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소금교회 사경회 첫째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편)
녹취자 : 최영순
시편23편은 표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시의 기록 연대를 다윗이 인생 말년에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23편은 주일학교시절부터 우리의 입에 그리고 귀에 익숙해진 시편이고 찬송도 수없이 작곡되어 나왔습니다. 본래 시편1편에서 6편까지 설교하기 위해서는 저에게 18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3번 밖에 안 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요한 시편의 산맥 3봉우리만 이번 집회에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우리가 시편23편을 여행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이고 이것은 총론적인 고백,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 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시인의 목자이신지 근거를 노래하고 있고, 마지막 6절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들이 미래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결론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1절을 다루겠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첫 절을 시작하면서 왜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할까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사소한 질문 같지만 시편23편 전체의 대의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 중 두 이름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엘로힘’이라는 단어였고, 또 하나는 ‘여호와’ 라고 번역된 ‘야훼’ 라는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이 두 하나님의 성함은 각각 다른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성경에 사용됩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이 단어가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알라흐’에서 왔을거라고 보고 알라흐는 ‘두려워떨다’라는 동사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학설은 ‘울’ 이라는 단어에서 왔을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울은 당시에 있었던 도토리나무를 가리킵니다. 도토리나무는 뿌리가 깊어서 심한 홍수와 바람에도 좀처럼 뽑히지 않아 강함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는 이 세상 모든 열망 백성들에게 함께 계시된 이름으로써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강력한 힘을 가지신 위대한 신’ 이라는 이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라고 하면 히브리어 본문의 ‘야훼’라고 읽히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시대에 와서 출애굽기 6장에서야 계시된 이름입니다. 이 ‘야훼’ 라고하는 이름은 ‘스스로 계시는 분’ 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보고, 이 이름은 너무나 거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부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존함입니다.
오늘 시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이렇게 부를 때 이것은 우리를 시인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맺고 있는 어떤 관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 그 관계가 바로 언약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맺으신 그 언약,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맺으셨을 뿐 아니라 모세에게서 맺으신 그 언약, 언약의 양상은 달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를 이루며 달려온 하나님의 언약이고 이 언약의 최고의 핵심적인 사항이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관계가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오늘 이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를 때 이 하나님을 자신 위에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난 그냥 신들 위에 높은 막연하고 위대한 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민 중에서 자신을 선택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하신 바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 나는 그 분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 그 분과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의식 속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라고 불리우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제일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시여’ 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생각은 많이 생각하지만 그 분이 하늘이 계시다는 사실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생각도 충분히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은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농담에서도 들먹거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의 태도는 두 가지인데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아주 작고 낮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줄을 알고 엎드리는 두려운 경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고 왠지 그 분께로 이끌려 가야 할 것 같은 끌림을 느끼는 사람,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경외의 감정이라 부르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가 960억 광년쯤 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많은 과학자들은 빛이 약 150억 년 쯤 달려가면 아마 우주 이 끝에서 저 끝 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가봐야 소용이 없다는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이 우주는 초속 이천 킬로로 확장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어마어마한 우주의 폭발로 우주를 확장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궁금했는데 최근 학계에서 암흑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팽창한다면 그 밖은 무엇이 있길래 팽창하는 것일까? 한없이 팽창하기만 하는 것일까?, 마지막엔 이 우주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주라는 곳이 얼마나 드넓은 곳인가? 어떤 학생이 과학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어요?” “야, 임마 .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너 같은 놈을 가르치고 있겠느냐? 그러나 내가 말해주지. 너희집이 어디냐?” “목동아파트요”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온 세계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 치고 너희 집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빨간 전구가 하나 있고 거기 아홉 마리 날파리가 돌아가고 있는 데 그 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다. 우주는 그렇게 넓다.”
