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더욱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이미란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영적으로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어제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4절로 넘어갑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의 의미는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험한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5절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자기의 잔이 넘친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잔치집의 문맥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혼인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자리에 주인은 가장 오래되고 잘 익은 포도주를 내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님들의 잔에 가득가득 아낌없이 따라줍니다. 그리고 잔과 잔이 부딪히면서 축배를 드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기쁨의 소리가 가득한 그 잔칫집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입니다. 잔칫집에서 그렇게 온 사람이 기뻐하며 잔을 부딪치며 환호했던 것처럼 그런 기쁨이 자기의 마음속에 넘쳐나고 있다는 고백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행해지는 원인을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원인은 올바르지 않은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향락주의 시대입니다. 이단도 무섭지만, 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향락주의와 쾌락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위협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미친 듯이 향락을 찾고 쾌락을 찾을까요? G. K.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충격적인 언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에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모든 기쁨을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찾도록 창조되었는데, 죄와 어두움이 그리고 무지가 그 참된 인생의 기쁨을 주는 곳에서 기쁨을 찾을 마음을 포기하고 그릇된 곳에서 그 갈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상이요, 쾌락을 향한 질주입니다.
(예화) 한 20여 년 전에 어느 의사가 글을 썼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맨 끝에 가면 수유동이라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기부터 서울에서 많이 확장되었기 때문에 멀리 있지만, 조금만 더 가면 의정부와도 연결이 됩니다. 의사가 당직을 서는데 응급차도 아니고 택시가 왔습니다. 새벽인데 신사들이 한 남자를 업고 와서 병원 문을 두드리면서 이 사람을 좀 살려달라고 금방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찰을 해보니 이미 죽었음을 확인했습니다. 1시간쯤 지나자, 가족들이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가족들은 울어도 의사는 죽은 시체를 바라봅니다. 의사 생활을 20년 이상 했지만, 저렇게 기묘한 자세로 죽은 사람을 처음 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한쪽 손을 움켜쥐고 한쪽 손을 펴고 죽은 것입니다. 신기하다고 느껴 아무도 없을 때 그 손가락을 펴보니 손에서 무언가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화투 두 장이 떨어진 것입니다. 뒤집어 보니까 의사도 모르는 사이에 ‘38 광땡이네’ 라는 말이 나와 버렸습니다. 무슨 사연인가 봤더니 장사 집에 가서 친구들하고 밤새 화투를 했는데, 새벽에 끗발이 붙은 것입니다. 돈이 이만큼 쌓였는데, 3광 8광이 손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훌륭하게 되든지 별로 훌륭하지 못하던지 어디에서 태어났냐고 묻는 후손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우리 아빠가 왜 죽었어?’ 라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은 자손들이 우리 할아버지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왜요?’ ‘38광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그리 되었다.’라고 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실화입니다.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동양화 두 장을 두고 그렇게 가슴을 조이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지만, 여러분은 좀 더 큰 거 집문서, 땅문서, 통장, 학위나 무슨 자격증을 만지다가 죽은 것이라고 보이길 원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명백히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사나, 우리는 왜 태어났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목회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14살 2달 되는 해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었습니다. 집에 변두리였기 때문에 논둑을 지나야 20분가야 교회가 나옵니다. 거기 엎드려져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가난했지만 가난해서 운 것은 아닙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세상은 내게 무엇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녔습니다. 교회는 제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 말 중 단 한마디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은 수없이 만났지만 저는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교회 와서 선생 노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캄캄한 절망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각하게 자녀들을 봐야 합니다. 주변 권사님이나 집사님들은 이러십니다. 목사님이야 어렸을 때 워낙 영특하셨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했지 우리 애들은 핸드폰 들여다보고 게임이나 하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부모로써 아직 멀었다고 말합니다. 교육을 말하는 ‘education’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라틴어 ‘educatio’입니다. 이는 ‘이끌어낸다’는 뜻입니다. 그 아이들이 스마트폰 게임과 음란물에 빠져들까를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으로 진정한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인데 그것이 눈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 노골적으로 통곡하고 울었지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그걸 감춘 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 쓰라린 고민과 고통을 끌어내고 영혼의 목마름을 읽어 내는 것이 부모와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통곡하고 울고 난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눈물을 씻고 난 결실이었습니다. 신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난 무신론자로 살 것이고 더욱이 하나님이란 분이 있더라도 그 분은 나의 인생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치열한 무신론자의 삶으로 6년 동안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는 죽음의 끝에까지 갔다가 회심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병적인 증상이 삶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소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며칠이겠습니까? 