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1)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엡 4:15)
사도는 에베소서 4장까지 교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부터 6장까지는 그 교리에 입각한 삶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교리를 향하여 펼치는 이 마지막 부분인 제 4장에서는 교회와 그 교회 안에 있는 신자의 일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평안에 매인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하며 하나인 몸과 그 몸 안에서 다양한 성도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상세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개진하는 가운데 그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신자가 개인적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일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찌라 그는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 즉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화는 교회 전체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그 교회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는 거룩한 뜻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강설하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은 먼저 중생과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문자 그대로 죽어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죽어 있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그 영혼을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다시 살리실 때 그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힘입어 영혼은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피터 마스리에트 라고 하는 개혁파 정통주의자는 이 중생과 회심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심은 중생한 영혼의 첫 번째 움직임이다.” 그래서 거듭난 영혼은 반드시 첫 번째 움직임이 있는데 그 움직임이 바로 회심입니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웃고 재롱떠는 일이 아니라 으악 하고 통곡하는 일이듯이, 사람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면 거듭난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 바로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만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개와 믿음이라고 부르고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회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발견한 중생한 영혼 덕분에 일어나는 영혼과 정신의 첫 번째 움직임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되면 그것은 순수하게 영적인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거듭난다고 해서 노인이 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육체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동떨어진 인간이었는데 이번에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즉 하나의 개체로 떨어져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이 살던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그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 중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모든 몸과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서 실제로 누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듭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셔서 그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놀라운 영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식론적으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영적인 세계를 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전에는 물질적인 것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믿는 것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고 그의 사랑도 믿고 그의 은혜도 믿고 그의 생명도 신앙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다른 하나는 거듭나는 그 순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에 접붙여지게 될 때에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는 교회라고 하는 이 몸 자체가 예수의 사랑이 항상 흐르는 몸이기 때문에 거기에 접붙여질 때에 피가 접붙여진 지체 속에 흐르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성도의 영혼과 마음 안에 흐르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넘치게 때로는 부족하게 흐르는 적이 있지만 , 언제나 성도의 마음에는 이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흐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리이신 예수께 접붙여졌다고 할 때에 이것은 이렇게 열린 교회, 혹은 이 동네 있는 교회, 저 동네 있는 교회에 붙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길 때 이 몸에서 저 몸에 가서 달라붙는 그런 방식으로 신자는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교회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교회의 참된 표지를 지니고 있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연합입니다. 과거로는 이미 지나간 시대, 그리고 미래로는 오고 오는 시대에 예수를 믿을 모든 사람들까지의 연합을 포함하여 천상과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영적으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데, 이 교회는 둘이 아니고 하나의 교회이니 이 교회가 바로 공교회요 혹은 보편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하나인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그는 교파와 피부색깔,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나라, 민족에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함께 누리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후에는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에 우리의 영혼을 접붙여 놓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이는 이 개별적인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드셔서 거기에 접붙임을 받은 것을 구현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죠.
