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 죽음
녹취자 : 오희열
목회자의 고난과 자기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목회자들은 고뇌가 많은 사람입니다. 왼쪽으로는 삶의 상황 속에서 많은 갈등을 겪고 이상하게 돈 많은 사람들이 신학 공부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신학을 합니다. 저도 매우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내적으로는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으면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는 신학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기도’(oratio)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신학공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외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 공부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묵상’(meditatio)입니다. 어떤 진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가 눈길을 끕니다. 이것은 ‘텐타치오’(tentatio)라고 하는데 ‘시련’입니다. 시련을 겪음으로써 진정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처음엔 수도사에 불과했지만 점점 더 신학이 깊어졌습니다. 신학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련’때문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을 읽어주십시오. 마르틴 루터 당시에는 서양에서 금값만큼 비싼 것이 후추였습니다. 후추 알갱이의 모양이 쥐똥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쥐똥처럼 볼품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후추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가톨릭 신학자들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고난이었다.” 목회자는 많은 어려움을 만나지만 그 어려움을 통해서 아주 소중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음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같이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똑같이 감옥에서 고난을 받으면서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목회자가 올바른 일 때문에 고난당할 때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목회자도 꽃길만 걸어가게 하시는 목회자는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목회자들이 시련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는 모함이나 비난을 사랑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사진에 나오는 그림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칼빈이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성 삐에르 예배당입니다. 베드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칼빈이 목회를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비난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성도들이 칼빈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칼빈이 마지막에 목회할 때 1만5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때 맨 위에 나오는 사람은 삐에르 아모라는 제네바 시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에 대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피카디리 출신으로 거짓교리를 전파하는 불량한 목회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사의 은사였던 제롬 볼섹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칼빈의 생전에는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 나쁜 사람이라고 했고 칼빈이 죽은 후에는 구제불능이고 짜증나게 사악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동성애에 탐닉하고 여자들을 범한 사람이라고 욕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네바의 목회자 뜨롤리에는 기독교강요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드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이레나 배커스이고 최근에 스위스 베젤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17세기 전공자입니다. 이 사람은 그러한 제롬 볼섹의 악의에 찬 두 가지 비난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는, 그 제롬 볼섹의 비난의 동기입니다. 그 동기는 그의 제자인 테오도르 베자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테오도르 베자는 칼빈의 죽음 후에 전기를 썼습니다. 그는 스승 칼빈에 대해서 엄청난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사실은 사도바울 이래에 최고로 경건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러자 제롬 볼섹은 그것을 너무 시기한 나머지 칼빈이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롬 볼섹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어떤 문서를 근거로 칼빈에 대해서 그런 판단을 했는가에 대해서, 살았을 때도 볼섹이 질문을 받았지만 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인물들에게 얼마나 시련이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권력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인 말씀에 깊이 은혜 받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존경합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구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욕하면 욕을 먹고 비난하면 비난을 당하고 심지어 때리면 맞을 뿐입니다. 아무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고난입니다. 이러한 목회자로서의 고백은 사도바울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말 최고의 학자였고 최고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그는 매우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중국어)”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한국에서는 종종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세상의 법정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중국어)” 목회자의 삶이라는 것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거기서 사랑에 관해서 말합니다. 사랑의 세 가지 특성을 말합니다. 첫째는 오래 참는다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메크로 듀메오’, ‘듀메오’는 ‘견딘다’는 뜻이고 ‘메크로’는 ‘최대한’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특성이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테고’라는 것은 ‘덮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모임을 시작합니다. 여기 좀 더러운 것이 묻었습니다. 치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덮어 놓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가려주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휘포메노’는, ‘휘포’는 ‘아래’이고, ‘메노’는 ‘머물다’입니다. ‘낮은 곳에 머문다’는 뜻으로 그것이 바로 ‘견딘다’는 뜻입니다. 