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공부와 소명
녹취자 : 김세나
제가 최근에 1600페이지 책을 마감하였습니다. 두 권으로 나오는데 첫 번째 책이 12월에 출간됩니다. 그것은 4년 6개월 동안 쓴 것입니다. 나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5년을 꼭 썼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신학 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그래서 1권에서 신학을 누가 하는가, 그 다음에 신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첫 번째는 소명이고 두 번째는 경건과 학문의 조화. 마지막 세 번째는 목사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왜 지성인이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700페이지 다뤘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 두 번째 권이 뭐냐 하면 그러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것부터 시작해서 언어-성경언어, 일반 언어의 준비부터 시작해서 철학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무슨 철학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고대철학, 그리스-로마 철학, 르네상스의 철학, 현대 철학 등등. 역사, 과학, 심지어 수학도 나옵니다. 리먼 가설 이야기, 양자 역학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실제로 저는 과학을 통해 신학에 대한 통찰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왜 옛날 신학자들이 통합적인 공부를 하였는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으로 들어와서 신학에서 속사도 교부들부터 시작해서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신학자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자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그 다음에 종교개혁,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18, 19세기의 근대신학자들, 현대신학자, 이렇게 해서 대충만 점프하면서 날랐는데 그게 800페이지 정도 됩니다. 전체 속에서 마지막에 뒤에 붙은 bibliography가 3700권입니다. 그 중에서 절반 정도는 내가 책 이름을 인용한 것이고, 절반은 실제로 그 책을 보면서 전부 훈노트를 다룬 내용이 그것입니다.
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안타까운 것이 이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빨리 공부해서 어디 가서 학위를 받아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공부를 안 하고 온 사람보다 약간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은 것을 봅니다.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보니까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실컷 3년 동안 교수님이 죽어라 신학을 가르쳐 놓으니까 마지막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 아무 것도 쓸 모가 없다더라, 신학 무용론을 이야기 합니다. 신학교에서 3년을 배운 다음에 탈 신학을 해야 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 다음에는 설교가 그냥 말이 안 되는 것은 없는데 꼭 들어야 할 이야기도 없습니다. 설교에 신학이 없습니다. 궂이 장로교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순복음에 갖다 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신천지에 갖다 놔도 그 신천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설교 하느냐고 이야기 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풋내기 설교자가 이야기 하면 허세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23년 전 7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하실 교회로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지금 여기까지 오기까지 제가 약 5천 5백 편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설교를 한 설교자로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설교는 정말 어렵다.’ 그리고 여기에 서서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알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며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성경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쳐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준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설교를 너무 탁월하게 하니까 어느 교인이 물었습니다.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목회자 만나면 키, 나이, 배 둘레, 이런 것 물어 보는 사람 있습니다. 하루에 기도 몇 시간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있습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물어봅니다. 스펄전 목사님에게 그 설교를 몇 시간 준비하였는지 물었습니다. 스펄전이 위트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평생 준비하였습니다.” 한 설교자가 단상에 딱 섰을 때 그는 깨어지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살아온 일생의 모든 존재를 가지고 거기에 서게 됩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설교자가 설교할 때 그는 그의 사람 됨 이상을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 다음 이야기는 이해가 안 된다고 어느 교수님이 그러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람됨 이하의 설교도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마지막에 신학이 어려운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이것을 어디에서 들어다가 머릿속에 집어넣어 토해서 갖다 던지는 게 설교라면 머리 좋은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미친 듯이 살아서 거기에 피를 바르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린 그 결과를 가지고 마치 단상에 서 있는 동안에 이 사람은 우리가 따라 올 수 없는 어떤 세계에 범접한 사람이라고 하는 식견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말해서 궁극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결정적인 그 무엇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그 모든 것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한 부분이기 때문에 하루 중 한 부분만 공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그것은 부분입니다.
