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 오희열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신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에서 야간대학을 직장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그리고 총신에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했습니다. 다시 7년이 주어져도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Th.M.을 마치고 엉겁결에 신학대학교 교수로 발령이 났고 서른네 살부터 신약대학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를 끝내지 않았고, 그렇게 안양대학교에서 4년, 5년을 머물고 백석대학교에서 같은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제가 뜻이 있어서 당시 학교에서의 굉장히 좋은 proposal에도 불고하고 사표를 내고 개척교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시작한 상태에서 한 2년을 무보수로 설교봉사를 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목회에 올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였다고 생각하고 저의 진정한 신학공부는 사표를 내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박사과정은 공부만 끝내고 논문을 쓰지 않고 그냥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 다음부터 제가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목회에 너무 바빠서 공부의 진도가 조금 안 나가는 경우가 있었고 어떤 때는 몰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쉼 없이 1993년도에 열린 교회를 개척했으니 지금 23년, 24년이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저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고, 특히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몸이 아플 때까지 한 95년부터 2005년, 2015년, 한 20년 동안은 나 자신을 쏟아 부어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저는 비로소 신학이라는 것의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신학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고 정도의 차이만 있지 그런 혼란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셨길래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십니까?” 할 텐데, 하여튼 최선을 다 했습니다. 나의 신학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2천 페이지를 썼는데 그 중에서 한 권의 책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 왔다』라는 제목으로 650페이지 정도로 1권이 나왔습니다. 써 놓기는 2천 페이지를 다 써 놨는데 1권을 먼저 내고 2권을 교정보다가 제 몸이 너무 아파서 멈췄습니다. 어쨌든 세 권을 쓰면서 저 나름대로의 지적인 편력들을, 탐구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인 이것입니다. “우리가 왜 신학을 공부하는가?” 그리고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해 보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이라고 하는 자체를 어떤 활동을 위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신학의 definition 속에 들어오는 내용이 아닙니다. 결국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동기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한 지식입니다. 이 말은, 그 지식이 없다면 참 살기 어려운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그것 없다면 살기는 좀 불편하지만 살기가 어려운 지식이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뜻은 한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자통신 같은 것들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없어도, 예를 들어서 아이패드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도구 없어도 얼마든지 덕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고려할 때 신학이라는 것은 살기위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라고 하는 영국 사람으로 화란에서 활동을 했던 17세기 개혁파 강성주의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The Marrow of Theology, 『신학의 정수』라는 영어 책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면 약간 허접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띠올로디아 에스띠엔띠아 리벤 데오”, “신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기 위한 학문이다, 지식이다.”라고 합니다. 이 책이 100년 뒤에 미국 하버드 대학이 생기고 신학부로 시작을 하는데 그때 최초로 신학교의 교재로 사용하던 가장 중요한 책이 바로 이 사람이 쓴 The Marrow of Theology 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학에 대한 규명도 사실은 그렇게 정밀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지식”, 그리고 살아야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화란의 우트레히트 대학의 교수가 있고, 이 사람이 쓴 Theoretico-practica theologia 라는 『이론 실천 신학』 이라는 두 권으로 된 책을 씁니다. 4*6 백판으로 두 권 합쳐서 1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세상에 인간이 쓴 책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최고의 걸작품이다.” 라고 격찬을 했던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장에서 신학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떼올로지아 에스드 독트리나 비벤디 독트리나 에스드 비벤디 데오 크리스토미” . ‘doctrina’와 ‘scientia’는 ‘교리’이고 ‘지식’입니다. 'Vivendi Deo', “하나님 앞에 마땅히 살아야 할 지식이다.” 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통하여”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기적으로 보면 이것이 조금 앞서고 이것이 조금 뒤의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이야기할 때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한 지식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신학의 definition은, “띠올로지아 에스드 독트리나 비벤디 데오 페르 크리스툼 인 스피리투” 완벽한 신학에 대한 definition 이라고 봅니다. “신학은 지식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렇게 하면서 삼위일체식의 신학에 대한 definition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맨 처음 기독교가 시작될 때부터 사도 시대부터 시작해서 사도, 속사도, 초대교회 교부들, 그리고 2세기 변증가들, 그리고 4세기의 거목인 어거스틴으로 시작해서 그 이후의 중세 신학자들을 거쳐서 오기까지 기본적으로 목회자라고 하는 것,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상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인생관이 무엇인가? 세계관이 무엇인가? 하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판단할 수 있는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 한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놓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신학의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인 목회자가 기본이었습니다. 이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성직 신학자가 있고 비 성직 신학자가 있는데 그 전통이 유지되고 종교개혁 때에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후기에 르네상스를 거치고 계몽주의가 들어오면서 데카르트 이후에, 그리고 신학 쪽에서도 슐라이 마허 이후에 이러한 기본적인 목회자 상이 깨어져서 목회는 행동전문가,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신학자, 지식 전문가로 양분이 됩니다. 이렇게 양분되면서 신학은 목회적 빈혈에 걸리고 목회는 신학적 빈혈에 걸리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학문의 수준이 그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세상에 뭔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상을 선포할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리고, 한편 대학 안에 남아있던 학문은 이미 데카르트 이후 계몽주의가 넘어오면서 이성의 범위 안에 드는 것만 학문의 진정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아웃라인을 쳐서 거기서 신학은 제외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 안에 이 신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학문의 범위 속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종교학, 인류학 같은 것입니다. 그 속으로 들어와서 일반 종교의 이론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중심성이라는 것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이전까지는 기본적으로 대학에서나 목회에서나, 목회에서도 목사, 신학자들이 설교함으로써 사상에 영향을 끼쳐서 이 세상에 사상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 세계를 보고 사회를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도전을 받고 그 길을 갔습니다. 대학에서는 수도원과 대학에 탁월한 신학자들이 있어서 이 사람들이 이 사상을 가지고 글을 쓰고 전파함으로써 이 세상의 사조를 이기고 녹여내면서 기독교 지혜의 우월함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신학적인 contribution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쪽에서도 무너지고 저쪽에서도 무너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패권이 이성에게로 완전히 넘어가서 학교는 그런 종교나 성경을 빌 필요 없이, 그런 것을 완전히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 저 구석에 있으라고 하고, 판도가 종교나 계시,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간의 이성에 의해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진행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20년 이상 읽었습니다. 여러분에 권하고 싶은 것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목회를 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 잘 알 것입니다. 