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곤고한 이유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곤고한 이유(시 107:10-11) 2005.10. 12 수요예배 1
2. 욕망과 자유(잠 28:7) 2005.11.2 수요예배 14
3. 고독과 자유(시 68:6上) 2005.11.16 수요예배 24
4. 미움과 자유(요일 3:15) 2005.11.23 수요예배 34
5. 무지와 자유(렘 4:2)2005.12.21 수요예배 47
6. 원망과 자유(잠 19:4)2005.12.28 수요예배 56
1. 곤고한 이유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 107:10-11)
인생을 살다가 보면 곤고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 언제든 곤고하지 않을 때가 있겠습니까. 만은 특별히 곤고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늘 곤고했었는데 세상의 즐거움이나 쾌락에 빠져서 그 곤고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마취되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곤고함을 깊이 제대로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곤고함이 견딜만 하다가 특별히 더 어려운 일들이 생기니까 곤고함이 더해져서 그래서 정말 제대로 자신은 아무 희망이 없고 살 소망이 없다는 그러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곤고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든지 간에 어쨌든지 인간이라고 생겨나서 이 세상에 살다보면 곤고해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라나는 애들을 보고 “너희가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고 그래도 그 애들도 걱정이 참 많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를 가만히 이렇게 돌아가 보면 그 때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달픈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희 때는 중학교까지 시험을 봐서 갔습니다. 얼마나 그 공부를 하느라고 못살게 구는지 그 과외 공부 선생이 5.6학년 애들을 모아놓고 3당 4락 3시간을 자면 중학교 시험에 붙고 4시간을 자면 떨어진다. 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후배 아이 하나는 중학교 시험에 떨어졌다고 돌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여자 아이가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그 동네에 큰 돌산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어린 것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사는 것이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곤고한 것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 유치원 정도만 다니는 애들을 보더라도 그 곤고함이 나타납니다. 밤에 잘 때 옆에 가서 이렇게 쳐다보세요. 그러면 이미 얼굴에 평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3살 4살 강퍅하면 3살, 덜 강퍅하면 5살까지 가는데 벌써 유치원만 들어가도 평화 없습니다. 더군다나 초등학교 들어가면 평화 없고, 중학교쯤 지나고 나면 산전수전 겪은 사람처럼 잠꼬대 하면서 뭐하는지 싸우기도 하고, 이러면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인생을 곤고하게 삽니까? 그러면서 물어보면 참 할 얘기가 많습니다. 그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곤고해지는 비결은 참 하나님의 지혜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건강이 부족해서, 건강도 있고 돈이 있는 사람은 또 수치를 당해서, 명예도 있고 돈도 있고 건강한 사람은 또 뭐 인간관계가 나빠서, 그런 것 다 좋은 사람은 가족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하여튼 등등의 많은 문제로 인해서 어쨌든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곤고함의 이유가 뭐냐? 그러면서 이야기 해보라고 하면 뭐 별 얘기 다 나오죠. 뭐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그렇다. 심지어는 남편이 돈을 안 벌어 와서 그렇다 생활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 벌어다 주는데 부인이 돈을 제대로 쓸 줄 몰라서 문제를 자꾸 일으킨다. 뭐 애들 때문에 그렇다. 뭐 부모님이 괴롭힌다. 애들이 괴롭힌다. 뭐 수없이 많은 자기를 곤고하게 하는 요인들을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정신이 버쩍 나게 만들어줍니다. “사람이 사망 아래 있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로 들었던 여러 가지 많은 우리를 곤고케 하는 요인들은 사용된 제2의 원인에 불과합니다. 진짜 첫 번째 원인은 그것이 아닙니다. 모두 나를 곤고하게 하는 원인을 다 누구든지 자기 밖에서 찾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 곤고함에 대한 자기 자신의 책임, 혹은 자기 자신의 기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내서 물질이나 상황, 환경, 또 주위에 있는 사람, 내 안에 있는 건강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곤고하게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곤고해지고, 그 이상 아무 대책이 없이 살아간다면 신앙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곤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신앙 때문에 그 곤고함을 벗어나게 되죠. 그렇죠. 또 신앙 때문에 물질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고, 또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가족들이나 인간관계가 있는데 신앙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거기에서 진짜 곤고하게 살 수밖에 없는 미움의 칼을 품고 곤고하게 살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극복하고 이것이 결국은 신앙의 힘 아닙니까.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힘을 찾아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계속해서 우리의 곤고한 원인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이 모든 시도들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재주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반쯤 접어야합니다. 우리들이 좋지 않은 환경은 계속 바꾸면서 살아가야 되겠지만 그러나 이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내 안에 있는 것들과 내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매우 커다란 교만입니다. 그것을 매일 매일 버리는 것이 자기 깨어짐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자신이 존재론 적으로 가장 상위에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질서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최상위에서 세우는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전부다 자기가 보기에 나쁘다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 하고나니까 모든 자신의 이 고통스러운 문제가 자기가 속으로 정해놓은 이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움직이지를 않느냐?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못돼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엄마가 왜 못 되느냐는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하는 인간은 왜 내가 생각하는 그 남편,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되었을 그런 남편이 좀 되어주지, 이상적인 그런 남편이 되어주지 그것도 못하고 말이죠. 자식들도 다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기가 다 그 사람들 때문에 얽혀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누가 보기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어 본적이 있느냐고요. 한번 물어보세요. 자기는 누가 그렇게 자기를 맘에 들어 하더냐 고요. 부모님이 볼 때 “아, 너는 진짜 내가 낳았지만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며 자식의 그 위치에 그렇게 아름답게 있냐.” 혹은 남편이 자기가 인간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없지 않은 그 사람 말이죠. 왜 그렇게 남편이 그것 밖에 하지 못하냐? 이렇게 생각하는 그 남편이 여러분들에게 와서 “여보, 당신은 나는 당신보기에 정말 제자리에 안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당신을 곤고하게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워 당신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거기에 있어. 내가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계속 할거야.” 그러는 남편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남편이 있어요. 손들어보세요. 내가 무릎을 꿇고 배우고 싶어요. 누구입니까. 없습니다. 그리고는 저 잘났다고 물고 뜯고 하니까 이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것이 신앙이잖아요.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손가락질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 최고의 실수는 널 만난거야. 내 인생의 최고의 실수는 널 낳은 거란다. 너만 안 낳았으면 내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을 것을” 이러면서 한 번도 자기를 가리켜본 적은 없고 계속 가는 데마다 남만 가리키면서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정신이 버쩍 나게 해주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추운 겨울날에 정신 못 차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뒤통수에다 쏟아 붓는 얼음 섞인 한 되의 물과 같을 것입니다. 확 쏟아 붓겠습니다. “사람이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말씀을 멸시함이라.” 이것이 말하자면 수많은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있는 실제입니다. 우리들이 감기에 걸리면 목도 붓고 그다음에 눈물로 나고, 재채기도 나고, 열도 나고, 오한이 나고,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춥고, 이러잖아요. 진짜 온 몸이 전부다 감기 걸린 몸살 걸린 징후가 나타나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수만 가지 약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감기 균을 죽이는 약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면 콧물도 멎고, 부은 목도 내리고, 열도 내리고, 뼈마디 쑤시는 것도 다 멈춥니다. 그렇잖아요. 모든 문제는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문제가 되게 복잡해보입니다. 모든 문제가. 그런데 은혜가 충만해지고 나면 문제가 너무나 단순해보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미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굴 미워하겠습니까. 다 내가 부족해서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의 과실을 잘 발견하기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더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고, 어려움을 주시는구나. 결국은 아직은 내가 잘 모르지만 그러나 나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고, 또 주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그런 방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정답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사람이 어떤 사람을 상종하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다.” 그러는데 이것이 무슨 모습입니까? 감옥 속에 갇혀있는 죄수의 모습을 염두 해 두고 지금 쓴 것입니다. 죄수들은 무슨 햇빛 잘 드는 남향에 커다란 통유리 해 놓고, 거기에다 한복 입혀서 침대에 눕힐 일 있습니까. 그냥 큰 칼 채우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쇠사슬 엮어서 움직일 때 얼마나 불편할까. 그런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지하 감옥 같은 곳에 덜컥 하고 가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죄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무슨 모습입니까? 자유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여러분,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을 은혜 떨어진 사람이 은혜 생활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살펴보면 얼마나 답답해 보입니까. 그렇죠. 인생사는 맛이 없어요. 월요일 이니까 원래 교회 가는 날이고, 화요일 이니까 여리고 전도 하러 가고, 수요일 이니까 수수하게 차려입고 수요예배 가는 것입니다. 목요일 날은 목숨 걸고 성경공부 참석해요. 금요일은 금요일 이니까 구역예배 토요일 날은 또 토요일 이니까 교회에 와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 사람 살아가는 것이 하나도 융통성도 없고 재미도 하나도 없고 그래요. 엊그제 노회에 갔더니 어느 목사님이 “아, 자기는 1달 동안 휴가 받아서 여행 갔다 왔다고 그래서 아, 진짜 좋겠다. 나는 여름휴가도 못 갔는데. 그러니까 그 목사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김 목사님 왜 그러고 살아. 그래요. 그래서 할 말이 있어야지. 모르겠어. 나도 하긴 뭐 여름휴가 교인들도 다 못 갔잖아요. 그리고 생각하니까 마음에 위로가 되더라고요. 여러분 꽤 여러 명 됩니다. 여름에 아웃리치 간다고 휴가 반납하고, 뭐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휴가 안 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핑계 김에라도 그렇게 동참하니까
그런데 어쨌든지 여기에서 그려내는 모습은 결국은 부자유한 모습이거든요. 은혜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진짜 부자유합니다. 그러니까 왜 여름휴가도 못 갔냐? 그러면 아, 그렇게 여유가 없네, 그렇게 정신이 없고, 아, 왜 그러느냐. 건강도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답답해 보이겠습니까. 같은 목사끼리도 답답해 보이는데 평신도들이 평신도들을 볼 때는 목사가 목사 볼 때 보다 더 답답해 보일 것입니다. 왜, 목사야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고, 직업이니까 하지만 평신도야 무슨 얼마나 나이롱 평신도들이 많은데 그렇게 월요일에는 원래가고, 화요일은 화나서 가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가고, 목요일은 목숨 걸고 가고, 이것이 매일 교회 가서 볼 때 사람들이 얼마나 갑갑해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아무 게는 교회에 매였어.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보십시오. 누군지는 모르지만 시인이 상정하고 있는 사람이 뭐 자기의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앉아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눈이 쾡 하고 여기에다 칼을 쓰고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머리도 감지 못한 채 더부룩해서 그저 간신히 들여다보일까 말까 하는 시커먼 감옥에 이렇게 눈을 껌벅이면서 앉아있어요. 움직일 수도 없고 거기에 가만히. 죄 지으러 다닐 때에는 얼마나 활기차게 다녔을까요. 죄도 힘이 있을 때 짓지 힘이 떨어지면 죄도 못 짓습니다. 활기가 있고, 힘이 있어서 그렇게 죄를 짓고 감옥에 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렇게 죄를 지어야 했으니 얼마나 활기차게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일단 그 죄를 짓고 은혜가 떨어져서 죄 속으로 깊이 딱 들어가게 되니까 그다음에는 속박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매일 것 같이 그렇게 재미없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인 사람들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해방이 되어서 자기 좋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사실은 매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무엇에 매인 사람들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에 다닌 사람들은 직장에 매이죠. 사업하는 사람은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 장난이 아니죠. 사업에 매이죠. 가정에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매이죠. 장난이 아니죠. 너무 어려운 일에 미여서 매일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지막 끝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지막에 무엇이 어떻게 될까요? 예배도 1부 예배에 와서 간신히 드리고 그것도 안 되면 새벽 예배에 와서 드리고, 그리고 불이나게 빠져나가서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나 이런 것에 몰려서 거의 주일을 못 지키고, 곤고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신앙생활도 못하고 기도 생활도 팽개친 채 살아갑니다. 결국은 그렇게 세상에 매여서 마지막에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국은 우리는 중립적일 수 없는 인간이니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줄로 굳게 매이지 아니하면 결국은 자기의 자아 중심적인 사랑에 매여서 육신의 노예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육신의 욕심에 매여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자유로운 모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한번 이 107편에 대고 한번 그러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의 영혼은 자유롭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원망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주님 밖에서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그 정욕의 욕구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거기에 매여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육신은 정신없이 자유롭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영혼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아래 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아서 그래서 곤고함의 큰 칼을 쓰고 그리고 고통의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소에 깊이 쳐 박혀있는 그런 신세가 된 것이 바로 그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행복합니까. 그것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필요하죠. 그 사랑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든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따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자기가 느끼는 것도 쓸모가 없고, 이따금 온 힘을 다해서 으라차차 한번 섬기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데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호루라기 불면 한번 모여서 으라차차 하면서 돌 맹이 하나 옮겨놓고 다시 제 길로 돌아가는 그런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길을 따라서 매일 매일 걸어가는 사람들, 그것이 주님이 바라고 또 원하시는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왈칵 느끼는 것,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온 힘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뭐냐면 자기가 있어야 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의 사슬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이 흑암의 그늘에 앉아있고, 그리고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여서 흑암과 사망 가운데 살아가요. 이 사람은 바로 그렇게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서 칭칭 얽어 매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말이죠. 강아지 하고 비슷합니다. 강아지를 처음에 막 빨빨 거리고 돌아다니던 놈을 이제 돌아다니는 개들 많잖아요. 그 놈을 잡아다가 목에다 개 줄을 걸어서 기둥에 묶어 놓으면 처음에는 며칠 동안 죽는다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깨갱깨갱 하는 소리가 나죠. 왜냐면 뛰쳐나가려다가 그러다가 이 줄에 목이 잡아 채이니까. 그러다가 일주일쯤 소리 지르면 가서 한번 발길질로 걷어차면 한 일주일만 되면 그다음에는 그 줄 밖에를 안 나갑니다. 그 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려고 합니다. 잘 길들여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계획하고 얼마나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시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정 반대입니다. 자유를 주시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죄의 사슬에 매여 있고, 죽음의 두려움에 매여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 자유가 이중적으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신분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조차 없는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신분을 죄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고 하나님의 용서받는 아들딸들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서 그 아버지 앞에 자유롭게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데 통근버스 갈아타려고 한 번 들어가 봤지만 청와대 말입니다. 대통령 만나려고 하는데 가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4시간 전에 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10분 만나는데 그래서 가서 교육도 받고, 몰라요. 아주 복잡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들어가면 그냥 들어가겠습니까. 들어갈 명단이 올라가면 신원조회 다 하고, 옛날에는 다 그랬습니다. 신원조회 결과가 경찰서에서 오면 그것으로 다 해서 정리해서 다시 갈사람 못 갈 사람, 가려내고 그리고 그다음에 주민등록증 가지고 가서 그 다음에 몸수색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통령 아들은 어떨까요. 그냥 들어가죠. 뻔 하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집인데, 아이고, 아저씨들 수고하시네. 그러면서 그냥 차 몰고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아들이니까. 예전에는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아갈 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신분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언제든지 가서 그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마음과 영혼의 자유입니다. 내적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죄 자체에 그렇게 매여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사슬에 매여서 노예처럼 살고, 그냥 고단하게 죄가 시키는 대로 봉사하고 섬기면서 그 죽은 행실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다가 이따금씩 입에 넣어주는 그 죄의 즐거움을 먹으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 없이 살다가 사망 하는 것이 그것이 옛날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컴컴한 지하 굴속에 그 죽음의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처지가 되어서 큰 칼 쓰고 쇠사슬을 두르고 수염이 더부룩한 채 거기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옛날의 영혼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주님이 아직 우리에게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포로 된 자처럼 죄에 매여서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그 순간에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이 모든 사슬들을 하나님이 다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영혼의 사슬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이 그렇게 스스로 이 사망과 흑암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함의 쇠사슬에 갇혀서 그래서 다시 죄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갇힐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렇게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죄는 신자를 그렇게 가두어 둘 수가 있느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죄 조차도 그렇게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은혜를 행사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옛날에 우리 애들이 아주 어렸을 때 언제인지도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무슨 애들 놀이 시설이 있는 곳을 데리고 갔는데 어디를 갔는데 애들이 감옥 들어가 있어요. 시커먼 철창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애들이 쭉 앉아있어요. 그래서 아니 애들이 저기에 왜 갇혔나. 그랬어요. 그런데 웬걸 낄낄 데고 웃더니 한 녀석이 그 철장을 확 뒤집으면서 뛰어나오는데 그것이 전부다 물렁물렁한 고무로 만들어요. 그런데 쇠 철장과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겉으로 보면 잘 몰라요. 그런데 만져보면 물렁물렁해서 확 열면 이렇게 틈이 벌어지면서 거기에서 다 기어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다가 은혜가 떨어지고 죄를 짓고 불순종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심령과 삶이 갇힙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갇힌 상태에서 다기 빠져나온 아무 희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신자는 더 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은혜를 받으면 그런 포로 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면 이것이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좋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의 작용을 초월해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 작용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거시리며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와서 도저히 거시리며 살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그런 예는 없습니다. 간증할 때나 가끔 과장하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업습니다. 신자가 죄를 선택하면 성령의 역사는 우리 안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은 사망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삶이 끝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자동차가 달려가는 도로의 끝은 있어도 인간의 죄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점점 더 깊은 흑암 속에 갇혀서 견딜 수 없도록 곤고한 인생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지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정직해서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것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내가 은혜로부터 멀어졌고, 그래서 내 영혼이 곤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면 해결의 길이 보이는데 이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퀴즈를 내고 싶습니다. 그 사람보고 자기를 도대체 곤고하게 하는 환경이 뭔지를 다 써보라고 하세요. 16절지에 빽빽하게 썼다고 해요. 그래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원대로 한번 해 줬어요. 그러면 그 영혼이 살아날까요? 여러분도 웃잖아요. 말도 안 되다고 하잖아요. 지금,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고 오늘 수요 예배에 은혜 받겠다고 나온 여러분 가운데도 지금 그 사람처럼 기가 막힌 생각을 하면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여러분 중에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 해결의 길이 있겠습니까. 시인이 시편에서 뭐라고 고백하는지 아십니까.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의롭다 하리이다.” 이것이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죄인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주님이 판단하실 때에 “나는 주님을 의로우시다 하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생각, 내 이유, 핑계를 모두 접겠습니다. 자신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것, 그 고통스러운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여서 포로 된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이유와 핑계거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물론 인리가 있지만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나 지존하신 여호와를 네가 멸시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렇게 판단하셔요. 나머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 하고 지존 자를 멸시한 정신을 통해서 나타난 제2 제3의 행동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뿌리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온 과거를 이렇게 돌아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시편에 나오는 이 사람처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여서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을 곤고한 영혼을 가슴에 끌어안고 살았을 때에는 죽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원망하는 사람도 많고, 세상도 밉고, 날 외롭게 하는 사람도 많고, 불만도 많았지만 그러다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어느 날 놀라운 사랑으로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여주셨어요. 죄를 다 보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녹아지게 하셨어요.
내 맘을 녹이셨네.