키에르 케고아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추상명사인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 희생이 필요 없지만,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후자가 전자보다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뻐하고 피로 값 주고 사신 이 땅에 있는 모든 추상적인 명사로서의 형제자매의 행복을 비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 안에서 구체화 되었을 때에 눈에 보이는 한 형제 한 형제를 위해서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희생적인 삶은 매우 어려운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는 늘 죄인들이 있고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런 교회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일 뿐이고 진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뿐이다 라고 말하며 지상에 모이는 모든 형태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제도와 이 모든 규율과 이 모든 통치, 이 모든 형식들을 거부하는 무 교회 주의자들이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참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경륜과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들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은 결코 복음적인 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수 없고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 놓으신 진정한 구원의 경륜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펼치며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편 교회의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신 그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이는 이 교회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추상명사로서의 이 보편 교회를 사랑할 때에는 우리가 많이 거룩해지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눈에 보이는 이 작은 교회에서 형제를 용납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그리고 희생하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자아가 내 안에 힘쓰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면서 자신은 아직 먼 존재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아름다운 모본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기 때문에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 놓으심으로 이 모든 중생한 성도들을 보편 교회에 속한 그 아름다운 성도의 지위를 이 교회 안에서 누릴 뿐 아니라 또한 성화의 삶을 살면서 구현해 가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지는 이 사건은 그것과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여된 하늘과 이 땅의 모든 복들을 자기의 것으로 누리게 하는 놀라운 특권인 것처럼 보이는 이 교회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신앙의 고백을 하며 살아갈 때에 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참된 성도는 이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하늘과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형제들이 모두 함께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공동체의 삶을 선택한 것은 종교심이 열정에 들뜬 나머지 오버한 선택이 아니라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무한대의 감화로 깨달았기 때문에 일어난 올바른 종교적인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지고 구원을 받게 되면 여러분의 모든 것은 교회의 것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이전에는 여러분 것이었지만 이제는 교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교회 안에서 그 재능을 사용해서 재능이 없는 형제자매들을 섬김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은혜가 많은 성도는 은혜가 없는 성도를 용납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많은 물질을 받았다면 그것도 여러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것입니다. 그러면 돈 있는 여러분들은 “왠 교회?”라고 깜짝 놀랄지 모르지만 사실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발적인 헌신 속에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은 나누어지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성도들의 연합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 지역의 개별교회 속에서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의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정신을 구현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러한 복음적인 정신도 모르고 심방을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목사가 만나자 그래도 시간이 없다고 그러고, 예배에만 참석하고 십일조 할 테니 내버려 달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하는데 나는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인지를 다시 한 번 물어보라고 난 여러분들을 권면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생활을 고집한다면 여러분들은 현저하게 불순종의 길을 걷는 것이며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복음적으로 교회를 세우신 이 참된 진리의 정신에 위배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풍조는 이러한 교회의 복음적인 정신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새롭게 깨어나야 할 필요성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은혜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린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바를 따라 순종할 수도 없고 진리에 복종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은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 은혜를 교회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학원들이 입시생들에게 입시를 위한 지식을 나누어 주듯이 그런 방식으로 공급하시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결점이나 부도덕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교회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은혜 있는 교회를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커다란 섭리와 경륜 속에서 일정기간 은혜 안에서 교회 생활을 하게하고 또 다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교회를 주실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목회지를 옮기고, 또 떠났던 목회자들도 다시 돌아오는데 하물며 성도라고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충분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렇게 교통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동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과 인도가 아니라 교회의 어떤 결점을 보게 되면 헌신짝처럼 침을 뱉고 돌아서는 그러한 행동들, 교회의 어떤 부도덕한 것이나 허물을 발견하면 자신 혼자 그 모든 피해를 한 몸에 뒤집어 쓴 것처럼 뛰쳐나오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과 야합하는 사람이고, 자신은 정의의 정신을 가진 것처럼 그렇게 간증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복음이 이야기하는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현저하게 욕보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 내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할 때에는 어느 정도 이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어쩌면 저렇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고 성도들을 기갈하게 만들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와서 설교 받고 은혜 받는 성도들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생활을 목회하고 여러분들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고 난 후에 