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함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의 정체(창5:22) 2005.4.18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동행하다의 의미 1: 하나님과의 평화(창5:22) 2005.4.19 십자가사경회(새벽) 10
3. 동행하다의 의미 2: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함(창5:22) 2005.4.20 십자가사경회(새벽) 20
4. 신자의 내적 생명(창5:22) 2005.4.21 십자가사경회(새벽) 29
5. 내적 생명과 외적 삶(창5:22) 2005.4.22 십자가사경회(새벽) 37
1. 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의 정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창5:22)
은혜 받은 신자가 가져야 할 가장 커다란 소명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몇 번의 설교 속에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사경회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리어 간 성경에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창세기 5장은 마태복음 1장과 대조를 이루는 장입니다. 마태복음 1장이 누가 누구를 낳고......하는 기록으로 이어졌다면 이 창세기 5장은 죽고 죽은 기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카일델리치 같은 주석가는 이러한 죽고 죽는 족보의 기록은 바로 그 앞에 나오는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지 않고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하와를 유혹했던 뱀의 유혹이 거짓이었고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선고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5장은 죽고 죽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적인 죽음이 역사하는 가운데 죽음을 보지 않은 한 사람을 여기에 두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이 사람이 아담의 7대손으로 나타납니다. 이 에녹이 죽음이 보편적인 족보 속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으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아주 매우 중요한 복음의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의 형벌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죽음의 권세는 원래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떨어진 자들에 대한 죽음을 사단을 통해 집행함으로서 인간들의 생명을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는 때에 에녹 한사람이 예외가 됨으로서 이후에 인간들이 비록 범죄하였다고 할지라도 -죄가 보편적으로 역사한다고 할지라도- 이 죄를 이길 생명이 나타나고 또 역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맛보기로서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에녹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빛을 던져주는 구속사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그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기까지 살았던 삶의 방식이 무엇일까요? 사실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나옵니다. 365세를 살았다는 이야깁니다. 그의 생애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데 65세를 기점으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이전과 이후의 삶을 구별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므두셀라를 낳은 사건이었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 65년은 이 땅의 죽고 죽은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연수까지 300년이라고 확정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기록을 성경이 남겼을 리가 없습니다. 65년은 하나님과 특별히 동행한 삶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은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동행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서에 의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캄캄한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던 선지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외치고 증거했던 선지자로 나타나는데 이 삶도 아마 전반기의 삶이 아니라 후반기의 삶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웰이라고 하는 성서 신학자는 이 므두셀라를 낳은 사건을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받은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므두셀라라고 하는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또한 메튜샤라고 하는 고대 근동에 있었던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의 보통명사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메튜셀라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주어진 이름이고 아이를 메튜셀라라고 했으니 이 아이가 죽으면 전쟁이 시작된다라고 하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즉 한 마을, 혹은 한 성을 적군이 공격할 때 제일 먼저 메튜셀라를 죽이고 메튜셀라가 살해되면 적국의 공격이 시작되듯이, 이 메튜셀라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수를 계산하면 이 메튜셀라가 죽은 다음 해에 노아 홍수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떻든 약간은 추측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지만 공교롭게 그런 추론들이 맞아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다 생략하고 오직 에녹이 65세를 살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후반기 300년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죽음을 본 그를 하늘나라로 직접 데려가셨다고 말하고 유다서에서는 그가 후반기 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그 시대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녹을 전문적인 선지자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시대는 족장 이전의 고대 시대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선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그는 김희보 교수님의 해설과 같이 평범한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났고 65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후반기 생애는 참다운 성도로서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이라고 보고, 유다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그 메시지는 전문적 선지자로서의 삶이라기보다는 한 성도로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을 교화했던 흔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1.‘동행하다’의 어의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삶의 방식입니다. 그 살았던 삶의 방식을 오늘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동행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동행한다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히트할라크’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할라크’라는 동사의 제귀형입니다. 할라크라는 동사는 그냥 ‘걸어 가다’는 뜻입니다. ‘히트할라크’는 특별히 누구누구와 함께 걷다 그리고 걸어도 좀 오랜 기간동안 걷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방황한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때는 예외 없이 ‘히트할라크’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요청입니다. ‘너는 나와 동행하라. 이것이 언약백성의 삶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순간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겨야겠다고 하는 일시적이고 종교적인 감동과 흥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까’ ‘내 몸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까’하였습니다. ‘내 몸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까 하는 것입니다. 고대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제사에 자식을 죽여 드리는 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부모가 자기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신심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까 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자기는 신앙생활 못하면서 자식은 신학교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기도하면서 자기 갈길 가면 됩니다.
(예화: 고등부 전도사 시절 한 자매가 동생 순교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 이야기)
그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첫째 공의를 행하고 둘째 인자를 사랑하고 셋째 겸손한 것 넷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세 가지 모든 것들이 마지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 속에 포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향해서 거는 최고의 기대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고통 받는 문제 중 궁극적인 것은 자원의 부족 때문입니다. 이 땅의 자원의 부족도 고통을 주지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할 때 우리의 영혼은 더 많이 고통 받고 괴로워합니다. 동행하는 삶에서는 이 자원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됩니다.
(예화: 아이들이 엄마보다 아빠와 시장하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
2.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공중에 매달려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 백성들과 함께 섞여서 삽니다. 그러니까 얼핏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구별이 잘 안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직장 가야 하고 집에 가서 밥해야 하고 아이들 학교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외관상만 구별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를 훑어보아도 종종 분간이 잘 안됩니다. 은혜 떨어지고 신앙 잃어버리고 나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이나 불신자의 마음속이나 다를 바가 뭐있겠습니까?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다시 썩었습니다.
새로 나온 책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보여주듯이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권은 종식되었으나 영향은 계속 미치고 존재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그 죄가 다시 크게 역사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자에게 있어서 우세해져서 악으로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경이 거듭난 피조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받은 구원,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난 변화가 그것밖에 안됩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이 은혜 언약,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은혜 언약은 우리를 구원해주시지만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가 신자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는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인간의 의지를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신자다운 삶을 살수 있도록 어떤 약속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 끊임없는 자원들을 공급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능히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이 세상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별로 없고 또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수시로 이 세상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그런 모습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신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들이 수시로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생과 존재를 재는 기준이 동일하게 이 세상에 있는 기준과 똑같이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의 자녀들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원인데 부당하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서 그것을 다시 빼앗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다시 사용하도록 이 세상을 정복해가는 것이 신자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살아가는 방식도 이 세상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동행하는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성경이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가 무엇인가를 먼저 확인할 때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하고 그렇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 즉 신자, 혹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정체가 무엇입니까? 많이 있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중요한 전제는 첫째 순례자의 삶이고, 둘째 동행하는 삶입니다.
