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 오희열
이어서 시인은 3절에서 하나님이 왜 자신의 목사이신지를 고백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데 3절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자신의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소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생 시키신다”의 번역은 히브리어에서 “살게 하시고”라는 뜻의 ‘하야’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당신’이 3인칭으로 되어있지만 원래 성경에는 2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당신’이라는 말이 잘 번역이 안 되지만 미국식으로 하자면 “당신이 나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셨고,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가 됩니다. 그러면 ‘살아나게 했다’라는 말은 영혼이 언젠가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간의 구성요소에 관한 논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내 놓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이라는 이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론으로 보면 모든 짐승들 가운데 원숭이들이 있었고, 그 중에 어떤 원숭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원숭이들은 그냥 원숭이로 있고 이동한 원숭이들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모든 동물들 중에 뛰어나다고 하는 말 자체가 이미 하나의 어떤 권력을 획득한 동물과 똑같은 존재들의 폭력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서울대를 나오고 똑똑한 젊은 법관이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미국으로 철학을 공부하려고 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법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보호하는데 왜 그렇게 인간이 그렇게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아야하느냐고 하니까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법 공부를 해도 인간이 왜 존엄한지는 법이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왜 존엄한지를 배우기 위해서 철학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철학 공부를 통해서 인간이 왜 존엄한가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나라는 뜻밖에 인문학에 대해서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그래서 TV를 보든 신문을 보든 무엇을 보든지 인문학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고, 심지어 사업하는 사람들도 인문학을 해서 돈을 벌자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문학은 그렇게 쓰이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인문학을 배우겠다고 설치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겠다고 간판을 내겁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고, 인문학의 기본적인 관점은 성경의 관점이 아니고 인간의 관점입니다. 오히려 교회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와 여러분이 배우는 기독교 교육의 내용이 이미 그러한 모든 인문학의 토대 위해서 그것을 극복한 기독교 사상들이 가르쳐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문학에서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절대로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아주 명료한 설명을 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두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영혼과 육체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육체를 흙으로 만드시고 그 속에 “후~”하는 동작으로 영혼을 창조하셔서 각 사람에게 불어넣으심으로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육체의 기원 자체가 물질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육체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 지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함으로써 인간의 육체가 지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쌩쌩해 보여도 한 일곱 끼 정도만 굶으면 눈이 쾡 하고 설교가 들리지 않고 눈앞에 통닭과 햄버거, 맛있는 밥이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원을 소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도 질서가 있어서 자연의 질서를 가지고 그 음식이나 환경이 자기의 육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많이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건강을 잘 지탱합니다. 그런데 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은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만나면서 육체에 심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맛있으니까 막 퍼먹습니다. 그러면 안 되고 음식을 보기를 약을 보듯 해야 합니다. 음식을 펼쳐놓고, 이 음식들이 나에게 들어오면 어떤 영향을 줄까, 그리고 이것을 먹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이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네? 어렵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면서 삽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것보다 훨씬 어려운 사태를 만나게 됩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사실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이 나는 고기를 절대로 안 먹는다고 하는데 그런 식의 삶은 칭찬받는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이성적인 통제 아래에 완벽하게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릴 환경이 아닌데 암에 걸렸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역학추적을 했습니다. 아주 금방 발견을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반찬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등어구이와 명란젓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암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명란젓을 만드는데, 시장에서 발그스름한 색의 명란젓을 사면 안 됩니다. 그것은 모두 착색한 것입니다. 그런 색깔이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갖다 놓으면 상해버리는 명란젓을 사야 합니다. 그렇게 발그스름하게 착색할 때 사용하는 색소에 아질산나트륨이 들어갑니다. 이 아질산나트륨이 고등어를 노릇노릇하게 구울 때 나오는 어떤 성분과 만나면 강력한 발암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사람이 매 끼니마다 먹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성경을 이야기할 때는 별로 집중하지 않더니 이런 이야기할 때는 집중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재밌어하니까 진도를 나가야하지만 하나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잇몸에서 피가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하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면 콩팥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계속 음식을 먹는데 피가 나옵니다. 그러면 순수한 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름이 섞여서 나옵니다. 그것을 함께 먹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몸에서 정수기로 거르는 것과 같은 멤브레인 필터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두 기관을 통해서 산소가 공급이 되는데 하나는 폐이고 하나는 신장입니다. 신장의 멤브레인에 계속 생수가 들어오다가 갑자기 뜬 물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멤브레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멤브레인은 물을 정수시키는 역할을 하는 막을 뜻합니다. 정수기에 물 대신에 뜬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만 부으면 멤브레인이 다 작살이 나고 망가집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이 녹즙이 좋다고 그것을 마구 퍼 마십니다. 