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질의응답
녹취자: 오희열/김경애
오늘 여러분이 질문하시면 제가 성실하게 답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일 먼저 목양관계에 대한 질문이 나왔는데 첫 번째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질문 1] 청년부의 리더로서 영적인 영향력을 순원들에게 끼치고 싶은데 지식에 있어서도 관계에 있어서도 너무 작은 제 모습을 맞닥뜨립니다. 영향력 있는 리더로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좋은 리더로 설 수 있는지 질문 드립니다.
[답변 1] 질문의 내용은 청년부 리더로서의 영향력을 갖추고 싶다는 것인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순장으로 세워줄 때 그런 영향력을 끼칠 것을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에게 프로포즈를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바꿔야 할 생각은, “나는 순장으로서 순원들 위에 있고 나는 나의 좋은 영향력을 절대 우위의 위치에서 아래로 흘려보낸다.” 라는 생각을 일단 내려놓으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렇게 쓰십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순장의 지식이 순원보다 많아서 그들이 배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순장의 제일 중요한 조건입니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잡다한 만사에 대해서도 -“알쓸신잡”에 나오는 지식 같은 것들- 순원보다 우위에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서는 좀 빠지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나에게 배울 정보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순장이 될 때 그런 사람을 골라서 순장을 시키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두 번째는 순장이 된 후에 다른 사람이 공부하지 않을 때 자신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에 대한 지식들을 더 많이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집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것들이 다 필요 없고 예수를 알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떤 것을 공부하고 사유하는 일에 있어서)요즘은 너무 심각합니다. 지금 사회는 유튜브가 10분만 되어도 안 봅니다. 7분? 안 봅니다. 1시간이 넘어가면 사람들은 아예 근처도 안 갑니다. 어마어마하게 특별하고 유명한 사람이 진행하는 엄청나게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닌 한 그렇게 보질 않고, 설사 본다고 해도 손가락으로 계속 넘기면서 핵심만 짚어서 보려고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댓글만 읽으면서 끝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지식이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여러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젖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일 예배의 한 시간의 설교를 견디는 것조차 쉽지 않게 느껴지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예전에는 제가 100분을 설교했습니다. 60분을 설교하고 내려오면 권사님들이 오셔서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으시거나 설교 하다가 말고 집에 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토막토막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토막을 얻어도 그것이 주님을 제대로 만난 지식이라면 길게 연결이 되어서 사상이 됩니다. 위키피디아처럼 하나를 클릭하면 그에 따른 정보가 나오고 또 다른 것을 클릭하면 또 다른 정보가 나오는 식의 지식과 상식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가우디라고 이야기하면 가우디에게 영감을 준 몬세라트 수도원이 떠오르고, 몬세라트 수도원이라고 하면 중세 가톨릭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며, 중세 가톨릭이라고 하면 그에 따른 바위산, 자연 등이 떠올라 길게 연결된 사상을 말하는 사람을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은 작동하는 기계일 뿐이고 CPU는 네이버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말씀을 듣게 하는 데에 아주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제가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을 자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인문학 강좌 같은 것을 열어서 이런 것들에 대해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현대의 사고방식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갉아먹는지, 기독교 신앙이 제대로 된 사상으로 설 수 없게 만드는 현대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지만 핵심은, 내가 먼저 존경받고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리더가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부담감으로 갖지 말고, 순원들과 함께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절대적인 우위에서 출발했다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항상 뭔가를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그런 위치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순원들이 3년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말씀의 지식에 대한 커다란 격차를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대부분의 순장님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서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신학교를 가겠다고 합니다. 신학교는 말씀을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학교를 가는 것은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지적인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 드리는 것은 나중에 하고, 우선 말씀을 읽으면서 우위에 서는 방법은 성경 중에서 <ESV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이나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 같은 것을 옆에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전체를 통독하되 난하에 있는 것을 모두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하루에 열 장을 읽겠다고 마음먹으면 본문 열 장, 각주 열 장까지 모두 읽으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단, 신뢰할 수 있는 스터디 바이블을 택해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배우면서 올라갈 생각을 하지 마시고 성경읽기와 병행하면서 스터디 바이블 한 권 자체를 독파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스터디 바이블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ESV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이고, 또 하나는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입니다. 양은 후자가 훨씬 작습니다. 그런 것을 줄치며 꾸준히 읽어 가십시오. 시험 보는 것이 아니니까 모두 암기하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읽어가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두 번째는 제가 백번이라도 권하는 것인데 설교를 청취하십시오. 성경은 성경 전체를 읽어주지만 하나의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 꿰뚫어주지는 않습니다. 순장 자신이나 순원들에게 지금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말씀 안내 책자를 놓고 보면 흥미가 가는 시리즈가 있을 것입니다. 서 너 개의 짧은 시리즈도 있지만 30개짜리 긴 시리즈도 있을 것입니다. 적당한 하나를 택하십시오. 그것을 듣는 방법은 시간 날 때 유튜브에서 BTS 노래를 듣듯이 들으면 안 되고, 정해진 시간에 정신을 차려서 메모하며 집중적으로 들으십시오. 그 메모에 일관성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메모하면서 설교를 들으십시오. 1번부터 9번 설교까지 있다고 한다면 각 설교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목차나 요약집을 참고하면서 메모하며 들으십시오. 하루에 하나씩 들으면 제일 좋겠지만 생업에 종사하며 정신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뜻을 세워서 일주일에 두 개든 세 개든 정해서 듣고 이 시리즈를 다룬 책이나 내부 교재가 나와 있으면 그것을 두 번째로 읽으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도 들었던 설교가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된 후에는 그 주제에 대해서 또렷한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마음지킴”이라는 시리즈라면 이미 설교를 하고 나서 한참 뒤에 책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설교를 다 듣기 싫으니까 책을 먼저 읽습니다. 그러면 감동이 뚝 떨어집니다. 책으로 읽었을 때에는 지적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설교를 먼저 들으면서 생생하게 임팩트를 받은 사람들은 이후 책을 읽을 때에 집중도가 아주 뛰어나고 수많은 질문들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따라서 더 많은 책을 읽게 됩니다. 요즘은 영어를 잘 하는 청년들이 많으니까 청교도들의 책 속에서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만 듣고 보고 나면 마음속에서 너무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때에 비실비실한 순원 하나를 찾아서 계획적으로 잘 대해 주십시오. 특별히 바쁘지 않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만 만나서 밥을 먹자고 하고 그것들을 가르쳐주되 한없이 가르쳐주면 너무 힘들어하니까 자신이 정리한 것을 간략하게 가르쳐 줍니다. 자매나 형제가 그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점만 이야기하도록 하고 여러분은 가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하는 모임이 교구마다 두 개, 세 개씩 있었는데 너무 많아지다 보니 제가 절제를 시킬 정도였으나 그 속에서 많은 영혼들이 살아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무 기대도 없이) 주일 예배에 나왔는데 서러운 일도 당하고 마음이 괴롭던 차에 마음에 ‘쾅’ 하는 충격과 함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몇 주나 지속되는 지를 묻고 싶습니다. 얼마 가지 않습니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결국 그런 은혜의 감동은 말씀의 토대 위에 서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장들은 먼저 그렇게 성경을 통독하고 설교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워서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읽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요즘 다시 조사를 해보려고 하는데 2005년도에 온 교인에게 조사를 했는데 그때 응답한 교인의 65%가 매주 하나 이상씩 지난 설교를 듣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굉장한 비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은 지식의 영향입니다. 아까 질문에 나왔듯이 순장인 자신이 지체들 앞에서 한 없이 작게 느껴집니다. 자신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엄청나게 지식이 많은 사람이거나 하다못해 돈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거나 무엇이든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감정은 덜 하겠지만 순원들이 볼 때 자기나 순원이나 별 차이 없다는 마음이 들게 되면 사람들이 얕보게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뭔가 부족하더라도 어떤 것을 붙들고 살아간다고 하는 확신을 가질만한 것이 없을 때 순장은 자신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적인 내용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순원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원들을 위해서 눈물로 많이 기도하고 그들을 만나면 그 어떤 순원이 나를 무시하더라도 순장의 눈에는 귀엽게 까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절대로 위축되지 않습니다. 사실 순원들은 하염없이 작게 보이고 순장 자신은 거인처럼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작게 느껴지는 것에는 비교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권세를 주십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한 구역장님이 초등학교 중퇴를 하셔서 한글을 잘 읽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이 그 구역은 연말마다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구역원의 수가 너무 많아서 찢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도 많지 않았던 교회이니 담임 목사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그 교회는 구역장이 구역원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교역자가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만만하게 보셨는지 제게 네 구역을 맡겨 주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그분의 구역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것도 세련되지 않으셨지만 두 가지는 확실하게 있으셨습니다. 첫째는 먹을 것을 잘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역모임이 있는 날에는 다과를 차리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음식을 만드셨습니다. 홍어회라든지 닭튀김 같은 것을 만들어서 거하게 차려 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너무나 기쁘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어마어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교역자들이나 담임목사님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구역원 중에 조희순이라는 분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3일 금식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관절염으로 고생하셨는데도 밤 11시에 보따리를 싸서 예배당에 가셔서 난방도 안 되는 추운 곳에 엎드려서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짜 어려움에 처한 지체를 위해서 3일 금식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3일을 금식할 정도면 에스더처럼 나라가 망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은 수시로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제가 그 구역에 가서 보면 말씀은 교역자인 제가 가르쳤지만 그분과 비슷한 나이의 구역원들이 그분을 어머니처럼 존경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인 우위를 지키는 길은 -나중에 구체적인 skill도 언급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하는 것이 지식입니다. 순원들이 여러분에게 “저 순장이나 나나 아는 게 별로 없네.”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여러분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설교 시리즈들을 체계적으로 들으면서 공부해가다 보면 순원들과 말씀을 나누다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딱 붙잡고, “이 시리즈를 들어보면 이러 이러해서 이렇게 되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라고 간략하게 선을 몇 번만 그어주면 순장이 말씀에 있어서 우위에 있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지도력을 위해) 그 다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순원들이 올망졸망한 주일학교 학생들처럼 느껴집니다. 대등할 때는 까불면 마음이 상했는데 우위에 있게 되었을 때 순원들이 까불면 불쌍하게 느껴지거나 가엾게 느껴집니다. 혹은 귀엽게 느껴집니다. 거기서 참을 수 있는 힘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리더는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모이고 싶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구역모임, 순모임의 첫 번째입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의 구역장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일 좋은 장소를 차지하고야 말 것입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 어떤 교회에서 간절하게 저를 초청하면서 무너져가는 청년부를 일으켜 달라고 했습니다. 15명 정도 모이는 곳이라고 해서 갔더니 첫 날에 세 명이 나왔습니다. 이 방 절반 정도 크기의 장소였는데 그곳 청년부를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열렬히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청년들은 어차피 놀러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 몇 주간 조용히 기도하면서 청년부실 전체를 리노베이션을 했습니다. 