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은혜가 넘치는 예배를 회복하자
녹취자: 이시내
들어가는 말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매우 특별한 주제를 하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맨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항상 우리들이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생각들을 허물어버리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지성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전체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 동네는 아니지만 여기서 멀지 않은 동네에 살면서 겪었던 일인데, 부모님이 예수 믿는 분은 아니셨지만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업혀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제가 사춘기를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중학교 1학년 겨울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는 굉장히 빠른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되어야지만 사춘기를 시작하는 아이들도 꽤 많았으니까 말입니다. 성격이 아주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친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막 사귀거나 떠들썩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교회는 유치부 때부터 계속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 정확하게 14년 2개월 되던 날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15살, 중학교 2학년 올라가던 겨울 2월 달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는 길이었는데 서울 변두리였기 때문에 논둑 같은 곳을 쭉 걸어가야지만 교회가 나오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가다가 너무 서러워서 논둑에 엎드려서 한참을 소리를 내어서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었던 이유는 집이 가난하기 때문도 -물론 가난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 아닌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인가? 무슨 의미를 내가 이 세상에서 발견해야 하는가? 신은 정말 있는가?’ 한참을 서러움 속에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물을 씻고 얼마를 울었는지를 모릅니다. 추운 바람이 불고 햇볕은 내리쬐는 그런 2월의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제가 교회 안가기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무신론자로 살겠다. 신이 없겠지만 있다고 한들 나와는 상관이 없다. 이제부터 신이 가진 나의 인생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 일종의 자아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엄습하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오늘 하루를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영혼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그런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린나이에 내가 무슨 어마어마한 야망을 품고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무엇이 되겠느냐는 어른들의 질문에 별로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저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그 나이에 사는 것이 더 중요했지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깊은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이 되든지 상관없다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은 마치 엄마를 잃어버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먹을래, 빵을 먹을래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많이 다녔지만 저는 한 번도 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모든 어른들은 생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정신이 출장 간 듯한 사람들, 아무 생각이 없어서 나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니면서 단 1퍼센트도 공감을 하는 분위기나 예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고, 누가 나한테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 분 정도가 저에게 어쩌면 관심을 가져 주셨던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교회로부터 신세진 것이 없었으며, 저한테 어떤 기독교적인 사랑을 가지고 대해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저는 저를 의존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두 가지 이외는 길이 없었습니다. 미친 듯이 자신의 머리로 고민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든지, 아니면 (남이 쓴) 책을 읽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 때 저의 성적은 그야말로 가마니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살아야 되냐 말아야 되냐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 가족들도 타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을 때 실존주의자들의 책에 대해서 깊이 심취했던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서술했을까? 지지난주에 우리교회에서 제가 고등학생들과 함께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장년들에게도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지만 이제 19살, 18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카프카에 대한 저의 해석을 들으면서 제게 보낸 그렇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을 그들에게서는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처럼 눈길이 이리 저리 방황하지 않고 저를 주시하면서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제가 해석을 했는데 두 시간 넘게 계속되는 저의 해석에도 미동도 안하고 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물론 고민이 많겠지만 적어도 자살은 아직 안하고 살아있지 않습니까? 저는 매일 눈을 뜨면 살아있는 한 항상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한 6년 정도의 세월을 보내면서 문제가 무엇이었냐면 많은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고민하는 것을 공감은 해 주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해결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공감하고 그 당시에 특히 제가 빠져들면서 읽었던 작가 중 한 사람이 헤르만 헤세였는데 제 나이 19살 밖에 안 되는 나이에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헤르만 헤세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다섯 명 중 하나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하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저는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친구들을 만나도 더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해결의 길이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공감을 하는 사람도 못 만났는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뼈 속까지 스며드는 이 피를 토할 것 같은 이 절절한 고민들을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되니까 사실은 소설이나 문학작품 같은 것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많으니까 양심상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읽으면서 막 절절하게 느껴지는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아무도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공감만 해줍니다. 