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적을 볼 때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녹취자: 조경훈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딸이 어렸다고 하니까 이 여자도 아마 그렇게 나이 먹은 여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린 딸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신에 들렸습니다. 언제부터 귀신에 들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는 귀신이 들렸고 귀신이 들려서 해결책을 부지런히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는데 깨끗한 귀신과 더러운 귀신이 있다기보다는 아마 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딸을 둔 어미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어쩌면 하나밖에 없었을 어린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고 그 정도는 점점 심해갔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자기의 딸을 낫게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민간에 요법들을 사용해 보았을 것이고 용하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심령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만약에 유효했다면 오늘 예수님께 나왔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인자한 성품으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심지어 귀신들린 자들을 단번에 내어 쫓아 주셨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예수의 소문을 듣지 않고 교회에 온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전해준 것입니다. 이 여자도 전해오는 풍문을 들으며 예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매우 크고 중대했습니다. 어린 딸의 문제는 언제 해결이 될지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돈으로도 정성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만약에 장애가 있다면 평생 이 아이를 봉사하면 되지.” 아마 엄마는 그렇게 결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과 헌신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귀신에 들려 순간순간 온 몸이 뒤틀려지고 발버둥을 치며 괴성을 지르고 자신을 해하는 이 아이의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어미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까?
오늘 소문을 듣고 이 여자는 곧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이 여자는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예수께 가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불붙었기 때문입니다.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아마도 이때는 예수님이 큰 무리에 둘러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곧바로 예수님께 달려갔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도 아니고 오직 한 가지 소원을 예수 그리스도께 간곡히 아뢰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여자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유대 사회에 살고 있는 헬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헬라인을 매우 멸시했고 이 사람은 더욱이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자였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수리아 지역인 페니키아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부드러운 말로 수로보니게 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그 사회에서 주류에 있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히브리 족속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족속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도 기이했지만 사람들이 이 여자를 하찮게 생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신의 딸을 낮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던 것입니다.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 의 기도제목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딸이 귀신들린 것 이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라면 오직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시고 그래서 딸이 단정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보다도 더 큰 기도제목이 없었습니다. 그 한 가지의 기도제목에 집중했습니다. 예수께 나아와서 자신의 일생일대기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저런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단도직입적으로 단 하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주님께 간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단 하나의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이 어머니는 도저히 귀신들린 딸을 두고 더럽게 귀신들린 딸을 두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 딸이 싫고 미워서가 아니라 딸이 차마 그런 비참한 지경에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딸을 향한 엄마의 극진한 사랑은 딸의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행복의 가장 큰 문제로 여기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묶어놓는 놀라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무엇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절체절명의 기도제목입니까? 여섯 가지도 말고 다섯 가지도 말고 세 가지도 말고 하나만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안 이루어져도 괜찮은 정도의 열렬하고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이런 기도의 제목이 없다면 삶의 초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낙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극락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염려와 근심과 고통도 없고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흘러가는 삶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관측은 사실입니까?