말씀에 은혜 받은 청년들에게 헌신하라고 하고 저도 헌신하고 집사님들도 헌신하면서 절반만한 방을 그 교회에서 제일 아늑한 방으로 꾸몄습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를 거창하게 할 수는 없어서 페인트칠을 새로 하였고, 신발 신고 들어오던 곳을 카페트를 깔아서 신발을 벗고 들어와 편안하게 앉게 해주었으며, 책상을 많이 사서 구역 모임할 때 돌려놓고 사용하도록 하였고, 먹을 것을 풍족하게 사다주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마이크도 잘 들리게 해주고 음악을 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갈 곳이 없는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 1년 6개월을 사역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처음에 세 명이 모였는데 65명까지 모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역장과 순장들이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순원들이 왔을 때 가장 따뜻하게 자신들이 대접받는다는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모임의 장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정성껏 마음을 담아 대접해줘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아보고 대우하는 것이 리더십에 자신이 영향 받고 있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도 매우 잘 알고, 교만하지도 않고, 기도도 많이 하고, 헌신적이고 순원들을 눈물로 사랑하는데 그를 깔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그런 대접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니까 괜찮아. 마음이 불구라서 그런 것이지.’하고 놔두면서 시종일관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여줄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얼굴이야 어차피 결정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도 사라지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화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화장도 하고 예쁘게 하고 나오십시오. 어떻게 대담한 마음으로 맨얼굴로 나옵니까? 실례입니다. 타인에 대한 폭력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오. 시종일관 기쁨 속에서 영혼들을 섬기십시오. 조바심을 내지 마십시오. 결국 마지막에는 다 복종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질문 2] 목자의 부족함, 교회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목양을 거부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희가 어떻게 그들을 목양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2]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감히 이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뭘 좀 배웠다고 여기는 사람, 혹은 은혜를 경험했다고 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순장의 목양권 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질문에서 ‘목자’라는 것이 순장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역자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상황은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목자의 모자람, 교회의 어려움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교회의 불합리함 등을 가지고 목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날을 잡아서 그 순원의 태도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확 까버리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잘 정돈해서 “너는 이런 것은 이렇게 잘못되었고, 성경적으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기 때문에 네가 생각하는 것의 일부는 맞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지 네가 네 아집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무뇌인이라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너만큼 생각이 없어서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려서 깨닫게 해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대판 싸울 각오도 하고, 그 사람이 순장인 여러분이 보기 싫어서 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좀 더 온화한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저렇게 철이 없었다가도 주님을 만나면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그 사람을 더 사랑하고 끌어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 그는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재밌는 간증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2002년도에 평촌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가 정확하게 제가 10년을 설교했던 때였고, 그동안 강대상에서의 설교가 항상 청중들을 압도하는 느낌이었으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물론 설교가 너무 길다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2002년도 말쯤 되었을 때 주일 설교를 하러 올라가면서 느끼는 것이 “교인들의 심령이 정말 교만해져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만약 제가 뒤로 물러섰으면 아마 지금과 같은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훨씬 더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을 때였는데, 2002년 평촌 예배당 공사로 인해서 공부하는 일에 엄청 손해를 봤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전문가에게) 모두 맡겼을 텐데 돈이 없으니까 제가 현장에 직접 와서 공사를 지휘하던 때였습니다. 아침 6시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설교 준비하는 것과 교리반 가르치는 것만 해도 빠듯했던 때였습니다.
아무튼 2002년 가을쯤 들어서면서 제 건강도 최악에서 벗어나서 개인적으로 공부에 열심을 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창 존 오웬과 연애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12시쯤 (사역들을) 마치고 운전해서 강원도 오대산 근처 숙소로 갑니다. 한 군데는 다 쓰러져가는 리조트였고 다른 곳은 좀 나은 곳이었습니다. 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앉아서 공부를 시작합니다. 존 오웬을 공부하면서 저녁에 잠깐 내려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올라가서 꼬박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한 것을 타이핑으로 쳐서 정리를 하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한참 공부를 하다보면 아침 해가 떴습니다. 주일 오전부터 일과가 있으니 이튿날에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깨끗하게 정리한 후 서울로 올라옵니다. 11시쯤 도착해서 점심을 잠깐 먹고 설교준비 마무리를 합니다. 그때 제가 큰 은혜를 받고 설교한 시리즈가 “죄와 은혜의 지배”(2003)였습니다. 그 설교를 하면서 5일 동안 사경회를 했는데 그 다음 주일에 제 마음에 든 생각이, “이 교인들이 지난주 그 교인들이 맞아?”할 정도로 아주 겸손하게 엎드러져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 목회에서 가장 충격적인 한 주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불붙는 확신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을 꺾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너무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역장들이 말씀에 확 꺾여보는 경험이 수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좀 전에 제가 이야기한 지식에서의 발전을 이루는 길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면 무지무지하게 성경을 읽고 싶어지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면 무지무지하게 설교를 더 듣고 싶어지며, 무지무지하게 책을 더 읽고 싶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면서 그렇게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고 까붑니다. 그때에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듯이 가엾게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사랑해주고 기다려줍니다. 그러나 좋은 시기에 반드시 진실을 이야기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논쟁을 하지는 마십시오.. “너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너는 너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양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제 생각에 교회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맞는 적당한 교회를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다시 해보는 것도 -물론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기대해 볼 수는 있습니다. 순장에 대한 혹은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나 여러 구조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없고 교회에 목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교역자에게 보고해서 구체적으로 이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촌으로 이사 온 후 제 마음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 또 하나의 일이 있었습니다. 평촌으로 이사를 오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동기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전까지는 은혜를 받아야 등록하는 구조였습니다. 설교도 90분가량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길이가 70미터 이상으로 길어지니까 뒤에서 딴 짓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9월쯤 되었는데 회심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늘어난다는 것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그때 제가 진짜 기도를 많이 하고 목숨을 걸고 선포했던 시리즈가 있었는데 “거듭남과 회심”이었습니다. 그때는 잡아먹을 정도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한 구역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구역장의 통솔이 안 될 정도로 구역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평, 불만들이 있었습니다. 구역장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지만 구역장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구역예배로 모이며 공과는 하지 않고 교회의 흉이나 보고 불만을 이야기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일곱 명쯤 모이면 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두 사람이 장단을 맞추고, 세 사람이 동의를 하면서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게 됩니다. 거기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 시리즈에 딱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주 깊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 이 구역이 전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동안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는데 완전히 회심을 하고 난 뒤에는 구역장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맞다고 지지해주고 다른 구역원들에게는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이 한 사람으로 인해 나중에 변화된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알던 그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너무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무서움이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사람이 바뀔 수 있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러면서 이 사람을 변화시킨 설교에 대해서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 구역의 사람들이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구역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은 순에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중에 말랑말랑한 인간이 누군지 잘 잡아서 이 사람이 깊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도록 눈물로 기도해줘야 합니다. 수련회든지 사경회든지 기도회든지 청년 MT든지 무엇이든지 한 사람이 말씀에 확 고꾸라져서 완전히 변화된다면 주변 사람들은 힘없이 허물어지거나 아예 떠나버립니다.
[질문 3] 목자의 권면에 순종할 수 없는 마음이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동의가 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순종의 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답변 3] 첫째 질문에 답부터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목자라는 사람은 순장일 수도 있고 강도사님일 수도 있고 목사님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담임목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하는 내용으로 볼 때는 담임목사까지는 올라올 것 같지 않고 자신을 담당하는 교구의 목사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역자든 전도사든 완전한 사람이 아니니까 합리적이지 않거나 이치에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소통하려고 애쓰지만 사실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님이 나보다 훨씬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그런 분이 인도하실 때에는 거기에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면서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극복해 나가는 방법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체들은 사고력이 굉장히 법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자신의 논리에 도저히 맞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죽어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신앙에서 떠났기 때문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너무 시간이 걸린다면) 목자에게 면담을 요청하거나 이메일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겸손한 태도로 편지를 써서 “이러이러한 것은 너무나 이해가 안 되고 너무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 됩니다. 그런 것보다 이런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서 소통을 하면 상당히 많은 어떤 경우에는 “지체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군요, 제가 잘 몰랐습니다. 그런 다른 면이 있었군요. 잘 몰랐습니다.”라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역자와 순장이 잘 소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된다면 직접 소통을 시도해 보는 것도 자기 신앙을 위해서 좋은 방법입니다. 그 대신 논쟁하고 대항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교역자가 정상적이고 충분히 인격적인 사람이며, 여러분의 이야기가 상당히 일리가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거기까진 잘 몰랐는데 얘기해줘서 고맙다.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다음번에는 참고해서 이것을 고쳐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지금 있는 것들도 이렇게 이렇게 해서 요건을 채우도록 하겠다.”고 받아들일 것이고, 이렇게 소통을 하고 나면 (이전의 상태가 굉장히 호감이 가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것입니다.
둘째 질문, 기도해도 동의가 되지 않을 때 순종의 도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순종이라고 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일을 할 때 이것이 더 좋은 방법인지 저것이 더 좋은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제안도 못한다면 그 공동체는 이상한 집단이 됩니다. 그러니 순종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서 (전자의 의미로 내가 그러고 있는지 아님 후자의 의미로 그러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자신의 지금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순종하지만 더 좋은 방법을 찾아 가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통하는 것이 신앙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소통하고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자주 하게 되면 교역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 매우 좋을 경우에는 뭔가를 해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통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질문 4] 강요하는 순장이 되고 싶지 않은데 너무 자유분방하여 지식적 순종도, 참여도 하지 않으려는 순원들이 있습니다. 권면의 수준을 어떻게 맞춰야 지혜로운 목자의 자질을 가지는 것일까요?
