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교역자 수련회 2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수 14:7~9)
녹취자: 김경애
리더십의 두 번째는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충성하는 대상이 있어야지만 충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충성한다는 자체는 이미 충성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제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사역의 목표도 생기고 충성해야할 이유와 근거도 발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리더십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었던 갈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갈렙은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리더십을 여호수아에게 물려주었지만 모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여호수아를 섬겼고 이제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 갈렙이 그 유명한 이야기인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는 그 상황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나이 사십대에 여호수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지파들의 파송된 사람들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이제 너무 자신이 없으니까 그 땅을 악평하면서 그 사람들은 어마하게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은 거기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를 하였더니 백성들의 간담이 녹아내리면서 백성들이 모두 절망 속에서 통곡하며 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는 내 하나님께 충성을 하였다 그래서 성실한 마음으로 보고했고 그랬더니 모세가 네가 하나님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고 하셨다며 이제 모세에게 남긴 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바는 모세의 눈에 이 사람이 충성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때로는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충성하는 사람들의 진가를 알아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이 사람 갈렙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갈렙은 지파로는 유다지파 사람인데 사실 이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그나스 족속 후손의 한명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애굽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애굽에 이미 중다한 잡족들이 출애굽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노예처럼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노예를 하다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고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혈통적으로는 자기 조상들에게 칼을 겨누고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가운데 들어왔을 때 차별대우를 하지 않으셨지만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차별을 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모세가 구스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을 때 백성들이 반발하고 심지어는 아론과 미리암까지 반기를 드는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미루어보아서 만약에 그 취한 아내가 구스사람 흑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중 한사람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상황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으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왜 겪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변함없이 주님의 집에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말에는 능숙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희생하며 걸어가는 지도자의 삶에 변함없는 모습은 반대자들의 입을 잠시는 막지 못하지만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의 삶이 지도자의 충성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허공중에 흩어지는 소리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충성스럽게 살아야합니다.
그 충성이라는 것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을 만큼, 하고 싶을 일을, 자기 좋은 시간에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그분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는데 갈 때마다 자꾸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이 한두 가지씩 늘어납니다. 의사가 물어보았습니다. ‘운동은 하십니까?’ ‘예 운동을 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십니까?’ 그때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걷기를 합니다.’ ‘얼마나 하십니까?’ 일주일에 삼일 정도는 걷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걷느냐고 합니다. 4㎞에서 5㎞ 정도를 걷는다고 하니까 어느 속도로 걷느냐고 합니다. 평소에 걷는 대로 걷는다고 하니까 의사가 웃으면서 ‘선생님 그것은 운동이 전혀 안됩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딱 잘라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힘들다 싶을 정도로 걸어야한다고 하고 숨이 차야하고 걷고 나면 땀이 흘러야합니다. 숨이 차다고 느끼면 땀이 이렇게 흐르는 것입니다. 천천히 걸으면 칼로리는 소모될지 모르지만 운동효과는 하나도 없답니다. 땀이 나고 걷는 것이 힘들다고 느낄 정도이어야만 운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목회의 경력을 묻습니다. 물론 경력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보면 아주 오래 사역한 사람인데 갖다놓으니까 차라리 처음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사역은 오래했는데 사역을 잘 배운 것이 아니라 나쁜 것만 배워서 그것이 몸에 배어서 자기가 왜 나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일을 행하는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도 김의현 목사와 차를 타고 오면서 졸업한 사람들이야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공부하고 사역하는 것 때문에 갈등을 한다는데 내가 바라는 것은 더 많이 느끼셔야합니다. 나는 신 대원을 다니면서 매일 울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진짜 작은 교회에 들어가서 죽도록 일이 많은 것입니다. 생활비는 거의 생활이 안 될 정도인데 일은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사찰까지 해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속에 사찰 대신 집어넣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석탄난로 6개를 불 피우고 교회를 청소하면서 또 야간신학교에 다녔습니다. 목사님이 노인네들하고 심방 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만날 나를 불러서 나는 주일학교를 하는 사람인데 장년심방을 데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직장 다니면서 괴로웠었는데 이번에는 직장을 그만두니까 교회에서 이 기회라고 꽉 붙들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유년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장년구역 3구역, 토요성경공부, 주일 제자반, 교회청소, 심지어는 행정까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습니다. 