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이 흘러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 4:12-15)
녹취자: 조경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명한 솔로몬의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지방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누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니 이 누이는 굳이 육신의 혈육으로서의 누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은 깊은 사랑의 노래인데 이후 신약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를 한 동산으로 안내합니다. 그 동산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동산이 아니라 왕의 비원입니다. 그야말로 ‘시크릿 가든’입니다. 왕 한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비밀스러운 정원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그 정원으로 데려가는데 정원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동산이 잠겨 있다고 했는데 왕 이외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잠겨있는 동산이 있고 그 안쪽에는 우물이 있는데 덮은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을 열어보니까 가물어도 끊임없이 물이 솟아나는 샘이 거기 있었습니다. 샘의 물이 우물에서 넘쳐서 골짜기를 이루고 그 물은 시내가 되어 흘러가고 흘러가는 시내 가장자리에는 우리가 이름만 알 뿐 원래 무슨 식물인지도 잘 모르는 많은 식물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개울을 따라서 아주 아름답고 값진 꽃과 약재와 향품들을 만드는 식물들이 줄줄이 자라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산이 있는데 동산 한복판에는 샘과 우물이 있고 거기서 개울이 흘러나오고 개울 옆에는 아주 값비싼 꽃과 향료와 약재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 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합니다. 솔직히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나 이 길로 들어섰을 때에는 세상의 자랑과 가치를 버린 것 아닙니까? 물론 버렸다고 해서 평생 버린 채 살 것 이냐 나중에 마음이 변해서 세상 것에 욕심이 생기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무튼 목회의 소명은 세상의 영광과 자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지금 이런 저런 일로 아주 분주하게 바쁘게 살고 있고 어떤 때에는 즐겁고 보람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만 어떤 때에는 너무 괴롭고 힘든 상황을 맞이합니다. 목회의 짐을 훨훨 벗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면 그 다음에는 좀 어떨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 계시던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님이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은퇴하기 전과 후의 차이가 뭐냐 하면 은퇴하기 전에는 모두 해야 되는 일이었는데 은퇴하고 나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그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까지는 끊임없는 긴장에서 떠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젊어서 서울서 공부를 한다고 할머니와 함께 생활을 했고 사업하시는 부모님은 지방에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매일 저를 야단치시는 게 ‘너는 잠이 너무 많다. 그렇게 잠을 많이 자서 네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하면서 아침이면 제 등짝을 때리시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목회를 하고난 후로 푹 자본 적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잠을 많이 자려는 성질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잠을 안 잤습니다. 『게으름』 이라는 책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책입니다.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죄는 아니지만 너무 태만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졸린 데도 자신을 채찍질해서 늦게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도록 나를 훈련했습니다. 젊었을 때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하면서도 내게 그려지는 천국은 푹 자는 곳이었습니다.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뽀송뽀송한 이불을 덮고 푹 자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습니다. 하루 쯤 자도 되는데 안 될 것 뭐 있겠습니까? 뽀송뽀송한 이불을 집에서 만들거나 호텔 같은 곳을 가서 창문을 활짝 열고 자면 되는데 저는 휴가도 많이 즐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은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옵니다. 어떤 때는 너무 괴롭습니다. 토요일 날에도 수면제를 먹었는데 2시 반까지 잠이 안 옵니다. 6시 반에 일어나서 1부 예배를 준비하고 나와서 네 번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한 번 강의를 하고 밤늦게까지 당회를 하고 그러면서 삽니다. 언제까지 이런 긴장이 살아지지 않을까요? 교회 목회를 그만하기 전까지는 못 내려놓을 것 같습니다.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목회를 그만 둬도 글을 쓰던지 선교를 하던지 무언가를 하겠지 제가 교회를 은퇴하고 나서 떡볶이 집을 하겠습니까? 곰탕집을 하겠습니까? 뭔가를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한은 아마도 긴장이 사라지지 않을 꺼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과업이 주어지고 우리는 그것을 매일매일 살아냅니다. 물론 사모님들 가운데는 ‘목회야 남편이 하고 나는 벌어다 주는 사례금을 가지고 편안하게 교인들의 간섭 안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생각하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 사모님은 정말 행복하냐 하면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맨 처음 목회를 하게 된 것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랑을 알고 보니까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목회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목회라는 일을 하면서 교인들이 걷어다 준 돈으로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꿈도 꾸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서 죽어가는 저 영혼들을 먹여라.’ 하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아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대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목회를 하면 큰 교회를 해서 영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입니까? 아닙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서 교회가 커지면 경제적으로 아주 윤택한 삶을 살 것이다? 그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 세상의 영광도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가도록 처음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을 때 저는 공무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눈물을 흘리며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는데 미묘한 것은 요즘엔 그 찬송을 안 부릅니다.
