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소금교회 사경회 둘째 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편)
녹취자: 김경애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외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존귀하게 대우를 받습니다. 돈이 많이 있다든지 혹은 높고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든지 둘 다 없지만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다든지 그러면 인정을 받습니다. 셋 다 없다면 얼굴이라도 예쁘게 생겼든지 그러면 세상에서는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모두 인간존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인간에 대해서 판단하는 시각과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세상의 사회 속에 살면서 어느 정도는 이 세상이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입사면접을 갔답니다. 실력은 있었는지 모르는데 머리도 부스스하고 화장도 하지 않고 그냥 와서 면접 자리에 앉았더니 면접관이 당신은 면접을 하러오는데 차림새가 어떻게 그 정도밖에 안됩니까? 그러니까 이 자매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답니다.’ 그랬더니 면접관도 그리스도인인데 ‘우리 회사는 외모도 봅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매들이 주일날 머리를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교회를 오고, 머리를 빗지 않고 오고, 그리고 예수 믿는 아저씨들이 주일이면 옷도 깨끗이 입고 와이셔츠도 깨끗이 입고 와야지 꼬질 하게 입고 오면 부인이 얼마나 집에서 살림을 안 해주면 저 모양으로 노숙자처럼 하고 다닐까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면 점점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십니까? 그러니까 젊어서는 괜찮은데 나이가 들면 화장품도 좀 바르고 특히 여성들 말입니다. 그리고 옷차림도 궁상떨지 말고 어느 정도로 해서 품위를 유지하고 살면 욕할 것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세상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하나님이 바라보는 시각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바라보실 때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하나님 앞에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가 되고 인간이 선한 의지를 크게 갖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이렇게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육체는 성경에 보면 육체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영혼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을 생각할 때 육체가 죽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사실은 이 육체의 죽음이 무엇인지 아직 합의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학에서도 무엇을 보고 사람이 죽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심장이 멎은 것인가? 아니면 뇌가 멎은 것인가? 아니면 호흡이 멎은 것인가?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차라리 생명에 대해 정의하기를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Metabolism 즉 신진대사와 자기의 생명을 해치려는 어떤 것에 대한 항거를 특징으로 하는 이 두 가지 기능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이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든 악한 불신자의 영혼이든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는 이런 식으로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식의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영혼이 죽었을 때에 오히려 활발히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경은 ‘죽은 영혼의 행실’ 혹은 ‘죽은 행실’, Dead Works 라고 부릅니다. 그게 바로 갈라디아에서 이야기하는 육체의 열매들이 바로 영혼이 죽었을 때 맺히는 열매입니다. 실제로 영혼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죽었다고 불리는 그 시기에 활발하게 움직여서 육체의 수많은 죄와 정욕의 결실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라는 의미가 육체의 생명이라는 의미와 영혼의 생명이라는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의미도 양자가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소멸되었거나 멸절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이 만드셨을 때 의도하신대로 그렇게 영혼이 올바르게 잘 기능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영향력이 종결된 상태가 바로 영혼의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신자의 영혼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하나님이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법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법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서 법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크게 두 가지로 카테고리를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규범적 의미에서의 법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국가가 혹은 하나님이 의사표시를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한다. 만약에 이런 죄를 지으면 나의 명령을 어기고 이런 식으로 잘못하면 벌을 주겠다.’ 그래서 국가가 만드는 것은 수많은 형법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 법령집이 이만큼이 됩니다. 그것은 국가가 의사표시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기면 벌칙이 가해집니다. 작으면 벌금을 내야하고 심하면 사형을 시킵니다. 하나님도 율법을 통해서 이렇게 규범적인 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사용된 ‘죄와 사망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 이럴 때는 이런 규범적 의미의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규범적 법이 아니면 또 어떤 것을 법이라고 합니까? 성향적 법입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지.’ 그리고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옆에 있는 떡볶이 집에 들어가서 떡볶이를 먹습니다. 또 직장인들이 퇴근시간에 술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이야기하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는 그것은 모든 참새는 반드시 방앗간에 들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안 들르면 감옥 간다, 사형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참새 자신 안에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나거나 보면 반드시 거기에 가서 그것을 쪼아 먹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 번째 의미의 법이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한 이 사람들은 죄와 사망이라는 성향으로써의 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그것을 끌러주시고 해방시켜주셔서 더 강한 법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생명과 성령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한 교회에 가입된 것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원래 있던 교회의 영적인 몸에 접붙여져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그 생명이 교회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 속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의 강한 성향이 되어서 신자 속에 어느 한순간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신앙은 좀 깊은 영적인 체험이 없으면 남녀 간에라도 한번 죽을 때까지 사랑해본 사람들이 이 기독교신앙을 잘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못해본 사람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진도를 나가야하는데 조금만 더해보겠습니다.
그럼 이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거듭나고 회심하게 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신자가 되는 그 순간에 생명과 성령의 법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일방적으로 부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주시는 이것을 이제 힘적인 방법이라고 합니다. Physical In Fusion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성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이 계시려나 모르겠는데 형제한테 프러포즈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남편이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나하고 결혼합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자기가 밑지는 것 같습니다. 돈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신앙 하나는 좋다고 하지만 얼굴도 별로인 것 같고 그래서 막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가 막 고민을 하는데 계속 프러포즈를 합니다. 계속 만나니까 정이 듭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막 흔들립니다. 끝까지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지 않으면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누구의 강요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백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대부분의 여자의 마음은 그 고백과 함께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커다란 사랑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격적으로 이상해서 아무렇게나 늘 고백하고 사는 그런 지조 없는 여자들은 말고 입니다. 