매일 눈물이 나옵니다. 떨치고 나가려고 기도를 하면 항상 하나님은 참으라고 하십니다. 보다 못해 나를 그래도 재능 있다고 생각하는 어느 선생님이 자기네 교회에 오면 우리교회에서 받는 봉급의 두 배로 주고 공부할 시간도 주겠다고 했지만 기도해보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왜 그렇게 인도하셨는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번에 900페이지짜리를 다 써놓고 보니까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운동이라는 것은 자기가 평소에 생활하면서 쓰는 근육을 똑같은 강도로 움직여서는 운동이 되지 않습니다. 운동할 때는 쓰지 않던 근육들을 쓰고, 평소 일상적인 생활에서 도달해보지 못한 한계까지 가고, 거기에서 그 한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새로운 근육이 생기고 몸이 유연해지고 그 다음에 내공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어린나이에 목청이 틔어서 노래를 그렇게 부르는데 폭포 뒤에서 노래를 불러서 그게 폭포를 뚫고 4㎞를 가서 들려야한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이 두 사발의 피를 쏟아야한답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을 득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살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듯이 남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진주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진주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려면 중국에 가서 담수진주를 어떻게 기르는지를 보면 압니다. 조개를 벌려서 그 속에다가 상처를 내서 말하자면 거기에 작은 유리 알갱이 같은 것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개가 병이 듭니다. 몸이 너무 아프니까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속 무슨 물질을 내면서 그것이 자기 몸에 영향을 미치도록 계속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 결정체가 진주입니다. 병이 들지 않는 조가비는 진주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교회를 뷔페식당처럼 운영하면서 그냥 각개전투를 해서 건물 청소하는 사람에게 외주 주듯이 일층만 청소하고 매일 아침에 7시부터 9시에 청소해주는데 한 달에 백만 원이라면 그 사람이 나오든지 말든지 청소하고 집에 돌아가는 식으로 오늘날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서 운영하지만 교회가 그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신경 쓸 것 없고 네 할 일만 하고 돌아가라.’ 그런데 그것은 교역을 배우는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역을 오래했다고 하는데 ‘차라리 사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겠다. 그리고 처음 사역을 배웠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어느 안수집사가 자매를 하나 데리고 오더니 “목사님 이 자매가 불교신자였는데 교회에 오는 날 회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로 나오고 십일조도 합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정말 불교신자였느냐고 하니까 어려서부터 절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받아서 와서 첫날 깊이 회심하고 그리고 나서는 그때는 구원과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할 때인데 딱 걸렸습니다. 어렵지 않더냐고 했더니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새벽기도도 나오고 십일조생활도 하고 책도 열심히 읽고 하는데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이상하게 믿다가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역을 어떻게 하느냐가 어렸을 때 사역을 어떻게 배웠는가가 너무 중요하고 일평생을 그것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공평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에게 충성스럽게 당신을 위해 충성스럽게 봉사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주십니다. 땅을 주신다는 것은 부동산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감화력과 말씀의 능력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분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8년 동안 처음 간 교회에서 시달리다가 내수동교회로 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 나면 교역자들이 모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하시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목사님이 없고 예전의 교회에서 하도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다가 꼬박 존댓말을 쓰시면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그것을 보고 불평을 하는 교역자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직 사역의 세계를 잘 모르는구나.’ 진짜 말도 안 되는 교회에 가서 한번 비인격적으로 대우를 받고 짓밟혀봐야지만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난을 받으면 그게 저절로 여러분들은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여러분들을 리더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에 도달합니다. 너무 고통스럽다. 거기부터 진짜 정신과 영혼에 운동다운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물마시고 화장실가고 싱크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운동이 안 됩니다. 바벨을 든다든지 높은 산을 오르면서 헉헉하는 그때에 자기 한계에 도전하면서 그것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한 7, 8년 전에 시찰회에서 금강산을 갔습니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해서 따라갔습니다. 금강산을 오르게 되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사모님들이 뒤에서 제 흉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김 목사님은 틀림없이 저 높은 산을 오르지 않을 거야. 틀림없이 버스에 그냥 앉아서 책이나 보면서 기다리시겠다고 그러시겠죠?’ 우리 집사람은 또 맞장구를 칩니다. ‘그럼요 우리 남편은 저렇게 높은 데에 못 올라가요.’ 너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운동화 끈을 고쳐 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올라갔습니다. 850m의 높이입니다. 두 개를 올랐는데 850m를 가는 것이 아니라 400m 차를 타고 올라가서 450m 정도 올랐습니다. 그것을 처음에 하나, 두 번째 날에 하나 올랐습니다. 금강산을 다녀오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관악산이 재미없습니다. 특히 유명산은 이렇게 계속 올라갑니다. 그것은 굉장히 점잖은 편입니다. 철사다리를 잡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떤 느낌이냐하면 새카맣게 철사다리를 잡고 수직으로 올라가는데 이게 바위에서 뜯어져서 뒤로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도 잘 올라갑니다. 요즘 등산들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잘 올라갑니다. 그런데 나는 체력이 없고 그런 데에 잘 올라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올라가야겠다고 뜻을 세웠는데 체력과 모든 것이 부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맨 앞으로 가서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딱 올라가니까 ‘김 목사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얼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올라갔습니다. 웃을 기운이 없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어제 그렇게 오르셨으면 오늘은 아마 쉬실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올라갔습니다.