깊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시니까 회개했잖아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깊이 회개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정말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앉아있어요. 진짜 곤고할 대로 곤고하고 인생의 아무 희망이 없을 정도로 쇠사슬에 매여서 영혼의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살아가요. 그 핍절한 자신의 영혼을 보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가슴을 녹이실 때에 그 핍절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면서 이를 갈면서 아내나 남편을 원망했습니까? 아니면 이웃을 원망했습니까? 아니면 이 사회를 규탄했습니까. 아니면 부모에 대해서 한을 품었습니까? 안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그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피 묻은 손으로 어루만지시면서 녹이실 때 여태까지 나를 이렇게 곤고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야에서 모두 사라져버리고, 오직 한 가지 고백밖에 안 나왔죠.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할 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안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돌아오고, 저렇게 돌아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갔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는 이런 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가 자기의 영혼을 둘러싼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때가 여러분들이 그 모든 오해와 어리석음에서부터 벗어나서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때, 그 때 자신의 영혼의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여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하다보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은혜가 떨어져서 이렇게 곤고하게 되었는데 그 위데 죄를 짓게 되니까 하나님의 음성은 더더욱 들리지 않고, 비유를 하자면 공중에 뚜껑이라도 열려서 어렴풋이 비춰오는 빛이라도 있었는데 그것을 철판으로 덮어버린 것입니다. 진짜 캄캄한 흑암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요.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보면서 한없이 마음 아파하시고, 그런 흑암의 그늘아래 앉아서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의 열매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자신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어떤 것들 중에는 이치가 닫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평가하실 때 진짜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가? 자신의 부족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뜻을 꺾고.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리가 있으면 뭐합니까. 그 사람이 거기에 그렇게 사망과 흑암의 그늘아래 앉아서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그 자체를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데 그 한두 가지가 자기가 일리가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묻고 싶어요. 곤고합니까? 아니면 평화로우십니까?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깨달아지고 기도하면 주님의 은혜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리고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분과 항상 동행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무슨 환경 때문에, 어떤 이유 때문에, 물질 때문에, 사업 때문에, 어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살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책임을 여러분들이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걸려 넘어져 있는 여러분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각자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하나님 앞에 범 죄 한 후에 징벌을 받았던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을 생각해보세요. 아담보고,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저 여자가 주는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 여자 찾아가셨어요. 그 여자를 부르셨어요. 너 왜 그랬느냐. 뭐 어쩌고, 저쩌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책임이 덜해졌습니까. 여자에게 책임을 물었더니 뱀에게 핑계를 댔으면 하나님이 아, 그래 하와야 넌 정말 죄가 없구나. 저 뱀이라는 녀석이 와서 그렇게 유혹을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을 진짜 너 말을 듣고 보니까 네가 책임이 없구나. 하나님이 그러셨습니까. 아니거든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요. 이것이 결국은 뭐냐면 일종의 자기 아첨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편이 되는 모든 것이 자기 아첨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다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잘못되어있는 자기를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자기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위로하고 쓰다듬고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아,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네가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혼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결국은 자신은 계속해서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 곳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아가다 보면 역경을 만나게 되잖아요.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들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예비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점은 환경 때문에 올 경우도 있고, 여러분 자신 안에 약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약점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 약점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영광을 받으셔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만약에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면 약한 그곳에서 주님의 은혜가 온전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랬잖아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일생을 살았는데 하나님을 섬긴 적도 없고, 계속 죄의 그늘아래서 그렇게 비굴하게 살아가요. 그래서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널 구원해 줬는데 내가 너를 구원해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고 나의 뜻을 위해서 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게 하기 위해서 살라고 너에게 내가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었는데 어떻게 살았느냐? 아,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그렇게 도저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주님 저에게 처해있는 환경을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시집 한번 잘못 가서 이상한 남편 만나고, 장가 한번 잘못 가서 이상한 아내 만났더니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결국은 내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구원해주셨지만 섬기면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교회에 장로로 세워주셨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 얼마나 이상합니까. 그 사람하고 아마 천사도 동역을 못할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서 너의 부인과 너의 남편에게 가서 책임을 물을 것이며 너를 동역하지 못하게 했던 그 사람들을 내가 찾아가서 책임을 물어야 되겠다. 너는 여기에서 잠깐 기다려라. 주님이 그러시겠습니까. 아닌 것은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동정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그렇지만 실제를 보세요. 실제를 보면 그 마지막에 본질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해주시는 이유는 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곤함과 쇠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되는 영혼인데 이렇게 죄에 억압되어 있어서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이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우리의 영혼의 진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착각하는 것입니다. 착각이 뭐냐면 자신은 진실을 찾아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이 라는 말이 “베룸”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진실을 찾아서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는 이렇게 진실을 찾아서 살고자 하는 그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 본성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계시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핑계들 때문에 자신의 실제의 삶 속에서 진리를 버려요. 진실, “베룸”은 찾아가는데 진리 “베리타제”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래도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인데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제의 삶에서 내가 진리를 버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을 찾아가는데 실제의 삶에서 진실을 져버린 삶이 그것이 바로 거짓입니다. 그것이 허위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그렇게 미워하셨던 그 바리세인들의 삶입니다. 그들이 진실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진리를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을 사랑 하는 데는 비용이 안 들어가는데 진리를 따라 사는 그 길에는 피를 흘리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서 아, 존경스럽게 아멘, 아멘, 무슨 비용이 들어가요. 무슨 비용이 들어가느냐고요. 거기에 앉아서 눈만 껌벅거리면서 한숨 쉬듯이 아멘, 아멘 하고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몸매를 가진 패션모델의 패션쇼를 지켜보는 마음으로 그 간증을 들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비용이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허리를 가진 사람이 패션쇼를 보는데 비용이 들어갑니까. 무슨 비용이 들어가요. 그러나 자기가 진짜로 그 식이요법을 해서 몸을 줄여보려고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그 모델들처럼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해보세요. 그것이 해결이 됩니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은 적어도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미워하십니다. 차라리 “나는 진실 같은 것 필요 없다. 그래서 나는 진리도 모른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죄가 덜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원래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진실이 뭔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알았잖아요. 진실이 무엇인지도 알고, 그 가치가 무엇인지도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희생의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는 진실은 찾아간다고 하고 피 흘리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삶은 자신의 살 속에서 헌신짝처럼 내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슨 해결이 있겠습니까. 그 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옳게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왜 곤고하게 사시죠? 왜 기도가 되지 않죠. 왜 예전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서 사라졌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갑자기 떨어졌나요.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이 갑자기 요즘에 와서 효력이 줄어들었습니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래요. 내가 오늘 여러분들의 편이 되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들은 타당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정말 여러분들 괴롭힌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을 그렇게 괴롭게 살아가도록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는 주위에 있는 여러분들을 불행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인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곤고한 것은 곤고한 것이고, 충만한 것은 충만한 것이지 그것이 인간적으로 보면 다 그렇다고 쳐도 오늘 성경은 그러나 네가 나의 말을 거역하였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서 해결을 보아야 되겠습니까. 그 문제의 매듭을 어디부터 풀어야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안 되는 남편의 멱살을 붙들어야지만 문제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직장, 사업의 거래처 거기에 가서 멱살을 붙들어야지만 문제가 풀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매듭부터 풀어야죠. 주님은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누구에 의해서도 억압을 받거나 강요받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깊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 사업의 문제, 가족의 문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결국은 그 많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 제 영혼이 제 마음이 제 삶이 주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문제는 제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오직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하게 열려요. 그리고 아,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고난을 내가 당하게 된 것이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총명이 다시 돌아와요. 그래서 눈이 뜨여집니다. 그리고 그런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죠. 그러면 이제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 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깊은 곤고함과 고통 속에서 아, 이것이 나 때문이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이 두렵지 않아요. 왜?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니까 내 꿈과 희망도, 그리고 나의 생명도 모두 그분의 손에 맡기면서 그분의 선하신 처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요. 그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의 처분만 기다리며 주님의 사랑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손에만 붙들려서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고통을 받아도 하나님이 양보하지 않으셔요. 왜냐면 하나님이 마지막에 원하시는 것은 뭐냐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곤고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충만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막 물고 빨고 사랑해주시다가 그리고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이 찬밥처럼 토해버리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다가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영혼의 곤고함이 확 밀려오거든요. 말할 수 없이 영혼이 곤고하게 되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은혜를 떠난 우리들을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전에 그렇게 매일 교회에 가면서 주님 섬기는 단조로운 삶을 살고, 그러던 것이 너무 재미없는 것 같아서 세상 즐거움을 쫓아서 그 단순한 삶을 버렸는데 그리고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속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누구의 억압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고 해도 주님이 가장 좋기 때문에 주님 옆에 머물러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곤고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곤고해지거든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모든 이유와 핑계는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야기 하세요. 회복하고 나면 그것 가지고 와서 이제야 제가 말씀드리는데 보따리 풀면서 사실은 내 안에 내 남편, 내 마누라 무슨 누구. 이런 얘기 안 나옵니다. 그 안에서 모두 풀려요.
사랑하는 여러분, 정직하게 돌아갑시다.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일 때문에 곤고하고, 어떤 환경 때문에 그렇게 곤고하게 살아가고, 기도할 수도 없고, 말씀의 은혜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생각을 모두 접고,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을 멸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영혼의 깊은 자유를 잃어버린 곤고함이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기도하고, 오히려 여러분들이 이러, 이러한 것 때문에 나에게 괴로움이 되었다. 생각되는 것들은 오히려 바꿔서 그것을 한번 감사해보고, 여러분들이 누구,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곤고하게 살아간다. 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을 마음을 크게 열고 그들을 축복해보세요. 안 되도 그렇게 해보세요. 하나님 사실은 제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제 아내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애들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직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은 내 마음 깊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그 말씀을 거역하면서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추복해보세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환경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살면서 하나님이 가장 많이 훈련시키셨던 부분가운데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저는 지금은 많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혹은 부분적으로는 이리저리 시달리면서 살다가 보니까 많이 나아졌는데 회심하고 얼마 안 되어서는 인생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이 이 마음이 유리 그릇 같아서 너무 잘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좀 아프게 하면 거의 며칠 동안 괴로워하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괴로워요. 그 사람하고 화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그런데 그러면서 생활하다 보니까 이것이 너무 인생의 낭비가 심해요. 이 사람, 저 사람 잘 어울리면서 잘 어울리면서 그렇게 지내는 성격이 아니니까 특히 학교에 있을 때는 부딪히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특히 학생들, 얼렁뚱땅 하려는 그 친구들 말이죠. 내 제자인데도 내가 직접 편지 써서 이놈 학교에서 쫓아내 버리라고 했으니까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나보고 검찰총장이라고 했겠습니까. 내가 어느 교실에 감독을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장학생의 판도가 달라요. 그러니 싫어하는 학생들은 나를 얼마나 싫어했겠어요. 그런데 그 때 후에 하나님께서 나를 깊이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고 그래서 그다음부터 학생들도 그렇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나를 아프게 했던 녀석들을 여러 날 동안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축복하느라고, 맨 처음에 축복하면서 아이 씨, 뭐 내가 빌면 뭐해 지가 복 받을 짓을 해야지. 그런 생각이 나면서 내 기도 다 떨어져라. 그런데 참 놀라워요. 그렇게 내가 복을 빌었기 때문에 그 축복 기도가 응답된 것은 내가 확인을 못 해 봤으니까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축복하면 하나님은 내 마음을 녹이셔요. 그래서 나를 보게 하셔요. 그러면서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하셔요.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요즘 특히 여기에 설 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요. 특별이 요즘 그래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셔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래도록 영혼이 이렇게 자유를 잃고 감옥 속에 갇힌 것처럼 매여서 살고, 심령의 자유 함이 없었어요. 여러 가지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자유를 주던가요. 아니거든요. 결국은 하나님은 마지막에 여러분 자신이 죽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원망하는 환경이나 사람이 죽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죽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할 얘기가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왜냐면 내게 물질의 어려움이 많았더라도 내가 넘치는 믿음으로 살았더라면 극복했을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많이 와서 나를 미친 듯이 억눌렀어도 충만한 은혜로 그것을 이겨서 고난의 현장이 충만한 기쁨의 현장으로 바꾸게끔 그렇게 살았더라면 우리는 이길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못 이겼잖아요. 주님이 은혜를 안 주시겠다고 그래서 못 이긴 것 아니잖아요. 이미 벌써 그런 어려움에 쳐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구부러짐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난이 오는데 위기를 느끼면서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았고, 유혹과 어려움이 많이 왔기 때문에 더 깨어 있어야 되는데 잠자고 있었죠. 그렇죠.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환경을 향한 원망, 하나님을 향한 원망 같은 것들이 밀려올 때에는 더 마음을 단속하면서 주님의 사람들을 축복하고 가족들을 축복하고 평화의 도구가 되어서 그 모든 상처들을 끌어안고 주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따라서 그 사람들을 다 끌어안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주께로 더 가까이 갔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안 했잖아요. 그러니까 영혼이 미끄러지면서 어두움이 깊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붙들고 매달려서 다시 영혼의 자유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를 붙들고 매달려도 다시 영혼의 자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기도해 주어도 그것은 기도일 뿐이지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걸어가다가 쓰러져서 넘어진 그 자리는 여러분들이 일어나야 하는 자리이지 남들이 대신 일어나주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넘어진 자리에서는 여러분이 진리의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여러분들 속에 깊이 밀려오면서 어둠과 죄악 가운데 있었던 영혼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어나고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던 그런 회심의 때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심이 다시 반복이 되는 것, 그것 없이는 누구도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그 영혼의 억압으로부터 여러분들을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경회가 가까워옵니다. 이제 다음 주에 말씀 준비하러 가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꼭 10정도 남았습니다. 그냥 또 넘어가실 겁니까. 아무도 겁내는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은 점점 더 깊은 지하의 감방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끝없이 부르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일어설 힘이 없습니다. 말하지 마세요. 주님은 일어서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다시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돌아와서 그 진리의 지팡이를 짚고 오랫동안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욕망과 자유
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잠언 28:7)
지난 수요예배 시간에는 우리가 곤고해지는 이유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을 세상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죠.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이 유혹으로 흔들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핍박과 고난으로 흔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그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 속에서 솟아나오는 자기 맘대로 살고자 하는 수많은 욕망들을 줄여야 합니다. 그것도 신자에게는 형벌과 같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말씀을 지케는 사람의 삶은 많은 고난과 형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거역하고 순종하며 사는 삶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것 같고 자유로운 것 같죠. 그러나 결국은 그 각각 삶에 대한 댓가가 내세에서만 주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현세에서도 주어지고, 섭리가운데 일어날 미래에서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멀리는 말씀을 거역하고 산 사람들에게 심판이 있겠지만, 가깝게는 일반 섭리 속에서 세상 속에 사는 동안에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더 가깝게는 그 사람들의 영혼 안에 커다란 파괴가 일어나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죠. 아름다움을 상실한 영혼이 투사해내는 마음은 결코 아름다운 마음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영혼의 투사이니 영혼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면, 그 마음이 결코 아름다운 마음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적절하게 더러워진 마음이 되고 그 마음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와 탐식하는 자의 친구가 되는 두 경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율법으 F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며, 탐식자를 친구로 사귀는 아들은 아비를 수치스럽게 하는 자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 시에 있어 A->A' B->B'로 이어지는 댓구법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상을 말을 바꾸어 확대해 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와 탐식자를 친구로 사귀는 자를 병행으로 놓고, 이 병행은 물론 반대의 병행이죠. 지혜롭게 되는 것과, 아버지에게 수치를 끼치는 자.....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며 탐식자와 친구로 사귀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수치를 끼친다는 말이죠. 하나씩 살펴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지혜롭다고 할 때, 이 지혜롭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메빈 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빈 분별하다의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잘 분별하는 아들이요, 이라는 말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올바로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것이고, 또 그런 분별력을 가리켜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지혜는 단순히 공부를 많이해서 얻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사물을 분별해 내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고도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부를 좀 못했어도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지식보다 이 지혜를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지혜는 지식에서 얻어지기는 하지만, 지식이 지식에 그치는 적도 있고, 지혜를 가져다 주는 적도 있으니 이 지혜의 탁월함이 바로 여기 있죠.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이런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지혜를 얻게 되는가? 우선 첫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지혜를 얻게 되는 방식은 율법을 깊이 사랑하고 지키게 되면,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을 깊이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켰지만, 그것은 지금 성경에서 기술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사랑하면 그때 비로소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사물을 보시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며 하나님이 가치있게 보는 것은 이 사람도 그렇게 보게 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일체된 마음가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 있는 자들의 분별력은 하나님의 판단에 근접하는 사람을 말해요. 하나님께 근접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파악하는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사물을 하나님 입장에서 분별하게 되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신앙을 버리고 인간의 지혜로 승리하고 성공하고 세속적 욕망을 위해 인간 꾀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방금은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품질은 그 사람의 세상적 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지혜롭게 하나님 입장에서 분별해 낸 인생의 길에 의해서 삶의 품질이 결정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되느냐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지키게 되면 실천적인 지혜가 생겨나게 되요.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동해안에 군 복무를 했는데, 군대 식사가 오죽하겠어요. 요즘은 김치를 납품하기도 한다는데 우리 옛날에 보면 군대 김치를 직접 담급니다. 무를 사다가 담그지 않고 군인들이 밭에다 무를 심었어요. 군대 땅이 많으니 그렇게 많이 씨를 뿌려 놓죠. 일중대 이중대 삼중대 식으로 해놓고 어쨌든 많이 나와야 해요. 신통치 않다, 하면 기합입니다. 그러니 수시로 물을 갖다 붓고 뭘 어떻게 하는 지는 모르는데, 하여간 먹어 봤는데 이건 민간인 무 하고는 완전 달라요. 크기는 굉장히 큽니다. 그런데 소금만 넣으면 힘없이 쭈그러 드는 거예요. 아마 영양은 없는데 물은 많이 주어서 그런가봐요. 하여간 난 그런 깍두기는 처음 먹어봐요. 하여간 소금만 뿌리면 확 쭈르러 들어요. 짱아치가 되어요. 그게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목욕통 같은데 졸병들 넣어놓고 거기서 그냥 운동하듯이 밟으면서 담가요. 물을 들입다 뿌리고, 이쪽에서 한번 밟고 또 다시 저쪽에서 한번 밟고, 그래서 결국 보기에 흙좀 털었다 하면 깍두기를 담그는 거죠. 고춧가루는 또 얼마나 있겠어요? 그저 깍두기 하나에 한 개 씩이나 붙어 있으면 다행이지. 고춧가루가 헤엄을 치죠. 짜기는 왜 그렇게 잔지. 이유는 두 가진데 짜니까 늘쿼먹을 수 있고, 또 자니까 봄까지 맛이 안 변해요. 완전 염장이죠. 그러니 그게 맛있겠어요? 그러니 경비서는 아이들이 꾀를 냈는데, 우리는 고추장과 김치는 사재로 조달한다......어떻게 조달하냐? 순서를 정해놓고 매주 훔쳐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이 당법이 된 거예요. 그러니 이걸 미리 알았으면 서울로 연락해서 김치 담가오라고 했으면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는 거죠. 내일 모레 까지 부대원들 일주일 먹을 고추장과 김치 조달한다 실시. 요령은 밤중에 가서 고추장 단지에서 퍼 오고. 김치 뚜껑을 열고 바케스에 담아온다. 들키면 너 혼자 책임진다. 그러니 이제 고민이 생기죠. 크리스찬이니 훔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고참을 찾아갔어요. 고추장과 김치 조달 문제로 왔습니다. 훔쳐오라면 오지 뭔 말이 많어? 이게 몇 십년 내려오는 전통인데. 저 사람들은 우리가 훔쳐갈 줄 알고 미리 많이 담근다 그거야. 그러니 이 사람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구했어요. 못해가면 반 죽는 거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더래요. 그래서 고참에게 갔죠. 책임지고 조달할 테니 방법은 제 맘대로 합니다. 방법이 어딨어 인마, 가서 훔쳐와야지. 하여간 그건 내 자유고 날짜까지 가져다 놓겠습니다. 그렇지 맘대로 해 봐라. 그날 저녁 간절히 기도했대요. 낮에 비번 시간에 나간겅요. 그리고 한집 한집 바께스를 들고 사정 얘기하고, 우리 부대원들이 너무 김치를 먹고 싶어 합니다. 아줌마도 저같은 아들 있으시죠. 좀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다들 아 착하다고 그러더래요. 왜냐면 그 군인들이 와서 고추장 단지 깨뜨린 게 한두번이 아니라 이거예요. 먹을 만큼만 퍼가면 말을 안 하는데 왜 깨뜨리냐 이거예요. 깨뜨릴 수 밖에 없죠. 군화 신고 밤에 다니다 덜그럭 소리나면 도망가고 그러다 보니. 그래서 얼마나 고생이냐? 하면서 퍼 주는데 다름 병사들 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많이, 김치 종류별로 한 보따리 가져온 거죠. 그 집사님 이야기가 재밌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야 겠다는 것에 중심점을 두고 하나님 앞에 길을 열어달라 기도하면 하나님이 열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순종할 의도가 모자라기 때문에 길이 안 보이는 거지, 중심을 거기 딱 세워 놓고 나는 하나님 명령대로 살겠다 해놓고 지혜달라고 기도하면,.....사실 누가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훔쳐오는 게 오랜 전통인데.
그러니까 진짜 우리들이 순종하려는 의지가 문제이고 마음이 문제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겠다는 것을 중심에 놓고 그걸 삶의 실제로 적용해보니 지혜가 생겨난 거죠. 그게 바로 율법 지키며 살아갈 때 놀라운 지혜가 생겨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 결심을 미리 양보해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써야지만 실천적 기회가 생겨나는데, 실천을 안 하고 기회가 오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이미 타협해요. 그러니 기회가 생겨나지 않죠. 모든 하나님 일의 이치가 그래요. 전도하는 데 있어 뜅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전도를 학문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현장에서 별사람을 다 만난 사람들이에요. 이교도, 불신자, 낙심자 다 만나다 보니 비로소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 지헤가 생겨나는 것이죠.
하나님 공평하신 분이에요. 그런 실천적 지혜는 말씀대로 살겠다고 율법을 굳게 붙들고 그 뜻대로 살아본 사람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태도에요. 그렇게 살다보면 삶의 질이 놀랍도록 향상되요. 주위에서 보면 저 인간은 왜인생을 저리 사나? 대책없는 사람들이 있죠. 기회가 없어서 그래요. 신앙 안에 있으면서 지혜로와 지는 길은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것을 삶 속에서 적용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실천적 지혜를 얻게되요. 두 개가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실천하게 될 때 잘 깨닫죠. 말씀에 실린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되죠. 그걸 실천하려고 할 때 지혜가 생기죠. 그 삶이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삶이에요. 그럴때 인생을 하나님 앞으로 빛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럼 이제 반대이야기죠.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탐식이 뭐죠. 마구 퍼먹은 거거든요. 사실 이건 번역이 좀 그래요. 졸레린 이라는 히브리 단어예요. 잘라르 라는 히브리 단어에서 왔는데, 잘라르 는 방탕하다, 탐욕스럽다. 제멋대로 행동하다는 뜻이에요. 여기에서는 탐식 그러면 먹는 걸로 연상되는데 사실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탐욕스런 자들과 함께 하는 자들은 -복수로 나와요- 아비를 욕되게 하느니라 그렇게 나옵니다.
그럼 왜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탐욕스런 사람을 사귀는 것을 반대적 의미로 두었을까? 궁금해지죠. 여기서 우리가 쉬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율법 안에는 우리 멋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통제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며 사는 본능을 가진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아주 망가진 삶을 살게 되는 존재죠. 그래서 창조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사면서 아주 망가진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 안에는 우리 멋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억제요소가 있어요. 말씀을 깊이 깨달으면 자기 반성이 일어나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말씀은 거울이 되는 거예요. 또 말씀을 통해 자기를 비춰봐요. 뿐 아니죠. 말씀이 어떤 때는 우리를 책망해요. 방망이 처럼 우리를 때리죠. 그럴 때 아파. 경험해 보셨어요. 깨달을 때 막 아파. 경험해 보셨어요? 아프잖아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때리고 책망하죠. 말씀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우리가 깨끗해져요. 물로 씻기거나 혹은 불이 되어 우리를 태우는 거예요. 성경 말씀 속에 그런 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 일어나도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욕망을 태워버리거나 정화되는 작용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졸레린 이라는 ‘방탕한 자’ ‘욕심대로 행하는 자’ 이것은 뭐 어마 어마한 욕망을 가지고 악의 화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통제가 안 되는 채그냥 살아가는 사람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다 불한당같은가요? 교회 멀쩡히 잘 다니고 신사 소리 들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거의 통제 안 받는 사람들 얼마든지 있어요.
예화)미국에 집회를 갔었는데, 정말 무섭더라구요. 이틀째 날인가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이 저녁을 대접하는데, 거기 다른 교회 다니다 오신 장로님이 계셔요. 미국에서는 뭐 교인 하나가 새로우니까 장로님이 오셨다고 하니까우리 교회 함께 활동하고 세워가시자 하고 말하자면 협동장로로 그렇게 세워주셨어요. 제가 보기엔 그 분이 정말 구원 받았을까 들더라구요. 왜냐면, 그 목사님도 굉장히 힘들어하시면서 그 말을 하셔요. 장로님이 참 성격이 너무 과격해서 걱정이라고. 수요예배때 목사님이 어디 가셔서, 자기가 좀 설교를 하게 해달라고 해서 맡겼더니 담임 목사님에게 직격탄을 날린 거예요. 목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교인들이 황당한 거죠. 또 한번은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설교를 했는데 아마 그 목사님이 잘 내막은 모르겠는데, 그분이 요즘 장로들이 이러면 안 된다고 똑바로 섬겨야 한다고 야단을 좀 친 모양이에요. 그랬더니 그 장로님이 끝나고 나서 어디서 저런 사람을 데리고 왔냐고 막 분해서 혼났다구. 권총있으면 쏘고 싶다고. 쏘실 수 있었을 거예요.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대접받는 사람들은 사실 막 사는 사람들이에요. 누가 말리겠어요? 그런데 사실 너무 불행한 거죠. 그런식으로 사는 거.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 글에 보면 목회하면서, 예의 바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대한 공손하자. 야, 정말 놀라워요. 저도 배웠어요. 목회의 규칙입니다. 무례한 사람일 수록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자. 여기서 말하는 졸레린 이라는 사람들은 쉽게 말하면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이에요. 밥 먹는 일만 그런게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사귀면 뭘 배우게 되면, 바로 묙망대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되죠.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를 절제하고 죽이고 살던 사람들은 고통스러워요.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도 내가 견디니까 하나님이 견디게 해 주시는 것 같애. 그런데 이 졸레린들은 이미 인생을 보는 시야 자체가 달라요. 병신, 참을 걸 참지. 틀렸잖아. 죽이고 보는 거야. 한번 받아버리고 보는 거야. 계속 참지말고 한번 뽄대를 보여주는 게 상대방을 위해서도 좋은 거야. 뭐 이런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면서 그러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친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친구 시리즈도 했어요. 재밌는게 ‘친구’라는 단어가 히브리 말로 ‘로에’예요. 로에. 라아는 양을 치다 그런 뜻이에요. 웃기는 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할 때 그 목자가 바로 로에예요. 목자 이콜 친구죠. 그러니 이런 사람들과 즉 졸레린과 친구가 되었는데, 이 친구는 대등한 수준에서 사귀면서 친구가 뭐라 하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여기서 로에는 똘마니예요. 똘마니. 욕망이 이끄는 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똘마니 같은 친구는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하느니라 라는 거예요. 배우는 거죠. 그가 목자가 되어서 신앙이 조금 있는 사람들의 신앙 마저 뭉개는 겁니다. 야, 참지마. 참으면 니가 신앙 있어 그런게 아니라 니가 빙죽맞아서 그런 거야. 너 병신 쪼다된다. 할말은 하고 살어. 밸도 없냐? 그러면서 그렇게 졸레린으로 살아가는, 마음에 욕망대로 살아가는 걸 가르치는 겁니다. 친구지만 똘마니 처럼 따라다니면서 배우는 거예요. 친구 중에도 대등한 친구가 있고, 똘마니가 있잖아요. 가방 메고 다니는 애들, 서로 반말은 하지만 현저한 똘만이 있잖아요. 따라다니면서 뭐 얻어먹고, 가방 들어주고. 그런 똘마니. 그런데 잘 보세요. 요즘 우리는 예수님 잘 믿고 경건한 사람들이 세상 친구들 사귀면 절대 똘마니 안 돼. 예수 잘 믿고 우리가 세상에 가보면 친구들이 우리 되게 싫어하죠. 왜 싫어하면 똘마니가 아니라 선생이 되 있으니까. 야 임마.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술 따라 주니까 먹지도 않고 놓고 너 그렇게 살면 안돼. 아주 작정하고 나간거야. 염장 지르려고. 그렇게 살면 너 끝이 안 좋아. 너 지옥있는 거 알어? 찜질방에서 5분도 못 견디는 주제에. 찜질방에서는 나오면 되지만, 너 어떻할래? 절대로 똘만이 안 되요. 그런데 은혜 떨어지면 그 친구들이야 세상에서 잔뼈 굵었고, 여러분은 중도 은퇴한 사람들이잖아요. 가 보면 판이 바뀌었는데, 똘만이 안 되고 배길 수 있어요. 회심해서 한 10년 주님 밖에 모르고 살았죠. 세상 나가 보라고. 옛날에 놀던 그 물이 아니야. 낯설지. 그러니 똘마니가 되어 버리는 거야. 그게 이치예요.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거. 동반자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영향을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살죠. 결국 어떻죠. 아버지를 부끄럽게 할 수 밖에 없죠. 왜냐하면 욕망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점점 숨 막히듯 갑갑하게 느껴지는 거죠. 그러니 반항하고 대들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 이치에요. 그래서 경건한 집안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일찍 회심하지 않으면 엄마 아빠 살아가는 삶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어느 순간 숨이 막히죠.
