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의 감화력: 전도서 설교 방법론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 읽기
II. 성경 본문 나누기
III. 중심 단어 찾기
A. 단어 의미
1. 언어적
2. 신학적
B. 메시지
IV. 논리적으로 연결하기
V. 삶의 현실에 적용하기
이런 순서대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특별한 이야기라고 하기 보다는 설교자로서 어떤 식으로 본문들을 다루어야 하고, 하나의 본문을 설교할 때 어떤 준비과정들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그 샘플로 전도서를 보려고 합니다.
I. 본문 읽기
우선 제일 먼저, 설교하기 전에 우리는 본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본문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본문을 설교할 자신감이 생겼든지, 심지어 남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든지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어떤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먼저,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선포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둘째는 신학적인 공부를 하면서 이런 부분은 설교로 깨우쳐줘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때도 있으며, 셋째는 그와 반대로 텍스트가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아, 설교를 늘 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성도들에게 가르침이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을 해서 그것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았기 때문일 때도 있습니다. 넷째는 아예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성도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알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될 때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 네 가지 동기에서 설교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 설교의 경우에는 성경 한 권을 선택해서 첫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설교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다루는 방식 자체는 본문의 길이가 길지 않고 오히려 그 본문을 깊이 설교하는 편이기 때문에 마태복은 같은 것을 하나로 잡아서 제가 일상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본문을 다룬다면 15년 이상 매 주일 설교를 해야 할 정도의 길이가 나오기 때문에 대개 그렇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마스트리히트라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 화란 신학자가 제시했던 바를 적실하게 여깁니다. 그는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연속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제네바 1차 개혁 때에 섬겼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두 번째로 다시 초청을 받아서 돌아왔을 때에 “그때 했던 그 설교의 다음 본문입니다.”라고 했던 것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의 경우에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물론 100년 이상의 거리도 있지만 그분은 굉장히 깊이 있는 심오한 신학자였는데도 청중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도 깊이가 있고 힘이 있으며, 경건의 영향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분은 하나의 성경을 끝까지 설교하면 그 성경 전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훌륭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변하는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 신앙의 필요들을 상황에 적실하게 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다룰 때는 끊어서 열 번 정도를 설교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목회를 하셨습니다.
저는 26년 정도 열린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공식적으로 6000번 정도 설교한 것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주일설교나 수요일 설교 포함하여 대부분의 설교가 그렇지만 주일 설교를 기준으로 하면 어떤 때에는 성경의 한 챕터를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찬찬히 설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장 같은 것은 33번에 걸쳐서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설교를 한 예이지만, 대부분은 어떤 주제 하나를 가지고 여러 본문을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침체, 기도생활, 친구, 게으름,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할 죄, 이런 주제를 정해서 동일하게 연속되는 본문을 설교하거나 그 주제에 부합하는 다른 본문들을 점프, 점프하면서 설교하여 설교들을 모아 놓으면 그 하나의 주제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조직신학적인 진술이 되도록 설교하는 방식을 취해 왔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저에게 다시한번 목회할 기회가 주어져도 성경을 차례대로 연속해서 설교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설교하는 것이 목회에 훨씬 유용했을 것이라는 판단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원리 속에서 본문이 선택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본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설교자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성경읽기입니다. 성경읽기는 그냥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성경읽기(Theological reading)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설교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읽는 성경의 분량이 있는데 그 성경을 펼쳐서 매일 성경의 일정 부분을 읽고 그것을 읽을 때 거기서 설교할 계획이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최상의 설교자는 최상의 청취자입니다. 