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6_웨민 목회학 박사과정 특강2
에드워즈와 사랑의 목회
녹취자 : 오희열, 이경순
오늘은 에드워즈와 사랑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Edwards of love입니다. 이것은 요새 제 마음에서 따끈따끈하게 생산되고 있는 것이라 훨씬 편하게 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제 약속드리기를, 오늘 질문한 기회를 드리고 강의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강의한 것이나 혹은 집에 가서 여러분이 읽으시면서 질문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함께 나누고 강의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Q.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내용은 아니나, 잠깐 언급하신 토론토 블레싱 등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A. 토론토 블레싱. 이제 블레싱은 다 꺼지고 신사도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사역했던 교회의 한 전도사도 그것 때문에 제가 강의에 가기도 했는데 지금 현재도 그 영향을 조금씩 받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는 모르다가 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때 그런 현상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까?
A. 이안 머레이가 쓴 책 중에서 『Revival and Revivalism』이 있습니다. 저는 원서로 읽었지만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것으로 압니다. “부흥과 부흥주의”라는 책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주제가 Counterfeit Revival, 가짜 부흥입니다.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18세기 말에 컨터키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제가 한 때 너무 좋아하고 심취했던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입니다. 그 사람의 설교를 모으는 일에 공을 들였고 그분의 전기는 거의 제가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한때 저의 영웅이었습니다. 설교도 아주 건전했습니다. 이분의 멘토가 매튜 헨리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마음에 부흥의 불을 지른 사람이 조지 휫필드라고 보기도 합니다. 휫필드가 여기에 와서 집회를 하면서 에드워즈 목사님이 목회하던 노샘프턴에도 왔습니다. 그때 조지 휫필드 같은 사람이 보기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공부의 면에 있어서는 훨씬 뛰어났지만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popularity나 power 에 있어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 것입니다. 휫필드의 기록을 보면 “저 착한 에드워즈 목사는 내가 설교하는 동안에 어린아이처럼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신학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당시 직업적인 부흥사들이 많던 시대에 조지 휫필드가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람의 멘토인 매튜 헨리의 책, 적은 분량이 아닌 매튜 헨리의 주석을 일생동안 네 번을 읽습니다. 마지막 한 번은 무릎을 꿇고 읽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일설에 의하면 휫필드가 설교 준비를 잘 못했을 때는 그 주석을 찢어서 가지고 올라간 적도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휫필드는 매튜 헨리의 빅팬이었습니다. 덕분에 그의 설교는 지금 읽어도 신학적인 가치가 있는 설교입니다. 원래 그는 술집 보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열다섯 살에 회심하여 설교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묘사의 달인이었습니다. 설교 중에 죄인의 불우한 처지를 난파당한 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승객들에 비유하니까, 당시 영국같은 곳에서는 집회 장소의 앞쪽에는 좋은 의자를 놓고 귀족들이 앉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돈도 좀 더 많이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휫필드가 생생한 비유로 설교를 하니까 설교를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구명튜브를 던져라!”하고 외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영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의 기폭제에 불을 붙인 사람이 사실은 휫필드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휫필드가 왔을 때 서포트하던 사람이 UPenn,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설립자이기도 하고 피뢰침을 만든 벤자민 플랭클린입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신실한 신앙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갖습니다. 그 당시의 지성인이고 잘난 사람들은 대개 인도주의적인 사상의 나라를 꿈꿨습니다. 인쇄업을 하고 피뢰침을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번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에드워즈가 와서 설교를 하고, 당시 영국이 가난했으니까 여기에 와서 돈을 많이 쓴 것입니다.
피곤하니까 재밌는 얘기를 더 하자면, “나는 결심했다. 이번에는 휫필드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더라도 헌금하지 않을 것이다”했는데, “그러나 설교를 하는 도중, 조금은 하기로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은화만 헌금하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나는 돈주머니를 매만졌다. 설교가 끝났을 때는 주머니 채 갖다 놓고 왔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는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죽는 장면을 보면, 집회를 마치고 2층 숙소로 등불을 들고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너무 존경하고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그가 2층으로 올라가는 발코니 아래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등불을 들고 올라가다가 모인 사람들을 보고 너무 가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등불을 들고 그 계단에서 다시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영혼만 사랑하던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아침에 가보니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추도식 때 사람들이 몇 km 씩 줄을 섰다고 합니다. 휫필드에게서 은혜 받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갑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주일 예배를 한번 드리기 위해서 또 대서양을 건널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휫필드의 빅팬이었다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극단적인 씨앗들을 뿌립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부흥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은 후에 목사가 회심하지 못한 것 같으면 쫓아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D.L 무디 같은 길거리 설교의 효시가 휫필드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거성의 소유자였는지, 영국의 화남 마운틴 광산에서 설교할 때 그 설교를 얼마나 멀리까지 들을 수 있는지 벤자민 플랭클린이 측정했습니다. 1마일 바깥에서 육성으로 설교가 들렸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씨앗들을 남기는데 그 사람은 순수했기 때문에 그것이 통제가 가능했지만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좋지 않은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켄터키의 리바이벌 운동”입니다. 켄터키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제도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사람에 대해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누구든지 성령의 불을 받으며 설교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매우 좋지 않은 극단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서 그 이후에 무디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 이후에 미국에서 일어나는 자생적인 오순절 계통의 큰 뿌리가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부정적인 그림자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은 비판을 많이 합니다. 메이첸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했습니다. 특히 그의 회심에 관한 00(녹음불량)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런 문제들이 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기본적인 신학의 얼개를 공부하고 그것이 형성된 가운데 자신의 판단이 따라와야 하는데, 목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신학의 집이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확!’하고 꽂히는 것 하나를 가지고 거기에 몰입하며 들어가게 되면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신학적으로도 물론이고, 마지막에는 도덕적으로도 매우 좋지 않게 끝이 납니다. 그런 운동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한번 물들고 나면 교정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일단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잘 교화하여 신학을 공부하며 다시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개중에는 다시 신학을 공부해서 세워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Q. 에드워즈가 활동했던 시대 상황을 보면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인디언들과의 전쟁, 유신론(theism) 등 그런 중에 에드워즈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투사처럼 강력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성찬식의 문제로 결국은 교회를 사임하기까지의 과정을 겪은 분인데도 사랑을 강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A. 그것은 에드워즈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일대의 에드워즈 연구센터의 소장으로 있는 캐네프 닌케마라는 분을 몇 년 전에 만나서 교제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박사 논문이 있습니다. Family of Johnathan edwards입니다. 그것까지 읽을 시간이 나실지 모르지만, 거기에 보면 에드워즈의 집안의 기질 자체가 무척 고집스러운 집안입니다. 절대 자기를 꺾지 않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강고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찬론에서 그렇게 한 것은 사실 신학적인 확신이었지, 에드워즈에게 사랑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하자면 한없이 길어지는데,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그의 첫 번째 사역지가 그의 장인 솔로몬 스토다드가 있는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갑니다. 당시 그분은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내로라 하는 목회자였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어마어마하지는 않더라도 깊이가 있었고 그 당시 생생하게 살아서 토마스 보스턴 같은 사람들처럼 부흥을 생생하게 경험한 아우라가 있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분의 시대에 다섯 번 정도의 커다란 회심이 일어나고 이런 것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와 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솔로몬 스토다드가 세상을 떠나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뒤를 잇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솔로몬 스토다드의 말년쯤에 교회 안에 비회심자들의 비율이 많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엄격한 청교도의 기준과 성경적인 기준으로 볼 때 회심한 사람과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분류했습니다. 