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고난을 피하지 말라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 27:34)
녹취자: 김정규
(이 본문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스펀지에 꿰어서 올려드렸던 그 포도주가 드려지는 것과 꼭 같은 내용이냐, 아니면 다른 내용이냐에 대해 의견들이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렇게 십자가를 매달리기 직전에나 매달리신 후에나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에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아마도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에게 지워주신 십자가의 고난을 그런 마취하는 것으로 달래고 싶지 않으셨고 오히려 자신의 임무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고난을 다 감당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분이 대속하셔야 했던 것이 우리의 죄악이었고, 그 죄에 대해선 하나님의 진노가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 저도 외골수 사람으로 살았는데, 나는 그것이 그리 잘못된 삶은 아니었지만, 다시 30, 40년 전으로 돌아가서 산다면 좀 더 나은 삶도 있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의 사역은 100m 단거리경주를 단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마라톤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명감 하나로만은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자신들이 목회자로서 목회자의 아내로서 훈련받는 과정들이 즐겁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도 여기 계시지만, 남편을 기뻐하고 교회를 기뻐해야 합니다. 솔직히 토요일 저녁 준비하고, 그저께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사먹어도 되는데 교회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수련회까지 와서 밥을 짓고 이 고생을 해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예전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사모들이 봉사하지 말고 말씀이나 배우고 오히려 밥으로부터 좀 해방되어서 산책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보탬이 없이, 너무 맛있었는데 이것을 만들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년에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설렁탕을 사 먹더라도 쉬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이 밥을 할 시간도 없으니, 좀 쉬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명감만으로는 안 되어 우리가 고단하게 사역을 해가면서도 즐겁게 사역을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1993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2000년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과 설교하자는 열정도 아주 뛰어났고, 목회도 좀 잘 해보고 싶어서 교역자 수련회에 오면 놀지 않고 15시간씩 회의를 하고, 회의하다가 교역자들이 전부 바깥에 나가서 길거리에서 토하고 들어와 물마시고 다시 회의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할 정도였는데,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이 공부 좀 하려면 심방을 가자고 하고 설교준비 좀 하려면 회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공부하다가 심방가려면 불평하면서 끌려가고, 기도 좀 해야 되는데 집회를 가야하고, 집회 후 ‘다시는 가나봐라’하며 돌아왔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똑같은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고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것이 꼭 해야 되는 일이라면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 공부하다가 심방을 가야하면, ‘아 심방을 가는구나. 전부터 심방하고 싶었는데, 교인들을 돌아보지 못해 부담이었는데 가자.’ 그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공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돌아오면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얼마나 좋은 현상이 나오는지 무엇을 해도 그것이 기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공부하다가 회의하다가 ‘교회 일을 단속해야겠구나.’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얘기를 몇 번을 강조하고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합니다. 쥐어짜고 가슴을 후벼 파는 것으로는 얼마 못갑니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서 위트가 있고, 유머가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이러면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도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마취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당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식이나 간식을 먹을 때는 달콤하고 고소하기를 원하지만, 약을 먹을 때는 눈을 꼭 감고 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식이 쓴 것은 의외이지만, 약이 쓴 것은 의외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목회사역을 해나가면서 그런 즐거움을 찾지만,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저는 자기 교회의 목회를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목회에 관심이 없어져 퉁하고 튕겨져 나와 교회정치로 (교회정치를 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는 목회자를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에서 재미가 없고 쓴맛이 나오니 조금 달짝지근한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여행이 끝나면 다음 여행을 계획하면서 끊임없이 일(-하나의 모임, 두 개의 모임 등-)을 만듭니다. 결국 목회를 하면서 쓰디 쓴 것을 만날 때 쓴 것을 마취제를 피하신 예수님과 같이 감당할 때, 그때에 그 쓴 것을 넘어서 진짜 달짝지근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달콤한 것이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람들이 거기까지 안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우나에 가서 땀을 빼, 그 성분을 조사하면 다 물입니다. 헬스를 하면 나오는 것이 다 중금속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하면 힘을 쏟아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고통을 받으면서 그것들을 위로할 수 있는 세상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냥 쓰디 쓴 것을 감당할 마음을 가지고 ‘목회는 원래 이런 것이다’ 라며 그것을 받아먹으려고 할 때, 그때 쓰디 쓴 것을 넘어 내 마음에서 참 맛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주는 왜 달콤하지 않고 찝찔한가요? 그것을 먹어야만 술 맛이 증진되기 때문입니다. 똑 같이 목회를 하면서 어려운 것을 조금도 못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제 말씀드렸듯, 피할 수 있습니다. 몇 번만 피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주 쉽게 그만두고, 다음에 다음 것을 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목회지는 자기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합니다.