(찬양)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x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x2)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러한 사랑이 목회를 하게 합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또래에 목회를 한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유난히 심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저와 아내를 훈련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연세 드신 분이 들으시면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서 전도사가 됐습니다. 목사님이 “김전도사. 아직 사찰을 아직 못 구했는데 석 달 안에 구할 테니 네가 그동안에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지켜라.” 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 “목사님.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꿈도 못 꾸고 교회를 들어왔습니다. 다 부서져가는 낡은 공장하던 건물을 샀는데 옆에는 일하는 애들이 자던 방이 있었습니다. 루삥이라고 아십니까? 종이에 콜타르를 먹여서 지붕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방 하나와 부엌 하나를 만들었는데 방문을 열면 바로 교회마당이었습니다. 미닫이문이 창호지로 돼 있어서 부부들이 말하는 소리도 바깥에서 들릴 정도였습니다. 겨울에 거기서 잠을 자는데 조갈이 있어서 항상 머리맡에다 물을 놓고 잤습니다. 자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물이 안 먹혔습니다. 보니까 물이 얼어서 돌이 되었습니다. 옆에 보니까 24살에 시집와서 25살 새댁인 아내가 자는데 얼굴이 새빨개서 입에서는 계속 김이 나오는 겁니다. 여름이 되면 비가 새는 겁니다. 그릇을 갖다 놓으면 띵동동 소리가 나서 그릇 9개를 놓고 잤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교회에서는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불평 안하고 그냥 놓고 이리로 피하고 저리로 피하고 나중에는 피할 데가 없어서 구석에서 둘이 이불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서 밤을 새우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것이 고생 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찬양)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본향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저는 서럽지도 않았고 고통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목회의 길에 들어설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영광이나 번영을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주님을 생각하면서 고난의 때와 궁핍에 때를 지나는 것입니다. 모든 때들을 지난 게 어디 저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여러분 사모님들 모두 다 연세 어느 정도 드셔서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목회의 고비 고비를 지나셨겠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냥 참으면 되는데 사람으로 말미암는 정신적인 깊은 고통, 특히 사모님들은 많이 참아야 되니까 그런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하여 심지어는 정신 질환까지 오지 않습니까?
왜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들을 이겨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물론 교인이 조금 변해줬으면 좋겠고 생활비도 좀 더 줬으면 좋겠고 말썽 피우던 교인은 제발 나가줬으면 좋겠고 그래도 끝까지 안 나가는 사람은 좀 변화됐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직하게 보면 하나의 문제가 해결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납니다. 꽃길을 걷는 목회는 없더라고요. 목회라는 자체가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뒤 따라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신 적도 있고 핍박을 받으신 적도 있지만 예수님이 걸었던 어느 길이 꽃길이었습니까? 아무도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가슴에 정말 손을 얹고 아무 목회자도 부러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느 목회자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한 고비가 끝나면 그 다음에 또 한 고비가 있고 이 고개를 넘으면 좀 낳겠지? 하면 또 다음 고비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계속 펼쳐지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닙니다. 물론 환경도 잘 만들어줘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주님이 ‘내가 복음을 위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내가 무엇 때문에 그 부르심에 ‘아멘. 주 예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게 만들어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해 봅니다. 세상의 자랑이나 꽃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내가 예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가지 아니하고는 먹는거, 자는거, 입는거, 노는거 아무것도 행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간단한 말로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소명은 안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시켰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강제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사랑의 강제력입니다. 그 사랑에 이끌려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는 길이 목회입니다. 목회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건, 거기에서 만나는 마음 졸이고 아파하고 고통해하는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내게 있는 사랑에 비해서 내게 닥친 현실이 너무 엄혹하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을 바꾸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떨 때는 목회자들끼리 하도 힘드니까 교회를 바꿉니다. 그런데 나중에 몇 년 지나보면 양쪽 다 힘들다고 합니다. 기존 교회에서 사고치고 말썽을 부리고 힘들게 하는 것을 이미 다 터득을 했는데 새로운 교회를 가면 새로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목회자인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봅니다.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자기도 힘드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인으로 안 났으면 정말 사이좋은 이웃으로 살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나서 서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서 일평생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가 잘못 했는지 누가 잘 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 날에 모두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겪으면서 항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면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에 대해서 관용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게됩니다. 사랑이 그렇게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잠근 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온갖 아름다운 화초와 향품과 귀한 약재들이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으면 그 아름다운 정원이 몇 달이나 가겠습니까? 그 물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샘에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그 샘의 물이 더 이상 안 나오고 그쳐버리면 동산은 불과 몇 개월 안에 황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교회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의 마음은 바로 이런 봉한 샘입니다. 이런 시련 저런 어려움이 모두 있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다시 넘칩니다. 너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솟아납니다. 놀랍게도 은혜 받지 못했을 때와는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괴로우면 자기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나는 얼마나 힘든가? 얼마나 이 십자가가 무거운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얼마나 고통을 많이 당하는가? 이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내가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도 우리 주님처럼 고생하지는 않았구나.