다른 신학자들이 가지지 못한 강점이, 중생과 회심을 엄청나게 강조한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아주 강력하게 칼비니즘적입니다. 사실 칼비니스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적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드워즈의 중생과 회심에 관한 이론이 정통적인 칼빈주의냐, 아니면 언약을 떠나서 너무 인간의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냐 논쟁하기도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표준적인 칼비니즘인데 실천성을 훨씬 더 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같은 목회자들에게 굉장히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런 가운데, “half-way covenant”라는 개념이 들어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반쪽 언약의 상태’인데, 우리의 이론으로 보면 언약 백성의 자손들은 언약 안에 있는데 나이가 들면 자기가 스스로 믿고 거듭나고 부모와 유아세례를 받아들인 것들을 자신이 받아들면서 자기 독립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으로 보면 자기 자신에게 신앙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문제들도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가 타협적인 신학적 중재안을 내 놓는데 그것이 “half-way covenant theory”입니다. 반쯤 언약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찬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그것에 대해서 어느 날 반기를 드는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것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자신을 비롯해서 자신의 자녀들이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에드워즈가 자신들을 교회의 회중에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저항하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사회 전체에 이미 회심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사회 전체가 전반적으로 이신론 쪽으로 많이 기울어지게 되고 이신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에드워즈의 교회와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알미니우스주의에 광범위하게 설득됩니다. 에드워즈의 사임을 결정할 교회의 중재위원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3분의 2, 4분의 3이상이 알미니우스주의에 설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표결이 그렇게 밖에는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가 600명 정도 되는 교회였는데 아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250 명 정도가 투표를 했는데 에드워즈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 2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교인 대부분이 에드워즈 목사의 사임을 원했던 것입니다. 서글프게 끝났습니다.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성경대로 참답게 가야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떠난 후에도 수시로 에드워즈 목사를 청빙해서 말씀을 들으며 좋은 관계를 가집니다. 하지만 에드워즈 목사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하나의 변화였습니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에드워즈가 Stockbridge의 인디언 선교사로 가서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목회에 여유를 가지게 되고 거기서 『Freedom of Will』 같은 유명한 작품들을 씁니다. 아마 그 교회에 계속 있었다면 그런 책을 쓰기 힘들지 않았을까 보기도 합니다.
Q. 제가 이해를 잘 못했을 수도 있는데, 들으면서 계속 풀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로크의 영향을 받은 생득관념(? 23:06)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부정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영적 감각으로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 감각으로, 임플란트 한 것을 (완전히 새롭게), 유출까지 (유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이라는 단어를 (그것은 좀 다른 것입니다. 중생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이라는 것들 까지 얻어지는 것인지, 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인지 헛갈렸습니다.
A. 에드워즈에 대해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로크와의 관계를 너무 과장해서, 에드워즈가 로크를 거의 베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에드워즈는 자기 갈 길을 가되 그 당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과 그 선상에 서 있는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철학과 신학에 관한 방법은 ‘에틀레틱메소드’라고 해서 절충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지식이 없이 신학을 진술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내용을 그대로 전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채택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존 로크와 에드워즈의 관계도 존 로크가 이야기하는 경험주의적인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The Rational Biblical Theology of Jonathan Edwards』를 쓴 John H Gerstner는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경험주의의 렌즈를 가지고 성경을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경험주의가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것을 경험주의를 통해서 보고 그 경험주의의 방법론들을 가지고 성경적 신학을 펼치는 데 도움을 준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센수스 디비니따티스(sensus divinitatis), 신의식, 신성에 대한 의식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는 개혁신학자들이 갖는 주장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단, 에드워즈이 입장에서는 어제 말씀드렸듯이 당시에 회심의 물결이 거의 빠져나가고 이신론의 기우는 사람들을 놓고 고민하면서, 어떻게 우리 속에 지식이 전달되고 이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그 틀을 설명함에 있어서 경험주의의 이론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뷸라 라싸’(tabula rasa) 이론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따뷸라 라싸는 백색서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하얀 칠판 같고 경험에 의해서 쓰여진다고 봤는데 에드워즈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았더라면 인간의 죄 같은 이론들이 모두 달라졌을 것입니다. 표준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다만 에드워즈는 그것을 이전의 개혁자들이 그렇게까지는 설명하지 못하던 것들을 새로운 방법론을 가지고 설명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드워즈의 그런 설명이 최초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존 오웬을 한 20여년 연구해 오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에드워즈의 인간에 대한 세밀한 분석 같은 것들은 존 오웬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품 자체에서 그 면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조 오웬은 거의 대학생 수준이고 에드워즌 중학생 수준에서 전개합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서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2005년도에 쓴 『죄와 은혜의 지배』가 있습니다. 거기 보시면 존 오웬에 대해서, 특히 성화론에 대해서 6권, 7권 전체를 한 번에 꿰뚫은 책입니다. 작은 글씨로 조금 두꺼운데 꼬박 앉아서 읽은 사람이 8일 걸렸다고 합니다. 450페이지 정도 되고 각주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오웬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엄청난 지식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거의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가 에드워즈에 의해서 펼쳐진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에드워즈만 읽은 사람들은 그렇게 에드워즈에게만 뭔가 priority를 두고 싶어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미 중세 때부터 어마어마한 연구들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청교도 시대에 활짝 꽃피게 됩니다. 대충 기억나는 사람만 이야기하면, 토마스 부디, 리차드 십스, 스테판 차노, 존 오웬,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어마어마하게 이루어집니다. 특히 영국의 신학자로 화란에서 활동한 윌리엄 아메스라는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윌리엄 에임즈라고 부릅니다. 『The Marrow of Theology』가 유명한 책입니다. 윌리엄 에임즈의 책에서 『Cases of Consci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양심에 관한 것인데, 그 당시에 양심은 어마어마한 주제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해부한 책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책이 없고 옛날에 쓰던 이상한 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아마 에보에 들어가시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이보와 이코가 있는데 이코는 18세기 것이고 이보는 16세기 것입니다. 거기 보시면 오래된 자료들이 있습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렇게 앞선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책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식으로든 접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저자들의 이름들이 에드워즈의 전집 속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마음에 대한 탐구들은 에드워즈가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독특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로크와 경험주의자들의 이론을 사용하고 그 이후에 (녹음 불량)나 칼스 워드 같은 사람들의 많은 작품들에 나오는 것처럼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과 지적인 교류들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자기의 독특한 방식으로 어떻게 지식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켜서 성향을 형성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는 점에서 에드워즈의 독특성을 인정해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을 지극히 높이 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Never, never say first”를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77페이지입니다.
