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이신 하나님(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녹취자 : 조원정
시편 23편은 어려서부터 찬송가로 많이 부르던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이기 때문에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나의 신앙과 목회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시편 23편을 전 세계에 설교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저는 25년 전의 그 감격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구약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가 다윗의 생애 중 언제쯤 쓰여 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난무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시편이 목가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다윗의 생애 중 초창기에 쓰여 진 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고 시작하는 아름다운 들판의 풍경은 다윗의 목동 시절을 생각나게 하지만 뒤편으로 넘어가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이야기 등은 다윗이 많은 고난을 겪은 인생의 말기에 쓰여 진 작품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토막은 1절인데 이것은 시편 전체의 총론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는 주제입니다. 두 번째 토막은 2절부터 5절 까지 있는데 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인지를 차례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하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에서 건지신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여러분들은 저에게 4일 동안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1절부터 6절까지 한절도 남김없이 오늘 저녁부터 주일 오전 예배에 이르기 까지 한절씩 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세 토막 중 첫 번째 토막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라고 하는 1절입니다.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시편 1절을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늘에 계신 높으신 그분을 가리키는 세 개의 대표적인 존함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단어입니다. 세 번째는 ‘주’라는 단어인데 히브리말로 ‘아도나이’입니다. 이 세 하나님의 존함은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그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엘로힘’ 입니다. 많은 논쟁들이 있고 그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추측을 하지만 그중에 설득력을 얻는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두려워 하다’라는 ‘알라흐’라는 단어에서 엘로힘이 왔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도토리나무를 상징하는 울이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강함을 상징하는 도토리나무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단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시된 하나님의 성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성함은 모든 인간들에게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함의 뜻은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게 강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 정확하게 야훼라는 하나님의 존함은 원래 존재하다는 히브리어 ‘하야’ 동사에서 왔는데 이 성함은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나머지 모든 이름 중 가장 하나님의 고유한 존귀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네 글자로 된 야훼라는 이 이름은 입 밖에 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된다고 할 정도로 존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입에 올리지 않던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글자는 야훼라고 쓰고 읽을 때는 아도나이라고 읽을 정도로 하나님의 존함을 존귀하게 여긴 이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인류에게 계시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었고 자신이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자신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의 존함이 주라는 단어인데 히브리말로 아도나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주인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23편 첫 장을 열자마자 하나님의 성함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도나이도 아니고 엘로힘도 아니고 야훼입니다. 시인 다윗은 하나님의 존함을 부르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매우 특별한 은총의 언약이 있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에 매일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이스라엘의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그분을 붙들며 살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우리는 그분께 사랑 받는 백성이라고 하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야훼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위대한 시편 23편은 뚜껑을 열자마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야훼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앙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깊이만큼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깊이만큼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고 농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아주 경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조금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인간과 비교될 수 없이 높고 뛰어나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탁월하신 하나님임을 기억하며 두려워 벌벌 떠는 것으로 신앙은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물리 시간에 중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이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녀석아. 그것을 내가 알면 여기서 너를 가르치고 있겠니?” “그럼 우주가 얼마나 넓을까요?” 아무도 우주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통설로 그저 짐작하기를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길이가 백오십억 광년 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측정된 값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격찬을 하면서 여러분에게 시청하도록 격찬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1974년에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과학자가 만든 “코스모스”라고 하는 시리즈물입니다. 그의 제자가 한 30년 만에 다시 만들어서 코스모스라고 하는 다큐멘터리로 탄생했습니다. 칼 세이건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위대한 과학적인 업적과 우주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는 약 150억 광년쯤 되는 크기의 공간인데 그 공간 안에는 약 1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실제로 1천억 개라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 정도 숫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지구는 태양이라고 하는 항성 주위를 돌고 있는 여덟 개의 행성중 하나인데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빛나는 항성이 약 이천억 개쯤 모여서 하나의 별들의 가족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약간 타원형의 바람개비처럼 생겼습니다. 태양은 그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약 이만 육천 광년 왼쪽 하단에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태양 주위를 여덟 개의 위성이 돌고 있고 또 다른 위성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약 160개정도의 별 가족들이 돌며 태양을 엄마처럼 삼으며 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측정되는 별들은 모두 항성들이기 때문에 위성들의 수는 이천억 개에 들지 않습니다.
