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난과 자기죽음
녹취자 : 장미연
이렇게 나오는 순서(목차)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자 혹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의 길에 선다고 하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겠지만 목회자의 길은 특히 그렇습니다. 외적으로 갈등, 가난, 박해 이런 고난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그런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 여러분들은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 지금 이 길로 들어서신 분들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소위 얘기하는 three theology 즉, 신학을 하는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배경이 있냐면 마르틴 루터가 복음을 만나고 개혁자의 길을 걷고 보니까 어떤 내용의 신학을 공부하느냐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하느냐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신앙의 과정과 일치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세 가지를 말하게 되는데 첫째는 ‘oratio’.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기도를 드리는 그것이 신학 공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유가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경외의 표지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도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을 빌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마음을 쏟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meditatio’. ‘묵상’입니다. 어떤 성경의 진리와 자신이 처한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묶고 말씀을 자신의 삶과 묶으면서 이것들을 마음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meditatio’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묵상을 통해서 마음으로 내려오게 해서 그 마음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사실은 meditatio를 잘 안합니다. meditatio는커녕 thinking을 안합니다. thinking을 해야지만 그 다음에 meditation일 텐데, 우리는 thinking을 해야 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묵상해서 자신의 삶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삶 자체가 묵상하는 삶입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진리의 빛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진리를 채득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설교는 쉽습니다. 자신이 직접 채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채득되지 않은 설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이 meditation의 부족입니다.
세 번째 특이한 것은 ‘tentatio’입니다. ‘tentatio’는 ‘시련, 혹은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참된 목회자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거짓된 목회자들에게는 고통이 없지 않겠지만, 그것이 고난이기 보다는 고생입니다. 고생과 고난은 다릅니다. 고생은 그냥 힘든 것이고 고난은 뭔가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도록 가르쳐 줄 뿐 아니라 그 지혜가 얼마나 참되고 달콤하며 사랑스럽고 능력 있고 위로가 되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시금석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저작의 비텐베르그판 서문에서 1539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쥐똥같이 보잘 것 없는 제가 후추같이 고급향신료에 빗댈만한 신학자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 당시에 후추가 동양에서 새로 향신료로 들어오게 됩니다. 서양 사람들이 이 후추 맛에 반하게 됩니다.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한창 비쌀 때는 금값하고 후추 값하고 거의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비싸서 귀족들은 후추통을 식탁에 올려놓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엄청난 부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후추 알갱이가 쥐똥하고 비슷하게 생겼잖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은 쥐똥 같은 신학자고 교황주의자들은 향신료 후추처럼 자칭 고귀한 신학자들인데 “자기가 그 레벨에서 그들과 함께 논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준다면 그것은 모두 교황주의자들 덕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악마의 분노로 공격하고 탄압하고 괴롭혔습니다. 저들은 나를 꽤 좋은 신학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되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고난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자신에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생애는 풍운아와 같은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비밀을 터득했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바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목회자에게는 숙명적인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말씀을 지키고 혹은 그 말씀을 전파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시련을 만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용납과 위로를 경험하겠지만 그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우리는 핍박을 받고 혹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있을 때 참고 그것을 잘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이고 이것이 신앙의 깊이인 동시에 이것을 통해서 신앙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신학도 깊어져 갑니다. 우리 중에도 일반 작가들 있잖습니까? 저도 문학 작품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문학 작품을 보면 한 권 정도만 읽어보면 이 사람이 누군지 대충 알게 됩니다. 드라마나 써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정도의 레벨인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진짜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든 흔적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문학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는 직접적으로 진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편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게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설교가 얼마나 깊은 고뇌 속에서 쓰여 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들려지기 전에 저 사람 마음속에 얼마나 큰 울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모두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여기에서 어떤 설교, 어떤 목회, 어떤 삶 그 모든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참고 견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화면에 보이는 예배당은 제네바에서 존 칼빈이 목회했던 삐에르 예배당입니다. 존 칼빈은 원래 이런 대범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혁명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수줍고 개인적이고 조용히 앉아서 글이나 쓰고 명상이나 하면 아주 좋을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적합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을 밀어 넣으셔서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평생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삶을 산 사람이 바로 존 칼빈입니다.