그런데 신장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마시면 치명적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아유, 복잡해.’ 한다면 마음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30세에 암 걸리고 40세에 심장마비, 심근경색, 뇌졸중으로 나머지 인생을 사는데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잘 배우고 조심하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이런 게 다 힘들다고 한다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합니다. 귀차니스트들입니다. ‘존재 귀차니스트’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가 어차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어쩔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을 그렇게 귀찮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육체는 그런 원리를 따라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생각없이 인생을 많이 살았지만 제가 만약 여러분이라면 30세가 지나기 전에 건강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세워서 일평생을 그 원칙을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체에 관한 기본적인 원리뿐만 아니라 나라고 하는 사람의 체질을 정확히 이해해서 무엇을 피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터득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자매가 하나 있는데 양파를 너무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니언(onion)은 먹는답니다. 왜 안 먹느냐, 마지막에 남겨야할 열 가지 음식중 하나인 수퍼 푸드가 양파라고 해도 먹기 싫다고 합니다. 그것을 고쳐야합니다. 고쳐서 너무 먹고 싶은데 좋지 않아서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말아야 하고, 혹은 안 먹을 수 없으면 줄여야합니다. 많이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먹기 싫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짧은 인생인데 그냥 놔 두라고 하면 불행해집니다. 반드시 그 여파가 몸으로 오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이깁니다. 그런데 누적이 되면 어느날 쿵, 하며 쓰러지고 타격을 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그러한 것을 다 건강에 맞게 먹고 그런 환경에 살려면, 여러분이 이렇게 지하실에 오래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것보다 1/3밖에 안 되는 곳에서 시작을 했고, 목사님은 설교를 길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길게 하십니까? 얼마나 길게 하십니까? 두 시간? 세 시간? 대단하십니다. 저는 평균 설교가 100분이었습니다. 주일 낮 설교가 말입니다. 주일 설교의 기록은 2시간 24분, 모든 설교를 통틀어서 기록은, 쉬지 않고 5시간 15분, 남의 교회 집회 가서의 기록은 쉬지 않고 4시간 15분, 시편 24편 제 5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설교를 하다가 사람들이 졸도를 했습니다. 말씀에 졸도를 한 것이 아니라 공기가 잘 안 통해서 자매들이 툭, 툭 졸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그런 환경에 오래 갇혀서 장시간 동안 산소가 모자라는 곳에서 설교 듣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처럼 우리 몸에도 원리가 있듯이, 그것을 함으로써 육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안 해도 삽니다. 그러나 일찍 죽든지 생명기능이 망가지거나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음식을 대할 때는 어거스틴도 말했지만 약을 보듯이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맛있다는 비주얼이나 냄새에만 끌리지 말고 이것이 내 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것이 매우 안 좋을 경우에는 과감하게 “나는 싫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너무 먹고 싶지만 나는 먹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딱 끊어야합니다. 맛에 대한 탐식, 양에 대한 탐욕, 이렇게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둘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우리의 건강을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제가 늘 얘기하는 것이, 너무 먹고 싶으면 먹어라, 네 젓가락만 딱 먹고 “충분해.”하고 얘기해라, 삼겹살이 먹고 싶으면 네 점만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큰 것으로 네 개가 아니라 요만한 것 네 점입니다. 딱 먹고 “충분해, 나는 내일 또 먹을 수 있어.”하면서 젓가락을 탁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문제는 영혼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 짝을 이루는 것이 영혼입니다. 영혼은 그 기원자체가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자원에는 두 가지 자원이 있는데 천상의 자원과 지상의 자원입니다. 혹은 땅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입니다. 땅의 자원으로는 우리의 육체를 부양하고 적절히 우리의 육체에 만족을 주고 그것이 우리의 정신에 까지 어느 정도는 영향을 줍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그 자체가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영혼이 이 지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영혼의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의 자원, 혹은 천상의 자원이 유용한 것입니다.
아까 인문학 얘기가 나왔는데 제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보신 분들은 그 정도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말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만 제 책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게 어려우면 네가 온 몸으로 부딪히고 찢어지고 피를 토하고 불구가 되어 살아라, 그런다고 해서 네가 나처럼 깨닫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게 어려우면 가라고 합니다. 책을 읽었다면 이미 극복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극복했다고 저는 봅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에 청년들이 800명 정도 되는데, 장년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해도 청년들과는 자주 만납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신앙이 제대로 들어간 청년들은 그 정도는 극복합니다. 요새 알프레드 아들러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뿅 갑니다. 강신주는 아십니까? 벙커 아십니까? 벙커 세미나 모르십니까? 세상 돌아가는 물정 좀 아십시오. 기독교 신앙이 지성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그 정도는 극복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들러의 책 여러 권도 아니고 ‘미움받을 용기’ 그 한 권을 읽고 뿅 가는데, 현대 심리학에서 아들러는 한물간 퇴물입니다. 그것을 지금 읽으면서 신드롬이 일어나는데 75만부가 팔렸답니다. 아들러의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것들을 아무리 얻어먹어도 그것은 천상의 자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줄 수는 있지만 영혼이 변화되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읽고 교회에서 복음을 외칠 때에는 아무런 귀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이 강신주의 벙커에 가서 펑펑 울면서 하나님 없이 살기로 회심하는 것입니다. ‘다상담 시리즈’를 읽어보셨습니까?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미친 듯이 빠져 들어가게 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적절하게 목사님이나 기독교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문제가 있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 책이라도 읽으면서 벗어나십시오. 저는 책 파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극복하고 나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이 쓴 책을 읽어도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래의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극복하는 방법을 써 놓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최고의 재앙은 지성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부메랑처럼 교회로 돌아옵니다. 자, 이 얘기를 하면 오늘 밤 세워야 합니다. 진도를 나갑시다.