오늘날 목회가 문제를 가진 것은, 원래 초대교회 전통으로 돌아가면, 심지어 사도시대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라는 것은 세상을 보는 독특한 사상을 갖게 해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유세비우스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당시의 역사 기록들을 보면 당시에 세계를 보는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사상이 있었는데 하나는 유대주의이고 하나는 헬라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사상의 눈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생겨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대교 안에 있는 종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제 3의 족속”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 누구도 그렇게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신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자연세계를 보는 안목을 제공해주는데, 이것은 유대주의도 아니고 헬라주의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심각성을 느꼈을 때는 이미 너무 때가 늦은 때였습니다. 복음이 불꽃처럼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원래 전통적으로 볼 때 기독교의 가치는 예전에는 전혀 그렇게 갖지 않았던 view를 가지고 신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자연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였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터툴리안을 보면 정통교회에서는 빗나가긴 했지만 그 사람의 기록들을 보면 전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과목이 cosmology였습니다. 우주론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이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시기 전에 이 모든 창조세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모든 세계와 사물들의 의미, 이 모든 얼개와 시스템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재료로써 cosmology를 가르친 것입니다. 실제로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은 스스로 말하기를 예루살렘과 아데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고 기독교가 철학적인 용어를 쓰고 사색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지만, 자기 자신이 중요한 신학적 단어들 90여개를 만들고 의미를 정초하게 됩니다. 알다시피 삼위일체, 위격, 등등의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어 산란하던 기독교의 사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돈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천재적인 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가 붙인 별명은 순교하기 위해서 안달난 사람입니다. 몬타누스주의자로서 생애를 마감하기 때문에 사실 가톨릭에서도 시성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오류는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테르툴리아누스는 화산처럼 쏟아놓은 사람이다”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그런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었습니다. 당연히 어거스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을 때 고민하던 것이 ‘인간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세계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거기서 나는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18세기까지는 이런 것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자유주의화 되면서 사라집니다. 예전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의무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쓴 『Magnalia Dei』를 아실 것입니다. 『개혁주의신학서론』이라고 되어 있고 예전에는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그 책이 당시 화란에서 농부들이 밭 매러 갈 때 수레 뒤에 싣고 가던 책이라고 합니다. 오전에 한바탕 밭을 갈고 새참 먹기 위해 그늘에 앉았을 때 읽는 책이었습니다. 화란이 그런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렇게 신학교육을 잘 받은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것 자체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문제가, 기독교를 믿었는데 사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보는 통일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사람들이 목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사상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듯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할 때, ‘본받지 말라’는 말이 ‘수스께마티지오’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Die Casting’입니다.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쇳물을 부으면 그 모양대로 쇳덩어리가 나옵니다. 주조하여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시대의 독특한 구조와 틀을 가지고 있고 태어나면 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거기에 찍히지 마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존 오웬에 의하면 인간은 결국 두 개의 Die Casting밖에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의해서 찍혀 나오든지 그리스도에 의해서 찍히든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항할 수 있는 웅장한 사상을 가르치는 일들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이 슐라이마커 이후에 일어난 커리큘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점은 세계 모든 학교들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신도가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 갑니다. 로마서 9장입니다. 목사님께 물어보니까 그건 교수들이나 아는 내용이고 너무 어려워서 자기 같은 목회자는 대답을 못 한다고 합니다. 신학교에 가서 교수를 만나서 무슨 뜻인지 물어봤더니 “미안합니다. 저는 조직신학 전공이라서 성경을 모릅니다”, “그러면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성경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성경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구약전공이라서 신약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찾아가야합니까?”, “신약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찾아갔더니 누가복음 전공이라서 로마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바울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가까스로 바울신학 전공한 사람을 찾아서 물었더니, “미안합니다. 저는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드디어 로마서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저는 8장 전공이라서 9장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자체를 학문적인 아우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8장을 전공하고 9장에 대해서 아는 척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미친 듯이 파며 공부를 했으니 8장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하게 알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지식을 모두 통합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2012년에 제가 쓴 책인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 있습니다. 설교집이라고 생각하는데 설교집이 아닙니다. 그 책을 붙들고 끝까지 읽은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할 정도로 신학, 역사, 철학, 문학, 미학, 건축학, 도시미학까지 엮어지면서 현대의 탈진리 사상이 어떻게 기독교 신학을 균열시키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규명한 책입니다. 나에 대해서 사람들이 청교도다, 청교도 신학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만약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 사람에게 두 권의 책을 권한다면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을 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는 다니는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현재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상가로서 어떻게 신과 세계와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규정할 것인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별력 자체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호크마’입니다. ‘지혜’, ‘소피아’,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들입니다.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교재 79페이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문단입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올바르게 이웃을 사랑하고 온 세상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에드워즈의 목회적인 비전이었습니다. 사랑은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아서 알게 하고 성경과 학문, 삶으로 사상을 가르치며 돌보게 하는 것, 이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어제 했던 내용입니다.
인류가 창조되었는데 창조된 인류가 결국 타락합니다. 타락한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인데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라를 근본적으로 사랑의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나라,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아주 정확하게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그대로 빼다 놓은 것 같은 논리로 설명합니다.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구속사, 이런 것들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목회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이 목적에 관계된 것이라면, 참된 미덕의 본질은 사랑이 유일한 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모든 인류애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고 이 사랑이 구속사를 통해서 가장 찬란하게 나타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Redemption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라고 보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에센스일 수 있는 이유는 redemptive history 때문입니다. 설명을 더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습니다.
에드워즈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야 하고, 보여준 이 아름다움이 그 사람 속에 감화를 불러일으킬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의 견해를 따라서 에드워즈가 보기에 결국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자기를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미 오웬을 비롯한 개혁신학자들이 다 다룬 것이긴 합니다. 심겨진 사랑과 설득된 사랑입니다. 첫 번째 심겨진 사랑은 하나님이 영혼 자체가 이미 자기 사랑의 경향성으로 굳어진 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중생으로써 하나님이 신적 사랑을 그 영혼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에 대한 이해이고 그 힘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중생과 회심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예전에 없던 사랑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심겨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네르기즘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동력적인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데 그 거듭남의 본질은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인데 그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득된 사랑은 신자가 된 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거기에 심취하면 심취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의 임무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심기도록 돕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보여주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화를 받게 만드는데 두 경우 모두 사랑의 유효적 작용인은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Love라는 것은 무엇인가? 에드워즈가 제 8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Love is the sum of all virtue. “사랑은 모든 덕의 총합이다”인데, 사실 ‘총합’이 아니라 ‘요체’라는 뜻입니다. 요체는 뭐든지 그것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 ‘사랑은 모든 덕의 요체’라고 하면,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에 온전히 감화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두 가지 단어를 채용하여 설명합니다. ‘아가페’, 그리고 ‘까리따스’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적실하게 보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아가페와 까리따스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살고 싶어서 믿는 것입니다. 안 믿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못 살겠으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에로스’적인 동기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에로스가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에 대해서 반응이 생겨납니다. 그 반응으로 생기는 이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지순애’,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생겨납니다. 여기 이 사람에게 사랑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점에서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나’라는 인격 속에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불연속성입니다. 또 하나는, 여기 아가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지만 이 까리따스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이 사랑하게 됩니다. ‘아마레’, ‘사랑하다’입니다. ‘아마레 데움’, 라틴어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과 함께 ‘아마레 데오’, 탈격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마음 안에 함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영원한 당신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사람들 속에 까리따스로 주셔서 그 까리따스를 가지고 하나님이 계셨더라면 이룰 사회를 이루어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런 전통을 에드워즈가 어거스틴에게서 그대로 물려받고 있습니다. 사랑이론은 어거스틴과 거의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어거스틴은 어마어마한 이론으로 사랑에 대해 펼쳤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신학을 ‘사랑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영원의 신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미 사랑에 대한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을 남깁니다. 『Confessions』 그 자체가 눈물겨운 사랑의 고백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의 하나의 ‘연서’입니다.