저는 2010년도 쯤, 정확히 시기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종교개혁이 거의 500주년 됐을 때에 종교개혁 여행을 한 번 해봤습니다. 백금산 목사와 같이 여행했는데 솔직히 마르틴 루터의 유적을 돌아볼 때, 마르틴 루터의 유적은 생각보다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독일이 개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또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던 그 지역의 대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실 돌아오면서 굉장히 감동적이기는 했지만 공감은 좀 안됐습니다. 왜냐면 루터는 워낙 풍운아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거의 영웅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서울 변두리에서 목회나 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위대한 사람을 한없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그런 흔적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칼빈의 삐에르 예배당에 들어가 앉았을 때는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정말 그 연악한 사람이 수많은 대적자들에게 에워싸이면서 그렇게 고통을 받았던 한 연약한 개역가의 모습이 훨씬 더 목회자로서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질적으로 약하고 샌님과 같은 이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제네바에 시의원 삐에르 아몬 이라는 사람은 칼빈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칼빈은 삐가르디 출신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촌놈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매우 불량한 목회자다. 칼빈을 진짜 죽을 때 까지 집요하게 미워했던 사람이 제롬 볼섹이라는 사람입니다. 볼섹의 논쟁은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이 사람이 칼빈이 살아있을 때는 “칼빈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 아주 사악한 사람이다.” 라고 비난을 하고 칼빈이 죽은 후에는 “구제불능이며 짜증나며 사악한 사람이고 불만족으로 가득 찬 사람이고 동성애기질을 보여서 모든 여성에 대한 성적 탐닉에 빠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난이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한 200년 동안 유럽에서 칼빈의 저작들이 잘 안 읽히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제네바에 목회자 트롤리에는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의 죄의 저자로 만드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샤들로티에 얘기까지 하지 않더라도 이런 많은 반대들을 겪습니다. 이 사람은 이레나 백커스라고 하는 17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바젤 대학에 계셨는데 이분이 칼빈에 관한 논문을 최근에 발표를 합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칼빈과 얽힌 제롬 볼섹의 이야기들을 다 정리하면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제롬 볼섹이 칼빈 사후에 이렇게 아주 악의적인 비난을 퍼부었는데 그 이유는 사실은 칼빈 때문이 아니라 칼빈의 제자인 테오도르 제자 혹은 베즈 때문이었다.”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칼빈이 죽은 후 제롬 볼섹은 칼빈의 생애 전체에 관한 전기를 씁니다. 그 전기에서 제자인 이 베자는 그 스승인 칼빈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기가 가까이에서 본 칼빈의 모습을 그립니다. 특히 그의 생애의 말기를 그림처럼 그리면서 배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선생님 칼빈은 아주 탁월한 경건의 사람이었고 그의 그 탁월한 경건은 중세의 신학자들은 몰론 교부들을 능가할 정도로 정말 온전히 경건하고 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대해서 반감을 느낀 볼섹이 칼빈에 대한 이 비난을 퍼붓고 그러한 비난을 퍼부었을 때 당연히 어떤 근거로 그러한 비난을 하냐고 나왔을 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자기가 기록에 의한 것을 통하지 않고는 칼빈의 비리를 말한 적이 없다고 썼지만 그러나 사실 막상 캐 들어가 보면 남에게 누구누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라는 것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든 당시의 논쟁적 자료들을 모두 검토하고 나서 이레나 백커스는 이러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는 볼섹이 거짓말과 소문과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였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기록에 의존했다라고 하고 그러면 그 기록이 무엇이냐고 하는 반론에 답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 해아래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학식을 소유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사도 바울 조차도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청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유언적인 설교를 남기는 가운데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내가 너희 중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당시 교회에서 있었던 교회에서 해결하고 치리해야 할 문제들을 세상에 법정에 호소하는 것을 두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로서의 목회자의 삶은 항상 자기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따님 되시는 권사님이 자기 아버지의 목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그렇게 성자처럼 알려지신 분이었는데도 그렇게 집요하게 아버지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교인들이 교회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옛날을 회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릴 적에 그 아버지가 교인들에게 그렇게 당하는 광경을 모두 본 것이지요. 결국 목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박수를 쳐주는 그런 꽃길과 같은 목회는 없습니다.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이 보이면 겉으로 그래 보이는 것이지 그가 참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살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 진리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존경하고 사랑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이유로 그를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죽을 때까지 꽃길만 걸어가는 그런 목회는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은 목회의 길에서 자신이 연단되고 강해지게 만드십니다.