더구나 신학공부를 많이 하면 설교를 잘 한다는 말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설교가 뛰어나게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역사를 기준으로 20세기 초반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유력한 학자들의 목록과 유력한 설교자들의 목록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여기에 오다보니까 존 머레이(John Murray) 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형제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영국 출생이지만 청교도적인 영성을 가지고 개혁주의적인 마인드로 교육을 받아서 한 사람 안에서 청교도적인 뜨거움과 개혁사상의 유장함이 함께 묻어져 나온 괄목할만한 신학자였고 대단히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발로우 라는 사람이 쓴 앤드류 머레이의 전기를 보면 그는 키가 1m 54cm 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묘사를 합니다. “우리는 앤드류 머레이 목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체구의 거인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고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천국으로 올라갔다.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기도합니다.” 기도가 모두 끝났을 때 우리는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이것이 바로 진짜로 신학을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성화론이나 이런 점에 있어서는 저와 현저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몇 가지 견해를 제외하고는 아주 탁월한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였습니다. 그런 종류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는데 아무리 다양한 신학을 많이 공부해도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신학 사상가운데 귀퉁이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할 때는 universality와 particularity라고 하는 신학의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이 두 가지를 같이 고려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공부할 때 이미 자신의 입장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성결교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신학을 시작한 사람도 있고 장로교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이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단은 안 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어느 시점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신앙의 영역에서 장로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신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해서 그 신학을 공부하면서 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로교니까 칼빈을 배우고 쯔빙글리를 배우고 존 낙스를 배우고 하면서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마르틴 루터와의 연관을 공부하고, 또 하나는 저쪽 끝에서 신약 성경이 끝난 직후의 속사도 교부들로부터 시작을 해서 1세기 교부들,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유스티누스, 그 뒤로 오리겐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더듬어서 공부하고 어거스틴을 통해 중세 신학자들까지 옵니다. 이것이 universality입니다. 이것이 particularity와 포물선처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의 개별적인 신학의 입장이 어디로부터 와서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이해를 갖게 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고백의 확실성은 어떤 면에서 확실하다는 것을 역추적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디까지가 신앙의 본질이고 어디까지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식견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definitely하게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신학공부가 물론 넓은 의미에서 여러분의 앞으로의 목회 사역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진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맡은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섬겨나가기 위해서는, 더욱이 여러분이 설교를 꿈꾸고 목회를 꿈꾼다면 그 공부는 지금 하고 있는 공부와는 별개의 공부로, 다른 방식을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가르치는 학교로 가면 되지 않겠냐고 하시겠지만 미안하게도 전 세계에 그렇게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종류의 신념이 먹혀들어가는 학교가 아닙니다. 시도하는 학교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개별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판넨베르그를 공부했다고 해서 그의 보편사에 대해서 한 부분을 공부해서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에서 그것 하나를 5, 6년 해서 썼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실제적으로 조직신학 전반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하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공부를 해야 하고 그 조직신학이 성경 신학이나 역사신학과 연결이 되고 신학이 다시 일반학문과 연결되는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역사, 그리고 인간 이해, 심지어는 물리학이나 천문학과 연결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방대한 양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학교에서, 지금 그 분 나이가 80쯤이니까 60년대쯤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학생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충고를 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충고를 하는데 너희가 진짜로 좋은 신학공부를 하려고 하면 이사람 저사람 찝쩍거리면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한 사람의 대가를 파라. 평생을 파라. 그러면 너희가 훌륭한 복음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에 깊이 감동을 받은 한 신학생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독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존 파이퍼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재 예일판에서 70여권이 나와 있는데 그중 한 50여권은 별로 가치가 없는 책이고 현재 예일에서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25volume 인데 한 volume이 두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어서 27권이 한 세트로 나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페이지 시작부터 끝까지 정독을 한다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러나 상당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저는 그 27권 가운데 세 권 정도의 설교집을 빼놓고는 다 정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읽은 것들은 모두 메모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한 것이 저에게 매우 매우 유익했고 그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어떤 부분을 이야기해도 한 부분을 가지고 5년, 10년 동안 박사를 쓴 사람과 논쟁하면 제가 좀 딸릴지 모르겠지만 전체를 놓고 본다면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든지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lectio’, ‘읽는 것’, 그리고 'meditatio', ‘묵상하는 것’, 그리고 ‘practica’, ‘실제로 살아가는 것’, 이 세 가지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 내면화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의 출발선부터가 다릅니다. 구라파에서 자라면서 그 역사를 한 눈에 다 꿰고 그 문화를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라틴어, 독일어, 불어, 화란어,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계통의 인문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과 지금 우리처럼 영어도 어떻게 간신히 해서 공부하고 제 아들이 지금 웨스트민스터에 가 있는데 한 주에 800페이지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읽을 능력이 안 되서 과제도 겨우겨우 따라가는 사람들이 그걸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잘난 척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드 폰테스’(Ad Fontes), 라틴어로 하면 “원천으로 돌아가라.” 칼빈을 공부했는데 칼빈에 대해서 쓴 사람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온 것입니다. 칼빈 자신을 공부하지는 않고 칼빈에 대해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지식으로 얻고, 그걸 이야기하면 그것을 가서 한 번씩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칼빈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드 폰테스’, “원천을 돌아가서 원천을 읽어라.”