저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고 공부를 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가 어느 정도 넓은가 하면 은하 하나가 약 천억 개에서 이천 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항성은 고정되고 계속 불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별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태양계 안에는 태양 하나만 항성인데 거기에 딸린 주요 위성이 아홉 개 이고, 그 위성 주위를 도는 또 다른 위성, 지구는 달을 가지고 있지요. 이런 위성까지 합하면 256개의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 256개는 갯수로도 안치고 오직 태양처럼 빛나는 별만 우리 은하계에 약 이천 억 개의 별이 있고, 나선형으로 되어 있고 태양은 중심부에서 약 이만 육천 광년 떨어진 오른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천 억 개의 별들이 있는데 우리 은하계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약 이십만 광년 정도 됩니다. 밤하늘에 보면 빛나는 별들은 대부분 모두 99% 이상 항성들인데 항성은 얼마나 가까이 있나? 수금지화목토천해 태양계 위성 들이 오백 원 동전 안에 들어간다면 태양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항성의 거리가 대구에 있습니다. 그 별들이 하늘에 가득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인간이 가본 곳이라고는 달 밖에 없는데 달은 1초면 가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위대하다고 기지개를 켜면서 우주를 모두 정복한 것처럼 폼을 잡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밤새도록 해야 하지만 어쨌든 어마어마합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태양계 안에 있는 위성과 항성의 비율을 가지고 계산한다면 우리 은하계 안에 3조2천5백 억 개의 별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우주는 얼마나 큰가? 그런 은하가 천억 개 내지 이천 억 개가 모여 있는 것이 우주일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한없이 드넓은 무한한 우주를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있어라’ 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은하 가운데 하나의 은하, 그 은하 안에 있는 이천 억 개의 별들 중 하나, 거기를 1년에 한 번씩 돌고 있는 지구, 그것도 아홉 개 가족 속에 섞여 있는 아주 작은 별, 목성의 천분의 일 밖에 안 되고 태양의 백만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자그만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허리가 잘려 반 토막이 된 나라, 거기서도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약간 옆으로 비껴서 여러분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우주를 하나님이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책 ‘팡세’ 속에서 말하길 ‘무한한 우주의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 고 했습니다. 그 드넓은 우주와 아름다운 세계의 규모, 그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아주 티끌같은, 장수하고 돌아가셨다고 해봐야 90세, 파리하고 잠자리하고 놀다가 헤어지면서 잠자리가 “다음 달에 만나” 그랬습니다. 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모릅니다. 하루살이하고 파리하고 놀다가 헤어지면서 “하루살이야 오늘 참 재밌었어, 내일 만나.” 헤어지고 나서 하루살이는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내일이 뭘까?’ 답을 못 내리고 그 날 죽었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위대한 세계 앞에서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은 아주 티끌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알면서 깨닫고 엎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군다나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결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인류는 그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는 티끌같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엎드려질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구원을 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시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티끌만도 못한 시인이 뭐라고 부르냐면 ‘나의 목자시니’라고 부릅니다. 소유격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신 세계에 계시면서도 세계를 초월하신 그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자신이 소유격을 써서 "My shepherd'하고 부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까지는 그저 만물 위에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일 뿐이었는데 그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감히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고,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고 그 분의 높고 위대하심이 어떠하신지를 깨달아 알아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격하는 신앙을 갖게 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들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혹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엄마의 하나님, 우리 가문의 하나님, 우리 구역장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 신앙의 세계는 누군가에게 버선목을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이성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진수에 해당되는 부분들은 전수할 수가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도록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인간의 표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신앙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시인 다윗은 한 때 실제로 목동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중의 유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살아보니까 그 분의 성품을 배워가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시는 방법이 자기가 양떼들을 다루었던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오늘 자신 있게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목자라면 시인은 누구라는 뜻입니까? 대답을 해 보십시오. 양이라고 말입니다. 23편을 눈 씻고 찾아봐도 양이라는 얘기는 안 나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왜 23편을 읽으면서 양이라고 생각합니까? 소 키우는 사람도 목자이고, 돼지 키우는 사람도 목자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개 키우는 사람도 요새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그럴 때 자신을 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없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하나님은 목자이십니다.할 때 자기는 하얀 양입니다. 그것도 늙은 양이 아니라 어린 양이라고 우깁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나이 드신 분들도 어린 양이랍니다. 마음속에 있는 양은 뉴질랜드 같은 파란 풀밭에 하늘에는 햇빛이 환하게 내리쬐고 흰 구름 몇 개가 떠가고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어있고 저쪽 화면 끝에서 양을 세제로 깨끗이 닦아서 드라이기로 말린 것 같은 순백의 어린 양이 뛰어나오는데 그게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기는 개떡같이 살면서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양은 티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캥기시죠? 사실은 1절에는 안 나오는데 2절로 넘어가면 목자라는 말이 소나 말이나 염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양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우리들이 양 하면 한국 사람의 Korean context에 보면 긍정적인 동물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동물입니까? 긍정적이죠? “그 사람 어때?” “양 같아.” “그럼 결혼해도 되겠네.” 