칼빈의 생애를 보면 칼빈이 첫 번째 개혁을 하다가 쫓겨납니다.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아버지와 같은 마틴 부서 목회자 아래서 목회를 배웁니다. 제네바에 돌아와서 다시 2차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마틴 부서로 부터 실제적인 목회를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이민자들을 나라별로 이렇게 모아서 동역자들을 세워서 목회하게 하는 방식 자체를 거기서 배운 것입니다. 왜냐면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이 프랑스 출신의 난민들을 돌보는 일들을 실제로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다국적 사역을 하는 비밀들을 터득하고 교인들을 실질적으로 돌보고 모든 교인들을 말씀의 일꾼으로 세워서 자기를 돕게 만드는 이런 방식들을 배웁니다. 심방도 배우고 아주 8년 만에 엄청나게 성숙한 목회자가 되어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의 그의 생활은 정말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하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아와서 목회를 하면서 이 사람이 그런 시련과 모든 것을 겪으면서 점점 더 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말년에는 엄청나게 강인한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지도력 아래 복종시킬 수 있는 그런 탁월한 지도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우리는 사랑의 장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보면 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고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다가 눈 뜨여지면서 생애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13장을 33주에 걸쳐서 설교를 하면서 사랑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적이 있습니다. 이 13장을 연구하면서 제가 찾았던 중요한 사실은 이런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이 사랑의 장은 사실 사도 바울로 살게 만들었던 그 내면의 세계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고 그 사랑이 사랑에 감화를 받으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그 사랑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특성들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자신이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대적자들에게 에워싸이며 살아가면서 그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빛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우리는 한 쪽으로는 인입되어 들어온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소위 얘기하는 플레로마 충만을 보게 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13장을 통해서 그것들이 인출되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 그것을 우리들이 사도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까 모든 사랑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그 13장의 깨달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수렴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사도 바울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말하자면 확산되는 그런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이 “the charity and its fruits” 라고 해서 전집에 그 8권에 대부분을 고린도전서 13장을 해설하는데 바쳤던 것은 그런 점에서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는 이제 사랑의 특성을 크게 세 가지를 드는데 ‘오래 참다.’ ‘매크로’는 ‘최대한’이고 ‘두매오’는 ‘견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듀머스’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 다음에 ‘덮어주다’ ‘스테고’ 여기서 나오는 명사형이 ‘스테개’ ‘덮개’입니다. 그 다음에 ‘휘포매노’ ‘휘포’와 ‘매노’ ‘머물다’에서 나오는 건데 모든 시련들을 뒤집어쓰고 거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 악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세 번이나 썼고 두 번째 것은 유실됐고 두 개가 남았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고린도교회가 퍼부은 비난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독특한 방식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다가 사도가 되었는데 이 사람은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기록도 없는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만났다고 주장하고 사도가 되었다고 하니까 이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과의 사이가 원만했을 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고린도교회가 복음에서 떠나서 변질하면서 분파주의와 물질주의 부도덕에 빠지고 나니까 그것을 올바르게 책망하는 사도 바울의 지적들이 너무 따가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직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때 고린도교회 후서에서 전서를 받들고 그 교인들이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마음이 누그러진 가운데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 변증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사도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사도임이 분명한 표가 있다.” 그 표가 있다고 하니까 결정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표니까 상표가 있는 거니까.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표적. ‘세메이온’입니다. 기사, 능력 이런 것들은 사도의 가장 중용한 자격 조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옵고 그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의 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것을 밀치면서 제일 먼저 제시하는 것이 모든 참음입니다. “나에게는 사도임이 분명한 표가 있다. 내가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참을 수 있었겠느냐. 내가 이렇게 참았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논리에 의하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참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사랑입니까? “너희들이 나에 대해 베푸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 주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겠느냐?” 그리고 사랑을 사도의 중요한 표로 제시 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에서 특히 “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이나 “Revival”에 대한 평가에 대한 글들 속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것이 “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체험하고 신령한 사람이 된 가장 확실한 표는 사랑이다.” 그 모든 신령함의 마지막 열매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목회자는 교인 때문에 목회하거나 자신의 야망 때문에 목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는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들을 목회 하냐?