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교리반
녹취자 : 양일구
I. 본문해설
교회론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성경인데, 그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구원론이나, 인간론에 안나오고 교회론에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말씀과 성례가 나란히 나오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관한 교리 그 자체는 우리가 이미 배운 바와 같이 서론에서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은 성경론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때 풀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믿도록, 그리고 잘 살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는 일들이 교회에 위탁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론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작에서부터 도전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꼭 공부만 한다고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에서 하나님과 교회와 사랑하는 지체들과 하나되는 가운데 생활을 하면서 그 가운데서 질서를 배우며, 거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 지식들의 지평을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즉 배운다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척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 처럼 교회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성경을 배우기만 하면 기독교 신앙이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은 재대로 된 태도가 아닙니다. 올바른 교회론에 입각해서 교회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위탁하여 그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풍성한 해석으로, 풍성한 교리로 가르칩니다. 성경에 가르침들이 많이 있는데, 그 많은 가르침을 올바로 배열했을 때, 올바른 가르침이 됩니다. 잘못 배열하게 되면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지식은 사실인데, 그것들을 잘못 연결 시키서 전혀 가치가 없는 지식이 되는 경우처럼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서 어떤 진리들을 꺼내어서 올바른 질서 속에 배열해서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라는 학문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올바른 가르침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여러분들은 일차적으로 어디서 배웁니까, 가정에서 먼저 배웁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젖을 먹이고 사랑해주고 선악을 가르칩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이 법인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것을 다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면 엄마 잘못된 것에서 야단을 치면, 아이는 반항하게 됩니다. 그 때쯤되면 선악의 분별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점점 인생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배워도 인생을 잘못 사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인생 잘사는 법에 대한 권위 있는 아무개가 오늘 떨이로 싸게 수강료를 할인해서 받고, 7일만에 속성으로 가르쳐준다면, 여러분들은 신뢰할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은 그런 식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물론 인생을 잘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하니까 주식투자 7주 단기코스 이런 것들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되는 5주 단기 속성 코스는 우리들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그렇게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공부는 매이는 공부가 아닙니다. 지금은 모두 다 단답형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몇 년전에 ( ) 책이 나왔는데, 40분만에 읽는 회개, 40분만에 읽는 아리스토텔레스, 40분만에 읽는 기독교 같은 시리즈가 나옵니다. 물론 이렇게 요약을 할 수는 있겠지만, 40분 읽고 칸트를 이해했다. 40분 읽고 회개를 이해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기독교 사상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가라고 하면 굉장히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도 사상가입니다. 회심 집회 할 때 4살 아이한테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거든 복음을 들어볼래?” 라고 하면 “싫어!” 라고 말하는데 그것 자체가 사상입니다. 어쩌다 한번 소 발길질에 개구리 맞은 격으로 선한 일을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 신앙이 가장 잘못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 때문에 남과는 다른 눈으로 신을 보고, 세계를 보고, 인간을 보고, 자기를 보는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렇게 안배우기 때문에 오늘 날 기독교가 문제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 어중간하게 말이 끝나네요)
비유(칠판 설명)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신, 세계, 인간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온 세계와 모든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받게 되고, 성경을 통해서 잘 배움으로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를 잘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게 될 때,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가 역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가 아니라 자신의 시각으로만 세계를 보게 되면, 대상 자체로부터 진실을 얻기가 희미해집니다. 보는 사람의 눈 자체도 이미 어둡기 때문에 안질이 있는 사람이 밤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사물에 대한 판단이 흐려져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왜곡된 형태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사상을 쌓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해서 화합할 수 없는 불구의 형태를 만들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햇볕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우리 눈이 건강할 때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눈에 안질이 있다면 그 좋은 햇빛도 괴로운 것이 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행복하고 유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이 옳다고 칭찬해줄 때는 좋아하다가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줄때에는 참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이유였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지식들을 갖게될 때, 총포괄적인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교회 안의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지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함께 죽고 살 수 있는 사실이고 신념입니다.
그렇게 해서 흔들림 없이 인생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이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이것은 웃을 만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해야할 명제입니다. 공부 안하고 절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것만 공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을 보면 비판은 하고 있지만 답은 제시를 못합니다. 살인을 해도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것은 컴퓨터를 켜서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게임이나 동영상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이 누구인가를 배워가는 것을 최소한 사람이나 자연 속에서 배웠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전부 다 폐기되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공중에 붕 떠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너는 나를 사랑하거라”, 그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참된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기독교인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리를 올바르게 배우면 질문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총포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24:00 - 25:30 초 가량 자리를 옮기면서 녹음이 끊김.