영혼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소생시켰다는 것은 거의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육체는 물질입니다. 영혼은 만져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물질을 기준으로 보면 아무데도 없지만 영혼을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그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데나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 영혼이 이쪽으로 갔을 리는 없습니다. 이 사람이 호리호리한 사람인데 영혼이 거기에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구가 배로 늘어나게 되면 영혼이 그 사람 속에 절반만 채워져 있고 나머지는 비어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팽창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물에 따라서 있다 없다하는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리모컨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개념과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는 똑같이 있다고는 하지만 주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있다고 하는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럼 배를 째보면 어디에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양심은 그런 장기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육체가 살아있다는 말과 영혼이 살아있다는 의미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릅니다. 그러면 똑같이, 육체가 죽는다는 말과 육체가 죽는다는 말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릅니다. 영혼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은 영혼들을 주께 돌아오게…”하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영혼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영혼은 처음부터 불멸하는 존재로, 모든 사물은 유시유종,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유시무종의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었다는 의미도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와는 훨씬 다릅니다. 그래서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은 멸절되어 소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영혼이 고유한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이것을 영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은 행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행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 육체의 주인은 우리의 영혼이고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렇게 우리 영혼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의 영혼에게 있는 고유한 힘, 고유한 성향들이 변질되거나 약화되어서 원래의 영혼이 의도했던 대로 작동을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서 ‘영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말을 잘 안 쓰는데,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잘 때마다 시계의 태엽을 감아줍니다. 하루에 한 번씩 감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깜박 잊고 태엽을 안 감아주면 시계가 멎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거봐라, 어제 네가 시계태엽을 감아주지 않아서 시계가 죽었잖니.” 합니다. 시계가 죽었다는 것이 장사지내서 관 속에 들어갔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기능을 제대로 못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죽었을 때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마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여러분이 이 사회에서 보는 충만한 악들이 그런 죽은 영혼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함께 만나는 지체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세계 상품권 20만원어치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을 테이블 아래에 놓고 식사를 주문했는데 더 좋은 방이 있으니 옮기겠느냐고 묻기에 저는 괜찮은데 함께 온 지체가 옮기자고 해서 방을 옮기고 식사를 하는데, 먼저 있던 방의 테이블 아래에 둔 상품권이 생각났지만 ‘잘 있겠지.’ 하며 식사를 했습니다. 종업원에게 상품권이 아까 그 방에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찾아 보고나서 없다고 했습니다. “왜요?”, “한 팀이 밥을 먹고 나갔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닌데 왜 가져갔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이라서 양심의 기능이 망가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서 분노했던 것이, 그것을 가져간 사람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라 이런 나라에서 산다는 것에 분노가 나고 슬펐습니다. 저는 아직도 묻고 싶습니다. “그걸 왜 가져갔습니까? 당신 것이 아니잖습니까?”
결국 영혼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제 잠간 살펴봤지만 정말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오웬이라는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가 말하기를,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다.” 사무엘하 11장까지 다윗은 점 하나 티 하나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부터 죄를 짓기 시작하면서, 특별히 두 가지 죄를 짓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 이었습니다. 이것은 행정적, 정치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동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인구조사는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과 말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지를 한 번 과시해보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온역에 걸려서 죽어갑니다. 두 번째 심각한 범죄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왕이니까 그냥 성폭행 수준으로 범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성경 앞뒤로 보면 그 여자도 다윗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저항했다는 얘기가 나오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한 순간의 솟구치는 정욕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아마 한 번 하고 차 버리든지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가지 데리고 사는 것을 보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적으로 그런 많은 상처와 소외를 입으면서 영혼이 살아있을 때에는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엄마!” 혹은 “아빠!”하고 부르고 싶을 때, 저도 이 나이가 되어서도 그렇게 부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제도 걸으면서 “아버지…”하고 불러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족’이라는 책을 썼는데, 읽으셨을 것입니다. 눈물로 그 책을 썼습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한 달 동안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 생각에 울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엄마”, “아빠”하고 부르고 싶은 순간에 다른 분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단 한 사람, 정말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jtbc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가 유아인을 만난 순간이 인생의 위대한 정점이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영혼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리고 가혹할 만큼 긴 세월동안 쓰라린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게 바로 그 순결한 사람이, 결국 자기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살인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행한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무지, 둘째는 죄, 마지막 세 번째는 지속되는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생기를 잃어버린다고 설명합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와 세 번째는 가운데 있는 두 번째로 모두 연결이 되어서 어느 하나도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지는 죄를 내포하고, 고통 속에서도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 앞의 선한 양심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중심에 오는 것이 ‘죄’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죄? 진짜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은 이 세상 속에 있는데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까?’ 늘 예수 믿고 살면서 큰 죄는 짓지 않고, 신문에 날 죄를 지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군인들이 개울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병사 세 명을 모아놓고 자루를 하나씩 주면서 지시를 했습니다. “자, 지금부터 이 자루에 돌멩이를 50kg씩 모아온다. 실시!” 세 명의 병사들이 각자 다니면서 돌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한 병사는 무식하게 하나에 50kg이 되는 돌덩이를 찾아서 자루에 담았습니다. 두 번째 병사는 30kg짜리 하나와 20kg짜리 하나를 골라서 담았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주 영리했습니다. ‘이걸 그냥 담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짊어지고 어디로 이동하라고 할 테니 큰 돌보다는 작은 돌들을 모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공깃돌 같은 것들을 1천 개를 모아 담았습니다. 