깊은 각오를 가지고 ‘힘들다’라는 말을 목회자는 쉽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힘듭니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즐겁게 목회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들어가 보면 다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하시는 말씀은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순교입니다. 요한을 보고 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니 예수님은 상관하지 말고 너는 네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비교는 제일 바보 같은 짓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 교만해지거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고 위축-열등감까지는 아니더라도-되면 안 됩니다. 나는 나여서 존중하고, 존중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훌륭한 사람을 만났을 때 존중하고 많은 사람에게 겸손하게 하는 것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교통하게 하는 것의 원동력입니다. 세상에 누구를 만나서도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종들, 노예들입니다. 어떤 노예는 주인 마차를, 어떤 노예는 거름마차를 끌고 다니고, 마당쇠의 역할의 차이 일뿐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교만하지 말고,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도 존중하고 겸손하려고 조심합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갑니다. 과장이 아니라 영어 좀 못하는 것 빼고는 뭐가 차이가 있겠습니까? 감사하게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교회에 사역하는 전도사나 부교역자는 그런 열등감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나일뿐입니다.
고난을 받고 고생을 하는 모든 사람이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목회자는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없고, 고난이라는 고상한 단어는 고생을 통하지 않고는 고난이 될 수 없다. 모자라고 고통 받고 찔리고 아프고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동시에 자연스러우면 이상한 것입니다.-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고생을 하면 끝날 것이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교역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펑펑 울 길래 가만히-그만두려나? 생각했고 화도나지 않고-있었습니다. 펑펑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하여 계속얘기하게 나뒀습니다. “너무 너무 잘하고 싶은데 제가 너무 능력이 안 됩니다.” “네가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은 주님도 아시고 나도 눈치 챘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능력이 되냐?”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식은 죽 먹기지 이정도면 나한테 껌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고 낮아지겠습니까? 사람들은 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최초로 설교 한 것이 25살이었고, 목회자로서 변화를 받고 설교한 것은 30년이 지났어도, 설교는 여전히 나에게 이국의 언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원하지 않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적으로 이렇게 사람 앞에 비참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물건을 팔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엄청난 보상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비난하면 그대로 당하고, 그러면서 묵묵히 그 길을 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나 그 길을 걸어가셨지 인간에게 적합한 길입니까? 추호도 과장이 아닙니다. 설교는 이국의 언어고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목회가 아닌 가슴앓이입니다. 목회라는 것 자체가 망가지고 상처받은 사람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고, 주님이 그 사람을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상처받고 망가지는 것은 자식을 기르다보면 알게 됩니다. 자식은 너무 귀엽지만, 귀여운 때만 있는 것이 아닌 밤을 새워 눈물을 흘려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약합니다. 약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고통을 다 견디면서 꿋꿋이 서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가 좀 힘들면 나가서 막 버립니다. 지난 주 유기 견에 대한 설교를 했더니 교인이 와서 “목사님, 유기견이 문제가 아니라 유기아가 더 큰 문제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냥 너무 쉽게 자식을 버립니다. 그 이유가 법이 개정돼 입양이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애들은 버리는데 입양이 안 되니까 대부분 시설에서 수용돼 18살 될 때까지 고아로 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신학교 들어오고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교회를 떠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목회를 진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덜 힘든데 찾아갑니다. 어디에 그런 곳이 있습니까? 그런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견뎌야 합니다. 견디는 것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둔 자리에 그냥 거기 있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서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잘 안하지만, 담임 목회하는 여러분의 선배들이 정말 오랜만에 스승의 날에 찾아오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거기에 그냥 계서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애잔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담임목회자가 돼보니 거기 서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장로들한테 시달리고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 수시로 뛰쳐나가고 싶기에, 거기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인사를 부교역자에게는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한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똑같이 다 그럽니다. 편지를 보내도 다 똑같습니다. 서 있어야 합니다. 거기 있어야 합니다. 있을 수밖에 없다면 잘 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여러분은 영원히 있지 않고 몇 년 지나면 가야합니다. 그때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가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정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냐는 여러분들의 여기서 어떻게 훈련받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 번 인정했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요세푸스의 고대사에서 인용한 글이 적실하리라 봅니다. 로마의 군인에게 한창 강성하던 시절에 “로마 군인에게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때 로마는 강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집에 가도 ‘힘들다’-팔이나 다리가 아프다는 말이 아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 원망을 동반하기 쉽습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여기서 세워주셔서 감사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진취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