내가 늘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야기가 에도시대 때에 양 파벌에서 바둑을 대표로 두는 그 유명한 토혈국입니다. 하다가 한 사람이 졌습니다. 그러니까 피를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어져서 죽었습니다. 한 오락을 해도 그런 열정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두십시오. 사람들이 사역을 하다가 힘들면 툭하고 접습니다. 새 출발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일종의 배신행위로 생각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면 안 그런 사람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슬픈 마음을 가지실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웃길지 모르지만 우리교회 장로님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인들도 압니다. 열린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어서 임 목사처럼 개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심지어 어느 교역자가 와서 그만두겠다고 해서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약간 쉬운 교회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가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조사를 다 해보았답니다. 뭐냐 하면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충성한 길을 주셨을 때 충성한 사람들의 끝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끝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계속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목회자가 안 됩니다.
여러분 문학작품을 보더라도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간 작가들이 쓴 글은 시트콤이나 써서 돈을 벌어먹는 그런 작가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보면 정신이 있고 사람을 굴복시키고 두렵게 만드는 그런 어떤 힘이 있습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무슨 깊이가 있습니까? 그냥 쌈박한 대사를 가지고 하는데 시청자들이 무슨 10시 드라마 하나를 보면서 인생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오락성으로 보는 것입니다만 그런 수준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면에서 깊이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러시아 문학사를 보면 작가마다 관점이 나타납니다. 고골리 같은 사람은 검찰의 입장에서 소설을 썼다면 톨스토이는 판사석에 앉은 사람처럼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이 굉장히 도덕주의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런가하면 도스트옙스키는 피고석에 앉은 사람처럼 죄인의 범죄의 심리와 현실에 대해서 아주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안톤 체홉과 같은 사람은 방청객에서 그 모든 검사와 변호사와 재판장이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이 글을 씁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진지한 고뇌와 몸부림치는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힘들거나 어렵다는 생각으로 툭 놓아버리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즐겁게 자기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싶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고뇌와 외로움을 겪으면서 그 속에서 신학과 그리고 경건이 그리고 사역과 신학적인 비전이 융합되면서 그러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할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타령을 많이 하는데 참 좋은데 공부는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충성스럽게 살면 그러면 하나님이 공부의 복을 주십니다. 나는 일생동안 목회를 하면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는 사역과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사역은 어마어마하게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게 살면 하나님이 공부에 놀라움을 부어주십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에 놀라운 지혜를 주시고 놀라운 힘을 주신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안 해도 그렇게 하게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면 그런 안타까운 기도를 들어주셔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지혜를 하나님이 함께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한 지식들은 여러 번 인용을 했는데 패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의 정의를 인용하면서 ‘독트리나 에스트 디벤디 데오 페오크트리툼.’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학공부를 그저 박사논문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충성하면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을 쓸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학을 마스트리히트처럼 정의하면 하나님이 그 신학에 놀라운 부흥을 주십니다.
나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굉장히 힘들고 어려웠을 때 그때 하나님이 기도를 많이 하게 하시고 제가 성질대로 하면 무슨 사건을 저질렀을 텐데 그래도 하나님이 잘 참게 해주셔서 기도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50세 되던 해입니다. 몇 년 전부터 생각인데 내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주님을 한번 깊이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었습니다. 옛날에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깊이 주님을 만나면서 그러면서 정말 최초로 교회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일생 잊을 수 없는 나의 신앙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시리즈였는데 그게 당시 어거스틴에 대해서 쓴 박사논문을 11월부터 8권을 읽고 1월에 3일 동안 원고지 1,000매를 작성해서 사경회 때 설교를 했고 교회에서 출판해서 책이 나왔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절대로 하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빈손 들려서 보내시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개척교회를 하는 임신택 목사가 어느 날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냥 자기는 바깥세상도 모르고 딴 교회도 모르고 그냥 열린 교회밖에 모르고 그냥 12년인가 엎드려 있다가 보니까 사실은 좀 바깥세상도 궁금하고 그래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기 친구가 부러워서 종종 몇 사람을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반나절동안 쭉 이야기를 해보았답니다. 무엇을 느꼈느냐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공부를 하고 온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님 저의 판단력이 훨씬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교회와 현실의 상태와 목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에 대한 판단력이 공부는 하고 왔지만 그러나 자신이 내린 판단력이 훨씬 정확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신학공부는 했지만 자신의 신학이 훨씬 나은 것 같다는 뜻입니다.