이제 포인트로 돌아가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한 마디로 조지 마스던이 평가했듯이 미국이 내놓은 지성적 인물 중 the Great 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더욱이 18세기에는 유럽에서 볼 때 뉴잉글랜드는 촌구석에 불과했습니다. 그 촌구석에 있는 사람의 사상을 배우겠다고 유럽 사람들이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굉장한 인물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방식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렇게 이렇게 시작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개별신학과 보편신학의 어울림이 있어야만 기본적으로 신학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구라파에서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심지어는 목회자가 된다고 할 때는 기본이 파트롤로기아, 그라이카, 라티나, 즉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의 책이 민요판으로도 나와 있고 토널티 판으로도 나와 있는데 토널티 판은 1940년대에 시작되어서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 판이 시작되어서 지금 현재 나와 있는 책만 550권정도 됩니다. 그것을 모두 읽고 거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신학공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 교부 시대부터 시작해서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가톨릭 교부들의 문집은 따로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것들을 머리에 넣는 것으로 신학공부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기독교에 대한 신학의 해석이 어땠는지, 그리고 현재 어땠는지는 관심 없고, 자신의 연구 분야 딱 하나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지식을 습득해서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자기를 따라올 사람이 없게 만들어서 자신을 시장성의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고 어딘가에 가서 그 지식을 팔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이야기한 신학이 가지고 있는 정의를 고려해볼 때 그것은 굉장히 원대한 철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기에는 사실 그 지식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공공신학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급진 개혁파 정통주의 같은 사상도 나오고, 그래서 어거스틴을 아주 강력하게 추종하면서 급진주의적인 정통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것도 마지막에 알고 보면 신학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독특한 모습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모든 학문 위에서 그 학문이 올바른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특히 철학을 ancilla theologiae 를 삼아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모든 설명을 해 내는 그러한 기능이 바로 신학의 기능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현실감이 없는 것 같으니 현실성 있게 설명을 하고 에드워즈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제가 나이가 열네 살 2개월 되었을 때, 저는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길거리 논둑에 엎드려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울었던 이유는 질문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른 사람보다 사춘기가 훨씬 먼저 시작 되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이었는데 그렇게 통곡하게 만든 질문은, 첫째, “난 누구인가?” 두 번째,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 번째,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인가?” 마지막 네 번째, “신은 존재하는가?” 그 질문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웠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무서움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렇게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는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질문 속에서 한참을 엎드려 울다가 눈물을 씻고 일어나 결심한 것이 “나는 무신론자로 산다. 이제 신은 없다. 있어도 그분은 나와 상관이 없다. 나는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내 길을 간다.” 그렇게 그 어린 나이에 무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이라는 혹독한 세월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 네 가지 질문은 인류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저 황하문명부터 시작해서, 저기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문명,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학자들의 그리스 문명에까지, 사람들이 미친 듯이 고민을 해서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한 것이 그 네 가지 질문입니다. 그러면 신학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미 모든 설명을 듣고 확신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기본적인 문제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너무 지엽적이고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지 않습니다. 오늘 착하게 살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했더니 이웃이 행복해 했더라 하는 이야기가 기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상을 설교해서 그 허망한 철학과 종교, 모든 학문이나 이 세상의 번영이나 쾌락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사상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타 버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깊이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걸어가면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학문입니다. 신학은 바로 그 대답을 하기 위해서 하는 학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여러분이 한 사람을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다 읽고 이해하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식의 공부를 몇 사람에게 적용을 했습니다. 어거스틴, 존 칼빈, 존 오웬,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그렇게 공부하면서 얻은 유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책은 약 18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출판된 것만 말입니다.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더구나 300년 전의 영어이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확실한 보상을 해준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18000페이지 정도 되는 책들을 제가 한 30분 동안에 summary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순서는 Introduction, 에드워즈와 Korean church, Aesthetic theology, 에드워즈의 만남, 사랑과 갈등, 다른 학문들의 도움,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입니다. 한국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 있습니다. 대부분 간단한 내용들로 되어 있고 비로소 지금 부흥과 개혁사에서 Works가 번역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 미미하다고 봐야합니다. 기본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은 사람들이 너무 희귀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이 사람이 꽤 알려지게 된 것은 마틴 로이드존스에 의해서 입니다. 이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채플을 담임하면서 『로마서 강해』를 쓰게 됩니다. 14권으로 된 이 책에서 마틴 로이드존스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만약에 청교도들이 히말라야라면 마르틴 루터와 칼빈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은 알프스이며 그들이 알프스라면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입니다.”라며 극찬을 합니다. 사실 읽어보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책을 제일 처음 접한 것은 Banner of truth의 두 권의 책이었습니다. 아주 깨알 같은 글씨로 돋보기 없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책인데 여기에는 에드워즈의 모든 전집이 들어간 것은 아니고 대부분 들어가긴 했지만 일부는 많이 빠진 상태에서 비평도 없이 그냥 그대로 해 놓은 책이었습니다. 이것을 읽을 때도 저는 이 사람이 우리 날에 알려진 대로 1차 대각성 운동에 쓰임을 받습니다. 소위 말하는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유가, 오늘날의 복음주의의 기본적인 뿌리가 개혁주의입니다. 이게 하나의 뿌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뿌리가 중간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18세기 미국의 부흥주의입니다. 이 두 개가 만나서 서로 기여도 하지만 갈등도 일으키면서 오늘날까지 오고 있습니다. 1740년대에 일어났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 대한 부흥의 기록들,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에드워즈 전체를 읽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이 예일대에서 나온 전집입니다. 여러분 학교에도 가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가서 일단 한 번 만져보십시오. 펼쳐놓고 선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게 그렇게 중요한 책이구나!” 하면서 다른 사람은 안 읽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모두 읽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읽어볼 도전을 해보십시오. 한 권만 붙잡고 읽기 시작하면 이 도전이 매우 힘겨운 도전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절대 1권부터 시작하지 마십시오. Freedom of Will, 이것이 1권인데 마크 트웨인이 이 책을 읽다가 미친놈이 쓴 책이라고 하면서 집어던진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드워즈 자신도 그게 무슨 소린지 알고 썼을까를 두고 아직도 논쟁하기도 합니다.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책인데, 두 번을 읽었는데 아직도 어떤 부분들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하여튼 저 책은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 사람은 1703년에 태어납니다. 지금부터 이 사람의 책 스물네 권을 한 번에 주파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저를 매혹시킨 글이 있습니다. Miscellanies입니다. Miscellanies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수필에는 미셀러니와 에세이가 있는데, 에세이는 논리와 형식을 갖춘 것이고 미셀러니는 신변잡기 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Miscellanies라는 뜻은 신학적 묵상집입니다. 여기에는 성경부터 시작해서 성경, 역사, 과학, 심지어 심리, 모든 것에 대해서 어떤 사유의 포인트가 시작되면 그것을 막 전개한 것을 급히 메모해 놓은 책입니다. 이 사람은 메모의 사람이었고, 아침에 말을 타고 외출을 하면 부인이 종이를 자른 것과 펜을 넣어줍니다. 이 사람이 그것에 써서 핀을 꽂아둡니다. 정신이 산란해서 잊어버리게 되는데 천재들이 약간 그렇습니다. 그렇게 꽂아두는데 돌아올 때쯤에는 온 몸에 메모가 붙어있게 됩니다. 그러면 부인이 그것을 하나씩 떼어서 잘 보관해 둡니다. 여기 가운데 있는 것은 에드워즈가 친필로 쓴 미셀러니입니다. 바이네커 도서관에 있다가 지금은 예일대학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줍니다. 그 에드워즈의 미셀러니는 나로 하여금 정말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토막 한 토막 끊어져서 어떤 것은 두 줄, 세 줄짜리도 있고 어떤 것은 3페이지, 4페이지 이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주제도 너무너무 다양합니다. 윤리학부터 시작해서 성경 신학,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심지어는 이 사람이 18세기 때 4서3경을 모두 독파했습니다. 