칼 세이건은 자신의 코스모스라는 책 속에서 우리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수를 약 4조 개라고 계산을 했습니다. 4조 개가 딸린 우리 은하계는 우주에 있는 다른 은하계에 비해서 결코 큰 은하계가 아닙니다. 그런 은하계가 펼쳐져 있는 곳이 우주입니다. 인간의 과학으로 갔다 온 곳이 달나라 인데 빛이 1.2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갔다 왔을 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중에 아주 먼지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화장실에 빨간 전구가 있고 그 주위를 여덟 마리 날 파리가 도는데 세 번째 날 파리 등에 붙어사는 세균과 같은 존재가 겨우 인간입니다. 별들은 태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수십억 년 혹은 백억 년 가까이 수명을 갖는 대신 인간은 매우 탁월하게 오래 살았다고 해야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루살이가 파리가 놀다가 헤어지면서 파리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또 만나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파리가 매미와 만나서 놀다가 다음 달에 만나자. 파리는 다음 달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게 인간의 존재입니다.
밤하늘을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끝없이 흐르는 우주의 공간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조 개의 별들이 모인 곳이 우리 은하계인데 사조 개의 별들이 한 곳을 맴도는 곳이 아니라 서로 질서 있게 돌면서 사조 개의 별들이 우주 공간을 초당 220km씩 비행을 하는 곳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입니다. 폭발과 함께 오늘도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공간 밖에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성질의 무엇이 폭발과 함께 펼쳐지면서 우주의 공간이 우리에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 인간이 서 있습니다.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인생의 날들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파스칼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주의 무한한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합니다.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으니 수증기 한 방울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던 파스칼의 묵상에 우리들이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습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제 나이 서른여섯이던 때에 다시 한 번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6개월을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영광은 영원하리로다. 잠시 풀잎의 이슬처럼 맺혔다가 햇살이 퍼지자 사라지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젊어서는 힘이 있다고 까불고 좀 더 나이 들면 돈이 있다고 까불고 좀 더 세월이 지나면 높은 권력이 있다고 까붑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시간은 수많은 사람을 삼키고 말이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그 인생을 바라보면서 한없는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허무를 느꼈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쾌락에 빠지고 돈을 사랑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미친 듯이 경쟁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빛으로 온 사물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와는 다른 인생의 견해를 갖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오늘 시인은 인생의 가장 고난으로 찼던 시련의 때를 생각하면서 거기서 만났던 위대한 언약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그 문제의 해결은 세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염려와 고통 모든 것이 세상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는 우리 인생에서 진정한 쉼을 얻지 못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백록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안식을 찾을 수 없었나이다.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어떠한 안식도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그분의 품에 이르러 참 안식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는 자신의 인생과 온 우주와 세계에 대한 근거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예수를 믿진 않았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14살 2개월 되던 해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 가던 저는 불현 듯 마음에 허무한 마음이 밀려오면서 교회를 가던 논둑에 엎드려졌습니다.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피가 마르도록 가슴을 파고드는 질문이었습니다. 오래 교회 다녔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었습니다. 무수한 전도사님과 목사님의 설교, 선생님의 공과는 나에게 티끌만한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논두렁에 엎드려서 한동안 통곡하며 울고 난 후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어린 아이는 결심했습니다.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누구든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신앙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예수 믿는 것이 티끌만큼도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성격 분열로 그를 치닫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문의 종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의 인생에 근거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자신이 양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양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문맥이 우리에게 말해줄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오, 나는 그 분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이라고 하면 한국적인 문맥에서 보면 매우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맥락에서 보면 양은 반드시 긍정적인 짐승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라크 지방에서 사람들이 가장 험한 욕이라고 생각하는 욕은 너는 양 같은 놈이다. 라는 욕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욕은 다 참아도 양 같은 욕은 못 참을 정도로 싫어하는 욕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양은 더럽고 주제를 모르고 능력도 없고 고집은 센, 생각이 없는 짐승의 대명사가 양입니다. 성경은 그 정도로 까지 양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양은 여러 곳에서 부정적인 짐승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가 그리고 있는 양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이 없고 고집이 세서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고야 마는 불순종 하는 사람의 대명사로써 양을 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 것은 양 전체에 대한 그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받쳐지는 것, 순순히 주인의 인도를 따라 희생하는 것, 이러한 그림을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에게 비유하는데 집어넣었을 뿐입니다.
