해서 악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말고 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말씀을 들으면서 죄에 대해서 많이 배우잖아요. 죄를 사랑하고 죄를 짓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어떻게 작용하고 역사하는지 잘 배워서 그 죄를 대적해서 그 죄를 죽이고 오히려 우리가 그 죄를 이기게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악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가 되기를 원한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악에 대해서 무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라는 뜻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되어서 악을 행하여야 되겠다. 라고 하는 면에 있어서 악에 대한 지식을 갖는데 있어서는 어린 아이처럼 되고 오히려 그 악이 근본적으로 무엇이고 악인의 꾀가 어떻게 위를 얽어매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장성한 사람처럼 잘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수많은 구설, 음모와 모함, 근거 없는 비난, 교묘함, 이런 것들로 뒤범벅이 된 속에서 그래서 오해를 많을만한 여지가 많은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비밀히 장막에 시인을 감추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장막”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자는 그 텐트를 치는 그 장막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이 이 말을 사용하였을 때에 염두 해둔 것은 사실은 그 법궤를 보관하고 있는 성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비밀히 감추셔서 구설의 다툼을 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번 법궤가 있었던 그 성막을 생각해보십시오. 회막 이라고도 불리던 그 장막을 생각해보십시오. 겉은 허물하고 누추했으나 속은 찬란하고 화려했습니다. 금색, 자색, 청색, 홍색 실로 짜여있고, 그리고 촛불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 속죄소가 있는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막 속에 이 시인을 보호하심으로서 감추심으로서 그 악인의 모략과 이 비난을 근거 없는 소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이죠. 그 악인들로부터 핍박 받고, 욕을 먹고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에게 그 장막의 내부의 화려함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화려함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시시때때로 주님만을 전심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새벽에 나와서 한번 기도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수시로 장시간은 아니더라도 수시로 마음을 흠뻑 쏟아놓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혹은 감깐 일터에 엎드려서 혹은 공부하던 책상에 엎드려서 마음을 짧아도 마음을 흠뻑 쏟아놓는 시간,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뭘 경험하느냐면 환난이 오고 악인의 칼날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도 그렇게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면 주님이 그 모든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려고 할 때에 악인들이 많은 꾀를 동원하고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두려워 떨어 악인의 꾀로부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려운 환경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장막에 들어간 것처럼 은혜의 세계의 그 심오함을 보여주시고, 환난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깊이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그 때에는 오히려 그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그 시를 읽을 때 마다 눈물이 나는데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로다.” “영접 하시리로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 말 성경에는 “하시리로다.” 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미래나 현재나 같이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는도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적인 경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리고 부모로부터 버렸다고 까지 고백할 정도로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았고, 정말 상처뿐인 인생 아니었습니까. 아버지로부터도 그랬고, 또 사울로부터도 그랬고, 아내 미갈로부터도 그랬고, 그리고 형들로부터도 그랬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 다윗으로 하여금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으로부터 오는 모든 기대를 가질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 하면 이상하지만 다윗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밖에는 사랑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 수많은 상처들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비밀히 장막에 감추셔서 그래서 그 많은 상처들을 위로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시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한 것투성이인 그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발견한 것입니다. 왜? 거기에서 하나님이 시인만 사랑하시고 시인만 위로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많은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이 시인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 어떤 삶이 가장 기대해야할 삶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한분으로부터 온전히 위로를 받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 수많은 상처들을 하나님이 오히려 위로로 바꾸셔서 그 많은 상처를 통해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것을 배우는 신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에 그들을 대적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복수하고, 그리고 보복의 칼날을 갈고, 이렇게 이글거리는 미움과 증오 속에서 살다가 인간들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자신 속에는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 되어 버리는 그런 파괴된 삶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 최선이겠습니까?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신앙 말고 다른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구설의 다툼 속에서 마음에 아픔이 있을 때에 그 때에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오늘 당하는 이 상처와 괴로움은 멀리 떠나있는 나를 하나님 당신 가까이로 부르셔서 이 상처를 위로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구나. 하고 깨달아야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런 신실한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배신을 영광으로 바꾸심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 하시는도다.(시편3:2-4 )
