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한 사상을 사도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라는 말로 표현했다는 말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로서, 또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 지역 안에 한 교회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닮아가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이유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는 이 일이 어떻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길이 무엇일까요? 오늘 사도는 여기에서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하나는 참된 것을 행함으로서, 또 하나는 사랑 안에서 성장함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참된 것을 행하는 것이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사용하는 이 말- 참된 것, 참되다, 참된 생활,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렸을 때에 늘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참되거라, 바르거라 하는 그런 교훈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 스승의 날 부르는 노래에도 배어 있죠?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은혜는 끝이 없어라. 오늘날은 이러한 가르침들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참되다 하고 하는 말, 진실하다고 하는 말은 우리들이 흔히 이해하는 바로는 정직하고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는 여기에서 말하는 참된 생활, 진실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좀 떨고 있죠? 박 연차 회장이 도대체 몇 백억을 만졌는지 아무도 모르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천억대의 비자금이 명동에서 돌아다니고 있고, 그것들 중 상당부분이 정치인의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될지는 우리들이 두고 봐야 되겠지만 어쨌든 돈을 먹은 것은 사실일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당신 돈 먹었지?” 그때 “먹었다. 어쩔래?” 이것도 진실한 것에 해당될까요? 진실하다가 말았어요. “먹었다. 이백억 먹었다. 배 째라. 나만 먹었냐? 누구도 먹고 누구도 먹고 다 먹었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진실한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진실한 것은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경에 끊임없이 이 진실이라는 말이 나오고, 빌립보서 6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이 허물이 없이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줘요. 그러면 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직하고 솔직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진리와 관계를 맺고 있어야 되요. “돈 잡수셨죠?” “네, 먹었습니다. 난 째째하게 먹고 나서 안 먹었다고 말 안합니다. 통 크게 먹었습니다. 나만 먹었습니까? 안 먹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우린 이런 것을 가리켜서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진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돈에 눈이 어두워 검은 돈에 손을 댔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이건 정말 나를 투표해준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었고, 여러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더러운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빕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먹다 남은 돈 모두 내놓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집에서 조용히 남은 생애를 참회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 이걸 우리들이 진실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게 만든 것은 무엇이냐면 진리의 빛이라는 거예요. 그림으로 묘사를 하자면 이런 것이죠.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언제나 자기 자신도 보고 사물도 보고 어떤 일들도 생각해요. 그런데 예전에는 자기 스스로 보고 판단하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춰서 그 진리의 빛에 비췸을 받는 가운데 올바른 판단을 갖게 되요. 그러면 내 마음은 이쪽으로 가길 원해도 진리의 빛을 받으면 저쪽으로 가야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져요. 그러면 이때에 힘은 없지만 애써서 내가 가고 싶은 이 길이 아니라 진리가 가르쳐 주는 저 길을 가려고 애쓰는 마음의 움직임, 성향 이런 것을 가리켜서 진실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진리의 힘은 우리에게 질서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힘이 질서 안에 있는 거예요. 진리의 힘은 그래서 질서를 보여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를 때에는 자기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참 재미있는 게 뭐냐면 평평한 평면 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리면 중심의 점은 딱 한 개죠? 모두 진리를 모를 때에는 자기가 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나중에 진리를 알고 보니까 이 세상은 백지에다 그린 동그라미 같은 게 아니라 공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아무데나 점을 찍어도 그것은 중심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찍어놓은 점들은 아무것도 중심이 아니에요. 중심은 사실은 그렇게 공의 표면 여기저기에 점을 찍어 놓는다고 중심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속 깊은 곳에 공을 뚫고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그곳의 오직 하나의 중심만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진리를 몰랐을 때에는 그 하얀 공 표면에 인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점을 찍어놓고, 그게 이 모든 우주와 세계와 인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다가 진리를 깨닫고 나면 비로소 인간이 찍어 놓은 수많은 점들은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리고 진리는 오로지 한 분이신 하나님, 표면에는 보이지 않으신 중심이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이 그 진리에 합치하는 지를 고민하는 거요. 이런 고민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에요. 요즘은 이러한 진리와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이 너무나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분명하게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참된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참된 생명, 그리고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게 하는 은총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편리한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진리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참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의 빛을 받아 자기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창조의 질서 가운데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이 죄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곁을 스스로 멀리 떠나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할, 무질서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진리의 빛을 알고 난 이후의 신자의 삶은 그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합치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인하여 고민하는 것이죠.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식이 무엇입니까? 받아들인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게 아니겠습니까? 참회가 무엇입니까? 이 진리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회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중심이 바로 이 진리, 이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지요. 이 진리를 참으로 안 모든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자신의 삶이 이 진리와 합치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고민하는 내용이 이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 자신의 고통, 자신의 행복이에요. 그래서 예수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한도까지만 믿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한도가 있으면 예수도 잘라 버리고, 하나님도 잘라 버리고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이건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신앙의 아름다운 향취나 하나님께 올려드릴 영광 같은 것들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위대한 힘은 진리의 힘입니다. 이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는 힘, 이 진리를 전심으로 붙들고 그 진리에 합치하게 사는 힘 이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참되게 살자. 