1)순례자의 삶
신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너희는 순례자다’고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순례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화: 성지순례가 아니라 성지여행이라고 해야 맞다)
예전에는 자기의 즐거움이나 호기심의 만족,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하면서 성지를 간 것이 아닙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지를 순례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선행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시였고 후에 중세 교회 시대로 들어오게 되면 성지를 여행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보속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비행기타고 갔다 오면 되지만 옛날에는 해로의 위험, 육로에서 만나는 강도의 위험, 질병, 고단한 여행길,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나라와 마을과 동네를 지나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지에 갔다 오니까 만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생명을 걸지 않으면 성지를 순례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간이 바로 이런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위인들을 칭찬하는 가운데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이 이 땅에서 자신을 나그네로라 자처하였으니 이는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본향을 가지고 있었고 또 거기를 믿음으로 떠나왔는데 다시 그 본향에 돌아가려고 마음먹었으면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은 이미 그 본향을 떠난 사람들이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라’고 자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들이 찾아가는 또 다른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져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바로 돌아갈수도 없었지만 두고 온 그 고향도 아닌 애굽, 죄의 땅을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매우 심각합니다. 즉 하나님이 불러내신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두고 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으로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례자의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많은 족장들이 약속으로 받은 그 땅에 아직 나아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동네에 우거할 때 그들이 너희가 누구냐고 물으면 항상 대답하던 말이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라’고 자처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낯선 사람처럼 취급될 때에도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세상이 자신들의 영원한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성화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가장 고통스러운 장애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세상 사랑이 우리를 억압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계속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순례하고자 하는 성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마지막 몇 미터 남지 않은 길도 모두 낯선 나그네의 길입니다. 그래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는 이 땅에서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집을 지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 하루 주막에서 묵고 내일 아침이면 다시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좋은 집을 지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웃고 떠들고 같이 한 끼 밥을 먹고 함께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내일 아침이면 잠시 있던 그 만남을 뒤로 하고 다시 헤어져 자기의 갈 길을 가야하는 것이 순례자의 길이고 나그네의 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갈망,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좀더 진실하고 참된 신자가 되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신령한 욕망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순례자의 삶과 세상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추구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많은 사람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하기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우울하고 비관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순례자의 삶을 살지만 이 세상이 마치 자기는 살아서는 안 되는 세상이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나그네라고 자처하였던 청교도들은 정말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집에서는 늘 악기를 치고 즐거워하고 심지어는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성이 주는 즐거움들을 높이고 가족과 이웃들 간에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았고 많은 오락과 여흥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순례자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세상을 비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살면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분복들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이 누리게끔 해주시는 많은 공급되는 자원들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그 자원들을 통해서 마음에 커다란 활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 길, 전쟁과 같은 순례의 길에서 주어지는 위문품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즐기고 누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탐닉하는 것 때문에 가야할 순례의 길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뿌리 깊은 세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가는 성화의 길, 순례의 길에 거침이 되고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욕심에 눈멀어 있으면 그 눈 안에 하늘의 신령한 약속들이 비춰질 수가 없고, 하늘의 신령한 약속들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 비춰져서 소망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너희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사는 자신의 인생을 순례의 길을 가는 나그네로라 자처하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명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라고 명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되 이 세상에 탐닉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의 즐거움에 빠져서 신자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났기 때문에 고쳐져야 할 이 세상, 아파하고 망가졌기 때문에 자기가 가서 몸 바쳐서 이 세상을 치료하고 고쳐야할 세상으로서 깊이 사랑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연인 사이에 있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의사가 자기를 찾아온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짝한 사람들이 아니라 의사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파송되어 치료자로서 행세하고 치료자로서 이 세상을 위해 봉사했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었던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세상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빛 아래서, 죽음의 빛 아래서 우리의 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묵상으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두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정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데 의합함으로서-함께 뜻을 같이 함으로서-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내일부터 말씀을 드리겠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정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게 되었을 때 그 하찮은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를 비롯한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목부에 지나지 않았던 그 초라한 모세를 그처럼 크게 보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자원이라고 말하자면 아무 것도 없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지위라고 말하자면 자기들의 노예였고, 모세는 지명수배 받은 반역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그토록 크게 봤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만날 때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한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기사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세겜에서 정착하던 야곱이 디나의 강간 사건을 만나고 두려워 떠는 가운데 아들들의 경솔한 판단으로 거기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제 가나안 족속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 땅을 속히 빠져나오는 그 때에 다른 족속들이 이스라엘 집안을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커다란 두려움들이 그들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황망히 도망가는 그 집안 식구들이 두려운 존재가 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들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이 세상에 대한 최고의 소명은 자기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오늘도 역사하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보여주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수많은 약속들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우 기뻐하실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실 때 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줄 수 있었던 최고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반역하는 가운데에서도 만나를 보내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서도 메추라기를 보내어서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실 때 절대 행하시지 않는 것, 그 중요한 축복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더럽혔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 내 사자를 보내어서 너희를 인도하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친히 너희와 올라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불쾌감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줄 테니 나를 약속을 어기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 땅을 준다고 했으니 주겠다. 그러나 나는 안 준다’라는 의미를 깨닫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장품을 모두 제하고 흐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데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우리와 동행해 주십시오’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게 되었고 모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이 백성들을 당신의 족속으로 여겨주셔서 함께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독특성을 드러내주는 거의 유일무이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장 커다란 관건은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삶을 사는 것, 교회 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여러분 모두가 잠들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그 교회를 위해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시고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조국교회 위에도 가장 시급한 것이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 인생길을 사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신앙적으로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친히 동행해주시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소유한 그러한 정체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동행하다의 의미 1: 하나님과의 평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1)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 세상을 산다고 할 때 가장 첫 번째 우선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라고 하는 것, 혹은 성경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화목이라고 하는 것은 막힘과 거리낌이 없는 상태에서 관계가 완전히 친교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평화만 아니라 불화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과의 불화도 경험했고 그 불화에서 벗어나서 다시 하나님과 평화를 재수립하는 은혜도 경험합니다.
어제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를 순례자의 삶, 곧 나그네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그네는 사실 위로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 위로받을 길 없는 나그네의 삶 가운데 이 땅에서 받는 커다란 위로와 기쁨이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산 사람들입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방식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가 어떻게 수립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①공로적-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 통해
우선 첫째는 공로적으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전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전혀 모르고 죄 가운데에서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한 담을 허시기 위해서 자기의 육체를 허물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 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의 용서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의 것이고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다만 용서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함이 있는 사랑의 가족 관계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방식은 제일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중보를 통해서 -그 공로에 기초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림에 있어서 우리들이 높여야 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감과 낯섦을 모두 철폐하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까워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최초의 평화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②유효적-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중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효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거론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한 성령의 유효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수립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나 혼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가족들을 위해 늘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내 가족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그 가족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서 예수님을 믿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공로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과의 평화로 부르셨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살아가던 악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과 성질에 부합하도록 작용하셔서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데 제일 먼저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각성을 시키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의 비참한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죄인의 마음을 설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강요나 두려움에 의해서 억압을 받는 상태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마음을 설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이 신자가 인격적으로 억압이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자기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영혼의 상태가 자기의 죄 때문이었고 그 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평화를 깨트렸고 그 결과가 이렇게 비참하고 앞으로도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셔서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유효하게 그 죄인을 설복하신 것입니다.