오늘로서 바꾸시는 하나님의 시리즈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배신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편의 표제에 이미 나와 있듯이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특별히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피하여 도망가던 때에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사실 황망하게 도망가면서 한가하게 시를 쓰고 있을 틈은 없었겠죠. 그러니까 아마도 그 후에 이제 이 상황에 떠올랐던 내용들을 아마 연상하면서 그 때 떠올랐던 내용들을 가지고 후일 정리해서 시로 만들어서 오래도록 암송하며 그 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것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지만 성도의 삶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지난 삶을 묵상하는 것도 자신의 영혼에 큰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 그분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때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다시 바르게 잘 살도록 격려해주기도 하지만 실패의 때에 고통의 때를 돌아보는 것은 또한 우리에게 커다란 경고가 되고 그런 실패와 고통의 때를 돌아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나면 반드시 그 고통의 끝에는 하나님이 어두운 터널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주시던 은혜와 회복의 감격들이 항상 뒤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온 날들, 혹은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죄 가운데 방황했을 때에 그 슬픔과 쓰디쓴 고통 같은 것들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유익과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때로는 격려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경계를 받기도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과 함께 했던 날들, 그리고 하나님 없이 방황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만난 날들, 이 일들에 대한 묵상은 우리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들이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노래하기를 참 좋아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 어려움을 당하던 그 때로 돌아가서 다윗의 정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지지난 시간에 시편 31편을 해설하면서도 이 압살롬으로부터 받은 이 반역이 얼마나 다윗의 생애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 했습니다 만은 아마 이 사건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아마 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그것과 함께 이 두 사건은 아마 자신의 일생에 가장 뼈아프고 가슴 아픈 사건들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그 심판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영민한 영의 사람이 못 깨달았을 리는 없습니다. 왜냐면 선지자를 통해서 이후에 주어질 하나님의 심판을 엄중히 경고하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런 연단이 이렇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기의 자식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3년이 넘는 기간동안 압살롬은 철저한 반역을 준비했고, 아버지 휘하에 있는 신임 받는 장수들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아버지의 측근들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문 앞에 서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면밀b주도하게 무기를 준비하고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윗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은 압살롬의 슬기와 지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번 이 다윗으로 하여금 정말 일생에 자기가 정말 의지해야 할 분이 하늘에 하나님 밖에는 계시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땅에 있는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뼈저린 배신을 당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그래도 남아있고, 붙어있던 마지막 찌끼와 같은 욕심까지도 털어버리고 노년에 그의 눈에 자신의 왕국의 껍질을 깨고 부화 하게 될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하고 무궁한 그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시기 위해서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철저하게 가려진 가운데 어느 날 반란은 일어났고, 그리고 다윗은 차마 그 반란군과 맞서기는커녕 자신이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다윗 하면 도망 다니는 데는 일평생 이골이 나있는 사람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부터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우가 너무 달랐습니다. 왜 달랐느냐면 그 때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지만 그러나 최소한 사랑하는 자기 가족으로부터 받는 배신까지 동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이 새로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기를 향하여 경쟁의식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차원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칼을 들고 쫓아오는 사람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다윗이 정말 머리를 풀고 흐느껴 울면서 그러면서 도망을 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런 처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 다윗은 뼈저리게 고통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그 배신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다윗이 도망갈 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라 말했습니다. 자신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에는 자기에게 등을 돌린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지 몰랐습니다. 정말 구약의 많은 임금 가운데 다윗처럼 어질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 몇이나 될까요?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가난하고 빚지고 억울하고 한 맺힌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를 세웠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선한 정치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향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욕했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마음을 더 많이 아프게 했던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의 저주와 비난이 신앙을 빙자한 비난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무슨 뜻입니까?