제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예수를 안 믿으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식구들이 예수 믿는 고모들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15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중학교 2학년 아주 추운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주일에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논둑에 엎드러져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는지 모릅니다. 15살 먹은 애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울었는가? 우리 나이로 15살이었고 미국 나이로 13살 반 밖에, 13살 1/3밖에 안 되는 나이였습니다.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물론 가난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난 때문에 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자 친구가 없어서?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신은 존재하는가, 내 앞에 펼쳐진 이 세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눈을 뜨면 무서웠습니다. 죽는 것은 한 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것도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나는 수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 정성을 들여 들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대답은커녕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은 이런 것이란다, 기독교에서 인생을 이렇게 생각한단다, 라고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너에게 이러한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고 13살 1/3밖에 안 된 눈에도 교회 안에서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처럼 보였습니다. 15살 밖에 안 되는 나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피나게 고민하고 밤중에 머리를 벽에 피가 나도록 지 찧으면서 왜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엄청난 세계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 것 같아서 실익이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얼마를 통곡하면서 울다가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15살 소년이 일어나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일평생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구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소위 이야기 하는 요즘 유행하는 어데이즘이 아니라 엔티데이즘까지 나간 것이었습니다. 반신론과 무신론은 다릅니다. 무신론은 신이 있는지 확신을 못 하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합니다. 안티데이즘은 신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습니다. 싫다,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성적표 보면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런 정신 상태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하나, 영어만 그렇게 좋았습니다. 몇 번을 자살하고 싶었지만 영어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밖에 안 되는 아이가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버트란트 러셀 원서로 다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재미를 배웠습니다. 맨 처음에 그 아이가 문학작품을 읽었습니다. 엄청난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신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내 주위에는 이런 사람이 별로 없지만 세계에 이런 사람이 대게 많았구나. 그런 고민들을 하면서 한 참을 읽었습니다. 동료의식을 느끼며 감동을 받고 울면서 읽었습니다. 이 친구들도 물음표를 던져서 나를 감격시킨 것이지 마침표나 느낌표를 찍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함께 고민한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은 위로가 되지만 어차피 같이 방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아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에 사상으로 옮겨갔습니다. 그 당시 실존주의 책을 몇 권 안 읽으면 어디 나가서 입을 못 떼던 시대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 당시 니체, 하이데거, 이해하지도 못한 것이 틀림없는데 칸트의 형이상학, 도덕철학 원론, 수없이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해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학작품들은 이해 못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그 무엇을 개혁신학의 빛에서 발견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설교하였습니다. 김용옥 씨가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가에 서서 책을 다 읽었습니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사랑과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는 사랑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가지고 아, 이게 성경의 사랑이구나 하면서 설을 푼 것입니다. 그것을 읽는데 속에서 확 치받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이것이 아닌데. 이미 사랑에 대해서 800페이지 정도에 달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해 전에 강론하였습니다. 33번에 걸쳐서 말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도대체 오늘 설교하는 것이 그 15살 먹은 아이의 그런 고민에 무슨 답을 주고 있느냐 말입니다. 설교자들이 깊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니체, 쇼펜하우어로 시작해서 수없는 철학자들을 섭렵하면서 읽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사상들 말입니다. 마지막에 인생의 무게를 알고 나니까 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15살 때보다 더 나쁜 상태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전도한 사람 없이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기독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대신 나에게 단초를 제공해 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책과 인생론입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화를 느꼈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입니다. 그것을 여러 번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생겼는가 하면 ‘하나님이 없어도 믿고 싶다.’ 그러면서 기독교에 귀의를 하였습니다.