그러는 이유가 뭐죠? 졸레린의 삶을 너무 많이 배운 거예요. 그걸 많이 배우면 배울 수록 신앙의 세계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믾고 하기 싫은 데 해야 할 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견딜수 없이 갑갑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 가운데 거하는 신자들은 절대 그런 거 느끼지 않아요. 너무 행복하고 그 안에 안식이 있고, 욕망을 극대화 해서 그대로 살아봤자 돌아오는 건 영혼의 황폐함, 현세에서의 불안과 고통, 내세의 심판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 향해서도 이웃을 또 자신을 향해서도 계속적 파괴밖에 없어요. 또 그걸 알아.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 이거죠. 이 두 사람이 정확히 대조를 이루죠. 은혜를 많이 받을 생각을 먼저 하지 말고 쓸데없는 욕망을 버려요. 그러면 기도 제목이 생겨요. 욕망이 살아있으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쪽으로 은혜가 쓰이는 게 아니라 이 부패한 욕망을 녹이는 데 은혜가 다 사용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은혜를 경험했는데, 성화의 진전이 없는 거예요. 욕망을 죽여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욕망대로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욕망대로 살 때 가져다 줄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그를 충동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죠. 여러분 깊이 동의하게 될 거에요. 자 옷을 하나 사 입고 싶어요. 그러면 멍하니 있다가 벌컥 들어가서 사는 사람 없다구요. 물론 있긴 하겠지만, 돈이 워낙 많고 충동대로 사는 사람이야 그렇겠지만, 그냥 대부분 여러분 정도의 수입이나 형편을 볼 때 옷 한번 사려면 몇 번을 망설일 겁니다. 우선 제일 먼저 오래된 생각이 꽂히죠. 남이 입은 좋은 옷을 보고 꽂히는 경우가 있고, 적극적 방식이죠. 다음은 자기가 입고 있는 걸 계속 불편하게 느낄 때 또 꽂혀요. 소극적 방식으로 꽂히죠. 하여간 옷을 사겠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이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져요. 옷만 아니라 모든 거이 다 마찬가지죠. 뭐에 대해 꽂히면 강하게 끌려요. 그리고 나면 이대로 사는 게 불편하다고 느끼고 나면, 저린 일을 하면 굉장한 만족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겨요. 황당한 거 아니에요? 옷 선전 같은 거 보면 옷 맵시가 확 나는 몸매를 가진 모델한테 그 옷을 탁 입혀놓는 거예요. 너무 예쁘지. 그런데 자기 몸매 생각은 안 하고 나도 입으면 저렇게 될거다 그러는 거죠. 그게 되냐구요. 개발에 편자지. 편자가 뭔지 알아요? 말 달릴 때 말굽 상하지 말라고 달가락 거리고 박는 쇠 있어요. 그걸 개발에 박아보라구. 우선 개가 죽으려구 하겠지. 그건 발톱에 박는 건데 개는 밥톱이 작아서 결국 살에 박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죽는다고난리치지. 편자를 박으면 두 발로 뛰면 달가닥 달가닥 하나요? 깨깽 깨깽 거리지. 그런데 묘하게 현혹을 시키죠. 내가 상품을 잘 팔리게 할 자신은 없는데 어떻하면 안 팔리게 할 지는 알아요. 제가 진짜 어느 회사에서 예쁜 여자한테 몸무게 40에 허리 23쯤 되는 여자한테 탁 입혀놨는데, 허리 한 30에다 몸무게 80은 나가는 여자가 나도 저 옷 사 입으면 저렇게 될 거다 그러는데. 될 수가 없잖아요. 목이 없는데 옷이 맵시가 나나요? 그 여자는 목이 길고.......그런데 그런 상상을 하는 거죠.
예화) 어느 부인이 옷을 사러 갔어요. 근데 하도 까딸을 부리니까 어, 아주머니 눈이 크시네요. 그러니까 그건 욕이 아니잖아요. 제가 심방 갔더니 어떤 분이 목사님 가까이서 보니까 눈이 크시네요. 그래요. 새우젓 같은 모양이지? 하여간 눈 크시네요. 목이 기시네요. 배만 나오면 이티겠네요. 저쪽에서는 무슨 소린지 모르시겠어요? 이티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기대감을 일으지는 거예요. 먹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정말 하나님 은혜로 사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성화되는 거에 반만 성화가 되도 주님이 여러분보다 저를 칭창하시리라 생각해요. 그렇게 불리한 조건이 많아요. 색에 대한 감각, 균형미, 하다 못해 미각까지 너무 발달을 시켜주셨어요. 라면을 세 번 끓이면 세 번 맛이 다 달라요. 물의 온도 스프 넣는 순서 물의 질, 냄비 종류 등등에 따라서. 정말 다른 사람들은 그게 그거네 뭐. 그래요. 그러면 참 재미 없죠. 커피도 물 넣고 커피 넣을 때, 커피 넣고 물 넣을 때 프림 먼저 넣을 때 나중 넣을 때 설탕 넣는순서.....다 다르게 느껴져요. 컵을 물에 따뜻하게 튀기고 끓일 때 안 튀기고 끓였을 때 퐁퐁에 닦은 컵, 맹물에 닦은 컵 다 달라요. 왜 그렇게 잔인할 정도로 뛰어난 감각들을 주셨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러면서 사실 오랫동안 살아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유를 깊이 생각했어요. 왜 많은 사람들이 탐식의 문제 같은 거, 해결 못할까? 진짜 다이어트 할 사람들은 밥 먹기 전에 절식 결심을 하는데 못하는 사람들은 꼭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아, 안 돼. 이미 벌써 들어 갔어요. 자기는 절식 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죠. 15분 걸려요. 밥 먹고 포만감 느끼는데. 아직 배가 좀 고프다 할 때 숟가락 딱 놔야 해요. 그러면 15분 후에 딱 배가 부르거든요. 그런데 상당히 배가 불렀을 때 숟가락 놓죠. 어느 정도 찼으니 그만 먹으려는 건데 그러면 이미 과식 한 거거든요. 근데 후식이 또 있잖아. 먹고 나면 포만감이 좍 오죠. 그렇게 사는 게 문젠가 그랬는데, 어느 날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기니까 어느 날 나를 초청해요. 그러면 비만강좌 한 번 해줄께요.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절제가 어려울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금식하고 결심문 작정하고 하루 마다 작정하고 일주일 645마다 반성하고 한달마다 일년마다 작정했어요. 백개가 넘는 결심문을 쓰는데 여덟 개가 식사 문제였어요. 절식하자. 먹는 것에 절제하자. 그런데 가끔 그런 구절 있어요. 아 정말 안 된다. 특히 파티가 있는 날은 도저히 절제가 안 된다. 그 영적인 대가가......그래서 위로를 좀 받았죠.
대체 왜 그럴까 했는데, 깊이 터득한 게 있어요. 그 이유는 바로 기대감이에요. 기대감이 계속 욕망을 일으키는 거예요. 여러분 담배 안 피우시죠. 강남에 가면 담배 전시장이 하나 생겼어요. 그런데 필터 끼워 만든 담배가 아니라 시거에요. 시거. 애연가들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담배예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렇게 그 담배를 즐겼어요. 나중에는 끊었지만. 그 담배는 한 가치에 천 불이에요. 한 개피에 천불. 백 만원. 물론 한 번에 다 피는 거 아니지만, 그런데 거기는 그 시연장이 있어서 한번 피워보는 거죠. 근데 여러분 욕망을 느껴요. 예배 끝나고 한 번 빨아봤으면 좋겠다. 안 느끼는 이유가 뭐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강하게 느끼거든요. 그거 피워본 사람들은, 필 때 니코틴이 몸 속으로 쭉 빨려들어가는 게 느껴진대요. 거르지도 않고 니코틴이 들어가니 어떻겠어요. 정말 환상적이래요. 그들은 느끼는 욕망을 여러분은 못 느끼는 이유는 오직 하나에요. 그게 그런 즐거움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 단정할 수 없잖아요. 차이점은 기대감이 없는 거예요. 욕망이 없는 거죠. 그들은 기대감이 있으므로 계속 욕망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먹는 것에 대해서도 아, 오늘은 뭘 먹을까? 삼겹살에 깨끗이 씻은 쌈장 마늘 풋풋한 마늘 이렇게 해서 보리밥 먹고 된장국으로 입가심하면 맛있겠다. 이렇게 욕망이 생기거든요. 상상 많이 해서 기대감을 부풀리고 나면 욕마잉 더 많이 생각나죠. 그래서 갈비집 같은 데서 그래요. 저녁 시간쯤 되면 바깥에 연탄을 내놓고 그 갈비 기름, 이른 걸 거기다 지져요. 연기 막 내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막 그 냄새를 맡으면서 입맛이 확 생겨요. 저는 원래 빵을 싫어하거든요. 빵 가지고 식사를 대신하는 적은 아주 다급할 때 빼고는 안 해요. 특히 햄버거 같은 거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열린공간이 나를 유혹해요. 작전 같아요. 열시 쯤 되면 문을 다 열어 놓아서 거기서 구운 냄새가 2층을 타고 죽 타서 1층으로 내려와. 쿠키 굽는 냄새랑 빵굽는 냄새가 확 나요. 근데 또 조건이 아침을 안 먹었어요. 그러면 기대감이 확 생겨요. 방에 대한 기대감이 생길 때는 부정적인 것은 안 떠올라.노릇노릇한 빵, 따끈한 빵, 포 하고 김나는 거 이런 거 생각나는 거죠. 그러면 막 먹게 되는 거죠. 그러면 거의 신들린 사람처럼 열린 공간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돈이 없으면 장부에 긋고라도 먹게 되죠.
대표적인 게 성적인 욕망 같은 것이 그렇잖아요. 그러니 아이들에게 뭘 제대로 가르치겠다고 하면서, 쬐그만 아이들 데려다놓고 성교육 시키고 그러죠. 그거 잘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것들이 자꾸 자극을 주어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조기에 성범죄를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거죠. 물로 어떤 경우에는 아이들이 그런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잘못해 불행하게 될 위험이 있지만, 그런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생명의 존엄성 그런 것도 잘 이해 못하는 아이들 한테 그런 성교육을 잔뜩 시켜놓으면 어떻게든 해볼까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거죠. 기대감이 욕망을 계속 일으키죠.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제자가 되는 순간에 그런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생각을 해야해요. 그래서 좋은 집에 살면서 만족을 확 느끼고 아주 큰 차를 타면서 만족을 확 느끼고 예쁜 옷을 입어서, 목도 없으면서, 자기 자신이 뭐 굉장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진다....아니면 지혜는 없으면서 공부만 많이해서 거기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 뭐 기쁨을 느낀다던지,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뭘 먹어서 내 입을 좀 즐겁게 해 볼까?이러면서 발달하고 기대감 가지고 그걸 채우는 게 기쁨이 되고 그런 것들은 모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해요.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목사님이 한쪽으로 엄청 기울어졌구나. 금욕주의로 가시는 구나....그건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어느 날 목사가 되고 나면, 우리 선배 한분이 그러셨어요. 목회는 먹회다. 그게 뭔소린가 했더니, 얼마나 먹으러 다닐 기회가 많은지. 목사님 중에 위암으로 돌아가시는 분들 많아요. 저도 목회를 한 12년 해보니 이게 정말 나빠요. 식사 시간이 조절이 안 돼. 심방 시간에 맞추는 거야. 그러니 어떤 날은 9시 에도 밥을 먹고. 7시에 심방인데 어떻게 식사를 하고 갑니까? 그리고 어쩌다가 한번 심방가는 집에서는 꼭 저녁 대접을 할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또 얽히고. 참 재밌는게 사람들을 격려해도, 아 참 잘하셨습니다. 이건 격려라고 생각을 안 하고 먹으면서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걸 격려로 아는 거죠. 그러면서 자꾸 먹을 기회가 많아져요. 어느 날 제 방으로 전화가 왔어요. 제가 잘 가던 식당에서. 목사님이 우리 식당에 오셔서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 있었냐고. 도통 발을 딱 끊으셨다고. 그래서 오래간만에 갔어요. 사경회때. 갔더니 어떠헥 목사님 그러실 수가 있냐고. 딴 데로 안 갔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런 데서 즐거움 느낄 수 있죠. 사랑하는 지체들과 가족들과 함께.......또 이런 설교 들었다고 옷 입는 데서 즐거움 느끼면 안 돼. 비싼 옷 주고 후진 옷 사 입자. 그럴 필요 없어요. 기왕 같은 돈 주고 사려면 색도 좀 맞추고, 목 없는 분들은 폴라 사지 마시고. 그렇게하며 즐겁게 사세요. 제가 말하려는 건 그것이 중심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중심적인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중심은 따로 있고, 흘러가는 가운데 간간히 그런 즐거움도 누리고 그럴 수는 있다는 거죠. 중심적으로 흘러가면 곤란해요. 저는 그래요. 누가 새 옷 입고 왔다던지, 누가 머리 좀 하고 왔다 그러면 항상 칭찬을 해 줘요. 아 좋다. 너무 좋다. 5년 쯤 젊어 보인다. 빈말이라도. 야 그 옷 입으니 날아가겠구나. 곧 칭찬하게다. 그렇게 칭찬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중심이 되면 안 되죠.
그럼 중심의 즐거움은 뭐냐? 그런 것들에 욕망을 극대화 하고 굴복하다 사는 동안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자기를 절제할 힘이 야금 야금 약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하나에 있어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막 살게 되면 그건 다른 모든 방면의 욕망에서도 뛰쳐나가려는 속성을 보이는 겁니다. 성적 욕망도 그렇잖아요. 그런 것들을 절제하면서 살다보면 그런 것들이 몸에 딱 배어서 잘 절제가 되어요. 그런데 절제 따위가 뭐냐 하면서 확 풀어놓게 되면 마치 우리는 풀어놓고 줄에만 묶은 호랑이 다루는 느낌이고 또 줄까지끌러놓은 호랑이로 되는 거 아니에요. 요즘 멧돼지들 난리 치는 게 그런 거 잖아요. 그런 식으로 된다는 거죠.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계속 그 사람의 영혼이 더러워지는 거예요. 물론 즐거움을 그렇게 간간이 느끼면서 말하자면 지나가면서 하나의 여흥 같은 거죠. 대여섯개 사입을 거 그저 하나 색깔이라도 괞찮은 거 질 괜찮은 거 입으니 좋다 뭐 그 정도. 간식같은 즐거움이어야죠. 그게 자기 인생에 중심적 즐거움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가. 오늘 말씀처럼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의 똘만이가 됨으로써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통해 영혼이 순결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주님의 사랑과 교통하고 그런 것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해요. 말은 쉽지만 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취향 자체가 세속화되어 버리면 그런 기쁨을 느끼는 게 쉽지 않아요. 사도 바울이 얘기 하잖아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피로 속죄함을 얻었을 때,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거기서 계속 기쁨을 느껴야 해요. 그러면서 그 사람이 진리의 말씀인 이 하나님 음성, 주님의 말씀 율법 그걸 사랑하고 지키고 그걸 따라 살고 하는 가운데 더 놀라운 지혜가 생겨나고 아름다운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은 아름다운 영혼의 투사에요. 영혼이 아름다우면 찬란하게 비추는 빛이 아름다운 마음을 만들어요. 그 아름다운 마음은 사람을 행동하게끔 만드는 움직임의 공장이에요. 아름다운 마음이 작용하면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 또 인간의 영혼, 그게 투사한 마음, 마음이 가져온 삶, 삶이 가져온 하나님과의 관계가 휘둘리면서 하나의 질로 통일되는 거예요. 여기에 인간의 진정한 쉼이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워요. 뭐냐하면 인간의 육체에 대한 욕망이 어디서 온다고 했어요. 기대에서 오잖아요. 영혼에 대한 신령한 욕망도 그래요.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 받으면 자기가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나에 대한 기대가 없어요. 그러니 신령한 욕망이 발동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 경험해보고 나면 다음에 은혜가 부어지면, 하나님뜻대로 순종하고 말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갈 때 영혼의 자유함이 가져다주는 큰 행복에 대한 기대가 계속 증진되는 겁니다. 기대감이 많아지니 어떻게 되요? 욕망이 많아지는 거죠. 욕망이 많아지면 어때요? 그게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간절함이 생기는 거예요. 오늘 하나님이 나 안 만나 주시면 오늘 여기서 묻어주세요. 목숨 걸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어느 것이건 모든 것이 동질을 이루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는 거죠.
내 영혼 날마나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그러면 자기는 그렇게 생각을 못했는데 주위 사람이 보기에 그 사람이 너무 아름답게 변해가는 거예요. 점점. 그러면서 그 형상을 본받아 가는 거죠. 그러니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것이 피눈물하는 고통속에서만 본받아간다고 하면 안 돼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자원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인간의 참 미덕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기쁨을 느끼면서 게속 그렇게 그 형상을 닮아가는 거죠. 그 속에서 참다운 만족을 느끼죠. 그래서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고 손짓해도 내가 진정 쉴 곳이 어딘지 발견해요. 예수 안에서 쉼을 누리고 아무리 많이 즐거워해도 그 즐거움 때문에 주님의 명령을 어길 염려가 하나도 없는 그 원천에서 그 방식으로 즐거움을 찾아요. 그러니 그 즐거움을 누리면 누릴 수록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거죠.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니까 이 많은 욕망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마음에 참된 여유가 생기는 거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 다른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 이런 것들은 모두 쉼에서 오는 겁니다. 자신의 영혼이 쉼을 누리고 있으면 여유가 생겨요. 그래서 너희 관용을 모든에게 알게하라.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평강이예요. 샬롬 이에요. 하나님의 평강을 신가가 충만히 느낄 때 다른 사람 관용할 수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한 참 된 즐거움을 끊임없이 목말라 하면거기서 생수와 같은 기쁨들이 솟아나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죠. 그들은 묙망을 따라 살고 그게 채워질 때 자지러질 듯 기뻐하지만 그 기쁨 때문에 그 영혼은 계속 파괴되어 가는 거죠. 그 영혼은 더러워지고 존재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계속 이탈해요. 그래서 아주 지저분하고 추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걸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겁니다.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도 절약이 되요. 쓸데없는 많은 기도가 필요없어요. 왜냐하면 욕망이 많으면-기도를 못하는 건 별개 문제고-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많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욕망을 비워버리고 나면 쓸데없고 사사로운 사랑에 매인 기도제목이 사라지고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기도 제목들이 안개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의 10년이 섞인 마음 가지고 산 사람의 100년보다 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해 살게 되는 것이죠.
더하고 싶지만 지난 주일도 무리했으니 오늘은 이 정도 하겠습니다. 결론! 그러니까 욕망대로 사는 사람의 친구가 되지 말고 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도 안 돼., 그들의 즐거움이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못하니 얼마나 박탈된 존재인가, 그러지 말고. 그런 걸 다 잃어버린 대신 우린 더 좋은 걸 얻었잖아요.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마음 속에 새긴 비밀을 나는 말할 수 없네
사람들에게는 없는 예수가 우리에게 있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할 때 주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추루한 욕망에 메어 짐승처럼 우리 마음에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자고 악한 말을 쏟아내고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입니까?그런데 우리 맘 속에 아직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부자연 스럽게 느끼고 괴로워하는 마음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가 우리 속에서 죄 때문에 소진되고 영혼은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우리의 심령은 파괴됩니다. 오늘 이시간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 드리겠습니다.