좋은 집을 샀다면 한 달이 행복하고, 훌륭한 말을 샀다면 일 년이 행복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면 일주일이 행복하고, 이발을 했다면 하루가 행복하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그게 얼마나 허무한가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시인이 그걸 경험한 것입니다. 폭풍의 바다를 지나고 눈보라 치는 언덕을 넘고 사망의 그림자가 가득한 골짜기를 지났는데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이 당신 자신으로 가득 채우셨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여러분 이런 단어 최근에 써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쁨’, ‘환희’, ‘감격’, ‘가슴 벅참’, ‘넘치는 즐거움’, 더욱이 이것을 신앙의 영역에서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영혼의 빈 잔을 채워주셨을 때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무엇 때문에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부은 포도주 잔처럼 넘치는 것을 경험했겠습니까? 그 이유를 성경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지금 번역에서는 ‘차려주시고’라고 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는데 예전의 번역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그 상을 졸업식 때 주는 상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슐한’이라는 단어인데 상중에서도 ‘밥상’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밥을 우리처럼 이렇게 바닥에 앉아 아빠 다리를 하고 먹거나 서양 사람들처럼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서 높은 테이블에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파 같은데 비스듬하게 기대 앉아 티 탁자높이의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슐한’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원수의 목전에서’에 대해서 히브리 성경에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의 밥상을 차려주시고’ 라고 나옵니다. 그것이 이 시인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 시인에게 밥상을 차려주셨을까요? 설마 여러분들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상 네 귀퉁이에 낚싯줄을 매달고 반찬을 잔뜩 담아서 구름을 뚫고 이 세상에 내려 보내어 시인이 이것을 온갖 반찬과 먹을 것을 포식했던 경험을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바로 문학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밥상과 관련된 성경의 신앙입니다. 밥상이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신앙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 우리도 양반과 상민이 있을 때 양반이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민과 함께 잠은 같이 잘 수 있으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양반은 상민과 함께 밥상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밥상을 같이 한다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셨을 때 가져온 양식이 떨어진 후에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신 사건은 굉장히 의미 깊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밥상을 차려서 온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상에서 먹게 하시는 모습을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눈 뜨고 나면 모두 들판에 나갑니다. 들판에 하얗게 가시 같은 만나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새까맣게 나가서 그걸 거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화목제의 경우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귀천을 막론하고 모여서 함께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제물을 그 날 안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서 같이 먹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이 있습니다. 동대문 옆에 제기동이 있습니다. 그곳에 기우제를 드리는 제단이 있습니다. 비가 안 오면 왕이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천지신명께 비를 구합니다. 그리고 황소를 잡아서 각을 떠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가 끝나면 그것을 나누어서 어마어마한 큰 가마솥에 넣고 삶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지내는 단이 ‘선농단’입니다. 거기서 끓인 국을 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똑 같이 공평하게 한 그릇씩 퍼서 모두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렁탕의 유래입니다.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우리는 한 가족이다 한민족이라고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구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세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먹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은 한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나 랍비들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처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끈임 없이 그들과 함께 밥을 드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죄인들을 이 세상에 나쁜 사람들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한 가족으로 보시며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당신이 그들의 형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하신 일이 바로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떡을 떼어주며 ‘이것은 위하는 바 나의 몸이다’ 잔을 따라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자 마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와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하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생명적인 연합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이 시인과 하나님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밥상을 받았을 때에 이 시인이 너무 기뻐서 감격과 환희, 기쁨이 확 차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교회 개척 1년쯤 후에 시편23편을 설교했었습니다. 그때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23편을 집에서 읽었습니다. 원래 쓰인 언어가 이스라엘 언어입니다. 그 당시 저는 히브리어에 깊이 빠져 있었을 때였기 때문에 성경을 대부분 히브리어로 읽었습니다. 읽다가 너무 감격해서 성경을 가슴에 끌어안고 방안을 몇 바퀴 돌아서 히브리어 성경 아니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나오는 ‘차려주시고’라는 동사 때문이었습니다. ‘차려주시고’는 히브리어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부대에 많은 병사들이 대오를 갖추고 학열을 지어서 진을 치고 있을 때를 묘사할 때 ‘아라크’라고 합니다. 