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는 목회자는 없다”:
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김경애
여러분들과 함께 다루어보려고 하는 주제는 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목회자의 고난이 한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형성하는가에 대해서도 성경과 역사, 신학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다룰 내용들은 이정도의 이야기입니다.
Ⅰ. 들어가는 말
목회자라는 것은 결국 정의를 하자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고난의 길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많은 환경적인 갈등을 겪을 수 있고 또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고통을 받으며 신학을 공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고난과 함께 내적으로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자기가 깨어져야지만 목회자로서 빚어져가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이런 목회자의 ‘신학함’ ‘Doing Theology’ 혹은 ‘Being Pastor’ 즉 목사가 되고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고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표적인 사람이 종교개혁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루터입니다. 이 사람은 특히 이런 문제들 Doing Theology의 문제. 이것을 굉장히 많이 강조했습니다. 신학의 내용보다도 어떤 식으로 신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 존재를 건 투쟁과 갈등 속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주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신학공부를 하는 방법 세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기도(Oratio)’입니다. 이것을 첫 번째로 꼽은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루터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모든 신학함의 근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묵상(Meditatio)’입니다. Meditatio는 신학공부를 통해 배우는 지식들을 자기화하는 과정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신학지식이 음식이라면 이 Meditation은 추인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씹어서 그것을 자기가 섭취하는 과정입니다. 그것과 함께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시련(Tentatio)’입니다. 시련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능력이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시금석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문집에 비텐베르크판 1539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만약 쥐똥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고급 향신료에 빗댈 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면” 그 당시에는 후추라는 향신료는 조금 과장을 하자면 금과 똑같은 무게로 값어치가 나갈 정도로 그렇게 비쌌다고 합니다. “아주 그런 값진 향신료같이 제가 그런 잘난 신학자들과 함께 같은 대열에서 내가 언급이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교황주의자들의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악마의 분노로 저를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저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정말 이 마르틴 루터는 고난의 길을 걷는 가운데 신학의 성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온몸으로 보여준 하나의 전범이 되는 것입니다. 굳이 이런 위대한 종교개혁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이 말해줍니다. 목회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거의 운명적인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 1장 8절 옥중에서 쓴 편지에서 말합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의 고난을 참음과 견딤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젊은 목회자들은 이 깊은 비밀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꽃길만 걷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부모의 후원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를 아주 높이 인정해주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그리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누군가의 지원을 받으며 유학하고, 그렇게 해서 좋은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키우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꽃길만 걷는 목회는 없습니다.
Ⅱ. 참고 견딘다는 것은
A. 모함과 비난을 사랑으로 견딤
그러면 참고 견뎌야하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목회자는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에게만 에워싸여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는 길에는 언제나 모함과 비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모함과 비난을 어떠한 태도로 견디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더 깊게 하고 경건을 더 깊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칼빈입니다.