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령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6)
녹취자: 이경순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확신을 갖게 되고 어떠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리로다.” 제일 먼저 눈여겨 볼 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현재를 포함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따르리니’ 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라다프’라는 단어인데 ‘추격하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인 시인은 자신의 인생의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추격하는 것처럼 반드시 자기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하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토브’인데 이 단어가 제일 먼저 쓰인 것은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번역된 모든 구절들이 바로 그 좋았더라는 뜻하는 단어로 ‘토브’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냥 예쁘고 좋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도에 맞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만물에 대한 관념을 당신의 지성 안에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지성을 따라서 모든 것들을 만드셨을 때에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그것이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있는 것 그것이 토브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있다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선입니다. 원래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관대히 대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자신이 선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선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의문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수많은 악들이 있고 또 우리 앞에서 많은 악들이 발생하는데 왜 선하신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있게 하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죄와 잘못 때문에 선이 아닌 것을 선택해서 만들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원래 선한 분이시고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존재하고 살기만 하면 악이 있을 수 없는데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지었고 이 지은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속에 침투하고 사회 속에 침투하고 그리고 자연 속에도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위해를 주는 환경의 문제나 모든 자연의 재앙 같은 것들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타락한 다음에 들어오게 된 악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자연 악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들어오게 된 악을 도덕 악이라고 부릅니다. 마음 안에 있는 도덕 악 들은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고 삶을 통해 나타난 악들은 자신 뿐 만아니라 모든 이웃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범죄와 그리고 도덕 악 들은 결국 사회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의 마음에서 있었던 것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 악을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악들을 허용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 닮은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각기 자신의 지성으로 판단하고 의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인간을 대단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동물들은 동물이하의 삶을 살아갈 수 없지만 인간은 동물 이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역설적으로 인간의 위대성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당신 닮은 성품으로 창조하시고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시기로 했으니 심지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도록 결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대로 그것을 실행하도록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창궐한 악들을 하나님이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악함이 그 모든 악들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선을 고집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선을 거슬러 살려고 하면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을 꺾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적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이 악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에 보여주십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한 예 가 바로 요셉의 생애입니다. 요셉은 순전한 사람이었지만 형들의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디발의 집에 팔아넘겨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이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그 악이 없었더라면 애급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애급에 가지 아니하였더라면 그가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모함을 받아서 옥 속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관원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바로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지혜 속에서 악이 의도하지 않은 선한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어두운 밤하늘이 있기 때문에 별빛이 찬란하게 빛나듯이 인간의 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별똥별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위대한 구원의 계시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가슴을 녹이는 것처럼 우리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됩니다. 마음을 녹이는 것 같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들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인데 죄 때문에 경험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지혜를 악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에게 악을 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먼 훗날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한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한 깨달음과 맞닿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목자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의 선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지만 이 제 것 살아온 삶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셔서 먹게 하시고 또 침체에 빠진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에 따라 자기에게 선을 베푸심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은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에게 인격적으로 자신을 모두 의탁한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어디로 자신을 이끄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일인데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 건너편에서 그리워하던 주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이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헤세드’인데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단어로 바꾸자면 아가페사랑입니다. 이 헤세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 중 하나입니다. 이 헤세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인데 이것은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시인과 언약관계를 맺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사이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을 향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니 이것은 인간의 장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아주 부랑자라고 멸시받는 인간이라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었다면 그 엄마의 마음은 창자가 녹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어떠한 죄를 짓고 잘못했든지 엄마의 마음에는 그 아들이 감옥 속에서 받는 고통과 추위 더위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살점을 저미고 자신의 뼈를 갈아서라도 그 자식이 옥 속에서 나와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엄마는 모든 것을 합니다. 