중국의 4서3경을 말입니다. 공자, 맹자, 논어, 천추, 주역, 이런 것 말입니다. 모두다 완독을 했습니다. 완독을 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비판을 합니다. 그 안에도 중보자 사상이 있다는 것을 찾아내면서 기독교적으로 칭찬할 만 한 점과 비판할 점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미국에서는 몰라도 영국을 비롯한 구라파에서는 중국 문헌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17세기 초에 이미 중국의 모든 고전이 영어로 번역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은 그 사람들에게 철학의 나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엄청난 인류사회의 이상향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실제로 거기에 영향을 많이 끼쳐서 영국 공화정 상하원 제도 같은 것이 중국 고전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배운 “Invisible Hand(보이지 않는 손)” 이론 같은 것이 전부 중국 고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학문에 아주 정통했고 끊임없이 유럽에서 책을 가져다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미셀러니를 쓰게 됩니다. 이 책이 나로 하여금 내 머리통, 뇌를 찢어서 열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설렁탕과 된장찌개 밖에 못 먹던 사람에게 아프리카 요리에서 부터 인도 요리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한 지식의 세계에 대한 미각을 갖게 만들어 준 책 입니다. 오늘이라고 가서 한 권만 대출을 해서 한 열 페이지만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왜 이렇게 감탄하는지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은 History of Work of Redemption이라는 책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한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 역사에 관한 책을 세 권 썼는데 한 권은 완벽하게 책을 썼고 두 권은 노트로 남기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중에서 이 History of Work of Redemption 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의 역사 철학적 작품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 과 유사한 책이지만 각도는 그것과 좀 다릅니다. 존 오웬이 Biblical Theology 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이 원래 라틴어로 된 책입니다. 라틴어로 쓰고 싶었는데 나중에 스테파니 라는 사람이 후에 영어로 번역을 합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칼빈 디지털 라이브러리에 가시면 원전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거의 1000페이지 가까이 가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 사람이 언약을 따라서 성경의 시대를 전부 분류합니다. 그리고 한 시대를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 그 시대가 다른 시대와 다른 경륜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 중심에 언약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를 경륜하셨던 하나님이 다윗의 시대를 경륜했던 그 하나님이시지만 역사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경륜 전개의 방식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것을 설명해 나가는데 차이점은, History of Work of Redemption은 성령역사로부터 시작해서 대개 계시록에서 끝납니다. 사도시대 정도에서 끝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살던 최근의 시대까지 모두 끌고 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악의 세력들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거기서 보호하셨는가를 설명하면서 역사를 관통하는 역사철학적인 시도를 합니다. 그것에 대해 너무 자의적이지 않느냐는 비판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대단한 작품이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에 있어서 그의 최고의 신학적인 관심사가 “구속사”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왜 이렇게 구속사가 중요했는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성경적인 진술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을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에드워즈처럼 훌륭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개 우리는 암기식을 배워왔지만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면 한이 없지만, 제가 설명하기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예술가적인 각도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이 세상이 필요해서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완전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 필요하지 않은데 창조하셨다면 쓸데없는 일을 하셨으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완전성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세계는 필요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단순하게 필요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뭉크라는 작가가 ‘절규’라는 작품을 남깁니다. 제가 직접 가서 전시장에서 그 그림을 봤는데 1100억짜리라고 합니다. 석양 아래서 비명을 지르는 그림입니다. 똑같은 작품 세 개를 그렸는데 그 중 하나가 1100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뭉크에게 저 작품이 필요했을까?” 뭉크라는 작가에게 저 작품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뭉크 안에 있는 넘치는 예술혼이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그려지지 않았더라면 발견해 낼 수 없을, 뭉크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석양 노을이 지는 그 선창가에서 극한 인간실존의 외로움을 경험하면서 그로 하여금 피를 토하는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정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마음을 먹는다고 그런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뭉크가 우리보다 더 낫습니다.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그런 시각에서 하신 일이라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세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으로서 시간 안에 있는 세계를 만드셔서 시간을 초월하는 당신 자신을 아시는데 시간 속에서도 당신 자신을 아심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인간이 타락합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창조의 목적을 더 완벽하게 이루는 일에 인간의 타락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됐지만 타락함으로 온 세상에 어둠이 들어옵니다. 그 어둔 세상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원래 창조하셨던 뜻대로 구원하기 위한 구원계획을 세우시는데 그것이 Work of Redemption 입니다. 그것이 어두운 타락한 세상에 한줄기의 빛처럼 빛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거룩함,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구속사를 통해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듯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최고의 지식의 보고인 이유는 바로 이 구속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지혜의 보고라고 불릴 수 있다고 설명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또 하나의 책은 『삼위일체론』인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논란이 많이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조나단 에드워즈가 잊혀 지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웨스턴 처치에서는 기본적으로 페리코레시스의 이론으로, 하나님을 한 분을 보고 하나인 하나님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당연히 출발점이 divine oneness, 신적인 단일성, 신적인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심리학적인 유추를 통해서 divine threeness를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 이후로 생각, 생각하는 자, 생각하는 대상, 그리고 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런 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좀 다릅니다. “페리코레시스의 이론”,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계시다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어떻게 이 세 위격이신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를 추론해 나가면서 소위 말하는 페리코레시스 이론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이 서로 교류하면서 위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면서 divine threeness에서 divine oneness로 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우리는 전통적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고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각자가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데는 첫 번째가 기여를 했지만 두 번째는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사회에서 어떻게 구성원들이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담론에 대한 많은 모델들을 이스턴 처치의 접근 방식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삼위일체론에서 이런 설명을 합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교통하심으로서 그 분이 사랑이 되시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할 대상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기 전에도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 4:8)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는 분이었다고 설명을 합니다. 이미 하나님 자신이 그런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 교통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실 수 있다고 하고, 어거스틴은 이것을 사랑으로 설명을 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생명으로 설명을 합니다. 