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되지만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레 아마레’ ‘사랑 하네’입니다. 사랑하는데 이 사랑을 ‘인떼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마레 떼우’ 그건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왜 ‘목사가 교인들을 사랑해야 할까?’ 그것은 나의 인격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18세기에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여러분들을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에게 하나 충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저는 이 충고를 여러분들에게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7살부터 시작해서 이 나이에 이르기 까지 약 40년 가까운 세월을 쉼 없이 신학을 공부했고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집을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모두. 물론 몇 권 안 읽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설교집이나 이런 것들. 그러나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 젊고 활기찬 시절에 여러분들에게 스승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20몇 년 전에 쓴 1997년도에 그 책이 나왔으니까 이미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 쓴 것에 대해서 나는 그대로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승이 없는 사람의 신학은 유통기한과 제조업체가 표시되지 않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신학이다.” 우리들이 배고프면 구멍가게에 가서 제조업체도 표시되 있지 않고 제조일자도 없는 것을 사서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를 교회에서 채용할 때도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두 가지 답변은 신뢰를 안 합니다. “목사님입니다.” 인정을 안 하고 두 번째 “우리 아버지요.” 이것도 인정을 안 합니다. 내가 여기서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수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사상적인 멘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 훌륭하시겠지만 그 분이 신학에 대해서 모든 걸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로서 그 분을 존경은 하되 멘토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처럼 생각하고 그 분처럼 말하고 그 분처럼 이해하는 그것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한 때 존 오웬에 깊이 심취해서 거의 한 20년을 읽었습니다. 집중해서 읽은 기간이 10년 된 것 같습니다. 그 분에 저작 전집도 거의 다 읽었습니다. 뭐 한 두 권 정도 빼놓고는 모두 읽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저는 그랬습니다. “나는 존 오웬 목사님이 담임 목사고, 나는 부목사다.” 그래서 항상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몰론 어느 정도 과장이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갔습니다. 제게는 깊이 흠모하는 신학자가 네 명이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존 칼빈, 존 오웬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어떻습니까? 물론 헤르만 바빙크도 읽었고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이 네 분을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면서 읽지 말고 한 사람을 관통하는 독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온 첫 시간이었는데 어느 교수가 들어오더니 “얘들아, 너희들은 집적거리면서 이 책, 저책 읽고 얕은 물에서 퐁당 거리지 말고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를 독파하라.” 그 때 한 학생이 그 얘기에 깊은 감동을 받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훌륭한 설교자가 됩니다. 존 파이퍼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일관되게 읽어서 그 사람의 저작들을 끝내는 것입니다. 종종 이야기가 들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견해가 틀렸다. 저런 견해가 틀렸다.’ 저는 네 사람을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지만 아무의 견해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없습니다. 제가 세 분을 합한 것보다도 어거스틴을 훨씬 더 존경하지만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말합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할머니하고 아우구스티누스 밖에 없다.” 뭐 다른 사람보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어거스틴을 비판하며 따릅니다. 비판하려면 우선 모두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집적, 집적 독서하면서 세월을 보내면 마지막에 내 것도 없고 남의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조각, 조각 돌아다니면서 구름 속을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관통해서 읽어야 합니다. 만약에 영어를 독파해서 17세기나 18세기의 영어를 읽도록 연습을 하고 위대한 사람들의 저작들을 읽어 간다면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유식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일관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누구도 그냥 추종하지는 마십시오. 그 대신 일단은 존경하고 깊이 심취하면서 읽으십시오. 이 얘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저자입니다. 그에게 몇 가지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는 다른 어떤 신학자보다도 아주 놀라운 적응성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에드워즈 붐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궁리만 하지 말고 딱 책상에 앉아서 에드워즈의 전집이 17,000페이지 정도 됩니다. 영어를 예일출판사를 기준으로하면 그렇습니다. 그중에서 아마 몇 백 페이지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을 것입니다. 번역의 질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별개 문제지만. 17,000페이지를 몇 년에 싹 정리를 해낼 것이냐, 분명한 사실은 소설처럼 빨리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18세기의 문법도 따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읽어나가야 하는데. 그 사람을 딱 놓고 내가 3년 안에 모두 읽겠다는 마음으로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처럼 느끼면서 사상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다른 얘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빨리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천재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 나이로 4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연습을 하게 되고 이미 6살 때 자연을 관찰해서 글을 쓰고 8살 때는 유물론에 관한 견해를 자신의 글로 발표를 합니다. 13살 때에 예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라틴어와 희랍어 이런 것들을 특히 라틴어를 거의 능숙하게 하는 가운데 입학했습니다. 