3. 고독과 자유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시편 68:6 上)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외로운 자의 위로가 되어주신다는 이야기를 여기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욕망과 자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고독과 자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그리고 크신 은혜를 우리에게 예비하고 계신데도 곤고하게 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첫 째 시간에는 곤고하게 사는 이유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곤고하게 사는 이유가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결국은 곤고하게 된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곤고하게 사는 이유는 우리들이 외로움을 이 고독한 때를 하나님 앞에 선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이 곤고하게 산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고독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우리들이 흔히 말할 때에 거룩한 고독, 세속적인 고독,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사실 세속적인 고독이라는 말은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지만 거룩한 고독, 진지한 고독이라는 말은 꾀 여러 번 사용한 것으로 제가 기억이 됩니다. 그렇지만 이 구분은 처음부터 그 고독에 어떤 고독은 거룩한 고독이고 어떤 고독은 태어날 때부터 세속적인 고독이고, 이렇게 근본부터 다른 두 고독이 인간의 마음속에 생겨난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말을 보면 외로울 "고" 에다 홀로 독입니다. 그래서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이 고독입니다. 이 고독이라고 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냥 혼자 있는 것을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고독이라는 것이 뭐냐면? 사랑을 받고 사랑할 수 있는 기대가 끊어진 상태 그것이 고독입니다. 이 인간 사이에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든지, 죄가 들어온 후든지 간에 어쨌든지 간에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은 모두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애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을 때에 그들에게 주신 사랑 자체가 의존적인 사랑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랑의 반대되는 사랑의 모양이 뭐냐면 하나님의 독립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날 인간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은 더 위로 올라가보면 하나님 안에 있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 교통하시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는 서로 의존성이 없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하시지만 사랑하심으로서 성부가 성자와 성령에게 사랑을 받으심으로서 비로소 성부가 된다거나 성자가 성부와 성령의 사랑을 받아야지만 비로소 성자가 된다거나 성령이 성자와 성부의 사랑을 받아야지만 성령이 되시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이시지만 서로의 사랑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지만 그것은 독립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투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런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기는 했지만 무한히 완전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무한히 완전한 존재였다면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죠.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 속에서 서로를 의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의존하는 분이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지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되지만 그 의존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의존하며 살도록 그렇게 할 때에 인간은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니까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그리 좋아보이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본질적인 하자가 있었느냐면 그것은 아니거든요. 아담이 병이 들거나 어디가 부러져서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아니었는데도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었지만 그가 혼자 있는 것,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며 의존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죠.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아담 하나 만들어 놨다가 한참 두고 보니까 별로 신통치 않아서 하나 더 예정에도 없이 하나 창조한 것이 하와라고 하면 여자들이 너무 섭섭하죠. 뭐 어쩌다 보니까 할 수 없이 태어난 인간이라더라. 그러면 안 되죠.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 차례대로 창조를 하신 것이죠. 그 때에 그 하와를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만드시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아, 남자는 그런 점에서 여자와 다르다. 왜 남자는 하나님이 직접 손으로 빚으셔서 원 재료를 하나님께서 직접 건드리고 손대셔서 흙으로 빚어서 후, 하고 만드셨지만 여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으니까 남자가 우월하다. 그러는데 사실은 갈비가 흙보다야 비싸지 비싸다, 싸다 보다도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갈비가 훨씬 완전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갈비가 그 굴러다니는 티끌보다야 훨씬 완전하죠. 그러니까 티끌로부터 창조된 인간에 비해서 갈비에서 창조된 그 인간이 완전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남성들의 얼굴이 영 편하지 않는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참 귀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보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머리에서 뼈 하나 뜯어서 창조하시든지, 뭐 발가락의 뼈 하나 뜯어서 창조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그 많은 수 백 개의 뼈 중에서 갈비뼈를 취하신 것입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위의 뼈에서 창조하지도 아니하시고,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에서 취하지도 아니하시고 사랑을 받도록,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취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만들었더니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오시니까 아담이 그를 본 순간 자기의 뼈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갈비에는 살도 붙어 있잖아요. 갈비 살, 그러니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영혼이 곤고한 이유 3 이어서
이를 남자아세서 취하였으니 이를 여자라 하리라. 이것이 한 몸이라는 그래서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이 의존적 관계의 사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별도의 흙에서 여자를 만들지 아니하시고 남자에 의해서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서로를 의존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제 무슨 문제가 생겨났느냐면 이러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냥 이용되는 사랑의 관계이여야 하는데 이것이 뒤 바뀌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서로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것이 이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죠. 그렇지만 어쨌든지 인간에게는 이러한 의존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을 사람도 없다. 라고 판단될 때 인간에게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은 사실은 죽음의 공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이 외로움입니다. 사랑할 대상이 없고, 더 이상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을 대상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이제 확신이 되게 되면 아주 비참한 인간은 아주 비참한 지경으로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독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왜 그렇게 사랑을 할 희망도 끊어지고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어떠한 소망도 다 끊어지느냐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으로 접어두고 일단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어쨌든지 인간은 깊이 외로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고독의 때는 그 때 느끼는 고독은 사랑할 희망도 끊어지고 사랑을 받을 희망도 끊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가 고독인데 이제 이 고독한 상태 이 자체는 이런 감정 자체는 중립적인 감정입니다. 문제는 이 중립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그 고독에 뭐가 채워지느냐. 그것에 따라서 그 고독이 거룩한 고독이 될 수 있고, 아주 세속적인 고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희망도 끊어진 것 같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 같은 희망도 모두 끊어진 것 같은 상태가 고독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는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이 이런 때가 찾아옵니다. 이런 때가 굉장히 많이 찾아옵니다. 이런 때가 인생을 살면서 아주 급격하게 찾아오는 때가 두 때가 있습니다. 사춘기 때 이런 때가 찾아오고 또 하나는 갱년기 때에 이런 것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 안 해준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못 느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느낄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진짜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고, 내가 사랑을 해 줘도 진짜로 받아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사랑을 해 주는데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기가 못 느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주는데 그 사람은 받아주는데 자기가 이렇게 사랑을 하면 자꾸 거절당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때가 되면 사실이야 어쨌든지 간에 어쨌든 느끼는 바에 의해서 이 사람이 깊은 고독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텅 빈 고독한 상태가 신앙수준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에게도 언뜻언뜻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독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이렇게 따뜻한 상태보다야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지 그런 텅 빈 것 같은 상태 자체는 중립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곤고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고독의 때를 만날 때 이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해소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잘못된 방법으로 해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하는 것이 뭐냐면 인간이 그렇게 외로움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끊어진 것 같은 고독이 올 때에 인간이 빠지기 쉬운 것이 뭐냐면 자기를 강열하게 자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이 굉장히 선량한 사람인데 어느 순간에 극단적인 쾌락을 선택하거든요. 이런 것들이 전부다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면 외로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요즘에 청소년들이 컴퓨터에 중독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참 많이 느낍니다. 오히려 옛날에 시골에서 그런 컴퓨터 없고, 텔레비전 없고, 그래도 아기자기 하게 잘 살았거든요. 해만 지면 볼게 없어요. 저도 시골에 가끔 가서 있어보면 캄캄해요. 그리고 전기도 안 들어오잖아요. 옛날 시골은 그리고 한 집안에 호롱불을 두 개. 세 개 켜 놓는 집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이 난리를 치죠. 왜 괜히 석유를 없앤다고, 불하나 켜 놓고 온 식구가 다 모이는 것입니다. 화로 하나 펴 놓고, 거기에다 감자 몇 개 집어넣고. 그리고 거기에 모여서 무슨 모일 때마다 쭉 둘러앉아서 오락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거기에 앉아서 할아버지는 뻐끔뻐끔 졸면서 담배 피우시고 어머니는 캄캄한데 앉아서 뭐라도 한다고 그러시고, 애들은 그냥 거기에 가만히 앉아서 툭툭 치고 싸우고 놀고, 그냥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모이는 것도 아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제 가족들을 사랑하고 서로 기대고 가족이라는 개념들을 가져다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느냐면 문명이 우리에게 편리하도록 가져다주는 모든 것들이 서로를 다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다 쳐다봐요. 우리 사이좋게 텔레비전이나 보자, 서로 아무 교통이 없어요. 각자 보는 것입니다. 끝나면 끄고 자자. 그리고 자는 것입니다. 교통이 없죠. 컴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이 정겹게 하는 무슨 컴퓨터가 있다면 좋은데 그런 것 없고, 게임하기 전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혼자 하면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각각 사람들을 이렇게 고독하게 단절시켜요.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요즘 뭐가 생겼냐면 핸드폰 증후군 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막 불안하고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수시로 열어보고 괜히 쓸데없이 자기 얼굴 호떡 같은 얼굴을 사진 찍어서 뭐해요. 찍었다.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그렇게 만지막 거려야지만 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 다른 가상의 세계로 자꾸 다가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냄새가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가서 20시간씩 p.c,방에 앉아서 그것을 하다가 무슨 환각 증세들이 오는 이유가 결국 왜 그러느냐면 물론 거기에 어떤 자극에 빠지고 그런 것도 있지만 결국은 뭐냐면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에 극단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외로움을 달래고 그것들을 처치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면 이 외로움 때문에 인간이 계속해서 파괴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자극해서 그것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어떤 자극을 주어서 외로움을 쫓아내 보지만 그러나 그 자극이 언젠가는 끝날 때도 있고, 무뎌질 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제 자극이 이제 더 이상 자극이 되지 못하는 것이죠. 그 자극이 더 이상 자극이 되지 못한 그 시점에 딱 왔을 때 그때의 무서움을 아세요. 밀물처럼 외로움이 더 강렬하게 밀어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인생의 풍요로움은 막 어울려 사는 시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홀로 사색을 하고 홀로 자기를 돌아보는데서 인생의 부요 함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니 신앙이나 불신앙이나 떠나서 인간이라는 것이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을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 속에 어울려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는대서 하루를 마치고 쓰러져 자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외로워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미 외로워졌지만 그 외로운 현실을 직면하기 싫어하는 것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계속해서 곤고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지난 시간에 욕망에 계속 사로잡히면 자유가 없다. 라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욕망이 좋아서 욕망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도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뭐 죄인들이 언제나 탈선하지만 특히 탈선이 많은 때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다닐 때 탈선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사춘기 때에 탈선하는 것이죠. 그렇죠. 청소년 시절에 탈선합니다. 군대 갔다 오자마자 탈선했다. 그런 것 있습니까. 그때쯤 되면 철이 들어서 자기를 챙길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언제입니까. 통계에 의하면 인간이 살면서 도덕적 개념이 가장 해이해지는 때가 갱년기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갱년기 시리즈를 한번 할까요? 그래야 되겠어요. 선교사의 아내 한분을 만났는데 상담할 것이 있다고 해서 무엇을 상담할 것이 있느냐? 그래서 일층에 커피숍에 앉아서 상담을 하는데 뭐냐면 제가 주님을 만나고 너무 뜨거웠어요. 그래서 제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얼마 전부터 그렇게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렇게 섭섭한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드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예수님 안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옥에 보내실까? 내 주위에는 이슬람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리고 그렇게 지옥에 보내시니까. 이렇게 선교를 하려고 애를 써야 되고,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실까. 그러면서 뭐 이제 영혼을 봐도 사랑스럽지도 않고,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 지금 굉장히 영혼이 침체에 빠진 거죠? 제가 지금 굉장히 잘못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아니요. 깜짝 놀라요. 왜요.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누구나 다 지나는 강이요. 그래서 뭐냐면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도 전도하고 그러는 것이 싫어도 그래도 할 때 기분이 좀 좋은 것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자기는 그렇게 영화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라도 좀 보고 있으면 남편이 와서 “이 사람 말이야. 무슨 사모라는 사람이 그런 것이나 보고 말이지.” 그러면서 핀잔을 주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보고 있다가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얼른 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끄지 마시고, 끝까지 광고 나올 때까지 보세요. 그리고 제가 그랬어요. 사모님 하고 싶은 것을 해보세요. 그리고 누구나 다 지나는 강입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하나님 싫어하고 죄 짓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호르몬 수치만 떨어져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서 진찰 받으시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시고, 그러면서 극복하세요. 이 사람도 다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어요. 영화 좋아하신다고 하니까 가끔 비디오나 빌려다가 보시고, 우리 열린 신문에 그 비디오 어떻더라. 그런 것 좀 써주시겠어요? 그랬더니 아 목사님 그런 것을 어떻게 써요. 그래서 괜찮아요. 얘기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안 믿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기적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 사모님에게 그것은 패역한 짓입니다. 당장 일어나서 40일 금식기도 하고 속 차리시오. 하루에 3시간은 기도하고 진리를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교리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많이 위로해줬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 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제가 잘 위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계속 있으면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진짜 망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외로움이 밀려올 때 우리들이 탈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도덕적인 감각들이 아주 해이해지는 때가 두 때가 있는데 그것이 언제냐면 사춘기 때 그다음에 갱년기 때 도덕적으로 굉장히 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아주 굉장히 잘 살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마지막 지점에 가서 실망스러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외로움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인간적인 지혜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 즐거워해야 되죠. 그런데 그것은 틀림이 없는데 사람들 속에서 만남을 즐거워하고 그리고 사람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하는 이 관계 자체를 아주 즐거워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길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이기면서 그것에서 기쁨을 찾고 보람을 찾고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 사람을 싫어하고 관계를 기피하는 사람들 중에서 감사에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번 추수감사절 만나서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 뭐냐면 그렇게 외로움 속에서 살다가 그렇게 타락한 방식으로 그 외로움들을 피해보려다가 인생의 곤고한 골짜기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다 모아주신 것입니다. 모아주셔서 이렇게 살게 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함께 교통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 라고 하는 것 얼마나 좋아요. 요즘 배우 이름도 잘 모릅니다. 만은 가끔 차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들으면 그래요. 누가 차를 붕 몰고 가다가 “주유소요. 주유소 갈 때 뭐 바라고 가나요. 좋은 기름 하나 바라고 가죠.” 여러분도 들은 기억나죠. 아 그것을 듣는데 그런 생각이 났어요. 아, 이것 우리 교회 광고하면 참 좋겠다. “교회요. 교회 뭐 바라고 가나요? 아주 좋은 신앙하나 바라고 가죠.” 할렐루야. 얼마나 좋아요. 외국에 가면 돈 내고 자기가 기름 넣거든요. 뭐 그렇게 젊은 애들을 미니스커트를 입혀서 그런다고 뭐 기름이 더 많이 들어가나요. 왜 쓸데없이 돈을 써요. 나는 그것 다 돈 주고 빌려 왔을 것 아닙니까. 고깔을 쓰고 박수를 치고, 그래요 그리고 아니 기름 넣으러 왔으면 기름 넣고 보내주면 되지 뭐 주는 것은 그렇게 많아요. 뭐 휴지, 세차권, 생수, 커피, 어디 가니까 강냉이까지 주더군요. 그래서 내가 거의 안 받아요. 생수는 내가 가끔 먹지만 다 필요 없다. 그러면서 내가 항상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돈을 가지고 헛돈 쓰지 말고 기름이나 좋은 것 사서 넣으세요. 주유소. 뭐 바라고 오나요. 좋은 기름 하나 바라고 오지. 김 목사가 주유소 가는 까닭은. 그러니까 나는 이제 이 교회 당에 들어오는 사람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열린 교회에 들어와서 나가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고, 뭐 천장은 낮고 예배당은 덥고,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뭐 그러죠. 아, 교회에 다른 것 바라고 가나요. 진리하나 바라고 가죠. 나가면서 진짜 다시 못 오겠네. 지난 주 보니까 설교가 120분이야. 너무 길고 말이죠. 힘들지 않으세요. 아이 뭐, 교회 설교 일찍 끝나기를 바라고 오나요. 진리가 선포되면 되지. 아니 이렇게 좀 초연하고 의연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또 엊그제도 또 누가 설교 길다고 인터넷에 짧게 올렸더군요. 그래서 내가 길게 썼어요. 논문을 한편 써서 올렸습니다. 보세요. 주유소라는 것이 남는 돈이 많아요. 뭐 4%가 남는데요. 그것 가지고 1억 원짜리 세차기 사다 놓고, 공짜로 차 세차 해주지 그 차 세차 하면 그 사람 인권비 주지. 휴지 주지 그것도 다 돈 주고 사지. 거기에다 생수 주지. 강냉이 주지 뭐 주지, 뭐 주지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기름의 질이 계속 떨어지는 것이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인간이 갱년기에 외로워져서 그래서 결국은 쓸데없는 대로 가서. 여기도 예수 안 믿었으면 여러분 갱년기에 춤바람 나고, 가정 파괴될 사람 많잖아요.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우리를 어느 정도 보호해 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잘못된 기회는 고구마에게도 잘못될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러니까 그런 대로 가지 않고 이렇게 교회당에 모여서 그래서 얼마나 감사해요. 그대들이 있음으로 내가 있다. 이렇게 다들 이렇게 있다. 그래서 얼마나 좋아요. 사람들이 다 있어서 내가 그렇게 외로움 속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타락한 정서로 갈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는 지체들을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 얼마나 감사한가. 집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가도 보면 애들 때문에 들볶여 가지고 죽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애들 없어보세요.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어느 교회에서 건축 헌금을 하는데 우리 교회보다도 더 빨리 성장을 했던 모양입니다. 금방 돈 잔뜩 들여서 이사 갔는데 또 이사 간다. 그리고 또 이사 가야 된다. 그러니까 제직회 시간에 어느 집사님이 일어나서 불평했어요. 아니, 뭐 교회가 은혜로 와서 예수 믿으려고 왔더니 2년에 한 번씩 교회가 이사를 가느냐. 힘들어서 못 살겠다. 이제 팔 집도 없고 말이지. 그러면서 불평하니까 연세 많으신 장로님 한분이 와서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외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대학 2학년 다닐 때 까지 같이 살았는데 얼마나 돈을 달라고 하는지 죽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구 농구 이런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운동화를 사 주면 다른 애들은 6개월 쓰는데 얘는 3개월 쓰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사 달라고 하고, 옷도 사주면 매일 어디 가서 뜯어먹고 와서 새것 사 달라고 하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힘들었는데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로님이 지금은 운동화 사 달라는 사람도 없고, 옷 찢어졌다고 교복 새로 사 달라는 애도 없고,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달라고 할 때 그 아이가 달라고 하던 그 시절로 나는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 교회 교인이 늘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사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것이 좋은 것이냐. 그러면서 타일렀어요. 모든 지체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아멘. 하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집에 가서도 보면 아이들이 있고, 그러면 얼마나 감사해요. 그야 뭐 남편이 좀 부족하고 그래도 바가지 긁을 남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그 인간 없어봐, 그러면 바가지는 어떻게 긁어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요. 그 사람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이 미끄러지지 않게끔 다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게 그런 모든 것에서도 불구하고 확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 외로움을 달래지를 못하고, 깊은 타락으로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경우에 전부다 어떤 일들이 먼저 있느냐면 아내하고 살아도 남처럼 느껴져요. 교회에 와서 웃고 밥 먹고 그래도 이 사람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게 느껴져요. 자기 몸으로 난 새끼들이지만 관계가 없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있는데도 다 자기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똘똘 자기 나름대로 장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 속에서 자살하고 그러는 사람들 있잖아요. 조짐이 다 나타나요. 지난번에 죽은 어느 여 배우도 조짐이 다 나타났죠. 조짐 없이 그런 일이 날 수는 없습니다. 조짐이 다 나타나요. 그런 벽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사실은 안 그런데도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은 끊어졌다. 그리고 그다음에 타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세요. 뭐 그렇게 감사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감사하세요. 교회를 주신 것도 감사하고, 가정을 주신 것도 감사, 또 가끔은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프다. 라는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본인에게는 좀 이해가 안 되겠지만 감사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아픈 것을 통해서 아픈 만큼 성숙하고 또 깨닫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를 깊이 감사하세요. 추수 감사절에 한번 하나님 앞에 잘 생각해보세요. 먹고 입고, 쓰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나는 추수 감사절이 오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 먹고, 입게 해 주신 것도 참 감사하죠. 고난도 참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해요. 여러분 같은 사람 주셔서 그래서 이렇게 관계를 맺고 목자로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는 한번 여러분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나는 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해요. 왜?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진리를 계속 탐구하게 되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없다면 내가 뭐 진리를 열심히 탐구해본들 어디에다 쏟아놓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이렇게 있으니까 하잖아요. 여러분 가운데 속 썩이고 그런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또 내가 연단되니까 감사하고 또 속 썩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께 속 썩인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물론 그분들이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어서는 안 되지만 절대로. 나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이 참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고, 그런 분인데 뭐 교회도 한 200 명밖에 안 모이는 교회에 가서 1300명까지 교인이 늘어났어요. 목회를 잘 하셔요. 나이는 젊으셔도 탄탄해서 뭐 진짜 노련하시면서도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몇 달에 한 번씩 겸손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요. 동생이 예수를 안 믿어요. 꼭 술 먹고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씩 형네 사택이 있는 골목에 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 모여 살잖아요. 지나가면서 돌 맹이로 교인들 유리창 다 깨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난리를 치면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아무게야, 우리 형이 목사거든, 나는 우리 형의 은혜야, 우리 형을 겸손케 하는 가시란 말이야. 우리 형이 나 때문에 사람 되었데.” 그러면서 밤새도록 돌아다니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목사님이 다음날 와서 교인들 앞에서 얼굴을 못 드는 것입니다. 유리창 다 물어주고, 그리고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모두 생각하면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봐요. 그러면 감사한 것 너무너무 많아요. 미끄러지지 않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꾝 붙들어주신 것, 그런데 교회 안에 있으면서 지체들과 조금 부딪히고 힘들고 그런 것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는 안 그러나 자기는 살다보면 발톱 하나 빠져서 그 발톱 하나가 온 몸을 힘들게 할 때도 있고, 자기는 원하지 않는데 넓적다리에 가래톳이 서서 가야할 곳을 못 가는 때도 있는 것이고, 몸살이 나서 기침이 나고 콧물이 나는 바람에 발은 아직 멀쩡한데 가야 될 곳을 못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한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그런 대가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눈 아픈데 발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눈 아픈데 발이 걸어서 안과 까지 데려다 주느냐고요. 그것이 한 몸으로 사는 길이니 어떡해요. 발은 안 아픈데 눈 아픈데 발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래야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 미끄러져서 바보 같은 구렁텅이로 안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이 아니라. 시인은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은 고독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 했으면 별로 말 발이 안서요. 그런데 이 다윗은 그야말로 고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주 전에도 설교했지만 아버지에게도 사랑을 별로 못 받았습니다. 형들에게도 물론이고, 아내에게도 처음에는 사랑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살 깊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나라를 일으킬 때에 다윗을 따라와서 그 나라를 일으키는 주축 세력들이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병든 자. 원통한자, 빚져서 도망 다닌 자.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동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의 마음을 깊이. 다윗에게서 어떤 그런 외로운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는 목자 적 심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 다윗의 품 안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병들고, 원통하고, 빚지고, 이래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다윗의 품 안으로 다 모이게 된 것이죠. 거기에서 사랑의 맛을 알게 되니까. 이 사람들이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서 왕국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로운 생애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외로운 속에서 산 사람이 오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가 고독한 자였기 때문에 그 고독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 받을 것이라는 희망, 사랑할 것이라는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 속에서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철저하게 단절된 마음이 될 때에 그 사람의 모든 관심은 자기가 정말 사랑할 수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응집되어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응집되어서 모인 그것이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 불같은 세상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고 모아져서 하나님을 응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아주 절절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피 눈물 날 정도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에 잘 나오느냐면 시편 42편에 잘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왜? 