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3-34)“
녹취자: 허혜숙
어제는 두 가지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 아신다.’ 이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뒤의 성경구절 33절 34절을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가르치시면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사람들은 자기의 신들에게 이렇게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나와서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며 제사를 드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뇌물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은 이방인들의 삶이고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다른 삶이 있다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들을 돌보시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들에 핀 백합은 길쌈수고를 하지 않아도 해마다 옷을 입고 공중에 나는 새는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모아두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십니다. 이 세상의 들풀과 새들까지도 하나님이 이렇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공급해주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너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떠하시겠느냐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신들에게 뇌물을 바치면서도 그 신의 성품을 알고 그 신을 신뢰하지 않지만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뿌리를 캐 들어가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부족한 데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까지 주셔서 사랑하신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공급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병들게 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공격하여 찢어놓습니다.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야지만 무엇인가 목표가 있는 삶을 살 텐데 염려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산산이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염려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것일까요? 오늘 33절과 34절은 두 가지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입니다. 즉 너희들이 끊임없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사는 것은 삶의 목표가 아직 하나님을 향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지 혹은 무엇 때문에 고통 받는지를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살게 하고 싶으셨던 삶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끊임없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의식주에 대한 염려도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힘겹게 살 때는 그냥 따뜻하게 거할 집이 있고 몸을 가릴 옷이 있고 끼니를 때울 음식이 있으면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좋은 옷, 더 큰 집, 더 화려한 집, 그리고 더 좋은 음료를 마시고자 합니다. 결국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끊임없이 우리는 먹고 입고 마시고 주거하는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욕망이 커졌기 때문에 이제 현실이 그 욕망을 못 따라오고 이 간격이 그에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사노라면 결국은 일생을 살아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해 주신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그 안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나라, 하나님 중심이 되는 나라, 그 의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분의 뜻입니다. 그 분의 뜻이 온 인류를 향해서도 있고 우리 각 사람을 향해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의 초점을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하는 세상에 맞추고 또 끊임없이 욕망의 변화는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 세상을 자신의 욕망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수단정도로 여기면서 살아가지만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을 우리는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이 이제는 나를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 나라를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내 뜻의 성취를 바라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성취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삶의 목표가 나, 세상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그의 뜻으로 바뀌어졌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근심이 없겠습니까? 라는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물론 근심이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땅이 아직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현실이 주는 슬픔, 꿈꾸는 나라와 현실의 나라 사이에서 오는 차이가 그를 끊임없이 아프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온 몸을 드려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허물며 살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느끼는 고통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을 때 경건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렇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마음을 더욱 깊이 후벼 팠던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에 가득 차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막상 나라가 망하고 나니 이제는 그 하나님의 무너진 나라를 위해 애통하기 보다는 곡식을 사러다는 데 더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선지자는 마음에 깊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늘 눈물과 슬픔으로 가득 찬 기도를 잊지 않으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도 없고 흠도 없는 그 분이 세상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이 만드시려는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을 전심으로 따르는 무리들을 기뻐하신 이유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격하셨는지 그 분은 이런 놀라운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즉 가난한 사람이 겨우 겨우 마련한 가루가 있는데 그 가루에 누룩이 들어갑니다. 반죽을 하면 누룩이 들어간 그 가루는 점점 부풀어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의 재료로 변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누룩 삼아서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가루는 서 말이고 누룩은 한 줌밖에 안 되지만 그 한 줌이 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온 세상을 변화시켜 아버지의 나라를 만들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아실 때마다 고통과 아픔도 가지셨고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쁨과 소망도 아울러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분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근심과 염려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욕망으로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 어디에 거할까 하는 것을 고민하고 염려하면 염려할수록 그의 마음에서 그리스도는 점점 사라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라져가는 인생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 때 눈앞의 현실을 보면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그렇지 못한 자신의 가정을 봅니다. 사회를 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그 모든 일들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했던 사람과 현재 이렇게 살아있는 나 사이에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는 똑같이 괴로워하게 됩니다. 더 많이 눈물을 흘립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괴로워하고 혹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 때문에 힘들어하지만 가슴을 찢으며 슬피 울기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들을 보면서는 가슴을 찢고 슬피 울고 탄식합니다. 때로는 그 고통이 이 세상의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겪어본 적이 없는 가슴을 찌르는 아주 커다란 고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고통은 우리를 죽이고 삭이고 말리고 병들게 하는 고통이 아니라 이 고통은 우리를 살리고 힘주고 다시 솟아나게 하는 놀라운 기쁨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의 비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곳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예수의 그 고난 후에 하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목말라 하던 사람에게 그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것만큼 기쁘고 슬픈 것만큼 행복하고 고통 하는 것만큼 환희에 가득 찬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 거라.’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가르치실까요? 이것이 너희의 그 모든 세속적인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이니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하루에 충실 하라.’ 입니다. 3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 하니라” 아주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사람의 고민과 염려의 대부분은 현재의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미래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텐데 어떻게 하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어떤 일들은 이미 일어났지만 어떤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오늘 현재 일어난 일은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은데 미래의 그 일이 매우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염려를 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염려하는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때 가장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마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근심한다.’라고 하는 자체는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기도가 나오고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신을 얼마나 싫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아직 닥친 것이 아니고 내일에 가면 그것이 또 현실이 될 터이니 그것과 맞닥뜨리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고 염려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은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화목하다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러면 “…내일 일은 너희가 염려할 것이 아니요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이 말씀은 ‘내일’이라는 것은 비인격체입니다. 오지도 않은 날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염려는 너희의 몫이 아니다. 모두 너희의 믿음이 작기 때문에 너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들에 핀 백합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도 너희 자신은 하나님께 돌봄을 받지 못할 것처럼 근심하고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너희 자신은 새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인데 그 염려는 너희의 몫이 아니고 내일의 몫이다. 오늘은 오늘 염려하고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염려는 너희의 몫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찬송)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은 이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너희가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고 또 괴로움을 겪었는데 그것은 한 날로 충분하다. 그 날의 괴로움이 내일로 연장이 되거나 모레로 연장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는 내일에 대해서 많은 염려를 하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많은 힘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내일을 향한 염려가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오늘 하루를 살고 내일 또 살려주시면 내일도 내일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런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마음을 끓이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것이 없이 모두 주님께 맡겼고 내 인생의 꿈과 소망을 예수께 드렸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예수가 함께 사시는 것임이요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은 그 분에게도 괴로움이 될 것이고 나에게 기쁜 일은 그 분에게도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니 그 주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염려에 대해서 내려놓고 그렇게 주님 보다는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으로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오늘 하나님이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줄을 깊이 믿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자 인줄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