견디는 사람은 자신이 겸비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비참한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결국 목회라는 것은 넝마로써 고통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 화면의 사람은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철학자요 교육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여러분이 구할 수 있으면 이 사람의 책을 구해서 무엇이든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사람인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대학을 졸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세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살 때 이미 자연과학에 대한 글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여덟 살 때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발표합니다. 열세 살에 예일대학에 입학합니다. 4년 후에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 2년 더 공부한 후에 예일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때 에드워즈의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정말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학자로 크게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외할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의 부목사로 나가게 되고 후일에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시의회에서 교인의 자격을 규정했습니다. 사람들이 규정할 때는 부모가 예수를 믿고 믿음에 배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에드워즈도 맨 처음에는 그 생각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난 표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그 교회 교인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를 떠나게 될 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친구 혹은 제자에게 남긴 편지 속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중국어)”
당시 이 사람에게는 열한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정말 자녀를 많이 낳았습니다. 교회에서 쫓겨났을 때 이 자녀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이 막막했습니다. 떠날 때 에드워즈가 교인들에게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때 남겼던 고별설교의 제목이 “심판 날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와 목사”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조나단 에드워즈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었던 고난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어)” 이 시인이 이 글을 쓴 것은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시련의 날에 주님께 피해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슴에 새겨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십시오.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사람들 모두 성격과 교육, 자라난 배경, 모두 다릅니다. 그렇게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발성연습을 해보겠습니다. “도~ 미~ 솔~” 여기는 ‘도’만 합니다. “도~”, 이쪽은 ‘미’만 합니다. 저쪽은 ‘솔’, “솔~” 다 같이 해봅시다. 같이 ‘도’만 하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도, 미, 솔” 로 하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다시 한 번 완벽하게 해 봅시다. “도~ 미~ 솔~” 아름답습니다. 왜 아름답습니까?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대포를 쏘는 것이 아니라 음악회,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최고의 미인, 현대 영화배우 중에 누가 최고의 미인입니까? 그래도 비교적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인 누구입니까? 탕웨이? 한국으로 시집왔으니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또 시집오려는 사람들이 몇 사람 더 기다리고 있습니다. 탕웨이가 예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탕웨이와 똑같은 사람 3천 명이 길을 걸어간다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무서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탕웨이 같은 사람은 중국에 열 명도 없습니다. 혹시 있는데 안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탕웨이가 아름다운 이유는 탕웨이가 예뻐서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이 못생겼기 때문에 탕웨이가 예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막 웃어야 하는데 안 웃는 걸 보니 통역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탕웨이는 얼굴이 예쁘지만 여기 있는 이 자매는 신앙이 예쁘지 않습니까? 탕웨이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위로가 되십니까?
(찬양)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으나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목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품에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 신앙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이 매우 돈이 많은 부자라면 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들은 얼굴이 못 생긴 사람을 아주 우습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을 깔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내가 돈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돈으로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종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얼굴이 예뻐서 생각 없는 남자들의 수많은 대시를 받아도 나는 나의 예쁜 얼굴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목회를 하는 여러분들은 자기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용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 사람은 아마 목회자 같습니다.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인데 마음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도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결국 믿음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을 목회하는 것은 얼마나 쉽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목회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모두 끌어안고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에서 오는 많은 고난을 자기 죽음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제가 5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생물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선생님을 불러서 생물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화면에 나오는 저 그림은 사람의 몸입니다. 시커멓게 피부가 죽은 것입니다. 독거미에게 쏘인 것입니다. 화학약품 같은 것이 들어간 것과 같아서 피부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물학에서 ‘네크로시스’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희랍어를 배우셨으니까 ‘네크로스’가 무엇입니까? ‘죽음, 죽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세포가 외부의 힘에 의해서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현대 과학도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이 우리 몸에 있습니다.
