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9-10)
녹취자: 백지영
I. 들어가는 말
선배 동료 후배 목사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강의하는 내용은 강의안에 모두 수록되어 있지만 성경구절을 하나 보고 그리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제1장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8절부터 읽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하였습니다.
II. 목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오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목회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늘 경험하고 있는 현장에 있기 때문에 밤을 새워 해도 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라는 그림 속에는 건물을 짓는 것부터 전도하고 심방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그리고 심지어 은행과 거래하고 그리고 병자들을 돌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든 일게까지 목회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아무 것도 목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목회의 본질을 설교에서 찾지만 사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설교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어쩌면 순교를 당할지 모르는 순간에 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편지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보면 그가 목회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전도란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면 목회는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이미 사랑한 사람들을 점점 더 설득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성공은 얼마나 커다란 교회를 이루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 깊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풍성하게 하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페리쉬에(περισσεύῃ)라는 단어인데 우물처럼 가장자리가 쳐있는데 물이 계속 솟아나서 그 가장자리에 흘러넘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조금씩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서 그 흘러넘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한 사람은 자신도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성도들도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해 준 사람이 목회를 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았다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목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시기와 다툼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 목회는 결코 성공한 목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정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사랑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의 지혜와 사랑 속에서 창조하셨습니다. 태초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은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계셨습니다. 서로를 알고 사랑하시는 교통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자가 없고 사랑받는 자가 없다면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님이 사랑하시고 사랑을 받으시고 이러시면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떠서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드신 것입니다. 아담과 그 이후 이어지는 창조를 보십시오. 놀랍게 하나님은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시고 아무도 흙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한사람만 흙으로 만들어 당신과 다른 존재임을 보이시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시고 세 번째 사람은 두 사람의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하의 모든 인류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세 분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한 하나님인 것처럼, 세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하나님인 것처럼, 모든 인류를 한 사람 안에 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을 지으셨을 때 둘을 서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게 하심으로 혼인이 성립하게 하셨고, 이 놀라운 고백은 결혼할 남녀에게만 해당할 고백이 아니라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똑같이 고백해야할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가인을 보며 서로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랬을 것이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대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를 그렇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인간은 미쳐 날뛰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할 하나님대신 자기를 사랑하고 육욕을 사랑해서 자신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인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온 인류를 한 몸으로 창조하셨으나, 하나님과 연결하여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셨으나, 그 사랑을 끊어버리고 모두 찢어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시고는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한 사람 한 사람 거듭나는 사람을 당신에게 접붙여 예수의 한 몸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이 점점 더 발전하고 전도하고 많은 사람을 충족한 수에 끌어들인 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들은 지옥에 던져지고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한 몸의 사회는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여기는 사랑의 사회이고, 바로 그 사회가 종말에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선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미움과 분쟁과 고통이 사라진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행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자신도 저런 행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만들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는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고유한 사랑이고, 죄인이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을 라틴교부들은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과는 구별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지순한 사랑을 까리따스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점에 있어서 추상과 같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사망에 있는 자”라고 분명하게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하나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라따스의 사랑을 모든 성도들 속에서 점점 더 풍성해서 마음에 흘러넘치도록 만들어주는 일이 바로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많이 배우고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그 큰 교회를 실패한 베드로에게 맡기실 때에도 여러 가지를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신 후 예루살렘 교회를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그 마음의 고통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웃으셨다는 말씀은 없지만 눈물 흘리고 통곡하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나오는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을 보시면서 안타까우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로서 오늘 양심을 걸고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나의 일신의 괴로움이나 혹은 목회적인 고단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있는 한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흘린 마지막 눈물이 언제였습니까? 정말 우리는 우리의 양떼들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목숨도 아낌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리워 그 목에서 피를 흘리고 죽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목회자는 바로 이 본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삶의 모든 상황과 사태들을 만나도 하나님께 구원받은 한 신자가 어떻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보이는 목회자를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III.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그러면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가. 돌보고 있는 모든 교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넘쳐흐르도록 풍성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오늘 본문이 주고 있는데,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는데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두 가지 수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모든 총명입니다.