그 이방의 땅에 망명을 갔는데 사랑 받을 대도 없고, 사랑 할 대상도 없어요. 모든 희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상태에요. 그 때에 영혼의 모든 시선을 다 모아서 그래서 하나님 한분에게 주목을 하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제가 갈급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팔레스타인에서 사슴이 교미기입니다. 교미기가 되면 이제 수사슴들이 암 사슴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 이제 몸에서 체취가 나는데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갈증이 신체적으로 엄습해옵니다. 그러면 짝짓기는 물 건너가고, 물을 너무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그렇게 흔하지 않잖아요. 왜냐면 계속 따가운 햇볕 가운데 걸어가다 이제 눈에 헛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힘을 다해서 달려가다가 결국 가보면 없어요. 결국은 거기에서 눈을 부릅뜨고 갈증으로 사슴들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쓰러질 때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사슴의 시체들을 이 시인은 본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외로움은 그렇게 사용된다면 이 외로움은 너무너무 좋은 외로움입니다. 도시 같은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시장 바닥 같은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도 빈들 이었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신 곳도 광야였죠. 그래서 모세에게 내 백성을 건져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엘리야의 광야, 세례요한의 광야, 예수님도 광야, 사도바울도 아라비아의 광야, 그리고 마지막에 사도요한도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외로운 섬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낼 때에 위대한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외로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그 외로움에 마음을 모두 모아서 세상에 대한 기대를 다 끊고 세상으로부터 많은 욕망을 충족시켜서 자기가 그 안에서 행복해질 것이라는 모든 기대도 다 버리고 그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쭉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 하나님 앞에 혼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 속에서 하나님 자체를 응시하는 것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응시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꽉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뭔가 하나에 끊임없이 고정되려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정되려는 경향이 살아나요. 그래서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또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고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딱 고정된 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는 거죠. 깊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시인이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신다고 말하느냐면 “가속 중에 나로 처하게 하시며” 여기에서 “가속” 이라는 것은 가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고독한 중에 하나님을 응시하는 사람,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고독하게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응시하면서 나의 피난처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당신의 가족 중 하나로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 있을 수 없죠. 내가 그 때 간증했던 것 기억나시죠. 저의 노 스승을 찾아가 뵈었을 때 94이나 되신 노인네가 아파트에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시는데 목사님 외로우셔서 어떡해요. 그랬더니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나 혼자 있나 뭐. 예수 안 믿으면 몰라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주님과 항상 같이 있지.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요. 언제 주님이 부르시든지 삶과 죽음의 경계 같은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이렇게 고독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채우게 될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놀라운 친밀함을 보여주셔요. 그래서 보면 외로울 때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응시하면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다가가요. 왜냐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기 때문에 기도나 아니면 말씀 이 모든 것에 대한 강한 힘과 영향이 언제 오느냐면 집중했을 때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금식 같은 것 하면 우리가 실제로 기도를 그렇게 많이 못 하거든요. 그런데도 거기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가 뭐냐면 포식에서 오는 정신의 분산이 사라지고, 24시간 하나님을 쭉 응시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도의 놀라운 힘이 나오게 됩니다. 소리 버럭버럭 지르고 책상 두들기고 그런다고 해서 기도가 강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집중 할 때 마치 렌즈를 통해서 태양 빛이 들어오면 종이를 막 태우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응시할 때 거기에서 기도의 놀라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듣는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 하는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리고 꼭 오늘 주님을 만나야 된다. 라는 마음으로 듣는 것과 들리면 듣지 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응시하게 될 때 하나님이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놀라운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놀라운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던 그 때에는 약간 외로웠을 때입니다.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에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하고 풍부한 사랑을 받고 그 충만하고 풍부한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수 있는 그런 삶을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워하지 마세요. 정말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교회, 주신 가족, 섬길 수 있는 지체, 사랑 받을 수 있는 환경, 이런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 감사하면 섬길 힘이 납니다. 감사하세요. 언젠가 한번 누가 아파서 병원에 누워서 낙심에 깊이 잠겨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뭘 그렇게 낙심해요. 죽을병도 아닌데 당신이 없는 것이 뭐가 있어요.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지, 당신이 신뢰하는 목회자가 있지, 당신이 여기 누워 있어서 기도해 주는 구역식구 들이 있지 주님이 이 병상에 계시지 안 가진 것이 뭐냐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정말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구나. 참 좋으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로울 때마다 선물이다. 라고 생각하세요.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구나.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그러면서 주님을 깊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시면서 아주 친근한 사랑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힘을 얻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죠.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4. 미움과 자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 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 일서 3:15)
곤고한 이유에 대해서 우리들이 몇 주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독과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제 미움과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곤고하다. 라고 하는 것은 속박을 받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우선 평안하고, 무엇에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를 속박하는 제일 큰 요인이 무엇일까요? 환경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속박합니다. 그래서 그릇된 욕망을 품게 되면 자유하기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의 영혼에 자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게 되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본문은 어떤 상황에서 써졌느냐면 사도요한에 의해서 기록 되어졌는데 이 수신자들은 아마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이렇게 보고 당시에는 사도들에게 편지가 오면 회람이라. 그래서 편지가 오면 그것을 교회마다 돌려보았습니다. 그 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몇 천 명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런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가정 별로 모였으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중국에 있는 가정 교회와 비슷한 것입니다. 자기네 집안 식구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네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그 안에서 돌려서 읽는 회람서신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당시에 아주 중요한 이단 하나가 생겨나서 교회를 막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이단들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단이 그렇게 진리이면 자기네들이 가서 열심히 개척하면 될 것을 꼭 교회로 오죠. 그렇죠. 이단이 그렇게 진리이면 저기 멀리 시베리야나 이런 곳에 가서 에스키모인들에게 가서 열심히 선교를 하든지, 아프리카에서 가서 토인들에게 선교를 하든지 하지 꼭 교회로 들어와서 이렇게 빌붙죠. 그러는 것이 이단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그 이단이 무엇이냐면 영지주의라는 이단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신비사상이 마나서 만들어진 그런 종류의 이상한 기괴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의 주장의 핵심이 뭐냐면 영혼과 육체를 따로 떨어진 세계에 속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이원론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은 선한 세계에 그리고 그것이 밑으로 내려와서 물질로 다가올수록 악한 세계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들이 직면했던 제일 어려운 기독교의 교리는 뭐냐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은 신이신데 그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다. 라고 하니까 이것은 이제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데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안 맞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보느냐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의 실제가 아니라. 가짜로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육체로 오시고, 육체로 죽으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분이 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참 사람의 몸처럼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것마저도 사라져버리고 순수한 영으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인성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니까. 예수님의 참 사람 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죠.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요.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다고 하는 생명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생명을 버리고 죽으셨다. 라고 하는 이 구속의 대속의 교리가 설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놀랍고 신비한 세계에 속한 영적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철학적이죠.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교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느냐. 우선 기본적인 예수님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속죄의 교리를 흔들죠. 그다음에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는 양성의 교리를 흔들죠. 그리고 이 기독교의 당시의 가장 중요한 구원론과 기독론의 중심 기둥을 흔드는 것이죠. 실제로 교회가 직면하게 된 어려움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실천적인 것이었습니다. 뭐냐면 육체와 영혼이 나눠지고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체적인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이 육체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된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고, 육체가 그렇게 죄를 짓는다고 해서 영혼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보면 요즘 열린 교회에서 이루어진 주일 설교를 보면 그 사람들이 보면 이단이라고 생각했겠죠. 육체로 악을 행하는데 그것이 마음을 통과해서 영혼에 투사되면서 영혼의 아름다움이 깨뜨려지고 파괴되고, 이런 것을 웃긴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아니 뭐 물체에 불과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정신을 통해서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영혼이 파괴되고, 다시 질서가 잡히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겠느냐. 웃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되죠. 엄격한 경건을 추구하고, 신앙의 의무를 행하면서 살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영지주의는 아니지만 오늘 날도 그런 식의 가르침들이 아주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서 내가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이지 빌리비즘” 이라고 합니다. 쉬운 믿음 제일주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행동 같은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그것은 바보들이 믿는 종교입니다. 절대로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도 중요하지만 누가 믿느냐? 믿는 사람이 누구냐? 또 성화의 맥락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누가 믿느냐? 쉽게 얘기하면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 자체는 구원에 이르는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인데 그럴 수 없잖아요. 그다음에 무엇을 믿느냐. 도 중요합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것을 믿느냐? 아니면 무엇을 믿느냐. 엊그제도 장로님 한 분을 만났는데 자기는 이렇게 그 장로님은 연세가 많으신 장로님인데 자기는 부모님이 목사님이셨답니다. 여러분 그것 들으면서 저도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복장이 터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무엄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는데 9살 때부터 어른 예배에 참석을 시키셨답니다. 그러니까 주일 학교 예배 참석을 하고 어른 예배에 참석 시켰는지 주일학교고 뭐고 없이 어른 예배에 참석 시키셨는지 모르는데 꼭 아버지 목사님이 앞자리에 앉힌답니다. 그러니 9살짜리 어린애가 그 2시간씩 계속 되는 예배에 무슨 말귀를 알아듣겠어요. 한국말이니까. 알아듣겠지만 이해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인생 사는 것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9살짜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손장난도 하고 몸도 꼬는 거예요. 그날 저녁에 피 터지게 맞는답니다. 아버지가 몇 번 신호를 보낸답니다. 그 날은 이제 피 터지게 예배 끝난 다음에 종아리 걷어서 버드나무 가지를 회초리로 꺾어서 피가 나게 때린 답니다. 네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되먹은 행동이냐? 그리고 피가 나도록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9살 때부터 굳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우리 교역자들 보고도 얘기를 했습니다. 뭐냐면 여러분들도 들어보세요. 예배 시간에 이 자세는 부동자세가 원칙입니다. 그저 인간이니까 움직이는 것이 죄라는 것이 아니라. 아니 몸과 마음을 다 집중하고 특히 설교시간에 제발 이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데 부산 떨 사람들은 이 앞자리에 앉지 마세요. 머리가 다 아파요. 그 앞에 앉아서 주머니 뒤지고, 핸드폰 울리고, 또 무슨 어디가 가려운 곳이 그렇게 많은지 이가 있으신가. 왜 그래요. 그러다가 또 그 앞에서 졸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는 너무 힘들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저 뒤로 가세요. 말씀 전하는 그 시간에 부동자세로 똑바로 집중하면서 들어야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배가 드려졌는데 지금은 어때요. 하나님 앞에 집중할 필요도 별로 없죠. 왜냐면 집중할 시간도 별로 안 줘요. 찬송 부르고 뭐 나와서 율동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설교 간단하게 20분이나 25분 그렇게 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니까 사람이 깊이 있는 신앙으로 자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은혜, 은총, 이런 것만 계속 강조하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공평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신다. 라고 하는 공정한 그런 하나님의 공정한 성품을 가르쳐 주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자랄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어요. 성경을 주신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데 쓸모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다. 늘 좋고, 달콤하고, 기분 좋고, 격려 받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고 용서가 있고, 그것뿐이다. 그러면 성경을 설교한 것이 아니잖아요. 칼빈이 그것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설교가 성경대로 설교하게 되면 성경이 갖는 목적하고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어떤 사람은 그래요. “목사님 요즘 우리에게 위로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저 한테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 없습니다. 왜냐면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서 말을 안 해요.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에게 가끔 그런 다는 것입니다. 대놓고 그렇게 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를 좀 해주시지 그렇게 까기만 하냐고, 뭘 깠는지는 모르겠는데 위로를 좀 해주시지 그러느냐고,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잘 책망 받으면 위로가 넘쳐요. 잘 교훈 받으면 위로가 따라와요. 잘 바르게 해서 다른 데로 가다가 올바르게 돌아오면 위로가 넘칩니다,. 그리고 의로운 길로 걸어가도록 철저하게 훈련을 받으면 그 안에서 위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그것을 기색 설교라고 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여기 교회는 요리 집이 아닙니다. 여기 와서 위로 한 접시, 격려 두 사라. 책망 빼고 위로 한 접시, 무슨 먹물 빼고 낙지 두 사라. 그런 것처럼 책망 빼고 위로 두 접시. 무슨 요리 집인 줄 아세요. 그러면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지. 여기는 병원입니다. 병원에 와서 의사 선생님 빨간약 좀 주사 놔 주세요. 왜? 색깔이 예쁘잖아요. 그러면 안 되죠. 병원에는 갔는데 한 20년 전이었어요. 면도칼로 머리를 긁어내는 것 같이 아파요. 그래서 병원에를 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면도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픈데 견딜 수가 없어요. 진통제를 한 숟가락씩 먹어도 두통이 안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다 진찰하더니 결과가 잘 안 나온데요. 그러면서 신경성인 것 같다고 해요. 그 신경성이라는 것은 그 의사자기도 모를 때 쓰는 용어이거든요. 어떤 의사가 나보고 그래요. “목사님 의사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알면 병원가기 무서울 것입니다.” 의사가 그랬어요. 그래도 목사보다는 굉장히 양심적이다. 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 엉터리 의사에요. 그 의사가 그래서 실망을 하고 진찰비만 내고 나가는데 “어이, 젊은 양반” 그래요.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어디에서 먼지 뽀얗게 쌓인 병 하나를 들고 오더니 이것 한번 마셔볼래. 그래요. 그것이 뭔데요. 몸에 아주 좋아. 맞아봐. 그래요. 그래서 속으로 그런 거예요. 아니 자기도 왜 아픈지 모른다며 어떻게 처방을 하나. 그래서 아니 선생님 뭐 원인도 안 나온다며요. 그 얘기는 대답도 안 하고 맞아봐 그래서 왜요. 싸게 해 줄게. 그래요. 아이, 돌팔이에요. 그때는 제가 선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아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선생님 맞으세요. 그리고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이즈 빌리비즘” 쉽게 믿는 것이 말하자면 오늘날의 독버섯처럼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여러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거의 다 읽으셨죠. 그 책이 굉장히 부담이 되세요. 되겠죠. 그만 합시다. 그러면 이제 여기들이 “자유” 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자유일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미움과 영혼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 갈까? 이것입니다. 우선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범죄 하는 것과 영혼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것을 먼저 이야기를 해야지만 쉬울 것 같아요. 인간이 죄를 짓게 되잖아요. 죄를 짓게 되면 이 죄를 짓는 것 자체는 손. 발. 입, 눈. 이런 것들로 죄를 짓게 되지만 이 내면의 도움이 없이는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앗, 뜨거워”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부다 대뇌의 작용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만약에 범 죄 하려면 마음이 충분히 움직여야합니다. 그런데 특히 신자가 죄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어기고 범죄 하려면 더 강력한 마음의 이끌림과 그다음에 죄를 짓게 하는 불결한 작용이 이 안에서 일어나야지만 선한 의지가 꺾이고 그 선한 것을 결핍한 의지가 바로 악한 의지가 되는 것이거든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선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의지는 악한 의지로 돌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악한 의지의 도움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들이 실제로 이것이 잘못이다. 라고 아는 것을 죄를 짓게 될 때에는 한번 짓고 싶은 욕망이 딱 떠올랐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범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보고 반복하는 가운데 물건을 사듯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악한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것은 이미 행동으로 손으로 악한 일을 했지만 이것은 이미 벌써 더 깊은 뿌리를 인간의 정신 작용에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은 영혼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으로 충분히 그 죄에 대한 성숙한 욕망을 가지고 죄를 짓게 되니까 이것이 결국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결국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살 수 있는 경향성들을 움직이고 바꾸어 놓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죠. 신자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려고 하는 힘과 경향성들이 그 뜻을 어기면서 살려고 하는 또 다른 경향성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 안에서 함께 가지를 않고 두 개의 경향성들이 생겨서 이것들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런 식으로 충돌을 일으키니까 거기에서 부딪히는 충돌들이 마음에 반영이 되어요. 그러니까 범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혼란이 가득한 것입니다. 실타래처럼 막 엉켜서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떨어지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뭐예요. 유행가 가사들이 장난이 아닙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그것이 뭐냐면 죄인 속에 있는 혼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것이 무슨 통일 된 생각을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하고, 오늘 저녁에 후회하는 것입니다. 돌아서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후회하고 그다음에 후회한 일을 그 다음날은 또 하고, 이렇게 하면서 혼란이 들어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 죄 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자유가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미움인데 이 미움이 문제인데 예수님께서도 이 미움을 살인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미움을 살인에 비유할 때 왜 살인에 비유하셨을까? 그것을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사유의 날개를 펴보세요. 내가 누구를 미워해요. 어디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서 막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갈구고 다녀요. 그러니까 나도 그 얘기를 들으니까 짜증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을 미워해요. 박 집사 못됐다고 하더라. 돈 빌려 쓰고 돈도 안 갚고, 그러면서 애들도 개차반으로 기르고, 말이지 사육하고 말이지. 남편은 그냥 공처가로 만들고 있는 얘기도 있지만 없는 얘기를 더 많이 하고 다니면서 자기를 수치스럽게 해요. 그러면 미운 마음이 생길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뭘 미워합니까.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무엇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주둥이를 미워한다고요. 주둥이만 미워요. 뒤통수는 사랑스럽고, 그러면 뭐가 미워요. 인격이 밉다고 대답하시는데 그러면 인격은 밉고 신앙은 사랑스러워요. 뭐가 미운 것입니까 그렇죠. 존재 자체가 미운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그럴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고, 누구에 의해서도 제재 받지 않는데 그 사람을 미워해. 그 얘기는 뭐예요. 존재 자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싫은 거예요. 그 사람의 있음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제거 하는 방법이 뭐에요. 그렇죠.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인의 심리학입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이 중국 형제인데 미국에 있습니다. 그래요. 자기 먼 친척이 아직까지도 복음을 안 받아들이고, 뭐 큰 음식점을 하는데 그 음식점에 조폭들이 늘 드나들고, 그러면서 이제 청부살인도 하고 그런답니다. 그러면서 그러더래요. 놀랬어요. 뭐라고 하느냐면 형님 저기 앉아서 밥 먹는 사람들이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래. 야, 겁난다. 형, 형도 맘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요. 우리나라 돈으로 50만원이랍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 해주는. 그런데 뭐 목사가 50만원씩 주고 제거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어요. 50만원씩 쓰고 구원을 해도 시원찮은데 누굴 제거하겠어요. 일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어느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직업이 있습니다. 청부살인입니다. 어느 나라나 다 있습니다. 나는 전 세계를 다 다니면서 우리나라 좋다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만약에 경기도에서 어제 총을 한방 쏘았다고 하더라. 그러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죠. 미국에서는 어제 밤에 총을 한방도 안 쏘았다고 하더라. 그러면 발칵 뒤집히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좋은 나라입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범죄가 안 일어나지는 않지만 외국에서 보면 사실 우리나라는 좀 도둑이죠. 뭐 굉장하잖아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미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미움과 사랑은 항상 총체적인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여러분들에게 아주 좋은 말을 했어요. 하긴 뭐 나는 그 사람을 좀 못 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가끔 들리는 이야기가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너무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니, 그 박 집사님은 훌륭해, 어쩜 그렇게 훌륭한지 나는 열린 교회에 와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는 은혜를 못 받았는데 그 박 집사의 그 행동을 보면서 내가 진짜 은혜를 받았어. 내가 진짜 소원이 있다면 진짜 박 집사 닮은 그런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어.” 한번 우연히 들었거든요. 기분은 좋지만 그냥 하다보니까 나온 이야기겠지 그다음에 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박 집사는 어쩜 그렇게 검소하고 사람이 자기에게는 인색하고 남에게는 후한지 아, 그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도와준다며,” 아니 몇 만원 몇 번 도와줬는데 그 사람은 너무 추켜세우는 것이에요. 그래 알고 보니까 그 사람도 엊그제 이야기 한 바로 그 사람이에요. 진원지를 물어보니까. 가는 곳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스러워지잖아요. 어디가 사랑스러워요. 눈이? 입만 사랑해요? 그래서 선물을 하나 선물했는데 립스틱을 선물해요. 아니거든요. 그래서 사랑스러운 것도 총체적입니다. 미워하는 것도 총체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 되나니. 그럴 때 그것이 “엑스뜨라 에이스떼온” 이라고 하는데 원수 됨이 “에이스” in to 거든요. 하나님 속으로까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속속들이 이것이 바로 사랑과 미움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워보세요.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 냄새도 밉고, 그 사람 기침 소리도 밉고,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도 재수 없어요. 다 싫은 것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입니다. 그러니까 그 미움이 결국은 여러 가지 제약 요인에 의해서 발전을 안 하니까 거기에 멈추는 것이지 발전하면 어떻게 되요. 그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과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움의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화해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양립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오늘 이 시간에 왜 두 사랑이 양립할 수 없는지를 내가 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요점만 이야기를 좀 해주고 넘어가겠어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 우리 지난 사경회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를 교통하게 하는 사랑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랑 자체가 교통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지순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이 그 사랑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만 묶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전도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습니다. 권사님들이 전도하고, 집사님들이 전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전도 많이 해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전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누가 불쌍히 여기게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울고불고 회개할 때는 다른 사람 관심도 없어요. 왜? 내가 사는 것이 너무 곤고하고 괴로워서 예수님을 찾았는데 누구 거들떠 볼 때가 있겠어요. 환난과 시련이 겹치고 인생사는 것이 죽을 지경인데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무슨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겠습니까. 진짜 괴로워보세요. 아무 생각 없죠. 그러다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깊이 회개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물 붓듯 부어져서 충만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 고달픈 인생살이 변화된 것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어때요. 이것을 뛰어넘어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언제나 충만했잖아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사랑의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렇게 보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보여요. 예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이 사랑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두 개가.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할수록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교통하는 것입니다. 교통하지 않고 어디에 묶여 있는 것은 이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적인 사랑이지.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있다면 그러면 사랑이 역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흐르지 않는 것은 이쪽으로도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워하는 동안에 하나님과 유감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밉거나, 아, 하나님이 왜 저런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인간이 여전히 싫은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이것이 결국은 마음을 통해서 영혼에 영향을 미치면서 까리따스의 사랑 전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미움과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미움과 살인을 살펴보면 우선 이 미움의 죄의 심각성은 뭐냐면 이것이 지속적이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범죄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 중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서 한번 지었지만 다시는 안 그러는 죄 있을 수 있잖아요. 