무게를 달아보니 세 병사 모두 50kg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명령이 이 병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이제 가져온 돌멩이를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실시!” 큰 돌멩이 한 개만 가져온 병사는 한 개뿐이니까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갖다 놓았고 두 개 가져온 병사도 조금 헷갈렸지만 금방 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1천 개를 가져온 사람은 단 한 개도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대학의 실험실에서 비이커에 차가운 물을 담고 큰 개구리 한 마리를 넣고 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1초에 0.02℃ 상승하도록 불꽃을 조절했습니다. 비이커가 평평한 접시 같은 모양이어서 개구리가 마음만 먹으면 펄쩍 뛰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1시간 20분 후에 이 개구리는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개구리를 잡아다가 미지근한 물에 집어넣었으면 들어가면서 “시원하다~”했겠습니까? 여기에 가정주부 여러분도 계시지만 아이가 방금 나가서 흙탕을 묻혀 들어온 것은 한 번만 걸레질하면 없어집니다. 그런데 저 싱크대 밑의 이사 올 때부터 쌓였던 기름때는 세제로 닦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사 갈 때 그대로 두고 가면 그 다음 사람이 장판 걷어버리고 새 장판을 깝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죄는 그 크기가 중요합니다. 모든 죄는 죄이지만 큰 죄는 성경이 매우 특별한 죄로 취급합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그런 것은 있습니다. 성경은 미움과 살인을 똑같은 죄로 봅니다. 그렇다고 미워한 것과 칼로 찔러 죽인 것을 똑같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과 간음한 것을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고 진짜로 행하는 것은 육체로 행한 것입니다. 죄의 크기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지 말라고 저희 아내가 늘 얘기하는데, 이번에 우리 교회를 정리하면서 화장실을 중앙식으로 만들어서 저절로 빠져 나가도록 했습니다. 예전에는 대개 정화조를 파서 만듭니다. 그 정화조를 치워달라고 구청에 신청하면 주로 사람이 없는 아침에 퍼 갑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그 차가 올 때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베토벤이 얼마나 짜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에 쓰라고 작곡한 것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음악을 틀면서 굵은 호스를 넣어서 오물을 퍼가고 다 담으면 또 그 음악을 울리면서 갑니다. 차에 보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투명하게 게이지가 있는데 거기 보면 출렁출렁하면서 안에 있는 더러운 오물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참 불결한 모습입니다만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것들 중의 일부를 퍼서 믹서에 잘게 갈아서 채에 여러 번 걸렀더니 노르스름한 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스프레이에 넣어서 분사를 했더니 노랗게 분무되어 날아갑니다. 그것을 멀리서 보면 그렇게 더러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방울의 정체는 아까 그 똥차 속에 있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성분입니다. 여러분이 그 출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더럽다고 느끼지만 노랗게 분무되는 것을 보면서는 예쁘다고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몰라도 알고는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작은 죄의 본질은 큰 죄와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팬레터를 많이 받는데,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메일로 편지를 보냈는데, “목사님, 목사님의 책 참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음악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하면서 영화 ‘러브 어페어’의 연주곡을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답장을 했습니다. “저는 한가한 시간에 이런 종류의 음악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책 ‘마음지킴’을 읽어보십시오.”했습니다.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마음지킴’이라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 이게 아니구나.’하며 깨달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음악이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확 풀면서 그런 은근한 정서 속으로 우리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서 다 보진 못했습니다만, jtbc의 드라마 ‘밀회’의 짤방을 몇 개 보았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거의 안하고 sns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요즘 그러한 방송을 보면서 저런 것이 왜 안방을 뒤흔들어 놓았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참 잘됐다.’라고 느끼는 사람은 있지만 ‘왜 그랬을까?’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치 아들러를 읽으면서 뿅 가서 아들러의 팬이 되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름다우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 도덕적인 규범이 사라지고 아름답고 눈물겨우면 모두 용서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류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이런 것을 대처해야하겠는지, 왜 이 시점에서 그런 영화, ‘사도’라는 영화가 많은 관객을 이끄는 것, ‘명량’이 왜 그런 인기를 끌었을까? ‘아바타’가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을까?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면서 살아야지, 마치 설탕그릇에 파리가 달라붙어서 빨아먹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죄가 성격은 달라도 품질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을 자신의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아주 명료한 표현을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 순간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저의 표현으로 하자면 “죄를 짓는 그 순간 신자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 무가치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가발전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자기기가 있는데, 태양광이 있어서 스스로 충전을 한다고 합시다. 다른 기기들은 대부분 콘센트에 꽂아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지탱할 수 있는 힘도 우리 안에서 무한정으로 스스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영적 침체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동적인 힘으로 계속 살아가게 되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의 로봇 속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받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조차 방전이 됩니다. 몇 십 년 가더라도 방전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울이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고 말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왜 ‘자기 깨어짐’을 가지고 공부를 합니까? 그리고 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워지도록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를 다시 유장한 성화론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여기서 모두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우리는 수시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혼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을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영혼이 영혼에 적합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영혼에 적합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정신으로는 세상을 섬기거나 자기 자신을 임금 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육체에는 육체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에는 영혼의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신명기 8장이나 요한복은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너희에게 먹이신 것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만나를 먹이신 이유가, “봐라, 너의 육체가 이렇게 하나님이 내려주신 육체의 떡을 먹고 힘을 얻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온 너의 영혼은 얼마나 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하겠느냐?”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진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기에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한 7, 8년도 더 된 얘기입니다. 어떤 교인에게 친구가 있는데 너무 곤고하게 사니까 일요일이니까 함께 만나서 밥을 먹자고 교회 근처로 불렀습니다. 여자가 남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이혼을 결심하는 것은 보통 괴롭지 않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도 실행을 하기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다가 끊어져도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고개를 그렇게 끄덕이며 공감하면 사람들이 다 봅니다. 