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백지영, 김명진
시편 23편은 150편의 시 중에서 가장 애송되고 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잘 들었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도 그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는 우리의 교만이기 쉽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고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누구도 쉽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시가 다윗이 목동 시절에 아주 목가적인 상황 속에서 쓰인 것 같지만 그러나 많은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은 이 시는 다윗의 젊은 시절의 시가 아니라 노년의 시일 것이라고 하는 데 모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풍경은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뒤편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혹은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사건 같은 것들은 모두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은 사람의 달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여섯 절로 되어 있고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인데, 시편23편 전체의 총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인지를, 2절 3절 4절 5절에서 그 이유를,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토막이 마지막 6절인데, 이 세 번째 토막은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모신 사람의 현재의 결단과 미래의 삶의 비전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시간씩 열여덟 시간을 해야지 이것을 완전히 설교할 수 있는데 여러분이 저에게 삼일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압축해서 오늘은 1절, 내일은 새벽에 2절, 저녁때 3절, 그리고 모래 새벽에 4절 그리고 마지막 저녁 때 5절, 6절은 여러분이 삼일밖에 안주었기 때문에 못합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이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부르시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불렀을까? 하고 묻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구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함이 성경에 여러 개가 등장을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함 세 가지를 들라면 바로 ‘여호와’ 혹은 ‘야웨’라고 하는 단어와 ‘하나님’ 혹은 ‘엘로 힘’ 이라는 단어, 그리고 ‘주’ 혹은 ‘아도나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 중에서 ‘야웨’와 ‘엘로 힘’은 구별된 방식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 이 ‘야웨’가 도대체 정확하게 어떻게 읽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함인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로 힘’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전능함, 위대한 능력을 염두에 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성함으로서 ‘엘로 힘’, ‘하나님’이라고 하는 성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야웨’라고 하는 이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된 언약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그래서 이 ‘엘로 힘’이라는 단어와 대조되는 ‘야웨’는 스스로 계신 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관계 속에 계신 분으로서의 ‘야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내가 너희들에게 비로소 야웨라는 이름을 계시한다고 출애굽기 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이름이 많아도 호적을 보면 하나의 이름이 진짜 이름이듯이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성함이 ‘야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시인 다윗이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냥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위대한 하나님과 자신이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상정하면서 그 언약관계 아래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언약의 아주 위대한 장으로 우리를 시편 23편 1절이 데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자로서 23편 1절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께 부름 받은 언약의 백성으로서 시편 23편 1절을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오늘날은 여호와 하나님을 뒷집 아저씨 이름정도로 생각을 하고 때로는 농담도 하고 그리고 장난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모두 다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지극히 거룩한 이름이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밀고 당기면서 기도하고 응답해 주시고 주고 안 주시고 하는 그런 사이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을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우주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보통 통설이 150억 광년쯤 된다고 보고 많이 보는 과학자는 900억 광년이 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오는 이론들을 보면 가봐야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매초마다 우주가 폭발하면서 2000킬로씩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팽창할 때 그러면 그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공간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부터 공간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우주는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거리로 150억 광년이라는 것이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느 학생이 과학시간에 공부를 하는데 선생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커요?” “그것을 알면 여기서 내가 널 가르치고 있겠니? 그렇지만 얘기를 해 주지 너희 집이 어디냐?” “서울에 목동 아파트 단지입니다.” “온 세계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다고 치자. 그런데 너희 집의 화장실의 빨간 전구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여덟 개의 날파리가 돌아가고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칼 세이건이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과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만든 ‘코스모스’라고 하는 우주 다큐멘터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추천할 정도로 아주 유명한 다큐멘터리이고, 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을 2000년대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다시 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 속에서 칼 세이건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칼 세이건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여기서부터는 제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 지구는 우리 은하계라고 하는 별 집단 속에 하나 있습니다. 