공중목욕탕에 물이 가득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거기서 첨벙거리며 헤엄을 칠 정도로 물이 많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종업원이 물이 내려가는 구멍의 마개를 열고 물을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물은 엄청난 힘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한 구멍으로 빠져내려 갑니다. 어느 정도 물이 내려갔을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그 물은 밑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빠져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어도 만약에 우리가 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기도제목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진정한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여자는 딸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미치고 딸이 온전해 질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다면 이 엄마는 아마 기꺼이 그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게 낫지 온전한 정신으로 딸이 미친 것을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소원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한 간절한 소원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은 생각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은 진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 강요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인 경우에는 이렇게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는 돈도 명예도 물질도 평안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더러운 귀신이 들려 이리저리 비참하게 이리저리 비참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의 어린 딸이 온전해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여자는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 주님이 나타나셔서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여종아! 너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할 때 머리를 걸쩍거리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열렬한 기도는 소리를 지르는 데서 열렬한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극도에 달하여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마음이 간절한 기도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이 올바를 때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을 위해 꼭 필요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는 흉악하게 귀신들리지도 않았고 병들지도 않았고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불행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먼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런 소원을 여러분의 마음에 품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주님 앞에 물러설 수 없는 열심으로 주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겠습니까? 목말라 하겠습니까? 몸부림을 치겠습니까? 그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글에서 보면 지구 전체를 이렇게 비추다가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면서 마지막에 한 사람을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제목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작년 말고 내년 말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살아있게 하셔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눈물이 있는 기도의 제목,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기도의 제목, 수치를 무릎 쓰고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기도의 제목,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살아 있을 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 온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어떻게 보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있는데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듣자마자 곧 그 분께 달려왔고, 그 분의 발아래 엎드렸고, 비천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면서도 유대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께 매달렸습니다. 뜻밖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거절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뜻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 말씀은 너무 비인격적이고 심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자녀’ 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을 어떻게 예수님이 몸소 이렇게 차별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만약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면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혜택을 받아야 될 것이고 내가 무엇을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그 혜택도 히브리 사람들이 받아야 될 터이니 그것을 자녀에게 두지 않고 개들에게 이방인 사람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당신을 통해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를 만들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자녀와 육적인 이방인들을 육신의 혈통으로 갈라놓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자녀로 부르시고 또 이 여인은 개라고 비유하시는 것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시험하셨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이 여자를 넘어뜨리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여자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더 크게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으로 이 여자의 마음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자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서 그냥 자식이 힘들어하기 때문에 한 번 와 본 것이라면 어느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을 부모가 있겠습니까? 자식이 힘들어 하는데 한 번쯤 풍문을 듣고 가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런 정도의 믿음이었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 여자는 돌이켜 자신의 길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 속에 있는 믿음을 모르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이 여자 속에 이런 믿음이 있을 줄을 아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셔도 개의치 않고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매달릴 줄을 예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모르셨다면 예수님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하기 원하셨을까요? 이 여자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종종 드는 예입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서 지내는 그 선까지 왔으면 언제든지 돌이키면 됩니다. 썸을 탄다고 합니다. 그만 두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쪽이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응답을 하든지 아니면 거절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돼야지 한 쪽이 고백을 하고나면 그 다음 부터는 다시는 그렇게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사이가 아닙니다. 결단을 빨리 내려줘야 됩니다. 싫으면 싫다고 단호하게 얘기를 해서 끝내야 하고 좋으면 좋다고 하고 자신이 없으면 시간을 좀 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속히 답을 줘야지 그렇게 고백을 받고 5년, 6년 동안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나쁜 형제들이 누구냐 하면 자매하고, 그것도 결혼 적령기에 한 6, 7년을 사귀어 놓고 기껏 와서 하는 말이 이렇게 말하는 형제들입니다. “목사님. 