그 때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기의 이 형벌 받을 상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져서 고통을 받고 있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아야 되겠지만 그렇게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그런 무조력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밖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갈망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③적용적-신자의 믿음을 통해
세 번째는 적용적으로 신자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적용적으로’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공로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죄인의 마음을 각성시키시고 설복시키셔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 때 그 모든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게 하는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둘 다 구원을 얻은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은혜가 없었더라면 믿어도 소용이 없는데, 또 은혜가 주어졌어도 너희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었는데 ,그 은혜가 기초였고 그 위에 너희가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은혜가 바로 공로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고, 유효적으로는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바라보게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효하게 성령이 역사하신 바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오래 동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우리의 악한 죄들을 회개하고 다시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오게 만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수립,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처음 불신자에서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만 적용되는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졌을 때에도 역시 동일한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시 수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최초로 수립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성령의 유효한 역사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그런 평화를 잃어버리고 방탕하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되찾을 때에도 이 방식을 그대로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던 신자가 다시 그 평화를 회복할 때가 되면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들어옵니다. 냉랭하게 제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말씀을 깨달으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자기가 너무나 긴 세월동안 방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공로적 원인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십니다. 은혜가 떨어진 가운데 신앙생활 할 때는 죄가 무엇인지 불순종이 무엇인지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성령이 역사하시기 시작하시면 그것들을 다 발견하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믿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워진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회개하고 다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고 나면 그 신자의 마음속에는 굳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진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야겠다. 이제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겠다’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방식으로 최초의 평화도 수립이 되고 그 이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는 것도 이런 방식으로 수립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과 유지
그러면 이런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과 유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①평화의 깨어짐-불순종과 죄
우선 첫째로 이렇게 신자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 하나님과의 최초의 평화가 왜 깨트려지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평화의 깨어짐은 불순종과 죄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질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믿는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나보다’고 생각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모든 요인을 거론하면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느니라(롬8:38-39)”고 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오는 인격적인 관계의 경험입니다. 그러한 평화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이 끊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 있는 환경이나 모든 여건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로막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말 정직해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평화가 깨트려지는 많은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계속 환경의 핑계를 대고 주위의 여건의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건이 얼마나 잘되면 그 여건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수립하게 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뜨거운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어려운 여건 때문에 그 안에서 더 많이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후일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고난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존경하던 은사 김희보 목사님이 꽤 연로하신 때에 학생들에게 강의하시면서 수업하시기 전에 늘 빼놓지 않고 기도하시는 것이 ‘우리 사랑하는 이 신학생들의 가정과 교회와 일신상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아 주셔서 후고-쟁기를 지고 가다가 뒤를 자꾸 돌아보는 것-의 염려가 없이 하나님을 배우는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지금도 그 기도가 귓전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그 평안한 상태를 활용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섬기고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길을 매진하면서 한길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형통한 여건을 주셨기 때문에 그 형통한 데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이 주시는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의 심판 날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입니다. 23년 동안 목회하던 로스덴턴 교회에서 투표에 의해서 그 직을 사임하면서 남긴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어마어마한 설교입니다. 제가 보기에 3시간정도 설교 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거기에서 가슴 깊이 감명 받은 것은 목사의 속을 썩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교인들의 진정한 변화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일에 전심전력하는 사람들이니까 가치도 별로 없는 일을 가지고 목회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문제를 일으켜서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에 정진하지 못하도록 훼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다 헤아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분쟁하면 그리스도의 심판 날에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의 보좌 앞에서 만나고 그리스도께서 그때 분쟁하던 목사와 교인들에 대해서 엄중하게 심판을 내리셔서 시비를 가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우면서도 너무 명쾌한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평화는 다른 것에 의해서는 절대 깨트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교인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 깨지고 인생이 매우 곤고한 데 있는데 자신이 곤고한 이유가 환경이고,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고 하면서 자기 가족, 교회, 교인, 친구, 사돈의 팔촌, 심지어는 대통령 이름까지 들먹이는데 그러면 인됩니다.
시인이 말하기를 “사람이 흑암의 그늘에 앉게 되는 것 그리고 착고에 갇히게 되는 모든 것은 지존자를 멸시함이라”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니까 그런 것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되려면 제일 먼저 하와가 타락한 이래로 계속 되었던 그 죄인의 교묘한 핑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여건일 뿐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②하나님과의 평화 회복-참회와 용서
그렇게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졌을 때 다시 회복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참회와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과 수립된 평화를 끝까지 계속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믿음이 약해지고 때로는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느슨해진 관계는 우리를 죄와 많은 욕심으로 데려가서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순례자의 삶으로 자처하던 좋은 신앙의 때의 결심들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나그네로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집 짓고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정말 큰 문제는 너무 현세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너무 현세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잘 살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남편은 너무 좋은 사람인데 문제가 있다면 예수를 안 믿는 것뿐이라고 했다)
성경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화: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 니다’라고 말하면 강남에 사는 교인들이 ‘목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없어도 이 땅에서도 건강하기만 하면 살만해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한 모든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의 불순종,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집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이고 불순종은 바깥으로 흘러나온 삶입니다. 죄의 뿌리에서 마음으로 불순종하고 또 외출적으로 불순종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질 때 치료하시는 방법은 그 신자 편에서의 참회와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신 재수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냐는 것입니다.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언약관계에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인 사랑만 입고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무한한 죄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런 평화가 수립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그 평화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의무들을 부과하셨습니다. 그 의무가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를 때 그런 실패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로를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면탈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에는 이렇게 적용시켜도 문제가 안 되는데 성화의 도상에서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적용시키면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이 안 되고 성경적으로도 입증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얼마나 많이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계명들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실제적인 삶의 지침들입니다. 그것들을 마구 짓밟아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평화를 주실 것이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감히 인간이 그 평화를 깨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깨트렸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참회하는 과정에서도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은 인간의 지성만으로 는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성을 성령님께서 비춰주실 때에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상 세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먼저 이 영혼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개명(enlightement)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을 밝게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불이 나가면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이 환하게 들어와도 눈곱이 끼고 안질이 있으면 못 봅니다. 병이 싹 나아야 봅니다. 말하자면 어두움 가운데 먼저 불이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 개명이라면, 안력이 좋게 만들어주시는 것이 조명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개명하시고 인간의 지성에 조명하시고 인간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을 보고 깨달아야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올 것 아닙니까? 아무 것도 안 보이다가 빛이 들어오면 환하기는 한데 무엇인지 모릅니다. 눈이 열리면 죄인 줄 압니다. 여기에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화를 주시면 자신의 죄와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통절하게 깨닫고 그러한 죄인들을 다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평화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도록 감화시켜주십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이 생기고 예전에 죄 가운데 살던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바로 신자가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자기를 불순종하게 만들었던 죄, 그리고 그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마음으로 실제의 삶으로 불순종하였던 자신의 많은 잘못에 대해서 통렬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는 참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참회가 생겨날 때 신자는 자기 비참을 극도로 확인하게 됩니다. ‘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오’ 그렇게 통절하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절망하게 될 때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동시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용서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데 이 용서의 경험의 진수가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③평화 유지의 비결-순종과 사랑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찾았을 때 그 하나님과의 평화가 계속 유지되는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입니다. 그런 회복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사는 비결이 순종과 사랑입니다. 다른 새로운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그리고 불순종이 죄로 말미암았다면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두개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모든 계명에 모두 순종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 오고 시련이 옵니다. 인생 사는 날 동안 어떤 괴로움이 우리에게 없겠습니까? 인생 사는 날 동안 너무 행복해서 하늘나라도 생각나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호의호식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잠시 신자가 미친 것입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님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많은 위로를 주십니다.
전투하다 보면 가끔 낙하산 타고 위문품이 내려옵니다. 잡지도 오고 사탕도 오고 양말도 내려오고 장기판도 내려옵니다. 우리도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래 아무리 돌아봐도 너처럼 섬기는 사람 못 만났는데 너 정말 진국이구나. 내가 좀 너를 죽을 때까지 부려먹으리라’하시지 않습니다. 시시 때때로 위로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을 갖게 해 주십니다.
그런 위로와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관계를 통해서 올 수도 있고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이 세상의 섭리적이고 일반적인 축복들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에 천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순례자의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게 될 때 이 신자의 삶 속에서 열매 맺는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려는 사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과의 평화의 진수-기쁨
하나님과의 평화의 진수는 기쁨입니다. 이것은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첫째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①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사
이 땅의 성도는 하나님의 큰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평화를 수립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계속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언약 백성들, 당신의 성도들을 모두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정도가 똑같지 않습니다. 자기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도 똑같이 기쁘십니까?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만나기만 하면 기쁩니다.
②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기쁨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기쁨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책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자기 시대를 개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시대가 두 가지 죄를 짓고 있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도무지 기뻐하기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기독교 기쁨주의’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 많이 벌고 잘나가고 쾌락을 즐기면 기뻤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 되고나면 진짜 하나님 자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기쁨주의-크리스찬 헤도니즘-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우울증 환자처럼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자 기도할 때는 좀 고뇌하더라도 같이 일할 때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활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야 합니다.