거기서 확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뭐냐 하면 회심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힘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없는 어떤 사랑을 한 신자에게 확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어제 사랑하지 않던 하나님을 오늘 확실히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사랑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입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설복하시는 사랑입니다. 이성적으로 설복하심으로써 우리의 지성을 통해 승복하게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렇게 들으면서 자기가 잘못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승복이 되면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속에서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곁가지로 갔습니다만 어쨌든 영혼은 이런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질 때 그때에 우리의 육체의 열등한 정신의 기능들인 먹고, 배설하고, 육욕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품 속에 인간의 욕망이 배어서 이것을 열등하게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런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이 영혼의 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충만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성향을 우리가 중생하고 회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회심, 신자가 된다고 할 때 첫 번째가 존재론적으로는 없었던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없었던 사랑이라기보다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바꾸어놓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데 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중생과 회심을 체험할 때, 중생을 통해 회심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일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인식론적인 변화인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회심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모두 자기의 육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신령한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있다는 의식도 거의 없거나 아주 희미하고 희미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다가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눈이 떠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쓰레기 같은 죄인인데 자기를 구원하기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리스도인이 되고 변화되기 전에는 산에 올라가봐야 삼겹살 구워 먹을 자리를 찾는 것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주님을 알고 나니까 마음의 눈이 확 열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성경은 예전에는 읽으면 계속 잠이 오는 수면제였는데 피곤하면 항상 책을 펼쳤습니다. 금세 잠이 오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책을 읽으면 송이 꿀처럼 달고 너무너무 달콤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것을 훈련시킵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을 깨끗한 판에 쓰고 거기에 꿀을 바릅니다. 그리고 요만한 아이들이 와서 쓰면서 꿀을 빨아먹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답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콤하다는 것을 말씀인지 꿀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달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깨닫는 것입니다.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자기가 그냥 우연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아주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도처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장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장 많이 묻어있고 이것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있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에도, 그리고 대지를 가로지르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도, 풀벌레 노래 소리에도, 아침에 들판의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도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랑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원인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하나님이 거듭난 신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신자의 영혼이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현저히 쇠퇴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성향들이 현저히 영향력을 잃어버려서 마음의 기쁨과 영혼의 활기, 즐거움, 진리에 대한 감각, 이런 것들이 무디고 희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 은혜는 쇠퇴하고 우리 속에 죄와 정욕은 힘을 얻게 되면서부터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아래 있었던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죄들을 짓고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가리켜 영혼의 침체기, 영적 침체기라고 말하고 혹은 영혼의 죽음의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활기 있는 시인의 영혼이 왜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고 말할 정도로 침체 속에 들어갔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편 안에서 영혼이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무지 때문이고 또 하나는 계속되는 고통 때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죄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단절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밑바탕에 있는 뿌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무지와 죄입니다. 무지와 죄가 바탕에 깔리고 이것이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앞의 두 가지는 생략하고 세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가장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이런 생명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쇠퇴하게 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이미 죽었던 그런 육체의 욕망들을 일어나게 해서 우리의 육체의 열매를 행하며 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악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워낙 오랫동안 굶주렸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그것이 여태까지 못해본 것이 다 혁명을 일으키듯이 들고 일어나서 쏟아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이 많고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되는 사람들은 그냥 여전히 안 믿고 삽니다.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도저히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어서 ale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인간은 마지막까지 혼자 살 수 있는 한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이 죄 된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그게 바로 씩씩하게 혼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이제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자기인생을 하나님 앞에 헌납하기로 말하자면 자기 인생의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기를 포기한 각서를 쓴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안 믿을 수 있었으면 안 믿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은 그 사람들이 구원받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안 믿을 수밖에 없던 사연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가 되지만 은혜가 멀어지면 나면 그동안 자기가 못해보았던 것들이 솟구치면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기의 신앙을 뒤집는 것과 같은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사무엘하 11장까지만 해도 정말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저민 B. 워필드라는 미국의 신학자는 구약성경에서 이 다윗의 신앙의 위대함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다윗의 이 신앙을 높였습니다. 