저는 저의 생각을 상당부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위탁된 진리를 통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데,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단절된 가운데 은혜를 받기 위해 이 기도원, 저 기도원, 이 단체, 저 단체를 돌아다니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자신의 영혼을 이단에까지 팔아먹는 그러한 성도라고 할 수 없는 성도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하는 것이고, 복음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지막에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목회자의 목양을 거절하고 이리저리 유리방황 하면서 교회를 단지 은혜 받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 진리의 근처에도 못간 사람이니, 어디 가서 여러분들이 감히 복음을 아는 개혁교회의 신자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그 품에서 말씀의 젖을 먹으며 거기에서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고 참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앞서간 좋은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그 믿음을 배우고, 그리고 그들이 부족하면 참고 용납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며 자신들도 또한 동시에 믿음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신념 하나를 붙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유리방황하는 것은 심히 죄악된 일이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교회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과거가 있다면 여러분은 이 교회가 그런 과거의 마지막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좋은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이 교회를 떠난다면 나는 한 번도 여러분들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마당에서 그대들을 품에 안고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보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도 이 비 복음적인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복음과 거리가 먼 그리스도의 몸을 현저히 상처 내는, 목양도 받지 않고 이리저리 기갈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에 현저히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몸인 교회에 접붙이실 때 이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은 무엇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떠나고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맺은 이 연합은 불변하는 끈으로 묶여진 언약의 띠입니다. 그리하여 우린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영혼이 아무리 추루하고 더러워진 상황 하에서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이 원리적인 연합은 끌러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신자의 마음속에는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여된 신적 생명이 그 안에서 역사하고 아무리 상태가 나쁠 때에도 신자의 그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주 사라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삶으로 끊임없이 주를 버려도 주님은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또 주님이 여러분들을 붙잡고 계시는 한 여러분들은 주님을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나 원리적인 연합 뿐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도 있습니다. 이 실제적인 연합은 성도가 실제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연합인 것입니다. 이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의 차이는 하나는 원리적인 것이고 하나는 실제적인 거라고 하는 것이죠. 실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할 지라도 실제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면서 살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면서 산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실제적인 연합은 성화의 정도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성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그리스도를 충심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실제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 연합 안에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이천년 전의 죽으신 죽음과 그리고 이천년 전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게 되면 놀랍게도 가장 기뻤던 때는 가장 슬펐던 때이고, 가장 행복했던 때는 가장 가슴 아픈 때였어요. 가장 충만하던 때는 목마르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질 때, 그 사랑을 많이 받을 때 여러분들은 목말랐습니다. 의에 주리고, 의에 목말랐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세상 모든 민족이 그 은혜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높이는 그 날이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마르고 주린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뼈저린 신앙의 고백 속에서 그의 고난에 아파할 때에 사실은 그때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맡겨주신 이 길을 걸어갈 때에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서 끔찍이 아팠지만, 그러나 이천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그 고통을 생각하며 우리가 당하는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실 수 있다면 이렇게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인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능가하는 신자의 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외쳐져야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들을 왜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희생과 고난을 지불하셔야 되셨는지 그걸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오래된 복음을 들으며 나 같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치르신 그 큰 희생과 값없는 무한한 은혜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눈물만 흘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셨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고 이렇게 한 교회를 가정처럼 이루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바지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아름다운 진리를 성경책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은 진리의 새 저장고를 이 땅에 두셨는데 하나는 교회요, 목회 사역이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 교회의 목회 사역을 통해 진리가 풍부하게 드러나고 성도들이 그 말씀으로 인해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지를 잘 살펴서 때로는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함으로써 지금은 불완전한 교인들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교회의 몸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들을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경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개개인의 성화는 성례전적으로 하나님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더욱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거룩해져 가는 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그의 성화의 삶은 성례전적으로 연합된 교회에 드려지고, 교회는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묶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봉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알고 복음의 은혜를 받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인 것이죠.