그 별은 집단이 약 2000억 개 정도 되는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행성이 아니라 항성입니다. 행성은 지구 같은 것이고 항성은 태양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2000억 개 정도 있는 별들의 집단이 우리 은하계이고, 바람개비처럼 타원형으로 돌고 있는 것 같은 우주 속에 좌측 하단으로 중심부에서 2만 6천 광년정도 떨어진 곳에 지구가 위치합니다. 옆에서 보면 중심이 볼록 튀어나오고 양쪽이 접시처럼 벌어지는데 이 중심 팽대부 말고 옆에 있는 것들이 900광년 정도 되는 거리이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거리는 약 20만광 년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별들의 집단입니다. 태양 하나가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거느리고 있고 명왕성은 잘렸지만 그 별들을 다시 돌고 있는 것들이 있고 그 돌고 있는 별들을 다시 돌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구를 돌고 있는 달, 목성을 돌고 있는 이오라는 작은 위성, 이런 것들을 모두 합치면 태양 하나가 약 260개의 위성을 거느리고 있고 이렇게 계산을 하면, 칼 세이건에 의하면 우리 은하계 안에는 약 4조개의 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 전체는 이런 4조계의 별들이 있는 이 은하는 그리 큰 은하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약 1천억 개쯤 있는 곳이 우주일 것이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우주 그 중에서 인간이 가 본 곳은 이 지구에서 가장 멀리 사람이 간 게 달, 그것은 1.2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은 대한민국 밖도 못 나간 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울도 못 올라가본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한 30개국쯤 다녔습니다. 그 정도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어느 선교전문가를 만났더니 자기는 162개국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4조 곱하기 1천억 분의 1개를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빨간 화장실의 전구 주위를 돌고 있는 세 번째 파리의 등에 붙은 세균보다도 더 작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위대하게 어마어마한 이 우주를 하나님이 여러 번 애쓰다가 간신히 만드신 것이 아니라 "Be there." "거기 있어라." 하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이 세계를 보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시인들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주 티끌 같아서 태어났다가 정말 보기 드물게 목숨을 장시간 누렸다고 해 봐야 100살이고 그리고 그 사람도 아주 희귀합니다. 지금도 부산 시내 내려가서 장례식장에 가서 보면 20대 젊은 사람의 사진도 자주 걸립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나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 창조된 어떤 사물도 그분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그분의 뜻을 피하거나 벗어나서 그분의 통치를 이탈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 먼저 그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인 것을 알고 두려워서 떠는 것으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단지 그런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종교의 공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고 뛰어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떨리는 두려움과 함께 이끌리는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존재,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존재론적인 초월성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서 떠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이고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면서 그 사랑에 두려우면서도 왠지 도망치고 싶지 않고 그분의 품으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만난 것이 바로 ‘삐에따스’, ‘경건’입니다. 그래서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도 방자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공포가 아니라 그 사랑에 이끌리는 승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신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우리의 존재의 격차는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과의 관계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격차는 우리와 아메바의 격차보다 더 큽니다. 우리와 병균 한 마리의 격차보다도 더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병균 한 마리에 비해서 위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무한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오늘 시인이 나의 목자라고 자기의 소유격을 사용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높고 위대한 그분 앞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그 격차를 뛰어넘어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이 신앙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도저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존재론적으로 초월적이시고 도덕적으로 무한히 완전하신 그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유일한 반응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교부들의 위대한 전통 속에서 그것을 발견해 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은총에 대한 하나님이 기대하신 최고의 응답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론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자기를 던지며 굳게 믿는 것입니다.
제가 요새 별로 기쁜 일이 없는데 우리 손녀딸을 보는 재미로 삽니다. 지금 15개월인데 너무 너무 귀엽습니다. 우리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그 아이들 3배 보다도 더 귀엽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그렇게 귀여운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30대 때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얘는 너무 너무 귀엽습니다. 이 녀석이 내가 들어가면 아직 말은 못하니까 막 기어와서 다리를 꽉 잡습니다. 그리고 손을 듭니다. 안아달라는 것입니다. 안아주면 엄마가 '이리 와 봐라.' 그럽니다. 그러면 고개를 팍 돌리면서 깔깔깔깔 웃으면서 내 목을 끌어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안았다가 힘드니까 금방 내려놓는데 할아버지는 가슴도 크고 한참 동안 안아주니까. 품에 안긴 아이를 이렇게 들고 위로 던집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얘는 좋아서 죽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위로 던지고 팔짱을 끼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 웃으면서 예배드리고 있지만 다 푸른 초장을 걷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배 오기 전에도 살까 죽을까를 고민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난관에 처해도 두 가지만 굳게 붙들면 살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그 모든 시련의 웅덩이에서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믿으면 어떠한 난관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하나님이 목자라면 자기는 어떤 존재라는 것입니까? 