그런데 팔레스티니안 컨텍스트에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중동에 오래 근무하다 온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이라크에 가면 그 사람들이 못 견뎌하는 욕이 있는데 ‘양 같은 놈’ 이랍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양이 긍정적인 동물이 아니고 ‘양같은 놈’ 그러면 머리도 나쁘고 욕심도 많고 미련하고 제 갈 길도 못 찾아가는 무지랭이를 가리켜 양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성경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이야기 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아주 순해서 그저 희생 제물로 끌려갈 때에도 소리 없이 순종하며 끌려가며 죽어서 우리를 위해 대신 화목제물로 죽으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 짐승, 이렇게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의 한 측면을 이야기 한 것이지 전체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입니다. 양은 특징이 있는데 지독한 근시랍니다. 몇 미터까지는 보는데 그 이상 넘어가면 눈이 나빠서 보이질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 이야기는 나오는데 돌아온 양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 번 대열에서 이탈하면 누군가가 가서 데려오기 전 까지는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그게 양입니다. 물에 대한 무서운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양입니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은 각각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와 공격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강한 이빨은 없어도 굉장히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맹수들은 이빨이 있어서 자기 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커다란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카멜레온같은 동물은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속이기 위해서 주위의 숲 속 색깔과 똑같이 변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스컹크는 방귀를 뀌어서 질리게 만들어 자기를 해치는 대적들을 물리칩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늘 방영되지 않습니까? 내셔널지오그래피 같은데 보면 많이 나오잖습니까? 한 번 눈여겨 본 프로가 있습니다. 사자가 맹수 중 왕이긴 하지만 항상 사냥에 성공해서 배부르게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새끼들이 굶어 죽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굶주린 사자가 마치 염소과에 속하는 어느 짐승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염소보다는 날렵하고 키가 작고 뿔이 60에서 70센티미터 나와 있는 초식동물입니다. 굶주린 끝에 사자가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갔습니다. 초식동물이 죽어라 도망을 갑니다. 도저히 사자를 따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못가겠으니까 달려가다가 동물이 확하고 돌아섰습니다. 뒤쫓아 오던 사자의 속도가 워낙 빠르니까 뿔에 걸렸습니다. 뿔이 사자의 등 뒤로 나왔습니다. 사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작은 짐승은 몸부림치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났습니다. 그걸 촬영하던 기자가 따라가서 마취총을 쏘고 사자를 치료해 주고 위치 추적 장치를 부착해 놓았는데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사자의 밥 밖에 안 되는 작은 동물들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사자가 좋아하는 도시락중 하나가 얼룩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얼룩말은 언제나 사자의 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룩말에는 뿔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어느 순간 사자가 나타나자 누가 경계경보를 발령 내렸는지 도망을 가고, 도망을 못간 얼룩말들은 새끼를 가운데 놓고 동그랗게 에워쌉니다. 조용히 기다리니까 사자가 천천히 뛰어오면서 그 중의 한 마리를 보고 올라타기 위해 달려와서 점프를 하려고 하는 때,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모르는데 뒷발로 흙과 돌멩이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돌멩이 하나가 얼룩말 뒷발에 맞고 직통으로 날아갔는데 사자의 왼쪽 눈을 정통으로 맞히고 사자는 팍하고 고꾸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자가 그렇게 대단한 짐승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피를 흘리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은 얼룩말 조차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을 보십시오. 양은 뒤뚱거리면서 빨리 뛰지도 못합니다. 이빨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풀을 씹기에 적합하게 넓적한 이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뿔은 있는데 마치 만두처럼 말려서 두 개가 디자인으로 붙어있는 것이지 적군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인간, 특별히 자기가 택하고 언약을 맺은 자기의 백성들을 좀 폼나는 짐승에 비유하시지 후지기 이를 데 없는 양에게 비유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 인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나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단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양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어린 양이라고 부를 때는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의존성을 가리킵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서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장소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수백만 명이 모이는 대회나 세계 유명한 사람이 모이는 집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장소는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크게 높임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지 않다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설교가 준비되고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양이 예비되었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예배자가 없다면 거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특징은 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몸부림, 주님께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절실한 사모함, 하나님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하나만 이야기 해 볼까요? 개봉관 극장 갈 때에는 15분 전에 도착합니다. 팝콘도 사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앞에 들어간 사람이 나오길 기다립니다. 예배당에는 15분 전에 나와서 그런 식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10분전에 오기 시작하고 5분전이 러시아워입니다. 땡치면 우르르 밀려 들어 옵니다. 찬송부를 때는 들어가도 되고 기도시간에는 못 들어가는데 그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설교가 시작될 때 쯤 될 때 거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목사님이 설교할 때 그러셨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와서 주일날 두 시간 예배드리면 신자인줄 아십니까?” 그 때는 예배시간이 두 시간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고등학교 때쯤 되니까 목사님이 “한 시간 사십 분 예배드리면 교인인줄 아십니까?” 지금은 한 시간에 예배를 끝내려고 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는 650명 정도 모이는 크기의 교회였는데 항상 65분 만에 끝납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혹시 못 끝낼 것 같으면 목사님이 “찬송가 544장 1절만 부르시고 마치겠습니다.”라고 해서라도 65분에 마칩니다. 65분에 예배 순서지를 보면 23가지입니다. 얼마나 복잡한 순서가 많은지 모릅니다. 줄어드는 것은 설교시간입니다. 설교시간이 25분 정도로 줄어듭니다.
설교시간에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설교를 듣는지를 2층에서 내려다 보면 가관입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머리의 스위치부터 끕니다. 조용히 앉아서 목사님 쳐다보면서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이고, 시선은 목사님을 보지만 딴 생각하는 사람, 주보는 뭐하러 읽는지 모릅니다. 주보를 펼쳐놓고 설교시간에 주보를 읽습니다. 거기에는 시도 나오고 수필도 나오고 읽을 것이 꽤 많습니다. 맨 뒤에 넘겨서 오늘의 헌금을 봅니다. 헌금 보고 헌금 액수 바로 위에 헌금 낸 사람 명단이 가로 세로로 나옵니다. 헌금 금액 나누기 명수도 해보고, 틀린 글자는 빨간색으로 고쳐도 보고 옆 사람과 필담을 나눕니다.
그러다가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인데 하나님보다 높은 분에게 연락이 왔는지 전화를 들고 밖으로 뛰는 사람도 있고, 요즘은 거기서 펴놓고 메시지를 보내고 인터넷을 보고 설교시간에 록펠러가 말하기를 그러면 록펠러가 진짜 그 얘기를 했는지 찾아봅니다. “틀렸어. 록펠러가 아니고 딴 사람이야.” 예배가 끝났으면 주님을 만났으면 만난 감격 때문에 한참 앉아서 기도를 할 것이고 못 만났으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예배를 드렸길래 주님이 내게 은혜를 안 주셨을까 생각하고 회개를 해야할 것 아닙니까?