4년 뒤에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라틴어로 졸업 연설을 하게 됩니다. 2년 후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될 때 약관 나이 19살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학문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노세튼 교회의 우리로 말하자면 부목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목회지였습니다. 거기에서 23년 정도 목회를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 그 교회와 갈등을 갖게 됩니다. 그게 솔로몬스타드 시절부터 소위 얘기하는 반쪽 언약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시의회에서 교인의 자격을 규정했는데 그 교인은 믿는 성도와 그 성도의 집안에 자녀들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들어갑니다. 중생의 경험이 없이도 세례와 성만찬의 참여가 가능하다는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나중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판하면서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면서 결국은 정들었던 목회지와 결별을 하게 됩니다. 얼스틴이라는 사람이 쓴 조나단 에드워즈의 1750년 7월 5일자 편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 내던져 졌습니다. 나와 내가 부양해야할 가족들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녀가 11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좀 더 손에 잡힐 만한 것을 위해 열리도록 제가 의지할 만한 어떠한 특별한 문도 제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헤어질 때 ‘심판대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와 결별을 합니다. 이 사람이 사실은 벌써 이때 스코틀랜드에 있는 목회자들과 서신교류를 많이 하고 에드워즈의 사상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애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미국이 식민지였으니까. 그런 속에서 에드워즈가 스코틀랜드의 목회자로 오도록 요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절하고 인디안 선교사로 헌신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주옥과 같은 작품 의지의 자유를 비롯해서 중요한 작품들을 기록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시인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 결국은 목회자가 올은 길을 걸어가려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렇게 분쟁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런 모든 시련 속에서 주께 피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신학과 신앙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속의 물결을 따라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들을 다르게 창조하셨고 구속하신 것은 그 다름을 아주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에 은혜를 주십니다. 이 사람은 목회자겠지요?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어떤 성도는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동일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사람은 예배에 나오지만 변질되고 있고 이 사람은 이미 모두 은혜가 사라졌고 이 사람은 드디어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진안한 현실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이 사람들만 데리고 목회를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이렇게 변질되는 사람들, 심지어는 신앙을 거의 완전히 떠난 사람들조차도 교회 안에 남아서 악을 행하고 혹은 진리에 반대하고 혹은 똑같은 진리라도 다른 방식을 고집하면서 목회자에게 고난을 더합니다. 목회자는 이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교회를 개척하고 2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목회를 해서 내 맘대로 안 한 적이 없었습니다. 뭐든지 나 하고 싶은 대로 거의 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살아온 날들을 회고해보면 ‘너무 철이 없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말을 해도 그렇게 사람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했을까? 왜 사람들에 대한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없었을까? 제가 55세 때까지 평생에 소원이 한 번 입원해 보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하얀 시트가 깔린 병원 침대에 힘없이 누워서 교인들의 문병을 받아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링거가 이렇게 꽂혀있는 파리한 손이 한 번 되어보는 것이 바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때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체력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제가 게으름이라는 책을 썼잖습니까? 최근에 미국에서 출판됐는데 몇 권을 미국에 있는 내가 아는 학자 친구들에게 보내 줬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연로한 교수님이 그 책을 읽고 즉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이제 막 받았는데 읽기 시작하는데 빠져 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젊은 시절에 게으름과 치열하게 싸웠던 당신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아닌 것 같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 박사였습니다. 그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제가 가장 원기 왕성한 삶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월요일 날 휴무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월요일 날 쉬나?’ 평신도들도 아침 9시부터 나와서 저녁 7시까지 수고하다가 월요일 날 출근하는데 저는 이제까지 월요일 날이라고 특별히 휴식을 취해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제 교회에 아무도 안 나오니까 할 일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월요일 날 꼬박 꼬박 나와서 학생들 가르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난 모든 아픈 것은 정신이 해이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는 얘기가 “봐라. 이차도는 목을 잘리고도 몇 미터를 걸어갔다는데 진짜 이 정신이 없으니까 자꾸 아픈 거지. 왜 그렇게 아프냐? 죽기까지 한다며?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뭘 그러냐?” 저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의 책의 한 구절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죽을 것 같이 건강이 나빠지면 살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살려주시면 또다시 죽을 것처럼 일하십시오.”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됩니다. 왜 그렇게 모든 사람을 나의 잣대로 대했을까? 그 후로는 제가 10년 동안에 11번을 입원하고 9번을 수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매우 약해진 것을 경험하면서 숨을 쉬는데 이렇게 큰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습니다. 숟가락이 그렇게 무거운 물건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합니다. 자기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용납하고 교회에서 말씀을 잘 안 듣고 뺀질거리고 은혜를 못 받으면 가라고 그랬습니다. ‘그 자리 좀 비워놓고 다른 사람 좀 앉게 해라. 교회도 좁은데. 