공감도 맨 처음에는 신나지만 계속 많은 사람이 공감만 하고 어떤 해결을 안주니까 그러니까 사실 공감의 진실성도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이렇게 나 같은 사람과 공감하는 이야기를 많이 써서 책을 팔기 위해서 이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정말 이 사람이 진짜 그렇게 고민을 하는 사람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상과 철학 이런 것들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뭐 잘 모르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이 안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쓰레기처럼 돌아다니던 책들, 아무 영양가도 없는 그런 책들이 지금에 와서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 그리고 안 믿어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교회 권사님하고 연세 드신 집사님들은 목사님이야 어릴 때부터 워낙 영특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스마트폰 들여다보고 게임이나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 발달한 감각문화에 대한 몰입의 수준은 굉장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미 벌써 스마트폰 같은 것에 중독된 분들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런 것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을 너무너무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3년 전에 책을 하나 썼는데 제가 생각하도 참 잘 썼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해줄게’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설교할 때 교인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저는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 팔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독자가 엄마인데 엄마가 그 책을 열면서 자기가 올바른 엄마 노릇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확인받기가 싫은 것입니다. 안 팔립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현실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이들이 그렇게 감각적이고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런 사회 심리적인 요인이 점점 그런데 매몰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과학기술이 막 폭발적으로 증진되지 않습니까? 그런 감각적인 쾌락들을 폭발적으로 증진시켜줄 수 있는 그런 방법들이 많이 나옵니다. 영화 토탈리콜에 나온 VR여행 있지 않습니까? 노래방 같은 곳에 들어가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버튼을 누르면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전개되는 상황을 즐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이 곧 현실화 될 것이라고 여기고 그쪽 분야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돈을 거머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도저히 희망이 안보이니까 그런 가상현실에 사람들은 얼마나 더 빠져들까 싶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이생망’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현실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꽃다운 십대 절대 안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번 저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볼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분에게 주라고 저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습니다. 한번 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지금의 이런 지성과 이런 모든 판단력을 모두 그대로 가지고 한 15살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한번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굉장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선각자나 천재들이 외롭게 살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내가 고민했던 문제들을 사람마다 다 하고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끌어내어 주는 것이 인생의 변화를 위한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이 자신에게 있다고 시인하고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정체성을 깊이 고민하면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발전인데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결정적인 자각이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인생을 살긴 살았습니다. 그런데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산 것도 아닌 것 같고, 혹은 내 인생 같기도 하고 남의 인생 같기도 하고, 남녀관계로 비유해서 말하면 자기 인생과 일평생 썸을 타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남녀 간에 썸은 즐겁기나 하지 이런 인생의 썸은 별로 즐겁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인생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나마 돈이나 진탕 벌거나 권력이나 잡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라도 욕망을 배설하다가 죽는다면 올바른 삶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순간이라도 즐거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런 능력도 안 됩니다.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그런 인생의 말할 수 없는 절망의 해결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듯,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한 것도 아닌 채로 살았다가 이제는 예수를 믿었는데도 역시나 내 예수도 아니고 남의 예수도 아닌 듯, 신앙생활 한 것 같기도 하고 안한 것 같기도 한 듯, 예수 믿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무 쓸데없는 것 같기도 한 듯, 신앙을 버리자니 뭔가 양심에 찔리는 것 같고 붙들고 그대로 살자니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채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할게’ 라는 책에서도 나왔듯 신앙생활이 그냥 버거운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전에는 세상이라는 운동장에서 자유 없이 살았는데 이번에는 종교라는 운동장에서 자유 없이 사는 것입니다. 전혀 행복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 밖에 없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말씀을 하실 겁니다. ‘목사님은 자지러지듯이 고통 받던 그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를 믿자마자 모두 해결을 보셨겠네요.’ 그랬으면 제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주 진실하고 뜨거운 신앙생활과 함께 내가 이미 믿은 이 예수가 나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예수가 누구이신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지, 신은 존재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에 대한 체계적인 답을 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은 공부하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탁월한 지성을 가진 성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 머리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그만큼 공부 못할 대단한 사람들도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게 하는 신앙적인 질문은 열린교회에서 초등학생들도 할까 말까한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대답하는 내가 부끄러울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발견한 사실은 세상에서 직업 활동을 하기 위해서 습득하는 지식은 참으로 끝도 없이 많지만 참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습득하는 지식은 얼마나 적은가였습니다. 온 몸으로 자신의 인생의 역사에 피나도록 부딪치고 찢어지고 피를 흘리면서 체험한 학습을 통해서 깨닫는 진리는 생생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것들입니다.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단순한 한 가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아주 말할 수 없이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깨닫는 것입니다.