‘아포프토시스’라는 세포의 죽음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네크로시스’의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네크로시스’는 외부에 의해서 타살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포프토시스’는 세포가 무슨 이유때문인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물론 마른 사람은 세포가 적고 뚱뚱한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60조 개의 세포들이 스스로 자살을 합니다. 한 세포가 자살을 하면서 죽을 때 거기서 ATP 라는 화학에너지가 나옵니다. 그 에너지는 옆에 있는 세포의 분열과 생성을 촉진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우리 몸 전체를 60조 개의 꼬마전구라고 한다면 그 꼬마전구가 깜박깜박하면서 켜지고 꺼지는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신기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몸에서 죽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무 세포도 죽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몸의 일부에서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세포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영양분이 필요하고 다른 곳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 다른 부분은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그 어느 한쪽 부분은 뭉쳐집니다. 이것이 바로 ‘암’입니다. 암 덩어리라는 것은 아무도 죽지 않으려는 세포의 덩어리입니다. 이런 성질을 다른 세포에 전달합니다. 그것이 암의 전이입니다. 아무도 죽지 않으려는 왕성한 세포 때문에 어느 날 몸 전체가 죽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국가나 가정이나 교회나 모두 기꺼이 죽으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국가가 망하거나 가정이 깨뜨려지거나 교회가 무너지게 됩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참고 견디고 희생하고 죽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 그림은 놀라운 그림입니다. 지구에서 약 7천 광년 떨어진 곳에 “이글성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기둥이 세 개 정도 있습니다. 이것이 제일 긴 기둥입니다. 여기서 여기까지 4광년 거리입니다. 빛이 4년간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우주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학기호로 H라는 수소 원소가 군데군데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분자 구름입니다. 그 분자 구름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별이 수십억 년을 지난 후에 자신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 마지막은 커다란 폭발과 함께 맞이합니다. 그렇게 폭발할 때 수많은 다른 원소들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지구상에 어마어마한 숫자, 그렇게 엄청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167개라고 배웠는데 160, 혹은 170개 되는 원소들이 생겨난 것은 모두 열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H가 하나면 화학에서는 수소라고 부릅니다. H₃가 되면 헬륨이 됩니다. 이 수소가 헬륨이 되려면 섭씨 3만 도의 온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우쓰이, 우쓰,..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금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 폭발과 함께 생애를 마감하는 별들이 이런 먼지를 남깁니다. 그 분자 먼지는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력이 있는 것을 서로 잡아끕니다. 모입니다. 모인 것들이 세월이 많이 흘리면 더 모입니다. 더 모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핵반응이 일어납니다. 핵 융합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뭉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별의 융합이 너무 커지면 펑! 하고 폭발을 하면서 떨어져 나옵니다. 그것이 새로운 별의 탄생입니다.
여러분 닭을 보셨습니까? 암탉. 그것을 잡아서 가릅니다. 그 안에 계란이 들어있습니다. 계란을 더듬어서 올라가보면 요만한 계란의 알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습니다. 알에서부터 하나씩 만들어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 별들이 알처럼 모여 있다가 찬란한 폭발과 함께 떨어져 나옵니다. 별들은 아무데서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우주의 별들이 막 흐트러져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중국 땅이 넓어도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사는 것처럼 별들도 가족을 이루면서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별들도 가족을 이루면서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별의 탄생의 비밀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천문학에서 공부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별이 죽음으로 이 별 먼지를 만들고 그 죽은 별의 먼지 속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별이 죽음으로 새로운 별들을 탄생시킵니다. 아까는 세포의 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동물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수 없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생명은 끊임없는 죽음으로써 생명이 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 세포의 세계가 우주의 세계에서 똑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To die is to gain. 직역을 하면, ‘내가 죽는 것이’, “To die”, “is to gain”, ‘얻는 것이다.’ “어찌하든지 나는 죽고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고 하나니” 이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저 우주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원리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원리와,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살아있는 것에서 그런 죽음의 역사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똑같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있음으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중국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고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만약에 죽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 죽음이 생명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목회를 할 때 육체의 혈기를 버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죽으신 그 정신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성질을 냅니다. 화가 날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러면 안 되지만 화가 납니다. 이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목사가 된 것이 무슨 벼슬인 줄 압니다. 왕처럼 군림하려고 합니다. 배가 툭 튀어나와 있습니다. 탐욕이 가득합니다. 마치 압록산이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황제가 묻습니다. “압록산, 너는 어찌 그렇게 배가 많이 나왔느냐?”, 대답합니다. “폐하, 이렇게 튀어나온 제 뱃속에는 황제를 위한 충정이 가득하나이다.” 그런데 사실은 충정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했습니다. 탐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자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욕심을 버리고 혈기를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겠습니까? 내가 뭐가 못났습니까? 나도 자기들만큼 공부했고 나도 자기들만큼 하나님을 믿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무시당합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그럴 때 자기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을 자기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십자가로 사용해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한쪽에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라는 11세기의 중세 신학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중세 가톨릭의 수도사였지만 아주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비밀에 대해서 칼빈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까리따스’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일생동안 이루어져가는 것이 영적인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성숙해져 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사용하십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나무에 매달립니까? 