올 때는 천천히 교회에 온 사람들이 갈 때는 왜 그렇게 빨리 나가려고 합니까? 한꺼번에 확 밀려서 쏟아져 나갑니다. 멀리서 내다보면 교회의 시커먼 문이 열리고 계단 아래로 형형색깔의 구슬같은 사람들이 계단 아래로 통통거리며 쏟아져 내려옵니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이 특별히 급한 일이 있나 했더니 식당에 밥 먹으러 줄서러 가지 않으면, 주차장으로 뛰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갈아 입고 벌러덩 소파에 누워서 리모콘으로 TV를 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걸어 나오면서 눈물을 닦아도 이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자기가 변화되지 않는데 무슨 세상이 변화되겠습니까?
실제로 어느 한 기관에서 조사를 했는데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 백 명을 무작위로 추출해서 “지금 방금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네” “오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까?” 그랬더니 95%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95%중에 절반은 방금한 설교가 신약인지 구약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거기 앉아서 예배드리시지요? 대게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흠뻑 흘리며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빌어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기억은 있습니까?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그 분의 돌보심과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보다 뛰어난 가치가 있고 이 세상에 자기보다 힘센 수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고귀함을 간직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하나님을 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이 그렇게 모든 만물과 온 땅 위에 아주 뛰어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개가 번뇌한다는 얘길 들어보았습니까? 돼지가 인생을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고양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러한 깊은 불행과 상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지성과 의지와 정신의 세계를 가진 인간만이 떨어질 수 있는 불행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모든 동물 위에 탁월한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육체가 이 땅의 자원을 사용해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듯이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와 생명을 공급 받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영혼이 육체를 통활하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끔 만드는 그런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확실한 것을 말씀드릴 수 있는데 다음 세대, 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지나 갈수록 예수님의 사람들 수는 줄어들 것입니다. 아마 교회 수도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기독교에 눈길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사라져간다 할지라도 다음 세대는 기독교를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확고한 진리를 신봉해야 하고, 자기가 무엇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가 자신의 인생에 의미하고 이 세계에 대하여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그는 기독교 사상의 학교, 진리의 학원에 들어온 학생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는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워 가야할 사람입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없는 확고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가참되고 행복한 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저절로 살아지는 게 아닙니다. 확고한 사상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됩니다. 말씀을 깨닫고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삶을 윤리적이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은 남이 사는 것을 보면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지만 자기가 사는 것은 항상 희생을 요구합니다.
올바르게만 가르치면 올바른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려면 이 두 개를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은혜가 하나님의 교회속에 넘쳐서 확고한 사상의 진리와 확고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며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행복하게 살아갈 때 다음 세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으려 하겠지만 쓰러질 듯 죽을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할 때 그들은 어둠속에서라도 진리를 외치는 그 어둠속에는 항상 메마른 손으로 진리를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붙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 시대 교회의 가치입니다. 지금도 역시 교회는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교회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그 교회는, 그 신자는,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결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독립하려는 정신, 이것이 죄의 원인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불러주시는 경륜과는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라고 할 때 목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을 양처럼 생각하고 인도해 오신 일생을 돌아보니까 자기가 양을 인도하는 것 같은 방식입니다. 인격적인 방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말이나 짐승들은 카우보이들이 총을 쏘거나 채찍을 쓰면서 몰아갑니다. 흩어져있는 수많은 말들을 카우보이들이 채찍과 총을 가지고 넓은 원을 그리면서 때로는 채찍을 쓰고 위협하면서 말들을 한쪽으로 몰아갑니다. 말들을 겁을 주면 말들이 무서워서 한 쪽으로 달리면서 마사로 들어가고 문을 닫음으로 목동의 하루가 끝이 납니다.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눈이 어두워 잘 보지도 못합니다. 