좋은 청취자가 아닌 사람은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없고 좋은 청취자가 아닌 사람이 보여주는 훌륭한 설교의 행위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설교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심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 텍스트를 폅니다. 성경을 천천히 읽습니다. 읽어가다가 어느 한 부분에 마음이 부딪치면 거기서 멈추고 다시 뒤로 돌아가서 계속 리딩을 합니다. 그렇게 계속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지, 그렇다고 해서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으로 본문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대하고 나면 거기에서 명료하게 자신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그것을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충분히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한 본문이 나의 기도를 이끌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에 무슨 기도를 할지 나는 모릅니다. 성경에 물어야만 어떤 기도로 갈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어떤 말씀이 은혜가 되었고,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내게 주시는지가 명료하게 마음에서 정리가 됩니다. 정리가 될 때에 성경의 오리지날 텍스트를 폅니다. 성경본문(text)을 말입니다. 희랍어든지 히브리어든지 아람어든지 어쨌든 텍스트를 폅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과 텍스트를 비교합니다. 어느 부분의 번역이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해서 자기가 감동받고 있는 메시지가 확실하게 성경본문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고 난 후 그것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설교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나중에 이 본문을 보더라도 여기에서 발견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어플리케이션과 함께 간단하게 혹은 상세하게 자기의 취향대로 적어놓습니다. 가능하면 잊어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넘어갑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넘어가면서 이것들이 쌓여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어떤 것을 설교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자신이 은혜 받았던 성경구절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찾아가서 그때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전면적으로 설교를 작성하게 됩니다. 아직 그렇게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어제까지 성도들에게 5절까지 설교를 했으니 오늘은 6절부터 설교해야겠다고 한다면, 그 설교를 준비할 때는 앞서 말한 것과 똑같이 자신을 설교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가가야 하는데 설교자로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써 그 본문 앞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리지널 텍스트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샘플로 전도서 한 구절(12:9-11)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 BHS입니다). 너무 작은 글씨로 나와서 불편합니다. 조금 크게 확대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우선 자기가 설교하고자 하는 오리지날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비평과 정확한 1차 번역을 이끌어내는 것이 모든 설교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이 이렇게 오리지날 텍스트를 다룰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열심을 내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나 아람어를 공부해서 설교에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했어야 합니다. 젊은 나이에, 활발하게 뇌가 움직이고 정신이 움직일 때 성경 언어에 헌신해야 합니다. 나이가 젊으신 목사님들은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가 쉬운 언어는 아니지만 도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언어도 아닙니다. 문법을 공부한 후에 단어를 아쉬운 대로 1천 개정도 외우시고 읽기 시작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히브리어 알파벳인 알렙, 베트도 모르는 학생들을 가르쳐봐서 압니다. 그 학생들을 주일 밤에 기도원에 데리고 가서 보따리 풀어놓고 알파벳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토요일 아침에는 창세기 1장을 읽고 모두 내려왔습니다. 가능합니다. 문제는 해야지, 해야지 하는데 몰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어는 번역하는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그것들을 비평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 본문 아래에 보면 난해주(난하 비평장치, apparatus criticus)가 달려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렇게 복잡한 논쟁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기호입니다. 이 성경은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4판입니다. 레닌그라드 사본을 기초 본문으로 채택한 B19 사본을 가지고 만들었지만 이 본문은 많은 사본들 사이에 이독과 논쟁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최소한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 바로 난해주 이 부분입니다. 이 기호들을 어떻게 읽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사본에 이렇게 되어 있다 혹은 아마도 이렇게 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있는데 단어가 바뀜으로 인해 별다른 뜻의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엄청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사본들이 있을 때 어느 것이 신뢰할 수 있는 사본인지를 논쟁하면서 거기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결정함으로써 본문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편집한 사람은 이것을 편집한 사람으로서 이런 의견을 제시한 것이고 우리는 그중에서 어떤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비평”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은 저의 주제가 아닙니다.