두 개가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은혜를 설명하다가 이렇게 나오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실제로 그가 대각성 운동을 지나면서 성령의 큰 역사를 경험하면서 인간이 회심하지 않으면 얼마나 절망적인 인간인가 하는 것, 그리고 회심한 다음에 그가 얼마나 거룩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Regeneration(중생)과 Conversion(회심) 이전에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세상을 좋아할 때 좋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물질을 사랑한다고 하면, 물질이 정말 좋은 것이 아니라 물질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편에 섰기 때문에 물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회귀되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런 대상이 인간에게는 딱 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그리고 인간입니다. 공부를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목회를 사랑합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형제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반대가 되어서 자기 자신이 그 이유가 됩니다. 결국 Sin 이라고 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이 Sin 이 아니라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모든 만물 위에 가장 높이 있어서 심지어 하나님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죄는 황제의 천하에서 일어난 반역이라고 해석합니다. 만일 중국 같은 어마어마한 나라에서 황제에게 “넌 내 밑에 있어야 한다.” 라고 해버리면 9족이 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 완전히 변화될 때, 기본적으로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신자가 된 다음에는 신자의 가장 큰 과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존재인데 이렇게 흑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융성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약화되기도 합니다. 거의 약화되어서 죽은 것 같기도 하고 거의 융성해서 하나님 사랑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가 한 10년 전에 쓴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로마서 6장 14절을 가지고 쓴 두꺼운 책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복잡하고 길고 어려워서 잘 안 읽습니다. 그러나 읽으면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신학적으로 논쟁이 많이 되는데, Disposition 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성향”입니다. 성향은, 물체 자체에 배어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성질입니다. 이렇게 굴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물을 쏟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성향은 물질 안에 존재하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고 경향성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 관련해서 일정한 방향으로 작동할 때 그것을 우리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성향이 다양할 것입니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과 어울려 신이 나는 성향이 있는가 하면, 공부할 때 집중이 잘 되는 성향이 있는가 하면, 오락할 때 집중이 잘 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먹는 시간이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성향을 중생과 회심 시에 하나님께서 한 번에 말씀을 탁 심으시는데 그 심으시는 말씀이 성령이고 그 성령이 곧 하나의 성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양심의 빛을 받아도 결국은 자기 사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유혹을 받아서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정욕을 좇아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The Religous Affections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걸작품 중 하나인데 『신앙 감정론』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번역에 별로 동의를 하지 않고 “신앙 정동론”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뜻은, 우리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데, 예를 들어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다고 합시다. 헬리콥터 한 대가 떴습니다. 호수 위에서 큰 바위 덩어리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바위가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호수의 물이 출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퍼집니다. 에너지를 인식이라고 하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affec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큰 것이고 이것은 작은 것입니다. 요점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반대로, 어떻게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가? 이런 것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론은 갖습니다.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구조를 분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식으로 저 사람 속에 저런 정동이 일어나게 하는가? 입니다. “정동”은 “영혼의 빠른 움직임”이라고 보았습니다. 감정, affection이라는 것을 영혼의 빠른 움직임이라고 보았습니다. 열정이라는 것은 영혼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열정이 선한 것을 향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완전히 넉다운이 되어서 늘어진 상태에 있는 것, 그것을 저는 게으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을 향해 빨리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얻습니다. 지식을 얻는 방법은 이성을 통하기도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이는데 하나는 추론적인 것이고 하나는 변증법적인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들어올 때, 그것들이 어떤 인식을 그 사람의 마음에 가져다줍니다. 그 인식이 마음을 내려오면서 여기에서 그 인식이 작동을 합니다. 작동해서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그 마음이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추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목회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학문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에 이바지 하는 학문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신은 너무 많이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가여워서 그것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그들도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의 미학적 측면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아주 정교하게 설명합니다. 만약 한 번에 덤벼들어서 읽으면 머리가 아프고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고 혼란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설명과 개론을 듣고 돌아가서 읽어보면 간단한 책이 아니라고 알게 됩니다. 대부분은 읽다가 지루하니까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책입니다. 어떻게 인간을 저런 식으로 신학을 가지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할 때, 기본적인 바탕은 bible 인데 17, 18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특히 18세기에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네오플라토니즘(Neoplatonism) 운동이 전개되고 그때가 영국사조로서는 로커의 경험주의가 활발한 때였습니다. 이때 18세기의 도덕주의자들, 그 사람들도 우리 계열의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양심 그것 하나 말고 어디에서 오는가?” 할 때 그 당시의 낭만주의 사조와 연관 지으면서 아름다움에서 그것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은 이미 플라톤이 그 이전에 했던 말입니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선한 것 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할까?” 아름다운 것은 자기 소견에 좋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공부를 해야 하는데 왜 그런지 놀고 싶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공부를 해야 맞지만 놀고 싶습니다. 그래서 놉니다. 그 이유는 노는 것이 더 예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마음은 도덕적 선에 끌리는 마음보다 큽니다.
여러분도 게임을 하십니까? 어떤 목사의 집에 가보니까 “게임은 절대 하지말자!” 하고 느낌표를 다섯 개나 붙였습니다. 얼마나 육혹을 받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그게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그런 것이 재미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연애해 보셨습니까? 연애를 하면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 제일 좋지 여러 사람 만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몰입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사람을 그렇게 몰입시킵니다. 우리도 저렇게 인간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설복시켜야 합니다. 성경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나면 다 내려놓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에서 행복하게 야유회를 갈 계획을 다 세웠습니다. 내일 모레금요일에 끝나면 다 챙겨서 저기 텍사스도 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놀자고 했는데 저녁 먹고 옆집에서 놀러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휴가는 어디로 가세요?”, “너무 좋은 계획을 세웠어요!”, “그래요? 