사실은 23편을 다 뒤져보아도 양이라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사람만 목자는 아닙니다. 소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돼지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우리나라같이 개를 먹는 나라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읽는 즉시 여러분 자신이 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양도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양이 아니라 백옥같이 하얀 양, 그것도 늙은 양이 아니라 노인네들도 다 자기를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 시편을 읽으면서 그리는 것입니다. 뉴질랜드나 호주에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풀밭에 어린양 한 마리가 깨끗이 온 몸을 샴푸하고 린스까지 한 새하얀 모습으로 슬로우비디오로 푸른 풀밭을 뛰어놀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가는 광경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기는 엉터리로 살아도 자기는 그런 양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한국적 문맥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쓰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양에 대한 생각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동물 중에서도 긍정적인 짐승과 부정적인 짐승이 있습니다. 강아지, 양 이런 것들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러나 까마귀, 뱀 이런 것들은 부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양이 반드시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이란이나 이라크지방에서는 특히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욕이 있는데 ‘양 같은 놈’이라는 욕입니다. 그 양 같은 놈이라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닭대가리 그런 정도의 뜻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고 지저분한 그런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 보면 양을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지만, 양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가지고 간 것은 아니고 속죄의 제물을 드릴 때 순종하며 자기를 희생해서 누군가를 용서받게 해 주는 제물로서의 양의 컨셉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부정적인 묘사가 나옵니다. 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다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양은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는데 왜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느냐 하면 양이 사물을 총천연색으로 못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거리가 매우 짧아서 눈 나쁜 사람들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희미하게 보이듯이 가시거리가 짧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길 잃어버린 양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돌아온 양은 없습니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동물들은 각기 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빠른 발, 날카로운 이빨, 혹은 자기 몸 색깔을 변신시킬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기능, 박쥐같이 자기 몸을 은폐할 수 있는 기능, 스컹크 같은 것들은 강력한 가스를 분사해서 자기를 보호하고 오징어도 비슷한 방법으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런 기능이 없습니다. 굉장히 빠른 발도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은 더더욱 없고 어금니가 발달해서 껌을 씹듯이 초식을 먹기에 적합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뿔도 없습니다. 뿔이 있는데 그 뿔은 만두처럼 말려서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뿔이라고는 볼 수가 없고 그냥 디자인상으로 하나님이 달아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니까 그런 디자인적인 배려를 한 것입니다. 양은 자기를 보호할 아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 수많은 동물 중에서 자기의 백성을 양이라고 비유를 하셨을까? 양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에게 보호를 받고 인간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목사님 그게 말이 안 됩니다.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에 멸종 위기의 동물입니다. 다 잡혀 먹히고, 산양이 높은 데를 걸어 다니다가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서 죽고, 전 세계적으로 산양이 거의 멸종 위기의 동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여러분에게 강하게 어필되는 게 없습니까? 우리는 생각 없이 여태까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양”이라고 그랬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문학과 성경의 신학을 종합할 때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동물 위에 탁월한 존재입니다. 동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원래 인간이 키가 110센티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인류의 체질적인 특징이 변하면서 170센티까지 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모든 동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체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렇다 아니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인간이 그렇게 모든 동물들 위에 뛰어났지만 힘이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염소 한 마리의 힘에도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고 모든 짐승들을 자기의 도구로 부리면서 문명을 개척해 왔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모든 동물 위에 뛰어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동물들보다 하나님을 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은 먹고 자고 평안하면 충분합니다. 인간은 그것 가지고 안 됩니다. 모든 먹을 것 입을 것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자살할 수 있습니다. 복지가 잘 된 나라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결국 인간은 내면의 세계와 정신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절대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복음을 통해서 자기가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이지만 그런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이 당신을 가장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안하던 어떤 일을 하나 더 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데 철이 안 들어서 내게 그런 아버지와 가정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객지에 떠돌면서 사는 것입니다.