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길에 흙을 던지며 다윗을 따라와 욕하던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아들의 반란을 받고 쫓겨 가는 다윗을 보면서 이것이 잠시 하나님이 다윗을 더 성결하게 하고, 그리고 이 환난을 통해서 더 정금같이 연단해서 후일에 노년에 더 보화와 같이 써서 그렇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려는 계획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다윗 자신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지 못하고 노년에 눈이 어두워져서 젊은 시절에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노년을 육체로 마친 임금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임금들과는 달리 오늘 이 다윗은 노년에 눈이 어두워져 노욕에 사로잡혀 그 영성을 잃어버리는 대신 이 환난을 통해서 그의 영혼을 거룩하고 빛나게 닦으시고, 그래서 그 눈을 거룩을 응시하는 찬란하고 영롱한 현자의 눈빛으로 바꿔놓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심묘막측한 지혜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다윗이 불신자였습니까? 다윗이 이 세상에 잠시 실패했지만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 말고 이 땅에 사랑하는 분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 사랑하는 분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자기의 수많은 백성들이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를 욕했을 때에 아마 다윗은 차라리 이 고난을 이방으로부터 침략해온 적군에게 이런 비난을 받았더라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한 지체끼리 자신들이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빙자하여 한 사람 다윗을 신앙적으로 매도하고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그렇게 비난을 받았을 때 그러면서 정처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나기 위해 도망칠 때 그 때에 다윗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니다. 지금 내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미워서 그리고 나를 버리셨기 때문에 내리는 형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다윗에게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백성은 임금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다. 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또 면류관인데 그런데 지금은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향해 등을 돌렸고, 존경하고 복종하기는커녕 신앙을 팔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다윗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다윗은 아마 태어나서 가장 뼈저리게 배신이라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보신 적 있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면. 이 살을 면도날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렇게 아픈 것이 배신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배신을 받았다면 자신도 그를 배신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들 압살롬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란군들의 그 격렬한 반란이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죠. 그리고 반란군이 토벌당하고 그리고 반란군의 괴수는 역적, 압살롬이 도살되었다. 라고 하는 소식은 반란을 당한 왕 다윗의 편에서 보면 그 난이 평정되었다. 라고 하는 승리의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다윗에게 어떤 기쁨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윗을 사랑하는 장수들이 나아가 열심히 목숨을 걸고 싸워서 결국은 반란군을 이기고 압살롬을 죽였을 때에 다윗이 슬피 울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고 통곡해서 오히려 다윗을 위해서 싸웠던 백성들과 그리고 장수들의 마음에 심한 서운함을 안겨준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 사랑과 신뢰를 볼모로 우리를 배신했을 때 당하는 그 비통한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어떻게 이 땅에 있는 언어로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바로 그것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대로 표현하자면 속에 근심이 에워싸고, 안팎에 원수들이 진을 치고 돌격을 한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다윗의 시는 이제 끝났는가? 했습니다. 왜냐면 다윗이 너무 아무런 방비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변란을 당했고, 그리고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변란을 주도하고 있는 압살롬에게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다윗은 점점 그 세력들에 의해서 압박을 당하고 다윗의 왕국은 그야말로 꺼져가는 불꽃과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처럼 환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의 뜻은 예전에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시는데 이 환난의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주님을 섬길 때에도 하나님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다윗이었고, 범죄하고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멀리 사라진 때에도 그가 지은 죄는 미워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와 맺은 “내가 내 위를 영원히 서게 하리라”고 한 하나님의 그 다윗과 맺은 그 영원한 언약에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다윗에게 이 다시 생각할 수 없는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이 끔찍한 배반을 당하게 하신 것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사건을 향하여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이시고, 다윗은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이 환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다윗을 더 정결하게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노년에 풍부한 미래의 계시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다윗 그 자신을 계시의 보존자요. 또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계시를 후대에 전해주는 훌륭한 그릇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참 훌륭했던 것은 다윗이 이전에 죄를 많이 짓고, 그 죄로 인해서 그는 뼈아프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상실하고 그리고 정말 뼈가 상할 정도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죄악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으나 그러나 이미 이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는 그 지옥과 같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었던 때였습니다. 무엇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 은혜 아래 있을 때와 그 환난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환난을 만나면 그 환난이 하나님의 큰 섭리의 물줄기를 타고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거시적인 안목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단순히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전달하는 대에 동원되었던 하수인과 같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향하여 미움과 원망의 칼을 갈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 손해를 보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은혜도 모두 부패하고 미움과 이를 가는 원망 속에서 적개심을 가득 찬 마음으로 변하고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도 깃들일 수 없는 원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 갑작스러운 어려움과 환난을 만나면 얼마든지 남은 얼마 안 되는 신앙이라도 팔아서 그 환난을 면할 준비가 되어있죠.