존오웬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 구약성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윗을 높은 인물로 칭송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다윗을 지상에 존재했던 최고의 철학자로 생각하며 자기의 철학함에 전범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어디에 가든지 이 다윗과 함께 해주셨고 드라마와 같은 인생여정을 지나며 일개의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임금의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크게 두 번을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금한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왕이 실시한 것은 행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싫어하셨습니다. 이유는 당시의 인구조사는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쟁에 나갈 군인들의 수와 그리고 마필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작업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결과는 곧 국력에 대한 측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울 때 이방나라와 같이 왕의 지혜나 병사의 수, 전쟁에 나갈 마필의 수를 의지하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여 이기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신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이 마음을 격동시켜 이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그는 하나님 앞에 큰 징계를 받게 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온역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두 번째 그보다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이시대의 국가는 가산제 전제국가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한 사람이 왕으로 등극하는 즉시 국가 전체는 왕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산제 국가입니다. 그 국가의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유가 자기의 것이니까 남의 부인이라도 왕이 원한다면 얼른 갖다드려야지 자기도 그 왕의 소유인데 그렇게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이 남의 집 여자인 아내를 데려다가 자기의 첩실을 삼았다는데 옛날 같으면 그렇게 되었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아야 될 윤리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세상나라와는 다른 윤리아래에서 살아가야했던 나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다윗은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영혼은 일찍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깊은 침체와 사망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이 고통에 대한 노래가 시편 6편, 51편 같은데서 참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깊은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어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한 뜻이 아닙니다. 뭐라고 기도하느냐하면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라고 참회의 눈물로 하나님 앞에 아룁니다. 이 기도를 올릴 때 다윗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선임자 사울이 하나님이 기름 부을 때 주신 성령을 거두시자 그가 미치광이로 변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영혼이 파리하게 죽는 그런 깊은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깊은 영혼의 침체 무서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시간동안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큰 고통을 받았는데 그러나 여기에서 그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아주 놀라운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영혼의 침체는 죄 때문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는 영혼의 생명을 앗아가는 아주 유일한 원인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을 만나도 죄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렇게까지 깊은 침체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가 무지인데 무지는 이 세상에서 이 무지를 다루는 것과는 성경은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이 세상에서는 법을 어기거나 잘못했을 때 벌을 덜 받거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반성문을 쓰면 됩니다. ‘제가 잘 몰랐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무지해서 잘 몰랐습니다.’ 라고 하면 정상을 참작해줍니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 무지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세상과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무지를 대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청교도들의 저작을 보니까 무지 즉 Ignorance를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두 사람의 작가의 작품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마음이 조금 널찍한 사람이어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Ignorance is almost evil.' 그러니까 무지는 거의 악이다. 그 사람은 마음이 널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까칠한 사람은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Ignorance is the very evil.' 그것이 바로 악이다. 딱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는 자기가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교회에 들어온 순간 일평생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을 때까지 평생을 진리의 학교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육과 예배, 교회의 예배와 교육을 통하여 배우고, 성경을 읽으며 배우고, 경건서적을 읽으며 배우고, 신학서적을 읽으며 배우면서 일평생을 진리에 관한 한 학생으로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입니다. 아멘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아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강남의 부동산 시세에는 어쩜 그렇게 잘 알고 골프 학습은 밤늦게까지 TV를 켜놓고 배우면서 안합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세례 문답할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합니까? 2종 보통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 더 열심히 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러니까 틀렸다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는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남의 차를 얻어 타면 되지만 이 세례 받는 교인이 되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 인생 자체를 운전하는 면허입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일절 없습니다. 한 달 교육을 받은 다음에 소요리문답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새벽 2시에 발로 차서 일으켜 세워서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또박또박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단 한글을 모르시거나 연세가 너무 많아서 외워지지 않는 분이나 지적능력이 모자라는 정서장애가 있는 분들은 다른 방식으로 테스트를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통과해야합니다. 못하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세례를 못 받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무지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좋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몇 년 신앙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5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기독교에 관한 책들이 책꽂이에 하나는 되어야합니다. 한 칸이 약 20권내지 30권 들어갑니다. 일 년에 그 정도 샀다고 하면 한 삼십년 신앙생활을 했으면 그래도 기독교 책이 책꽂이 다섯 칸짜리 여섯 개는 있어야합니다. 밥은 식당에 가서 삼, 사만 원짜리를 먹고 잘 먹었다고 하면서 책 한권을 사려면 ‘만원입니다.’ 그러면 ‘만원씩이나?’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책이 싼 나라가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쌉니다. 우리나라에서 책한 권을 팔면 유럽에 가서는 껍데기밖에 사지 못합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지 않습니다. 안 읽습니다. 내가 책을 쓰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는 빛이 들어오지 말도록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확고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성경을 어디를 읽고 계십니까? 두 번째는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세 번째는 가슴이 아프도록 고통스러운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 세 개에 답을 할 수있어야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이게 초점이 그리스도께 맞혀진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무지와 함께 죄가 있는데 죄는 무엇을 배워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이 시인은 영혼에 깊은 어두움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침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설교는 지금 시작했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1/5도 못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끔찍하게 큰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크기도 문제가 되지만 죄의 본질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화를 들 때마다 우리 집사람은 제발 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는 한 달에 두 번씩 분뇨차가 와서 교회의 분뇨를 수거해갑니다. 