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를 살리심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1-10)
녹취자 : 오희열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주전 605~606년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가 그때의 일입니다. 이때는 이미 나라가 완전히 망했을 때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에 태어나서 유대의 멸망을 직접 본 사람이었고 그는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간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환상을 경험하며 선지자로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에스겔에게 신약시대의 풍성계시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에스겔에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나오는 이 마른 뼈의 환상이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보면 에스겔이 주님의 영에 이끌려 골짜기 가운데 갔습니다. 거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여러분이 조용히 상상해보십시오. 끝없이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계곡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뼈가 아니겠습니까? 계곡은 공격받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계곡으로 난 길은 군대가 이동하기에 쉬운 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거기에서 몰살을 당한 군인들일 것입니다. 어차피 환상이니까 그 시작과 결말을 모두 보여주지는 않지만 어쨌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난 수의 마른 뼈,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른 뼈의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인자야” 아마도 친근하게 낮춰 부르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선지자는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해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을 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시기에 “안 된다.”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저 그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애매한 말로 빠져나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명령하시고 마른 뼈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마른 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 라고 명령하시고, 마른 뼈들을 향해서는, “생기가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명령이라기보다는 예고를 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대언했는데 내용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그 마른 뼈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이렇게만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다 더 많은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마른 뼈들에 대해서 선지자가 “마른 뼈들아, 너희는 마른 뼈지만 여호와께서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이 말씀을 대언 할 때 너희는 살아 나거라.” 이렇게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하고 있는 이 선지자의 모습은 얼마나 바보스럽겠습니까? 죽은 지 얼마나 된지도 모르는 바짝 마른 뼈가 계곡에 가득한데,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이 이 마른 뼈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른 뼈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 살아나는 것도 순서가 있었는데 먼저 이리저리 흩어져서 돌아다니던 뼈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람의 모양으로 맞춰지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힘줄과 살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뼈가 오래되고 나면 습기 때문에 근육과 살은 모두 썩어서 없어집니다. 달랑 뼈만 남습니다. 그 뼈를 다 붙여서 사람 모양을 만든 후 근육과 살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근육과 살이 살아나서 사람의 형체를 만든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거기에는 산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는 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하나님이 지으셨지만 생기가 들어가기 전 까지는 산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후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른 뼈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꼭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은 이 마른 뼈들을 맞추어 사람의 형체가 되게 하시고 그 후 주님은 거기에 살과 근육이 붙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들어진 살을 가진 사람일 뿐이지 아직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 정말로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서 멀리 떠나 죽은 자처럼 살아갈 때 그때 여러분의 영적이 모습은 계곡 사이이의 너부러진 수많은 많은 뼈와 같습니다. 죽어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죽어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어떤 좋은 일도 행할 수 없으며 죽은 영혼의 처지에서 기껏 행하는 것이라야 죽은 행실 이외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살아있다, 죽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실제로 이 세상에서 생물이 살고 죽는 것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영혼은 어차피 멸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이 죽었다.’라고 할 때는 ‘개가 죽었다.’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 라는 것은, 영혼은 멸절될 수 없고 단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죽은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불신자의 영혼을 죽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영혼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는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결정할 수도,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다 합니다. 다만 그들은 영혼이 그 고유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합니다. 그들이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영혼의 행실입니다. 시기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쾌락에 빠지고 타락하고 등등,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일 이외에 그는 어떠한 신령한 일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도 도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누군가가 기쁘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기쁩니다. 영혼이 출렁거립니다. 그것이 감정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슬프고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근심되고 우울해집니다. 