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하시는 하나님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녹취자: 허혜숙
‘푸른 초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그저 놀이터일 수도 있고 기분 좋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산책 코스일 수도 있겠지만, 양들에게는 거기가 밥상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어디를 가든지 목초지가 새파랗게 이어지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을 이끌고 일정한 목초지로 가서 양을 먹입니다. 양들이 이 초지에서 충분히 먹고 나면 더 이상 뜯어먹을 풀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이 양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정말 곤핍한 시절을 수없이 지내왔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사울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동안에 그는 배고픈 시절을 수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전에서 진설병까지 먹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그가 왕으로 기름을 부은 후에는 함께 뜻을 같이 하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때도 그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동료들을 위한 양식을 염려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길을 지나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나는 나의 염려로 산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오늘 자신에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2절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 목동은 그 풀밭을 가늠합니다. 며칠이나 이 많은 양떼들이 이 풀밭에서 풀을 뜯을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은 언덕에 올라 먼 산지를 바라보며 관측과 경험에 의해서 다음에는 이 양들을 이끌고 어느 목초지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떼들은 풀을 뜯습니다. 양떼들은 ‘자. 이 풀을 다 뜯어먹은 후 이후에 어디에서 또 먹을 것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한 목자는 이미 양들을 위한 모든 대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목자로서 날마다 자신이 돌보는 양떼들을 굶주리지 않고 꼴을 먹이기 위해서 온 마음을 기울였던 목동시절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내가 돌보는 양떼들을 위해 그들이 무엇을 먹어야 할지 또 무엇을 마셔야 할지를 미리 준비하고 헤아렸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한 마리 어린 양인 나를 위해서 얼마나 더 잘 준비하고 공급했을까 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 영혼에 활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염려’입니다. 이 염려와 근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의 살을 썩게 하고 피를 말립니다. 그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불안’을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다.’라고 보았습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인간은 무엇에도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선언을 하고 나니까 이제는 규범도 없고 내가 지켜야할 원칙도 없고 모든 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그래놓고 보니까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나는 완전한 판단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데 도대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때문에 깊은 불안을 느끼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 근심과 염려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세속적인 염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거룩한 근심입니다.
첫 번째,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적인 염려는 끊임없이 그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욕심이 생겨나고 또 다른 욕심이 생겨나면서 인간이 끊임없는 궁핍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염려입니다. 두 번째, 거룩한 염려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넓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엾은가 하면서 영혼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들고 핍박받고 고생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데 마음 깊은 곳에 무거운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염려입니다. 좁게는 내가 섬기는 이 교회, 그리고 좀 더 넓게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번영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한 근심입니다. 이 두 가지 근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첫 번째 근심이 그의 주를 이루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번째 근심이 주를 이룹니다.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기 사랑을 떠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의 관심사가 자신의 행복과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인 번영을 도모하게 되고 이 세계의 선교지도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도둑질과 살인, 그리고 간음 혹은 폭행 이런 죄들을 나열하고 하나만 택해봐라 할 때 그것을 선택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찬송을 부르면서 사람을 죽이겠으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남의 집을 털어 도둑질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양심은 매우 뚜렷해서 이런 것들은 잘못 된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염려는 다릅니다. 그 염려는 사람들이 염려를 하면서 염려에 골몰하기 때문에 이렇게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행동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살짝 정체를 감춘 채 우리에게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런 염려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원래 이 ‘염려’라고 하는 말은 희랍어로 ‘갈라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갈라진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금식기도를 권장하는 이유는 밥을 굶는 것 자체가 어떤 위력이 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육체의 주된 욕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마음이 하나님 한 분을 중심으로 바라보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에는 불안과 염려, 걱정 등 이런 것들을 던져놓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명은 마태복음 6장 33절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알게 하셨는데 그것이 6장 1절부터 시작해서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그러면서 돈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길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 그러니까 돈에 대한 욕심은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과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라고 하신 이 말씀 한 마디를 하려고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을 길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한 날에 족하니라”(마 6:34) 하며 그 위대한 장이 끝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돈에 그렇게 몰입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거의 돈에 미친 세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돈에 몰입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 다음으로 돈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그랬을 것입니다. 어렵게 무엇인가 하나를 사고 한 번 사용해 보면서 ‘야, 진짜 돈이 좋기 좋구나.’ 한 번쯤은 다 해 보셨을 것입니다. 차를 바꿨을 때, 집을 바꿨을 때, 혹은 사용하고 있는 의자를 바꿨을 때, 혹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핸드폰을 바꿨을 때 아마 그런 말 한 번쯤은 하지 않을까요? 어느 권사님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이 분이 밤마다 꿈을 꾸는데 젊으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가난하던 시절에 ‘망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망태는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짠 굉장히 커다란 주머니였습니다. 사람을 다섯 명 정도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바구니였습니다. 그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기다란 집게를 들고 휴지를 주우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지나가다가 휴지만 줍는 것이 아니라 슬쩍 사람이 없으면 고무신도 집어넣어버리고 개 밥그릇도 집어넣어 가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애들도 훔쳐간다더라’ 라는 소문이 있어서 애들이 울면 망태할아버지 온다고 하면 뚝 그쳤습니다. 그런 망태를 지고 가던 사람이 앞에서 가더랍니다. 시커먼 천 조각들을 잔뜩 메고 가고 권사님이 그 뒤를 자기도 망태를 하나 메고 따라가는데 앞에 가는 사람이 시커먼 천을 계속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계속 그것을 잡아서 자기 망태에 집어넣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나중에서는 망태가 너무 무거워서 땅에 고꾸라져서 망태에 눌려서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손으로는 계속 그 시커먼 천을 집어서 자기 망태에 담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담임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웬 해괴한 꿈입니까?” 목사님이 웃으면서 “염려가 참 많으시군요. 마귀는 끊임없이 염려를 뿌리고 권사님은 등골이 휘도록 주워 담으셨군요.” 그 권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자기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회개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명한 비유를 드십니다.