[답변 4] 순장으로서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에는 신앙적인 깊이는 그만두고 상식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순원들을 만날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며 생각할 때, “진짜 상식 이하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한번 받아버리고 끝냈을텐데….”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순원을 만나서 따뜻하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깨닫도록 시간을 가지고 변하도록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 세 사람, 늘어날 경우에는 자기가 순모임을 인도했는데도 리더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삿대도 뺏기고 돛대도 뺏기고 어디로 가는지도 종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때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가도록 두면 안 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히 그런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는 기분 좋게 이렇게 제안해 보십시오. 하루 순모임을 쉬든지, 순모임을 일찍 끝내든지 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순모임이 될지에 대해서 모두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편에 서 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도 없다면 사람관리를 잘못한 것입니다. 날짜를 잡고 순모임을 일찍 마치고 아무개네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든지, 스타벅스에 가서 차 마시면서 이야기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여기서 뜨거운 물이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순장은 절대 자기가 많은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의장도 발언을 하려면 발언권을 얻어야 합니다. 평소 수줍어했던 사람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다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순모임에 와서 제일 따뜻하고 좋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언제 제일 힘들었나요?”, “바깥에서 힘든 것 말고 우리 모임 안에서 어떤 때 제일 힘들지요?” 이런 질문들을 하면, 어떤 이는 “혼자서 이야기를 다 할 때 너무 힘들어요.” 라고도 하고, “구역공부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배우려고 왔는데 자기가 가르치려고 할 때 힘들어요.”라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었다고 하고 다음 자매에게는 어떤지 묻고, 그러면 또 답을 하고,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들은 후에 종합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제가 다 적었습니다. 정리해보니 이렇게 되는군요. 첫째는 무엇을 하지 말고, 어떻게 합시다.”식으로 마무리를 해줍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눈치를 받도록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구나.” 하면서 그날 저녁에 순장에게 문자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순장님, 기분 더러워요! 나를 겨냥해서 그런 모임을 만든거죠? 알겠어요. 내가 꺼져줄게요.”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 필요는 없습니다. 쿨하게 받아들여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자기의 말로 하는 것도 좋지만 공동체 전체가 행복하게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삼해야하고 어떤 일을 좋아해야 하는지 서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작하면서부터 남의 욕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것은 너무 싫었습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모임에서 존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시당하고 뒷담화하는 것은 너무 싫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거기서 논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당신, 그 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냐?” 하면 논쟁을 하도록 두십시오. 그리고 은혜롭게 잘 마무리를 하십시오. 정말 어떤 사람은 “나에게 하는 말이지? 그래, 내가 꺼져줄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고 제가 순장이 되고 나서 1년에 두 번씩 항상 했습니다. 우리 순이 시작되고 한 번 모임을 가져보고 2월말쯤 되서 어떤 것이 어려운 일인지, 또 어떤 일이 좋았는지 나눠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떼어서 가지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다시 정리를 합니다. “이 일은 제가 구역장을 맡고 10년 동안 늘 해오던 일이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자매를 겨누겠습니까?” 하며 따뜻하게 보듬어서 보냅니다. 퍼붓는 말이 올 수도 있겠지만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면 돌아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돌아온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모임을 이끌어나가는 것입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너무 말이 많은 순장이 되면 안 됩니다. 조용히 참아주면서 지혜롭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이 충분히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정도라면 그런 모임을 기획해서 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진리는 인정을 하지 않아도 공동체의 합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시류입니다. 순원들이 7, 8 명이 모였는데 어떤 순원이 “나는 이러이러한 분위기는 싫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순원들이 자기들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 그쪽으로 정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더 재밌는 순장의 경우에는 약간 웃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미리 겨냥을 해서 이런 것을 없앴으면 좋겠다는 설문을 만들어서 모입니다. TV에서 볼 수 있듯이 차트처럼 만들어서 “금년에 있었던 제일 웃기는 일, 베스트 5.”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순 안에서) 의견을 점검해봐야 할 일, 5가지” 식으로 던져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순모임 시간은 몇 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하면서 질문을 뗍니다. 그리고 그 답에 대한 투표를 카톡으로 합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오겠지요. 60분? 70분? 다른 순보다 10분 일찍 마치기? 등등. 또 “당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사건은 어떤 것인지 다음 네 가지 중에서 고르시오. 1. 혼자 너무 말을 많이 한다. 2. 다른 사람 욕을 너무 많이 한다. 3. 순장을 너무 세워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통계를 내고 마지막에 토론 정리하듯이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그 정리된 것을 놓고 같이 기도합니다. 얼마든지 지혜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이 최선은 아니고, 그렇다고 끝나고 교회 복도에서 만나 한판 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질문 5] 개성이 강한 지체들과 믿음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제 의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순원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의 태도들도 부질없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해야 이 관계들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요?
[답변 5] 개성이 강한 사람들은 힘듭니다. 저의 목회가 개성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니,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의 말씀을 잘 듣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목사님을 존경하고 경건생활을 열심히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제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지만, 충격적으로 은혜를 받고 뒤집어지거나 설교시간에 졸도를 해버리거나 혹은 그 반대로 나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언젠가는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개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셨는지 모르지만 개성이라고 할 때 앙드레 김 패션쇼를 생각하면서 개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뭔가 안 좋은 의미를 지닌 개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스킬이 필요합니다. 이런 일은 오랫동안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온몸을 부딪치면서 살아온 순장의 짬밥이 중요합니다. 밥그릇 수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선배로부터 받는 좋은 조언이나 지혜도 정말 필요합니다. (질문에서 나온 개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100%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뭔가 개성이 있긴 있는데- 그 개성에 춤에 끼가 있다거나 노래에 끼가 있다는 그런 개성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으면서 (다른 이들과 다르게) 튀는 것, 혹은 뭔가 독특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약간 삐딱한 것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을 하신 순장님은 아마도 마음이 심약하거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 듯 합니다. 소위 말하는 유페미즘(euphemism)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00%는 아니겠지만 이런 사람들의 상당수가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랑받고 싶은 사람입니다. 직설적으로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장들은) 항상 이런 사람들을 배려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순하지 않아서)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이 감싸주면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표현을 부드럽게 해서 “개성”이지 한마디로 말하면 “싸가지”입니다. 그런 싸가지의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노력을 하지만 나중에는 그만두게 됩니다.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를 놓고 주님 앞에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사람을 내가 특별히 사랑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관심을 보여주십시오. 대화를 하더라도 (애정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대화 가운데)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폭풍처럼 말을 걸기 마련이라 나중에 말을 건 통계를 내어보면 30번의 건넨 말 중에 20번 정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나머지는 자기가 별로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건넨 것이고, 어떤 경우엔 말을 건 적이 없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지 마시고 말도 걸어주고 앉을 때도 제일 편하고 좋은 자리도 주고 개인적으로 편지도 쓰고 하면서 (관심을 가지십시오). (무심한 듯) “다음 주 목요일 저녁에 시간되니?” “왜요?”, “요새 대학로에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는데 아주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구. 위트도 넘치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고 하더라. 같이 갈래?”라고 약속도 잡아보십시오.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그 사람과 편한 시간에 맞추어 데이트를 합니다. 동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난전에 앉아서 맛있는 것도 먹고, 미리 인터넷에서 찾아 두어서 기웃거리지 않아도 빈대떡을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을 가서 함께 맛보고, 연극 마치고 나면 그 옆에 아이스크림 가게도 갑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순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너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족들에 대해서 물어보더라도 캐듯이 묻지 말고, “너는 혼자 자랐니? 형제들과 함께 자랐니? 큰 언니로 태어나서 제일 힘든 때가 언제였니?” 등으로 편하게 대화하십시오. 그리고 대화는 6 대 4 정도로 상대방이 더 많이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데이트를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 참 예쁘지? 여기서 사진 한 장 찍고 가자.” 저는 하지 않지만 여러분이 sns를 한다면 누구랑 어디에 갔었다고 사진도 올리고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갔다 왔다고 유세 떨지 말고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며 인간적인 관계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잘 잊히지 않는 날들을 잘 기록해두었다가 그 날에 축하표시를 해주십시오. 열린교회에 처음 온 날과 같은 날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들의 결혼기념일에 예외 없이 선물과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집사님이 결혼하신 OO번째 기념일입니다.”하며 보내줍니다. 그의 개인적인 일들을 챙겨줍니다. 상이 났다고 하면 제주도라도 날아갑니다. 절호의 기회입니다. 검정 옷을 입고, 비행기 값이 없다면 인천에서 11시간을 배를 타고서라도 갑니다. 제주도에 문상을 거의 온 사람이 없는데 그 순장이 갔다면 그것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잊지 못합니다.
내수동 교회에서 고등부 사역을 할 때 자매 하나가 설교시간마다 (저의 설교를) 조금도 듣지 않았습니다. 기둥 뒤에 앉아서 얼굴만 가리고 있었습니다. 설교자의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매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아이 엄마가 교구에 속해 있어서 교회에서 장례 절차를 모두 치러주었습니다. 그 자매의 담임 선생님과 함께 처음 임종 예배부터 시작해서 입관, 심지어 하관 때까지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 이유 하나로 그 자매가 기둥에서 바깥으로 나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변화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모님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을 녹이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필요로 할 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낌없이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지켜봐 주십시오. 그리고 서로 관계를 가지고 사랑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계속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변화됩니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을 받은 그 지체는) 나중에 “나 내년에 결혼해서 4교구로 올라 갈거야.”라고 이야기하면, “나도 언니 따라갈래.”라고 답하는 순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들이 한 번 옆에 있으면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줍니다. 그것을 ‘오네시모 목회’라고 합니다. 주님이 부어주시는 사랑만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가르쳐드렸습니다. 사랑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희생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의 유익은 내가 그만큼 크고 넓어집니다. 처음에는 (그 사랑이) 요만해서 (나를 좋아하는) 똘마니들만 품에 와서 안깁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점점 커져 가면 나에게 까불고 대들던 사람들도 와서 내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들의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여기 있는 김민식 순장에게 가지 않으면 성경을 배우지 못하겠습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든 배웁니다). 목회는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필요로 할 때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주고 아파해주고 들어주어야 합니다. 들어주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밤늦게 전화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퍼붓습니다. 그러면 노이로제(neurosis)에 걸리기도 합니다. 통화를 시작하면 두 시간, 세 시간 하고나서도, “언니 내가 금방 또 전화할게.” 합니다. 나중에는 짜증나서 전화를 들으면서도 TV를 봅니다. 숨소리 빼고는 전부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들어주는 것입니다. 다 들어주고 네 가지 반응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말?”, “대박이네!”, “헐~”, “맞아 맞아!” 이런 감탄사만 돌아가면서 해주면 됩니다. 아무도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 지체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전화를 해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입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듭니다. 말도 되지 않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내 마음 속에 구겨 넣는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가치 없는 것은 흘려버리십시오. 그리고 저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해 주십시오). 정신병자들이 하는 횡설수설한 말과 이상한 행동을 정신과 의사가 모두 마음에 담으면 그 역시 돌아버립니다. 이번에도 한 의사가 살해당했습니다. 너무 가엾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에 대한 어마어마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이성은 다 살아있습니다. 말 같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을 다 마음에 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하면서 저 사람의 마음에 뭐가 있는지를 찾아내야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가르쳐야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감을 해 주면서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렇게 관계가 생기다보면 어느 날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 정색을 하고 “너 그러면 안 돼!” 라고 해도 권위가 생깁니다. “이 언니가 이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닌데 진짜 나에게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 이러면 안돼, 이렇게 살면 안돼, 그렇게 하면 안돼”하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박나래의 표현에 의하면 “너 양아치야.” 라고 해도 (그 지체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인내, 오래 참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을 길렀던 순장도 그랬고 목사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사랑해주는 것이 그들에겐 격려가 됩니다.