뭐 한번 훔쳤는데 회개하고 다 갚고, 이제 돌아서서 올바른 삶을 산다. 장발장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 미움의 죄는 5분만 10분만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인간에 대해서 딱 맺히게 되면 그다음에는 그 인간을 끝까지 미워해요. 그런데 참 신기해요. 뭐냐면 누군가를 미워하면 꼭 사랑할 때와 똑같습니다. 감아도 눈에 떠오르고 떠도 떠오르고, 늘 떠올라요. 그 대신 차이는 뭐냐면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싶은 얼굴인데 이것은 미워하는 얼굴인데 떠올라요. 세수하면 물속에 떠오르고, 목욕가면 떼 뜬 그 욕조에 떠오르고. 밥을 먹으면 국속에 어리고, 늘 지울 수 없는 얼굴입니다. 늘 떠올라요. 말로는 매일 용서했다고 해도 이것이 계속 떠오르면 용서한 것 아닙니다. 계속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떠오르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아이, 오늘 마음도 좀 공허하고 그런데 그 나쁜 녀석 생각 좀 해야지. 그리고 머릿속에서 파일을 뒤져서 하나 딱 꺼내고, 사진을 딱 보면서 이 인간 이지. 그리고 딱 놓으니까 사라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그러잖아요. 사랑할 때 그래도 면목이 있지. 집을 떠 난지 며칠인데 이 마누라 생각이 왜 이렇게 안 나지. 채면이 있지 아이고, 생각 좀 해야지. 5분만 그리고 사진봐서 이 사람이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지. 아, 이제 생각 다 했다. 그러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미움도 똑같습니다. 계속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지속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미움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미움에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렇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보다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한 16년 전인데 어린 전도사 시절 때였습니다. 애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굉장히 혼란스러운 수련회 였어요. 뭐 은혜를 받아서 거꾸러진 애들도 있는가 하면 입이 대발 나와서 툴툴 거리고 돌아다니는 애들도 있고 하여튼 굉장히 힘든 수련회 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폐회 예배를 드리는데 마룻바닥으로 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지막 설교도 뭐 별로 였어요. 그래서 참 심경이 괴로웠는데 마지막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한 번 더 하고 가는데 마지막 일어서서 찬송을 부르고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기도를 한번 했으면 좋겠다. 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폐회 예배드리는 축도는 안 했지만 마지막 송영을 부르는데 그래서 선 채로 우리 기도한번 합시다. 기도를 했는데 딱 맞았어요. 진짜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에 별로 은혜도 못 받았는데 막 여기저기서 기도가 막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하는 애들은 거기에서 서서도 놀고, 막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저 뒤에서 어떤 녀석이 특이하게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덜덜 사시나무 떨듯이 기도를 하면서 진짜 심각한 상태로 들어갔어요. 서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조금 있더니 체구가 육중했어요. 마루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어요. 쾅 하고 떨어지더니 막 거의 인사불성이 되다시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벌 떨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리고 그 아리를 네 명이 들어서 저쪽 방으로 옮겼어요. 하도 시끄럽게 떠드니까 옮겼어요. 혼자기도 하라고 하면서 그리고 우리 한 번 더 기도하자. 그리고 더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앞에 있는 자매 하나가 으악, 으악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땀을 비질, 비질 흘리면서 꽈당 하면서 또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또 들고 세트로 그쪽 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기도를 하고 어쨌든지 정리를 해서 보따리 싸라. 그리고 정리가 되었어요. 둘이서 인사불성이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땀인지 비 오듯 쏟아지면서 애들이 눈도 못 뜨고 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서. 그러다가 정리가 어떻게 되었어요. 그래서 훌쩍이면서 보따리를 싸서 나가는데 이 자매 하나는 더 심각해요. 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너무너무 얌전하고 모범생이에요. 조용한 여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아이의 머리맡에 앉고 여 선생 한 두 사람, 이렇게 있었어요. 막 울어요. 울지 마라. 고 하니까 더 서럽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 뭐가 있구나. 우는 것은 좋은데 내 말을 들으면서 울어라. 버스는 저기에서 가자고 부릉부릉 하고 있는데 “너, 하나님 앞에 맺힌 것 있지.” 그러니까 막 창으로 찌른 것처럼 꺅 하고 울면서 더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30분 씨름을 했나요. 그러다가 이제 이 아이가 거의 탈진되다 시피 해서 기운이 없어요. 그래서 물을 좀 먹이고, 누여 놓고 괜찮다. 누워있어도 이해 할 것이니 이야기 해 봐라. 눈물을 그치지 못해요. 눈을 감고 뜬금없이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뭐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든지. 그런 것을 예상했거든요. 아빠를 용서할 수 없다든지. 요즘 아빠를 용서 못하는 애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런가보다 했는데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소리냐. 내가 알아듣게 얘기를 해봐라. 그랬더니 눈물이 비 오듯 와요. 그러니까 눈을 감은 상태로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좀 못했어요. 이 아이가 그래서 연합고사를 그런 것도 떨어지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 때는 연합고사가 안 되어서 고등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러니 뭐 집에서 좋은 대접을 받겠어요. 그리고 제수를 하던 차에 언니 집에서 언니가 애기를 낳으니까 애기를 좀 봐주라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기가 100일 이나 되었나 어린 아이입니다. 갓난아이인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는데 애들을 그렇게 어렸을 때는 이렇게 눕혀 놓고 기르잖아요. 그런데 심장을 튼튼하게 해 준다고 이렇게 엎어 놓았답니다. 엎어놓으면 이 아기가 일어나려고 막 이러면서 심장이 튼튼해진다고 하나 봐요. 그것도 하나의 고문이지 그러니까 얘는 옆에서 그 아이를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잠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참 얼마나 잤는지 모르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아기가 이불에 코를 박고 있더래요. 이불이라고 푹신하지 않으면 괜찮은데 푹신하니까 아기가 코를 박고 이렇게 뒤집어 보니까 아기가 완전히 널 부러진 것이었어요. 그래서 아기가 숨을 안 쉬는 것 같으니까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혼자 있다. 그러니까 이 아기를 안고 그냥 거의 인사불성이 되다시피 병원으로 뛴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신앙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빌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다. 이 아기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뛰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가서 보이니까 죄송합니다. 죽었습니다. 못 살립니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요. 아기를 하나 죽였는데 뭐 공부도 못한데다가 언니네 집에 가서 처음 난 애를 시집가서 얼마 안 되는 아기를 죽였으니 뭐 어떻겠습니까. 그다음에 마음속에 딱 뭐가 생기느냐면 하나님은 나쁘다. 그러니까 그만한 나이의 수준에 진짜 보통 믿음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도대체 뭐 다른 어른이 그랬다고 하면 죄가 많아서 그랬나보다. 그러지만 갓난 애기 어린 아이인데 무슨 죄가 있어서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왜 이 아이를 죽이셨냐고. 이렇게 착하고 예쁜 우리 조카를 이유도 없이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냐고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뭐가 생겼느냐면 하나님께 대한 미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미움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나오기는 나오는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나. 안 되죠. 그러니까 진짜로 제대로 사단의 덫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착실하고 얌전한 학생도 교회에 나와요. 빠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러나 비교적 착실하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겉모습은 그렇게 나오는데 그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년이 되었느냐면 거의 3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었습니다. 이 미움의 특성이 뭐냐면 지속성입니다. 지속적으로 그 죄를 계속 짓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죄를 선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죄가 자기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움입니다. 중독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이 미움입니다. 중독은 그것을 제거해버리면 담배 같은 것은 중독되었다고 하더라도 못 피우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 욕망이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이 미움은 사람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은 심지어는 그 사람이 죽고 존재가 사라졌는데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한 맺힌 부인들이 남편이 죽었는데도 여전히 남편 미워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존재가 사라졌는데도 그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부관참시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나중에 보니까 굉장히 나쁜 놈이에요. 당장 목을 베어라. 전하가 어명을 내렸는데 전하 10년 전에 벌써 죽었는 줄 아뢰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것입니다. 부관참시 하여라. 무덤을 파서 관을 뜯어서 시체가 다 썩어서 뼈만 남았는데 그것을 그냥 짖 이기는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져도 미움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범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요. 순간적으로 범죄를 해도 그것이 마음과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데 지속적으로 범죄를 하니까 지속적으로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또 뭐냐면 그러면 이 미움이 누군가를 미워해서 마지막에 가고 싶은 데가 있느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없지. 없어요. 자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고 쳐요. 죽이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의 경우에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못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죽이면 반드시 탈로 나고. 탈로 나게 되면 자신도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되요. 그런데 이런 미래에 대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현제에 그 사람의 존재가 이 땅에 있다는 것에 대한 미움이 훨씬 더 크게 되면 사리에 대한 판단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서 살인을 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못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해서 마지막에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기도할 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 저 사람, 한번 온 것으로 죽여 버리십시오. 아니면 엄청나게 불행하게 해서 짓이겨버리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사람은 없잖아요.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가는 곳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죽어버린 경우에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데 어디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그 미움의 충동을 이기지를 못하고 그 충동에 굴복해서 마음속에 아주 독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인간에 대해서 결국은 그것이 어디로 갑니까. 이끌고 가는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자기 마음에 불 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악한 욕망에 불을 계속 지르면서 영혼은 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죄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자유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막 파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아주 미워하게 되면 얼굴이 변하는 것 아십니까. 보면 저 사람은 사람을 쉽게 미워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가 얼굴에 대충 나타납니다. 이것이 수 십 개의 근육으로 얼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근육으로 얼굴이 이루어져서 온갖 표정들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감정의 상태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환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근육들이 긴장하고 그 속에서 분노할 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같은 그런 물질들이 스며들면서 이 표정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원한 맺히고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화장으로 감출 수 없습니다. 절대로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보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수없이 파괴하는 것입니다. 저는 뭐 화장을 하지 않으니까 잘 모르지만 여성들 보면 어떤 여성들을 보면 화장품이 밖으로 다 토해내는 얼굴 있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스며들지를 않고 번들번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화장을 하면 화장이 확 스며들어서 정말 자연스럽고 예쁜 얼굴이 되어요. 그래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단할 때 피부도 푹 쉬고 그다음에 수분이나 유분 같은 것이 충분히 공급되어서 아주 피부가 의욕에 넘칠 때에는 화장품을 바르면 피부가 쫙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부가 무엇인가를 인해서 트러블이 생기고 안 받아들여져요. 그러면 화장품을 바르면 살갗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장품을 화장품대로 도는 것이죠. 그야말로 도포하는 식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뭐냐면 사람을 늘 사랑하고, 그리고 그가 행복해지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들은 얼굴이 화장도 잘 먹어요. 그래서 얼굴이 보시시 하게 피어나요. 그리고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기쁨의 근육들이 잘 발달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주름이 많죠. 많이 웃으니까. 그래도 얼마나 귀여워요. 그러니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전체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습니까. 제자 지난 시간에 물 얘기 했죠. 보기 싫어. 꺼져버려. 꼴 보기 싫어. 이것이 그냥 있기만 해도 우리 자체도 물로 되어 있으니까 뒤에다 넌 꺼져버려. 그렇게 써 붙이고 다니면 물의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영혼이 직접 그렇게 되니까 영향이라는 것은 엄청난 것이죠. 그런데 엊그제도 그랬는데 가족끼리 이렇게 안아 주고 그러세요.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안아주세요. 애들도 잘 안아주고 남편도 이렇게 안아주고, 그러면 남편이 그러겠지. 무서워할지도 몰라요. 평소에 안 그러다가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이 물이 출렁 거리겠어요. 기쁨이 출렁거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미워해요. 그것이 계속해서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질병이 많다는 것은 맞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래서 그러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자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말은 쉽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 누군가에 대해서 아픈 감정이 생겨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그냥 미운 생각이 드는 것 이것은 좀 이상한 사람이죠. 항상 자기가 상처가 있기 때문에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그냥 지나가면서 아, 맘에 안 든다. 이럴 수는 있지만 당장 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싫어. 나는 저 사람 진짜 있는 것도 싫어. 왜 뭐 관계가 있어요. 아니야, 아무 관계도 없어. 그런데 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싫어. 얼굴이 못생겼잖아.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뭔가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상이 좋고, 호의적인 마음을 나에게 평소에 주었는데 상처를 주면 그러면 미워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평소에안 그랬거든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데 상처를 주면 그냥 그대로 날아오는 것이죠. 또 반대로도 성립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그러잖아요. 나를 모함한 자가 내 원수였더라면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 친구가 그랬다. 그러니까 더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죠. 사랑의 깊이만큼.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런 것을 받았을 때 용서한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상처를 깊이 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잘 새겨들으세요. 내가 만들어낸 에피그램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어렵습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체험이 없으면 누구나 못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입니다. 아니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아니 목숨을 버릴 수가 있겠어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보면 이세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 그러잖아요. 한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다. 엊그제 목사님이 오셔서 신년 제직 세미나 하셨거든요. 뭐 워낙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러셨어요.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적 없었거든요.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있는데 분란에 크게 휩싸여서 고통을 좀 받으셨습니다. 그러더니 그 목사님이 그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셔요. 그런데 내년에 은퇴하시거든요. 그래서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참고 목회를 해야지 왜 떠나시라고 그러나. 목사님 그 후손들이 있잖아요. 아, 그런데 깜짝 놀랐어요. 연세 드신 분이시니까. 그런 생각까지 하시고, 경험이 있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후손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뭐냐면 그 목사님하고 부딪혔던 분들이 연로해요. 다 은퇴하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면 그러면 교회가 다 정리되겠구나. 그런데 아이고, 목사님 그 집 자녀들이 자라는데요. 그러니까 대가 물려지는 것입니다. 내가 최근에 집회 갔다 온 어느 교회에서도 25년째 집안 대 집안이 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25년이면 한 세대가 지나고 아버지가 벌서 30살에 애를 낳았으면 그 아들이 30세 아닙니까. 아버지가 60이고 아들이 30아닙니까. 그러면 그 자라나는 애들이 2살 3살 초등학교 다니고 유치원 다니고 그럴 것 아닙니까. 유치원 다니는 애들까지는 잘 모르겠죠. 그러나 이제 아들은 왜 그렇게 아버님이 왜 그 집안 하고 그렇게 등지게 되었는지 사연도 몰라요. 그런데 뭐냐면 계속 암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되 물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인생을 살고 주님을 믿으면서 마지막 내린 결론은 뭐냐면 사람을 미워할 때 지상 최대의 피해자는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번 해 볼만 합니다. 워낙 미우니까. 그런데 절대 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지상 최대의 피해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자기의 영혼이 더 빨리 파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쾌재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박살나니까. 그런데 이 문제는 뭐냐면 모든 죄가 그러하듯이 다른 것으로 만회가 안 돼요. 내가 저 사람 밉거든요. 어쩔 수 없는 것 아시죠. 그대신요. 헌금 많이 할 께요. 해결이 됩니까. 안되죠. 만회가 안 됩니다. 저 사람 너무 밉거든요. 하남이 그것을 버리시라고 하는데 저는 정말 못하겠거든요. 미워한 사람을 미우하지 못하도록 강요를 받을 때 그 때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과 미워해서는 안 되는 당위, 하나님의 명령사이에서 양쪽에서 갈등하고 고통을 받을 때 그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은데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를 너무 미워하는데 그를 제거할 자신이 없으면 그다음에 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자신이 제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존재와 존재가 부딪힐 일이 없는 것입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부딪히지 않으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한 사람이 싫으면 이 땅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데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너무너무 어렵죠.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깊이 용서할 때 그리고 다시 사랑할 때 그 사람의 그 헌신은 무슨 선교사 헌신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쪼금 죽어도 사명대로 살겠습니다. 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는 사람을 온전히 용서하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생을 이만큼 살다보면 사랑도 많이 받고, 미움도 많이 받고, 마음속에 미워하던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쭉 살아오면서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가장 힘들었던 훈련이 그것이었습니다. 용서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 많이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런데 항상 정말 미워하던 사람을 깊이 용서하고 나면 제일 먼저 물밀듯이 마음에 밀려들어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면 자유입니다. 확 밀려들어옵니다. 그래서 자유하게 되죠. 그다음에 밀려들어오는 뭐냐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것입니다. 실행하지도 못할 복수를 꿈꾸면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그것을 택하느냐. 아니면 자기가 깊이 죽고 그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사랑 속에서 살 것이냐? 그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내가 무슨 계기로 그런 경험이 일어났었는지는 내가 솔직하게 얘기해서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하여튼 부당한 방법으로 나에게 상처를 가했고, 내 마음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뭐 또 오늘 목사님이 내 얘기하나, 그러지 마시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상처 받은적 없으니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무 아픈 것이었습니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 것입니다. 너무너무 아파요. 그래서 너무 미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벌써 성령께서 일어주셨거든요. 벌써 그 감각은 상당히 발달되었거든요. 뭐 용서에 관록이 붙었다고 얘기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런 감각들은 이러면 내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이제 그를 계속 축복했어요. 그런데 사실 처음에 그를 축복이 안 나오죠. 하나님 은혜를 주시고, 은혜는 무슨 놈의 은혜, 은혜를 주시고, 이 속에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라. 그 인간이 은혜 받을 가치가 있냐. 그러다가 이제 자신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것을 한번 보여주시옵소서. 또 그렇게 기도도 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아닌 것 같으면 아니 그것 말고요.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러면서 계속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방법은 뭐냐면 끌어안고 계속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을 주셔요. 왜냐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진심으로 안 하니까 문제가 되지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계속 마치 애들이 짓밟아 놓은 샘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흙물이 걷히고 샘물이 솟아나듯이 저 속에서 퐁 퐁 퐁 솟아나요. 그런데 어느 순간인데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내 마음 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싸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상당한 시간이 흘렀어요.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야, 내가 한번 혼내줄까?” 유혹이죠. 내가 혼내는 것이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언어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계시가 아니라. 그런데 그 때 경험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마 강물같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뭐라고 하느냐면 “하나님 그러시면 안 돼요. 하나님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뭐냐면 그 사람을 징계하시려는 그 아픔이 내 영혼 속에 쭉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편을 읽으면 누군가를 미워할 때 시편을 읽으면 눈물 많이 나요. “하나님 원수의 뺨을 치소서, 뼈를 꺾으소서. 반죽이소서.” 나오거든요. 항상 읽으면서 그렇게 은혜에 넘치니까. 하나님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하나님 내가 죽을께요. 하나님 저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아픔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그냥 막대기 같은 도구일 뿐이고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는 내가 안 고쳐질 것 같으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죠. 막대기에 어린 아이의 종아리에서 흘린 피가 묻었는데 막대기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러시면 안 돼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잊을 수가 없어요.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그 영혼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 그러시면 안 돼요. 하나님 하지 마세요. 아주 상당한 기간 동안 그 기도만 했어요. 하나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를 복 주십시오. 그를 사랑해주십시오. 그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축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 난지 몰라요. 죽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셔요. 그를 신뢰해서 가까이 두느냐 마느냐. 뭐 아니면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느냐 마느냐. 이것은 나중 문제이고 마음속에서 그 사람과의 참다운 화해가 일어나요.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면 자신이 그를 빌어서 깊이 용서해줄 때 그 때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면 아,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 때에 뭐가 들어오느냐면 진짜 예수가 죽는 아픔, 예수 죽음이 고통이 쭉 자기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미움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오래 참지 못하는 기질, 쉽게 원수 맺는 단순함, 충동, 맺힌 것을 풀지 못하는 무정함, 이런 것들이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아프게 느껴지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 죽는 것입니다. 아자가 죽을 때는 항상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쭉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신비한 것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렇게 예수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와서 그 자신의 기질 속에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 속에 배어 있는 것들을 제거하고 죽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짝 죽이면 견디기 힘든 고통과 통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파하면서 막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칼로 등가죽을 벗겨도 그 정도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아프면 혼절하는 수도 있습니다.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은혜의 경험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육신의 고집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요. 스며들어 와서 막 죽어요. 그 때 죽음의 기운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며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거기에서 이제 스며들면서 예수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던 것들이 죽으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곧바로 뒤따라서 사랑의 경험이 물밀 듯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 그런데 거기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이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자유를 원하면 곤고하게 살지 않으려면 용서해야합니다. 그렇게 용서하게 될 때 그 미워하는 육신의 고집을 꺾고 깊이 그를 용서하게 될 때 제일 먼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용서 받은 여러분들의 원수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가장 먼저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이 죄인이 거의 비슷한 죄인을 용서하는 것도 힘든데, 그렇죠. 순결한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른 그 인간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실 때 그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주님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더 이상 곤고한 그런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뭐 할 일이 없다고 되 물림까지 하면서 교회에서 그러면서 살아요. 잘못 한 것입니다. 깊이 용서하고 사랑하세요. 그것이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한 지체니까 더더욱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입니다. 깊이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합시다.
5. 무지와 자유
성경말씀: 예레미야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아 4:2)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곤고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미움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미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생명을 사라지게 하고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부메랑과 같아서 자신에게 그것이 돌아와서 자신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미워함은 곧 자신의 영혼을 미워함이요. 자신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때문에라도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상처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미워하고 그리고 그 미워함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 되돌아와 박히는 수많은 부메랑과 같은 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은 점점 더 곤고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움도 알고 보면 미움의 또 다른 원인은 오늘 다루려고 하는 이 무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지와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침공을 당하고 망하기 직전에 끝없이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예레미야에게 임했고,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김없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은 결국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까닭 없이 그를 미워함으로서 그들은 죄 위에 또 하나의 악을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예레미야가 타는 것 같은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이 심판이 확정되어서 멀리서 들려오는 이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민족의 위기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민족에게 닥치는 그 커다란 위기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일어나는 커다란 재앙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백성이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무서운 이들에 대해서 경고를 받지 아니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때에 그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강대국은 애굽이었고, 바벨론은 이제 신인으로 일어나는 국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애굽에 가서 도움을 청해서 결국은 바벨론의 공격으로부터 도움을 받아보려고 외교적인 노력에 심열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게 말게 되니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죠.