우리 서로에게 참되게 살자고 권하고, 우리 자녀에게도 참되게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왜 받습니까? 참되게 살기 위해,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기 위해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열렬히 구합니다. 이단과 거짓사상, 인본주의적인 사고들이 가득 매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판단만으로는 참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빛을 사모합니다. 거짓신자는 예수 믿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만, 진실한 신자는 예수 믿고 참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거짓되게 살면서 양심을 속이고 진리로부터 멀어진 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는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도 참되고 순전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서 자기가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이 진리와 자기가 삶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최대한 합치되는 것에서 기쁨과 큰 위로와 행복을 맛보는 것이에요. 이게 신자의 삶이에요. 오늘 성경은 그 진리를, 참된 것을 행함으로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순종이 등장하는 것이죠.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이 진리를 알고 이 진리의 판단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삶에까지 이르는 그런 복종이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앎과 순종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가르쳐 주셨어요. 알기 때문에 순종한다고도 가르치고, 또 순종하기 때문에 알게 된다고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 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도록 거짓된 것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먼저 진리를 깨달아 알아라. 그리하면 그 진리가 진실하게 살지 못하는 너희를 해방해서 진실하게 살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만 말하지 않고, 우리에게 우리가 참으로 자유를 얻고 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많이 본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순종함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도 사도는 말하지 않습니까? 참된 생활을 함으로써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에게까지 자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을 안 결과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런 것들을 아주 명증하게 설명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위대한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순종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관계, 진리를 파악하는 것의 관계를 이렇게 명료하게 설명했습니다. 자! 우리가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에 이끌리고 욕망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진리의 빛이 멎은 가운데 자기의 본성을 따라서 사는 이 삶은 혼란스럽고 매우 피곤한 삶이죠.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와 참회하고 참된 구원을 얻기 전까지 살았던 삶이었죠. 많은 학식을 구하고 천재성을 발휘해서 일찍이 훌륭한 선생이 되었습니다. 돈벌이도 잘하였고 철학에 달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육욕을 가누지 못해 열일곱 살에 사생아를 낳고 끊임없이 방종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고백이 훨씬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에서 멀어져서 우리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살 때에는 우리 속이 매우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하나님이 진리를 보여 주셔도 그 진리를 올바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진리는 우리들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진리라고 가르쳐 줄 때 나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복종 하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먼저 순종하라는 것이죠. 마치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세미한 음성을 올바로 듣기 위해서는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먼저 꺼야지만 그 소리가 들리듯이 그렇게 먼저 진리에 순종함으로 소란스러운 자신의 생활의 스위치를 끄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진리에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같은 것들이 급작스럽게 확 밀려오는 과격한 은혜는 당장은 없을지라도 우선 진리에 순종하면 시끄럽던 내면의 세계의 소리가 꺼지면서 진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심령의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는 거죠.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그 기도는 거의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은밀하고 부끄러운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다면 이유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그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데 거기로부터 멀리 떠나서 주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있다면 거기에서 죽도록 충성하든지 안 하든지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그곳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놓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거의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을 안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알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 그 자체가 호기심이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하는 기도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경배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진정으로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목적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먼저 복종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나 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힘, 신앙의 변화, 영적인 회복 같은 것들을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께 불순종하고 살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가 나를 굴복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강력한 진리의 힘이, 은혜의 능력이 나를 굴복시킨다면 그때는 나는 굴복할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ㄴ서 불순종하는 자신의 삶을 연약함이라고 호도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잘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연약함 아닙니까?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고도 연약함이라고 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약함은 그렇게 하고자 애를 쓰는데 안 되는 것이에요. 악함은 의지 자체가 그것을 하고자 하는 뜻이 없어요. 악함이에요. 왜 그렇게 수많은 예배 시간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어떤 사람은 놀랍게 변화시켜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만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이 되고 그렇게 들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들은 결코 마음에 열매 맺지 못하고 가랑잎처럼 떠내려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 할 때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생활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기도 속에서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고 심령이 녹아내리는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어떤 사람은 단 한 번도 전심으로 기도한 적이 없이 교회에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절반 이상은 지난 한 주간 동안 거의 한 번도 전심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붓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쏟아 붓지 않고 아껴진 마음은 지금 누구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나요? 어디에게 론가는 쏟아 부어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디로 쏟아 붓고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거기에 쏟아 부어진 마음은 과연 쏟아 부을 가치가 있는 대상을 향하여 쏟아 부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 선명한 진리가 있고 풍부한 가르침이 있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납니다.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죠.