영혼이 가라앉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영혼의 기능이 현저히 그 고유한 상태를 떠나게 되면 그러한 것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하등한 기능은 살아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아주 민감하지만 영적이고 거룩한 일에 대해서는 거듭날 때 가졌던 그 고유한 감각에서 현저히 멀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일까?’ 아마 오래전에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죽은 뼈다귀와 같은 사람들을 교회 밖에서 교회 안에서 매일매일 만납니다. 살아있으면, 살아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영혼이 깨어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러한 은혜의 작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찔러서 잠자던 나의 영혼이 깨어나고 평안하던 나의 심령에 돌이 던져지고 내 마음 속에 기쁨과 희열, 혹은 분노와 아픔이 일어나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반응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독특하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입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즐기고 쾌락을 얻는 것 이외에는 우리의 영혼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영혼이 마른 뼈와 같이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여러분은 공동체 속에서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함께 모여도 가슴을 찢는 기도가 없고 찬양 속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은 시련이나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죽어있는 영혼이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삶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령선, 달빛 아래 그 마른 뼈들이 나와서 춤추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육적인 감각은 예민합니다. 그래서 새 옷을 사 입은 것,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 키가 크고 작은 것, 몸이 날씬 한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잘 압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예민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머리를 새로 하거나 살이 좀 찌면 친구들이 화젯거리로 삼아도 은혜가 떨어져서 영혼이 죽은 자와 같은 때에는 누가 나에게 나타나나서 경고해주거나 나를 책망해주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도 사람들은 우리 영혼의 그런 변화보다는 새로 산 우리의 가방 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결국 영혼이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느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언제나 자기편이기 때문에 좀처럼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옹호합니다. 망하는 데 까지 가더라도 자신은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깨달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마른 뼈와 같은 인간이지를 배우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제게 기쁨을 주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정성을 들여서 모았고 아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는 것이 나에게 준 유익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또 다른 기준을 발견하게 해 준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시대에 태어나서 나와 비슷한 사람끼리 예수를 믿으며, 또 나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서 설교를 듣고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다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면, 위인들의 전기는 그들이 한 위대한 일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추적합니다. 심지어 일기책 같은 것은 굉장히 좋은 자료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들의 내면을 봅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나를 이러한 사람들이 누렸던 신앙의 세계, 영적인 은혜의 세계에 비교한다면 나는 매우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 준 아주 좋은 효과는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할 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나의 영혼에 무엇이 모자라고 내가 더 많이 누려야할 신령한 은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주는 인물들은 대부분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할 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잔소리처럼 나오는 말이지만, 여러분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게다가 가끔 들고 다니는 책은, 목사로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어쩌면 저런 책을 들고 다닐까...’ 더 많은 사람은 그런 염려도 하지 않게 아예 책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전망이 없습니다. 자신이 마른 뼈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자신만 모를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다른 시대에는 어떤 충만한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 가운데 살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자신들의 시대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한 번 보십시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은혜와 부흥의 시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정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자의 삶이 이렇게 메마르고 건조하고, 어제 여러분에게 설명 드린 것처럼 결혼했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애매모호한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오다 보면 그것이 그냥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배를 드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상담도 받아보고 때로는 성경도 펼쳐보고 때로는 이런 수련회에 따라와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가끔 기대를 걸어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합니다. ‘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것이구나. 주위를 둘러봐도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사는구나.’ 라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침체들이 아주 장기화됩니다. 더 이상 무엇인가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해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치 운동하지 않은 선수들이 나중에는 그 본래의 체력을 잃어버리듯이 그렇게 나태한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당연히 삶은 재미가 없고 기쁘지도 않고 내 인생 같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즐거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맛있는 것도 먹고 친구들을 만나서 떠들기도 하고 큰맘 먹고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그냥 삽니다. 그것들이 모두 마른 뼈입니다.