II. 성경 본문 나누기
이제 히브리어 텍스트를 보면서 성경본문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몇 편을 설교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설교의 본문 전체에서 숨 쉬는 부분을 어디로 보고 끊을 것인가? 이것에 의해서 한 편 한 편 설교의 포커스가 정해지고, 그 포커스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포커스를 향해 가야 합니다. 본문 전체가 여러 편의 설교로서 하나의 주제를 다룰 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 본문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9-11). 저는 이것을 9절, 10절, 11절로 3번을 나누지 않고 4번 정도로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해서 한 편을 설교하고 이렇게 해서 두 편을 하고 이렇게 해서 세 편을 하고 이렇게 해서 네 편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본문을 다룰 수 있는 실력에 따라서 나누는 것인데 만약 지금 저에게 설교를 다시 하라고 한다면, 당시에는 4번으로 나누었지만 지금 6개나 7개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눌 때 좋은 점은 설교의 포커스가 여러 개가 되지 않고 딱 하나가 되어서 집중적으로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여섯 개나 일곱 개로 나누어 설교를 하게 되면 그 설교를 거의 다 듣기까지는 사실 이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니 어렵다기 보다는 전체 그림을 그리는 일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매 시간 은혜를 받으면서 여섯 번, 일곱 번 참석한 사람에게는 후자의 방법이 너무 좋지만 이 설교들을 지속적으로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본문을 크게 잡고 커다랗게 그림처럼 설교하는 것이 유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할 때 설교자가 받는 감동과 감화가 어느 정도의 크기이고 그 색깔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훨씬 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석도 중요하고 원어도 중요하고 중요한 것이 너무 많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이 설교를 통해서 얼마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 설교의 깊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이 성경 본문을 통한 체험의 요소가 있다고 봅니다.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아지고 풍부해집니다. 둘째, 지식입니다. 성경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성경전체에 대한, 기독교 신앙 전체에 대한, 혹은 성경 이 본문 전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신은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정확하게 그림처럼 그려서 제시할 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전달해주는 데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 생활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삶의 양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modus vivendi Copia dicendi). 자기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느냐가 그 가르침의 풍부함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사람은 전도에 대해서 가르칠 내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선교를 실천하는 삶을 밤낮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당연히 선교에 대해서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설교자는 만약 그의 삶이 그 진리에 합치된 삶을 살려고 매일매일 노력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이라면 가르침의 내용이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을 하나의 의미단으로 나눕니다. 나누고 나면 한절 한절 해석을 하고 의미를 따라서 단락을 나눌 것입니다. 그렇게 나눈 것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구상할 것인가를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그립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나눈 단락은 다시 변동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부분에서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 앞부분에서 너무나 많은 메시지가 있을 경우에는 이렇게 자르고 이것을 다음 설교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자기가 어느 정도 깊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III. 중심 단어 찾기
A. 단어 의미
텍스트를 보겠습니다. “예페르쉬에 야하 코알레트 하캄” 여기에서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냅니다. 모든 단어가 다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단어는 결정적으로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단어의 전체적인 뜻을 이해하지 않고는, 혹은 그 단어를 적절하게 해석해내지 않고서는 사상 전체를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단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나오는 “지혜롭다”라고 하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하캄”()입니다. 사실 “지혜롭다”로 번역한 이 “하캄”에 콤마가 옵니다. 그러면 ‘지혜’가 됩니다. 여러분이 눈치 채셨겠지만 구약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아마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를 단순히 사전을 놓고 “하캄”의 뜻이 “지혜”라고 해석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첫째, 단어는 제일 먼저 언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전들이 나오니까 가장 최근의 문헌의 결과들이 반영된 좋은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지혜롭다”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둘째, 다음으로 그 “지혜롭다”는 것이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첫째로, 단어의 언어적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은 신학사전입니다. 그냥 신학을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사전이 아니라 Dictionary of theological word book(신학단어사전)이 필요합니다.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가 갖는 원래의 언어학적 의미, 그리고 그 단어가 성경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전체를 관통하면서 보여주는 사전들이 있습니다. 이전 세대에 각광을 받으며 쓰던 사전이 키텔(G. Kittel)의 신학사전 TDNT(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 사전이고, TDOT(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라는 구약사전도 있습니다. TDNT의 경우에는 아주 방대한 사전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연구의 결과가 그 속에 쌓여 있어서 성서 단어 연구의 금자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예를 들어 거기에서 기본적으로 “아가페”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아가페가 고전 헬라어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지, 그것이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바깥의 문헌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고 이방 문헌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성경 안에서는 어떻게 나오며 기독교 안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고, 성경 안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이것이 가지고 있는 구약적인 배경, 유대교적인 배경은 어떤 단어인지 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아가페라는 단어와 관련된 “헤세드”라는 단어도 쭉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가페”같은 중요한 단어는 한 20페이지 이상이 될 정도로 빽빽하게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여기 나오는 “하캄”이라는 단어도 그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일을 슬기롭게 잘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지혜로워서 어떤 일을 규모 있게 처리한다는 간략한 뜻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앙의 전제에서 만물을 해석하는 지혜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넓은 지혜를 이 “하캄”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니라.”고 할 때, 제가 맨 마지막에 이야기한 그런 의미에서의 “지혜”로 사용된 것입니다. 지혜문학인 잠언의 8장 같은 경우는 지혜를 아예 의인화해서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얻을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의인화된 지혜로서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해석에는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가깝게 이야기하면 일을 슬기롭게 처리하는 것, 혹은 인간의 명민한 판단력에서 시작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바로 “그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할 때 우리는 “뜨악!”합니다. 도대체 이 “지혜롭다”라는 단어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뜻이 담겨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설교에서 이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혜롭다”는 말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과 아무 생각이 없이 이 말을 해석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빙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어떤 지식을 보여줄 때는 그것보다 열 배쯤 많은 것이 설교 아래에 감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설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북극에서 얼음이 떠올랐는데 그 크기가 집채만 하다고 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수면 아래의 얼음은 잠시 잊고 위로 떠오른 것만을 봅니다. 그 아래에는 그것의 아홉 배, 열배 크기의 얼음이 수면 아래에 잠겨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할 때마다 오늘 제시한) 이것보다 더 많은 단어들이 등장할 텐데 한 달에 한 번도 아니고, 6개월에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매주에 몇 번씩이나 이렇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이것이 계속 쌓여가면서 설교자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상승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를 좌우하는 몇 개의 요소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성경의 단어를 얼마나 깊이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입니다.