눈치가 있어야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맺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 다 탄로 납니다. 아무튼 이혼은 이렇게 어머어마한 인생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시련도 당해봐야 인간이 성숙하게 됩니다. 물론 신앙도 있어야 합니다. 이 여자가 이런 결정을 했으니까 이것은 살아보려고 해도해도 안 된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친구를 데리고 가서 점심을 먹이고 마침 예배시간이니까 예배드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이 친구는 한 번도 교회를 안 가본 사람인데 그렇게 이끌려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제대로 걸린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이 정말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이 자매가 펑펑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날 저녁 집으로 갔습니다. 이혼 서류에 자기 도장을 찍어 놓고 남편 도장을 찍으라고 매일 얘기를 했었다고 합니다. “여보,”하고 남편을 부르니까 ‘저 여자가 또 도장을 찍으라고 얘기 하려는 구나.’ 생각하고 ‘한바탕 싸우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아내가 자기 앞에 오더니 스르르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미안해.”하며 울었습니다. 남편은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편도 아내 앞에 앉으면서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걸 이제 깨달았어?” 했겠습니까? 정상적인 남자라면 “아니야, 여보 내가 잘못했어.” 할 것입니다. 남자가 대부분 잘못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긴 세월동안 그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리가 없어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축구공을 한 번 차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찰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먹고 깨달으니까,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그 힘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날 반나절에,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이 남자와 함께 살아야겠다.’고 하는, 그리고 지난날 남편이 잘못했더라도 자기가 잘못 반응한 것에 대한 모든 반성이 객관적인 진리의 빛 앞에서 쫙 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리가 가져다주는 생명의 놀라운 힘입니다. 생명의 놀라운 힘입니다.
그런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가 하면 회개라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이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우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죽어도 자기반성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 풀고 용서해주고 좋은 말로, “이런 것은 네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하고 가르쳐주는데, “뭘?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사람들과는 많이 상대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후회하기 쉬운 일들이 생깁니다.
여기 자매님들이 많은데, 누구하고 결혼해야하느냐고 묻던데, 멋있는 남자, 별 볼일 없습니다. 형제들은 자기가 멋있으면 자매들의 마음에 끌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여러 형제들은 자매들이 아무리 성품이 좋고 가문이 훌륭하고 어쩌구 저쩌구 기도 많이 한다고 해도 예쁘지 않으면 마음이 끌리지 않듯이, 웃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아무데서나 듣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듯이, 자매들은 형제에게 능력이 없으면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매들은 정직하게 얘기를 잘 안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전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이걸 모릅니다. 절대로 끌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원빈 비슷하게 생겼어도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들에게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매의 얼굴이 예쁘면 무능, 유능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한 번 전화번호 따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남자와 여자와 차이입니다. 맞습니까? 저는 살아오면서 이것을 자매들에게 직접 배웠습니다. 아무도 이 얘길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얼굴이 멋있어서 저 여자에게 발탁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저 여자는 그게 아니라 그 남자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보면 아주 심각하게 무능하면서도 얼굴이 멋있다는 이유 때문에 여자에게 사랑받는 남자는 없습니다. 혹시 그런 여자가 있다면 어차피 힘든 사람 둘이 만나는 것입니다. 가망 없는 사람 둘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무슨 시집을 좋은 데로 가겠습니까? 정말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진리의 객관적인 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내가 무엇이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18년 전에 내비게이션을 보았습니다. 그때 충무에서 집회를 끝내고 부산으로 가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시간에 맞출 수가 없는데, 그 교회에서 저를 헬기에 태워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 헬기 정기 노선이 하나 있었습니다. IMF때 다 없어져서 지금은 없습니다. 삼성항공에서 운행하는 헬기가 충무 앞 바다의 산 위에서 떠서 부산 공항으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기사가 산꼭대기에 데려다 주었는데, 승객이 저 혼자였습니다. 조종사, 부조종사, 그리고 제가 탄 것입니다. 돈을 불과 5만 몇 천원 내고 거기서 헬기를 혼자 타고 부산까지 날아왔습니다. 그때 기계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지금 보는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헬기가 날아가면서 계속 무전을 하면서 가는데 약 15분 만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시속 250km로 날아가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화면을 보니까 헬기가 날아가다가 항로를 이탈하니까 빨간 줄 옆에 파란 줄이 생겼습니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조금 돌리니까 다시 제대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라는 용어를 모르고 말로만 듣던 항법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이처럼 어떤 기준이 없으면 자기가 표시하면서 가는 길이 옳은 길인 줄 압니다. 그런데 말씀을 깨달을 때, 빨간 줄이 딱 생기고 그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 줄 알게 됩니다. 만일 그 길이에서 어긋나면 스스로 빗나간 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저는 15살에, 왜 살아야하나,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통곡을 하며 울다가 마지막에 일어날 때에는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주님의 은혜로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배우기로는 “네가 정말 예수를 믿으려면 지성의 스위치를 꺼야한다.”고 배웠습니다.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인생에 내가 주체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주체가 될 능력이 없는데,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인식하고 느끼고 의지로 판단하고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한 각성이 없어서 머리가 멍한 채로 게임에나 몰두하고, 담배나 피우고 도색잡지나 보면서 만족을 하며 살던 애였다면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담배피우고 술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여학생 사귀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마다 두려움 속에서 눈을 뜨고, 내가 어떻게 사람으로 살아야하는지가 풀려야 예쁜 여학생도 눈에 들어오는데 말입니다. 제 눈에 예쁜 여학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여학생을 한 다스 실어다준다고 해서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담배 한 모금 피워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고등학교 때는 피웠느냐? 물론입니다. 저는 1학년 때부터 아버지 앞에서만 빼고는 내놓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1학년 겨울방학부터는 어머니가 늘 담배를 사 주셨습니다. “얘야, 담배는 좋은 것을 피워라.” 하셨습니다. 제가 사오면 청자였고, 어머니가 사다주시면 은하수였습니다. 그 당시 담배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회심하고 나서도 4년 동안이나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런 것을 진리의 빛을 통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지성의 스위치를 꺼야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박수를 힘차게 치면서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이 없어서 허우적거렸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있는데도 허우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깊은 영혼의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고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극복하고 신학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그때 그 모든 고민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렇게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끄지 말아야 할 것은 지성의 스위치입니다. 