이런 전통을 물려받은 것은 너무 다행입니다. 이렇게 물려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신학적 회심입니다. 회심이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어, 헬라어로 보면 ‘메타노에오’의 회심이 있고 ‘메타멜로마이’의 회심이 있습니다. ‘메타멜로마이’는 가룟 유다의 후회,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너무 비감한 느끼면서 후회하는 것이 ‘메타멜로마이’입니다. ‘메타노에오’는 다릅니다. ‘노에오’에서 희랍어의 ‘누스’가 옵니다. ‘정신’입니다. 그리고 ‘노에시스’가 옵니다. ‘통찰’ 지성의 한 기능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메타노에오’는 회개의 의미가 아니라, 회개는 회개인데 지성적 변화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을 때 회개의 중요한 특징이 지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생각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변화가 주어졌다는 것을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로 했는데 후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주 감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독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고전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들이 합의하는 내용입니다.
신학공부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definition 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자기가 무슨 뜻으로 이 용어를 쓰는지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 그 신학적인 용어들이 태동하게 된 철학적 연관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계승하고 어떤 것들은 계승하지 않는지 칼 같은 구분을 가지고 있을 때 혼돈되지 않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소방서에서 “지금 구원하러 갑니다”하는 것과, 목사가 “구원 받으셔야겠습니다”할 때 ‘구원’이 똑같은 의미가 될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철학적인 훈련이 꼭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사랑은 모든 미덕의 요체’라고 할 때, ‘까리따스’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을 참 까리따스이게 하는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최고의 덕스러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에 대한 당신의 행위를 완전한 사랑 속에서 행하시기 때문에 최고의 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 attribute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개혁파 정통주자들은 소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 그 지식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사람답게 만들어줍니다. 호세아 4장에 보면,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에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을 주제로 책을 써서 5백 만부 이상 판매한 사람이 제임스 파커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체는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시행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진 분이시고 그 성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전한 사랑이시고 이 사랑을 인간들에게 부어주실 때 그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됩니다. 그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아가페와 까리따스 자체가 charity라는 말의 연원이 됩니다. 까리따스가 라틴어 단어라서 그것을 그렇게 구별해서 사용하지는 않고 아가페로 통일하지만, ‘아가페토스’, ‘사랑하는 자여’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가 아니라 ‘be loved’, ‘사랑받은 자여’입니다. 그것이 아가페토스입니다. 그런 사랑이 모든 미덕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들을 덕스럽게 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왜?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모든 윤리적인 행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 중에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고 묻는 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 인류의 창조부터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첫 번째는 그냥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랑의 근원에 관한 문제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을 보시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이 세계와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창조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원래의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철학적인 이야기인데, 사랑은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일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자식이 있는데 공부를 잘해서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잘 생겨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 와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 뛰어나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좋아서 그의 아들의 존재와 자신의 마음이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엄격한 정의로 본다면, 사랑은 영혼을 가진 인격체끼리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가능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가능합니다. 그러나 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그런 엄격한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definition은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학교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을 너무 사랑해!” 이렇게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는 교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과 내가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이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랑 이론을 연구하고 윤리를 연구하면서 빼놓지 않고 설명하는 부분이 ‘존재일반’입니다. 영어로는 ‘Being in general’ 입니다. ‘일반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용어입니다. ‘존재일반’이 아니라 ‘Object in genera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상일반’입니다. 대상일반을 설명하면 존재일반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여기 컵이 두 개가 있습니다. 각각의 체적과 높이, 길이, 부피를 가지고 있는데 모두 다릅니다. 대상일반이라는 것은 크기, 높이, 넓이, 등을 뜻합니다. 이런 특징을 가지지 않은 사물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를 들어 내 마음에 있는 사랑이나 느낌은 높이, 깊이, 둘레 같은 것이 없겠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모든 사물들은 크든지 작든지 높이와 크기, 넓이, 길이, 체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먼지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대상일반’이라고 합니다. ‘존재일반’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든 존재에 공통되는 그 존재성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고 모든 것들이 그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존재의 기반이 ‘Being in general’입니다. 이것을 바꿔서 말하면, 무신론자들은 ‘Being in general’을 쓸 때 어떤 다양한 사물들의 연원을 추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Being in general’을 쓰지만, 에드워즈는 종종 이것을 대문자로 씁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설명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벗어날 수 없이 그 안에 있어야 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되는 기반, 그것은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반, 그것은 인간과 천사, 마귀 같은 도덕적 피조물뿐만 아니라 비지성적인 피조물, 나무, 돌멩이, 짐승 같은 모든 것들도 그것들이 있게 하는 존재의 기반이 되는 것, 어떤 존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을 ‘Being in general’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것을 읽을 때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과외 선생님이라도 불러서 배우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가르쳐줄만한 전공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혼자서 이 세 권의 책을 읽고 터득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고 그렇게 하고 나니까 에드워즈에 대해서 쓴 많은 글들이 완벽하게 이해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내가 에드워즈에 대한 논문을 읽으면서 너무 어렵다는 것을 읽은 적은 없습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일치라고 이야기했는데, 여기 내가 사랑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총각으로 살다가 이 여성, 우리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물어봅니다. “나는 그렇게 얼굴이 탁월하게 예쁘지도 않고 - 물론 우리 집사람은 얼굴이 예쁩니다 - 공부를 아주 잘하지도 않고 인간성이 좋지도 않고 신앙이 뛰어나지도 않은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합니까? 나의 어떤 것이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습니까?” 할 때,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됩니다. “당신 아버지가 부자라서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것은 이 여성이 아니라 이 여성과 결혼하고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유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그것을 얻기 위해 딛고 가는 사다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일치가 아닙니다. 확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것을 적용한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주실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입니다.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를 위해서 계속 간구하는데, 결국 신에 대한 애정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관련된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신들에 대한 우상숭배, 이방신들과의 접촉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반감을 가지고 거의 대역죄처럼 다루십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이 주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시는데 그 이유는, 당시 중동, ANE, 고대근동에 있는 종교들을 연구해보면 그 신관은 고도의 도덕적이고 모든 만물에 초월해 계시고, 특히 ‘헤세드’로 인간을 다스리신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다신교에서는 신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항상 굶주려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빼앗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 신을 섬기는 이유가 deal입니다. “내가 이것을 줄 테니 제발 심술부리지 말고 잠잠하고, 이걸 주는 대가로 내가 원하는 이것을 달라.” 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이었습니다. 그들의 제물은 뇌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것 중에 하나는 ‘리브패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리브’는 다투는 것, argue입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우리가 언제 주를 버렸나이까? 우리가 언제 주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제사를 드렸어도 너희는 악을 행함으로 나를 버렸다” 이런 식으로 다툼의 패턴, 리브패턴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원히 좁힐 수 없이 평행선으로 갑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않나이다”라는 말은, ‘상한다’는 히브리어로 ‘리슈바르’이고 ‘통회한다’는 ‘다끄에’인데 이것은 형체가 없이 짓이겨지는 것입니다. 닭 한 마리를 놓고 해머로 두들겨서 곤죽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힘이 있게 만드는 것이 ‘자기사랑’입니다. 그렇게 짓이겨지는 과정이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하게 우리의 마음이 바쳐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시인의 그 깨달음은 어마어마하게 시대를 앞서가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벤자민 워필드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심오한 복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간음의 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하나님과의 단절을 느끼면서 엄청난 복음의 진수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마음의 일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끝인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그 위에 다른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을 받고 그 관계를 가지면 Nothing,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더 없습니다.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 마지막으로 정초하게 되는 그곳은 하나님 딱 한 분입니다. 그것과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됩니까? 잠시 쉬었다가 계속 하겠습니다.