둘째로, 단어가 제시하는 신학적 의미를 찾아봐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필로소피아”,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당연히 기독교 바깥에서도 “지혜”를 말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일평생 자신이 그렇게 논쟁하면서 살았던 마지막 이유가, 그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찾았던 지혜는 여기서 말하는 “하캄”과 어떻게 다를까요? 여기까지 우리는 가야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한 편의 설교 속에서 성경과 신학, 인문학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고하게 성경계시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민하기 시작했던 이 고민들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주제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는 것, 곧 내포와 외연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전도자’(코헬레트), 그것도 지혜를 갖춘 전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지혜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우리들끼리 주고받는 거래처럼 들립니다. 거기에는 불신자들이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설교는 교회 안에서 소모되는 설교일 수는 있지만 “코헬레트”의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이해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무조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누가 작시했는지 아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물론 그 이론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이 작시했다고 봅니다.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에 관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이고 하나는 계시인 성경입니다. 두 개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충돌하는 것은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대로 자연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올바르게 자연을 공부하면 올바르게 성경을 공부한 것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자연이 성경에 관해서 모두 이야기해주지 않고 성경이 자연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발견된 진리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어야만 겨우 겨우 느껴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어서 눈을 뜨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 속에 살아있고 숨 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 가운데 성경은 가장 탁월하게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캄”이 이렇게 중요한 단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뒤로 가보면 더 중요한 단어들이 여럿 나옵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단어는 “림메드”()입니다. 알다시피 “라마드”()의 피엘형입니다. “라마드”는 “배우다”라는 뜻이고 “림메드”는 “가르치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유 속에는 ‘아주 세게 배우는 것’이 곧 ‘가르치는 것’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피엘형이 강세형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정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하나의 순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철학이었습니다. 잘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잘 가르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잘 배운 사람은 반드시 잘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배우다’라는 뜻을 가진 “라마드”의 피엘형인 ‘라멛, 맴, 달렛’ 이 세 글자로 이루어진 ‘림메드’가 함의하는 바는 정말 많은 것입니다. 오늘 내내 강의를 해도 다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풍부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출현 이후 이성주의에 대한 엄청난 신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뉴턴이 중요했던 이유는 뉴턴이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썼는데, 라틴어로 “원리”라는 뜻입니다. “자연과학에 관한 수학적 원리들”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됩니다. 그 책이 인류 역사를 흔들어 놓은 10의 책 가운데 한 권입니다. 뭐가 그렇게 특별했을까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수학으로 환원이 가능하고, 그것은 법칙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고 소리가 울리는 현상들을 신의 진노, 기쁨, 축복, 보복, 이런 징조들로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뉴턴은 그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수학으로 환원이 가능하고 법칙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조건이 갖춰지면 어떤 환경에서도 이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준 것 입니다. 그런 사상이 쭉 들어온 후부터 “배운다”라는 말과 “이해한다”는 말, 그리고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과 “가르친다”는 말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라멛, 맴, 달렛”이라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사전을 찾아보면 뻔합니다. 그냥 “배우다”, “가르치다”로 나옵니다. 별다른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고하는 사전은 성경에서 집적적인 방법으로 단어들을 모두 수집하고 성경에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동일한 자음을 가지고 있는 다른 단어들이 히브리어 텍스트에서 어떻게 쓰였나를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히브리어 단어의 많은 단어들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모릅니다. 관습적으로 사용해 왔을 뿐입니다.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되면 반드시 히브리어와 사촌, 육촌, 팔촌 격에 있는 또 다른 셈족어들을 공부함으로써 렉스컬러지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실력에 이르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 스스로 사전을 만들어가면서 본문을 해석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언어들이 우가릿어라든지, 아카드어 등이 있습니다. 아카드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함무라비 법전에 쓰여진 언어입니다. 더 멀리는 수메르어라든지, 모압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언어들을 가지고 공부해야하는 필요를 느끼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어려움은 이런 단어들이 구약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을 때는 다른 성경에서 이 단어의 똑같은 용례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관습적으로 읽어오던 방식으로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런 복잡한 문헌학(philology)이 아니라 이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매우 커다란 의미와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배우다”와 “가르치다”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 공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공부, 다른 신학자들에 의해서 조직해 놓은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신학적인 분석을 공부함으로써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필수적으로 해야 할 작업이지만, 둘째로 성경을 많이 읽은 다음에 성경 전체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림메드”라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머릿속에서 그려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텍스트를 읽을 때도 가장 유리한 사람은 많은 양을 읽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석을 잘못할 때 그 사람은 그 단어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추적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의미의 폭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정확한 번역이 나오게 됩니다.