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은 원래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위에 환난을 만나게 되면 그가 정말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실제의 삶의 고백으로 생생하게 입증하기 마련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하나님이 그것을 섭리 가운데 보내 주셔도 나의 “시대는 주의 손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라는 고백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큰 섭리의 환난과 시련을 인간의 잔머리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이 땅에서 더 큰 부끄러움과 낭패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 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붙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환난과 시련을 많이 만날 때에 그 때에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 그 환난과 시련의 그 쓰라린 고통을 통해서 얼마나 남지 않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과 그리고 세상에 붙은 욕심의 찌끼들을 모두 태워버리게 됩니다. 환난이 그를 순결하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환난의 고통을 영혼을 정화시키는 거룩한 불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믿음이 그를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죠. 욥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다.”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온 것 밖에 자신에게 특별한 죄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사단에게 보증까지 해준 그 경건한 사람 욥이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할 때에 자신도 자기의 잘못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더 깊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시련과 이 고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무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단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신의 일상적인 삶 저 밑바닥에 잔존해 있는 자기의 부패와 불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더라면 어떻게 그가 “단련”이니 “정금”이니 “나아오리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환난과 시련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점점 더 사람을 향하여 바라보고 생각하던 눈길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자기의 가는 길을 오직 주께서 아시나니 자기를 단련하신 후에는 자신이 더 값지고 고귀한 정금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에 가까이 가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거룩한 은혜의 세계의 빛을 보면 볼수록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는다는 사실을 이 욥이 깊이 터득하게 되었던 것처럼 다윗은 이 압살롬으로부터 받은 저항할 수 없는 이 뼈저린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오직 이 세상에는 아무 미련이 없고, 그리고 자신의 분복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그런 놀라운 신앙으로 자기가 정결케 되어지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경건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날마다 죄를 죽이며 말씀의 은혜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노년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나이가 점점 들면 마음은 점점 더 노역으로 가득 차게 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젊은 시절에 가졌던 진리를 향한 총기어린 눈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아사 임금이나, 혹은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사람들은 뛰어난 영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년은 육체로 끝난 생애였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이렇게 우리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없으면 우리의 노년은 점점 더 젊었을 때 간직했던 그 명민한 신앙과 은혜의 그 예민함 들을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젊어서는 매인 것도 적고 육체에 힘도 있고, 혈기왕성해서 은혜 받기만 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순응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이가 들면 행동거지도 느려지고 그리고 점점 자기 아집에 사로잡히고, 살아온 인생관의 틀 속에 묶이기가 십상이 아닙니까. 또 세상을 향한 염려와 이런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애에 뼈저린 배신을 당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불 가운데 집어넣어서 치열하게 연단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의 위대함은 바로 그런 연단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 연단 속에서 믿음이 없는 소인들이 흔히 행하는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하나님을 향한 불신, 인간의 간교한 잔꾀와 같은 것들을 모두 접어버리고 자신의 인생, 그리고 자신의 왕국을 향해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피난길에 자기를 향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그 못된 시므이를 쳐 죽이려는 자기의 부하를 말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시켜서 그렇게 하시는지 누가 아느냐?” 법궤를 두고 갈 때에도 “하나님이 만약에 나를 권고하시면” 즉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 주시면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 다시 왕국에 돌아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다시 이 법궤를 볼 것을 이 법궤를 내가 인간의 힘으로 옮겨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이겼습니다. 다윗은 오늘 생애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그 뼈저린 배신을 하나님이 세 가지로 바꾸셨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지어서 노래하고 있죠. 첫 째는 방패였습니다. 이 고대시대의 방패는 매우 큰 방패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의 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막아주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무기였고, 그래서 성 앞에 이런 방패들을 걸어두기도 했던 것이죠. 그래서 돌격하다가도 비 오듯 쏟아지는 그 적군의 어마어마한 화살 앞에서도 그 방패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기기만 하면 방패가 대신 그 모든 화살을 맞아주었고 자신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살던 그 피눈물 나는 도망자의 광야생활 속에서 자주 하나님을 “여호와는 나의 피할 바위시요.”라고 노래했습니다. 