저는 자매하고 오래 사귀었지만 양심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혼기에 있는 여성을 6년 씩, 7년 씩 잡아둔 것 자체가 양심에 거스르는 것이지 누구 혼삿길을 막을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백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사랑은 고백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고백을 할 때 이 속에서 그 사랑에 헌신하고자 하는 놀라운 힘이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양치질하고 물 마시는 것 같은 그런 수준으로 있는 고백이어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때때로 자신의 인격 깊은 곳에서 그 사랑을 고백하고 다시 고백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고백하라고 계속해서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보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너희는 이렇게 찬송할지니라. 주 하나님은 높으시고 위대하시며.’ 하나님 당신이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그것을 굳이 그렇게 찬송하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휘돌려서 거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찬양이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곡조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곤고하고 마음이 매마를 때 조용히 부르고 듣는 찬송은 우리의 마음에 다신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 이미 알았던 것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의 엔진을 확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경운기 같은 것을 농가에 몇 년 동안 놔두고 안 쓰면 발동도 안 걸립니다. 몇 번을 애를 쓰면 털털털털 거리는 소리가 계속 납니다. 그러다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주 애를 써서 발동이 부르르릉 하고 걸립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계속 발동이 걸린 채로 그것을 가지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오면 그 다음날은 스위치만 넣게 되면 그대로 부르릉 하고 발동이 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고백을 통해서 그런 식으로 발동을 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절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오느라. 올라오느라. 애야.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번 더 고백을 해 봐라. 더 용감하게 분명하게 뚜렷하게 확실하게 크게 고백해 봐라.” 그리고 드러누웠다 일어나려고 하는 여자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셨지만 자신이 받는 거절감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자기를 향한 무시하시는 발언 같은 데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귀신들린 자신의 딸이 낮기를 바랐고 거기에서 자신은 믿음의 기적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기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적이 무엇입니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일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원인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2층에서 누가 바가지로 물을 퍼 부었기 때문에 아래에서 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물리학이나 과학의 관점에서 보는 원인과 결과라면 찾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왜 결과가 없겠습니까?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응답을 받고 완쾌하는 일들은 화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의사들도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질병에서 그를 낮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을 가지고 간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그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고 꿈꾸는 것 같았던 일이기 때문에 그것 기적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멘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신앙은 바로 그런 기적을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때로는 이런 어려움 속에 두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벼리십니다. 벼린다는 말을 아십니까? 조선시대에 칼을 만들 때 쇠를 가지고 만듭니다. 당연히 무쇠가 아니고 합금한 것을 만드는데 이렇게 달궈서 두드려서 한 번 접고 불에 달궈서 또 한 번 접고 접고를 1,200번을 해야지 한 자루의 칼이 탄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칼은 바위로 내려쳐도 이빨이 깨지지를 않고 바위가 부서지는 단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벼리셔서 놀라운 날이 서게끔 만드시기 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주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께 나아와 매달릴 것이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께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간구할 때 그 일이 한 번에 응답되고 이루어 진 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서 딸아이가 귀신들렸사오니 낮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주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던 이 여자처럼 문제를 들고 주님께는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고합니다. 기도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 외에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예수여 도와주시옵소서. 간구합니다.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한 번 더 너의 더 큰 믿음을 보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번에 응답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렇게 간구했는데 거절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기도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이 안에서 더욱 더 분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믿음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 분발하고 타오르기 위해서 영적인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불붙는 장작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눈보라치는 겨울 벌판에 갖다 놓는다면 몇 분이나 불이 계속 불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산소가 공급되고 땔감이 공급되고 습기가 없어야 하듯이 믿음이 그렇게 계속 분발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영적생활에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자신의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고 성령의 감화로 자신 속에서 그것이 감동이 되고 그렇게 마음에 타오르는 은혜의 불길, 믿음의 불길을 여러분들이 뜨거운 경건생활 속에서 간직하려고 할 때 이것들이 솟구쳐 올라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 여자처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뜻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이 한 칼에 자르시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셨으나 이것은 여자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는 예수께서 기대하셨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사옵니까?
이것은 생생하게 당시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주인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많은 음식을 먹고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먹고 남은 음식이 있고 찌꺼기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던져주면 개들이 먹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감히 주인의 식탁에 함께 앉아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자녀들이라고 부르는 유대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면서 예수님께로부터 온갖 영적인 은혜의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생이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일 뿐입니다 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수없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차별 대우를 받아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이런 차별을 받는 것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흉악하게 귀신들린 그 딸이 나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그대로 머물러 있느냐 하는 것이 이 여자의 가장 큰 관심사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사채를 쓰고 너무 돈이 없어서 돈을 해내지 않으면 조폭들에게조차 위협을 받는 상황이고 있던 집도 빼앗겨서 길거리로 나아갈 상황이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어서 남에게 가서 무릎을 꿇다시피 애원을 해서 돈을 빌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돈을 왜 봉투에 넣지 않고 그냥 주냐고 항의를 하겠습니까? 