원래 이 양은 지독한 근시라고 합니다. 모든 동물들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맹수 같이 날카로운 이빨이 있어서 다른 것들과 싸워서 물어뜯어서 자기를 보호하는 짐승들이 있고 아주 빠른 다리를 가져서 도망을 치거나 혹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거나 많은 자기 보호하는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임팔라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조그만 노루처럼 생겼는데 뿔이 6-70센티 정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짐승입니다. 초식동물입니다.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배고픈 사자가 임팔라를 공격했습니다. 바람과 반대방향으로 바람을 마주보고 서서 임팔라에게 포복으로 냄새가 나지 않게 접근합니다. 자신이 그 짐승을 경주하여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을 때 그는 어깨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사자의 습격을 안 임팔라는 전심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도저히 사자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잡혀먹기 직전에 임팔라는 몸으로 방향을 틀었고 공교롭게도 달려오든 사자의 어깨 쪽에 그의 뿔이 박히며 그 뿔이 어깨 뒤로 튀어 나왔습니다. 두 짐승은 함께 엉켰고 사자는 치명상을 입고 함께 쓰러졌습니다. 임팔라는 어깨 깊이 박힌 자신의 뿔을 빼내고 도망갔지만 사자는 상처를 입은 후에 정확히 두 달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다큐멘터리 팀이 추적기를 달고 추적을 했던 것입니다.
초식 동물 하나도 위기에는 사자도 이겨낼 수 있는 자기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이 있지만 말처럼 빠르지도 않고 이빨이 있지만 그것은 껌을 씹듯이 초식을 먹기 좋은 이빨이지 누구를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아닙니다. 뿔이 달렸다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도 그 뿔은 누구를 받아 들일만한 뿔이 아니라 만두처럼 양쪽에 달렸을 뿐인데 그 뿔은 무엇에 쓰는지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디자인 적인 요소로 그곳에 달아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을 좁은 의미에서 언약 백성들을 하필이면 양에다 비유하셨습니까?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인간은 양이 인간을 가까이 살면서 인간을 의존하며 생존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위대합니다. 우리는 위대성을 존엄성을 믿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개인의 중요성을 믿습니다. 천하의 무엇으로도 한 인간의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뛰어납니다.
오늘날 발달한 위대한 문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너무 발달한 것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2G폰이 아폴로를 달나라에 보낼 때 미국이 가지고 있었던 슈퍼컴퓨터의 용량입니다. 지금은 너무너무 발달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256기가가 담겨있습니다. 저의 설교를 약간 낮은 영상의 화질로 했을 때 약 256편의 비디오를 담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용량입니다. 과학의 기술은 엄청난 진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인간의 지혜 때문입니다. 인간은 위대합니다. 그거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위대하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보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인간의수명이 늘어나고 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50년 전보다 인간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가장 번영하고 잘 사는 나라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무서운 허무는 질병처럼 파고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생 본질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없게끔 소비와 향락에 빠지게 하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무절제와 향락에 흐르고 폭력에 빠지게 합니다. 인간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자신이 만든 문명 때문에 자신이 소외되는 이상한 현상을 겪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서울부터 부산까지 15분에 주파하는 열차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부산에 가서 아침을 먹고 출근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F22 전투기 정도의 속도로 부산까지 날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아마 멀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 질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까?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인간은 맨 처음 인간으로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것을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용감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소수의 분들을 제외하고 아마 구원을 받으신 분들일 겁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 혼자 힘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내 인생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도저히 나 혼자 힘으로 감당 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였습니다. 희망이 없는 자기 존재의 밑바닥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낯선 만큼 이 세계도 한없이 낯선 세계가 됩니다. 인생의 정체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자신이 우주 공간에 홀로 던져진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고 내가 가장 가까웠던 혈육도 내 인생에서 타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철저히 인생이란 벌판에 혼자 서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처럼 어린 나이에 그것을 의식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지만 그건 문화일 뿐이지 한 번도 인생의 진면목으로 그를 데려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애 같은 종교생활을 계속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난 적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렇게 자신이 버려진 그렇게 내동댕이쳐진 소외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이 인생의 무한한 허무의 깊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답을 알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기처럼 길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분이 사람이자 하나님이셨으며 그분이 이 세상에서 눈물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 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를 부르시기 위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기가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다는 것, 그래서 자기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로 온 땅과 세계, 근원을 알 수 없었던 자신과 모든 인간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깨달음입니다. 