원수들이 찾아낼 수 없고, 정확하게 겨누어서 화살을 날려도 자기를 막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셨다고 하는 것이 이 불같은 배신의 환난을 통과한 뒤에 이 다윗이 경험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막아주셨던 것이죠.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그 아픈 마음의 칼질을 통해서 그 마음에 타오르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의 연단의 불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도 다윗을 정결하게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 환난을 사용하셔서 그에게 베푸시는 은혜,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이 다윗의 새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그 마음 안에 있는 틀들을 새롭게 바꾸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비록 한 나라의 위대한 군주이지만 이 땅의 나라에 왕국에, 그리고 이 왕의 권세에 어떤 미련도 갖지 아니하고 온전히 그 눈빛이 하나님의 왕국을 향해 타오르는 사모의 눈빛이 되어서 하늘나라로부터 비쳐 내리는 찬란한 계시를 그의 폭넓은 신앙과 지성 안에 담아서 그것을 후대에 전해주는 흔치 않은 계시전달의 도구로 다윗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이 원수들의 화살에 맞아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끝까지 지켜주신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들이 교리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짓거나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이 양심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깊은 죄의 상태에 들어가서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같은 경우도 있지만 거듭난 자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일이 아니라. 잠깐 일어나는 일일뿐입니다. 양심은 두 가지를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송사하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정죄하는 기능입니다. 송사는 네가 잘못했잖아. 너는 나쁜 놈이야. 네가 잘못했잖아. 너 이제 큰일 났다. 이렇게 송사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양심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실 거야. 너는 이제 끝났어.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너는 용서하시겠느냐. 이 때에 가련한 신자의 영혼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육신의 힘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마음에 들게끔 양심의 가책을 피해보려고 율법적인 행위를 하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그의 가련한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해 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희망 없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이죠.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들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그것들이 이제 자기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기능을 활발히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자신이 받는 그 고통과 큰 환난을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크신 보복을 향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런 두려움을 느낄수록 그 영혼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게 됩니다. 열렬히 매달려서 용서해달라고 부르짖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부르짖음이라고 보다는 형벌을 면해보기 위한 부르짖음일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부르짖음이 응답되는 예는 없습니다. 이 교리적인 문제는 지난 사경회 때 “용서를 경험하는 길”이라는 가을 사경회 때에 모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환난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배신의 칼을 받으며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시련을 당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그리고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십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모두 에워싸고 자기는 하나님만 바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다윗이 당한 이 뼈저린 배신의 순간을 말할 수 없는 이 은혜의 기회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중에 경험한 것이 방패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 앞에 지속적으로 범 죄할 때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실 때에도 절대로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복수심을 가지고 그들을 징계하시는 분이 아니시죠. 이 세상에 만연하는 죄를 억제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범죄 하는 영혼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 목사는 인간이 산출하는 죄를 막으시기 위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절대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고 못 박습니다. 만약에 신자가 죄 중에 죽는다면 그것은 다른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지 신자가 짓고 있는 죄 때문에 하나님이 복수하셔서 그를 죽이시는 것은 아니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러한 뼈저린 배신의 상황 속에서 고통 하는 다윗에게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방패가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도 자신의 인생을 향한 영원한 의지 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이 때에 그가 경험했을 영혼의 정화작용의 그 강도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 남은 사랑하는 피붙이를 향해서도 모든 기대를 접을 때 하물며 그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나 이웃들이었겠으며 다윗이 평생을 사랑해 왔던 백성들을 향해 어떤 기대를 가졌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이 압살롬의 배신 사건을 통해서 정말 이 땅에 있는 자신의 왕국에 대한 그 마지막 남은 육신적 사랑까지도 모두 정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왕국은 하나님께서 쇠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부강하게 하시는 한 껍질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노년에 그의 눈이 열리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것을 보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는 것을 그는 경험하면서 위대한 하나님 창조주로서의 그 영광과 엄위와 존귀하심을 인해서 행복해 하는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의 방패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혹시 육신적으로 이런 쓰라린 시련을 만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 쓰라린 환난과 시련의 기회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새까맣게 잃어버렸던 지난날의 검은 죄악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들은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무고히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자기를 