신학을 우리들이 슈마이마허 이후로 오늘날 우리 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신학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 우리는 제대로 신학공부를 한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래 고유하게 이 기독교역사 속에서 신학이 온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종교와 학문이 통합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훌륭한 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연단을 많이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한번 칼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도 전통방법에 의해서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장군들이 들고 다니던 혹은 임금이 들고 다니던 칼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시퍼런 날이 선 칼을 바위를 향해 내리치면 바위는 박살이 나도 칼은 날이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뜨거운 불에다가 좋은 철판을 달궈서 그것을 계속 접어서 때린답니다. 요즘은 망치로 때리지 않고 오토해머가 있는데 불에 달궈서 오토해머에 넣으니까 두두 치면서 철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집어넣어서 반을 접는 것입니다. 또 집어넣어서 접고 이천 번을 접는 답니다. 접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주 강한 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의해서 가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천 번을 접어서 칼이 나오는데 그 칼 길이가 이 테이블 길이 정도 되는데 가격이 이천만원이랍니다. 한번 접는데 만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접어서 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칼은 그것을 몇 천 번을 접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짜 그렇게 담금질이 된 칼은 일평생 한 번도 갈지 않는답니다. 그냥 쓰는 것입니다. 뻥이 아니라 내 동생이 이야기하는데 자기 친구가 미국에서 미용실을 하는데 이가자 미용실인데 미용실에 놀러가서 가위가 있기에 코털을 깎았답니다. 기겁을 해서 달려오더랍니다. 가위를 뺏더니 가위 3개가 1200만 원짜리 세트랍니다. 뭐가 그렇게 비싸냐고 했더니 특수하게 담금질을 해서 평생 한 번도 갈지 않는 가위랍니다. 그것을 쓰는 사람들은 미장원에서 최고의 고수만 쓰고 밑에는 카펫이 깔려있어서 떨어져도 가위가 망가지지 않도록 한답니다. 그러니까 정말 잘하는 사람은 연장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목수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쓰는 책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쓰는 책은 사전부터 주석부터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그중에서 최상의 것으로 비치해놓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하면 여러분들이 이 사역을 하면서 수없이 접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야합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가 도망을 가면 안 됩니다. 소용없습니다.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쪼개질 듯이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그것을 깊이 견디고 내면화하는 가운데 그 사람 자신이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야할 하나의 길인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여기에 있게 하셨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자기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치 발람 선지가가 했던 것처럼 비슷하게 말입니다. 힘들면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되고 아주 좋으면 말끝마다 ‘주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싫어하는 회피하는 마음이 그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모세가 구스여자에게 장가를 들고 미리암과 아론까지 반기를 들고 덤벼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문둥병으로 치시고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와만 말씀하시지 않더냐! 우리와는 말씀하지 않더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 종 모세와 내가 교제한 것은 너희들과 한 것과는 다르다. 너희는 꿈과 이상으로 너희와 말했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하였도다. 이것은 그가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부흥을 주시고 성령이 위로를 주시고 큰 능력을 주시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업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는 것 없으니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대로 단일합니다. 졸업하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배려를 해줍니다. 그래서 눈물 흘림을 당하며 행할 길을 며칠 더 가야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것들이 이 속에 배여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방위밖에 안 갔다 온 사람이니까 군인들이 훈련받는 것을 보면 군인이 훈련 하나에 의해서 똑같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특수부대로 가고 어떤 사람은 군대에서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그렇게 사람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훈련이 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회피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학교 다닐 때부터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온 몸을 다해서 자기 몸과 마음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고 살점이라도 배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자원하는 의지에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명심해야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은혜도 많이 받고 열린 교회도 잘 알고 해서 써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냐 하면 그냥 자기 좋을 때만 열심히 하는 것이지 조금만 어려울 때가 오면 인내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참는 이런 강한 분투하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입니다. 주님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이런 찬송을 하지만 실제 삶에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특별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탁월하게 교회 일을 지혜롭게 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자동적으로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지혜는 충성스러운 삶의 결과입니다. 잘 하려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명품이 만들어지듯이 사역의 목표를 세우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꾸려간 사람들은 10년 일을 해도 그 사람 손에서 명품사역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하려고 몸부림치면서 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제대로 된 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배를 이렇게 보면 컨테이너가 실려 있습니다. 그것이 쇳덩어리 가지고 대충 두드려 만든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정밀과학의 산물입니다. 큰 배는 10,000TU 혹은 20,000TU까지 올라갑니다. 20,000개의 컨테이너를 싣는 것입니다. 수십 층으로 쌓아올리는 것입니다. 