그것과 함께 너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함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백이 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것과 오늘 풀잎에 이슬처럼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져가는 덧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 앞에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잠시 태어났다 이슬처럼 사라지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기억한바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죽음의 순간을 마치 어린 아이가 이방에서 누웠다가 저 방에서 잠이 깨는 것처럼 인생이 지나가는 한 양상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자처럼 용감하게 살다가 그분의 품 안에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시인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인생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한 분 하나님을 붙드는 인격적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고난의 골짜기를 노래하며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될 수 있었고 그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를 읽어보십시오. 이 시는 정확하게 약 3천 년 전에 쓰여 진 시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읽으면 오늘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힘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입니다. 여러분이 시인처럼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인생의 소망을 발견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가지 목자라는 단어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 하시는가 입니다. 시인은 두 개의 유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원래 목자이었던 사람으로서 목자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고 자신이 한 마리 어린 양으로서 목자이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돌봄을 받았는지를 함께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고 보니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신 방식은 자기가 양들을 인도하는 방법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인격적인 인도입니다. 어느 여행객이 팔레스타인을 여행하고 여행담을 남겼습니다. 도로로 차를 몰고 여행을 하는데 양떼들이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서 이 도로 이편에서 저 편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양떼들이 아직 길을 건너고 있을 때 목동은 소변이 급해서 양떼를 놔두고 멀리 가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이동하던 양떼는 목자가 사라지자 꼼짝도 않고 도로 위에 멈추었습니다. 지나던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켰지만 양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목동이 돌아와서 양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니 그 목동의 음성을 들으면서 양떼들은 조용히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양떼를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양이 소 같지 않고 말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채찍으로 양을 휘몰거나 막대기로 후려치면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아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으로 양떼들을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주일 날 교회를 안 나오고 등산을 갔다면 칭찬할 만한 일입니까? 비난 받을 일입니까? 칭찬할 만합니까? 아니면 야단맞을 일입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주일 안 지키고 놀러 가면 칭찬 받을 만합니까? 야단맞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일을 안 지키고 그냥 놀러 가면 어떻게 됩니까? 1번 큰일 난다. 2번 괜찮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큰일 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별일이 없습니다. 어떤 자매가 주일 날 교회 앞에 내렸습니다. 택시를 타고 왔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깁스를 하고 미라처럼 생긴 사람이 내렸습니다. “누구십니까?” “저희 교회 다니는 박 아무개 자매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이따 간증 시간에 얘기하겠습니다.” 간증시간에 이야기를 합니다. 주일 날 교회를 가려고 늦장을 부리고 세수를 하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개야 오늘 등산가기로 약속한 거 있지? 빨리 나와 우리 기다리고 있어.” “안 돼. 나 교회 가야 돼. 너는 오후 예배도 없니?” “있지.” “그럼 오후 예배 가. 저녁 예배가고 우리랑 놀러 가면 돼지?” “난 그래도 낮 예배 가야 해.” “네 하나님은 낮에만 계시고 저녁에는 안 계시나? 빨리 와라.” 툭하고 끊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교회 가서 지루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졸 것인가? 아니면 봄나들이를 갈 것인가? 망설이다 보니 12시가 넘었습니다. ‘그래. 저녁 예배 들이면 되지.’ 주먹만 한 성경책을 배낭에 넣고 급히 사가지고 갔습니다. 산을 올랐습니다.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교회 안은 답답한데 여긴 최고의 자유가 있습니다. 산에 올라갔습니다. 친구들이 편편한 자리에 앉아 둘러앉아서 도시락을 먹기 전에 음료수를 꺼냈습니다. 맥주 밖에 없습니다. “나는 음료수 밖에 안 먹어.” 친구들 8명 모두 맥주가 술인지 음료수인지 투표를 했는데 모두 음료수라고 의결을 했습니다. 한 모금 먹어 보니까 옛날 입맛이 살아납니다. 한 통 두통 먹다보니까 혼자서 6통 먹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재밌는 노래를 부르고 걸어 내려오는데 천국을 손에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잘 내려오는데 급히 깎아 지르는 돌계단이 있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 손을 잡고 내려오는데 하필이면 바나나 껍질을 밟았습니다. 