우리는 내일 스위스로 떠나는데, 스위스와 그리스와 이태리를 거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온 가족의 즐거움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더 좋은 계획을 듣고 나니까 자신의 계획은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니까 세상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놀랍게 설명을 할 때, 사람들은 다른 것이 너무 시시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는 광산이 성경이고, 그 광산을 맨손으로 캘 수가 없기 때문에 도와주는 도구가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 캔 것을 끌고 나오는 수레 같은 것을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이런 모든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을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로 하여금 저런 설명을 가능하게 했다고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는 아주 광범위한 독서가였고 특히 저는 에드워즈의 많은 신학들이 어거스틴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고 제 생각에는 어거스틴 이후로 인류 최대의 기독교 신학자가 아니었을까, 어거스틴을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역사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밖에 없는데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에드워즈의 작품을 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쓴 그 다음 책은 『과학 철학사』(Philosophia of Science)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던 그 당시에 유럽에서 핵폭발적인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뉴터니즘의 시작, 그리고 그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다윈의 진화론, 이 두 개가 계몽주의의 완벽한 승리를 안겨다 주는 요인이 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뉴터니즘이라는 것은 뉴턴이 『프린키피아』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쓰는데, 이 책은 인류 역사를 움직인 10권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내용은, 자연 속에 일어나는 모든 자연의 현상들이 예전에는 신비하기 짝이 없었는데 모두 수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의 요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과가 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전에는 저게 왜 떨어질까 하다가 9.8㎨ 으로 설명됩니다. 한 순간에 이 세계는 온 세계가 수학 공식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됩니다. 이렇게 던지는 것도 수학으로 다 설명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됩니다. 그러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계몽주의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거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거나 하는 모든 sign들이 모두 수학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어떤 기계적인 공식을 필연으로 모두 기계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God is no where.”,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 라는 생각이 불길처럼 번지게 됩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게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뉴터니즘의 중심부에 뛰어들어서 뉴턴의 수학을 모두 이해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해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새로 나온 학문인 뉴턴의 이론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입니다 . 어마어마하게 밀물처럼 밀려오는 이성주의 사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과학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아서 이미 열여섯 살 때 영국의 유명한 학회지에 자신의 과학논문을 실을 정도로 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세 살 때 자유롭게 이야기를 했고 네 살 때 자기의 사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여덟 살 때 유물론에 관한 견해를 글로 밝히고 열두 살 때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을 씁니다. 그리고 예일대학을 2년 만에 졸업을 하고 약관 나이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수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quick down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뉴터니즘적인 world view 가 폭발적으로 휩쓸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아, 이제 신학의 시대는 갔구나!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구나.”하는 것을 그게 아니라고, quick down, quiet down 시키고 싶었고, 적극적으로는 계몽주의를 주창한 사람들의 의견에 대항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법칙만 남겨두셨고 나머지는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이미 14세기에 플로렌스의 철학자였던 피코 델라미란돌라 같은 사람이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미란돌라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내가 미리 결정해 놓은 그런 것은 없다. 너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네가 살아갈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라. 내가 밀어주겠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조들은 이미 기원전 2세기경에 루크레티우스라는 사람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쓰는데 이 책은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금서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의 시작을 1417년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1417년은 폼포나치에 의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어느 수도원에서 발견되고 빛을 보게 됩니다. 그게 복사본으로 찍히고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주전 2세기판 “프린키피아”였습니다. 뉴턴의 사상과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유물론적인 세계관, 기계론적인 세계관의 원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의 뿌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론에 대한 변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두 개에 대해 극단적인 견해가 있는데 논쟁은, immanence와 transcendence입니다. immanence는 내재성이고, transcendence는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해 계시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immanence 쪽에 치우친 사람들이 오시안더 라든지 루터의 “컨서비시에이션”, ‘공제설’ 같은 것들을 엑스트라 칼비니스틱꿈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속성이 있는데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두 속성이 서로 교류한다, 이것을 “이리오막타”라고 하는데 그렇게 속성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성은 모든 만물에 편재하기 때문에 오늘 성찬하는 이 떡과 포도주 안에, 그 위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떡을 먹을 때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떡 속에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간다고 설명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immanence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 그 당시 특히 보르티우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었지만 칼빈은 반대를 합니다. 이쪽으로 가는 것 같은 사람들은 반대를 하는데 이쪽으로 가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 하나님은 법칙만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본 회퍼 같은 사람들도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율주의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우리가 이 사회를 사람다운 사회로 만들어 가야한다는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치우친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모든 만물들 사이에는 신의 법칙이 존재한다, 그 힘이 생기는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힘이 생긴다고 설명을 하면서 이런 계몽주의에 의해서 법칙만 존재하고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사상을 변증하려고 하면서 이 변증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관련되어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나중에 제네바 아카데미아 학장을 지낸 분인데 개신교 역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중세 철학에 대해서 아주 달통한 분이었습니다. 이분의 설명은, 그런 모든 논쟁들은 존재에 관한 혼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고 사물을 그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세 가지 실존의 방식, “모두스 이그제스텐디”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서큠스크립티블리, 두 번째는 데피니티블리, 세 번째는 레프리티블리 입니다. 서큠스크립티블리, 서큠은 둘레입니다. 스크립트는 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립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물입니다. 이 바깥은 물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물병입니다. 바깥은 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그린 경계선을 토대로 이 안쪽은 물병이고 바깥은 비물병이 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첫 번째 존재양식으로 보는데 동물, 식물, 돌멩이, 등의 모든 물질들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데피니티블리는, 이런 식으로 선을 그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장소가 국한 된 상태에서 존재하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어디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내 영혼이 내 안에 있지 저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마귀, 천사 같은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존재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그것이 충만적 존재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사물은 따 하나, 하나님밖에 없다. 