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혼을 소생시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허혜숙
저는 어제 여러분들에게 시편 23편 1절을 말씀드렸습니다. 요지는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을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은 티끌과 같은 존재이다. 그 하나님이 신앙을 통해서 우리 개인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 하나님 때문에 시련이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제목을 선포하고는 2절부터 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지를 차례대로 논증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3절로 넘어갑니다.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우선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하는 묘사입니다. 여기에서 ‘소생’이라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말로 ‘살아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확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의의 길로 데려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럼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시인이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면 언젠가 그의 영혼은 죽은 것처럼 되어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는 때, 소생해서 살아 있는 때,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공부를 안 하는 주제이기는 한데 우리가 꼭 공부해야 될 내용 중의 하나가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창세기 2장으로 돌아 가 보면 흙을 빚어서 인간의 몸을 만드시고 진흙으로 빚은 몸에 후 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그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이 영혼을 불어 넣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창조하시는 행위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따로 따로 창조하셔서 우리의 인간의 육체와 만나게 하심으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아담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처음 사람이었기 때문에 흙으로 만드시고 후 하고 불어넣으신 동작을 성경에서 보여주셨지만 그 다음 사람부터는 하나님이 은밀한 방법으로 그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육체는 크기와 부피, 그리고 길이와 두께 그리고 생김새, 무르고 딱딱함, 따뜻하고 차가움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눈, 코, 귀, 입, 살갗을 통해서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하나님이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분명한 것은 그 영혼이 우리 몸 안에 있고 그 안에 있어서 이 영혼은 우리의 육체를 지도합니다. 영혼의 기능은 고등한 기능과 하등한 기능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등한 기능은 먹고 배설하고 배고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고 하는 이러한 기능들이고 고등한 기능은 생각하고 느끼고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더 고등한 기능은 영혼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진리를 들을 때에 그 진리가 진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기능이 영혼의 고등한 기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러한 영혼의 기능 중 특히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는 기능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양심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는 기능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죽은 상태에 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혼의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생을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인지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고 새로운 생명을 분여 받게 됩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맺고 있는 영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그것 없이 이기고 견딜 수 없었던 삶의 상황을 이기고 극복하고 견딜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기쁨과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혼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공부를 하려면 밤을 새워도 다 못할 정도로 많지만 이 정도로 하고, 오늘 여기에서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하였을 때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소생 시킨다’라고 하는 뜻은 ‘살아난다’라고 하는 뜻인데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 이 시인도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깊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어떤 동사가 나올 때 그 앞에 있는 주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의미가 사뭇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가 죽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까불고 돌아다니던 강아지가 타살이 되든지 혹은 병으로든지 더 이상 숨 쉬고 돌아다니지 않고 맥박도 뛰지 않는 그런 상태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죽었다’고 할 때는 의미가 다릅니다. 영혼은 육체와는 다른 사물이기 때문에 육체와는 똑같은 방법으로 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그 영혼은 불멸하는 영혼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죽음’이라는 의미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죽게 되면 아무런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인간의 영혼이 죽었을 때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즉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아주 많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죄의 목록입니다. 사기와 살인과 시기와 미움과 거짓과 배신과 간음과 이런 모든 것들이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생생하게 살아있을 경우에는 그 나타나는 현상들이 그렇게 괄목할만한 현상들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사람이 온화해 집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이타적이고 불쌍히 여기고 그를 섬기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그렇게 그것을 주목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크게 띄지만 일반적인 사람들 눈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변화가 아닙니다.