A. 지식(ἐπίγνωσις)
자, 그러면 이제 그런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인 이 지식은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 이 ‘지식’이라고 번역된 말은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 말은 ‘에피’라고 하는 무엇 무엇에 관하여, 대하여, 위에라는 전치사와 ‘그노시스’, 지식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열 개 안에 들어가는 명사중 하나입니다. 이 ‘그노시스’는 원래 ‘기노스코’라고 하는 동사 ‘알다’에서 왔는데, 이 동사의 히브리어 형태가 ‘야다’이고 이 ‘야다’는 ‘알다’라는 뜻인데 첫 번째로 사용된 곳이 창세기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할 때에 동침했다고 사용된 동사가 바로 ‘야다’이고, 야다가 기노스코가 되고 기노스코가 명사가 되어서 지식이라는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이라는 단어는 그냥 머릿속을 오가는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로 경험된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기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 있고 그 사물밖에 모르는 것은 그것은 그 사물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물이 있고 이 사물이 무엇이지를 알았지만, 이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이 사물을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이 사물을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냥 물질주의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지식이 넘치지만 인간의 삶은 더욱 몰지혜한 삶이 되어서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인간들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말은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사물에는 모든 발아래 구르는 작은 돌멩이로부터 하나님자신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물이라는 단어 안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들어가는데, 참된 지식은 그것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해석해줄 때 그때 그 해석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 년, 이년, 삼년, 사년, 오년, 십년이나 이십년을 지나갔는데도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가 전혀 새롭게 느껴지고 그리고 어떤 말씀이 펼쳐질지를 예측할 수 없는 지식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식의 중심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있고, 이 성경이 파문처럼 펼쳐지면서 이외의 모든 지식들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심에 성경이 있고, 가장 가까이에 신학이 있고, 그 주위에 일반학문이 있고, 그 주위에 과학의 세계가 있고 예술의 세계가 있고 이렇게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들이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지 올바로 해석했다면 그 모든 학문의 세계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웅장한 교향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끊임없이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학문을 공부하면서 종종 자신도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생각에 감격해서 스스로 그 지식 때문에 자기 자신이 감동을 받는 일들이 그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책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함으로 에피그노시스의 사람이 되어갈 때 그때에 여러분의 설교와 모든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은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B. 총명(αἴσθησις)
두 번째는 “모든 총명”입니다. 여기서 ‘모든’이라고 붙인 이유는, 칼빈이 해석한 바와 같이 깊이라기보다는 범위입니다. 여기에 총명이라고 하는 단어는 희랍어로 ‘아이스데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아이스다노마이’,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스데시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식이 이렇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적해서 아는 것이라면 ‘아이스데시스’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뛰어 넘어서 그 배후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판단력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신론자였다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로는, 이론으로는 모두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없어도 어떤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빛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그것을 이론으로 믿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아이스데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이성이라고 본다면, 이 총명이라는 것은 신앙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칠 때 사람들에게 성경에 관한 지식으로 잘 설명하고 그리고 성령이 역사해서 하나님에 속한 신비한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을 향해 냉담하던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뜨겁게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왜 오늘날 목회해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 잊어버리시지 않도록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자, 갈멜산 위에 불이 떨어졌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허공에 불타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밑에는 이미 쌓아두었던 장작이 있었습니다. 총명과 지식이라는 두 개의 장작 위에서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는 불길들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식과 총명이 공급되어야 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이 하실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목회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식으로 가르치고 그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총명을 더하도록 이렇게 우리가 힘쓰는 것이 사랑의 목회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리에 대한 관심, 믿음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됩니다. 사랑했던 교회는 미워하게 되고, 하나가 되었던 교회는 찢어지게 되고, 그리고 서로를 섬기며 겸손했던 교회는 서로를 지배하고 교만하려고 하는 교회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정리하면, 목회는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는 지식의 목회가 필요하고 총명의 목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IV. 목회의 목표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렇게 그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해서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10절은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둘째로 진실하며, 셋째로 허물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목회를 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인을 교회 안에 모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 점에 있어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자신들의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고 싶으시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 목사님을 떠받드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만드시고 싶으십니까? 성경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부득이하게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야 할 수도 있고 목회자는 죽을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자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혹은 목회자를 위해 충성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충만한 지식과 총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사람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A. 분별함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별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분별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라는 단어인데, 그냥 분별하는 게 아니라 의심할 수 없이 실험을 해 본 결과 분별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나무가 아니면서도 나무와 똑같은 가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아서 우리는 나무가 나무가 아닌지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칼로 긁어보면 나무인지 나무모양의 필름을 입혔는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서 ‘도키마조’, ‘분별하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지극히 선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는데, 오브라이언이라는 학자는 이것을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서 어떤 문제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가 있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 두 사안을 혼돈한 데서 인생의 오류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별력은 하나님 앞에 결정적이지 않은 것과 결정적인 것, 자유롭게 해도 되는 것과 꼭 지켜야 되는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이것을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지금 두 번째 것을 따른 것입니다.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좋지 않은 것과 안 좋아 보이지만 결국엔 아주 좋은 그것을 분별해 내서 인간의 생각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인생의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운동을 하고 매일매일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하는 일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그리고 편한 데로 사는 것보다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편한 데로 자기 마음대로 건강을 상하면서 사는 그 일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육욕에 빠져서 당장 좋은 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궁극적으로 좋은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함을 갖게 하는 것이 그게 목회의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 교회에 남아 충성을 하든지, 나를 존경하든지 하찮게 여기든지, 이교회를 떠나 또 다른 교회를 갔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교회 안에 세계 안에 있으니 어디서든지 그렇게 슬기롭게 살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우리의 목회는 훌륭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교인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슬기로운 사람들로 말씀 안에서 길러내는 것이 우리의 목회의 중요한 목표라는 것입니다.