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원래 이 칼빈은 기질적으로 보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사교적이기보다는 혼자 사색하고 공부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선비타입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도 이 사람을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루터를 사용하셔서 일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용해서 종교개혁을 더 풍성하게 하고 사실은 종교개혁을 마무리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커다란 밑그림을 굵직하게 그려놓았다면 그 그림을 보다 상세하게 마무리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그리고 종교계에서 어느 한쪽으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한쪽에 치우쳤던 견해들을 목회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로잡은 사람이 칼빈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과 루터 이후에 데오도로 베자 그리고 멜란히톤 이어지는 많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그 그림이 명암도 들어가고 색칠도 들어가면서 아주 화려한 초상화가 되는 그림이 바로 16세기 17세기 두 세기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리켜서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매우 중요한 시대입니다. 17세기는 개신교 유산이 완성이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시기를 개신교 교부들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시대에 첫머리에 살았던 존 칼빈은 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제네바의 시의원 아미 페렝(Ami Perrin)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칼빈을 깔보면서 그 인간은 피카르디 시골출신이요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매우 불량한 목회자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공개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까르멜수도회 수사인 의사 제롬 볼세크(Jerom Bolsec)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악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 생전에는 뭐라고 비난했느냐 하면 “너는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 나쁜 인간이다.” 예정론 같은 것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칼빈이 죽은 다음에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제불능이고 짜증나며 사악한 인간이고 늘 불만족을 가득한 인간이며 동성애기질을 가지고 실제로 죄를 범했으며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는 색골이다.” 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알리스더 맥그레스의 책을 보면 칼빈의 사후에 나오는 볼세크의 칼빈에 대한 비난이 출판되는데 이것이 맥그레스의 평가에 의하면 상당한 성공을 거둡니다. 그래서 유럽권 안에서 약 200년 동안 칼빈의 저작이 잘 읽히지 않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러면서 제네바의 목회자 가운데 장 트롤리에 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인물은 기독교강요 그 자체를 가지고 비난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공격합니다. 이것은 일부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칼빈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가 30가지가 넘는 질병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의 상당수가 깊은 스트레스와 고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렇게 바짝 마르고 턱이 뾰족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묘사하기를 지금도 칼빈 페이지를 펴보면 피가 주르륵 흐르면서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은 원래 칼빈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 여성이 나오는데 이레나 바쿠스(Irena Backus)라는 인물입니다. 이 여성 신학자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는 상당히 예리하고 아주 날카로운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Calvinus sacrarum literarum interpres” 라는 합본으로 된 문집에서 이것은 최근에 나온 문집이고 네덜란드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 안에 논문이 들어있습니다. “Calvin, saint, hero, or the worst of all possible Christians?” 라는 Article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볼색이 거짓말과 소문을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였음을 거의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왜 그랬느냐 하면 볼색이 칼빈에 대해서 그렇게 비난을 했는데 이레나 바쿠스가 찾아낸 아주 굉장히 중요한 학문적인 업적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볼색이 칼빈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쓰면서 모함 비슷한 것들을 쏟아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롬 볼색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칼빈에 관해서 잘못된 점을 지적했는데 근거 없이 한 것이 없다. 다 Document가 있었고 아주 지체 높은 사람과 내가 만나서 이야기했는데 다 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 Document 가 무엇이었는지 또 그 높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평생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레나 바쿠스가 볼 때에는 이것은 하나의 반감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반감을 갖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칼빈이 죽은 다음에 데오도로 베자가 칼빈에 관한 전기를 씁니다. 그런데 이 데오도로 베자의 중요한 주상점이 무엇이냐 하면 “칼빈의 경건을 내가 옆에서 보았다. 이 칼빈의 경건이라는 것은 중세신학자들은 물론이고 초대교회 교부들 심지어 사도 바울을 능가할 정도의 거의 완벽한 성자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고 하고 자기의 스승을 Admire합니다. 이것이 밸이 확 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오물들을 끄집어내어 칼빈에게 뒤집어 씌었다고 이레나 바쿠스가 그것을 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논증해낸 것입니다. 성경 읽을 시간도 없지만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읽어보십시오.