어느 한 인간이 미치다시피 돌아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행하고 폭력을 행하고 살인을 하고 온갖 더러운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괄목할만한 변화이고 다른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이 동네에서 쉽게 파악될 정도로 울림이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 일들이 영혼의 죽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도대체 죽음이 무엇인가? 사실 육체의 죽음조차도 우리들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리기 쉽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저는 생물학자한테도 물어봤고 의학자들한테도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명백하게 ‘죽음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뇌 활동이 멎은 것이다. 숨을 쉬고 있는데 과연 죽은 것일까요? 숨도 멈추고 뇌도 멈추면 죽은 것이다? 전기 충격기를 주면 다시 깨어나잖아요? 어떻게 이 죽음을 정의할 것인가? 최근에도 이번에 보니까 오랫동안 뇌사상태로 있던 사람이 전기충격을 주니까 반응을 하고 깨어났다는 뉴스 보셨잖아요? 이런 것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어렵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어떤 철학자는 아예 부정어법적으로 생명을 정의합니다. ‘생명이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것 이것이 생명이다’ 썰렁하죠? 그러면 반대로 영혼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없어지거나 모든 기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영혼을 만드실 때 의도하던 대로 의도하셔서 매우 벗어난 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death' 영혼이 죽은 상태입니다. 이해하시겠죠? 어려운 내용을 쉽게 가르쳐 드린 것입니다. ‘영혼의 죽은 상태’ 그것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영혼을 부여할 때 기대하셨던 바람직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잘못 작동을 하고 있는 상태, 그것을 영혼의 죽음이라고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답이 어느 정도 나옵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한 사람이 왜 저렇게 잘못 된 삶을 살까? 혹은 마음이 강퍅해 져서 하나님을 대적할까? 커다란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을까? 이것은 영혼이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확 살려내셨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원래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이 시인의 영혼을 죽은 자와 같이 만들었을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영혼을 주실 때 의도하셨던 대로 영혼이 작동을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그 말씀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던 그렇게 기능하던 영혼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잘못 작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은 여러 개의 원인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 이외의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을 죽은 것 같은 상태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거나 죽거나 혹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은 것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바깥에서 기계를 부러뜨리듯이 내 영혼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죄는 그런 식으로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 마음과 합의를 보고 그 합의 속에서 영혼 속에 침투하여 우리의 마음의 기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고 보니까 내 영혼이 소생된 상태가 아니라 내 영혼이 죽은 것 같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내 영혼이 그렇게 됐을까요?’
(예화)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이렇게 납작한 비커에 물을 감고 밑에 불을 붙여서 1초에 0.02도씩 올라가게 불꽃을 조절해 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놨습니다. 개구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거기에서 팔짝 뛰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결국 개구리는 거기에서 푹 익혀진 상태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따끈따끈한 물을 받아놓고 논에 사는 개구리를 거기에 옮겼더라면 개구리가 몸을 담그면서 시원하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뛰쳐나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주부들이 여기에 계시는데 비가 와서 애들이 밖에서 장난을 치고 묻혀 들여온 흙과 진흙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걸레질 한 번 하면 싹 없어 집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거나 싱크대를 교체할 때 저 뒤에 한 번 보십시오. 7년 전에 이사 올 때 깨끗하게 싱크대를 설치했는데 긴 세월 먼지가 쌓이고 조리대에서 기름이 튀었습니다. 그것은 걸레질을 해도 안 닦입니다. 특수한 성분의 약품으로 뿌리고 무릎을 꿇고 닦아내지 않으면 닦아낼 수가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전문 시공업체에 주어서 보수를 받기 전에는 그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신문에 날만하고 경찰에 수배를 받을만한 죄만 영혼에 이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크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예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적합한 예화라서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아주 발달해서 정화조를 거의 파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물을 지을 때 구청에 신고를 하고 화장실에서 수로를 꺼내서 바깥으로 연결을 하면 그것만 모으는 수로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할 때 한 분기에 얼마씩 돈을 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건물을 지으려면 자기네 건물 안에서 생성되는 대소변을 자신들이 처리를 하게끔 기본적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이 정화조입니다. 정화조를 대부분 지하에 파는데 굉장히 과학적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배설물이 생기면 쌓이고 액체가 되고 거기에 균도 뿌립니다. 발효종도 뿌려서 발효를 시켜서 걸러내서 한 번씩 똥차가 와서 퍼냅니다. 저희교회도 맨 처음에 평촌으로 이사를 와서 땅을 파고 정화조를 묻었는데 700명분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교인이 2천 명쯤 모이니까 이것은 1년이 아니라 수시로 퍼내야 했습니다. 정화조가 너무 찼다고 생각되면 구청에 전화를 하면 반드시 새벽시간에 똥을 풉니다. 왜냐하면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혐오하니까. 새벽기도 끝나서 가보면 똥차가 옵니다. 그런데 똥차가 올 때는 항상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고 옵니다. 베토벤이 들으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자기가 그 노래를 작곡할 때 그런 곳에 쓰이라고 작곡한 것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와서 파이프를 꽂고 확 빨아드리는데 엄청난 속도로 빨려 나갑니다. 맨 처음에 눈금과 빨아드린 후의 눈금을 보며 “몇 리터입니다.” 