(찬양)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님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예수님이 당하시던 고난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로 나의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내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이것을 이겨내시게 하신다는 믿음이 드는 것입니다. 고통을 많이 겪으면 겪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이 솟아나서 괴로운 목회의 시기를 지나면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더러운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어떻게 그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며 사람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인생을 사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고난의 현장이 내가 사랑하는 예수의 고난을 경험하는 현장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놀랍게 내 안에서 죄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작은 일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사람들을 쉽게 미워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이 자리를 아주 가볍게 여기고 사명감 없이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회개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기도했더니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 확신이 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니 생명의 기운이 넘치면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사랑으로 바꿔놓습니다. 오만한 자들을 겸손하게 섬기면서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살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 사랑과 생명이 목회자와 사모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서 넘치도록 흘러내려 갑니다. 그 물이 스며들어 가면서 목회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물이 아니라 그 배에서 솟아난 생수의 강이신 성령이 죽었던 영혼들을 살려내고 어리석은 영혼들의 눈의 비늘을 벗겨서 하나님 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제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한다는 책을 쓴 게 한 20년 전입니다. 다 완성해 놓고 마지막 서문을 쓸 때 혼자 바닷가를 가거나 산에 혼가 갑니다. 혼자 가야지만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는데 전념할 수 있어서 치악산을 혼자 갔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물었는지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가로수들이 말라가서 소방차가 와서 물을 줄 정도로 가물었던 해였습니다. 치악산을 올라가는 입구도 나무들이 다 시들어갑니다. 그런데 산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는데 한 20분 정도를 걸어 들어가니까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물이 사람 두 길 정도 될 정도의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게 뭘까? 산이 비가 왔을 때의 물을 잔뜩 머금고 있다가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6개월 동안 계속 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 때 큰 깨달음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목회를 한다고 해서 모두 목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사람을 살리는 목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의 아내와 목회자가 산 같은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높은 산이 있는 곳에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산 전체가 물을 머금었다가 가뭄의 때에 물을 흘려보냅니다. 온 땅이 가물어서 식물들이 다 죽어가도 산자락 아래 이어진 논밭은 물이 가득해서 농사가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행복하고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우리의 양떼로 맡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모두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깨닫고 나니 우리는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에게 맡겨 준 영혼들은 옛날의 우리처럼 곤고하고 병들고 상처받고 주리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교회에 보내십니다. 망가진 사람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시들어가는 영혼들을 그 물로 먹여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잎이 피고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는 나무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양떼들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잠근 동산입니다 아무도 못 들어오고 언제나 주님이 오셔서 그 교회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성령의 놀라운 은혜들을 보실 수 있도록 주님 사랑에만 문을 여는 곳이 교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왕의 정원 속에 있는 나무는 얼마나 행복한가? 거기에 얼마나 소중한 약재들과 향품들이 자라고 있는가? 라고 감탄합니다. 예전에는 쓸모가 없었으나 예수를 만나고 우리의 목양을 받으면서 신앙 안에서 하나님 앞에 정말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게 해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영혼을 살리고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게 하여서 하나님을 향해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들이지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양떼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자녀로 세워가는 것 그들을 돌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소중한 사명입니다.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제가 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 힘들다 여보. 그래서 제가 조금만 참아. 왜 뭔 좋은 일 있어? 조금만 참아. 왜? 기쁜 소식이 있어. 뭔데? 기쁜 소식이 있어. 조금만 참아. 곧 죽을 거야. 우리의 모든 꿈이 세상에만 있다면 우리는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태어나서 목회하시면서 사람대접 좀 받아보셨습니까? 우리는 항상 마음을 열고 심호흡을 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젊은 시절에 목회하면서 힘들 때 우리부부가 함께 잘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조금만 더 참자.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달려가자. 곧 끝날 겁니다. 제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그 책을 쓰고 한 10년 동안 전국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불려 다닌 것 같습니다. 그때는 조금만 더 참자. 여기까지만 강의를 했습니다. 지금은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훨씬 더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나이가 지나면서 예전의 견해를 바꾼 것이 아니라 좀 더 원숙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모님들도 즐거움을 찾으시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즐거움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예수에게 있습니다. 