그러니까 칼빈은 그런 모든 환경 속에서 에워싸인 채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었을 때 교회에 휴가를 내고 마르틴 루터의 유적지를 다 돌았습니다. 6,000㎞를 차를 타고 다 돌면서 칼빈과 루터를 찾았는데 사실 비텐베르크성당에 갔을 때는 그렇게 감동이 있었지만 그냥 감동이 있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는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하고는 별로 접촉점이 없었습니다. 감히 나하고 비교할 수가 없는 Adventurous 한 삶을 산 풍운아적인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기질이 그런 운동권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칼빈의 흔적을 찾아서 가서 칼빈이 목회하던 삐에르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는데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칼 같은 성격을 가진 개혁자였는데 성당 안에 각종 조각품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을 칼빈이 설교하던 자리를 보고 조각들이 Statues 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 앉았는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칼 같은 종교개혁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조각상 하나 없애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아까 이야기한 이 모든 모함과 비난을 다 받으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몸도 아프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곧바로 나에게 투사되어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아, 칼빈은 정말 힘들었겠구나! 그리고 매일 매일 죽음을 기다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거기서 삐에르 예배당에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왔다가 사역을 하고 이제 자기가 순교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 거기서 이미 성령이 증거하기를 핍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그리고 자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사도, 설교 한마디로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사도, 그리고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 신약성경 절반을 쓴 저자의 모습은 읽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목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은 세 가지 액체 속에서 절여지면서 담가지면서 그러면서 신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Our theology is formed by the immersing into sweat and tears and blood. 땀과 눈물과 핏속에 푹 잠기면서 그 속에서 그것들이 모두 스며들어서 신학다운 신학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 시대도 이미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법정에 들락거리면서 욕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원래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이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아주 전형적인 통제력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어떤 식으로 발견하느냐 하면 부활의 경험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계속 더듬어 추적할 때 발견되는 ‘Core of Pauline Faith’ 사도 바울 신앙과 신학의 핵심부에 들어가면 거기서 무엇이 나오느냐하면 다마스쿠스의 체험이 나옵니다. 다메섹의 체험이 나옵니다. 어떤 식으로 되느냐하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갑니다.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의심할 수 없이 예수입니다. 거기서 순간적으로 신학적인 ‘Theology Confusion’(신학적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구약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를 아주 놀라운 인물로 인정해주셨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에 죽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왜? 십자가에 죽는 것은 나무에 달아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의 Fact가 Compleat(갈등)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는 “Jesus died on the cross.”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Fact. 또 하나는 “Jesus is resurrected.” 예수는 부활하셨다는 사실 이 두 개의 사실이 갈등을 일으키는데 둘 다 자신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입니다. 부활은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았습니다. 거기서 한 순간에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느끼는데 거기서 강력한 빛이 그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으신 것과 살아나신 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자기 자신 때문에 죽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실 인류를 위한 대신적 죽음이었기 때문에 죽으신 그것이 하나님께 더 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어서 주님이 살리신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 경험을 핵심으로 자기가 알고 있었던 유대주의의 종교적인 배경,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적이고 지적인 배경, 그 다음에 정치적으로 Romaism 이라는 배경들이 파편처럼 흩어져있었는데 그 십자가 부활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 온 세계와 우주의 역사의 중심에 예수가 서 계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움직이는 열쇠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꽝하고 때리면서 신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신학이 최고로 발전했을 때 그리스도의 신학이 최고로 발전했을 때에 나온 작품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가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골로새서에서는 이 온 우주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호튼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고되어야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교육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상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온 세계와 우주를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리사적으로 Recaputalatio의 교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나오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아나카펠레오’의 교리라고 합니다. 다시 머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그 예수 부활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데 예수를 통해서 감화를 받게 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Love’,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일생이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많은 고난과 깨달음을 통해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놀랍게도 사도 바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장을 기록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서 13장 사랑장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을 크게 ‘오래 참다. 