하고 “사인해 주십시오.” 하며 관리 직원에게 사인을 받아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 차가 털렁거리며 지나갑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들이 생산해 냈지만 정말 보기 싫습니다. 온갖 찌꺼기들이 출렁거리면서 지나갑니다. 그것이 뭡니까? 똥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모든 건더기를 걸러내고 한 국자를 펐습니다. 그것을 아주 얇은 실크로 된 천으로 망으로 삼아 걸러내니까 노란 빛의 물이 한 잔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현대백화점에서 사온 아주 예쁜 외국제 스테인리스 분무기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카펫이 깔리고 햇빛이 퍼지는 방에서 하늘을 향해 분사를 했습니다. 노란 가루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구름처럼 번집니다. 얼핏 보기에 저 건더기가 출렁거리면서 지나가는 그것은 너무 더러워 보이고 이것은 덜 더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 더 해서 특수 탈취제를 넣어서 냄새를 모두 제거를 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저 건더기가 출렁거리는 똥하고 이 카펫이 깔린 방에 아침 햇살을 받은 외제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안개와 같은 수증기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떠다니는 노란 물방울을 캐치해서 성분 분석을 하면 동일본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껍데기를 어떻게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딸이 이제 다 컸고 어린아이 일 때처럼 ‘아빠, 아빠’ 하며 따라다닐 때가 아닙니다. 아들이 장가를 가서 첫 손녀를 허니문 베이비로 가져서 출산을 했습니다. 저는 별로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애가 너무 귀여운 것입니다. 한 동안 어떤 느낌이냐하면 연애를 새로 시작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집에는 거의 안 들어가는데 오후에 아이가 보고 싶어서 꼭 집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얼굴을 한 번 보고 안아주고 와야 합니다. 너무 좋은 것입니다. 아이를 보는 즐거움에 오후에 집에 한 번 들어가서 보고 오는데 너무 좋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이 녀석이 두 살쯤 됐을 때 일입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주의를 줬습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으니까 당신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그런데 착각을 했습니다. 애가 너무 귀여우니까 저녁때 집에 오자마자 볼을 비볐습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독감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환경에 의한 착각입니다. 아이가 아주 어리고 귀여우니까 설마 저 아이 안에 있는 독감도 저 아이처럼 귀엽다고는 생각을 안 했지만 별거 아니려니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맞습니다. 아이 속에 있는 균도 똑같은 균인데 저항력은 내가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균이 아이를 떠나서 나한테 들어와 가지고 제대로 걸려서 약 한 달 동안을 죽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동일 본질이듯이 독감 바이러스도 동일 본질인데 못되고 험한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으면 내가 당장 마스크를 쓰고 피했을 텐데 애가 너무 예쁘고 귀여우니까 애 속에 있는 독감 균과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 속에 있는 독감 균이 동일본질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은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계곡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병사 세 사람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자, 이 자루를 가지고 가서 모두 50kg 씩의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했습니다. 한 사람은 가서 무식하게 50kg짜리 돌멩이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한 개를 집어넣고 두 번째 사람은 30kg, 20kg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돌멩이를 어딘가로 이동할 텐데 그러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어깨에 얹어서 가는 방법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돌멩이가 작아야 됐습니다. 그래서 자디 잔 공기 돌 천 개를 모아서 50kg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지휘관이 무게를 달아보니까 거의 정확했습니다. 그 사이에 이 지휘관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명령이 거기에 있는 병사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이제부터 가져온 돌을 모두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실시” 한 개를 가져온 사람은 한 개밖에 안 가져왔으니까 정확하게 거기에 갖다 놓았습니다. 두 개를 가져온 사람은 조금 헷갈렸지만 무사히 갖다 놓았습니다. 천 개를 가져온 사람은 그 중의 단 한 개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은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기가 회개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죄가 모여서 크게 된 사람들은 자기가 제법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마치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것처럼 ‘저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이나 안양 교도소에 있는 정치범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 하나이다. 나는 주일 학교에서 교사를 했으며 십일조를 5년째 바치며 성가대 봉사를 하고 있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영혼의 침체가 죄 때문이라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두 개나 세 개 혹은 다섯 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죄에 대한 치료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흔치 않았고 또 다윗만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산 사람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왕들이 똑바로 하나님 앞에 잘 산 사람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라고 하였고 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더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고 사무엘 하 11장까지는 정말 눈꽃처럼 순결한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오게 됩니다. 그는 시인이었고 군인이었고 전략가였고 정치가였고 왕이었고 문필가였고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찬송)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주님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와 똑같이 여러 가지 많은 죄들을 그가 짓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괄목할 만한 두 가지의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이 자기 나라의 국력을 알기 위해서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잘못 된 동기 때문에 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을 매우 큰 죄로 여기셨고 그래서 그의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고 나라는 큰 형벌을 받게 됩니다.