왜 돈을 나한테 건네주는 태도가 거만하고 불손하냐고 투덜대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지만 이 사태를 해결하고 빚을 갚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른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아직 배부른 것입니다. 아직 살만 하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런 것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뭐라고 여기든지 유대인이 자기를 뭐라고 생각하든지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멸시하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 분이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지금 내가 그 분 앞에 있으니 내가 그 분께 매달리면 그 분이 마음만 먹으면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개에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개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개들도 인자한 주인의 자녀들에게서 혜택을 받으며 그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나를 개같이 여기셔서라도 그 부스러기를 나에게 좀 주십시오. 그 부스러기가 바로 당신이 말씀 한 마디로 나의 딸을 낮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이 여자의 솟구치는 믿음을 한 번 보십시오. 당연히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고 우리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응답해주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항상 만족시켜주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한 기도이고 참된 기도이면 언제나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 들이냐 못 받아 들이냐의 문제이지 응답이 없는 기도는 없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고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진심을 토했다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여러 방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욱 간절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응답 받은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유대인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방 여인에게서 말하자면 극단적인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당신 말고는 나를 구할 분이 없고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나이다.” 이런 모든 아름다운 고백이 이 안에 다 담긴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예수 한 분을 의존하고 있는 이 여자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는 성경의 기록에 올랐습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여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선택된 육신적 이스라엘 사람들을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의 여인으로서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무슨 뜻일까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을 하였으니. 무슨 뜻입니까? “이런 고백을 통해 네 속에 참된 믿음을 보였으니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바로 그 시간에 거리는 있지만 귀신은 나갔고 오랫동안 귀신에 매였던 이 여자의 아이는 단정하게 침상에 누웠고 귀신은 나가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것은 고백입니다. 마음에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원을 보여준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화) 저도 아주 옛날에 설교 속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기도에 나갔더니 웬 부인이 새벽기도 올 때에 남자 구두를 늘 가지고 와서 옆에 놓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왜 새벽기도 올 때마다 구두를 들고 다니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이게 남편 구두입니다. 구두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남편은 아직 교회 오지 않았지만 구두는 교회 왔나이다. 사람도 보내 주시옵소서.’ 귀엽지 않습니까?
귀여우면서도 가슴이 절절히 와 닿지 않습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불신 남편 구두 두 짝을 들고 예배당을 걸어오는 그 여자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하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간절하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나의 남편을 예수 믿게끔 만들어주시지 않고는 내가 행복할 수 없나이다.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그래서 함께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며 이 구두의 주인인 남편과 함께 은혜를 받는 날이 온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하겠나이다.’ 그 신앙을 그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고백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듣는 우리가 감동이 되는데 그것을 보았던 목사님은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예수님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마음이었고 예상하신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왜 그렇게 기쁘셨을까요? 이 여자가 인생의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신을 전폭적으로 믿으면서 주님 앞에 나아왔다면 이 여자가 당신을 떠나서도 그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는 이 고백을 하고 주님께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간절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에 실망할 것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그런 일들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난관 속에도 그 신앙을 고백하십시오. 그 신앙을 토해놓으십시오.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으로, 표현으로, 모든 것으로 그 신앙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서 기도할 때의 기도는 더욱더 불타오르는 마음에서 드려지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마음을 토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으며 이 여자의 마음도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 여자는 꿈에도 그리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이 여자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었기 때문에 예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랬으니 예수님의 이 선언을 이 여자는 온전히 믿었을 것입니다. 돌아가 보니 과연 날뛰던 아이는 침상에 단정히 누워있고 귀신은 나갔고 온전한 여자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를 끌어 앉고 이 엄마가 얼마나 기뻐하였을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서 귀신이 들려서 이리 저리 날뛰고 흉악하게 귀신이 들린 상태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어린 딸이 단정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었을 때 이 여자의 기쁨은 얼마나 차고 넘쳤을까요?
바로 믿음의 결국이 이런 것입니다. 이 집안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있을 수 없었던 일, 아무리 시도해도 되지 않아서 운명처럼 포기하였을 그 일이 기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 분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의 역경을 극복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여도 탁월한 믿음을 가지면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렇게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주님께 집중된 가운데 간절히 그 분께 나오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께 의지하고 그 분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기꺼이 던지고 그 하나의 기도의 제목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놀라운 믿음의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그 기적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며 예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는 이 세상보다 굳게 믿으며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해 이렇게 간절한 기도제목을 찾고 믿음의 기적을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