A.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1)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방편 혹은 수단 혹은 방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사용하시는 가장 성경적인 방편을 말합니다. 은혜의 방편론에 대해서는 일개설, 이개설, 삼개설이 있습니다. 일개설은 성례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라고 가톨릭은 말합니다. 이개설은 말씀과 성례라고 봅니다. 삼개설은 말씀과 성례, 기도라고 말합니다. 통상적으로는 두 개로 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은혜를 많이 받는데 왜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고 그러는가,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수단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기도는 기도 자체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우리에게 은혜를 스스로 공급하는 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받는 은혜는 결국 알고 들어가면 기도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는 말씀의 은혜에 귀속된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는 성경을 늘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성경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의미들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됩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파에서는 통상 은혜의 방편을 성례와 말씀을 봅니다. 그리고 말씀이 더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례가 은혜가 되려면 성례의 의미를 알아야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례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은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위에 물이 뿌려질 때, 침례의 경우에는 물 속에 들어갈 때, 죄와 더불어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날 때,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또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을 때에는 성찬에서 떡을 땔 때,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떡이 찟어진 것 처럼 자신의 몸을 찟으셨구나, 포도주가 따라질 때 이 포도주가 붉은 색인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라고 깨달아집니다. 이렇게 될 때 성례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성례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성례의 의미를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부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떡 한 조각을 먹고 가고, 포도주를 마시고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은혜를 받겠습니까, 일표지설, 이표지설, 삼표지설 중에서 우리는 이표지설이라고 보고, 성례도 은혜를 전달해주는 방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씀을 아는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가톨릭에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을 성례라고 하지만 말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1) 말씀과 성령
“은혜의 방편이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교회가 사용하기로 한 방편의 (평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삼위 중 제 2위이신 인격적 말씀이나 능력 있는 창조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므로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강조할 점은 전파되는 말씀인데,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니, 즉 가정에서와 학교에서 대화나 종교적 문학의 방편으로 소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은혜의 방편이 된다. 이 말씀만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키는데 충족치 않지만, 꼭 필요한 도구이다. 한편 성령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킬수 있기는 하지만 말씀을 떠나서는 통상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 말씀 전파는 성령의 의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 p206
지난 번에 제가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몇 개의 세미나를 철저히 들어야 합니다. “세계화 사회에서의 진리의 전달자로서 신자의 역할” “회심 목회” “현대 복음주의의 흐름”을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날 행해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수 많은 이단적 행위들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사람을 쓰려뜨리거나, 금 이빨이 되는 것도 유행했었고, 요새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발 빼기 운동이 있는데 사람을 쓰러뜨려 놓고 발을 잡아 당기면서 당신의 모든 질병의 원인은 발이 짝발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고 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발을 빼는 것입니다. 성령과 현대의 흐름을 잘 모르면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들을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이 잘 안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늘 못하게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데” 설사 성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자신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 아류로서 “기도하던 중에”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은 미묘한 영적인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말들입니다. “성경을 읽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니라, “성경을 읽다가 생각이 났는데”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교만한 표현이 아니라, 훨씬 더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조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야하는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가장 훌륭하고 고유한 역사는 어떤 사람이 성령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문자적인 표현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더 깊은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거룩해지고 싶은 사람이고 가장 고유한 성령의 경험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교리반으로는 부족하고 기회가 닿으면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 신학, 사회등 아주 골고루 배웠으면 합니다. 자동차 운전 면허 따려고 백만원씩 투자해가며 학원까지 다니며 투자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 인생 자체를 운전하는 것에는 얼마나 많이 배워야겠습니까, 그래서 올바로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벌코프는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지식입니다. 여러분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데이비드 웰즈의 4부작 시리즈가 있습니다. ‘신학 실종, 윤리 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그리스도’와 4권을 압축해 놓은 ‘용기 있는 기독교’까지 총 5권입니다.
(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말씀 그러는데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은혜의 말씀 방편인 말씀은 두 부분, 즉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된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율법은 죄를 자극하게 하며,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에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몽학선생이 되게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의 규칙이므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준다” - p 206
a. 율법
첫 째로 죄를 깨달음, 둘 째로 그리스도께 인도함, 셋 째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하나님께 구원받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감사해야하는지를 생각하며 율법대로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b. 복음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바 구원의 방도의 명백한 표시이다. 복음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약속한다. 또 복음은 믿는 자를 위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기에서 “위하여”라는 말 속에는 대신, 이익, 대표 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