가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와 준 것 만해도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용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런 것을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내가 열정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말 사랑이 부족했었구나.’ 그런 사실에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목회의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저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으로서 주님을 닮은 자가 됩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꽃다운 시절에 불붙는 가슴을 안고 신학대학원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휙 지나가버렸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생각합니다. ‘아, 나의 생애에 날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리고 지나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매순간,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굉장히 사랑하셨던 거 같습니다. 매순간 예수와 함께 동행 하면서 대학 과정 4년, 신대원 3년을 보냈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야간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진짜 열렬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금도 7년을 회고해보면 다시 한 번 그렇게 살라고 기회를 주셔도 그 이상은 못 살 것 같습니다. 특히 신대원 3년은 그렇습니다. 다 잘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열심히 더 이상은 살수가 없을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면 사랑할수록 우리에게는 고난도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고 진짜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요새는 나를 조금도 사랑 안 하시는 거 같다고.” 하나님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 중 고난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대원 다닐 때 심지어는 제가 34살에 교수가 난 다음에 늘 하나님 앞에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지치고 피곤한 이 몸을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토요일이면 가방을 싸가지고 한강을 건너서 철야를 하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 갈 때 늘 부르던 찬송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 너무 괴롭습니다. 목회도 못 하는 것 같고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공부를 잘한 것 같지도 않고 껍데기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같고 탁월한 경건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기도하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그 사이에서 막 찢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강을 건너는 좌석 버스에 창문을 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찬송을 부릅니다.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그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자유론』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상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밀입니다. 아버지가 제임스 빌이었는데 아버지는 거의 스토아학파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아주 엄격하게 욕망을 절제하면서 탁월한 사상을 자식에게 가르쳤던 분이었습니다.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견유학파적인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존 스튜어트 밀이 자기 자서전에서 인생의 깊은 수렁 속에 들어갔던 자기 자신의 경험을 개신합니다. 물론 그 사람은 신앙을 포기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어디서 인생이 무너지냐하면, 내가 지금 욕망하고 있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성취되었을 것을 가정해보았더니 우리 모두 바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것이 모두 성취되었을 때 그때 나는 행복할까?’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졌는데 ‘아니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순간 ‘나는 산이 무너지듯이 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무슨 뜻이냐면 여러분들이 비록 주님의 일을 하려고 목회의 길에 섰지만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저는 지금의 상태에서 그렇게 물론 바라는 게 있겠지만 여러분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을 거 아닙니까? 큰 교회 청종을 받아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유수한 신학교에 그렇게 유학을 가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유학을 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진짜 이루어졌을 때 행복하겠느냐? 나는 스튜어트 밀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 사람이 거기서 완전히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인데 아버지에게 고민을 가지고 가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도 답을 못 할 거다.’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나중에 이 사람이 몽테뉴라는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탈출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분이 내리는 결론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훌륭한 목표가 아직 안 이루어진 상태, 그것을 끊임없이 갈망해서 가는 과정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엄밀한 의미해서 말하면 그 행복은 점적인 행복이 아니라 선적인 행복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백 프로 동의할 순 없지만 대국적인 의미에서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수적이고 우리의 성취의 기쁨이 지금 내 속에 살아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미완성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이런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그렇게 살지 말고 오히려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여러분 같은 사람은 없었고 이후에도 없고 지금 현재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쉽게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멸종 위기 단 한 개체가 남은 생물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들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고난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나에게 합당한 고난을 주시고 내가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바와 같이 “명하는 것을 내게 주소서. 원하는 것을 내게 명하소서.” 하는 그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괴사한 피부입니다. 독거미에 물려서 피부가 썩어 들어간 것입니다. 괴사했습니다. 이러한 세포의 죽음을 가리켜서 의학용어로 ‘네크로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희랍어에서 왔습니다. 이 네크로시스는 ‘네크로스’라는 희랍어 단어에 익숙해져있지요? ‘죽은’이란 의미입니다. 