그러면 이 마른 뼈를 하나님이 어떻게 살려내셨습니까? 제일 먼저, 말씀이 그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선지자를 통해 증거 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이것이 선포됨으로써 모든 뼈들이 모아지고 살과 근육이 붙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런 일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여러분이 회복될 때는 어느 한 순간에 벼락을 맞듯이 하나님의 성령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리고 삶의 개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안 지키고 제 멋대로 사는 것은 잘못되었구나!’ 하며 하나님 앞에 잘못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은혜가 그 순간에 폭포수처럼 부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영적인 회복이 있기까지는 자각의 시기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삶이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삶이 싫다면 내게 전개될 수 있는 또 다른 삶은 무엇일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았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곤고한 영혼 피곤한 삶, 그리고 무엇으로도 해결될 수없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제 이 삶도 지겹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몸부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성경도 안 읽어서 너무나 곤고했는데 이런 외적인 모습으로부터 하나씩 둘씩 돌아가게 됩니다. 뼈가 맞춰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엄청난 은혜가 바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힘줄이 붙고 살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다시 주일을 지키고 신앙의 형식으로 돌아오게 되면 무엇인가 자신의 삶이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보호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 이렇게 돌아다니십니까?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설교했는지 잃어버렸습니다. 공동생활에서 덕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한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까?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든지 하십시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아무렇게나 팽개쳐져있던 자신의 삶이 가지런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전조입니다. 전조적인 현상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은 기분이 내키면 주일에 나오다가 안 내키면 나오지 않습니까? 새가족 공부를 하라고 그렇게 설득을 하고 돌아다녀도 나오지 않고, 아무 예습도 하지 않아서 하얀 백지를 들고 순모임에 나타납니다. 그나마 오지도 않아서 제발 참석만이라도 해 달라고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문자를 보내야만 겨우 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추호의 규범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예수 잘 믿으라고 챙겨주고 문 앞에서 목회자가 예배드리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니까 진짜 여러분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때에는 성령 충만할 수 있고 어떤 때에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본적인 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부모가 말을 할 때 자식이 그 말을 잘 듣지 않거나 돌아서서 세수를 하며 구시렁거리거나 투덜거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멱살을 잡고 ‘당신이 뭔데 내 인생에 이렇게 참견이야?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어? 당신과 나는 의절이야!’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해버리고 나면 하나님을 막 보게 됩니다. 넘나들지 못하는 선이 없이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하나님을 깔보는 행위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향해 준비된 마음속에 오시고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보십시오. 마른 뼈들은 영적으로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마른 뼈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환상입니다. 영적으로는 ‘너희가 마른 뼈다귀와 같이 되어버렸다.’ 그 마른 뼈가 계곡에 가득 찼으나 그 마른 뼈의 상태에서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영혼들이 그렇게 모두 하나님을 향해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미 있는 어떤 일을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적으로는 어떠했겠습니까? 육적으로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절절한 회개의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실제로 바벨론 포로의 사건이 있을 때에도 경건한 눈물을 흘리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런 증거가 예레미야 애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기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예루살렘이 멸망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마치 겁탈당한 처녀처럼 느껴지면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것이 애가입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토로하기를 “왜 너희에게는 내 마음 속에 임한 것 같은 불이 없느냐? 하나님이 불을 내게 보내시매 골수에 사무치는구나!”(애 1:12-13)라고 기록했습니다. 영적으로는 그들이 마른 뼈처럼 되었지만 육적으로는 그들이 바벨론 포로 시대에서 예전처럼 똑같이 죄짓고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에스라 10장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마른 뼈와 같은 때에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못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깔보며 무시하고 대적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무에 대한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섬김과 전도, 이 모든 거룩한 삶에 대해서 의무를 주셨을 때 그 의무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 의무가 하찮게 여겨지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자기를 임금삼은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은 선지자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자 뼈들이 맞추어지고 근육이 붙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삶을 개혁하지 않으면 은혜의 회복은 없습니다. 삶의 개혁 자체가 은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마른 뼈와 같이 살았던 이 삶을 바꾸고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일이 없이는 마른 뼈와 같은 삶이 다시 서로 들어맞으며 질서를 잡듯이,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효과는, 우리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판단으로 무엇이 영구하고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오직 진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거대한 뼈의 무덤이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다시 작동하며 사람들의 뼈가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줄이 붙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워있는 시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마지막으로 그들에 대하여 생기를 향해 명령하시기를 생기가 그 마른 뼈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방으로부터 와서 이 죽은 자에게 들어가 살아나게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선지자가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때 그 마른 뼈들 속에 생기가 들어가 살아나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커다란 군대였습니다. 까마귀가 나는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거대한 뼈의 무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계곡에 생기가 불기 시작했고 마른 뼈였던 그것들은 다시 맞추어지며 일어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군화소리가 나고 함성 소리가 들리며 대열을 맞추며 무기를 준비하고 마차들을 갖추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바로 그런 거대한 군대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과 싸우고 사랑이 없는 것과 싸우고 인간의 모든 악과 싸우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화목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마지막에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바로 영적인 군사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루시고자 했던 그 위대한 경륜들을 가슴에 새기며 그것을 따라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기독교 교양을 가르치시고 진리를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뜻을 같이 하는 신앙의 동지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들 때 그 동지들에게 와서 건빵하나 나눠먹고 함께 물을 마시면서 다시 전투에 임할 태도를 다지게 됩니다. 돌아와서 그렇게 한 번 힘을 얻으려고 했는데 동료들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주일마다 모든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보다 더 깊은 시련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샘솟는 저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는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함께 그냥 그렇게 살아가다가 아이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서 회심을 합니다. 엄마 아빠에게는 그 아이의 변화된 모습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아이들을 볼 때 부모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여러 명의 자매가 너무 무서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신앙이 없는데 자녀가 회심하고 정말 열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생활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이 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유익입니다.