[질문 6] 사역을 같이 해 나갈 때 의견의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도 이러한 상황을 겪으셨는지,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나가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6] 의견의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대쪽 잘라지듯이 갈라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동기가 정말로 교회와 목회자를 사랑하는 동기에서 저렇게 다른 의견을 가질 수가 있고, 두 번째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도전 내지는 상당히 반항하는 마음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삐뚤어지게 보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내에 침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말을 안 할 뿐이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체적인 의견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당회를 할 때 자주 열 명이 모두 이야기를 하게 합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만 기다립니다.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은 많이 이야기하고, 없는 사람은 조금 이야기하더라도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튀는 내용이 여기저기서 나왔으면 그것을 좁혀서 이런 주장과 저런 주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면 상반되는 두 주장에 대해서 의견들이 나오면서 갈라집니다. 그러면 A라는 의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해를 시켜보라고 하면 그것은 이런 것이고 이런 것입니다 하면서 이야기하면 그것을 듣고 바로 “아, 내가 잘못 알았습니다.” 라고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A라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 70%이상이라면 의결을 하고 그대로 넘어가자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때는 먼저 그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주 불신앙적이고 반항적이고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쉽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임에 대한 불만이라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고 분기마다 한 번씩 모여서 이야기 할 때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 해 보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다 들어보도록 하고 여러분이 답변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답변하고 그 답변으로 그 사람이 완전히 바뀌기를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범위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교역자에게 패스하고, 어려워도 교구 목사님과 의논을 하도록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디렉터 목사님과 의논을 하도록 넘겨야 합니다. 충돌이 일어나는 일을 할 때는 본인이 어느 편에서 서서 뭘 좋아한다는 것을 경솔하게 보여서 열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지도자로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주 힘듭니다. 저도 오래 목회를 했는데도 힘든 일입니다. 주위에서 저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동안 굉장히 많이 훈련되신 것 같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힘듭니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아주 적절한 유머, 적당한 순간에 아무도 마음 상하지 않을 그런 유머를 터뜨리면 분위기가 싹 가라앉으면서 기운이 식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방법일 것입니다.
[질문 7] 말씀 중에 깊은 곳에서 우물을 떠올리는 것 같은 기도를 하라고 하신 적이 있으신데 깊은 기도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그러한 기도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답변 7] 모든 사람이 꼭 하고 싶은 질문일 것 같습니다. 구역장을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원들 열 명을 위해서 매일 기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순장을 그만두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 기도가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생활을 하라고 하면서 우물을 퍼 올리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지난 수요일에 시편 5편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1편을 했고 엊그제 2편을 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솔직히 말해서 짧은 이야기로 그것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 머릿속에 잘 정리되게 해줄 수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깊은 기도를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마치 “누군가와 불같이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같이 뜨겁게 빠진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것이다.” 등등을 이야기하면 ‘아, 그런 것이구나…’ 할 수 있겠지만 자기가 실제로 빠져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깊은 기도라는 것은 깊은 기도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 심지어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설명을 붙이면 붙일수록 너무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깊은 기도” 라고 하면, “으흠!”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면 “음…”합니다. 그리고 “운명 같은 사랑”하면, “으흠!” 한다면 해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아픈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깊은 기도를 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마치 2분 50초 정도 유튜브 동영상 시간 정도로 설명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깊은 기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 것일까? 의문을 갖게 합니다.
(찬양)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지난 수요일에 했던 설교를 이야기하자면, 깊은 기도는 결국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뜻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제가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 그래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텍스트에는 없습니다. 대신 “아라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영어로는 arrange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목적어가 없습니다. 번역을 하면 너무 이상합니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내가 정돈할 것입니다”입니다. 셋째로, “바라리이다”는 expectation인데,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기대를 가지고 기다린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본문에는 “기도하리이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번역들이 무척 고민을 합니다. “아라크”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크게 네 가지의 뜻으로 쓰이는데 종합을 해서 설명하자면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군대를 가보면 평상시에는 자유롭습니다. 영화 진주만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평소에는 경계를 서는 사람만 경계를 서고 나머지 부대원은 자유롭게 총도 소제하고 배 위에서 웃통을 벗고 씨름도 하고 장기도 두고 권투도 합니다. 자신들의 작업일지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다른 부대원은 쉬기도 하고 밥도 먹습니다. 그런데 사이렌이 울리고 레이더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적기가 떴다고 하고 “전원 전투 위치로!” 방송이 나오면, 부대원들은 순식간에 완전군장을 하고 전투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거기서 말하는 “아라크”입니다.
깊은 기도를 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아라크”, 곧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전투태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휴식태세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칸포를 쏜다거나, 미사일을 쏜다거나, 전 대원이 기관총을 쏜다거나, 어뢰를 발사하는 일들은 휴식태세에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각자 전투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이 전투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깊은 기도에 대한 계속적인 고민은 하나님과 나와의 고민의 축소판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 대한 고민은 조금만 하면 해결이 되는데 깊은 기도 대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하려는 자기 개혁이 동반된 가운데 기도가 되는 것이지이지 다른 것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깊은 기도를 하려면 이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제발 설교를 좀 들으십시오. 지지난주 설교 같은 것을 작심하고, 한 시간 조금 더 되는 그런 설교를, 그리고 시리즈에 들어가 보면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길”, “무엇이 깊은 기도를 방해하는가?”, “깊은 기도란 무엇인가?” 등등 나옵니다. 어떤 것이든 시리즈를 붙들고 이번에 내가 이 궁금한 것에 대해서 해결을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면서 지성의 빛을 받으면서 실제로 기도할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길고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면 되고 안 되려면 안 됩니다. 탁 털어버리고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기도 없이 내가 이렇게 비척거리면서 살 바에야 기도하다가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하는 마음을 먹으면 깊을 기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물을 길어내는 것처럼 하라는 뜻은 외적으로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정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깊은 기도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면서 게임기에 매달려서 하루에 서너 시간을 보내고 수시로 비디오를 보느라 날밤을 새고 sns를 한다고 폰이나 붙들고 눈이 부시도록 있는 삶의 모양으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하고 삶 자체를 바꾸겠다는 마음의 쇄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기도를 실천해야 하는데 처음에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때에 그것을 솔직히 그런 권면을 이미 기도가 펑펑 솟아오르는 사람에게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물을 긷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물이 터져서 위로 온천수처럼 분수처럼 쏟아 올라오고 있습니다. 기를 필요도 없습니다. 두레박 던지는 비유는 죽어도 기도가 안 되는 사람, 집중이 안 되어서 갈리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단 던집니다. 그리고 천천히 길어 올립니다. 그리고 마음에 없는 말은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다. 내 나이에 어떤 날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길어 올리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그냥 차라리 되지 않는 기도를 할 바에야 차라리 ‘말이 안 나와요.’ 그 말을 저 깊은 마음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도가 잘 안 돼요.’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말입니다.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인가 봐요.’ 이것도 마음에서 길어 올린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진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은 내 가까이에서 듣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게 기도제목을 정할 필요도 없고 마음의 흐름에 따라서 바닥에 던지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가 길어 올려 집니다. 그렇게 기도가 길어 오르는 좋은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아무리 두레박을 정성껏 던져도 우물에 물이 없으면 못 길어 올립니다. 던졌는데 덜컥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그 우물은 있지만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레박을 던질 때에 그래도 첨벙하고 길어 올릴 수 있기 위해서는 밑바닥에 물이 있어야합니다. 마음이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깊은 기도의 물을 거기서 길어 올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자의식의 밑바닥에는 기껏해야 자기연민입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비참해요. 내가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매일 매일 죽고 싶어요.’ 이런 것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 밑바닥에서 길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기도가 기도의 시작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낙망을 확인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 속에서 항상 길어 올려야 할 그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가장 절호의 기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을 때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설교하고 주기도문도 안마치고 끝났습니다. 굉장히 늦은 시간까지 성도들이 절반 이상이 앉아서 가는 사람들은 일찍 갔지만 절반 이상이 앉아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왜? 받은바 은혜가 있으니까, 두레박을 던지니까 길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제발 설교 좀 들으십시오. 주일날 예배시간에 다른 생각 좀 하시 마십시오. 무엇을 들었는지도 모르는 머리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70분을 지성과 씨름을 했는데 왜 내 머리통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머리구조가 잘못된 것인가, 설교자를 잘못 만난 것일까, 무엇인가?’ 그럼 당연히 재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에 들었던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설교요약지까지 올라오니 옆에 갖다 놓고 들으십시오. 더 좋은 것을 이야기 해주면 도서관에 가면 ‘은혜의 강가로’ 라는 매해 설교들을 모두 모은 설교요약집이 있습니다. 그것을 펼치면 설교들이 두 페이지로 요약해서 모두 실려 있습니다. 심지어 서점에 가면 ‘무슨, 무슨 시리즈 청취가이드’ 이런 것까지 있습니다. 그것을 펼쳐놓고 질문이 계속 나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그 질문에 답을 하면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지성 안에 무엇이 쌓여있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 싶은 기도가 내 마음속에 물처럼 고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의식적으로 두레박을 던지고 지성으로써 그것을 길어 올릴 때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심이 있냐구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이 없는 사람이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 이기심과 야비한 마음 외에 그 밑에 무엇이 있습니까? 뭐가 우리 자신에게서 솟아나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극도의 자기 연민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비참해.’ 눈물을 펑펑 흘리지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절망에 싸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안 들어가겠다고 펑펑 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대답을 못합니까? 정말 깊은 기도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내가 가르쳐 주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것을 알고 싶은데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냥 했으면……. 빼어난 것도 없는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 사람은 재벌 집에 시집을 갔으면…….’ 그러면서 소파에 쓰러집니다.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깊은 기도에 들어간다면 무슨 희생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진짜 너무너무 깊은 기도에 들어가고 싶다면 내가 시간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들어가게 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해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냥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드라마 보면서 잠옷 입은 채로 소파에 쓰러지는 그런 백수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알고 싶다면 나는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깊은 기도가 알고 싶어요.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싶어요.’ 정보가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원합니까? ‘3분 안에요.’ 그런 것 없습니다. 3분 안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합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만나서 3분 안에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까?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열린 말씀 시리즈 중에서 아무것이나 기도에 대한 것을 찾고 못 찾겠으면 그냥 아무것이나 하나 찍어서 ‘내가 이것을 독파하고야 말리라.’ 그리고 매달려서 들어보십시오. 내가 가끔 시리즈를 소개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성을 기울여서 들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왜 안합니까? 너무 간절하게 원하면 수많은 가르침들이 그 속에 있으니까 들으십시오. 그렇게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주일에 설교를 듣는 태도가 다릅니다. 나는 요즘의 여러분들이 설교 듣는 태도는 55점밖에 안줍니다. 100점을 최고의 청취자의 기준으로 볼 때 55점 밖에 안줍니다. 낙심할 정도입니다. 물론 예의 바릅니다. 똑바로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다른 데에 가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점점 더 여러분들의 신앙이나 모든 것들의 깊이가 얕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해보는 것입니다. 우선 기도를 하십니다. ‘깊은 기도를 안주시면 나는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그러고 매달려 보십시오.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설교도 심지어는 그렇게 기도하려는 몸부림이 있는 사람에게 전달될 때 마음을 뜨겁게 하고 불을 지펴서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아니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둔 채 파자마 입은 것 같은 삶을 살면서 깊은 기도 타령만 하지 말고 깊은 기도를 정말 결심하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40일 금식기도 그것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고- 나도 못했지만 - 그렇지만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음 독하게 먹으면 합니다. 왜? 건강하니까 됩니다. 저는 직장을 다 다니면서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일주일 동안 교회에서 기도하겠습니다. 40일 동안 기도하겠다고 허락해달라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40일 동안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영아부실에서 문 잠그고 자모 실에서 자고, 새벽기도 참석하고 가고 아니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작심하고 ‘내가 20일 동안 주일에는 안 되겠고 평일에는 직장 끝나자마자 몇 시에 끝나든지 내가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겠습니다.’ 아니면 ‘몇 시에 끝나든지 돌아와서 내가 뒷방에서 바로 이 자리에서 방석을 놓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기도에 대해서 죽도록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주기도문이 탄생합니다. 뭐냐 하면 말만 하고 상상만 하지 말고 해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당장 결심하십시오. 오늘 당장 ‘내가 좋은 순장이 되기 위해서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으니까 내가 올해 깊은 기도를 경험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순장을 하게 하셨으니까 나에게 반드시 깊은 기도를 경험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는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를 심방했는데 자기 남편이 변화가 잘 안된다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공감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기도해 봤어?’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3일 금식을 하지 않았잖아?’ 가만히 있습니다. ‘특별기도는 하지 않았잖아?’ 가만히 있습니다. 왜 안합니까? 그렇게 고민이 되고 남편이 회심을 하고 가족이 회심하는 것이 마음에 눈물이 되고 짐이 되는데 어떻게 특별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리즈를 집어서 들으십시오. 나는 가르쳐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듣고 은혜를 받고 회계를 하면 자기가 뭔지 몰라도 한 번에 깊은 기도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질문 8] 예전에는 개인기도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개인기도만 잘되었습니다. 리더로 선 지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의 참된 의미와 중요성이 무엇인가요?