몸이 허공으로 떠는가 하드니 몇 번을 구르고 난 다음에 의식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어떻게 넘어져서 이 모양이니? 완전히 박살이 났어. 다 부러졌어.” 의사들 소리였습니다. 그때 이 자매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주일을 안 지켜서 벌을 받았나.’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여러분들 주일을 꼭 지키세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무서워서 주일 날 다른데 가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최 집사는 눈 한쪽이 이렇게 뭘 매달고 왔습니다. 지난 주일날 낚시 갔다가 옆 사람이 던진 낚시에 찍혔습니다. 그러니 등산 좋아하는 사람은 다리 만지면서 예배드리고 낚시 좋아하는 사람은 눈 만지면서 예배드리고 그럴 것이 아닙니까? 확실하게 얘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치사해서라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방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한 순간에 우리를 때려서라도 고치십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그렇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십일조 해야 합니다. 한 달 뛰어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박살이 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 뛰어 먹고 잘 삽니다. 명심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한번 두 번 괜찮다고 해서 이렇게 살아도 되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철이 없어서 부모에게 불효할 수는 있지만 철이 났는데 부모를 막보는 자식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렸을 때에는 까불고 부모님 집을 떠나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난 다음에는 그 아버지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으며 돌아가는 귀향과도 같은 길이 신앙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의 강요에 의해서 공포에 의해서 인격적인 신앙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싫으면 관두십시오. 싫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마지막 결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도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서 믿든지 말든지 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기계적인 우상숭배의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도의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종교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교육할 때 인격적인 교육 받고 싶다고 여러분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인격적으로 기르지는 못 합니다. 인격적인 교육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말이 자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하고 자녀가 하는 말을 들어 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교육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인격적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말씀 속에 담겨진 어머니 같은 하나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그분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지만 인격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지 여러분이 교회 나와서 아무리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해도 하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면서 진심을 구할 수 없다면 인격적인 신앙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과 모든 것 중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받쳐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성의 기능입니다. 우리가 힘써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그분의 말귀를 알아들으려고 하는 사랑하는 자녀의 마음을 갖는 것 없이는 누구도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대 얻어맞고 피를 흘리고 나서야 인생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신앙의 사람은 간증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간증할 것이 없는데도 너무 들을 것이 많은 신앙의 인격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초점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마음을 전수 받는데 자신의 신앙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알다시피 이 시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이 이 시인을 찾으시는 방법입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고 찾는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의 비유를 두 개 제시합니다. 잃은 것의 비유를 세 가지에 제시합니다.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중에서도 잃은 양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와는 달리 양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에 비해서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떠한 심정으로 그들을 찾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때는 아마 저녁때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양떼를 모두 헤아렸습니다.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없어진 양을 보니 어느 양이 없어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양 한 마리의 가격이 얼마쯤 합니까? 호주에 가서 물어보니 이백 불정도 한답니다. 미국에서 3백 불 정도 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3~40만 원 정도 한다고 칩시다. 저녁에 양을 찾으러 가다가 발을 삘 수도 있고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맹수를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그냥 포기하고 말지 아흔 아홉 마리나 들어 왔는데 목동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는 홀로 낙오 되어 있는 울고 있는 어린 양을 발견합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그 양을 어깨 위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양을 찾아 나섰을 때 목자에게는 양이었지만 20만원, 30만원,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양이 어디선가 주인을 찾으며 목동을 찾으며 슬피 울 걸 생각하면 목동이 편안하게 잠들 수 없었고 그것이 참 목자의 심경입니다.
