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집회 새벽예배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낰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요한 21:15~19 )
녹취자 : 이경순
요한복음 21장은 사실은 요한복음 전체로 보면 부록처럼 붙어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본문을 살펴보면 20장 마지막이 요한복음의 끝처럼 느껴지지 21장 마지막이 요한복음의 끝처럼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요한복음 21장은 오직 한사람을 위해서 씌여진 복음서로의 부록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서는 네복음서중에 맨 끝에 있기 때문에 이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인 동시에 복음서 전체의 부록이라고 여겨지는데 여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만약에 이 21장이 없었더라면 교회는 굉장히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까지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머리 제자인 것은 입증이 되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부인했던 그 사람이 바로 복음서 뒷장인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장은 사실은 복음서와 이후에 이어지는 신약의 역사서를 연결해주는 아주 중요한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저는 한 10여 년 전에 이 부분들을 살피면서 깊이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21장 이 자체가 놀라운 복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당신을 버린 그 베드로를 머리제자로 삼으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처럼 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영웅적인 전기를 좋아하는 우리인류의 심성에 비추어 본다면 복음서의 내용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야지만 감동되지 않겠어요. 열한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다 부인하고 도망을 갔는데 한 제자가 피투성이 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거의 죽을 고난을 당했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아서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거기 까지 따라가고 마지막에는 그 사람은 타락하고 실족했던 열한제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는 지도자로서 초대교회를 이끌어 가는 그런 광경 이였다면 우리에게 훨씬 더 감동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만약에 그런 식으로 스토리가 이어졌다면 사실 우리가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왜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오히려 쉽게 예수님을 두려움 속에서 배신하거나 실족해서 주님을 떠나갔다가는 다시 돌아오는 열한제자의 나머지 모습과 훨씬 더 닮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놀랍게 이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인 이 사람 베드로를 비롯해서 야고보와 요한 이런 사람들을 흠 없이 넘어지지 않은 사람들로서 무리를 이루어서 자기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던 이 사람들을 주님이 친히 회복시키셔서 그래서 예루살렘의 교회의 지도자로 삼고 또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사람이 리더십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 권위에 복종하면서 교회를 이끌어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 예수님을 만난 이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나타나셨고 뵈온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던것 같지는 않아요.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은 세상이 돌아간 것이라기보다는 칼빈이 판단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아직 미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기에 굳이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똑 같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소명될 때에 그날 밤에 실패를 생각나게 하는 똑같은 재연 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똑같이 나타나셔서 그렇게 고기를 잡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예수님은 이미 숯불을 피우고 떡과 고기를 굽고 계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 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기를 가져오게 해서 그래서 함께 식탁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탁을 나누는 것은 브라서 푸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고 예수님을 배반하지만 예수님 마음속에서는 한 번도 이들을 버리거나 저버리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식탁으로 불러 그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모두 먹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시는 호칭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이 이름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베드로라고 새롭게 이름을 지어 주시면서 버리기를 원하셨던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살아온 사람은 이제까지 충분히 족하다 이제 너는 반석과 같은 믿음의 사람 베드로 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오늘 왜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이미 잊혔던 이름, 세속에서 살던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 그의 이름을 호칭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고 시몬은 듣는다. 에서 온 말인데 이 이름은 사실 그 당시에 개똥이나 아니면 철수 영이처럼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으로 이 베드로를 불러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은 어떤 것이었는지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했던 이 사람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여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실패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베드로라고 부르시는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개 해 주신 것이지요.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가롯유다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가롯유다가 은30을 위해서 예수를 팔았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50보 100보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가롯유다에는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약에 예수님이 이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하고 과거로 물어봤더라면 이 사람이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지은 허물을 일일이 거론하는 대신 현재 가정법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물으실 때에 예수님이 불러주신 이름은 베드로가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뵈옵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진실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 허위 가식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단 하나인 마음으로 그분을 뵈올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맞아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어떠한 실패와 그리고 죄 가운데서도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요한의 아들 시몬을 불러 주셨습니다. 요한 칼빈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 신학공부를 하면서 맨 처음에 왜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세상에 부귀와 명예 그리고 이 세상의 평판을 위해서 신학을 공부 하고픈 사람이 있다면 처음부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 모두 그런 것들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은혜의 경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불러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지를 아는 놀라운 지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나의 행복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교만한 인생관을 버리고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주님사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 앞에 늘 마음속에 나 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피빛사랑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요 이제 나의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주님을 위한 덤으로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에 주님의 그 큰 용서하시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안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도 함께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영혼들의 주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함을 보면서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쳐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필연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께서 우리보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를 처벌하시겠다는 위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거 같은 위협을 느꼈고 이 세상에 누구에게도 빚진 적이 없는데 우리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부채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그래서 그 맨 처음은 주님을 떠났던 추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갔고 나만 우리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그렇게 우리 주님사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이에요 맨 처음 그리스도 십자가앞에서 신학에 문을 두드렸던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주님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6년 정도 세월이 흐르고 신학의 문을 두드렸을 때 저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그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사실 결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그냥 신학을 공부해서 그저 시골에라도 가서 영혼들을 섬기다가 조용히 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이런 찬송만 불렀습니다.