(예화: 어느 해 스승의 날이 며칠 지난 후 성경에서 구두티켓과 함께 편지가 나왔는 데, ‘목사님이 거기 계셔서 저는 참 기쁩니다’라는 감동적인 말이 쓰여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해줘서 기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자체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는데 아이들이 뛰어나오면서 ‘아빠 사랑해. 뭐 사왔어?’하다가 ‘치-’하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가면 기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못 사왔는데 어쩌지?’할 때 ‘아니에요. 아빠가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기뻐요. 사랑해요’하면 다음에 더 사다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3. 동행하다의 의미 2: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함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때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내포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평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한다고 할 때 그 갈망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본체적인 영광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더 보태지고 높아지고 하는 가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동일하게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이 세상이 그것을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이름은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업신여김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도록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적극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어떠어떠한 일을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어떠어떠한 의무를 행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일을 다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러한 일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향한 계획과 섭리에 참여하여 거기에 자기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의 정체입니다.
A.신자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의 갈망
그런데 신자가 갖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현실에서의 갈망은 신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아파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갈망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어놓으시려고 하는 그 일과 계획에 자기가 동참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신자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신자가 거듭나는 순간에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 수립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원리들이 파괴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새 생명을 심으셔서 원리적으로 은혜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진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졌느냐고 하는 것은 성화에 많이 의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생활을 잘 못하면, 정말 구원받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실제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심령의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떠난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화를 받고 끊임없는 은혜 살림과 죄 죽임 속에서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랑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충분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 마음 안에서 통치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양심의 율법을 따라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고유한 의미의 율법을 따라서 다스리시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신자의 내면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신자 안에 가득 차게 될 때 그 때 신자는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와 자기 밖에 살아가는 삶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비교하게 됩니다. 두개의 영역이-자기 마음 안의 영역과 자기의 실제적인 삶의 영역이-평균을 이룰 때 신자는 가장 편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굉장히 풍부하고 마음 구석구석을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현실을 보면 도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주님의 영광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고통 받습니다. 그때 신자는 마음으로 깊은 아픔과 통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라면 그러한 갈망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신자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새로워지고 몸부림치는 모든 은혜 생활의 원리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가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바로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당신과 동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따라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찬 내면의 생활을 해나갈 때 외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저것을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 드릴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만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할 때 이것은 인격적인 특징이겠습니까, 삶의 특징이겠습니까? 인격적인 특징인 동시에 또한 삶의 특징입니다. 행동의 양식인 동시에 그 사람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갈망과 열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본래의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 계획대로 이 세상을 바꾸어 변화시킴으로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 당신 자신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가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그러한 경륜을 이루는데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그 열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헌신 이상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다양한 헌신들은 바로 이러한 열망의 산물이어야 합니다. 그때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해주시는 삶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B.영광을 갈망하는 삶의 특징
이렇게 어떤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갈망하는 삶을 산다고 할 때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그 삶의 특징이 네 가지 있습니다. 최소한 이 네 가지를 포함해야지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음
첫째는 신자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계획이 나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신자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신자의 삶의 최고의 가치가 자기의 행복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아가고 그러한 기여를 통해서 자기 주위의 세계들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그분의 이름을 높이게 될 때 신자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신자가 즐거워지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그곳에서 신자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상황 하에서 하나님은 그 신자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신자는 그런 하나님을 통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독교의 기쁨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단절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분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그리고 최고의 가치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심지어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많이 하면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을 섬기고 어떤 의무에 복종하고 율법을 행하고 여러 가지 열심 속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자신의 행복이 우선순위 1번에 있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어있고, 겉으로는 그 두목표가 화합하는 것 같지만 어느 결정적인 시점에 가면 반드시 두 목표가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두 목표가 갈등을 일으키게 될 때 신자는 반드시 그 두 목표 중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이라고 하는 목표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가면 예수님께서 다 판단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을 많이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뿌리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섬김이요 봉사였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행했는지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하실 것이요 그런 동기에서 행하지 않은 모든 섬김들은 불타 없어질 지푸라기와 같은 공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신자의 마음 안에서 가장 먼저 영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참다운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고 정말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축으로 해서 자기중심적인 자기 사랑 속에서 쌓아 올린 많은 꿈들을 성취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하는 것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직한 마음으로 눈을 들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신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혜택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이 있지만 자신을 죽기까지 소진하여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면 이 세상 어디에 살든지 자기는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영광에 대한 갈망을 읽게 해주는 신자가 얼마나 소수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언제나 그러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던 세상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숫자로 당신의 나라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주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충분히 이루심으로서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그것이 사람의 재주와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행해주시는 하나님 자신에 달린 것임을 하나님이 혁혁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그 일을 위해 모든 삶을 재편함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실제적인 모든 삶이 재편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면 그러한 은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용어나 개념에 익숙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많이 좋은 말을 남발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심리 속에서 자기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고백하다보면 자기가 예수님처럼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고, 선한 삶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많이 이야기하고 고백하다보면 자신이 이미 그런 사람을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감정 이입의 현상입니다.
연기자가 연기에 몰두하다보면 감정이입의 현상이 일어나서 자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극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파서 울고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하는 사람들이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이입의 현상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영혼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영혼보다 매우 더 많이 위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충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자신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라는 암시와 고백들이 많이 행해질 때 신자는 실제적인 자신의 삶의 재편 없이 수시로 자기가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인 것처럼 이런 감정이입으로 인한 착각의 현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진실한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이 재편되고 그 모든 다른 삶의 구도들이 그 한 가지 목표를 원활하게 수행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재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한 투수가 공을 다양하고 유리하게 던지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자르는 수술을 하고 너무 좋아했다는 이야기-그의 갈망은 어느 타자도 치기 어려운 공을 던지 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렇게 할만한 가치가 있는 열망은 어떤 것입니까? 그 답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예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초인적 연습으로 손에 마비가 와서 연 주를 못하게 된 이야기)
그 조그만 악기 하나에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명을 다 바쳐서 생명을 거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나요?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 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여러분들을 관찰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씩씩하게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다 마음에도 없이 가끔 하나님 부르고 어려운 일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껏 믿었더니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냐’하며 하나님 앞에 따지기나 하고, 하나님께서 좀 공급해주시면 ‘헤헤’하며 하나님 앞에 아첨이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선을 끌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저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 많이 애를 쓰지 마십시오.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주님 자신이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게 되는 하나님의 그 크신 경륜에 이바지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서 내 밖에서 도처에서 모욕 받는 주님의 이름을 봅니다. 하나님, 이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의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습니다’한다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주목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너무 소수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확실하게 삶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적합하도록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가 가지고 있는 고백이 참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3)그렇지 못한 현실을 아파함
세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못한 현실 때문에 아파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들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로 말미암아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참될 때에는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아픔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될 때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자녀가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내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어서 거리나 방황하기를 원합니다’하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좋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권면하기도 하고 신앙생활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 아이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의 농도에 있어서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다가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치러야할 희생과 자기 자신의 행복이 충돌을 일으킬 때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삯꾼부모들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하지만 정말 그렇게 똑같은 정도로 사랑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면서 산다고 할 때 그것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에 살면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참된 것이라면 자기가 거룩해지지 못한 죄인 된 모습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불편해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해야할 불변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는 것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고 고통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갈망하는 그 대목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진짜 충성스러운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만 그가 충성된 것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지 못한 삶을 산 것 같은 그날에 그것을 후회하고 아파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임이 입증됩니다. 그래서 진실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진짜 진실한 상태에 의해서 자기가 진실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하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특징은 수시로 진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점점 더 진실해져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많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아무리 진실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시시때때로 부패해져서 나중에는 매우 불신실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게 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현실을 인해서 깊이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오웬은 말하기를 “인간,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욕망의 소리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은 신령한 축복들을 사모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들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과의 친교를 갈망하고 주님을 더 만나기를 사모합니다.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많은 것들을 누리는 것보다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친교를 갈망하게 되고 그분을 만져보기를 원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인격적인 사모함들이 있습니다.