자,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겨났습니다. 들어오니까 가르치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지성의 스위치를 꺼야지만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신학교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났는데 그 대신 그 때는 지성의 스위치를 껐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신학대학 학부과정 4년, 총신 신대원 3년 해서 7년 동안은 하나님이 나를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돌려보내도 나는 그 이상은 다시 못 산다 말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 후에 이제 학교를 그만두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제가 신학교를 사표내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제 내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부의 재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책을 못 사보았지만 교회 크기가 어느 정도 되니까 눈물 나도록 저를 서포트 해주었습니다. 원 없이 공부할 수 없었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시간이 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아온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신학의 마지막 입문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어떻게 복음이 이 위대한 신학의 목표와 연결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 보여주는데 결국 알고 보면 이 신학은 공부하지 않으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길을 모릅니다. 결국 그것이 신학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피눈물 나게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 속에 비장함이 없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그의 마스터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거기 와서 마스터 클래스를 받는 것이 치열하였겠습니까? 한국 사람이 거기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토스카에 나오는 별은 빛나 건만을 불렀습니다. 딱 불렀는데 제가 봐도 그저 그랬습니다. 파바로티가 한 수 가르쳐 주었습니다. “생각해 봐라. 네 애인은 죽었다. 널 죽이려고 온다. 그때 네 마음이 어떻겠니. 그렇게 노래를 부르겠냐.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냐.” 그러면서 한 소절을 불러 주었는데 느낌이 팍 오는 것입니다. 역시 위대한 성악가구나 싶었습니다. 한 소절 딱 불러주는데 눈물과 용솟음치는 피가 응어리진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그 로베르트 알라냐,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사람이 부른 별은 빛나건만 하고 그 친구가 부른 것과는 초등학교와 대학교 차이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인형이 부른 노래였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복음이 감격스럽지 않은 것은 복음이 도대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 규정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의 소명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체험이 그 사람을 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고 하는 종교적인, 신학적인 확신과 두 번째, 유대인 이외에 다른 모든 족속들은 쓰레기라고 하는 심리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근거없는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학적인 편견, 신학적인 확신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공통적인 해석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중대한 신성모독이고 그것들을 잡아 죽여야지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으면 부인하였을 텐데 다메섹 가는 길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성립이 되었습니다.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된 두 개의 확고한 명제가 부인할 수 없도록 사도에게 제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간이다. 또 하나는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난 것을 모든 구약의 전통과 유대인의 맥락의 전통에서 보면 그 죽은 자가 일어난 예는 없었습니다. 성경에 그러한 것들, 그 사람들은 모세가 살아났다고 보았는데 그것이나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못하고 올라간 것, 에녹이 죽음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어마어마하게 옳다고 인정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의 명제는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엄청나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신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다메섹 체험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그렇게 저주하실 사람이라면 인정하셨을 리가 없고 인정할 사람이라면 저주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서 발견하였는가 하면 대속의 죽음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아, 그가 그렇게 저주를 받으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이 인정해 줄 리가 없지만 그렇게 그 분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 우리 인류의 죄 때문이었구나.’ 그러면서 지성에 벼락을 받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지성에 먼저 벼락을 맞는 것이다. 가슴을 열고 여기에 불덩어리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이게 두 개가 이 모순된 양립된 사실이 합치면서 확 터지는 찬란한 불꽃이 되어서 인간의 창조로부터 그때까지의 역사와 역망적으로는 인류의 종말과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찬란한 빛이 확 비치면서 한 눈에 영원 전부터 세계의 완성과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한 번에 그림이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세계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경륜의 한 복판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스테이트에 따라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로고스 크리스투스 아싸르크스’,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삼위일체 중 한분이신 그 분, 그 다음에 ‘크리스투스 사르크스’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크리스투스 아나바토스’ 들려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 모든 세계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이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속에, 만물을 떠나 계시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인간이 모든 진리를 인식하고 학문이 성립하는구나 하는 소위 헤르만 바빙크가 이야기하는 로고스 실재론에 기본적인 토대들을 열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한 천재의 눈에 확 들어온 그 그림은 라인 바이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지평의 현저한 어떤 인상들이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한 인간의 지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일부가 골로새서, 에베소서 등등 서신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로마서가 위대한 서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보다 위대한 것은 골로새서라 생각합니다. 훨씬 더 원숙하고 방대하고 원대한 작품이라 봅니다. 