일평생 살면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물었던 이 네 가지 질문이 없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런 것들이 심각하게 나를 흔들어 놓지 않았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에게 그런 의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개방하고 그런 질문 속으로 자신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 들어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않고 그냥 산다고 뭐 안 된 것이 있습니까? 다 먹고 살았고, 아들딸 낳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사십시오. 문제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이런 종교를 선택했다가 아니라 내가 이 종교 안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지 행복할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는 데에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어린나이에 제가 무신론을 선택한 것도 예수 믿는 것보다 안 믿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고, 6년 후에 다시 주님께로 돌아올 때도 저는 결단코 말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믿고 보니까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내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제가 예수를 믿으려고 했던 것은 제가 행복해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해의 시작, 회심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자기에 대한 이해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자기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결정적인 변화가 하나님 앞에 회심하는 것입니다. 회심이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회개와 그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전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회개와 믿음이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제껏 자신의 삶을 지탱해오게 만들었던 세계관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래 ‘회개하다’라는 말이 희랍어로 메타노에아(Μετάνοια)라는 단어인데 메타는 뒤에 혹은 다시(again), 혹은 또다시(twice)라는 의미입니다. 노에오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가장 뚜렷한 표는 감정이 아니라 지성의 변화,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생각하던 나의 어떤 생각의 틀이 회개를 통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 생각하던 틀들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그런 모든 사고 질서의 정점이 계신 것이 아닌 체계를 내가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꼬이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뭔가 확실한 체계가 있어서 그것이 다 인줄 알고 우격다짐으로라도 살면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교나 잘못된 사상 같은 곳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길 뿐인 줄 알며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안정감을 갖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것과 결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자기이해와 같은 이야기들을 수없이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자기가 누군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의 생각의 크기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고 합니다. 과장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심리학도 결국은 확고부동한 체계적 지식이라기보다는 통계적인 지식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캄캄한 벌판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동그랗게 빛이 비추면서 어떤 사물이 있는지가 발견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어떻게든지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한 것이 심리학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학자마다 다 해석이 다릅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누구인가에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사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보면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요즘은 굉장히 유행하는 구호이지 않습니까? 자기사랑, 자기애. 이제 남편만 위해서 살지 말고 널 위해서 살아라. 자식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널 위해서 살아라. 특히 여자들에게 그런 권면을 많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만을 위해, 남편만을 위해 산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런 권면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논의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공감이 가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참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모든 우주의 질서 속에 있는 하나로 만드셨지 인간을 독립적으로 그 하나가 따로 존재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냐 라고 계속 질문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랑 속에서 찾는 사람들이 훨씬 자기를 확실히 발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인가 자기를 개발하고 노력을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일에 예수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성경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갖고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생각과 생각이 충돌합니다. 그래서 삶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인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을 인류라고 하는 커다란 보편적인 덩어리 속에 있는 의미 없는 한 단자로 생각하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실존주의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모든 곳에서 동떨어져서 우주 공간속에 이유와 목적, 원인과 어떤 의도도 없이 던져진 그런 존재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사회를 이루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다루시지 않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항상 균형을 이루면서 우리 신앙의 날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에 이 질문은 먼저, 언제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존재한 인류가 일천 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쪽은 나쁜 사람 이쪽은 괜찮은 사람, 이쪽은 예쁜 사람, 이쪽은 못생긴 사람 등등으로 분류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분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사람입니다.’ 그러면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사람이구나. 내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구나.’ 그러면서 내가 사람으로 빚어진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나는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고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평생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서 자신의 온 몸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교회 와서 박수나 치고 주여 삼창이나 하고 그렇게 사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사람들 속에서’ 찾아가게 하십니다. 