그런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불순종, 고통하는 현실,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단절의 시간들이 찾아오게 될 때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45편에서 고백했던 시인의 고백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목마릅니다” 물이 있을 때가 아니라 물이 없을 때 그 물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 목마른 사람입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물과 연관돼서 생각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정말 그런 목마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4)영광의 나타남과 함께 즐거워 함
마지막 네 번째는 영광의 나타남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두 가지 방법으로 위로하십니다. 첫째는 직접적인 위로이고 또 하나는 간접적인 위로입니다. 그래서 저는 분류하기를 이 직접적인 위로는 ‘영혼 위로’이고 간접적인 위로는 ‘섭리 위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갈망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할 때 주님이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기쁨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오셔서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십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놀랍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경험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너무 비감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저렇게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고 엄위로우신 분이신데 이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가득하구나’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니까 너무나 더럽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정결케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갈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제가 가겠습니다”하니,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환희를 느끼면서 주의 영광을 봄으로서 그 사람이 영광의 신학의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직접적으로 어루만지십니다.
두 번째 간접적인 위로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어루만지시는 것은 아닌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위해서 애를 쓸 때 자기가 맡고 있는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들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섭리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영혼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사용하시는구나’하며 위로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섭리 속에서 베풀어지지만 간접적으로 그것이 영혼에도 영향을 미쳐서 ‘더 잘 살아야겠다’하며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게 됩니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간접적인 방법으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신자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안 먹어도 자기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면 그것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그까짓 거. 그런 인간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하고 생각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니 얼마나 기쁜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런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자의 삶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짧은 인생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영원히 있는 법입니다.
4. 신자의 내적 생명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과 신자 안에 있는 내적 생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고 내일은 그러한 내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맺혀지는 외적 삶의 열매들을 살펴봄으로서 사경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A.하나님과 동행함의 세 요건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고 할 때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합치입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사람이 의합하지 않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 둘이 먼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화: 엘리베이터에 여러 사람이 함께 타는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옆자리 에 탄 채로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힘 드는 일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의견들의 합치가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구현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목표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커다란 설계도를 만드셨습니다. 그 설계도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천국을 만드시고 거기에 천사들을 두어 섬기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처럼, 땅에는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이 지상의 나라를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에는 사람을 두셔서 하늘의 통치를 구현하게 하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손길들을 온 세상이 골고루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의 영광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후에 성화의 교리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세워지는 교리의 뼈대들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구속하신 목적들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설계도를 만드시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처음 창조하셨을 때는 계획대로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했습니다. 그 좋은 세상에서 창조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이 계속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이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더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또 드러내야 합니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여러분들이 결혼해서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아기를 낳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정말 완벽하게 낳았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던 대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아기는 계속 자랍니다. 자람으로서 점점 더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서 부모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완전했지만 그것은 태어난 세상에 있어서 완전한 것이고 그 태어난 세상을 점점 가꾸면 가꿀수록 더 놀라운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창조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인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고 세상은 망가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망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계획을 완전히 바꾸시지 않으셨다면 창조하신 계획과 망가진 세상을 고치시는 계획이 일치하겠습니까, 틀리겠습니까?
집을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큰 덤프트럭이 와서 기둥이 무너지면서 집이 찌그러졌다면 그 집을 다 부수고 새집을 만들지 않는 한 수리를 하려면 원래 지었던 설계도를 가지고 와서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계획과 구속의 목적이라는 단어를 제가 늘 나란히 쓰는 이유는 이 두 목적이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한 설계도가 바로 구속 계획입니다. 그 설계도를 실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설계도대로 우리를 고쳐놓으신 것이 중생입니다. 뼈대는 고쳐졌는데 전체적으로 세상 자체가 고쳐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설계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손과 발이 되어서 세상을 섬겨야지만 세상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역입니까?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렇게 목표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집을 지으셨는데 죄라는 덤프트럭이 와서 한쪽을 우그러트리고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인부들을 많이 부르셨는데 우리가 그 인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비도 공급해주시고 자재도 주시고 돈도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주셔서 재능대로 그 망가진 건물에 붙어서 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고치다보니 고치는 일은 힘들고 주는 품삯은 맛이 쏠쏠합니다. 맡긴 일을 하기는 하지만 그늘에 가서 합판 깔고 드러누워 실컷 자다가 점심 먹고 저녁 때 품값 받아서 간다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목표가 합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적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과 함께 심겨지는 것인데 이 생명이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대로 자신이 존재하고 또 이 세상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기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향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그런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인데 우리가 거듭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우선적 소원을 주시고 또 그러한 소원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자신에게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서에 보면 성경의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선한 일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행실입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기여하는 선한 행실입니다. 그것은 다양합니다.
(예화: 총신사랑섬김의 날로 섬기고 돌아왔는데 이는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는 일이다. 그 학생들이 은혜를 받고 좋은 목자가 되면 우리가 가지 못한 곳까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들이 펼쳐 질 것이다)
이런 것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의 보람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생명의 원리를 심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을 통해서 심겨지는 새생명의 원리가 있어야지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최초의 회심의 중요성입니다. 최초의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아주 특별히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지 능력이 있는 어린이 이상의 모든 성인들 모두는 거듭나는 것과 회심하는 것이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언제 거듭났는지도 모르게 거듭나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인지 능력이 생긴 어린 아이를 포함해서 어른에 이르기까지는 그들이 참으로 회심을 경험하지 않으면 중생을 믿을 수 없습니다.
중생은 영혼이 다시 태어나서 새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고 회심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이며 또 그런 깊은 회개와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믿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우리의 무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인지할 수 없지만, 회심의 경우는 우리의 의식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과거의 죄악 된 생활로부터 돌이켜서 성결한 생활로 살아가는 전환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세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최초의 회심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인지능력이 있는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된 사람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이 중생과 회심의 경험이 함께 옵니다. 그래서 회심이 중생은 아니지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내가 구원받을만한 어떠한 구원의 방법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언약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회심의 경험 없이는 그가 진짜로 중생한 신자일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진실한 회심의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중생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하나님을 믿으면서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며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어떠한 구원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처절함 속에서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해본 경험이 없다고 한다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 회심의 양태는 어떤 사람에게는 격렬하게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죄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믿음은 반드시 그의 영혼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뚜렷한 회심의 경험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진짜 구원을 받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회심의 은혜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입니다. 진실한 회심의 경험과 그 회심 때 받은 은혜를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참 하나님의 자녀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은 바로 우리의 중생과 연관이 되는데 중생,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예전에 주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에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죽었던 생명을 다시 살려서 새생명을 받게 만들어주는데 그 생명은 가만히 있지 않고 어느 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지만 그 방향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고 성경 속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계명들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고 싶고 그 말씀을 읽고 싶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명령과 분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고 그것대로 살아가고 싶은 열망들이 생겨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최소한 세 가지를 포함한 것인데 첫째는 하나님과 모든 신령한 것들을 향한 신령한 작용이 결핍되어있거나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두번째는 이러한 하나님 자신과 또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 하나님과 애정적 관계에 있는 신령한 모든 것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셋째 이러한 하나님의 신령한 요구에 맞게끔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옆에서 욕을 해도 반응할 수가 없고 느끼고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영혼도 죽어있으면 신령한 하나님의 작용, 혹은 하나님과 애정적 관계에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배타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영적 죽음은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 죽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과 관계된 작용을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제거되어서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영혼이 아무 것도 못합니까? 죄를 짓습니다. 또 다른 영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육체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회심은 바로 이런 죽음의 상태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중생과 함께 경험됩니다. 이렇게 안 된 사람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까? 거듭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사랑에 꼭 차서 살아가는 사람보고 ‘오늘부터 회사의 목적을 따라 살지 말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시오’하며 가르쳐줘도 그 사람은 그것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 회심의 중요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B.최초의 회심의 중요성
처음 회심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데 이 은혜가 부어져서 우리 안에 죄 죽임의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죽여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신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고자 하고 선을 행하며 살고자 하고 궁극적으로 창조와 자기를 구속하신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런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처음 회심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은혜의 경향성들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성화가 중요합니다.