(예화)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주일날이었는데 성도들이 몰려오는 대낮에 그 교회 앞마당에서 강도사하고 사찰하고 주먹다짐을 하며 한 판 벌렸습니다. 강도사가 아구통을 날렸더니 집사가 강도사의 배를 발로 차 버렸어요. 그리고는 개처럼 엉켜 붙어서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개들을 뜯어 말렸어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야이, 자식아. 니가 사찰이면 똑바로 해.” 하니까 상대방이 하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야이, 새끼야. 니가 강도사면 다냐? 내가 교회 큰 버스 운전 할려고 취직했지, 니네 중고등부 봉고 몰려고 운전한 줄 알아? 똑바로 해, 이 자식아.” 만약에 사찰이 개념이 없어서 까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강도사가 성화가 많이 되어서 그날 은혜에 깊이 젖었어요. 그래 좀 심한 말을 했다고 칩시다. 그때에 강도사가 “집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르고 너무 무례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운전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죠. 맘 상했다면 맘 푸세요? 샬롬!” 이렇게 했다면 그 유익이 개인에게만 돌아갔겠어요? 교회 전체적으로 돌아갔겠어요? 그럼 아무 일없이 끝났을 일을 그 강도사가 강도같이 성화가 안됐으니 거기에서 분명히 성경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그랬는데 자기가 아무리 힘세도 집사의 아구통을 날리면 되겠어요? 그 무서워서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 하겠어요? 교회 등록 하려면 태권도 1단은 되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게 한다는 얘기에요. 그러니 거꾸로 얘기해서 그 강도사하고 집사하고 둘이 성화되지 않은 건 그래서 교회에서 개 싸우듯이 싸운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에요, 교회적인 사건이에요? 찔려도 대답을 하란 말이에요. 그게 모두 합해 묶어져서 우리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불결한 제물이 된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그 정도 해서 되겠어요? 마음 깊은 곳에서 “주여” 하는 탄식이 나와야지. 여러분들이 뭘 알아요? 여러분들이 이 교회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해 놓으신 이 경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요? 그거 얼마 안 되는 은혜 받은 거 가지고 자고해져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겠어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그것 이예요.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아무리 여러분들이 교회 오래 다니고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를 준엄하게 책망할 때에 그때에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려 쉬며 한 교회 오래 다니는 것 날 본받아야지 그래도 그것은 예수의 생명에 접붙여져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그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을 때에 그 경력이 빛나는 것이지,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한 교회에 눌러 붙어 있는 것이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게 되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은혜를 받으면서 성화되어 가야 한다는 얘기에요.
오늘 사도는 성화의 목표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지니라. 그는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라.” 라고 말이죠. 그러면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라고 하는 의미가 도대체 뭘까요?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라고 했는데,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두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어요. 우선 그분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완전함에 이를 수 없어요. 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의 형상과는 달리 사람이자 신이신 본성 안에 있는 형상이에요. 우리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지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이에요.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은 완전한 형상이에요.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형상은 완전한 형상이 아니에요. 완전한 형상이 되었다면 굳이 오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라다’ 하는 말은 어린 아이가 자라서 키가 자라고 몸무게가 자라고 정신이 자라서 성인이 되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직은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 안에 죄와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성화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좋은 항법 장치가 없었던 시대에는 그저 지도 한 장, 별자리, 컴퍼스와 삼각자 몇 개 가지고 항해를 했습니다. 자! 어떤 선장이 사공에게 명령했습니다. “자! 우리가 가려면 북극성을 향하여 계속 가면 된다.” 지도에서 북극성을 향하여 뱃머리를 돌리게 되면 자기가 가고자 하는 항구가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죠. 알다시피 지구는 둥급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평선의 끝은 20마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20마일 넘어서게 되면 둥근 지구 저편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래도 선장은 별자리를 보고 계속 항해를 하라고 사공에게 명령합니다. “자! 저 북극성을 향하여 가자.” 라고 말했다고 해서 사공이 이 배가 바다에서 두둥실 떠서 구름을 지나고 달빛을 받으며 북극성에 안착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목표로 삼을 뿐이지, 그곳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고 싶은 곳은 북극성이 아니라 북극성과 같은 방향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 사물 하나 없어도 파도를 해치고 항구에 도달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만약에 배에 있는 사공이 우리라고 말하고, 배가 우리의 삶이라고 보고, 우리에게 이 길로 가라고 지시하는 사람을 성령이라고 비유하고, 그가 우리에게 준 지도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별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도착된 항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마련해놓은 우리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모두 경로는 다양해도 한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구원을 얻은 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사는 목표는 각각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를 잘 하게 하려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게 하기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 붓을 잘 제작하게 하기 위하여 보내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회를 하게 하려고 보내셨고, 또 어떤 사람은 목회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게 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인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걸어가게 하시는 개별적인 인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문처럼 모두 다양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그 다양한 것을 모두 사용하셔서 마지막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온전히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의 관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전에 많이 덮었던 비단 이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뒤집어 보면 거기에는 파란 실, 은색 실, 