당시 인구조사는 인구만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의 수효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한 조사의 이유였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전쟁에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병거와 말 이런 것들을 헤아리는 것도 포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것들을 조사하는 것을 싫어하셨을까요? 당시에 큰 나라의 많은 왕들은 시간이 나면 그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자기나라의 병사가 어느 나라보다 더 많고 어느 나라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나라는 강대국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이나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그 나라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한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 앞에 깊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결정적인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지극히 제한된 정보를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있었던 이 불륜, 이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해석할 지에 대한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다윗은 어느 한 순간 불끈 하고 색의 정욕이 발동하여 이 여자를 겁탈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아마 버렸을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상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왔고 누구도 그의 주위에는 멀리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내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 중에 다윗이 푸근하게 마음을 기대며 인격적으로 소속감을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천애의 외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는 순간 그가 깊이 반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욕정도 함께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스터리는 왜 그 여자는 벌거벗은 채 그 때 거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이 다윗을 향한 하나의 유혹의 제스처였을까? 아니었을까? 이다음에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혹시 그 여자를 만난다면 물어 볼 일이고 거기에 없으면 딴 곳에 가서라도 물어 볼 일입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게 되자 이것은 다윗의 영혼에 씻기 어려운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결국 다윗은 이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이 여자를 사랑한 죄 때문에 그것을 덮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사실상 다윗이 살해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여자를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 사건이 이 시인에게 가져다 준 영혼의 상처는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되느냐 하면 구원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무엇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전혀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실 것 같은 확신이 왔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셨던 성령을 거두어 가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전임자였던 사울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거두어들일 때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어떻게 미치광이처럼 살다가 죽었는지를 다윗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자기는 그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자기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의 첫 번째 생각은 어떻게 보면 아주 나이브(naive)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죄를 지었지? 그럼 해결할 수단이 있잖아?’ 왕이 얼마든지 요청하면 제사드릴 제사장들이 수없이 많았고 왕궁에는 최고의 재물로 바칠만한 우양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실제로 그는 그것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충격적인 신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역설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결코 진입할 수 없었을 기독교 야훼 신앙의 영성의 깊은 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제사와 헌신, 제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이 제도가 모든 의미를 저절로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진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서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레브 니쉬바르’, ‘깨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깨어진 다는 것은 이런 도자기 그릇 같은 것을 땅에 떨어뜨려 쫙 하고 금이 가서 쪼개지는 것입니다. 쪼개지지 않고 금이 간 상태에서 겨우 붙어있는 것도 ‘니쉬바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상한 심령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이 ‘통회하는 심령’ 이것은 히브리말로 ‘레브 다께’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예화) 사당동에 가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25~30년 전쯤에 정말 가난하고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튀김 집이 있었습니다. 어떤 튀김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었느냐하면, 닭이었는데 닭을 부위별로 쓸 수 있는 부위는 모두 쓰고 어느 곳에도 쓸 수 없는 곳이 목이었습니다. 이 목을 수없이 어디에서 사오는지 모르지만 몇 포대씩 상인들이 사왔습니다. 그것을 뼈든 뭐든 아작이 나는 오징어포 만드는 기계에 집어넣고 돌립니다. 그러면 이 목 뼈가 으깨져서 가루가 되어 납작한 고기조각처럼 됩니다. 그것을 튀김옷을 입혀서 뜨거운 기름에 튀겨냅니다. 그러면 거기에 노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와서 500원, 1000원을 주고 그것을 삽니다. 사면 비록 거기에 뼈가 있기는 하지만 다 으스러져서 이만한 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튀긴 채로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번 사 먹어보고 싶은데 몸에 해롭다고 사람들이 안 먹어서 이제는 살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뼈가 살아있는데 이것을 오징어포 만드는 기계에 넣고 잡아 돌리니까 뼈고 뭐고 으스러져서 하나의 고깃덩어리처럼 흐물흐물하게 내어 버려진 상태가 ‘다께’라는 히브리어가 가리키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금이 간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뭔가 율법의 비췸을 받고 자각이 생기고 번뇌하는 이런 마음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짓이겨져가지고 형체가 사라져서 흐물거려서 이제는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고는 아무데서도 무엇을 의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그 마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시인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살았던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한 사람이 벤자민 부리크미즈 워필드(B. B. Warfield)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을 통해서 비록 죄를 지었지만 이 죄 속에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그는 이 죄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비밀들을 배워갔다’