시인이 받은 밥상이 범상한 밥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초창기에 1,100명이 모일 때까지는 등록한 성도들을 제가 모두 심방을 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리 심방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포기를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심방을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워낙 바빠지기도 하고 교구 목사님들이 여러분 계셔서 해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상이 났다든지 그 가정에서 특별히 담임 목사님의 심방을 원한다고 하시면 저는 심방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집안에서 뭔가를 해주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주부들이 어떤 음식을 맛있어 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가 하지 않은 모든 밥은 다 맛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목사님 어떤 집사님이 심방을 와달라고 하십니다. 그럼 밥은 하지 말길 얘기합니다. 가다가 갈비탕이라도 먹고 가자고 합니다. 그래도 그 지체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갔는데, 11시에 심방을 갔고 50대 초반의 여성 지체였습니다. 우리 교회 와서 주님 깊이 만나고 은혜를 아주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분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저를 심방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롭게 예배를 마쳤습니다. 기도를 다 받은 후에 그 지체는 저에게 점심을 먹고 가길 계속 권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3~4명이 밥상을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본적이 없는 교자상을 들고 왔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하나도 중복되는 반찬이 없이 꽉 차 있었습니다. 밥상을 보는 순간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한 끼 먹는 걸, 사라지는 걸 이 시간에 성경을 한 장 더 보고 기도를 한 시간 더하시지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했더니 이 자매님이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분은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이미 읽었거든요? 맛있게 드세요.’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먹으면서 젓가락을 들면 사정거리 안에 반찬이 안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무릎 꿇고 앉아서 반찬을 날라다 주시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런 밥상을 못 받아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밥상을 어떻게 차리셨냐고 여쭤보니 한 달 전부터 계획했고, 보름 전부터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고, 열을 전부터 밑반찬을 만들고 닷새 전, 삼일 전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으로 어제 오후에 장을 보고 다 다듬어서 준비해서 새벽 6시에 언니들을 모두 불러서 모든 걸 준비했다가 예배 끝나자마자 그걸 모두 따뜻하게 조리해서 상을 내온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집에 손님이 왔을 때, 그를 어떻게 밥을 대접하는지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지를 보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집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그렇게 시집도 안가고 말썽을 부리더니 어느 날 드디어 시집을 가겠다고 왠 녀석을 불러왔습니다. 엄마 아빠는 기대를 잔뜩 하고 우리 사윗감이 어떤 녀석이 올까 기대했는데, 얼굴을 보니 아닌 것 같고 대화를 해보니까 아닌 게 틀림없고 밥을 먹어보니 확신이 굳어진 것입니다. 아 이 녀석과 결혼하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은 그 녀석과 결혼 못하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못 이겨 결혼을 시켰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안부 전화를 합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갔다 왔어’, ‘그래 잘했다’, ‘엄마 우리 내일 갈 건데 점심 줄꺼지?’, ‘그럼 오너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신랑이 밥을 달라고 합니다. 밥하기 싫으니까 ‘참고 이따가 점심때 친정가면 엄마가 잘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실거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물 보따리를 하나를 들고 친정집에 갔습니다. ‘엄마’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문이 닫혔나하고 열어보니 문이 열려 있습니다. 지금쯤 전을 부치고 고기를 굽고 난리가 나야 하는데 조용합니다. 그래서 보니까 아빠는 없고 엄마 혼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사위가 절을 하고, 딸이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얘기합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면서 2분 만에 점심상을 차려서 나옵니다. 한쪽이 깨진 나무로 만든 소반에 먹던 밥 두 개에 찬물을 부어서 제사지내듯이 숟가락 두 개를 꽂은 다음에 반찬은 달랑 하나,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만 덜렁 올라와 있습니다. 엄마는 ‘차린 것은 없지만 넉넉히 들게’ 라고 말하고 상을 탁 내려놓는데, 상이 삐뚝하면서 밥이 물이 찍 하고 옆에 튀었습니다. 그게 바로 무슨 뜻일까요? 엄마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밥상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위, 난 니가 싫어, 어쩌다 우리 집안이 너하고 엮였냐? 다시 안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나타나지 말아다오, 우리 딸을 돌리도.’ 라고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시인에게 차려주신 밥상은 ‘아라크’의 밥상이었습니다.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왕실의 식탁이 차려진 엄청나게 많은 음식들이 차려진 엄청난 밥상이 시인에게 내려온 것입니다. 그 시인이 밥상을 받았습니다. 원수들이 이 시인을 한 칼에 죽여 버리기 위해 덤벼드는데, 화려하게 차린 식탁을 앞에 놓고 누군가와 겸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이 악인들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저 자식이 저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어? 하나님과 겸상을 할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family였어?’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인을 매우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의 목전에서 한 밥상을 차려 주셨고’ 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큰 자비하심으로 아무것도 아닌 다윗에게 찾아오셔서 분에 넘친 화려한 식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이 시인이 낚싯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99개의 진귀한 반찬이 담긴 그런 밥상을 천사들로부터 받아본 적이 있다는 것일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이것은 하나의 문학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이 자신을 가족으로서 후하게 대접해주시는 넘치는 사랑을 묘사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시인이 첫날 말씀 드린바와 같이 결코 우리가 부러워만 할 수는 없는 매우 특이한 인생을 살았고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의 날들을 지났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런 속에서 이 시인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왕족의 식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의 family중 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감격을 누렸겠습니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차려진 영적인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당한 후에는 내가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내 영혼을 구해주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그 말씀의 식탁, 시련의 계곡을 지나며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며 막막한 사막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이 이는 모래사막 한가운데서 그는 오직 주님의 말씀하나를 붙들고 영혼의 부흥의 때를 누리면서 그 모든 것을 이겨나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는 영적인 생명의 힘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 자매님이 한분 계셨는데, 그 자매님의 아이가 정서 장애였습니다. 