덮어주다. 견디다’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매크로튜메오’ 라는 뜻인데 ‘매크로’는 ‘최대한’이라는 뜻이고 ‘튜메오’는 ‘참는다’ 는 뜻이고 최대한 참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스태고’ ‘덮어주다’인데 여기서 ‘스태게’ 라는 ‘덮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휘포메노’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을 쓰는데 문맥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교회에 분파를 만드는 문제도 있었고 도덕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또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감히 사도 바울의 ‘아포스십(apostolate)’,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가 자기를 제자로 삼았느냐?’ 그런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는 것을 변증합니다. 그 변증한 내용이 바로 고린도전서 12장 12절입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사도라는 증거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사도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하고 부활을 경험하고 세 번째는 그와 함께 그 모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사도의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 권능을 마태복음 10장에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뒤로 밀쳐버립니다. ‘너희들은 나보고 아니라고 그러는데 나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맞다.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를 보아라. 오래 참았다. 만약에 내가 사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참을 수 있겠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을 받은 것보다도 더 확실한 예수의 사도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고 증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에서 얼마나 사고가 바뀌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B. 인내로 고통을 이김
그런가하면 인내로 우리는 그런 모든 고통들을 이겨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한다는 것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인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 참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인물입니다. 나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아주 가장 중요한 멘토 중 한사람입니다. 저는 한 20년에 걸쳐서 이 사람의 저작을 거의 모두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굉장한 인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이 시대에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신학적인 다양한 도구들이 에드워즈의 사상과 철학 속에 아주 많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20세기 후반은 놀랍게도 에드워즈의 부흥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전 세계를 다녀보면 에드워즈 학회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칼빈이나 루터가 없는 나라는 종종 있는데 에드워즈는 저기 동구라파에 있는 작은 나라까지도 전부 다 있고 학회가 있고 세미나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과 같은 이 다원주의 시대에 에드워즈의 그런 변증적인 신학이 굉장히 많이 차용할 내용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에드워즈를 몇 년 공부한다면 헛된 시간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공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3살에 예일대학에 입학해서 17살에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 학교의 교수가 됩니다. 요즘 같으면 강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전도양양한 학자의 길을 버리고 이상하게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던 교회에 후임자로 갑니다. 거기에서 그 당시에 누가 세례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할 때 그때에 그런 자격의 중요한 것을 시의회에서 결정해주었습니다. 시의회에서 뭐라고 결정해주었느냐 하면 조상이 예수를 믿고 기독교신앙에 반하는 행동을 밖으로 보이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 자다. 중생이 없어도 세례와 성찬에 참여가 가능하다고 시의회에서 규정했습니다. 그것을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네 교회에 적용했습니다. 에드워즈도 처음에는 그것을 따랐다가 나중에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면서 이것은 아니라고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소위 이야기하는 ‘Half Covenant Controversy’(반쪽언약의 논쟁)을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이 일로 인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속된 말로 잘립니다. 공동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의 표결로 잘립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교회는 거기 동부에서 제일 큰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공동의회에 참여하는 교인이 600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20, 30명이 안 되는 사람만 에드워즈의 해임을 반대하고 나머지는 다 가편 투표를 해서 해임이 되어 떠납니다. 이미 그때 이 도시와 동부는 알미니우스주의에 의해서 잠식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쟁을 중재하는 의원들이 대부분이 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골통 보수 같은 설교에 대해서 이미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편이 없이 기울어지는데 그때에 그 조나단 에드워즈가 1750년 7월 5일에 Erskin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내던져졌기에 나와 내가 부양해야 할 많은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애들이 10명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 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 만한 어떠한 특별한 문도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고 결국은 인디언 선교사로 홀연히 떠납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역에 종사하는 동안에 위대한 작품들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귀족출신으로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그렇게 목회를 하던 사람도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고난을 겪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고난의 사람이었고 꽃길만 걸은 위대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 시인이 비슷한 경험을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 오래 참아야합니다. 교회에 가서 괴로운 일이 있으면 금방 사표를 내고 어디 다른 곳을 기웃거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너는 이제는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 때로는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집이 멀고, 구박을 받아도 그냥 거기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괴로움을 기도 속에서 녹여내야 합니다.