(찬송)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래서 아주 놀랍게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회개는 우리 영혼의 잃어버린 생명을 찾아줍니다. 회개는 나약해진 신앙을 다시 불같이 뜨겁게 만들고 식었던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냥 땅은 짐승들을 내어라 했던 것처럼 땅은 인간의 육신을 울려라 하시면 되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흙으로 인간을 만드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히브리어로 ‘아파르’인데 티끌입니다. 티끌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티끌은 모든 가치 없는 것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이 그 티끌을 모아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너희의 육체를 볼 때마다 너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출처 자체가 지상에 있는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해야 됩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보호받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이 지상에 있는 사물들입니다. 이것을 지상자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지상에 있는 사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천상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육체가 요구하는 자원이 아닌 또 다른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 자원이 바로 천상의 자원입니다. 진리,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생명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영혼에 끊임없이 주어질 때 이 영혼이 육체를 지도할 수 있는 우의적인 성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원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리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그것으로서 우리는 영혼의 생명을 공급받으면서 육체와 함께 한 몸을 이루어 건강한 한 인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정농단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이 감옥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저 사태를 꿰뚫어보면 결국은 땅에 있는 것들을 탐욕스럽게 긁어모아서 행복해 보려고 했지만 그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지도해야 할 영혼을 위해서는 아사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의 인생이 어떻게 찌그러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의해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그 분의 영적인 생명과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적인 장애의 상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기독교를 믿는 효용성을 자신의 인생 속에서 누리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중간의 것을 다 떼어버리고 나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는데 거기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하고 하는 것은 ‘Grace’입니다. 원래 ‘은혜’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냥 주는 것입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면 은혜가 아닙니다.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 가보면 하나 사면, 하나 더 줄 때 그것을 ‘크라치아(gracia)’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익숙한 말로 하면 ‘보너스’입니다. 주어야 할 의무가 없는데 특별 행사로 보너스로 하나 더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라치아, 크라띠아 혹은 grace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획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녀석이 어느 날 엄마에게 쪽지를 하나 내 놓고 냅다 도망을 갔습니다. 엄마가 받아보니까 노트에 연필로 쓴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는 청구서, 몇 월 며칠 엄마 없을 때 동생 봐 준 것 세 시간 곱하기 200원은 600원, 아빠 구두 두 번 닦아 준 것 두 번 곱하기 200원은 400원, 그리고 동생 아팠을 때 엄마 심부름으로 밤에 약국에 뛰어 갔다 온 것 1회 사용료 600원, 도합 1600원을 청구합니다. 아들 아무 아무개” 엄마가 받아보고 그 다음날 아들이 학교에 갈 때 아들에게 도시락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엄마가 편지를 썼는데 친구들하고 밥 먹을 때 펴 보거라.” 아들이 점심 때 도시락을 열어보니까 엄마가 노란 편지지에 연애편지처럼 사각으로 접은 편지가 있었습니다. 펴 보니까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너를 뱃속에 담고 아홉 달 반 동안 고생한 것 공짜, 네가 아파서 119에 싣고 응급실로 뛴 것 세 번 공짜 등등 여러 가지를 적고 마지막에 아들아 엄마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구나, 모두 공짜다, 아들 사랑해 엄마가”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심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부를 안 하고 까불고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맞았습니다. 아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니 이렇게 모든 것을 공짜로 줄 수 있는 엄마가 왜 나를 때릴까?’ 그것은 사랑하면 모든 것을 공짜로 줄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하니까 그 날 심하게 맞은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은혜 안에 이미 소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은혜의 소명의 내포적 성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관계 자체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사명이 있고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일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으니 이제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에게는 “내가 가정주부로 부름을 받았으니 온 마음을 다해서 이 가정에 가족들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자매님들은 싫어하시죠? “어찌 그것이 여자만의 소명입니까?” 그래서 이미 500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아주 혁명적인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여러분들에게 위로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 중세 시대에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남성들이 집 안에서 자기 어린아이의 기저귀를 개킬 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신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지금이야 이런 말들을 보편적으로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적인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은혜를 주시지만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시인을 비롯한 모든 언약의 백성들을 의의 길로 이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의의 길이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 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 성경과 책을 항상 자신의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며 그것이 그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끔 만드는 지식의 탐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주 풍부하고 쉽게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공부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자주 사용되는 의미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단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한 단어가 여기에 나오는 ‘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righteousness’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째데크’혹은 ‘째다카’라고 나옵니다. 