오늘 아침에도 마당에 나와서 설교를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연 참되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 진실하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 바르게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 제목을 유지하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이 되지 않으니까 사라져 가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회개예요. 회개가 사라져 가고 있어요. 회개는 삶의 방향의 수정이에요. 가는 방향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사람은 누구냐면 갈 목표를 정한 사람이에요. 길을 걸어가면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사람은 어느 길을 가도 잘 못 가는 길이 없어요. 어차피 목적지가 없으니까, 여행하는 것 자체가 목표니까 잘 못 간 길이 없어요. 시간 내에 어디를 도착해야겠다고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잘 못 가는 길이 분명히 있어요. 목표가 뚜렷하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 번져 있는 말할 수 없는 무력감, 나태함, 영혼의 싫증, 육체에 가득 번진 게으름, 어느 것도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활 이 모든 것들 이면에는 결국은 진리가 사라진 현실이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힘쓰고 애쓰는 대부분의 많은 일들은 이 세상에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위한 염려요 고생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얼마나 가꾸고 있습니까? 참되게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녀로 부르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세요.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깊이 무릎을 꿇은 복종, 그 속에서 여러분들은 지금은 비록 비루하지만 존귀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에요.
두 번째로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사람 안에서 사랑하라는 것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중적인데 하나는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주관적으로는 그 사랑에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사랑이에요. 이 사랑을 가리켜서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불러요. 이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데,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위대하게 나타난 것이에요. 그래서 사도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깊이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일치를 이루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은 예수시지만, 예수가 그렇게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따라서 살고 진리보다는 나의 판단을 따라 사는 이것이 가장 편안하고 좋은 삶인데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살도록 우리를 이끈단 말이에요.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에요.
지난 수요일에도 제가 잠깐 말씀 드렸지만,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이고, 인생관은 내가 세운 원칙이고 그러면 나의 이웃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원칙인 진리를 어겼을 때와 내가 세워 놓은 인생관에 어긋나게 행동을 했을 때 우린 언제 더 분노하게 되요? 이웃이 진리를 어겼을 때 더 분노하게 되요? 아니면 내가 세운 원칙을 어겼을 때 더 분노하게 되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그게 바로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으며 살아도 잘 참는 사람이 자기가 세워 놓은 인생의 원칙, 자!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일은 작은 일이에요? 큰일이에요? 자기한테 꿔간 돈을 제 때 안 갚는 일은 큰일이에요? 작은 일이에요? 누구한테 더 분노해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고백하는 질서와 자기 마음에 있는 질서가 불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이 신자 안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에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신자의 마음 안에 사랑이 많이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원래 은혜라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에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신자 안에서 계속 일어나게 될 때에, 이때에 이 은혜는 신자에게 사랑 안에서 점점 자라도록 만들어줘요. 이것을 영적 성장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래서 진리를 점점 더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지식이 성장하는 것을 가리켜서 영적 성장이라고 부르고, 그런 성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도 성장을 해요. 예전에는 하나님을 조금 사랑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성장,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이에요.