내일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기쁨과 은혜를 유지하며 살 것인가를 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도 이것 없이는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그것을 강조하면서 그 후로 20년의 세월을 목회를 하면서 살아보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위대하고 강인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취미도 없었습니다. 진짜 취미가 없었던 게 아니라 일부러 마음속에서 다 끊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운동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오직 목회를 해야 하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살았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취미를 못 가질 것 같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요즘 저는 젊은 후배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러지 말고 너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해라. 컴퓨터게임이나 이런 것은 권할 게 못 되고 운동을 하던지 등산을 하던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던지 취미에 잠깐 몰입하면서 마음의 짐들을 틀어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라. 사모님들도 잠시 집중되고 긴장됐던 마음을 풀고 육체도 이완시키고 마음도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모님들이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도 예전에는 아주 제가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꽤 괜찮습니다. 목사님들 한 네댓 명이 교회 개척하기 전부터 모이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25년이 넘었습니다. 백금산목사님, 화종부목사님, 박순우목사님 등 여태까지 모입니다. 처음에는 나오지도 않았던 사모님들이 지금은 우리보다 더 열심입니다. 매번 나와서 남편들은 이 쪽에서 모이고 사모님들은 여기서 모이는데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 흉도 보고 한 번 털어내고 나면 마음이 좀 시원 해 지는 모양입니다. 매달 모입니다. 덕을 잃지만 않는다면 사모님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서 맛있는 것도 잡수시고 여행이 안 되면 가끔 어디 산보라도 가시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으십시오. 아니면 운동을 하셔도 좋습니다.
(예화) 제가 들은 한 경우는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때렸다고 합니다. 아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뭘 좀 해보고 싶었는데 다 재미가 없고 딱 하나가 재미있더랍니다. 다른 운동은 재미없고 권투가 재미있더랍니다. 여기에 왕 짜가 그려질 정도로 아내분이 권투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남편 정도의 사람과 한 번 붙으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다 보고 알게 된 후로 놀랍게 폭력이 딱 끊겼다고 합니다. 전세가 역전이 되어서 남편이 뭐라고 막 그러면 붕대를 꺼냅니다. 글러브를 끼기 전에 뼈가 상할까봐 붕대를 감는데 다 감을 때 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도망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예 이겠지만 혹시 권투가 재미있으시면 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목사님들을 때려눕힐 일은 없고 교회 속 썩이는 사람들을 펀치를 날릴 수는 없겠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좋다면 한 번 해 보십시오. 수영도 좋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는 운동이라면 해보십시오. 사모님들이 긴장을 풀 수 있는 무엇이든지 한 번 해보십시오. 쉽게 말해 돈 많이 들이지 않고도 재미있는 일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쳐서 목회의 초점을 흐리게 할 정도의 재미에 빠져서는 안 되는 선에서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목회가 딱 삼 년만 하고 끝낼 거라면 한 번 그렇게 해보겠는데 언제 끝날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제가 보니까 칠십 되시려면 아직 멀고 아직도 긴 길을 가야되고 무슨 일을 만날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사람들의 사랑을 구걸하지 마십시오. 교인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나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들 중에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 우리 주님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 만 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언제 이 먼 길을 걷나 했는데 벌써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책을 쓰고 설교하러 다닐 때 ‘김남준이라는 목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랬는데 한창 때는 한 달에 10권의 베스트셀러가 발표되면 5권이 제 책이었습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신학교 교수가 된 때가 엊그제 같은데 3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목회의 마지막인 주석을 써야 되는 시기가 왔습니다. 너무 빠릅니다. 결국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우리와 헤어지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 다음으로 끝까지 오래있을 사람이 남편이고 아내일 것입니다. 어디 가겠습니까? 좋으나 싫으나 데리고 살아야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목회로 부르셨으니 이제는 주님이 저의 것이듯이 제가 주님의 것입니다. 나를 주님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쓰시고 저를 훌륭한 강대 위에 올려놓는 꽃병같이 쓰시지 않고 교회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는 걸레로 쓰셔도 주님께 쓰임을 받으며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목회를 하면서 최후의 승리하는 사람들은 설교 잘 하는 사람, 교회를 크게 한 사람, 열광하는 많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목회자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고단하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목회의 무거운 짐을 벗을 때 가 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찬양)
금 면류관 쓰고 나 찬송할 말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사랑하는 성도들의 전송을 받으며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무거운 모든 짐을 벗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던 주님의 모습, 믿음으로만 간신히 보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 대하며 만나고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어깨를 겨루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넘어지고 미끄러졌던 우리의 모든 길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놓지 않고 붙드십니다. 우리가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때도 사실은 하나님이 거기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거기서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소명을 주시고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목회를 하게 하셔서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셨던 우리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 받을 위로와 소망으로 마음을 꽉 채우고 믿음의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