C.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함
이 그림은 칼빈과 제네바에 있는 신학자들의 회합을 그린 그림입니다. 칼빈의 탁월한 점은 뭐냐 하면 자기와는 아주 뚜렷한 자기 신앙의 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대해서도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용납합니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죽으십니다. 그런데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도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똑같이 만들어놓으시지 않고 다 다르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그렇게 다양하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입니다. 그런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태도가 목회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목회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정해주는 리더는 자기의 생각과 모든 것에 딱 맞는 똘마니 같은 사람들을 줄에 꿰어서 달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들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에게는 간이라도 빼줍니다. 진짜 사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달라도 눈길도 안줍니다. 인간으로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품은 아버지의 품과 같아서 서로 서로 다른 자식들이라도 그 아버지의 품에서 쉼을 얻을 수 있고 그 아버지의 품에서 자기가 이해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인간에 대한 훨씬 더 폭넓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미성숙한 지체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고 사랑이 충만한 목회자가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5명은 모두 교회의 회원입니다. 이 녀석은 은혜를 단단히 받았습니다. 빨간 색깔이 진합니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니까 은혜의 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목회자를 존경하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봉사하겠습니까? 이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랑이 서서히 은혜의 불꽃이 꺼져서 사랑이 남긴 남았는데 회색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거의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예 나는 교회도 못 간다며 뒤로 자빠졌습니다. 목회자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만 데리고 목회를 하면 안 됩니다. 이것도 다 자기새끼입니다. 그러니까 찾아가서 이렇게 사랑의 빛을 잃어버리고 미끄러진 성도를 보면서 그 미끄러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파해야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목자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완전히 뒤로 나자빠진 놈들도 ‘어떻게 가르쳤는데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나?’ 그러면 안 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가는 심정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만 데리고 목회를 하라고 해도 쉬운 것이 아닌데 이런 인간들을 한없이 참으면서 사랑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살아가면서 그 맛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충분히 맛을 보아서 고통의 쓴물을 삼키기까지 그 괴로워하는 그 속에서 신학이라는 것이 땀과 눈물과 피에 젖게 됩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신학의 탄생이 이루어집니다.
D. 고난을 자기죽음의 기회로 삼음
목회자는 어차피 많은 고난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자기죽음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생물학 공부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생물학, 천문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등의 몇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역사와 철학은 늘 공부하는 것이지만 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생물학을 전공한 박사과정을 거의 끝낸 선생님을 모셔다가 공부를 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신학에서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생물학이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Dead! 왜 죽음이 중요하냐 하면 빛을 설명하려면 어둠을 이해해야 하듯이 생명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죽음을 이해해야지만 생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 세포의 죽음입니다. 세포의 죽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와 아포프토시스는 모두 희랍어입니다. ‘네크로시’는 ‘네크로스’ 죽음이라는 희랍어 단어와 같은 어근이고 ‘네크로시’ 그러면 영어에서 죽은 자를 불러내는 강신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독거미가 쏘았더니 독극물질이 들어와서 세포가 이만큼 죽어버린 것입니다. 뚜렷합니다. 이것을 세포의 타살이라고 합니다. 타의적인 죽음입니다. 화상, 타박상이나 유해물질등의 자극으로 세포가 팽창하면서 세포가 죽는 것을 네크로시스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 자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 우리 몸 전체가 약 60조개의 셀로 이루어졌습니다. 60조개의 셀로 이루어졌는데 어떤 세포는 죽으면 영원히 다시 복원이 안 되고 어떤 세포는 빨리 되고 어떤 세포는 늦게 되는데 적어도 우리 몸의 어떤 세포는 10년에서 20년 정도면 세포가 다 바뀌어서 다른 몸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유하자면 꼬마전구가 60조개가 켜져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켜져 있으면 불이 깜박거리는 것처럼 어떤 세포는 죽고 다시 살아나고, 죽고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크로시스의 죽음을 당했어도 치료를 하면 없어지고 새살이 돋아나는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 몸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학 문제를 풀면서 여러분들에게 제공하려고 하는 또 다른 세포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의학용어이기도 한데 아까 것은 타의로 죽음인데 이것은 자의적인 죽음입니다. 자살입니다. 왜 세포가 자살하는지는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아주 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나지만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은 아주 단기간에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포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는데 스스로 자기가 죽습니다. 죽으면서 거기에서 세포 물질들이 ‘리소솜’에서 이것들이 소화되면서 여기서 영양분과 함께 ATP라는 화학에너지가 나옵니다. 