대개 새벽에 와서 파이프를 대고 정화조를 흡입합니다. 그러면 똥들이 출렁거리면서 탱크로리에 실려 가고 거기에 유리가 달려서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건져서 꽉 차서 한약 짜듯이 짜서 노란 물로 만들어서 스프레이에 넣고 공중에 뿌렸습니다. 그러면 그 건더기가 출렁거리며 가는 그 똥차의 똥과 예쁘게 노란 분말이 공중에 퍼지는 것이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똑같이 똥입니다. 우리의 죄의 크기는 다르지만 죄의 본질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어떤 군인들이 계곡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처럼 보이는 군인이 졸병 세 명에게 부대 하나씩 주면서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가서 돌멩이 50㎏씩 담아온다. 실시!’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한 병사는 무식하게 가서 50㎏짜리를 찾았습니다. 50㎏짜리 돌멩이 하나를 부대에 담아서 낑낑거리며 들고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병사는 30㎏짜리 하나 20㎏짜리 하나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세 번째 병사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고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저 친구들은 왜 저렇게 미련하게 큰 돌멩이들을 지고가나 하며 공기 돌처럼 자잘한 것 1,000개를 주워서 담았습니다. 그리고 지고 어디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그 다음 지휘관의 명령이 황당한 명령이었습니다. ‘지금부터 가지고 온 돌을 모두 제자리에 갖다놓는다. 실시!’ 그랬습니다. 한 개를 가져온 사람은 한 개를 가져왔기 때문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갖다놓습니다. 두 개를 가지고온 사람은 조금 헷갈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놓아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나 천개를 가지고온 사람은 하나도 제자리에 갖다놓지 못했습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접시처럼 납작한 비커에 찬물을 넣고 개구리 큰 것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물론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폴짝하고 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램프에 불을 붙이고 1초에 0.04⁰만 오르도록 불꽃을 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시간 20분 만에 개구리가 거기에서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개구리를 논에서 잡아다가 미지근한 물에 넣었더라면 개구리가 미쳤다고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찬물에 들어갔습니다. 천천히 기온이 올라오니까 얘가 사우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온도가 더 올라가니까 여기에서 삶아져서 곰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집안을 청소해보면 애들이 비 오는 날 진창에 가서 흙을 묻혀서 마루를 밟고 지나간 자리는 걸레질 한번으로 됩니다. 그런데 이사 갈 때 싱크대 밑에 한 5년 동안 기름과 먼지가 떨어져서 쌓여진 때는 세제로 뒤범벅을 해서 솔로 박박 닦아도 닦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러한 크고 작은 죄들이 모두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주면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고갈시키고 그렇게 해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약화시켜 마침내 영혼이 아주 파리한 채 되어서 영혼으로써의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끔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으로부터 해결 받는 길은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도 없고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입니다. 회개. 이 회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독교처럼 이 회개를 강조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오늘날과 같이 인간을 중심삼은 사고가 보편화된 시대에는 이 기독교는 현대정신과는 맞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점점 심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감을 느끼면서 사는 인간들이 행복한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시대정신을 잘 이해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붙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회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회개를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계속해나가면 본인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반드시 나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나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를 끊임없이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결함과 과오와 악한 본성들이 잔존하고 있는데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 마치 핸들의 조향장치가 망가진 자동차처럼 그냥 자기가 원하는 한 방향으로 달리는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는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나는 참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죄를 회개하는 그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진리와 생명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갈 때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 생명은 예수 안에 감추어져있고 진리가 함께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와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영혼이 생명을 얻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반드시 지성적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지성을 죽이거나 약화시킨 신앙생활은 신뢰할 수 없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지성이 우위에 있고 그리고 지성을 따라서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가 그 진리에 복종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신자의 특징은 초롱초롱 빛나는 지성의 눈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거슴츠레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킬 때는 생기가 돌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의 눈이 언제나 초롱초롱하고 진리의 빛을 모른 채 일천 년 동안 이 세상에서 황제로 살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이 진리의 빛을 받으며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자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왜 그렇게 생명과 직결되느냐하면 지성이 진리를 확실하게 인식하면 그 진리는 항상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왜? 그 진리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 진리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어야지만 겨우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깊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진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구나! 나의 영혼의 침체와 내 인생의 모든 비참함이 내가 진리를 멀리 떠난 데 있었다고 회개하는 사람은 간절한 소원이 부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다시 합치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합치된 상태를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진실해질 수는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고 솔직해질 때 우리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하지 진리에 대한 인식은 없고 솔직한 것은 만약에 ‘너 이렇게 사람을 죽였다며?’ ‘그래 죽였다. 죽이기만 했는지 아느냐 돈도 훔쳤다. 이것이 사실이다. 어쩔래?’ 우리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의식 속에 진리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BGR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빼째라입니다. 그래서 회개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그를 꾸짖었을 때 즉시 회개하며 이 시인 다윗은 왕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인이 아니라, 정치가가 아니라, 그리고 군인이 아니라, 위대한 시인이요, 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아무도 없는 그 벌판과 같은 외로운 처지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은 은혜언약의 관계는 최소한 두 가지를 개런티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순종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무제한으로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가 진실하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게 참회하면 언제나 그 죄를 무제한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자신의 침상을 띄우며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하나님이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눈물로 매달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이 다윗을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을 때 그때 하나님이 다시 한 번 그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죽었던 영혼을 무지로 말미암아 고통으로 말미암아 침체되고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신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형태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반섭리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했는데 이상하게 잘됩니다. 