정결케 하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들의 지난날에 이루어진 일, 혹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죄와 악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방패가 되어주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원수들의 비난과 그리고 현실적인 공격으로부터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의식하시며 여러분들의 방패가 되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날마다 자기의 믿는 백성들에게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사랑과 용서의 위대한 성품을 계시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경험한 것은 그 배신의 뼈저린 아픔을 변하여 영광이 되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말은 다윗에게 커다란 재산이나 왕의 권력 같은 것들을 돌려준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는 말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기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본체적인 영광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십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효과적인 영광이거나 혹은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으로 인한 영광이 우리를 통해 비취게 되어서 우리를 정당하게 인정해주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당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이 다윗이 이렇게 수많은 백성들에게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하며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 여호와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라고 하는 신앙을 빙자한 욕설을 들을 때에 그의 영광이 어디이었습니까. 누가 그를 왕으로 인정했습니까. 예전에 “사울은 천 천 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 부르던 그 백성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정말 다윗과 같이 높은 이 세상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 만물의 찌기와 같이 여겨지고 그리고 나의 영광이라고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우리들이 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은 올바르지만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시련 때문에 혹은 우리들이 당하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환난과 시련 때문에 안으로는 양심의 송사와 정죄를 받고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하늘위로부터는 마귀의 조롱을 받아야 하는 그런 끔찍한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광은 모두 사라지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겨지는 때가 우리와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거룩한 삶을 살았던 바울에게도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다시 그 영광을 어떻게 돌려받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근거 없이 비난을 당하거나 살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말할 수 없이 나를 존경하는 사람이 돌이키면서 나를 비방하고 욕할 때 그 때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영광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몸부림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할 뿐입니다. 아마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우리는 더 부끄러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옳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욕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잠시 지나는 것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아니하면 천만인이 나를 칭송할지라도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리라고 하는 이 물러설 수 없는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변천하는 이 세상 속에서 오히려 불변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가치에 더 눈길을 두고 그 하나님의 불변하는 판단에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고난의 한 계곡을 통과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결국은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아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상실해버린 그 영광을 결국은 끝까지 되찾지 못하고 수치 속에 그의 인생을 마감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뼈저린 배신을 당하였기 때문에 더 멀게는 그렇게 일순간 은혜의 지배에서 멀어져 타락의 길을 걸어갔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은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다윗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죄악,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하는 뼈저린 단절감, 그리고 마지막 남은 사랑하는 혈연들로부터 당한 그 견디기 힘든 살갗을 찢어 소금을 뿌리는 것과 방불한 그 아프고 아픈 배신의 경험을 거치면서 그는 순결한 사람으로 변모되어 갔고, 다윗이 자신의 영광과 만족을 구할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러나 자신 안에 부패성을 들려다보면서 자기 인생을 통하여 만족하고 영광을 받으셔야할 하나님을 응시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이 잃어버렸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20년도 넘은 옛날이야기입니다. 만은 지방에 있는 한 공원을 내려가는 길에 들르게 되었는데 동물원에 새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뚜껑이 없는 새장입니다. 그래 보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새들이 너무 잘 보이니까. 그런데 왜 저 새는 날아가지 않나. 그랬더니 날개를 뒤에서 보여주는데 날개 끝에도 고무 바킹을 만들어서 도저히 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훨훨 날아가게 내버려두고 자기들이 보고 싶으면 자기들이 가서 보든지 그래도 꼭 가둬놓고 보고 싶으면 좀 매우 크게 만들어서 그 안에서 새들이 불편하지 않게 날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해주든지 그 돈도 없으면 그만 두든지. 그렇게 하지 그 새들에게 고무 바킹을 해서 날아가지고 못하니 결국은 새들마다 다리가 이렇게 굵어졌어요. 그것은 새의 생명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의 그 영혼이 바로 그렇게 날지 못하도록 날개에 족세를 채운 새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하늘을 향해서 비상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이 땅에 살고 있으나 그리고 그의 영혼과 온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계신 그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 마지막 영광스러운 날들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물질에 대한 탐심과 유혹, 육신의 정욕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영광 가운데 들리움 받게 될 그 날에 대한 소망을 잊고 살아가면 그는 족쇄 채운 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생명이 사라진 신자입니다. 