C.이후의 성화의 중요성
회심을 통해서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부여받은 다음에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불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내적 생명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내적 은혜의 생명력이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되면 영향을 받으면서 힘이 약화됩니다.
1)은혜 살림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첫째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거듭난 신자는 그가 죄를 짓고 아무리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그를 회심 시키고 중생시키셨기 때문에 그 안에 은혜의 불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죄의 재, 불순종의 재에 덮여서 밖에서 보면 어떤 열기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나아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 속에 그런 불씨를 넣어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재가 덮여서 거의 불 꺼진 화로와 같이 되어버린 신자들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그 모든 재들을 거둬내고 성령의 은혜로 그들의 불씨를 불어서 다시 꺼져가는 화로와 같았던 그런 사람들을 다시 활활 타올라서 그 타오르는 열기와 열정과 자원을 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목회 사역의 목표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계속 살려야 합니다.
재에 덮여있는 속에 불씨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얗게 식었는데 쑤셔보면 속에서 빨간 불씨가 나옵니다. 손을 얹으면 다시 따뜻한 기운이 돕니다. 그러니까 회심한 모든 신자들에게는 그런 은혜의 불씨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망하고 낙담만 하지 말고 그 은혜를 계속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은혜가 살아나게 하려면 은혜가 살아나게 하는데 유용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똑같이 불을 피워도 비가 펑펑 쏟아지는 습기 찬 곳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또 그렇게 비가 오지 않더라도 영항 30도쯤 되어서 손이 곱아 성냥도 켤 수 없을 정도의 추운 곳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바람이 막 부는 곳에서 성냥불을 켜는 것도 굉장히 힘듭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불이 안 피워지니까 그런 환경을 피하고 불이 잘 붙을 수 있는 건조하고 바람도 없고 따뜻하게 바람막이가 되어있는 곳에서 불을 피워야 합니다. 담뱃불을 붙일 때도 날이 좋을 때는 그냥 붙이지만 바람이 부는 날에는 웅크려서 가리고 담뱃불을 붙입니다.
은혜의 불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계속 살리려면 은혜를 받는 장소에 가고 은혜를 받은 사람과 사귀고 은혜를 주시는 방편에 참여하고 은혜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그런 여건 속에 자기를 두어야지 계속 은혜의 불을 끄는 환경에 드나들면서 은혜의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은혜를 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새벽기도 한번 나온다고 해서 일생이 바뀌지는 않지만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고 그래서 우리 안에 다시 은혜의 불을 붙이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2)죄죽임
두 번째는 죄를 죽이는 생활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신자에게도 잠재되어서 남아있습니다. 남아있는 것들이 따로따로 돌아다니지 않고 합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쳐서 하나의 커다란 경향성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고 점점 우세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것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죄와 은혜가 똑같이 우리 마음 안에서 우세해져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죄가 우세해지면 죄의 지배, 은혜가 우세하게 되면 은혜의 지배가 되는데, 은혜가 우세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목적을 따라서 살지만 죄가 우세하게 되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의 나라에 일꾼으로 부름 받아서 망가진 이 세상이라는 집을 고치도록 하나님께서 먹을 것도 주시고 입을 것도 주시고 일당도 주셨는데 남이 열심히 고쳐놓으면 가서 망치로 구멍이나 뚫어놓고 망가트립니다. 그러면 그 건축현장을 지휘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불러다가 야단치십니다. 그래도 계속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십니다. 그 현장에서 완전히 격리시켜 버리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생명을 거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런 세상이라는 집을 고치시려는 일을 방해하는 인간과 신자들의 행동을 그치게 하십니다.
동행하는 삶은 집을 고치시려는 계획에 부흥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고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일당이나 받아먹고 그늘에 가서 자다가 주님이 주신 점심 먹고 힘내서 기둥이나 망치로 쪼개고 유리창이나 깨고 가끔 쇠붙이나 나무를 포대에 담아 팔아먹고 하면 안 됩니다.
이 죄죽임은 두 가지 면에서 필요합니다. 첫째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계속 죽여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하는 마음의 동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가 유지되려면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끊임없이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죽지 않고 많이 살아있으면 하나님 앞에 섭섭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별로 예뻐하지도 않고 누구만 좋아 하시고 현저하게 편애하시고 나는 소외되었다’하며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 섭섭합니다. ‘뭐도 안주시고, 뭐 하려고 할 때도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시고, 예수님 잘 믿어도 된 것은 쥐뿔도 없고’하며 투덜대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자기 사랑에 빠져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섭섭한 점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이 나를 안 예뻐하시나보다 하는데 자기들이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다른 데로 갔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끼는 것이지 집을 나간 것은 탕자인데 왜 아버지를 원망합니까? 그런데 죄 가운데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은 동기가 계속 유지됩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내 평생 살리라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나면 자기 사랑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 하나의 동기는 죄를 죽여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 위한 활기와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연약한 자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연약한 채 사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는 죄인이었으나 회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자도 사용하시지만 연약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은 사람입니다.
집이 망가져서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집을 사랑하는 사람이 와서 ‘하나님, 이렇게 망가진 집을 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제가 이 집을 고치겠습니다’하고 목숨까지 버리며 일하겠다고 왔는데 피골이 상접해서 몸을 못 가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제발 이 모습 이대로 사용해주시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고 고쳐서 사용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사용해 주시라는 착한 고백을 하면서 올 때는 왜 그렇게 힘이 없을 때만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망한 다음에 와서 내 모든 것 주께 드린다고 하지 말고 가진 것이 있을 때 와서 다 드린다고 하십시오. 옛날에 부자였던 사람, 옛날에 권세가 있었던 사람, 옛날에 건강했던 사람, 옛날에 은혜 충만했던 사람만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옛날에 그랬던 사람 말고 요즘 그런 사람도 좀 섞어서 보내주십시오’
죄를 죽여야지만 이런 연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활기와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영적인 활기와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성화의 사람을 살아갈 때 이 사람이 바로 내적인 생명을 풍부하게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내적인 생명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풍부함 속에서 아름다운 외적 삶의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화: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사서 나오는데 주인이 작은 비료통을 주었다. 돌아와서 그 작은 황토 알 같은 것을 뿌렸더니 잎이 싱싱하게 올라왔다. 영양분이 땅을 비옥 하게 하니까 그 비옥한 땅에서 그런 줄기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자원들이 공급되 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운 외적 삶을 통해서 열매가 나타나고 세상이 고쳐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이런 내적 생명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계속 살아나고 죄는 끊임없이 죽어서 내적 생명이 강건해질 때 그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5. 내적 생명과 외적 삶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2)”
지난 시간에는 순종하는 삶과 내적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국 거룩한 삶과 내적 생활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내적 생활은 외적인 거룩한 삶의 뿌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한 내적인 뿌리인 우리의 내면생활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순종하는 생활-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됨
첫 번째는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하는 생활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신앙의 모든 원리들을 제대로 이해해서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순종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것이고, 그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주실 것이지만, 만일 특별히 마음을 먹고 순종을 한다면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균을 하고 싶으면 그냥 연약한대로 핑계를 대면서 불순종하고 사는 것이고 특별한 보너스를 얻으려면 특별히 순종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저변에 깔려있는 가벼운 생각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죄를 선택해서 불순종 하고도 마치 그것을 잘못한 장본인이 자기라는 인식을 갖지 않고 오히려 자신도 그러한 일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의지론에서 명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의지의 주인이 자기가 되어서 자신 스스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죄에 사로잡힌 노예의지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인간을 시기에 따라서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의 상태였고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의지’ 상태입니다. 그리고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영화되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간 이후에는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를 포함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의지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의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난 다음에는 달라집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에서 노예의지 상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의지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자기는 꼭두각시같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의지의 노예상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그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그것을 사로잡아서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도저히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없고 또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을 따라서 살려고 할 수도 없지만 또 살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이 의지의 노예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신자의 경우 죄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의 상태에서도 죄를 지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양심의 율법과 본성의 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빛을 주셨는데, 문제는 이러한 본성의 빛, 그리고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지만 죄를 이길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의지를 발동해서 힘을 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것입니다.