(찬송)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입히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천금 같게 하시네
주님이 아주 아름다운 그림 같은 시어로 염려를 자신의 인생의 일부처럼 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잠시 있다 사라질 풀과 하늘을 나는 값어치 적은 새 한 마리도 그렇게 돌보신다면 인간인 너희들, 나의 자녀인 너희들은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느냐,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염려는 사실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밤을 하얗게 밝히며 근심하고 염려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날 일어났다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병들고 근심하면 근심할수록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노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을 새우면서 고민을 하고 염려를 하는데 기도는 못 합니다. 이미 염려라는 마음이 우리 속을 깊이 잠식하고 나면 마음속에 있는 이 기도의 활력을 다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염려는 점점 커지고 때로는 그 염려를 자기 방식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불신과 범죄를 가져오고 마지막에는 인간을 절망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떨쳐버려야 됩니다. 떨쳐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노라면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의심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이 내 마음 속에 생생하게 경험되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열렬한 기도가 사라지고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들이 사라지는 영혼의 깊은 침체가 오면서 미래의 소망보다는 염려와 근심, 심지어 절망이 그를 에워싸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에 빨려들듯이 자기 비참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가서 아무런 희망적인 증거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도 사람들이 그런 의식이 극도에 달했을 때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내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분은 나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할 것이고 이 풀밭이 끝나면 또 다른 풀밭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염려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염려는 결국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육체를 병들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냐면 ‘또 다른 어려운 일이 만약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하자. 그리고 오늘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이 많으니 즐거워하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 인생을 살아오면서 별의 별 힘겨운 고비를 다 넘기고 때로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순간까지 있었는데 오늘 그리고 내일 내게 좀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까짓 것 한 번쯤 더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게 무슨 큰 상관이 있으랴 하는 위로의 말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염려를 끊임없이 달고 삽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쉽게 털어버리고 나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고 나는 예전에 이 힘겨운 인생을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파멸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된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지켜주실 것이고 나의 인생은 주님의 계획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찬송)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인생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얼핏 생각하기에는 가난하고 걱정되는 일들이 많으면 염려를 많이 할 것이고,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고 복을 받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겪어야 할 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회고해 보면 기쁨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어도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철야하면서 열렬히 기도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주일날 말씀에 은혜 받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낮에는 열심히 돈 벌고 그렇게 힘겹게 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던 때가 있는가하면, 이제 먹고 살만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년을 갖게 된 어리석은 부자는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되었는데 염려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곡식을 어디에 보관하지?’ ‘쌓아두면 도둑들이 가져갈 것이고 도둑을 지켜도 쥐가 와서 먹을 텐데 혹시 비라도 쏟아져서 썩어버리면 어떡하지?’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금 어려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좋은 환경을 우리에게 주셔도 거기에서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신앙이 있으면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나면 그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이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전도사 생활을 했을 때인데 벌써 약 35년 전의 이야기가 됐습니다. 교회에서 제가 집사였는데 “김 집사, 너네 그 신혼집 방 빼서 교회에 들어와라.” 신혼생활한 지 불과 넉 달 되었는데 방을 빼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새로 샀는데 교회를 지킬 사람이 없다고 공짜로 살게 해 줄 테니까 어차피 전도사 할 것이니까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60년데 지은 건물이니까 어땠겠습니까? 직원들 기숙사라고 지어놨는데 방 한 칸짜리인데 요즘은 그런 것은 알지도 못하는 루핑을 쳐놨습니다. 종이에다가 아스팔트를 먹인 것을 지붕 제를 위해 썼습니다. 문을 열면 바로 교회 마당입니다. 거기에서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셔서 그 때는 반대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약 3년을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매일 새벽에 성경을 한 장씩을 강해를 하셨는데 창세기로 시작을 해서 예레미야 할 때쯤 나갔습니다. 장마철이 되면 밤새도록 비가 쏟아져서 새는 것입니다. 그릇을 아홉 개 정도 놔야지만 됐습니다. 딩동 딩동 딩동 밤새도록 그릇에 빗물이 쏟아졌습니다. 겨울이면 조갈이 나서 항상 머리맡에 물을 놓고 잤는데 밤중에 조갈이 나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물이 안 나옵니다. 무슨 일인가 불을 켜고 보니까 물이 완전히 얼음이 되어버려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새 색시인 집사람은 코가 새빨개져서 콧김을 뿜으면서 잠을 잤습니다. 얼마나 가난했겠습니까? 교회에서 사례금을 7만원을 주는데 신학교 등록금은 45만원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부모 형제의 도움도 한 푼도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하나도 근심이 안 되었습니다. 왜?