일상적으로 양이 이동할 때에는 뒤에서 목동이 위협하며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목동이 자기의 소리를 들려주며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떼들이 목동을 따라오며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일을 하실 때 우리가 인격적으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어서 지성으로 이것을 깨닫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로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단을 내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경배하지 않겠다는 성도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땅바닥에 피가 나도록 쳐박으시면서 나한테 절하라고 그러시지도 않고 무릎을 꿇어서 당신에게 경배 안 하겠다는 거만한 신자의 조인트를 군화발로 차듯이 무릎을 꿇려서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늘 하는 이야기인데 신앙 생활하기 싫으면 여러분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안 믿으려면 안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성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놔두시는데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말씀 듣기 싫어서 벌떡 일어서 나가면 나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힘주지 않아도 여러분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든 것은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까지나 노예적인 신앙이어야 되겠습니까? 왜 주일에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예배 끝나고 가기 위해서 예배당에 온다”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신앙생활입니까?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주일날은 무엇하는 날 입니까?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디를 와야 합니까?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놀러 가면? 1번 큰 일 난다. 2번 아무 일도 없다. 몇 번 입니까? 1번이 답이라면 말이 안 되는게. 지난주에 결석한 교인들 있지요? 오늘부터 차례로 돌아가시겠네요. 목사님, 아무래도 괜찮다 대답한 사람들 눈 여겨 보십시오. 저런 사람 교회 일꾼 시키면 큰일 납니다. 주일날 교회 안 와도 아무 일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소득의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확신이 없으십니까?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한달치 떼어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1번 큰일 난다. 2번 아무 일 없다. 1번이라고 하면 아직도 십일조 생활 안 하는 사람들은 살아계신걸 보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괜찮다고 하면 그것도 안 됩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시고 우리가 무엇을 섬기는지 의무에 대한 우리의 명료한 인식 속에서 자신의 인격적인 책임성을 가지고 모든 신앙의 행위들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 안내를 서고 있는데 엠블런스가 왔습니다. 문이 덜컥 열리더니 교인 한 사람이 내리는데 부축해 주는 사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미이라처럼 완전히 붕대를 감고 목발을 든 사람이 온 것입니다. 예배 위원이 깜짝 놀라서 “이 몸으로 어떻게 교회에 오셨습니까? 누구세요?” 눈만 보이는데 “집사님 저 박자매입니다.” “그래 박자매구나. 이게 웬일이냐?” “조금 있다 간증시간에 얘기할게요.”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간증하는 시간 미이라처럼 생긴 자매가 올라가서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가까이 사는 자매였는데 (지금부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항상 직장 다니고 너무 바쁘니까 일요일은 자는 날입니다. 일요일에 잠을 자는데 자매에게는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입니다. 푹 자는데 예배당 가야 하니까 항상 10시40분에 자명종을 맞추어 놓고 일어나 10분 동안 세수하고 머리 가리고 집에서 입는 옷 입고 성경책 들고 교회에 갑니다. 그 날도 자명종을 눌렀다, 눌렀다 하면서 간신히 45분에 일어나 세수하고 5분 남아서 막 뛰는데 전화가 온 것입니다. “잘 있었어? 나 아무개야”.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반갑다.” “너 뭐해? 빨리 와.”“어딜 와?” “우리 오늘 지난 번에 만났을 때 관악산에 등산가기로 했잖아. 다들 모여서 너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여기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으니까 빨리 나와” “안돼, 나 교회 가야돼” “새털같이 많은 날 왜 오늘 교회에 가니? 다른 날 가면 되지.”“오늘 주일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야돼” “너 오후 예배도 드리니?” “아니, 난 오후 예배는 쉬고 오전 예배만 드려”“그럼 잘 됐네. 오전에 우리랑 놀고 오후에 가면 되잖아.” “안돼. 그래도 대예배 가야지.” “너희 하나님은 대예배에만 오고 오후 예배에는 안 오냐?” “그건 아니지만” “됐어, 빨리 나와. 너 안 나오면 상대도 안 해” 하고 끊는 것입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5분입니다. 그 사이에서 성경책을 들고 갈등을 느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정신을 차리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루한 설교와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등산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오후 예배를 드려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배낭 맨 밑에 조그만 성경을 집어 넣고 거기에 몇 가지 싸서 갔습니다.
가을햇빛이 쏟아지는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니 힘은 들지만 오랜만에 오니 너무 좋았습니다. ‘특별은총보다는 일반은총이 훨씬 좋구나’ 중턱쯤 올라가니까 친구들이 “여기서 도시락 먹자.” 해서 가보니 평평한 잔디밭이 있습니다. 거기 앉아서 “물 한 잔 마시자.” 하니 “물 없어.” “음료수라도 줘. 음료수는 있지?” 가방에서 꺼내는데 맥주였습니다. “아니 이거 말고. 나는 그냥 음료수 줘.” “이게 음료수야.” “아니 그건 술이잖아. 나는 음료수 마실래.” 친구 아홉 명이 다수결로 투표를 했는데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할 수 없이 먹었는데 정말 세월은 흘러도 입맛은 변하지 않아서 참 맛있는데 너무 감미롭게 넘어가며 목구멍이 말하기를 이 좋은 것을 왜 이제서야 그러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수다 떨고 도시락을 먹고 재밌게 놀다보니 한 통, 두 통 먹었는데 자기 옆에 아홉 통이 쌓여 있었습니다. 내려 올 때 쯤 되니 육체와 정신 모두 거의 환희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못할 말도 하고 섭섭했던 이야기도 하며 어깨동무를 하며 내려오다가 해는 뉘엿뉘엿 지고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가파른 계단이 있었는데 누가 과일을 먹으며 내려 가다가 바나나 껍질을 떨어뜨리고 간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려오다가 “조심해. 너 취한 것 같아.” 하니 “취하긴 내가”하면서 발을 딛는 순간 온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어렴풋이 의식이 돌아와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어떻게 이렇게 부러졌을까? 골고루도 부러졌네. 일부러 부러뜨리려고 해도 안되겠다.” 옆에서 “아작이 났구만. 이 여자 육백 만 불의 여자 되는 거 아니야?” 옆에서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수술과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 아무리 친한 친구가 연락이 와도 주일을 지키세요“ 그랬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아멘, 아멘“했더랍니다.