기록 연대부터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신학적, 철학적으로 무르익었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을 딱 받고 나니까 뭐가 생기는가 하면 이 사실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데 결국 자기 자신을 저렇게 불행하게 하는 인생을 사는구나 하는 것들이 확 밀려왔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사도바울에게 협박을 하였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내가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김세윤 교수님은 자기의 글에서 뭐라고 불렀는가 하면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소명의 코어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엿장수가 엿을 팔아도 울릉도에서 가져온 호박으로 만든 엿일 경우 자기 엿이 맛있다고 침을 튀기면서 하는데 보라고 입에 안 붙는다고 하나씩 먹어보라고 하는데 설교 내용은 고사하고 어떻게 그렇게 맥이 없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까? 설교자의 영광은 교회의 크기나 사회적인 지위,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큰 교회를 하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끊임없는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모세는 남전도회원만 67만 명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뭐 좋은 게 있었습니까? 맨날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그의 죽을 때까지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들어올 때 다 버리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필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어떠한 타오르고 있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외치지 않으면 예레미야가 이야기 하였듯이 중심에 사무쳐 진짜 죽을 것 같다,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토해놓고 살다가 죽는 것이 설교자의 일생입니다. 그게 불행한 시대를 만나서 불에 태워서 죽거나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고 좋은 시대를 만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에 호응하면서 스펄전과 같은 성공을 이룰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위클리프처럼 떠오르는 별처럼 떠오르다가 잊혀지고 사라질 수도 있고, 존 후스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그 시대가 모두 이해한다면 어떻게 영원한 진리를 외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이 동기가 되면 이 안에서 뭐가 생겨나는가 하면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지울 수 없는 소명의 표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그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서 세상의 지혜와 비교하는데 그 세상의 지혜가 소피아코스모스, 세상의 철학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 보여주고 싶어 하였던 해결점들이 그리스 로마 철학이 자기의 철학을 행함으로써 보여주고 싶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였습니다.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오니아학파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확 바꿔 놓았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면서 플라톤이 그 방대한 소위 이야기하는 폴리테이아, 국가론, 그 안에서 철학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다룹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대한 주석입니다. 결국 그러한 모든 것들이 탑의 탑을 주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신학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부를 조금 밖에 못 합니다. 그러면 그냥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들어도 그 사람에게 복음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탁월하게 공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사상이 탁 서서 모든 학문을 쓸고 지나가면서 그러면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한 세계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한 번도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엄살 부린다고 이야기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도 학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그러고는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밀하지도 않고 그리고 치밀한 논리도 부족하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하나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학을 하는 것은 테이블에 앉아 루이스 벌코프나 판 덴 베르크를 읽는 것이 신학이 아니라 온 몸으로 도를 찾아 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구도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 구도가 무엇인가? 그것이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I am the way.”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길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왜 하필이면 길을 먼저 말씀하셨겠습니까? 생각을 많이 새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도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도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도에 대한 사모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도 때문에 그 도를 대면하면서 내가 그 도를 말하고 나에게 적용시키기에는 얼마나 그 도로부터 먼 인간인가 하는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도애의 삶이 나옵니다. 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도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입니다. 통곡을 하고 실제로 아파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대화해 보면 고민이 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딱 느껴집니다. 말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인간이 영물인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그냥 신음소리만 내는데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는구나,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도애의 삶입니다. 그러한 도애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그 도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도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신학에 중심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끊임없이 우리는 신학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존재하는 이유, 이 세계가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목적, 인류가 함께 살아가야 할 좌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유와 근거를 묻게 됩니다. 그것을 나는 신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혼자 공부하면서 그 15살 먹은 아이의 피눈물 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저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에도 거기에 답을 제대로 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상식선에서는 줄 수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후에 공부를 하면서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세 중반이 되었을 때 나는 신학교 다니면서 늘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조직신학교수가 와서 조직신학 안 하면 다른 것 해봐야 소용없다고 합니다. 