옛날 제가 전도사 시절 때 교회의 집사님이 있었는데 가방을 만드시는 분이었습니다. 가방을 어마어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수출했는데 갑자기 경기가 안 좋아지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수출이 끊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가방을 만들어놓고 회사가 도산을 할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복자율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방이 없어서 못 팔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딸내미가 어디서 형제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얼굴도 못생기고 대학도 후져서 안 된다고 계속 반대했는데 죽겠다고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다녔는데 아니 이 친구가 젊은 나이에 사업을 했는데 대박이 나서 ‘장모님 그런 후진 집에서 사시지 말고 강남의 아파트 45평짜리 하나 사놓았으니 그것 장모님 가지십시오.’ 그러면 면목 없이 받아야겠지요? 얼마나 그렇게 되고 싶으시면 저렇게 활짝 웃으시겠습니까? 이런 것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애를 낳았는데 남편도 그렇고 자기도 그렇고 둘이 합쳐도 아이큐가 150이 안될 것 같은데 얘는 어디서 돌연변이가 태어났는지 그렇게 공부를 잘합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대학에 수석으로 들어가서 신문사에서 인터뷰까지 받았습니다. 활짝 웃으시는 것을 보니까 역시 좋으신가봅니다. 이런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이와는 또 다른 종류의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Spiritual Blessing 즉 영적이 복입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 직접 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복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받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든지,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든지,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였다든지, 이런 것들이 Spiritual Blessing입니다. 그 Spiritual Blessing중에서 초월적이고 가장 놀라운 복이 무엇이냐 하면 용서의 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고 통탄할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후회를 갖는 것은 영적인 생활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영혼을 어루만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죄보다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소생된 영혼을 그 소생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실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된 영혼으로서 영혼이 우리의 삶 전체를 규율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도 이 쓸쓸한 가을밤에 여기에 나와서 집에서 편히 누워서 자거나 TV볼 시간에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간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오늘날 자신의 영혼에 관심이 없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강남에 사는 여성들이 자기의 외모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의 1/10만 자기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져도 아마 세상이 엄청 많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침체 속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 은혜, 생명, 그리고 놀라운 신앙의 감격 같은 것을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 가운데 심각한 죄로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영혼들이 있으면 오늘 회피하지 말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승복시키시려고 오늘 여러분을 여기에 오게 하셨습니다. 양심에 고통을 느낄 정도의 죄는 아닐지라도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크고 작은 죄들을 지으며 영혼이 침체상태에 들어가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해야합니다. 정말 회개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자기의 죄를 뉘우칠 때 이 시인이 영혼이 다시 소생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놓으면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아주 행복해집니다. 이제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도 달라지고 교회 가는 발걸음은 구름을 떠가는 것처럼 행복합니다. 예배는 감격 속에 드리게 되고 새벽에 나오는 기도생활은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 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귀찮은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을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 넘치게 되고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신학적인 견해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자녀들은 결코 침체에 빠지지 말고 이렇게 행복한 영혼으로서 아름답고 충만한 은혜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늘로부터 충만한 은혜와 사랑, 진리의 찬란한 빛들을 부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고 진리를 목회자로부터 주일학교 학생에까지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고, 그 진리를 파수하고, 혹은 그 진리를 전파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들이 빛으로 나타나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는 언제나 거기에 하나님의 소명이 내포되어있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이것을 스스로 소비하고 엔조이 하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법은 없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계획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은혜는 삶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그 사람 안에 오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 어느 집 아들이 학교를 가면서 엄마한테 ‘이거 엄마한테 주는 편지야 꼭 보고 그대로 해줘’ 그러면서 문을 꽝 닫고 학교로 내뛰었습니다. 엄마가 편지를 열어보니까 가관입니다.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무엇인가 보니까 엄마 없을 때 동생 돌보아준 것 900원, 아빠구두 세 번 닦아준 것 600원, 엄마 심부름하느라고 슈퍼까지 뛰어 갔다 온 것 300원, 합계 1800원을 청구하오니 속히 지불하여주시기 바람. 그 다음날 엄마가 아들에게 도시락을 싸주면서 ‘엄마가 도시락편지를 썼으니까 학교에 가서 열어보아라.’ 그래서 도시락을 친구들과 꺼내먹는데 진짜 엄마의 도시락 편지가 나와서 봉투를 뜯어보니까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네놈 뱃속에 넣고 9달 15일 동안 배 아프고 힘들게 다닌 것 공짜, 두 번째 네놈 낳을 때 순산을 못해서 배 째고 나은 것 공짜, 아플 때 너를 데리고 앰뷸런스도 오지 않아서 병원으로 뛴 것 공짜, 쭉 써넣고 마지막에 합계 0원 아들아 엄마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단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와서 공부를 안 하고 컴퓨터 게임을 한다고 엄마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왜 엄마는 배 가르고 난 자식 아홉 달 15일 동안 무거운데 넣고 다녀도 수고비 하나도 받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세상에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엄마가 왜 아들을 패냐는 것입니다. 그 돈을 안준다고 팬 것이 아니라 엄마가 공짜로 사랑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뜨겁게 공짜로 사랑해주는 것은 그 안에 엄마로서의 아들을 향한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라고 방에 집어넣었더니 문을 잠그고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있는데 그것을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혼을 내야합니다. 컴퓨터게임 때문에 큰일입니다. 여러분 애들 그것 못하게 하십시오. 세 살 때부터 중독이 된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답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없습니까? 가끔 심방을 가면 부인이 컴퓨터 게임에 중독이 되었다고 남편이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들도 그러고 말입니다. 그런 것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고 살면 안 됩니다.