(앞부분이 녹음이 안 됨) 있음을 가지고 계신 무한한 있음의 존재가 하나님이고 다른 모든 있는 것들은 그를 덕 입어서 일정한 분량의 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드워즈가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가 일치하는데 인간의 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덜 중요한 것은 덜 가치 있게 여기고 더 높은 존재의 위치에 있는 것은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중 무한히 최고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가치 있게 여겨서 나머지 것들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를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는 예를 들어서 이게 지금 A의 존재의 질서의 A 등급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B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상 이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게 위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비극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나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입니다. evil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악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과 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아름다움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아름다움은 결국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원천이고 나머지 아름다운 것들이 이 원천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최고의 사랑은 파생에게로 가야되나요? 원천으로 가야되나요? 당연히 원천으로 가야됩니다. 그 다음에 모든 덕들의 근본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다른 것을 사랑했을 때) 최초의 피해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이 사랑이론 안에서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미덕이란 존재일반에 대한 박애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쓴 표현 그대로 쓴 것입니다. 베네블런스 인 투 빈 인 제너럴입니다. 그러면 어기에서 나오는 베네블런스(benevolence)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들어가면 전통들이 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분류를 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에로스, 필리아, 에피투니아, 아가페, 이렇게 분류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분류하느냐면 ‘목적애’와 ‘박애애’로 분류합니다. 목적애는 사랑하는 데 그것이 주는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사람하고 계속 관계를 가집니다. 이 사람이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어서 나를 많이 보호해주고 아니면 이분이 장로님이신데 엄청난 부자입니다. 계속 가까이 관계를 맺으면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교회에서도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목사인 나를 보호해줄 굉장히 훌륭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사람을 좋아합니다. 유용애라고 얘기 하는 것입니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사랑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덕의 조건에 될 수가 없습니다. 그담에 나오는 것이 ‘박애애’입니다. 박애애는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이 사랑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 때문에 사랑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자신이 사랑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품이 원인이 되어서 흘러나와서 바깥으로 넘치는 사랑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분이 계속 오면 뭘 달라고 합니다. 내가 계속 뭔가를 도와 줘야 되는 입장입니다. 다른 한 분은 장로님인데 항상 내가 보호해 줘야하고 장로로서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자기 직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인데도 늘 나에게 신세를 지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 두 분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장점이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가엾고 불쌍하고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 속에서 사랑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완벽한 원형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데 우리 각자 가지고 있는 장점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원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비참에 처한 사람과 만났을 때는 자비로 나타나고 그 사랑의 성품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으로 만났을 때는 의로 나타납니다. 또 그 사랑이 비참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긍휼로 나타나고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세계 자체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위대한 속성이 불완전한 인간과 부딪히면서 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사회에 악이 없다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미움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할 리가 없습니다. 무자비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눈물 흘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사회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잘못된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부딪히면서 찬란한 빛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확 터지면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더 갓 글로리 화이트 인디펜더스 오브 멘이라고 하는 그의 글이 있습니다. 논문이기도 하고 설교인데 논문 식 설교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면서 죄가 들어오므로 얼마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는지를 역설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학에 의하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세계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마음이 녹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런 사랑을 아담은 몰랐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안에서 당신이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갓 미스턴 디스 플레이드 인 더 월드라고 하는 그런 제목에서 이런 논설들을 펼칩니다. 그런데 굉장히 웅장합니다. 어느 저자를 만나서 쉽게 볼 수 없는 정도의 그런 웅장한 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럼 박애에 대한 설명을 마쳤습니다. 그럼 존재일반에 대한 박애애라는 것은 하나님은 저기 있고 내가 있는데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사랑하는 그것이 아니라 박애라는 것 자체가 내안에 들어온 사랑의 성품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닮은 행동 하나와 성품으로서의 사랑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바탕에 박애가 없는데 어떤 선한 일을 우연적으로 했고 그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히포크라스라고 부릅니다. 위선은 행동자체가 잘못된 게 아닙니다.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박애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용애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커다란 하나의 힘이 되고 에드워즈에 의하면 지속적인 인클리네이션(inclination) 혹은 디스포지션(disposition)이 되어서 혹은 프로펜스(propense)가 되어서 그것들이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계속 발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화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면 질서 자체가 다 재편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미국 사람인데 25살 먹은 여자입니다. 미국 애 치고는 너무너무 예쁩니다. 26살 먹은 한국 남자를 만났습니다. 한국 남자도 그 정도면 못생긴 얼굴은 아닙니다.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모든 미국생활 포기하고 한국으로 와서 일 년 반째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하고 사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매일매일 일상에 재미있게 일어나는 일들을 꾸밈없이 유튜브에다 올리는데 조회 수가 수십만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기서 그가 한국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미국)에서 대학 나왔고 직장 다니고 여기서(미국에서) 살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조금 좋은 게 아니라 끝까지 간 것입니다. 가장 좋을 때는 그 사랑 없이는 못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사랑이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태까지 자신의 인생의 계획은 백지입니다. 이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에 딱 맞춰서 나머지를 다 다시 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자체는 질서를 재편하는 힘이 있고 사랑의 본질 자체가 질서를 다시 정하는 것입니다. 질서의 영향에 못 치는 사랑은 사실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의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 때문에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질서와는 다른 완전히 다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하면 예전에는 요 하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하나에 대한 사랑이 위로 올라가서 질서를 재편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A라는 대상이 이 위에 올라 갈 정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 위에다 올려놓는 것입니까? 자기가 좋은 것입니다. 자의적입니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자리에 하나님이 마땅히 가지셔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삼위 하나님이 계시고 창조목적이 위에 잇고 그 담에 창조 목적을 따라서 각 사람이 자신의 분량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결국 사랑의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복수성의 사회를 구성하는 그런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타락입니다. 타락은 인간이 각자 있는데 원래 이렇게 창조목적으로 정의가 되어야 되는데 창조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를 이탈해서 각자 자기가 살아가는데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통들과 악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셔서 이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셔서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 질서를 다시 되찾게 하는 것이 구원의 계획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특히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보면 개별적 사물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아름다움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단어를 몇 개 드릴 테니까 마음에 그려보세요. 파란하늘, 초록색풀밭, 예쁜 나무들, 그리고 구름, 시냇물,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그림 들어왔죠, 새가 예뻐요? 안 예뻐요? 여기 새가 들어왔습니다. 일곱 마리가 돌아다닙니다. 예뻐요. 안 예뻐요. 왜 그럴까요?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 예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물 자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과 다른 사물들이 어떤 연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예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있어서 두 요소는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관계철학의 아주 중요한 얼개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예쁘기 위해서는 아름답기 위해서는 완전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이런 게 있습니다. 구닥다리입니다. 그런데 신제품이 나왔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목적으로 쓰고자 하는 이데아가 여기에 있는데 새로운(기존의) 제품보다 더 진보된 제품은 이 이데아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쓰기 편하고 예쁘고 가볍고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등등의 요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도 이렇게 해서 여기에다 넣었을 때 어울리나, 안 어울리나 까지 모두다 포함이 됩니다.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과 그것이 다른 사물과 어떻게 어울리나에 따라서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해보면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본질적으로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육체도 아름다우면 금상첨화입니다. 요세푸스의 엔티키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굉장한 미인으로 되어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정확하지 않겠어요, 물론 멋진 사람이 소외감을 느끼겠죠. 어쨌든 한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한 개인 사람으로 완전하고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그 사람도 아름답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왠지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들 때 그때에 그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풀은 모든 게 다 있는데 잔디도 없고 나무도 앙상하게 말랐고, 강은 있는데 물도 없고 그러면 예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흐르면서 그림이 다 조화가 되면서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는데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에 왜 아름다운지 추적해 들어가면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장소에 가있는 그 당시 나의 감정상태도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황량하게 느껴지던 것이 아주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량미입니다. 