(예화) 제가 신학교의 교수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벌써 1992년도 일이니까 26년 전 일입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점심을 먹으로 길거리로 건너오는데 아주 부잣집 아이들처럼 생긴 두 자매가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딱풀로 이렇게 부치면서, 하도 신기해서 그때 칼라 컴퓨터가 잘 없을 때니까 복사를 해서 붙였는데 보니까 주먹만 한 강아지 한 마리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현상금이 70만원입니다. 그때 70만원은 보통사람이 생각하기에 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학교에서 월급을 꽤 많이 받고 있었는데 200만원 밖에 안 되었습니다. 70만원이니까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에 70만원 현상금을 걸고 찾는 것입니다. 이 강아지를 찾는 사람에게는 7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얘들이 부잣집 아이들이니까 엄마 아빠가 준 돈 모두 모아서 현상금을 건 것 같습니다. 그 강아지가 얼마였겠습니까? 7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으니 강아지 원가가 있을 것입니다. 30만원? 그러니까 아직 강아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강아지는 얘들이 돈 주고 사온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얻은 것일 수도 있고 아무 이름 없는 잡종 일 수도 있습니다. 개종자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를 데리고 만날 같이 이불 덮고 자고 까불고 장난을 쳤는데 어느 날 리본을 달고 없어진 것입니다. 큰 개가 물어 간 것인지 차에 치여 죽었는지 보신탕 주인이 데리고 갔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얘들은 눈물로 붙이면서 개를 찾으러 다닙니다. 개와 가지고 있는 관계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개를 현상수배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 개를 그렇게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보고 “예수 믿어라. 잘 믿어라.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 돌보시는 은혜, 모든 것을 이쪽 난에 기록하고 여러분이 속 썩이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손해를 입힌 것을 이쪽에 만들어서 대차대조표를 만든다면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께 하나님께 이익 들였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몇 명이나 됩니까? “아 목사님, 제가 예수 믿고 하나님 확실히 남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도 정말 편하실 것입니다.” 감히 누가 그럽니까? 그럼 왜 그러십니까? 당신에게는 이익도 되지 않는 일을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더 재미있는 것은 양 한 마리를 업고 돌아옵니다. 동네 있는 사람들에게 광고를 합니다. “여러분!” 말하자면 사람들은 다 창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저녁 먹었어?” “못 먹었지.” “조금 있다가 우리 집에 모두 모여.” “왜?” “잔치를 할 거야.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자고 합니다. 설마 그 양을 바비큐 하겠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양 한 마리를 잡았기 때문에 너무 기쁜 나머지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바비큐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양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애들을 교육시켜 보면 엄마 아빠로부터 흠뻑 사랑 받는 아이들, 남편에게 충분히 사랑 받는 여전도의 회원들은 다릅니다. 남들에게 꺾이지 않는 자신감, 자기 자존감이 있습니다. 인생의 그런 자존감이 거기서 옵니다. 세상에서는 찢기고 치이고 때론 패배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주시고 구해주셨으니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는 이 고백이 있을 때에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존감이 세상이 조금 흔들리고 내 뜻대로 안되고 사람들에게 가끔 무시를 당해도 나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명색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다. 그분이 내편이시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모든 평안과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기도해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의 내가 거는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인생의 순간순간의 귀로에서 그거 때문에 울고 웃고 한다면 우리 인생은 끝없이 변덕스러운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될 때에도 안 될 때에도 무엇인가 믿고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그분의 손 안에 있으므로 그분의 손에 의해서 내 인생은 그분의 품에 안겨서 흘러간다. 라는 자신감, 그 편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을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으면 믿을 수가 있어도 다윗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로 소외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기름 부으러 왔을 때에 분명히 이새의 집에 아들을 택하였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큰 형부터 차례로 선지자에게 데려갔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가 묻습니다. 너희 집안에 아들이 이거 밖에 없느냐? 그때 비로소 아 하나 더 있었다고 생각 난 아들이 다윗이었습니다.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무시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는 다윗의 심오한 신앙의 세계에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영적인 수준이 안 맞는 여자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면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데도 사울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하고 와서 눈물을 흘리는데 불행하게도 그 강간범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첩들이 있었는데 그 첩들을 백주에 강간하고 아버지의 침상을 욕보인 자식은 자기 배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군의 괴수가 아들이었습니다.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아들의 죽음의 소식과 함께 날아 들어왔습니다.
인생에 다윗이 마음 편할 날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시련에 시련, 고난에 고난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그는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시인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고난과 슬픔의 때를 지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인생의 길에서 자신의 뜻이 좌절되는 경험 없이 승승장구하기만 하는 신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경험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은 그분의 장중에 있고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련의 폭풍을 지나가게도 하시고 고난의 가시밭길도 지나게 하시지만 마지막에는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꽃길만 걷게 하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조차도 꽃길만 걸으며 인생을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꽃길은커녕 멸시와 천대와 욕을 받으며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기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은 자기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지만 그분은 자신의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유익입니다. 예수를 믿고 꽃길을 걸어가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가치는 우리 인생이 꽃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꽃과 같이 아름다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련의 파도가 고난의 물결이 엄습합니다. 역경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나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평생 가슴에 수많은 가시넝쿨과 같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이 되었을 이 사람이 고난의 인생길을 모두 마치고 하나님의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거기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창조된 어린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여러분들의 본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