어쨌든 그것은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계획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계획은 ‘참 좋다 은혜를 받으니까 너무 좋아’ 이러고 그것을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소비해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나 재산을 방탕하게 써서 낭비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왜 하나님은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또 죄를 지어서 그 은혜를 잃어버리면 회개를 시켜서라도 그 은혜를 회복시키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이름은 생략하고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말을 설명하겠습니다. 이 의의 길이라는 것은 히브리 성경에 데레크째데크 라고 나오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도 그렇지만 히브리사람들이 인생을 길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인생’ 그러면 인생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인생은 꼭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불의의 길에 반대입니다. 그러면 이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성경에서 이 의에 대한 개념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데 설명을 드리면 길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의의 개념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오는데 첫째는 인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해서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의입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은 ‘여호와여 주의 의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런 것들은 마틴 루터가 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루터는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절망 속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고백하느냐하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당신은 복음속에까지 칼날을 두셨습니까?’ 주님의 의로 우리를 판단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파멸되어야 마땅한데 그는 나중에 비텐베르크에서 깊이 깨달으면서 복음의 위대한 세계를 보면서 구약에 나오는 이 의의 개념이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칭의의 개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율법입니다. 그 당시의 의와 불의의 기준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합치하는 삶은 의로운 삶이고 그 율법에 합치하지 않는 삶은 불의한 삶이라고 이분법적으로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의에 대한 개념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구약에서 모세시대를 지나서 주전 8세기 7세기로 넘어가게 되면 성경신학적으로 이 의의 개념이 심화되면서 어떻게 변하느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Quality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이게 무엇과 일치를 이루느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거기에서 비롯되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게 미가서 6장에 잘나옵니다.
(찬양)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 내 몸의 열매로써 주께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거기에 나오는 인자가 ‘헤세드’입니다. 이 헤세드가 바로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이웃 간에 공의를 행하는 동기가 되고 그리고 그 사랑이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히트할라크라고 하는 이 동행이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내포하는데 Peace with God. 즉 하나님과의 평화 그 다음에 Thirsty For Glory.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데서 하나님의 이 헤세드의 사랑을 충만하게 입으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며 자비를 자신들에게 베푼 것처럼 이웃에게 그 자비를 전달하며 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를, 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은혜의 비밀들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도덕적인 반성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그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바르게 하자라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덕철학적으로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사용해서 선하게 살게 하는 그 중심성과 한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복종해서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추구하는 도덕의 중심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다루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이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의의 길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세상에서는 법을 지키고 이웃의 유익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의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이 의는 거룩함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지존하도록 높으신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 앞에 자기가 티끌임을 알고 엎드리는 두려움과 경배 그리고 그 앞에 자신이 한없이 더러운 존재라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그분 앞에서의 복종, 이것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이 계획된 의지를 따라서 사는 것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그 거룩함의 열매가 의로운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 교회의 어떤 도덕성을 인정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우쭐해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잘 몰라준다고 해서 섭섭해 할 필요도 없고 세상에서 욕을 먹으면 먹을수록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거룩함의 특성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솔직히 집회를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저도 공부를 해야 하고 목회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하고 바쁘니까 어쨌든 그런데 지금부터 15년 전에는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충청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 신앙특강을 해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제 일찌감치 서울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차가 굉장히 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왔을 때에는 시간이 빠듯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 이상을 남겨놓고 출발했는데 그래서 좀 밟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르망을 타고 다닐 때였는데 좀 밟았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경찰이 있어서 속도를 얼른 줄이고 갔는데 경찰이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수고하십니다. 면허증도 봅시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제한속도를 위반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위반을 했느냐고 이렇게 살살 왔는데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여기서는 위반을 하지 않으셨는데 산 너머에서 위반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산 너머에서 위반한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그러니까 거기 우리친구가 스피드건을 들고 서있는데 20㎞ 정도를 초과했다고 자기에게 무전이 왔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이냐고 그래서 ‘대학의 선생인데 요 앞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그래서 가는 길인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얼른 스티커를 발부해주십시오.’ 내가 빨리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아,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교수님!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습니다. 어쨌든 좋으니까 빨리해달라고 그래서 빨간딱지를 끊어주어서 햇빛가리개에 꽂아놓고 가서 집회를 잘했습니다. 밤중에 혼자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이것을 그때 교회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서 내라고 그럴까 하다가 내가 어차피 은행에 가야하는데 내가 내야지 그러면서 범칙금 스티커를 들고 갔습니다. 그때가 94년도인가 95년도인가 그랬습니다. 돈을 내야하니까 얼마를 내야할지 모르니까 지갑을 열고 ‘얼마입니까?’ 물어보니까 너무 싼 것이었습니다. 6,000원이었습니다. 그때도 한 20,000원 정도는 좀 주었을 텐데 60,000원은 아닐 텐데 아니 6,000이라니 그러면서 다시 0을 세어보니까 분명히 6,000원이고 납기 후에는 가산금을 포함해서 7,200원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싼 범칙금을 낸 적이 없는데 그때 생각이 난 것입니다. ‘교수님 걱정하시 마십시오.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보니까 위반내용이 네모나게 쓰여 있는데 거기다가 뭐라고 썼느냐하면 ‘담배 피다 걸렸음.’ 그렇게 쓰여 있다. 