이 말은, 이성이 신앙을 능가하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를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이해하면서 그렇게 성경의 간극들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마어마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청년들이 걱정되는 것은, 지성이 너무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학생들과 앉혀놓고 토론을 시켜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말 빨이 세지, 그런 자리에서는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앉아있습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죄구나!’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아, 이런 죄를 내가 짓다니,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구나!’하며 가슴 아프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것은 아니다.’하고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는 죽어있는 영혼을 살리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는2세기의 위대한 교부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회개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이 세상에 참회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만약에 우리 인간을 본성대로 가만 내버려두면 거룩함과 은혜에 가까이 가는 존재가 아니라 부패와 죄로 가까이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아이를 나쁜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 악한 교육을 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가만 내버려두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여름에 음식을 바깥에 내어 놓고, 무슨 양념을 하고 뭔가를 거기에 해야지만 음식이 썩는 것이 아니라 그냥 냉장고에 꺼내어 내버려두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하지 않게 하려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냉동을 시킨다든지, 기름 속에 담가둔다든지, 딤채에 넣어 두든지, 말리거나 소금을 뿌린다든지, 이런 각종 방법을 다 써야만 그게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본성도 음식과 꼭 같습니다. 나쁘고 생명을 잃고 망가지는 것은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절로 내버려두면 한참 시간이 지나가면 서서히 망가지고 기능이 부패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죄를 짓는 데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경사진 곳에 물건을 두고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그것을 붙들고 있어야하지만, 놓으면 굴러 떨어지듯이, 우리들의 존재 자체가 부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그렇게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가 이런 것입니다. 이 시인이 결국은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같이 되었는데, 그 영혼을 살려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영혼의 소생을 체험했고, 그러고 나니까 정말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물질을 받고 저런 돈을 받고, 지위가 올라가고, 혹은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매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면 누가 그 재능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조성진씨가 쇼팽 콩쿨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잘 들을 줄 모르는 막귀지만, 정말 잘 쳤습니다. 거의 신들린 것처럼 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항상 죄의 용서를 통해서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23편의 저자인 다윗은 그런 깊은 죄의 용서를 경험하면서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세계를 맛보면서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하나님의 영광, 그의 선하심과 자비가 저 하늘 끝까지 가득하다는 위대한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셔서가 아니라, 많은 금은보화를 주셔서가 아니라, 아무 희망이 없는, 죄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던 사람,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에 처했던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주님이 아가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에게 보복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당신에게 돌아오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끊임없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참된 신자의 뚜렷한 표는 회개의 눈물이 있는 신앙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지금은 매우 좋은 사람이어도 언젠가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나빠도 회개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모든 죽어가는 영혼, 침체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그 충만한 생명으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영혼의 회복을 통해서 이런 영광스러운 힘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침체에 깊이 빠졌다가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서 은혜를 다시 받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고, 헤어 나왔는데 어떻게 헤어 나왔는지도 모르니까 그 다음에도 똑같은 상황을 직면하게 되어도 답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온 몸을 부딪쳐서 해 보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뭔가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목적에 대해서 오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의 길”은 ‘데레크 쩨데카’라는 히브리어 구절인데, ‘불의’의 반대는 ‘의’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불의가 무엇인지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기준으로 율법대로, 율법에 합당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하는 삶은 의로운 삶이고, 그 율법에 어긋나게 살면 불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율법이지만 이 율법 속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규정한 율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 대한 흠 없는 계시의 총체적인 분량을 우리가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비치는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희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이 율법을 준행하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 의를 통해서 우리가 가능해지는 것을 배우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흠 없는 계시의 총체를 우리가 율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결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율법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새롭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을 향한 본뜻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게 먼저 살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이 있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을 따라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이 항상 그들을 징계하시고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 다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영적인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을 걷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신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이 세상의 불신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을 아는 지식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the way of living' 즉, ‘삶의 방식’”에 대한 차이입니다. 이 이야기는 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이렇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불의한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행합니다. 보십시오. 그 상품권을 왜 가져갑니까?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그것을 왜 가져갑니까? 저는 무조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외국을 다녀온 어떤 사람이 책에서 말하기를, 길거리의 가로수에 사과가 후두둑 떨어졌답니다. 초등학교 학생쯤 되 보이는 아이들이 막 달려가더니 사과를 줍더랍니다. 그 옆에 한국 사람이 걸어가면서 생각하기를 ‘저걸 주워서 가져 가려는가보다.’했는데, 아이들이 주운 사과를 그 나무 아래에 차곡차곡 쌓더랍니다. 너무 이상해서 “아니 그걸 왜 안 가져가고 길거리에 버리는 거니?”했더니, “아저씨, 이 사과는 우리 꺼 아니에요.” 하더랍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면 자기가 처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는 임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공금횡령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원 다닐 때도 보니까, 학생회비 걷어서 절반은 갈비집에서 없어집니다. 그냥 막 퍼 먹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존감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가져갑니까? 자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왜 이럴까? 자기 것이 아닌데 왜 그럴까?