자 그럼 그 ‘의’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의’는 ‘불의’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는 무엇인가? 당연히 ‘의’의 반대이겠죠? 그래서 ‘의’와 ‘불의’가 대조가 됩니다. 의인은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고 악인은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시대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의로운 삶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무엇이 의로운 삶이고 무엇이 불의한 삶인지 잴 수 있는 선명한 계량기가 있었습니다. 그 계량기가 바로 모세 오경이었습니다. 모세 오경을 토대로 인간이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고 법은 또 어떻게 집행이 되어야 하는지 뚜렷한 선을 그려 놓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것을 더 확장하면 모세의 오경입니다. 모세 오경은 모세가 쓴 첫 번째 다섯 권의 책입니다. 오늘날은 우리들이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를 잘 판단하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늘 하는 질문은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똑같은 질문을 다윗의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것일까? 모세가 살아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문제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걸으면 의로운 길이지만 율법은 인간의 외형의 삶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그 당사자의 마음의 품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모든 율법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율법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서도 반복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가르침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서 ‘강령’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바로 벽에 박힌 못입니다. 이 못에 빨래를 걸어놓습니다. 걸려있습니다. 걸려있는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와 성문서가 걸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못이 없다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강령이 없다면 이 강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무서운 도전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쉽게 구약의 종교는 외형적인 종교이고 신약의 기독교는 내면적인 종교라고 그런 식으로 해석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읽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이런 단어들 한 단어, 한 단어를 깊은 뜻이 무엇인지를 공부해 가면 이것이 1년, 2년, 3년 쌓이고 나면 이것이 커다란 힘이 되어서 성경을 볼 때 눈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지식은 어디에서 얻게 되는가? 많고 많습니다. 서점, 인터넷 들어가 보면 성경 사전, 성경 신학 사전, 성경 신학용어 사전, 이런 것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책을 사십시오. 그래서 예수를 한 20년 믿었으면 벽에 한 쪽은 기독교 서적으로 꽉 차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친숙하게 읽고 그런 엄마 아빠의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랄 때 이것은 사상이 있는 그리스도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30년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 갈 때 성경에서 먼지를 털고 요즘은 그것도 안 가져갑니다. 핸드폰을 열어서 보는데 그것을 보고 자녀들이 자기도 안 읽는 책을 자녀들한테 읽으라고 하면 읽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 취직할 때 돈 100만원씩 주고 자소서나 쓰는 그런 비극이 오게 되는 것 아닙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아멘을 해 보십시오. 아멘.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의’라고 하는 대표적인 두 단어는 ‘째데크’이라고 하는 단어와 ‘째데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인데 하나는 여성형 단어이고 하나는 남성형 단어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르냐면 ‘모두 짜다크’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인데 남성형으로 사용이 되면 째덱이라는 단어는 속에 있는 품질을 가리킵니다. 마음과 내면의 의, 째데카는 이것들이 행동으로 바깥으로 나왔을 때 산출되는 많은 결과들을 여성으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죽은 것 같은 이 시인의 영혼을 살려내시는데 이 시인은 그 하나님이 자신의 죽은 것 같은 영혼을 그 침체에서 회복시키시는 그 의도를 명백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내 영혼을 놀라운 방법으로 이렇게 소생시키시는 것은 나를 하나님이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의의 길이다.
(예화) 저는 정말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일찍이 사업하셔서 실패하셨는데 그 실패 하신 그 때가 제가 돈이 막 필요한 그 때였습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은 무척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도 저는 독립정신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의지하면서 인생을 설계한다든지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바라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거북스럽고 힘겨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쨌든지 그러다가 생전 처음으로 집다운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살 능력이 안 되는데 신학대학에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그 학교에서 저를 면접을 하더니 “주거 환경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래서 “조그마한 집 방 두 칸을 전세를 얻어서 살고 있고 한 칸은 아내와 아이들이 쓰고 다른 한 칸은 제가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종종 내 방에 놀러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시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당시 20년 전이었는데 학교에서 5천 만 원을 무이자로 빌려줬습니다. 그냥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수님이 갚고 싶을 때에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방배동에서 생전 처음 42평형 빌라 전세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들은 너무 좋아서 동네에 뛰어다니면서 우리 집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뛰어다녀야 되고 화장실이 두 개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어쨌든 그 집에 와서 몇 년 살았는데 어느 날 건너편에 살던 기도를 많이 하는 집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사모님, 내가 기도를 깊이 하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목사님께 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다, 왜 살 사람한테는 말씀을 안 하시고 팔 사람한테만 말씀을 하실까?” 