저쪽에는 집사 한 사람이 안대를 들고 왔습니다. ”왜 그랬나?“ 하니 주일날 낚시를 간 것입니다. 고기를 낚으려고 확 던졌는데 낚시 바늘이 눈을 확 찌른 것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는데 왜 비명을 지릅니까? 옆에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쿡쿡 찌르며 하는 소리가 ”여보 간증 들었지? 당신 내 말 듣기를 얼마나 잘했어. 어제 내가 뭐랬어. 자더라도 교회 가서 자야 된다고 그랬쟎아.“
실제로 신앙이 없는 교인들에게 왜 주일날 교회에 오냐고 물었더니 찜찜해서 나온다고 합니다. 왠지 주일을 안 지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생활을 원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은 말이 통하는 것입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어오고 우리말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다다르는 은혜의 수단이 있을 때에 인격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신다’고 말했습니다. 뭔가 지성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시나,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당신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듣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분은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 나 같이 비천한 인간은 그 분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쁨으로 자신을 드려 순종하는 것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여기 여성분들 많이 와 계신데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다 주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인격적으로 자기를 대해 주지 않는다면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습니까? “뭐해? 빨리 빨리해.” 욕이나 하고 구타나 하고 그러면 좋겠습니까? 비인격적이잖아요. 좋은 고기 먹을 거 그냥 배추를 먹으며 살아도 존중 받고 존경 받아야 부부생활이고 가정생활이지 그렇게 폭력적으로 비인격적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에게 인격적인 신앙생활 하기를 원하십니다. 낚시 좋아하는 박집사는 눈 찢어질까봐 주일날 교회에 나오고, 등산가기 좋아하는 최집사는 다리 부러질까봐 무서워서 예배당에 나오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커다란 위기를 만나고 하나님 앞에 징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간증하는데 사실은 그런 일을 아무것도 안 겪으면서도 깨달으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대게 그렇게 극적인 환란과 시련을 통해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깨달았다는 내용들이 아주 특별한 내용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맨날 얘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집 다 날리고 가족들이 죽음의 벼랑 끝에 가고서 깨달았다는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위대함이 그 속에 있는 것처럼 영웅전 읽듯이 그런 사람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정상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과외비를 지불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제일 평범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시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정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구나.’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하고 마음 깊이 주님께 순종해야겠다고 결단하고 실지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과외비를 저축한 것입니다. 누가 더 복된 사람입니까? 깨지고 부서지고 집안이 난리가 나고 집 안의 식구 몇 사람 죽고 난리를 친 다음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는데 오늘 앞자리에 앉아서 이름 모를 부흥회 강사가 와서 설교하는 시간에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았구나,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깊이 깨달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사랑에 대한 최고의 나의 반응은 하나님 섬기며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예배당을 떠나는 사람이 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간증을 우리는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회사도 망했습니다. 집안이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작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일곱 바퀴 반을 굴렀는데 다리만 부러지고 멀쩡했습니다. 드라마가 되잖아요 거기에는 적당히 과장도 들어갑니다.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생활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느리라.’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마음이 상한 자라고 하는 것은 ‘미슈바르’ 라고 하는데 딱 쪼개진 것 입니다. 도자기 같은 것이 떨어져 딱 쪼개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통회하는 자는 ‘레브닥게’라고 얘기하는데 닭 같은 것을 뼈째 망치로 두들겨 부시면 뼈가 으스러지면서 짖이겨지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으깨어진 마음, 중심이 으깨어진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마음이 자기중심성과 완고함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귀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시면 그 돈 때문에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고, 가난해지면 그 근심 때문에 하나님께로 못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어떤 ? (1:19:15) 통해서든지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려고 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지성을 명료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음성 앞에서 진실하게 자기를 꺾고 승복하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칼이나 창, 채찍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맨 처음 여러분이 예수를 믿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결코 예수 믿는 사람 될 리가 없었습니다. 혼자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같은 사람들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 분의 십자가의 고난 안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가를 보았고 그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면서 주님 십자가 앞에서 세상이 어떤 것인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그리스도를 붙들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로드쉽 앞에서 두 가지를 약속하는 것인데 무제한의 순종과 무한대의 헌신입니다. 무제한의 순종과과 무한대의 헌신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심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로드쉽 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한 참회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사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신앙이 진정으로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되길 원한다면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교부 중 한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길 ‘나는 참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와 가까운 존재인지 자신은 참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 전체가 참회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이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안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이 사실은 내 인생 어디에든 계셔서 내 인생을 움직이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소위 얘기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도 나오고 ‘솔라그라티아’ 하나님의 은혜사상도 나옵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때리는 채찍 없어도, 얻어 맞는 몽둥이 없어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채찍으로 때리시거나 몽둥이로 패지 않으셔도 나는 너무 그 일을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포기해 본 적 있습니까? 나는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에 티끌만한 부분도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 앞에서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티끌만큼도 자기가 그것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순간 거기에서 정욕과 더러운 인간의 욕망이 둥지를 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시인의 목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 시인을 다루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군대를 다루듯이 우리를 획일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당신이 아시는 그 지식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대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교인은 혼을 내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을 내면 불면증에 걸리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 교인은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알아 듣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논리를 초월해서 따뜻하게 품어야지만 변화되는 교인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누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 차이점을 알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생활 할 때에 거기 공부 잘하는 청년들이 참 많았습니다. 중등부를 하면서 그 선생님을 많이 데리고 일했는데 그 중에 한 형제가 있는데 공부를 아주 잘 했습니다. 지금 서울대 교수가 되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가 끝났는데 어느 집사님과 깊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끝난 다음에 “선생 왜 그래? “그 집사님이 무슨 긴한 얘기를 해?” “에이, 전도사님, 뭐긴 뭐겠어요. 아들이 공부 안하니까 공부 못해서 속상해서 그러죠.”“그래?” 갑자기 “근데 전도사님” 얼굴도 얍상하고 귀여운 소년티가 흐르는 청년이었습니다. “전도사님 궁금한게 있습니다.”“뭐가?” “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할까요?” “왜?” “이해가 안가요” 이 형제는 초등학교때 부터 시작해서 그 때 서울대 박사과정에 다녔는데 운전면허를 포함해서 모든 시험을 한 번에 붙지 않은 시험이 없다고 합니다.