우리도 살다 보면 인생이 곤고해지고, 아주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인생이 곤고해지고 힘들어 질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곤고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구속하시고,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내 인생을 지금까지 인도하셨는데 지금 내가 영혼에 있어서 왜 환경적으로 또 내적으로 이렇게 깊은 고통을 당하며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까?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처럼 단지 내게 일어나는 이 많은 곤고한 것이 환경 때문이고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백성들 아닙니까. 주님을 의지하면 살도록 부름 받은 주님의 자녀죠. 지금 위협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나라가 서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 아니셨습니까. 그 나라를 그 땅에 건설하기 전에 애굽에 종 되었던 사람들이었죠. 하나님이 어떻게 건져내셨습니까. 그 광야에서 멸절당해 죽을 수밖에 없는 히브리 민족을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까? 가나안에 도착했더니 가나안이 비어있었나요? 수많은 강성한 민족들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점철된 역사로 걸어와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죠. 그랬는데 그 나라가 바벨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고를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정말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고, 택하신 이 민족에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큰 민족적인 위기가 온다고 경고하실까. 생각하고 그 다가오는 고난의 의미를 이해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리고 당연히 역사를 움직이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언약 백성의 도리이고, 또 그 백성들의 특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순수한 외교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을 애써서 믿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정작 그런 위협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애굽의 군대를 끌어들여서 자신의 나라에 안위를 도모해보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불신앙을 오늘 우리들이 그대로 저지르고 있지 않은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조금만 복잡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 우리의 걸어온 신앙의 길을 돌아보면 걸음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 발걸음이 없습니다. 기쁠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을 때도 그랬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서 살고 보니까 그 때 바로 내가 혼자 버려진 줄 알았던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리고 그 주님이 나를 다루시는 것이 그 때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아팠는데 세월이 모두 지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다루셨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사물들이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 자리에 갖다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해서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많이 섬기며 살 때에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충분히 섬기지 못할 때도 혹은 오히려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역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계획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동안에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잘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잘 순종하고 섬기는 동안에는 그 사랑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지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수중 안에 있었고, 지금도 그분의 계획안에 있고, 그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강줄기를 타고 물이 가득 흘러옵니다. 거기에 사는 물고기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강에서 살아요. 강폭은 유한하고 강의 길이도 한정이 있어서 민물고기가 바라로 흘러들어가는 법은 없지만 그러나 그 고기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강이 좁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고, 어디를 헤엄쳐도 그 강의 품속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그 뜻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다. 그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시겠죠.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가 그 뜻대로 살 때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그 뜻대로 살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죠. 그런데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은 포기되지 않죠, 그러면 우리가 불순종한 길을 걸어갔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마음 아파하실 뿐만 아니라. 개입하셔서 우리로 올바른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 이성적인 생각 아닙니까? 개입하십니다. 그렇게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가 환경적으로나 내적으로 곤고함이 밀려오면 그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말할 수 없는 환경의 곤고함, 그리고 영혼의 곤고함이 어떻게 찾아왔으며 하나님이 이 곤고함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깊이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많이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들은 말씀을 계속 생각하고 특별히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말씀 다음으로 많이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나라의 장래를 보호 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애굽을 의지하고 그들의 군대를 의지하지만 선지자는 그것이 결국은 썩은 지팡이일 뿐이라고 지난했습니다. 몸을 의지할 수 없는 지팡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곤고함이 다가오면 한번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죠. 이것이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곤고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를 지적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번영의 기회를 주시고, 그 땅에서 장성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그 백성이 결국은 이처럼 매우 곤고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을 경고 받는 것은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곤고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바로 이러한 교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곤고한 일을 만납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환경적으로 곤고하고 영혼 적으로 곤고해서 정말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여러분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지금 처해있는 것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개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런 고통 받고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실 때에는 그 곤고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보여주시고 싶으신 것이 있고, 깨닫게 해주시고 싶으신 것이 있고, 무엇인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고치고 싶으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무지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여기에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랑한다. 경배한다. 특별히 인정한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말이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모르겠습니까.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율법을 읽고, 낭독하고, 가르침을 받고, 제사를 드리고 엄격한 율법의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여기에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의 앎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서 그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지금 고난과 시련과 국가적인 재앙을 내려 보내주시는데도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기 못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외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제 애굽과 바벨론 사이를 오가면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외교문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제 뒤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도하잖아요. 결국은 무엇입니까.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보물들을 뜯어서 뇌물로 바치면서 자기네 나라의 안녕을 도모해보려는 그런 마음 아닙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이렇게 나라가 위기상황에 도달하게 되고 말할 수 없는 민족적인 곤고함이 밀려오게 될 때 그들의 제사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성전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제사장과 많은 주의 일꾼들이 있었는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도움을 줄 수 없어서 하나님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말 참 종을 보내셨습니다. 예레미야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듣잖아요.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정말로 이 신앙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형식에 참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많이 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중심에 모시고, 그 하나님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의지가 내 인생 속에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시련이 오고, 그래서 인생에 곤고함이 찾아오면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실까? 시련은 아프고 고난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왜 이런 곤고함의 상황 속에 나를 두실까?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깨닫고 난 다음에는 “아, 하나님 그러셨군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다루실 수밖에 없었군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이 곤고함 가운데 있게 될 때 하나님이 궁극적인 원인이시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시는 원인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못 보고 도구만을 가지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들을 아주 엄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잘할 때는 많이 칭찬해주시지만 잘못하면 회초리를 때렸습니다. 회초리를 잘 깎아서 뒤에 고리까지 달아서 아이들 방에 걸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회초리를 가지고 와라. 그리고 잘 못했지. 잘못했지. 그리고 다 이론적으로 따져서 예 잘못했어요. 그러면 그러니까 맞아라. 그리고 때려요. 그러니까 어느 날 문 사이로 이렇게 보니까 애들이 볼펜으로 회초리를 막 때리더래요. 왜 이 회초리에 맞았으니까. 그런데 그 회초리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때린 것인데 그것과 똑같이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곤고한 상황을 만나서 사람을 원망하고 그다음에 거기에 도구로 쓴 다른 모든 사물들을 원망하고 하는 것은 마치 그 짓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러면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이 시간에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떤 가장 중요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면 사람의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러니까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많이 만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좁아질 대로 좁아집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이기적이 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곤고할 때 인간이 이기적인 되는 것입니다. 자기 위로해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는 언제 누구 위로해 줘 봤습니까. 자기만 아프다고 합니다. 저만 아파요. 세상사람 모두 다 아프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떻게 되요. 그런 시련을 만났을 때 자기를 그런 상황에 갖다 두었던 원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는 것입니다. ‘저 인간, 저 자식, 이런 환경, 저런 환경,’ 그러면서 하여튼 자신에게 이러한 상황이 미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모든 사람에 대해서 치열한 원망과 미움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지난주 설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말씀들이 그런 원리에 의해서 더 곤고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비유로 하자면 늪 속에 빠졌는데 헤어 나오기 위해서 막 몸부림을 치니까 가만히 있을 때는 늪에 천천히 빠져 들어갔는데 몸부림을 치니까 늪하고 자신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더 빨리 내려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많은 다툼이 나오고 그다음에 분쟁이 나오고 욕설이 나오고 그리고 원수 맺고, 이게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인정해보는 것입니다. 아,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나에게 이렇게 곤고한 환경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일생동안 나를 배반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셀 수 없이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왜 이런 곤고한 상황을 만나게 하셨을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제 관심이 사람들에게 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그다음에 그 관심이 당연히 그렇지 자기 자신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곤고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느 인간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곤고하게 되었다. 라고 생각을 딱 고정시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나쁜 인간이고 더러운 인간인지는 잘 보이는데 자기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워요.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으셔서 나를 이렇게 눈물 나는 이 곤고한 골짜기에 나를 두셨을까? 그리고 왜 지금은 하나님 없이 나, 혼자 이렇게 고통을 받을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해서 여기에 데려오셨을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울이 되어서 자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서만 유일하게 신자는 자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아요. 그러면 사람에게 가졌던 원망을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냥 범인은 하나님이시네.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구나. 너희들도 다 피해자다 주범은 하나님이시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바로 그런 성격입니다. 안 그렇습니다. 절대 안 그렇습니다.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
그 생명 되신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곤고함을 만났을 때에 자기를 곤고하게 만든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은 그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정직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곤고한 상황에서 사람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더니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잖아요.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불순종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좀 더 깊이 자기를 성찰하고 나면 그것이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자신의 영혼 안에 세팅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경향이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을 가슴 아프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바로 그런 곤고한 일을 만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게 되니까 자기 자신의 그런 잘못된 본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지금 상황이 곤고한 상황에 안 들어가서 만약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비춰볼 수 없다면 비춰 볼 수 없어서 못 보기는 했지만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 안에 분명히 그것이 남아 있잖아요. 언젠가는 이것이 문제를 일으켜서 자기를 그렇게 데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보면 자기를 곤고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보다 잘 이해가 가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자동차가 이렇게 간단한 물건이 아닙니다. 아주 예민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가 말이죠. 바퀴가 있는데 이 바퀴 하나가 여러분 보기에는 똑바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똑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돌아갑니다. 똑바로 돌아가면 바퀴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설계할 때부터 바퀴는 이렇게 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같은 자리로 굴러가데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쪽이 무게 중심이 똑같이 되어 있어야지만 바퀴가 똑같은 정도로 바닥에 닿아서 수평을 유지하면서 똑같이 가요. 그런데 무게가 틀리게 되면 바퀴가 안쪽이 닿는다든지, 바깥쪽이 닿는다든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그란 바퀴 전체가 바닥에 닿아야지만 차가 안정성이 있지, 어떤 부분은 충분히 닿고 어느 부분은 약간 덜 닿고 하면 이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문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벨런스를 잘 맞춥니다. 그것뿐만 아니죠. 하나, 하나는 그렇게 벨런스를 잘 맞춘 다음에 네 개의 바퀴는 각각 무게 중심과 균형이 딱 맞아야지만 차가 똑바로 쭉 달려갈 수 있고, 차가 달려갈 때에 네 개의 바퀴가 이 차의 무게가 골고루 다 실려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이것이 적어도 100킬로 150킬로 달릴 때에 그 때에 문제가 안 생깁니다. 그런 균형을 맞추는 정비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맞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차가 한 쪽으로 계속 쏠리는 것입니다. 운전을 해보면 쏠립니다. 심하면 핸들을 꽉 잡아야지만 비뚤어지게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가끔 자기의 차가 똑바로 되어 있는지를 매번마다 정비소에 가서 컴퓨터로 재 볼 수 없으니까 이제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한 2보 정도만 틀어져도 이게 차를 타면서 느낍니다. 그래서 한번은 이것이 틀어졌다. 그래서 우리 관리팀에 얘기했더니 가지고 가더니 아무 이상 없데요. 그러는데 다시 타보니까. 또 틀어졌어요. 그래서 틀어졌다. 나는 불안해서 못 타겠다. 그랬더니 가서 보니까. 컴퓨터에 넣고 막 돌리더니 2.5도가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도대체 이 차 주인이 누구냐고 그러더래요. 우리 목사님이다.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또 한 가지 방법은 차가 없는 시멘트 도로에서 약간 빠르게 쭉 달리다가 브레이크를 꽉 잡아요. 급브레이크를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타이어가 바닥에 긁히면서 자국이 날 것 아닙니까. 차를 끌어 놓고 그 자국 난 것을 쳐다보면 됩니다. 이것이 균형이 딱 맞으면 똑바로 가다가 밟았으니까. 까만 바퀴자국이 똑같은 길이로 쭉 나서 딱 끊어져요. 그런데 이게 안 맞으면 이쪽 바퀴자국은 반밖에 안 나고. 이쪽 바퀴 자국은 길게 나요. 심지어는 이쪽 바퀴는 거의 안 보이고 한쪽만 길게 나 있는데 이것이 지금 마른 땅이니까 똑바로 가다가 그랬으니까. 그렇지 만약에 이것이 젖거나 혹은 도로에 사정이 있으면 많이 긁힌 쪽을 중심축으로 해서 사정없이 도는 것입니다. 심하면 두 바퀴 세 바퀴씩 도는 것입니다. 뒤에서 트럭 같은 것들이 달려오면 사정없이 박살이 나는 것이죠. 저는 제 눈앞에서 그렇게 도는 차를 여러 대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정확하게 하고 다녀야합니다.
그것은 무슨 얘기냐면 계속 다니는데 사고는 안 나요. 그 차의 성질이 지금 그렇게 되먹어 있습니다. 상황이 발생이 안 되니까. 그것이 감춰져서 그게 그냥 가는데 상황이 발생되면 그 차는 반드시 그렇게 작동하도록 이미 그 속에서 그렇게 망가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동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곤고하게 하시고, 진짜 시련을 만나게 하시는 이것이 나는 그것을 항상 우리의 인생이라는 이 차를 하나님이 정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수들이 못 되어먹어서 정비를 안 받고 다니겠다고 그리고 돌아다니니까. 문제지 자기가 가다가 무슨 바위에 부딪혀서 뭐 차가 부서져서 죽어버렸다든지 그러면 자기 개인적인 일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몰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으로 들어가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딱 인정하고 나면 사람들이 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 내 인생 차가 신통치 않으니까 하나님이 한번 정비하시는구나. 그러면 어때요. 뭐 영업한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차의 결점을 발견했으면 영업 취소하고 정비공장에 가서 그리고 기계를 떠서 높이 들어서 바퀴고 뭐고 다 빼고 신발도 벗고 다 떼고 그리고 수리해야합니다.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들의 역사를 움직이셨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똑같이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곤고함 속에서 싸우다가 보면 마음속에 계속 죄는 짓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원망, 이런 것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범 죄 하게 되죠. 성격이라도 못 돼서 욕이라도 하고 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대판거리 싸우고 그러면 이게 화병이라도 안 걸리는데 또 좀 모자라서 그것은 또 못해요. 그것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삭이기에는 신앙적인 능력이 안 되고 그러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성격이 굽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이것, 그래서 그 자기가 안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상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 목회자들의 마지막 목표는 인생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렇게 사고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렇게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러면서 깊이 생각하는 그 때에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섭리의 정의를 내리자면 섭리는 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배치하시는 사물의 질서입니다. 그것을 질서롭게 하나님이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 지각이 없다. 그랬습니다. 뭐라고 했느냐면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그랬거든요. “지각이 없는” 이라는 이 말이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의 단어의 복수로 쓰였습니다. “세칼림” 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뭐냐면 “어리석음” “바보,” “허황된 짓.”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지각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은 복수로 써진 것을 보면 결국은 이것을 무엇을 얘기하느냐면 분별력과 같은 지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을 딱 인정하게 되면 그러면 놀라운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마치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서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인정하는 것은 물건을 찾을 때에 비춰주는 빛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딱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 섭리가운데 이 고난으로 인도하셨다. 이렇게 딱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그다음에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놀랍게 지혜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그러면 무지하면 계속해서 사람만 미워하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 아이들은 하나의 희극적인 행동으로 그렇게 몽둥이를 볼펜으로 때리면서 둘이서 그러더래요. ‘미워, 미워, 몽둥이 미워,’ 그러면서 막 때리더래요. 사실은 몽둥이가 때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때린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맞았으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면 그러면 몽둥이를 볼펜으로 때릴 이유가 없죠. 똑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계획안에서 벗어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인생이 매우 곤고하고 심지어는 인터넷에서 이 설교를 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어쩌면 누군가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의 안 느껴지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포 자기 한 마음으로 더 이상 무엇이 나빠지랴. 하면서 그렇게 막 가버리는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도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다 내려다보고 계셔요. 주님을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을 인정하기만 하면 지혜의 빛이 들어와요. 그런데 그것을 안 해요. 미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고, 비관하지도 않아도 될 일에 대해서 그렇게 비관하고, 하면서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낭비하고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한 해가 저물어 가잖아요. 그렇죠. 지난날의 모든 실패와 견디기 힘든 괴로움, 그리고 무지 속에서의 방황, 이런 것들을 이제 2005년도 여기에다 다 묻고 가야지 끌고 가서 되겠습니까. 다 묻고 가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곤고하다면 이 곤고함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셔요. 그리고 그 빛을 가지고 이제는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왔던 옛 삶에 종지부를 찍고 그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어둠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그래서 주님 말씀 따라서 생활하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이 항상 자신의 마음에 오시기를 바라면서 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인생의 계획과 창조주 하나님의 인생의 계획이 충돌할 때 평범한 마음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누가 양보해야 되겠습니까. 누가 양보해야 되겠습니까. 변경될 수 있는 내 인생의 계획과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갈등을 일으킬 때 누가 양보해야 되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마음으로는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찾으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곤고한 골짜기로 계속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실패에 가득 찬 옛 삶을 이제 2005년도에 묻어놓고 그리고 이제는 범사에 주님을 알아서 인정하고 그 지혜로 이 곤고함에서 벗어나서 정말 자유를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원망과 자유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느니라 (잠언 19:4)
오늘 이 시간에는 곤고한 이유 여섯 번째로, 지난 시간에는 무지가 곤고한 이유라고 살펴봤는데, 오늘은 원망하는 마음이 우리를 곤고하게 하니 어떻게 그 원망을 벗어나서 자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잠시 해설해 보자면, 오늘 본문에는 "사람이 미련하여 자기 길을 굽게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느니라" 고 나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가지 요소가 함께 결합되어서 한 인간을 곤고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련한 것과 고집스러운 것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함께 하여져서 그 사람을 곤고하게 하는 것이죠. 살아있는 것이 모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죠.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아무리 길게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오래 사는 인생의 길이가, 곧 그렇게 길게 산 인생의 길이가, 곧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섬긴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는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그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바 목적에 이바지 하면서 살았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살아 있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며 산 사람의 일생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인생은 짧게 살았어도 온전히 불태워 하나님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많이 섬긴 사람들이요. 인생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도록 장구한 세월을 살았어도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지 못한 사람들은 헛된 시간들을 이 세상에서 많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되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고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산 곤고한 시간들은 우리의 인생의 의미적 측면에서 볼 때에 어떤 시간들일까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그 원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으니, 살았으나 그 날들은 하나님을 섬긴 날들이 아니겠죠. 그러니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그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안에는 그가 이세상에 살아있으나 정말 창조의 목적대로 자기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겠죠? 그렇게 되면 그는 그런 원망을 품고 산 날만큼 자신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의미없는 인생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못 드렸다면, 그러면 자신에게라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할텐데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자신도 행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쾌락적인 삶에 빠지는 사람은 잠시 하나님을 떠난 기쁨이긴 하지만 육체의 연락을 즐겨보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산 사람은 하나님도 섬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살아가니 그 마음에 평화가 있을 리가 없고, 평화가 없으니 그 마음에 즐거움이 존재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원망을 통해서 덕을 입을 수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께는 공허한 시간을 낭비하고 자신의 마음에는 고통이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 옆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웃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원망하는 사람이 곤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거예요.
그러면 이 원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특별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죠. 우선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태와 질서 속에 자신이 있게 되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그 누구를 향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원망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향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원망이에요. 그러니까 자신과 관련되지 않으면 원망하지 않아요. 지금도 저 우주에서는 별들이 폭발하고 그리고 또 별들이 태어나고 별들이 사라지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 거죠. 그거 때문에 마음에 안드는 거 있으세요? 도대체 요즘같은 불경기에 별은 왜 태어나는 거야! 그러면서 별을 만드신 하나님을 원망할 일 있어요? 그거 왜 그래요? 내가 무슨 물건 하나를 잃어버리고 갖고 하는 일보다 더 엄청난 일이 우주에 일어나고 있지만, 내 이익과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니에요. 그렇죠? 그런 것을 원망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 원망의 구조를 한 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제일 먼저 제가 내린 정의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에 있게 된 것. 자기가 원하는 사물들의 질서가 있어요. 여러분에게는 왜 없겠어요? 여러분! 새해에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러는 것도 대부분 그 사물들의 질서야. 그렇죠? 나를 별로로 생각하는 남편은 변해서 거기 있지 말고 돌아와서 나 좋아하는 자리에 있고, 회사는 요새 기우뚱기우뚱하는데 그러지 말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제자리로 가고, 월급도 잘 주고, 그리고 주위의 상황들이 모두 변해서 나를 알아줘서 나를 이 정도의 계급에 놓지 말고 승진도 좀 시켜주고. 그리고 나의 이익과 관계된 여건들이 다 바뀌어서 주식을 사놨으면 주식이 가격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땅을 사놨으면 땅의 가격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집을 팔았으면 집값이 뚝 떨어지기를 원하고. 이런 식으로 사물들의 모든 질서가 그렇게 되어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자신의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거죠.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질서들이 자기에게 유익을 주고, 또 자기를 중심으로 질서가 자리잡아 가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들이 소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물을 부어서 목이 마른데, 물을 떠서 이렇게 기울여야 놓으면 물이 저쪽으로 기울여져서 마실 수가 없쟎아요? 그런데 물을 이렇게 기울이면 목마른 자신의 입을 축일 수 있듯이, 만물의 질서도 자기를 향하여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 질서가 이렇게 잡혔으면 하는 그 마음이 있쟎아요? 누구에게나 그 마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든지 그런 마음이 조금씩은 다 있는 거 아니예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질서가 되어 있지 않고, 잘못되어 있는 질서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게 될 때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는 거죠. 안받게 되는 비결이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조금 있다가 나오기는 하겠습니다만은 그렇게 바뀌어진 질서를 가지고 만족을 하면 고통이 덜 되요. 그런데 그걸 그렇게 생각 안하고,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거죠. 고통을 받을 때는 인간은 항상 자신이 왜 고통을 받나 이유를 생각하게 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유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이유를 생각함에 훨씬 민감해요. 그걸 근인이라고 하는데, 원인보다는 근인에 대해서 더 인간이 민감해요. 왜냐면 원인, 멀리 있는 요인은 생각을 많이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반해서, 근인은 가까이 있는 원인은 눈만 뜨면 깊이 생각을 안 해도 즉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럼 즉각적으로 그것들을 알 수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들어간 사람이 고통을 느끼게 될 때에 제일 먼저 누구를 원망하게 되냐면, 자기를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원망을 하는 거죠. 심지어는 자기가 해 놓고 원망한다구요.
(예화)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인데, 둘이 친구 사이인 모양이라. 한 사람이 쑥 들어와서 따뜻한데 몸을 담그고 있는 거죠.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찬물에 들어갔다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친구도 샤워를 하느라 이걸 못 봤어. 그리고 나서 우리가 어허! 하고 있으니까 뜨거운 물에 풍덩 들어온 거야. 마치 통닭이 튀어나오듯이 나오더니 몸이 뻘게지고 친구한테 막 뭐라고 하는 거야. 친구의 죄는 거기에 앉아있었던 겁니다. "아, 얘기를해줘야지, 이 사람이!", "아니, 내가 뭘 잘못했어?"
그게 인간입니다. 아니, 뭘 잘못했어요? 김도 나겠다, 자기가 뜨거울 거 같으면 발도 집어넣어보고 손도 집어 넣어보고 들어가야지, 왜 텀벙 들어 가냐고. 어쨌든 인간은 마지막까지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까지 들어간 게 전부 자신의 책임이라는 걸 인정하는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려요. 들어가자 마자 내가 누구를 원망하랴, 이건 내 탓이다, 이건 거의 성인군자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에요. 대부분은 즉시 원망합니다. 사람을 먼저 찾고, 거기에 기여한 사람을 찾고, 하다가 안되면 무생물이라도 찾아. 그리고 그 무생물을 거기다 갖다 둔 사람이라도 원망을 하죠. 두 다리 세 다리 건너서라도 원망을 한단 말이죠. 이런 것들은 생각을 깊이 안해도 금방 알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느니라. 이 사람은 누구겠어요? 신자예요, 신자. 언약백성을 향해서 이걸 쓴 거 쟎아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지금 이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인정을 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간 고통받는 처지에서 인정을 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 하는 거지. 그런데 그거는 성령에서 인정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안 본다 이 얘기죠.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으신 분이 아니에요. 자기가 그 고통받는 상황 속에 쑥 들어가서 그 모든 질서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주관자라는 사실을 인정은 해요.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걸려요. 그거 왜냐하면 원인이기 때문이죠. 먼데 있는 이유라고 인식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신앙이 없이도, 작은 신앙만 있어도 충분히 인식을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을 이렇게 하셨다. 그러면 자신이 잘 될 때, 자기가 원하는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정말 하셨지! 어떻게 그렇게 잘 됐어? 나야 한 게 있나. 그분이 모두 하셨지", 이런 은혜냐, 그게 아니다 이거야.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이거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들이다 이거예요. 대체로.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도 하나님을 지독하게 원망하던 때들이 있었을 거예요. 신자되고 난 다음에. 그때에 영혼은 곤고하고 사는게 사는게 아니겠죠. 그 직전에 형통하던 때도 있었겠죠, 그렇죠? 그때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고 뭔가 선한 일이 생기면 오직 그분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신앙 속에 있었습니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 속에서 인정하게 될 겁니다. 원망을 하죠. 원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를 거기에 있게 하신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불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에요. 이게 원망이에요.
그러면 이러한 원망이 우리를 어떻게 곤고하게 하나? 원망과 자유의 문제를 한 번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지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의 목표가 일치된 가운데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에 인간이 참으로 쉼과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 원망하는 마음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해요. 그 원망하는 마음의 기초가 뭐냐 하면, 무지야. 무지! 원망하는 마음의 기초가 무지. 미련한 거죠. 무지죠. 이 사물들의 질서가 우리에게 항상 마음에 든다면, 인간은 반드시 불행해지는 거죠.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속에 이런 얘기가 나왔어요.
(예화)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꿈에 신이 나타나서 "너희가 착하게 늙도록 잘 살았으니 내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 그랬대요. 이 할머니 할아버지 둘이 끌어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어요. 한 두 가지도 충분한데, 세 가지나 들어준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래서 막 펄펄 뛰면서 기뻐했죠.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불을 때면서 밥을 준비하는데, 소시지 하나가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소시지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네". 소시지가 탁 생긴거야.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보고 화를 벌컥 냈어요. 그 소원 세 가지를 그렇게 쉽게 써 먹으면 어떻게 하냐 이거예요. 이 할아버지는 홧김에, "그 소시지 니 코에나 붙어라" 그랬어요. 이 소시지가 붙었어요. 이 소시지를 아무리 떼어내어도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가 "이거나 떨어 졌으면…" 그러니까 소시지가 딱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원이 세 가지가 다 성취가 됐어요.
하도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은 안나는데, 그 동화책을 읽으면서 어릴적 생각했던 것은 또렷이 기억이 나요. 그게 뭐냐면,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게 뭐든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서 4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더니, 어렸을 때 했던 그 생각이 맞았어요. 여러분, 한 번 퀴즈를 낼 테니 알아 맞춰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해달라는 대로 하나님이 다 해주시면, 여러분이 행복해질 거 같아요, 불행해질 거 같아요? 틀림없이 불행해져요.