앞의 두 단어와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단어가 여기 또 등장합니다. “다아트”()라는 단어입니다.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알다’라는 뜻을 가진 “야다”()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야다”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킹제임스 버전을 번역하면서 거꾸로 히브리어가 영어에 영향을 끼친 것인데 지금도 두꺼운 영어사전을 보면 “성교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결국 이것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뉴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과학적인 정보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이해한 후에 받아들이고 습득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알 듯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알 듯이 안다는 것, 히브리 사람의 맥락에서 보면 그렇게 안다는 것과 동일한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인격 전체를, 내용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 그것을 경험적으로 체험한 ‘지식’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용법이 사실은 영어에는 풍부하지 않은데 우리나라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기 가까운 동네에서 열다섯 살 때부터 서른두 살까지 살았습니다. 여기는 전부 벌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붉은 모래로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가난했지만 너무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여기서 보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가난은 좀 알지.” 이렇게 말할 때의 “안다”의 뜻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그노시스”로 바뀝니다. “그노시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할 때에 사용된 그 “지식”입니다. 희랍어로 신약을 쓰던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이 사람들의 머리와 핏 속에 용해되어서 흐르고 있는 사유는 사실 히브리어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날 이야기하는 지식과 사랑, 혹은 정보와 경험이 분리되는 이런 식의 신앙은 신약을 기록하던 사람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심지어 그 이후의 초대교회 교부들, 심지어 중세교회의 교부들에게까지도 굉장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에게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식의 경험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험일 수 없고, 그런 식의 지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식일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지식, 참된 지식이 동반되지 않은 사랑의 감정, 그런 것들은 성경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다아트”는 구약에서 “호크마”와 함께 top 10에 들어가는 중요한 단어일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다아트”의 의미를 알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너희는 알라, 알라, 알라” 수없이 나옵니다. 그 단어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수없이 나옵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의 지성우위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때 이야기하는 ‘알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등의 지성을 겨냥하는 것 같은 이 모든 단어는 항상 경험 전체를 동반하는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도자가 기록할 때에도 이미 그런 식으로 체험적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허무함을 알 수 있었고 진정한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끝낼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관련된 책을 읽고 그것을 자기 속에서 소화해서 자신 속에서 피와 살이 되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화”의 과정입니다. 사전에서 확정된 의미는 우리에게 경건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자기 속에서 이해하고 스며들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된 지식만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 뒤로 가보면 더 많은 단어가 나옵니다.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10절로 넘어가면 “코엘레트”가 나오고 “디브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헤페체”도 나옵니다. “디브레”()는 “다바르”()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말씀”입니다. “다바르”라는 말은 속으로 생각하는 말까지 모두 포함하는 “아마르”라는 단어와는 대조되게 입으로 발화된 말씀입니다.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일”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와서 “로고스”가 됩니다. 로고스도 똑같이 “말,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커다란 그림을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 접두어가 붙어서 “미드바르”가 되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광야”라는 뜻입니다. “광야”와 “말씀”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다바르”의 의미도 엄청나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에서 하나둘 씩 차례대로 나오는 모든 단어는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독자적으로 자기가 공부해가면서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하면 좋은 점은 한 번 공부하면 다음에는 그 똑같은 단어를 볼 때 몰랐던 때와 같은 마음으로 단어를 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자기가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더 공부해가고 사유해가면서 그 단어의 의미와 깊은 폭들이 더 세련되게 자신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 속에서 수많은 사유들을 만들어내면서 다른 단어들의 의미, 뜻을 정하는 데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들이 학문의 형식으로 나왔을 때는 아주 복잡한 논리와 논쟁의 방식으로 전개 됩니다. 실제로 그러한 단어 하나를 가지고 논문까지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을 들여다보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하고 논쟁도 많습니다. 사실 설교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수많은 논쟁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그것을 모두 사용해서 자신에게 정리된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설명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캄”이라든지 “다아트”라든지 “림메드” 등의 설명을 듣고 여러분이 성경을 읽었을 때 그 설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한 단어를 보고 성경전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에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굉장한 깊이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풍부하고 그 지식이 자신 안에서 체화되었을 때는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아지게 됩니다. 당연히 본문의 길이가 짧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똑같은 본문으로 다음에 다시 설교할 때는 전보다 다른 설교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생겨나게 됩니다.