성경신학 교수님이 오면 그런 것 아무리 해 봐야 성경 신학 안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실천신학자 교수님이 와서 그런 것 아무리 해 봐야 마지막 우리의 사역에서 골을 집어넣는 것은 실천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 중요하다고 하는 저것이 어떻게 서로 링크가 될까? 결국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게 틀림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고민하였는데 어느 날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 확 한번 하나님의 은혜의 개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신학의 수많은 학문들의 분과들이 어떻게 통일을 이루면서 성경을 높이는가 하는 것들이 열리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경험은 탐구의 경험이 아니라 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탁 보면서 이 세상의 신학자들이 쓴 모든 글들은 하나님에 대한 흑백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그 찬란한 총천연색의 그림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부터 15년 정도 흐른 50세 가까이 되었을 때 정확하게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50세 가까이 되었을 때 40대 후반에 한번 더 개안을 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 성경과 신학을 넘어서 의학, 철학, 역사, 천문학, 물리학, 수학, 심지어 식품영양학, 모든 것들이 어떻게, 결국 자기는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오케스트라처럼 온 세계에 드러나는가 하는 그림이 어느 한순간에 들어왔습니다. 오랜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50이 되기 전에 다시 한 번 주님을 깊이 만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눈물로 보내었던 그때 쓴 책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뒤에 많은 bibliography가 붙었지만 저는 어느 책도 보지 않고 한 숨에 썼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게 도용이 안 될까 생각하면서 거꾸로 제 기억을 더듬어서 자료를 찾아낸 결과입니다. 한 숨에 썼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느 한순간에 신학의 눈이 열리면서 책을 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일 만에도 300-400페이지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생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그것을 통일되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를 많이 접근하는데 사실은 이것은 모두 지역적입니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두 가지 힘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계적인 지식을 원합니다. 모든 사상의 구조물의 중심에 있는 그 중심이 되는 기초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기본적인 조건의 토양을 상실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상의 체계가 세워집니다. 모든 학문적으로 공부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이 책을 다 읽었냐고 하는데 이 책을 쉬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읽어도 400년 읽어야 할 책의 분량입니다. 340년인가 계산해 보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그것을 다 읽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천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상의 체계를 가지고 그 사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윤리의 힘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상을 중심으로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걸어온 자신의 발자국은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인생입니다. 그러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자기가 도덕적인 신념으로 승화시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넘어졌어도 한번 넘어졌으니까 다른 길로 가자, 그러면 안 됩니다. 넘어진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용서를 걸어가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세계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한길 같이 용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그러면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거기에서 피를 쏟다가 죽는 것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그리스인의 삶입니다. 이번에 나온 사도라는 영화를 보니까 왕이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손으로 세자를 서인으로 할 수가 없으니까 뭐라고 합니까? “네가 상소를 올려라. 얘 못 쓸 애라고 정리해서 서인으로 보내 버리십시오. 나한테 해라. 그것을 도장을 찍어서 하마.” 그러니까 “왕이여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죽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거라.” “왕이여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나란히 세 명이 죽습니다. 그게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입니다. 선비의 기본은 항상 죽을 준비를 하고 삽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아우라입니다. 아우라가 일본말인 줄 아는데 아우라가 일본말이 아니라 라틴어입니다. 이미 벌써 피타고라스가 옛날 희랍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욥기에도 한번 나옵니다. 70인역에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공기, 바람, 분위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신에서 풍기는 저항할 수 없는 기운입니다. 그게 아우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우라가 없습니다. 베테랑이라는 영화를 보니까 형사의 아우라가 나옵니다. “야, 우리 형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게 아우라입니다. 너무 유치하지만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상을 가진 사람이 모두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는가, 아닙니다. 하이데거가 제 아무리 탁월한 철학으로서 당시대를 휘어잡은 사람입니다. 나치의 부역하지 않습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기발한 사상이나 철저한 체계 하나 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으로도 그러한 행동, 그러한 말하자면 변절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정당ㄹ화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은 바로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연결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제 3의 힘이 필요한데, 이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악됩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the Power of Grace’,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뭐냐 하면 눈물로 젖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 가벼운 자유주의에 의해서 요동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아우라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요새 무엇입니까? 아주 극단적인 킹 제임스 버전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기독교 강요 하나 이외에는 전부다 사탄의 작품인 것처럼 극단주의자들 있지 않습니까? 전부다 가치가 없습니다.