제가 지금은 부흥회를 잘 안 다닙니다. 그런데 여기는 제 책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진짜로 감동을 받고 온 것입니다. 제가 30대 때에는 사명으로 생각하면서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것도 자가 운전으로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새 차로 르망을 뽑았는데 제가 교수인 것을 모르는 카센터 사람이 저에게 “아저씨, 영업하세요?”했습니다. “왜요?”, “1년에 5만 km를 뛰셨어요.” 저녁에 전라도에서 집회를 하고 새벽은 양평에 나타나서 집회를 하며 다녔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 잡혀 다녔습니다.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충청도에 있는 어떤 대학에서 저를 초청해서 일찍 출발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는지 엄청 밀렸는데 거기를 가까스로 통과하여 나왔는데 지방도로가 나왔습니다. 시간을 보니 빠듯해보였습니다. 그래서 차가 하나도 없으니까 시속 60km 정도의 길을 시속 80이나 90km 정도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경찰이 서 있기에 속도를 줄이고 차분하게 갔더니, 저를 딱 세우고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요?” 했더니, “속도를 위반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속도를 위반했습니까?”, “제 앞에서는 위반을 하지 않으셨는데, 산 너머에서는 과속하셨습니다.”, “산 너머에서 제가 과속한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제 친구가 거기에서 스피드건으로 속도를 찍어서 차번호를 무전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제가 할 말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제가 대학의 선생인데 이 앞의 학교에서 나를 불러서 가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딱지를 끊어주십시오.”했더니, “아, 교수님이시군요. 몰라 뵈었습니다.”합니다. 그때 당시만해도 교수라면 꽤 인정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러더니, “교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게 저는 무슨 소린지도 잘 모르고 벌금은 낼 테니 빨리만 끊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딱지를 받아서 간신히 집회 장소에 도착해서 집회를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돌아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니까 그 딱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개척교회였지만 직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그냥 내가 은행가는 길에 직접 내야겠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가서 보니까 이상하게 금액이 너무 싼 것이었습니다. 6000원짜리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속도위반하면 2만 원쯤 되었을 텐데, 너무 싼 것입니다. 그때 “교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범칙금 6000원, 범칙내용,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웠음” 이걸 만약에 교회 직원이 가져가서 봤으면 얼마나 큰 시험에 들었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어디가 담배 피우다가 걸려서 딱지 끊었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것을 은행에서 납부하고 고지서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교통경찰이 오면 무조건 한 번만 봐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절대 안 주더랍니다. 그래서 “당신, 면허증을 휴대하지 않은 걸로 딱지 끊고 싶습니까?”, “저는 그래도 면허증을 줄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들이 면허증은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더랍니다. 제가 고지서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 스스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규정을 지키자. 그러나 규정을 어겼을 경우에는 정당한 처벌을 받자.’ 지금까지 이행해 오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위반을 했는데, 유턴차선을 가로막고 있어서 노란줄, 중앙선을 밟고 유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지하도에서 숨어 있다가 나와서 위반했다고 저를 잡았습니다. “도로교통법 1조를 보면, 이 법은 도로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저 앞에 유턴차선을 가로막고 있는 운전자는 왜 잡지를 않습니까?”했더니, “제가 신입니까? 모든 걸 어떻게 다 잡습니까?” 하더니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싼 걸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 경찰에게 “당신은 적발하고 지적할 수 있는 권한은 법률로부터 위임받았지만 싼 걸로 끊어주는 권한까지 당신에게 준 것은 아닙니다.”했더니, 경찰의 안색이 변하더니, “알았습니다.” 하면서 벌점15점, 벌금 6만원을 끊어주었습니다. 이건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곳에서 살다가 집을 방배동으로 이사했는데 학교에서 큰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면서, “교수님께서 그런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좀 편안한 집으로 이사를 가십시오.”하면서 말도 되지 않게 방배동의 40평형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들이 쬐끔한 지하실에서 살다가 거기를 가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우리 집은 화장실이 두 개가 있고, 한참을 걸어가야 끝이 나온다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서 몇 년 살았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집사님이었는데, 제 아내에게 찾아와서 “사모님, 제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자꾸 우리 집을 사모님께 팔라고 하십니다.”하는 겁니다. 제가, “아니 그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지 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는 거지?”했습니다. 우리는 돈도 없었는데, 집요하게 사라고 해서 결국은 가까스로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한 번도 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던 곳보다 더 작은 집 하나를 샀는데 그렇게 세금이 많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엄청난 세금이 나왔습니다. 제 아내가, “이렇게 작은 집에 무슨 세금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요?”했더니, 법무사의 아가씨가 “많으세요?”, “그럼요, 많지요, 이걸 어떻게 다 내요?”, “그럼 반만 내세요.”하는 겁니다. 무슨 그런 법이 있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니까, 집을 사고 판 당사자끼리 집의 가격을 절반 정도로 떨어뜨려서 가짜 계약서를 쓰면 된다는 겁니다. 이중계약서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다 그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아내가 그 이중계약서 얘기를 하기에 “로마서 13장을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이라고 했는데, 집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면 성령님이 진짜 기뻐하시겠다!”, “정말 그렇겠지?” 