SG워너비 김진호의 가족사진이라는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넘어지다 또다시 일어나고 외로운 어느 날 문득 꺼내 본 가족사진...” 살아가면서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지치고 깨어지다 또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가족사진을 봅니다.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어느 덧 아빠 나이가 됐고 아빠를 닮아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부족할 때는 그래도 덜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해서 살아보려고 몸부림칠 때는 부부가 갈등이 없습니다. 가끔 싸우기는 하지만 갈등은 없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다 돈 좀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사업도 하고 잘 되기 시작하면 싸우지는 않는데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혼자 넉넉히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여기 없습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여러분은 지금 가짜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은 비록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한번 주님을 믿을 때는 도대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했고, 그리고 눈을 들어서 사방을 둘러보니까 엄마도 아빠도 이 세상에 내가 배운 도덕과 사상과 모든 것들도 내 인생을 붙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마지막에 복음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모든 죄의 뿌리를 캐들어 가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독립심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한결같이 모두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한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 되고 세상에서 약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강한 사람입니다. 쉽게 하나님 앞에 꺾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를 왜 왔는지 아십니까? 목사님도 모르고 이 교회도 모릅니다. 한 가지 때문입니다. '자기 깨어짐'으로 공과공부를 한다고 해서 제가 충격을 받고 온 것입니다. 열린교회에서나 가능한 일을 도대체 어느 교회가 하고 있을까?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그것이 추한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존할 때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의존미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존하는 아름다움, '더 뷰티 오브 디펜던스'(the beauty of dependence) ‘의존미’입니다. 그런 ‘의존미’ 안에서 인간은 아주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담과 하와는 가장 빛나는 존재가 되었는데 어느 한 순간 그 의존을 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독립의 추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은혜 없고 자기 깨어짐이 없는 교인은 박력이 있습니다. “때려치워. 내가 안하면 그만이지 내가 안한다는 데 누가 뭐라고 그래.” 자기가 하나님처럼 생각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를 낮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고 자신을 한 마리의 양으로 자기를 스스로 고백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그런 의존이 있습니까? 은혜는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독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가장 큰 비결이 의존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시려면 좀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굳이 안 도와주신다고 해도 저는 이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으며 기도할 수 없습니다. “아, 이 길이 마지막이구나. 주님 나를 박대하시면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는 주님 없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선한 절망감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한 나라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땅 아래 있는 왕국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매일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는 가난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놓는 것입니다. 한 위대한 제왕의 모습을 우리는 그 어린아이 같은 기도 속에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이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의 정수입니다. 저는 부흥도 경험하고 하나님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지만 정말 별별 일들을 다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주고도 바꾸고 싶지 않은 신앙의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 속에 눈물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두 개의 유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다윗은 실제로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생을 살아오다가 보니까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데 이것은 내가 양을 목자로서 인도할 때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목자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그 안에 깃들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 인간을 인도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인격적인 방법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안다.” 요한복음 10장 에 나오는 유명한 목자의 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결국은 양과 목자 사이에 오고가는 어떤 교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고, 또 넓게 보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인도 하나님을 알 가능성이 있고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인도하실 때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들을 인도합니다. 여러분이 서부영화에서 보면 카우보이들이 말이나 소를 인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막 풀어놓고 방목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그것들을 한데 모읍니다. 그러면 개를 풀어서 짖으면서 달리고 혹은 총을 쏘면서 위협을 하면 흩어졌던 말들이나 소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하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우리 간으로 집어넣는 것이 카우보이들의 하루입니다. 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양은 그런 식으로 휘몰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했던 어느 여행객이 그런 수기를 썼습니다. 도로를 차를 몰고 가는데 이쪽이 풀밭이고 저쪽이 풀밭입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양떼들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양떼들이 수백 마리가 지나가면서 도로에 걸쳤는데 목동이 그만 소변이 마려웠습니다. 냅다 뛴 것입니다. 딴 데로. 그랬더니 양들이 제자리에 딱 서더랍니다. 그러니까 차들이 황당해 진 것입니다. 길이 막혔으니까. 크락션을 누르고 깜빡깜빡하고 해도 양들이 미동도 안 합니다. 그런데 목동이 다시 돌아와서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양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목동들이 양을 이끄는 방법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휘몰아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안 하십니다. 우리들은 가끔 사람들이 간증할 때 과장해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나도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이 나를 휘몰아치시는데...”