운동선수를 보면, 탁구공은 무게가 불과 2.5g 정도로 아주 가볍습니다. 투포환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창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축구공을 차는 사람도 있는데 공통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로드웍입니다. 매일 뜁니다. 체력을 기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무슨 종류의 운동을 하든지 모든 순발력은 탄탄한 체력적인 기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런 단어들을 이해하고 신학적인 의미들을 접촉해가면서 우리 자신의 지식을 늘려감으로써 우리는 기초체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경건생활 자체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 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B. 메시지 찾기
이렇게 파헤친 후에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말한 것을 다 찾은 후에 그것을 모두 녹여놓고 돌린 다음에 그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너무 복잡하면 좋지 않습니다. 경험에 의하면 세 개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더 많으면 끊어서 다음에 설교하면 됩니다.
첫째, 메시지는 수정같이 맑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본문을 읽어도 부인할 수 없이 그 메시지여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수정같이 맑아야 합니다. 누가 그 본문을 보더라도 “아, 맞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그것을 말하고 있구나!” 그렇게 수정같이 맑아야 합니다.
둘째, 메시지는 힘줄처럼 튼튼해야 합니다.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메시지입니다. 수정같이 맑을 뿐만 아니라 맑은 메시지를 끌어내어서 사람들의 삶으로 연결시켜 주는 논리가 모두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탄탄해서 아무리 공격해도 끊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함을 가져야 합니다. 맑음과 강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IV. 논리적으로 연결하기
그렇게 찾아낸 메시지는 논리정연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집중해서 설교를 듣는데 논리가 정연하지 않으면 그 속에서 자꾸 논리에 대한 반박이 떠오르게 됩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논리를 통해서 수정같이 맑은 메시지가 의심할 수 없이 자신의 가슴에 와서 꽂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서 상대방이 화살을 쐈는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에 아무도 맞지 않고 비껴가는 것입니다. 논리가 맞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가 맞으면 그것들이 가장 강력한 힘으로 가슴 속에 꽂히게 됩니다. 논리를 갖췄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그 논리가 갖춰졌을 때 성령이 역사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수정같이 맑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그 본문을 보면 “맞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네. 부인할 수 없어.”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수정 같은 논리를 고래 힘줄처럼 탄탄하게 연결해서 “아, 정말 할 말이 없네. 그 메시지는 나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이런 삶을 살라고 말하네.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네.”라고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 상당기간동안 법학책을 읽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눈앞에는 논리에 맞지 않으면서 예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논리가 아주 치밀하게 딱 정합성을 가질 때 제 눈에는 예뻐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말을 하거나 혹은 글을 쓰거나 할 때, 제가 제 책을 써 놓고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여섯 번, 심지어 여덟 번씩 교정을 볼 때 항상 나는 내가 쓴 책이지만 내 논리에 반대하는 눈빛으로 원고를 봅니다. “이게 왜 꼭 이래야 하지?”, “이게 진짜 피할 수 없는 논리일까?” 어김없이, 과감하게 그어 버리면서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문장으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물로 비교를 하자면, 논리가 없이 설교하는 것은 체력이 좋은 어부가 멸치를 잡는데 송어가 빠져나갈 정도의 그물을 가지고 바다를 휘젓는 것과 비슷합니다. 안 잡힙니다. 멸치를 잡으려면 촘촘해야 합니다. 만약 크기가 30kg에서 50kg이 되고 머리통이 신발 두세 배쯤 되는 물고기를 잡으려면 이 정도의 굵기를 가진 그물을 써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빠져나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면 작은 그물망을 써야 합니다. 논리 없이 설교하는 것은 그물코가 한없이 큰 그물을 가지고 바다를 휘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논리에 굴복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논리로 모든 것을 굴복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논리 없이 설교하는 것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의 예를 들면, 짧은 본문을 잡고 설교할 때 이것을 들고 올라가서 설교합니다. 여기에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분량이면 약 70분 정도를 설교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냥 읽으면 5-7분 정도 걸릴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논리적으로 연결하면서 전개해 나갑니다. 항상 자기가 출발한 논리와 진행하고 있는 논리와 마지막 도달한 논리가 마치 활강하면서 착륙하는 지점을 찾아가는 비행기처럼 정확하게 자기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논리입니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본인이 압니다. 뿐만 아니라 수사도 필요합니다.
