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대하여
녹취자 : 오희열
아까 이야기했듯이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하도록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환경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이, 부모나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환경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이 아이가 태어나서 자각이 생기고 온 우주에 대해서 궁금해 하면서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특별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많은 사람은 그 질문이 이 속에 깔려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환경 속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놀고 까불고 있다가 어떤 한 아이가 자살을 시도합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얘들아 나는 인생을 살 의미를 못 느끼겠어.” 하고 며칠 후에 자살을 한 것입니다. 우리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아이들이 쿵! 하는 충격을 받으면서 “그 의미라는 것이 우리를 죽게 할 수도 있는 거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계속 보면서 그 환경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아이들에게 질문에 대해 자극받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삶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괴로움들이 그 질문들을 촉발해준 사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괴로움을 겪는 모든 아이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나마도 저는 문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저와 대화를 나눠주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어렸을 때부터 “얘야, 너는 저 새가 어떻게 생겨났다고 생각하느냐?”, “얘야, 너는 이 풀이 어떻게 이렇게 시퍼렇게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사라진 그 풀이 왜 봄에는 다시 돋아난다고 생각하니?”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일깨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이 우리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속에 있는 이 질문들을 일깨움으로써 탐구의 정신을 갖게 되고 진리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도 그것을 제대로 이끌어 내지 못한 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니까 일종의 허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 괴로움과 허전함을 이기지 못하면서 결국은 쾌락 같은 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을 아주 정신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러면 그럴수록 참된 질문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답을 찾으려는 마음도 없고 답이 답으로 주어졌을 때, 그것이 답이기 위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비추심이 있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답을 찾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교육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어린 나이 때부터 산업사회에서 이런 물질문명에 눈을 뜨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끝없는 슬픔과 고통, 기쁨과 환희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서 자기를 비춰보고 반성이 되는 것인데,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반성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끊임없는 비극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불신자와 만나고 싶은 것은, 조용히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전에는 그 사람들 안에 없는 것을 내가 넣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이제는 이 사람들이 이 안에서 진짜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자신의 많은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이 이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꺼내어주는 것, 꺼내어서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줄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은 자기가 생각했던 인생의 행복의 조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런 조건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꼭 종교로 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가 그런 든든한 기반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일 때 “아, 저 사람의 길도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좀 아쉽습니다.
매번 학기에 그랬지만 이번 학기에 학생들과 마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학생들이 그래도 총신에 왔으니까 그리스도인일 텐데 거듭나지 못한 학생들도 많고, 마음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할 때 학생들이 “아~, 아!, 아~!”하는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그 학생들은 진짜 복이네요, 스물한 살, 스물 두 살 때 그것이 꺼내짐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때 내가 처음 가르쳤던 학생들이 지금은 신대원을 거의 졸업해서 목사들이 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9년 전 즘이었으니까 2학년 때 배우면 3년 졸업하고 5년, 2년 후에 목사 되면 7년이니까 나옵니다.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두 그 학생들 마음에 있는 고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이끌어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솔직하게, “너 고민이 뭐니?” 하면 “아버지가 망했어요,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동생이 군대 가서 사고 쳤어요.”하고 이야기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계속 대화를 해보면 “교수님,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합니다. 그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뭐가 필요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이 뭔지를 모르니까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탄식 소리는 내면서 강의를 듣는 아이들을 보면서 굉장히 보람을 느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아니지만 그중에 어떤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굉장히 바람직한 것입니다.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