여기에 못을 박습니까?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이 찬송가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까? 그 찬송을 부를 때 그 십자가는 무슨 뜻입니까? 고난? 이 찬송을 부른 적이 있습니까? 들어보기만 하셨습니까? 내가 찬송을 불렀을 때 무슨 뜻인지 아셨습니까? 그 십자가는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도 있는 십자가” 를 무슨 뜻으로 이해했습니까? (답변 - 중국어, 자기에게 주신 십자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찬송을 들어보셨습니까? 중국어로는 없습니까? 그 찬송을 박선생님에게 가르쳐달라고 하십시오. 너무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시련과 고난,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이 십자가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십자가, 이것은 자기가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오는 십자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속이고 자기 부인을 때렸습니다. 딸을 구박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습니다. 나는 정말 잘못했다고 하나님께 빌었고 이 사람들에게 가서 때려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어도 나에게 복수를 합니다.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빕니다. 전에 예수를 몰라서 당신을 사랑해줘야 하는데 때렸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해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을 박해합니다. 딸에게 가서 내가 너무 잘못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 나쁜 아빠였다. 나를 용서하라고 하며 딸에게 잘 해주지만 딸은 마음을 닫았습니다. “아빠는 싫어, 나쁜 사람이야! 상대하지 않을거야!” 합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런가하면 절대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사이좋게 지낸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아빠, 내 동생, 그리고 우리 고모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다 욕을 합니다. “넌 나쁜 놈이야!”, “넌 내 손자도 아니야!”, “넌 내 아들도 아니야!”, “넌 내 조카도 아니야!”, “넌 우리 오빠도 아니야!”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어떤 십자가이든지 그런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점점 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런 시련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목회를 그만두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뭘 기대했습니까? 목회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뭘 기대했습니까? 황금마차를 기대했습니까?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기대했습니까? 세상의 임금 같은 지위를 기대했습니까? 그랬다면 “힘들다. 그래서 나는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했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목회를 시작은, “내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복음에 빚진 자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옛날에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너무 가여워서 어떻게든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목회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중국어)”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중국어)”,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좋은 목회를 합니다. 목회를 잘 못하면, 이 말은 목회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목회를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나쁜 사람이 하는 목회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강의는 마쳤습니다. 질문이 있습니까? 질문이 이상하다고 비난하지 않을 테니 편안하게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질문 1) 목회자 선배님들이 고난 가운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는 목회자는 모두 승리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1)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옵니까? 혼자 조용히 생각합니다. “역시 목회를 해야 보람이 있을 것 같다. 돈을 벌려고 노력했지만 벌수도 없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지만 올라갈 수도 없고, 세상에 할 일이 없구나. 그래, 그냥 목회를 하자. 하나님도 좋아하신다니까 목회를 하자.” 이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봤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공부도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다 실패해서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는 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부르셔서 신학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없이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불러주셔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공부하다가 부르심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르심이 없는 사람들은 교양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어떻게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 모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다릅니다. 너무 높은 수준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그 마음이 너무 강렬하게 타오르고 그러면 병이 납니다. 중국에도 이런 시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들었노라” 중국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까? 당연합니다.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그런 병에 걸려본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없습니까? 너무 슬픈 일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병에 여러 번 걸리면 안 되겠지만 한 번쯤은 옛날에 걸려봤으면 좋을 것입니다.
제 설교를 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한 청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는 연애라도 깊이 해본 사람들은 이해를 잘합니다.” 그런 상사병에 걸렸을 때의 느낌이 어떻습니까? 너무 보고 싶은데, 보면 문제가 되지는 않는데 볼 수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싫다고 합니다. 싫다고 하지는 않아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 사랑하는데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사라졌고 사랑은 남아있습니다. 그때 생겨나는 감정은 ‘그리움’입니다. 그것이 너무 큽니다.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고 놀 수도 없고 잘 수도 없고 안 잘 수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들을 무엇인가 도와주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이 듭니다. ‘내가 그냥 죽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 살아날 수 있다면 내가 기꺼이 죽고 싶다.’ 그래서 이제는 그 감정이 너무나 크고 지속적이어서 다른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런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평생 똑같이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자기 안에서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성화”라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부르심이 이 안에서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똑같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 신앙은 이미 모두 끝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 사람들을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오해를 하게 됩니다. 자기는 이미 완전하게 예수를 닮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심히 하는데 진짜 그가 사랑하는 것은 세상이 됩니다. 거기서 모든 목회자의 탈선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목회자의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매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질문 2) 어떤 형제가 교회에서 몇 년간 교회 사역을 했는데 그 사역이 교회의 형제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역이었습니다. 갑자기 그 사역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사역을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이 도마처럼 갑자기 세상으로 나가버린 것을 보고 저에게 내적인 갈등이 생겼습니다.