V. 삶의 현실에 적용하기
들어가는 말이 나오고, 본론이 셋으로 나눠져 전개되고 마지막에 결론을 맺습니다. 크게 세 토막을 냈습니다. 성경 본문이 있고, 이 본문을 전개하되 수정처럼 맑은 테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힘줄처럼 탄탄한 논리로 연결한 후에, 사람들을 낚아채서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하고 이 말씀대로 살고 믿도록 바꿔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기보다는 그 실존에 적용하고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뭔가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에 성령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하나님께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 설교를 하고 그리고 난 후에 원고가 나옵니다. 원고를 먼저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설교준비가 아주 짧으면 네 시간, 길면 열 시간 정도 논리적으로 프레임을 작성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설교를 합니다. 설교한 결과를 하나씩 하나씩 소리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타이핑 쳐서 옮겨줍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녹취록입니다. 이렇게 나온 자료를 정리하고 보면 한편의 논문처럼 되는 것입니다. 한 설교를 읽으면 그 내용에 대해서 확고한 수정처럼 맑은 테제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논리, 그리고 실제 자신의 삶을 낚아채는 도전이 그 속에 함께 묻어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마음으로 설교를 구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된 것들을 책으로 쓸 때는 기존 형식을 다시 허물고 설교가 아닌 문학으로 작성합니다. 사람들이 듣는 논리와 읽는 논리는 다릅니다. 읽는 것이 훨씬 더 조직적이어야 하고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들을 통해서 한 설교자의 마음속에 있던 도전이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완성된 하나의 정보, 지식의 형태로 나오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과 답변>
Q. 아무리 노력을 하고, 연구를 하고,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설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오류는 잘 모르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기회를 많이 가지려고 욕망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한 편의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은혜인지를 생각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이 되셔서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지는 않으셨을 텐데 벌써부터 성경 구석에 몇 자 정도 쓰거나 작은 포스트잇에 몇 자 정도 써서 그것을 들고 설교단에 올라가는 버릇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20년 후에 쓸모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수많은 주석을 파면서 어떤 견해를 풀어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본문으로는 설교하지 아니하리라는 신앙적인 결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주님을 만난 성경 본문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학생들은 성경이 눈물에 젖어 있어야 합니다. 시련을 만나고 괴로울 때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고, 좀 전에 이야기한 것 같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흔적들이 남으면서 살아있는 설교가 나옵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성경을 볼 때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이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가, 그것과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것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있는 메시지로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네 가지를 충고하겠습니다. 첫째는 훌륭한 설교가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십시오. 그것만큼 훌륭한 공부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현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대했던 과거의 사람들의 설교를 읽으십시오. 둘째는 한 사람을 깊이 파십시오. 이 사람 조금, 저 사람 조금 건들이지만 말고 한 사람만 깊이 파서 공부하십시오. 칼빈이면 칼빈, 에드워즈면 에드워즈, 루터면 루터, 오웬이면 오웬, 스펄전이면 스펄전, 한 사람을 깊이 파십시오. 셋째는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넷째는 주님을 깊이 만나셔야 합니다. 덜 중요해서 아니라 잊어버리지 말라고 넷째입니다. 말씀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만난 사람이 그 마음을 압니다.