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존 오웬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역사하시지 인간 바깥에서 인간 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급할 때는 아주 급하게, 빠른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하고 감화 시켜서 그 길을 가게 하시고, 혹은 하나님이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주어서라도 평범한 환경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결론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시고, 우리의 정서를 일깨우시고, 사랑을 불러일으키시고, 우리의 의지를 감화시킴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이 바꾸어 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면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을 아주 노예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주인이 무섭게 다뤄야 쩔쩔매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80년대 한참 사회 문제가 되었던 인신매매의 심리학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평범한 여성들을 데려다가 그 사람을 노예처럼 만드는 방법은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박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한 방법으로 구타를 하고 폭행을 하면 6개월만 하면 공포에 질려서 자기가 존엄하다는 생각을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심지어 창문을 열면 저기 사람이 사는 동네가 보여도 거기에서 탈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간증은 환난을 만나서 주님께 돌아왔다는 구시대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혼자 간직하는 것입니다. 창피한 줄 알고, 그것을 무슨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늘어놓을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동차를 타서 몇 번을 구르고, 서너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면서 겨우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믿으면서 승복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누가 더 위대한 신앙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 극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데 그것도 웃기는 것은 심지어는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자식을 잃어버리고, 사고가 나고, 재산을 다 날리고, 망하고, 사기 당하고, 거렁뱅이가 되면서 깨달은 것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깨달은 것 중에 특별한 것을 깨달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너무너무 평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합니다. 매일 설교하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겪어야만 겨우 깨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까? 그런 평범한 사실 하나를 깨닫기 위해서 전 재산을 날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가는 그런 것은 완전히 고액과외입니다. 여러분을 보니까 제가 개척교회를 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제가 개척을 할 때 청년들만 교회를 올까 고민이었습니다. 청년이 60〜65%이고, 장년이 35% 정도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7년 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 청년들이 다 중년이 지났습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이고 깨달은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150개 중에서 첫 번째 머리를 무엇으로 갖다 놓을지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조용히 앉아서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마어마한 과외비를 절약한 것입니다. 남편을 잃어버리고 재산을 탕진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머리를 끄덕이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방법은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싫으면 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하지 못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억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주님을 믿으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사람을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서 부러뜨려서 주저앉게 만들거나 절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머리끄댕이 끌어서 절을 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 치사해서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땅바닥에 처박아서 이마에 피를 나게 해서 절을 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은 치사해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야 할 복음적인 진리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위해 노예를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자유로운 주체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승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데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인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엄마아빠가 말로 하면 이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엄마 아빠도 이 아이가 간절하게 이야기 하면 이 아이의 심정을 전달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인격적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서로를 언어로서 이해시키고 이해 당하는 관계가 성립이 될 때 그것이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지성의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조차도 지성의 이해를 통해서 옵니다.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죽는 날까지 간직해야 할 것은 진리에 빛나는 영롱한 눈빛, 그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 그 진리의 가치 앞에서 기꺼이 순종하려는 손과 발, 이것이 죽는 날까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신앙생활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양떼를 돌보고 인도하는 것이 양의 가치 때문에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형이상학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이미 수립된 관계를 심화하려는 정신의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 사귀다가 “그래” 이 정도에서 끝내자. 나는 너 없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어” 하고 도끼로 줄을 자르듯이 딱 끊고 한 사람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렇게 끊어진 인연을 붙들고 가슴 아파하며 다시 쫒아가서 무릎을 꿇고 나를 용서하고 내가 무조건 잘 못했으니까 헤어지지 말자고 말하는 두 사람 중에서 다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전자의 사람이 아니고 후자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사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 있고 이유가 없는데도 사랑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나오는 자매들이 시집을 잘 못 가지 않습니까? 나이가 계속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되면 “시집을 왜 안 가니?하고 상처받을까봐 묻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모두들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이 너무 적고 예수님을 믿는 자매들이 너무 많아서 짝수가 맞지 않아서 결혼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쁘게 생긴 자매들은 다 갑니다. 