B. 진실함
두 번째는 “진실하여” 라고 했습니다.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라고 하는 그리스어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크리노’, ‘판단하다’라는 동사와 ‘에일리’ 두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에일리크리네스가 무슨 뜻이냐에 대해서, 이 에일리에 대해서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에일리가 에일레스, 곧 ‘태양빛’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문서가 있었고 그림이 있었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는데 좋고 비싼 것은 항상 위조품이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그 위조품과 진품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 물건을 들어서 이렇게 태양빛에 비추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빛으로 판단하다’ 그런 뜻입니다. 돈 같은 것은 칼라 복사기에다가 복사를 하면 어두운 데서 보면 똑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가짜 돈은 들어서 빛에 비추어보면 홀로그램이 없습니다. 복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겉으로 그럴싸해 보여도 그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보았을 때 과연 그러한 사람인가를 판단하고 난 것, 그것이 “진실하여”입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다른 의견을 내는데, 이 에일리크리세스에서 ‘에일리’라는 접두사가 ‘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 빵을 할 때에 절구로 찧어서 그것을 고운 체에다 내려서 고운 가루만 쓰고 나머지는 버리거나 다시 빻아서 아주 고운 가루가 되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 체입니다. 그러니까 체 위에 얹힌 어떤 것은 빠져나오고 어떤 것은 걸려있는데, 똑같아 보이지만 체에 놓고 걸러보면 합격된 것은 빠져나오고 불합격된 것은 거기에 남아 있듯이 그렇게 이 진실하다는 단어는 무엇인가 검증을 거친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 ‘진실’이라고 하는 단어는 초대교부들부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였습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베루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베루스는 ‘베리따스’라는 단어와 관련 있습니다. 베리따스는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다는 것은, 솔직하고 투명한 것이 진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진리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너 왜 나를 이렇게 자꾸 나를 괴롭혀?” 이렇게 말할 때 상대방의 그 악한 사람이 자기의 속셈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나 너를 협박해서 돈을 좀 받고 싶어” 이것은 솔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솔직하기는 했는데 거기에 진리의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어제 당신 교회에서 이 물건을 훔쳐갔습니다. 이것을 팔려고 생각하니 이것을 잃어버려서 설교하는데 불편할 당신을 생각하니 내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은 솔직했을 뿐만 아니가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진리의 기준이 있는 솔직함이었습니다. 이 기준이 없이 솔직할 때 그것은 뻔뻔스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결심문에서 이런 특이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옳다고 해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다수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모두 진실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칼빈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두 이처럼 진리에 뚜렷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진리와 함께 죽을지언정 그 진리를 버리고 변절해서 살고 싶어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도들이 맹목적으로 자기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배타적으로 그 교회를 사랑하거나 혹은 목회자를 한없이 높이거나 하는 그것을 목회자는 즐거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진리에 어긋나면 충심으로 네가 진리에 어긋났다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약에 예수님이 좌판에 성공, 번영, 명예, 부, 물질, 장수, 모든 것과 함께 진실을 함께 놓으셨을 때 아마 가장 마지막에 팔릴 상품이 진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 진실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고단한 일이고 때로는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목회의 목표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붙게 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진실한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C. 허물없음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하였습니다. 이 ‘허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저는 동방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의 표준적인 해석을 지지합니다. 황금의 입이라고 불렸던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넘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허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첫 번째로는 신학적인 허물이고, 즉 신학에 있어서 어떤 오류에 빠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윤리적인 허물입니다. 사람이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아주 작은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고 윤리적인 어떠한 흠도 없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삶을 살도록 애를 쓰고 그런 삶이 가능할 것처럼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목회는 살아있는 목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가실 때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기초로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드린 책입니다. 더 읽으시면서 이 강의안을 보시면서 더 깊은 은혜의 세계를 누렸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