[답변 8] 우선 중보기도라는 말은 우리교회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중보라는 말 자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주님만 중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런 단어를 무분별하게 많이 사용하는데 사용하지 말고 ‘섬김 기도’라고 신학적으로 통일하십시오. 그래서 나는 어떤 식으로든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섬김 기도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입니다. 진짜 이기적인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자체가 엄청난 희생입니다. 마음에 없는 하나님을 중심에 그리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혹시 여러분 선에 나가서 한눈에 이 사람은 아닌데 데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적 있지 않습니까? 그때 어떻습니까? 맛있는 것을 사주는데도 친구하고 먹는 우동 한 그릇이 맛있고 영화구경하고 싶은데 더 싫은 것입니다. 영화배우하고 옆에 있는 사람과 너무 대조가 됩니다. 저 사람은 깎아놓은 조각인데 이 사람은 오징어입니다. 어쨌든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도 똑같은 것입니다. 너무 이기적이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을 경우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시간은 너무 괴롭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열렬히 기도하는 환경도 너무 싫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임에 가려고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발전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자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조금합니다. 그중에서 이익이 결정적인 사안이 될 경우에만 기도합니다. ‘하나님 집이 팔리게 해주세요.’ 아니면 ‘제가 종합검진을 했는데 뭐가 있다고 조직검사를 하자고 합니다. 암이 아니게 도와주세요.’ 등등등……. 은혜가 조금 있으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래도 은혜를 주시니까 그렇게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기니까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사랑이 한 방울 떨어집니다. 그때는 나를 보게 되지만 사랑이 폭포수처럼 부어지면 이렇게 흘러넘치면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한바가지가 부어져서 넘쳤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가족들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행복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사람들이 두 번째로 들어오게 됩니다. 내 아내, 우리 엄마, 우리 아빠, 동생은 관심은 관심 없습니다. 왜? 금방 시집가기로 했으니까 요새 연애에 빠져서 집에도 밤늦게 들어오고 하니까 빼놓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픈 것은 내게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가 많이 아프시면 연로하신데 유산이 탕진됩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사랑이 더 부어지면 이것이 넘치면서 이모, 삼촌, 조카, 그중에는 대판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친척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영혼들이 너무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교회에서 만나는 식구들이 느껴집니다. 교회에서도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이미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의 기도가 막 나옵니다. 왜? 자기의 행복과 그 사람과의 교제가 너무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를 해서 창자를 뒤집어놓는 사람은 정말 싫습니다. 사랑이 넘치면 그 사랑이 거기까지 갑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우리 모임에 와서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할까? 저 사람의 창자가 얼마나 힘들까? 창자는 히브리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창자가 꼬였으면 저렇게 이야기할까? 이제 거기까지 기도가 나옵니다. 거기까지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흘러넘치고 흘러넘치게 됩니다.
1월 2일에 의정부에서 최남수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의정부에서 목회하시고 나이는 저와 동갑이신데 저와 같은 시기에 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1년 선배이십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역을 하십니다. 뭐냐 하면 영국, 브라질을 비롯해서 85개국을 다니면서 각 국에 있는 교회 사역들과 기도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면서 엄청난 일들을 해냅니다. 다니는 교회마다 가서 ‘너희 교회가 이런 이런 나라를 위해 기도해주면 안되겠니?’ 요청하고 이곳 저곳으로 추천하고 다리를 놔서 사역들을 이루어갑니다. 목사님과 함께 교인이 20명이 같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가서 낮에는 전도하고 저녁 먹고 주무시다가 밤 9시쯤 침낭 하나씩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새벽 6시까지 기도한답니다. 영국 런던에 간 팀이 템스 강을 보지 못하고 왔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리고 6일 동안을 눈물로 그 교회와 그 교회의 부흥, 영국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했답니다. 외국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일을 하니까 밤중에 진짜 기도하는지 와서 본답니다. 권사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텅 비어가고 있는 그 교회, 얼마 후면 무슬림에게 팔릴 수도 있는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현지 교회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기이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교인들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주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꼭 해야 할 일을 남의 나라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을 날아와서 대신 해주다가 집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야기하는 보편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정말 넘칠 때 그때 우리는 그런 보편교회들을 보면서 가슴이 저미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놀라울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면 얼마나 놀라울까? 하면서 기도의 제목이 점점 넓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성숙의 과정이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 대신 목양을 하고 만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알게 된 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십시오. 놀라운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기도하게 되지만 반대가 훨씬 더 실제적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주다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 영적침체 세미나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1년을 더 기도해주기로 했는데 매일 기도해주면 형평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카드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책상 앞에 놔두었습니다. 32장인데 아침마다 10장씩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10장을 기도했습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가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현재적으로 저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지는 못하지만 32명을 처음 만났을 때 그중의 몇 명은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중에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 보십시오. 매일 매일 기도하는 것을 두 달 정도 하니까 얼굴도 외워지고 이름도 외워지고 ‘이 사람이 무슨 기도제목이 있구나!’ 알게 되고, 은혜를 받고나니 기도제목이 바뀌었구나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더군다나 구역장입니다. 그러니까 구역원들은 그렇지 않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 여러분들의 순원이 100명도 아니고 1000명도 아닌데 매일 한 번씩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엄마가 하루에 한 번씩 애들 얼굴 안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감에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열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커집니다. 희생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를 위해서 뭐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질문 9] 가끔은 말씀에 적용이 되지 않고 남의 이야기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답변 9] ‘가끔은 말씀에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말씀을 들었는데 이것이 자기의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첫 번째 질문이고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 3개가 엮여지는데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말씀에 적용이 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한토막이고 두 번째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게을리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태만하게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적용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적용을 해줘야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 그것도 설교학에서 다룹니다. 그래서 말씀을 설교하면서 항상 역사적인 사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이야기를 설교 속에서 합니다. 그러나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적용만 몰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가 전개되면서 적용이 따라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는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세 위격이 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부, 성자의 사랑이 그 자체가 성령이십니다. 결론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랑에 대한 적용이 나옵니다. 이것이 나오고, 나오고, 나오는 것이지 할 이야기를 다하고 마지막에 적용을 폭탄처럼 퍼붓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이야기는 이 질문 자체는 이 사람은 설교를 거의 놓치고 있는 것이고 설교를 읽는대도 마음과 Text가 붕 떠서 마음은 마음대로 가고 Text는 글자로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들을 때 그런 마음이면 설교도 들을 때 똑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린 신앙이었을 때도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때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그것을 그냥 밀고 들어가는 것도 매우 위험하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첫 번째 질문을 통해서 보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마음이 굳어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부대에서 직업적인 군종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일을 도와주는 군종들을 모아서 부흥회를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순복음기도원을 갔답니다. 이 아이는 신학을 하다가 군대를 갔는데 그때 참석했던 부흥회의 경험 하나를 이야기 했습니다. ‘아빠, 설교 내용이 정말 없었어요. 그런데 많은 군인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내용은 없는데 평소 같았으면 은혜를 전혀 못 받았을 텐데 멀리서 와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으니까 은혜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은 고 하니 하면 배부를 때 파스타점에 가면 식전 빵을 남기고 오기 일쑤인데 배고플 때 가면 파스타를 다 먹고 나서도 크림 파스타의 소스가 아까워서 빵을 더 달라고 해서라도 깨끗하게 소제하듯 먹습니다. 개가 핥아 먹은 것처럼 깨끗이 먹습니다. 왜요? 배고프니까……. 그때 자기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용이 없지만 미친 듯이 배고프면 거기에서도 내용을 찾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질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의 태도를 바꾸십시오. 이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강추 시리즈는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입니다. 제가 그 시리즈가 유일하게 이 교회에서 이 설교를 하다가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느낌의 각오를 가지고 설교를 한 것이고,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한 것입니다. 엄청 셉니다. 그런데 지방에 살고 있는 어느 대학부 지도자를 우연히 수련회에서 만났는데 ‘목사님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공부를 청년들 50명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청년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공부를 못시킬 것 같아서 토요일에 모여서 목사님 설교 시리즈를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였습니다. 그런데 펴놓고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는 것을 50명이 모여서 토요일마다 이것을 듣고 감상문을 쓰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은혜가 주어져서 아이들이 회개하고 뒹굴고 청년부가 놀랍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담임목사한테 안 걸렸냐?’ 물었더니 안 걸렸답니다. 속으로 ‘안 걸렸으니 다행이다. 걸렸으면 상연 중단 했을 텐데…….’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예배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하고 은혜를 받으면 그 구역장은 반드시 오늘 예배 속에서 어떤 것을 느꼈느냐고 말합니다. 자기 관심사대로 가는 것입니다.