제가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 리처드 멀러 교수를 통해 만나고 그 원서를 읽고 나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 얼굴도 모르는 그 양반을 만나려고 마스트리히트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습니다. 리처드 멀러 교수가 나를 만나 줬습니다. 누구냐고 할 때 나는 한국 서울도 아니고 변두리에 있는 목사라고 소개했습니다. 왜 왔냐고 하였을 때 당신의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를 읽고 엄청난 은혜를 받아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분이 미국 학생들도 안 읽는 책인데 더군다나 그것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까, 그러면서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방대한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처럼 공부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 못 보지만 열심히 7만 대지 혹은 8만 타이틀을 보았습니다. 그 시대 작품들을 쫙 보면서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참 감사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을 깊이 만났습니다. 이번에 갈 때 『영원안에서 나를 찾다』그 책을 줄 텐데 제가 그것을 10년 동안 사유의 결실입니다. 제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최소한 100번, 넉넉히 잡으면 150번을 읽었습니다. 안 읽은 날이 없을 정도로, 한창 많이 읽을 때는 9장, 10장을 거의 눈감고 외웠습니다. 울고 웃고 그러면서 180권의 책을 읽고 씨름하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읽지 않을 거면 받아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거스틴을 읽으면서는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제가 오늘 페스코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똑같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개신교도 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를 읽으면서는 내가 수많은 개신교 중에서 리폼드(Reformed)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어마어마한 유산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가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결국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 의미를 깨달은 다음에 그 진리의 빛을 모르며 사는 모든 인간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까지 드는가 하면 ‘차라리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고 저 사람이 구원받은 나의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위 이야기하는 ‘아나데마’의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저주 받은’입니다. ‘아나데마’의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결국 사나 죽으나 나의 모든 인생이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들여다보기만이 신학이 아니라 살아가고 오늘 밥 먹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러는 것 자체가 말하자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신학적인 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보수, 자유주의 할 것 없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칼날 앞에서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리고 이 진리와 더불어서 생각하고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작렬하게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공과 바꿀 수 있는 가치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주님을 깊이 만나면 신학이 달라집니다. 두 번째,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뭐냐 하면 학교 다닐 때 한번쯤은 응급실에 실려 가서 ‘이렇게 공부하다가는 당신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선고를 받아야 합니다. 성성하게 젊지 않습니까? 왜 공부를 안 합니까? 제발 스마트폰 좀 가지고 다니지 마십시오. 나는 이것을 가지고 9년 째 쓰는데 불편한 것이 없고 이것으로 300페이지, 400페이지 책을 세 권을 썼습니다. 뭐가 불편합니까?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공부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서 말입니다. 개혁신학만 공부해서는 개혁신학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못 생긴 사람을 봐야지 자기 애인이 진짜 잘 생기고 예쁘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두루두루 공부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성경과 나의 생애』에서 말하였습니다. 당신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무개 목사, 화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기도 많이 하십시오. 기도 안하면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기도 안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해를 끼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살아있는 동안에 정말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 세우든지 정말 눈물이 있는 설교,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피를 토하는 사람, 그것을 진리에 대한 장엄한 증언으로 쏟아놓고 어느 한순간에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목회자의 인생입니다.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으로써 사라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냥 퇴장하고 사라져야 합니다. “난, 아직까지도 잘 하는데!” 정점에 올라 최고의 지점에 있을 때 은퇴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어느 한순간 장엄하게 막을 탁 내리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은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위로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지막 자기가 그토록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가장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목회자의 일생입니다. 신학을 하는 일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