그래서 뜻하지 않게 오래 살 준비도 안 되었는데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대출을 받고 집을 샀는데 생전처음 취득세, 재산세를 내 봤습니다. 그렇게 조그만 집이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 집 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서 세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이렇게 내라고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뭐가 이렇게 비싸요?” “아줌마, 비싸요?” “네” “그럼 반만 내세요.” 하며 그 자리에서 반을 깎아준다며 하는 말이 “아줌마, 집을 판 사람하고 둘이 조용히 만나서 이중계약서를 쓰세요, 그것이 요즘 청문회에 나온 계약서이고요 다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값을 2/3로 낮추면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아내가 집에 와서 물어봅니다. “여보, 이렇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해요?” “그것이 말이 되냐?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앉아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있으면 성령님께서 엄청 감동을 하시겠다.” “내야 되겠지?” “그것을 말이냐고 하냐? 로마서 13장을 봐라.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롬13:7) 하지 않느냐?” 그래서 세금을 다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돈이 없었습니다. 아들 저금통까지 깨서 맞춰서 세금을 가지고 갔습니다. “세금 내러 왔습니다.” “어, 아주머니 오셨네? 계약서 써오셨어요?” “아니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냥 다 내려구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여직원이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어땠겠습니까? ‘아, 존경스러우신 분들에게 내가 거짓을 행하도록 유혹했구나.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사는구나.’ 하면서 우리를 쳐다봤겠습니까? 아니면 ‘어이구 병신 줘도 못 먹어.’ 그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도 그리스도인들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와달라고 해도 너무 바쁘니까 집회를 잘 못 가는데 30대,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제가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해 달라고 해서 일찌감치 출발을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지방도로를 벗어나고 나니까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막 달렸습니다. 저쪽에서 파란 옷을 입은 경찰이 불렀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이고 공손하게 갔습니다. ‘면허증 좀 보여주십시오.’ ‘왜요’ ‘어쨌든 보여 주십시오’ 해서 보여줬더니 ‘속도를 위반 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속도를 위반했어요?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 ‘여기에서는 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 너머에서 과속 하셨습니다.’ ‘산 너머에서 위반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거기에 내 친구가 있는데 스피드건(speed gun)으로 쏴서 나한테 보냈습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저에게 벌을 주십시오, 대신 제가 급하니까 빨리 좀 해 주십시오.’ ‘뭐 하시는 분이십니까?’ ‘이런 사람입니다.’ ‘아, 대학 교수님이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해서 저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빨리 가고 싶어서 스티커를 받아서 썬 바 뒤에 꽂아놓고 급해서 간신히 도착을 해서 강의를 하고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 날인가 딱지 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가서 내야지 교회 직원을 시킬까 하다가 뭘 그런 것까지 하면서 혼자서 은행에 가서 창구 앞에서 돈을 내려고 펴 보니까 벌금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 당시 과속하면 2만 원 정도 내야 됐는데 보니까 6천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6천 원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까 ‘길거리에서 담배 피다가 걸렸음.’ 만약에 그것을 우리 교회 직원을 줬다면 우리 목사님이 어디에 가서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경찰한테 걸려서 이 딱지를 끊어 오셨을까? 거기에서 6천원의 범칙금을 내고 오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게 뭘까? 이건 좀 아니다. 젊었을 때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피드광이었습니다. 요즘은 안 그럽니다. 요즘은 제가 운전도 안합니다. 경찰이 알면 별로 안 좋은데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서울에서 해남까지 네 시간 만에 도착을 했습니다. 목포에서 두 시간, 목포에서 해남까지 두 시간, 그 당시 일곱 시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시속 어느 정도였을까요? 그 때 좋은 차도 아니었는데 천천히 갈 때 180km 빨리 갈 때 240km 서해안 고속도로가 막 생기고 카메라를 아직 안 달았을 때였습니다. 그 길이 생겼는지도 몰라서 차도 별로 없을 때였습니다. 그 길을 한 번 원하는 대로 밟아 봤습니다. 그렇게 달리던 때였기 때문에 더 반성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건 뭐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그 다음부터 원칙을 세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도로교통법을 지키자, 그러나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습니까? 고속도로 100km 그 100km가 언제 적 100km입니까? ‘가능하면 지키자 지키지 못 할 때에는 처벌을 달게 받되 결코 봐달라고 하지 말자’ 그 때부터 걸린 적도 별로 없지만 한 번도 봐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 후로는 저희 집 사람 말로는 운전대를 잡고 제 2의 회심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속도를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주셔서 새롭게 생명과 삶의 힘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그것을 즐기라고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뭡니까? 하나님이 바로 의의 길을 걸어가라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도 그 길이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주시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집에 세금을 낸 사건은 내 개인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이것은 어쩔 수 없어 이것은 법대로 가야 돼.’ 하면 쉬웠습니다. 두 번째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지하실에서 7명이 교회를 시작했는데 250명이 모여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산소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가끔 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가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워낙 길었습니다. 주일 낮 예배에 보통 100분이 기준 이었습니다. 그것을 오전 오후예배 두 번을 듣고 나면 200분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가끔 졸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올라오게 되었는데 올라온 인원이 250명에서 3년 반 만에 1000명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이사를 와야 했는데 그곳이 평촌이었습니다.