한 15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공과공부 예습을 안 해옵니다. 그것이 일상적이니까 와서 참석합니다. 열 명의 순원들이 새카맣게 필기가 된 교재를 꺼내 놓을 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기는 이렇게 생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반대로, 자기는 깨알같이 예습을 하고 갔는데 자기가 주목을 받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해 온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눈보다 더 흰 교재를 가지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른 뼈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성경공부만 해당되겠습니까? 신령한 생활이나 기도, 말씀 생활, 예배, 모두 해당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계속을 가득 채운 거대한 뼈의 무덤이었습니다. 아마 아무도 그 뼈들이 변하여 다시 살아있는 군대가 되리라고는 믿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선지자조차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마른 뼈의 삶이 살 만합니까? 행복합니까? 정말 마른 뼈의 삶이 기쁨을 주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 기쁨이 며칠을 가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구원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목적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마른 뼈다귀와 같은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혐오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다시 그 삶과 화합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마른 뼈다귀와 같은 삶을 살면서 그것이 계속 행복하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정신구조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 합니까
많은 경험들을 하며 살았지만 저는 처음 부흥을 깊이 경험하던 사역자의 때가 가장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있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삐쩍 마른 여고생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니?”, 자기 목을 쥐고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는 영혼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 이외에는 죽음의 기운을 불편하게 느끼는 법이 없습니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의자에 누워버렸습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런 삶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아 빛 가운데 오게 하셨는데 다시 어둠으로 걸어갑니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서 살게 하셨는데 다시 그 어두운 죽음의 동굴로 걸어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게 이성적입니까? 그렇게 주님을 등지고 불순종하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자기 마음대로 산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생에서는 끊임없는 불안과 번민이고 마지막에는 주님의 심판입니다. 왜 우리가 한 번 밖에 없는, 이 전 세계에 남은 단 하나의 멸종할 위험에 처해있는 개체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삶을 그렇게 남의 인생처럼 살다가 죽기에는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인생의 길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날 동안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며 고독하게 우리 인생의 길을 걸어왔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고작 뼈다귀 같은 삶을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걸어온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만나고 눈물을 흘리고 은혜에 기뻐하며 그분의 품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그 수많은 날들의 추억이 결국 이런 뼈다귀 같은 삶을 무덤으로 해서 마무리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현실의 깊은 절망과 미래의 희망이 교차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려내신 그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이 마른 뼈와 같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껏 주님을 떠나서 은혜에서 멀어진 채 마른 뼈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삶을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삶이 싫다. 이것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이 삶과 결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회복으로 돌아오십시오. ‘단 하루를 살아도 주님의 그 생명 안에서 살고 싶습니다.’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모든 사람에게 생기가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기는 성령이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뒤따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생명을 갈망하면 믿음으로 당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다시 이 성령의 충만을 주시나니, 여러분이 이 새벽에 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