질문 첫 번째가 남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예배자로서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딱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결코 예배는 객관적인 관람객처럼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참여하고, 뛰놀고, 기뻐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물어보십시오. 예배드리기 전 토요일 밤을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고 예배의 은혜를 못 받고 난 다음에 기도를 했는지 물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몇 분에 왔는지 그리고 일주일 동안의 삶이 이 예배를 지향하고 있는 삶이었는지 물어보십시오. 전폭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후에 오신 분들을 위해서 하나만 거기에 나오는 그림처럼 생생한 예화 하나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갔더니 문을 세 개나 지나는 어마어마한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주인장이 진짜 아름다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 곱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들딸들이 하인들이 인사를 했습니다.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엄청난 교자상이 차려졌습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그리고 금수저를 올려놨습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비켜주고 남편과 아내가 나란히 마주 앉아서 큰 밥상을 받았습니다. 뚜껑을 열었습니다. 누런 똥이었습니다. 두 번째 뚜껑을 열었더니 애기 똥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마른똥이었습니다. 네 번째 뚜껑을 여니 개똥이었습니다. 전체가 똥 천지였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심경이 어떻겠느냐는 생각해 보십시오. 훌륭한 예배순서, 아름다운 인테리어, 빛나는 성가대, 목사님의 검은 가운, 탁월한 음향효과 이 모든 것은 그 방에 가기 전까지의 일이고 정성껏 차려 오른 것도 예배의 형식입니다. 그 속에 들었던 똥은 여러분들의 예배 태도입니다. 예배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머리뚜껑을 하나씩 열어볼 때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때 느끼시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앞에 있는 것들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이것은 더 큰 모독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예배자로서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본을 순원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순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순원들에게까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말씀에 불이 안 붙었는데 생활이 편안해질 리가 없습니다. 자극을 받아도 일주일간의 삶이 흐트러지는데 예배시간에 자기 깨어지는 자극이 없습니다. 그냥 고요하게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예배에서 주님을 못 만나는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무겁습니다. 몸도 너무 무겁고 아픈데도 왜 그렇게 많습니까? 너무 몸이 무겁습니다. 두 번째는 정신은 더 무겁습니다. 무게가 추처럼 달려서 자기를 내려가게 합니다. 그것이 쭉 내려가는 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물 위에 있는 추 같습니다. 그 물에 빠져서 계속 내려갑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뻘에 꽂힙니다. 그 뻘이 정욕입니다. 이제는 게으른 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되고 나쁜 짓을 해야지만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여기서 도박부터 시작해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외로움을 이겨보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닌 곳에서 기쁨을 찾아보려는데 그것은 중독성이 있어서 조금만 하면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수면제를 7년 넘게 복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의사선생님을 만났는데 목사님은 정말 많이 절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성이 생겨서 계속 늘어나는 것입니다. 온힘을 다해서 그 내성과 싸우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먹을지 모르니까 약을 줄이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약품이 향정신성약품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지막에 게으르면 그런 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이 그냥 쭉 내려가서 수렁에 꽂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 오웬은 비영적인 틀 속에 갇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박, 게임, 포르노그래피, pc방에서 밤을 새우는 것 등 그런 속에 빠져들어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한 영혼의 무게로 그 세상사랑, 육적사랑의 무게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도 2분 30초 만에 답을 찾고 싶을 것입니다.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냥 그것을 끝날 뿐이지 진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돼서 추가 내려간 것을 갈고리를 해서 그놈을 잡아당겨 끌어올려야 하는데 물에 빠질 때는 간단하게 빠졌지만 꺼내려니 상상할 수 없는 시설이 동원되어야지만 그 조그마한 배 하나를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천안함 빠졌을 때 그 까짓것 1,000톤 밖에 안 되는 것인데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까? 세월호가 빠졌을 때는 아무데도 하는 곳이 없어서 우리나라 기술로 못하고 결국 상하이 세배지가 와서 했습니다. 그 사람들 900억을 밑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빠질 때는 간단하게 빠지는데 끌어올리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2분 30초 유투브 타임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냥 그렇게 살게 됩니다. 절대 못 헤어 나옵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상을 바꾸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빠진 것이 잘못이 아니다. 게으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면서 건너가는데 There is no life.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수없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 생활 속에서 게으름과 싸우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옵니다. 설교 한편이라도 제대로 들어야합니다.
어떤 목사님 한분이 그랬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 방면에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떻게 목사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살아갈까? 힘들다. 왜 힘들까?’ 놀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리더십체험 120권을 읽었더니 리더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답니다. 또 한 목사님은 신학자인데 그분도 나처럼 교수도 하신 분인데 박윤선 박사는 우리 총신에서 신학의 아버지처럼 여기는 분입니다. 박윤선 박사의 주석이 도서관에 꽂혀있습니다. 박윤선 박사의 개혁신학이 얼마나 좋은 신학인지 나도 배웠는데 그 좋은 신학을 팽개치고 왜 나쁜 신학자를 좋아할까? 너무 궁금하더랍니다. 왜 좋은 신학을 설교하는데 안 먹힐까? 너무 궁금해서 이분도 누구에게 물어보면 그것을 2분 30초 만에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분도 자기 자신의 지적인 능력이 있는데 그래서 이 시대의 조류에 관한 책을 70권을 읽었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 ‘시대가 달라졌구나! 그 시대가 이런 식으로 달라졌구나! 그러면 같은 내용의 신학을 옛날에 했던 방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 목회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누가 질문하셨는지 모르는데 두 주째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1년일 수도 있고 순장에서 국장으로, 팀장으로, 무슨 새가족위원으로, 위치 변동은 계속 했겠지만 이런 상태는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안 듭니까? 진짜 궁금하다. 궁금한 것은 호기심이지만 이것은 내 인생과 관련이 있다. 진짜 알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러면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책을 읽든지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60권을 읽든지 그래도 그것은 각자 다 일관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들 이야기를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를 한 시리즈를 듣든지 그렇게 각오를 하고 내가 이것 해결될 때까지는 시간이 없으면 그냥 다이어트에도 좋다니까 저녁때 미숫가루 한잔 타먹는 것으로 하고 저녁 밥 먹을 시간에 이것을 듣고 정리를 해서 스터디를 해서 똑같이 물어보는 사람에게 답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하실에 있던 교인들이 여러분들보다 좋은 교인이었다고 가끔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진짜 인생 막장까지 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리고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은혜가 떨어지고 나니까 돌변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았고, 그런데 그래도 그때 사람들이 미워할 수 없고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내 인생의 살고 죽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해봐야겠다고 도전하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새롭게 깨달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겠습니다.
[질문 10] 말씀을 어떻게 묵상할지 어떻게 잘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을 묵상하시기 위해 즐겨 사용하시는 법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답변 10] 말씀의 적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적용되느냐하면 먼저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의 적용부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설교를 들으면서 적용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설교내용도 손에 쥐어주고 다 한 다음에 마지막에 ‘그러므로 너는 이렇게 행동하라.’ 라고 손에 쥐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설교 듣는 사람이 바보입니까? 멍청이입니까? 아무 생각이 없습니까? 기계입니까? 강아지입니까? 아니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적용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신앙생활이 화장법도 아니고 화장법도 주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전문가가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화장품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스위스화장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구할 때 항상 그 피부의 기준은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의 표준에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인 여자의 피부는 동양인여자의 피부하고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물론 어마어마하게 비싸게 돈을 주고 산 것은 그래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얗게 그림같이 피어나다가 20대 후반에 검버섯이 생기기 시작하는 피부가 구라파 사람들의 피부입니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 그레이스 켈리의 자서전을 보면 그레이스 켈리가 뒤태를 보이면서 걸어 나오는데 등에 검버섯이 나옵니다. 그때 나이가 28세였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의 피부입니다. 멀러서 보면 정말 멋있어 보이는데 악수를 하면서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엄청난 땀구멍들이 화산구처럼 아주 빨리 패여 갑니다. 그 사람들의 골든 에이지, 곧 블링블링하게 얼굴이 빛나는 나이는 14살나 15살부터 시작해서 23세 정도까지이고 그 이후로는 막을 내리고 노화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마어마하게 빨리 노화되어 갑니다. 우리처럼 화이트닝이나 선블럭 제품 같은 것을 잘 안 씁니다. 그 사람들은 미용이 Beauty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부과 의사들이 피부암을 예방하기 위해 강력하게 권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블럭을 바릅니다. 그 사람들은 대게 암이 코나 귀부리에 많이 발생합니다. 돌출된 부분이 햇빛을 제일 많이 받으니까 그들은 선블럭을 바르면 여기부터 바릅니다. 그렇게 그 할머니들이 늙어가니까 40대밖에 안되었는데 볼 수 없을 정도로 노화가 빨리 옵니다. 그 노화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성숙의 조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런 것을 다른 남자들이 보면서 평가를 하지 않으니까 사회적으로도 널리 이해가 됩니다. 등 쪽은 검버섯부터 시작해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새까맣게 나옵니다. 반면 우리나라 화장품은 동양계 사람들에게 굉장히 잘 맞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구를 해서 범용적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맞추는 화장품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글로벌 시대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나라 화장품이 좋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마다 주체성이 있는데 내가 설교를 해서 이런 것이 적용점이라고 찾아내서 손에 쥐어진 것이 나의 적용이지 여러분들의 것입니까? 그렇게 주체성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적용이라고 이야기할 때 공식을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용하지 못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은혜를 덜 받은 것입니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설익은 것입니다. 제대로 받으면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그 속에서 성령님이 우리를 거울처럼 보여주셔서 너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이렇게 살아야한다. 잘 살았다. 훌륭하게 살고 있어! 너 더 힘을 내!’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를 절대로 가만두시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는 신학적 설명에 의하면 다음 주 설교할 내용인데 성령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인데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지 하게하지 아무것도 못 하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윤정 자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힘듭니까? 아니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인데 아무것도 해주지 말라고 해서 안하는 것이 힘듭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라면 싫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나 승무원들이 데모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뭐하는 짓입니까? 조까지 짜서 가서 뭐하는 것입니까? 여기가 북한도 아닌데……. 자기가 싫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으로 할 경우에는 싫다는 것을 금방 눈치를 채야하는데 바보 같은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챕니다. 마음이 없이 하는 것은 진저리치도록 싫다고 확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싫어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집과 같은 유흥산업이 여전히 번창하고 남자들이 외로우면 그런 밤 문화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너무 사랑하는데 아무것도 못해주는 것입니다. 가끔 TV에 보면 아이가 불치병이 걸렸는데 엄마가 한없이 웁니다. 그런대 무엇이 제일 힘드시냐고 물으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아이를 간호하는 것이요, 24시간 깨어있는 것이요.’ 그럴 것 같은데 한마디로 모든 엄마가 공통점입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제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 너무 슬퍼요.’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읽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아무 적용도 안 생긴다.