식물이 나이를 먹는 방법이 둘 있어요. 분재처럼 자라면서 나이를 먹는 것과 거목처럼 자라면서 나이를 먹는 것. 난 분재 싫어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나에게 분재를 선물하는데 받는 즉시 마당에 갖다가 구석에 내놓다가 결국은 시들어서 없어져 버려요. 난 절대 거기에다 물 뿌리면서 가꾸는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그런 분재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폭력을 느껴요. 왜 그렇게 해요? 거기에 성장 억제제까지 주는 것 아시죠? 그건 너무 잔인한 거예요. 사물의 아름다움은 생긴 대로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줄기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아름다운 거예요. 그럴 왜? 어떤 사람은 변명하죠. 이건 억지로 기른 것이 아니라 산에 있는 것 따 왔습니다. 거기다 두지. 그걸 왜 패와? 거기다 둬야지. 그것은 싫어요. 그런데 오래 예수를 믿어도 영적 성장이 없으면 분재처럼 되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제 그 모든 나무들을 가지고 집을 짓는 것처럼 당신의 교회를 세워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광화문하고 어디 궁 고친다고 금강송을 잘라 왔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보호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 110년 묶은 소나무를 쾅쾅 해가지고 몇 십 그루를 베어 왔는데 그곳에서는 그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대요. 거기에다가 표시를 해서 우리 고장에서 바로 그 나무를 베어다가 이렇게 했다고. 여러분! 예수를 오래 믿었어요.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그동안 내가 진리의 햇빛도 비추고 은혜의 물도 주고 내 일꾼들을 통해서 열심히 이 산을 돌보게 했더니 이제는 큰 나무들이 있으려나? 이제 한번 하나님의 집을 지어볼까?” 하고 주님이 도끼하고 톱하고 가지고 내려오십니다. 자! 150년 묶은 나무를 좀 보자. 그래도 150년은 되어야 되겠지 하고 내려갔는데 주먹만 한 분재에요. 그걸 어디다 쓰겠어요? 흠 없이 곧게 쫙 뻗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는 그 교회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어요? 온 산야를 둘러보아도 동력으로 쓸 나무는 몇 그루 안돼요. 올바르게 자라지 않는 거예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 성장이 있습니까? 집사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그러는 것은 성장이 아닙니다. 성장은 점점 더 점점 더 사람이 사람 되어가는 것입니다. 왜? 예전에는 몰랐는데 진리를 깨달아 알면 알수록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진리를 알면 알수록 무엇 때문에 이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셨을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점점 자라가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성장이에요. 이런 사랑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작용해요.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선한 행동을 할 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굉장히 힘들고 그래요. 제가 대학에서 선생으로 있을 때 저는 저 나름대로 자기들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었지만, 학생들을 엄격하게 다루어서 학교의 균형을 잡으려고 많이 애를 썼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어 갔는데 애들 중에 교회 안 다니는 애들도 있더라고요. 소수이긴 하지만. 교회 음악과라고 뽑아 놓았더니 절에 다니는 애들도 있고, 수요 예배를 안 나가는 애들은 아주 많았어요. 그래서 가자마자 교수님들하고 의논해서 숙제 장을 하나 만들었어요. 숙제 장을 모두 나누어 주고 거기에다가 주일 예배 드리고는 설교를 다 정리해서 쓰고 뒤에다는 주보를 갖다가 스테이플러로 찍어가지고 오게 하고, 그 뒷장에는 주일 저녁 예배, 그 옆 장에는 수요 예배, 그거를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내라고 했어요. 안내면 졸업 안 시킴. 그러니까 생전 처음 수요 예배 가 봤다는 애들도 나오고 그랬어요. 그렇게 엄격하게 하니까 반발하는 애들은 반발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김 남준 교수를 골려 주고 싶은데, 기가 막히게 좋은 때가 언제냐면 오락회 때, 하여튼 끌어내서 나를 율동을 시키고 노래를 시키는데, 나 그거 제일 못하거든요. 얼굴이 새빨개져서 창피해하면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율동하라고. 굉장히 괴로웠어요. 말하자면 내 자신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율도하고 하는 기질이 없는데 그럴 필요에 의해서 생산을 해 내려고 하니까 차라리 무릎 꿇고 손들고 있는 게 낫지,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선한 행동은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거라는 거죠. 하나님만 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들은 변해요. 이게 우리같이 악한 죄인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본성의 변화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본성은 곧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성령은 우리에게 그것도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 거예요. 거기에 소망이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성화되는 것 자체가 본성이 순결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깨달으면서 나보다 더 큰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이 쓸모없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동을 받으면서 아버지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질 때 망가진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주님을 향해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행동은 육체의 행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의 행동을 어떤 것을 했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참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무엇을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그것에 종이 되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만약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자라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사랑 없음을 인하여서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을 때는 포악하고 상처뿐인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알고 나서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변화시켜 주심으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유통시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성장에 대한 간증이에요. 예수 믿고 물질의 복을 받고, 내 지위가 높아지고, 건강을 얻게 된 것들 보다도 더 뛰어난 간증이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켜 주신 것이에요. 