차라라 사고가 나서 팔이 하나 없다든지 귀가 하나 없다던 지도 심각한 장애지만 어떤 시도를 해서라도 보조적인 도움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아 아이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몸은 80kg, 나이는 18살인데 정신은 4살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55kg 엄마 무릎에 앉으려고 합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는 교회오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안 일어나는데’ 라고 말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던 중 한 말씀이 확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말은 안하지만 이와 같은 똑같은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지 제가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데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왜 나에게’라는 질문에 대해서 100퍼센트 대답을 못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리고 보니, 그 날 부터 자기 자녀가 다르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론 ‘내가 이 세상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은 정신 장애가 있는 우리 아들입니다.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의 많은 좋은 것들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가식적인 고백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에서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그러면서 순식간에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뭡니까? 그것은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의 힘은 바로 이 생명의 힘입니다. 바로 이 생명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식탁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50대 초반, 중반 될 때까지 평생소원이 병원에 입원해서 하얀 침대에 누워 연약한 손으로 꽃다발을 받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 나이가 지나가고 10년 동안 11번을 입원하고 9번을 수술했습니다. 이제는 많이 해봐서 싫습니다. 이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힘이 넘쳤습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생명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에너지, 힘입니다. 막다른 삶의 상황에서 그걸 극복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생명의 힘이고, 이것을 주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이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시인에게 잘 차려진 왕족의 식탁과 같았습니다. 그걸 먹으면서 힘이 나는 겁니다. 곤고하고 너무 힘들 때, 자기가 진짜 만나고 싶은 친구가 혹은 형제가 교인이 목회자가 함께 찾아와서 함께 좋은 식탁을 나누며 밥을 먹어도 이상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이 바닥에서 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밥이 주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인에게 그러한 영적인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 같은 때에도 하나님이 살리신 것을 경험했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의의 길을 걸어갔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위로하여 현실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 깨달음이 너무 소중해서 설교를 듣다가 그 말씀의 은혜가 너무 커서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없었던 생명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죽음의 기운을 이기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라는 병을 날마다 극복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씀의 부흥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 보십시오. 왕관이 넓은 땅이 수없는 곡물이, 그리고 바쳐온 수많은 선물이 이 시인을 감격스럽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차려주시는 말씀의 식탁, 은혜의 밥상만이 이 시인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워서 하나님 사랑에 넘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두 번째 그의 빈 잔이 넘쳤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3가지 직분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형식적으로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지만 왕은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진짜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종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또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중요한 사명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 윤리에 적용할 때에 그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교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또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사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어떻게 하면 죄를 지은 불길은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과 교제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왕은 이 모든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대로 구현하는 사람이고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나아가며 죄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은 하나이고, 선지자나 제사장은 더 많았습니다. 이 세 직임을 맡은 사람들이 속발처럼 버티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떠받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로 미친 듯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지만 미국에서는 4년과 연임으로 4년 더 해서 8년, 우리나라에서는 5년 대통령하고 내려오면 다 늙어 버립니다. 결국은 대통령은 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바마씨도 대통령될 때에는 청년이었는데, 8년하고 내려올 때에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어렵겠습니까? 그러니까 왕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 말씀 안 듣기가 소심줄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세상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면 그렇게 고분고분 듣는 시대입니까? 