그것으로 이런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람들이 그 당시 계몽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없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저 1번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세상에 서 찾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3번의 관점으로 찾으면 분명히 하나님은 계신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배우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이 너무나 많고 오늘은 시간 관계상 에드워즈의 철학 같은 것은 다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목회자로서 직접 유익을 얻었던 네 가지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conversion의 중요성입니다. 사람이 회심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양심, 도덕, 이런 것에 의해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Preaching. 설교의 중요성입니다.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모든 신학적 탐구와 개인적인 고뇌의 마지막 결정은 성경과 씨름해서 그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설득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사역에 헌신해 왔고 저의 모든 신학적인 탐구와 학문적인 탐구의 마지막 결과물은 설교로 나오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이제껏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5300번 정도 설교했습니다. 그 모든 설교가 가치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설교들은 대부분 원고 없이 이루어진 것들이고 이후에 설교한 것을 문서화해서 지금은 모두 text로 풀려있습니다. 원고지로 약 45만매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설교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Doctrinal education, 교리교육의 중요성입니다. 교리는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교리 교육을 시켜야만 그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세상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을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결심문 1번에서 “나와 나의 이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자신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자기가 간섭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게 목회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Bible,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끝났습니다.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여러분이 지루해 하실 테니 이정도로 맛을 보여 드리고 오늘이나 내일 도서관에 가서 에드워즈 전집을 만져보시기 바랍니다. 만져보시고 그 중에 한 권이라도 만져보시면 제 강의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쳤습니다. 혹시 질문이 있으십니까?
<질의와 응답>
질문 1)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목회와 신학의 정수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 들을 때 목사님께서 삼위일체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웨스턴과 이스턴을 구분했을 때 웨스턴의 경우는 divine oneness에서 divine threeness로 설명을 하시고 이스턴의 경우는 divine threeness에서 divine oneness?? 로 이야기를 한다고 설명하셨는데 제가 그 설명을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든 것은, 웨스턴도 그렇고 이스턴도 그렇고 결국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라는 것을 threeness와 oneness로 이분화시키지 않았나, 그래서 이스턴 같은 경우는 divine threeness에서 divine oneness로, 이동을 하는 것이고 웨스턴같은 경우는 oneness에서 threeness로 이동한 것이라고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신대원 때 목사님께서 오셔서 설교를 하시고 책을 나눠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설교하셨던 내용이 하나님의 시간과 영원에 대한 (네, 창세기 1장 31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적용을 해보면, 결국 사람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결국은 뭔가를 이해하고 그 나머지 것은 그 다음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도 threeness를 이야기 한 다음에 oneness를 이야기할 수 있고, 또는 oneness를 이야기하고 threeness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면 결국은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이야기 하셨던 시간의 개념을 비추어본다면 사람은 직선적인 시간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하나님은 그 직선적인 시간을 손바닥에 놓고 한 번에 다 보신다, 쭉 뻗은 직선적 시간이 아니고 압축해서, 모든 것이 동시에 보이듯이, 물론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의 관점이 아닌가, 그렇게 보면 divine oneness와 divine threeness도 사람의 입장에서는 뭔가를 먼저 이야기하고 나머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그 순서를 동시에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답변 1)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 A 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입니다. T, 여기는 T0, 여기는 T1입니다. T1 에 A라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T2 에는 A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 B가 생깁니다. 이 B를 원인으로 해서 T3에 C 사건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T4에 가서 앞의 원인으로 이런 사건이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 시간이 전개되면서 이렇게 이렇게 진행됩니다. 여기서 시간을 확 추출해버리면, A 는 원인, A에서 B로, B 에서 C로, C에서 D로 D에서 E 로 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A, B, C, D, E, 라는 인과 관계, 원인과 결과 관계만 남을 것입니다. 저것은 시간을 상상하고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묶여 있습니다. 만일 저런 식으로만 인간을 보시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교통의 여지도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계시를 전달하실 때, 계시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전달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수납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 수여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셨는데 수납자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야만 겨우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삼위일체도 결국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성부, 성자 없이 성령님 혼자 인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있는데, 그 성부, 성자, 성령이 이렇게, 혹은 이렇게, 혹은 이렇게, 그래서 이것이 부, 자, 영, 이렇게 되거나 혹은 부, 영, 자, 이렇게 되거나 혹은 영, 자, 부, 이렇게 됩니다. 삼위일체가 계신 가운데 성령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거나 성자가 맺으시거나 성부가 맺으시거나, 이 자체가 모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사역 가운데 내재적 사역이 있는데 내재적 사역은 하나님은 원래 계시고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로 부터 성령이 나오시는, 이런 것들이 내재적 사역이고 그 내재적 사역 안에서 신적 작정과 예정 같은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외재적 사역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는 세계와의 경륜 속에서 어떤 위격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면, 삼위에서 시작하는 접근은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고, 1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 적인 접근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 모든 만물은 허상이라고 생각하고 본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물이라는 것이 있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 있는 것이지, 이 물에 열만 가해도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불에 집에 넣으면 여기 있다고 하는 것들이 몇 초 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주목하면 주목할수록 사람들은 혼란을 느낍니다. 이것을 모두 뿌리치고 저 위로 올라가서 1자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강하면서 사물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될 때 이런 것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의 빛으로 개별 사물을 보게 된다는 것, 이것이 플라톤의 인식론의 전통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있는 것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지, 있지 않는 것을 통해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실제로 있는 것은 이것이고, 확실히 알 수 있는 이 지식에서 시작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의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입니다. 그리고 유명론의 논쟁이 사실은 종교개혁의 사상적인 토대를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철학과 법학의 전통이 강했습니다. 한 번에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에 배해서 동방교회는 오히려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전통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보면서 성경을 이해하며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런 차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2) 개인적으로 안양대학교를 다녔을 때(몇 학번입니까?) 91년도에(그럼 제가 마지막 학년 가르칠 때였을 것입니다. 주간에 다녔습니까? 신학과?) 네, (성함이?) 김준구 목사입니다. (네, 반갑습니다.)