그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그림자입니다. 물론 그것은 불완전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하나님도 그 이상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실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완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인자의 깊이가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 모든 삶의 닻을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에 내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이 요동치고 풍랑이 일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이 모두 일어나 우리를 헤친다 할지라도 그리고 마귀들이 온 무장을 하고 우리를 헤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방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빌리자면 “장래 일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고 한 사도바울의 로마서 8장의 고백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유익입니다. 그는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 때문에 어느 한순간 기뻐서 폴짝폴짝 뛰고 어는 한순간 실망해서 고꾸라지고 그런 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악이 잠시 이기는 것 같고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 같아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폐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을 베푸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선을 베푸시기 때문에 이해 안 되는 그 때는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서울까요? 엄마가 그렇게 자기를 예뻐하던 엄마가 손을 붙들고 병원에 가서 팔뚝을 걷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간호사와 함께 팔다리를 꽉 붙들고 그리고 아주 큰 예방주사를 팔뚝에 놓을 때 아마 이 아이는 엄마가 선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균을 집어넣고 나면 그 균이 속에 들어가서 저항력을 만들어 주고 그래서 이 후에는 질병을 얻지 않게 됩니다. 어린 아이 때는 그 의학에 담겨진 깊은 뜻을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 전게되는 모든 것들이 이해되게끔 전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이 현실이 모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라고 외쳐도 믿음으로 그 모든 상황 너머에 계시는 내가 알고 있는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며 삽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이 시인이 굶주리고 고통스러웠을 때 먹여주시고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이 이 시인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인생의 과정들을 통과하며 이 시인은 움직일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모를 때조차도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과 인자는 끝까지 나를 추격하여 결국은 나를 붙잡고야 말리라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목자로 모시고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깊게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남은 구절은 이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영원한 목자이시라고 고백을 하고 2절부터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에서 지켜주신 은혜 때문에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바르는 은혜 때문에 그 주님을 목자로 모시게 된 사람이 마지막 자신의 인생에 거는 기대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는 것입니다. 야훼라고 되어 있는 이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솔로몬 때 지어졌고 다윗시대에는 하나님의 집이 장막이었습니다. 직사각형으로 되어있는 텐트, 앞에 것은 열두 평쯤 되고 바로 그 붙어있는 작은 방은 여섯 평짜리 방이었습니다. 큰방은 성소로 불리고 작은 방은 지성소로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성막의 뜰이 있고 그리고 울타리가 헝겊으로 쳐진 그곳 지붕은 물 돼지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냥 텐트였습니다. 속에는 각종 금 기구들이 있어서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나 겉은 비바람에 찌들고 햇빛에 쩐 물 돼지가죽이었습니다. 아름다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허름한 텐트였습니다. 그 집에서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의미심장한 구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집이 무엇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도록 상세하게 그 제도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분부를 따라서 정확하게 모세는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 성막을 만든 후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가든지 이 성막이 먼저가고 장소가 정해지면 거기에 이 텐트를 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밤낮으로 그 성막위에 있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파별로 그 성막주위에 진을 치게 됩니다. 어디로 가든지 똑같은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분이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집에 당신의 임재를 즐겨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항상 성전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의 어머니 이셨던 한나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집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은 무슨 심오한 일때문이 아니라 첩의 분수에 넘는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들 하나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성막을 찾았습니다. 나라가 큰 위기에 놓였을 때 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러간 때에도 다니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긴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며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자신의 설움을 그 분 앞에 토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구약에서의 성전이 신약에서의 교회와 신학적으로 연결되는 측면이 있고 연결이 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있지만 교회는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았지만 교회는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로 당신을 드렸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희생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찢으신 육체로 갈라진 휘장을 지나 그의 피로 뿌려진 보좌의 이르는 핏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 앞으로 나아오는 보좌에 이른 산길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고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는 연결되는 측면과 연결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탁월한 임재를 당신의 교회에서 즐겨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의 숫자는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숫자를 능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성품과 그 임재를 당신의 교회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삶입니다. 거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다른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목회자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어른처럼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기쁨과 설음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나누며 믿음에서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자 오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물 돼지가죽으로 된 거무칙칙한 텐트근처를 그렇게 사모하고 거기에서 진을 치며 하나님을 앙망하였던 것처럼 오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교회는 자신을 귀찮게 하고 속박하는 인간이 모인 집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모신 사람들에게 이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혼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기쁨과 설음을 함께하면서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간 모든 성도들이 이 교회에 와서 사랑을 나누며 슬플 때에 서로를 위로하고 고통 받을 때에 서로에게 힘이 되어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렇게 자신이 결코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아니라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번져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함께 겪으며 때로는 가슴아파하고 섬기며 때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말씀의 보고를 세 개를 두셨는데 성경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의 마음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의 보물창고를 열어주십니다. 알지 못했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그리고 어리석던 인간이 지혜로워 집니다. 항상 지혜롭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교회에서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도록 목양을 받습니다.