물질은 나에게 하나도 없어도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산을 물려주면 나는 졸지에 부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미움과 원망의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이 시간에도 여러분을 끊임없이 돌보고 계세요.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팽개쳐 버리는 적은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은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교회 안에 모으세요.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또 보이는 교회 안에서 살도록 만드시고 여기에서 진리의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또 나보다 신앙이 뛰어난 좋은 성도들의 본을 통해서 참되게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주님을 사랑하며 생활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우게 하세요. 여러분들 안에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님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도록 수많은 섬세한 배려들을 여러분에게 베푸세요.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이런 세심한 어머니와 같은 배려를 깊이 깨달으며 성장하는 것이에요. 자라가는 것이에요. 나이가 들어도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은 추하지 않고 아주 아름다워요.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고 젊은이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교회에서 큰일을 위해서 봉사하고 돈 많은 부자들처럼 큰돈을 내놓지 못해도 먼 곳에 선교사역을 따라가지 못해도 그래도 영적인 성장이 있는 분들에게는 날마다 새로 깨달은 진리의 빛이 있어요. 예수 더 알기 원하는 그 마음에 날마다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그 진리의 기쁨이 있는 거예요. 한번 여러분이 조용히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기쁨이 있어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헛된 곳에서 이러한 기쁨을 찾는 거죠. 주님을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가고, 그래서 그렇게 우리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잘 몰라서 예수님을 새롭게 깨달아요. 아! 그렇구나. 그것이 깨닫는 것이에요. 우리가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래도 기쁜 때는 예수 믿고 난 후였어요. 예수 믿고 난 후에 주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때로는 심한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감동으로 확 밀려오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기쁨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런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깨달음은 우리에게 항상 주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들어도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은혜가 있는 사람들 속에는 기쁨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주님께 사랑을 받는 기쁨이에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확 밀려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도 위로가 있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있어요. 이 세상의 위로는 참 신기한 게 그 위로가 있을 동안만 위로가 되고 사라져 버리고 나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시 고개를 들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는 이 위로 안에서 우리들이 여지껏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시련이요, 아픔이요, 고난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어요. 그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사랑의 힘이에요. 그러니 만약에 어떤 신자가 매일 매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기뻐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면서 행복해 한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저는 두 주 동안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이 15절을 가지고 했잖아요.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 일이었어요. 집회가 끝나고 비행기 타는데 딱 하루가 남아요. 거기에 있는 지체들이 나를 좋은 산 속에 있는 곳에 가서 하루 지내게 해 주겠다고 해서 차를 타고 산에 갔어요. 무지무지하게 추웠어요. 얼음이 버적버적 어는 곳인데, 우리나라의 콘도시설은 세계 최고예요. 아주 허접한 콘도 시설에 들어갔는데 추워서 덜덜덜 떠는데 다행히 전기장판을 미국까지 가져가는 바람에 그것에 의존하고 드러누웠어요. 한 3000m 꼭대기에서. 9월이었는데 산에 눈이 하얗게 내리는 거예요. 너무너무 추워요. 세 시 오십분 쯤 됐나 하는데 새벽에 깨가지고 죽어도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초롱초롱해요.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일 가려면 좀 자야 되는데······.” 씨름을 하는데도 잠이 안 와요. 이렇게 새벽에 눈 뜨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지 모르는데 일어나자. 일어나 앉아서 세수를 하고 스텐드를 켜고 성경을 폈어요. 에베소서 5장을 폈어요. 하나님이 그 깊은 산 속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확 쏟아서 부어주세요. 4시부터 6시 반까지 이 15절을 읽었어요. 막 부어주세요. 여러분들에게 다 표현하지 못하는 눈부신 깨달음들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때의 느끼는 그 기쁨이 아름다운 산을 올라오는 그 기쁨하고 비교할 수 있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쁠 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을 때였어요. 그리고 가장 행복했을 때에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그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와서 이렇게 보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만나주셨는지 이렇게 적어놓고 마지막에 16절에도 놀라운 깨달음이 있는데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글을 쓸 수 없구나! 하고 점을 딱 찍어놨어요. 여섯시에 저녁 먹고 새벽에 일어나 그러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먹을 건 하나도 없고. 춥기는 엄청 추운 산속 캄캄한 곳에. 그 다음에 16절에 그 큰 깨달음이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까 또 사라졌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행복은 예수를 아는 것,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번 내년에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렇게 한번 삼아 봐요. 참되게 살자. 참된 사람이 되자.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날 노래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참되게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자라서 그렇게 가는 사람이 돼야 되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