금색 , 까만 실, 굵은실, 가느다란 실, 노란 실, 수없는 많은 실밥들이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들이 모두 엮여져 실들은 알지 못하는 장인의 손에 의해서 짜여 질 때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단들이 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악기들이 단일한 한 줄의 음표만을 가지고 연주한다면, 아마 아름답기보다는 무섭다는 느낌, 지루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불쾌하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 개의 악기들이 각기 다른 악보들을 가지고 연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각각 다른 음표를 따라서 연주하는데 이미 작곡자는 다른 것들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어 이 교향곡을 끌고 갈 제작의 기술들이 있기 때문에 각자 틀린 것처럼 보이는 곡들을 연주하면 그것은 놀랍게도 서로 다른 곡조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이런 악기를, 어떤 사람은 저런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 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저건 나도 연주할 수 있겠다 하는 악기가 있어요. 심벌즈요. “뚱”하고 치는데 많이도 안 나오고 한 시간 연주하는 동안에 서너 번 밖에 안 나와요. 그거 졸다가 놓치면 큰일인데 그래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자기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월급도 똑같이 받는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악기 하는 사람들이 찾기가 굉장히 힘들고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들도 거의 없다고 그래요. 헨델의 메시야, 할렐루야 여러분 들어보셨죠? 마지막에 거기서 그 심벌즈가 몇 번 힘차게 부딪히는 그 화음이 없다면 메시야는 정말 시시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기 모양대로 살게 만드셨지만,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하모니로 만드셔서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번영하게 하시는데 사용하시는 것이에요. 다양성 속에서도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그를 사랑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갈 때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어울려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가며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형상의 회복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에요. 즉 하나님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부르신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닮은 영적 특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영혼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불신자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으로 구분합니다. 수의 이치를 알고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깨달아서 같은 것 끼리 모으고 다른 것끼리 구별하는 분석과 종합, 이것을 통해서 사물의 이치를 찾아가고, 자연적인 삶에 있어서 자기의 처신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정신적인 작용들은 자연적인 형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도덕적인 형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의지를 따라서 순종하며 살 수 있게끔 하는 영혼의 기능이며 특성인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자연적 형상은 아직 많이 건재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형상은 하나도 남김없이 산산이 부셔져 버렸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여름날에 상자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생선과 같이 그렇게 형체만 남고 모두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창조의 목적도 이해하지 못한 채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을 운명적으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무한한 자비 속에서 인간들 중 얼마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완전히 죽어있는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그래서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의 의지를 따라 살 선한 마음을 인간에게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가망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도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더욱이 그 형상이 그리스도를 닮은 정도를 우리 스스로 영혼을 직관함으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화의 상태, 교회의 성화의 정도가 어느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향하게 하신 목표를 따라 향하고 있는 형상인지는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우리 영혼의 상태의 어떠함은 우리의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이 마음은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사람들은 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자신도 그 뜻에 순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강한 작용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 작용하는 이 성품의 성화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회복하면 회복할수록 신자의 마음은 예수를 충분히 닮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간절히 피력한 소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회복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지닌 사람이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성향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어떠함은 결국은 그 사람의 행동과 그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통해 나타나게 되니 이 모든 것을 통괄하여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인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게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담고 있으면 그는 그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며 그러면 그의 흘러나오는 삶은 하나님께서 지신을 구원해놓으신 그 목적에 따라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어 빛 된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우리 질문해 봅시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약 삼천년 전에 이새의 집안으로 향하시며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하고 아주 기뻐하셨을 때 그는 이 세상에서 뭐하던 사람이었습니까? 황금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서 통치를 하고 있었다면 그의 높은 지위 때문에 그를 소중히 여기셨다고 오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최상의 호의를 보여 주셨을 때 남루한 옷에 가축의 똥을 묻힌 채 목동 노릇을 하며 짐승의 꼴을 먹이고 있는 천한 목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셨고,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전심으로 따르는 그 마음의 특이함을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삶은 하나님이 어디에다 두시든지 결국은 하나님만 높이며 그분을 공경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다윗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매우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다윗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이었죠.