하고는, 거짓말 안 하고 저희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뜯어서 세금을 맞춰 준비해서 법무사 사무실로 갔습니다. “세금 가져왔습니다.”, “아주머니 이중계약서 써 오셨지요?”, “아니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냥 다 내려구요.” 그때 그 직원의 눈빛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존경스러운 애국자가 여기 계시구나. 정말 나는 왜 이렇게 부끄럽게 인생을 살았을까?’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병신, 못난 것들이 혼자 잘난 척해요.’ 했을 겁니다. 이것이 몇 백만 원의 세금을 더 냈을 때 돌아오는 눈빛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현실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이 살았던 현실은 그런 거였습니까? 예수님이 현실을 얘기했다면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가 대중적인 시절은 없습니다. 복음이 모든 사회의 다수가 되고, 복음이 아닌 것이 극소수가 되던 시절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의 대세에 밀려서 눈치를 보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것은 바로 그 소생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은혜, 자비, 충만한 기쁨, 가슴 터질 것 같은 행복,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돌파하면서 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예수를 믿는 그 순간,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입니다.
‘사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것도 안 보셨습니까? 영조가 세자 이 녀석이 마음에 차지를 않았습니다. 공부하라고 하니까 개나 그리고 있고 통 마음에 차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자가 왕이 될 재목이 되지 못하니까 서인으로 내려 보내고 싶은데, 왕의 체통 때문에 직접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중량급 신하가 주총을 하도록 합니다. 신하 중에 말단이 그런 말을 해봐야 소용없으니까 중량감 있는 신하가, “폐하, 아무래도 세자는 재목이 아니옵나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폐 세자하시고 서인을 만드십시오.” 하면, 왕이 못이기는 척하면서, “그럴까? 그래 경의 뜻대로 하시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를 불러서 그렇게 하라고 얘기를 했더니, 이 신하가 편지를 썼습니다. “폐하,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목을 매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하에게 또 얘기를 했더니 그 신하도 똑같은 편지를 쓰고 죽어버립니다. 다른 신하도 똑같이 합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입니다. 선비는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 자체를 삶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는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성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대의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명을 대입시켜보십시오. 어차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여태까지 산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심지어 왕이 그를 처단해버리거나 귀향을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거기서 혼자 조용히 살면서,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면서 자기를 완성해가면서 후손들을 위한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못 마땅해서 왕이 사약을 내려 보내면, 왕에게 “이 나쁜 자식!”하면서 사약을 발로 차는 선비는 없습니다. 임금을 향해서 예를 갖추고 정중하게 절하고 한 사발의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함으로써 그 피로써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이여 이것은 잘못된 명령입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겁합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한때 미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서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온 미국의 교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일 수가 없다. 우리는 국가의 이 결정에 승복할 수 없다!”하면서 일제히 궐기를 했습니다. 그때 나온 찬송가가 이것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아직도 진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를 확신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장렬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삶으로 말입니다. 그것을 당장 혁명적인 방법으로 실행할 것인지, 가슴에 품고 내가 그것을 개혁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개를 꺾지 않고 용기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코 고분고분하게 거기에 꺾이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남에게 주시지 않은 사랑을 주시고 남이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닫고 남이 받지 못한 생명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주셔서 오늘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만족을 위한 정신적 소비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저는 은혜를 사모합니다.”, “왜?”, “힘드니까요?”, “은혜 받아서 뭐 하려고?”, “그냥 그래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요.”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식의 낭비형 소비재가 아닙니다. 군인에게 최신 병기를 들려주고,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신무기들을 들려주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장비들을 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라고 준 것입니까? 그것들을 보면서 거울이나 보며 즐기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라고 준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패전병처럼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영적인 짜증이 납니다. 왔을 때는 피 묻은 갑옷을 벗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렬하게 싸우다가 왔습니다. 다시 하늘을 열어서 새로운 갑옷과, 새로운 의의 흉배, 새로운 무기들을 내게 주십시오. 내가 다시 죽도록 충성하며 싸우다가 오겠습니다!” 하는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고 은혜를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 은혜는 그런 전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싸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이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와서 형제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물러서지 말고 조금만 더 참고 싸우자!,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올 것이다!” 이렇게 믿으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신 것처럼 오늘도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