저는 fact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 갑니다. 그 자매들은 기도를 별로 많이 하지 않아도 다 갑니다. 제가 15년 전만 해도 중매를 많이 했습니다. “너 장가갈래?”, “네”, “그러면 일주일 기도하고 와.” 하고 둘을 붙여주었습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해 보니까 너희들 어울릴 것 같아 웬만하면 해라.” 그렇게 하면 70%가 순종을 했습니다. 그것도 미리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네 짝이 지금 〇〇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〇년 〇월 〇일 〇시에 나가라.” 갈 때까지 누구인지 모릅니다. 거기에서 만나고 자기들끼리 웃다가 결국은 결혼을 합니다. 요즘에는 포스트모던시대가 되어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안 해줍니다. 형제들을 불러놓고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들 살아봐라. 인물이고 집안이고 다 필요 없다. 신앙과 성품이 훌륭해야 한다. 특히 신앙이 좋은 자매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형제들이 “목사님, 저희는 신앙이 좋은 자매를 만나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기보다 그림같이 예쁜 자매를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다 갑니다. 그것은 무슨 비율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도 우리교회 자매 하나가 있는데 사람들이 계속해서 전화번호를 가져갑니다. 한 사람 앞에 수많은 형제들이 돌진을 합니다. 바로 예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사랑의 심리학적원인은 예쁨입니다. 그것이 진짜 예쁨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심리학적으로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완전한 사랑은 저 사람의 장점이나 예쁨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이타적인 성향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장애아를 가진 엄마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아이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는 분리되지 않고 진짜 이런 사랑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발견하지 못하는 사랑을 그 대상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에센스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에센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라는 것을 알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을 해서 우리의 삶을 바꾸시는지 그 방식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경과 자연의 만물과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위대한 이상은 이 세상의 철학과 사상과 학문과 모든 것이 보여줄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면서 그 보여줌으로써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이 사실은 하나의 아름다움을 흉내 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예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가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성경의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길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들어와서 양을 세어보니까 한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목자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 녀석 부실하던 그 놈이 길을 잃었구나.’, 그리고 그 양을 찾아서 길을 나가는데 시간은 저녁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몇 푼이나 된다고 온 길을 지나서 양을 찾아서 갑니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거나 돌부리에 채여서 발목이라도 부러지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많은 치료비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34살부터 신학교 교수생활을 했는데, 교수 시절에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자매 둘이 전봇대에 광고지를 딱 풀로 붙이고 있는데 무엇이냐면 “아래 강아지를 보시거나 보호하고 계신 분은 연락을 주십시오. 70만원을 사례하겠습니다.” 그때가 92, 3년도의 일입니다. 그때 학교에서 생활비를 아주 많이 받을 때였는데 그때 받은 돈이 200만 원 정도였습니다. 70만원은 굉장히 큰 돈 이었습니다. 방배동이라 진짜 잘 사는 동네였습니다. 강아지를 보니까 정말 볼품없었습니다. 머리에 핀을 꽂고, 보신탕 애호가들에게는 한 끼 꺼리도 되지 않는 한 마리였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 강아지가 얼마짜리이겠습니까? 이 아이들이 가격 때문에 강아지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이불속에 넣고 뽀뽀하고 같이 살았는데 추운 겨울에 어디를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큰개한테 물려 죽었는지, 차에 치여 죽었는지, 아니면 나쁜 사람이 발로 차서 발목이 부러져서 울고 있는지 몰라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70만원은 그 개의 값어치가 아니라 이 자매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재력을 동원해서 그 관계를 다시 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누가 감히 “하나님이 나를 오래 전에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저 같은 사람 구원해 주신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그 분이 남는 장사 한 것입니다. 제가 주님께 신세진 것 보다 구원받은 이후에 영광 돌린 것이 훨씬 더 컸습니다. 제가 오히려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면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구해도 아무 희망이 없는 그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까? 김현양을 기억하십니까? 한동안 한겨레신문에서 계속 특집으로 나왔었습니다. 지존파 살인범입니다. 그 사람이 있던 감옥소에 제가 예배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그 친구가 사형을 당한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 이야기가 얼마나 더러우면서도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가 현장검증을 하는데도 사람의 뼈에서 살점을 발라서 석쇠에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던 사람이었는데 누가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너무 무지하고 몰라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막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죽기 직전에 이 사람이 거의 성자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장기를 다 나누어 주고, 마지막에 늘 부르던 찬송이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을 부르면서 사형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렇게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주님께 갔습니다.
그렇게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무슨 덕을 보셨겠습니까? 그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앙심을 품고 보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분노를 푸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훈적인 것입니다. 아들이 학교를 갑니다. “너, 아들 명심해. 오늘 집에 곧바로 들어오지 않고 게임방에 가면 진짜 죽을 줄 알아.” 엄마의 마음속에 자식에 대한 살해의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을 하면 “네가 다시 또 게임방에 가면 내가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엄마가 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부엌에 가서 숯 돌에 칼을 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경상도 말로 식겁해야 할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식겁한다고 인생이 바뀌겠습니까?