신자들의 경우에는, 성경에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셨기 때문에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없게 했던 불신자 시절의 의지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택하고 불순종 가운데 얽매였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삶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기 전 의지의 자유 상태와 죄가 들어온 다음 거듭난 신자의 의지의 자유상태는 다릅니다. 그쪽에서는 완전한 자유였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적으로는 완전한 자유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중생한 다음에는 다릅니다. 완전에 가까운 자유상태가 될 수도 있고 또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적절하게 죽이지 못하면 그것이 자기를 사로잡아서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는데도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속박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생활을 잘 하면 의지의 노예상태로 안 들어가고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임으로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순종하는 생활을 우리들은 아주 가볍게 생각합니다. ‘순종 안 해도 기본은 축복을 받는데 순종하면 특별히 신문에 간증을 낼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내적 생활을 하나님 앞에 이어가게 되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 평화 안에서 신자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관계에서 오는 실제적인 유익들이 수시로 손상을 당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 오늘날 못된 부모들이 자식 버리고 도망가듯이, 고아로 만들고 하나님이 떠나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불순종하고 타락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섬기며 살아야할 언약관계에서 주어진 그 의무를 기준으로 해서 순종과 불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 나의 외아들도 주었고 너에게 끊임없는 은혜를 공급하고 필요한 이 땅과 하늘의 모든 자원을 공급해서 너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만들어주겠다. 죄를 지으면 용서해주고 힘이 없으면 힘을 주고 물질이 없으면 물질을 주고 이렇게 너의 기도에 응답하면서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그 대신 나는 언약백성으로서의 너에게 이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지켜라’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계명이 있으니까 불순종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그 계명을 아주 가볍게 생각합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먼저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먼저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공부 잘하기를 원하고 일찍 일어나고 나쁜 행동은 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아들이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해요.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데 그까짓 엄마 아빠 뜻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엄마 아빠를 사랑해주겠어요’하며 공부도 안하고 돈이나 벌러 나가겠다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그러니 맨 처음에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만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랑하는 방식이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순종의 생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계명을 수시로 위반하게 되고 언약관계에서 주어진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상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평화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평화는 깨어지지 않지만 실제적인 삶의 평화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실감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늘 부르며 사는데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변화된 내적 은혜의 생활은 반드시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요즘 설교되고 있는 신명기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깊이 집착하고 거기에 천착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무리 많이 받았어도 불순종하면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너무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운데 다시 잃어버리기가 이렇게 쉽구나’하는 사실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마치 금세공장이들이 금덩어리를 갖다놓고 아주 가느다란 칼로 세공하는 것처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혼도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꼼꼼하게 배워나가야 합니다. 제가 제일 싫은 사람들이 설교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운전면허 공부하는 것만큼이라도 공부해보십시오. 평생 구도의 길을 가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화: 책이 어렵다는 사람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기가 탐구하려는 노력도 없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은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쉬워서 뻔히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며 새로운 신앙의 경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먼저 믿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갈비고 뭐고 먹어야만 쑥쑥 자랄 텐데 미음이나 끓여 먹이면 잘 넘어가기야 하겠지만 그래서 되겠습니까?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 잘 순종하면서 살면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고 주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과 동행합니다. 그런데 불순종은 끝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죄에 만족이 없고 불순종에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곤고하고 외로운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죽을 듯이 매달리는 것 이외에는 끝이 없습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순종하는 것이 힘들 때 바로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도 지셨는데, 죽기까지 하셨는데 내가 순종하고자 하는 이 모든 실천 가운데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죽음만 하랴. 잠시 지나는 세상, 이 불확실한 인생의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곳에서 주님을 뵈올 텐데 그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지’하는 마음을 가지면 불같이 일어나던 불순종의 욕구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동행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받습니다.
B.헌신하는 생활-목표의 하나됨에서 비롯됨
두 번째 열매는 헌신하는 생활입니다. 이 헌신하는 생활은 삶의 목표를 하나님과 합치시킨 데서 오는 효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목적을 깨닫게 되니까 그 사랑에 너무 감격해서 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꿈들이 다 이루어져도 하나도 행복할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아들의 피로 구원해놓으신 그 특별한 사랑, 그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중요하지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계획이 무엇이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계획을 그분의 계획에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 길대로 걸어가다가 가끔 생각이 나면 하나님께 적선해주듯이 헌신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목표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그 목표와 일치하는 데서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1)회심을 통한 삶의 동기의 변화
제일 중요한 것은 회심을 통해서 삶의 동기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예전에 살아가던 삶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죄악 된 삶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주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고 이후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언약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생활이 바로 회심의 삶입니다. 이런 회심(회심은 한번이지만 회심의 반복된 경험은 여러 번 있을 수 있다)을 하게 되면 예전에 거듭나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삶의 최고의 목표가 세상의 길과 자신의 행복이라는 가치를 찾는 것이었지만 회심을 하게 되면 삶의 동기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고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너무나 놀랍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도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 인생의 계획은 공부 열심히 해서 영문학 교수가 되어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서 여러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 글 써서 여러 젊은이들을 방황하게 만들면 이다음에 지옥 가서 그 심판을 어떻게 다 받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포기하게 된 이 세상의 길과 가치입니다. 전에는 나의 영광을 구하고 이 세상의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회심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회개를 통해서 이 회심은 새롭게 경험되고 우리 안에서 그 회심의 은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깨어짐의 삶입니다.
2)창조와 구속 목적에 대한 깨달음
두 번째는 이렇게 회심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계획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날 사랑하실까? ’하는 감격스러운 질문들을 회심할 때 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사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너무 놀라워’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대답을 안 내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이 나 같은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골고다 가야했나’하며 감격하고 있을 때 가슴에 ‘내가 너에게 그 대답을 알려 주마’하며 교리를 새겨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너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왜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랑 안에 살 수 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한 중요한 교리를 심장이 따끈따끈 할 때 단 쇠로 지지듯이 불로 지져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감격하다가 마음이 부패해져서 돌멩이처럼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쓸데없이 미신적인 맹종에나 빠지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너무 낭비가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계획을 깨닫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런 소명을 가지고 살고, 그렇게 고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고 영혼에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은혜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새로운 가치를 따라 살게 하는 세 가지 방식
세 번째로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따라 살도록 변화시키시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계명(啓明)입니다. 이 계명(啓明)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하면서 사는 계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밝힐 계(啓)자를 써서 밝게 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영혼을 밝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아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창조의 목적도 모르고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도 모르고, 신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영혼의 어두움이 남아 있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는 고맙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고 또다시 이번에는 주님을 의지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 모두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영혼의 어두움을 하나님께서 밝히심으로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계명(啓明)이라고 합니다. 확 비춰주심으로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바깥이 아무리 환해도 눈에 이상이 와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지르다 보니 눈이 밝아졌다면 그것이 바로 계명(啓明)입니다.