신약성경에서 뜬금없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이 신약 시대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룬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워 졌지만, 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형상을 담지한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삶을 통해 그분의 인격을, 그분의 인격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그분의 마음을 통해 급기야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어떠함을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기에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이 하나님의 형상을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대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좀 불확실한 면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에게 매우 쉽고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를 내가 얼마나 닮았을까? 사는 것이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을 보니 나의 성화는 멀었구나!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상은 볼 수 없어도 우리의 삶은 우리 눈에 밝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 교회를 세우셔서 이 교회 안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선배들, 목회자들과 신앙의 동지들을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 닮아가는 그 아름다운 삶을 보며 자신들이 가보지 못한 성화의 길에 대해 소원하는 마음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사람들을 또한 본받으며, 한 가족처럼 기쁨과 설움을 함께 하며, 한 상에 먹고 마시며,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이 지역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우주적인 교회의 그 상들을 구체적으로 이 현실 속에 이루어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비록 작은 교회, 그리고 볼 것 없는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 가난한 성도들이 사는 교회지만 그 교회를 이 세상의 불꽃 삼으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의 어떠하심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들, 일평생 그리스도를 욕보이며 아버지의 마음에 못 박으며 산,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을 구원하셔서 우리들을 때리시고 어루만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고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등불 삼으시는 하나님의 이 큰 경륜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타날 때에 자신에게 면류관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대 사도라는 이력과 가는 곳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던 혁혁한 업적, 귀신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렸던 이적의 능력의 면류관이 아니라 바로 날마다 주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거룩해져 가는 성도들인 너희들이 나의 면류관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화되고 싶지 않아서 이 고단한 회개와 끊임없는 십자가와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연단, 주를 닮아가는 것, 이것들을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폭풍과 같은 시련의 밤바다를 통과하게 하시면서라도 울부짖는 자녀들의 고통하는 신음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신자다운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때리면서 어루만지십니다. 교회생활이 왜 푸석 푸석해지고 왜 예배 생활이 배교에 가까운 냉담함과 무관심 속에서 드려지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맨 처음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이 못된 인간을 위해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흘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죽인 것을 바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소원은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면서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맨날 노래했습니다. “참다운 신자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사셔서 나는 사라지고 주님이 드러나실 수 있다면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 신자는 무슨 지식을 섭취해도,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 하늘 높은 자리를 누려도 잠시일 뿐이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퇴근길에, 혹은 깊은 밤에 어두운 예배당에 들러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껏 까지 자기의 생각과 아집으로 자기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변화시키셔서 흠 없고 정결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셨던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불순종 했던 사람들은 깊이 뉘우치고 순종으로 주님의 성화의 계획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속에서 나 때문에 불완전해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더 온전하게 되도록, 아직도 주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어 있어서 마음의 어두움으로 진리를 불순종하며 거칠게 행하는 자들의 그러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불완전한 교회에 아픔들을 한 몸에 끌어안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이 교회에 남기신 고난을 육체 가운데 짊어지고 살아가며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자라서 이 땅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 이루신 그 성화로 말미암아 교회의 아프고 연약한 부분들을 끌어안고 감당하며 주님 앞에 서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