그러니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돌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제사장은 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결국 이 세 가지 직분은 인간이 맨 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직분으로 사람을 세우실 때에는 빈손으로 세우지 않으시고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때 사용되었던 기름은 오늘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올리브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올리브유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쩐 것이고 바로 그것을 부으며 그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리브유를 붓는 사건이 그냥 기념식이 아니라 실제로 기름을 부을 때에 그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성령을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이전에 없었던 탁월한 지혜와 용기, 결단할 수 있는 능력, 지도력, 총명 같은 것들을 갖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의 경륜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이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어떤 사람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끝낸 다음에 그 성령을 거둬가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을 징벌하는 의미로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때가 되고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거둬 가시는 형태의 성령의 역사가 구약의 역사였다면,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한번 신자에게 오시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 안에 영원히 계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가 이뤄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고 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순종의 삶을 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은 일생에 세 번의 기름 부음을 경험합니다. 그 세 번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잊히지 않던 성령의 경험이 첫 번째, 그가 이새의 아들로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을 때였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니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 없었던 탁월한 지혜와 용기, 그리고 판단력, 담대함을 갖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성령 충만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차면 희열, 기쁨, 감격들은 성령의 충만함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성령은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은 기독교가 점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들이 무시되고 있는 시대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냥 같은 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처럼 그리고 서로 나누고 의지하고 사는 그런 생활 공동체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접붙여진 그런 공동체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끈임 없이 흘러 들어옴으로써 그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 용기를 줍니다. 사랑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한 7~8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5월이 되면 여느 목회자들과 같이 가족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짧으면 5주 길면 8주 정도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부모, 부부, 자녀, 형제에 대해 나누어서 설교를 합니다. 어느 해는 늘 그렇게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교회의 지체들을 살펴보니 의외로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혼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새로운 설교를 할 용기를 주셨는데, ‘이혼을 생각 하는 그대에게’ 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인들이 그 설교로 썰렁했을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부부가 차를 타고 가는데 남편이 짜증을 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진짜 이상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혼을 생각한다고, 이혼을 생각하는 설교를 그렇게 오래 설교하시냐’고 남편이 얘기합니다. 옆에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나 많이 생각했거든’ 이라고 말입니다. 또 어느 날 남편이 그랬답니다.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내에게 ‘여보, 나는 생각 많이 했어, 난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때도 나는 당신하고 결혼할거야’ 라고 말하니까 아내가 곧 신경질을 내면서 ‘당신은 어떻게 다음 생애에도 당신 생각만 해?’ 라고 말했답니다.
또 다른 부부의 경우, 아내는 남편하고 살다 살다 지쳐서 이혼하기로 다짐하고 법원에서 서류를 받아다가 써서 남편 이름만 쓰고 도장만 받아 놓을 수 있게끔 장롱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를 해서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친구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답니다. 친구의 권유로 할 수 없이 이끌려서 생전 처음 교회를 왔는데,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그날 하나님이 그 자매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자매는 통곡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집에 와서 남편을 부릅니다. 남편은 또 이혼하자고 할까봐 도망 다니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안 살겠다고 할 정도면 못생겼다거나, 배가 나왔다거나, 키가 작다는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아이까지 낳고 긴 세월을 살았으니 정말 남편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것입니다. 남편은 잔뜩 긴장해 있는데, 아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더니 힘이 없이 주저앉으며 웁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집이 이지경이 된 것이 다 당신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오늘 깨닫고 보니까 진짜 나도 나쁜 사람이었어. 당신을 너무 괴롭게 해서 정말 미안해’라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남편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바보, 진짜 너 때문이지’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남편도 ‘아냐,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이었어’ 라고 말하며 울었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찬송)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살아 있는 한, 살아가야한다’ 라는 말은 명제입니다. 죽었으면 안살아도 됩니다. 살아 있으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같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힘들면, 술 진탕 퍼먹고 며칠 동안 골방에서 꺽꺽 거리고 울 수는 있습니다. 술 깨고 밖에 나오면 현실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쾌락에 빠져서 며칠 밤을 지내고 나면 그동안은 마약을 맞은 것처럼 잊을 수 있습니다. 그게 끝나고 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똑같은 현실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앙이 장난입니까? 