사실 제가 지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바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막바지 단계에 있어서 굉장히 바쁜 시간을 내어서 참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reformed교회에서 계속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우면서 제가 배웠던 교리나 교회에서 들었던 reformed의 교리들이 있는데 최근에 제가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성경 전체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4년 동안 네 번을 요약하면서 이런 식으로 성경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데, 제가 느꼈던 갈등 중에 하나는 기존의 교회에서 들은 reformed의 교리와 성경을 읽으면서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reformed의 교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이 배치되는 부분을 발견하면서 씨름을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믿음과 행위에 대한 부분인데 행위가 굉장히 경시되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신대원 교육 자체도 서철원 교수님의 신학을 많이 배웠는데 어떤 행위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행위만 조금 이야기하려고 하면 알미니안이나 행위구원론자라고 하고 행위가 천주교의 공로사상 같은 것처럼 보고 천시되는, 그런 것들 때문에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고 거룩과 성화와 행위를 많이 강조하는 것들이 있는데 우리 reformed 는 왜 이런 것들에 대해서 왜 이렇게 천시하는 경향이 있을까? 그리고 교회가 타락하는 데에도 이런 교리에의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사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고민을 20년 동안 해왔고 제가 쓰고 있는 논문이 사실 그것에 대한 고민을 풀어보려고 쓰고 있기 때문도 논문 제목도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이것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논문으로 쓰고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은, reformed의 신학이 성경을 정말 다 담고 있는가? 이 질문 하나이고 한 가지 제가 깨달은 것 하나는 이름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실제로 칼빈의 글, reformed학자들의 글을 직접 읽으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reformed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칼빈이나 그런 reformed학자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칼빈이나 다른 학자들이 굉장히 많이 실제로는 강조하고 있었고 칼빈만 해도 상당히 성화를 강조하고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분립되지 않고 하나로 보고 있다는 부분들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고민했던 것을 말씀드리고 그것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reformed가 성경전체를 다 담고 있는지, 그것에 대하 질문과,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이 reformed가 정말 제대로 된 reformed인지, 이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2) 우선 우리가 두 개의 극단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관에 상관없이 자기가 추종하는 reformed나 알미니우스주의나 부흥주의나 어느 한 라인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의 신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그것을 조심해야하고 두 번째 극단은 여태까지 신학이 무엇을 이야기해 왔든지 내가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하는 이것이 가장 확실한 지식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개혁신학, reformed라는 것은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서 최 광의로 사용될 때는 종교개혁 때를 기준으로 가톨릭에서 튀어나온 모든 것을 reformed라고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좀 더 협소하게 보면 이단들을 떼어내고 복음주의에 속한 것들 가운데 reformed가 들어가니까 당연히 거기에는 알미니우스나 루터란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가장 좁게 보면 지금 표준적인 장로교 제도가 따르고 있는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reformed라고 봅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reformed가 정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신학이 과연 사람이 세워 놓은 신학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신학이라는 것은 결국 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종교적인, 사회적인, 교회적인, 신학적인, 다른 학문적인 요구들을 수렴하면서 신학이라는 것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개혁시학은 정해진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 시대에 끊임없이 적용하면서 그 시대의 고민들을 그 신학으로 녹여내고 그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변을 하고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 오면서도 몇 사람에게 물었던 것은, 저는 여기가 처음이고 한국에서는 남아공화국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흑인들에 대한 박해와 아파레이트 라는 정책이 이루어지고 만데라 라는 사람이 나오고 했을 때 소위 화란을 비롯한 신학의 정통적인 것, 혹은 오늘날에는 현대에 대해서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발전하는 신학의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는 날에서 그런 것들에 대한 어떤 신학적인 해석을 내놓고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백인이나 흑인 크리스챤들에게 정확하게 그 시대에 대한 해석을 내려주었을까? 하는 질문을 몇 사람에게 던져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은 결국 아무리 개혁신학을 가르쳐도 그것은 정말 참된 개혁신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박제된 개혁신학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 하나를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과 함께 이해해야 할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라는 것은 오늘 내가 부딪쳐서 성경을 이해하고 어느 하나를 진술해 낸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다른 많은 진술들과 함께 일치를 이루어야 하고 일치를 이룬 많은 것들은 신학사상사적으로 그것들이 다른 요소들과 설명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사상의 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이제까지 reformed를 계승했다는 사람들의 인격과 도덕생활이 거지같고 교회가 제대로 되는 꼴이 없다고 하면서 reformed에 대한 전반적인 반감 내지는 깔보는 듯한 태도도 무식한 태도이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는 누구누구의 책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복제하듯이 계속 반복하기만 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reformed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reformed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reformed를 이야기한다면 사실 그것은 벌써 그 이전에 종교개혁자 이전에 18세기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리고 그 뒤로 넘어가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있고 종교개혁자들은 자신의 신학적인 뿌리를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부들에게 두고 있었고 심지어는 중세의 교부들에게도 상당히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중세와 모든 것을 결별하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continue나 discontinue가 상재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들이 비판받으면서 새로운 신학이 나온다는 것을 볼 때, 개혁주의는 그 뿌리가 어느 한 순간 칼빈이나 루터 몇 사람에 의해서 덜컥 태어난 것이 아니라, 보편교회에 신학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뿌리를 두고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의 오류였던, 가장 성경적으로 중요한 교리들, 이신칭의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요즘 혹시 여러분이 뉴퍼스펙티브에 대해서 공부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아까 목사님들의 질문한 것에 대한 한 예가 될 수 있는데,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야기하고 개신교가 굳게 붙들었다고 했는데 행위를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개판인 사회가 되었는데, 이게 정말 맞는 것일까? 이것을 수정하자!” 하고 사도 바울이 그 당시의 유대교를 잘못 이해했다, 루터도 잘못 이해했다고 하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가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한국의 괄목할만한 신학자들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총으로 받았고 그 구원을 유지하는 것은 너의 행위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똑바로 살아라. 마지막 날에 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의 개념인가에 대해서 회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현상을 가지고 무엇이 유익한지 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구원론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있는 사람인데 그것이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연합은 취소될 수 없이 영원하다고 보는데 이게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붙었을 때 주님이 오셨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계속 붙어 있다가 살짝 떨어졌는데 그때 주님이 오시면 황당한 것입니다. 어떤 하나를 문제로 삼고 이야기할 때는 그것을 양보했을 때 어떤 논리적인 결과가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대부분의 그런 것들은 교회 역사를 찾아보면 예전에도 주장했던 것들이고 문제점도 드러났던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거울삼으면서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reformed 신학은 성경 모든 것을 담아내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신학도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성경에 의해서 신학이 쇄신되고 신학에 의해서 성경이 다시 살펴지는 해석학적인 순환 속에서 온전해져가는 것이 신학이 아니겠느냐,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