그 에너지가 전기처럼 다른 세포에 전달되어서 그 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옆에 있는 세포에 양분을 공급하고 세포가 생성되고 분열할 수 있도록 전기를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60조개의 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들의 어떤 것들이 끊임없이 스스로 자살하고 죽음으로써 다른 세포들을 살려내는 것이 생명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세포들이 끊임없는 자살을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몸 전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어떤 상황이냐 하면 특정부위가 아무도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안 죽으려고 합니다. 서로 상대방에게서 엄청난 영양분을 끌어와야 합니다. 끌어옵니다. 끌어다가 계속 덩어리를 키웁니다. 계속 키우니까 이것은 계속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것들이 죽습니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암(Cancer)입니다. 그러니까 암은 너무너무 충만한 생명의 덩어리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생명의 덩어리 때문에 인간의 몸 전체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 생물학적인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니까 어떤 살아있는 피조물이 살아있다는 의미는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세포들이 끊임없는 자기죽음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쳤으면 나의 감동이 크지 않았을 텐데 그 시기에 천문학을 1년 공부했습니다. 1년 동안 매주 천문학을 공부하니까 미적분으로 들어가서 수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거기까지는 목사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두었습니다. 도전할 마음도 있었지만 미적분을 다시 공부해야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생물학 선생이든지 천문학 선생이든지 나에게 Fact는 가르쳐주는데 그들은 이 Fact가 주는 Meaning은 모릅니다. They don't know they could not explain any meaning of such……. 그중의 한 현상이 소위 이야기하는 Eagle Nebula 에 관한 스토리였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기둥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독수리성운의 일부입니다. Eagle Nebula, M16, NGC 6611입니다. 여기와 지구와의 거리는 약 7,000광년입니다.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보면 생성 시기는 약 55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그리고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길이부터 이야기하자면 여기에 가장 긴 기둥이 보입니다. 이것이 4광년입니다. 빛이 4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태양까지는 8분 걸립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큰 기둥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자구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주공간에는 H 이외에는 없습니다. H 도 지구처럼 밀도가 높은 상태가 아니라 오다가다 하나씩 있어서 없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분자의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 이런 분자운이 어떻게 생기느냐하면 별이 항성과 위성으로 나뉩니다. 지구는 위성이고 태양은 항성입니다. 그런 항성이든지 위성이든지 수명을 다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천문학적인 시간의 길이가 필요합니다. 수명을 다하면 마지막에 백석외성의 상태가 됩니다. 쾅하는 폭발과 함께 그 별이 우주 공간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폭발할 때 그것은 한마디로 먼지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 먼지로 변하는 것들이 떠돌아다니다가 그것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뭉칩니다. 뭉치면서 핵융합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자면 월드컵 경기장만한 곳에 있는 분자운이 수소분자 같은 것들이 꽉 뭉쳐져서 축구공 하나만큼 커지면 약 6천만도 정도의 열을 낼 수 있는 불덩어리로 변합니다. 그것이 Plasma Technology입니다. 미래의 NT나 BT를 넘어서는 먹거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공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그것을 지하실에 집어넣고 거기서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Pollution도 없습니다. 공기오염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거기에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연구 중입니다. 아무튼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뭉치다가 나중에는 쾅 하고 폭발을 해버립니다. 폭발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순식간에 불이 붙는다는 의미입니다. 순식간에 불이 붙습니다.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온도를 내는 것입니다. 몇 억 도의 열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의 변형이 일어납니다. H라는 것이 수소지만 H에다가 약30,000도 정도의 열을 가하면 H3 헬륨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금이 되려면 약 50억도 정도의 열이 가해져야합니다. 그래서 금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구 안에 있는 금들은 우주공간에서 어떤 물질이 50억도 정도의 열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폭발에서 생기는 열과 함께 수많은 분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현재 발견된 원소들만 해도 지금도 계속 발견되니까 잘 모르겠지만 한 200개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원소들을 가진 독특한 지구 같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이렇게 눈동자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닭의 배를 갈라보면 계란이 매달려있듯이 때가 되면 이것이 폭발하면서 별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별이 만들어지는 것은 이미 죽은 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별들이 자신을 폭발시켜서 만들어놓은 분자들이 재료가 되어서 거기서 새로운 것들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동북아 철학에서 무(無)라는 것은 Ex Nihilo 라고 합니다. Creato Ex Nihilo 무(無)로부터의 창조입니다. 동북아철학에서는 이 무(無)를 무(無)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無)는 무(無)가 아니다 Nothing is Nothing. Nothing is all possibility. 무(無)라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굉장히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있다 없다는 기준을 이런 것이 있다 없다의 기준으로 보면 Creato Ex Nihilo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 자신이 Summa Esse입니다. 