신앙이 농담입니까? 목사를 위한 신앙입니까? 아니면 누구를 위한 신앙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좋으라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 예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봤던 사람들입니다. 저 14살 나이에도 하나님 없이 살았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일 비겁한 인간들이 누구냐면 이 명제를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우리 엄마 때문이야, 내 인생이 꼬인 건 우리 아빠 때문이야, 내 인생이 틀어지기 시작한건 이상한 남편 만났기 때문에 이 꼴이 된 거야, 내 인생이 이렇게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은 만나지 말았어야 할 마누라를 만나서 이 꼴이 된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잘못된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타율적이고 타자 의존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판에서 한참 동안을 통곡하고 울고 눈물을 씻으며 박박 머리 깍은 14살 2개월 된 아이가 이젠 무신론자로 살겠다고 했다가 6년 동안을 지냈습니다. 엄청나게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문학과 철학과 사상을 헤매다가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탕자의 돼지우리 칸 이었습니다.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무릎 꿇고 어렸을 때 들었던 복음을 기억하며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잊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라는 복음의 말씀이 마음을 녹이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세상이 모두인지를 알았던 저의 마음에 천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과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뿌리인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결국은 저 혼자 전도하는 사람 없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고 동네에서 20분 떨어진 허허 벌판에 2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2층에 있는 작은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수요일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교인들은 삐거덕 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저녁에 장작 난로는 때우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평화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긴 세월 동안 유리하고 방황하다가 엄마가 계시는 따뜻한 고향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몇 달 후에 목사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교인 20명, 30명밖에 안 모이는 교회에 멀끔한 청년에 예수를 믿겠다고 왔으니 목사님이 얼마나 좋으셨겠습니까? 더군다나 할아버지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이 이러셨습니다. ‘자네는 이번에 세례를 받게’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게’ 라고 말입니다. 그 당시에 목사님은 제게 하늘같은 분이었는데 제가 어떻게 거역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 날부터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교회를 나오는 것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혼인을 할 수 있을까? 나 같이 걸레 같은 인간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매일 저녁 예배당에 나와서 촛불을 켜놓고 주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응답은 없었지만 토요일이 되었고 문답을 받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목사님이 물을 가지고 저에게 오셔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위로부터 목사님이 기도를 하신 그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온 몸에 퍼지더니 마지막에 몸이 공중에 뜬 것 같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제가 구름에 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세례가 끝나고 예배가 모두 끝났는데도 난 거기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일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쓰레기 같은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셨을까?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그리고 ‘이 더러운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 의로우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동안 울고 나니 예배도 끝나고 사람들도 다 빠져나갔습니다. 그 추운 날 찬란한 햇빛이 성에가 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올 때에 오직 내 마음 속에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꿈도 많고 많은 소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다 필요 없고 오직 살아 있는 날 동안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 드려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살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든 못하든 영문학자가 되는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던 가난하게 살든 부하게 살든 말입니다.
(찬양) 나를 위해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그리고는 생전 처음, 내 인생에 그렇게 사랑해본 대상이 없었는데 그 분께만은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는 환희, 기쁨, 감격, 희열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기쁨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로도 모자랄 만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충만했을 때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이었습니다.
우리 딸이 이젠 커서 직장에 다닙니다. 중학교 다닐 때쯤, 학교 끝나고 아빠하고 달려옵니다. 뜨겁게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왜 그래’ 라고 물어보니, ‘아빠 너무 좋은 일이 있었어’,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데?’, ‘너무 친한 친구가 있는데 사이가 틀어져서 한참동안 말을 안 하고 지냈어. 그런데 너무 괴로웠고 오늘 만나서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기로 했어.’라고 말합니다. 아이 얼굴에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과 화해해도 참으로 행복한데, 하나님과 화해를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 두 가지 꼭 마음에 새겨두시길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실 수 없는 좋은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나쁜 상황의 저자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그분께로 왔고 나쁜 것은 우리의 허물입니다. 두 번째, 그 선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 은혜, 사랑, 기쁨, 감격 같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셔서 그 영혼의 빈 잔이 넘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면 인생에서 다윗처럼 어떤 난관을 만나도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듯이 거기에서 헤치고 나와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일평생을 환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