어린아이 기르면서 요즘은 약도 잘 나오고 그래서 괜찮습니다만, 애들이 유별나거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별로 배려가 안된 약들의 경우에는 애 한 번 약 먹일려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져요. 아빠는 다리잡고, 할머니는 입 벌리고, 엄마는 숟가락 들고 오고. 누나는 두 팔 붙들고 있고, 애는 죽겠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 말 못하는 애가 온 가족이 동원되어서 팔다리 붙들고 그 할머니가 입을 벌리고, 그 쓴 약을 엄마가 눈을 부릅뜨고, 그것도 빨간색 약을. 그거를 숟가락으로 혓바닥을 누르면서 들이밀 때 그 쓴 게 목으로 넘어갈 때, 자기 그렇게 붙잡고 있는 사람들 죽이고 싶도록 밉지 않겠어요? 그 아이는 몰라. 그런데 그 약을 먹고 그날 그 아이는 편하게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서 엄마, 아빠하고 방긋방긋 웃는단 말야. 그 시간만 잘라서 보면 그 아이에게는 견디기 힘든 사물의 질서야. 아빠가 왜 내 다리를 붙들고 있냐 이거야. 할머니가 왜 내 입을 벌리고 있냐 이거야. 누나는 왜 팔을 잡고, 엄마는 왜 시뻘건 약에 가루를 타서 코를 붙들고 내 입에 쑤셔 넣느냐 이거야. 사물의 질서가 다 자기가 원하는게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사물의 질서가 잘못되어 있는거 같아도, 그거 자체에 깊은 뜻이, 가족들의 사랑이 숨어 있쟎아요. 그런데 그거를 무지해서 몰라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몰라요. 신앙이 어려도, 어리다는 얘기는 결국은 모른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결국은 무지, 그 무지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더 많이 원망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생각없이 교회에 잘 왔다 갔다 하고, 좋은 얘기 나오면 듣고 싫은 얘기 나오면 그냥 슬며시 자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 그거 바람불면 다 떨어져요. 자기가 원하는 질서가 아닌 때에는 신앙의 이파리가 다 떨어져요. 그러면 그게 무슨 진정한 신앙의 유익이라고 말 할 수 있겠어요? 남들 좋아할 상황에서 나도 좋아할 수 있고, 남들 싫어할 상황에서 자기도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고 산다면 신앙의 유익이 과연 무엇이 있겠어요? 신앙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평정, 흔들리지 않는 기쁨 그리고 그 안에서 얻는 안식. 그런 것들이 신앙의 참된 유익이에요, 유익.
오늘날에는 이렇게 보면은 신앙 엘리트주의적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그래서 간증하는 사람들 보면은 우리 아이가 신앙생활 잘하니까 서울대에 들어갔다더라. 바닥에서 왔다갔다 하던 아이가 갑자기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감당 못하도록 공부를 잘해서 미국으로 바로 입학을 했다 그러더라. 그런 얘기 여러분 들어본 적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실패했는데, 신앙생활 잘 해서 회사도 불일 듯 일어나서 점포가 백 개 있는 무슨 체인점에 사장이 됐다더라. 그러면서 나는 무슨 기술을 가지고 연주도 하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 믿고 영적을 좋아지니까 기량이 뛰어나서 스포츠 선수계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고 그랬대더라.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모두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여세를 가리켜서 꿈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게 뭐 그렇게 기분 나쁠 거는 없겠죠.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쁠 일은 없겠죠? 여러분도 예수 잘 믿으면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공부도 좀 더 잘 할 수 있구요, 사업도 좀 잘 될 수 있구요. 또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하면 자녀들도 올바른 사람이 될 겁니다. 이거 뭐 시비걸 말 아니에요. 모두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구요.
그걸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러면 오늘날 도대체 여러분들이 신앙에 있어서, 이런 말 쓰는거 웃기지만, 예수를 믿어서 성공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진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축복을 받았다, 진짜로 신앙생활을 한 보람이 있다 라는 그런 사람의 표상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어떤 사람을 설정하고 있는지가 난 무척 궁금해요. 어떤 사람일까? 그런데 내가 여러분을 집중적으로 조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염려가 드는 거예요. 혹시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정말 신앙 생활을 잘 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모범을, 아까 얘기한 사람들처럼 오! 주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더니 감당할 수 없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들어 갔다더라, 놀기만 하고 매일 패싸움만 하던 애가 감당할 수 없이 실력이 늘어서 미국에 있는 대학에 갔다더라, 아니면 기울어 가던 사업이 번영을 해서 정말 그렇게 됐다더라. 혹시 이런 데에서 신앙의 성공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염려를 하게 되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렇게 된 사람들을 진심을 박수쳐 주고 축복해 줘요. 그리고 여러분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 될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영적으로 변화 받아도 단시간 내에 그렇게 공부 잘 할 수 없는 애들도 많아. 그리고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그렇게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큰 사업을 일으켜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는거 아니고, 회사가 형편이 좀 어렵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게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게 뭐냐면, 너도 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생각하고 그런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은 영적인 허영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지금 남들은 꿈을 주는데 지금 꿈을 꺾는 겁니까? 아니, 꿈을 꺾는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의지해서 일등의 마라톤 선수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마라톤 선수의 자질을 가지고 난 사람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잘 믿으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잘 될 거라고 믿지만, 그게 모든 매사가 다 그렇겠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성공의 모범을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그런 식으로 찾아야 한다면 그건 종교적 엘리트주의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거에 대한 답을 들려 줄께요, 지금.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해서 공부 못하는 아이가 정신차리고 올바르게 신앙 생활하면 성적도 오르고, 엄마가 그 아이를 위해 많이 기도하면, 수능시험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 주시지는 않겠지만, 주어진 한도 내에서 좋은 기량을 발휘하지 않겠어요? 남편도 그렇게 되고. 그런데 최고의 성공이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다 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이거예요. 제가 항상 말씀 드리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어디냐고 물으면 에베레스트 산이라도들 말하지만, 그 산이 제일 예쁜 산이라고 말하면 다 웃는다 이거예요. 그렇지 않다 이거지요.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그런 것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나 목숨 걸 일은 아니에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품격은 어디에 있느냐? 그 품격은 그들의 삶의 양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왕에 공부를 하니까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구요. 내가 기업하는 사람을 심방하면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열심히 이 기업이 기업으로서 가치를 빛내라. 그래서 이 기업이 있어서 하나님만 유익을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경영의 원리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이 회사의 물건을 쓸 수 밖에 없는 그런 회사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렇게 해서 성공을 해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삶의 양태에 지나지 않고, 그것보다도 더 신자가 추구해야 할 바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이다 이거예요. 품격. 품위. 영원을 향하여 아무 의미가 없고 잠시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만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고 영원을 향해 정말 소용이 되는 그런 품격을 갖추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죠.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첫째는 지식, 두 번째는 지혜예요.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지식이냐, 아 그러면 또 공부 많이 해야 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이 지식은 공학, 미술, 정치, 사회에 관한 지식이 아니고, 심지어는 똑 떨어진, 다른 것과는 관련이 없이 똑 떨어진 성경 자체에 대한 문자적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뭘까요? 이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삶의 교훈.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과 내가 무엇을 믿으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믿음의 규칙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거에요. 학문에 관한 지식이 많아도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있고, 세상의 학문에는 눈이 어두워도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의 규칙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지식이 꽉 찬 사람들,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믿어야 한다 라고 하는 이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많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변하지 않는 품격이에요.
두 번째가 뭐냐면 지혜야 지혜. 사피엔띠아, 지혜에요. 이 지혜라는 것은 뭐냐하면, 생각의 척도예요. 이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고, 흘러가는 것인데도 영원히 거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금방 사라질 것인데 영원히 존재하는 것, 무로부터 생겨났는데도 영원히 존재해 온 것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착각을 할 수 있는게 인간의 마음이고 인간의 판단이거든요. 그것들을 그렇게 흔들리게 판단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자처럼 척도를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지혜가 바로 사물을 정확하게 재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여러분 이제 과년한 딸들이 있으면 시집을 보내게 되쟎아요? 그것도 이제 요령이 있단 말이죠. 자기 딸이 키가 좀 작고, 얼굴이 윤곽은 좋은데 피부가 별로야. 그러면 반드시 밤에 선을 봐야되. 약간 어두운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붉은 불빛을 받으면서 보면 다 묻혀요. 키도 묻히고, 피부도 묻히고 다 묻혀요. 그래서 저녁에 분위기에 혼미해져서 선택을 한단 말이지. 그런데 척도가 잘못된 거지.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니까 아 키가 크구나 생각을 하는 거지. 대낮에 해날 때 보면은 짝달만한거지. 그런데 자를 가지고 딱 재보면 밤에 늘어나고 낮에 줄어들지 안쟎아요.
이렇게 사람의 눈에는 표상과 실제는 혼돈하기 쉬운데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마음의 척도가 지혜라고 하는 것이죠. 지혜가 많은 사람은 따라서 속는 법이 없어요. 지혜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는 거죠. 그런데 이 지혜는 지식을 토대로 해서 지혜가 생겨나는 거죠. 어떤 식으로 지혜가 생겨나는가 하면, 배우고, 배운 지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한 후에 옳게 판단을 하여 실천을 하고 난 후에 지혜가 생겨요. 자꾸 지혜가 생겨나요. 그런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 지혜는 지식을 통해서 얻어져요. 그런데 그 지식은 아까 얘기했듯이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통해서 바로 지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에 대한 지식, 그 지식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 지혜라는 것이 생겨나는 거죠. 그런데 그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생활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보면은 공부는 많이 하고 머리가 커졌는데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지혜가 거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가방끈은 짧아도 인생의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세상 지식에서는 그 할머니를 몇 번을 가르쳐도 시원찮지만, 인생의 도리에 있어서는 그 분 앞에서 몇 번이나 무릎 꿇고 배워야 하는 젋은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쟎아요. 그게 바로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꼭 필요한 지식을 못가진 사람과 작은 지식을 가졌어도 꼭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 찾아온 지혜의 효과가 그 만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오늘 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무지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지식도 없고,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에 대한 지식은 물론 없고. 그것을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해서 신앙생활을 열렬하게 해서 지혜를 얻은 경험도 별로 없는 그런 사람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무지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이거예요. 이 세상에서 사업도 성공하고 세상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런데 그 위에, 그런데 그것과 함께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에 대한 풍부한 지식, 그것을 끊임없이 사유하는 삶, 그것을 끊임없이 적용하고 실천하는 생활, 그것을 통해서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지혜까지 소유했다면 최고죠.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품격은 예수를 믿고 성공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이렇게 지적인 품격을 가지고 내 비록 시골에서 땅을 일구며 농사꾼으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야지만, 주님이 세워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활의 교훈을 알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믿음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그래서 참으로 인간이 참으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터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없으면서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보다, 그것이 있으면서 이 세상에서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여러분들이 "당신은 예수 믿으면서 정말 예수 믿은 바람직한 사람의 본이 무어냐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으면 성공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성공도 좋지만, 내가 예수를 믿는 핵심적인 가치는 지적인 품격을 갖추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비록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슬하에서 자라는 내 아이들이 유명한 장관이나 대통령이 아닐지라도, 유명한 의사나 세계 제일의 과학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활의 교훈을 알고, 주님이 무얼 믿기 원하시는지 신앙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활용하고 실천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지혜를 가득 가진, 지적인 품격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입니다. 실제로 말이죠, 지적인 품격을 가진 가난한 사람을 돈 많이 가진 인간이 무시할 수 없어요. 그 속에서 위엄을 느끼게 되죠. 인간으로서 존엄을 느끼게 되요. 그래서 이 세상에 돈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면서 사는 것을 목표로 해야 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런 이유 때문에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는 지적인 품격도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얘기죠. 그러니 성경이 그리고 있는 그 사람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이냐 이거예요.
그 다음에는 뭐냐면, 이 사람을 곤고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인데,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고집이에요, 고집. 오늘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자기 길을 굽게 하고. 이 말은 확 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걸 고치지 않아는다는 말이에요. 패역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와요. 그걸 굽게 하고 고치지 않는 거예요. 이런 패역은 고집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냥 평범한 고집이 아니라, 도덕성관 관련된 고집이에요. 무슨 뜻이냐면, 본성적으로 정착된 고집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부도덕한데 옳지 않은 행동을 계속하고, 바르지 않은 고집을 하나님 앞에 계속 가질 수 밖에 없도록, 그런 식으로 본성이 굽어버린 상태예요. 그러니 이것은 도덕적으로 보면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계획과 정 반대예요.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계획은 뭐냐면, 이렇게 굳게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고쳐가지고 이제는 뭘 생각해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거의 자연스럽게 술꾼이 해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술집을 찾아가듯이, 그렇게 자신도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본성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게끔 그의 영혼과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그 사람 마음 속에 그런 본성을 심으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한 번만 은혜 주시지 않고 계속 은혜 주시고, 한번만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말씀한걸 또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고 재차 말씀하셔서 그래서 그에게 그것을 계속 심고 싶어 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은혜의 성향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이 바로 그런 사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회심하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과 정반대로 되는 거예요. 어쩌다 한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딱 굽었어요. 물을 부으면 항상 그쪽 통로로 물길을 따라 흘러가듯이 생과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하나님을 거스르는 방향이에요. 그러니 이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방향과 어울리지 않는 거쟎아요. 이런 고집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원망하면서 살아요. 또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고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면서 사는거죠. 그리고는 계속해서 뭐만 기대하는 거죠? 사물들의 질서가 자기가 원하는 질서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최근에도 신문에 보니까 강원랜든가 거기에서 카지노 놀이를 하다가 6년 동안 열 몇 명인가 자살을 했대요. 몇 달 동안 두 명이나 호텔에서 뛰어 내려서 자살을 했다는데, 그런거 거기다 왜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하루에 와서 거기서 20억씩 털어놓고 간대요. 어떤 친구는 교회에 나오는 형제자맨데 신혼여행때 거기가서 한 번 해서 돈을 땄다고 목사한테 자랑을 해. 좋은 소리로 들었겠어요? "목사님, 8만원 땄어요." "하지 마라."그러니 어떤 사람을 거기서 그것을 잃고, 어떻게 그렇게 해서라도 사물에 대한 질서를 자신에게 돌려 놓고 싶어 했는데, 결국 자살이라는 것은 뭐냐면 그 질서로부터의 도피예요. 도저히 그 질서를 견딜 수 없으니까, 그 질서를 마주해야 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 질서에 대한 자기 자신을 제거해 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거죠. 이것은 모두 고집의 소산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설교를 들으면서 찔리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지금 제가 정말 되는 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중인데, 저를 찌르시는군요. 정신차리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하나님이 뭐 잘못 하셨어요? 하나님이 잘못하신게 뭐 있으세요. 여러분 스스로 불순종하는 길을 걸어서 거기에 들어갔거나, 여러분이 원하는 질서에 있지 않다면, 둘 중의 하나일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잘못해서 그리고 들어갔거나, 그래서 벌을 받고 있거나. 아니면 잘못한 건 없는데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요셉을 국무총리 만들게 하기 위해서 애굽에 팔려가게 하셨던 것처럼, 아이가 질병에 걸려서 온 가족이 입을 벌려 약을 먹이는 것처럼,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쟎아요. 그러면 첫 번째 경우는 회개해야 할 경우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할게 아니라 자신을 원망해야 될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지. 하나님이 원망할만한 무슨 일을 하셨어. 뭐 잘못하신게 있어요. 그거 다 쓸데없는 시간들을 보낸 거예요. 그렇게 해서 고집 속에서 계속 버틴다고 해서 어느 날 하나님이 여러분이 흔히 신문에 광고내듯이, "얘야 내가 다 잘못했다 돌아만 오너라."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안한신단 말이죠. 그 고집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 이 곤고한 나예요. 이거 꺾어야 되요.
그럼 꺾는 길이 뭐냐, 자기 질서를 고집하는 거예요. 자기질서를 꺾는게 아니라 자기 질서를 계속해서 고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질서가 되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질서라는 것은 힘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거든요. 그런데 힘을 가하면 엄청나게 움직입니다. 그렇죠? 옛날에 사람들이 일군 모우는 거 보면 말이죠, 큰일하는 사람, 일하고 그러는 사람, 특히 건축하고 그러는 사람들은 일군을 제때에 수배하는 것이 큰일이쟎아요. 일군이 많으면 문제가 틀린데, 일군이 없어요. 다 불려가고. 사람이 남았는데, 이 사람들에게 "하루에 오 만원 줄 테니 따라 오슈." 아무도 안 따라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도 일꾼들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 급한 일이 생겼는데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는 일군들이 그렇게 와주지 않는 답니다. 그래, "어떻게 하냐" 그러니까, "힘을 가해서 끌어야죠.""어떻게 끄냐?" "다른데 가서 일 잘하고 있는 사람한테 전화를 하는 거예요. 지금 나 급한 일 생겼는데, 빨리 올라와라. 너 거기서 얼마받냐?" "10만원." "내가 30만원 줄께." 그러면 어디 간다는 소리도 안하고 연장 다 챙겨가지고 올라온다는 거예요. 일단 나중에 와서 바가지로 욕을 먹어도 3일만 일하고 나면 백만원인데. 그것도 힘을 가하는 거죠. 어쨌든 잡아 끄는거 아니에요? 질서라고 하는 것은 힘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자기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질서가 다 잡혀 있어. 이거를 제 자리에 돌려 놓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힘이 필요하쟎아요? 그럼 자원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 거지. 돈으로 돌려놔 볼까, 힘으로 돌려놔 볼까, 안되면 힘으로 해서 주먹으로 쥐어패서 태도를 고치하고 해볼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동안에 결국은 많은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정확히 묘사하기는, 여러분이 하나님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 가만히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서 그냥 마음속으로만 하나님 원망하는 적 없어요. 뭔가 행동으로 해서 죄를 자꾸 짓게 되는거예요. 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신앙을 파괴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신앙적인 방법을 택하는 거 봤어요? 절대 그렇게 안한다 이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꼭 불의를 저지르게 되는거죠. 그러니까 죄를 더 짓게 되는거죠. 하나님의 도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영혼은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인간의 마음은 더 강팍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하면 안된단 말이죠. 참된 자유를 찾아가야 되는거죠. 참된 자유가 뭐냐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를 고집하면서 그렇게 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태도를 버려라 이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냐면,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왔지만, 이거는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사실 말은 쉽지만 굉장히 어렵죠.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죠. 받아들이기 싫죠. 그래도 받아들여야 해요. 왜냐하면 그게 시간낭비를 안하는 비결이에요.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는 가수 가운데, 안드레아 보첼리 라고 하는 가수가 있어요. 맹인인데, 노래를 참 잘 불러요. 그래서 파페라 시장에서 아주 명성을 날리고 있고, 유럽에 있는 많은 대회에 나가서도 수상을 많이 했고,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쓴 전기 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어느 날 의사가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깜짝 놀랐대요. 그런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을 볼 수 없는, 시력을 잃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거야. 한 시간 반 만에 딱 접은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예수를 통해 눈을 가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거지요. 그 자기 고백이 어느 정도 진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 같았으면 정말 못했을거 같아요. 여권을 잃어버려도 3일을 찾는 사람인데, 시력을 잃었는데 1시간 반 만에 못 본다고 포기하고 새 길을 찾자 할렐루야. 이게 아직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주님 믿으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사실은 그런 태도가 필요해요. 전들 무슨 모든 사물의 질서 마음에 드는 속에서만 살아가겠습니까? 뭐 제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여러분들이 찔려 하실 필요는 없구요. 그렇겠습니까? 안 그럴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즐겨 부르는 찬송이 있어요.
(찬송)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조용히 불러 보세요. 그럼 믿음이 생겨요.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왜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괴롭고 마치 분쇄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온몸이 부스러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울까요? 여러분이 잘못해서 그 속으로 들어가셨죠? 회개하면 되요.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끔 만드셔요. 그래서 마치 세월이 지나가면 여러분이 원하지 않은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보석과 같이 소중한 것이 되어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아름답게 이바지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에요. 잘못한 게 없으시다구요? 그러면 더 많이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약 먹이고 계시는 중입니다. 아마 병들어야 될 아침에 그 약 때문에 건강하게 될 것이고, 시험의 큰 고통 중에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영혼의 질병을 하나님이 미리 고치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말예요, 이 고난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에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결점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결점 때문에 아파하고, 스스로 자기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때로는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을 많이 섬긴 사람들인데도 때로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셔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될것 같은 원석을 깎아서 보석을 만드시기 때문이에요. 될 거 같은 원석을 깎아서 보석을 만들지 되지도 않을 돌을 깎아서 보석을 만드시겠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셔요. 그 고난은 바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함께 고난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그 속에서 많은 괴로움을 당해요. 그런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발견하게 하시는 거에요. 누군가가 괴로움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서, 어떤 사람이 고통가운데서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들어가서 많이 고통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모르는 사람들은 ‘죄가 저렇게 많은가 보구나.’ 생각할 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더 넘치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원석과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석과 같이 깨끗하게 깎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깎으시는 거에요.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세 가지 C예요. 쓰리 C. 첫째는 크기, 둘째는 투명서, 셋째는 컷트, 어떻게 깎았느냐예요. 크기야 하나님이 각각 정하셨다고 하지만, 정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훈련과 거기에 순종하여 진리를 품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협력하는 순종을 통해서 정화되어가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정화되어 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면을 깨끗이 깎아내서 각이 똑바로 선 좋은 다이아몬드를 만드시기 위해서는 얼마나 맹렬하게 깎으셔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깎으시는 거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주님이 많이 사랑한 사람이 슬리퍼 끌고 편한 신앙의 길 걸어온 사람이 없어요.
(찬송)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해. 아프도록 순결하게 만드시고, 고통스럽도록 정교하게 깎아서 그래서 훌륭한 보석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는. 오늘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고통을 받는 여러분이 있다면, 난 오늘 여러분에게 자신있게 말하고 싶어요.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특별하게 다루고 계신 거예요. 많이 잘못했든 잘못이 없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매우 특별한 다루시는 거예요. 그렇게 다루지 않은 사람들이 돌처럼 길바닥에 굴러 다닐 때, 여러분들은 잘 깎여진 보석이 되어서 왕의 면류관에 박힐 것이며, 귀한 신부의 손에 가락지에 끼워질 것이며,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반드시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드셔요. 그러니 하나님 원망하면 되겠어요? 원망하면 안되죠. 사람을 원망하면 되겠어요? 그러면 안되죠.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예요, 천사. 자기 혼자 있으면 백날이라도 깨달을 수 없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보내어서 여러분들에게 고난을 주므로 때로는 여러분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여러분들이 인간적으로는 여러분들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원망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들을 축복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영혼을 망가뜨리며 사람을 향해 죄를 짓고 그러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돼요. 그러면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사람과 뭐가 다르겠어요. 똑 같은 거지요. 저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는 목회를 하면서 하도 교인들이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장로님들이 자기를 너무 힘들게 해서 너무 괴롭다면서 목회도 아닌 이 인간관계 때문에 이렇게도 괴로움을 당하는 자신이 솔직히 말해서 너무 싫고 한 번 목회에만 전념해봤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목사님 이 세상에서 그런 인간이 있답디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런 인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랬어요. 고난을 받았을 때,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갔을 때, 이거 나한테 진짜 필요한거네 진작부터 받고 싶었던 고통인데. 이런 사람 누가 있어요? 이러한 상황에 들어갈 때마다 위로를 주는 찬송이 있어요.
(찬송)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사랑 받은 자여라 주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말씀과 찬송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소망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 지 아세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가 어떻게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사물의 질서로 바뀌어서 나도 행복해 질 지 몰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르는 건 안 믿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믿기를 거부해.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더라도 나의 계획이 그분의 수중 안에 있기 때문에, 혹은 내가 넘어져서 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최후 승리를 믿어요. 그래서 그분의 손을 붙들고 볼 수 없는 그 길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순종하면서 걸어가요. 그러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들이 다시 왜 그렇게 됐는지 우리 앞에 다 드러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 이것을 쉬운 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며 곤고하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더하게는 사람에게 죄요, 환경에 대한 원망일 수 밖에 없으니 이런 무지와 고집을 다 버리고 오히려 이 고통스러운 사물의 질서 속에서 나를 깎고 빚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훌륭하게 빚어진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곤고한 이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