자기보다 신앙이 훌륭한 사람들의 섬김과 돌봄을 받으며 그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걸음마를 떼어놓는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렇게 성도들과 목회자의 섬김을 받으며 갓난아이의 믿음은 어린아이로 자라고 어린아이의 믿음은 소년이 되고 소년의 믿음은 청년의 믿음이 되고 청년의 믿음은 장년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알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기쁨과 보람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그리스도 의 교회에서 발견하게 되고 세상에서 분투하며 믿음의 싸움을 쌓아오지만 이 싸움이 나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싸움이라는 것을 교회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선배 들을 통해 배우게 되고 목회자를 통해서 교훈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되어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불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셨습니다. 핍절하고 배고프고 가난하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주님께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푸른 초장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그리고 쉴만한 물가 으로 우리를 데려가셨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을 공급해주셔서 후히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영혼의 침체가 왔습니다. 죄와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방황이 시작됩니다. 만족도 없는 이 세상에 발을 담그고 살아가지만 그의 영혼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영혼의 침체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헤어나야 할지를 모를 그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보여 주십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왜 그런 곤고한 영혼이 되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사랑에 반역하며 살았던 자신의 가치 없는 삶을 대조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그 사람을 용서해주시고 용서위에 사랑을 더하십니다. 그 속에서 그는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경험 하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잘못과는 아무상관이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원수들의 부르짖는 함성소리가 가득하고 도처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보호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한 단계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생명의 놀라운 감격을 주십니다. 가슴 벅찬 환희와 기쁨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감격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복인지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이 세상에서의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에게 단순한 집단이 아닙니다. 가정에 시련이 왔을 때 경건한 성도가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정에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주님 앞에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차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승진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올 때 남편이 하는 사업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져 올 때 그가 찾는 곳은 교회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후하게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습니까. 제 마음과 모든 뜻을 드려 주님을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는 소식 그리고 어여쁜 딸이 훌륭한 형제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 그들 사이에서 예쁜 손자가 태어났다는 감격에 찬 소식들이 들려 올 때 경건한 성도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립니다. 이 벌레 같은 나를 구원하셔서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예배당에 찾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돌보는 구역에 영혼이 실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아픈 마음을 안고 하나님의 교회를 찾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돌 볼 수 없는 저 영혼을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남의 영혼인데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하나님께 빕니다. 그뿐입니까? 교회에 커다란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조용히 교회를 찾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예배당 한 구석에서 주님이 피로 값 주시고 사신 이 교회를 버리시지 말고 도와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그리고 성가대에서 주일학교에서 어린영혼들을 그리고 식당에 봉사로 선교로 전도로 열심히 봉사합니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재미있는 삶이냐고 비웃지만 그것은 마치 햇빛과 바람에 찌든 성막의 지붕과 같아서 겉보기에 흠모할만한 좋은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성전 속에는 찬란한 금은기구들이 청색홍색 자색실로 짠 아름다운 그 직조물들이 성전을 예쁘게 장식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그리고 환희가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존재합니다. 그 비밀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한때 지금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교회 여성도들의 드림이 있습니다. 결혼한 자매들의 드림이 풀타임으로 교회 가는 것 그래서 돈은 남편이 벌고 자신의 월요일은 집안일 하고 화요일 전도 나가고 수요일 날 교회 와서 섬김 기도하고 목요일 날 교회 청소하고 그리고 금요일 날은 구역예배 인도하고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고 주일날 와서는 주일학교에 봉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들이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에서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돈 벌어서 다 교회에 갖고 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통해 주시는 물질들을 사랑으로 흘려보내서 그 물질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섬깁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갑니다. 제가 93년도에 교회를 개척했으니까 목사님보다 1년 먼저 했는데 7년 동안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젊었습니다. 제 나이 39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45세 되었을 때 교인이 한 600쯤 모였는데 나이서열로 20위안에 제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전 교인의 60퍼센트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젊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사이에 그때에 청년이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교회를 안 떠났습니다. 이제는 거의 권사님 포스가 날 정도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때 권사님 정도로 연세 드셨던 분들도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파파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젊은 청년들은 이제 40대 후반 50대 그렇게 되어가고 저도 30에 교회를 시작해서 이제는 이순을 훨씬 넘어선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자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될까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비록 이 세상에서 이름을 드높이는 저명인사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교회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습니다. 