그것을 만약에 직원이 들고 갔으면 우리 담임목사가 어디를 가서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교회가 큰 시험에 들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그 범칙금 통지서를 들고 사실 은행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뭐냐 하면 이것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이런 식으로 살면 정말 이 세상은 희망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위반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부득불 나도 모르게 위반했을 때 걸리면 일체의 변명 없이 법에서 정한 모든 처벌을 받는다는 원칙을 세워서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조그마했으니까 우리 교역자가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여전도사님이 심방전도사님인데 운전을 못하셨습니다. 그때는 담임목사가 운전을 하고 자기는 옆에 타고 계속 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방하는 집에 데려다주면 자기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누가 전도사인지 목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날도 둘이 심방을 가는데 사당역 앞에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유턴차선에 차들이 가로막고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턴을 해야 하는데 위에서 유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지하도에서 뛰어올라왔습니다. 지하도에서 이렇게 보고 있다가 뛰어올라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더니 경례를 하더니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그럽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더 앞으로 나가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노란 선을 밟고 유턴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땅따먹기냐? 유턴을 안 할 자들이 서있지 않느냐? 그 차는 왜 잡지 않고 그 차 때문에 유턴을 하지 못해서 위에서 했는데 왜 잡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신입니까? 다 잡아내게? 어쨌든 주십시오.’ 그래서 ‘그러지 말고 생각을 바꾸어봐라 도로교통법을 내가 위반했다고 그러는데 도로교통법 1조를 보아라.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나온다.’ 그랬더니 ‘이유 없습니다. 주십시오.’ 그 다음에 나는 정말 억울하다. 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내가 불렀습니다. 안 된다. 왜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주느냐? 싸게 끊어주는 것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고 너는 적발을 했으면 법대로 해야지 왜 네 마음대로 싼 것을 끊어주느냐고 그랬더니 갑자기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걱정 마세요. 법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벌점 10점에 60,000원을 북 끊더니 확 찢어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갔더니 경찰서 아저씨가 툭툭툭 컴퓨터를 쳐보더니 막 웃는 것입니다. ‘아저씨 드디어 면허정지입니다.’ 내가 면허정지가 되었는데 왜 자기가 웃는 것입니까? 나는 얼마나 순진했는지 ‘제가 사실은 교회 목사도 하고 교수도 하기 때문에 차 없이는 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다른 방법으로 벌을 받을 테니까 이 운전면허를 정지하지 말고 계속 운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빙긋이 웃으면서 ‘집에 돌아가셨다가 6시 조금 넘어서 오십시오.’ 그러는 것입니다. 6시가 퇴근시간인데 왜 6시 넘어서 오라고 그럴까? 그리고 순진하게 교회에 와서 우리교회 집사들에게 ‘이상하다 그 경찰서에서는 6시에 퇴근하면서 6시가 지난 다음에 오라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집사들이 막 웃으면서 우리 목사님은 저렇게 순진하다고 그러면서 봉투를 달라는 것입니다. 모르십니까? 이게 세상입니다.
더 심각한 일은 우리가 집한 칸도 없이 전세를 전전하다가 대학교로 가니까 그 학교에서 돈을 보태주어서 방배동의 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앞집은 대학교수집인데 부인이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날 우리 집사람에게 ‘사모님,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교수님께 팔라고 그러시는데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그것을 파시려면 하나님이 나한테 말씀하시지 그것을 거기다가 이야기하실까?’ 그러면서 나는 살돈이 없다고 그랬더니 계속 사라는 것입니다. 어찌어찌하여 기적적으로 그 집을 샀습니다. 사고 나서 놀란 것이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그랬더니 계산을 해주는데 정말 막대한 돈입니다. 그 조그마한 집에 세금이 그렇게 많으냐고 하니까 너무 많아요. 그랬더니 법무사직원이 ‘아줌마 많아요?’ ‘많지요! 조그만 집에 세금이 이렇게 많으니 어떻게 다 내요?’ 그러니까 ‘반만 내세요.’ 또 무슨 세금이 그런 것이 있습니까? 여직원이 ‘반만 내세요.’ 그럽니다. 나라의 세금인데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고 그러니까 양쪽이 합의해서 다운계약서를 써오라는 것입니다. 요즘 문제되는 것 말입니다. 옛날에는 다 통용되었습니다. 다운계약서를 써오라고 그래서 예를 들면 1억 3천만 원을 주고 집을 샀다면 그냥 8,000만원 주고 샀다고 다운계약서를 쓰면 절반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와서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그러는 것입니다. ‘여보, 법무사 여직원이 그러는데 어떻게 할까?’ 그래서 ‘그게 말이 되냐? 아니 로마서 13장을 보아라. 거기에 분명히 세금을 내라고 되어있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가 파는 사람은 집사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서 마주앉아서 성도의 교제를 할 일 있느냐? 다 내야지!’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우리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깨서 돈을 맞추어서 법무사 사무실에 갔습니다. 여직원이 ‘아줌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운 계약서 써오셨습니까?’ ‘아니요 그냥 다 내려고요.’ 여직원의 표정이 ‘어휴 정말 아줌마 제가 부끄러워요. 탈세를 방조했으니 정말 부끄러워요. 선생님들 같은 분들 때문에 이 나라는 대한독립만세에요.’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그 눈빛이 ‘아이고 병신들! 가르쳐주어도 못해! 잘났어!’ 눈빛이 전자였겠습니까? 후자였겠습니까? 후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을 때 돌아오는 대접입니다.
더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쯤 되었나? 5년쯤 되었을 때 지하실에서 4년 있다가 도저히 안 되어서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서 교인들이 졸도를 하고 그랬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졸도한 것은 아닙니다. 큰 예배당으로 올라갔습니다. 큰 예배당이었고 좌석이 900석 되는데 자기네는 교인들이 너무 많아 너무 좁으니까 건축업자에게 팔고 다른데도 가서 지었습니다. 건축업자가 그것을 부수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하는데 IMF가 터진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교회를 세를 놓겠다고 써 붙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건물을 월세로 들어갔습니다. 교인 200명이 들어와서 3년 있었는데 교인이 계속 늘어나서 1,000명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거기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차를 댈 데가 없는 것입니다. 20대 정도 밖에 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갈 길을 모르고 방황을 하는데 어디 땅이 있었습니다. 돈도 없지만 돈만 있으면 땅을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크기에 맞는 땅은 장소가 맞지 않고 장소가 맞는 땅은 너무 작거나 또 크기를 따지면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땅을 샀는데 복덕방 사람이 말하기를 그 땅은 내놨다가 도로 들어갔기 때문에 절대로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가르쳐달라고 그래서 주인을 만났습니다. 땅을 팔라고 그랬더니 안판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왜 와서 귀찮게 하느냐고 그러는데 그 주인은 80먹은 노인네였습니다. 자꾸 조르니까 땅을 팔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그런다니까 깜짝 놀라면서 ‘교회?’ 그러더니 일주일만 생각해보자고 그랬습니다. 일주일 만에 갔더니 이분이 장로님이었는데 그분이 땅을 절대 팔지 않으려고 했는데 평생에 내 마음에 여기에 교회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팔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냐고 그러니까 36억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교회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산다고 큰 소리는 쳤는데 계약금을 3억을 달라고 하는데 3억을 어디서 마련합니까? 울고불고 기도를 했더니 어느 교인이 3억을 빌려주었습니다. 가서 계약을 하려고 그랬는데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 땅이 사실은 40억도 더 가는 땅인데 36억에 해주는 것이라면서 느닷없이 30억은 계약서에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운계약서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했더니 제직회를 했더니 건축하는 사람도 있고 다 있는데 요새는 95% 이상이 그렇게 하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래도 이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께 사람을 보내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할아버지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 땅은 원래 너무 싼 가격에 사서 회사를 하면서 이 부동산을 가지고 은행에 대출을 11억인가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서 우리에게 36억에 넘겨주면 세금을 내려면 자기가 2억을 보태야지만 세금도 내고 이 땅이 청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교회에 편의를 봐줄 수는 있지만 내버려두면 오르는 땅을 내가 내 돈 2억을 집어넣고 이 땅을 청산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며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이 얼마입니까? 