남들은 군대 가느라고 고생을 하는데 시험을 봐서 6개월 만에 중위를 달고 제대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전도사님,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어요?” 난 속으로 ‘난 이해가 잘 되는데’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지요? 저는 고 3때도 8시간씩 잤구요. 학원은 근처도 안 갔어요. 그래도 서울대 들어갔거든요. 근데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 있냐구요?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물어보면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일부러 못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공부를 못 할 수 있어요?” 속으로 ‘아유 잘났다.’
두 달 쯤 흘렀는데 청년의 얼굴이 우울해졌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왜 그래?” “전도사님, 저는 요새 살 의욕이 없어요” “왜?” “아주 기가 막혀요” “왜?” 공부만 하니까 체력이 다운이 되어 테니스를 배우러 갔다는 것입니다. 코치가 공을 던져주면서 먼저 폼만 가르치더랍니다. 그 다음엔 공을 던져 주면서 하더랍니다. 일주일쯤 지났는데 코치가 성질을 내며 오더랍니다. 어쩜 그렇게 못하냐고, 이게 안되냐고, 내가 7년 동안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은 정말 못 봤다면서 교본에 다 나오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주는데. 그 때 생전 처음으로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처음으로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꼭 맞출 것 같았는데 헛방을 치듯이 공부한 애들도 안 될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더랍니다. “교회에서 못 받은 은혜 테니스장에서 받았구나.”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획일적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추신 사람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면서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어디서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받아보겠습니까?
여러분 학교 다니십니까? 공부 못하는 사람 학교에서 대접 못 받습니다. 직장 다니십니까? 유능한 사람은 상사가 밥이라도 한 번 먹는데 처지고 능력없는 사람은 거기에 끼지도 못합니다. 친구들 승진할 때 쳐다만 보아야 합니다. 애들이 학교에 모이니까 “너 어느 아파트에 사니?” 물어보더랍니다. “나 어느 아파트” 옆에 있는 아이들이 “거기 24평이야 놀지마.” 또 “너 어느 아파트 사니?” 어디어디 하니까 “놀지마. 임대 아파트야.” 세상은 그렇습니다. 주님은 안 그러십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약점을 알면서 우리 인생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분을 떠나서 여러분이 어디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양에 대한 목자의 사랑은 아주 유별납니다. 그래서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 자신이 목숨을 걸고 양떼를 지켰고, 양떼를 맹수가 물어갈 때에는 입을 벌리고 양떼를 꺼내올 정도로 용맹과 사랑을 함께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랑이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목자로서의 성품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저녁 때 양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 헤아려 보니 한 마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목자도 아는 양이었습니다. 군대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항상 사고치는 사람이 사고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호주에 갔을 때 양 한 마리가 얼마냐고 물으니 그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16만원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저녁때였을 텐데 가다가 강도를 만난다든지 안 만나도 혹시 돌부리라도 걸려 발목이라도 부러지는 날에는 치료비가 양 값보다 더 들어갈 텐데 목자는 양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화) 방배동에 살았었는데 어느 날 골목에 내려갔더니 예쁜 자매 둘이서 풀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추운 겨울에 무엇을 붙입니다. 신기해서 가보니 그런 거 붙이러 다닐 애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쁘고 부티나 보이는 소녀 둘입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주먹 만한 강아지 사진 찍어 놓고 ‘칠십 만원을 사례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제가 교수로 있었는데 그 때 제 월급이 이백삼십만 원 쯤 될 때였으니 칠십만 원은 굉장히 큰 돈 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사례비를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를 사표내고 교회에 들어오니 월급이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습니다. 어쨌든 칠십 만원은 굉장히 큰 돈 이었습니다. 사례금이 백만 원이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 개 얼마 짜리 일까요? 최소한 이백 만은 되야지 칠십 만원 현상금 주고도 백 삼심 만원은 남을 거 아닙니까? 값과 상관이 없습니다. 똥개 잡종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계속 옆에 끼고 자고 뽀뽀하고 침대에서 뒹굴고 놀아서 어느 날 없어지니 너무 슬픈 것입니다. 보신탕집에 끌려 가서 어느 신사 뱃속에 들어 갔나, 큰 개한테 물렸나 ,길 건너다 못된 차에 치여 죽었나 별 생각을 다하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해서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으러 간 것은 양 한 마리 얼마인가 그 계산이 아니라 가엾은 것이 어디서 고통을 받을 지도 모른다고 찾은 것입니다. 찾아서 어깨에 메고 왔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어깨가 복수로 나옵니다. 편안하라고 메고 온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어이, 동네 사람들” “뭔데?” “밥 먹었어?” “아니” “조금있다 우리 집에 와. 잔치를 할거야.”“무슨 잔치?”“오늘 기쁜 날이야. 잃었던 양을 찾았어. 내가 한 상 차려 놓을 테니 먹자. 설마 그 양을 바비큐 해주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양 한 마리에 몇 푼 된다고 사랑은 그걸 계산 하는게 아닙니다. 사랑은 존재 그 자체를 필요로 하고 그가 나에게 해주는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우리가 누구길래 하나님은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커다란 손해나 되십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커다란 피해나 되는 것처럼 우리를 위협하시며 우리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이 지점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손해를 보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커다란 결핍이 된다면 그 분이 어떻게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되시는 그 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사랑하면 상을 주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때로는 징벌하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야말로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만들려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될 때부터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인간다울 수 있고 그렇게 참으로 인간다울 수 있을 때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설득해서 하나님께 나오도록, 당신을 사랑하도록, 멀리 떠나간 그 마음의 방황하는 길에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교회에 있다고 여러분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아니고 마음이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니라는 것, 여러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황혼에 아이들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사는 부부처럼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무얼 가져다 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도 행복하지 않고 본인 자신은 더더욱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목회자는 그야말로 괴로움입니다. 