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안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리고 얼굴을 똑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다시 제본해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읽어보면 생생하게 눈물 흘린 자국도 있고 메모한 자국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말씀에 내 마음에 흔들리고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보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였거나 회개를 많이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말씀을 열어주십니다. 목회자가 사실 힘겨운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준비는 한편의 설교준비가 아닙니다. 이렇게 5,000편이 넘도록 설교를 했는데 이제는 약간 관록이 붙을 만한데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주시면 오늘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그리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기 시작하면 한번 성경을 읽고 묵상했는데 6개월 치 설교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안주시면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묵상의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이런 것을 들으면서 힘이 들것입니다. 계속 돌다가 질문은 다른데 계속 똑같이 돕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 자체가 은혜를 받고 변화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장사꾼적인 생각을 여러분들이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위에 관록이 필요하고 약간의 스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묵상 세미나도 수없이 했습니다. ‘평신도들을 위한 생명의 삶’을 제가 집필했고, 특히 ‘목회자들을 위한 말씀묵상’을 제가 집필했습니다. 특히 후자는 제가 여러 해를 담당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직접 접하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설교와 맞먹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 성경에 대한 사랑과 설교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반찬이 맛있으면 입맛이 없어도 밥을 먹습니다.’ 밥을 성경에 비유하고 반찬은 설교 혹은 경건서적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듣고 은혜를 받으면 모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성경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는 원천이 둘이 있는데 성령이 그런 마음을 주시고 이단이 그런 마음을 줍니다. 이단의 미혹의 영에 접촉이 되면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막 생깁니다. 그 성경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고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모순들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원하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낚싯밥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건전하게 설교와 신학,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수많은 묵상집들이 나오지만 여러분 마음에 맞는 것을 쓰십시오. 그런데 제가 발견한 제일 좋은 것은 성경을 그냥 읽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히브리어 텍스트와 희랍어 텍스트를 놓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까지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성경을 읽으십시오. 영어는 할 수 있으니까 영어번역 킹제임스 버전이 너무 힘들고 무겁다고 생각되면 NIV 정도를 옆에 놓고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기도할만한 환경과 자세 속에서 읽으면 제일 좋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마음이라도 그렇게 되게끔 읽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에 욕심을 내지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의 욕심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성경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읽어나가고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딱 와 닿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멈춥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읽습니다. 다시 내려오고 다시 읽습니다. 그랬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내려갑니다. 그 다음을 읽습니다. 무엇인가 또 마음에 옵니다. 읽습니다. 다시 올라갑니다. 읽고 이것이 정말 완전한 번역일까 하고 NIV 성경 정도를 펴놓습니다. King James Version 정도는 읽을 수 있으니까 펴놓습니다. 우리말 성경보다는 King James Version을 신뢰하는 것이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것은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감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성경들을 펼쳐놓고 26개 번역을 펼쳐놓고 제가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서 제가 찾아낸 결론입니다. 거기도 틀린 것이 있습니다. 그저께 내가 해설한 부분은 사실은 King James Version으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선택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확률적으로는 훨씬 높습니다. AV나 오늘날 현대인에 나오는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든 성경들은 Living Bible 같은 것들은 사실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King James Version을 봅니다. ‘이런 뜻이구나!’ 다시 읽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어떤 뜨거운 것들이 다가옵니다. ‘너 왜 사랑하지 않니? 너 왜 기도하지 않니? 너는 왜 계속해서 불순종 하느냐?’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계속 읽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감동이 솟아나오면 그 자리에서 성경을 그대로 펼쳐놓고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내가 하고 싶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하게 하시는 기도입니다. 그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것이 우리는 지금 두레박을 던져서 기도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꽝하고 터트리면서 물이 확 쏟아 나오는 것 같은 것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해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랫동안 하나님이 기다리셨던 내가 하기를 원하셨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하게끔 수없이 말씀을 주시고 사람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시고 또 자기 귀를 통해서도 들립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에서 자기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감각이 없어서 흘려보낸 것들입니다. 마침 기회가 되어서 성경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딱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는 항상 깎습니다. ‘그것은 목사님의 의견이고…….’ 자기가 하기 싫은 것에 대해서 ‘너무 청교도적으로 치우친 견해이고…….’ 아니면 ‘저것은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분도 아닌데 저 이야기를 내가 꼭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돼?’ 등등 심지어는 ‘그렇게 잘하면 너는?’ 그런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자기는 그렇게 했나?’ 그러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떨어져도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를 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주십니다.
놀라운 것이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눈물을 닦고 성경을 보면 성경에서 새로운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1%도 과장이 아닙니다. 눈물을 씻고 다시 성경을 펼쳐보면 어제 보던 성경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본문이 막 뛰어 올라옵니다. ‘나도 여기 있습니다. 나도 여기 있습니다.’ 뛰어나온 성경구절들을 붙들고 가르침으로 정리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설교자로서 설교를 준비하는데 제일 어려운 것은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니고 주석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주석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님들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영어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고 독일어야 사전을 한참 찾아야하지만 어쨌든 읽습니다.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면 대부분 그 수준이 그 수준입니다. 특별히 정말 대단하다고 줄치는 것은 몇 주에 한번 정도밖에 자료가 안 나옵니다. 오히려 내가 설교 속에서 풀어내는 경우가 더 깊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런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어렵습니까? 내가 말씀을 만났을 때 그 말씀이 튀어 올라오는 경험과 그 말씀이 나를 먼저 때려서 내게 눈물을 쏟게 하는 것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사경회 때 한 번씩만 하면 되지만 그것도 대단합니다. 사경회 때 한 번씩 만해도 일 년에 4번이나 하니까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매주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될 때에는 진짜 설교 준비하고 설교하는 것이 행복한데 안 될 때에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주실 때에는 회중들도 느끼는 것입니다.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누가 그랬습니다. 한번 연습을 안 하면 내가 알고, 두 번을 안 하면 바이올린이 알고, 세 번 연습을 안 하면 청중들이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도 느끼는데 하물며 자신에게서는 어떻겠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다가 목회자의 이상적인 삶을 안토니오처럼 수도사처럼 살고 있다가 주일날 살짝 내려와서 설교하고 주일 저녁에 구름타고 올라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에 부딪힙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님은 은퇴하셨는데 꼭 토요일 저녁에 전화해서 ‘목사님, 힘들어 죽겠습니다.’ ‘왜요?’ ‘아무아무개 집사와 아무아무개 권사가 돌아다니면서 목사님 억수로 하고 다닙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마음을 다 뒤집어 놓습니다. 지금 설교준비를 다 못해서 마지막 마무리하려고 씨름을 하는데 꽝 하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미치겠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이름을 대면 다 알정도로 삼, 사만 명씩 목회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목사였습니다. 나를 만났을 때 직접 이야기했으니까 거짓이 아닙니다. 미치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토요일에는 다른 방으로 가서 전화코드를 빼버리고 자기는 사택으로 전화를 못 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설교자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는 일들은 수없이 일어납니다. 가장 잘하는 것이 부부싸움입니다. 잘 참다가 토요일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마지막 말다툼한 것이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아도 인간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이 속에서 올라오는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과 싸우면서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서 내가 말하고 실은 것은 설교자들을 긍휼히 여기십시오. 나는 긍휼히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목사님들을 긍휼히 여기십시오.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십시오. 특별히 설교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떤 때는 죽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메모를 하십시오. 메모하지 않은 것은 다 날아갑니다. 메모를 하시면 감동이 다가옵니다. 시를 쓰고 싶으면 시를 쓰십시오. 노래를 짓고 싶으면 노래를 지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은혜 받은 성경구절을 외우고 싶으면 외우십시오. 그리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성경에 은혜를 받는 비결입니다. 그것이 성경묵상입니다. 그것이 성경 묵상에 관한 좋은 책들이 수없이 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그것도 똑같이 우리를 어린애처럼 보고 다 만들어서 손에 쥐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하듯이 묵상도 어렵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앉아서 쭉 그렇게 해보십시오. 하루도 거르지 말고 꾸준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아마 마태복음 한권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이렇게 할 수 있겠구나!’ 하실 겁니다. 그래서 내가 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터디바이블>입니다. 스터디바이블을 놓고 통독과 정독을 겸해서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아침에는 정독으로 묵상을 해서 단 하나라도 건진다는 마음으로 하고, 그 다음에 저녁때 자는 시간에 아니면 오후시간에는 퇴근해서 통독을 한다고 하든지, 아니면 통독을 하고 그 다음시간에는 정독을 하겠다고 하든지, 통독은 구약, 정독은 신약으로 하고 다하면 둘을 교체하는 식으로 하되 스터디바이블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ESV 성경책을 샀을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1억 원어치를 팔았는데 ESV를 사십시오. ESV나 <개혁주의 스터디바이블>이 권합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나오는데 그것보다는 얇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ESV바이블입니다. 그것을 읽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고 읽을 때에는 성경본문을 읽고 한 장을 읽고 그 밑에 있는 각주를 다 읽고, 물론 서론을 읽으면서 통독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루에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5장을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밑에 있는 난 하주까지 읽겠다고 통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통독을 하면 그러면 매일 3장씩 읽고 주일에 5장 읽으면 성경 한번을 읽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프로그램이 다 있습니다. 계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3 주5. 매일 3장 읽고 주일에 5장을 읽으면 통독을 하고 신구약을 전부 다 읽으려면 하루에 얼마씩 읽어야하는지 봐서 계획을 세우고 맥체인 성경읽기도 활용해서 통독을 하는 것입니다. 정독은 절대로 ‘한 장을 읽어야겠다.’ 혹은 ‘3장을 읽어야겠다’고 정하지 말고 그냥 넉넉잡고 1장 정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십시오. 반장을 읽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는 성경구절이 있으면 거기서 끝난다고 생각하고 양의 압박감을 갖지 말고 주님을 만나는 것에 목표를 두고 하십시오. 그렇게 두 방향으로 쭉 읽어 가면 ESV 같은 바이블을 여러분들이 일 년에 한 번씩만 읽으면 상당한 지식의 양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시장에서 대충 집어 드는 스터디바이블은 그 밑에 있는 내용을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공신력 있는 바이블을 읽으면서 그 밑의 각주까지 여러분들이 통독을 해나간다면 -예전에는 성경만 읽었는데 읽기만 했고 사실 성경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 중요한 구절에 대해서는 그 구절이 무슨 뜻인지를 신학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을 통독과 정독을 같이 해나갈 때 놀랍게 성경 자체가 여러분들을 움직여서 기도하게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면 성경을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만약에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성경을 전혀 읽고 싶지 않거나 성경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설교는 듣는 사람이 매우 이상한 태도를 가지고 다른 데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에서 은혜를 받는다든지 성경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듣고 나면 설교자의 천재성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위대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이 이렇게 위대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독과 통독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시간입니다. 