아주 굉장히 비참한데 아름다운 것 처량미 혹은 처연미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은 심미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사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개별적 사물이 완전한 것이고 다른 사람 사물과 어울리는 것이고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데 디자인은 하나님 안에 있는 조화와 균형 비례 이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분석할 줄 모르지만 어떤 건물을 볼 때 야 정말 멋있다는 느낌이 들고 또 어떤 때는 뭐 이래, 촌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만나는데 이것을 이 사람의 놀라운 것은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를 도덕신학하고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이란 것이 존재에 대한 존재 그리고 여기에 8번의 542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름다움은 불일치나 조화가 아니라 일치와 어울림 속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성적인 존재 인간, 천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성적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존재 일반과 관계된다면 보편적인 존재의 한 부분이라면 그래서 전체가 윤곽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결론입니다. 지성적인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거대한 전체와의 연합의 일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전체를 창조하신 그 계획과 얼개가 있는데 거기에 자기가 모순되지 않는 존재로 있을 때 그 때에 자신은 가장 빛나게 되고 자신 땜에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원천은 결국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은 이런 삼위일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완전하심으로 다른 위격을 사랑하고 다른 위격에게 사랑을 받으시므로 결국은 스스로 사랑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기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그것을 세 위격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사랑이 되신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아름다움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보여준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럼 아까 수업 끝날 때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알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성향이 심겨지고 그 성향이 계속 증진되어서 아주 더 강력한 성향을 갖게 될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박애애로 흘려보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에드워즈는 하나님 사랑 안에 사람이 포함되어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이 명언을 남기는데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 형제들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들을 순수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명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두 가지 사랑이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이것을 공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과 같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다.” 멋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그렇게 폭이 좁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정된 범위 내에서 쓴 것입니다. 칼빈의 데뷔작품은 세네카의 관용론 해설입니다. 엄청난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사람 안에 사람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계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는데 그 보여주시는 아름다움의 절정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움의 절정이 되느냐 이것은 사실 에드워드의 강점입니다. 기독론을 미학적 기독론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소위 이야기하는 엑셀시스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존재론의 개념에서 미학의 개념에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길지만 간략하게 요약을 해서 여러분에게 던져주면 결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체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분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영어로 말하자면 그분의 왓 메세브 라틴어로 ‘꾸비대’라고 합니다. 인간이 알 수가 없습니다. 겨우 알 수 있는 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유일하게 계시된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두 개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단 두 개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하나님은 누구의 의존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시는 분이다 이게 하나님의 왓 메세브에서 던져지는 성경의 유일한 언급입니다. 그러니까 유한 무한은 파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과도한 관심을 갖지 말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짜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who is this’ 이것을 라틴어로 ‘꾸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은 오늘 만나서 이틀 동안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제 헤어질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김남준 목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여러분 나름대로의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런 것을 갖게 된 것입니까? 결국은 나의 말, 언어, 행동, 태도 모든 것을 보면서 그것들이 밖으로 막 쏟아져 나왔는데 이것을 추적해서 거꾸로 들어가면서 이 사람의 성품이 어떤 성품인가 이 사람의 정신구조가 어떤 구조인가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김남준 목사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세계의 모든 인류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는 결국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도적적인 연결 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라고 할 때는 공중에 별로 가치도 없는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한 마리에 3천 원밖에 안 되는 그런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통해서 창조한 것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적인 사물들이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속성보다는 도덕적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이 훨씬 찬란한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이 찬송하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헤세드를 입은 사람들인데 그게 성도입니다. 헤세드가 영원한 찬송의 제목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속성을 비쳐주시고 그 속성을 어떤 식으로 시행하시는지 의해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알려질 때에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이론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이 구약시대에는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인격 안에서 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한꺼번에 눈부신 빛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라고 하는 이 주제는 이미 아레니우스 그담에 어거스틴 같은 사람에 의해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신학의 핵심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핵심적으로 떠오른 중요한 주제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그 전통을 따라서 그대로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아름다움의 절정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절정이기도하고 인식론적인 절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그냥 선지자의 선포를 통해서 또 일어나는 이스라엘 국가의 여러 일들을 통해서 추측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을 보고 눈물 흘리시는 광경을 통해서 듣던 사랑을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들리던 사랑을 그 사랑이 성육화된 그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보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현실이 절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에게 물어보면, “인간의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다고요?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봐라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을 보게 될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에 그 때 행복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믿을 때 당신을 알 때 우리에게 그런 박애적 사랑을 갖게 만들어주냐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는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따르면 그 아름다움에 한번 빠지고 나면 그 맛이 자기의 영혼에 배어서 다른 것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그 아름다움에 기갈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가 막힌 스테이크를 먹었다면 그 다음에 먹는 모든 스테이크가 다 맛대가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참된 행복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아름다움의 최고의 절정이신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름다움의 최고봉이고 그 아름다움이 옅어지면서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은 교회와 인간과 제도 와 그담에 심지어 자연 사물에까지 흘리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이론입니다.
아름다움은 크게 원형적 아름다움과 모형적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원형적인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이고 모형적 아름다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도덕적 아름다움과 자연적 아름다움입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일차적 아름다움이고 영적 아름다움이라고도 부르고 자연적 아름다움은 이차적 아름다움이고 물질적 아름다움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에드워즈는 묵상을 많이 합니다. 자연묵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그렇게 감격하는 이유는 그 모든 사물들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연의 모든 만물을 주신 미학적인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산에 갑니다. 그런데 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 디자인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산에 가면서 “야, 이 식물들이 여기서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인데 야! 예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질학자가 지나갑니다. 산을 가면서 단층을 보는 것입니다. “야!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는 단층인데!” 하면서 거기에 매료가 되는 것입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색깔과 빛이 어우러지면서 계곡과 능선의 자태를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고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질에 대해서 감탄하게 만들고 식물의 종류에 대해서 감탄하게 만들고 디자인에 대해서 감탄하게 만들어 봐야 그것은 산 자체를 좋아하는 것에서 멈춥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서 이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하는 것은 원인이 이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위의 존재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실제로 자신의 고백론 속에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나무의 크기와 높이를 잘 안다고 할지라도 그를 내신 이를 모르는 것 보다는 그 나무의 크기와 부피와 넓이는 잴 수 없을 지라도 그것을 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겠나이까?”라고 설명합니다. 에드워즈는 정확하게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연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전시장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전시장에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 아름다움과 자연적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 가지 조건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사람이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조건을 보면 첫째로 지식의 빛, 알아야지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데 마음이 확 끌린다고 하는 것은 일시적인 충동입니다. 두 번째, 미각 능력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 안에 판단의 기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거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관적인 사랑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만나면서 어떻게 주관적으로 사랑하는 그것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주관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가에 대해서 세 가지가 답입니다.