이제 세월이 어느덧 흘러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고 아이들은 어느덧 초등학교 중학교 가고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이 아이들이 대학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가 하더니 취직을 했다고 하고 그리고 좀 더 흐르니까 그렇게 꼬맹이처럼 유치부 영아부실에서 기어 다니던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짝을 만나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 들 또한 자라갑니다. 손자손녀들이 태어나고 청년이었던 우리들은 점점 자라서 이제는 반백의 노신사 노 할머니가 되어 갑니다. 손자손녀들이 점점 커서 이렇게 청소년이 되었을 나이에는 우리의 인생의 황혼이 깃듭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이 이제 인생의 수고를 끝내고 ‘너는 내 곁에 오라’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가 39세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 엊그제 같았습니다. 예배당 올 때마다 두 살 난 우리 딸 데려와서 여기에 올려놓으면 삼십분이고 사십분이고 태엽감은 인형처럼 교회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웠습니다. 그런 아이가 이제는 27살이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시겠지만 제 나이가 60대 중반인데 제가 유치원을 졸업했습니다. 그것도 서울이 아니라 강원도에서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도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그 유치원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예배당이 모양은 좀 바뀌었지만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가 그 교회를 개척했고 그래서 일찍이 유치원 교육을 했습니다. 그때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저를 그 교회 유치원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둑어둑한 마루로 된 유치원에 가지고 놀던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나무로 된 블록들이 생각이 납니다. 노란 가방을 메고 그리고 뒷집에 사는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 유치원을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유치원이 끝나고 난 때에는 학교 담장을 따라 걸어가며 풀을 뜯어서 가방에 담으며 우리 이것을 가지고 가서 떡을 하자고 그러면서 풀을 담던 기억이 선명하게 납니다. 하루에 두세 번씩 버스가 지나가는데 저 멀리서 버스가 오면 신작로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그 털털거리며 버스가 달려오던 그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눈을 감으면 더운 여름날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미루나무 잎사귀들과 거기를 지나가던 바람소리 스치는 나뭇잎에 부딪히는 소리까지도 들릴 듯합니다. 겨울이면 꽁꽁 언 어름위에서 형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팽이를 돌리거나 혹은 연을 높이 날렸습니다. 어린 제 눈에는 형들이 너무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러한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귀마개를 하고 그 얼음판에 서서 그 신기하게 돌아가는 팽이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연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때 불었던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그 추운 얼음에서 나오는 비릿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 멀리 가난한 초가집들이 지붕에 함박 흰 눈을 짊어지고 서있는 그 모습 그리고 뒤뚱이며 머리에 무엇인가를 메고 지나가던 시골 아줌마들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손을 뻗으면 모두 보일 것 같은 것들인데 5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한나절의 꿈과 같은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어찌 한 두 번 이겠습니까? 내 마음은 아직도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고 무지개를 보면 여전히 마음이 뛰는데 내가 할아버지라니 내가 할머니라니 내가 아줌마라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은 속히 지나갑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유치원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찬송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삐걱거리며 마루에 울려 퍼지던 풍금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죽음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제 이쯤이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궂은일 기쁜 일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인생의 모든 사태들을 만나며 매 순간 그 사태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는 죽습니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해서 우리가 유명을 달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교통수단일 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내일도 살아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날에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죽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신은 관에 안치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그날까지 잠시 머물 우리의 무덤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정들었던 교회에 들리게 됩니다. 우리가 자식처럼 사랑하던 젊은이들에 의해 우리의 관이 떠메어지고 그리고 우리는 정들었던 교회당을 뒤로하고 무덤을 향하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성도들에게 기억이 될까요? 교회에 나왔지만 항상 신앙에 확신이 없었던 사람 자기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허접하게 살았던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무서워했던 사람으로 기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인상을 줄 것입니다. 여기 믿음을 따라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던 한 성도가 잠들었구나. 젊은이들은 우리의 육신적인 인연 때문에 그리워하는 눈물을 씻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도 이 성도와 같은 믿음을 주시옵소서. 잠시 살아도 하나님을 향해 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마음을 다하여서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인생의 본분을 다하게 하옵소서.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그렇게 성도의 일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연의 그리움 끊지 못한 가족들은 슬피 울며 장례를 지내도 우리는 그 순간 이 세상의 수고와 근심과 걱정에서 모두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어깨를 겨루며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셔서 여기에까지 이끄셨는지를 천국의 성도들에게 간증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그 하늘나라에서도 우리는 놀고먹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지상에 있는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붙들어 주시고 천국의 복음을 능력 있게 확장하사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할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가득한 것처럼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아버지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음을 다하여 이 땅에서 그토록 사랑하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노래는 시련과 고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부패성으로 종종 끊어지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끊어놓을 수 있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친히 뵈옵는 그 완연한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 때 우리들이 느끼게 될 환희와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행복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그 무한한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영광은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새로운 지식의 아침을 맞게 해 줄 것이며 예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매일매일 새롭게 느끼게 되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그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이라 일컫는 이 날 동안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그 위대한 뜻을 헤아리며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시고 성도인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매일 매일 힘닿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영혼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봉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일생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날들이 속히 다가올 터이니 여러분들 자신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니 그리스도를 기뻐하게하고 존귀하게 하기위해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을 갖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