그랬더니 3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고 샀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통장에 1,500만원이 있던 그때에 3억은 빌려도 언제 갚을지 기약이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고민하다가 앞에서 이미 학습했듯이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은혜를 주셨는데 어떻게 우리까지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 하면서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렇게 이중계약서를 쓰려면 회계장부를 조작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36억만 달라는 땅을 우리가 자원해서 39억을 주겠다고 바보같이 하고 파는 사람이 달라는 금액보다 3억을 더 주고 샀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에 모여서 ‘똑바로 합시다. 올바로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 됩니다. 그러나 진리대로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불편하게 되고 때로는 피를 흘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성도들 속에서 마음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하나님이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것은 이 세상을 위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고 노예처럼 그 사랑에 감동하여 봉사하기 위해서도 교회를 세우셨지만 하나님은 이 교회를 한 시대에 예언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 교회 때문에 이 나라가 평안해지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안정된 가운데 살아가고, 정치가들이 올바르게 정치를 하기 원하는 마음이지만 돌이킬 수 없이 정권이 그릇된 길로 가고 현저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엄을 파괴하거나 하나님이 국가에게 주신 분수를 넘어서 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통치를 굽히지 않을 때에는 이 정권에 항거해서 나라를 전복할 수 있는 권한까지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평화로운 때에는 전쟁이나 정권의 이변이 일어나는 때에는 우리가 그렇게 혁명으로 대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평화로운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올곧게 살려는 의지가 없을 때 과연 그런 위기가 왔을 때 예언자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교회는 그런 점에서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투명하고 깨끗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아주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러나 언제 와서 보겠다고 그래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윤리적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윤리적인 기준 때문에 윤리적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을 추구하면 산 구별된 생활로써의 열매로써의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박수를 치고 교회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교회는 이렇게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칭찬할 때 우쭐해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에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 고신의 비유를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수많은 투옥 성도들과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어느 정도 살게 된 다음부터 그 사람들을 보상해주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후손들도 많은 혜택을 주니까 애국지사로 등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지금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 남편이 옥 속에서 고초를 받은 것은, 우리 아내가 옥 속에서 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위해서 죽은 것이지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왜 우리가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하느냐? 보상을 받으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진지해지고 엄중해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먼저 의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한다고 이야기하고 일어서서는 다시 넘어져도 그 길을 걸어가야지 몇 번을 넘어지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야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좋은 일만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오래전일입니다만 제가 아는 국내 유수한 그룹의 구매담당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는지 이분이 들어가면서 여태까지 구입하던 모든 물품의 단가가 10%이상 낮아졌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줄 아십니까? 방송업자가 와서 교회의 방송공사를 하는데 이만큼 돈 봉투를 우리교회 직원에게 놓고 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리베이트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달라는 뜻인데 공사비의 5%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왜 주냐고 우리는 필요 없다고 하니까 왜 그러느냐며 강남에 있는 무슨 교회, 무슨 교회는 아예 직원들이 전화를 해서 이번에 공사를 맡길 텐데 리베이트를 얼마를 줄 것이냐는 협의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직원이 ‘우리는 이런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돌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정신에 항거하고 살라고 그 걸어가는 길이 고통스럽고 고난을 당하는 길이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했는데 승진을 한 것이 아니라 잘렸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전임자들이 모함을 해서 쫓아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언제나 복 받는다고 누가 그럽니까? 성경은 그런 기독교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핍박받고 죽은 사도들,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디트리 본 히프라는 신학자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이리 오너라 나와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말입니다. 어디 그런 기독교를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죽었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대접을 받기는커녕 죽었습니다. 있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들과 헤어지고 이게 이 세상의 정신을 거슬러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대가입니다. 그러나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난에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와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셔서 우리가 그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한때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구실은 여러 개가 있지만 구실은 하나입니다. 영토를 확장하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이 침략전쟁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의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어느 청교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산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안일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충만한 은혜를 받을 적마다 엄중한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빛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삶을 살아내려는데 이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한편으로는 이것을 참고 이기고 손해를 보면서도 갈 수 있는 은혜와 사랑, 용기와 힘을 달라고 빌고 또 한편으로는 이 사회를 후손들에게 같은 사회가 되지 않도록 이 사회를 고쳐나가도록 우리 자신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맨 앞에 서서 선두에 서서 그 모든 위기와 고통을 감내하며 걸어가라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은혜의 비밀을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는 진리의 빛을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과 위로와 용기를 하나님이 여기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에는 한없이 낮아져서 심령이 짓이겨진 사람처럼 통회하는 자가 되지만 눈물을 씻고 일어난 후에는 이 세상에서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 어둡다고 말합니다. 환하던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어두웠고 어두운 이 세상은 반짝이는 별들에게는 빛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엄중함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은 너무 장난 같습니다. 오락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시인은 자기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 자기로 하여금 의의 길로 걸어가게 하기위해 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며 이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마침 여러분의 교회이름이 빛소금교회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