답변 2) 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도바울은 위대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더 충격적인 이야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또 뭐라고 합니까? “이전 것은 잊어버리고 날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항상 자신은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많은 역경을 이기고 이 먼 곳에 와서 신학교육을 받고 있지만 내가 얼마든지 예수를 배반하고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내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나와 함께 예수를 믿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었지만 오히려 탐심이 가득한 사람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는 이미 도달했다. 나는 이루었다.”라고 말하지 말고 숨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위대한 사도들도 미끄러졌습니다. 예수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던 사람들이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항상 믿음과 함께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질문 3)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해서 넘어진 사람도 있고 미끄러진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지, 위로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 사람들을 처리하고 대해야 좋을지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3) 그 질문에 대해서 영상으로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한국말로 되어있는데 월순자매가 빠른 속도로 통역을 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목양을 받으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미끄러집니다. 죄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옛날에 있었던 나쁜 것들이 다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겠습니까? 너무 어려운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을 한없이 무조건 용납할 것인가? 야단을 칠 것인가? 아니면 무조건 많은 지식으로 가르치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 강요할 것인가?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아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현명한 방법을 이해해서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때로는 교훈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책망하고 잘못된 사람을 올바르게 하고 의로운 길을 가도록 돕는 것, 이것을 채찍이나 몽둥이나 돈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신학의 공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목회의 훈련을 받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그런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선생님으로부터 신학을 공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목회자 밑에서 실천적으로 목회를 배우는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사람이 교회에 나타났을 때 어떻게 다뤄야할 것인지, 저런 못된 사람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씀에 무지한 사람들을 어떻게 일깨워야 하는지, 그런 실질적인 기술들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을 싫어하는 나라든지 좋아하는 나라든지 상관없이, 미국을 가장 강한 나라로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주 강한 군대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탁월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국은 70년 전에 전쟁을 해보고 안 해봤습니다. 중국도 그때 내전을 겪어보고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이 시간도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서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군대 전체가 실제로 전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군대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지를 학교에서 다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좋은 교회에 가야 합니다. 교회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보여드립니다. 똑같은 질문을 우리 교인들이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로 하면 동공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목회를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동공인가? 어떤 사람이 가장 좋은 동공인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을 한없이 받아주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라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식으로 교인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3분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동안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대만에서 온 목회자들이 있었는데 자기들이 했던 선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팔 쪽으로 매년 선교를 간다고 합니다. 그 대만 목사님들 중에 한 분이 93세 정도 되는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매년 전도를 가서 그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이 할아버지가 100세가 되어있을 때까지 살아계셨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이렇게 오래 사시니까 어떤 것이 좋습니까?”, “그럼 좋은 것이 있지.”, “뭐가 좋으세요?”, “내 마지막 원수가 작년에 죽었어.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이 복수야.” 모든 못된 사람들이 다 죽은 것입니다. 마지막 원수까지 작년에 죽었답니다. 그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목회자들이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머입니다. 그것도 아주 야비하고 천한 유머가 아니라 아주 수준 높은 유머입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때 재미가 하나도 없이 찬송 부릅시다, 기도합시다 하다가도 가끔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것만 계속 하면 안 됩니다. 한번 웃게 한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 더 해 드리겠습니다.
한국, 중국, 일본의 통신기술자들이 모였습니다. 자기네 나라의 통신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것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중국 대표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천 년 전의 유물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기다란 구리철사가 발견되었습니다. 보십시오! 10세기 전에 중국에 전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일본 대표가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우리도 10세기 전의 지층에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기다란 유리 줄이 발견되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광통신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대표가 이야기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우리도 그 소식을 듣고 10세기의 지층을 파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때 우리는 이미 무선 통신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었는데 갑자기 하려고 하니까 다운로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것도 재밌는 것이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세 분의 성우가 각각 연기를 합니다. 여자가 나오면 여자 부분을 통역하시고 남자1이 나오면 남자1을 통역하시고, 남자2가 나오면 남자2를 통역하십시오. 보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