새의 생명은 나는데 있고, 신자의 생명은 위에 것을 바라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영혼의 찌끼들, 결별하지 못한 세상사랑, 그리고 하늘을 날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의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것들에 매여 사는 그런 삶을 하나님이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환난을 너무나 살붙이까지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복종하시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얼마나 슬기로웠습니까.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나주께 나아가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조들의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의 영광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셨는데 그 영광은 땅에 있는 것들을 궁극적으로 바라는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끗이 이 세상에 있는 더러운 욕심들을 씻어내고, 그래서 성도들이 그냥 저부터 말씀드려서 할 수만 있으면 하루에 세 가지 색깔의 눈물로 우리의 영혼을 닦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주체는 성령님이시죠. 우리들이 그런 진실한 참회와 그런 진실한 눈물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낼 수 있다면 아마 주께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끊임없는 성화의 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첫 째는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로 씻어내고, 또 한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인간을 향해서 베푸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 때문에 또 눈물을 흘리면서 한번 닦아내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 하늘로부터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호령 소리가 나고 우리들이 이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들려져서 주와 만날 그 날을 앙모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그 기다림의 눈물로 다시 한번 씻어내면 아마 우리는 주님 만나 뵙는 날까지 뒤로 물러서지 않는 성황의 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영광을 하나님께서 결국은 환난 가운데서 마음을 낮추고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고 그 배신의 아픔을 바꾸셔서 이렇게 훌륭하게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머리를 드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 머리를 든다고 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 은총을 입는다.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결론은 아무렇게나 내려서는 안 되고 시편에 나와 있는 머리에 관한 기록들을 쭉 언어적으로 문맥적으로 관찰해보면 통일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성경구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시편 110:7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데 “시냇물을 마시고 머리를 드시리이다.” 원수를 향해서 메시아가 머리를 드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시편 83편에서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이것은 반대로 원수가 힘을 얻고 원수가 득세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다시17편에는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원수위에 들리리니.” 이제는 침체 되어 있었지만 나의 머리가 나를 뺑 둘러 에워싸고 있는 그 원수들 앞에서 나의 머리가 다시 들리워지리니. 그 수동태죠. 그 머리를 드시는 분이 오늘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요. 동시에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과연 그 날이 오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뼈아픈 경험이기는 하였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지만 그 모든 변난은 평정이 되고, 정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다시 왕국으로 돌아왔고, 아마 그의 일생은 두 번 왕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변난을 당하면서 그는 요단강 건너편 남의나라 땅까지 망명을 떠나야 했고, 거기에서 그와 함께 했던 일행과 함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는 소리를 들어야했으며 주야로 눈물로 음식을 삼는 그 치열한 고통과 외로움의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왕위에 앉았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을 거시렸던 그 배신자들은 처형되었고, 다윗을 멸시하던 그 모든 백성들은 다시 다윗에게 용서를 빌고 다윗을 따르게 되었고, 그리고 그의 보좌는 다시 영광 가운데 빛나게 되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자신은 잠시 다윗을 막 다루셨지만 당신 자신 이외에 누구도 자기의 사랑하는 다윗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셨고, 그를 하나님 자신의 생명싸개 안에 감추고 보호하셨던 사실을 나타내 증명해주셨습니다. 애쓰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머리를 드셨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머리를 든 그날 그 다윗은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겠습니까. 다시 찾은 왕국이나 그까짓 것 속절없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과 그리고 인정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때가 그렇게 길고 고통스럽던 연단의 과정이 끝나는 때였고, 그리고 이제 그의 말년에 하나님이 위대한 계시를 보여주시는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경험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하고 왕이 두려워서 어찌 할줄 모르며 황망하게 무릎을 꿇은 하찮은 백성을 향해 옆에 서 있는 만조백관들이 모두 있는 그 앞에서 “너는 고개를 들라.” 그리고 왕이 대면해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의 상주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다윗이 바로 자신보다 더 큰 왕이신 지존하신 하나님 그 위엄 앞에서 이런 회복을 다시 경험했던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했기에 그런 인생의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그 배신의 아픔이 변하여 이렇게 하나님이 다시 머리를 들어주시고,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그를 보호해주시는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 그의 상급이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 받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삶을 살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죠. 다윗은 오늘 그 사실을 우리들이 읽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소리로 주께 기도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 하시는 도다.”라고 말이죠. 