이건 세포의 죽음인데 타의적인 죽음이고 화상이나 타박상 유해물질 등으로 세포가 팽창한 후 괴사한 것입니다. 세포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포의 죽음 중 이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죽음이 있는데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타살이 아니라 매타니즘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세포가 아직 성 썩었는데 세포가 스스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한 세포가 죽으면 죽은 세포에게서 A.T.P라는 화학 에너지가 나오고 이것을 전력으로 삼아서 다른 세포가 구동을 하면서 여기에서 얻은 생산물들을 살아있는 세포가 활용하면서 이 세포들이 세포 분열을 하면서 세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한 세포의 죽음을 통해서 이렇게 세포의 증식과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이 모든 세포 안에 작동을 하는데 어느 특정한 세포의 군이 아무 세포도 아포트토시스의 죽음을 실행을 안 합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현상은 세포가 아무도 안 죽으니까 그 세포의 생명력이 넘쳐서 자신을 위해서 죽어주는 세포가 없으니까 스스로 증식하기 위해서 다른데 있는 영양분들을 막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전체는 야위어 가고 체중이 주는데 특정한 세포만 이렇게 붉어지듯이 점점 더 증대됩니다. 이게 암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입니다. 이미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국가를 보더라도 국가 안에 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도 있을 것이고 군인 계급, 전사 계급도 있을 거고 그 다음에 물건을 사고팔고 먹고 사는 그런 평범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국가를 위해서 기꺼이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죽으려는 사람이 있는 국가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을 때 그것은 아주 작은 위기에도 국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실행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많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기꺼이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이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실행하는 그룹에 의해서 교회는 살아납니다. 그러한 그룹에 중심에 목회자가 서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 일을 안 하겠다고 하고 아포프토시스의 죽음을 거절하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시작하면 교회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못된 인간의 통치에 완전히 복종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집단이 되면서 평화를 누리든지 아니면 고통을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지금 이상한 구름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이게 독수리 성운(Eagle Nebula, M16)입니다. 지구로부터 약 7천 광년 떨어져 있는데 큰 그림을 보면 네 개의 기둥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일 긴 기둥이 거리가 4광년 정도 됩니다. 빛이 4년을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8분정도 걸리니까 4년 동안 빛이 달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럼 이 밑에 있는 둔치까지 생각해보면 상상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한 것입니다. 이 정체가 별들의 먼지입니다. 별들이 수십 억년동안에 생을 마치고 마지막에 죽을 때 이게 한 것 팽창하면서 백석 외상의 상태가 되어서 쾅 하고 폭발하면서 별의 생애를 마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행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항성을 이야기합니다. 태양도 언젠가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폭발하는 불꽃의 범위는 수, 금, 지, 화, 목, 토성까지 갈 정도로 목성까지 도달할 정도로 어마 어마한 불길로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별들이 죽고 나면 그것들이 먼지가 되어서 이렇게 구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먼지처럼 모이는 것들은 장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분자 군들이 서로 중력 작용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서서히 핵융합이 일어나게 됩니다. 핵융합이 일어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점들이 있습니다. 하얀 점들이 매달려 있는 점들이 융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융합이 계속 되면서 점점 규모가 커지면 나중에 폭발을 일으키면서 이 별이 여기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건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중력에 의해 떨어져 나갑니다. 새로운 별들의 탄생입니다. 별들은 아무데나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분자운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신학을 공부하다가 천문학이 너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천문학을 한 1년 동안 과외 선생님한테 배우면서 사실 신학에서 답을 들려주지 않는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천문학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보면서 결국 느끼는 것은 여기에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어느 별인가가 죽어서 그 희생의 잔해 물들을 통해서 새로운 별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목회의 고통 같은 것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별로 큰 관심을 가지시지 않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가 3년 전쯤에 쓴 책 가운데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꽤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제가 온 몸으로 이러한 진리들을 채득하면서 써 내려 간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요 고난이었지만 이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교회에 남겨두세요. 이것은 교회가 온전해 지고 그 온전해 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도 온전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교회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편안하고 안락한 길만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탁월한 고난의 사람으로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진리가 결국은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래서 저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 세포에서 일어나는 일,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자기가 죽는 것만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충만히 사신다는 비결을 말할 때 한 6개월 이상 커다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충격 속에서 지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온 몸으로 그리스도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며 살아간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