최고의 있음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는 유로부터 또 다른 종류의 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놓고 보니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하면 결국은 세포 안에서의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원리와 우주공간 안에서 별들의 폭발로 사라지는 것들과 함께 그 죽은 별들의 흔적을 사용해서 새로운 뉴스타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너무나 통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밀알이 이렇게 있습니다. 밀알 전체가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밀알 전체가 죽으면 절대로 밀이 맺힐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밀에 씨눈이 있습니다. 배아입니다. 배종이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스페르마티코스’ 라고 합니다. ‘스페르마티코스’가 있습니다. 이것 전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죽는 것입니다. ‘스페르마티코스’가 아닌 것이 죽는 것입니다. 썩고 부패하는 동안에 생겨난 유기물들이 이 아이를 도와서 이 아이가 뿌리를 내리고 잎이 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바로 우리에게 그런 ‘스페르마티코스’가 있다고 합니다.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니’ 그래서 완전히 자신이 죽은 상태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것이 인간이 참된 주체성으로 돌아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E. 육체의 혈기를 버림
그러면서 이제 목회자들이 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신이 깎이고 죽지 못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혈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뿔따구를 내는 것입니다. 성질이 안 맞아서 목회를 못해먹겠다고 하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 뱃속 가득히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회사역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결국 뭐냐 하면 목회자가 목회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죽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Ⅲ. 영적 성숙과 십자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끊임없이 죽고 성숙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두스 끌레르보(Bernardus von Clairvaux)입니다. 11세기부터 12세기를 살았던 아주 학식이 높은 중세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그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많은 사유들이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학자들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체의 이기심이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사랑을 받으신다. 이것이 끌레르보의 사상이고 칼빈도 이런 사상을 계승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리를 갖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원리는 중세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사랑의 원리의 큰 틀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라틴어로 ‘까리따스’라는 사랑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죄인이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데 그것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거기에서 아가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이제껏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랑을 우리들이 ‘까리따스’라고 부릅니다. ‘까리따스’는 에로스와 아가페의 지평융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약성경이 이것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이 십자가는 뭐냐 하면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도록 성숙시키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매일 지고 가면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부활의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Ⅳ. 맺는 말
마지막으로 비유를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합니다. 여기에서 고난이 옵니다. 여기서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며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때에 진짜로 죽습니다. 이 죽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사랑’ (Self Love) 이기적인 자기사랑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15년 전에 학생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 중의 한 학생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아내가 암에 걸렸습니다. 사경을 왔다 갔다 하는데 어린아이들은 2살짜리, 4살짜리 둘이나 있는데 아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아내가 만날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여보! 공부 좀 해! 여보! 목사 될 사람이 그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해! 여보! 기도 좀 해! 당신은 기도도 안 해?” 만날 잔소리를 했는데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자기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의 기도를 가지고는 안 되어서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12시가 될 때마다 산속에 가서 기도하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11시 반에 아내를 재우고 동네에 있는 산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진짜로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6개월이 흘렀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6개월 동안에 이 사람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에 아내가 자기한데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잔소리 했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새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할 때 자기의 간증을 가지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빚어 가십니다.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고난당한 모든 사람이 다 성숙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어떤 사람은 성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 되고 아주 상처투성이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설명한 것과 똑같은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 사랑으로써 마지막에 결론 내리는 고백이 내가 이렇게 죽으면 내가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내가 죽는 것도 나에게는 유익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으로써 강의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