컨테이너를 제작해서 오차범위가 2mm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2mm 이상의 오차가 나면 절단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데 보내서 구멍을 뚫어서 만들어서 집처럼 경비실처럼 씁니다.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배위에 실리는 것은 그 오차의 한계를 넘어가면 수십 개를 쌓으면 우르르 무너지기 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거기에서 말하자면 남이 따라올 수 없는 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본의 기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일본사람들 자꾸 속 썩이면 ‘체! 다른데서 수입하고 수출하지 않으면 되지!’ 그러는데 안 됩니다. 수출을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입을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거기에 나와 있는 화학이나 기계 그리고 설비 중에는 우리가 지금 시작해도 30년 안에는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기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활용이 되지 않으면 한국의 산업이 안 되고 심지어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부품을 주지 않으면 미국에서 스텔스기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깊은 몸부림 속에서 명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매일 울었습니다. 교회를 오면 공부를 하지 못해서 눈물이 나고 학교를 가면 그 사역을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해서 눈물이 나고 집에 오면 가정사역이 이래서 되겠냐고 항상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 속에서 온전해지려고 애를 쓸 때 그때에 주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그때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경우에 그 사람들의 고뇌가 무엇인지를 어려움이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고 지도할 수 있는 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 이외에는 나를 이런 상황에서 도우실 분이 없다는 처절한 외로움, 깊은 고통,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깊은 견딜 수 없는 고뇌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그러면서 마치 금속 위에 뜨거운 불이 가해지고 망치질이 더해지면서 제대로 그 무엇이 나오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터키나 캄보디아나 그런 곳에 가면 금이 참 쌉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밀수를 종종 하다가 걸립니다. 캄보디아에도 금이 쌉니다. 그런데 기술이 신통치 않아서 순도 높은 금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 사서 한국에 가서 팔려고 하면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제값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정제기술이 뛰어나니까 금을 정제하는 것을 못 따라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반짝이는 것이 모든 것이 금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전도사가 되고 전임전도사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지만 그러나 사실은 어떤 목사는 다른 목사 교회의 성도자격도 되지 않는 목사도 많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똑같은 목사인데 어떤 목사는 옆에 있는 목사교회의 성도로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겠습니까? 어려서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런 것일 것입니다. 저 아이의 집이 부자인가? 부자면 좋습니다. 유학도 가고 교회를 한다고 하면 개척도 시켜주고 말입니다. 아니면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면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가 차이가 납니다. 교수들이 대부분 무엇을 시키는 것을 보면 못하는 사람은 불러서 책상이나 옮겨달라고 하지 공부 잘하는 아이 보고는 논문을 같이 쓰자고 합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목회를 하고나면 그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뭐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교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것입니다. 영혼을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는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다루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절대로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면 설마 하겠지만 20년 후에 이중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너무 바쁘고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전부 받으면 사역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차이를 무엇이 만드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괴롭다면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 괴로움 때문에 내가 향기가 나는구나! 그런 괴로운 일 때문에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어두운 밤에 교회의 한구석에서 담임목사도 모르고 동료들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있어서 주님께 매달리고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사역자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방식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그래서 정말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어디에 가든지 그 발로 밟는 땅이 그의 기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판치는 교회에 가서도 그 사람이 밟아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면 변화되어서 짐승이 모인 것과 같은 그런 교회가 성도들이 모인 것과 같은 교회가 되고 분쟁과 갈등으로 점철되던 교회가 평화로운 교회가 되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분투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고 피를 흘리면 나중에 목회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설교를 하는데 제발 내용이 있는 설교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우리 부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것을 듣는데 아주 깊고 심오한 설교는 원하지 않으니까 박윤선 주석이라도 열심히 읽고 올라오셔서 설교하셨으면 좋겠다고 성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내용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올라가기 전 두 시간 전에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본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씀이 과연 그렇게 믿게 만들어주고 굴복하게 만들어주는 그 무언의 힘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받은 고난과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크기와 믿음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그러면서 깊이 몸부림쳐야합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불평이나 하고 자기의 길이 어떻게 하면 편안한 길이 있을까 생각하고 사역을 하면서 수시로 그만둘 생각이나 하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 없습니다. 정말 좋은 설교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헌신하면서 살아가서 여기에서 훈련을 받는 기간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