(찬양)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그렇게 노래했어요. 우리 신학교에 다닐 때 매일 채플시간마다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을 들고 가오리니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드리리다. 노래를 했습니다. 저는 35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님을 믿어왔고 신학교의 선생노릇을 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교회를 개척을 해서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공부도 할 만큼 혼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난 도달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모든 지식과 영혼을 섬기는 사역 혹은 목회에 있어서 소위 성공이라는 자체도 하나에 걸려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첫째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니라. 가 있습니다. 그 강령이란 말이 희랍어로 크레마티 인데 벽에 박힌 못을 가리킵니다. 그 못에 옷을 걸어두는 것처럼 선지자와 율법사와 모든 성경의 계명들이 그 못에 걸려있어야만 안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목회사역의 헌신 신학의 공부 그 담에 목회에 있어서 어떤 성취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사역을 하는 모든 사역자들의 첫 번째 조건이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왜 나를 버렸니 왜 세 번이나 부인했니. 왜 교만해 졌니 네가 나를 버릴 거라고 말할 때 너는 큰소리쳤지 이렇게 예수님이 여러 말씀하지 않고 오직 한 말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옛날에 나를 사랑했니. 앞으로 날 사랑할래.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대학 나왔니 신학공부 많이 했니 성경 몇 번이나 읽었니. 목회자의 윤리를 터득했니. 세계정세에 대해서 알고 있니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요한의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요한의 아들 시몬은 비록 얼마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대답은 무엇입니까 잠시 은혜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탁월하게 깨달았던 많은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통된 특징은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가장 찬란하게 우리의 영혼 속에 퍼져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가정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이 없이 오직 복음과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고 수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그러한 주님 사랑에 백발의 노사도가 되어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어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엔드류 목사님은 자기의 겸손이라는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밖에는 없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사람들의 부류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용서를 받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의 그 큰 용서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겠음 만들어주신 그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일평생 이렇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자기를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군으로 삼아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며 자기가 죄인 중에 죄인이었던 사실을 일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다는 점에서는 바울과 일치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핍박이 가득 밀려오는 마지막 때에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서신서를 쓸 때에 그는 한번 실패 했다가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했습니다. 소망가운데 흔들리지 말고 기꺼이 고난을 감당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합니다. 모두 바람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주님을 깊이 만난 후에 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루어주실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하나님이 그러한 놀라운 비전들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긴 세월을 살아오고 교회를 해오는 동안 주님이 은혜가 감사했지만 매일 매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아주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고 주님의 역사 속에 펼치시는 위대한 경륜 속에 흩어지는 작은 모래알 같은 존재들이기 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그 착한 인격이 마지막에 주님을 섬기고 남는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지는 해 비낀 저녁에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의 섬김도 신뢰하지 않고 그것도 결과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더 간절히 사모하고 되는 것은 마지막에 나의 인생의 황혼에 속죄가 무엇일까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 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고백을 우리 주님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무슨 공부를 하던지 간에 공부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공부와 섬김을 통해서 마지막에 돌아가고자 했던 그 종착점인 지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은 사라져도 마지막에 주님을 향한 인격이 우리의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새벽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정말 이 세상에서 어떤 한 사람이 사역을 영광스럽게 복음적인 승리로 이끌면서 살 때에 그 사람의 영광과 사역에 실패할 때에 그 사람의 찌그러진 그 모습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고 한사람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아요. 그러나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판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실은 목사안수도 늦게 받고 교회도 늦게 개척했습니다. 39에 교회를 개척을 했고 위임목사가 된 것은 결국 장로들이 세워지고 나서 교회를 개척하고 한 10년쯤 지나고 난 다음에 위임목사가 되었고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이 그 예배에 와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그 때 참 제 마음속에서 위임목사가 되면서 내가 이제 이 교회에 종신을 해야 되는 구나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참 많은 은혜를 주셨어요. 그중에 하나가 정말 마지막 주님이 나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때 우리교회를 수만 명 모이는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주님께 부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내가 공부를 워낙 좋아하니까 내가 책한 권 쓰고 논문을 발표하면 교회와 학계가 충격을 받는 그런 학문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는 고백도 없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면서 마지막에 깊이 밀려오는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선배들로부터 우리의 역사의 의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 후배들에게 이 역사의 의자를 물려주고 떠나야 하는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도 천재성도 목회에 의해서 휘황한 업적도 모두 잊히고 마지막에 우리는 주님 한 분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언젠가는 내가 개척한 이 교회에서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 나에게 두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들어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고별설교를 하는 그날 분명히 성경을 펼 텐데 오랫동안 나의 목양을 받았던 사람은 그렇다면 31년 동안을 설교를 들었는데 그때 마지막 설교에도 31년 동안 설교를 들은 성도가 본문을 읽었는데 김남준 목사가 무슨내용으로 설교할지를 짐작할 수 없는 말씀의 깊이를 주시옵소서. 마지막 한 가지는 그날 마지막 설교하고 성도들과 눈물로 작별하는 그날이 살아온 날 중에서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 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는 가장 적게 주님을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져도 마지막 이 힘든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날 중에서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 되도록 그래서 내 인생에서 주님이 가장 친근하게 느껴지는 날이 되도록 그래서 죽음과 함께 미끄러지듯이 그분의 사랑 속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맨 처음 신학의 문을 두드릴 때 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계속 그것이 불타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거칠고 방탕한 삶을 우리 하나님 앞에 회개 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회개의 눈물로 성경이 써질 때 신학은 절대로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지식이 은혜에 잠길 때 우리의 그 지식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며 종노릇하는 사람으로 우리들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