(찬송)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가끔 너무 힘들기는 했지만 염려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셨고 내 인생은 그 분의 손 안에 있으니 이러한 연단도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라면 지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신학대학원 시절에 저는 정말 목숨을 걸고 공부를 했습니다. 방학이나 휴교 때는 하루에 15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려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기를 약 세 번 정도 했습니다. 무슨 병인지 알아보려는데 의료보험도 없었고 그럴 정도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번도 서럽지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내가 잠시 이 고난의 때를 지나는 것은 하나님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지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과 끊임없는 고통, 8년 동안을 공직 생활을 하고 우체국장으로서 퇴직을 한 다음 퇴직금을 받아서 전세를 학교 옆에 얻었는데 사기 치는 사람들이 그 돈까지 떼어먹고 매일 매일 찾아와서 새 집 주인이 당장 이번 주 안에 방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갓난아이와 셋이 사는데. 사회적인 힘도 없고 매일매일 예배당에 올라가서 주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러 올라갈 때는 마음이 산란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올라가면 하나님이 마음을 물같이 쏟으셔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나면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서너 시간 기도를 했습니다. 여름이니까 기도를 하고 나면 런닝셔츠부터 티셔츠, 바지 심지어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진짜 벗어서 짜면 물이 줄줄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오면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계단을 걸어서 내려옵니다.
(찬송)
폭풍우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오다가 다시 계단에 앉아서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수류탄이 날아들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이는 병이 나서 매일 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한 달의 수입이 이 아이의 약값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무엇이 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염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기도하던 어느 날, 저는 영원히 비밀로 붙여두고 싶은 깊은 신비로운 은혜의 세계를 혼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인도해 주리라’ 그 말씀을 듣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울지 않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이 배에서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이제까지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 제목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
(찬송)
하늘 위의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아침을 짓고 있는 아내에게 “여보, 걱정하지 마.” “뭘?” “아무튼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리라고 말씀 하셨어.” 그리고 정확하게 6개월 후에 만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저는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오늘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에게 제가 묻습니다. 그 염려와 근심이 무슨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됩니까? 그것 끌어안고 마음으로 젖을 먹이고 길러봐야 마지막에 여러분을 죽입니다. 버리셔야 됩니다. 다 버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을 향해 살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며 내가 염려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담대하게 염려할 시간에 나는 기도하리라.’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잘못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시편 23편을 보면서 제가 깊이 감격을 했던 것은 ‘물가’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 ‘메노호트’라는 단어인데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양들은 선천적으로 물을 향한 깊은 공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털이 두껍습니다. 물에 빠지면 그것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물이 모두 흡수가 되어 뜨지를 않습니다. 장마철에 저는 시골에서 봤는데 소도 헤엄 잘 칩니다. 개도 개헤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돼지도 뚱뚱해서 헤엄을 못 칠 것 같은데 잘 칩니다. 닭도 오리도 헤엄을 잘 칩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콸콸 흐르는 물을 마음대로 못 마십니다. 그러면 목동이 양을 위해서 야트막하게 졸졸 흐르는 시내에 가서 돌멩이 나무뿌리 이런 것들을 갖다 놓으면서 흙으로 막아서 댐을 쌓습니다. 그러면 물이 흘러오다가 댐에 막혀서 고여 있게 됩니다. 그 물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 물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양떼를 데려다가 해갈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할 수 없는 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분질러서 사용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다루어 우리를 우리의 성품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성품 안에서 자신의 생활을 고치고 이렇게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이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홀로 된 때도 이렇게 하나님은 그가 홀로 외로이 있는 곳에도 함께 하셔서 그의 연약한 모든 것을 헤아리시면서 하나님이 그를 입히고 먹이시는 가운데 다윗이 오늘 이렇게 자기의 인생을 회고하며 이 위대한 시를 쓰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를 가슴에 품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가 없고, 염려를 가슴에 깊이 끌어안고 그것이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함께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꼭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마지막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어차피 나의 인생이니 오늘 피었다 지는 들꽃도 돌보시는 주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라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