아무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는 비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렵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서 시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했다면 신뢰합니다. 다윗이 한 이 이야기는 신뢰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위대한 군인이었고, 훌륭한 시인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 사람처럼 인생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여러분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상처투성이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에게 왕따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엄마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고 아버지 얘기가 나오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 부으러 왔을 때 아들을 하나씩 다 보내 주었는데 사무엘이 보니 하나님이 기름 부으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에게 아들이 이 아이들 밖에 없냐?” 한참 생각하다 ”하나가 또 있긴 있네요.“ 겨우 생각난게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형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형들은 다윗을 형제로 여겨주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윗이 달려갔습니다. 형들이 잘 있는지를 보러 갔습니다. 형들이 거기에서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추호도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때는 자기를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세계에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뛰었을 때 아내는 책망했습니다.
다윗은 아내의 아버지 사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어찌하든지 마지막 순간 까지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으로 대우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을 죽이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도 집요하게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는 수없이 피난길을 다니며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이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칼을 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자기가 낳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어느 흉악한 놈이 와서 강간을 했는데 그 강간범이 자기가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마침내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은 그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압살로마, 압살로마 ,내 아들 압살로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죽음보다 더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날 동안 치열한 하나님의 형벌 아래서 눈물로 침상을 뛰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영혼의 깊은 위기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미치광이가 된 사울을 통해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는 더욱 무서웠습니다.
이제껏 일어난 사건 중에 단 한 가지라도 여러분 인생에 일어났다면 아마 여러분은 인생을 접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험한 인생길을 걸어 왔고 ,걸어가고 있었던 다윗이 "I shall not be in want.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결핍이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자원을 하나님이 많이 주셨기 때문에 결핍이 해소되고 가난이 물러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한 비밀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부어주신 신령한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우리에게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결핍과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시련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힘들이 거기에서 솟아나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 주면서 살 수 있는 사랑이 그 생명 안에서 나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거기에서 깊은 샘을 거쳐서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적셔서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광야를 지나면서 기쁨의 찬송을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시인에게 부어주셔서 인생의 비극의 골짜기에서 원수들에게 짓밟혀 무참하게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처의 사람을 모든 것을 이기며 구약의 최고의 영적인 인물이 되게 하셨고,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위대한 철학자요 신앙인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 어떤 분에게는 저의 설교가 인격적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부르사 신앙의 참된 본질로 돌아오길 원하시지만 우리가 끝까지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때려서라도 우리를 치셔서라도 우리의 영혼까지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선한 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선한 것이라면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거슬러 살 때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해 주는 훌륭한 웅변적인 표징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여러분들이 강요받는 신앙, 군대식으로 억압받는 신앙, 공포와 혹은 두려움 속에서 혹은 여태까지 해 온 종교의 관성으로 앞으로도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렵니까? 이름은 신앙생활이지만 종교습관일 뿐입니다.
아니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인격적으로 깊이 결단해서 이전의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종교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거룩한 믿음생활,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그 은혜 속에서 사시렵니까? 남이 결단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결단으로 여러분을 이끌 수 있을 뿐이지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 이 사경회가 끝나기 전 여러분이 벌판에서 주님 한 분을 대면하고 내려야할 결단인 것입니다. 목자는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