결국은 다윗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뼈저린 배신을 당하고 홀로 내동댕이 처진 것 같은 그런 처지가 되었을 때에 그 외로운 시련의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남이 대신 해주는 기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그리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그의 영혼의 시선을 아버지께 고정시킨 가운데 그 부끄럽고 비참한 인생의 가장 어둡고 캄캄한 영혼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아마 기도하기로 뜻을 세웠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신의 정직함을 입증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밖에 없고, 백성들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여호와 한분 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시인은 뜻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밤이나 낮이나 부르짖었고, 그리고 눈물을 음식으로 삼으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뼈아픈 일을 당할 때 취해야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그 이름 석자를 가슴에 품고 이를 가는 것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해 보십시오. 저도 얼마 되지 않은 인생을 걸어오면서 나는 크게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꾀 많이 만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저를 향해서도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나를 비난하거나 그리고 나를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함께 섞여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대응하고 싶은 나 자신이 더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니까 도움이 되더라고요. 정말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오해로, 혹은 악의로 인해서 비난을 받거나 혹은 멸시를 당할 때에 두 가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정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다 아무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까.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실 우리가 외롭고 고단한 인생길을 지나면서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이 외롭고 고단한 인생의 길을 걸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깨를 마주 대고 얼굴을 부빌 수 있는 것, 그리고 추운 바람이 불면 서로 가슴을 기대며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그 형제 된 삶, 그 사랑의 교제, 그것만큼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가슴아파하고 그것을 인해서 사람을 원망하고, 배신을 복수의 감정으로 바꾸기 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내가 너무 잠깐 지나가는 것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고 집착하니까 하나님이 이러한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얼마나 영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구나. 생각하는 거죠. 물론 그랬기 때문에 그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잠시 지나가는 것이요. 나이가 젊은 것이 죄입니까? 얼굴이 곱게 생긴 것이 죄이며, 머리가 총명한 것이 죄이고, 육신의 근력이 튼튼한 것이 악입니까? 악이 아니더라도 모두 지나가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뭐냐면 그렇게 자기를 많이 마음 아프게 한 사람,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 결국은 그를 통해서 그 상처와 고통이 왔죠. 그 때에 우리들이 꼭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뭐냐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원수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를 깊이 축복하고 심지어는 저가 나를 비난하고 나에게 배신의 칼을 들었는데 그것을 인해서 저가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거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기를 못 박는 무리들을 향한 기도였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기도하였던 바가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그러면서 원수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거니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되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인이 그랬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무기로 삼아서 자기를 그 미움의 죄와 원수 맺는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이 환난과 시련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의 상처를 입어도 하나님은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결국 이 시인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되었고, 그 응답은 하나님의 성산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성산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이 성산은 곧 시온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그 시온은 바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였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그 곳을 중심으로 한 지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있고, 하나님이 임재를 두시기로 약속한 성소가 있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우리들이 짧은 인생을 지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환난과 시련이 오는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살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만 하면 우리가 나아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압니다. 우리들에게 교회가 있고, 그리고 우리들이 부르짖을 때 들어주시는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는 우리 주님이 계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아버지와 교통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시인은 그런 기도 속에서 성산에서 하나님께 응답받았고, 그리고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졌고,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이 뼈저린 배신의 아픔은 오히려 그 풍랑 인하여 이 다윗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원수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돌격하였고, 원수들은 다윗의 인생이라는 배를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끝장내 버리려고 폭풍을 보냈으나 오히려 그 풍랑 인하여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품이라고 하는 귀향지로 더 빨리 순항하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쁘고 즐거울 때뿐만 아니라. 환난과 시련을 만나던 때를 인해서도 주님을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게 된 것이죠.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닥거리고 미워하는 자에게 칼을 겨누고 칼을 빼든 자에게 총 쏘고 이렇게 살아서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빛 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섭리의 큰 물줄기에서 우리의 인생을 보고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기도하겠습니다.
바꾸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