Q. 지금 보여주시는 것 그 세 가지가 동일한 말 아닙니까?
A. 세 가지가 거의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빛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다 수거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시다가 목사님에게 하나 쑥 주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빛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면 그 자체로서 지식의 효과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붙들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것은 항상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시력이 나빠서 글씨가 안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분은 다 봅니다. 점까지 다 보입니다. 이것은 여기 있지만 이 사람에게는 보이고 나에게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빛이 만약에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미감능력은 내가 이것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것을 전달해주는 빛입니다. 여기에 빛이 비쳐서 빛에 반사되어서 내게 들어오니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처럼 하나로 붙어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Q. 제가 알기로는 미감 능력 그 자체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주셨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A) 그렇습니다. 그런데 미감능력은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그 하나님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제대로 인식했다면 이방종교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이는 이 지식의 빛은 개별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지만 이것은 인간의 정신구조 속에 주어진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예를 들면 내가 이것을 봤다고 하면 이것을 볼 수 있는 미감능력이 내게 생겼다가 이게 사라지고 나면 없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물이 여기에 등장하기만 하면 나는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계속해서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미감능력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이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주신 것입니다. 역시 이것도 수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회심보다 먼저 나오는 구원의 처세에서의 논리가 살아 있지 않으면 하나님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영혼을 살려내시고 논리적으로 그 담에 말씀을 들려주시면 살아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거기에 반응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의 인격에 느껴지는 것이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비판을 많이 받지만 그렇지만 개혁주의에서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지식과 미감능력과 성령에 의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이것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몰랐을 때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해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사랑의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를 까리따스 사랑으로 바꾸면서 결국은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두 대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거기 계셨더라면 대하실 것처럼 그렇게 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지식부터 세 가지가 나란히 나오는데 사변적 지식과 실천적인 지식으로 나뉩니다. 사변적 지식은 사물의 인과관계를 연결 짓는 지식입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기 때문에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에 비해서 실천적인 지식은 영적 지식이고 초월적으로 사물을 아는 지식이고 경험적 결과를 자기에게 적용한 지식이고 자기화 한 지식이고 성령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서 신앙을 갖고 하나님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이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으로 확고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겸비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학을 존 거스트너라고 하는 에드워즈 위대한 연구가가 에드워즈의 신학 전체가 rational, 이성적이고 성경적인 신학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같이 겸비되어야 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감능력은 결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두 개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 두 개의 원리가 굿 앤 뷰티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창조하신 것도 선하고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흔적이 어디에나 묻어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타락했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선한 것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에드워즈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자연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뭔지 모릅니다. 중생과 함께 아까 말씀하신 미감능력이 부여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감능력이 부여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에드워즈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미학적 표현입니다. 홀리니스 이즈 뷰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에 영적이며 신적이신 능력을 통해서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 주어질 때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동이론은 어저께 제가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여기 이렇게 호수에서 떨어지면서 파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는 애호의 정동이고 하나는 오염의 정동입니다. 애호의 정동은 favor, 오염의 정동은 hatred라고 합니다. 어떤 것들의 사물의 추함을 계속 말하면 결국 그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햄버거를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어느 날 자료를 가져와서 햄버거가 얼마나 망할 놈의 식품인지를 상세히 증명을 하면서 설득을 합니다. 그러면 햄버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먹어야 하나? 못 먹겠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직무는 사람들이 잘 모르던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움을 아주 기가 막히게 예쁘게 사실에 입각하게 설명을 해서 애호의 정동이 계속 생겨나게끔 만들고 자기라는 중립적인 존재 말고 죄에 치우친 자기가 얼마나 역겨운 존재인지 보여주고 자기가 빠져있는 이 사랑이 얼마나 유한하고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지를 보여주어서 죄에 대한 오염의 정동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중요한 자격은 항상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런 식의 정동을 계속 느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감명적인 문장 하나만 외워보겠습니다. “영적인 지식은 신적인 것들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완전성에 대해 최고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느끼는 마음의 감각 안에 있습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번역을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말이 어렵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또한 신앙에 속한 일들에 대한 모든 인식과 지식은 그런 감각에 의존하며 거기로부터 흘러나온다. 영적 지식은 일차적으로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감각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에드워즈의 사랑의 미학은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영적인 총명을 새롭고 단순한 감각이라고 묘사합니다. 뉴 앤 심플 센스라고 묘사하는데, 이것이 감각으로 부르는 이유는 우리들의 감각은 예를 들어서 내가 시각을 잃어버렸는데 다시 시각을 갖게 되면 모든 사물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을 감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들이 들어와서 다음 단계가 perception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것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이 내가 없으면 물도 내가 모르고 플라스틱도 내가 모르고 이것이 마시는 것 이라는 사실조차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들어오면 들어올 때 이것이 무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 들어와서 어떤 진료처럼 들어온 것이 이런 반죽의 형태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 물과 플라스틱 이것을 먹었던 기억들을 다 가지고 확 들어온 그 감각의 재료들을 나누어서 빵을 빚듯이 빚어내기 시작합니다. 막 빚어내는 과정을 perception이라고 하고 완전히 빚어서 빵이 만들어진 상태를 인식이라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단계 sense, perception, 카드미션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쳐서 이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들은 원래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존재인데 이것들을 알기위해서는 감각이 먼저 부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해서 사랑의 미학에서 성령의 역사와 연결이 됩니다. 결국은 이것을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은혜는 크게 성경에서 세 가지 용매로 사용됩니다. 첫째로 구원의 길, 둘째로 객관적 호의, 셋째로 사랑의 감화인데 에드워즈가 여기서 이야기할 때는 대게 세 번째 용매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가라고 할 때 - 항상 우리가 은혜롭게 살아야 된다고 할 때 - 그 은혜가 무슨 의미인지를 사람들이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의 감동입니다.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것들을 버리고 회개하고 그 하나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작용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공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은혜로운 정동은 모든 신령한 체험은 언제나 은혜로운 정동을 동반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령한 체험은 언제나 은혜로운 정동을 동반한다, 이게 에드워즈의 명제입니다. 그런 에드워즈에 의하면 이 은혜의 정동 그 자체가 성령이 우리 안에 출렁거리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점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신령한 경험이라는 것은 신비 체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을 알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언제나 은혜로운 경험을 동반하고 그 은혜로운 경험이 반복될 때에 사랑의 성향을 형성한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럼 인간이 결국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되므로 불행해지는데 그럼 왜 인간이 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게 되는가. 이것을 에드워즈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각각 다르게 설명합니다. 에드워즈가 더 단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적인 요인과 의지적인 요인 두 개가 있다고 봅니다. 지성적인 요인은 그것은 교만입니다. 예를 들자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마라 먹는 날엔 넌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이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락의 원인이었다고 설명을 합니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지 않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다(고 판단했습다.) 그 교만은 정체가 뭐냐면 하나님이 판단을 내리시는 위치에 있는 그 위로 자기가 등극한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하나님이 여기서 최종적인 위치에서 판단을 내리시는 데 이것을 부인하려면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두 번째는 의지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모르스위’입니다. 자기사랑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바람직한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려고 하는 자기입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다 통합해서 ‘셀피시네스’라는 한마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는 이 설명에 만족을 안 합니다. 물론 구구하게 에드워즈가 나중에 여기에서 자기가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인가. 원하시지 않는 자기인가. 아니면 세계 속에 있는 자기인가. 이런 것들을 나누어서 설명하며 보충하긴 하는데 이 설명이 훨씬 더 깔끔합니다. 이 이기심을 보면서 에드워즈가 이렇게 자기사랑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가장 광범위한 자기사랑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단순한 자기사랑, 이것이 가장 최악의 형태의 자기사랑입니다. 