(예화) 여러 가지 많은 사연이 있었는데 땅을 사야 하는데 땅도 없고 돈도 없었습니다. 딱 한 곳이 있었는데 부동산에서 ‘그 땅은 내놓았다가 도로 들여놔서 여러분들이 가도 안 팔 것입니다.’ 해서 ‘안 팔아도 좋으니까 주인이라도 보게 해 주십시오’ 해서 주소를 알아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주인을 만나서 ‘땅을 좀 파십시오.’ ‘안팝니다.’ ‘그러지 마시고 좀 파십시오.’ ‘아니 안 판다는데 왜 귀찮게 합니까? 가시오.’‘그래도 생각해 봐 주십시오’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내가 그 땅을 팔면 거기에서 뭘 할라우?’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뭐요? 교회요? 일주일만 생각을 좀 해 봅시다.’ 우리는 이것 뭔가 비밀이 있구나, 하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신데 일평생 몇 십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마지막 그 공장을 끝으로 사업을 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이 공장이 끝나고 나면 이 자리에 교회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갔더니 ‘내 땅을 가지고 가시오, 내가 팔겠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땅이 35억을 달라는 땅인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돈이 150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계좌에 입금이 되어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약금을 줘야 되는데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느 교인이 계약금을 자기가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계약금을 가지고 가서 계약을 했는데 잔금이 있어서 돈을 치러야 넘어 오잖습니까? 계약을 하러 갔는데 그 할아버지께서 ‘교회에 돈이 있수?’ 해서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 너무 창피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거짓말이 되어서 우물쭈물했더니 ‘있긴 뭐가 있겠수?’ 그러더니 금고를 열더니 땅문서 인감도장 모두 주는 것이었습니다. ‘가지고 가서 교회 명의로 바꾸고 대출을 받아서 가지고 오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 분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땅이 얼마입니까? 했더니 36억이라고 합니다. 막상 계약을 하러 갔더니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30억은 계약을 하고 6억은 서류에 쓰지 말고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또 이중계약서를 써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세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놔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인데 만약에 계약서를 36억으로 쓰면 여기에 있는 돈을 받아서 대출을 갚고 세금 줄 돈이 모자라서 자기가 2억을 보태야지 청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교회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이 재산을 청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재직들을 모아놓고 물어봤더니 다들 사회에서 생활하신 분들이라 ‘목사님, 그것 문제없습니다, 다 그렇게 합니다. 대기업들도 그렇게 하고 토지의 85%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회계사한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꼭 하셔야 됩니다. 장부를 진짜 장부와 가짜 장부 두 개 쓰셔야 됩니다. 해서 ‘아 이건 아니다, 됐다 세금이 얼마나 나오느냐?’ 했더니 3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를 다시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6억을 달라고 했지만 우리 목사님이 39억을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약서는 정식으로 쓰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36억만 주면 살 땅을 우리 스스로 3억을 얹어서 39억을 주고 땅을 산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크고 나니까 3억이란 돈이 큰돈이긴 하지만 숨이 넘어갈 정도의 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빌려주는 곳도 없고 제2 금융권에서 1년에 25%의 이자를 내겠다고 해도 교회는 믿을 수가 없다고 안 빌려주던 때였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3억을 더 주고 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할 때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입술에 침만 바르면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손해보고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몸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야 됩니다. 한 때 미국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멕시코와 전쟁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때 교회가 극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 때 부를 찬송이 이것이었습니다.
(찬송)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메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다 외치며 사나니
그것이 바로 그 당시 교회가 불렀던 찬송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전쟁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온 몸을 던져서 교회가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두신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빛으로 살라고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사는 방식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고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것을 희생하지 않고 그 길로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삶이 매우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이기며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둡고 캄캄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이 온 세상에 풍랑이 일 때 배가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수천 발의 조명탄을 쏘아 올려 바다를 대낮과 같이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등대 하나만 제자리에서 빛나도 그 등대의 불빛을 보면서 수많은 배들이 항구에 안전하게 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힘들 때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너무 큰 고난이다 생각할 때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고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의의 길을 걷는데 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 힘을 하나로 묶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로운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