두 번째는 조명(照明)입니다. 이 조명은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작용 가운데 지성적인 작용에 비추시는 빛의 효과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눈이 밝아도 깜깜하면 사물을 만질 수 없었는데 빛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이 무슨 물체인지 분간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러한 회심의 순간에 인간의 지성을 밝히시고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예전에는 공정하게 볼 수 없었던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지성을 특별히 일깨우시는 작용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지성적으로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잘 깨달아 알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을 활용하면 말씀의 빛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안 하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오는데 엎드려 자기나 하고 기도도 안하고 무슨 말씀을 듣던지 아무 관심이 없고 하면서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고 영혼은 죄악의 찌끼와 불순종의 때로 눌어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추하고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감화(感化)를 주심으로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고 그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데 이 감화는 인간의 마음에 끼치는 성령의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빛을 이 마음이 사용하여 적용함으로서 우리의 삶이 거기에서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감화가 마음에 미침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그 은혜를 불러 일으켜서 감화를 주어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대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계획을 따라서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자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추구했던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헌신의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4)회심의 보존과 영광의 갈망
네 번째로 이러한 회심이 잘 보존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계속 유지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이 보존될 때, 이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렸던 그 회심의 은혜가 잘 보존되고 있어야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한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사명을 위해서 죽도록 살았지만 지금은 거기에서 미끄러져서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끝날지도 두고 봐야 하고 오늘은 비록 불순종 때문에 방황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해도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어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런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하고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에만 주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면서 살아갈 때, 신자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C.그리스도를 닮은 인격-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 비롯됨
마지막 세 번째 열매가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로부터 비롯되는 효과입니다.
1)분리되지 않는 은혜의 작용
우선 첫째로 이 분리되지 않는 은혜의 작용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내적인 경건생활과 외적인 실제의 삶이 나누어지기는 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내적 생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와 담대함, 선한 일을 향해 굽히지 않는 열심, 죄와 더불어 싸우는 분투하는 생활, 유혹을 뿌리치는 실천, 이런 것들은 외적생활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구분은 됩니다. 삶의 영역은 구분될 수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은혜의 작용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내면 안에 이러한 은혜의 작용이 가득하게 되면 반드시 그것이 삶으로 나옵니다. 댐에 물이 가득 차면 그 물이 넘치듯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들이 가득 있게 되면 신자가 그런 삶을 살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마음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지나서 그 사람의 삶을 향해 가게 되고 내면세계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이것이 결국은 삶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데 이 삶과 내면생활 중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입니다.
그러면 그 인격이 내면의 생활과 외면의 순종하는 삶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내적인 은혜는 신자의 내면을 계속 거룩하게 쇄신시킵니다. 거룩한 것들을 생각하고 느끼고 거룩한 결심을 하고 하는 모든 은혜의 작용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조잡하고 더럽던,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던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새로운 인격을 갖게 하고 그 새로운 인격의 통로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흘러나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2)거룩한 인격을 위해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인격으로 바꿔놓기 위해서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새 성품을 우리 안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 새 성품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고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적 새로운 성품입니다. 이 성품이 강하게 우리 마음의 밭에 심겨지게 되고 이 심겨진 원리가 우리의 모든 삶의 내적 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심겨진 원리가 바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계속 살게 되면 이러한 새로운 성품의 원리가 계속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받은바 은혜가 단속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오래 계속되게 되면 그 사람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도라지는 껍질을 벗겨 찬물에 담가나야 쓴물이 빠져서 먹을 수 있게 된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고 은혜 받았다고 하더라도 즉시 타락하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쓴물이 빠질 새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은혜의 물에 한참 담가놔야 쓴물이 빠집니다. 교만도 빠져나가고 자기 사랑도 빠져나가고 인내가 부족한 것도 빠져나가고 사람 사랑할 줄 모르는 것도 빠져나갑니다. 은혜의 물에 집어넣어야 더러운 성질머리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면 펄펄 뛰는 대단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저럴 수 있을까 하지 말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물에 푹 잠기지 않아서 아직 쓴물이 덜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교회라는 병원에 와서 수술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수술을 다 마치고 약도 먹고 병원에도 가고 하는데 이 사람은 반쯤 개복하다 뛰어나간 사람이니까 먼저 은혜 받은 사람이 좀 참아야지 어쩔 수 없습니다.
조나단 에즈워드가 ‘나는 이제부터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고 싶다. 특별히 짐승 같은 사람에게는 더 예의를 갖추도록 노력하자’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렇다고 ‘대우받고 싶으면 짐승같이 살면 되겠구나’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 날에 어떻게 심판받으려고 그럽니까?
목회자의 눈에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랑스러운 교인이 눈에 띄어서 그들을 편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쓴물 안 빠진 사람들이 더 잘 보입니다. 그리고 괴롭습니다. 저렇게 쓴물이 안 빠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좀 불편할 정도이지만 세상에 나가서 이 세상을 망가트릴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또 그렇게 망가트리는 동안에 자기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불쌍합니다. 그 쓴물을 빼내야지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사실 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면 안 됩니다. 백여 명 모여서 살림 제대로 안하는 가정주부들 야단도 치고 가정 돌아보지 않고 돌아다니는 남편 혼내서 다시는 술 못 먹게 카드도 뺏고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실제 삶 자체를 바꿔놓는 것이 목회입니다.
2세기때 사람 히플리투스라는 교부가 그의 책에서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네가 너희 가정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너는 매일 교회에서 배워야 한다” 고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에 교회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그리고 실제의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구체적인 생활의 지침들을 교육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심방도 오지 말라고 하니 그래서 되겠습니까?
두 번째는 옛성품을 하나님께서 죽이심으로서 거룩한 인격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옛 성품은 잘 안 죽습니다. 안 죽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자신 안에 있는 옛성품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하면서 집요하고 끝까지 매달려서 끝장을 보기까지 그것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것을 죽이는 구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팔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발 다 찍어내고 굴러다닐 것이라고 하는데 내장에는 온갖 더러운 생각이 다 들어있으니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문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결단을 가지고 죄를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도끼로 찍어버리는 결단을 가져야 하는데 못이기는 척 말리다 마니 그것이 고쳐지겠습니까? 그래서 죽임당한 옛 성품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옛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도 죽여 버리든지 가만 내버려두든지 해야 안전한데 설 건드려서 상처를 입히면 보통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많이 깨트려졌다고 하는데 계속 금만 간 것입니다. 뼈가 부러졌다 붙으면 더 튼튼해지듯이, 금 많이 갔던 사람들이 더 완악합니다. 깨트려진 적은 한번도 없고 금은 수십 번 갔으니 옛 성품이 죽지는 않고 상처 입은 옛 성품이 펄펄뛰고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못되는 것입니다.
3)거룩한 인격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이유
마지막 세 번째는 거룩한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한 사람이 악하게 살아가다가도 기분이 내켜서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거의 안받으십니다. 악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선하게 변화되어서 선을 행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룩한 인격으로 변화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항구적으로 흘러나올 수 있지만 그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자극과 충동에 의해서 가끔 선한 행실이 나오는데,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선한 삶이 흘러나오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흘러나와야지만 세상이 고쳐지지 그렇지 않고 충동적으로 가금 행하는 선한 삶으로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목적을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기분 쓰듯이 선행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새로워져서 선한 것을 좇고 선한 것을 행하고 그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고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 땅을 사는 동안에 어디 있든지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주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