너무 좋은 데 시간이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러분들의 생활 속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은 어차피 우리 시간을 빼앗아 갑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없게 만드는 것이 사실은 사회생활 뿐만은 아닙니다. 사회생활도 이제 근로기준법에 의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퇴근 후에선 팩스도 못 보내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회사가 얼마나 될지는 궁금하지만 나도 밤중에 교역자들에게 문자를 보내니까 확실히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낼 아침에 보내자고 나 스스로도 절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1시고 2시고 자다가 생각이 나면 막 보냈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들으면서는 깨지 않으니까 어차피 그것을 들으면서 깨지는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많이 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에 잘 살펴보면 성경읽기 위해서 회사를 안다닐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고 시간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성경이 주는 유익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6시 이후 휴대폰 사용금지는 어떻습니까? 매력적인 제안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꺼내기 어려운 곳에 두고 여러 번 복잡하게 해서 놓습니다. 예를 들어 자명종이 울리는데 얼굴을 보여주어야지만 자명종이 꺼지는 것이 있답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탤런트들이 나와서 자기 딸들이 자명종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주는데, 자명종이 울리면 톡 치고 그냥 자버리니까 해결이 안되니 자명종을 끄기 위해 어려운 과제를 달아 놓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명종이 울리면 세면대를 찍어야지만 알람이 멎게 해놓았고, 또 한 아이는 수학공식 하나를 풀어야지만 자명종이 멈춘다는 그런 앱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서 6시부터 잠자기 전까지 핸드폰을 꼭 사용하려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화면이 열리게 되는 앱으로 걸어놓아 보십시오. 그것을 끊고 음악과 책으로 저녁시간을 보낸다면 놀라운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아직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마치 수도사처럼 수녀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중 피할 수 없는 날은 그렇게 살더라도 나머지 날들은 리듬을 깨뜨리지 말고 집에 돌아와서 경건의 시간을 한 시간만 가져보십시오. 성경을 읽고 테이프를 듣고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써 보십시오. 성경을 하루 통독하고 그 다음날은 설교 테이프를 듣고 그 다음날은 또 성경을 통독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경건의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스마트폰을 붙들고 밤늦게까지 TV나 보면서 - ‘전지적 참견시점’이나 우리 집사람이 좋아하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것들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한두 시간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흘러갑니다.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말씀과 함께 해야겠다고 결단을 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들으면 좋을 음악, 혹은 묵상할 때 좋은 음악을 분류해 놓고 들으면서 유익을 얻으십시오. 그러다가 여력이 생기면 인문학 서적도 읽으면서 삶이 지성적으로 풍요롭게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신앙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에게 ‘열심 하나만 내놓아라. 눈물만 흘려라. 전도만 열심히 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달라’ 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필요해서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는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안 하고도 신앙생활을 해보려는 편한 길을 택하려고 하니까 수많은 오류들이 나오고 거기에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다 바꿔놓고 싶으신 것입니다. 순장을 오래 해보신 분들이 기억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순이 바뀌고 변화되는 과정이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 하나를 바꾸시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순원들이 개판치는 과정을 통해서 거울로 들여다보듯 ‘네 존재가 이것밖에 안 된다. 네 인성이나 폭이나 인간관계의 기술이나 봐라. 너는 논어도 안 되고 손자병법도 안 떼었다.’ 고 보여주시는 것을 압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독서토론이 손자병법입니다. 성경은 논어를 넘어서는데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는 논어는커녕 손자병법 근처도 안 간 것입니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건너뛰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신앙을 이야기하니까 워낙 심오한 철학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철학은 무슨 개뿔입니까? 지금 인생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끄러울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독서토론하고 고등부 학생들에게서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사진첩처럼 생긴 학생들이 듣고 자유롭게 쓴 소감문입니다. 그중의 어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강의를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미친 듯이 대학공부를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목사님이 나에게 우주를 보여주셨습니다. 진짜 나는 왜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을까요? 나는 누구일까? 세계는 무엇일까?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들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우리 계모이고 철학은 나의 생모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일평생을 살았는데…….’ 라고 적었습니다. 이 아이는 철학자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고등학교 1학년 아무개 올림.’ 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청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 중에는 걔네엄마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 40이면 엄마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그렇게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애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눈을 열고,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듣습니다. 고등부에 가서 설교를 하면 여러분들보다 태도가 좋습니다. 몇 학생들은 전혀 아닌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주 탁월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면 설교할 맛이 납니다. 그러니까 강의를 120분 정도 하는데 빨려듭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솔직히 이야기해서 행복하게 살려고 예수를 믿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이상적인 목표이고 현실적으로는 그래도 나오는 이유는 그래도 예수님을 믿어야 살겠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모든 우리의 인생에 관한 의미 있는 견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철저한 사유와 일체의 진지함입니다. 사유는 우리에게 일체의 진지함을 요구합니다. 둘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기독교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러한 진지함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것을 붙들고 살 것이냐 아니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냥 약장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약장수 앞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마술을 부릴 때에는 모여서 재미있다고 쳐다보고 약장수가 약을 팔려고 이야기할 때는 다 일어나서 갑니다. 결국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꼭 기독교가 아니어도 그렇게 약장사의 마술구경 하러 온 것 사람 같은 태도를 가지고 도달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온전한 견해는 없습니다.
저는 김용옥씨 강의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은 진짜 엄청나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사상이야 내가 100% 동의할 수 없고 나는 그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고민은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신학과 신앙이라는 것은 철학이라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경고의 경고를 거듭하는데 유투브에서 정보를 얻는 것같이 기독교에 접근하면 반드시 여러분들의 삶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 안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눈물 나게 매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몰라도 아마 그 정도까지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눈물 나도록 가슴이 찢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는 일을 1년, 2년, 10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런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과 연계 속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입니다. 내가 피를 토하듯이 이야기한 것이 기독교의 힘은 두 기둥이다. 사상의 기둥과 윤리의 기둥 두 개입니다. 그런데 사상이 윤리를 저절로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살면 사상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상과 윤리 두 개를 말하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서 모순을 느낍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 사상과 윤리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아치가 얹히는 것입니다. 그 아치가 얹어지면서 사상이 은혜를 통해 윤리의 열매를 맺고 윤리는 이 은혜를 통해서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정체를 지성에 전달해주어서 사상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은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이렇게 쓰레기 같은 신앙이 유행하던 시대가 없었을 정도입니다. 중세시대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사상은 살아있었습니다. 물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무지한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사제들도 무지했지만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상층부도 없고 하층부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다 파편화 되어서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사람들이 다 BTS나 부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BTS를 부르고 나이든 사람은 니나노나 뽕짝을 부르고 장윤정의 트로트나 좋아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신앙생활이 잘못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펑펑 울면서 매일 목숨 걸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무지해서 바보 같은 짓을 하거나 태극기부대를 따라다니는 것을 천생 소명으로 생각하고 다니는 사람이 될지는 모르나 최소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신앙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원래 이상적인 기독교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한 순간 나를 시름에 잠기게 만드는 음악과 같은 것입니까? 옛날 강부자 같은 사람들이 불렀던 그런 노래들이 전국을 휩쓸고 어마어마한 레코드판을 팔리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자기 삶속에서 나오는 설움을 그런 노래에 그런 문화에 실어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문화에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없습니다. 잊어버리게 하는 힘만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현재를 즐기라’(카르페 디엠)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빛, 싸이키 조명들을 비추면서 망각으로 들어가 그냥 순간을 즐기며 의미를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요즘의 유행하는 상황입니다. 요즘 음악은 장르로 잡을 수도 없습니다. 욕지거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속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음악이 있으니 클래식입니다. (획일화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을 좋아하고 클래식에 깊이 심취한 사람은 당연히 예술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고, 독서와 고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예술은 다 예술이기 때문에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하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든 문화라는 것은 상위문화와 하위문화가 있습니다. 하위로 내려갈수록 감각에 치중되고 위로 올라갈수록 고도의 미학에 호소하고 도덕에 호소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기왕에 기독교신앙을 가졌다고 한다면 철저하게 사유해야 합니다. 내가 너무 가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젊은이들 속에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어떻게 호소하느냐 하면 어차피 사람들이 그렇게 사상을 안 들으려고 하니까 우리도 파편 대 파편으로 승부하자고 이야기 하는데 나는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없이 제의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엄청 감동적인 부분을 2분 50초로 수없이 잘라서 유투브에 매일 뿌리는 것은 어떠냐하는데 그것도 어떤 유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들을 어느 한순간 자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이 과연 얼마나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사상이라는 것 자체는 이미 진지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파고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설교도 모두 이런 감각적인 것들에 매이지 말고 하면서 뭔가 든든히 살아가려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까부는 애들도 모두 사랑으로 다 끌어안아야 합니다. 애들이 한참 까불다보면 힘들어서 그만두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주든가 아니면 까불지 말라고 한차례 혼을 내주든가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그들과 함께 한 문제, 수많은 삶의 상황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 주면서 같이 가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세우십시오. 사람들은 흔히 해보다가 안 되면 어느 시점에서 내려놓고 다른 방법을 써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흐릿한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고 흐릿한 식으로 목양을 했는데 별로 남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런 방법으로 순장을 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완전히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으로써 여러분의 질문에 대해 모두 마쳤는데 지금 12시 반이나 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나눈 질문과 여기에 대한 최선을 다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답을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 질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해 보십시오. 또 다른 토론의 장을 다시 만들자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밤늦게까지 고생한 여러분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밤에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달달한 케이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상으로 나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