우리는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신앙이 너무 노예적이고 타율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사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그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해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그렇게 해서 양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어깨에 메고 온다고 하는데 히랍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이렇게 멘 것이 아니라 양쪽에 멘 것입니다. 이렇게 메는 것은 이 아이가 편안하게 어깨를 받치고 오라고 다친 아이를 뒤에 메고 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돌아오는 데 저녁 시간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5시나 5시 반쯤 된 것입니다. 성경의 막간에 흐르는 대화를 구성해 보면 동네사람들에게 “어이, 저녁 먹었어?”, “아니”, “조금 있다가 우리 집에 다들 내려와.”, “왜?”, “잔치를 하려고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어?”,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설마 이 양을 바비큐를 해 주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찾아오지를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역설이 등장하는데 그 때 동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소를 한 마리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양 한 마리가 몇 푼 한다고 소를 한 마리 잡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의 마음속에 잃은 양을 찾은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제 동생의 친구 이야기인데 길거리에서 쓰러진 고양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차가 밟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을 안고 동물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의사선생님 얘 어떻게 합니까?”, “그냥 안락사 시키시죠. 기르신 것입니까?”, “아니오. 길거리에서 주웠습니다. 너무 불쌍하잖아요. 선생님”, “안락사 시키시죠?”, “수술하면 안 될까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0만원입니다.” 참 착한 사람입니다. 그 150만원을 카드로 긁고 그것을 동물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돈으로 계산을 못하게 합니다. 그것을 잘 읽어보면 그 속에 아주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를 이용가치로 생각한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위대한 사랑입니다.
더 있지만 마지막 세 번째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양떼를 인도하시되 약점을 알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2절에 내일 새벽에 나오면 보겠지만, 보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매번 성경 때마다 잘 못 번역합니다. 쉴 만한 물가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 “메 메호 노트”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양은 물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목이 말라도 흘러가는 물은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흙이나 풀뿌리 같은 것을 가져다 댐을 쌓아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데려가서 먹입니다. 그것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물가입니다. 놀만한 물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물 가장자리로 나를 이끄시는 도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사람은 우리를 항상 평균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제일 싫은 것은 “엄마친구 아들은…….” 진짜 짜증납니다. “누구는 그렇게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더라.”하고 하면 공부를 못 하는 아이는 죽을 지경입니다. “누구는 벌써 시집을 갔다고 하더라.”라고 하면 노처녀는 너무 괴롭습니다. 물론 “두 번이나 갔다고 하더라.” 그것은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누구는 무슨 그룹에 취직을 했다고 하더라. 한 달에 월급을 800만원이나 받아서 엄마에게 200만원을 갖다 준다고 하더라.”라고 하면 취업을 못한 아들은 너무 괴롭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저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왔는데 이 사람은 처져, 이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해. 이 사람은 돈도 잘 벌고 헌금도 많이 해, 저 사람은 만날 구제 대상이네.’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거기는 경상도에서 올라온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경상도뿐만이 아니라 전라도에서도 많이 올라왔는데 그 당시 80년대에 서울로 유학을 온 아이들은 두 종류입니다. 공부를 굉장히 잘 했거나 아빠가 워낙 돈이 많은 경우입니다. 그 중 형제 하나가 있는데 공부를 정말 잘합니다. 지금은 서울대 교수입니다. 하루는 학부모와 저 뒤에서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그 형제는 중등부 교사였고 저는 전도사였습니다. 나중에 끝난 다음에 한참을 이야기해서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 “전도사님, 그 집사님 아들 아무개가 공부를 못한다고 저한테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굉장히 순박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니, 애들이 왜 공부를 못 할까요?” 그런데 이 형제가 나중에 NASA에서 근무한 후에 교수가 되었는데 태어나서 운전면허를 포함해서 시험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든 사건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시험에 떨어졌을 때 어떤 심경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고3때도 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고 몸이 약해서 무조건 8시간 이상 자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대도 가뿐하게 들어갔고 군대도 공부를 잘 하니까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때에 6개월을 근무하고 중위로 제대하는 석사장교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6개월 훈련을 받고 중위 달고 제대 하는 것이 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제가 총신에 있을 때 대학원에서 딱 한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가뿐하게 중간고사를 보는 것 같은 마음 딱 붙고 그리고 6개월 만에 중위 달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 어떻게 애들이 공부를 못 할까요?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그때 교수였지만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이해가 너무 잘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계속 들었습니다. “아니, 책에 다 나오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께 물어보면 다 가르쳐 주는데 자기가 노력하지 않는 한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잘났다.”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아주 우울한 얼굴로 다녀서 “왜 그래? 공부도 잘 하는 사람이 왜 그래?”, “아, 정말 인생 살 맛 안나요.” 그때 테니스가 한창 붐이었습니다. 몸이 너무 약해서 테니스를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테니스를 가르쳐도 굉장히 지루하게 가르쳐 줍니다. 공을 던져주면 폼을 며칠 가르쳐 주는데 일주일쯤 지나서 코치가 라켓을 던지면서 오더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쩜 그렇게 테니스를 못 치냐고 여기에서 7년을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 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못 칩니까? 