세 번째가 복합적인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자기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잘 사는 것이 보태주는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못 살게 되면 당장 찾아와서 괴롭히고 손을 내밀 텐데 잘 살면 내가 손해를 안 본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세 번째 복합적 자기사랑입니다. 네 번째 진정한 자기사랑은 하나님이 지어준 질서 속에 정확히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이런 논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말이 안 나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올바르지 않은 자기라면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수가 없고 –동의하시죠?- 만약에 올바른 자기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게 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감정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의지를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한 여자로서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직원이 있었습니다. 예쁘장한 자매였는데 많은 남자들이 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선교사한테 시집을 갔습니다. 이 자매가 절대로 고기를 안 먹습니다. 좋은 스테이크를 사줘도 안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이서 사랑에 빠지고 나서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 남자가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굳이 하나님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감정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감정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의지를 사랑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그것을 이룬 사랑은 이미 그 안에서 이미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가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것은 중대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이론을 설명합니다. 에드워즈보다는 어거스틴의 설명을 백번 좋아합니다. 설명하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설득이 됩니다. 어거스틴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야 말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인데 그 안에 어마어마한 함의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신자의 성화의 과정 자체가 그릇된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줍니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건대 당신은 우리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나이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위협하면서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당신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 커다란 손해라도 보실 것처럼 우리를 위협 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시라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거 거의 원문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은 이것에 대해서 뭐라고 답을 내릴까요? 당신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사랑을 안 받아도 손해날 것이 없지만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어떠한 선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아야만 겨우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사랑을 못 받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가가 규명된다고 보는 것이 에드워즈의 철학이고 어거스틴의 철학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헤겔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거대한 보편체를 존재하는 구성물로 본 것입니다. 라이프니츠 같은 경우에는 인간 자신이 모나드 단자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원래 소통이 안 되게끔 단절 되어 있는 하나의 모나드입니다. 그런데 신적 예정에 의해서 이 모나드인 인간이 교통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인간은 기적적으로 소통하면서 산다고 보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인간관입니다. 이에 비해서 스피노자는 거대한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이 하나의 커다란 덩이를 이루고 그 하나의 본질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인간 일뿐이라고 설명하니까 우리가 개별자로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지독한 우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봅니다. 데카르트 같은 경우로 돌아가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색하는 단일체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하지만 자기가 왜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 인가하는 것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함으로서 내가 존재한다고 설명하지만 그 존재하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나 자신 안에서는 설명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에드워즈나 아우구스티누스나 인간론에 관한 위대한 사상의 가치는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찾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어떤 가치를 발견할 수 없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하는 것 그 자체로서 나는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존재는 결국은 나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에드워즈를 보면서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신 중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체적인 그의 사상을 놓고 보면 에드워즈나 어거스틴이나 최고의 휴머니스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든 존재라고 하는 이 무한한 긍지를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어거스틴이 두 개의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private affection, 사적인 사랑입니다. 사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상상해보세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사랑이 하나님께로 수렴합니다. 그 수렴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 질서 속에 사람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등등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사랑에 방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방해가 되도록 끼리끼리 뭉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적인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적인 사랑은 폭이 좁을수록 추악하게 되고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덜 추악하게 되는데 결국은 하나님 사랑하고는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나밖에 모릅니다. 내 가족도 모르고 그래서 미친 듯이 돈을 벌어서 나만을 위해서 쓰고 가족들은 굶어죽어도 쳐다도 안 봅니다. 이것은 가장 좁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게 꽤 넓습니다. 결국은 이웃을 위해 돈도 내고 자기 조국을 위해서 기부도 하면서 자비를 베풀면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좀 폭이 넓은 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려내는 이 사랑의 질서와는 어는 지점에서 반드시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둘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사랑과 사적인 사랑입니다. 아모르 소키아리스 아모르 뚜리바뚜스라고 설명을 하는데, 사회적인 사랑은 사랑 자체가 사람들을 교통하게 하는 사랑이고 이것은 자기 안에 갇힌 사랑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회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이 도달해야 할 하나의 예상인 것입니다.
마지막 장입니다. 제가 찾아낸 것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랑의 신학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떤 사람이 어떤 의견을 피력합니다. 나는 그 사람과 견해 다릅니다. 무참하게 공격을 해서 부셔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헤겔의 변증법처럼 내가 정의였지만 결국은 반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부정해서 신티시스(synthesis)가 이루어지지만 그 신티시스는 또 다시 반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그 위에 합이 다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통하면서 그 지점을 연결하면서 지나가는 것이 헤겔의 벨트가이드 세계정신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사람과 나의 견해가 다릅니다. 그래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내가 분별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원수가 되어버리고 다시 얼굴도 안쳐다보고 그리고 이를 갈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아닙니다. 이 사람과 나는 어떤 견해애서 의견이 달라서 내가 그를 공격하고 그 사람이 더 이상 (반박) 못하게 했다 하더라도 그 위에서는 이것을 통합시키면서 여전히 한 형제로서 사랑하게 할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오늘날 거의 제시를 안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한 번 원수 된 사람은 술을 먹고 푸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입니다. 목사들도 서로 안 봅니다. 가는 곳 마다 욕을 해서 그 사람의 명예를 떡칠을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옳고 그른 것을 더 능가하는 최종적인 사랑 안에서 수렴하게 해주는 논리적인 윤리적인 기초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결국은 그런 사랑을 구현하는 것을 삶 전체로 돌려주기 위해서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신앙입니다. 저의 말로 이야기하자면 에드워즈는 결국은 모든 지식이 사랑의 씨앗입니다.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처음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지는 것도 하나님에 관해서 지식이 들어올 때에 그 지식과 함께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지적인 전통은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신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지성의 중요성이 굉장한 것입니다. 원론은 지식의 중요성이 무시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아름다움의 신학입니다. 정동의 신학입니다. 조화의 신학입니다. 에드워즈가 보는 것은 아름다움은 그 정체가 ‘다름다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다름다움입니다. 에드워즈에서 있어서 아름다움은 자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수많은 다른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또 다른 사물들에게 비친 아름다움입니다. 조화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나는 나와 관계를 맺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므로 그를 아름답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회 자체가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누구도 홀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다른 것들을 다름다움을 갖게 하심으로 전체가 하모니를 이루어서 그 하나님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포니 교향악단에서 나타납니다. 소프라노부터 시작해서 베이스까지 악기가 좍 펼쳐져 있습니다. 모든 악기가 다 똑같은 소리를 내면 악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포스트 바이올린, 세컨드 바이올린 다 다른 음들을 냅니다. 그것이 지휘자의 손끝에서 모두가 놀라운 다양성 속에서 전체적인 것들을 연결을 만들어 가는데 그게 하모니입니다. 하모니를 만들어내면서 심포니가 나오는 것입니다. 소리라는 말과 심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의 악기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위대한 소리를 함께 어우러지면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창조의 세계는 그렇게 개별적인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과 함께 연결이 되어서 웅장한 심포니를 들려주는 교향악단의 연주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렇게 목회자는 인간이 지휘함으로서 자연의 모든 만물들이 다름다움을 가지고 조화로 연결되게 하신 것 입니다. 그것이 정복하고 다스리는 작용을 통해서, 노동명령, 문화명령과 종교문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고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웅장한 심포니 같은 음악이 들리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웅장한 소리가 나게 하도록 지휘자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각기 작은 지휘자들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결론을 내자면 에드워즈는 웅장한 산맥과 같고 우리는 그중에서 어제와 오늘에 거쳐서 작은 오솔길을 산책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력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발걸음으로 웅장한 산맥을 일평생 누비길 바랍니다. 에드워즈를 심취하면서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에드워즈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