제가 한 십 오년 전 쯤 성경을 읽다가 아주 충격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지금도 그것이 나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왜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으면서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성우위론자들은 ‘남자야말로 원조 인간이다.’라고 과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자들은 또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히브리어를 공부할 때에 남성우위론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번역을 하면 전혀 다른 번역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실제로 성경번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성분들은 저의 이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까지는 몰라도 성평등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보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남자는 흙으로 지었고 여자는 갈비뼈로 짓지 않았습니까? 원재료가 여자가 훨씬 고급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차세대 제품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나가서 싸우고 개척하고 이런 능력은 좀 떨어질지 모르지만 섬세하게 느끼고 가꾸고 보호하는 데에는 여성들이 우월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까 아담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한눈에 마음이 확 기울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뼈들 중에 한 뼈요 살들 중에 한 살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런 표현은 중요성(importance)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너는 왕 중의 왕이라.’ 혹은 ‘왕들 중의 왕이라’가 좋은 실례입니다. 그것은 왕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왕들을 주고도 너는 바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너는 여인들 중의 여인이라.’는 것도 다른 여인들 한 트럭으로 가지고 와도 필요 없고 네가 최고이다라는 찬사입니다. 히브리 문학의 묘미이지요. 우리 몸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살도 있고, 치명적으로 중요한 살도 있습니다. 발 뒤꿈치에 있는 각질, 나온 뱃살과 같은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살도 아니고 조금 베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살과 같은 것은 손톱깎기로 조금만 떼어내어도 죽습니다. 뼈는 어떻습니까? 어떤 뼈는 잘라내고 다른 것 갖져다 인공접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뼈는 골수가 지나는 뼈라 1mm 만 끊어져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살들 중의 한 살, 뼈들 중의 한 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이 고백은 자기에 비해서 그 여자가 우월하다 혹은 열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이는 뼈들 중의 한 뼈요 살들 중의 한 살’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두 남녀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엄마와 아빠는 살들 중의 살이고 뼈들 중의 뼈지만 너는 다른 뼈 다른 살이야’라고 했겠습니까? 그 질문이 떠오르면서 눈이 확 열리는 듯 했습니다. 성경전체의 그림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것이 모든 인간이 서로에 대해 ‘너는 뼈들 중의 뼈요 살들 중에 살이라’는 고백을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흔적들이 타락했는데도 아직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어느 가수 한사람은 엄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엄마가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어쩌면 남편이 죽었다면 그런 우울증이 안 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우울증에서 해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렇게 웃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런 살깊은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꼭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 사이에 그런 고백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례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미친 듯이 서로에게 헌신하고 올인하면서 열애하다가 한 사람이 떠나가면 남은 한 사람도 기꺼이 죽음도 택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그렇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하나님이 마지막에 교회를 다 완성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시는데 하나님 마음에 꿈꾸고 있는 세계가 바로 인간들이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미리 맛보도록 부름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자기를 꺾으며 -정의까지 양보할 수는 없겠지만-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렇지 않은 세상과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삶이 맞부딪치는 그곳에서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지만 그 부딪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불꽃처럼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그림이 한 번에 제 속으로 들어오면서 저는 여러 날 동안을 거의 황홀경 속에서 지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관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라이프니츠와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하나가 단자처럼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사람으로 외톨이가 되었다거나, 실존주의자들처럼 처음부터 이웃과 아무 관계없는 사람으로 우주에 내동댕이쳤다고 보거나, 헤겔처럼 한 개인은 역사의 보편적인 전체를 움직이는 한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견해들을 뿌리치고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창조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아노라’(I know you by your nam)라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제까지 걸어온 지적인 발자취 가운데 기독교만큼 뛰어난 휴머니즘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무시당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름으로도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의 삶속에 개입하셔서 그들과 함께 그들의 인생을 전개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 눈을 열어주는 것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심사건입니다. 회심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어떻게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받은 구원의 의미의 우주적인 성격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하나님이 내게 누구신지를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게 해주신 사랑하는 나의 가족, 사랑하는 지체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인류들은 나에게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매일매일 부어지는 그 은혜로써, 우리 안에 부어지는 사랑의 힘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 나라를 싫어하는 사람들과의 부딪힘이 있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믿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여기에 나와 있는 이유이고, 우리가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집약을 하면 첫째는 회심하고, 둘째는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처음 회심할 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깨달았던 것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현실을 주체성 있게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기쁨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