교본에 다 나와 있고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는데 어찌 그렇게 못합니까?, 당신 일부러 못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딱 맞을 것 같은데 맞지 않더랍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꼭 될 것 같아서 하는데 안 되는구나.’ 사실 그것이 대부분 우리의 경험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약한지를 모두 아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했다면 동의 할 수 있지만 다윗이 했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말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성경을 들여다보면 엄마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고 형들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윗은 아버지로부터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을 받지 못 했다기보다는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고 형들을 아버지가 편애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무엘이 기름부음 받으러 왔을 때 첫째 아들, 늘씬한 아들부터 하나씩 보여주는데 다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황당했습니다. 분명 이 집에 기름 부을 자가 있다고 했는데 다 끝나도 없다고 하니까 물었습니다. 이 이게 다니?”, “아참, 하나가 남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다윗은 지워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과의 관계도 보면 다윗은 형들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형들은 무엇 때문인지 다윗을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블레셋과의 전쟁 때 아버지가 형들에게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어떻게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합니다. 동생이 거기에 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러나 한없이 구박을 합니다.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가 되었던 여자도 처음에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신앙의 세계를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한때는 육정으로 좋아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를 못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법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춤을 추니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더구나 왕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자식들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정말 자기의 인생에 진흙탕 바닥에 구르는 고통을 안겨줍니다.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런데 그 강간범이 자기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어났는데 그 놈이 자기 아들입니다. 심지어 자기와 함께 몸을 섞었던 그 처첩들과 동침해서 온 세상에 부끄러움이 되게 했던 그 놈이 아들입니다. 그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그 아들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해지니까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고 탄식합니다. 완전히 산산 조각난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부모로부터 아내로부터 그러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사랑했지만 그 짧은 사랑 때문에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불같은 영적인 연단을 받습니다. 그런 상처투성이의 사람이 겪었던 인생사 중에서 그 수많은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났어도 아마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말 가운데 하나가 ‘상처’입니다.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인간은 그냥 이렇게 서 있고 끊임없이 외부에서 타격을 입는 아주 무력한 존재로 묘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가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자기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몸부림치면서 인생을 살아 왔다는 것을 강조해야지 지금 내가 못하는 것이 과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상처 때문이었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에 대한 유체이탈법적 화법입니다. 정말 비겁한 것입니다. 내가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처를 받아서 망가진 나도 나이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유체이탈법적인 화법을 사용해서 자기 인생의 어떤 주체성을 비껴가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인간의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은 나와 함께 내가 살아온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에 잘된 것은 주님의 은혜요, 잘못된 것은 주님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선택해서 망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그 불행을 딛고 자랑스러워진 사람들 많습니다. 자기가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못된 것이 그보다 훨씬 더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자신의 인생의 과오에 대해 유체이탈법적 화법을 사용함으로 마지막에 자기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책임회피와 자기의 실존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것이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래, 너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상처야. 가엾어.”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다른 사람도 지겨운 것입니다. 겨우 다른 사람들의 동정이나 받고 그것에 의존해서 우리의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쓰레기 같은 인생이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인생일 수 있습니까?
그런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왔는데도 오늘 다윗은 아름답게 선포 합니다.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단호하게 고백합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미래형이 아닙니다. 현재를 고백하고 있고 동시에 미래도 포함하여 계속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끔찍한 고통의 이력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는데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은총으로 딛고 일어서서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긴 것을 보여줍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하고 그 사랑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알려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모든 비복음적인 신앙생활에서 떠나고,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얄팍한 사탕발림의 신앙도 떠나고, 그렇다고 신비주의적으로 따르는 것도 벗어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위대한 힘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삶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언제나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내가 있다는 것, 나의 인간의 모든 계획이 선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되도록 매일매일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